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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지도

인문 2015. 2. 28. 16:51

 


욕망하는 지도

저자
제리 브로턴 지음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 | 2014-02-2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영국 퀸메리대학교 교수인 역사학자 제리 브로턴이 역사상 가장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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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졌던 모든 중요한 지도를 연구하고 이 책이 내린 결론은 정확한 세계지도를 제작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지구를 한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없기 대문. 세상만사는 "지도 없이는 절대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하나의 지도로 세계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도 없다"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처럼 모순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순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인생의 항해를 하기 위해서 자기 나름의 지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중요 메시지.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지상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신의 위치에서 세상을 재현하는 지도가 아니라, 지역이나 국가 또는 개인이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법을 제안하는 지도라는 것이다. 문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정보화하고 연결하고 축적하여 빅데이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서 지도를 만드는 인간의 능력은 점점 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을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계몽의 기획이 인간을 도구화하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변질되는 사태가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정보화의 변증법에 직면해서 우리는 정보를 다운로드 받는 것으로 인생의 지도가 그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디지털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진짜 세계는 가상현실로 대체될 것이고, 이로써 나는 누구인지 정체성은 물론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삶의 방향정립에 커다란 혼란이 초래될 것임. 이 같은 문명사적인 위기에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가상현실을 통해 지도제작자의 모든 주관적 요소가 배제된 완벽한 지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디지털 지구를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도의 지도에 대해 성찰하는 사유능력이다.
- 사람과 제국과 교역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놓인 거대도시들이 거의 다 그렇듯, 알렉산드리아도 배움과 학문의 중심이 됨. 알렉산드리아를 규정하는 많은 위대한 기념물 중 고대 도서관만큼 서양인의 상상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도 없다. 기원전 30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세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공공도서관의 원조로, 그리스어로 쓰인 세상에 알려진 필사본 일체와 다른 고대 언어로 쓰인 번역본을 소장할 목적으로 세워짐. 이 도서관에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된 책이 수천권 있었고, 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도서목록도 갖춰 놓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왕궁 중심에 무세이온, 즉 박물관을 세움. 원래는 아홉명의 뮤즈에게 바치는 성역이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를 배움과 학문의 여신들을 찬양하는 장소로 재정비. 그리고 학자들을 초청해 숙식과 생활비를 제공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게 했고, 무엇보다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함. 그 결과 그리스 전역에서 당대 최고 학자들이 이곳 박물관과 도서관으로 초청됨. 위대한 수학자 유클리드가 아테네에서 왔고, 시인 칼리마코스와 천문학자 에라토스테네스가 리비아에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공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에서 이곳에 옴
-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활동으로 멀리 떨어진 지여에 대한 실제 경험과 기록이 늘면서 지도묘사는 더욱 정교해지고, 궁극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서 정점을 이룸. 알렉산드로스 정복의 의미는 기지 세계에 대한 그리스의 지식이 확장된 데 그치지 않음. 알렉산드로스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경험적 관찰의 중요성을 배운 터라 학자들을 뽑아 정복지역의 동식물, 문화, 역사, 지리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군대의 진척 상황에 대해 날마다 보고서를 쓰게 했음.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보다 앞선 사람들의 이론적 지식에, 알렉산드로스의 출정에서 얻은 직접적 관찰과 발견이 더해지면서 알렉산드로스 사후 헬레니즘 시대의 지도 제작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 고대 그리스의 지도 제작은 우주생성론과 기하학에 초점을 둔 반면, 헬레니즘 시대의 지도제작은 여기에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좀더 과학적인 방법을 접목. 알렉산드로스와 동시대 인물인 마살리아의 피테아스는 이베리아 반도, 프랑스, 영국, 그리고 어쩌면 발트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서쪽과 북쪽 해안을 탐험. 그러면서 사람이 사는 세계의 북쪽 끝인 툴레를 확정했고, 천구의 극을 정확히 표시. 그러나 지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그의 업적은 어떤 지역의 위도와 그곳에서 연중 해가 가장 긴 날의 낮의 길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위도 평행선을 지구 둘레를 한바퀴 도는 선으로 투영했다는 점
- 한 사회가 지식을 모으고 보관하기 시작하면, 지식을 안전하게 수용할 물리적 장소가 필요하게 마련.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그것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고, 최초의 사서 가운데 한 사람이 프톨레마이오스에 앞서 그리스 지리학을 집대성한 리비아 태생 그리스인 에라토스테네스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아테테에서 공부했고, 그 뒤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초청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그 아들의 가정교사이자 왕립 도서관장으로 일함.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지구측정과 지리학을 남겼는데, 지구측정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지리학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책이며, 사람 사는 세계를 나타낸 지도에 기하학적 투영을 표시한 최초의 문헌임. 에라토스테네스의 위대한 업적은 천문관찰과 실용지식을 결합해 지구둘레 계산법을 고안했다는 것.
- 프톨레마이오스가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이루려 했던 것은 '저쪽에 있는 세계'의 무질서한 다양성에 기하학적 질서를 부여해 세계를 이해하고, 동시에 그 무한한 다양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 것이었음. 지리학 앞부분에 등장하는 지구의 기하학적 측량과 관련한 선언에 새겨진 그의 혜안은 르네상스를 지나 유인 우주비행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세대에 걸쳐 많은 지리학자를 자극하게 됨. 이런 것들은 지적 추구 중에서도 가장 숭고하고 사랑스러운 것에 속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수학을 매개로 하늘 자체를 그 물리적 특성 안에서 이해하게 한다. 하늘은 우리 주위를 돌며 우리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수학을 매개로 지구를 생생하게 묘사해 그 본질을 이해하게 함. 거대하고 우리를 둘러싸지 않은 진짜 지구는 누구도 통째로 또는 부분으로 떼어 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 Orientation(방위)라는 말은 동쪽 또는 해가 뜨는 방향을 뜻하는 라틴어 oriens에서 파생. 기록을 보면 사실상 거의 모든 고대 문화가 일출과 일몰을 관찰해 동서축을 정하고 북극성이나 한낮의 태양위치를 관측해 남북측을 정한 다음 그에 따라 방향을 찾을 줄 알았음. 이러한 방위는 방향도 방향이지만 상징과 신성을 내포하기도 했음. 태양을 숭배하는 다신교 문화는 동쪽을 부활과 삶을 뜻하는 방향으로 숭배하고 그다음으로 남쪽을 선호한 반면, 어쩌면 당연하게도 서쪽을 쇠퇴와 죽음, 북쪽을 어둠과 악에 연관지어 생각. 유대-기독교 전통은 이런 연관관계를 발전시켜 지도뿐 아니라 예배 장소의 방위를 정할 때도 이용. 동쪽은 궁극적으로 지상천국이 있는 장소였다. 반면 서쪽은 죽음과 연관된 방향이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마주한 방향이다. 북쪽은 악과 사탄의 영향을 상징하고, 교회에서 추방된 자들과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을 화형에 처할 때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이기도 했다. 15세기까지 사실상 거의 모든 기독교 세계지도(마파문디)는 동쪽을 지도 위에 놓았다. 이슬람교와 알이드리시 같은 지도제작자들도 동쪽을 숭배하는 전통을 물려받음. 물론 지구 어디에 있는 메카가 있는 신성한 방향을 향해 기도하라는 코란의 명령에 따라 동서남북의 기본방향에 더 큰 관심을 보이기는 했다. 메카의 방향을 찾고 메카와 카바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작업은 중세에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지도와 도해 계산이 탄생하는 촉매가 됨. 이슬람교가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던 초기단계인 7~8세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공동체 대부분이 메카의 북쪽에 살았고, 그렇다 보니 이들에게는 정남쪽이 키블라가 되었다. 그 결과, 알이드리시의 세계지도를 비롯해 이슬람의 세계지도 대부분이 남쪽을 지도위쪽에 두었음. 이는 이즈음 정복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공동체 전통과도 일맥상통함. 이들 역시 남쪽을 신성한 방향으로 여겼음. 전통적으로 지도에서 서쪽을 위에 놓는 사회는 거의 없음. 서쪽은 보편적으로 태양의 소멸과 연관되어 어둠과 죽음을 상징하는데, 한예로 영어에서 서쪽으로 가다라는 표현은 죽음을 의미. 마지막으로 바빌로니아 세계지도의 위쪽에 놓인 기본방향인 북쪽은 그 역사가 훨씬 더 복잡함. 중국은 북쪽을 신성한 방향으로 여겨 으뜸 방향으로 인정. 남쪽은 중국의 드넓은 평원에 햇빛과 따뜻한 바람을 안겨주었고, 황제가 백성을 내려다볼 때도 남쪽을 향했음. 그렇다 보니 모든 이가 복종하는 자세로, 황제를 올려다볼 때, 북쪽을 쳐다보게 됨. 한자에서 등을 뜻하는 말과, 북쪽을 뜻하는 말은 어원이 같음. 황제의 등이 북쪽을 향하기 때문 중국의 세계지도 역시 방향이 그런 식으로 정해졌는데, 중국 지도가 언뜻 봐도 굉장히 현대적인 이유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다양한 공동체에 나타난 그노시스주의(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멀리하고, 개인적 수련으로 영적깨달음을 얻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와 이원론에 기초한 믿음도 북극성을 빛과 계시의 근원으로 여겨 북쪽을 신성한 방향으로 찬양. 바빌로니아 세계지도가 북쪽을 위에 둔 이유도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모름
- 권근은 광범위한 정치적 시각을 담은 지도가 얼마나 민감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고, 1396~1397년에 그가 관여한 외교임무는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에 강리도를 제작하는 동기를 새롭게 조명해 줌. 1388년 반란직후, 조선정권은 이웃 명나라와의 오랜 사대관계를 계속 유지하려 했음. 이성계는 1392년 왕위에 오르기 전에 명 태조 홍무제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새 국호에 대해 자문을 구함. 그러나 명나라는 1396년에 조선의 종속적 지위를 확고히할 목저긍로 조선의 서한을 경박하고 무례하다며 서한을 가져온 조선 사신을 억류. 이로써 왕가에서 그리고 문헌에서 제국과 영토를 어떻게 정의할지를 두고 표전문제라 불리는 외교위기가 초래됨. 홍무제 주원장이 모욕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근거에 담긴 정치지리학은 이후 강리도 제작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음.
"새 조선은 왕이 다르리는 나라이며, 왕은 본디 우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어리석과 반역적인 사신들이 멋대로 행동하고, 그들이 가져온 문서에 인장과 제국의 고명(임명장)을 청하니 이는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조선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바다로 막혀, 하늘과 땅이 그곳을 동이족의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곳은 풍습도 다르다. 내가 공식 인장과 임명장을 내리고 사신들을 봉신으로 명하면, 혼령들 눈에 내가 탐욕이 과하다 보이지 않겠는가? 그리되면 고대 성군들에 비해 나는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하다."
- 류코쿠에 있는 강리도는 1402년 지도를 기본으로 삼고 권근의 발문을 그대로 유지해, 1470년대 정권의 관심은 1400년대 초의 관심과 다름 방식으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보여줌. 두 지도 모두 넓은 세계 안에서 조선왕조의 터를 정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음. 변화하는 세계에서 조선의 제국주의적 야심은 중국과 일본의 야심과 삼각구도를 이루어야 했음. 그러나 원본 강리도를 제작한 사대부들은 중국의 원칙에 절대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던 덕에 동아시아 너머 오랑캐 땅도 투영할 수 있었음. 중국인들은 한반도 사람들을 곧잘 오랑캐로 묘사했지만 조선은 "세계는 대단히 넓다"는 사실을 독자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고, 가장자리에 무엇이 놓이든 조선의 지리와 역사를 지도에 독자적으로 표시하고자 했음. 오늘날 서양인의 눈에 강리도는 모순이다. 강리도는 언뜻 보기에 과학의 진기함에 실린 여러 지도나 헤리퍼드 마파문디에 견줄만한 세계지도 같다. 그와 동시에 물리적 공간을 대단히 다른 방법으로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이질적 문화에서 나온 세계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계라는 개념 자체는 어느 사회나 공통이겠지만,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사회마다 대단히 독특하게 정의된다. 그런데도 강리도와 그보다 앞선 중국의 여러지도가 보여주듯이, 서로 다른 세계관은 지도를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일관되고 기능적이다. 강리도는 세계 최강의 고대 제국에 지도제작으로 대응한 것이며, 조선이 자국의 자연지형과 정치지형을 동시에 인식해 만든 지도다. 중국과 조선은 경험을 활용해 지도를 만들었고, 그렇게 탄생한 지도는 단지 지리적 정확성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조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강리도와 그 사본은 작지만 당당했던 새 왕조가 덩치가 훨씬 큰 제국의 영역 안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 1420년부터 1500년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 제국의 성취는 누가봐도 대단히 특별하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은 미지의 영역을 항해하면서, 아프리카 해안에 발을 디디고 아조레스와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카보제르데 제도를 식민지로 만들었음. 1488년까지는 서아프리카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고 아프리카 최남단을 돌았으며, 1500년까지는 인도와 브라질을 항해했음. 스페인은 1492년 콜럼버스의 첫번째 신세계 항해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는데 이를 포함한 세차례의 지원으로 카리브해섬들과 중앙아메리카에 유럽인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어진 항해에서 미지의 영역인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해안과 조우하게 되었음. 이 모든 발견이 우주형상도에 기록되었고, 그 결과 이곳에 그려진 세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오이코메네보다 두배이상 크다.
- 15세기 말 유럽으로 수입되는 모든 향료를 관리한 곳은 전설적인 동양으로 가는 관문인 베네치아였듬. 동남아에서 수확된 향료는 인도상인에게 팔렸고, 인도 상인은 그것을 인도대륙으로 가져와 무슬림 상인에게 되팔았음. 무슬림 상인들은 향료를 배에 싣고 홍해를 지나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 여기서 베네치아 사람들이 향료를 사서 배에 싣고 베네치아로 가져와 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상인들에게 판매. 귀한 물건이 이처럼 원산지에서 수천킬로 떨어진 곳까지 운송되는 사이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관세도 붙다보니, 유럽에 도착할 때면 가격은 대단히 높아지고 신선도는 떨어짐. 1498년 5월, 인도 남서쪽 해안에 다가마의 선단이 도착하면서 유럽과 인도양의 상업균형이 완전히 깨질 조짐이 나타남. 지역 상인들과 거래하며 후추를 비롯한 귀한 향료와 목재, 돌을 다량으로 구입하던 다가마는 향료처럼 부피가 작은 사치품은 희망봉을 거치는 바닷길을 이용해 곧장 리스본으로 가져가면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육로를 이용할 때처럼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냄. 마누엘 1세는 다가마의 항해가 유럽 제국 정치에서 포르트갈 왕국의 입지를 다지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재빨리 간파. 다가마가 돌아오자 마누엘은 카스티야 왕에게 보낸 편디에서 종교적 색채를 띤 희망을 담아 이렇게 썼다. "대규모 무역이 그 지역 무어인(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에 사는 이슬람교도)을 부유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이나 개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물건을 실어나릅니다. 우리가 규제를 한다면, 그 물건들이 우리 왕국의 배로, 우리 국가로 곧장 옮겨질 것입니다." 그는 엄숙하게 편지를 마무리했다. "이제부터 유럽의 모든 기독교인은 향료와 귀한 돌을 다량으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에서 카스티야를 앞선 기쁨은 숨긴 채 기독교인의 단결을 외친 마누엘은 기독교 세계에서 다가마의 항해로 가장 큰 이익을 볼 왕국은 포르투갈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16세기 초에 살았던 대다수 사람들에게나, 바다호스-엘바스에서 포르투갈 대표단에게 엉덩이를 까보인 남자아이에게나 몰루카를 둘러싼 논쟁은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경쟁하는 두 제국 사이의 정치논쟁이었을 뿐 대다수 사람들이나 그들의 일상과는 무관했음. 심지어 이 갈등이 암시하는 세계적 파장을 감지했던 사람들에게도 세비야나 리스본에서 지도나 지구본에 선을 그어 지구 반대편 세계를 분할하는 일은 해상활동에 별다른 현실감을 주지 못했음. 이슬람교도든 기독교도은 힌두교도든 중국인이든, 선박 조종사와 상인들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누비며 여전히 상업활동을 벌였음. 포르투갈과 카스티야가 제국의 중심에서 수천킬로 떨어진 영토에 대해 언제까지나 독점권을 주장할 수는 없었음. 그러나 서유럽 제국에서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카스티야가 다음에는 홀란트와 잉글랜드가 처음에는 지도에, 다음에는 지구본에 선을 긋고 제국의 군주란 사람들이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땅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하나의 선례가 되어 이후 수세기 동안 이어졌고, 500년 넘게 지구 전역에서 이루어진 유럽 식민정책의 근간을 이룸
- 블라외의 대아틀라스는 아름다운 활판인쇄, 섬세한 장식, 빼어난 색채, 호화로운 제본으로 17세기 인쇄물 가운데 단연 으뜸. 그것은 스페인 제국에서 벗어나고자 격렬히 투쟁하고, 영토획득 보다는 부 축적을 선호하는 세계시장을 창조한 네덜란드의 산물이었음. 블라외도 궁극적으로는 이와 똑같은 절박함으로 지도책을 생산, 그에게는 구태여 암스테르담이 그러한 세계의 중심에 놓일 필요가 없었음. 네덜란드에서 돈줄을 쥔 세력들은 갈수록 널리 퍼져갔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세계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17세기 금융시장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부를 축적할 수만 있다면 정치 중심지나 경제 따위는 별로 상관하지 않음. 사실 대아틀라스의 성공은 17세기 말이 되면서 지리학 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었음. 프톨레마이오스 때부터 지도제작자들을 자극해온 보편적 지리 지식 획득이라는 고전 전통은 이제 사라졌다. 대아틀라스는 분량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모습을 표현할 새로운 지리학적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과학혁신이나 지리적 정확성보다 지도나 지도책의 장식적 가치에 관심을 둔 구매자들을 만족시켰을 뿐. 긜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투영법이나 비율을 제시하지 않은 채, 세계는 더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암시만 던졌다. 블라외에게 태양중심설은 그저 판매수단일 뿐이었다. 대아틀라스는 르네상스 전통과 확실하게 단절한 진정한 바로크 창작물이었다. 메르카토르같은 선대의 지도제작자들은 우주에서 세계가 차지하는 위치를 단일한 과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지만 블라외는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무작정 많이 수집했다. 이는 시장성을 고려한 것이지 세계를 이해하는 특별한 방법을 찾으려 해서가 아니었다. 대아틀라스는 확고한 지적 원칙 없이 부피만 한없이 커진, 지식만큼이나 돈에 이끌린 아쉬운 미완성 걸작이다.
- 17세기 중반의 프랑스는 지도제작의 미래를 바꿀 나라로는 보이지 않았음. 16세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도 제작자들이 이 분야를 장악했고, 17세기 초에는 그 주도권이 프랑스를 우회해 저지대 국가로 이동. 프랑스의 이웃국가에서는 뱃길을 이용한 지리발견이나 주식회사 설립이 유행했지만 프랑스는 그런 일에 관여하지 않음.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던 시기는 16세기 말부터임. 부르봉 왕가는 종교문제를 놓고 여러차례의 기나긴 내부싸움 끝에 권력을 잡음. 부르봉의 군주들은 이런 내부위협에 맞서, 그리고 각 주의 강력한 지역적 독립성에 맞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를 확립. 이런 중앙집권적 성향과 그것에 저항한 지역주의는 당연히 조율이 필요했는데, 한가지 확실한 방법은 정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지도에 담는 것이었음. 유럽의 다른 군주들도 비슷한 결론을 내림.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1세 황제는 18세기 초반에 헝가리, 모라비아, 보헤미아의 거대한 측량도를 만들게 했고, 페라리스 백작은 1770년대 내내 저지대 국가의 오스트리아 소유지를 상세히 측량해 내각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면적이 약 60만 제곱킬로미터로 유럽에서 가장 크다보니 가뜩이나 어려운 작업이 더욱 어려웠음. 6000킬로가 넘는 국경은 절반이상이 육지와 맞닿았고, 이중 상당부분이 경쟁왕조와 이웃하고 있었음. 각료들이 생각하기에 지도제작 전략에는 왕국 내부를 관리하는 것뿐 아니라 외부의 침략에 맞서 왕국을 보호하는 것도 포함해야 했음. 초기 근대 유럽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프랑스가 지도와 지도책에 행정구역을 일관되고 영속적으로 표시하는 일에 몰두했다.
- 카시니 지도는 지도 제작 역사상 전례가 없는 진척이었다. 그것은 측지와 지형측량을 기초로 전국을 그린 최초의 일반도였다. 이 지도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전세계에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17세기 중반에 시작된 기하학적 정신을 추구하면서 경험적이고 표준화된 객관적 방법을 사용했고, 그 결과 이후 150년에 걸쳐 지도제작을 증명가능한 과학으로 서서히 바꿔 놓았다. 그리고 이 방법은 곧 세계 전체로 퍼졌다. 지도 제작자는 이제 지도와 영토를 연결하는 사심없는 기술자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일련의 기하학적 삼각형으로 단순화한 세계는 인식가능하고 관리가능한 세계가 되었다.
- 어떤 개념이 어떻게 직접적 정책으로 변모했는지 정확히 밝히기란 늘 어렵지만, 90년대 다양한 정치인들의 선언을 보면 매킨더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짐작가능. 닉슨과 제럴드 포드 시절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키신저는 94년 이렇게 썼다. "러시아는 누가 통치하든 매킨더가 말한 지리적 심장부에 걸터 앉은 나라이며, 가장 강력한 제국전통을 물려받은 나라다." 브레진스키는 97년 "유라시아는 세계의 축을 이루는 초대륙으로 지리적 체스판에서 심장에 위치한다." 고 주장. 그는 "지도를 얼핏 보아도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나라는 거의 자동적으로 중동과 아프리카를 통치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결론 내림. 표면적으로 매킨더의 정치지리학은 평화를 유지하려는 국가의 열망에 기초함. 그러나 실제로는 세계를 무대로 한 체스판에서 다양한 말들이 갈수록 귀해자는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끊임없는 군사충돌과 국제전쟁을 기초로 한다. 이 정치지리학은 전쟁 이후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에도 기여해. 미국은 세계의 거의 모든 대륙에서 은밀히 또는 공공연하게 군사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음. 42년에 독일의 정치학자 한스 바이게르트는 매킨더의 1904년 발표를 회상하며, 많은 영국인에게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였으리라고 썼다. 그러나 매킨더가 세상을 떠난 1947년 무렵에는 그의 주장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이론으로 확실히 자리잡음. 그의 이론에 의지한 20세기 가장 유명한 정치인으로는 조지 커즌, 처칠, 무솔리니가 있다. 독일 교수 카를 하우스포허는 스스로 세계전쟁에 이바지하는 지리학이라고 평가한 매킨더의 개념을 이용해 나치의 지정학 이론을 개발. 하우스 호퍼는 나치당 부대표인 루돌프 헤스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히틀러는 30년대에 독일을 향한 러시아의 위협을 연설하면서 줄곧 매킨더의 말을 인용. 지리적 중추는 심지어 조지 오웰의 48년 소설 1984에도 나타남. 소설에서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세개의 군사대국으로 나뉘어, 매킨더가 말한 대양국가와 육지로 둘러싸인 국가간의 계속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다. 매킨더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54년에는 유명한 미국 지리학자 리처드 하츠혼이 매킨더의 원래 모델은 "세계 권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이었는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정치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친 가장 유명한 근대 정치지리학이 되었다고 주장. 미국 중앙정보부의 전신으로 전쟁 중에 운영된 전략사무국에 지리분과를 창설했던 하츠혼의 이 말은 분명 칭찬이었다.
- 매킨더의 지도에 나타난 세계관은 여전히 전 세계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육군대학 학보 파라미터스 2000년 여름호에는 크리스토퍼 페트웨이스의 해퍼드 매킨더경, 지정학, 그리고 21세기의 정책결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글에서 페트웨이스는 "유라시아, 즉 매킨더에게 세계의 섬은 여전히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이며, 이런 성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 그는 오늘날 심장부의 심장이 기름바다위에 떠다닌다고 지적. 많은 정치 관계자들은 이미 90~91년에 일어난 1차 걸프전을 미국이 세계 석유공급을 장악하려는 일련듸 자원전쟁의 시작으로 보았음. 예일대학 폴 케네디는 04년 6월 발행된 가디언지에서 이렇게 썼다. "유라시아 주변지역에 미군 병력 수십만이 주둔하고 미 행정부가 주둔의 당위성을 끊임없이 설명하는 현재 상황을 보면, 미 정부는 역사의 지리적 중추를 장악해야 한다는 매킨더의 권고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듯하다. 매킨더의 애초 예측이 실현되는 당혹스런 순간이다. 현재 미국의 걸프전 개입을 보건대 갈수록 귀해지는 천연자원을 둘러싼 충돌이 여기서 끝날 것 같지도 않다. 매킨더의 세계지도는 사실상 폐물이 되었지만, 그곳에 나타난 세계관은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 구글어스 같은 지리공간 앱의 발달로 생긴 불안은 새로울 것이 없다. 역사에서 지도제작 매체가 크게 바뀔 때마다 비슷한 불안이 나타났다. 돌에서 양피지와 종이를 거쳐, 직접 그린 삽화, 목판화, 동판화, 석판화, 컴퓨터 그래픽으로 변할 때마다 그러했음. 그때마다 지도 제작자와 사용자는 지도를 특정 계층의 이익에 맞추려는 종교적, 정치적, 상업적 압력을 잘 이용해 왔다. 정보의 무료 배포나 정부 당국과의 충돌이 장기적 독점 사업의 결과인지 아니면 인터넷의 힘을 믿는 민주적 태도의 결과인지 의문이 생기지만, 그러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구글 앱을 둘러싼 현재의 논쟁은 어느 면에서는 단지 그러한 역사적 추세가 격화된 사례라 볼 수도 있음. 다국적 기업이 으레 그렇듯이, 구글 내부에서도 미래의 방향을 두고 긴장이 흐르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거대한 수익을 챙기고픈 욕구와 표면상의 민주적 이상을 조화시키기는 갈수록 불가능해 보인다. 클로드 섀넌의 전자 소통이로처럼 처음에 구글을 자극한 것은 수량화할 수 있고, 잡음이 없는 정보를 소통하는 것이었고, 그 후 그 정보는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로 유통되었음. 그러나 구글은 지리정보를 수량화하는 방법뿐 아니라 그 정보에 화폐가치를 더하는 방법가지 개발했음. 지도 역사에서 귀중한 지리정보를 한 기업이 독점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인터넷 업계는 세계 인터넷 검색 시장을 구글이 70%나 점유한 상황이 우려스럽다. 사이먼 그린먼은 이렇게 말한다. "구그링 구글어스로 놀라운 일을 해냈지만,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세계지도 제작을 지배할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 10~20년 뒤의 모습을 미리 내다본다면, 구글은 전 세계 지도제작과 지리공간 앱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지구 어디서든 우리 위치를 알려주는 인터넷 지도 덕에 우리는 길을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고 구글은 즐겨 말함.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개인, 국가, 단체가 다양한 지도를 제작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마지막 세대도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지리학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지리학은 전에 없던 단 하나의 목표, 수량화한 정보를 독점해 경제적 이윤을 축적한다는 목표를 추구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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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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