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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의 지구사

역사 2014. 10. 3. 11:55

 


향신료의 지구사

저자
프레드 차라 지음
출판사
휴머니스트 | 2014-04-2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향신료의 역사향신료는 생산지와 소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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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신료는 몇가지 이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
(1) 향신료는 동과 서, 남과 북의 여러 문화를 이어주었음. 이처럼 다양한 문화의 만남은 긍정적이고 원만할 때도 있었지만 해가 되거나 심지어 파괴적일 때도 있었음.
(2) 향신료 교역으로 세계화 시대가 열리고 경제 세계화가 시작됨. 향신료 교역으로 지구 한쪽에서 일어난 일이 그곳과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과 사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됨.
(3) 향신료 교역의 결과로 새로운 요리를 맛본 사람들의 식습관을 뒤바꿔 놓았고 이런 식습관의 변화는 요리를 준비하고, 먹고, 맛보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음
- 향신료는 무엇일까? 대체로 향신료는 열대식물의 향기로운 부분이리고 정의됨. 식물의 뿌리일수도 있고, 나무껍질이나 꽃, 씨앗일수도 있음. 바닐라와 칠리페퍼, 올스파이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향신료의 원산지는 아시아임. 유향과 몰약(콤미포라 미르라나 콤미포라 아비시니카 등의 나무껍질에 상처를 내어 채취한 천연 고무수지)은 향을 내는데만 쓰임. 향신료와 허브를 같은 것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이는 틀린 생각임. 허브는 목질의 줄기를 지니지 않으며 생육기간이 끝나면 죽음. 대부분 허브는 약이나 양념으로 쓰임
- 고대의 여러 향신료는 지구 곳곳의 음식과 약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침.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되고 널리 퍼진 칠리페퍼는 전 세계의 음식과 문화를 온통 바꾸어 놓음. 칠리페퍼는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이와 품종이 등장했고, 카리브해부터 중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향을 내는 그 어떤 향신료보다 더 널리 쓰임. 오늘날 멕시코 지역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기원전 7000년부터 칠리페퍼를 먹기 시작했고 그 몇세기 뒤부터 경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있음. 칠리페퍼는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서인도 제도에서 유래. 15세기와 탐험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칠리페퍼가 세계무대에 등장했지만 다양한 종류가 수천년전부터 야생으로 자라거나 식용으로 재배되고 있었음.
- 향신료와 관련된 오해가운데 하나는 고기를 저장하기 위해 향신료를 썼다는 생각.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근거를 들어 반박할 수 있음. 무엇보다 중세 서양에는 고기가 풍부했음. 사람들은 짐승을 일상적으로 도살하고 손질하고 요리하고 먹었음. 따라서 고기를 저장할 필요가 없었음. 둘째, 향신료는 방부제로 그다지 쓸모가 없었음. 향신료보다는 소금에 고기를 절이거나 훈제하거나 말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 소금은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훌륭한 방부제였음. 시간이 흐르면서 향신료는 약재와 음식으로 쓰이게 되었음.
- 14세기에서 15세기에 북아프리카의 맘루크 왕조(이슬람 사회의 군사노예인 맘루크가 이집트에 세운 왕조.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250년간 통치하다가 오스만 제국에 멸망)가 전성기를 누리고 터키에 오스만 제국이 등장하면서 유러브이 내해인 지중해를 오스만 제국이 장악.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장악은 1571년 그리스 서해 연안의 레판토 해전(신성동맹의 함대가 레판토 앞바다에서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격파한 싸움)에 이르기까지 계속됨.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한 동안 서유럽은 향신료를 실어나를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으며, 그렇게 해서 서양의 탐험의 시대가 시작됨
- 탐험의 시대는 유럽 대륙과 해안 및 영국 제도에 위치한 나라들과 관련된 서구적 표현. 15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이 남아시아와 동남아 두지역에서 향신료 시장을 놓고 경쟁.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프랑스과 덴마크도 이 경쟁에 뛰어듬. 향신료 교역지대를 차지하려는 이들 나라의 경쟁은 서양과 동양 모두에 영향을 미친 세계적 사건이었음. 향신료의 땅으로 가는 북쪽 경로와 남쪽 경로를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음. 16세기와 17세기에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이 나라들의 경쟁은 사실상 최초의 세계경쟁으로 여길 수 있을 정도였음.
- 16세기 내내 포르투갈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에 이르는 향신료 교역로와 향신료 제도를 찾아 계속 동으로 항해했으며 결국 성공. 포르투갈은 말레이 반도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말라카를 점령. 말라카는 해협으로 들어가는 요지이자 동남아와 향신료 제도로 가는 길목에 있음. 포르투갈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향신료의 땅에서 계속 성공을 거두었음. 하지만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많은 토착세력이 해상무역을 개척하는 데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 그렇지 않았다면 포르투갈은 토착종교 세력 및 왕국과 세력다툼을 벌여야 했을 것임. 해상무역에 큰 관심이 없는 토착세력 덕택에 포르투갈은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음. 그러나 포르투갈이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을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교역망도 계속 번성. 정확히 말해 포르투갈은 향신료 교역을 지배했다기보다 일정 부분을 차지했을 뿐이었음. 그뿐 아니라 포르투갈이 마카오 기지에서 중국인들과 교역할 때도 중국인들이 교역조건을 정했음. 포르투갈은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을 따라서 전체 향신료 거래의 약 5%만을 장악했을 뿐이었음. 페퍼 교역에서도 교역량의 10%만을 차지. 향신료 교역에 투자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쏠쏠했음. 하지만 포르투갈 왕실이 어렵게 개척한 에스타두 다 인디아(포르투갈령 인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후 포르투갈이 인도에 세운 식민지들로 코친과 고아 등을 포함)는 그다지 수지가 맞지 않았음. 포르투갈은 분명 인도항해로 수익을 얻기는 했지만 향신료 교역으로 유럽에서 생기는 수익은 대부분 홍해를 거친 육로는 통해 향신료를 얻는 상인들 몫이었음. 하지만 세계는 변화하고 있었음. 역사학자 복서에 따르면 포르투갈 제국은 다양한 상품을 거두어가고 있었음. 기니, 남동아프리카, 수마트라에서 금을, 마데이라와 상투메, 브라질로부터 설탕을, 말라바르와 인도네시아에서 페퍼를, 반다 제도에서 넛메그와 메이스를, 트르나테와 티도레, 암보이나에서 클로브를, 실론에서 시나몬을, 중국에서 금과 비단, 자기를, 일본에서 은을,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에서 말을, 인도에서 면직물을 얻어갔음.
- 16세기 동안 포르투갈은 리스본에서 브라질로, 일본으로 세계 무대의 지배권을 넓혀갔고 수도 리스본은 서유럽의 주요 중심지가 됨. 하지만 포르투갈은 곧 네덜란드의 도전에 부딪힘. 포르투갈이 동양의 향신료 교역에서 유럽의 선두주자로 우뚝 서는 동안 네덜란드는 유럽의 여러 강과 발트해의 교역을 장악. 네덜란드인은 뛰어난 사업수완과 항해감각을 갖고 있었음. 그들은 어떻게 대양을 건너 동쪽으로 항해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을까? 16세기 중반 저지대국인 네덜란드는 여러 나라와 도시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17개 주의 느슨한 연합체로 에스파냐의 카톨릭 왕이 지배하고 있었음. 그런데 1566년 네덜란드의 칼뱅파 신교도가 에스파냐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일으켰고 1579년에 위트레흐트 동맹(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북부 7개주가 위트레흐트에 모여 결성한 동맹으로 에스파냐 총독과 타협한 남부 10개주와는 달리 끝까지 하나가 되어 싸울 것을 결의)이 탄생. 이로써 네덜란드 남부는 에스파냐의 지배아래 남아 있는 반면, 암스테르다을 중심으로 한 7개의 북부주는 네덜란드 동맹이 됨. 1602년에 네덜란드의 세계무역을 추진할 상사가 설립됨. 그후 80년 사이에 이 작은 연합국은 세계 무역계의 강자가 됨. 발트해와 유럽의 여러 강에서 이미 항해 경험을 쌓은 네덜란드 동맹은 변신을 거치며 세계 전역으로 세력을 넓힘. 네덜란드인은 처음에 동반구가 아니라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 서반구로 항해를 시작. 1593년 남미로 떠났던 원정대가 금과 상아를 가득 싣고 돌아옴. 1621년에 이르자 네덜란드는 유럽과 브라질 간 교역의 3분의 2를 장악했고, 무역규제를 위해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설립됨. 네덜란드의 아시아 탐험은 포르투갈인을 도와 아시아를 항해했던 네덜란드인으로부터 시작되었음. 그들은 포르투갈인과 항해하는 동안 향신료 교역로에 대한 귀중한 지식을 얻음. 1594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로 항해를 시작. 2년 뒤에 몇척의 배가 많지 않은 페퍼를 싣고 돌와왔지만 원정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았음. 1598년에 또 다른 함대가 출항한지 15개월이 되기도 전에 값비싼 향신료를 싣고 돌아왔음. 페퍼 60만 파운드(약 272톤), 클로브 25만 파운드(약 113톤), 그리고 그보다는 적은 메이스와 넛메그를 싣고 왔음.
- 1601년 65척의 배로 구성된 14개 함대가 동인도 제도로 출항하면서 교역은 더욱 발전. 네덜란드를 떠난 이 함대와 배는 각각 북부나 남부 네덜란드의 정치조직이나 개인의 지원을 받음. 위트레흐트 동맹이 네덜란드의 경제적 이익까지 결속하지는 못했음. 향신료 제도의 같은 항구에 여러척의 네덜란드 배들이 도착해 똑같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각각 경쟁. 그다지 이상적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 떠났던 배와 함대가 1602년이 되기 전에 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로 돌아왔을 때 항해로 얻은 이윤도, 실패한 항해에서 생긴 손실도 함께 나누거나 책임지지 않았음. 개별회사들은 파산했음. 여러 분파 사이의 많은 압력과 불화, 논쟁끝에 1602년 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연방 동인도회사가 탄생. 하나로 뭉친 네덜란드의 경제 나침반은 아시아를 가리켰음. 교역은 대체로 성공적이었음. 네덜란드인들은 교역할 때 매우 직선적이었음. 그들은 포루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처럼 값싼 진상품을 바치지 않고, 네덜란드 은화로 향신료를 샀음. 1605년에 포르투갈은 향신료 제도를 네덜란드에 빼앗겼고 1641년에는 말라카가 네덜란드의 손에 들어감. 콜롬보는 1656년, 실론과의 시나몬 교역은 1658년에 네덜란드 차지가 됨. 1662년에는 코핀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넘어감. 이렇게 해서 주요 향신료 교역의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
- 향신료 제도에서 쫓겨난 포르투갈처럼 네덜란드도 향신료 교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음. 독일의 역사학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에 따르면 중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이 해상을 지배하기 시작. 17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진출은 사실상 역전됨. 다른 역사학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향신료 생산지역의 내륙으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세력이 공백상태에 있었기 때문. 그들은 짧은 기간동안 그 공백을 채울 수 있었을 뿐임. 네덜란드는 식민지를 개척하고 식민지의 향신료를 독점했지만 세계의 향신료 교역에서는 작은 부분밖에 차지하지 못했음. 어쨌든 네덜란드는 아시아를 세계경제에 편입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음. 아시아와 유럽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됨
- 향신료 교역의 이야기에서 중국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중국인은 이미 그곳에 있었거나 그곳을 떠난 뒤였음. 유럽이 아시아에 진출하기 몇세기전부터 중국인은 향신료 교역망에 뛰어들며 페퍼, 클로브, 넛메그, 시나몬을 구해갔음. 아시아의 교역은 매우 상호적으로 이루어져 중국인은 원하는 향신료를 얻기 위해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었음. 15세기에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원정을 시작.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도착하기 전인 1400년대부터 이미 중국은 정화장군이 이끄는 원정대를 서쪽으로 보냄. 이 원정대의 첫 항해에는 62척의 중국 범선과 225척의 지원선, 2만 7000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 함. 정화가 탄 범선은 놀라운 기술이었음. 범선의 길이가 130미터가 넘고 폭이 60미터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음. 돛은 이물에서 고물까지 9개가 있었음. 이에 비하면 인도로 항해했던 포르투갈의 카라벨은 길이가 30미터 미만이었음. 정화는 사상 최대의 함대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음. 그렇다면 또 한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음. 중국이 이미 향신료를 구할 수 있던 상황에서 이 항해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대체로 명나라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선전용 원정이라 여겨짐. 중국인은 원정대가 정박했던 모든 항구에서 접한 상품에 대해 기록. 중국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지도와 항해기록이 실려 있었음. 정화는 일곱번의 원정으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동쪽으로는 향신료 제도에 이르기까지 인도양 전역을 돌아다님.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기린을 구해 황제에게 바치기도 했음. 중국의 궁정 사람들에게는 분명 전례없는 흥미진진한 사건이었을 것임. 정화는 해외원정을 지휘하는 동안 사자, 낙타, 타조, 얼룩말, 코뿔소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야생동물도 중국으로 데려옴. 정화의 원정으로 중국은 인도양에서 향신료를 비롯한 물품의 교역로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임.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음. 정화의 성공은 당시 성리학적 정치제도로 전환중이던 명나라 조정에 문제를 일으킴. 성리학적 정치제도는 내치를 중요시하면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이방인과 야만인을 상대한다는 것. 이처럼 거대한 사상의 변화로 중국의 해상활동이 중단됨.
- 19세기에 향신료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감. 네덜란드는 몰루카 제도의 주요 향신료를 지배했고, 영국은 인도와 인도의 페퍼교역을 장악했으며, 프랑스는 클로브 산업을 지매. 미국은 동남아 페퍼를 동과 서에 공급. 칠리페퍼는 계속해서 동양으로, 동남아와 남아시아로 전파되면서 지역 주민의 식습관에 꾸준히 영향을 미침. 19세기에 주목해야 할 사건은 육로와 해로를 통한 운송수단이 개선되었다는 점. 증기선의 발달로 향신료를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실어나를 수 있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해외를 여행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요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됨. 토머스 쿡 여행사 같은 새로운 사업이 등장한 덕에 부유층뿐 아니라 부유층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들이 세계 곳곳의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됨. 땅 위에서는 증기기관차가 개발되면서 드넓은 철도 시스템이 생겨나 여러 대륙의 사람드을 이어주었으며 배로 도착한 여행객을 내륙으로 실어나름. 부유층에게 향신료는 더 이상 이국적 음식이 아니었음. 향신료는 이제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상품이 됨
- 고추는 포르투갈 무역선에 실려 1540년대 마카오를 비롯한 중국의 무역항에 도착. 1543년에 포르투갈 상인이 다시 고추를 일본 규슈의 나가시키로, 1552년에는 예수회 신부인 포르투갈인 발다자르 가고 등이 오이타 현의 나카쓰 등지로 가져감. 이렇게 규슈의 동서 무역항에 도착한 고추는 일본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쓰시마를 거쳐 오늘날의 부산인 동래왜관에 전해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고추는 이미 경상도 일대까지 퍼짐. 하지만 조선의 중부지역 사람들이나 나가사키와 나카쓰에서 먼 일본 혼슈 지역 사람들은 고추를 모름. 그래서 한양 사람들은 임진왜란 중에 남쪽에서 왜군과 함께 고추가 올라왔다고 생각했고, 혼슈 사람들은 전쟁에 패하고 귀국한 자신들이 한반도에서 고추를 가져왔다고 믿음. 고추를 처음 접한 조선 사람들은 이 지독하게 매운 식물을 크게 환영하지 않음. 고추가 들어오기 전에도 한반도에는 매운 맛을 내는 달래, 마늘, 파, 생강, 천초 등이 있었기 때문. 고기나 생선의 비린맛을 없앨 때는 천초를 썼고, 부자들은 후추를 구해 사용. 그런데 천초는 사람이 직접 채집해야 했고, 후추는 한반도에서 생산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값이 비쌌음. 이에 비해 고추는 한반도의 남부지역에서 재배가 잘 되었음. 천초와 달리 고추는 재배가 가능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재배지가 점점 퍼짐. 18세기에 이르면 고추가 천초와 후추를 대신하여 매운맛을 내는 으뜸 재료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 천초가루로 만들던 천초장이 고추장으로 바뀜. 매운탕도 등장. 고춧가루는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주었음. 고춧잎으로 장아찌를 담글 정도로 이용법도 다양해짐.
- 20세기 100년 동안 한국인의 식탁에는 날이 갈수록 고추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뿐 아니라 그 품종도 다양해졌고 매운 정도도 그 전에 비해 훨씬 강해짐.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식재료의 신선도와 다양한 조리법을 매운 맛의 고춧가루로 덮어 버리는 결과를 만들기도 했음. 더욱이 70년대의 외식업의 성장은 한국 음식의 매운맛을 더욱 강화. 심지어 멕시코의 핫소스를 응용한 새로운 외식업이 소비자의 입맛을 자극하면서 20세기 말에는 새로운 매운맛의 시대가 열림. 돌이켜보면 식민지 시기 의학자들이 제기했던 고추의 다량 식용문제는 오늘날 한국음식에서 가장 크게 개선해야 할 문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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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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