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인생수업

예술 2021. 5. 6. 22:16

- 목차
1장 공부는 못해도, 잘생겼다 불운 극복법 
2장 장점을 극대화하다 직업 선택법 
3장 나를 키워줄 도시를 찾다 청춘의 여행법 
4장 스승을 능가하는 비법을 찾다 청출어람의 학습법 
5장 인생에서 때로는 측면 돌파 나와 맞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6장 창조는 변방에서 시작된다 비주류로 주류의 스타가 된 비법 
7장 마무리 짓지 않아도 괜찮다 야심 관리법 
8장 깔끔히 포기해야 새 길이 열린다 인생의 두번째 기회를 만드는 법 
9장 무시와 좌절을 우아하게 넘어서다 분노 사용법 
10장 자기다움으로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다 자아 유지법 
11장 미켈란젤로와 세기의 대결을 벌이다 경쟁자 관리법 
12장 마음을 과학으로 표현하다 모나리자의 미소법 
13장 시대에 맞은 고유한 성이 있다. 창조의 비법 
14장 평생 노력했던 그 사람 실패 사용법 
15장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가 레오나르도를 존경하는 진짜 이유 융합형 인재의 시대 

- 15~16세기의 르네상스와 21세기는 모두 '융합의 시대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에서 쌓은 지식으로 그림을 발전시켰고, 해부학적 관점으로 건축을 바라본 융합의 창조자였다. 그는 신을 의심하지는 않았으나 남들처럼 무조건적으로 믿지도 않았으며, 자연과 세계를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었다. 시대와 불화하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그는 신과 같은 재능을 갖고 태어난 천재가 아니라, 왕성한 호기심을 끈질기게 해결한 노력형 재인이었다.
- 세르 피에로는 세속의 욕망이 강한 사람으로, 피렌체에서 일을 하기 위해 빈치의 집을 자주 비웠다. 아버지 없이 자란 레오나르도에게 단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떤 종류의 권 위는 복종하려는 욕구가 굉장히 강한데, 권위가 위협받는 현실은 곧 세계가 붕괴하는 것과 같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아주 어릴 때 부터 권위가 없는 상태에 적응해야 했던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권위를 포기하는 법을 일찍 깨우쳤다. 그로 인해 대담한 과학적 탐구로 상징되는 지식 추구와 남들의 비난에도 꿋꿋이 제 길을 가는 독립성을 가질 수 있었다고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설명한다. 모든 아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랬다.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면 젊은이들은 신앙도 잃는다는 프로이트 의 말을 받아들이면, 2000년대 초반 전 세계적으로 불었던 교황 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은 그만큼 사라진 아버지의 권위를 되찾 고 싶다는 열망으로도 이해된다.
이렇듯 아버지로 상징되는 일체의 권위와 권력을 레오나르도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공백은 과학적 탐구 정신으로 채워졌다. 불운이 반드시 불행으로 귀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생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생아로 태 어났기에 그는 수학과 라틴어, 그리스어 읽기, 쓰기 등의 교육을 받지 못했고, 대학에도 가지 못했으며, 주류 사회에 편입될 가능 성도 희박했다. 훗날 스스로를 일컬어 “학문이 없는 자Uomo Senza Lettere"라고 했지만, 지식에 대한 강한 욕구로 노년에는 라틴어를 독학으로 깨우쳐 고전을 읽을 정도였다. 그러니 저 말은 자조나 한탄이 아니라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글을 읽고 쓰기만 하 는 자들과 달리, 그는 스스로 “경험의 신봉자Disciepolo Della Speriena"로 당당했기 때문이다. 
시련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출생의 불운이 성공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맹자의 말도 레오나르도의 삶의 모퉁이마다 잘 들어맞는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는, 먼저 그의 마 음을 괴롭게 하고, 뼈와 힘줄을 힘들게 하며,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여 그가 행하고자 하는 바와 어긋나게 한다. 마음을 격동시켜 성질을 참게 함으로써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 레오나르도는 타고난 장점인 외모를 발전시켜 얻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덕분에 화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우리의 감각에서 생겨난다. 젊은 시절에 얻는 것은 노년의 비참함을 이겨내게 해준다. 그리고 지혜를 노년의 양식으로 삼기를 바란다면, 저장해둔 양식이 늙어서 부족하지 않도록 젊은 시절에 노력하라.
- 같은 시대를 살더라도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사람의 운명은 달 라진다. 레오나르도가 15세기 후반에 태어났다는 사실보다. 피렌 체에서 10대 후반부터 15여 년을 보냈다는 점이 그의 예술세계에 서는 더 중요하다. 그가 밀라노나 로마에서 성장했다면 상당히 다른 인물이 되었을 수도 있다. 도시도 사람처럼 개성이랄까 고유한 유전자 DNA가 있어서, 나를 키워줄 수 있는 특징과 분위기를 품은 도시에서 한 시절을 보내는 것은 상당히 가치 있다. 
- 새로움을 추구하려면 먼저 과거의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에 뿌리내리지 못한 새로움은 치기어린 시도에 그칠 뿐이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을 공부한 브루넬레스키처럼, 레오나르도는 이전 시대의 회화를 자신의 시대에 맞게 재창조해냈다. 모든 혁신은 현실에 발을 디뎌야 쓰임새가 생긴다.
- "레오나르도는 옷을 든 천사를 그렸다. 그때 그는 아직 매우 어렸지만 베로키오가 맡았던 다른 인물보다 훨씬 빼어나게 그렸던 것이다. 베로키오는 어린 제자가 자신보다 색채 처리와 묘사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고 결국 베로키오가 붓을 꺾는 원인이 되었다.”
- 과장을 양념으로 자주 사용한 바사리의 말을 그대로 믿긴 어렵겠으나, 이후 베로키오가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 이유를 바사리는 자기보다 뛰어난 도제를 향한 스승의 질투 탓으로 돌렸는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일단 베로키오는 그리 옹졸한 성격이 아니었고, 그림이 개인의 예술작품보다 문화 상품으로 인정받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공방운영자 베로 키오에게 솜씨 좋은 제자는 탁월한 직원으로 기뻐할 일이었다. 따라서 베로키오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차츰 그림은 레오나르도와 다른 도제들에게 맡기고, 베로키오 자신은 그보다 수익성이 좋은 조각과 세공에 집중했을 가능성이 크다. 흐르는 물에 담근 예수의 발을 통해, 당대 최고의 데생 전문가로 인식되던 베로키오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위의 바사리의 말은 실력 좋은 선생에게 잘 배운 제자 레오나르도의 빛나는 재능을 돋보이게 만들고 싶었던 마음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이런 평가는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점차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예술가로 발전해가고 있음을 반증한다. 역사적인 기록 도 이를 뒷받침한다. 
1472년 스무 살의 레오나르도는 수련생활을 끝내고 보티첼리 와 함께 콤파냐 디 산루카에 가입하여 '피렌체의 장인 레오나르 도Maestro Leonardo Fiorentino 로서 독립 화가가 되었다. 당시 관례대로 베로키오와의 협력 관계는 계속 유지됐다. 
- 유럽에서 미술은 오랫동안 정해놓은 방식대로 그려야만 했다. 몇몇의 선구자적인 화가들이 그에 반기를 들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렸는데, 조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c.1267~1337가 대표적이다. 조토는 중세에 르네상스의 씨앗을 심은 화가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종교화에 인간적인 표정을 불어넣었다. 조토는 세상의 생각보다 자신의 눈을 믿었고, 그림에 인간의 감정을 담아냈다. 그의 눈은 손을 통해 그림으로 구현됐다. 조토의 혁신적인 눈과 손을 가지려 노력한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과학의 위대한 선구자들 의 가르침을 흡수했고, 조토가 도착한 지점을 지나서 르네상스에 걸맞는 종교화를 구현했으니, 조토가 꾸었던 꿈은 레오나르도에 의해 마침내 이루어졌다.
- ‘문명 이야기 신앙의 시대’를 쓴 역사가 윌 듀랜트에 따르면, 교회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으로 공포심 을 꼽았다. 천국과 지옥으로 극명하게 나뉜 사후세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과 논리적인 반박은 매우 위험했지만, 레오나르도는 한 번 시작된 의문과 호기심을 멈추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람 들의 죄를 없애준다며 교회가 팔았던 면죄부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비판했다.
"갖가지 다양한 물건이 공식적으로, 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팔린다. 그 물건들은 그만한 가치도 없고 또 어떤 힘도 갖고 있지 않으며, 주께서 그 물건들을 팔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인간의 정의로 이를 막을 수 없단 말인가.”
-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자연을 탐구하면서 이단의 정신이 생겨나서 가톨릭과 불화하게 됐고, 기독교인보다는 철학자의 길을 택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분석은 레오나르도 사후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레오나르도가 생전에 스스로 '이단의 정신'을 운운했다면 제 명대로 살기 어려웠을 텐데, 그저 자신의 노트에 기록만 했으니, 교회는 레오나르도의 불경한 생각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과학자였으나 사상가는 아니어서 자신의 의심과 발견으로 세상을 바꾸거나 기존 진리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없었다. 내가 궁금하고 의심이 들어 탐구해서 해결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 창조성은 변방에서 비롯된다. 내가 세상의 중심' 혹은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한다면 창조성은 발휘되지 못한다. 시대의 중심과 사회의 주류는 현상 유지에 에너지를 쏟아붓기 때문에, 주류의 힘이 미치지 않는 비주류의 공간에서 창의적인 생각들이 만들어지기 쉽다. 왼손잡이 사생아이자 동성애자, 채식주의 자 등 사회의 비주류였던 레오나르도는 종교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을 가졌고, 그것을 새로운 관점과 기법으로 르네상스의 종교 화를 그렸다. 바로 이것이 치열한 피렌체 예술시장에서 젊은 레오나르도가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비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이 빛이라면, 그림자는 미완성작이 많다는 것이다.
- "좋은 화가가 그려야 할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인간, 그리고 그 영혼의 의도이다. 앞의 것을 그리기는 쉽지만, 뒤의 것은 어렵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 레오나르도는 이미 성취한 것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만족을 몰랐고, 건축과 해부학 같은 분야를 파고들어 얻은 새로운 발견들을 그림에 완벽하게 녹여내고 싶었다. 욕심은 실력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창작 과정에는 장애물로도 작용한다. 생산성에는 커다란 결점이나, 완성작에는 장점이다. 압도적인 장점 하나는 자잘한 단점을 덮는다. 그는 적은 수의 작품을 완성했으 나, 스프링처럼 많이 움츠렸다가 튀어오르듯 완성작들은 아주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니 미완성작이 많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30여 점이나 작품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한다.
- 그림은 생각의 표현물이다. 문제는 누구의 생각을 표현하느냐 다. 레오나르도의 시대는 교회(교황과 성직자)와 왕(귀족) 같은 주문자의 생각을 담아내야 했지만, 레오나르도는 제 생각을 담으려 했다. 이것은 표현기법의 문제를 넘어, 화가를 그림의 주체로 믿 었다는 뜻이다. 그림의 제작비용과 실력에 대한 대가로 거래를 하 나, 내 창작물은 내 생각대로 완성하겠다'는 태도다. 따라서 레오나르도는 주문자의 요구를 자신의 욕구로 전환시키지 못하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네와 반 고흐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에서야 조금씩 받아들여진 이러한 생각을, 레오나르도는 무려 400년 앞서서 실행했다. 따라서 그의 미완성 작품은 예술가로서의 독립성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기회를
피렌체 예술시장의 큰손인 성직자들은 중도 포기를 일삼고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레오나르도에게 점점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시대와 맞지 않는 예술관도 문제였다. 레오나르도는 주문자 화가의 관계보다 후원자 - 예술가의 관계를 원했으나, 피렌체의 상인 자본가들은 그림과 조각 부분에서 세속적인 욕구를 매끄럽게 풀어내는 브라만테,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를 더 선호했다. 
나이와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도시는 달라진다. 피렌체는 레오나르도를 장인으로 키워냈으나, 그가 실력을 꽃피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희망 없는 곳에서는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레오나르도는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기로 했다. 그렇다고 막연한 희망을 꿈꾸며 무턱대고 떠날 수는 없었다. 우선 '피렌체 출신의 장인'이 후광효과를 누릴 수 있는 곳, 예술 후원자가 많은 군주국가, 그림과 조각 등에 대한 수요가 많은 곳일수록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그림에 흥미를 잃고 불안과 걱정의 나날을 보낼 때, 희망의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밀라노 군주가 로렌초 메디치에게 실력 좋은 화 가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밀라노는 레오나르도가 원한 조건을 대체로 만족시키는 곳이었다. 그는 밀라노 왕의 후원을 받으며 쾌적한 환경에서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이 곧 이뤄지리라는 기대로 부풀어올랐다.
여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스승 베로키오가 밀라노 궁정 과 일한 적 있었고, 당시 「수태고지」와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등을 그리면서 레오나르도의 실력도 꽤 인정받았던 터였다. 하지 만 로렌초가 선택한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 는 실망은 곧 로렌초가 레오나르도를 음악가로 보내기로 결정하 면서 희망으로 되살아났고, 서른 즈음의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떠난다. 이것이 여행에 그칠지, 이주가 될지는 전적으로 밀라노의 지배자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 1452~1508에게 달렸다.
- 인생에서 늘 같은 것만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생의 시기마다 원하는 것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10대부터 20대까지 레오나르도가 원한 것과 30~40대에 원하던 것은 분명히 달랐다. 나이, 도시, 주변 사람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아울러 살펴보면, 그 변화는 확연하다. 10대와 20대에는 자신의 자유로운 기질이 너그러이 받아들여지며, 새로운 학문과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가들이 즐비한 피렌체에서 과거와 현재의 생각들을 스폰지처럼 수용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과 배경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밀라노로 옮겨와 30대를 맞았다. 그것은 실로 탁월한 결정이었다. 그 덕분에 루도비코를 위시한 새로운 주문자들과 만났고, 새로운 협력자(와 제자)들과 아틀리에를 열고, 새로운 학문에도 빠져들었다. 그렇게 그림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의 결실이 그림으로 흘러들었고, 피렌체의 세련됨에 밀라노 궁정의 화려함을 더한 우 아한 스타일이 구축되면서, 레오나르도의 이름이 이탈리아 전역 으로 퍼지게 된다. 밀라노로 가지 않았다면 이루지 못했을 성공 이었다. 사는 장소를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 레오나르도의 출생 DNA는 밀라노의 환경 DNA와 만나면서 활짝 피어났다. 영광의 뒤편에서는 궁정 대신들의 무시가 여전했으나, 레오나르도는 아주 우아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그들에게 복수한다. 비트루비우스 인간에 그 이야기가 담겨 있다.
- 레오나르도는 궁정인들을 “권위에 의존하는 것으로 토론을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단지 지성이 아닌 그의 암기력을 사용하고 있을 뿐” 이라며 고전을 외워 반복만 해댄다며 진정한 배움을 모르는 나팔수이자 다른 사람들의 노동 덕분에 외모를 치장하고 잘난 체하며 거들먹거리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자연에서 직접 길어올린 자신의 지식이 더 우월함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밀라노에서 새로운 기회로 부풀었던 가슴은 분노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고대 서적을 읽기 위해 뒤늦은 나이에 라틴어 동사 변화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지식을 사랑했고, 그것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괴로움과 쓰라림을 대가로 치렀다. 그런 레오나르도를 봤는지, 1497년경에 라틴어 학자 빔보 추기경은 라틴어 '아마레amare를 사랑하다, 괴롭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사랑은 곧 괴로움이었으니, 지식을 사랑한 레오나르도는 괴로움도 컸다. 애석하 게도 라틴어는 금세 늘지 않았지만, 그는 뜻밖의 성과를 얻었다. 결정적 계기는 고대 로마 건축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 가 쓴 건축이론서인 『건축 10서 De architectura libri decem』다. 그림 없이 글로만 쓰인 터라 레오나르도는 주변의 도움을 얻어가며 겨우 읽어낼 수 있었는데, 피렌체에서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를 알게되었을 때만큼이나 강한 몰입으로 비트루비우스의 생각을 흡수 했다.
"균형잡힌 인체의 부분들과 관련된 원리를 정확히 따르지 않는다. 면 그 어떤 신전도 조화와 비례가 없으므로 제대로 세워질 수 없다.”
비트루비우스는 원형과 사각형의 조합이 완전한 모양을 만들어내며, 심지어 그것이 인체의 완전성과도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인체와 건축은 관련이 깊다는 비트루비우스의 의견에 동의한 레오나르도는 건축가를 '건물의 의사醫師'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건축 디자인과 인체해부학의 밀접한 연결성을 이해했고, 해부학 스케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렇게 분노로 촉발된 공부가 레오나르도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건축, 인체해부, 생리학 같은 분야의 지식들을 서로 연결하게 만들었다.
"세계의 모든 것이 일련의 보편 법칙, 원리, 관계, 힘 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서로 묶여 있다는, 거의 두려울 만큼의 우주적인 장대함으로 깨달았을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세계에 관한 경험적 연구를 충분히 부지런히 해나간다면, 사물의 내부 원인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이런 관점에서 회화는 세상에 대한 모사가 아니었고, 자연 피조물의 성질과 아름다움, 세계의 조화를 눈에 보이게 만드는 작업이 었다. 사람의 몸은 기어와 도르래 등 다양한 부품들로 구성된 일종의 기계이고, 기계는 조화와 균형을 갖춘 유기적인 몸과 같으며, 같은 원리로 건축은 해부학이요, 해부학은 지리학, 지리학은 수학, 수학은 기하학, 기하학은 음악, 음악은 일종의 물리학이라는 결론 에 도달했다. 이 모든 것의 열쇠는 수數, 소리, 무게, 시간, 공간, 존 재하는 모든 힘에서 파악되는 비례라고 믿었다.
생각은 이렇게 했으나,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여 다른 사람들 에게 전달하자니 막막했다. 레오나르도는 이해력은 좋았으나 자신이 이해한 것을 상대에게 풀어 설명하거나, 관찰한 것을 요약하는 데는 서툴렀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표 현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비트루비우스 인간을 그린 배경이다.
- 자기 능력의 80퍼센트만으로 잘해낼 수 있는 일을 하면, 여유롭게 일 을 마무리할 수 있다. 자기 능력의 100퍼센트가 필요한 일은 다소 힘겹고 작은 돌발 변수에도 숨이 찬다. 능력의 120 퍼센트를 발휘해야 하는 일은 주변에 피해를 끼칠 가능성이 크다.
레오나르도는 능력을 약간, 때때로 과도하게 상회하는 일에 과감하게 자신을 던지곤 했다. 그렇게 해서 성취하지 못한 일들도 있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확장시키고 발전시켜나갔다. 우리도 공을 멀리 차야 할 때가 있다. 공을 찬 후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려야 한다. 잠 재된 실력이 발현될 때 우리는 그만큼 성장한다.
- ‘최후의 만찬’에서 세속과 성스러움이 공존하는 예수의 얼굴은 추기경의 측근인 조반니 공작, 손은 파르마의 알렉산드로를 모델로 삼았다. 이러니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는데, 모두가 그의 작업 방식을 이해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중도 포기의 악명이 높은데다 어떤 날에는 그림 앞에서 하루종일 지그시 바라 보기만 했고, 다른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와서는 붓질 한 번 하고 다시 떠나는 경우도 많았으니, 그를 감독하는 산타마 리아텔레그라치에의 수도원장의 눈에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이에 그는 루도비코에게 레오나르도를 힐난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재치 넘치는 반박문이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다.
“전하(루도비코), 작품에서 유다의 머리만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문난 악한이기에 그의 사악함에 걸맞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찾느라 거의 1년 동안 흉포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보르게토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가 생각하는 그런 악한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악한의 얼굴을 찾기만 하면 바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전하께 저를 모함한 자가 바로 유다에 합당할 터인즉 그자의 얼굴을 대신 그려놓겠습니다.”
-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가 생전에 가장 극찬을 받은 작품 이었으나, 경동 기마상을 만들 기회는 끝내 얻지 못했다. 오히려 프랑스 군대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을 피해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떠나야 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떠나 만토바로 향했다. 당대의 예술 후 원자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화를 스케치했지만, 말이 유명한 만토바에서는 주로 말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그렸다. 이후 레오 나르도는 만토바를 떠나 베네치아로 가 군사 관련 일을 하다가 1500년 4월경에 18년 만에 다시 피렌체에 정착한다. 이를 제2차 피렌체 시기로 본다.
- 미국의 과학사가 조지 사턴은 돈과 권력과 편리보다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면서 레오나르도를 반란자라 불렀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분명 대단한 기술과 실력을 가졌으면서 도 부귀영화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돈이 안 되는 일에 집중하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림 한 점에 수년을 매달리고, 해부학과 수학을 연구하고, 언제나 적당히 실용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좋은 것을 추구했다. 이런 고집이랄까 세계관 때문에 그는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만 했 다. 그래도 자기답지 않은 것으로 사랑받느니, 차라리 자기다움으로 미 움받겠다던 소설가 헤밍웨이의 말처럼, 레오나르도는 꿋꿋이 자기다움 을 유지했다. 레오나르도의 위대함의 비결은 많은 대가를 치르고 지켜 낸 자기다움이었다.
-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은 과학이었고,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은 창조였다. 과학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태도가 전제되므로 레오나르도는 물질을 정신보다 중요하게 여긴 현실주의자였고, 돌과 회화를 통해 신의 고귀한 정신을 표현한 미 켈란젤로는 정신만이 가치 있다고 믿었던 이상주의자였다. 아름 다움은 사물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재현하면 드러난다고 생각했 던 레오나르도는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구하여 추한 인물들도 거침없이 그렸다. 성 제롬의 모습을 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세속의 노인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이유다. 해부학은 그에게 인간이 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인 반면에, 미켈란젤로에게는 단지 인체의 형태를 파악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레오나르도에게 미켈란젤로는 예술을 이상의 수단으로 삼는 보 수파였고, 미켈란젤로에게 레오나르도는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망치는 진보파였다. 둘의 갈등은 서로의 일거리를 뺏으려는 경쟁의식이 아니라, 극명하게 달랐던 그림과 조각을 향한 관점에서 비롯됐다.
- 레오나르도는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이해했고, 미켈란젤로는 신의 사랑이 구현된 세상에 감탄했다. 따라서 미켈란젤로의 몸은 르네상스에 속했으나 의식은 중세에 고정되어 있었다면, 레오나르도는 저 멀리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근대를 향해 걸었다. 과거의 인간과 미래의 인간이 현재에 만나 부딪힌 셈이 다. 미켈란젤로가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반면에, 레오나르도는 시대의 상징이 되었던 이유기도 하다.
-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만드는 요인이 하나 더 있다. 레오나르도는 얼굴을 윤곽선 없이 비대칭으로 그렸다. 즉, 모나리자의 왼쪽 입가가 오른쪽보다 올라가 있고, 왼쪽 눈 주변의 음영이 반대 쪽보다 깊다. 그래서 왼쪽 얼굴을 가리면 심각해보이고, 오른쪽을 가리면 미소가 강해진다. 현대의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 뇌가 좌뇌보다 감정처리에 더 많이 관여하므로 감정은 우뇌가 관장하는 왼쪽 얼굴에서 도드라진다. 따라서 지금 상태의 얼굴로는 화가 앞에서 긴장한 조콘다 부인이 억지로 미소를 짓거나, 미소로 자신의 속내를 감추려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눈도 좌우가 미세하게 다른 곳을 보고 눈꼬리의 높이도 다르다. 레오나르도는 인간의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눈과 입의 양쪽 끝을 각각 다르게 묘사하여 관람자가 혼란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인간이 어떤 감정일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것이 어떻게 보이 는지를 끊임없이 관찰한 레오나르도는 그것들 사이의 연관관계 를 정확히 파악했고,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 혼란을 가중시킨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나리자를 보면서도 조콘다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으며, 그림 속 조콘다 부인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모나리자를 신비롭게 만들었는데, 이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얻은 성취다.
- 「최후의 만찬」에서 시도한 프레스코와 유화의 접목은 실패했고, 거기서 얻은 교훈으로 다시 도전한 「앙기아리전투에서도 레오나르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불완전했겠지만, 전작보다는 오랫동안 그림이 유지됐을 것이다. 실패를 새로운 시도의 교훈으 로 받아들이며 지속했고, 그 결과 벽화에는 유화의 장점을 구사하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벽을 버리고 나무판에 여러 번 덧칠하고 자연의 빛이 그에 스며들도록 내버려뒀 다가 또 덧칠하는 과정에서 스푸마토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니 스푸마토가 절묘하게 발휘된 모나리자」 「성모자와 성 안나」 「세 례자 요한」은 「최후의 만찬」과 「앙기아리전투 등의 실패에서 피워낸 꽃인 셈이다. 
- 「앙기아리전투를 중단하고 피렌체를 떠나면서 시작된 제2의 밀라노 시기 동안 레오나르도는 그림보다 해부학과 궁정의 연회에 사용되는 장식물 제작, 건축가로서 관개시설에 관련된 작업 등을 주로 맡았다. 특히 책에서 영향을 받았던 이전의 오류(남자의 성기 와 뇌가 연결되어 정액이 뇌에서 생긴다는 중세의 정보)들을 직접 해 부해 바로잡으면서, 인체해부도의 완성도를 높였다. 자궁 속의 태아도 이즈음에 그렸다. 실제 임산부의 몸이 아닌 소를 해부한 탓 에 4~5개월의 태아가 사실과 달리 서 있다. 인체의 피부, 골격 구조나 근육 등은 자세히 알 수 있었지만, 인체의 장기에 대한 부분은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체에 정통해진 레오나르도는 인물을 아주 색다른 관점에서 표현했는데, 그의 후기 작품들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 레오나르도 창조력의 비밀 "남성성의 원리와 여성성을 통합해야 온전한 전체가 될 수 있다. (.........) 스탠퍼드대학이 실시한 연구에서 심리학자들은 가장 높은 수준의 지적 기능은 남성성과 여성성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발휘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토런스 박사는 성역할이 고정되면, 창의성이 억제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창의성을 발휘하 려면 여성의 특성인 감수성과 남성의 특성인 자율성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남성성과 여성성 가운데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높은 지적 수준 에 도달하기 어려우며, 성 역할이 고정되면 창의성이 발휘되지 못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레오나르도의 창조성의 비결 가운데 하나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균형이고, 그것이 그가 살았던 르네상스가 요구하는 두 성의 비율과도 맞았다. 즉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여성적인 문화와 중세의 남성적인 문화를 자기만의 방식과 비율로 재창조해냈고, 시간이 흐르면서 후대 사람들은 르네상스의 시대적 특징과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인 모나리자」와 「세례자 요한」이 이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따라서 레오나르도를 가장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보는 이유는, 그가 다양한 분야 에 업적을 남겨서가 아니라, 그가 그 시대의 정신에 부합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를 이룬 창작자였고, 거기에서 그의 왕성한 창조력이 비롯됐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점이 프랑스 왕의 마음을 건드렸고, 노년의 예술가를 프랑스로 모셔간 이유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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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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