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심리 2017. 11. 15. 17:50

- 아들러 심리학은 트라우마를 명백히 부정함. 이런 면이 굉장히 새롭고 획기적임.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은 마음의 상처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고 생각. 인생을 거대한 이야기라 보았을때, 그 이해하기 쉬운 인과법칙과 드라마틱한 전개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 '어떠한 경험도 그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함. 가령 엄청난 재해를 당했다거나 어린시절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음. 분명이 영향은 남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함.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 어떻게 사는가도 자신이 선택하는 것
- 과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유효한 수단도 써보지 못한채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함. 그 결과는 나를 둘러싼 세계에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하며 살다가 결국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지게 됨. 트라우마 이론으로 대표되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형태만 다른 결정론이자 허무주의의 입구임
-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됨.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공간에서 그저 홀로살아갈 수 밖에 없다.
- 인간의 고민은 죄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며, 이는 아들러 심리학의 근저에 흐르는 개념. 만약 이 세계에 인간관계가 사라진다면 그야말로 우주공간에는 단 한사람만 존재하고, 다른 사람이 사라진다면 온갖 고민도 사라질 것.
- 우선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 태어났음. 그리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보편적 욕구를 갖고 있으며, 아들러는 이를 우월성 추구라고 했다.
- 열등감 자체는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님. 아들러도 말했듯이 열등감은 노력과 성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함. 하지만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 A라서 B를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이미 열등감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며, 그것은 열등 콤플렉스
- 권위의 힘을 빌어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맞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됨. 자기 공을 자랑하며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걸핏하면 가장 빛나던 시절의 추억담을 늘어놓는 사람. 이런것도 우월 콤플렉스라 할 수 있음.
- 정말로 자신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것.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하려 함.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까봐 겁이 난다. 이는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임.
-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
-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며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쟁의 끝에는 승자와 패자만 남기 때문.
-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하는 것. 하지만 경쟁의 도식에서 해방되면 누군가에게 이길 필요가 없다. 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도 해방됨.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할 수도 있다.
-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욱해서라는 말이 나오는 거고, 분노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
-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애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반면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
-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을 받는다. 부적절한 행동을 하면 벌을 받는다. 아들러는 이런 상벌에 의한 교육을 비난. 상벌교육의 결과로 생기는 것은 '칭찬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 '벌주는 사람이 없으면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 등과 같은 잘못된 생활양식. 칭찬받고 싶은 목적이 있어 쓰레기를 치운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칭찬받지 못하면 분개하거나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됨
-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에 의해 발생.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는 급격히 달라짐.
-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함.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만약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결과(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희망하는 학교에 못간다)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님. 즉 공부는 아이의 과제
-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들은 명배기 자신의 목적(세상의 이목, 체면, 지배욕 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행동.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리면 아이들은 반발함
-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를 권하는 것이 아님. 방임이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시를 전하는 것.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함.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잔소리를 해서는 안됨
- 아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부모는 대개 아이의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아이의 과제까지도 자신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떠안는다. 그렇게 늘 아이만 생각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인생에서 나는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어느정도 아이의 과제를 떠맡았다고 한들 아이는 독립적 개인임. 부모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음. 진학할 학교, 직장, 결혼상대, 일상의 사소한 언행마저도 부모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음. 당연히 걱정도 되고, 개입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타인은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설령 내 자식이라도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과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것은 인생을 무겁게 짓누른다. 만약 인생에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 그 고민인 인간관계에 있으니,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며 경계선을 정할 것. 그리고 타인의 과제는 버릴 것.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만드는 첫걸음
-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타인의 평가에 민감. 그래서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면 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할까? 아들러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간단함. 아직 과제를 분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본래는 타인의 과제여야 할 것까지 내 과제라 생각. '내 얼굴을 주의깊게 보는 사람은 너뿐이다.' 그 말에는 과제분리의 핵심이 담겨 있음. 다른 사람이 내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건 그 사람의 과제임. 내가 이러쿵저러쿵 따질 문제가 아님
- 먼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할 것. 그리고 과제를 분리.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다.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개인관계의 고민을 단숨헤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면이다.
- 타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런 욕망이며 충동이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칸트는 그런 욕망을 가리켜 경향성이라 명명. 본능적 욕망, 충동적 욕망이란 뜻. 그런 경향성에 이끌린 채, 다시 말해 욕망이나 충동에 이끌려 사는 것, 비탈길을 굴러내려가는 돌멩이처럼 사는 것이 자유일까? 그런 삶은 욕망과 충동의 노예가 될뿐. 진정한 자유란 굴러내려가는 자신을 아래에서 밀어올려주는 태도
-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다.
- '그때 맞아서 사이가 틀어졌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 아들러가 주창한 목적론에서 보면 원인과 결과가 역전되는 셈. 즉 나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내들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나'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 생활양식이다.
- 칭찬한다는 행위에는 능력있는 사람이 능력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는 측면이 포함됨. 저녁식사 준비를 돕는 아이에게 '엄마를 도와주는 거야? 착하기도 해라'라고 칭찬을 한다면 남편이 같은 행동을 해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
- 장하다, 잘했다, 훌륭하다 칭찬하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무의식중에 상하관계를 만들려는 것. 동물훈련 사례는 그야말로 칭찬의 배후에 있는 상하관계, 수직관계를 보여줌. 인간이 남을 칭찬할 때 그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없다.
-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다고 바라는 것,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바라본다는 증거. 칭찬받기를 원한다면 수직관계에 익숙해졌기 때문.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
-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을수록 '나는 능력이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은 타인의 가치관에 맞추어 삶을 선택하게 된다
- 칭찬을 받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나는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 칭찬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능력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이기 때문
- 인간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됨
- 우리는 타인을 행위의 차원에서 보고 있다. 즉 그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차원에서만.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자리에 누워만 있는 노인은 주변사람에게 폐만 끼치고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음. 하지만 타인의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 한다. 타인이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느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함
-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만의 이상적 모습을 멋대로 지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를 내림. 예를 들어 부모님 말에 일절 말대꾸도 안하고,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가진다. 그런 이상적인 아이를 만들어 노호는 자식과 비교하며 불평하고 불만을 갖는다. 이상적인 모습을 100점으로 놓고 천천히 점수를 깎는다. 이거야 말로 평가라는 발상. 그러지 말고 아이를 누구와 비교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그저 거기에 있어주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것. 이상적인 100점에서 감점하지 말고 0점에서 출발하라. 그러면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 과제를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수 있는 것과 변할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함.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 없다.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할 것. 이것이 아들러의 자기수용이다.
- 열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중 한사람은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열명중 두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은 이도저도 아니다. 이때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해주는 두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한명만 보고 세계를 판단한다
- 인간은 내가 누구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 단 그때의 공헌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즉 공헌감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 왜 특별해지려 할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 특별히 잘하는 상태가 실패로 돌아가면 극단적으로 특별히 못되게 구는 상태로 빠르게 넘어감. 그런데 보통인 것, 평범한 것은 정말로 좋지 않은 걸까? 어딘가 열등하다는 뜻인가? 실은 누구나 평범하다.
- 우리가 평범해질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평범해지는 것을 무능해지는 것과 같다고 착각해서임. 평범한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님.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선(line)으로 파악.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선이 크고 작은 굴곡을 그리며 정점에 다다르다 그대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맞이. 하지만 인생을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이자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는 사고방식. 인생은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임
-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란 찰나안에서만 존재.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함.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 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다.
- 만약 인생이 선이라면 인생을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우리의 인생은 점의 연속. 계획적인 인생이란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지기 이전에 불가능한 것임
- 일반적인 운동을 키네시스라 함. 여기에는 시점과 종점이 있다. 그 시점에서부터 종점에 이르는 운동은 가능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달성되는 것이 바람직. 급행열차를 탈 수 있다면 일부러 역마다 정차하는 보통열차를 탈 필요가 없는 것처럼...반면 에네르게이라란 '지금 하고 있는' 것.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가리킴. 달리 말하면 과정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나 할까. 춤을 추는 것이나 여행처럼.
- 여행의 목적은 무얼까. 이집트 여행을 가정하면 우리는 되도록 효율적으로 빨리 피라미드에 도착했다가 그대로 최단거리로 돌아올 것인가. 그런건 여행이 아니다.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여행이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해 모든 순간이 여행. 물론 어떤 사정이 생겨 피라미등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에네르게이아적 인생
- 등산의 목적이 정상에 오르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키네시스적 행위임. 극단적으로 말하면 헬기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가 5분가량 머무르고 다시 헬기를 타고 내려와도 상관없다. 물론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경우 그 등산은 실패고. 하지만 목적이 산 정상이 아니라 등산하는 그 자체라면 에네르게이아적 행위임. 산정상에 올랐는지는 관계 없다.
- 우리는 좀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함.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음.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 함.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지 간에 '지금, 여기'와는 상관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서게 되면 인생을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하나의 큰 이야기로 보게 됨.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어린시절을 보내고, 어떤 학교를 나와서 어떤 회사에 들어가는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고, 미래의 내가 있다는 식으로. 확실히 인생을 이야기에 비유하면 재미있고 이해하기도 쉽다. 그래봤자 그 이야기의 끝에는 흐릿한 미래가 보일 뿐. 그럼에도 그 이야기에 따라 살려고 한다. 내 인생은 이러니까 이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쁜 것은 내가 아니라 과거인 환경이다. 이렇게 과거를 들먹이며 탓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면죄부를 주는 것. 인생의 거짓말과 다름없다. 하지만 인생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소깅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더는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다.
- 생활양식은 '지금, 여기'에 관한 이야기이며,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있다. 직선처럼 보이는 과거의 삶은, 우리가 '바꿀 수 없다'는 결심을 번복한 결과로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인생은 완전히 백지상태에 놓여 있다. 쭉 뻗은 레일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이야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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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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