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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저자
에릭 밀란츠 지음
출판사
글항아리 | 2012-12-3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세계적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근대 세계의 기원에 대한 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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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기술진보와 역동성, 창의성과 관련해서 중세의 노동형태들을 마치 근대세계와 근대이전을 나누는 중요한 차이인 것처럼 무시하지 말아야 함. 중세의 노동형태들이 지닌 역동성과 혁신은 그것들이 결코 보수적이고 정체된 비생산적 경제적 실체들의 화신이 아니었음을 보여줌. 사실상 산업혁명 이전(19세기 이전)의 시장은 보통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했음. 중세 도시사회가 정치기구들의 중심에 동업조합이 있었음. 따라서 우리는 근대화/발전 이론이 찬미하고 개념화한 산업혁명의 개념뿐 아니라 농업혁명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음. 불행하게도 근대화 이론은 동업조합의 하부구조를 간과할 뿐만 아니라 이따금 중세전반을 산업혁명 이전의 음울하고 무기력한 망각의 구렁으로 밀어넣으면서 자유방임주의가 경제의 모든 것을 휩쓸고 가버리기만을 기다리는 시기로 단순하게 처리하고 끝을 맺음. 또 근대화 이론은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단계적 관점에서 강조하는 마르크스 주의의 이론처럼 중세와 마찬가지로 16세기 근대 이전 시기에 대해서도 시큰둥하게 생각함. 따라서 근대화 이론은 근세에 형성된 도시들 사이의 연결망과 거기서 그들이 자립성장한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함.
- 오직 영국만이 국내에서 토종기술로 산업혁명을 통해서 근대산업세계를 열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 그것은 체계적 관점이 아니라 일국적 관점이기 때문. 우리는 근대라는 결과를 개별국가나 정부차원이 아니라 유럽또는 서구전체라는 커다란 하나의 차원에서 보아야 함.
- 서유럽의 도시국가들은 14세기 중반 봉건제의 위기를 가장 먼저 겪었지만 또한 거기서 가장 먼저 벗어났음. 그들은 유럽 중앙과 동유럽에서 새로운 시장 뿐 아니라 철광석 생산지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 엘베가 동쪽에 위치한 지역들은 서유럽이 회복하는 동안 오래도록 그 대가를 지불해야 했음. 유럽내에서 분업의 출현은 부를 구축하는 과정의 일환이었음. 이것은 거꾸로 자본주의의 등장을 설명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음. 즉, 단일국가 내에서 내적 변환을 통해 자본주의가 나타났다는 주장은 매우 어리석고 주제넘은 말임.
- 중세의 법률가와 그들을 찾는 고객들은 이자지불을 은폐함으로써 교회법을 피해가는데 대단히 능숙해짐. 교회자체가 돈을 빌리기도, 빌려주기도 함. 또 교회는 이자를 주지 않는 척 하면서 이자를 주기 위해 개발된 교묘한 속임수도 사용. 요약하면,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은 매우 널리 퍼져서 경제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가 됨. 따라서 아무리 신학적으로 반대를 해도 대부행위를 막을 수 없었음.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고리대금업의 도덕적 문제점을 상세하게 지적했지만 14세기 경에 이르면 교회가 실제로 고리대금업을 처벌하는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듬. 심지어 이자율을 낮추는 것을 허용하기 위해 교회법을 바꾸기까지 함
- 14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서 자본주의의 발생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발전은 서유럽에 있는 교회와 시청사에 기계식 시계가 등장한 것. 실제로 서구의 상인과 금융업자들에게 나타나는 합리적인 태도는 기계식 시계가 설치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 자본주의적 심성으로 충만한 그들은 시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김. 따라서 시간을 측정하는 역사적 혁명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지식과 상거래, 산업에 미치는 영햑력은 멀리까지 퍼져나감. 시간은 이제 잘게 쪼개지고 합리화된 상품이 되었으며, 시계는 점점 더 노동을 통제하는 도구가 됨.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은 시간을 측정하는 새로운 기계, 즉 휴대용 회중시계와 교회나 시청의 종탑에 달리 괘종시계에 종속되어야 했음. 그때부터 시계는 사람들이 언제 얼마만큼 일하고 쉴지를 정밀하게 결정함
- 봉건제는 쇠퇴기를 고통스럽게 겪으면서 서서히 몰락했고, 마침내 자본주의의 논리가 봉건제를 대체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렇게 볼때 역사적 연속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짐. 14세기에 이미 합법적인 화폐시장이 있었음. 그 안에서 금융업과 무역업을 하는 기업들은 지점을 두고 지폐 통화를 주고받았으며 모든 시장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계절이나 일정한 주기별로 경기변동을 거듭했음. 경제사가 존 데이는 다음과 같이 지적. "14세기 중반 상업 자본주의는 이미 경제력을 행사하는 수단이 상거래 조직을 완성했는데 그것들은 외환, 예금은행, 위험보험, 국가재정, 국제무역회사, 상업부기처럼 이후 400년 동안 시장에서 작동될 요소들이었다."
- 직물산업의 엄격한 임금통제 정책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음. 당시 국내와 해외시장은 모두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상인들이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을 늘리면서 동시에 임금을 낮추는 것이었음. 이것은 결국 천을 바래고 다듬는 축융공들과 천을 짜는 직조공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이어짐. 그들은 호경기에도 빚을 내지 않고는 먹고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음. 일반적으로 말해 중세의 노동계급은 착취하기 좋아 볼일때면 언제라도 데려다 쓸 수 있는 (대개는 계절적)잉여노동집단이었음. 게다가 아이들까지 일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수는 계속 늘어났음
- 인류가 정식으로 역사교육을 시작한 이래로 교육적 전통으로 굳어진 중세와 근대의 구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 하지만 우리는 이제 중세를 아무런 편견없이 바라보려고 애써야 함. 자본주의가 싹트는 초기 형태와 특징들이 어떻게, 왜, 얼마만큼 생겨나고 성장해서 16세기에 스스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는지 알아야 함. 이러한 이행과정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당시의 정치와 경제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라는 한정된 분석단위를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 송나라 시대 중국 부의 원천은 상공업이었음. 송나라 초기에 국가수입은 대개 농업에서 거둬들인 세금에서 나왔지만 북송시대 중반부터는 무역에서 나오는 수입이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 12세기 말, 중국정부 전체 수입가운데 약 70%가 차, 소금, 포도주에 대한 간접세에서 나왔다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음. 송나라는 북방 유목민 세력의 침입이 점증하는 데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강압으로 수탈하여 그것으로 연명하는 정부가 아니었음. 그것보다는 오히려 교역을 증진시켜 국가를 유지하려 애썼음. 상업을 중시하는 활동은 송나라 시대에 급격히 늘어났는데 당시 교역의 확대는 도시개발을 늘리고 광산, 도자기, 소금과 같은 산업에서 분업을 촉진시킴. 이러한 도시개발과 분업의 확대는 유럽의 직물과 광산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동일한,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자본주의적 특성으로 발전. 이것은 저장, 광동, 푸젠에서의 상업활동이 유럽 여러나라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로 일어났다는 사실로 확인됨. 따라서 이 기간의 생활수준은 중국이 유럽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임. 이와 같은 국제교역의 급성장은 유목민족의 점증하느 위협과 관련이 있었음. 유목민의 위협은 송나라가 교역 확대를 통해서 국부를 증진시키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써야함 하는 조건을 만들었음.
- 중국은 북방의 변경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른 거대한 제국 때문에 북쪽과 북서쪽으로 더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자, 바다로 눈을 돌리고 무게중심을 동남아 해양지역으로 이동시킴. 여진족과 몽골족의 침략위협이 점점 거세지자 남송정부는 북방의 군사위협에 대응하면서 국가재정을 늘리기 우해 교역을 활성화하지 않을 수 없었음. 대규모 기병대 양성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남송이 북방의 위협에 맞서 취할 수 있는 전략은 강성해군을 키우는 길밖에 남은 게 없었음. 중국 정부가 교역을 중시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국가가 운하를 건설하고 그곳의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상인을 보호하고 상거래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음. 그것은 이후 국내시장 형성에 기여했고 중국은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음.
- 몽골의 송나라 정복이 중국이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유일한 원인일수는 없지만 중요한 변수인 것은 부인할 수 없음. 그러나 1250년부터 1350년까지 몽골제국이 세계-체제에서 중심역할을 했다고 보는 아부-루고드 같은 일부 학자는 그러한 해석에 이의를 제기함. 그렇다면 누가 몽골제국의 세계 지배로 이익을 봤는가라는 아주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할 것임. 단기적으로 몽골의 지배자들은 군사정복으로 많은 이익을 얻은 것은 틀림없고 상인들도 몽골의 확고한 지배덕분에 보호와 거래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음.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유럽인들이 가장 큰 수혜자가 아니었을까? 서양상인들은 몽골의 평화시대 덕분에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봤음. 몽골의 평화시대는 서양의 경제발전에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마련해 줌. 몽골의 칸 제국 통합은 유럽의 라틴계 민족들에게 흑해 지역의 비잔틴 문명이 물려준 경제적 유산을 전달해주는 계기가 되었음. 처음에 몽골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청부인으로 고용되어 다른 어떤 집단보다 많은 이익을 본 사람들은 터키의 이슬람 상인과 위그루족 상인들이었음. 또한 일부 서유럽 상인들은 몽골지배 아래서 관직을 얻어 수혜를 입음. 그러는 동안 또 다른 서유럽 상인들은 아시아 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큰 이익을 봄. 몽골의 평화시대 덕분에 중앙아시아는 보기드문 정치통합의 시대가 유지되었고, 그 결과 유럽의 무역상들이 물밀듯이 그 지역으로 유입됨. 그들은 대개 이탈리아 상인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마르코 폴로였음. 그밖에 유럽의 국가사절단과 직인, 선교사들도 걷잡을 수 없이 몰려왔음.
- 중상주의 사회체제는 중국문명에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었음. 중국 황실의 고위관료들이 갖고 있는 기본생각은 부유한 상인들의 가치체계와 정반대였기 때문. 실제로 자본축적은 있었을 수 있지만 항구적으로 생산산업 부문에 속한 기업에서 자본을 축적하는 일은 유교관료들이 지속적으로 금지. 그와 같은 사회적 행위들이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위협할수도 있었기 때문. 따라서 중국에서 상인 동업조하븐 유럽문명의 도시국가에서 볼 수 있는 상인 동업조합의 지위와 영향력에 결코 이를 수 없었음.
- 상인계급은 도시를 건설하고 제도를 확립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음. 하지만 중국에서는 국가권력이 도시를 세움. 따라서 중국은 도시국가의 역사를 갖지 못함. 중국이 독자적인 부르주아 계급을 만들어내지 못한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임.
- 중국의 대도시들은 대개 황실을 대변하는 관리들이 지배했는데, 특히 사법과 재정문제와 관련해서 더욱 그러했음. 그리고 유럽의 도시들과 달리 중국의 도시들은 해방과 자유라는 개념이 전혀 구현되지 않음. 송나라때부터 중국제국에서 부와 정치권력, 사회적 지위는 실제로 지주귀족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음. 하지만 유럽에서는 기생 지주계급이 무척 강력해져 위협세력이 되면 상인계급이 군주와 동맹을 맺고 지주계급에 대항할 수 있었음.
- 이제 서유럽이 동아시아보다 훨씬 더 상업화 되었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임. 중요한 것은 중국제국이 자본주의 없이 상업화를 이루었다는 사실. 그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전쟁을 일삼던 유럽국가체제가 대규모 금융과 생산, 해외무역과 같은 활동을 민간이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요구함으로써 마침내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반면 중국은 그러한 활동은 모두 국가가 통제했기 때문. 강력한 상인집단과 같은 민간인 이익단체가 국사나 대외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중국의 국가경영개념과는 전혀 맞지 않았음. 오히려 중국상인들은 국가를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에서의 성가신 경쟁자로 맞서야 했음. 더 나아가 중국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확장을 꾀할 때마다 정부는 새롭게 편입되는 국경선을 따라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자원을 빼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자원을 이동시켰음. 대개 유럽의 중상주의 역사와는 반대되는 일이 일어났음.
- 13세기와 14세기 대부부의 기간동안 유럽 도시 내부와 농촌은 분업을 계속해서 확대. 동업조합 안에서의 전문화도 마찬가지로 확대됨. 이런 현상이 몽골의 평화시대(1250~1350)에 발생한 것은 우연의 일치였음. 거래비용과 보호비용의 급격한 감소는 서유럽 도시국가들이 시장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 그 결과 유럽 도시의 산업 대부분은 분업을 확대했음.
- 13세기와 14세기에 들어 유럽상인들은 아시아와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점점 더 많아지면서 아시아를 바라보는 생각들이 바뀜. 그들은 13세기 이전의 동아시아를 포함한 비기독교 세게를 극도의 혼란에 빠진 곳으로 여기고 상징화했지만 몽골이 점점 영토를 확장하면서 그곳이 온갖 부와 경이가 가득한 보고... 욕망의 세계라고 생각하기 시작. 몽골제국이 다소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1250~1340년 동아시아는 상인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제공함. 14세기 전반기는 유럽상인들이 몽골아시아로 침투하는 황금시대로 볼 수 있음. 따라서 몽골의 평화시대로 촉진된 동양의 사치품에 대한 욕망증대는 유럽의 도시 상인 엘리트들이 식민지 착취와 부등가 교환, 임금노동자 착취, 그리고 이어진 개발되지 않은 영토에 대한 상업화와 예속, 수탈을 기반으로 한 지속적 성장전략을 쓰도록 자극했음.
- 국가의 지원은 유럽 상인들이 아시아와 장기교역하고 장기적으로 그곳을 식민화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였음. 유럽 상인들이 이런 국가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주요 교역 거점들에 있는 아시아 상인들과 관계를 맺었을 테고 그들이 구축한 교역망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임. 그러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마침내 영국 상인에 이르기까지 유럽상인들은 모두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그것과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음. 포르투갈 정부는 중국과 달리 해외교역을 장려해 교역에 참여하는 국민들에게 혜택을 제공. 네덜란드도 17세기 초 네덜란드 정부는 상인들이 교역하는 곳이 어디든지 그들의 부를 늘리는 데 크게 관여함. 근세 포르투갈 정부는 인도국을 세워 국제교역과 정치무대에서 입지를 높이고자 하는 일종의 거대한 기업체로 불림
- 그동안 주류 사회학계에서는 막스베버가 주장한 것처럼 카스트 제도의 문화적 가치가 남아시아 아대륙의 근대화를 막았다고 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해왔음. 전통적으로 계층에 따라 직업을 차별화하고 대대로 세습되는 인도 사회의 카스트 제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개인주의를 경험한 유럽과 달리) 시민 도시공동체의 출현을 저해했음. 기존의 계급구조를 수용하는 종교가 역동적 사회변화를 방해했다는 베버의 주장 이후로, 카스트 제고의 수용과 관련된 문화적 가치의 특수성은 남아시아 반도에서 기술변화가 억제되고 자본주의와 근대성이 출현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는 주요 변수가 됨. 남아시아의 고유한 종교, 문화적 가치가 카스트 제도를 뒷받침하고 그 제도가 사회경제적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음. 남아시아 사람들을 유럽의 경제적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류학적 인간(특히 남아시아에서는 위계적 인간)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이런 식의 추론이 낳은 또 하나의 어처구니 없는 결과임
- 종교와 문화적 가치를 서양과 비서양을 구분하는 주요한 특징으로 강조하는 것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남아시아 사회가 본질적으로 정체되어 이으며 통치체제가 허약하고 미개발된 상태라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전략을 수행할 수 없다고 예단하는 것임.
- 서유럽 전역에 걸쳐 모든 도시국가의 시민들은 대개가 무장하고 전투훈련을 받았음. 이런 상황은 다른 도시국가들에 맞서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인근의 귀족층과 지역군주들이 경제적 요구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특권(독점권)과 도시의 자치권을 지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 그러한 도시 민병대는 군주에 대해서는 자본의 힘을 상징적으로 과시하고 귀족층에 대해서는 제도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구실했음
- 유럽이 외부세계를 체계적으로 주변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이 제도화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특정한 정책을 채택한 덕분. 그러나 남아시아의 상인계급은 그런 중상주의 전략을 택하고 실행할 수 없었음. 말라카 같은 동남아 국가들을 빼고는 장기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 남아시아는 중세유럽과 비교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도시운동이 확산되지 못했고 기존의 도시와 농촌의 봉건권력을 직접 대적하고 무너뜨릴 시민계급이 나타나지도 않았음. 그렇다고 남아시아 상인들이 수동적이었다는 것은 아님. 비교적 규모가 큰 상인조직들은 당시 사회에서 여러 중요한 구실을 했음. 국왕과 왕실관료들의 신임을 얻어 세금, 통행료같은 각종 과징금을 징수하기도 했고, 기존 종교체제의 보호를 등에 업고 매우 특수한 경우의 소송을 중재하기도 했음.
- 남아시아 국가들이 해군력 방위강화와 다양한 국가기구 정비, 지정학적 선택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유목민의 방랑생활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바닥에 깔고 이해해야 함. 유목민족의 습격은 중국제곡에 끊임없는 위협이었음. 그것은 15세기 초에 마침내 중국제곡이 주요한 해상원정을 포기하게 된 중요한 요소였음. 유목민의 침입이 남아시아 북서쪽 변경에서도 마찬가지로 가공할 위협이었음
- 경제가 성장하면 당연히 기술혁신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새로운 발명은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것이 이익이 될 때 비로소 발생함. 노예제가 근본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정치경제체제는 본디 중요한 기술혁신을 장려하지 않음. 기술혁신은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과 관련된 권력의 축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 비록 다양한 세계제국들이 개별적으로 이룩한 기술 혁신들이 매우 인상적일 수 있을지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러한 기술혁신은 새로운 기술을 가장 잘 전파할 수 있는 경제체제에서 가장 잘 돌아가기 마련임. 임금노동자가 많이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임금비용을 상쇄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기업가들이 지배하는 사적자본이 기술장치와 혁신에 투자됨. 노예제 경제에서는 노예를 감시하고 강제하는 데 더 많은 역량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혁신을 추진할 동기가 없음. 피라미드의 건설은 당시 이집트가 상시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그 성과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경제의 구조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예제 국가가 창출할 수 있는 강제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 어쨌든 강제로 부릴 수 있는 노동력을 얻고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에 주목해서 볼 때 북서아프리카의 지속적인 인적손실은 더 고도로 발전된 정치조직체로 진화하는 것을 가로막았음.
- 상인개인도 이슬람 국가도 상인들의 항해를 발전시키고 보호하는 데 자신들의 자원을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음. 통치자나 국가가 교역활동을 위해 제공하는 정치적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지중해 교역에 얼마나 많은 자원과 정치력을 발휘했는지 비교해볼 필요가 있음. 이슬람 정치권력이 교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은 것이 역량과 수단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의지가 부족해서인지를 불문하고 어쨌든 지중해 해안지역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이 왕성하고 정교한 해상교역체계를 쉽게 발전시킬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11세기부터 이탈리아 도시들의 지배와 개입에 손을 들게 된 이유인 것은 분명함.
- 이슬람 세계에서는 도시와 농촌간의 경계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음.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하는 정책을 지향하는 독립된 도시제도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음. 대다수 이슬람 도시에서 서유럽 도시들과 비슷한 체계적인 식민지 전략을 시행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음. 세우타처럼 유럽의 형태에 가장 근접한 도시도 유럽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음. 대개 부유한 북아프리카 상인들은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음. 그러나 그러한 노력을 제도화하하지는 못했음. 몇몇 북아프리카 국가가 서유럽보다 더 교역에 의존했고 거대한 대상교역은 자본주의적 영역으로 구분될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일어나지 않았음.
- 부의 축적은 상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불문하고 특별히 다르지 않음. 그러나 중심부가 주변주를 식민지로 만들고 지속적으로 착취, 지배하는 과정을 통한 체계적 자본축적 정책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유럽상인들이 추진한 예외적 과정이었음. 처음에 이과정은 유럽도시들의 인근 농촌지역과 지중해 유역, 동유럽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나중에는 유럽 이외의 지역, 예컨대 대서양 제도,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일부 수정을 거쳐 반복되더니 마침내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지역까지 확대되었음
- 군사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자본축적의 근대적 형태들, 즉 불법적 합법적 독점이나 신식민주의, 노동자 착취는 서유럽에서 최초로 발생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장기적 과정에서 나온 것임. 그러한 축적은 선대제라는 경제전략에서 뿐 아니라 도시국가의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 특성이었음. 상인계급은 도시국가에서 권력을 축적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법적 장치(시민권 개념)를 확립했음. 그리고 그것은 상인계급에게 이익을 주는 식민지화 및 주변부 구축과 병행해서 일어났음.
- 마르크스는 산업생산과 근대 공장체계의 영향력에 주목하는 바람에 근대 산업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국제분업체계가 근대 공장체계처럼 최근에 생겨났다고 결론지음. 그러나 국제분업이 발생한 것은 19세기보다 더 오래전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몰두하지 않았던 것은 중세와 근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
- 13세기 농촌에서 직접 과세의 부담은 도시의 간접과세보다 훨씬 더 무거웠음. 1280년대 이탈리아 중부 농촌지역 피스토이아는 도시가 내는 것보다 6배나 더 많은 세금을 냄. 농촌은 도시에 항상 채무를 진 상태였음. 농촌은 도시로부터 끊임없이 돈을 빌리고 지주가 아닌 도시 주민들이 농촌에서 지대를 받아 챙기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됨. 도시국가의 배후지 콘타도는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작물보다 환금작물 재배에 더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오늘날 제3세계 지역과 다르지 않게 착취가 지속적으로 되풀이 되기 시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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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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