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심리 2017. 12. 25. 09:19

- 아마 행복해지려면 상태를 분석하지 않아야 할지도 모름. 그것을 규정해보려고 시도하는 족족 행복은 죽어버릴 테니까. 의식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잃어버린 뒤 회고적으로만 인정되는 것일지도 모름. 장 자크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금시대의 행복한 삶은 인류에게는 항상 딴 세상의 것이었다. 인류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때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인류가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잃어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갖고 있다면 알아볼 수 없고, 알아본다면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 행복이란 어떤 지점이 아니라 하나의 범위, 맨 밑바닥에는 만족감이 있고, 맨 위에는 고양감이 있는 범위다. 달리 말해 행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계속 노력하는 것이다.
- 추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성공, 명성, 지위, 영향력, 재미, 즐거움 같은 행복의 대체물뿐이다. 행복범위의 가장 낮은 층위의 만족감은 직접 얻어질 수도 있다. 프로베르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이룰 수 없지만 평정은 이룰 수 있다' 이느 오히려 패배와 굴복을 인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철학자가 아니라 문인인 플로베르는 좀 변덕스러웠으므로, 빠져나갈 창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어리석음, 이기심, 건강은 행복의 세가지 선결조건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이 부족하다면 다른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 사실 이런 인용문은 플로베르의 전성기 시절의 글에서 따온 것들이다. 본질적으로 그는 그를 전후한 많은 사람들처럼 일종의 마니교 사상에 찬성. 인간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는 전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행복의 추구 그 자체가 불행의 주원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행복의 추구는 원천적으로 실패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삶과 행복을 즐기는 목표에 몰두하는 더 세련된 이유를 찾아낼수록 진정한 만족감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행복의 부조리란 그것이 규정될 수 없고 성취되지도 않으리라는 데 있다. 기껏해야 이따금씩 무의식적으로 달성된다. 직설적으로 추구한다면 정반대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도중에 예기치 않게 등장하기도 한다.
- 일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근사하게 살 수 있다. (톨스토이) 덧붙이면, 인간은 아주 근사하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철저하게 하찮은 존재라는 기분은 느끼지 않으면서 늙을 수 있다.
- 아무 처방도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처방이다. 개인과 그들이 처한 상황의 복잡성은 보편적 처방이라는 것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듬. 사실 처방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 시대를 나타내는 또 한가지 표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지 짧고 간략하게 몇가지 요점으로 정리해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조급하고 탐욕스런 시대뿐이다.
- 우울증은 하강나선형이다. 우울해지면 의욕이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우울증의 심화됨. 이런 식으로 계속 가라앉는다. 반대로 행복은 상승나선형이다. 행복해지는 것이 의욕을 고조시키고, 의욕은 또다시 다른 것을 증가시키고,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행복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그런 기분자체라기보다는 그것과 함께 오는 가능성의 전율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세계가 다시 마법을 발휘하고 자아가 새롭게 태어난다. 모든 것이 더 풍부해지고 낯설어지고 더 흥미로워진다. 눈은 더 명료하게 보고, 마음은 더 예리하게 생각하며, 심장은 더 강하게 느낀다. 이 세가지가 열광과 환희와 열정 속에서 통합된다.
- 명상이란 불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눈을 무겁게 내리깐 엄숙한 상태가 아니라 항상 깨어있음. 주의깊게 지켜보기, 사려깊음 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강렬한 정신적 활동이다. 법구경에는 이런 개념만 다루는 장이 여러개 있음. '주의 깊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 지켜보지 않는자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명상의 목표는 고요함과 무관심이 아니라 인식, 주의깊은, 예리한 합목적적 명료성이다. 부처는 칼집에서 뽑힌 칼을 해방된 마음의 은유로 삼았다. 부처는 명상의 실천을 토대로 현대 신경과학의 이론과 비슷한 의식이론을 개발. 의식은 아무런 실체나 방향성도 없고, 끝없이 깜빡거리고 요동치는, 지각과 환상과 망상과 연상과 기억의 그림자 연극과도 같다. '마음은 흔들리고 불안하고 까다롭고 변덕스럽다' 마음은 원숭이처럼 변덕스럽다. 한쪽 나뭇가지를 붙잡았다가 놓고 다른 가지를 잡느다. 그러니 통한된 자아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어떤 하나의 불변적 자아라는 것은 없다. 변화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나도 아니고 내 자아도 아니다. 이 그침없는 변화에 대한 인식이 부처의 또다른 중심통찰이었다. 모든 것은 유전한다. 모든 것은 덧업다.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 만물에 대한 대통합이론을 구축하지 않겠따는 이런 태도는 매우 현명하다. 어떤 교리도 없다면 교리논쟁도 없고, 이단 논쟁이나 분열도 없을 것이기 때문. 그러므로 종교재판도, 고문도, 화형도 없을 것이다. 불교의 두 주요계파인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항상 조화롭게 공존했다. 이를 카톨릭과 개신교의 역사와 비교해보라. 불교에는 그 어떤 초자연적 개입도, 신도, 신의 계시도, 신의 은혜나 신의 화신도 없었다. 그러므로 신앙이 필요치 않다. 사실 부처는 신앙이란 개인적 책임감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고 명확히 거부. 어떤 사람도 그저 누군가가 무슨 말을 했다는 이윰나으로 그것을 믿으면 안된다. 각자 개인적 해결책을 궁리해야 한다. 합리적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가 완전히 비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없고 터무니없기까지 한데 비해, 신비적 동양의 종교인 불교가 완전히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고 실용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것은 부조리한 영역으로의 신앙의 도약이 필요한 교의가 아니라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또 이런 매력적인 특징을 가진 불교가 오히려 그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매력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다른 주요 종교는 신자들이 늘어나는데 불교는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듯이, 인간본성은 항상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이드의 또 한가지 특징이다. 하지만 변화할 권리와 그에 대한 숭배가 뒤섞이게 되자 현대는 완전히 잠재력의 마법, 절박함의 매혹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단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림. 그리하여 보편적 수단인 화폐가 보편적 목표가 됨. 하지만 그 영향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령 인간관계에서 성적 매력이 섹스 자체에서 분리되는 경향이 생김. 원래 섹스에 도움이 되라고 성적 매력이 있는 것인데 말이다. 갈수록 매력은 만져지기보다는 찬미받고 싶어한다.
- 가능성에 대한 숭배는 항상 뭔가 더 나은 것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일종의 탐욕이다. 하지만 가능성의 마법은 미래에 마법을 거는 대가로 현재에 대한 환멸을 요구한다. 오늘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어제도 이미 일어났으니, 진정으로 흥분할 만한 유일한 일은 다음번에 있을 큰 건수이다. 다음번 연인, 다음번 직업, 프로젝트, 휴가, 행선지, 식사가 기대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가 생기면 도피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해결책이다.인간관계나 업무에서나 어려움이 닥치면 자리를 옮기고자 하는 유혹이 생긴다. 그런 태도는 상황을 직면하여 문제를 넘어서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차단하며 고난을 활용할 중요한 능력, 무슨 일이 생기든 그것을 유리하게 돌려놓는 능력을 파괴한다.
- 여가의 세계에서 쇼핑과 여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순수한 가능성의 행동이기 때문. 어떤 일이든 이루어질 수 있고, 가망이 있다. 쇼핑은 여러가지 형태의 가능성을 한데 합친 것이다. 모험의 중독성, 탐색의 신비, 도박의 위험성, 창조적 노동의 우연한 발견, 종교적 믿음의 초월성, 전희의 감성적 민감성 등등. 다들 쇼핑을 좋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가능성이 주는 흥분은 구매가 완료된 뒤까지 연장될 수 있다.
- 소유함으로써, 혹은 소유에 대한 기대만으로도 우리의 요구는 즉시 증가하며, 이것은 더 큰 소유와 더 큰 기대를 하는 우리의 능력을 증가시킨다. 뭔가 바라던 것을 얻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알게된다. (쇼펜하우어)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적응, 습관화, 쾌락주의의 쳇바퀴라 부른다.
- 인간의 자기기만 능력은 대단히 크다. 하지만 그보자 더 대단한 능력이 있다. 자기 정당화의 재능은 인간의 진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꽃임이 분명. 그것은 인간두뇌가 달성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어떤 행동을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모든 인간은 아인슈타인 수준의 지성과 셰익스피어와 같은 상상력, 예수회 신도같은 섬세함을 지니게 된다. 내가 특히 강한 인상을 받았던 사례는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 했던 변명이다. 그의 아내는 심한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였는데도, 그는 인내심 깊에 그 상처가 자기가 아니라 아내의 극악한 행위 때문에 생긴 거이라 설명. 자기처럼 온화한 영혼의 소유자가 참지 못하고 폭력에 호소할 정도라면 아내가 얼마나 심하게 도발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지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고, 정직성, 관용, 여성에 대한 사랑의 시로 유명한 시인이었다.
- 소비를 계속 밀어주는 힘은 대부분 무리보다 앞서 나가기 위한 무익한 시도이거나, 너무 뒤처지지 않기 위한 방어적 필요성이다.
- 긍정적 감정은 날갯짓하며 잠깐 내려앉았다가 곧 날아가 버리는 나비이다. 보는 자의 눈도 그에 상응하게 균형을 잃는다. 사람들은 은혜는 금방 잊고 더러운 술수는 영원히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결혼의 어려움 중 하나도 이것이다. 한번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좋은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해야 한다. 죄를 짓기는 쉽지만 그 대가를 치르기는 무척 싫다. 조너선 하이트는 돈을 따는 쾌감은 같은 액수의 돈을 잃는 고통보다 강하지 않다면서, 이 원리를 금융과 도박에도 확대 적용한다. 나쁜 것은 항상 좋은 것보다 더 강하다. 셰익스피어는 이 사실을 오래전에 다룬 바 있다. 인간의 나쁜 매너는 황동에 새겨져 있지만, 그들의 덕성은 물에 기록된다.
- 왜 불안과 우울이 그토록 쉽게 만상화되는지는 이들은 마음을 점령하여, 부정적 생각을 지배적 감정으로 만들라고 설득하기 때문. 아론 베크는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견해 세가지, 세속적 삼위일체를 밝혔다.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세상은 황량해, 앞날엔 희망이 없어. 이 일반적 견해의 삼위일체를 떠받치는 것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의 사중주, 즉 개인화, 지나친 일반화, 확대해석, 임의적 추론이다. 개인화란 불우이나 사고가 날때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이며, 지나친 일반화는 자기 자신이 항상 끔찍한 사건의 희생자라고 믿는 것, 확대해석은 나쁜 효과를 과장하는 것, 임의적 추론이란 근거도 없이 부정적 결론을 끌어내는 것. 다음으로 베크는 인지치료법을 개발.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식별하게 하고, 글로 써보고, 위의 네 악당 가운데 어느 하나가 못살게 구는 것으로 분류하도록 훈련시키는 것. 이는 불교나 프로이트 학설에서 이해에 의한 변신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로 사용되던 것의 심리학적 버전이다.
- 인간 심리에서 행복 프로그램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을 늘리녀는 것이 아니라 계속 투쟁하게 만들려는 데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힘껏 노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특히 부처, 스피노자, 쇼펜하우어는 이에 동의했다. 쇼펜하우어는 특유의 명료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따. '우리는 무엇인가를 향해 힘껏 노력할 때 외에는 존재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신경학자 안토니오 아마지오는 이 노력이 우리의 신경생물학적 구조에 근거한다고 주장. 생명조절의 내재적 장비는 이도저도 아닌 중립적 상태를 목표로 하지 않느다. 평형을 이루려는 노력의 목표는 중립적 생명상태보다 더 나은거, 우리가 사유하는 존재, 풍요로운 존재로서 행복한 삶이라고 규정하는 어떤 것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하도록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삶을 향해 노력하도록 태어난 존재다. 노력은 시간을 들이고 장애를 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과, 실패할 가능성, 매우 큰 실패의 가능성까지도 의미한다. 애쓰지 않고도 좋은 기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을 더이상 좋은 기분이라 할 수 없다. 가상현실이 발명되기 ㅈ너인 70년대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모든 면에서 실제처럼 느껴지지만 오직 즐거운 경험만 맛보는 삶을 제공하는 기계가 있다고 가정할때, 그런 삶에는 진실성이 없으므로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 하지만 그것에 정말 결여된 것은 진실성이 아니라 노력일 것이다. 결정적인 요인은 그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귀중한 것은 모두 애써 얻어야 한다.
-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내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에서 우리는 모순점을 여러가지 발견한다. 대개 삶에 대한 최고의 안내자들 본인은 모든 사람들이 생활이라고 여기는 것을 까탈스럽게 거부하고 살았다는 사실도 그중 하나다. 가령 스피노자가 렌즈 가는 일을 생업으로 살았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그가 일상에 시달린 기간은 고작 몇년이다. 부처는 가정이 있었지만 아내와 아이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밤중에 몰래 달아나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의 정직성이라는 것도 알 만하다. 소크라테스는 달아나지는 않았지만 가족을 무시한 것으로 악명이 높음. 야스퍼스는 공자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내 및 자식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샤르트르와 그를 둘러싼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보다 더 한심하다. 샤르트르의 실존주이자 연인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젊고 매력적이고 감수성 풍부한 여학생들을 유혹한 다음 그들을 샤르트르에게 넘겼고, 샤르트르는 놀만큼 놀고 나서 그들을 버렸다. 그들 중에는 이런 일을 겪고 평생 삶이 피폐해진 사람이 여럿 있었다. 심지어 축의 시대에 등장한 사상가들은 여성 혐오증의 기색도 보여으며,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특히 심했음. 그러니 이런 남자들이 처자식을 거느리고 가족을 부양하며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 3천년전 길가메시 서사시의 플롯은 주인공인 메소포타미아 왕 길가메시는 자신의 왕국과 생활에 환멸을 느껴 탐구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에서 그는 사나운 사자와 전갈 남자와 싸우며, 자신을 묶어 두려 하는 아름다운 여신을 만나 놀랄만큼 현대적 유혹을 받는다. 밤낮으로 흥겹고 즐겁게 해줄께.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씻겨주고 목욕도 시켜줄게. 하지만 주인공은 탐구여행을 계속하며, 깊은 바다속으로 들어가고, 불멸의 식물을 딴다. 그러나 결말은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버전에서든 바꾸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나쁜 쪽으로 맺어짐. 길가메시가 누워서 쉬고 있을 때 뱀이 그 식물을 훔쳐먹어 영원한 젊음을 얻는다는 결말이니 말이다. 신화에서 뱀은 항상 악당이다. 캠벨은 이런 서술구조가 본질적으로 내면의 여정을 상징한다고 주장. 영웅은 자기시대의 관습적 사유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사면적 사유의 어둠속으로 모험을 떠나고, 창조적 힘을 발견하여 자신을 변화시키고 이를 타인과 공유하기를 원한다. 수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을 겪은 뒤 얻는 상품은 인식이다. 영웅은 깨닫게 되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야기 구조에는 출발, 시련, 상, 귀환이라는 네 단계가 있다. 추상적 탐구자의 목표도 그와 마찬가지로 네 단계를 거쳐 도달됨. 그것은 거리두기, 어려움, 이해, 변형이라는 단계다. 이와 비슷한 네 단계가 원시 문화의 성년의례에도 공통적으로 들어 있음. 그것은 격리, 제례적 상처입음, 통과의례, 귀환이라는 형태이다.
- 다마지오가 발견한 내용을 토대로, 조지프 르두는 두뇌에는 결정에 이르는 두갈래 길이 있다는 설을 내놓음. 낮은 길과 높은 길. 낮은 길은 어떤 의식적 추론이나 인시깅 개입되지 않고, 두뇌이 감정중추인 편도체에서 감각지각 자료를 처리한다. 이 낮은 길은 즉각적이고 압도적으로 강력하며 통제하기가 무척 힘들다. 이것은 그레이/리벳 이론을 지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높은 길도 있다. 그것은 분석과 계획과 의식적 결정의 중추인 전전두엽 피질을 거치는 길. 이 중추는 편도체에 직결되어 있으므로, 다마지오가 깨달은 것처럼 추론에는 항상 감정적 내용이 투입됨. 하지만 르두의 말에 따르면 전전두엽 피질은 편도체의 원초적 욕구와 충동을 억누를 수 있고 또 자주 그렇게 한다고 한다. 감정적 두뇌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은 전전두엽 피질의 힘을 키운다. 다마지오도 같은 주장을 전개. 우리는 우리 두뇌에 그 기구가 여전히 남아 있고, 작동하는 맥락은 매우 달라졌는데도 반응 방식은 옛날과 동일하다는 사실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또 그런 반응을 무시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시하라고 설득할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행동에 대한 신경학적 견해는 부처/스피노자/프로이트가 제안한 자아모델과, 개인적 책임감 및 선택을 주장한 샤르트르의 입장과 완전히 맥을 같이 함
- 최근 두뇌과학 분야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발견은 우리의 행동이 유전자의 손안에 있는 것만큼이나 유전자도 우리행동에 달려 있다는 사실. 유전자는 감각을 통해 중재되는 경험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나사들이다. 그것들의 조촉매는 사건 하나하나에 따라 스위치가 켜지고 꺼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리들리의 결론은 분명함. 자유의지는 유전자에 의해 사전설정되고 그것에 의해 운영되는 두뇌와 전적으로 양립가능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유전학이 이기심과 잔인함, 야만적 힘을 옹호하는 사악한 과학이라는 생각을 물리친다
- 현대인들은 뚜렷한 이유없이 무작위적으로 가해지는 불운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런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남 탓하기라는 새로운 방법이 등장. 예전에는 부운을 신비스런 신의 처사로 설명. 고난에는 목적이 있고, 때가 되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 완전히 밝혀지리라는 식이다. 지금은 불운에 의미가 있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 잘못된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들 여긴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것은 절대로 희생자 본인의 탓은 아니다. 더러운 일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다. 제약산업이 장애를 비난하고 돈을 버는 것처럼, 법률이라는 직업도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고 돈을 받을 의사가 얼마든지 있다.
- 끊임없이 관심을 옮겨다니는 것은 두뇌에 장기적 영향을 미침. 신경과학자들은 서른 다섯에서 서른 아홉살 사이의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어 방해해도 인지과제에 집중하는 데는 거의 영향이 없지만, 열여덟에서 스물한살 사이의 사람들에게는 전기자극으로 방해하면 업무수행능력이 눈에 띄게 약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가 산만한 세대의 경우 끊임없이 방해요소를 처리해야 할 필요 때문에 전전두엽 피질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 있다. 두뇌의 매니저 역할, 에고 노릇을 한다고 알려진 전전두엽 피질이 두뇌가 성숙하는 최종단계에 속하며 사춘기가 지난 뒤에야 완전히 형성되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일이다. 이는 사춘기 아이들이 걸핏하면 이드에게 조종되며 명령적이고 충동적이며 배은망덕하고 화를 잘 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방해와 하이퍼링크가 많으면 결정적인 집행통제부는 주의가 산만해질 뿐만 아니라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 만성적 주의 산만함은 전전두엽 피질을 약화시키며, 그와 반대로 명상을 오래 하게 되면 그것이 강화된다.
- 자부심이 가진 문제점은 거기에는 어떤 가치도 원리도 없고,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과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자기존중에는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을 성취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지만, 현대에 통용되는 자부심은 자신에게는 아무 요구도 하지 않고 오직 타인들에게만 요구할 뿐이다. 자기 존중은 내면으로부터 오고 자부심은 외면으로부터 온다. 스피노자는 이 차이를 이해했다. '자기 존중은 우리 바깥의 어떤 것으로 확장되지 않으며, 자신이 완전해진다는 것의 가치를 아는자,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지 않는 냉철한 자만의 것이다.' 자부심은 세계에 비춰진 어떤 이미지이든 도로 반사되기를 요구하는 자아도취적인 것이며, 그 어떤 지속적인 이득도 없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 성공하고 싶다면 실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 일반적으로 우리의 단점에 집중하는 편이 더 현명함. 하지만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독하게 어렵다. 마음은 항상 그 자신을 소멸시키려는 전망으로부터 달아나듯이 그 자신의 무의미함으로부터도 줄기차게 물러난다. 날것 그대로, 동요하고 불안정하고 두려워하고 괴상한 것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데는 의지에 의한,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 신념에 반하는 도약이 필요하다. 내면의 거인은 알고보니 벌벌 떠는 난장이였따. 반쯤은 미쳣고 신경증에 걸렸고 탐욕스럽고 분개하고 비틀린 모습의 난쟁이인 것. 한 난쟁이와 다른 난쟁이를 구분해 주는 것은 위장하고 자기기만하는 힘과 성격이다.
- 요즘 사람들은 엄숙하고 수수께끼 같은 아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행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로, 무엇 때문에?'라고 물어보면 그 수수께끼는 금방 와해되어 짜증스러운 몰이해로 변한다. 뭔가를 특별히 보고 싶다는 열망이 없고, 그저 움직이고 싶다는, 가고 싶다는 욕구만 있기 때문이다.
- 사유는 선과 악을 구별해주는 것일 수 있다. 또 삶과 죽음을 구별해주는 것일수도 있다.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생존자들의 공통적 특징 중 하나가 지적 호기심이라고 함. 강제수용소의 극심한 고통조차도 적극적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연구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결정적 존재의 가치를 부여해줌. 지위와 소유에만 의존하여 완전히 부르주아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그런 자질을 갖지 못했으며, 가장 먼저 죽는 쪽에 속했다. 레비의 경험은 스토아 사상가들이나 실존주의자들이 조언했듯이, 이해가 곤경을 견디기 쉽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한 한가 사례다. 자기연민, 분노, 남 탓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이로운 쪽으로 돌려 놓으려고 노력할 수 있다. 배울 의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고통은 훌륭한 스승이다.
- 독서는 그것 자체로 강렬한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두뇌를 발달시키고 유지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중요. 또 경험을 고조시키기도 한다면 더욱 만족스러움. 플로베르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처럼 재미를 위해 읽지 마라. 야심가들처럼 지시를 받기 위해 읽지 마라. 그런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읽으라.'
- 주의를 집중하고 어려운 일을 해내야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요령이다. 칙센트미하이는 십대들을 관찰하여, 흐름의 활동이 가장 적은 아이들, 즉 텔레비전을 많이 보고 쇼핑몰에서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이 모든 만족감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 비해 공부를 하거나 운동경기에 참가하는 아이들의 점수는 높게 나왔다. 그런데 그들은 쇼핑모에서 시간을 때우는 아이들과 소파에 기대어 감자칩을 먹는 아이들이 재미를 더 본다고 믿고 있으며, 쿨함의 독재가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보니 축복받는 자는 자기들임을 깨닫지 못함. 이것은 일반규칙의 한 사례이다. 젊은이들이 가진 것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 문제는 노동이 그저 보수를 위한 활동만이 아니라 단순화된 페르소나를 유지하는 일, 항상적인 수행, 끝없는 연기를 포함한다는 것. 이것이 직장 밖에서 동료를 만나면 그토록 누추해보이고 왜소하고 능글맞게 보이는 이유다. 그들은 잠시 세트장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인공적인 생동감의 불이 꺼졌고, 잿불만 남은 상태다. 더욱이 우리는 연기하는 줄도 모르는 채 연기하고 있고, 심지어는 이것이 자연스런 행동이라 믿고 있다는 것. 부정적 감정은 모두 숭고화된다. 높은 연봉을 받으며 외견상 만족하고 있을 것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갑작기, 명백한 이유도 없이 우울증으로 쓰러지는 이유가 이것때문인지도 모름. 문제는 집단에 굴복하는 데서 요구되는 정체성의 상실이다. 가면이 얼굴에 녹아들어간 것이다. 조슈아 페리스의 소설에 나오는 광고회사 직원들은 모두 서로에게 열광한다. 모두 똑똑하고 창의적이고 재치있고 생기있다. 그러면서 모두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 현대 도시에서는 남녀간의 관계가 외부와의 유일한 연결고리고, 구조이고, 의미이고, 매혹일 수도 있다는 것. 전통사회에서는 의미와 마법을 안겨주는 종교가 있었고, 한해의 틀을 짜는 제례가 있었고, 뒷받침 역할을 해주는 강한 관련들과 확대가족이 되어주는 공동체가 있었다. 지금은 불쌍하게 신음하는 커플들의 관계가 그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하며, 허약해진 등이 삶의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 긴장감에 무너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 최근 신경과학 연구에서는 매혹과 사랑의 차이가 확인되었다.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각각 다른 두 단계를 낭만적 사랑과 애착이라는 용어로 부르는데, 자신이 연구한 175개 문화 모두에서 낭만적 사랑을 발견. 오래된 흑마법인 사랑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녀는 신경학자들로 팀을 구성하여 사랑의 상이한 단계에 처한 사람들의 두뇌를 스캔해 보았다. 이런 스캔 영상에서 낭만적 사랑과 애착은 완전히 다른 두뇌회로와 신경전달자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낭만적 사랑은 도파민 수위는 높아지고 세로토닌 수위는 낮아지는 현상에 관련되어 있으며, 애착은 여성의 경우 옥시토신과, 남성의 경우 바소프레신과 결부되는데, 이 두 신경전달자는 동물의 짝짓기에 관련된 호르몬임. 그리고 낭만적 연인들에게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두뇌회로와 도파민 수위는 심한 마약중독자들의 것과 비슷. 피셔는 낭만적 사랑이 정말로 중독의 한 형태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스탕달의 통찰을 확인해줌. 스탕달은 그런 사랑이 가장 비이기적인 활동처럼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대체로 이기적이라고 본다. 사랑하는 자는 상대인물이 아니라 도취상태를 사랑하는 것. 사랑받는 자는 정말 전율을 느끼지만 그것은 오직 중독자에게 코카인이 만들어내는 것과 동일한 전율일 뿐이다. 매혹이 왜 절대로 지속적이지 못한지는 이로써 설명된다. 중독되면 내성이 생긴다. 같은 정도의 효과를 맛보려면 약의 분량을 점점 더 늘려야 한다. 하지만 매혹은 그런 분량을 어느정도 이상으로는 늘릴 수 없다. 그러므로 도취감은 결국 사라진다. 또 다른 신경학자팀은 사랑의 도취감이 지속되는 기간을 조사하여, 통념이 옳다고 결론내렸다. 매혹은 대개 12개월에서 18개월 정도 지속된다.
- 누구라도 함께 살기는 쉽지 않다. 또 사랑의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단계란 없다. 행복이 그렇듯이 사랑은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며, 일종의 끝나지 않는 연합 창조력 프로젝트 비슷한 것이다. 또 행복처럼 성취를 위한 노력 그 자체가 성취가 된다. 창조적 노력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사랑은 탈진과 쇄신의 순환을 따른다. 쇄신의 기쁨을 맛보려면 탈진은 꼭 필요하다. 그 프로젝트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어떤 기술이든 가치 있는 것을 배우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 성숙한 사랑에는 거리두기가 애착을 부추긴다는 모순이 있다. 릴케가 말했듯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중대한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는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성찰하고 생각하고 자신을 추슬러 자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뭔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조언이다. 연인으로 성공하려면 혼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 과정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독립적이다.
- 늙는다는 것은 원치 않느 분리와 관련되어 있다. 직장에서 은퇴해야 하고, 자녀들이 독립하고, 성욕이 감퇴한다. 본성, 욕구, 욕망, 자아의 별난 특징들이 더 잘 이해되고, 그렇기 때문에 통제하기도 더 쉬워진다. 어떤 것이 만족스럽고 어떤 것이 그 반대인지 더 잘알게 된다. 노년의 상황이 젊은 시절에 비해 더 우울할지는 몰라도 부정적 생각을 억눌기는 더 쉬워지는 것 같다. 젊은 성인들의 두뇌를 스캔해보면 편도체가 긍정적 자극과 부정적 자극 모두에 반응하지만 연로한 성인들의 경우에는 긍정적 자극에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이는 전전두엽 피질이 편도체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됨. 에고가 마침내 이드를 길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 스릴 넘치는 섹스 모험을 떠나거나 직업적 성공을 이루기는 점점 더 불가능해짐. 그러므로 세상이 부르는 사이렌의 유혹소리에 저항하기도 쉬워짐. 다른 사람들과 같아져야 하는 필요도 줄며,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내가 그들을 좋아해야 할 필요도 줄어든다. 적응해야 한다는 강요도 적어진다. 노년이 누리는 가장 큰 영광 가운데 하나는 고집부리기인데, 의식으로 통제되는 범위내에 머무르고, 너무 완고해져서 괴팍스러움으로 변하지 않는 한 그래도 된다.
- 장수를 누리는 데 쾌활함은 상관이 없고 만성적으로 쾌활한 사람들은 평균보다 수명이 짧다. 유쾌한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은 나쁜 조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노년에 관한 또 하나의 희소식이다. 반면, 정념, 집중력, 새 기술의 습득은 수명을 연장해주며 그 품질도 개선시켜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늙었다고 해서 새롭고 힘든 일에서 움츠러 드는 성향은 문자 그대로 치명적일 수 있다. 심지어 두뇌가 꾸준히 쇠퇴하기는커녕 죽을 때까지도 계속하여 새 뉴런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증거도 있다. 이 현상은 신경발생이라는 기적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그토록 재앙처럼 느껴지던 절박함의 소멸인데, 이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가능성의 주문은 감각을 차단하고 정신을 발광시키는 악의 주문이니 말이다. 주문이 마침내 벗겨지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배우기가 더 쉬워진다. 여정이 목적지보다 더 중요하며, 활동이 성과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 말이다. 이것은 여러번 되풀이하여 얻어진 결론이다. 배우려는 노력이 배움 그 자체보다 더 귀중하며, 별 목적없는 생각은 가장 즐거운 사유형태이며, 어려운 기술에 몰이바는 것, 흐름의 경험은 그 어떤 인식보다도 더 큰 보상이 된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만족스럽다. 모든 것에는 그 자체의 보상이 있게 마련이다.
- 인간 역사에 있어 가장 대단하고 부조리한 탐구여행은 인간이 달에 내린 사건이었다. 카프카와 베케트가 힘을 합쳤다 하더라도 그런 숭고한 우화를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그 시대의 특징적 현상은 무척 많다. 이미지가 내용에 우선하는 현상(달 착륙에서는 사진외에 건진 것이 없지만, 그 사진은 월석보다 더 귀중했다), 절대적 가치보다 차이가 더 중요시 되는 현상(미국의 진짜 목적은 소련보다 먼저 달에 착륙하는 것), 수단이 목적에 앞서는 현상(인간이 달에 간 것은 그저 달에 가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출현하게 된 원천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전 세계 언론이 참여한 최초의 사건이었고, 현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신격화였다. 당시 거의 6억 인구가 그 광경을 TV로 지켜봄. 테크놀로지라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또 거의 실패할 뻔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말이다. 달착륙선은 착륙지점을 지나쳤고, 용량이 요즘 휴대폰에도 못 미치는 항법용 컴퓨터는 긴장감 때문에 탈이 났다. 즉 오작동을 일으켜 1202라는 에러 메시지를 띄운 것. 그때까지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메시지였다. 철학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메시지를 신의 유머감각이 대단하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해석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주인들은 그런 성향도, 시간도 없었다. 암스트롱은 수동식 조작으로 전환하여, 연료가 다 떨어져 가는 동안 엄청나게 울퉁불퉁한 바위투성이 표면이 휙휫 스쳐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다. 연료가 동나기 꼭 10초던에 그는 착륙할 만한 평평한 지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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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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