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1.02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2. 2015.12.13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 절대적 도덕법칙이 무너져가는 상황속에서 칸트가 제시한 것은 정언명법이다. 누구나 반드시 따라야 하는 도덕법칙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방법으로서, 칸트가 제안한 법칙이다. 실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라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이 말을 쉽게 바꿔보면, "네가 개인적으로 하려는 일이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해도 괜찮은 일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라" 정도가 된다.
-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파이어아벤트의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는 수학, 물리학, 철학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아 불가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 상징직 사건이 됨. 이런 학문의 내적 붕괴가 세계대전이라는 외적 요인과 결합되어 근대 합리성에 대한 낙관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이성은 사실 너무나 초라하고 제한적이며 폭력적 귀결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류는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절대적 진리로서 기대되었던 근대이성을 극복하고, 근대 합리성을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 포스트모던, 탈근대, 현대는 같은 말이며, 모두 근대를 넘어서는 시대를 말한다. 여기서 근대를 넘어섰다는 것은 근대 이성중심주의를 극복했다는 것을 의미. 그래서 탈근대는 이성에 반대하는 반이성을 특징으로 하고 근대적 합리성, 효율, 주체, 질서, 규율, 규칙 통제, 발전, 성장, 기술에 저항하며, 이 근대적 속성들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려고 한다. 근대가 쌓아올린 이성과 합리성의 완고하고 질서정연한 고층건물 안으로 새로 출근한 포스트모던이 걸어들어가서 취약해 보이는 몇몇 기둥을 손가락을 밀어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적 합리성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작업을 해체라고 한다. 해체는 포스트모던의 대표적 특징이다. 반이성의 시대가 온 것이다.
- 중세와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가치가 다른 가치를 억압하는 폭력을 수반할 수 밖에 없음. 그래서 포스트모던은 이분법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 세계를 강압적으로 쪼갤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하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그동안 억압받아왔던 가치들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하며, 한발 더 나아가 이분법에 포착되지 않고 배제되었던 것들까지도 다시 복원하고자 한다.
- 근대를 끝내고 현대 포스트모던의 탄생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해라."
- 절대주의 : 불변하는 단일 진리를 상정하는 태도
- 상대주의 : 변화하고 운동하는 현상세계와 진리를 고려하는 태도
- 회의주의 : 보편적 진리나 그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거부하는 태도
- 지금의 그리스도교 사상은 플라톤의 절대주의와 유사. 예를 들어 신플라톤주의의 '일자'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에 해당하고,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리스도교의 '천국'에 해당. 플라톤 사상에서 완전한 이데아 세계와 불완전한 현상세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은 그리스도교에서 완벽한 천상세계와 타락한 지상세계를 구분하는 이분법과 동일함. 이에 대해 현대철학의 문을 연 니테는 그리스도교가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에 다름이 아님'을 정확하게 지적. 그에 의하면 플라톤 사상의 세계 이해방식은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
- 중세 신 중심의 시대가 지나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성중심의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 그것은 역사파트에서 본 것 처럼 물질적 권력을 획득한 시민계급의 부상과 관련된다. 그들은 왕의 권력을 정당화해주는  신 대신 인간이 중심인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 이제는 진리의 대상이 종교에서 이성으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진리의 대상이 변경된 것과는 달리 진리에 대한 입장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로 크게 변하지 않는다. 중세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싸움이 보편논쟁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에 있었다면, 근대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논쟁으로 변형된다.
- 합리론과 경험론은 '어떻게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방법을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짐. 다만 그 답변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처럼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 탐구하는 분야를 철학에서는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 근대 합리론과 경험론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였다. 합리론은 보편적 이성을, 경험론은 개별적 경험을 그 방법으로 제시. 이 두체계를 종합함으로써 소모적 논쟁을 끝마친 인물이 칸트이다.
- 고대 이집트로부터 로마시기 노예는 구체적으로 유대민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도덕은 원한으로 시작되고 부자연스러운 형태를 띤다. 주인에 대한 그들의 원한은 점차 왜곡되고 이상화되어 결국에는 독특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재탄생. 즉 노예들은 자신들이 가진 도덕인 겸손, 근면, 순종, 순응 등을 '선'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뒤바꾼다. 그리고 주인의 진취성, 결단력, 창조력 등은 '악'이라는 개념으로 가치절하. 마음속으로 소심하게 복수하는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에 의해 좋음은 악이 되고, 나쁨은 선이되는 가치전도 상황이 발생.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에게서 발생한 그리스도교가 이런 선과 악의 개념을 공고히 했다는 것. 그리스도교는 유럽 사회 전체를 장악하면서 유럽인들에게 선과 악이라는 원한의 도덕관을 뿌리깊게 심어놓았다. 무엇인가 억눌리고 금욕적이며 겸손하고 희생하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로 유럽이 병들어가고 있다고 니체는 판단. 그에 따르면 주인의 도덕은 자신에 대한 무한한 긍정에서 출발하는 건강한 도덕이지만, 노예의 도덕은 타인에 대한 원한에서 출발.
- 오컴의 면도날이란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서로 다른 두 이론이 존재할 때, 더 간단한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고방식. 오컴의 면도날처럼 이론을 정립하는 방법과 논쟁을 진행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불필요한 가정을 덧붙이거나 상식에서 벗어난 논쟁을 담론에서 배제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결국 과학적 담론이 진행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 뉴턴이 관심을 가진 만유인력이나 힘에 대한 역학은 기존의 과학이 갖고 있던 관심사를 확장했다는 의미를 가짐. 갈릴레이나 케플러가 기하학을 통해서 자연적 사물들을 수학화했다면, 뉴턴은 그 사물들간의 보이지 않는 힘을 수학적으로 정리해낸 것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해보자면 기존의 물리학이 존재자에 관심을 갖고 그 존재자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면, 뉴턴은 특정 존재자와 다른 존재자가 맺고 있는 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수학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뉴턴으로 인해 물리학은 존재부터 관계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수학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 하이젠베르크는 동시에 결정되지 않는 미시세계의 원리를 불확정성 원리라고 이름 붙임.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물리하겡 대해 과학자들의 선언이 뒤따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코펜하겐 해석이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물리학으로서 양자역학의 출발을 알리는 선언인 동시에, 아인슈타인까지의 결정론적 세계가 끝나고 결정되지 않는 비결정론적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코펜하겐 해석이 물리학을 포기한다거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선언은 아니었다. 여기서 결정론의 세계가 원인과 결과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과론적 세계를 대변한다면, 비결정론은 확률로서 제한되는 세계를 말함. 양자역학은 수학적 확률안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된다.
- 쿤에 의하면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과학의 발전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는 과학이 실험과 관찰 그리고 수학적 적용에 따른 논리적 진보일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쿤이 과학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본 결과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실제 과학적 변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우선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보편적 진리가 존재.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신뢰하는 시기라고 해보자. 이 단계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것은 일반인들에게 무척 당연한 것이고, 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공통된 진리관이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다. 과학작들으 이 패러다임 안에서 실험과 관찰을 진행한다. 패러다임 안에서 과학적 활동을 정상과학이라 부름. 정상과학이 진행될수록 패러다임은 더 확고해진다.
(2) 그런데 위기가 찾아온다. 정상과학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변칙사례가 발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밤하늘에서 화성의 경로를 추적해보면 원래의 경로와 다르게 역행해서 움직일 때가 발견되는데, 천동설 안에서는 이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변칙 사례들이 발견된다고 해도 패러다임이 단번에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패러다임보다는 변칙사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변칙을 수용하려는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한다. 프톨레마이오스도 실제로 주전원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추가해서 화성의 역행을 설명하고 천동설의 변칙사례를 해결했다.
(3) 위기가 심화되고 혁명이 발생하는 시기. 변칙사례들이 계속 발견되고 기존의 정상과학이 이를 수용하기 어려워지면, 패러다임의 심각한 위기가 찾아옴. 그러면 기존 패러다임 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젊은 과학자 집단이 새로운 이론으로 기존이론에 도전. 이 시기에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경쟁하는데, 이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듯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다듬어 지지 않은 까닭에 기존의 패러다임보다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미적으로 보기좋다거나 간결해진다는 과학 외적인 요인을 기반으로 젊은 과학자집단에 의해 제시되는 단계다. 과학계를 장악하고 있던 나이든 과학자 집단은 기존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변칙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하고 노련한 방법들을 사용.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지만, 기존 과학계로부터 다양한 비판을 받은 것이 이에 해당.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움직이는 지구에서 왜 사람이 쓰러지지 않는지 등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어서 당대에는 설득력을 갖지 못했음
(4)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것을 폐기하고 혁명적으로 등장해 새로운 정상과학이 되는 단계.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런 변화가 기존의 정상과학과는 단절된 혁명적 변화라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새로운 과학이론이 기존의 과학이론을 아우르면서 점진적으로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쿤의 생각. 과학은 기존의 세계관과는 단절된 새로운 세계관이 등장하면서 혁명적으로 발전한다. 이를 과학혁명이라고 한다. 쿤이 과학발전대신 과학혁명이란 단어를 선택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과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만큼 비판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는 뇌이상설이다. 뇌이상설은 죽음이 임박한 당시 의 신체적 변화가 뇌에 비일상적인 영향을 주어 환각으로서의 경험을 일으킨다는 설명. 세부적으로는 호르몬설과 산소결핍설이 대표적. 우선 호르몬설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진통작용을 하는 엔돌핀의 과다분비가 환각의 원인이라는 설명. 전형적 임사체험의 경험 중 느끼는 평온함과 안락함의 경험이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됨. 다음으로 산소결핍설은 심장박동의 정지로 인한 뇌안의 산소부족이 환각의 원인이 된다는 설명. 산소농도의 저하는 시각 뉴런의 활동을 증가시켜 빛을 보는 듯한 경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주요 내용. 이와 비슷하게 혈류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져 환상을 보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음. 이 밖에도 임사체험을 수면의 단계와 연결하는 설명이나, 측두엽의 이상과 연결하는 설명 등 뇌 활동의 일부로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음.
- 만약 지금 이 순간이 힘겹고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은 영원할 것이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이 행복은 영원할 것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현명해질 것을 요구한다. 내가 지금 소모해버리고 있는 이 순간은 내가 영원이 반복해야 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영원이 반복될 이 순간을 위해 우리는 나의 삶을 창조해야만 한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도록 삶을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 지금 이 순간을 소모하지 않고 최고로 행복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존재. 이 존재가 니체가 말한 초인이다.
- 진정으로 신비하고 심오한 깨달음을 주는 것은 자신이 내적 세계로서의 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라고 믿었던 세계가 사실은 나의 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세계의 의미와 세계속에 살아있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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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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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라는 개념은 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 그리고 애국에 대한 강요는 지배자들을 편리하게 함. 그래서 애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고 교육됨. 애국자와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과 기념절차에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사회는 이들을 지칭하는 어휘를 검열하고 교정한다. 반대로 애국과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정치, 사회적 압력이 가해지고 이들을 지칭하는 어휘들에는 거칠고 모욕적이며 배타적인 언어들이 허용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요청은 자본주의만의 특성은 아니다. 신을 요청할 수 없는 모든 지배권력은 애국을 장려한다. 합리적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혹은 지적대화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신과 국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신과 국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신과 국가의 존재를 부정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과 국가의 객관적 의미를 초월해서 사회, 정치적으로 과장되고 포장된 의미가 나에게 강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왜곡된 세계에 서 있는 왜곡된 나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 지적대화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준비이다.
- 시장의 실패로 발생했던 공황은 정부의 개입으로 점차 호전되어 갔다. 이것이 바로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수정자본주의. 정부는 세금을 높이고 다양한 규제를 시행함으로써 거대자본이 산업을 독점하는 것을 경계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고, 노동환경을 개선. 발전과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소외계층을 보살피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시대가 온 것이다.
- 이러한 자본주의는 대공황부터 시작되어 냉전시대를 거쳐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이어짐. 이로 인해 미국은 소련과의 체제경쟁에서 자본주의를 보호할 수 있었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미국에 큰 부담이 되었는데, 공산주의가 노동자의 권리를 국가의 최고가치로 삼았기 때문. 공산주의는 부르주아인 자본가를 인정하기 않고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에 의한 정치를 추구. 미국의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는 매우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반대로 미국의 자본가들에게는 공산주의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악마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미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와 사회적 소외계층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불만을 갖지 않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배부르고 편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소외계층의 권리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수정자본주의의 모습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수정자본주의의 등장은 시대,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같이 한다.
- 어떤 사안이 복잡해 보일 때 그것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사안으로 인해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입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 어쩐 일인지 한국인들에게 경제체제는 두가지 밖에 없어 보인다. 양극단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라 할때 그것이 암묵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이고, 공산주의라 할 때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북한의 왜곡된 파시즘 체제이다. 경제체제는 종교가 아니고 선악의 문제도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효용과 이익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경제체제가 나와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는지를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사회에서 경제체제는 이념과 종교가 되었다는 것. 현 체제를 비판하거나 다른 체제의 가능성을 말하는 이가 이단이 되어 종교재판을 받는 것은 합리적인 현대인들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 정치란 단순히 경제체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경제체제 중 무엇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정치의 본질이다. 논의의 선택지는 두가지다. 하나는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입장으로 우리는 이를 정치적 보수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우리는 이를 정치적 진보라고 부른다
- 자신의 재산과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런 집단은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해서, 역사적 맥락에서 한국인이 거부감을 갖고 있는 공산주의를 후기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 새누리당이 집권당이 되거나, 민주당이 집권당이 되거나 모든 정책은 사회당과 노동당이 집권하는 유럽처럼 급진적이거나 진보적이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경쟁하는 한국사회는 어찌 되었건 간에 자본가와 기업의 이익이 대변하는 사회이며, 복지수준이 저조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된 국가일 수밖에 없다.
- 보수는 현재의 체제와 상태를 유지하려는 세계관을 가짐. SBS가 연예와 오락 중심으로 방송을 편성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을 그나마 안정된 세계라고 전제하기 때문. 비정치적 성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치지 않는 것, 정치적 사안의 심각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중립이나 비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에 구조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보수적 세계관이다. 날카로운 풍자와 시사가 배제된 예능은 대중의 말초적 재미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실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정치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 기업과 노조의 역사적 기원은 근대부터 시작. 프랑스 대혁명 이후 중세의 왕 중심의 가치관은 붕괴되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발생. 부르주아는 생산수단을 소유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두계급인 자본가와 노동자는 현대에 이르러 기업과 노조로 변화.
- 아이러니하게도 독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점은 민주주의의 형식적 측면만을 고려할 때 거의 필연적으로 보인다.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이라는 형식적 측면이 독재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측면과 동시에 내용적 측면이 보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형식적 다수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신이라는 내용적 측면가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의 수렴과정과 절차가 보장되고, 각 구성원이 소수의 의견이 귀 기울이는 관용적 태도가 전제되어야함 이상적 형태의 민주주의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 독재와 엘리트주의가 현실화 되었을 때,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점을 일으킨다. 첫재,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서 그것이 자본가이건 노동자이건 이익분배에서 배제된 다른 집단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둘째, 엘리트주의는 스스로의 완전무결성을 유지하기 우해 그런 불만을 가진 집단을 필연적으로 억압한다. 셋째, 이런 억압을 정당화하거나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이해 권력자는 정보를 은폐하거나 왜곡한다. 넷재, 정보의 은폐와 왜곡된 정보가 사실인 양 과정해서 교육한다. 다섯째는 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편협한 사람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 스스로가 사회의 합리적 선택을 방해하고 결국 사회는 병든다
- 전체주의는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 보다는 사실 경제적 위기가 발생시키는 하나의 병리현상으로 보인다. 아무리 평범하고 선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기인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경제를 살리겠다는 인물이 있으면 그가 전권을 맡는 것에 대해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독재를 하건, 외국과 전쟁을 벌이건,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를 잡아가건, 노조를 탄압하건, 대중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라 독재자가 한 거이고, 경제회복을 위해 전체가 함께 동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없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존재가치를 절하하고, 집단과 전체의 가치를 앞세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게 좋아 보이지 않지만, 전체가 위기에 처해있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개인은 언제라도 자신에게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을 반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가치가 절하되어 있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위안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지메의 원리와 동일. 전체가 비윤리적으로 행동할 때 내가 거기에 가담할 수 있는 것은 그 비윤리적인 행위의 직접적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 전체는 나의 이익을 위해 강력하게 행동하지만, 나에게는 책임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개인이 전체의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한다.
- 노암 촘스키는 "신문과 방송이 광고주인 사기업의 이익을 대변해주고, 사기업들은 광고로 언론의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잘못된 이익의 먹이사슬이 형성됐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미디어의 한계를 드러냈다.
- 미디어에 자신의 판단을 양도하는 사람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여유로워지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더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밖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고, 인생의 깊이를 얻지 못할 거이며,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속세어 빛날 수는 없을 거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만큼 주체적인 삶은 없다
- 의무론은 의무나 도덕법칙을 준수하는 행위를 윤리로 보고, 목적론은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윤리로 본다. 쉬운 예를 들면 의무론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대표적 사람들은 종교인다. 목적론적 윤리관의 대표적 인물은 안중근 의사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야" 같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총을 쏜 것이다. 이때의 윤리관은 좋은 결과를 고려한 행위이므로 목적론적 윤리관에 따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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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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