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질 용기

심리 2017. 12. 12. 19:25

- 아들러는 자신이 창시한 독자적 이론을 개인심리학이라 불렀음. 개인심리학은 분할되지 않는 통일된 전체로서의 개인을 고찰하는 심리학. 그래서 아들러는 인간을 정신과 신체, 감정과 이성,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는 다양한 형태의 이원론에 반대.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상반된 판단을 하는 두가지 부분이 갈등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아님. 예를 들어,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마음과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마음이 인간의 내부에서 서로 다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평소에 얌전한 사람이 느닷없이 아이를 심하게 혼내거나 남을 때러서 다치게 했을 때, 순간적으로 화를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들러는 전체로서의 나 자신이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므로 그 선택을 나 자신이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 아들런느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마음속의 갈등 탓이라거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얼렁뚱땅 넘기려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
- 목적론. 아들러는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서의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면 그런 행동을 야기하는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원인을 찾으려 하기 마련인데, 아들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화를 주체하지 못해 큰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를 지르기 위해 화를 내는 것이다. 불안해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불안이라는 감정을 만드는 것. 무언가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목적을 먼저 세우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을 생각해낸다는 의미. 분노라는 감정이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남들에게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는 것. 또한 남들에게서 동정을 유발하기 위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기도 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사후에 생각해날 수도 있다. 학교나 회사에 가기 싫은 사람은 물론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는 핑계를 생각해내곤 한다. 전날 밤에 잠을 설쳤다, 감기기운이 있다 같은 핑계가 대표적
- 어떤 경우에서든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존재하고, 그 이유는 나중에 생각해낸다. 이것이 아들러가 말하는 목적론. 그러므로 아들러파 카운슬러에게 '할 수 없어요'라고 하면 '하고 싶지 않은 거겠죠'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열쇠는 원인론적 발상을 목적론적 발상으로 바꾸는 데 있다. 우리는 원인론적으로 생각하는데만 익숙해져 있기에 행동이나 감정의 목적이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훈련이 필요. 다음 두가지 개념을 숙지할 필요.
* 분노나 불안에 관해 언급할 때 이야기했듯이 감정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스스로 감정에 대해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감정에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은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지금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과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불행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한, 과거에 존재하는 원인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
-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고 자각하고,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 변화하기로 결심했다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알아야 함.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가 목적이 된다. 하나하나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런 행동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행복이다.
- 인생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행복한 삶을 방해한다. 인생에 대한 의미부여(라이프스타일)를 바꾸면 세상은 믿을 수 없을만큼 단순해진다
- 아들러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라고 말함. 이는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님. 지금의 자신을 다른 자신으로 바꿀 수 없다면, 이런 자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을 달라 보이도록 해야함. 이는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 아무런 이유없이 어느날 문득 누군가가 이전과는 다르게 보일리는 없다.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을 바꾸는 궁극적 목적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일수 있다. 그때까지 좋아했던 사람을 갑자기 좋아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상대방이 변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겠다고 결심한 자기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자기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자신의 장점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단점만 눈에 들어옴. 자기자신을 좋아하지 않기 위해 장점을 보지 않고 단점만 보려하기 때문. 그러면 왜 자기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할까?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남들과 관계를 맺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남들과 부대끼다 보면 상대방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도 종종 발생. 그래서 상대에게 미움을 받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타남. 그런 사람은 상대에게 미움받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기 자신이 미움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서 스스로를 정당화함
-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며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남들의 평가를 두려워해서 그들의 기대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면, 자기 자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자신의 진정한 본모습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유대교 격언이 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결코 다른 사람의 인생무대에 서는 조연배우가 아니다. 남들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그 평가에 맞추려는 행동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걸맞지 않다.
- 부모를 비롯한 제3자로부터 듣는 속성 여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여겨도 괜찮다. 남들의 기대에 맞추거나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갈수는 없기 때문이다.
- 부모를 비롯한 제3자의 말에 따르지 않고 본인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산다면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사게 되고,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길지도 모름. 하지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자유롭게 살기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반대로 말해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증거
- 아이 스스로가 부모의 기대를 거역하지 않는 착한아이가 되고자 하는 것은 처음에는 부모의 요청에 부응하려는 행동이었겠지만, 어느샌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내적 규범으로 변해 자신을 옭하맨다. 부모는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버저리는 행동을 하면 아이가 반항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것은 반항이 아니라 주장이다. 젊은 사람은 주장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문제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일을 저지르거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건, 자학하는 것 말고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방법을 모른다
- 지금 이대로의 자기 모습을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가 아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 부모가 됐든, 사회가 됐든 제3자가 자신에게 넌지시 강요하는 기대 혹은 명령을 거부하려면 용기가 필요. 그리고 이처럼 용기를 내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결심하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또한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자신을 실제 이상으로 잘 보이려고 할 필요도 없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따른 용기가 필요. 남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겠따고 결심하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짐.
- 있는 그대로가 좋다는 것은 자신을 실제보다 과장하거나 남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 남에게 맞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진정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자신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찾는 일은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위안. 자식이 아무리 부모의 속을 썩이더라도, 혹은 큰 병에 걸리더라도, 자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에게 공헌하는 셈. 자식뿐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 남들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용기가 필요
- 열등감과 콤플렉스는 의미가 다름. 열등감은 자신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 한편 열등 컴플렉스는 A이므로 B를 할수 없다는 논리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 여기서 A는 남들이 봤을 때나 스스로 생각했을 때나 그런 이유가 있으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길만한 그럴듯한 핑계다
- 과제를 앞에 두고 용기가 꺾인 사람은 매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이라고 핑계를 댄다. 분명 달성하기 어려운 일도 있겠지만, 그 일에 착수하기도 전에 실패했을 때를 먼저 생각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며 망설이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이 '네,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할지 안할지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대부분 처음부터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핑계를 나중에 얼마든지 생각해낸다
- 아들러는 어떤 경험에 의해 지금의 자신이 결정된다는 의미의 결정론을 부정. '모든 경험은 그 자체로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쇼크(이른바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목적에 맞는 것을 찾아낸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거이 아니라,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 대인관계에서의 갈등은 쓸데없이 남의 과제에 간섭할 때 일어나기 마련. 그러므로 특별히 부탁을 받지 않는 한 아무거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남의 과제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면 먼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까?'하고 물어보고, 도움을 사양한다면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현명함
- 공부가 어려워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스스로 한계를 그어버리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 이런 한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 피아니스트든, 공부하는 학생이든, 매일 업무에 매진하는 회사원이든, 남들에게 공헌하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힘을 낼 수 있음. 만일 남들과 경쟁하는데만 관심이 있다면 공부든 일이든 괴로우면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만다. 일은 영어로 calliing, 독일어로 beruf라고 하는데, 이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천직이라는 의미. 외부에서 강요받거나 남들과 경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에서 촉발되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음.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당신의 밤 가운데 가장 고요한 시간에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오'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시를 쓴다는 필연성에 따라 생활계획을 세우시오'라고 말했다
- 누구나 말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실천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남에게서 미움받기를 두려워해서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주장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양보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다른 상대방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다. 이때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따르는 책임은 남에게서 미움받을 각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남들의 평가에 신경쓰지 않고 미움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유롭게 살기위한 핵심요소다
- 자식의 과제는 자식이 해결해야 하며, 자신의 판단으로 선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함. 아무리 자식의 선택이 부모의 감정을 거스른다고 해도 그것은 부모로서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몫일 뿐, 자식은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거도 없다. 자식의 결단으로 부모가 슬픔에 빠져도, 그 슬픔은 부모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부모를 슬프게 하고 싶지않다는 이유로 자식이 자신의 결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키케로도 이렇게 말했다. '지금 청년같은 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청년에게 소나 코끼리 같은 힘이 ㅣ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체력을 잘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년의 한계 내에서라도 무언가 일단 시작해야만 비로소 나이를 핑계로 포기하는 일이 사라짐. 세토우치 자쿠초, 도널드 킨, 츠루미 슌스케가 81세에 벌인 대담이 '동시대를 살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에서 벌어지는 지의 향안은 젊은 사람의 추종을 불허한다
- 정말로 건강한 사람은 병에 걸리기 쉬운 몸을 갖고 있고, 그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네덜란드 정신병리학자 판덴베르흐)
- 병에 걸린 몸이 들러주는 이야기에 응답(response)할 수 있는 것(ability)이 책임(responsibility)이다. 몸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다.
- 아들의 불치병과 선한 신의 전능함이 양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물음에 쿠쉬너는 신은 선하지만 전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병이나 불행은 신이 인간을 벌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신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도 아니라고 생각. 또한 병이나 불행은 신이 인간을 벌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신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도 아님. 그리고 '현실은 이렇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현실을 긍정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고통이나 과거에 초점을 맞춘 물음, 즉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는 물음에서 탈피하고 시선을 미래로 돌리려는 물음을 내놓아야 한다고 쿠쉬너는 말했다
- 신도 비참한 사건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을 극복하는 용기와 인내력을 줄 수 있다. 이런 힘이 신 말고 누구에게서 얻을 수 있겠냐고 쿠쉬너는 묻는다. 신을 내세우는 것은 쿠쉬너가 랍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병, 사고, 재난으로부터 재기하는 사람의 모습에서는 감동마저 느껴진다.
- 산다는 것은 시작점과 끝점이 있는 운동이 아니라, 춤을 추는 것 같은 에네르기아의 운동, 즉 어딘가에 도달한다는 목적이 없는 운동이다. 매순간 지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삶이다
- 생전에 천벌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모든 계산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죽음 뒤의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추론을 정당화한다.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 벌을 받지 않거나 착한 사람이 보상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세가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증명할 수 없는 생각에 희망을 걸고 싶지 않다. 사람이 굳이 보상받기를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죽은 후에도 보상받기를 꼭 원할 필요는 없다
- 인생은 유한하지만,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데는 충분히 길다.
- 인생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지 말고 또한 내일을 오늘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만족스럽게 산다면 지금 이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 아침에 냉장고를 열고서 오늘밤에 무얼 만들어 먹을지 고민하는 자신을 깨닫고 쓴웃음을 짓는 경우가 있따. 준비가 철저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제 겨우 하루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미리 결정할 필요가 없다. 저녁식사 메뉴는 아침에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업무도 반드시 끝까지 해내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완성해내지 못한닥만 생각한다면 어떤 일에도 착수하지 못할 것이다.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감을 갖고 인생의 과제와 대결하려는 사람은 초조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인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생의 과제에 임하지 않겠다는 핑계로 이용한다고 할 수 있다. 아들러의 말을 뒤집어 말하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초조해하고, 그 초조함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핑계로 내세운다
- 앞을 응시하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이중의 삶이 요구된다. 즉, 현실이 어떻든 간에 이상을 잃지 않는 것과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을 양립시켜야 한다는 의미. 언제든 우리를 좌절로 몰아넣을 위험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나아야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면 남을 동료로 파악하고 공헌하라는 아들러의 말은 현실성이 없어보일지도 모름. 그러나 이상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인 것이다. 앞을 응시해야만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동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사건과 맞닥뜨려도, 넓은 눈으로 보면 그 사건은 인생의 커다란 에피소드이기는 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 인생의 마지막날을 기다리지 말고, 또한 내일을 오늘의 연장선이라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만족스럽게 산다면 지금 이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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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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