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의 경제학

경제 2014. 10. 6. 20:58

 


결핍의 경제학

저자
센딜 멀레이너선, 엘다 샤퍼 지음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 | 2014-03-3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돈이 없으면, IQ 떨어진다?!" "원칙을 만들수록, 더 멍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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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결핍의 충격은 완전히 다른 분야들에서도 관찰됨. 대규모로 진행된 여러 마케팅 실험에서 어떤 고객은 마감시한이 명시된 쿠폰을 받았고, 어떤 고객은 마감시한이 없는 쿠폰을 받았다. 그런데 마감시한이 없는 쿠폰은 시간제한이 없는데도 덜 사용되었음. 시간결핍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집중적인 관심을 덜 받고 심지어 잊히기까지 한 것임. 또 다른 분야에서 조직 관련 연구자들이 영업직 사원들은 전체 매출주기의 마지막 몇주, 혹은 마지막 며칠 동안에 가장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확인. 우리가 진행한 어떤 연구에서도 데이터 입력 근로자들이 급료 지급일이 다가올수록 더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확인. 연국의 저널리스트 맥스 헤이스팅스는 처칠을 다룬 저서에서 '영국인의 정신은 시간적으로 거의 너무 늦었다 싶을 때 가장 잘 작동한다'라고 썼음. 마감시한이 임박한 상태에서 어떤 일이든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헤이스팅스가 말하는 영국인의 심정을 이해할 것임. 마감시한이 생산적 효과를 발휘하는 정확한 이유는 시간의 결핍 상황이 생성되고 이것이 정신을 집중하도록 유도하기 때문. 2차대전 때의 굶주림 연구에서 배고픔이 사람의 정신의 맨 꼭대기에 음식을 올려놓았던 것처럼 마감시한은 현재 진행하고 있는 과제를 정신의 맨꼭대기에 올려놓음
- 집중은 긍정적이다. 결핍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어떤 것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터널링은 그렇지 않다. 결핍은 사람들로 하여금 터널링을 유도해서 어쩌면 좀더 중요할수도 있는 다른 것들을 무시하게 만든다
- 수면부족의 경우와 3000달러 수리비 압박의 경우를 비교할 때, 어느쪽이 결핍효과가 클까? 후자쪽이 훨씬 컸음. 하룻밤을 꼬박 새운 뒤에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고 예리하다고 느낄까? 우리가 했던 연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단지 돈과 관련된 걱정을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상태보다 더 심각한 인지능력의 상실을 유발할 수 있음을 밝혀냄
- 어떤 사람이 결핍을 느낄 때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IQ점수가 적게 나온다고 함. 자동차 수리비가 소액일 때 빈자는 부자와 동이랗게 반응하는데, 이때는 결핍이 빈자의 정신을 사로잡지 않기 때문. 하지만 분명한 건, 이것은 타고난 인지능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 지나치게 많은 프로그램들이 가동되고 있을 때 컴퓨터 프로세서가 버벅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빈자는 자기가 확보하고 있는 대역폭이 다른 곳에서 소비됨으로써 IQ테스트에서는 낮은 점수밖에 기록하지 못함.
- 시간이든 돈이든 칼로리든 간에 적게 갖고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할 때, 루니는 결핍의 물리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춤. 놀기에 시간이 부족하다거나 지출하기에 돈이 부족하다고 말함. 그러나 대역폭 세금이라는 발상을 전제로 하면, 또 하나의 부족함, 어쩌면 좀더 중요한 부족함이 있음. 우리는 지금 좀더 적은 정신자원을 가지고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함. 결핍은 갚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을 빌리게 만드럭나 필요한 투자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그치지 않음. 결핍은 삶의 다른 측면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을 덧씌움. 결핍은 우리를 멍청이로 만들고, 우리를 좀더 충동적으로 만듬.
- 어째서 꿀벌은 정밀한 건축물을 만들고, 나나니벌은 엉성한 집을 만드는 걸까? 이유는 바로 결핍에 있음. 나나니벌은 흔해빠진 소재인 진흙으로 집을 지음. 반면 꿀벌은 귀한 소재인 밀랍으로 집을 지음. 꿀벌의 밀랍은 작은 가방속의 귀중한 수납공간 혹은 경제적으로 어려울때의 귀중한 몇달러처럼 아껴 써야 함. 정확하지 않게 집을 짓는다는 것은 이 귀중한 밀랍을 낭비하는 것. 재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집을 정확하게 지어야 함. 이에 비해 나나니벌의 건축소재는 사방에 널려 있어 값싸게 구할 수 있음. 그러니 얼마든지 낭비해도 문제가 되지 않음. 그래서 나나니벌은 느슨함의 여유를 누릴 수 있음. 꿀벌에게서 이런 여유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들의 건축소재가 매우 비싸기 때문.
- 넉넉한 부는 유혹을 얼마든지 쉽게 누릴 수 있는 사치로 바꾸어줌. 동일한 상품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실수가 되지만, 부유한 사람에게는 하지 말았어야할 쓸데없는 짓밖에 되지 않음.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먹는 음식을 의식적으로 피해야 함. 바쁜 사람은 바쁘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행위, 예를 들면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행위를 피함으로써 산만함에 빠지지 말아야 함. 결핍은 실수에 따른 비용을 높일 뿐 아니라 실수할 기회, 잘못된 선택을 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함. 일들을 정확하게 하는 게 한층 어려워짐. 많은 항목들이, 그러니까 바쁜 사람에게는 시간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비용이 제한된 영역 안에 꼭 맞게 쓰이도록 신중을 기해야 함
- 넉넉한 풍족함은 트레이드오프에서 해방되어 있음을 의미. 넉넉한 상태에서 어떤 물건을 살 때, 우리는 그 물건 대신에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음. 심리적으로 보면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뭔가를 선택할 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자기가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떤 것을 획득하는 데 따르는 비용이 얼마인지, 혹은 그것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느슨함, 즉 트레이드오프의 부재는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직관적이고 손쉬운 방방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 의지력이 단련되고 커진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가난한 사람이 강한 의지력을 갖고 있다는 상식은 터무니없이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설령 가난이 의지력을 높인다 해도, 결핍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과연 의지력이 이 정도 수준이 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사실 가난한 사람의 의지력은 날마다 시련을 겪으면서 오히려 줄어든다는 증거들이 적지 않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자기절제는 쓸수록 적어지는 경향이 있다.
- 누군다를 비판하기 전에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야 한다. 이렇게 하고서 그 사람을 비판할 때 당신은 예전 위치에서 1마일 떨어져서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잭 핸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수석작가)
- 이런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가난한 농부이다. 당신은 지금 다음 한주동안 어떻게 돈을 마련해서 필요한 지출을 하며 버텨나갈지 고민이다. 이가 아프다고 칭얼대는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데 그럴 돈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 밤에 잠을 설친다. 혹은, 그 일 때문에 오래전에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 약속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조만간에 잡초도 제거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은 천근만근으로 무겁고 걱정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돈다. 양치질을 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은 기필코 잡초를 제거하고야 말겠어와 같은 결심은 너무도 쉬워서 오히려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고 또 지켜지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흡연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재정적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흡연자는 금연에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 가난한 사람은 비만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식습관은 대단한 자기절제의 결과이다.
-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흔히 시달리는 결핍 가운데 하나가 대역폭이다. 부족한 돈을 어떻게든 쪼개고 만들어서 살아가려는 힘겨운 투쟁이 이 사람들에게서 대역폭이라는 필수적인 자원을 박탈함. 여기에 따른 결핍은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 영양부족 및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는 표준적 생리적 다양성과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대역폭은 빈곤에 의해서 항구적으로 훼손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돈에 쪼들림에 따라서 나타난 현재의 인지부하이다. 즉, 소득이 늘어나고 형편이 나아지면 인지능력이 향상된다는 말이다. 사탕수수 농부들의 대역폭은 사탕수수 수확이 끝나고 수입이 들어오자마자 원상태를 회복했다. 빈곤은 기본적으로 대역폭에 세금을 매기며 정신능력을 축소한다.
- 해야 할 일이 많을 때 일반적으로 드는 충동은 모든 것을 한가방 안에 다 넣을 수 있도록 시간의 짐을 될 수 있으면 빡빡하게 싸야 한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짐을 빡빡하게 싸지 않으면 어쩐지 충분히 일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효율성 전문가들은 사용되지 않는 식나을 많이 가진 빈둥거리는 직원에게 시간을 좀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라고 나무란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느슨함은 사라지고 만다. 만일 시간의 짐을 빡빡하게 싸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저 조금만 더 일정을 빡빡하게 잡았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교통정체로 꽉 막힌 도로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사람들처럼, 결국 이 사람의 전체 일정은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만다.
- 느슨함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도 마찬가지임. 70년대와 80년대 초에 많은 기업들이 승리에 도취되어 우쭐댔음. 어떤 기업은 현금이 넘처나다보니 경영진이 돈을 흥청망청 써댔음. 이 기업은 부동산 매입과 기업인수에 흥정을 제대로 하지도 않은 채 과다한 지출을 했으며 손익계산에도 둔감했음. 현금지출을 워낙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몇몇 정유회사들의 자산가치는 소유하고 있던 기름가격보다 낮았음. 시장은 이 회사들이 자산을 몽땅 낭비해 버릴 것으로 보았음. 80년대 불었던 차입매수의 광풍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음. 이것의 논리는 간단함. 이 기업들을 사들여서 이들을 빚더미에 짓눌리게 만듦으로써 압박을 가하는 것. 즉, 풍족함이라는 환경에서 결핍이라는 환경으로 몰아넣는 것. 빚에 따른 규율이 경영성과를 개선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 경영진은 좀더 많은 관심과 주의력을 기울일 것이고, 지출을 좀더 신중하게 할 것이며, 수익을 좀더 많이 낼 것이라고 보았음. 사실 많은 논문들에 의하면 차입매수의 결과가 어떠했든 간에 해당 기업의 성과를 개선했음을 입증했음. 그 이유는 기업의 군살이 경영진의 인센티브 문제를 악화시켰기 때문. 회사가 빚을 지고 있을 때는 경영진이 돈을 아껴서 쓸 수밖에 없음. 눈먼 돈이나 다름없는 군살은 경영진이야 마음껏 즐길 수 있지만 주주가 보기에는 아무런 쓸모 없는 사치로 소비되는 돈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채를 늘리고 군살을 줄임으로써 경영자는 예산을 좀더 현명하게 쓸 수 있게 된다. 차입은 또한 결핍의 심리에 따른 효과를 생성했다. 기업들은 부분적으로는 마감시한이 생산성을 높이는 것, 그리고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사람이 특정한 구간의 택시요금을 더 잘아는 것과 같은 이유로 군살을 빼고 날씬해졌음.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조금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경영자로 살아가려면 엄청난 양의 인지적 노력이 필요. 협력업체들과는 끊임없이 협상을 해야 하고, 비용이 발생할 때는 결제하기 전에 모든 항목을 세밀하게 따져봐야 함. 이런 종류의 집중은 결핍이라는 환경아래서는 한결 쉽지만, 반대로 풍족함이라는 환경아래서는 어려움. 심지어 사기업에서조차도 현금이 넘쳐날때는 군살을 불리기 시작함. 앞에서보 보았듯이 느슨함은 낭비이지만 한편으로는 유익함. 진짜 낭비와 유익한 느슨함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실제로 차입매수된 많은 기업이 파산의 벼랑끝으로 몰렸음. 이런 급박한 현실에서 그 기업들은 터널링 상태에 빠졌음. 만일 80년대가 군살제거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에 대해 교훈을 주었다면, 2000년대에는 경영진이 근시안에 빠질 때 어떤 위험이 빚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엇음. 어쩌면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름. 군살, 다시 말해서 느슨함을 지나치게 많이 제거할 때, 회사의 경영진은 오늘의 빚을 갚으려고 미래의 빚을 당겨다 쓰게 됨
-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2000 소프트웨어를 선적했을 때, 그 소프트웨어에는 이미 알려진 버그가 2만 8000개가 들어 있었음. 그 프로젝트 팀은 자기들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제품을 선적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마감시한에 쫓기던 터여서 선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패치작업에 돌입. 첫번째 패치작업은 자기들이 이미 알고 있던 버그들을 수정하기 위한 것이었음. 하지만 곧 새로운 버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 급한 불 끄기 덫은 엄청난 저글링을 해야 한다는 시련을 포함하고 있음. 코앞에 닥친 마감시한이 코앞에 닥쳐 있음.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게 바로 자기모습이란 걸 어느순간 깨닫게 됨. 아울러 결핍이 덫이 되는 이유들처럼 동일하게 급한 불 끄기도 덫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음. 누구든 급한 불을 끄기 시작하면, 이 과정에서 다치지 않고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음. 여러 팀이 이미 끝마쳤어야 하는 프로젝트에 미친 듯이 달라붙어 있다면, 다음 순서로 예정되어 있던 다른 프로젝트 착수에 늦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이런 악순환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 결핍과 느슨함의 논리를 이해하면 급한 불끄기 덫에 빠질 가능성을 줄일 수 있음. 하지만 터널링이 다른 중요한 고려사항들을 간과하도록 유도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음. 적어도 조직에서 통할 수 있는 한가지 해법은 느슨함을 노골적이고 명백하게 확보하는 것임.
- 거의 100년 전에 헨리포드는 시간과 대역폭의 차이를 인식. 그가 자기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당 40시간 노동만 하도록 결정한 데는 분명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수익에 대한 열망이 작용했을 것임. 이와 관련해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설명.
"헨리포드가 26년에 유명한 주당 40시간 노동제를 채택하자 전미제조업자협회 회원들은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적어도 12년에 걸쳐서 진행된 그의 실험은,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이고 6일제 근무를 5일제 근무로 바꿀 때 전체 노동자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단위 생산원가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포드는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데 따른 사회적 이익을 소리높여 외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늘어난 소비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이득임을 확고하게 표명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서 핵심은 노동시간의 축소가 생산량의 증가를 뜻한다는 것이었다."
- 터널링은 무시를 유발하므로 쉽게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 것들을 일회성 행동으로 변환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일도 상당히 번거롭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어떤 활동에 아이들과 함께 등록한다면, 단 한차례의 행동만으로 당신은 지속적으로 경계를 하지 않고서도 매주 아이들과 함께 놀아줄 수 있다. 이런 원리는 역방향으로도 적용된다. 문제가 될 수 있는 일회성 행동을 지속적인 경계를 요구하는 것으로 변환하면 된다. 몇몇 정책 입안자들은 자동차 구매에 냉각기간이라는 제도를 제안했는데, 이와 비슷한 제도는 돈, 시간, 칼로리 등 모든 형태의 빌리기에도 현명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행동을 실제로 하기 전에 그 결정이 과연 올바른지 여러번에 걸쳐서 확인하도록 하는 장치이다.
- 지금보다는 형편이 좋을 미래의 어떤 시점에 하고자 계획하는 좋은 의사결정이라도 그 미래가 코 앞으로 다가오고 여전히 형편이 나쁘다면 사람들은 그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음. 그러므로 미리 그 일을 하고, 미래와 현재를 현명하게 연결해야 함. 당신이 지금 운동의 중요성에 집중하고 있다면, 바로 지금 헬스장 회원으로 등록하고, 개인 트레이너 교습을 등록하고, 친구와 대기를 걸고, 다음에 다른 문제 때문에 터널에 갇힌다 해도 이런 사실을 상기할 수 있을 어떤 장치를 마련하라. 또한 만일 쇼핑을 할 때 당신의 생각이 건강한 식품에 충분히 집중되어 있다면, 당신의 정신이 더는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을 미래를 대비해서 미리 건강에 좋은 식품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란 말이다. 그리고 책이든 광고든 간에 어떤 것을 보고 당신의 노년의 삶에 집중하고자 할때는 곧바로 행동을 취하라. 월급에서 일정 금액이 자동으로 당신 계좌로 저축되도록 하라. 또 변호사를 불러서 유언장을 써라. 이렇게 하지 않으며, 나중에 언젠가 이런 일을 하겠다고 계획을 세우긴 하겠지만, 그때가면 당신은 또 다른 터널에 갇혀서 이런 것들은 생각도 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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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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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찾기 경제학

경제 2014. 10. 6. 10:20

 


짝찾기 경제학

저자
폴 오이어 지음
출판사
청림 | 2014-03-27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20년간 다양한 '시장'을 연구해온 전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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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최근에 개발한 구글플러스는 기능적으로 페북보다 우월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 구글플러스는 많은 가입자를 확보했지만, 페북의 시장 지배적 지위를 그다지 잠식하지 못함. 소비자는 친구들도 구글플러스로 전환하지 않는 한 페북에서 구글플러스로 갈아타려 하지 않음. 게다가 서로 친구관계인 한 집단 전체가 합심해 다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옮길 가능성은 희박함. 네트워크 외부효과 덕분에 우리는 페북에 머무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페북에 머무르게 될 가능성이 높음
- 페북은 어떻게 그처럼 시장 지배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마이스페이스나 다른 소셜네트워크 사이트들로부터 사용자를 유인했을까? 그 답은 페북이 출범해 시장을 지배하게 되면서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처음 선택하는 사용자들을 집중 공략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음. 페북 사용자는 남보다 먼저 페북을 사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이트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페북으로 갈아타도록 설득할 필요가 없었음. 페북은 단지 서로 네트워킹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페북을 사용하겠다고 동의하게 유도하는 것으로 족했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의 친구들도 같은 사이트를 이용하고 싶어했고, 그 친구들의 친구들도 페북에 가입했으며, 그런 식으로 계속 가입자가 늘어남
- 도로교통에서 수요가 수요를 감소시키는 현상을 경제학자들은 혼잡 외부교화라고 함. 유감스럽게도 혼잡외부효과는 도처에 존재함. 식당은 좌석을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수록 수요가 줄어듬. 운동경기를 관람하고자 하는 사람중 일부는 경기장이 혼잡하고 주차가 어렵고 좋은 좌석이 없으면 표를 사지 않음.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기는 힘들다.
- 캐피털원은 역선택을 거꾸로 자사에 유리하게 이용해 성공한 사례. 88년 창립당시,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 리처드 페어뱅크는 소규모 지방은행을 설득해 신용카드 부서를 만들었음. 당시 미국에서 발행되는 거의 모든 신용카드들은 연체금에 대해 동일한 이자율을 부과하고 있었음. 연회비도 카드마다 크게 다르지 않았음. 페어뱅크는 위험성이 높은 신규 고객들을 확보해 높은 이자율을 부과하고 보다 안전한 고객에게는 낮은 이자율을 부과함으로써 더 높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음. 초창기에는 생각처럼 쉽지 않음. 캐피털원은 자사의 신용카드에 가입 초기 우대금리와 같은 여러가지 독특한 장점들이 있다는 걸 알리려 애씀. 캐피털원에 관심을 보인 고객들은 대부분 회사 입장에서는 그다지 탐탁치 않은 고객들이었음. 체납금을 연체하지 않든지(이런 경우 이자를 부과할 체납금이 없기 때문에 회사입장에서는 수익이 나지 않음), 아예 채무변제를 하지 않음. 캐피털원이 회사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페어뱅크가 실시한 실험 중 한가지가 역선택 대박을 터뜨림. 페어뱅크는 매치닷컴의 호감형 고객은 모두 빼가고 비호감형 고객만 남겨둔 신생 온라인 사이트에 상응하는 신용카드회사를 탄생시킴. 캐피털원은 경쟁사의 고객이 체납금 잔고를 캐피탈원으로 이전할 경우, 누구나 꽤 솔깃한 이자율을 적용해주기 시작. 즉 고객이 경쟁사에 내지 못한 체납금을 캐피탈원이 갚아주는 대신 더 낮은 초기 우대금리로 캐피털원에 체납금을 갚도록 했음. 캐피털원은 체납금이 자사로 이전된 뒤 첫 한해 동안은 거의 이자를 부과하지 않다가 나중에 시장 이자율 수준으로 금리를 인상. 이런 체납금 잔고 이전은 현재 신용카드 시장에서 관행처럼 굳어졌지만 88년에는 전례 없던 일이었음. 신용카드산업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체납금 잔고를 만들되 채무불이행을 하지 않는 고객들이 가장 수익성 높은 고객이라는 점. 체납금 잔고 이전은 적어도 88년에는 앞의 두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고객들에게는 매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음.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용카드로 체납하지 않는 고객은 이전할 체납금 잔고가 없을 테고, 체납된 채무를 변제할 일이 전혀 없는 고객은 구태여 더 싼 이자를 찾아 체납금 잔고를 이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임. 따라서 매달 신용카드 대금을 완납하는 고객들과 채무불이행을 할 일이 없는 고객들은 캐피털원의 체납금 잔고 이전 상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함. 이런 고객들은 신용카드사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없는 고객임. 따라서 역선택 과정을 통해 다른 은행들에게는 이런 고객들만 남게 된 것. 체납금 잔고 이전 상품은 캐피털원에게는 호재였고, 그 후에도 캐피털원은 신용카드 판매부문에서 혁신적이고 수익성 있는 상품을 개발해 대성공을 거둠. 그러나 이 회사가 현재도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유는 체납금 잔고 이전 상품 때문이 아님. 체납금 잔고 이전 상품이 성공하려면 다른 신용카드 회사들은 이 상품을 판매하지 말아야 함.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신용카드사들도 캐피털원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방하기 시작. 결국 신용등급이 가까스로 체납금 잔고를 이전할만한 자격이 되는 신용카드 소지자들까지도 잔고이전을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음. 사실상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체납금 잔고 이전 상품이 이를 판매하는 은행들에게 역선택이라는 문제를 안겨줌. 아주 영리한 신용카드 소지자들은 해마다 새로운 카드회사로 잔고를 이전해 이자를 전혀 내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 이 고객들은 사실상 잔고 이전상품을 파는 신용카드회사들에게서 무이자 대출을 받은 셈
- 경제학자 아민 포크와 아드레아 이치노도는 취리히 근처에 사는 고등학생들을 채용해 취리히대학이 배포하는 설문지를 봉투에 넣는 일을 시킴. 연구자들은 학생이 혼자일할 때와 다른 학생과 함께 일할 때 둘 중 어느 경우에 생산성이 높은지 알아봄. 그 결과 세가지 결론이 도출됨.
(1) 학생들은 혼자 일할 때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생산성이 더 높았음.
(2) 짝을 지어 일하면 지루함이 덜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아질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의식한 나머지 생산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임. 같이 일한 두 학생은 둘다 열심히 일하든지, 둘다 낮은 생산성을 보였으며 짝을 이룬 두 사람의 생산성이 크게 차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엇음.
(3) 의류봉제공장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동일한 팀구성효과가 나타났음.
- 평균적인 한국여성은 외모가 뛰어난 남성과 외모는 평균이되 앞의 남성보다 연봉이 4만4000달러 더 많은 남성에게 똑같이 끌렸음. 그러나 평균적인 한국남성은 평균적인 외모를 가진 여성의 연봉이 외모가 뛰어난 여성의 연봉보가 15만 달러 높아야 평균적인인 외모의 여성과 외모가 뛰어난 여성에게 똑같이 끌렸음. 다시 말해 남성이 여성의 외모를 위해 지불할 의향이 있는 액수는, 여성이 남성의 외모를 위해 지불할 의향이 있는 액수의 세배에 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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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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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경제학자라면

저자
팀 하포드 지음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 2014-06-0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불확실한 세상? 대책 없이 고장 난 경제? 거시경제학의 눈으로 ...
가격비교

- 최고의 경제학자라면 보기드물 정도로 여러 재능을 겸비해야 함. 어느정도는 수학자이자 역사학자, 정치가, 철학자가 되어야 하고, 상징을 이해하고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함. 경제학자는 보편적 시각에서 개별적 사건을 살펴보아야 하며, 생각의 나래 속에서 추상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느껴야 함. 또한 미래를 지향하면서 과거의 불빛 아래에서 현재를 연구해야 함. 사람의 본능과 관습 어느 한 부분이라도 관심 밖에 두어서는 안됨
- 프랑스 경제학자이나 수필가, 국회의원이었던 프레데렉 바스티아는 1850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단순한 제목의 탁월한 소논문을 발표. "거시경제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학문입니다. 경제의 영역 안에서는 행동이나 습관, 제도, 법률이 한가지 효과뿐 아니라 연속적이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중 첫번째 효과는 그 하나만으로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원인과 동시에 나타나며, 볼 수도 있다. 다른 효과들은 그 이후에 나타나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보이지 않는 효과들을 예견한다면, 그야말로 행운이다."
- 일전에 크루그먼은 스위니 부부의 우화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쓴 적이 있음. "나는 그 이야기를 자주 생각한다. 그 이야기는 내가 위기에 직면해서도 침착할 수 있도록, 공황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운명론과 비판론의 힘에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탁아 이야기가 크루그먼에게 그렇게 깊은 영향을 미친 이유는 케인스의 마그네토 문제 비유(경기침체는 단순한 부분의 문제이다...)가 그랬듯이 불황은 피하거나 바꿀 수 없는 자연의 힘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가가도록 해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됨. 불황이 반드시 어떤 경제 구조의 뿌리깊은 문화적 또는 과학기술적 문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님. 불황의 원인은 의외로 단순하고 기술적일 수 있음며, 따라서 그 해법도 단순하고 기술적일 수 있음.
- 영향을 미치는 변수에 따라 가격이 완전히 자유롭게 조정된다면, 경제의 실제 통화량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임. 이 경우에도 탁아협동조합은 좋은 연구사례가 됨. 조합원이 아이를 맡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증서를 모으고 아무도 외출하지 않는 상황에서, 왜 그들은 3시간어치의 증서를 주면 6시간 동안 아이를 돌봐주겠다는 제안을 하지 않았을까? 결국 이 경우에 근본적인 문제는 조합원들이 충분한 증서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 아님. 문제는 그들이 소유한 증서가 원하는 만큼의 적정가치를 지니지 못했다는 데 있음. 만약에 조합원들이 증서의 액면가(탁아 30분)를 무시하고, 대신 그 증서가 탁아 1시간의 가치를 지닌다는 데 동의했다면, 즉시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가격은 고정되어 있었음.
- 디플레가 생기면 경제가 불황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음. 물가가 하락하면, 동일한 금액의 현금으로 오늘보다는 내일 더 많은 것을 살 수 있음. 따라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품의 구매를 가능한 한 늦추게 되고, 이는 수요를 더욱 위축시킴. 그리고 디플레 환경에서는 돈을 빌리려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은행이 저축자들에게 높은 이자율을 제공하기 어려워짐. 그러면 사람들은 은행에 저축하는 대신 현금을 과자통이나 침내 밑에 넣어두기로 마음먹게 됨. 일단 현금이 은행 시스템을 빠져나가면, 대출은 어려워짐. 이 모든 것의 효과는 수요는 줄어들고, 디플레가 심화됨. 디플레 환경에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 가격이 경직되어 하향조정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모든 것이 비싸게 보여 수요는 위축됨. 가격이 하향 조정되더라도,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소비를 늦추라는 신호로 작용하여 역시 수요는 위축된 채로 있게 됨.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됨. 이것이 바로 30년대 대공황 때 벌어진 일
- 일반적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정부당국이 이례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시작됨. 즉 전쟁자금이 부족하거나 또는 사회적, 경제적 격변으로 세금이 충분히 걷히지 않아 공무원에게 지불할 임금이 부족한 경우 등. 그런 경우 정부 당국은 돈을 찍어내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돈을 계속해서 찍어냄. 문제는 정부가 무에서 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과, 사람들에게 근로의 대가로 그 돈을 받아 들이도록 하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점점 더 많은 돈을 찍어냄에 따라, 가게 진열대 위의 상품에 따르는 현금의 양도 덩달아 계속 늘어남. 당연히 가격도 따라 오르고, 이런 과정이 강화되면서 악순환이 시작됨.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가격이 계속해서 오르리라 예상하며 더 높은 임금을 요구. 곧 통제불능의 상황이 닥침. 물가가 계속해서 오를 뿐 아니라 상승속도도 빨라짐.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는 것임. 이론적으로는 전쟁이나 혁명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경제라면, 임금과 물가 상승의 악순환을 적당한 인플레이션 수준에서 제어할 수 있음.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실상을 다름. 일부 선진국들은 70년대에 임금과 물가상승의 악순환처럼 보이는 상황을 경험했는데, 당시 유가상승과 통화정책의 완화가 결합하면서 두자리 숫자 혹은 20퍼센트가 넘는 연간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기도 했음. 그럼에도 연 20퍼센트의 인플레이션과 월 50퍼센트의 인플레이션은 같지 않음. 완전히 다름. 그리고 결국에는 중앙은행이 개입하여 그런 악순환이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냈음.
- 이념적 이유로 정부지출의 확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 재정적 경기부양책은 머리 쓸 필요도 없는 간단한 일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 이는 잘못된 생각임. 불황이 가볍고, 통화정책을 활용할 여지가 충분하며(즉 이자율이 0%보다 상당히 위에 있으며), 경제규모가 작고 변동환율제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 또는 이런 상황들 중 일부만 있는 경우에도 그들의 주장은 틀릴 가능성이 큼. 공교롭게도 가장 최근의 금융위기는 이자율이 거의 0%에 가까웠으며, 위기를 겪는 국가의 경제규모도 컸고, 고정환율제인 경우도 있었으며, 불황은 가볍지 않았음. 분명히 재정적 경기부양책이 적절하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음. 하지만 그런 믿음은 심각했던 최근 사례에만 해당할 뿐이지, 보편적인 진리는 아님.
-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하는 질문은 탁아협동조합 불황과 포로수용소 불황 중 어떤 종류의 불황이 더 많은가 하는 것. 우리가 경제를 이해하려고 할 때, 경제가 포로수용소의 경우처럼 매끄럽게 기능하지만 외부충격에 흔들리고 정책의 잘못으로 손상을 입는다는 가정을 전제로 해야할까요? 아니면 탁아협동조합의 경우처럼 경제 자체가 고장나기 쉬우며 빌 필립스 같은 기계공이 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전제로 해야할까요? 이 딜레마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려면 무엇이 경제의 산출이나 공급, 수요를 제한하는지 물어보아야 함. 프랑스 고전파 경제학자인 장 바티스트 세는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라고 주장하는 세의 법칙을 제시. 포로수용소의 상황에 대입하면 이 말은 가격 체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적십자 꾸러미가 도착하는지를 신경쓰라는 의미
- 가격이 제대로 매끄럽게 조정되는 경우에는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함. 생산자는 재화를 만들고 서비스를 창출하는 일을 하며, 적정한 가격이라면 그 재화와 서비스를 팔 수 있음.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폭락하면, 생산자의 소득도 떨어짐. 하지만 이 경우에 생산자가 자신의 소득으로 구매할 재호와 서비스의 가격역시 떨어져 있을 것임. 가격과 소득이 모두 하락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무도 더 가난해지지 않음. 세의 법칙에 따르면 경제가 일반적인 수요과잉을 겪는 것은 절대 불가능. 대신에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룰 때까지 가격이 조정됨. 만약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경제가 불황을 겪을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포로수용소에서처럼 공급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포로수용소의 상황은 불황을 바라보는 고전학파의 관점과 일맥상통함. 가격은 조정되었고 시장은 확실했지만, 외생적 충격 때문에 삶은 가혹했으며, 정책은 그 무엇이든 간에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음.
- 어떤 불황이든 어느정도가 총수요의 문제이고(그러므로 부양책으로 고칠 수 있고), 어느정도가 공급의 문제인지(그러므로 부양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에 관한 의문은 항상 있음.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단기와 장기의 문제임. 단기적으로 대부분의 불황에는 케인스 학파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부양책을 써야 함. 어쨌거나 그 부양책은 정부의 재정지출보다는 대개 중앙은행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생산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언제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함. 사실 한가지 동일한 정책으로, 예컨대 불황일 때 철도나 도로수리, 초고속 인터넷의 속도 개선과 같이 신중하게 선택한 사회기반 시설 사업에 지출하는 정책으로 수요와 공급의 문제를 둘 다 다룰 수 있음. 단기적으로는 실직 상태에 있었을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조치이자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구조적 생산능력을 향상시키는 일이 됨. 둘다 다루려 하는 경우 분명히 위험이 따르기는 함. 만약 당신이 사람들을 고용하여 초콜릿을 묻고 파내는 일을 시킨다면, 그 일은 경제의 생산능력을 높이지 못할 것임. 그리고 우리가 보았듯이, 재정적 경기 부양책은 부채가 서서히 감당못할 수준까지 쌓이도록 하여 경제가 회복되어도 원래 수준으로 줄이기 어려울 수 있음.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이미 상당한 부채를 지고 있는 상태에서 큰 불황에 들어섰으며, 호황일때도 정부 운영에 필요한 돈은 차입을 통해 충당하겠다고 공언하곤 했음. 이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며, 공정하게 말해서 케인스 학파의 접근 방법이 실제로 요구하는 것도 아님. 구조개혁과 관련하여, 경제의 근원적 생산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적당하지 않은 시기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음. 그리고 사회기반시설 사업을 정말 현명하게 선택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일 수 있음. 하지만 흔히 제시되는 구조개혁을 생각해 보십시요. 일례로 고용주가 노동자를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 개정을 들 수 있음. 그러한 법 개정이 장기적으로 경제를 더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할 것이라 믿는 이유는, 고용주가 사람들을 고용하는 데 신경을 덜 써도 되고 입증되지 않은 젊은 노동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데 있어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 하지만 불황의 한가운데에서 그렇게 한다면 단기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고용주는 종업원을 더 많이 해고할 수 있으며, 그 즉시 수요는 훨씬 더 침체되고 불황은 지속되겠지요. 더 빠른 고용성장이라는 개혁의 긍정적 측면은 불황이 끝날 때까지 실감할 수 없을 것임.
- 더 넉넉한 실업수당을 준다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는 데 덜 필사적이 될 것임. 다른 요인들이 동일한 경우, 넉넉한 수당을 주면 베버리지 곡선이 바깥으로 밀려가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특정 구인율 수준에서 실업률이 더 높아짐을 의미. 미국의 베버리지 곡선이 바깥으로 이동하는 이유에 대해, 한가지 가능한 설명은 실업보험이 확대되어 왔다는 사실. 또한 앞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한 이동을 언급했는데, 그것으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는 또 다른 가능한 설명은 부동산 시장의 침체임. 하락하는 집값에 발목을 잡힌 사람들이 집을 팔고 대출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이동이 더 어렵게 되었다는 설명. 좀더 넉넉한 복지혜택을 주면 사람들이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기술이나 관심에 꼭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좀더 오래 유지되는 소중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음. 그러나 넉넉한 복지혜택을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도적 차원에 있음. 즉 설사 그런 혜택 때문에 실업률이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명사회를 영위하기 위해 치를 가치가 있는 비용이라는 주장
- 금융경제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서 케시 포겔, 렌달 모크, 버나드 융은 전 세계 44개국을 대상으로 각국에서 가장 큰 10개 기업을 뽑아 분석. 그 결과 최상위 기업들의 출현과 쇠퇴가 빨랐던 국가들은 경제성장도 더 빨랐다는 사실을 발견. 더욱 인상적인 발견은 그 둘 사이의 인과관계임. 즉 최상위 기업들이 출현과 쇠퇴를 더 많이 겪을수록 그 후에 경제성장이 더 빠르게 나타났으며, 통계적으로 다른 주요 요인들을 고정시킬 경우 그런 인과관계는 계속 유지됨. 또한 포겔과 그의 동료들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결정적 요인은 떠오르는 유망기업이 아니라 사라진 거대기업이었다고 함. 흔히 기업의 실패를 경제전체의 실패와 잘못 연관시키곤 함. 물론 불황으로 인해 회사가 부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함. 하지만 기업의 실패가 경제문제의 원인은 아니며, 단지 부실경영기업이 좀더 생산적인 경쟁자로 대체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음. 바꿔 말하면, 개별적인 실패를 받아들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혼자 중얼거립니다. "억제라는 건 말이야. 적의 마음속에 공격의 공포를 심어주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 둠스데이 머신이 무시무시하고 생각하기도 쉽고 더없이 믿을만하고 확실한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건 바로 인간의 개입을 배제한, 돌이킬 수 없는 자동의사결정 과정 때문이야" 셸링은 자신만의 문제와 싸우는 인간의 의지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다른 모든 영역에서 확약전략의 개념을 발전시켰음. 가령 친구와 내기를 하면 금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한 예임. 60년대 셸링이 확약 전략연구에 열중하던 당시에, 그런 개념은 거시경제학에 어떤 가시적 의미를 던져주지 못했음. 하지만 70년대 오일쇼크로 경제가 혼란을 겪는 가운데, 논의의 흐름은 급격하게 바뀜. 신뢰할만한 확약이라는 셸링의 개념은 이제 경제제도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음.
- 너무나 많이, 그리고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그저 물질의 풍요만 쌓아 올리느라 개인의 우수성과 공동체의 가치는 포기해왔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국민총생산은 이제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GNP로 미국을 평가할 때, 거기에는 대기오염과 담배광고, 아수라장이 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문에 설치한 특수 자물쇠와 그것을 부순 사람이 들어가는 감옥도 계산에 넣습니다. GNP에는 삼나무의 하괴,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으로 잃어버린 경이로운 자연도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네이팜탄과 핵탄두, 도시의 폭동과 싸우는 경찰의 무장차량도 포함되며, 휘트먼의 소총과 스펙의 칼,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기 위해 폭력을 미화하는 TV프로그램도 들어갑니다. 하지만 GNP는 우리의 재치나 용기, 지혜나 배움을 측정하지 못하며, 우리의 연민이나 국가에 대한 헌신도 재지 못합니다. GNP가 모든 것을 측정한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들은 측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GNP가 미국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왜 우리가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합니다. (로버트 F 케네디)
-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경제가 어떤 결말을 향해 갈지 말해줄 수 있는 유용한 모델이 주류 거시경제학에는 없었으며, 이것이 바로 거시경제학의 결함이었습니다. 경험적 근거에 따르면 그 결말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이 어떻게 그 충격을 완화해야 하는지, 그리고 정부가 부양에 나서야 하는지 아니면 긴축을 해야 하는지와 관련해서 거시경제학이 권위를 지닐만한 위치에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움. 금융위기를 케인스 학파의 불황으로 이어지는 수요측면의 충격으로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을까요, 아니면 고전학파의 불황으로 이어지는 공급측면의 충격으로 생각하는게 최선이었을까요? 아니면 모든 이론적인 장치들이 다 소용없었던 것일까요? 더 심각한 것은 많은 미시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거시경제학의 제사장들이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대응에 미적거렸다는 사실. 거시경제학자들은 은행산업을 자신들의 모델에 포함시키길 거부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금유우이기가 어떤 지적인 대응을 요구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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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에 대비하라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출판사
동녘사이언스 | 2011-05-1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2009 SERI 추천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
가격비교

- 탈레브 교수는 나무바퀴와 인터넷 등의 사례를 들어 우리의 자만을 꾸짖엇다. 바퀴는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처음 나타난 중요한 발명품임. 바퀴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실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킨 혁신 중 하나임. 그는 바퀴가 달린 여행용 가방을 제시하면서 "6000년 전부터 바퀴가 존재해 왔지만 이렇게 편리한 여행용 가방은 아주 최근에야 발명됐다. 이렇게 단순한 응용을 왜 수천년 동안 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면 인간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이처럼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함
- 보편적인 것보다 특수한 것을 선호하는 분야에 낮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스콜라주의자들 이래로 지식을 공식화하는 방식임. 이 때문에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우대하면서 경험과 연륜을 가진 사람을 무시함. 이것은 고전물리학에서는 통할지 모르겠지만 복합적인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음. 이런 방식은 의학의 역사, 특히 임상의학이 탄생하기 전에 많은 환자들을 죽였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사회적 영역에서도 많은 피해를 초래하고 있음. 과거의 교사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적 메시지는 종교의 용어를 사용하면 선포(당신이 이해할 수 있고 당신에게 명확히 전달되는 목표를 가진 규칙)가 아니라 독단(반드시 이해할 필요 없이 당신이 실행에 옮겨야 하는 규칙)이었음. 대자연은 상호의존, 비선형성, 강인한 생태의 망으로 이루어진 복잡계임. 대자연은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늙은, 아주 늙은 사람이다. 대자연은 알츠하이머에 걸리지 않음. 인간도 운동과 단식이라는 식습관을 따르고, 오래 걸으며, 설탕/빵/주식투자를 피하고, 경제학 수업 듣기와 뉴욕타임즈 읽기 등을 자제하면 나이가 들어도 뇌기능을 쉽게 잃지 않는다. 결국 대자연은 긍정적 검은 백조를 활용할 방법을 인간보다 더 잘 안다.
-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너무 커지지 않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음. 기업 확장과 합병의 배후에 규모의 경제라는 개념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지지하는 증거는 없지만 이 개념은 집단의식 속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증거는 정반대의 사실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에 사람들은 합병을 계속한다. 합병은 기업이 아니라 월스트리트 보너스에 좋다. 기업이 커지면 CEO에게 좋다. 그런데 나는 기업이 커질수록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외적인 우발사건들에 더 취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안정이라는 착각속에서 진행된다. 기업이 커지면 월스트리트 분석가들을 만족시키기위해 최적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라. 월스트리트 분석가들은 손익을 개선하고 주당 손이익을 높이기 위해 기업들에게 여분의 신장을 매각하고 보험을 팽개쳐버리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다. 결국 회사의 파산을 촉진할 것이다.
- 포식자-피식자 모델에 의해 인구가 극단의 왕국 스타일의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에, 포식자들은 성찬의 시기와 기근의 시기를 경험하게 됨. 그것이 바로 인간임. 우리는 극단적 기아와 극단적 풍요를 경험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음식섭취는 분명 프랙털적인 것임. 하루세끼 적당한 식사가 큰 성찬과 단식을 번갈아 하는 것보다 건강에 더 좋은지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음. 그러나 근동종교들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며칠동안 단식을 했음.
- 제 4분면, 지도
(1) 1사분면 : 단순한 2진수 결과값, 평범의 왕국에 속함. 예측은 안전하고, 생활은 단조롭고, 모델이 유효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함.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은 실제에서보다는 실험실과 게임에만 있음. 경제적 의사결정의 결과값에서는 이런 것들을 관찰할 수 없음. 사례들 : 환자 개인에 대한 의료결정, 카지노 도박, 예측시장
(2) 2사분면 : 평범의 왕국에서 나타나는 복합적 결과값. 일정한 위험이 존재하지만 통계적 방법이 만족스럽게 작동할 수도 있음. 실제로 평범의 왕국 모델을 사용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닐지 모름. 전점근성, 독립성 결여, 모델 오류 때문. 확실히 문제가 있지만 데이비드 프리드먼이 여러 문헌에서 이 문제들을 폭넓게 다루었음.
(3) 3사분면 : 극단의 왕국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결과값. 틀려도 해약이 적음. 극단적 사건들의 가능성이 결과값에 영향을 미치지 않음. 검은 백조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음
(4) 4사분면 : 검은 백조의 영역. 극단의 왕국에서 나타나는 복합적 결과값. 문제가 있는 영역이지만 기회도 있음. 우리는 먼 결과값의 예측을 피해야 함. 물론 평범한 결과값에 대한 예측도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님. 분포의 먼 쪽에서 나오는 결과값은 가가운 쪽에서 나오는 결과값보다 예측하기 어려움. 4사분면은 긍정적 검은 백조에 노출되거나 부정적 검은백조에 노출되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짐.
- 실천규칙 : 실제 생활에서 바벨전략을 쓸 수 없는 경우 제4사분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혹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가? 4사분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잘라내기, 즉 보험에 가입하여 특정한 노출을 잘라내거나 바벨전략을 사용하는 것. 그러나 바벨전략을 쓸 수 없어서 기후나 전염병 또는 앞의 표에 나온 비슷한 항목을 피할 수 없다면, 강인함을 증대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혜를 지침으로 삼을 수 있음.
(1) 시간과 비논증적 지식을 존중하라
(2) 최적화 피하기, 중복을 좋아하는 법 배우기
(3) 작은 확률의 결과값에 대한 예측 피하기
(4) 먼 사건들의 비전형성 깨닫기 : 시나리오 분석과 스트레스 테스트라고 불리는 풋내기들의 방법이 있다. 이런 방법은 과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결함이 이후의 결함을 예측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위해 스트레스 테스트를 해야 할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예측이 작동하지 않는다. 예측이 무제한 노출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5) 보너스 지급과 관련한 도덕적 해이 깨닫기
(6) 특정한 위험계량 피하기
(7) 긍정적 검은백조인다, 부정적 검은백조인가?
(8) 변덕성의 부재를 위험의 부재로 혼동하지 말라
(9) 위험수치들의 표현이 주의하라
- 검은백조에 강인한 사회를 위한 10가지 원칙
(1) 허약한 것은 규모가 작을 때 일찍 붕괴해야 한다 : 이제까지 너무커서 파산을 피했던 것은 없었다. 경제생활은 숨겨진 커다란 위험을 지닌 것이 최대규모로 커지도록 촉진한다.
(2) 손실의 사회화와 이익의 사유화는안된다
(3) 눈을 가린채 스쿨버스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낸 사람들에게 새 버스를 주어서는 안된다
(4) 인센티브 보너스를 만든 사람에게 원자력 발전소나 금융위험관리를 맡기지 말라 : 이런 사람은 보수적이라고 자칭하면서도 수익을 보여주기 위해 안전을 위한 모든 경비를 줄일 것이다. 보너스는 위험을 위한 여분을 두지 않는다. 우리를 이 지경에 빠트린 것은 보너스의 비대칭성이다. 역인센티브 없이는 인센티브도 안된다. 자본주의는 보상만이 아니라 보상과 처벌을 함께 주는 시스템이다
(5) 복잡성을 단순성으로 상쇄하라 : 복잡한 시스템은 부채와 최적화가 아니라 느슨함과 중복으로 생존할 수 있다
(6) 다이너마이크 경고표시가 붙어 있어도 아이들에게 주지 말라 : 복잡한 금융상품은 금지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 상품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을 알만큼 충분히 합리적인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자신들로부터, 시민들에게 헤징상품을 파는 은행가들로부터, 경제이론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진한 규제자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7) 신용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폰지사기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가 신용회복을 책임져서는 안된다
(8) 마약중독자에게는 금단증상을 보이더라도 약을 주어서는 안된다 : 과도한 레버리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버리지를 사용하는 것은 동종요법이지 그것의 부정이 아니다. 부채위기는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9) 시민들은 가치저장 수단으로 금융자산에 의존해서는 안되고, 은퇴에 대비하기 위해 틀릴수도 있는 전문가의 조언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 경제생활은 탈금융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시장을 가치의 저장소로 사용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문적 의견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일반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확실성을 확보하고 있지 않다. 투자는 오락행위가 되어야 한다. 시민들이 불안을 겪어야 한다면 그들의 일 때문이어야 하지, 그들의 투자때문이어서는 안된다
(10) 깨진 계란으로 오믈렛을 만들라 : 선체가 썩은 배를 판자조각으로 수리할 수 없듯이 08년 금융위기는 임시변통 수단으로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새롭고 강력한 재료로 새 배를 만들어야 한다. 시스템이 스스로를 재건하기 전에 우리가 시스템을 재건해야 한다. 무너질 필요가 있는 것은 스스로 무너지도록 도와주어 강인한 경제로 자발적으로 이행하자.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는거, 기존 경제학계와 경영대를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것, 노벨 경제학상을 폐지하는 것, 차입매수를 금지하는 것, 은행가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것, 우리를 이 지경으로 빠트린 자들로부터 보너스를 환수하는 것, 불확실한 세계에서 항해하는 방법을 시민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등이 그런 수단이다. 그러면 우리는 경제생활이 생태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업의 규모는 작아지고, 생태는 풍요로워지며, 투기적 차입이 없는 세계, 은행가들이 아니라 기업가들이 위험을 감수하는 세계, 매일 기업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더라도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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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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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10년 세계경제의 내일

저자
클린트 로렌 지음
출판사
원앤원북스 | 2013-08-22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인구통계라는 렌즈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 이 책은 현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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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거없는 믿음의 사례 2가지
(1) 중국이 늘어나는 노동연령 인구의 고용을 위해 실질 GDP를 계속키워야 한다는 착각. 사실 중국의 노동연령 인구(15~64세)는 '10년 정점을 찍었고 이제 감소하고 있으며, 중국정부도 이런 현상에 주목하고 있음. 그런데도 우리는 중국이 GDP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자주 접하고는 함.
(2) 일본은 노인에게 인구가 편중되어 노인을 부양할 인력이 충분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심각한 사회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는 착각. 일본은 부양률이 세계최저 수준이며, 이런 상황은 앞으로 20년 동안 이어질 것임. 일본의 부양률은 인도의 1/3 수준인데도 인도에 대해 비슷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
- 오늘날 교육수준이 낮은 국가들은 젊은 인구의 비율이 높아서 장기적으로 미래 노동력의 교육개요가 달라질 여지가 크다는 점. 예를 들어 인도는 '32년 노동인구 가운데 최대 49%가 '12년 이후 노동시장에 합류할 사람들이 될 전망. 따라서 이런 인구 구성 연령이 낮은 국가에서는 지금 교육제도를 개선할 경우 20년 뒤 노동인력의 잠재적 업무능력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임. 이에 반해 인구의 연령대가 훨씬 높고 교육수준도 높은 중국에서는 '32년 노동인구 가운데 '12년과 '32년 사이 노동시장에 합류한 사람들의 비율이 31%에 불과할 전망. 이것은 중국 노동인력의 교육개요 개선속도가 인도보다 더 느리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음.
-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청소년 시장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러한 인식은 착각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함. 이미 중국에 세계의 65세 이상 인구의 27%가 살고 있고, 이 수치는 '32년이면 31%가 될 것임. 바꾸어 말해 32년에는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국가의 인구를 통틀어 65세 이상 노인 3명 중 1명 정도가 중국에 거주할 것이라는 이야기임. 그뿐만 아니라 65세 이상 연령 집단의 비율은 세계 인구의 9%에서 15%로 상승할 것이며, 이 인구 10명 가운데 4명은 중국 아니면 인도에 거주할 것임. 또한 65세 이상 인구층의 소비력이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만함. 부유한 지역에서는 이들이 더 늦은 나이까지 일하고 있으며 이전 세대보다 저축액도 더 많음
- 투자를 고려한다면 교육을 주목하라
(1) 교육이 노동자의 생산성과 국민의 부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사실. 교육은 주시해야 할 중요 변수임. 하지만 현재 교육수준이 낮은 국가의 경우 교육제도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그 혜택을 입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노동인력 안으로 유입될 때까지는 생산성 개선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기대를 할 수 없음.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교육투자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사례로 꼽힘. 노동인력의 증가와 교육수준 개선이라는 이중효과를 감안할 때, 다가올 20년 동안 두 나라의 경제성장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음. 말레이시아는 이제 막 한계점을 넘어 교육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국가임
(2) 중국 노동인력의 변화. 중국은 노동인력 규모가 감소하고 있고, 중국 경제의 성장을 유지하려면 좀더 생산성 높은 노동인력을 갖추는 일이 반드시 필요함. 이 점에서 중국의 타이밍은 완벽함. 중국의 교육지수는 12년 178가까이에 도달했고, 22년이면 19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됨. 중국의 일부 지역은 교육지수가 이미 200을 넘어섰고 노동인력의 감소여파를 상쇄할만큼 상승규모도 커서 앞으로 근로자 생산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며 이것은 중국 소비시장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침.
(3) 인도는 세계인구의 25%가까이를 차지하므로 당연히 중요함. 그러나 전반적 교육수준이 열악하다는 점이 인도에 대한 투자를 저해하고 있음.
- 노동력의 절대규모가 이렇게 감소한다는 것은 중국의 전반적인 경제성장과 미래의 위치에 관해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줌. 중국은 20년 이내에 필연적으로 맞이하게될 상황이지만 인류역사에서 급속한 노동자 수 감소를 겪은 사회는 아주 드물다. 중국의 급격한 노동자수 감소를 필연적이라고 장담하는 이유는 이를 주도하는 두가지 변수가 노동연령 인구수와 고용성향이기 때문임. 첫번째 변수인 노동연령 인구수는 32년까지 노동연령에 이르는 사람들 대다수가 현재 생존해 있어서 어느정도 정확한 전망이 가능하므로 거의 확정적임. 두번째 변수는 고용성향임. 그런데 고용성향이 현재 수준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음. 그러므로 중국 노동인력의 전체 규모는 틀림없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됨 이것은 중국의 경제전망에 적잖은 영향을 끼침. 10년까지 지난 20년 동안 중국은 매년 약 600만명의 신규 근로자를 노동인력에 추가해 왔음. 여기에 근로자 1인당 생산성 개선 및 대대적인 설비투자가 맞물려 중국의 GDP는 급속하게 증가할 수 있었음. 그러나 앞으로 20년 동안 중국의 노동인구는 연평균 670만 명씩 감소하기 시작할 것임. 중국 전체가 지난 10년과 같은 속도로 계속 성장하려면 중국의 1인당 생산성이 대폭 개선되어야 할 것임. 중국의 전반적 교육수준은 1인당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지점에 접근하고 있음. 그러나 전체 인구가 감소되고 있거사 현상 유지중인 국가에서 GDP의 성장은 별로 의미가 없음을 기억해야 함. 이보다 중요한 것인 1인당 GDP의 성장임. 중국은 노동인력의 교육개선으로 인해 전망이 좋은 편. 따라서 GDP성장률을 지나치게 낙관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어도, 중국 국민의 전반적 행복에 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유지해도 괜찮을 듯함.
- 많은 논평가는 일본이 인구노령화로 전체 인구 대비 노동인력 감소가 불가피한 상황이기 때문에 일본경제의 미래가 어둡다고 이야기해왔음. 하지만 그와 다른 결과를 기대해볼만한 2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 첫번째는 노동연령의 연장임. 일반적인 사람들이 은퇴후 20년 동안의 생활자금을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노동연령 연장은 사실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필요의 문제임. 이러한 사실은 32년이면 750만명의 노동연령 인구가 추가발생하게 됨을 의미.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11% 많은 수치. 이뿐 아니라 일본은 이례적으로 노동참여율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 여성의 노동참여율은 여성 노동연령 인구의 60%에서 68%로 증가할 전망. 부분적으로 이것은 꽤 오래전부터 남성들 못지 않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온 일본 여성들 개인의 역량과 여성참여에 대한 인식 변화가 맞물려서, 40세 이상의 교육수준이 높은 여성들이 생애 최초로 노동시장에 진입함에 따른 결과. 이런 요인들을 모두 감안하면 일본의 전체 노동인력이 12년 6280만명에서 32년까지 5600만명까지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한 기존 견해와 달리 5900만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할 수 있음. 기본적으로 전체 인구가 9% 감소하는 반면에 일하는 인구의 비율은 증가할 것이고, 전체 노동인력의 규모는 6% 감소하는 데 그칠 것임. 따라서 일본경제는 쇠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높은 생산능력과 매우 낮은 부양률로 사실상 그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될 것임. 이것은 저축 및 재량소비를 할 수 있는 여력의 확대를 의미
- 일본은 다시 한번 흥미롭고 예상과는 다른 동향을 보임. 이것은 서유럽의 많은 국가와 아시아 부국으로도 확장되고 있는 동향임.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기대수명이 길어지고 65~69세 연령 집단의 근로의지와 능력이 높아진데다, 여성의 노동참여가 증가해 일본의 전체 노동인력은 '12년 6300만명 수준에서 다가올 20년 동안 5900만명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됨. 이와 동시에 일본의 인구는 1억 2740만명에서 11억 1570만명으로 감소할 것임. 그에 따라 일본의 부양률은 1.03명에서 0.96명으로 사실상 개선될 전망. 이 정도 수치면 일본은 2032년 세계에서 부양률이 가장 낮은 국가가 됨. 결정적으로 이런 동향은 일본이 노령인구를 부양할 경제적 능력이 있는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됨
- 북아메리카, 서유럽, 아시아 부국의 수치를 주의깊에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음. 불과 세계인구의 18% 가까이를 차지하는 이 세지역의 소비력은 32년까지 연평균 2% 이하로 성장하지만 액수로 따지면 모두 합쳐 무려 8조 3천억 달러까지 불어날 전망. 이것은 4.9%의 연간 성장률로 1조 8천억 달러가 불어나는 인도나 4.1%의 연간 성장률로 3조 1천억달러가 불어나는 중국과 대조적임. 따라서 성장률은 높지만 고객당 매출액이 적은 신흥시장보다는 꾸준히 실적을 올려주는 시장이 더 나은 표적시장이자 기회일 수 있음.
- 구매력 평가지수라는 개념은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그 근거도 탄탄함. 기본적으로 구매력 평가지수란 두 국가에서 동일한 양의 물건을 구입하는 데 지출되는 총액의 차이를 지수로 환산한 값임. 가령 A국은 B국에 비해 생활비가 매우 낮고 A국 사람이 B국 사람과 똑같은 물건을 현행 환율을 사용했을 때 절반의 비용으로 구입할 수 있다면 지수는 2가 됨. 모든 지수가 그렇듯 측정상의 이슈는 존재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가감이 필요하지만 이 지수는 대체로 논리적인 편이고 다양한 국가의 생활방식에 따른 구입여력을 이해하는 데 유용함. 그러나 문제는 일각에서 구매력 평가지수를 사용해 시장가치를 평가하는 경우임. 이것은 결코 현명한 방법이 아님. 간단한 예를 통해 그 위험을 확실히 알 수 있음. 평균적인 중국의 도시가구가 주류 소비에 연간 247달러를 지출한다고 가정하고, 이 지출액에 도시 가구수를 곱하면 전체 시장 규모는 610억 달러가 됨. 이것은 달러 환율을 적용할 때 한해 동안 낼 수 있는 매출액임.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수치에 구매력 평가지수값(1.52)를 곱해서 시장가치가 610억 달러가 아닌 920억 달러라고 이야기함. 이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계산임. 우리는 지출되는 돈의 액수가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함. 달라지는 것은 구할 수 있는 물품의 가치임. 중국에서 1달러를 지불하고 미국에서 1.52달러를 지불한 것과 같은 양의 음료를 구입할 수는 있지만, 중국에서 그 음료를 판매하는 사람이 1.52배의 매출을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님. 현실적으로는 중국에서 1달러를 벌 뿐임. 단지 중국에서의 상품가격이 미국가격의 65%라는데 차이가 있음. 이는 중국에서 판매되는 브랜드의 가격이 미국에서 판매되는 가격의 65%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판매량과 총매출이 감소할 것이라는 뜻. 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음. 첫째, 국제적인 음료 브랜드가 중국 시장에서 의미있는 판매량과 총매출을 달성하려면 생산비용과 가격을 현지 제조업체 수준으로 낮추어야 해서 수익에 큰 영향을 끼칠 것임. 둘째, 시장가치는 원래의 수치인 610억 달러이지만 그 시장가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많은 양을 판매해야 함. 따라서 총매출과 단위당 수익이 낮아지게 됨
- 전세계 4가구 중 3가구 가까이는 연간 2만 5천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생활함. 이 71%의 가구는 세계 소득의 17%를 차지함. 반대로 표현하자면 29%의 가구가 전세계 소득의 83%를 벌어들인다는 뜻.
- 다가올 20년 동안 연소득 5만~10만 달러인 전체가구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3%에서 16%로 높아지는 반면에 3대 부유지역인 서유럽, 아시아 부국, 북아메리카의 비율은 12년 80%에서 32년 60%로 낮아질 전망.
- 다가올 20년 동안 이 책에서 다루는 국가와 지역내 전체 가구의 총근로소득 규모는 12년 52조 3180억 달러에서 32년 80조 8760억 달러로 증가할 전망
- 현실적인 중산층의 정의에 따르면 10년 실질가치 기준 중산층 가구수는 1억 7300만 가구에서 32년 2억 8800만 가구로 66%증가할 전망. 이러한 증가분 54%는 중국에서, 12%는 인도에서 나올 것으로 추정됨
0 12년에는 약 17%의 중국가구가 1만 5천달러 이상을 벌었고, 이들은 중국의 전체 가계소득 중 48%를 차지. 32년이면 그 비율은 전체 가구의 55%로 상승하고 이들이 중국의 전체 가계소득의 89%를 차지하게 될 것임.
- 총매출 성장을 극대화하려는 기업은 소비자 연령이 40세 이상이며 연간 가계소득이 5만달러를 넘는 가구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 해당 계층은 12년 전체 소비자지출의 37%와 다가올 20년간 전체 소비자지출 증가분의 45%를 차지. 다른 어떤 연령과 소득계층도 같은 기간 중 이 정도의 성장폭을 보일수는 없을 것임. 개도국에서 늘어나고 있는 가계소득 1만5천~5만 달러인 25~39세 집단의 젊은 중산층에 엄청난 기회가 있다는 주장도 수치를 보면 근거가 빈약함. 개도국에서조차 인구는 점차 노령화 되고 있어 가구수 기준 계층 규모가 더이상 커지지 않고 있는 데다. 이 소득계층에 집입하는 숫자만큼 거의 비슷한 비율이 더 높은 소득 계층으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 더구나 젊은 중산층의 1인당 지출액은 앞에서 정의한 40세 이상의 연간 가계소득 5만 달러 이상인 계층보다 훨씬 낮은 편. 따라서 수익은 물론 총매출 잠재성도 견줄만한 수준이 못됨. 두번째 시사점은 가처분적 성격이 높은 항목에 대한 지출 총액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반면에 소득수준 10만 달러 이상인 가구의 경우 지출액이 기대만큼 빠르게 증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지출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서 재량소비 대신 저축을 택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함. 10만 달러 이상의 소득계층보다 5만~10만 달러 계층에서 재량소비의 성장률이 더 높게 나타날 것임. 이것은 부유층이 필요충분한 상태에 도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실질적인 지표임
- 세금과 사회복지 비용 사이에는 분명한 상쇄관계가 존재. 가령 세금이 낮은 국가는 저축률이 높아서 세금과 저축을 제외하고는 남는 지출액이 세금이 높고 복지서비스가 잘되어 있는 국가와 거의 비슷한 수준. 이 지출 비율의 유사성은 주거비용을 포함시켰을 때 더욱 높아짐. 모기지 제도가 없어서 저축을 하는 경우와 모기지 제도를 이용해 대출금을 갚아 나가는 경우 차액이 실질적으로 상쇄되기 때문. 한 국가의 상대적인 가계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주거, 의료, 교육에 대비하기 위하여 세금과 저축비용을 제외하고 나면 기타항목에 지출할 수 있는 비율이 대략 소득의 50%인 것이 현실임
- 3인가구에서 2인가구로의 이동은 단순한 과정이지만 1인당 소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침. '12년 평균 도시가구의 세전소득이 8만 6652위안이라고 칠때, 자녀 없는 가구의 1인당 세전소득은 4만 3326위안(6800달러)가 되고, 자녀가 1명 있는 경우 2만 88898위안(4500달러)가 됨. 무려 50%에 달하는 격차임. 이러한 빈둥지 가구는 건강에 좋은 양질의 식품, 개인 위생용품, 건강관리, 차량, 여가 등 가처분 항목에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의 비욜이 높음. 그러므로 지난 몇년 동안 이런 제품의 시장이 꾸준히 성장해왔고 가까운 장래에도 성장을 계속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함. 빈둥지 가구의 수는 '12년 2억 3200만 가구에서 '32년 2억 9천만 가구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 기간중 도시가구의 세전 실질소득은 연평균 4.9%씩 증가할 것임.
- '12년 기준 주민 20만명 이상의 도시 862개 가운데 64개 도시에 부유한 소비계층의 5만가구가 밀집되어 있음. 중국의 부가 그 정도로 편중되어 있는 것이다. '32년이면 상위 210개 도시에 전체 소비계층 가구의 69%가 거주할 것이고, 그 가운데 가장 작은 도시에 10만 가구가 밀집될 것임. 부는 분명히 퍼져나가겠지만 비교적 집중된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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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골드만삭스를 떠난 이유

저자
그레그 스미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4-2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금융기업들은 어떻게 당신을 이용하고, 농락하고, 기만하는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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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JP모건에서 아주 잘나가던 사람들이 회사를 나와 독자적 헤지펀드를 시작하면 허우적거릴까? 그들은 더이상 다른 모든 사람의 카드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 불공평한 혜택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할 경우에는 더이상 비대칭적 정보도 없고 대성공도 불가능함. 월스트리트가 가장 강하게 꺼리는 개혁들은 그것이 가장 수익성 높다는 사실을 아는 영역, 바로 불투명한 파생상품과 프롭트레이딩임. 그러나 이것들은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저해하는 가장 위험한 영역이기도 함. 월스트리트 로비단체들은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수단들을 무효화하기 위해 이미 3억달러를 썼음. 정부는 볼커룰이라는 규제로서 금융기관들이 더이상 정보착취를 이용해 고객들은 상대로 투자하는 프롭트레이딩을 못하도록 막았음. 그러나 월스트리트는 투명성을 혐오하기에, 그런 규제집단들의 접근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을 것이다.
- 세계는 08년이 되어서야 금융위기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07년에 위기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특히 고객에게는, 금융기업들이 당신의 자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리라고 믿는가? 당신의 돈을 자신의 돈처럼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세계는 08년이 되어서야 금융위기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고객들은 탄광속의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였음. 우리 데스크에서는 07년에 위기를 보기 시작했음. 나머지 넓은 세계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내 고객 상당수가 07년 여름에 폭발하기 시작했고, 거대한 퀀트 대붕괴사태가 벌어짐. 이것은 그로부터 어떤 일이 닥칠지를 보여주는 전조와 같았음.
- 회사가 누구와 연루돼 있든 관계없이 골드만삭스와 월스트리트는 고객들의 공포심과 탐욕을 요리하는 데 정말 능숙해지고 있었음. 장사를 하기 위한 호객행위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짐. "세계가 분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보호해주고 당신의 동료보다 더 나은 실적을 낼 수 있게 도와줄 마법같은 묘책이 필요합니다. 당신을 위해 특별 제작된 이 구조화 상품을 거래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곳에도 마법같은 묘책 따위는 없다는 것이었음. 물론 이런 고객들은 이같은 상품을 거래할 만큼 얼이 빠져 있었음.
- 당신은 분명 금융위기를 기억할 것이다. 위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니까, 여전히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까지 궁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때까지 왜 아무도 몰랐을까? 왜 대처하지 못했을까? 사실 금융기업들은 알고 있었고 대처하려고 애썼다. 고객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대처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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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자라는 곳 그리고 거품의 본질

저자
가렛 가렛트 지음
출판사
레디셋고 | 2014-05-3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금융과 인간 심리 사이의 미묘한 메커니즘을 조명한 투자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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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완성된 이후 그 10만명의 인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음. 그들은 실업자가 되었을까? 아니면 본업인 농부로 돌아갔을까? 만약 그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돌아갔다면 오늘날로 따졌을 때 이 나라에서 4백만~5백만명이 갑자기 산업에서 농업으로 복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임. 어쨌든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이 끝났을 때, 이집트에는 놀랄만한 통계자료도, 일간신문에 등장하는 무너지는 지표들도, 주식시장 공황도, 은행이 파산하는 일도 없었지만, 실업과 맹목적인 사회적 혼란, 빈민증가와 같은 경제위기라고 불러야 할 일들이 발생했을 것임. 그리고 이런 위기는 그후 발생한 다른 모든 위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생산한 것들을 소비하거나 사용하지도 못하고 돌무더기에 노동력을 착취당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고 해도 어슴푸레하게 알고 있던 사람들, 즉 잊혀진 자들에 의해 마지막 부분까지도 흡수됨. 이 피라미드 이야기에는 우화에서나 찾을 수 있는 보편적 지혜가 담김. 이집트 문명이 끝난 이래 거쳐 지나간 세상들과 우리의 세상이 독창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모든 새로운 형태, 방법 및 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잊혀진 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여전히 우리의 체계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윌리엄 섬너의 고전 에세이에 있는 잊혀진 자에서도 같은 이유로 일어나고 있음. 이제는 말만으로 노동력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유일무이한 파라오는 없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자유의 몸이며 일한만큼 임금을 받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갖고 있는 노동력과 자재에 대한 통제력을 통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권력강화를 향한 욕망은 항상 존재했고, 매우 이기적이고 비경제적인 방법으로 욕망을 추구한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고대시절가 다를바가 전혀 없다.
- 빌리고 빌려주는 것은 내것과 네것의 관념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므로 단순하게 생각하면 신용도 꽤 오래된 것임. 하지만 현대에서 신용은 우리가 알다시피, 혹은 안다고 생각하듯이 새롭고 놀라운 힘이고 아직 진화하고 있으며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것임. 사람들은 신용을 통제하거나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신용의 힘을 발산하거나 신용을 이용해 착취하고자 하는 것에 안달해 왔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예전 파라오가 가졌던 노동력과 자재에 대한 통제력이 없이 개인적이거나 공공적인 권력강화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이 시대에도 신용에 대한 통제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
- 파라오가 노동력과 자재에 대한 통제력으로 하나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면, 오늘날 신용은 수천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한다. 당신은 오늘날의 피라미드를 찾을 때 파라오가 지은 것과 정확히 같은 형태를 찾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피라미드는 무한히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많은 피라미드들은 명백히 보이지만, 몇몇은 유용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나 전자처럼 그렇게까지 명백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고, 몇몇은 아예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중 보이지 않는 종류가 가장 파멸적이다.
- 어떤 제품에 대한 수요의 가능성을 넘어선 산업의 과잉건축은 파멸적인 신용을 의미. 여기서 권력강화의 정신은 마치 생물학적 법칙인 것처럼 행동함. 각각의 개별적인 조직은 한나라 내의 같은 분야의 산업 안에 있는 다른 조직들보다 더 커지려 노력하고, 한 나라의 산업 전체는 다른 나라의 경쟁산업보다 커지려고 노력함. 이는 점점 더 많은 신용의 혜택으로 계속됨.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너무 많은 신용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은 세계의 산업기계들 안에 갇히고, 동결되고, 고정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이 기계의 모든 생산품을 해당 산업이 그 빚에 대한 이자를 갚을 수 있게 해주는 가격에 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의 독창성이 아직 고안하지 못한 가장 복잡한 피라미드의 형태일 것이다. 이를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 당신은 이것을 극도로 부조리한 관점에서 보아야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세상 자본의 절반이 신발을 만드는 기계에 투자되었다고 생각해보자. 하루에 세상에 존재하는 발의 갯수보다 신발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기계이지만 세계 자본의 반에 해당하는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신발가격이 너무 비싸게 책정되어 버려 아무도 그 신발을 살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결론은 신발을 과잉생산하는 데에 투자된 모든 자본을 잃은 것이 된다. 세계 자본의 거의 절반이다. 절반에 못 미치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이 적절하게 투자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 자본을 정말로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이 자본이 의미하는 노동력을 잃은 것 역시 의미한다. 과도하게 신발을 만드는 기계 대신에 그 노동력이 생산할수도 있었을 모든 수요 물품들을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다.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파괴한다 해도 낭비된 이집트의 노동력을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신이 그 기계를 해체한다고 해서 노동력을 회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들, 그것은 무엇인가? 29년 폭락했던 주식시장처럼 미쳐 날뛰는 주식거래 투기가 이런 종류의 피라미드이다. 이 피라미드의 돌은 탐욕이고 과대망상이며 광기이다. 이것의 징표는 아직 벌지 않았거나 앞으로도 절대 벌 수 없는 이윤을 포함한 현실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들의 법적 소유권의 파편과 허구를 나타내는 인쇄된 종이조각들이다. 전부 평가하기 힘든 것들이다. 위아래가 뒤집혀 혼란스럽고 오래가지 못할 피라미드는 그 자신의 속도로 인해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피라미드는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신용을 점점 더 집어삼켰고, 신용은 그 속도를 키웠다.
- 만약 은행이 10대 1의 비율로 신용을 증식했다면, 그의 예금주들이 그들의 돈을 찾아갈 때 그는 신용을 같은 비율로 줄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의 손에서 떠나는 1달러마다 그는 10달러의 신용을 어디선가 회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빠른 속도로 운용되던 방대하고 민감한 신용의 작동방식이 갑자기 끽끽거리는 기어의 끔찍한 소리와 함께 역방향에 놓이는 것이다. 당신이 앉아있던 작은 지방은행으로 돌아가자. 예금자들이 예금인출을 계속할수록 은행은 신용을 회수해야 한다. 첫번째로 거대한 뉴욕시 은행에 전화나 전신으로 "신용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신용이 필요합니다."라고 통지하는 것임. 하지만 뉴욕은행이 지방은행으로부터 빌린 신용을 다른 곳에 다시 빌려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그 뉴욕은행은 빌려주었던 신용을 순차적으로 회수해야 함. 만약 뉴욕은행이 신용을 증권거래소의 브로커들에게 빌려주었고, 브로커들이 투기꾼들에게 빌려주었다면 투기꾼들이 신용을 돌려주어야 함. 하지만 신용이 유래된 전국 수천개의 지방은행들이 동시에 뉴욕은행들에게 신용회수를 요청하고, 증권거래소에 신용을 제공한 뉴욕은행들이 모두 동시에 신용이 회수되기를 요청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렇게 되면 증권거래소의 브로커들은 골치가 아파진다. 그들은 지금 신용의 원천이 수축되고 있기 때문에 회수요청을 받은 신용을 대체할 수 없다. 사실이 이렇기 때문에 브로커들은 주로 투기꾼들인 고객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죄송스럽고 끔찍한 이야기지만 더 이상 신용이 없습니다. 은행이 우리의 대출에 대한 회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여러분의 증권을 신용으로 갖고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15분 이내에 현금으로 지불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 증권들을 당장 팔리는 값에 매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증권거래소에 새로운 공황이 발생하여 붕괴가 더 심해지고 신문에는 흉측하게 커다란 헤드라인이 걸린다. 공황은 선전된다. 소용돌이치는 증권거래소라는 피라미드가 이를 유지시킬 신용의 부재로 무너진다. 이것은 결과가 원인이 되는 악순환이다. 상상속 부의 손실이 측정되는 증권거래소의 곤두박질치며 떨어지는 가격과 정확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유들 때문에 더 많은 은행들이 도산한다. 불안해하는 예금자들의 행렬이 매일 늘어난다. 이와 같이 신용의 물줄기는 계속하여 수축하고 그 비율은 가속화된다.
- 누군가가 예금을 할 때, 그가 은행에 돈을 빌려주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돈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만약 예금자가 가져온 돈이 그가 벌어들인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노동으로 생산된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니며, 그것은 그가 소비하기보다는 저축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상징. 한 묶음의 목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음. 여분의 목재 묶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몇가지 밖에 없음. 만약 당신이 이를 미래에 사용하기 위해 보관한다면 이는 여가시간의 획득을 상징. 그러나 만약 이것을 당신이 필요로 하는 다른 무언가로 이웃과 교환한다면 이는 기초적인 물물교환에 의한 전환이 됨. 두 경우 모두 어떤 수익도 없음. 당신은 그 목재묶음을 돈을 받고 팔 수도 있음. 이때 그 돈을 모아두면 한 묶음의 목재로서의 가치만 있고 아무 수익이 없다. 하지만 그 돈을 은행으로 가져가서 이자를 받고 맡겨 놓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경우 당신은 은행에 당신의 잉여 노동력을 목재 한 묶음만큼의 값어지로 빌려주는 것이고, 거기에서 수익이 발생. 한 명의 성실한 남자가 연장도 없어 도끼, 망치, 쐐기를 사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다. 이 연장들은 당신의 목재묶음을 상징한다. 남자는 이 연장들을 이용해 세 묶음의 목재를 만든다. 한 묶음은 자신을 위해 남겨두고 두 묶음은 판다. 그리고 한 묶음을 팔아서 얻은 이득으로 그는 연장을 사기 위해 빌렸던 돈을 갚는다. 그는 나머지 한 묶음을 팔아서 얻은 이득을 아직 손에 쥐고 있게 되는데, 이는 수익이나 증가라고 보면됨. 그럼 그가 이 수익을 소비하는 대신 저축하도록 해보자 그는 이 돈을 은행에 넣는다. 전에는 한 묶음의 목재를 갖고 있었던 은행이 지금은 두 묶음의 목재를 가지게 되었다. 목재 그 자체도, 노동력 자체도 아닌 노동력을 대신하는 돈을 갖게 된 것이다. 게다가 연장들은 여전히 남자의 수중에 있다. 이 모든 것이 처음에는 여분의 목재 묶음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부를 축적하는 것이고, 노동력을 상실하지 않는 이상 한계가 없다. 또 다른 남자가 와서 빌린 돈의 전부를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는 피라미드의 의미를 지닌 장난감을 만들거나, 운이 없는 투기를 하거나 동일한 가치의 것을 생산하기도 전에 무언가를 성급하게 구매한 뒤 결국 동일한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해 이자를 지불하거나 원금을 상환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우리는 돈을 잃었다고 한다. 사실은 잃은 것이 아니다. 돈은 아직 있다. 하지만 돈이 상징하는 것을 잃었고, 그것은 두 묶음의 목재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양이다. 돈 자체에는 가치도 힘도 없다. 오로지 돈이 상징하는 것에 가치나 힘이 있을 뿐이다. 실제의 돈 1달러마다 부가 어떤 형태로든 1달러 어치씩 생산되었다는 징조이다. 그 돈에 기반을 두어 은행원에 의해 증식되는 1달러어치의 신용은 어디선가 어떤 형태로든 1달러어치의 부가 생산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부의 총합과의 관계를 저하시켜서 돈의 구매력을 손상시키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은행에 그들의 노동력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일어난 것과 같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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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한국경제 이야기. 2

저자
이장규 지음
출판사
살림 | 2014-06-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역대 대통령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제 정책을 썼을까?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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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은 더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민주화 시대는 더이상 대통령의 강한 리더십을 원하지 않았고, 노태우도 그 점에 동의. 시대환경은 의회중심으로 흘러갔고, 대통령 스스로 권력행사를 삼갔으므로 청와대의 힘은 현저히 약화되었음. 정부관료들은 노골적으로 청와대와 간격을 벌려나감. 그전 같으면 경제수석이 관계장관 회의를 주재하면 장관들은 즉각 청와대로 달려갔지만, 노태우정부에 와서는 지방출장을 핑계로 빠지기 예사. 노태우도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화 시대에 맞다며 청와대 역할과 기능을 대폭 줄였음. 여소야대 의회는 더이상 정부의 일방통행 행정을 용납하지 않음. 국회의원들도 경제분야만큼은 경제부처의 전문성을 인정해 왔으나 이제 어림없는 분위기로 바뀜. 상황이 이렇다보니 권력의 중심도 청와대에서 국회의사당으로 넘어감. 대통령이 의회를 견제할 수 있는 거부권이 있었으나 노태우는 거부권 행사에 적극적이지 않음. 그는 자신의 소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대세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편하게 여김. 경제쪽에서 가장 먼저 민주화의 뇌관이 터진 것은 노동문제였음. 앞선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유연하고 합리적인 노동정책을 펴왔더라면 노태우 정권에 와서 그토록 부작용이 심각하진 않았을 것임. 전임정권의 잘못된 노동정책이 다음 정권을 더 어렵게 만들었음.
- 3저호황 속에 거침없이 뻗어가던 한국경제는 얼마 가지 않아 적신호가 켜짐. 88올리픽의 흥분이 가시면서 경제가 속절없이 주저앉기 시작. 민주화의 열기와 흥분 탓에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사실 이상 징후는 이미 여기저기서 나타났었음. 우선 전임정권에서 2~3%로 안정됐던 물가가 노태우 정권에 들어서는 7~8%가 보통이었음. 물가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 부동산 가격 폭등까지 감안하면 일반 사람들이 직접 느끼는 물가는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음. 수출전선부터 이상이 왔음. 미국이 원화 절상을 압박하는 바람에 달러당 원화환율이 한때 666원까지 떨어지면서 수출이 눈에 띄게 위축되었음. 환율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제품의 수출경쟁력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었음. 한국경제는 어느새 이른바 저효율 고비용 구조에 빠져들었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전정권이 3저호황에도 불구하고 물가안정을 위해 지나치게 긴축재정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항만,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소홀히 하여 물류 비용이 급속히 올랐기 때문. 여기에 더해서 임금상승 부담도 가중됐음. 국제수지는 88년 145억 달러 흑자를 정점으로 줄어들어 급기야 90년부터 적자로 돌아섬. 흑자시대를 마감하고 적자가 3년 연속 계속되는데도 정부는 수출감소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 그저 왜 이렇지? 이상한데? 하는 식이었음. 한국 수출이 부진에 빠지게 된 것은 국내적으로 인건비와 물류비용이 급속히 오른 탓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 제품의 경쟁력이 강해진 것도 크게 작용. 일본의 기술과 자본, 동남아의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이 서로 결합하면서 국제협업체제를 구축했고, 미국과 유럽의 중저가 시장을 협공하는데 성과를 올리고 있었던 것. 요컨대 동남아에서 만들어진 일본 브랜드 제품이 싼값으로 나서는 바람에 메이드인코리아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음
- 중국과의 수교(92년 8월)가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소련과의 수교 영향이 컸음. 소련 수교를 성사시킨 노태우는 여세를 몰아 중국과의 수교에 박차를 가했음. 북한과 형제국가인 중국과의 협상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소련과의 수교 덕을 많이 봤음. 그러나 한국과 수교 이후 중국은 북한의 반발에 적지 않게 시달림. 만약 중국과의 수교가 2~3년 뒤로 미루어졌다면 한국이 중국시장에 진출하는 시기는 지금보다 훨씬 늦어졌을 것임. 오늘날 중국 시장 수출이 미국과 일본 시장 수출을 합친 것보다 많을 정도로 한국경제에 새로운 젖줄이 되었음을 생각하면 노태우 시대의 북방정책이 갖는 경제적 의미는 매우 큼
- 실제로 개혁 대통령이라 할 정도로 김영삼은 집권 내내 개혁작업을 계속함. 그중 최고개혁은 부정부패에 대한 개혁이었음. 그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처럼 자신을 포함한 공직자들이 부패척결에 솔선수범해야 함을 강조. 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하는가하면, 공직자 재산신고제도를 도입하는 등 공무원들의 부패를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음.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고위 공무원의 재산등록을 의무화한 제도가 이때 만들어짐으로써 한국사회의 부패개선에 두고두고 큰 역할을 함. 이 시기에 실시한 금융실명제도 경제정책보다는 부패척결 차원에서 내린 긴급조치였음. 금융실명제 실시로 가장 타격을 받게 된 곳은 기업들보다 정치판이었음. 가장 고질적인 부패의 고리가 정치자금이었는데, 실명제 실시로 정치자금의 움직임이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 것. 물론 김영삼의 아들과 주변인물들이 비리 스캔들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감옥가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음. 그러나 공직자 재산등록제도나 금융실명제 등 이 시대에 구축된 제도적 장치가 한국사회의 투명성을 높이는데 결정적 계기가 됨.
-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을 때의 경제는 어떠했을까. 첫 경제부총리 이경식이 취임직후 한 말은 93년 초 경제상황을 잘 요약해 줌.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경제는 경쟁력 약화와 함께 성장활력이 크게 떨어졌다. 정치 민주화에 상응하는 경제윤리가 새롭게 따르지 못했고, 부동산 투기 등으로 계층간 갈등이 심화됐으며, 각종 규제로 기업의 투자의욕이 크게 위축됐고, 넷째 사회전반적으로 왕성했던 의욕과 자신감이 상실된 것이 이유다. 게다가 중국과 동남아처럼 새로운 경쟁상대국들이 부상하는 등 92년 하반기 이후 한국경제는 구조적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 원래 김영삼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이 아님. 특히 숫자가 있는 보고서를 싫어했으며, 구체적 사항에는 관심이 없었음. 물론 김영삼도 대통령에 당선되기위해 후보시절에 경제를 공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함. 텔레비전 토론을 준비할 때도 경제분야 공부를 꺼려서 가정교사 박재윤이 애를 먹음. 김영삼은 원래부터 거시정책이나 미시정책이나 하는 경제용어를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런 것은 전문가나 직업관료에게 맡기면 된다고 여딤. 아마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신경제 5개년 계획이 그토록 허망하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임.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YS노믹스에 해당하는 신경제 5개년 계획이 힘도 한번 못써 본채 흐지부지된 가장 근본적 이유는 김영삼 자신이 경제에 대한 이해나 열정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 그렇다고 김영삼이 경제를 무시한 대통령은 아니었음. 취임사에도 밝혔듯이 그는 나름대로 한국병을 치유해야 경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점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음.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해서 다른 대통령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경제개혁 정책을 훌륭히 실현할 수 있다고 자신. 특히 대통령이 우유부단해서 해야 할 것을 못하는 일은 자신의 임기중에는 없다고 장담함. 전임 대통령 노태우와 다르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했음.
- OECD가입을 계기로 자본시장을 과감히 개방했고, 신생 종금사들이 홍콩 금융시장에서 외자를 끌어들여 한국기업에게 빌려주는 일도 예사로 벌어졌음. 그들은 돈만 빌려 오는 것이 아니고, 대박을 노리고 위험부담이 높은 싸구려 정크본드를 대량으로 사들이기도 했음. 국내 금리보다 낮은 외채가 들어올 수 있게 되자 기업들은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등의 신규사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고, 부채비율은 350~400%로 높아짐. 그러나 원화가치가 계속 유지되는 한 기업은 외채를 많이 빌릴수록 좋았음. 재수가 좋으면 싼 금리에 더해 환차익까지 누릴 수도 있었음. 외국투자자도 설마 한국에 돈을 떼일까라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한국기업들에게 돈을 빌려줌. 수출이 줄어들어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는 데도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원화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던 것임. 일본의 엔화나 중국의 위안화는 같은 기간에 20~30%씩 절하되는 판에 유독 한국의 원화만 3년 내내 평균환율이 달러당 800원대를 유지됐으니 수출은 죽을 쑬 수밖에 없었음. 그런데도 김영삼 정부는 아랑곳 하지 않음. 수출은 부진한데 소비재 수입이 급증하고 해외여행 자유화까지 겹체 급기야 96년에는 237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 외환보유고에 육박하는 적자를 낸 것. 다른 한편에서는 금융기관들이 해외영업 규제에서 풀려 마음대로 외자를 끌어들임. 그것도 정부가 장기차입은 규제하고 단기차입만 허용했기 때문에 1년만기 이하의 단기 외채 도입이 크게 늘었음. 이렇게 총 외채는 93년 439억불에서 96년 1,047억 불로 급속히 불어남. 이처럼 불길한 징조가 완연한데도 환율이나 금리에 대한 정부정책은 일관성이나 정리된 입장이 없었음.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은 항상 의견이 엇갈렸고, 바뀌는 장관이나 경제수석마다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 한쪽에서 수출경쟁력을 위해 환율을 올리자고 주장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기업들의 외채상환부담 가중을 내세워 반대. 이견이 다른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견들을 조정하고 결론을 내려주는 시스템도 사람도 없다는 것이 문제. 더구나 환율인상(원화가치 절하)을 공론화하지 못한 배경에는 국민소득 1만달러 달성 차질을 염두에 둔 정치적 압박이 작용하고 있었음.
- 외환위기 원인정리
(1) 빚더미 기업(부채비율 400%이상)들이 무모하게 외채투자를 벌임
(2) 정부는 OECD 가입에 급급한 나머지 개방정책을 무분별하게 추진
(3) 의회는 대통령 선거에 눈이 멀어 정부정책에 딴죽걸기만 일삼음
(4) 노조와 시민단체들은 노동자 권익을 주장하며 부실기업 정리를 가로막음
(5) 국제투기자본이 여러나라에 몰려다니며 국제금융시장에 심각한 불안을 가중시킴
그러나, 결정적 문제는 대통령의 리더십. 대통령이 최소한의 위기수습 능력을 발휘했더라도 국가부도 위기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 수 있었음. 사실 경제분야의 대통령 리더십문제는 노태우권부터 불거졌음. 소위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 생겨나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이해상충의 문제를 잘 조화시켜 나가야 하는 새로운 대통령 리더십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
- 돌이켜보면 국가부도 위기가 처음은 아니었음. 70년을 전후로 차관기업들이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다가 무더기로 빚더미에 올랐을 때 사채동결조치로 위기를 넘긴일이 있었고, 이후 중화학공업 과잉투자와 석유파동, 대통령 암살 등이 겹쳐 80년에 또 한차례의 큰 위기에 몰렸었음. 그러나 모두 독재정치 시대에 일어났던 상황이었고, 위기대처 또한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일사불란하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음. 부작용이나 반대가 있더라도 방향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이었음. 그런 뜻에서 97년 외환위기는 종래 개발연대식의 대처가 애당초 불가능했음. 박정희와 전두환이 풀었던 위기해법 방정식보다 김영삼이 풀어야 했던 방정식은 훨씬 어렵고 복잡했음.
-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김대중 정권하에서 여러가지 개혁을 이루었음. 그러나 김대중이 의도한 개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이 개혁은 김대중의 개혁이라기 보다는 IMF개혁이라 부르는 게 옳다.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이지만 한국정부의 개혁의지가 아니라, IMF의 강력한 압력이 변화에 결정적인 개혁의 엔진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과거와 비슷함.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맥아더 사령부가 패전국 일본의 과거를 해체하고 변화와 개혁의 판을 다시 짰던 형국과 비슷한 점이 많았음. IMF가 구제금융만 해주고 개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정부는 어떤 정책을 폈을까. 30대 재벌의 절반이 무너지고 5개 시중은행이 모조리 간판을 내리는 사태가 벌어졌을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 과거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처럼 충격적 개혁을 우리 스스로 시도한 적은 없었음. 재벌개혁이든 은행개혁이든 훨씬 온건하게 진행되었을 것임. 특히 개방정책은 분명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소극적으로 진행했을지도 모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무자비한 초강력 긴축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외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음. 더욱이 지방은행 하나도 부도를 내본 적 없는 한국정부가 시중은행 간판을 내리게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음. 결국 IMF가 강요한 구조조정이기에 피를 철철 흘려가면서도 엄청난 대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음. 어쨌거나 재벌개혁, 금융개혁, 정부개혁, 노동개혁 등 4대개혁을 내걸고 김대중은 IMF의 약속을 실천에 옮겼으나 부문마다 사정이 달랐음. 개혁은 주로 재벌과 금융기관에 집중됨.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관치금융 속에 뿌리내렸던 권력과 재계의 유착관계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는 것.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거래은행이 눈감아주고, 국회의원이 압력을 넣는다고 계속 대출을 해주는 일이 근절되었음.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하는 기업은 부도처리를 당해야 했고, 은행도 자기자본이 일정기준 미만이면 문을 닫아야 했음.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이렇게 원칙대로 해온 일은 없었음. 뭐니뭐니 해도 기업들이 빚으로 사업을 마구 벌이는 차입경영 습관이 뿌리째 뽑혔고, 은행들은 전당포식 낡은 금융관행이 크게 변화. 500%에 달하던 대기업 부채비율이 100%로 급격히 줄었는가 하면, 은행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간섭도 확 줄어듬. 불신의 대상이던 한국기업들은 회계장부 작성을 국제기준으로 끌어올렸고, 감시감독 제도가 강화되면서 경영의 투명성이 현저하게 높아짐. 외국인들이 은행을 비롯하여 땅과 주식도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됨. 이처럼 외국인 투자가 보편화되면서 기업의 투명성 문제는 좋은 싫든 개선될 수 밖에 없었음.
- 한편 IMF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김대중의 지론이었던 대중경제론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IMF에 시종일관 끌려다니기만 한 것인가. 개혁의 주도권이 IMF에 있었으나, 그 내용이 김대중의 경제철학과 소신에 꼭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음. 우선 대중경제론 자체가 그동안 변해왔지만, 김대중의 생각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많이 달라짐. 더구나 자신이 늘 주장하던 것이 관치금융 폐지와 재벌규제, 자유로운 시장경제였는데, 이는 IMF가 한국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는 개혁의 핵심과 일치. 그러고 보면 뜻하지 않게 김대중의 개혁의지를 뜻하지 않게 IMF가 대신 비난을 무릅쓰고 실현시켜 준 셈
- 김대중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공기업 개혁이 용두사미가 된 배경에는 노조의 반발이 결정적이었음. 김대중은 평소에 공기업의 비효율과 저생산성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자신이 집권하면 반드시 민영화를 통해 경쟁원리를 도입시키겠다고 장담. 공기업을 민영화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소신은 오래전부터 국영기업체들은 독재정권의 일부라고 생각해왔기 때문. 그런데 막상 자신이 집권한 후 추진하던 민영화가 노조의 반발에 걸려 무산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아무튼 그는 집권 내내 노동자 편에 서서 가장 많은 정책을 폈던 대통령이었음. 처음으로 노조의 정치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민노총과 전교조를 합법화시켰으며, 공무원의 노조활동에 정당성을 부여. 그럼에도 대화와 타협의 장에 참여해달라는 김대중의 요청을 노조는 끝내 거부. 김대중은 노조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갔으나 이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일은 없었음. 다만 재임기간중 마지막 노동부 장관에 노조운동 준법을 강조하던 방용석을 기용함으로써 자신의 노조관에 변화가 왔음을 보여줌
- 김대중 정부는 구조조정 작업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경제에 새 살을 찌우기 위한 강력한 부양책을 펴기 시작. 국가적으로도 먹을거리를 제공할 새로운 산업을 찾아야 했는데, 인터넷을 중심으로한 IT산업이 그것이었음. IT산업은 운도 따랐다. 마침 미국을 중심으로 닷컴 비즈니스가 붐을 일으켰고, 국내여건도 전두환시대 이후 닦아 놓은 통신산업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서 IT산업 육성 정책의 여건은 잘 조성됌. 정부는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 구축 등을 비롯해 기업지원책을 적극적으로 늘렸고,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IT창업 자금지원을 대폭 강화했음. 강남 테헤란로 일대가 한국이 실리콘 밸리로 불렸던 것이 이때부터임. 99년 후반부터 소위 벤처창업이 봇물처럼 터지자 언제 국가부도위기를 당했느냐는 듯이 한국경제는 순식간에 달아오름. 그해 연말 증권시장의 종합주가지수는 1000을 돌파했고, 벤처기업들이 주식을 거래한느 코스닥을 모르면 촌놈이엇다. 닷컴이란 이름만 붙이면 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오름. 경기를 살린 것은 벤처회사만이 아니었음. 정부는 얼어붙은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신용카드를 적극적으로 권장. 현금대신 카드를 사용하면 세금을 깎아주는 제도를 도입하는가하면, 카드사의 현금서비스 한도도 철폐. 부동산 경기를 살리기 위해 아파트 전매금지를 비롯해 그동안 실시해온 규제란 규제도 죄다 풀었다. 금리도 빠른 속도로 내렸음. 이자부담 때문에 은행돈을 못쓴다거나 은행문턱이 높다는 말도 사라짐. 보통 연간 금리는 10%가 넘었는데 3~4%대로 떨어진 것. 자기돈으로 집을 사면 바보란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 집값이 오르고 투기가 일더라도 하루빨리 경기를 살려내는 것이 정부의 급선무였음. 이 같은 노력의 총집결을 통해 IMF 조기졸업을 박수갈채 속에 이뤄낼 수 있었던 것. 그러나 문제는 뒤탈이었다. 우선 2000년부터 미국의 닷컴 버블이 진정되자 곧바로 한국의 닷컴회사들에 영향을 미침. 하늘높은 줄 모르던 벤처기업들의 주가는 어느날 갑자기 폭락세로 뒤집혔고, 테헤란로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섯던 중소창업회사들은 여기저기서 무너짐. 01년 미국 9/11 테러사태까지 겹쳐 세계경제가 하락하자, 결국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99년 10.7%까지 회복했던 것이, 01년 4.0%로 떨어짐
-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출범 당시 충분한 준비가 없었으며, 특히 경제분야가 그러했음. 그의 주분에는 비판을 전문으로 하거나 운동권 사람들만 수두룩했지, 실제로 정채을 입안하고 책임지고 실행해본 경험을 지닌 행정전문가들은 드물었음. 물론 대선과정에서 기존 보수후보들과는 달리 서민복지를 앞세웠고 성장보다는 분배에 무게를 두는 과감한 개혁을 약속했으나, 막상 국정을 책임지면서 이내 간단치 않음을 깨달음. 오죽하면 노무현은 재벌기업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를 소문나지 않게 찾아가서 코치를 받고, 그들이 만든 보고서를 경제운영의 참고서로 삼았겠는가. 그러나 노무현이 추구하는 국정방향은 분명한 자기색깔이 있었음. 그의 경제관은 비록 다듬어지지는 않았으나 몇가지 점에서 명료했은. 무엇보다 박정희식 경제정책이 빚어낸 불균형과 왜곡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 요컨대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을 분배와 복지우선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음.
- 집권 첫해 03년 경제성적표가 나오자 노무현은 큰 충격을 받음. 경제성장률은 3.1%를 기록했는데, 일자리는 3만개 정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 경제성장률도 02년 7%에 비해 크게 둔화된 것도 충격이었지만, 일자리의 절대 숫자까지 줄어든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음. 성장을 하는데도 고용이 늘지 않는다는 이른바 고용없는 성장이 현실로 다가설줄은 노무현은 미처 예상치 못함. 이때부터 노무현은 선거때 주장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기 시작.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복지예산을 늘리는 게 아니라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일자리 창출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복지정책이요, 이를 위해서는 성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경제방정식을 비로소 인식. 그의 참모들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03년 고용없는 성장을 경험한 이래 노동시장 정책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물꼬를 틀었다. 무조건적인 성장우선 방식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북유럽식 복지체제를 추구하다가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경직되는 것도 피하자는 것이다."
- 집권중반에 접어들면서 노무현의 노조관은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었음.
(1)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노조의 투쟁방식은 과거 독재 탄압시대와 다를 바 없다
(2) 대기업 노조들이 집단이기주의와 귀족화 현상을 보인다
(3) 정작 보호받아야 할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는 오히려 소홀해졌다
(4) 노조의 불법파업이 너무 잦아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 한미 FTA는 미국의 개방압력으로 시작된 게 아님. 당시 미국은 한국과의 FTA에 시큰둥했으나,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추진됨. 초기 단계에서 한국 실무자들이 미국측과 협상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것이 결실을 볼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무엇보다 참여정부의 성격이나 정책기조로 봐서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개방정책이라고 여겨졌기 때문. FTA의 경제적 효과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가뜩이나 반미성향이 뚜렷한 노무현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랬던 것이 예상을 깨고 노무현이 앞장서 미국과의 FTA를 밀어붙였던 것. 노무현이 한미 FTA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극히 비정치적이고 실무적 차원에서 비롯됌. 통상산업본부장 김현종으로부터 한미 FTA 관련 보고를 받고 나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한번 결심이 서자 주저하지 않고 추진
- 노무현 정부는 돈줄 조이는 정책은 외면한 채, 왜 세금폭탄 정책에만 의존했을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 첫째, 돈줄을 조일 경우 경기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을 우려. 노무현 정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경제가 아무리 나빠도 부양책을 쓰지 않겠다는 정책의지를 밝혀왔는데, 사실 이런 정책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음.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푸는 인위적 부양책을 펴지 않는다는 것이었지, 아파트 투기의 원천이었던 주택대출제도는 그대로 방치했던 것. 둘째, 노무현은 부동산 투기꾼을 처벌하고 손해를 보게 하려면 세금을 중가하는 징벌적 정책으로 뿌리를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 참여정권은 집권내내 부동산 문제를 경제정책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운동권적 시각으로 보았던 것. 그 결과는 실패였음. 아파트값은 물로 전국의 땅값을 잔뜩 올려 놓았을 뿐 아니라, 세금폭탄 투하로 부동산 거래 자체를 얼어붙게 하였음. 소위 말하는 지나친 세금공세로 심각한 조세저항을 초래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열우당이 패하는 중요 요인이 됨
- 노무현의 업적을 돌이켜 봐도 대화와 타협보다는 오히려 반대를 무릅쓰고 굽힘없는 소신을 관철시켜 이뤄낸 경우가 많았음. 그에게는 역시 도전이나 투쟁이 더 어울렸음. 자기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가마저 모두 아울러 끌어안고 융화하는 것이 통합을 추구하는 리더의 기본덕목이라고 한다면, 그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끝까지 다투고 이기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음. 노무현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고야 이점을 후회했음
- 이명박은 전임대통령 노무현이 경제를 망쳤다는 사회분위기의 반사이익을 많이 보았음. 김영삼 경제의 실패로 외환위기가 닥친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처럼, 노무현 경제에 댛나 실망이 경제대통령, CEO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이명박의 당선에 크게 작용했던 것
- 집권초기 이명박은 성공한 기업인, 성공한 서울시장이란 이미지를 바탕을 매사에 자신만만해 했음. 사소한 부분까지 실무자들로부터 일일이 보고받고 지시해야 직성이 풀림.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현안문제들을 따지기 시작하면 보고가 서너시간을 넘기기 일쑤였으니 보고자들은 애를 먹음. 그는 관료들에 대해 부정적 선입견이 있었음. 특히 재무부에 대한 반감은 노골적임. 그는 기업에 있을 때부터 관치금융의 습성에 젖어있는 재무관료에 대한 불신이 깊었음. 이명박 정권의 첫 금융위원장 자리에 뜻밖의 인물인 전광우를 발탁한 것도 이런 불신 때문. 원래 주변에서 금융행정 경험이 풍부한 재무관료 출신을 천거했으나 재무관료 출신은 안된다는 기본입장이 작용. 대운하 추진계획이나 4대강 사업 또한 이명박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음. 4대강 사업의 경제적 타당성을 주제로한 TV토론에 출연한 이명박은 토목공사는 내가 최고 전문가 아니냐며 비판론자들의 비전문성을 반박. 이명박은 자신이 실무에 밝다는 점을 자주 내세움. 자원개발이나 원자력 발전소 건설수주 같은 사업도 직접 나서길 좋아했고 실제로 효과를 보기도 함.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추진됐던 녹색성장 개념 또한 이명박이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음. 그는 국정전반을 조감하고 총괄한다기 보다, 개별 프로젝트의 책임 매니저 같이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스타일이었음.
- 청와대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음. 야당가 시민단체의 공격에 굴복하는 항복문서나 다름없는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고, 그것에 더해 집권 첫인사를 불과 3개월만에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수모를 겪음. 이로 인해 MB노믹스의 추진일정은 초장부터 크게 빗나갈 수 밖에 없었음. 더구나 촛불시위의 위세가 어느정도 수습국면에 들어서자 미국발 금융위기와 3차 석유파동이 터져 나오면서 이정권은 또다시 격랑속으로 빠져듬. 운으로 치면 이명박 정부는 억세게 운이 나쁜 케이스였음.
- 기세좋게 출발한 MB노믹스는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났음. 정권 출범 3개월만에 터진 촛불시위로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된 것을 시작으로 미국발 금융위기, 국제 석유값 폭등 그리고 유럽발 경제위기로 이어지는 대외여건 악화는 성장 촉진에 초점을 맞춘 747공약을 초장에 주저앉혔던 것. 세계경제가 구조적 불황에 빠져든 판국에 성장을 모토로 하는 747 공약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음. 오히려 역풍이 불기 시작. 747 공약은 졸지에 나쁜 정책으로 전락. 경제가 나빠지면 당연히 투자촉진책을 먼저 쓰기 마련인데,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 것. 종전의 경기 부양정책이 기업특혜 정책으로 매도되는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지속성장을 위해 분배와 복지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음. 마치 다시 참여정부로 회귀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음. 원인이 어디 있든 간에 여론은 급속히 이명박 정권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울었음. 대외여건 악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추진했던 기업지원책만 비판의 도마에 오름.
- 이명박은 유난히도 자주 인사문제로 비판받았음에도 특유의 자기스타일 인사를 고집. 경제분야 인사는 내가 최고의 전문가라고 확신했기에, 누구를 등용하느냐보다도 누구를 시키든 내가 직접 챙긴다는 식이었음. 부총리를 통해 경제부처 장관들을 통괄하거나, 경제수석에게 부처간 이견조율을 맡기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 각료들의 팀플레이나 장관중심의 정책운용은 애당초 없었다. 이명박은 부총리제도를 폐지하고 주요 사안들을 직접 챙김. 선거캠프 때부터 중심역할을 했던 강만수를 첫 기획재정부 장관에 앉혔으나 경제부처의 총괄이나 통솔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획재정부 장관이 뭐라 하던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국토해양부 장관은 아랑곳 없이 대통령과 직접 의견을 나누거나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이명박 정부의 진두지휘는 미국발 금융위기에 처해서 일사불란하게 비상회의를 꾸려가는 과정에서는 효과적이었음. 하지만 MB인사는 고전의 연속이었음. 단순한 인사 스타일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였음. 첫번째가 도덕성 시비. 당선자 시절의 첫 국회청문회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은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음. 소위 고소영, 강부자라는 신조어가 회자되는 가운데 부자와 재벌을 위한 정부라며 몰아붙이는 야당의 공세는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 MB인사가 고려대 출신, 소망교회 교우, 영남지역 인사에 쏠려 있음을 비아냥 거리는 데서 나온것. 국회청문회에서는 청문대상자의 자격이나 능력검증은 뒷전이었음. 청문회가 개인적 치부를 들추기 위주의 도덕성 검증에 치중했음에도 이명박은 이점을 너무 소홀히 대처. 재산이 많은게 무슨 잘못인가.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돼야한다는 그의 소신은 너무 나이브했음. 축재의 정당성을 따지는 사회적 요구가 얼마나 엄격해졌는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줌
- 역대 대통령들은 대체로 국내보다 외국에서의 평판이 더 좋음. 이명박도 그러했음. 국내에서는 747공약의 좌절이나 촛불사태 등으로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졌지만, 해외에서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석유파동, 유럽의 재정위기 등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지도자로 그를 치켜세움. G20정상회담 서울 개최를 주도함으로써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를 이끌던 G7체제가 새롭게 진화하는 길목에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괄목상대로 끌어올렸다는 점 또한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만했음.
- 이명박 경제는 09년 동안 내내 미국발 금융위기의 대혼란 속에서 한국경제를 구출하는 일에 올인해야 했음. 이처럼 정부가 출범했던 08년부터 이듬해인 09년까지 광우병 사태와 국제금융위기, 게다가 3차 석유파동까지 겪어야 했으니, 747 공약은 제대로 추진할 겨를도 없었음. 그나마 위기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11년부터 그리스를 시작으로 한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연이어 덮침. 대외여건만 보면이명박 경제는 유난히도 나쁜 상황이 끊이지 않고 계속됨. 사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로서는 이같은 외부악재들에 대해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음. 그나마 한국은 대통령이 적극적인 리더십으로 대응을 잘해서 다른 나라에 비해 타격을 한결 덜 입음. 09~10년 세계평균 경제성장률이 2.2%였던 것에 비해 한국경제 성장률은 3.2%였음. 바로 이점에서 국내평가가 국제적 평가보다 훨씬 인색했음. 여론은 대부분 위기극복을 주도한 이명박 리더십에 대해 긍정적 시각보다 당초의 747 공약 실패를 비판. 대통령이 경제운영을 잘해서 위기를 넘겼다는 소리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음. 일반의 관심은 위기극복은 당연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일자리 문제, 다시 고개를 든 인플레이션, 서민들에게 직접적 타격을 주는 전세값 폭등 등 눈앞의 현안들이었음.
- 이명박에 대한 평가는 억울한 구석이 많음. 비록 당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 배경에는 국제경제 악화가 결정적이었으며, 고용없는 성장이나 양극화 심화문제 또한 혼자서 그 책임을 뒤집어쓸 일은 아님. 본인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경제살리기에 매진한 대통령이었따고 자부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명박은 왜 비판의 대상이 됐고, 노무현은 왜 명예롭게 부활한 것일까. 노무현 정부때보다 이명박 정부에 와서 객관적으로 더 나빠진 것이 첫번째 이유. 여기에 더해 이명박의 정책수정 결과가 노무현이 추구했던 것을 뒤늦게 따라갔다는 것이 둘째 이유. 다음 정권이 전임정권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태도를 바꿔 따라한다는 것은 결국 전 정권의 정책이 옳았음을 입증해주는 꼴. 노무현 부활론도 그런 맥락에서 나옴. 결과를 놓고 보면 그럴만 했음. 이명박 정권에 와서 경제가 더 악화된 것도 사실이고, 취임 첫해를 보낸 이후 이내 성장 위주 정책에서 분배 및 복지 정책으로 기조를 급선회한 것도 맞음.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고 친기업론을 강조하던 대통령이 어느날 갑자기 친서민가 윤리경영을 내세운 것도 사실. 동반성장 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비정규직 문제로 기업들을 압박하고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것은 원래 참여정부의 단골메뉴였음. 그러나 이런 이슈가 갑자기 생겨난 문제는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함. 양극화 해소는 사회통합 문제는 노무현의 적절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는 실패했던 사안. 도리어 집권기간 중 양극화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가진자와 없는자의 패를 갈라놓는 바람에 대립과 갈등이 더 증폭되는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이 바통을 넘겨 받았던 것. 경제가 악화되자 이에 대한 정치, 사회적 불만이 한층 더 강해짐. 다시 말해 노무현의 정책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노무현 시대에서 불거지고 이슈화되었던 양극화 문제가 국제경제 악화와 국내경제 구조의 급속한 진화로 한층 더 심각하게 부각된 것.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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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한국경제 이야기. 1

저자
이장규 지음
출판사
살림 | 2014-06-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역대 대통령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제 정책을 썼을까?해방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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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환경뿐 아니라 정치사회 여건도 북한이 남한보다 앞섰음.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눠서 점령했으나 양쪽의 사정은 많이 달랐음. 남함은 미군의 비교적 느슨한 통치 아래 정당이 난립하고 좌우로 갈라져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반면, 북한은 소련군의 치밀한 지시아래 김일성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공산정권을 구축해 나감. 많은 부문에서 북한은 남한을 앞서 나감. 46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해 사실상의 정부가 만들어졌고, 제대로 된 군대를 창설했으며, 소련한테 들여온 탱크로 탱크부대까지 만들었음.경제운영도 북한이 한수위였음. 남한은 거주 일본인을 다 쫓아냈지만,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 900여명을 강제로 붙잡아 놓고 일을 시킴. 그들이 없으면 비료공장, 철강공장 등 주요 산업시설이 당장 멈추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 제도 개혁또한 과감하게 추진.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대부분의 산업시설을 국유화. 그리고 땅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줌. 47년 말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49년에는 통일을 전제로 한 남한의 토지개혁계획까지 수립. 실제로 이듬해 6/25 전쟁을 일으켰을 때 점령지역을 대상으로 이때 준비했던 토지개혁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었음. 북한이 신속한 체제구축을 통해 일찌감치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이뤄나갔던 반면, 남한은 극도로 혼란스러웠음. 무엇보다 이념대립이 심각했음. 북한에서는 시비의 여지없이 사회주의 체제구축이 처음부터 정해진 노선이었던 반면, 남한은 수많은 정당이 자유롭게 생겨나면서 이념적으로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치열하게 대립했음.

- 일본인이 경영하던 적산기업의 수는 크고 작은 것을 합쳐 2700여개에 달했는데, 수많은 사람이 이것들을 차지하려고 미군정청을 상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열한 로비를 벌임. 철수한 일본인 기업주와 내통해서 사실상 주인행세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음.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 고문단의 코치아래 모든 기업의 국유화 조치가 일찌감치 취해졌고, 남한에서도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음. 그러나 미군정청의 기본입장은 국유화 반대였음.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은 민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결국 미군정청은 기업활동의 활성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적산기업의 일부만 민간에게 넘기고 대부분의 주요 기업들은 중간관리인만 지정한 채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음. 골치 아픈 적산기업 처리를 자기들이 처리하지 않고 새로 수립되는 한국 정부에 넘기기로 한 것. 아무튼 미군정청이 적산기업의 처리원칙을 국유화가 아닌 민영화로 정한 것이 남한 기업 역사의 시작이었던 셈. 적산기업 못지 않은 또 다른 돈벌이는 미국이 주는 원조물자, 구호물자를 확보하는 일이었음. 밀가루, 의류, 의약품 등 생필품이 중심이었고, 기름, 석탄, 비료, 면화 등 원료도 대상이었음. 미군정청은 본국에서 보내오는 구호물자를 제대로 나눠주는 것이 큰 과제였음. 그러나 무정부시대나 다름없는 해방직후의 혼란과 부패속에 구호물자들이 필요한 곳에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했음. 상당부분이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갔고, 이것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번 사람을 구호물자 벼락부자라 했음. 미국은 여러 시도 끝에 구호물자를 교회 같은 종교단체를 통해 배급하기도 했는데, 이즈음에 교회가 급격히 난립했던 배경에는 이처럼 무상으로 배급되는 구호물자 탓도 있었음. 또 다른 굵직한 사업은 일본으로부터의 밀수였음. 당시 일본을 통치했던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의 무역행위 자체를 금지시켰으나 사실상 단속이 불가능했음. 일본 상인들은 부족한 쌀을 한국으로부터 밀수입했고, 한국쪽에서는 부산항을 통해 일제 화장품, 의약품, 기계부품 등을 물물교환으로 들여왔음. 일본과의 밀무역에 이어 다롄, 칭다오 등 중국과의 무역도 성행. 47 3월쯤부터 마카오를 통한 중계무역이 그리고 뒤이어 홍콩과의무역이 본격과되기 시작. 우리는 적산기업들이 생산했던 텅스텐, 망간 등을 수출했고, 그 돈으로 페니실린, 사카린, 시계, 생고무 등을 수입. 이처럼 무역이 돈벌이의 주축으로 활기를 띠자, 해방이전부터 무역업을 했던 화신무역의 박흥식이 선두에 나섰고, 다른 조신인 기업들도 뒤따름. 대구에서 양조장을 하던 이병철도 48년 서울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에 뛰어듬

- 이승만의 경제적 관심은 오직 달러였음. 나라경제를 살리려면 달러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 부족한 생필품을 수입하는 일도, 공장을 짓는 일도, 달러 없이 되는 것은 없었기 때문. 이승만이 걸핏하면 미국과 실랑이를 벌였던 것도 바로 달러 문제에서 비롯.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 즉 환율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미국에서 얻어낼 수 잇는 달러 액수가 늘었다 줄었다 했던 것임. 원조받는 달러를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도 충돌. 이승만은 일본에서 생필품을 사다 쓰라는 미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국내에 발전소를 짓고 밀가루 공장과 비료공장들을 건설하겠다고 맞섰던 것. 원조를 통해 돈줄을 쥐고 있던 미국정부도 이승만의 이같은 고집때문에 애를 먹음. 미구긍로서는 코리아의 대통령이 영어를 잘해서 소통에는 문제가 없어 좋은데, 중요 정책들을 자기네가 시키는 대로 않고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바람에 골치를 썩임. 아무튼 이승만의 산업정책은 하루빨리 수입대체 산업을 키워서 수입을 줄이는 일이었음.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는 자급할 수 있는 제조업 기반을 키워야 한다고 이승만은 판단했음. 품질이 떨어져도 국산품 사용을 독려했고 수입은 강력히 규제. 국산품 애용과 수입품 배격은 이 시대의 중요한 범국민운동 과제였음. 따라서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자금을 부족한 물자를 수입하는 데 쓸 것이 아니라 공장 짓는데 투자하기를 바랐음.

- 농지개혁의 정치적, 정책적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 결과와 역사적 의미는 대단했음. 비록 땅값을 치른 유상몰수였다고는 하나, 왕조시대의 전통적 지주제도가 농지개혁으로 인해 일시에 해체된 것. 부작용도 상당했지만 지주제도의 해체는 한국경제의 생산구조와 분배구조 면에서 혁신적 변화를 몰고 왔음. 지주제도의 붕괴는 3년간의 처참한 전쟁을 치러내는 과정에서 더 과격하게 진행됐음. 전쟁통에 지주계급들은 피해가 컸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전쟁 인플레 탓에 토지보상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이 휴지조각이 되었기 때문. 농지개혁을 계기로 기존 농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을 기대하였으나, 애초의 의도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말았음. 지주들이 유상몰수의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은 3년 전쟁을 치르면서 엿장수들이 엿을 주고 거둬들일 정도로 그 가치가 폭락. 아무튼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공산화를 막았고, 자본주의 기틀인 사유재산제도를 공고히 다졌으며, 지주계급이 해체됨에 따라 분배구조면에서도 꾸준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음. 이것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필리핀 경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재임시절 "브라질 경제의 근본문제는 한국이 50년대에 했던 농지개혁을 아직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은 한국 농지개혁을 밖에서 보는 객관적 평가이기도 함

- 원래 5개년 계획은 장면정권의 경제관료들이 완성했지만, 발표 직전 쿠데타가 터져 사장됐던 것. 이 계획은 쿠데타로 경제 청사진 마련이 다급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음. 즉각 실무자들을 동원해서 몇군게 손질을 통해 급조한 것이 바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2~66)이었음. 박정희에게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두가지 계획을 성사시키는 데 필요했음. 첫째, 집권 6개월만에 미국 워싱턴 방무을 앞두고 있는데, 워싱턴에 가서 원조와 차관을 요청할 사업계획서가 필요했음. 둘째, 경제를 모르는 군사정권이었기 때문에 경제를 꾸릴 목표와 계획표가 있어야 했음. 그러나 두가지 모두 박정희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음. 박정희는 미정부에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열심히 설명했으나 워싱턴 당국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음. 호주머니 생각은 않고 사고싶은 물건들만 잔뜩 열거한 쇼핑 리스트라며 무시. 의욕만 앞세웠을 뿐, 내용도 조잡하고 방향도 틀렸다는 것. 미국은 애당초 한국의 독자적 경제계획에 부정적이었음. 미국은 5년간 평균 목표성장률 7.1%가 실천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숫자이며, 한국정부로서는 무리한 성장을 추구할 게 아니라 물가안정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 이는 세계은행도 마찬가지였음. 경제쪽에서 박정희에서 첫 시련과 좌절을 안겨준 것은 외자조달이었음. 자금이 없는 상태에서는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큰소리쳤던 대규모 공장건설은 불가능했음. 기업도 정부도 돈이 없었음. 몇푼 안되는 외환보유고만 축내고 있었음. 당시 정부 외환보유고는 2억달러 안팎.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첫해의 성장률이 흉작까지 겹쳐 2.2%에 그치자 박정희의 좌절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음. 경제살리기를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는데,초장부터 실패를 면치 못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음. 그로서는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음. 이후 박정희는 23개 부분에 걸친 220개 사업을 일일이 챙김. 브리핑 차트를 집무실에 걸어놓고 밤낮없이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였으나 그런다고 될 일도 아니었음. 계획자체도 엉성한데다 돈도 없으니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음. 결국 미국의 종용을 받아 목표성장률을 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실시 1년만에 계획을 수정. 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소득은 성공이 아니라 쓰라린 실패경험이었음. 박정희는 경제개발 전략의 요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수많은 조절을 통해 학습했고, 나름대로 해법을 찾기 위해 골몰. 무엇보다 사업이든 계획이든 자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엇하나 되는 일이 없음을 절실히 깨달음. 투철한 사명감과 혁명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추진하면 안될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그게 아니었음.

- 박정희 경제모델은 정형화할 수 없는 특유의 리더십과 환경적 요인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음. 정치적 화경, 그리고 박정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안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 그는 반대에 부딪히면 독재의 힘으로 밀어붙였고, 전문관료들이 소신껏 정책을 펼 수 있도록 정치적 외풍을 차단시킴. 정책 토론 과정에는 민주적 분위기를 보장해 주는가하면, 시간을 끌면서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자신이 결단함. 흉내낼 수 없는 리더십이었음.

- 정권말기를 제외하면 수출지상주의는 박정희 정권 내 경제정책의 핵심이요, 중추적 역할을 함.주무부 장관도 추진력을 으뜸으로 따져서 앉침. 심복이었던 국세청장 이낙선을 상공부 장관에 보낸 것도 세금을 걷듯이 수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밀어 붙이라는 의도였음. 관치금융, 정책금융의 대표선수가 수출금융이었음. 당시 일반 시중금리는 30%였는데, 수출금융 금리는 절반 이하로 특혜를 주었음. 한국의 은행들은 수출지원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음. 수출 뒤치다꺼리를 하다보니 금융시장이 왜곡되는 등 부작용도 많았음.

-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는 정권내내 지속되다가 막판에 와서야 제동이 걸림. 갖가지 부작용과 폐단때문이었음. 수출은 한국경제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돌파구였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인플레와 집값폭등 등 심각한 부작용을 만들어냄. 수출기업은 경제의 1등공신이었으나, 불항에 빠져드니 부실의 원흉이 됨. 더구나 싼 금리를 악용해서 수출은 뒷전이고 그 돈을 빼돌려 돈놀이를 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기업이 생기는 등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됨. 결국 2차 석유파동과 세계적 불황 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수출지상주의를 수정하기 시작. 16년 동안이나 지속했던 금융특혜를 대폭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하는 이른바 안정화 정책으로 노선을 전환

- 베트남 파병이후 보잘 것 없던 수출은 내용이나 규모면에서 모두 달라짐. 인력진출이 최고에 달했던 69년 해외진출 인력은 15500명이 넘었고, 베트남 진출기업도 최고 79개업체에 달함. 한진 그룹은 당시 베트남에 미군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업을 발전시켜 항공산업까지 뛰어들면서 오늘의 대한항공으로 발전. 훗날 중동에서 소위 대박을 터뜨린 해외건설도 우물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던 국내 건설업체들이 베트남 전쟁터에서 기초실력을 닦은 덕택이었음. 그전 같으면 국제입찰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 100만 달러만 수출해도 주목받던 시절,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수출금액의 단위도 달라지기 시작. 달러뿐 아니라 군인과 해외공사에 파견되는 노동자의 봉급 그리고 기업의 현지 사업수익 등을 모두 합치면 베트남 전잰중에 벌어들인 돈은 10억 달러가 넘었음. 현금반입, 군수품 편법 반입 등 비공식적 금액을 포함하면 한국의 경제적 소득은 공식 집계보다 훨씬 컸음. 이 같은 달러 벌이는 이후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데 주요 재원이 됨. 박정희 정권이 올린 또 다른 소득은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껄끄러웠던 미국과의 관계도 호전되었다는 점. 미국이 박정권에 대해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수출 또한 잘되는 바람에 국제 신인도는 부쩍 상승했으며, 돈 빌리기도 수월해지고,적용되는 금리도 한결 낮아짐

- 정부직제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운용임. 포철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 같은 국가적 프로젝트는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 그러나 대부분 주무부 장관들에게 믿고 맡기고 정기적 회의를 통해 전체 동향을 챙김. 월간경제동향보고와 수출진흥 확대회의가 대표적 사례.65 1월부터 본격화된 경제동향 보고회의는 대통령 주재로 매월 빠짐없이 열렸고, 수출진흥확대회의도 마찬가지였음. 이 두 회의는 박정희가 불행한 최후를 맞을 때까지 14년 동안 계속됨. 모두 1400회 이상의 회의 직접 주재. 모든 주요 현안은 대통령 앞에서 직접 보고, 논의 되었고, 난관에 봉착한 문제는 즉석에서 대통령의 판단과 결심으로 결론이 났음. 부처들의 의견이 달라 정책결정이 유보되거나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음. 아무리 어려운 일도 두 회의에서 결판이 났던 것. 이것이 박정희 주식회사의 의사결정방식의 요체였음.

- 훌륭한 출발을 보였던 새마을 운동은 유신정치와 결합하면서 당초의 순수성이나 자발성은 크게 훼손당했음. 이런 이유로 외국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훨씬 평가절하됨. 여기에 전두환의 잘못도 가세. 그렇지 않아도 변질된 새마을운동 사업을 전경환 손에 맡기는 바람에 기능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전히 망해버림. 본연의 새마을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전경환 개인의 놀이마당이자 대통령 친인척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 북한의 위협은 군출신 대통령 박정희에게는 큰 충격을 줌. 250만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전 국민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68년부터 시작. 경부고속도로도 서울-수원구간은 중앙분리대를 없애 유사시 전투기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 박정희의 산업혁명 방향은 중반을 지나면서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다시 말해 무기공장을 집중적으로 건설하는 것. 단순한 산업구조조정 차원의 변화가 아니었음. 한국경제의 근간이 된 중화학 공업의 본격적인 추진이 경제적 동기보다 북한의 위협이 가져다준 결과물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음. 유신체제 또한 한국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 당시 정치환경과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간의 관계는 매우 주목할만함. 박정희가 몰아붙였던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은 민주적 토의나 의견수렴 절차를 상식적으로 밟았다면 도저히 추진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 유신체제가 아니었다면 짧은 시간안에 그 같은 대규모 투자는 불가능했을 것임.그러나 극심한 정치, 사회적 저항을 초래했다든지, 무리한 과잉투자로 엄청난 부작용을 유발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신체제 때문에 빚어진 부정적 측면 또한 심각했음. 따라서 중화학 공업 발전이 유신체제 덕분이었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임. 중화학 공업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비용이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 없이 결과만 놓고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돌이켜보면 북한의 위협, 중화학공업의 육성, 유신체제의 탄생은 서로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음. 어떻든 간에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 경제성을 무시한 과감한 중화학 투자를 낳았고, 비판이나 반대를 봉쇄했던 권위주의적 정치환경 또한 이 같은 시도에 속도를 더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 지나친 정책금융으로 시장원리를 무시하는 바람에 부작용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비판과 부작용에 아랑곳 없이 정부의 강력한 지원아래 기업의 중화학공업 투자는 봇물을 이뤘고, 결과적으로 수출을 비롯한 국내산업 구조가 강제적으로 바뀌었음. 70년대 중반, 한때는 중화학 공업 제품이 수출증가의 새로운 견인차로 박수를 받기까지했음.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했던 것이 세월이 흐른 뒤 한국경제에 결정적으로 효자노릇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78년에 접어들면서 2차 석유파동과 세계적인 불황이 닥치자 그동안의 과잉투자와 잘못된 투자가 드디어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경제적인 면에서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심각한 파국을 초래. 사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훨씬 선배였음. 60년대 중반부터 주체사상 아래 자체 무기생산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 북한판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었음. 결국 그것이 실패하면서 70년대부터 남한경제가 북한경제를 추월하기 시작.

- 박정희 경제는 정권말기에 이르러 급기야 휘청거리기 시작. 그런데 희한하게도 위기도래 직전은77, 뜻밖의 반짝 호황을 맞게 됨. 중동 해외건설로 벌어들이는 오일달러가 안겨준 마지막 축복이었음. 중동 해외건설 붐은 베트남 전쟁에 이은 두번째 대박이었음.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한국기업들의 국제화가 본격화되었고,특히 국내기업들이 해외건설에 대거 진출했는데, 베트남 철수가 결정되자 이들이 갈 곳을 잃어 심각한 고민에 빠짐. 그동안 키웠던 해외건설 전문인력과 비싼 장비들을 소화할 방법이 없었음. 그러던 판에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국가에 건설붐이 일면서 안성맞춤의 돌파구를 찾은 것. 73년부터 74년 사이에 터진 1차 석유파동은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한국경제에 큰 타격을 안겨주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동 산유국들이 벌어들인 오일달러가 한국의 건설사들에게 살길을 터줌. 제조회사들의 수출만이 달러를 벌어들이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건설회사가 외국에 가서 건설공사하는 일이 새로운 달러박스로 등장한 것. 76년과 77년 사이 수출이 75억불에서 대망의 100억불을 돌파했고, 이중 중동 해외건설 수주는 25억불에서 35억불로 껑충 뛰었으며, 경제성장률은 각각 13% 14%를 기록.

- 그러나 중동 해외건설로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에 대해 모두 좋아하기만 했을 뿐, 경제가 너무 잘돼서 일어나는 무서운 부작용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음. 하지만 2차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우리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와 부동산 투기, 수출감소에 따른 재고누적 그리고 국제수지 악화라는 심각한 파국에 처함. 결과적으로 77년 반짝 호황은 박정의 정권에 독화살이 되어 돌아온 셈. 과잉투자로 인해 중화학 공업은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수출기업들은 줄줄이 도산. 여기에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조세저항으로 민심도 흉흉했음. 정치는 차치하고, 경제쪽에서도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심상찮은 조짐이 일고 있었던 셈.

- 박정희 정권 말기에 추진된 경제안정화 정채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큼 획기적이었음.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던 것일까. 이 같은 전환은 다름 아닌 박정희 시대가 키워 온 직업 관료들에 의해 시작, 추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함. 박정희 경제에 앞장서 왔던 그들이 박정희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안 제시와 새로운 처방을 주장하고 나선 것.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하고 권력에 약한 관료집단이 도대체 어떻게 위험을 무릅쓰고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를 겁없이 주도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박정희 키즈의 반란이었음. 7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경제기획원의 핵심관료들 사이에는 박정희식 경제정책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었음. 반란의 주모자격이었던 강경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음.

"78년 당시 경제관료들은 어떻게 하면 물가안정을 이루고 국제수지 흑자를 내는 경제를 만들 수 있는가 염원했다. .... 독일, 일본, 대만이 성공사례였다. 1차 석유파동 때 우리는 경기부양에 역점을 두었는데, 일본과 대만은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래서 우리도 79 2차 석유파동 때는 불황을 감수하더라도 물가안정 위주의 정책을 펴고자 했던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나. 그러나 공무원은 물론이고, 경제학자나 연구기관, 심지어는 언론조차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리는 정책건의나 비판을 대놓고 하기 어려운 때였음. 이런 상황에서 경제기획원은 차관보 강경식, 기획국장 김재익 등을 중심으로 78년부터 안정화 정책에 시동을 걸기 시작. 이들의 노력을 정책으로 만드는데 지지하고 방어해준 최후의 보루는 뒤늦게 부총리가 된 신현확뿐이었음.경제기획원이 나서서 외롭게 안정화 계획에 불을 지피고 KDI의 경제학자들이 힘을 보태는 과정에는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어떠한 건의나 경고도 없었음. 다시 말해 선진국 전문가들이 한국경제에 대한 경고등을 켜기 전에 한국의 경제관료들이 스스로 빨간 불을 켜고 비상을 건 셈. 실물경제를 주관하는 상공부와 금융기관을 관장하는 재무무, 그 밖의 농림부, 내무부 등 대부분의 부처들은 고통감수를 요구하는 안정화 정책에 모두 반대했음.

-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장관, 경제부총리, 경제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한 남덕우는 박정의의 최대장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탁월한 용병술이라고 말함. 집권초기의 혼란을 거치고 나름대로 경제정책의 틀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감을 잡은 박정희는, 남덕우의 말대로 특유의 용병술을 통해 사람을 키우고 적재적소에 활용. 박정희는 상대가 누구든 언제나 듣는 입장을 취함. 보고를 듣는 것은 공부의 기회이자, 동시에 보고자의 됨됨이를 살필 기회기도 했음. 집권 초기에는 자신의 심복인 군인들에게 요직을 나누어주었으나, 이내 한계를 깨닫고 직업관료를 중심으로 학자들을 과감하게 영입. 이병철을 비롯한 부정축재 처벌대상인 재벌 총수들에게 지도를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음. 현안이 생길 때마다 전담반을 만들고, 거기서 내린 결론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나감. 신문에 게재되는 팔럼이나 기고를 유심히 보고 발탁인사에 참고하기도 함. 남덕우를 재무장관에, 김만제를 KDI원장에 기용할 때도 그들이 쓴 신문칼럼을 주목했던 것. 박정희는 한번 믿고 맡기면 오래 중용했음. 경제 쪽은 더욱 신임. 그는 사람보는 눈이 있었음. 발탁된 인물이었던 장기영, 김학렬, 김정렴,남덕우, 김용환, 김만제 등은 박정희 경제의 기둥역할을 해냄. 그들이 없었다면 박정희 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임

- 믿고 맡기는 인사도 경제가 잘 돌아갈 때 이야기힘. 정권말기에 해당한느 78년 선거패배로 단행한 인사에서는 전에 없이 흔들렸음. 신임했던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을 모두 내보내고 신현확에게 지휘봉을 맡길즈음 박정희는 그전 같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함. 탁월했던 용병술이 정상궤도를 벗어난 것은 비단 경제분야뿐만 아니었음. 경호실작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정부장 김재규를 측근 3인방으로 임명하면서부터 심각한 사달이 나기 시작. 자타가 인정했던 인사의 달인이 결국 자신이 임명한 정보부장의 총탄에 최후를 맞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 박정희 시대가 한국의 경제발전 기틀을 마련한 것은 사실이나, 정권말기의 부작용과 어려움은 매우 심각했음.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 경제의 막판 위기상황을 어렵사리 극복해냈고, 한국경제를 여러면에서 한단계 끌어올림. 건국 이후 계속되던 만성 인플레를 근절시켰을 뿐 아니라 고도성장 시대를 부활시켰고, 여기에 더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국제수지 흑자시대를 열음. 처름으로 물가안정, 경제성장, 국제수지 흑자라는 소위 세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대통령이었음. 사실 경제성장도 잘하고, 물가도 안정시키고, 국제수지도 흑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불가능한 것으려 여겨 왔었음. 그런 것을 전두환 정권이 이뤄낸 것이다. 아무도 전정권이 세마리 토끼를 잡아낼 것으로 기대한 사람은 없었음. 원래 전두환은 경제에 문외한이었음. 세마리 토끼가 무얼 뜻하는지도 몰랐던 인물. 하지마 그는 집권초기부터 철권통치로 비판과 저항을 봉쇄한 가운데 물가안정 정책에 총력을 기울였고, 유능한 전문인력을 기용했으며, 본인 스스로 열심히 경제공부를 해나감.

- 전두환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운이 좋은 대통령이기도 함. 재임 중반에 국제 원유값이 떨어진 것을 비롯해 국제금리와 달러값이 동반하락하는 소위 3저 호황이 전두환 경제를 결정적으로 도왔음. 하지만 대외여건 덕을 보았다고 해서 그의 치적을 과소평가할 순 없음. 3저 호황은 세계 모든 나라가 겪었지만 유독 한국경제가 3저 현상을 잘 활용해서 좋은 성과를 만들었기 때문.물가안정은 원유값 하락에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이전부터 전정권이 추진했던 강력한 긴축정책 등 지독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음. 또한 개방정책이나 투자확대 정책 등을 미리미리 준비했었기 때문에 타이밍을 잃지 않고 대외여건 호전의 상승물결에 올라탈 수 있었음. 예산동결 같은 파격적 조치는 일종의 정치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정부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결단을 내리으로써 재정안정화의 기틀을 마련. 지금까지도 한국의 재정상태가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것은 당시의 재정혁신 덕택임. 산업쪽에서는 전임정권에서 넘어온 중화학 공업 과잉투자와 부실문제를 해결했고, 전자교환기 도입 등을 시작으로 오늘의 통신 혁명 인프라를 구축. 오늘날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기본터전이 이때 마련된 것. 재벌의 경제력 집중문제에 대처히기 위한 공정거래제도도 정권 초기에 도입되었는데, 기업들이 반대할 겨를도 없이 신군부가 후다닥 결정함. 박정희 시대의 연장선에서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들이었음. 이처럼 전두환 시대의 한국경제는 여러 방면에서 도약적 발전을 기록했고, 전두환은 스스로 경제대통령임을 자임했음. 그러나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실패하는 비판을 면키 어려운 것이 노동정책이었음. 그는 집권이후 줄곧 노조에 대한 탄압을 강화. 3저호황으로 노동정책을 정상화할 호기를 맞았으나, 전두환은 이때에도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음. 그는 노조의 활성화를 사회불안 요인으로 간주했던 애당초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함. 결국 80년대의 잘못된 노동정책이 후일 노동시장에서 두고두고 심각한 왜곡현상을 초래하는 화근으로 작용

- 돌이켜보면 물가상승률 목표를 2~3%로 책정한 것 자체가 일종의 몽상이었음. 어쩌면 김재익의 몽상을 신뢰한 사람은 전두환 혼자뿐이었을지도 모름. 박정희 경제가 자신의 확고한 경제관으로 추진됐다고 한다면, 전두환 경제는 경제선생이나 참모인 김재익에 대한 전두환의 절대 신뢰에 의해 소기의 목적을 극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셈. 아무튼 고통을 감내하는 물가안정 우선정책은 80년부터 시작해 무려 4년간 지속.불황의 터널이 그만큼 길고 지루했다는 이야기. 그렇다고 전정권이 경기부양을 전혀 외면한 것은 아님. 여러가지 부양책을 동원.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물가안정 기반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된 부양책이었음. 경제 전체의 체질개선을 위해 구조조정을 줄기차게 해낸 것은 건국 이후 처음이었음. 박정희 경제에 대한 대대적 수선기간이었던 셈

- 돌이켜보면 전두환 시대의 경제정책은 박정권의 경제를 계승하면서도 잘못된 것을 고치고 업그레이드시킨 정책들이 많았음. 경제운영을 시장원리에 더 충실하게 했다던지, 금융자율화를 더 촉진시켰다던지, 공기업들을 경쟁체제로 바꿨다던지, 공정거래제도를 처음 도입해서 재벌규제를 본격화했다던지, 정부의 만성적 재정적자를 청산했다던지, 수입규제를 과감하게 텄다던지 등 여러 방면에서 한국경제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책을 끌어갔다고 평가할 수 있음. 그러나 전두환 시대에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서 잘했다고만은 할 수 없음. 물가안정에 성공한 치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빚어졌던 부작용도 적지 않았음. 예산동결 같은 파격적 조치로 정부의 씀씀이를 줄이고 재정을 건전화시킨 공로도 크지만, 그 바람에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그 뒷감당을 다음 정부에 넘긴 부정적 측면도 없지 않음. 예컨대 세출예산 동결에 따라 항만이나 도로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싹둑 잘라버리는 바람에 중요한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할 수 없었음. 결국 부작용과 부담은 다음정권이 뒤집어 씀. 도로나 항만시설의 건설을 소홀히 한 결과 유통비용이 크게 오르는 물류대란을 야기했던 것. 가장 잘못된 것은 노동정책이었음. 다른 정책이 대부분 앞을 향해 나아갔다면, 유독 노동정책만은 뒷걸음질쳤음.경제가 좋아지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소홀했던 노동자 권익보호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을 펴는게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은 오히려 박정희 시대보다도 더 강압적인 정책을 폈던 것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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