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급중시 경제학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경제는 공급 환경을 조절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하고, 이때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공급 환경은 당연히 노동력 공급입니다. 1970년대 노동자계급의 힘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노동조합들의 힘은 강했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는 노동당과 사민당이 여럿 있었습니다. 미국의 민주당조차도 대형 노동조합의 힘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초기 단계는 이러한 노조, 소위 '대형 노조'의 힘을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 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정치 지형을 재편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엘리트층에게 정치권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길 이 열려야 했습니다. 선거에 자금을 대면 그 길이 열리게 되죠. 선거에 엄청난 자금이 들어오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문제를 놓고 1970년대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시절, 미 연방대법원 에서는 이 문제로 여러 건의 소송을 다뤘습니다. 요약하자면, 선거 자금 은 부득불 필요하지만 적정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 처음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선거를 돈에 활짝 개방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국 선거비용은 미 연방대법원의 결정과 보호 아래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차원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느 누구도 정계 로 유입되는 돈의 흐름을 막을 수 없게 되었죠. 이로 인해 대기업과 부유층은 점차 정계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언론 또한 장악해야 했습니다. 기업이 직접 언론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언론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대학을 포섭해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학생운동은 반기업 및 반전의 성격이 매우 강했으며, 교수진도 매우 진보적이어서 쉽 사리 포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맨해튼 인스티튜트를 비롯해 전미 경제연구소, 올린 재단, 헤리티지 재단 등의 싱크탱크들로 대학을 포섭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기관들은 모두 대규모 자본의 지원을 받았죠. 이들은 반노조, 친기업, 자유시장 및 시장 개방을 통한 경쟁 강화 등을 연일 주장하며 이에 관한 출판물들을 쏟아냈습니다. 1970년대부터 이런 분위기가 지배했으며, 이는 꽤 성공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 1960년대에는 개인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사회정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운동이 매우 격렬했습니다. 소위 68혁명 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본의 본질에 대항하는 운동을 했죠. 자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대응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합니다. 특히 시장에서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시장구조를 체계화할 것입니다. 그 대신 사회정의라는 것은 잊어주셔야겠습니다.”
이는 1970, 80년대 레이건과 대처가 68혁명 세대에게 제안한 악마의 거래였습니다. 이 거래는 1990년대의 클린턴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시스템은 사실상 매우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거죠. 이러한 사고방식은 초부유층과 잘나가는 기업가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초부유층의 재산은 나날이 불어났고 CEO와 직원 사이 소득 격차는 점점 벌어졌습니다.
- 폭스콘사가 위스콘신주에 공장을 짓기로 하자 주 정부는 40억 달러에 달하는 인센티브를 줍니다. 위스콘신주 정부는 40억 달러를 교육, 건강관리 등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에 투입하는 대신 폭스콘에게 준 것입니다. 주 정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 인해 일자리가 창출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창출되는 일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드러나는 결과를 보면, 아마도 아마존 때문에 창출되는 일자리란 것은 1년에 연봉 2만 달러짜리일 것이며, 이것도 주 정부 보조금으로 주는 일자리일 것입니다. 민중을 지원하던 주 정부는 거대 기업의 세금을 경감시켜주고, 직접적으로 보조금을 주며, 기반시설을 건설해주고, 규 제를 풀어주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기업의 사업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바꿨습니다.
이 같은 지원이 이루어지려면 강한 국가가 필요합니다. 약한 국가 로는 안 되는 일이죠. 신자유주의에 관한 제 저서에서도 언급했습니다 만,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연합이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 소위 '네오콘'으로 불렸던 자들이 정부에서 강한 파벌을 형성했습니다. 도널드 럼즈펠드와 딕 체니로 대표되는 이들은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신보수주의의 윤리를 신자유주의 경제 원리와 접목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신보수주의는 강한 국가를 대표했으며, 이는 군국주의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이 국가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도 지원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미 군국주의 정부는 이라크 전쟁에도 뛰어들었는데,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죠.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강한 신보수주의 정부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연합은 매우 중요했고 신자유주의가 대중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시기에도 계속 강화되었습니다.
- 우리는 신보수주의가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국가권력을 총동원하여 미국의 내부적인 위기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이 현상은 국가가 강 력하게 간섭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신념과 이데올로기적 으로 배치되는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국가는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들을 위해서 개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을 구하느냐, 아니면 민중들을 구하느냐의 양 자택일에 처한 국가는 망설이지 않고 금융기관들을 구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벌이는 정치적 게임에서 확고한 규칙으로 정착했으며, 그 후 계속해서 가차 없이 집행됐습니다.
2007-08년 금융위기는 주택이 압류당할 위기에 처한 주택 소유자들에게 정부가 보조금을 지불해서 해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주택 압류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지키고 금융기관도 구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간단명료한 방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까요?
사람들이 집을 압류당하도록 하는 것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매우 유리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압류당한 주택이 시장에 엄청나게 나오 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등이 헐값으로 사들여 엄청난 이익을 낼 수 있었죠. 이런 식으로 주택시장이 되살아났습니다. 지금 현재 미국의 제일 큰 임대주는 블랙스톤이라는 사모펀드입니다. 이 회사는 압류당한 주택을 최대한 많이 사들인 다음 수지맞는 사업체로 바꾸어버렸죠. 주택시장이 붕괴된 처참한 현장에서 대박을 터뜨린 것입니다. 블랙스톤의 우두머리인 스티븐 슈워츠먼은 하룻밤 사이에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 2012년 이후 2년 동안 중국이 소비한 시멘트 양은 미국이 과거 100년 동안 소비한 양의 두 배입니다. 이런 것이 물리적인 복리성장이라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파멸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60년이내에 우리는 문자 그대로 시멘트에 파묻힐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체제가 어떻게 팽창해갈지 정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산되고 소비되는 제품의 측면에서 팽창할 것인가? 생산 활동 및 잉여가치 생산이란 측면에서 팽창할 것인가? 돈의 힘이란 측면에서 팽창할 것인가? 이 중에서 원론적으로 무제한적인 것은 돈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공급되는 통화량에 계속 0만 붙이면 되니까요.
사실 전 세계의 중앙은행들이 양적완화라는 미명하에 하는 짓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 세계의 통화공급량은 1970년대 이래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했습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팽창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통되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으며, 그 돈으로 뭘 살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새로 찍어내는 이런 돈을 모두 진정한 투자에 쏟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2007-08년 금융위기 이후 엄청난 돈으로 은행들을 구제했을 때 사람들은 이 돈이 대부분 생산적인 활동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기를 희망했죠. 하지만 그렇게 사용된 돈은 20% 미만이었습니다. 나머지 돈은 주식을 다시 사들이고, 주식시장의 자산가치에 투자하거나 토지 및 부동산을 사들이는 데 사용됐습니다. 생산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으로 돈이 흘러간 것이죠. 주식 같은 금융의 도구와 부동산 투기 같은 곳으로 돈이 샌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말씀드리죠. 2007-08년 금융위기는 부동산 시장에서부터 시작됐는데, 이 금융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주요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되고 투기가 가속화됐습니다. 중국부동산 시장에서는 미친 듯이 투기가 이루어졌습니다. 중국 수출산업에 위기가 닥친 2008년 이래 중국 성장률의 약 15%는 신규 주택 건설로부터 기인된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소재 미 연방준비은행 직원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위기가 닥치면 집을 짓고는 그 안에 물건을 채워 넣어 그 위기에서 빠져나오곤 했죠. 그 역사가 깁니다.” 그런데 세계 주요 도심지의 부동산 시장을 보면 부동산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서 살 만한 집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뉴욕시에서 1년에 5만 달러 수입으로 살아보겠다 하는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살 집을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 '양적완화는 기본적으로 서민들의 피땀을 빨아서 부자들의 배를 불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잉글랜드은행은, 비율로 보면, 양적완화를 통해서 서민이 부자보다 더 혜택을 받았다는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최하층 10%의 평균 소득이 5년에 걸쳐 3천 파운드 증가한 반면, 최상층 10%는 32만 5천 파운드가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소득 증가율은 최하층이 최상층보다 더 높았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최하층 10%가 얼마나 가난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보고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10달러에 대한 10% 이자와 백만 달러에 대한 5%의 이자, 이 두 개 중에서 어떤 것을 고르겠습니까? 그때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양적완화를 통해 최상층은 기존의 부 와 권력을 어마어마하게 불린 반면 최하층은 겨우 1주일에 커피 두 잔 정도를 더 마실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보고서의 제목은 이랬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혜택을 받았다.” 증가율과 증가량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 금융 지원과 빚은 미래의 노동을 담보로 요구합니다. 학자금 지원의 빚을 지고 있는 학생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빚이 10만 달 러 있으면 10년에서 15년까지는 이 빚을 갚느라 노동을 소비해야 합니 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학생의 미래이자 우리 모두의 미래입니다. 우리는 노예들이 빚을 갚으려고 노역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빚을 진 사람들이 너무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앞에서 말했던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임 금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어서 수요를 유지하려면 점점 더 사람들이 빚을 지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신용제도를 끊임없이 확장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신용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본이 성장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우리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습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이런 현상은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이 존속하려면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 미국의 정치를 움직이는 집단은 소수의 초부유층과 기업입니다. 미국에는 정당이 하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 정당 내에 두 가지 파가 있을 뿐이죠. 이 정당을 월스트리트당이라고 부릅시다. 이 정당의 반에 돈을 대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코크 형제 패거리들입니다. 이것을 공화당파라고 할 수 있죠. 다른 반쪽에 돈을 대는 사람들은 마이클 블룸버그, 톰 스타이어, 조지 소로스 등의 패거리인데, 이들은 민주당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 자본가의 자금 지원에 좌지우지됩니다. 양쪽 모두 기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하지만 특정한 문제를 놓고 견해를 달리합니다. 특히 기후변화와 기후 관리에 대해서 견해가 다르죠. 양쪽 모두 대중들이 고등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견해에는 찬성하지만, 그 교육이 어때야 하는지는 견해가 다릅니다. 한쪽은 신자 유주의 교육, 사업가 자질을 배양하는 교육, 능력주의의 기초 위에서 사업가 정신을 배양하는 교육 등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죠. 다른 쪽은 사회적 책임의 배양과 자립정신을 익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양쪽 모두 사회적, 문화적 프로젝트를 지원하지만 지원하는 종류가 다릅니다. 양쪽 모두 다문화주의를 지원하지만, 그 지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둘 다 여성의 권리와 동성애자의 권리를 신장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습니다.
-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07-08년 금융위기 직후 미국 내에서는 이런 식의 제안이 있었습니다. “자, 우리는 모든 것을 되돌려놓을 수 있 습니다. 우리나라 다리는 대다수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기반시설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치 때문입니다. 특히 공화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핍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산을 증액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미국은 내핍생활을 강조하는 정치에 함몰됐습니다. 유럽에서도 내핍생활을 강조하는 정치가 판을 쳤습니다. 일본에서도 내핍이 강조됐습니다. 나머지 자본주의 체제의 나라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2007-08년 위기는 부채 위기입니다. 우리는 부채를 갚아야 합니다. 어떻게 부채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핍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빚을 갚으려면 국민들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경제를 제대로 돌아가게 되돌려놓아야 합니다.” 자, 이런 정치를 한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리스 같은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여러분은 기억나실 겁니다.
중국은 정반대로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말했죠. “자, 위기가 닥쳤습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죠. 사회적 불안이 엄청나게 고조되고 있고요. 우리는 이 사람들을 일터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백만 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빨 리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건설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 겁니다. 우리는 짓고, 또 짓고, 더 지을 겁니다.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냐고요? 그런건 신경 쓰지 마세요. 빚을 내서 돈을 지불하든지, 어쨌든 무슨 수를 낼 겁니다. 중국인들은 외국 돈이 아니라 자국 화폐로 돈을 빌렸습니다. 그렇게 중국은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기에서 탈출하려고 미친 듯이 건설하려면 당연히 자재가 필요합니다. 그 결과 중국에 철광석을 비롯해 여타 원자재를 공급하던 나라나 경제체제는 모두 2007-08년 위기에서 상당히 빨리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호주는 중 국에 상당히 많은 광물을 공급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도 위기를 겪었습니다만, 그 여파가 생각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칠레 같은 나라들 은 미친 듯이 구리를 중국에 보냈고,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콩과 광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이 2007-08년에 전 세계의 경제를 구원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 셰익스피어 시대에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은 여러 세력들이 온갖 합종연횡을 하며 벌이는, 일관성 없고 일회성으로 끝나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전쟁은 누가 누구를 지원하는지, 왜 파벌들이 편을 바꾸는 지 알기 힘들기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다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어 전 유럽에 걸쳐 이런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질서가 생겼죠. 이것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종교 간의 전쟁, 민족 간의 전쟁, 가문 간의 전쟁,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종식됐습니다.
이 조약은 기본적으로 국가, 즉 국민국가가 있어야 하며, 이 국가 내에서는 주권이 있어야 된다는 개념을 정착시켰습니다. 국가는 모두 다른 국가의 주권, 온전성, 국경을 존중해야 된다는 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죠. 이 조약이 그 후에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조약이었습니다. 이것은 전 유럽에 걸쳐 힘의 지역적 구조를 명확하게 해주었고 안정시켜 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정치적·경제적 힘은 이렇게 형성된 고정적인 지역적 구조 내에 억제되고 제한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죠. 1648년 이래 국민국가라는 명칭 아래 각각의 영토 내에서 일종의 권력 구도를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 있었습니다. 그 덕택 에 내부적으로는 그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그 구도를 주위의 세상에 투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권력의 논리는 처음에는 군사력의 존재하에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엘리트층의 우수한 교육 및 문화에 의지하게 됐습니다. 이런 것들의 배경에는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위계 구조와 함께 국가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구조가 자본가계급의 권력이 부상하는 것을 형성하고 그것을 길들이는 특징이 되었죠.
- 영국은 대략 1850년 이후부터 잉여자본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내수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 영국 내에서는 더 이상 이익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죠. 그러자 영국은 자본을 수출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자본을 수출할 수 있는 방법에는 몇 가지 서로 다른 모델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 모델은 이런 것입니다. 영국은 아르헨티나 가 철도를 건설하는 데 돈을 빌려줍니다. 하지만 철도에 관련된 설비나 도구는 모두 영국에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영국이 아르헨티나에 빌려 준 자본 때문에 영국의 철강 및 철도 설비 생산의 잉여분은 완전히 해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르헨티나는 대초원 지대인 팜파스를 가로지르 는 철도를 건설하여 밀을 항구로 최대한 저렴하게 운송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이 저렴한 밀을 영국에 팝니다. 영국으로 건너간 저렴한 밀 때 문에 빵값이 싸지고 따라서 사업가들은 임금을 깎을 수 있어서 이익을 더 올립니다. 이런 식으로 한 지역의 잉여자본은 다른 지역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팽창을 유도하고, 동시에 원래 국가의 기본적인 소비재의 원가를 낮추어 그 국가의 이익을 증가시킵니다.
19세기에는 잉여자본이 보이는 중심지가 드물었습니다. 주로 영국 과 서유럽 일부에 있었죠. 잉여자본 중 많은 부분이 미국으로 흘러갔습니다. 잉여자본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이것을 통제하거나 시장 시스템을 통해서 유동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것이죠. 19세기 영국과 기타 지역과의 관계가 이 문제에 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영국은 시장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죠. 인도를 대영제국에 흡수한 영국은 인도 마을 단위의 수공업 직조 산업을 완전히 뭉개버리고는 영국 직조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수입하여 대체해버렸습니다. 인도는 선택의 여지 없이 영국 제품을 사지 않을 수 없는 전속시장으로 재편됐습니다. 하지만 인도는 어떻게 해서든 수입된 직물에 대한 가격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영국 직물에 대한 가격을 지불하기 위해서 인도는 무언가를 수출해야만 했습니다. 차, 황마 등이었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을 재배해서 중국으로 보내라고 인도에 설득했습니다. 영국은 해군을 이용한 무력으로 중국의 아편 시장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아편전쟁'입니다.) 중국은 아편에 대한 대가로 은을 인도로 보냈고, 인도는 이 은을 직물에 대한 대가로 영국으로 보냈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는 대영제국주의에 관한 저서인 《자본의 축적 The Accumulation of Capital》에서 이에 관해 개괄했습니다.
- 19세기 영국에 대해 저는 당시 영국의 산업계가 미국에 비해 인도에서는 별로 이익을 내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의 식민 당국은 인도에서 수동적인 소비시장을 만들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동력(사업가의 '동물적인 감각 및 행동')을 억눌렀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인도에서 경쟁국의 자본가들이 생산 시스템을 개발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인도를 하나의 시장으로 자신들의 주머니에 계속 넣고 싶어 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것이 자본의 동력을 억제했고 궁극적으로는 시장의 성장과 지속적인 팽창을 저해했습니다. 인도에서 취한 영국의 정책이 사업가들의 이 익을 장기적으로 더욱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거죠. 반면 미국에서는 영국이 자본의 동력을 제어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이를 제어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공간적 해결은 미국 시장의 개발과 더불어 계속 팽창하였으며, 동시에 미국은 궁극적으로 지정학적 주도권을 잡는 경쟁에서 영국을 제치는 길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1945년 이후 세계경제에 절박한 문제가 닥쳤습니다.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입니다.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전쟁을 수행하느라 생산 설비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제대군인들이 또한 엄청났던 것이죠. 그런데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중요한 것을 이해했습니다. 미국은 식민지 해방을 통해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에서 식민지를 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세력에 잡혀 있는 전속 시장을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죠. 미국은 다른 나라들처럼 전속 시장 이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들에게 그 시장들을 해방하라고 권고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했죠. 미국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쉽사리 그 시장들을 식민지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전 세계적인 자유무역 체제를 통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죠.
- 자본은 3% 복리성장이라는 영원한 굴레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곧 복리 성장률이 자본 및 자본축적의 세계 지리적 재편을 통해 성취되고 있 다는 의미입니다. 공간적 해결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및 아프리카로 흘러가는 모습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자본의 복리성장 논리가 지정학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를 지리적으로 매우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일이 지난 세기에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켰습니다. 지정 학적인 경쟁관계가 두 번 다 개입되었습니다. 세계대전 같은 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지정학적인 경쟁 관계 및 그 이론의 역할을 매우 주의 깊게 분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긴장관계, 특히 중동 지역의 긴장관계 등을 무시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 자본의 원죄
마르크스가 자본의 기원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는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유산계급의 견해와 설명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축적의 출발을 미담으로 그려냈습니다. 즉 '세상에는 주의 깊고 사려 깊으며, 절제할 줄 알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미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현재의 욕구와 만족을 뒤로 미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방종하고 낭비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재의 욕구를 뒤로한 채 미래를 위해 저축으로 자본을 축적한 고결한 이들은 사업가가 되었다. 반면 낭비를 일삼으며 방탕하게 생활한 사람들은 하루 벌어 겨우 하루 먹고사는 신세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검약한 자본가들에게 노동력을 팔 수 박이 없었고, 책임감 있는 자본가들은 이 노동력을 유익하게 사용하였 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AKS, 마르크스 시대에도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고 합니다. 즉 자본이란 기독교 신가들의 덕성 때문에 생겼다는 설입니다. 이것을 나중에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거창한 책에다 써먹었죠, 붕괴하는 봉건주의를 구한 것이 바로 윤리적인 프로테스탄티즘과 퀘이커교도의 금욕이었다는 설입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한 뿌리에는 퀘이커교도의 덕성,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고 미래의 만족을 추구하는 성향, 돈을 주의 깊게 관리하는 덕성, 사업가적 기질, 가족에 대한 헌신 등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사유재산제도가 떠받쳤다는 것이죠. 이런 베버의 설을 접하기도 전에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본질, 마틴 루터, 퀘이커교도의 관용 등에 관해서 수없이 거론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일일이 다 설명한 다음에 모두 다 부정했죠. 자본이 그런 식으로 축적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축적된 역사란 '피와 불의 문자들'로 기록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폭력적이며 잔인한 과정의 역사였습니다. 지난 권력 구조와 권력관계의 찬탈, 강도질, 도둑질, 폭력, 사기, 국가권력 남용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가 다소 과장한 것일 수는 있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들 중 마르크스 이후에도 그대로 행해진 것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을 종교적인 덕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순 전히 위선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종교적인 인간들이 진짜로 한 짓을 알고 싶으면, 기독교의 교구가 어떻게 조직됐으며, 빈민원과 고아원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알아보면 됩니다. 이 종교적인 인간들이 감옥을 세웠으며,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유폐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었습니다(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죠). 기독교는 실업과 가난의 문제를, 부랑자들을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하여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 상인자본이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산업 생산자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상인자본은 부를 도용하는 뚜렷한 메커니즘으로 무장하고 있죠. 구글 같은 회사는 새로운 차량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디자 인을 일부 담당하고 있습니다만 구글이 하는 일은 대부분 시장 메커니 즘을 통해서 도용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상인자본은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애플도 생산 단계 시점에서 생산 가용 시설을 조직화하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도용하는 상인자본주의의 행태를 통해 엄청난 존재로 부상했습니다. 산업자본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점점 더 상인자본주의 및 지주형 자본주의에 굴종하고 있죠. 지주형 자본주의 및 상인자본주의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은 생산 역량을 조직하고 생산할 때 산 노동을 착취하는 행태가 아니라 더욱더 도용하고 강탈해서 축적하는 행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본주의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고전적인 좌파 조직의 기술로 길들일 수 없는 사회입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정치적 기구 및 프로젝트로 길들여야 하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정치적 항의 형태를 동원해서 힘을 불어 넣어 길들여야만 합니다.
- 1968년의 봉기는 젊은이들이 개인적인 자유와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자본가계급과 기업들은 젊은 세대의 필요와 욕구에 보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선택의 자유와 문화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선에서 소비지상주의를 재구성하여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상적 소비주의compensatory consumerism'라고 칭할 수 있는 이론이 탄생했고, 보상적 소비주의 행위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자본과 노동 사이에 파우스트식 거래를 낳았죠. 이 거래에서 자본은 노동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자네에게 잘 맞는 노동과정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가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노동에 대한 보상은 해줄 수 있다네. 집으로 돌아가면 싸구려 소비재가 잔뜩 뒹굴고 있을 거야. 자네는 그렇게 갈망했던 행복을 그것들을 통해서 얻게 될 거야. 직장에서 일하면서 보낸 비참한 시간을 그 소비재들이 전부 보상해줄 거야.” 어느 정도 부유한 노동계급을 만들어내야겠다는 프로젝트가 여기서 탄생한 것입니다. 보상적 소비주의 개념은 매우 중요해졌으며, 1970년대에서 80년대를 거치며 새로운 소비 형태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대량 소비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상적 소비주의에는 틈새 소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실상 자본은 소비자 틈새를 공략했고 어떤 경우에는 소비자 틈새를 창출했죠. 이것이 사회적 파편화를 초래했으며, 착취와 어떤 의미에서는 정체성 정치와 문화 전쟁을 형성하여 생활양식의 차별화 및 서로 다른 문화적 표현 양식, 성적 취향 등을 촉진했습니다.
기업은 보상적 소비주의를 직장 내 소외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보상적 소비주의는 소비자들에게 충분한 유효수요가 있어야 하며, 돈도 충분해서 상점에 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본가들은 임금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소비재의 원가를 낮추어 이에 대응했습니다. 임금은 제자리였지만 그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소비재가 늘었습니다. 소비재(대부분 중국에서 만든) 원가가 전반적으로 하락했기 때문이죠. 노동계급의 물질적 복지는 임금이 제자리여도 증가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임금 수준은 제자리걸음인데도 가구 소득이 느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여성들이 대거 노동인구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중에는 소비만능주의의 쾌락과 가사를 대신해주는 기술과 서비스가 급증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보상적 소비주의가 정말 작동하는지 불명확한 경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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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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