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비드 버스는 질투라는 것이 단지 파괴적이고 무가치한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보호하고 우회적으로 경고하며, 사랑에의 헌신을 안정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진화의 결과라고 주장. 그러므로 질투는 제거대상이 아니라 질투의 속성을 정확히 알고 조절해야 함
- 아빠들은 태교에서 분만까지, 기저귀 갈이부터 분유 먹이기까지 공동육아의 대열에 기꺼이 합류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감상의 육아에서 성장의 육아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아빠들이 처한 한계라면 한계다. 전쟁터에 나가 돈을 벌어야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절대명제 앞에서 자유로운 아빠는 없다. 덕분에 아빠들은 부정을 부정하며 키워왔던 좋은 아빠의 상을 전설속에 가두고 만다. 새벽귀가후, 잠자는 아이의 불쑥 커진 궁둥이와 발바닥을 주물럭거리며 히죽 웃는 것에 만족하면서, 가족들이 외국과 한국에 떨어져 있어야만 기러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아빠들은 가족과 함께 한국안에 있어도 모두 기러기다. 그리고 늙어가는 아빠는 이 무렵부터 자신의 아버지와 와해를 시작. 아버지가 표현하지 못했던 속사랑을 이해하기 시작. 동병상련, 내 아버지도 이렇게 혼자만의 소외와 우울 속에서 삶의 버거움을 가족에게 전혀 내비치지 못했겠구나. 지금의 나처럼 아내의 표현 중에 '당신은 왜 점점 아버님을 닮아가?' 라는 말이 부쩍 늘어날 때도 이 무렵이다. 기침소리, 걸음거리, 잔소리까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 안에 들어와 있다. 거부하고 싶었으나, 그것조차도 타협한다. 어정쩡한 모습으로 겉도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이 편하다. 좋든 싫든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의 기억속에서 존재감 하나는 확실하니까.
- 부부는 안팎에서 전쟁중이다. 우아하게 늙기가 버거운 것은 소외속에 늙어가고 있는 아빠들이나 고함만 늘어가는 엄마들이나 피차일반. 전쟁 때는 전우가 내 목숨 같은 것. 그러므로 최소한 전우끼리는 총 쏘지 않기.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기. 아버지와 화해하며 닮아가더라도 나몰라 아버지는 되지 않기.
- 부부싸움을 할 때 싸움의 내용은 이혼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의 방식과 목소리가 이혼을 결정짓는 관건이다. 대화가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 등 4단계로 진행되면 이혼확률은 92%다.
- 부부싸움을 할 때는 아내쪽에서 먼저 목소리 톤을 낮추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라. 손까지 잡아준다면 금상첨화. 이럴 대 남자는 혈압이 내려가고 엔돌핀이나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안정감을 느낀다. 결국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온다
- 스트레스가 생기면 즉시 풀어라. 억제론은 인간이 외로움을 숙명처럼 끼고 살아가야 하듯이, 분노 역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것. 폭발론 대표주자 아니타 팀페의 '분노는 나의 힘'에서 분노가 가진 긍정의 힘을 강조. 분노는 건강한 감정이므로 오히려 분노를 환영하라고 주장. 분노를 억누르고 방치하면 우울증, 공격성 등의 문제가 생기고 타인의 감정은 물론 자신의 기쁨 조차 느낄 수 없게 된다고 경고함. 분노를 긍정 에너지로 만드는 방법도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가 '건강한 자기 가치의식을 세워라'이다. 이 말은 자기 안에 있는 피해의식, 열등감, 나약성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내면화했을 때, 분노할 일도 줄어들고 화내는 것도 쉽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됨. 누군가 자신에게 잘못을 했을 때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래' 가 피해의식의 반응이라면, '이 정도로 내가 꿈쩍하겠냐?' 는 강한 존재감의 확인. '내가 그렇게 만만하고 우습게 보여?' 가 열등감이라면, '이 정도에서 네 수준을 알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부디 잘먹고 잘살아라' 라고 털어버리는 것은 내적 우월감이다.
- 거절표현 잘하기
* 모호하게 거절하지 마라. 상대방은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듣는다
* 죄의식을 느끼는 듯한 표현은 하지마라. 상대가 더 집요해진다
*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거절의 이유를 대지 마라. 진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 애원의 어조로 거절하지 마라. 상대가 기고만장해진다.
* 혹시 승낙했다면 뒷말을 퍼뜨리지 마라. 주고도 욕을 먹는다
- 중년이 되면서 발현되는 남성의 여성성을 융은 아니마라고 표현. '내 안에 여자 있다' 는 의미로서의 아니마다. 아니마가 특정 대상에게 꽂히면 바람이 난다. 그런데 대부분 자신의 아니마가 투사되는 대상은 융이 말한 아니마의 첫단계, 즉 어머니상에 묶여 버리는 이브의 단계다. 예쁘고 젊은 여자를 향하는 헬레나 아니마는 이브의 아니마와 싸웠을 때 백전백패다. 즉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면 젊은 여인의 미모가 아니라, 점점 소외되는 중년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따뜻함으로 감싸주는 그 여인의 모성애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모성애가 비아그라가 되어 점점 쪼그라드는 나면의 수컷을 일으켰을 수도 있따. 마누라와 애들 앞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왜 자기에게서 느낄까? 라며 행복해했을 수도 있다.
- 42년간 하버드대 졸업생 268명의 생애연구를 집결한 그랜트 연구는 실제로 인간관계가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줌. 성공적인 노후로 이끄는 열쇠는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다. 이쯤 되면 행복의 90%는 인간관계에 달려 있다고 말한 키에르케고르의 수치는 상향조정을 해도 무리 없어 보인다
- 환경이 복잡해지면서 하나의 진정한 자아는 없다.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적인 나에의 믿음은 망상. 주인격과 보조인격을 서로 조화롭게 발전시키며 그들 각자에게 멀을 걸되, 언제 어떤 인격이 나오고 언제 어떤 인격이 들어가는지 잘 조절하는 것이 중요. 다중인격을 미숙함 또는 부도덕과 범죄의 시각으로 보느냐, 아니면 리타 카터나 영국 심리학자 존 로언이 그랬듯이 정상으로 여기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다중성은 일관성에 비해 변종의 대우를 받는 것이 현실. 신뢰했던 내 친구가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씁쓸한 배신감처럼, 타인의 다중성은 때때로 신뢰관계에 치명적 결과를 초래. 그러나 역할에 있어서 다중성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점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절하는가, 조정당하는가의 문제일수도 있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에게 부과된 아들의 역할, 아버지의 역할, 남편의 역할, 사장의 역할, 관리자의 역할, 장남의 역할, 남자의 역할 등 수많은 기대가치를 단일한 색깔로 소화하기에는 어느 누구든 우리의 그릇이 너무 작다. 밥공기더라 밥통이 되라 하니 그릇이 깨질 지경인데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자신을 찾으라 한다. 이때는 자신이 여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 믿음직한 나, 자유로운 나, 근엄한 나, 자상한 나, 보수적인 나, 진보적인 나를 뒤섞어 버리고 나면 머리는 터지고 뇌는 돌아버릴 뿐이다. 패트리샤 던빌은 자신의 다중성을 인식하는 사람이 스트레스 상황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함. 사장일 때 나는 사장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고, 퇴근 후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삶의 취향을 즐기면 그만이다.
- 종교는 인간의 유한성으로 무한성을 획득함. 인간이 불로장생했다면 종교는 결코 인간의 땅에서 부흥치 못했을 것. 여하튼 다행한 일이다. 세상 어느 한쪽 맘 붙일 곳 없을 때, 엉엉 소리내어 울어보고 싶을 때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가야할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구원은 마라톤이거나, 등산이거나, 골프거나, 혹은 대폿집이 되겠지만, 그것이 그들의 종교라면 그것들은 모두 그 자체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 청춘기를 보내고 생의 후반전을 시작한 사람들이 보이는 가장 위험한 증상은 인지부조화. 꼰대 정신도 여기서 나온다. 자신을 이미 완전한 존재라 생각하다보니 스스로를 너무 믿어버린다. 그 믿음을 거역하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것 아닌 틀린 것이 된다. 자기의 판단과 선택은 늘 옳은 것이어야 하며, 누가 봐도 잘못된 것조차 자기 합리화를 통해 옳은 것으로 조직한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어른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하기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것을 습관화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삶이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에 의해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 삶은 독선과 아집에 빠질 수밖에 없다
- 어니 젤린스키는 느리게 사는 삶에서 이렇게 말함. 걱정의 40%는 일어나지 않고, 30%는 이미 벌어졌고, 22%는 아주 사소한 것이고, 4%는 바꿀 수 없고, 단지 남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걱정이다. 결국 우리가 하는 걱정의 96%는 쓸데 없다.
- 미성숙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소유에의 욕구가 아니라, 영속적으로 지속되는 소유욕이라면 그것은 병적인 것이다. (프로이트)
- 현대 소비자들은 나는 존재한다=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내가 소비하는 것 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지고 있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많이 사랑할 수 있다. 소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두 유형의 차이점을 구분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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