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중요한 것은 삶과 삶의 충만을 지배하는 일이었다. 로댕은 그가 바라보는 곳 어디에서나 삶을 포착했다. 그는 극히 사소한 곳에서 삶을 포착했고, 그것을 관찰하며 추적했다. 그는 변화가 일어나는 곳, 삶이 머뭇거리고 있는 곳에서 삶을 기다렸으며, 삶이 달려 나갈 때는 뒤따라가 잡았으며, 삶이 어떤 자리에서나 똑같이 위대하고, 똑같이 강력하고 매력적인 것임을 알았다. (릴케의 로댕론)
- 예술가는 태어나는 것인가 혹은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주목했던 프로이트는 마침내 "예술창조의 전제조건이 삶의 파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삶에든 사람에게든, 뭔가 억울하게 당했다거나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감정없이 예술을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 예술은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빼앗긴 행복에 대한 하나의 보상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며,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그러한 보상을 찾는 예술가는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는 망상적 돈키포테라고 보았다. 현재 자신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있다면 굳이 예술을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예술은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씀. 그래서 예술사가인 '예술사의 철학'의 저자 아놀드 하우저의 말을 빌리면, 모든 예술은 정확히 말해 일종의 돈키호테주의다. 그리고 이런 돈키호테주의가 예술사에서 전면화되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다. 요컨대 낭만주의 이후의 예술은 삶의 상실을 전제로 하며, 그에 대한 대가로 지불된다.
- 우리가 아는 예술가상의 전형은 겨우 200년밖에 안됐다. 그리고 이때 생겨난 순수예술이라는 개념 때문에 예술가-천재, 광기, 열정이라는 등식이 고정관념으로 굳어지시 시작. 어쩌면 지금, 예술가상의 원형이 바뀌는 시대가 도래했는지 모른다. 이제 통상 예술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은 타고나지도 길러지지도 않는 시대가 온 것 같다. 그러니까 예술가 하면 자꾸 피카소나 반 고흐나 뒤상 같은 이들을 떠올리는 일이 진부해질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런 낭만주의 예술가상은 멸종했고, 이제 기획상품처럼 부모가 만든 예술가들이 탄생하고 있다는 사실. 예고와 국내 명문 미술대, 해외 유명 미대를 졸업하는 등 충분한 예술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집안 출신. 그런데 이런 질 좋은 교육은 정작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 작품을 하는 작가를 배출하는 일과 그다지 연관되지는 않는다. 작품은 왠지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워졌고 디자인처럼 세련되어졌으며, 예술 또한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라는 사실만을 목도하게 된다. 젊어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교수가 되면 슬쩍 사라져 버리는 예술가들도 그들 중 한 부류이다.
- 삶은 심심해야 느려지고, 느려져야 기다림이 생기고, 기다림이 생겨야 인간에 대한 깊은 시선이 생긴다. 예술가가 심심해서 창조한다는 생각은 사실 근대적인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예술가는 장인이고 직업인이었기 때문에 주문자의 요구에 충실하면 그뿐이었다. 지루하거나 권태로우려면 인간존재의 조건이 바뀌어야 함. 일단 먹고살기 위한 일에서 해방되고, 일종의 부조리한 실존적 상태가 되어야 함. 현대 예술가들은 어떻게 한가함, 심심함, 지루함, 권태로움을 극복했을까? 그들은 그속에서 어떤 창조를 획득한 것일까? 현대인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많은 정보 속에서 어떻게 잃어버린 심심함을 되찾을 수 있을까?
- 어린아이는 천진난만함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고 놀이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니는 양심의 가책도 없는 비도덕적 존재다. 어떤 도덕과 법률, 제조도 아이를 심판할 수 없다. 다른 존재들에게는 전투였던 것이, 아이에게는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아이는 배울 필요없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생을 즐긴다. 따라서 아이가 하는 모든 말은 어린 진리, 혹은 작은 진리가 된다. (니체)
- 요즘 화가들의 모사 혹은 인용은, 반 고흐의 그것과는 다름. 그들의 모사는 오로지 자기 조형어법을 돋보이기 위한 경우가 허다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반 고흐의 자화상과 같은 작품들은 그것을 벤치마킹하는 작가의 기법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이라는 의미. 조형예술은 형식이 곧 내용이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기의 조형언어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 기존의 익숙한 이미지를 차용함. 약간의 오마주와 패러디, 그리고 더욱 중요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요즘 미술가들은 진심으로 다른 예술가의 삶마저 모방하고 싶어하기는 할까? 그들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 카피는 그리스 시대 조각을 로마시대에 다른 사람이 그대로 모방하는 것. 반면 레플리카는 어떤 공방의 조각가가 A라는 조각을 만들었을 경우, 그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똑같은 작품을 주문하면 그 작가 혹은 같은 공방의 사람이 다시 만들어주는 것이다. 거의 완벽히 복제할 수 있는 조각이니 가능한 이야기다.
- 거미조각으로 유명한 루이즈 부르주아야말로 늦은 나이에도 얼마나 활력있게 작업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기념비적 존재다. 사실 부르주아는 40세가 넘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고, 70세가 다 되어 명성을 얻었으며, 99세로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살다 간 작가였다. 부르주아는 86세인 97년부터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기로 결심. 그가 만든 조각 '거미'가 세계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지 3-4년이 흐른 뒤. 90세를 앞둔 노작가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만 하겠다니 참으로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남성 성기와 거세도구 혹은 여성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다소 폭력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작업을 하던 부르주아가 손바느질만으로 아주 작은 인형을 만들기 시작한 것. 값나가는 무겁고 딱딱한 재료가 아닌, 집 안의 모든 폐품과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사용했다. 다름아닌 부르주아가 평생 입었던 잠옷, 속옷, 수건, 이불 시트 같은 아주 부드러운 헝겊들이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부모님의 태피스트리 복원가게를 돕던 유년시절 기억을 되살려내기 시작.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의 모든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깁고, 싸매고, 꿰매는 등 바느질로 하루에 몇 점의 인형을 만들었따. 이로써 바느질 인형은 유년시절 가족사로부터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행위가 되었다. 부르주아의 인형작품은 이전 작품보다 훨씬 작고 부드러웠지만, 그 아우라는 훨씬 더 크고 압도적이었다. 그녀는 나이 아흔이 가까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삶과 화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세심한 바느질로 인형연작에 몰두했던 부르주아는 이후 꽃 연작을 시작. 그녀는 꽃을 아주 붉고 화려하고 섬뜩하게 그려냄으로써 그 어느때보다 젊고, 뜨겁고, 역동적으로 묘사했다. 부르주아의 꽃 연작은 여느 꽃 그림이 나타내는 단순한 바니타스(허무 혹은 무상)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년의 꽃은 자신의 삶에 보내는 환생의 암시이자 생명에 관한 드라마라 할 수 있음. 그런 의미에서 인형과 꽃은 만년에 그녀가 이룩한 가장 미시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생명력을 담보한 예술이 되었다. 중요한 건, 거의 100세까지 장수했던 부르주아가 나이가 들수록 진정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 거대담론에 대한 관심보다는 더욱더 자기다운 일에 집중했던 것. 그로써 부르주아는 무언가 다르게 살고 싶은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노년의 삶이 얼마나 황홀할 수 있는지를 아름다운 선물로 안겨준 셈이다.
-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신윤복의 미인도 속 주인공은 심심하고 평범한 얼굴임. 어쩌면 전형적인 우리네 여인의 얼굴일수도 있는 이 얼굴을 두고 사람들은 미인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음. 그런데 그녀가 진정 아름다운 이유를 서양인인 마르셀 프루스트가 더 잘 설명해줄 수도 있다. 지극히 평범한 외모의 여자에게 끌렸던 그는 자전적 소설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여쁜 여자들은 상상력이 없는 사내들에게 넘겨주자"라고 말할 정도. 그뿐 아니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아름다움에 관한 전혀 다른 상상력을 발휘한다. 앞니 사이가 벌어진 클로이라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 화자는 치아 사이의 틈이 그렇게 유혹적으로 보인 것은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완벽한 아름다움에는 어떤 압제, 창백함, 독단성이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흔들리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헝클어져 있었기 때문에 창조적 재배치가 가능했다. 고전적 비례를 갖춘 사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에 무슨 독창성이 있을까?" 진정 새겨볼 만한 말이다.
- 현대미술의 기본전략은 '낯설게 만들기'다. 그런데 무엇을 낯설게 만든다는 것일까? 시시한 것,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다. 귀한 것, 보기 드문 것을 낯설게 만드는 일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너무 하찮아서 한 번도 예술의 대상이 되리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물건이 대상화되고 시각화 될 때 기이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익숙한 물건이 낯설어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
첫째는 원래 있던 장소에서 떼어내 다른 장소에 두는 것. 미술용어로는 데페이즈망, 우리말로는 전치라고 부름. 원래 데페이즈망은 추방하는 것이란 뜻으로, 20세기 전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흔히 사용하던 방법론. 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하여 이상한 관계에 두는 것을 뜻함. 예를 들어 변기가 갤러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물건과 물건의 결합, 물건과 공간의 결합을 의미. 이런 데페이즈망은 합리적 의식을 초월한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로 관객을 유도함.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밀도로르의 노래' 속 유명한 시구 '재봉틀과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아름답다'가 그 전형이다.
둘째는 사물을 실제보다 확대하여 만드는 것. 크게 확대하면 일단 시각적으로 압도하게 마련. 그리고 이런 확대된 사물은 조형물, 즉 퍼블릭 아트라는 이름으로 공공장소에 설치된다. 공원, 광장, 아파트, 시청사, 사옥, 미술관 앞에 놓인 다양한 조형물이 그것이다. 불과 십수년전까지만 해도 조형물이 실내용 조각을 확대하여 설치하는 수준에 불과했다면, 그래서 우스꽝스럽게도 여성 누드나 모자상과 같은 조각품이 공공장소에 세워졌다면, 요즘은 대중과의 친화력과 소통을 강조한 흥미롭고 유머러스한 조형물이 등장한다. 이처럼 확대된 사물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확대된 사물은 스펙터클과 숭고의 미학을 환기한다. 스펙터클이란 볼거리, 광경을 뜻하고, 모든 시각예술 특히 현대미술은 기본적으로 스펙터클을 지향하곤 한다. 이와 관련하여 숭고의 개념이 중요. 우리는 언제 숭고하다고 표현하는가? 일단 무언가 나와은 다른 어떤 세상에 있는 느낌을 받을 때다. 즉 숭고란 사물(대상)과 나(관객) 사이의 심리적 거리에서 온다. 그것은 관람자가 닿을 수 없는 크고 높은 것과 관련된다. 그러니까 미적인 어떤 것에 대한 표상이 인간의 심적능력을 넘어서는 경우에 숭고가 성립. 숭고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과 정서는 깊이, 심연, 바닥없는 느낌, 불가해함, 부조리함, 신비, 외경, 경악, 경탄 같은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숭고의 미학의 예술작품은 첫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 유머란 밝히고 싶지 않은 적나라한 자신의 치부까지도 농담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가 되야한다. 또한 자신은 몸담은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타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을 때 유머는 더욱 생생해짐. 유머는 이처럼 자신을 타자화해서 볼 줄 아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매혹적 재능이다. 자기 안에 함몰된 자들은 유머를 쓸줄도 즐길줄도 모름. 어쨌거나 유머를 구사하려면 인생의 고난이라는 긴 터널을 빠져나와야 하며,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가 겪었던 고난이 별것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유머는 때로 죽음, 왕따, 이별, 배신, 상처, 좌절 등 인생의 파란만장함과 우여곡절을 겪은 자들이 그런 일들을 전혀 겪어보지 않은 자들보다 훨씬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 여성편력의 대가 제우스가 보여준 남다른 변신능력은 사실 그의 바람기를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그의 빼어난 시대적응능력을 암시. 다시 말해 제우스가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지분거리는 이유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욕망때문인지도 모름. 예술가와 기업가도 변화에 대한 도전의식을 느끼지 못하면 망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시대정신을 통찰하고 있어야 한다. 통상 예술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고집하는 사람으로 치부되지만, 예술가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던 시절은 19세기 정도에 와서야 겨우 가능했음. 미켈란젤로도 조각만이 자신을 대변하는 매체라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조각가인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엄청 투덜대며 회화인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나 최후의 심판을 완성. 그가 불평만 하고 이런 벽화작품을 소홀히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를 다비드와 피에타, 모세 같은 조각을 완성한 조각가로 기억할 뿐, 천장벽화의 대가로서 미켈란젤로는 만나지 못했을 것임. 자의든 타의든 변화에 대한 예술가의 갈증가 갈망은 명작을 낸다. 이처럼 진짜 선수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은 누가 못하겠는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대가. 하고 싶지 않은 일, 원하지 않는 일을 일종의 도전이자 변화의 기회라 받아들이는 자만이 인생의 굴곡을 새로운 터닝포인트로 삼을 수 있다.
- 성공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무얼까? 그것은 기질적으로 의욕이 매우 넘친다는 점. 예컨대 성급하고, 분주하며, 충동적이고, 행동이 앞서는 사람들은 성공하는 사업가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조증 혹은 경조증을 가진 사람들이다. 조증이란 과도한 활력, 대단한 쾌활함, 과잉활동, 편집증적 과대망상에서 흔히 보이는 팽창된 자존감을 특징으로 함. 이런 상태의 개인은 새로운 자극과 낯선 경험에 대한 갈망이 크기 때문에 모험을 감수하는 일을 즐긴다. 또한 쾌활한 분위기는 수다스러움과 연결되는데, 당연히 사고의 자유연상이 활발하므로 말을 빨리 하는 것은 물론, 사고의 논리적 비약이 아주 드라마틱해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다. 더군다나 지나친 활력으로 며칠 밤을 자지 않아도 전혀 졸리지 않으며, 상상력이 넘쳐나 하룻밤에 소설 한권을 후딱 창작하는 일도 빈번하다.
- 조증인 사업가의 경우는 행동을 유발하는 추진력이 최고조 상태이며, 빨리 행동해야 직성이 풀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면서 생각한다. 대개 그들은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보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에 중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은 하나의 목표가 이뤄질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다른 목표를 향해 돌진. 사업이 문어발처럼 확장되는 일이 아주 자연스럽다. 이처럼 사업가들의 조증은 대개 일중독으로 나타남.
- 그렇다면 예술가의 조증과 기업가의 조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단언컨대 차이가 별로 없다. "사업을 잘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앤디 워홀의 말처럼, 이미 사업은 개념미술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뒤샹 이후 현대미술이 아이디어가 더 우선하는 개념미술이 된 것처럼, 이제 아이디어를 잘 개진해 상품이든 서비스든 만들언내는 일이 훨씬 더 예술이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사업가는 이윤을 직원들과 나누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니, 그림이 벽에 붙어서 하는 역할보다 훨씬 더 숭고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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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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