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1

인문 2014. 10. 2. 17:18

 


이미지 인문학. 1

저자
진중권 지음
출판사
천년의상상 | 2014-06-0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진중권의 이미지 인문학 프로젝트디지털 이미지 속에 감추어진 섬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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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철학은 진지를 정신과 실재의 일치로 규정. 하지만 일치해야 할 정신과 실재는 성격이 다름. 즉 자연은 연속적이나 숫자는 단절적임. 따라서 수를 자연에 들이대면 자연은 수와 수 사이의 빈틈으로 빠져나오게 됨. 17세기의 과학자들이 자연의 수학화를 시도했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가 바로 이것임. 자연을 인식하려면 먼저 이 연속과 불연속의 모순부터 극복해야 함. 이 '근대의 패러독스'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손으로 해결된다. 그들은 미적분으로 숫자들 사이의 간극을 채움으로써 자연의 모든 것을 형식화할 수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전지하고 전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이론적 가능성일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미분방정식은 곧 현실에는 응용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실생활에서 해결이 필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너무 복잡하여 인간의 계산능력으로는 풀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아직 지식을 권력으로 전화할 수 없었다. 전지하나 전능하지는 못한 이 답답한 상태가 해결되려면 계산기가 필요했다. 17세기에 계산기 제작붐이 일어난 것은 이와 관련되리라. 라이프니츠 자신도 1670년경부터 모두 다섯개의 모델을 고안한 바 있다. 적어도 계산이라는 면에서 기계는 인간보다 우월하다. 17세기의 계산기들은 모두 십진법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당시 라이프니츠는 기계적 계산에 적합한 언어는 이진코드라는 인식을 이미 갖고 있었음. 하지만 이진법에 기초한 계산이라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기까지는 230여년을 더 기다려야 했음. 38년 독일의 공학자 콘라드 추제는 디지털 원리로 작동하는 계산기 Z1을 인류 최초로 제작함. 이진코드로 짧은 시간에 무수히 많은 연산을 수행하는 컴퓨터와 더불어 17세기 이후 그저 이론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자연의 정복이 비로소 실천적 가능성으로 전화됨
- 고대인의 상상력이 주술적 상상력이라면 현대인의 상상력은 기술적 상상력임. 인간이 세계를 표상하는 상징형식의 변화를 플루서는 이렇게 요약함. "먼저 인간은 생활세계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그것을 상상한다. 이어서 그는 상상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그것을 기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선형적 문자로 쓰인 비판으로부터 물러나 그것을 분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상상력에 힘입어 그 분석을 통해 얻은 합성 이미지를 투사한다."
- 오늘날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미디어를 통해 매개된 것.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남이 본 것을 보고, 남이 들은 것을 듣는다. 반면 미디어에 매개되지 않은 체험은 대부분 사회적 의미가 없는 사소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귄터 안더스는 이 매개된 체험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사실이라 부르는 것의 어원은 만들어진 것(faktum)이라는 라틴어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우리가 사실로 알고 있는 것이 실은 이미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 디지털 가상이 아날로그 세계를 그대로 베끼는 것은 적어도 한가지 장점을 갖는다. 인터페이스에 관한 별도 학습 없이도 대중이 운영체계를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디지털 기기의 인터페이스는 아날로그 현실과 디지털 가상이 봉합선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임. 디지털 대중도 전자책의 책장을 넘길 때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고 싶어함. 그래서 디지털 문화는 탈육체화에서 재육체화로, 비물질화에서 재물질화로 나아가고 있음. 산업혁명의 인터페이스는 기계를 상수로 놓고 인간을 변수로 간주해 인간을 기계에 꿰맞추려는 경향이 있었음. 그때 인간은 기계를 지향했음.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을 지배했던 무기물의 미학, 즉 추상과 몽타주는 그런 기계화의 예술적 반영이리라. 반면 정보혁명의 인터페이스는 인간을 상수로 놓고 기계를 변수로 놓는다. 여기서 디지털 가상마저도 아날로그 현실과 똑같이 디자인하려는, 이른바 디지로그의 복고적 경향이 발생한다. 오늘날 예술에서 유기체의 미학이 부활하는 것은 이런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대중의 의식에 일어나는 변화다. 그것이 가상현실이든 증강현실이든, 오늘날의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가상과 현실을 봉합선 없이 중첩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런 인터페이스에 이미 익숙한 대중은 가짜마저 진짜처럼 대하는 파타피지컬한 태도를 자연스레 갖게 된다. 디지털 대중은 가상과 현실, 관념과 실재의 구별을 괄호 안에 집어넣어버리는 현상학적 판단중지, 즉 존재론적 중립의 태도를 취하려 한다. 이것이 디지털 대중의 새로운 세계감정이다.
-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에 따르면 미디어의 발전은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가 공존하면서 상대의 전략을 차용하는 식으로 이루어짐. 이를 재매개라 부름. 이를테면 윈도우가 아날로그의 은유(오피스, 폴더, 파일, 휴지통)를 사용하는 것은 과도기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미디어의 발전에서 쉽게 발견되는 일반적 현상이라는 것. 칼라TV의 중계과정에서 자연스레 발생한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방송이라는 올드미디어가 게임이라는 뉴미디어 전략을 차용한 재매개 현상이라는 것. 중계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채팅창 혹은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시청자 견해가 올라왔음. 네티즌들은 방송으로 지켜본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촬영팀에게 전달되었음. 이를테면 광화문에서 시민들을 인터뷰하다가 "시위대가 사직터너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려 한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방송팀은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감. 카메라로 비친 영상을 보고, 지금 도로에 스티로폼으로 연단을 쌓는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봐달라고 구체적 지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음.
- 방송이 게임의 포맷을 차용했따는 사실의 바탕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음. 기실 방송의 보도는 진지한 현실에 관한 것이고 게임은 허구속에서 이루어지는 놀이일 뿐이다. 하지만 촛불집회 현장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정치와 오락을 가르던 뚜렷한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 현장에서는 불과 100미터 거리를 두고 치열한 투쟁과 즐거운 놀이가 공존했다. 촛불시위 속에서 저개발의 정치, 즉 투쟁의 정치는 과개발의 정치, 즉 놀이의 정치와 하나가 되었다. 서사학과 유희학은 앞으로 정치학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분야가 될 것이다. 저개발의 정치에서 과개발의 정치로 이행하는 데는 당연히 물질적 근거가 바탕에 깔려 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오면서 노동과 오락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정보사회에서는 생산의 수단과 여가의 수단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중은 컴퓨터로 노동하고 컴퓨터로 놀이한다. 노동과 여가가 시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것이 종종 노동을 감시해야 할 자본에는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노동자들이 클릭 한번에 근무모드에서 오락모드로 넘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종종 외부로 연결되는 인터넷을 제한하거나 아예 차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구술문화에서는 로고스보다는 뮈토스가 중요. 거기에는 객관적 기술보다는 주관적 상상이, 논증의 정합성보다는 플롯의 개연성이, 이성적 비판보다는 정서적 공감이 더 잘 어울림. 구술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태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제공하는 능력이 아니라 현실의 복잡한 사태를 영웅적 스토리로 압축, 변환하는 능력임. 토론토 학파 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전자매체는 문자문화가 무너뜨린 공동체 의식을 복원하는 경향이 있음. 실제로 나꼼수 청취자들은 버스나 전철에서 독특한 손동작으로 같은 상상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무언의 교감을 낯선 이들과 나누곤 했음.
- 인쇄술로 무장한 문자문화는 한때 구술문화의 비논리를 비웃었음. 새로운 구술문화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무장하고 나타나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문자문화의 논리를 비웃음. 서구사회가 오랜시간에 걸쳐 비교적 탄탄한 문자문화를 형성해왔다면 한국에서는 문자문화의 역사가 매우 짧았음. 공동체적 구술문화의 전통이 강고하다는 점은 인터넷이나 SNS위에 가상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유리한 조건이 되어줌. 하지만 그것이 문자문화의 비판적 이성으로 뒷받침되지 못할 때 그 발달한 테크놀러지를 들고 1차 구술문화로 함몰하기 쉽다.
- 나꼼수는 탈정치화한 디지털 세계에서 내면에 숨은 정치적 욕망을 발견하고 끌어냈으며,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의 연대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디지털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도 보여주었음. 나아가 유저가 제작하는 콘텐츠가 신뢰도와 영향력에서 기존 언론을 능가할 수 있음을 입증했고, 기능전환으로 테크놀러지를 정치적 목적에 전유하는 탁월한 예를 제시하며 정치의식에 유희정신을 결합한 새로운 유형의 정치적 주체들을 낳았음. 나꼼수의 한계는 우리 사회의 의식이 아직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진보적 잠재성을 올바로 활용할만큼 성숙하지 못했음을 의미함
- 차별을 당하는 자들이 왜 타인을 차별하려고 할까? 이유가 있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에서 신분체 철폐에 가장 반대한 것은 외려 상민들이었음. 신분제가 철폐되면 천민을 차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 사무라이로부터 받는 차별의 수모를 견디게 해준 것은 그들이 마음놓고 차별할 수 있는 천민계층의 존재였음. 일베의 심리도 다르지 않음. 현실에서는 차별의 대상이지만 적어도 일베에서 그들은 차별의 주체가 될 수 있음. 일베의 고학력 인증 사태도 이와 관련됨. 그것은 학력으로 차별받는 이들이 차별에 항의하는 대신 타인의 고학력을 내세워 차별하는 위치에 서보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다.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회원들이 굳이 학력을 인증할 필요를 못느낄 것이다. 일베에서는 다르다. 거기서 그것은 실재계를 가리는 스크린 역할을 한다. 즉 자신을 소수 고학력 회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가 학벌사회의 루저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차별받는 현실을 잊으려고 차별하는 권력에 동승할 때 병신게임의 무정부주의적 해학은 곧바로 파시스트적 공격으로 전화하게 됨. 자신을 병신이라 부르려면 보통은 존재의 여유가 필요하다. 자신이 병신이 아니라 믿는 이들만이 자신을 병신이라 부르는 놀이를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일베회원들은 다르다. 그들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자신을 병신으로 여긴다. 그들이 자신을 병신이라 부를 때 거기에는 놀이의 여유가 아니라 실존의 절박함이 묻어 있다. 이것이 그들이 인정하기 싫은 실재계다. 이를 공격적으로 망각하려고 억지로 차별대상을 만들어보지만 그런다고 실재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반복적으로 표출되기 마련, 그래서 혐오발언을 마치 오토마톤처럼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개인의 기억은 항상적이지 않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주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기억된다. 역사라는 이름의 집단적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역사학은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보존하는 작업이 아니다. 집단의 기억을 끊임없이 재조직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이 할 일이고, 또 이제까지 해왔던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집단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과거의 기억을 다시 조직하는 것은 그리 신기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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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한국경제 이야기. 1

저자
이장규 지음
출판사
살림 | 2014-06-0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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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책소개
역대 대통령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제 정책을 썼을까?해방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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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환경뿐 아니라 정치사회 여건도 북한이 남한보다 앞섰음.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눠서 점령했으나 양쪽의 사정은 많이 달랐음. 남함은 미군의 비교적 느슨한 통치 아래 정당이 난립하고 좌우로 갈라져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반면, 북한은 소련군의 치밀한 지시아래 김일성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공산정권을 구축해 나감. 많은 부문에서 북한은 남한을 앞서 나감. 46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해 사실상의 정부가 만들어졌고, 제대로 된 군대를 창설했으며, 소련한테 들여온 탱크로 탱크부대까지 만들었음.경제운영도 북한이 한수위였음. 남한은 거주 일본인을 다 쫓아냈지만,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 900여명을 강제로 붙잡아 놓고 일을 시킴. 그들이 없으면 비료공장, 철강공장 등 주요 산업시설이 당장 멈추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 제도 개혁또한 과감하게 추진.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대부분의 산업시설을 국유화. 그리고 땅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줌. 47년 말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49년에는 통일을 전제로 한 남한의 토지개혁계획까지 수립. 실제로 이듬해 6/25 전쟁을 일으켰을 때 점령지역을 대상으로 이때 준비했던 토지개혁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었음. 북한이 신속한 체제구축을 통해 일찌감치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이뤄나갔던 반면, 남한은 극도로 혼란스러웠음. 무엇보다 이념대립이 심각했음. 북한에서는 시비의 여지없이 사회주의 체제구축이 처음부터 정해진 노선이었던 반면, 남한은 수많은 정당이 자유롭게 생겨나면서 이념적으로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치열하게 대립했음.

- 일본인이 경영하던 적산기업의 수는 크고 작은 것을 합쳐 2700여개에 달했는데, 수많은 사람이 이것들을 차지하려고 미군정청을 상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열한 로비를 벌임. 철수한 일본인 기업주와 내통해서 사실상 주인행세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음.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 고문단의 코치아래 모든 기업의 국유화 조치가 일찌감치 취해졌고, 남한에서도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음. 그러나 미군정청의 기본입장은 국유화 반대였음.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은 민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결국 미군정청은 기업활동의 활성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적산기업의 일부만 민간에게 넘기고 대부분의 주요 기업들은 중간관리인만 지정한 채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음. 골치 아픈 적산기업 처리를 자기들이 처리하지 않고 새로 수립되는 한국 정부에 넘기기로 한 것. 아무튼 미군정청이 적산기업의 처리원칙을 국유화가 아닌 민영화로 정한 것이 남한 기업 역사의 시작이었던 셈. 적산기업 못지 않은 또 다른 돈벌이는 미국이 주는 원조물자, 구호물자를 확보하는 일이었음. 밀가루, 의류, 의약품 등 생필품이 중심이었고, 기름, 석탄, 비료, 면화 등 원료도 대상이었음. 미군정청은 본국에서 보내오는 구호물자를 제대로 나눠주는 것이 큰 과제였음. 그러나 무정부시대나 다름없는 해방직후의 혼란과 부패속에 구호물자들이 필요한 곳에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했음. 상당부분이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갔고, 이것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번 사람을 구호물자 벼락부자라 했음. 미국은 여러 시도 끝에 구호물자를 교회 같은 종교단체를 통해 배급하기도 했는데, 이즈음에 교회가 급격히 난립했던 배경에는 이처럼 무상으로 배급되는 구호물자 탓도 있었음. 또 다른 굵직한 사업은 일본으로부터의 밀수였음. 당시 일본을 통치했던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의 무역행위 자체를 금지시켰으나 사실상 단속이 불가능했음. 일본 상인들은 부족한 쌀을 한국으로부터 밀수입했고, 한국쪽에서는 부산항을 통해 일제 화장품, 의약품, 기계부품 등을 물물교환으로 들여왔음. 일본과의 밀무역에 이어 다롄, 칭다오 등 중국과의 무역도 성행. 47 3월쯤부터 마카오를 통한 중계무역이 그리고 뒤이어 홍콩과의무역이 본격과되기 시작. 우리는 적산기업들이 생산했던 텅스텐, 망간 등을 수출했고, 그 돈으로 페니실린, 사카린, 시계, 생고무 등을 수입. 이처럼 무역이 돈벌이의 주축으로 활기를 띠자, 해방이전부터 무역업을 했던 화신무역의 박흥식이 선두에 나섰고, 다른 조신인 기업들도 뒤따름. 대구에서 양조장을 하던 이병철도 48년 서울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 뛰어듬

- 이승만의 경제적 관심은 오직 달러였음. 나라경제를 살리려면 달러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 부족한 생필품을 수입하는 일도, 공장을 짓는 일도, 달러 없이 되는 것은 없었기 때문. 이승만이 걸핏하면 미국과 실랑이를 벌였던 것도 바로 달러 문제에서 비롯.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 즉 환율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미국에서 얻어낼 수 잇는 달러 액수가 늘었다 줄었다 했던 것임. 원조받는 달러를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도 충돌. 이승만은 일본에서 생필품을 사다 쓰라는 미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국내에 발전소를 짓고 밀가루 공장과 비료공장들을 건설하겠다고 맞섰던 것. 원조를 통해 돈줄을 쥐고 있던 미국정부도 이승만의 이같은 고집때문에 애를 먹음. 미구긍로서는 코리아의 대통령이 영어를 잘해서 소통에는 문제가 없어 좋은데, 중요 정책들을 자기네가 시키는 대로 않고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바람에 골치를 썩임. 아무튼 이승만의 산업정책은 하루빨리 수입대체 산업을 키워서 수입을 줄이는 일이었음.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는 자급할 수 있는 제조업 기반을 키워야 한다고 이승만은 판단했음. 품질이 떨어져도 국산품 사용을 독려했고 수입은 강력히 규제. 국산품 애용과 수입품 배격은 이 시대의 중요한 범국민운동 과제였음. 따라서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자금을 부족한 물자를 수입하는 데 쓸 것이 아니라 공장 짓는데 투자하기를 바랐음.

- 농지개혁의 정치적, 정책적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 결과와 역사적 의미는 대단했음. 비록 땅값을 치른 유상몰수였다고는 하나, 왕조시대의 전통적 지주제도가 농지개혁으로 인해 일시에 해체된 것. 부작용도 상당했지만 지주제도의 해체는 한국경제의 생산구조와 분배구조 면에서 혁신적 변화를 몰고 왔음. 지주제도의 붕괴는 3년간의 처참한 전쟁을 치러내는 과정에서 더 과격하게 진행됐음. 전쟁통에 지주계급들은 피해가 컸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전쟁 인플레 탓에 토지보상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이 휴지조각이 되었기 때문. 농지개혁을 계기로 기존 농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을 기대하였으나, 애초의 의도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말았음. 지주들이 유상몰수의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은 3년 전쟁을 치르면서 엿장수들이 엿을 주고 거둬들일 정도로 그 가치가 폭락. 아무튼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공산화를 막았고, 자본주의 기틀인 사유재산제도를 공고히 다졌으며, 지주계급이 해체됨에 따라 분배구조면에서도 꾸준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음. 이것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필리핀 경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재임시절 "브라질 경제의 근본문제는 한국이 50년대에 했던 농지개혁을 아직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은 한국 농지개혁을 밖에서 보는 객관적 평가이기도 함

- 원래 5개년 계획은 장면정권의 경제관료들이 완성했지만, 발표 직전 쿠데타가 터져 사장됐던 것. 이 계획은 쿠데타로 경제 청사진 마련이 다급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음. 즉각 실무자들을 동원해서 몇군게 손질을 통해 급조한 것이 바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2~66)이었음. 박정희에게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두가지 계획을 성사시키는 데 필요했음. 첫째, 집권 6개월만에 미국 워싱턴 방무을 앞두고 있는데, 워싱턴에 가서 원조와 차관을 요청할 사업계획서가 필요했음. 둘째, 경제를 모르는 군사정권이었기 때문에 경제를 꾸릴 목표와 계획표가 있어야 했음. 그러나 두가지 모두 박정희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음. 박정희는 미정부에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열심히 설명했으나 워싱턴 당국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음. 호주머니 생각은 않고 사고싶은 물건들만 잔뜩 열거한 쇼핑 리스트라며 무시. 의욕만 앞세웠을 뿐, 내용도 조잡하고 방향도 틀렸다는 것. 미국은 애당초 한국의 독자적 경제계획에 부정적이었음. 미국은 5년간 평균 목표성장률 7.1%가 실천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숫자이며, 한국정부로서는 무리한 성장을 추구할 게 아니라 물가안정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 이는 세계은행도 마찬가지였음. 경제쪽에서 박정희에서 첫 시련과 좌절을 안겨준 것은 외자조달이었음. 자금이 없는 상태에서는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큰소리쳤던 대규모 공장건설은 불가능했음. 기업도 정부도 돈이 없었음. 몇푼 안되는 외환보유고만 축내고 있었음. 당시 정부 외환보유고는 2억달러 안팎.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첫해의 성장률이 흉작까지 겹쳐 2.2%에 그치자 박정희의 좌절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음. 경제살리기를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는데,초장부터 실패를 면치 못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음. 그로서는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음. 이후 박정희는 23개 부분에 걸친 220개 사업을 일일이 챙김. 브리핑 차트를 집무실에 걸어놓고 밤낮없이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였으나 그런다고 될 일도 아니었음. 계획자체도 엉성한데다 돈도 없으니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음. 결국 미국의 종용을 받아 목표성장률을 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실시 1년만에 계획을 수정.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소득은 성공이 아니라 쓰라린 실패경험이었음. 박정희는 경제개발 전략의 요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수많은 조절을 통해 학습했고, 나름대로 해법을 찾기 위해 골몰. 무엇보다 사업이든 계획이든 자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엇하나 되는 일이 없음을 절실히 깨달음. 투철한 사명감과 혁명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추진하면 안될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그게 아니었음.

- 박정희 경제모델은 정형화할 수 없는 특유의 리더십과 환경적 요인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음. 정치적 화경, 그리고 박정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안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 그는 반대에 부딪히면 독재의 힘으로 밀어붙였고, 전문관료들이 소신껏 정책을 펼 수 있도록 정치적 외풍을 차단시킴. 정책 토론 과정에는 민주적 분위기를 보장해 주는가하면, 시간을 끌면서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자신이 결단함. 흉내낼 수 없는 리더십이었음.

- 정권말기를 제외하면 수출지상주의는 박정희 정권 내 경제정책의 핵심이요, 중추적 역할을 함.주무부 장관도 추진력을 으뜸으로 따져서 앉침. 심복이었던 국세청장 이낙선을 상공부 장관에 보낸 것도 세금을 걷듯이 수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밀어 붙이라는 의도였음. 관치금융, 정책금융의 대표선수가 수출금융이었음. 당시 일반 시중금리는 30%였는데, 수출금융 금리는 절반 이하로 특혜를 주었음. 한국의 은행들은 수출지원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음. 수출 뒤치다꺼리를 하다보니 금융시장이 왜곡되는 등 부작용도 많았음.

-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는 정권내내 지속되다가 막판에 와서야 제동이 걸림. 갖가지 부작용과 폐단때문이었음. 수출은 한국경제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돌파구였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인플레와 집값폭등 등 심각한 부작용을 만들어냄. 수출기업은 경제의 1등공신이었으나, 불항에 빠져드니 부실의 원흉이 됨. 더구나 싼 금리를 악용해서 수출은 뒷전이고 그 돈을 빼돌려 돈놀이를 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기업이 생기는 등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됨. 결국 2차 석유파동과 세계적 불황 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수출지상주의를 수정하기 시작. 16년 동안이나 지속했던 금융특혜를 대폭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하는 이른바 안정화 정책으로 노선을 전환

- 베트남 파병이후 보잘 것 없던 수출은 내용이나 규모면에서 모두 달라짐. 인력진출이 최고에 달했던 69년 해외진출 인력은 15500명이 넘었고, 베트남 진출기업도 최고 79개업체에 달함. 한진 그룹은 당시 베트남에 미군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업을 발전시켜 항공산업까지 뛰어들면서 오늘의 대한항공으로 발전. 훗날 중동에서 소위 대박을 터뜨린 해외건설도 우물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던 국내 건설업체들이 베트남 전쟁터에서 기초실력을 닦은 덕택이었음. 그전 같으면 국제입찰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 100만 달러만 수출해도 주목받던 시절,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수출금액의 단위도 달라지기 시작. 달러뿐 아니라 군인과 해외공사에 파견되는 노동자의 봉급 그리고 기업의 현지 사업수익 등을 모두 합치면 베트남 전잰중에 벌어들인 돈은 10억 달러가 넘었음. 현금반입, 군수품 편법 반입 등 비공식적 금액을 포함하면 한국의 경제적 소득은 공식 집계보다 훨씬 컸음. 이 같은 달러 벌이는 이후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데 주요 재원이 됨. 박정희 정권이 올린 또 다른 소득은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껄끄러웠던 미국과의 관계도 호전되었다는 점. 미국이 박정권에 대해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수출 또한 잘되는 바람에 국제 신인도는 부쩍 상승했으며, 돈 빌리기도 수월해지고,적용되는 금리도 한결 낮아짐

- 정부직제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운용임. 포철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 같은 국가적 프로젝트는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 그러나 대부분 주무부 장관들에게 믿고 맡기고 정기적 회의를 통해 전체 동향을 챙김. 월간경제동향보고와 수출진흥 확대회의가 대표적 사례.65 1월부터 본격화된 경제동향 보고회의는 대통령 주재로 매월 빠짐없이 열렸고, 수출진흥확대회의도 마찬가지였음. 이 두 회의는 박정희가 불행한 최후를 맞을 때까지 14년 동안 계속됨. 모두 1400회 이상의 회의 직접 주재. 모든 주요 현안은 대통령 앞에서 직접 보고, 논의 되었고, 난관에 봉착한 문제는 즉석에서 대통령의 판단과 결심으로 결론이 났음. 부처들의 의견이 달라 정책결정이 유보되거나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음. 아무리 어려운 일도 두 회의에서 결판이 났던 것. 이것이 박정희 주식회사의 의사결정방식의 요체였음.

- 훌륭한 출발을 보였던 새마을 운동은 유신정치와 결합하면서 당초의 순수성이나 자발성은 크게 훼손당했음. 이런 이유로 외국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훨씬 평가절하됨. 여기에 전두환의 잘못도 가세. 그렇지 않아도 변질된 새마을운동 사업을 전경환 손에 맡기는 바람에 기능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전히 망해버림. 본연의 새마을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전경환 개인의 놀이마당이자 대통령 친인척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 북한의 위협은 군출신 대통령 박정희에게는 큰 충격을 줌. 250만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전 국민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68년부터 시작. 경부고속도로도 서울-수원구간은 중앙분리대를 없애 유사시 전투기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 박정희의 산업혁명 방향은 중반을 지나면서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다시 말해 무기공장을 집중적으로 건설하는 것. 단순한 산업구조조정 차원의 변화가 아니었음. 한국경제의 근간이 된 중화학 공업의 본격적인 추진이 경제적 동기보다 북한의 위협이 가져다준 결과물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음. 유신체제 또한 한국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 당시 정치환경과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간의 관계는 매우 주목할만함. 박정희가 몰아붙였던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은 민주적 토의나 의견수렴 절차를 상식적으로 밟았다면 도저히 추진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 유신체제가 아니었다면 짧은 시간안에 그 같은 대규모 투자는 불가능했을 것임.그러나 극심한 정치, 사회적 저항을 초래했다든지, 무리한 과잉투자로 엄청난 부작용을 유발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신체제 때문에 빚어진 부정적 측면 또한 심각했음. 따라서 중화학 공업 발전이 유신체제 덕분이었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임. 중화학 공업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비용이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 없이 결과만 놓고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돌이켜보면 북한의 위협, 중화학공업의 육성, 유신체제의 탄생은 서로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음. 어떻든 간에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 경제성을 무시한 과감한 중화학 투자를 낳았고, 비판이나 반대를 봉쇄했던 권위주의적 정치환경 또한 이 같은 시도에 속도를 더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 지나친 정책금융으로 시장원리를 무시하는 바람에 부작용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비판과 부작용에 아랑곳 없이 정부의 강력한 지원아래 기업의 중화학공업 투자는 봇물을 이뤘고, 결과적으로 수출을 비롯한 국내산업 구조가 강제적으로 바뀌었음. 70년대 중반, 한때는 중화학 공업 제품이 수출증가의 새로운 견인차로 박수를 받기까지했음.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했던 것이 세월이 흐른 뒤 한국경제에 결정적으로 효자노릇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78년에 접어들면서 2차 석유파동과 세계적인 불황이 닥치자 그동안의 과잉투자와 잘못된 투자가 드디어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경제적인 면에서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심각한 파국을 초래. 사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훨씬 선배였음. 60년대 중반부터 주체사상 아래 자체 무기생산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 북한판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었음. 결국 그것이 실패하면서 70년대부터 남한경제가 북한경제를 추월하기 시작.

- 박정희 경제는 정권말기에 이르러 급기야 휘청거리기 시작. 그런데 희한하게도 위기도래 직전은77, 뜻밖의 반짝 호황을 맞게 됨. 중동 해외건설로 벌어들이는 오일달러가 안겨준 마지막 축복이었음. 중동 해외건설 붐은 베트남 전쟁에 이은 두번째 대박이었음.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한국기업들의 국제화가 본격화되었고,특히 국내기업들이 해외건설에 대거 진출했는데, 베트남 철수가 결정되자 이들이 갈 곳을 잃어 심각한 고민에 빠짐. 그동안 키웠던 해외건설 전문인력과 비싼 장비들을 소화할 방법이 없었음. 그러던 판에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국가에 건설붐이 일면서 안성맞춤의 돌파구를 찾은 것. 73년부터 74년 사이에 터진 1차 석유파동은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한국경제에 큰 타격을 안겨주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동 산유국들이 벌어들인 오일달러가 한국의 건설사들에게 살길을 터줌. 제조회사들의 수출만이 달러를 벌어들이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건설회사가 외국에 가서 건설공사하는 일이 새로운 달러박스로 등장한 것. 76년과 77년 사이 수출이 75억불에서 대망의 100억불을 돌파했고, 이중 중동 해외건설 수주는 25억불에서 35억불로 껑충 뛰었으며, 경제성장률은 각각 13% 14%를 기록.

- 그러나 중동 해외건설로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에 대해 모두 좋아하기만 했을 뿐, 경제가 너무 잘돼서 일어나는 무서운 부작용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음. 하지만 2차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우리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와 부동산 투기, 수출감소에 따른 재고누적 그리고 국제수지 악화라는 심각한 파국에 처함. 결과적으로 77년 반짝 호황은 박정의 정권에 독화살이 되어 돌아온 셈. 과잉투자로 인해 중화학 공업은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수출기업들은 줄줄이 도산. 여기에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조세저항으로 민심도 흉흉했음. 정치는 차치하고, 경제쪽에서도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심상찮은 조짐이 일고 있었던 셈.

- 박정희 정권 말기에 추진된 경제안정화 정채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큼 획기적이었음.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던 것일까. 이 같은 전환은 다름 아닌 박정희 시대가 키워 온 직업 관료들에 의해 시작, 추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함. 박정희 경제에 앞장서 왔던 그들이 박정희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안 제시와 새로운 처방을 주장하고 나선 것.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하고 권력에 약한 관료집단이 도대체 어떻게 위험을 무릅쓰고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를 겁없이 주도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박정희 키즈의 반란이었음. 7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경제기획원의 핵심관료들 사이에는 박정희식 경제정책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었음. 반란의 주모자격이었던 강경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음.

"78년 당시 경제관료들은 어떻게 하면 물가안정을 이루고 국제수지 흑자를 내는 경제를 만들 수 있는가 염원했다. .... 독일, 일본, 대만이 성공사례였다. 1차 석유파동 때 우리는 경기부양에 역점을 두었는데, 일본과 대만은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래서 우리도 79 2차 석유파동 때는 불황을 감수하더라도 물가안정 위주의 정책을 펴고자 했던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나. 그러나 공무원은 물론이고, 경제학자나 연구기관, 심지어는 언론조차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리는 정책건의나 비판을 대놓고 하기 어려운 때였음. 이런 상황에서 경제기획원은 차관보 강경식, 기획국장 김재익 등을 중심으로 78년부터 안정화 정책에 시동을 걸기 시작. 이들의 노력을 정책으로 만드는데 지지하고 방어해준 최후의 보루는 뒤늦게 부총리가 된 신현확뿐이었음.경제기획원이 나서서 외롭게 안정화 계획에 불을 지피고 KDI의 경제학자들이 힘을 보태는 과정에는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어떠한 건의나 경고도 없었음. 다시 말해 선진국 전문가들이 한국경제에 대한 경고등을 켜기 전에 한국의 경제관료들이 스스로 빨간 불을 켜고 비상을 건 셈. 실물경제를 주관하는 상공부와 금융기관을 관장하는 재무무, 그 밖의 농림부, 내무부 등 대부분의 부처들은 고통감수를 요구하는 안정화 정책에 모두 반대했음.

-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장관, 경제부총리, 경제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한 남덕우는 박정의의 최대장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탁월한 용병술이라고 말함. 집권초기의 혼란을 거치고 나름대로 경제정책의 틀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감을 잡은 박정희는, 남덕우의 말대로 특유의 용병술을 통해 사람을 키우고 적재적소에 활용. 박정희는 상대가 누구든 언제나 듣는 입장을 취함. 보고를 듣는 것은 공부의 기회이자, 동시에 보고자의 됨됨이를 살필 기회기도 했음. 집권 초기에는 자신의 심복인 군인들에게 요직을 나누어주었으나, 이내 한계를 깨닫고 직업관료를 중심으로 학자들을 과감하게 영입. 이병철을 비롯한 부정축재 처벌대상인 재벌 총수들에게 지도를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음. 현안이 생길 때마다 전담반을 만들고, 거기서 내린 결론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나감. 신문에 게재되는 팔럼이나 기고를 유심히 보고 발탁인사에 참고하기도 함. 남덕우를 재무장관에, 김만제를 KDI원장에 기용할 때도 그들이 쓴 신문칼럼을 주목했던 것. 박정희는 한번 믿고 맡기면 오래 중용했음. 경제 쪽은 더욱 신임. 그는 사람보는 눈이 있었음. 발탁된 인물이었던 장기영, 김학렬, 김정렴,남덕우, 김용환, 김만제 등은 박정희 경제의 기둥역할을 해냄. 그들이 없었다면 박정희 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임

- 믿고 맡기는 인사도 경제가 잘 돌아갈 때 이야기힘. 정권말기에 해당한느 78년 선거패배로 단행한 인사에서는 전에 없이 흔들렸음. 신임했던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을 모두 내보내고 신현확에게 지휘봉을 맡길즈음 박정희는 그전 같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함. 탁월했던 용병술이 정상궤도를 벗어난 것은 비단 경제분야뿐만 아니었음. 경호실작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정부장 김재규를 측근 3인방으로 임명하면서부터 심각한 사달이 나기 시작. 자타가 인정했던 인사의 달인이 결국 자신이 임명한 정보부장의 총탄에 최후를 맞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 박정희 시대가 한국의 경제발전 기틀을 마련한 것은 사실이나, 정권말기의 부작용과 어려움은 매우 심각했음.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 경제의 막판 위기상황을 어렵사리 극복해냈고, 한국경제를 여러면에서 한단계 끌어올림. 건국 이후 계속되던 만성 인플레를 근절시켰을 뿐 아니라 고도성장 시대를 부활시켰고, 여기에 더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국제수지 흑자시대를 열음. 처름으로 물가안정, 경제성장, 국제수지 흑자라는 소위 세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대통령이었음. 사실 경제성장도 잘하고, 물가도 안정시키고, 국제수지도 흑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불가능한 것으려 여겨 왔었음. 그런 것을 전두환 정권이 이뤄낸 것이다. 아무도 전정권이 세마리 토끼를 잡아낼 것으로 기대한 사람은 없었음. 원래 전두환은 경제에 문외한이었음. 세마리 토끼가 무얼 뜻하는지도 몰랐던 인물. 하지마 그는 집권초기부터 철권통치로 비판과 저항을 봉쇄한 가운데 물가안정 정책에 총력을 기울였고, 유능한 전문인력을 기용했으며, 본인 스스로 열심히 경제공부를 해나감.

- 전두환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운이 좋은 대통령이기도 함. 재임 중반에 국제 원유값이 떨어진 것을 비롯해 국제금리와 달러값이 동반하락하는 소위 3저 호황이 전두환 경제를 결정적으로 도왔음. 하지만 대외여건 덕을 보았다고 해서 그의 치적을 과소평가할 순 없음. 3저 호황은 세계 모든 나라가 겪었지만 유독 한국경제가 3저 현상을 잘 활용해서 좋은 성과를 만들었기 때문.물가안정은 원유값 하락에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이전부터 전정권이 추진했던 강력한 긴축정책 등 지독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음. 또한 개방정책이나 투자확대 정책 등을 미리미리 준비했었기 때문에 타이밍을 잃지 않고 대외여건 호전의 상승물결에 올라탈 수 있었음. 예산동결 같은 파격적 조치는 일종의 정치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정부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결단을 내리으로써 재정안정화의 기틀을 마련. 지금까지도 한국의 재정상태가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것은 당시의 재정혁신 덕택임. 산업쪽에서는 전임정권에서 넘어온 중화학 공업 과잉투자와 부실문제를 해결했고, 전자교환기 도입 등을 시작으로 오늘의 통신 혁명 인프라를 구축. 오늘날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기본터전이 이때 마련된 것. 재벌의 경제력 집중문제에 대처히기 위한 공정거래제도도 정권 초기에 도입되었는데, 기업들이 반대할 겨를도 없이 신군부가 후다닥 결정함. 박정희 시대의 연장선에서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들이었음. 이처럼 전두환 시대의 한국경제는 여러 방면에서 도약적 발전을 기록했고, 전두환은 스스로 경제대통령임을 자임했음. 그러나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실패하는 비판을 면키 어려운 것이 노동정책이었음. 그는 집권이후 줄곧 노조에 대한 탄압을 강화. 3저호황으로 노동정책을 정상화할 호기를 맞았으나, 전두환은 이때에도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음. 그는 노조의 활성화를 사회불안 요인으로 간주했던 애당초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함. 결국 80년대의 잘못된 노동정책이 후일 노동시장에서 두고두고 심각한 왜곡현상을 초래하는 화근으로 작용

- 돌이켜보면 물가상승률 목표를 2~3%로 책정한 것 자체가 일종의 몽상이었음. 어쩌면 김재익의 몽상을 신뢰한 사람은 전두환 혼자뿐이었을지도 모름. 박정희 경제가 자신의 확고한 경제관으로 추진됐다고 한다면, 전두환 경제는 경제선생이나 참모인 김재익에 대한 전두환의 절대 신뢰에 의해 소기의 목적을 극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셈. 아무튼 고통을 감내하는 물가안정 우선정책은 80년부터 시작해 무려 4년간 지속.불황의 터널이 그만큼 길고 지루했다는 이야기. 그렇다고 전정권이 경기부양을 전혀 외면한 것은 아님. 여러가지 부양책을 동원.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물가안정 기반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된 부양책이었음. 경제 전체의 체질개선을 위해 구조조정을 줄기차게 해낸 것은 건국 이후 처음이었음. 박정희 경제에 대한 대대적 수선기간이었던 셈

- 돌이켜보면 전두환 시대의 경제정책은 박정권의 경제를 계승하면서도 잘못된 것을 고치고 업그레이드시킨 정책들이 많았음. 경제운영을 시장원리에 더 충실하게 했다던지, 금융자율화를 더 촉진시켰다던지, 공기업들을 경쟁체제로 바꿨다던지, 공정거래제도를 처음 도입해서 재벌규제를 본격화했다던지, 정부의 만성적 재정적자를 청산했다던지, 수입규제를 과감하게 텄다던지 등 여러 방면에서 한국경제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책을 끌어갔다고 평가할 수 있음. 그러나 전두환 시대에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서 잘했다고만은 할 수 없음. 물가안정에 성공한 치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빚어졌던 부작용도 적지 않았음. 예산동결 같은 파격적 조치로 정부의 씀씀이를 줄이고 재정을 건전화시킨 공로도 크지만, 그 바람에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그 뒷감당을 다음 정부에 넘긴 부정적 측면도 없지 않음. 예컨대 세출예산 동결에 따라 항만이나 도로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싹둑 잘라버리는 바람에 중요한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할 수 없었음. 결국 부작용과 부담은 다음정권이 뒤집어 씀. 도로나 항만시설의 건설을 소홀히 한 결과 유통비용이 크게 오르는 물류대란을 야기했던 것. 가장 잘못된 것은 노동정책이었음. 다른 정책이 대부분 앞을 향해 나아갔다면, 유독 노동정책만은 뒷걸음질쳤음.경제가 좋아지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소홀했던 노동자 권익보호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을 펴는게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은 오히려 박정희 시대보다도 더 강압적인 정책을 폈던 것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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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이션

저자
살마 로벨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4-06-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뜻대로 안 되던 일, 얻기 힘들었던 사람 마음, 극복하기 어려운...
가격비교

- 인간의 정신은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느낌과 가치판단은 주위환경으로부터 미묘한 영향을 받을 수 있음. 겉보기에는 서로 무관하지만, 보고 만지며 신체감각을 통해 처리하는 것들은 대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끼침. 이 책에서 탐구하고 있는 신생 심리학 분야의 체화된 인지이론의 핵심은, 따뜻하거나 차가운 물체를 만지는 것 같은 감각운동체험과 인간이 실행하는 행동, 판단, 감정, 의사결정 사이에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 전통적 심리학의 역사를 보면 인간 머리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람들은 왜 행동을 할 때 실수를 하며 왜 선택을 하는가에 관심을 가져왔음. 대개 심리학자들은 공포, 욕망, 기억, 감정을 연구함. 그런데 인간이 외부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맥락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공개적으로 경쟁하는 상황(구직, 오디션, 시험, 스포츠)에서는, 참가자들의 머리 바깥에 있는 환경 또한 성공이나 실패의 이유에 영향을 미침. 예를 들면 오디션의 경우, 무대조명이 발산하는 열기나 커튼 색깔이 도전자의 당락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 또한 무심코 걸려 이쓴 브랜드 로고의 밝기가 경쟁자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
- 차가운 느낌이나 따뜻한 느낌은 방의 온도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상태에 의해서도 결정됨. 만약 사람이 외로움을 느낀다면, 실제로 사회활동에서 배제된다면, 또는 자신의 견해, 선택, 의견을 공유하지 않는 타인들과 같은 방에 있다면, 실제로 인간의 신체적, 심리적, 체험양상은 변화함. 심지어 인간은 다른 사람들 또는 어떤 집단으로부터 단순히 멀리 떨어져 서 있거나 앉아 있기만 해도 고립감을 느낌. 이때 방의 온도는 차갑게 느껴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만약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또한 자신의 견해, 선호도, 관점을 고유하는 이들과 함께 방에 있거나 그저 누군과와 가까이 앉아 있기만 해도, 방이 따뜻하다고 느낌. 이같은 연구결과는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암시함. 교사, 교육자, 부모가 아이들이 여러 다양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때 특히 중요. 예를 들어 어린이와 청소년은 때때로 학교에서 외로움이나 고립감을 느끼는데, 그것은 때로 적응에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음. 이제 당신은 따뜻한 온도가 대인관계를 통한 상호작용에 긍정적 효과를 끼친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기가 따돌림당하고 배제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도울 수 있음. 아울러 다른 친구들이 자신에게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것도 가능. 가령 실내 온도를 높이거나 아이들에게 스웨터를 입으라고 권하는 것 같은 간단한 행동도 원활한 대인관계 분위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됨. 또한 아이들이 함께 핫초코나 따뜻한 점심을 나누어 먹어도 분위기 개선에 도움이 됨.
- 인간은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행위를 통해 신뢰와 협력을 늘려나감. 접촉으로 인해 위협감을 줄이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증대시키며 안심함. 불안에 빠진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를 접촉하거나 손을 잡으면 심리적으로 도움을 받음. 환자가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높은 진단검사를 기다리며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의료서비스 제공자가 환자의 이마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려주면 불안이 줄어들 수 있음. 직장일이 유난히 힘든 날이라면, 근육이 특별히 뻣뻣하거나 불안한 기분이 들지 않더라도 마사지를 받는 것이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됨
- 비밀을 계속 간직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부담을 느끼며 끊임없이 어깨에 무거운 짐을 얹고 나르는 것과 유사한 감각을 체험함. 진짜 성적 취향, 대단히 충격적인 경험, 외도, 질병과 같은 중대하고 커다란 비밀은 무거운 물건이 신체에 부담을 주는 것처럼 실제로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함.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고 심각한 파문을 몰고 올 수 있는 비밀을 드러내지 않고도 부담을 완화시키려면 일기를 기록하거나 전문치료사와 상담을 하거나, 믿을만한 가까운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됨
- 수많은 연구결과를 보면, 여성들의 수학과목 시험에 대한 수행능력은 실험참가자들이 단순히 시험을 보기전 답안지에 성별을 기입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악화됨. 미국에 사는 흑인이 시험을 치르기 시작할 때 답안지에 자신의 인종을 기입하라고 요구받았을 때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나타남. 즉 수학과목 시험에서의 수행능력이 크게 감소한 것. 이 같은 연구는 "수학 실력이 좋지 않다"는 고정관념이 굳어진 특정 집단에 속한 개인이, 단순히 이런 사실을 머리에 떠올리는 행위만으로도 평소보다 낮은 시험점수를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함. 하지만 실험 참가자들은 고정관념이 자신의 수행능력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전혀 몰랐음. 이 같은 현상은 고정관념의 위협효과라 불림. 이 고정관념의 위협효과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수행능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임. 마찬가지로 빨간색 또한 그럴 수 있음.
-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감정반응 때문에 수행능력과 자신감이 감소될 수 있음. 빨간색은 위험과 연관되어 있으며 신경과민 및 불안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 빨간색으로 인해, 학과시험에서 빨간색 잉크로 채점된 시험지 또는 F가 새겨진 오래된 커다란 고무도장 등이 떠올라, 불안에 떨던 기억이 유발되어 학과시험에서 실패한 공포가 되살아날 수 있음. 당연히 이 같은 연상작용은 신경과민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어서 회피행동 및 저조한 수행능력의 원인이 될 수 있음. 빨간색과 위험간의 연관성은 학습된 결과로 나타나지만, 사실 인간이 진화를 하는 성향에 뿌리를 둔 것일지도 모름. 아득한 옛날 인간이 특정 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응 행위로 판명됨. 예를 들어 유아시절에는 빨간색 멈춤표지와 빨간색 신호등을 보고 잠재적 위험에 대한 경계를 배우며, 나이를 먹으며 이 같은 성향을 강화시킴
- 여성이 아주 매력적일 경우, 배경 색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음. 이를 일컬어 천장효과라고 함. 반면 여성이 중간정도로 매력적인 경우, 배경색이라는 환경요인은 보다 강력한 효과를 끼치며, 이때 빨간색은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 양방향성이 있는 상황일수록 환경요인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짐. 여성이 엄청 매력있거나 극도로 매력이 없는 경우라면, 이를 인식하는 남성에게 있어 상황은 아주 명확하고 일방향성을 띤다. 반면 여성이 중간정도로 매력이 있다면 상황은 양방향성이 강화되며 환경요인이 보다 큰 역할을 함
-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인간이 개인공간을 침범당했을 때 위협과 불편을 느끼는 심리가, 다른 사람이 신체적 위해를 가하기 충분할만큼 가까이 접근했을 때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진화과정에서 일어난 적응의 산물이라고 믿었음. 그런데 좀더 최근에, 신경학자들은 이런 반응은 명백하게 관장하는 뇌부위를 찾아냈다. 바로 측두엽에 있는 편도체다.
- 당신이 잠재적 투자자, 바이어, 기부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어떤 조직의 특정 부서나 특정 역할을 강조하고 싶다면, 조직과 그 아래 표기하는 직급사이를 잇는 선을 눈에 띌 정도로 길게 그어라. 수직으로 위치를 선정하는 것과 권력간의 상관관계는 아주 강력해서, 심지어 단순히 선 길이만으로도 어떤 이가 얼마나 권력을 막강하기 쥐고 있는지 인지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강렬한 발상이나 이미지를 마음속 맨 꼭대기에 띄워 올리고는 실제 홍보활동과 연계시켜 활용한다. 예를 들면 기업명칭 또는 해당 기업이 가장 먼저 내세울 수 있는 강력한 특성을 광고판, 화면, 지면의 가장 높은 위치에 배치한다.
- 연구자들은 스투룹 효과를 활용해 긍정적 의미와 수직위치간의 연관성이 자동적으로 성립되는지 조사. 실험 참가자들은 단어가 최하단보다는 최상단에 나타났을 때 좀더 쉽게 긍정적 의미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았음. 이와 유사하게, 단어가 최상단보다는 최하단에 등장했을 때 더 쉽게 부정적 의미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았음. 이 같은 결과를 통해 긍정적 성향 및 부정적 성향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우리 마음속에 수직축을 따라 자각되는 차원으로 제시된다는 점을 알 수 있음. 인간은 자동적/무의식적으로 수직위치를 권력뿐만 아니라 긍정적 성향과 부정적 성향과도 연관시킴. 위는 좋은 것이고 아래는 나쁜 것이다. 신과 악마라는 선과 악을 상징하는 두가지 추상적 개념또한 위아래와 연관되어 있음. 지옥과 악마는 우리가 있는 땅 아래 있는 반면 신은 변함없이 땅위인 천국에 존재하며 인간들 위에 있다고 간주됨. 실제로 여러연구를 통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신을 위와, 악마를 아래와 연관시키는 것으로 밝혀졌음.
- 2분 동안 앉았다가 일어서며 강력한 힘을 드러내는 자세를 취한 사람들은 테스토스테론 수준이 증가했으며, 코르티솔 수준은 감소. 이와 대조적으로 앉거나 일어서서 약한 힘을 표출하는 자세를 취했던 사람들은 테스토스테론 수준이 감소했으며 코르티솔 수준은 증가. 이 주목할만한 결과는 체화된 인지이론에 신빙성을 더해줌. 호르몬 수준 측정 실험 결과를 통해 인간의 몸동작과 느낌 및 행동 사이에는 분명히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음. 인간의 신체는 정신과 마음에 큰 영향을 끼침. 단순한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물리적 힘은 물론 정신적 힘의 느낌까지 전달할 수 있음
- 몸이 더러워지는 것은 개념상으로나 은유적으로나 부도덕과 연관. 개개인은 몸을 씻고 때를 벗겨내면서 양심이 느끼는 죄책감까지 닦아내며, 그렇게 함으로써 얼마든지 부정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허가증을 스스로에게 발부하고 다른 이를 돕겠다는 충동을 감소시킴. 개개인은 이렇게 깨끗한 양심으로 무장해 죄책감을 덜은 상태에서, 최소한 가벼운 도덕적 위반행위 쯤은 훨씬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으로 보임. 신체를 깨끗하게 하는 행위는 정신적으로 반향을 일으켜, 더러운 얼룩쯤이야 약간 묻어도 좋다고 여기도록 함. 씻는 행동을 통해 도덕적으로 백지상태인 양심을 지니게 됐기 때문. 이는 앞서 연구에서 본 것처럼 실험참가자들이 양심을 깨끗하게 만드는 바람에 마음이 느슨해져 도덕적 위반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음. 이와 대조적으로 몸이 깨끗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경향은 현저이 낮아지며 아울러 죄책감에 대해 좀더 민감한 반응을 보임. 인간은 신체의 더러움을 깨끗하지 못한 양심과 연관시키며 그리하여 더이상 위반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스스로 제재를 가함. 이런 현상, 즉 몸과 마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은 체화된 인지이론의 기본을 이룸
- 인간은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 뒤 몸을 깨끗하게 씻고 싶은 욕망이 있음. 그러니 배우자나 자녀가 몸을 씻는 행동을 예전보다 더 자주, 오래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때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라. 이것이 바로 향후 있을지도 모를 사유와 연관성에 좀더 주의깊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첫 조짐일수도 있다. 죄책감은 아주 개인적인 경험임. 많은 이들에게 죄책감은 일종의 화해이며,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윤리적이지 못한 짓을 저지렀을 때 꼭 체험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드는 필수과정임. 하지만 살면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기 몸을 의식적으로 씻는 행동을 통해 일부라도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계속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음
- 지금까지 소개한 연구는 단기적으로는 몸을 씻거나 깨끗히 아는 행위가 이후 우리가 취하는 행동과 결정에 확실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입증. 마치 몸을 깨끗이 씻는 행위를 통해 가장 최근까지의 심리적 자취도 없앨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현재 우리가 하는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임. 인생의 중요한 일은 마음속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반면,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체험은 좀더 가변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씻음으로써 그런 체험이 앞날에 영향을 끼치려는 것을 통제할 수 있음.
- 연구자들은 인간이 초콜릿 조각 같은 단 음식을 먹으면 좀더 친절하고 친사회적 태도로 행동하며, 필요한 경우 더 많이 다른 이를 돕게 된다는 점을 발견했음. 이 같은 정보는 상당히 유용함. 누군가와 다툰뒤나 다른 이가 내게 친절하게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에게 달콤한 음료나 초콜릿, 맛있는 케익을 대접하라. 이렇게 하면 그들의 행동은 눈에 띄게 개선될 것이며 당신을 돕고 갈등을 피하겠다는 생각이 더 커질 것임. 그런데 이같은 결과를 보고, 단 것을 먹으면 인간의 행동이 크게 바뀐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됨. 그럼에도 단맛 나는 음식을 먹는 행위와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이 분명함
- 사람들은 단지 생선 비린내를 맡기만 해도 충분히 의심이 많은 상태에 빠진다는 점을 알 수 있음. 참가자들은 자기도 미처 모르는 사이, 생선냄새와 의구심 사이에 놓인 은유적 연관성의 영향을 받았음. 감각을 통해 겪은 체험이 추상적 개념에게, 그 다음으로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판단 및 행동에게 영향을 준 것
- 생선 비린내와 의구심 사이에 존재하는 은유적 연관성은 쌍방향으로 작용. 즉 인간은 생선기름냄새를 맡고 난 뒤 의심을 품게 되는 일이 늘어나며, 반대로 뭔가 의구심이 드는 상태에서 생선 비린내를 잘 감지하는 경향이 있음. 위 실험을 통해 다시 한번 인간은 은유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한다는 증거가 확보된 것. 우리는 생선냄새와 의구심을 서로 연관시키며 이렇게 연관성을 이루는 각 요소는 상대요소를 활성화시킨다. 만약 갑자기 어떤 사람이나 장소에 대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또는 돌아가는 상황이 어쩐지 불편하다는 기분이 들지만 이를 이성적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면, 당신 신체에서 냄새를 맡는 감각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경고하는 것일 수 있음. 이렇게 연륜이 아주 오래된, 냄새맡는 감각이 제공하는 귀중한 정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함. 어떤 이가 뭔가 냄새를 풍기고 있다면, 과연 그사람을 신뢰할지 다시한번 고려해야 할 것임.
-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아예 바깥으로 나가 자유롭게 걷는 행동은, 인간이 관습과 장벽에서 벗어나 다른 방법, 창의적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줌. 두선을 뻗는 방향과 제스처를 바꾸기만 해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됨. 또한 두개의 물건을 물리적으로 합치는 행위를 통해 서로 무관해 보이는 개념에서 공통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음. 때로는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창의성을 증가시킬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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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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