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삶의 재미없는 이유는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했기 때문. 그래서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이야기다. 이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기 때문. 자꾸 반복적으로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이유는 뭔가 심리적으로 막혀 있기 때문. 여자들이 모여 앉으면 시집살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 선택의 자유는 인간 존재의 근거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됨. 그래서 등산가들은 죽어라 높은 산 정상에 오른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기 때문. 심리학에서 선택의 자유와 아주 비슷하게 쓰이는 개념이 내적동기. 재미나 즐거움과 같은 내면의 욕구를 의미. 요즘 이 내적 동기 전성시대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선택해서 하라고 곳곳에서 부추긴다. 유사해 보이는 내적동기와 선택의 자유는 사실 서로 다른 개념. 이 두개념이 상충하는 경우도 많음. 돈이나 성적같은 외적동기에 의해 움직이지만, 이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부여된 경우. 이렇게 내적동기와 선택의 자유가 서로 충돌할 때 어느 요인이 강할까? 심리하자들은 선택의 자유쪽 손을 들어준다. 비록 외적동기에 의한 행동이지만 스스로 선택했을 경우, 그 행동의 몰입도가 순수한 내적동기에 의한 행동의 몰입도보다 더 높다는 것. 구태여 순서를 따지다면 선택의 자유가 먼저고 그 다음이 내적 동기라는 이야기. 재미있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면 재미있어짐. 아무리 재미없는 행동도 내가 선택하면 재미있어짐. 요즘 유행하는 행동경제학의 넛지같은 개념은 바로 이 선택의 자유에 관한 경영학적 변형이다. 방향만 은근슬쩍 제시하고 최종결정은 스스로 내리도록 해야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심리현상은 좌절. 좌절한 이 땅의 사내들은 밤마아 모여앉아 다양한 폭탄주를 제조한다. 내 돈 내고 마시는 술이라도 한번 내 맘대로 섞어보자는 거다.
- 한국남자라면 누구나 약한 정도의 신경증과 학습된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음. 어려서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 나이가 들어서는 더하다. 집안문제든, 사회문제든 도무지 내가 어떤 결정에 주체적으로 관여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 어떻게 밀려살다보니 여기까지 온거다.
-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산다. 재미있으려고 산다. 한국사회에는 행복과 재미를 이야기하면 한급 아래로 보는 어쭙잖은 엄숙주의가 존재. 자유, 민주,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이야기하면 폼나 보인다. 그러나 자유, 민주, 평등은 수단적 가치다. 행복과 재미는 궁극적 가치다. 물론 수단적 가치가 확보되어야 궁극적 가치를 얻어낼 수 있다. 그러나 자유, 평등, 민주라는 조건이 이뤄진다고 자동적으로 사는게 행복하고 재미있어지는 것은 아님. 재미와 행복이라는 궁극적 가치에 대한 진지하고 꾸준한 성찰이 있어야 수단적 가치도 이뤄낼 수 있다. 행복과 재미에 관한 어떤 사회문화적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이 사회에는 감각적이고 말초적 재미만 남아 있다. 딸 같은 걸그룹 허벅지나 아들같은 아이돌 초콜릿 복근이나 이야기하는 방식으론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 삶이 재미없는 이들은 대부분 세상이 뒤집어지는 어마어마한 재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으나, 그런 재미는 없다. 행복을 거창하게 생각해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게 분명해야 설레는 삶을 살 수 있따. 방법은 간단하다. 지난 한주간 내 일상에서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내가 가슴설레며 기다렸던 일을 기억해 내면 된다. 바로 그 일들이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들이다. 그 설레는 일들을 끊임없이 계획하며 살면된다.
- '너를 바꾸라'는 문화사적 압력은 우연이 아니다. 130년 된 현대 심리학의 역사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너 자신'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기 때문. 심리학은 근대성으 총아로 나타난 학문. 근대성이란 주체적 자아의 형성을 의미. 계급 인종, 지위를 떠난 독립된 주체로서의 책임과 행위의 가능성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시기가 서구의 근대다. 이 주체적 자아를 설명하기 위한 학문이 심리학이다. 근대 심리학은 주체적 자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모든 것을 이상하다고 진단.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근대 심리학이 나타나기 전까지 정상과 이상의 구분은 그리 분명한 게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정상과 이상의 구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경계가 여전히 자의적이고, 문화적 합의의 결과에 불과. 그런데도 모든 책임을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한다. 드러난 심리적 문제가 그리 명확하지 않을 때는 무의식까지 들춰내며 '네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라며 현대인을 협박한다. 온갖 종류의 심리학적 상담 심리치료는 바로 이 인간의 결함모형에 기초함. 콤플렉스, 우울, 불안, 성격장애 등과 같은 심리학적 개념의 철학적 전제는 부정적 인간관이라는 의미. 그러니까 사방에 자꾸 자기 자신에 대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최근 결함모형에 기초한 현대 심리학에 근본적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 긍정심리학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약점과 부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해왔떤 현대 심리학의 접근방식에 대한 반성. 인간의 약점을 고치기보다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자꾸 키워나가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장점이 있다. 이 장점을 끌어올리면 약점은 저절로 개선된다. 과학적으로 엄밀한 심리학이 되기에는 아직 많은 이론적 약점이 있지만, 긍정심리학은 평생 '나 자신이 문제'라는 자괴심에 시달려온 이에겐 큰 위로가 된다.
- 안팎의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초조해하며 수면장애, 불안, 두통, 피로 등이 동반되는 증상을 신경쇠약이라고 함. 신경쇠약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비어드는 이 증상의 원인을 문화변동으로 설명. 비어드가 지적하는 신경쇠약의 가장 결정적 이유는 삶의 속도. 19세기 전신, 철도, 증기기관 등의 발전으로 인해 삶의 속도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남. 그 결과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18세기에 비해 100배나 많아짐. 빨라진 삶의 속도와 격렬해진 경쟁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부적응 현상이 바로 신경쇠약이라는 것. 비어드가 경고한 19세기 삶의 속도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속도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 삶의 속도가 급변하여 생기는 문화병의 치료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걷기다. 수백만년에 이르는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우리 몸과 마음은 걷는 속도에 적응해 발달해 왔다. 감당하기 어렵게 빠른 삶의 속도는 불과 지난 몇백년 동안의 일일 뿐이다. 인류 역사를 하루로 보면 겨우 몇 초전에 시작된 변화라는 이야기. 요즘 그래서 다들 올레길 등을 찾아다니며 걷느라 난리다.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삶의 속도를 회복하고 싶은 까닭이다.
-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삶에 감사할 줄 안다. 그래서 가끔은 외로워야 한다. 가슴저린 그리움이 있어야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기쁨, 내 가족에 대한 사랑,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생기는 까닭이다. 나이 들수록 내 삶이 허전한 이유는 그리움이 없기 때문. 도무지 그리운 게 없으니 삶에 어떤 기쁨이 있고, 무슨 고마움이 있을까. 삶에 아무런 기쁨이 없을 때는 처절하게 고독해 보는 것도 훌륭한 대처법이다. 혼자 떠나 제주도 갈대밭을,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나 골목을 헤매보는 거다.
-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건가? 때론 비굴하게, 때론 무모하게 부대끼며 정말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에 도대체 무엇이 빠져 있기에 이토록 허전한 것인가? 독일 심리학자 비요른 쥐프케는 중년의 남자들에게 불현듯 찾아와 도무지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이 무기력감의 실체를 '알렉시티미'라고 정의. 한국어로는 감정인지불능으로 번역됨.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는 의미. 자신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정신없이 앞만보고 달려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온통 변해버린 것을 깨닫는다. 더 이상 내가 설자리가 없다는 느낌에 한번 거꾸러지면 다시 일어나기 어려움. 비요른 쥐프케는 남자들이 한번 빠지면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심리적 미로를 4단계로 설명. 우선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기 시작. 이 감정부정 혹은 감정회피의 결과는 두번째 단계로 넘어가. 남성적 외향화. 고도하게 사내스러움을 지향. 술만 먹으면 욕하면서 터프함을 과장하는 이들을 자주 본다. 맛이 가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증상임. 이 상태가 극에 달하면 영웅주의와 지배욕구라는 독단적 이데올로기의 세번째 단계로 이어짐. 웬만큼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를 얻으면 다들 정치하려고 달려드는 것도 이 때문. 그러나 그 영웅주의의 실체는 무기력감이다. 자신의 무기력을 숨기려는 감정방어의 결과라는 이야기. 여기까지 온 남자들에게 남겨진 네번째 단계는 남성우울증. 이 우울증은 아내에 대한 정서적 의존으로 이어짐. 그러나 아내는결코 자신의 안식처가 아님을 알게 됨. 자신을 귀찮아하고 힘들어하는 아내의 속마음이 느껴지면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게 됨. 이런 식의 아내에 대한 애증의 모순적 감정 또한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
- 에로티시즘 혹은 섹슈얼리티가 사랑의 의미에서 빠져나가는 중년 부부에게 의사소통 장애는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결혼 25년차인 필자에게 사랑은 아침식사다. 집에서 아침을 못 얻어먹으면 더는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아내에게 사랑은 배려다.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구체적 관심과 배려가 사랑의 기준이다. 아침과 배려의 의미론적 구조는 전혀 다름. 그래서 매번 힘들다.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공유되는 것일까?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통해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곧바로 언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님. 인지적, 논리적 의미의 공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동일한 정서적 경험이다. 엄마의 품 안에서 아기는 엄마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함. 아기가 놀라면 엄마도 같이 놀라고, 아기가 기뻐하면 엄마도 함께 기뻐함.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는 이 정서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의미공유가 가능해지는 것
-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걸까? 기억할게 전혀 없기 때문. 기억속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많으면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전혀 기억할 게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회상효과다(reminiscent effect)
-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수록 긴장해야 함. 의미부여가 안되니 쉽게 좌절하고, 자주 우울해지고, 사소한 일에 서운해짐. 이런 식이라면 성격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은 순식간임. 삶의 속도와 기억의 관계에 관한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이 미친시간을 천천히 흐러게 하는 방법은 간단함. 기억할 일을 만들면 된다. 평소에 빤하게 반복되는 일들과는 다른 것들을 시도하라는 이야기. 인생과 우주 전반에 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계획은 아무 도움이 안된다.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 경험들을 시도해야 한다.
- 심리학의 창시자 빌헬름 분트는 인간이 경험하는 현재의 길이는 약 5초라고 한다. 우리는 불과 5초만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이야기. 과거나 미래를 사는게 아니라 오직 현재를 살기 때문. 그러나 이 5초의 객관적 단위는 주관적 경험에 의해 얼마든지 팽창가능. 제발 현재를 구체적으로 느끼며 살자는 이야기다.
- 리더는 훌륭한 사회자가 되는 것. 상대방을 폼나게 만들어 줘야 함.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남에게 순서를 안준다. 폼 날수록 자기만 이야기한다. 가끔 머쓱해서 썰렁한 농담을 던져보지만, 아무도 안 웃는다. 이는 설득력 없는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공토오딘 문제이기도 함. 어설픈 진보도 마찬가지. 이 경우 상대방의 반응은 대부분 이렇게 된다. '그래, 당신말이 다 맞아. 그래서?' 이해는 했지만 안 받아들이겠다는 거다. 인간은 절대 이런 식으로 설득당하지 않는다. 대화가 아니라 강요 혹은 계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스스로 옳다고 생각할수록,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할수록 친구가 없는거다.
- 도대체 우는 것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사내놈과 무슨 상관이 있는걸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능력이 애초부터 억압되어 있으니 어찌 남의 정서를 읽는 능력이 발달할 수 있을까? 남자들에게는 사회적 가치,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절차가 기초부터 꼬여 있다는 이야기. 사회적 참조가 불가능한 남자들에게 성숙한 의사소통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다. 철없는 남자들에게 남겨진 방법은 둘중 하나다. 개처럼 으르렁거리거나 애처럼 징징대거나...
-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차이에 관대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뜻한다. 8-85세까지 3280명의 일기 같은 기록과 유명작가 열명의 작품분석 결과, 일반인이 사용한 3800만 단어와 작가들의 900만 단어를 나이에 따라 분류해보니, 나이가 들수록 긍정적 정서를 더 많이 표현. 분노, 좌절, 슬픔과 같은 단어들은 젊은이들의 언어였따. 나이가 들수록 '나', '나의', '나에게'와 같은 단어들은 줄어들고 '우리'와 같은 공동체 관련 단어들이 증가. 나이가 들수록 시간과 관련한 단어들도 줄어듬. 시간에 덜 쫓긴다는 이야기다. 동사의 시제에서도 차이가 남. 동사의 과거형은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중년은 현재형을, 노년으로 갈수록 미래형을 더 많이 사용. 페네비이켜 교수는 이런 변화를 지혜라고 표현한다. 지혜롭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면의 시간이 아주 많아지는 것을 의미
- 우리의 가족이 그토록 갈등인 이유는 가족의 사회적 표상이 너무 긍정적이기 때문.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강요하는 가족의 표상은 죄다 푸른 초원 위에 웃는 얼굴로 서서 파란 하늘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웃는 모습. 그러나 함께 화장실을 쓰고 같은 이불을 덮는 가족이 어찌 매일 행복하고 즐겁기만 할 수 있을까? 남의 가족은 다 행복한데 내 가족만 문제투성이로 느껴짐. 프로이트는 이를 가족 로망스라고 정의. 지금 내 가족은 진짜가 아니고, 어딘가에 진짜 내 가족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한다는 것이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 유명인사들은 항상 '지금까지 희생해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아내는 반드시 희생해야 한다'는 사회적 표상이다. 그러니 내게 별로 희생적이지 않은 현실의 아내가 그토록 불만스러운 것. 그래도 이렇게 정적 상관이든, 부적 상관이든 연관관계가 가능한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님. 그 상관관계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 진짜 문제는 개념적 연관관계가 아예 불가능한 경우. 예를 들면 남자와 행복이다. 사회적 표상이론으로 보자면 남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음. 그런 개념적 연관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 여자의 행복은 일상에서 자주 경험한다. 실제로 행복하든 불행하든 여자와 행복은 실재하는 사회적 표상이다. 그런데 남자와 행복은 도무지 연결되지 않느다. 남자는 기껏해야 야망 또는 성공으로 연결될 뿐이다. 성공은 이미 물건너 갔고, 야망은 접은지 오래됐는데, 행복할 자격조차 없는 이 땅의 남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야할까...
- 본격적 감정 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이전, 사람들은 '가난뱅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다'와 같은 성공 내러티브에 열광했다. 빌게이츠의 스토리텔링은 이런 성공 내러티브의 전형.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고, 성공을 자선사업으로 전환해 사회적 의미를 얻어가는 방식.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빌게이츠가 잡스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함.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과 빌게이츠의 07년 하버드대 졸업식 연설을 비교해보라. 잡스의 연설은 고통, 열등감, 공격성으로 일관된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반면 게이츠의 연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빈곤퇴치, 환경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도덕저긍로 빌게이츠의 연설이 훨씬 우아하고 폼난다. 그러나 감정자본주의에서는 다르다. 빌게이츠의 스토리텔링은 오래된 록펠러 방식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음. 내면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내면에는 우리와 똑같은 문제로 좌절하고, 고민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 성공으로 인해 보통사람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다는 내러티브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한국기업에 빠져 있는 것은 바로 이 감정 자본주의적 특징. 독거노인을 찾아가고, 연탄을 나르고,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주는 구태의연한 사회공헌 방식으로 감정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란 그리 쉽지 않다. 기업의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기업경영에 정서적 스토리텔링이 존재하지 않으니, 느낌이 있는 물건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는 것처럼 거짓말은 없는 것 같아. 자신이 행복한가, 불행한가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부터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거야. 시간, 공간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 시간, 공간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지. 물건에 헌신하다 보면 내가 사라지지. 행복과 불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는 거야. 빠지고 몰입하는 거라고. 자아라는 주체로 서는 게 아니라 대상에 함몰되는거지. 돈이나 밥이 아닌 다른 것에 함몰되는 것은 참 근사한 거야.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플로우 이론)
- 여자의 욕구와 남자의 욕구 차이를 시간과 공간으로 대비해 설명하면 남녀 욕구차이는 소유하는 물건의 차이에 그대로 반영됨. 여자의 물건은 시간의 소유와 관계된 반면, 남자의 물건은 공간의 소유와 연관. 남녀 차이를 상자와 책상으로 비교하면 여자의 물건은 대부분 상자다. 상자는 여자의 자궁과 같은 것. 생명을 잉태해 시간을 소유하는 것처럼, 여자는 상자안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보석을 담는다.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남자는 시간을 소유하는 대신 공간을 정복하려 한다. 그래서 옛날 남자들은 달리는 말에 그토록 집착. 오늘날도 마찬가지. 금전적 여유가 생기면 남자들은 자동차 전시장을 기웃댄다. 보다 빠르고 폼나는 차를 타고 달리는 만큼 그 공간이 자기것이 된다는 환상 때문. 더운 여름날 위아래 꽉 끼는 가죽옷을 입고, 뒤에는 살이 삐져나온는 풍만한 여인을 태우고 할리를 몰고 싶은 욕망도 마찬가지. 공간이 생기면 남자들은 성을 쌓는다. 독일의 라인강변을 지나다 보면 지나치게 많은 성들이 있다. 산봉우리마다 정말 지겹게 성을 쌓았다. 내 공간을 확인하고 싶은 철없는 남자들의 욕심이 남긴 흔적들이다. 한국 남자도 마찬가지다. 돈이 생기면 집을 넓힌다. 집이 더이상 넓어질 수 없으면, 별장을 산다. 또는 정원을 만든다. 정치인이 되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대표하는 지역의 넓이만큼 권력이 생기는 까닭이다.
- 유기수에게는 출소라는 정해진 목적이 있따. 따라서 교도소의 삶이란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무기수는 출소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교도소에서 버틸 수 있는 한 버텨야 한다. 즉, 그곳이 무기수에게는 삶의 전부. 어찌 충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 현재'를 사는 거다.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는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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