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경제학이론의 한계를 살피는데 유용.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때가 많아서,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국가, 기업, 개인의 경제적 성공사례 중에는 어느 특정 경제학 이론 하나만으로 깔끔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허다함. 예를 들어 이코노미스트나 월스트리트저널만을 읽는 사람은 싱가폴이 자유무역정책을 시행하고 외국인 투자를 환영하는 태도에 대해서만 들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싱가폴의 경제적 성공이야말로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이 경제발전을 이루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결론짓는 것이 당연. 그러나 싱가폴 땅은 거의 정부소유고, 주택의 85%가 정부가 소유한 주택개발위원회를 통해 공급되며, 총생산량의 22%를 국영기업이 담당(국제평균 10%)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임. 그것이 신고전주의가 되었든 마르크스주의가 되었든 케인스주의가 되었든, 자유시장과 사회주의를 결합해서 이룬 싱가콜의 경제적 성공을 단독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음. 이런 사례들을 접하다보면 경제학 이론의 힘을 맹신하지 않게 되고, 하나의 이론에만 근거해서 정책을 세우는 데에도 좀 더 조심스러워지게 될 것임.
- 1820-1870: 산업혁명
터보엔진을 단 자본주의: 산업혁명의 시장
1820년경부터 자본주의는 비상을 시작. 서유럽 지역 전체의 경제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서유럽 파생사회라 할 수 있는 북미와 오세아니아 대륙 등이 뒤를 이음. 이 성장의 가속정도가 너무도 극적이어서 1820년 이후 반세기를 우리는 산업혁명시대라 부름.
이 50년동안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 성장을 보임.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기간동안 일본의 성장률이 1%였으니 요즘과 비교하면 좋은 성적이 아니지만 1500-1820사이 0.14%가 성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경제에 터보엔징을 달고 고속주행을 한 셈.
-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의 신화: 자본주의 성장사의 실체
19세기에 서유럽 국가들과 서유럽 파생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것은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의 확산 덕이라고 보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이 나라들의 정부가 국제무역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교역활동을 제한하지 않았고, 더 넓게는 시장의 활동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 영국과 미국은 자유시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무역을 채택했기에 다른 나라보다 앞설 수 있었다는 주장. 그러나 이보다 더 사실과 먼 주장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도 자본주의가 발달하던 초창기에는 정부가 선두에 서서 경제발달의 지휘자 역할을 했기 때문
- 오늘날 자유주의는 언론의 자유 등을 포함한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태도와 동일시됨. 그러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옹호자가 아니었다. 개인의 권리보다 전통과 사회적 위계질서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견해에는 그들도 반대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개인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여성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투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 또 가난한 사람에게도 투표권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가난한 계층은 개인의 재산을 몰수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에게 투표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 애덤 스미스는 정부라는 것이 "사실은 빈민들로부터 부자들을, 또는 재산을 갖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가진 자들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 여기에 혼돈이 더 가중된 이유는 미국에서는 리버럴이라는 용어가 좌편향적 견해를 가리키기 때문. 테드 케네디나 폴 크루그먼 같은 미국의 리버럴들은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라 불렸을 것이다. 반면 유럽에서는 독일의 자유민주당을 지지하는 정도의 사람들을 가리킬 때 리버럴이라는 말을 사용. 그런 사람들은 미국에서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라는 의미의 리버테리언이라 부름. 자유주의자라 번역되는 리버럴이라는 단어가 유럽과 미국에서 상당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 네오-리버럴리즘, 즉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까지 나와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신자유주의는 80년대 이후 경제학의 주류로 자리잡은 견해를 가리키는데, 고전적 자유주의에 상당히 가깝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경제학적으로 이 견해는 약간의 수정을 거친 고전적 최소정부를 옹호한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신자유주의에서는 화폐발행권을 중앙은행이 독점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반해 고전적 자유주의에서는 화폐발행도 경쟁을 해야한다고 믿는다는 점. 정치적으로도 고전적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신자유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민주주의에 반대하지 않음. 그러나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재산권과 자유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먼 민주주의를 희생할 용의가 있다.
신자유주의는 워싱턴 컨센서스 견해라 부르기도 함. 특히 개도국에서 많이 쓰는 이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말은 세게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조직이자 모두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세 개의 조직, 즉 미 재무부,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이 모두 강하게 이 이데올로기를 지지한다는 뜻에서 생김
- 1914-1945년 : 파란의 시기
자본주의, 발을 헛딛다. 1차대전, 그리고 자유주의적 황금기의 종말
14년 발발한 1차대전은 자본주의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 1871년 파리코뮌 등 빈곤층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끊임없는 위기감과 1872-96년 장기침체 같은 경제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전발발 전까지 자본주의는 상승과 팽창만을 거듭하는 듯했다.
1차대전은 여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자본주의의 물결을 타고 전세계적으로 상업적 상호관계의 그물이 점점 더 촘촘해지면서 나라들 간의 관계가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서 사람들은 1차대전 발발 직전까지도 전재이 터진다는 것은 극도로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고들 생각.
1차대전의 발발은 어떻게 보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님. 하이눈 시기의 세계화가 시장의 힘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힘으로 진행된 탓에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언제라도 무력을 동반한 갈등이 되어 터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 일부에서는 한술 더 떠서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외적팽창 없이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단계까지 진행되었고, 더이상 팽창할 곳이 없어지면 조만간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 자본주의는 적절한 정부개입하에서 가장 잘 돌아간다.
자본주의 황금기 동안 정부개입은 부자나라들의 국제무역 부문만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의 모든 부문에서 대단히 많이 늘었다. 이렇게 강도높은 정부개입에도 불구하고 부자나라들과 개도국모두가 이전보다 훨씬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 곧 이야기하겠지만 80년대에 정부개입이 상당히 줄어든 뒤로는 이 시기의 경제실적을 능가한 시기가 없다. 자본주의 황금기는 자본주의 잠재력이 정부정책에 의해 제대로 규제되고 자극될 때 극대화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
- 불확실성은 단순히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모른다는 뜻만은 아님.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능한 상황이 벌어질 확률들을 상당히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위험 또는 리스크라 부름. 사실 죽음, 화재, 자동차사고 등 사람들의 삶과 관계된 여러 리스크를 계산하는 능력은 보험산업의 토대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벌어질 확률은커녕 어떤 상황들이 가능한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놀랍게도 이 불확실성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럼즈펠드이다. 02년 아프가니스탄 상황을 브리핑하는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함. "알려진 기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알려진 미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미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들 말이다." 이 알려지지 않은 미지수라는 표현이야말로 케인스의 불확실성 개념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다.
- 탈산업화 현상의 일부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탈산업화의 정도 또한 통계자료가 취합되는 방식으로 인한 착시현상 때문에 더욱 과장되는 경향이 있음. 전에는 구내식당, 보안, 일부디자인 및 엔지니어링처럼 제조업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던 서비스의 많은 부분이 이제는 아웃소싱되어 독립된 기업들로부터 공급받음. 이 중 국외기업으로 아웃소싱하는 것을 오프쇼어링이라 부름. 이로 인해 서비스가 실제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됨. 아웃소싱된 서비스의 내용은 전과 같지만, 이제는 제조업 생산량이 아니라 서비스생산량의 일부로 계산되기 때문.
이와 더불어 일부 제조업체는 자사 생산량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하락하면 여전히 제조업무를 하면서도 서비스 업체로 재구분해달라고 요청함. 영국 정부의 한 보고서는 98년부터 06년 사이 자국에서 감소한 제조업 부문 고용의 10% 정도는 바로 이 재구분효과에 의한 것이라 추정.
- 현재 경제학의 주류인 신고전주의 경제학파에서는 생산부문을 심각하게 간과함. 대부분 경제학자에게 경제학은 공장 문 앞에서 끝나고 만다. 생산과정은 특정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자본과 노동의 양을 정확하게 명시한 생산함수에 의해 미리 결정된, 예측가능한 과정으로 여겨짐.
생산에 약간의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라도 대부분 경제 전체의 크기가 컺는 총체적 수준에서만 다룰 뿐. 이런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캐치프레이즈가 "한 나라가 감자칩을 생산하느냐 마이크로칩을 생산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80년대 미국 경쟁력과 관한 논쟁중 나온 이 말에는 경제활동의 방식이 다르면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인식이 빠져 있다. 즉 한나라가 단순히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느냐만이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것이 그 나라의 생산능력이 발전하는 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제조업 부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조업이야말로 지난 2세기 동안 새로운 기술과 조직능력을 만들어낸 주된 근원이기 때문.
- 그러나 현대사회는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새로운 사회 또한 공장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른바 산업화 후 사회에서도 이른바 새로운 경제의 동력이라고 여겨지는 서비스 산업은 역동적 제조업 부문의 뒷받침 없이는 융성할 수 없음. 서비스 산업이 주도해 번영을 이룬 경제의 대명사라 생각하는 스위스와 싱가폴이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세 나라중 두나라라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 (나머지는 일본)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생산능력의 개발, 특히 제조업 부문의 생산능력 개발은 기후변화라는 우리 시대 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 부자나라들은 소비패턴을 바꾸는 것과 더불어 녹색기술 분야에서 생산능력을 더욱 발전시켜야 함.
개도국들은 기후변화의 악영향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기술 및 조직능력을 개발해야 함. 그리고 이런 능력의 많은 부분은 오직 산업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음.
- 중요한 것은 아무리 교묘하게 상품을 묶고 구조화하고 파생상품을 디자인해도 결국은 플로리다에 사는 서브프라임 주택담보 대출자나 나고야의 중소기업, 자동차를 사려고 대출받은 낭토의 젊은이가 돈을 갚아야 한다는 전제가 이 모든 새로운 금융상품의 근저에 깔려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시스템 안의 서로 다른 부분을 긴밀하게 연결한 금융상품이 만들어지면서 최초로 돈을 빌린 사람이나 중소기업이 돈을 갚지 못한 데 따른 부작용이 시스템 전체로 훨씬 격렬하게 확산됨
- 현재의 금융시스템이 너무 복잡해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행동하는 규제기관은 물론, 이른바 경험많은 금융산업 종사다들도 마찬가지. 너무나 얽히고 설킨 금융상품이 확산되는 것을 제한해 단순화해야 함. 특히 상품을 만든 사람들이 그 상품의 폐해보다 혜택이 더 많다는 것을 명백하게 입증하지 못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이 같은 원칙이 매우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런 식의 원칙을 의학분야에 항상 적용해왔다. 인체의 복잡성과 새로운 약의 부작용 가능성을 고려해 제약업체에는 새 제품이 폐해보다 혜택이 많다는것을 사회에 입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사실 합법적 금융계약의 범위 자체가 정치적 결정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어 오지 않았던가.
금융시스템을 더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고 해서 금융이 경제의 중요한 부분임을 부인하는 것은 전혀 아님. 오히려 금융이 갖는 위력과 중요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어다니거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고작해야 말을 타고 달리는 게 가장 빨랐던 시대에는 교통신호도, ABS 브레이크도, 안전벨트도, 에어백도 없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규제 등을 통해 사용을 의무화하기 시작. 자동차들이 강력하고 빠르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잘못되면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임. 이와 동일한 논리가 금융에도 적용되지 않고서는 자동차 충돌사고, 뺑소니사고, 심지어 고속도로 다중 추돌사고에 해당하는 금융사고를 피할 수 없을 것임.
- 50년대와 60년대에 경제발전 초기단계였음에도 한국과 대만의 불평등도가 상승하지 않은 것 또한 정책으로 설명가능. 이 기간 동안 두 나라는 토지개혁을 통해 지지들이 당의 대부분을 시장가격 이하로 소작인들에게 팔도록 강제. 그런 다음 수입규제와 비료보조금, 관개시설 등을 지원해서 이 새로운 소농계층을 보호. 대규모 상점과의 경쟁에서 작은 가게가 살아남도록 하는 보호조치 또한 강하게 시행했다.
사실 쿠즈네츠 본인은 경제발전의 후기단계에 불평등도가 자동적으로 줄어든다고 믿지 않았다. 현대 경제발전의 성격상 역U자 곡선 모양으로 불평등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는 했지만, 실제 불평등의 감소정도는 노조와 특히 복지국가의 강도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
불평등 정도를 결정하는 데에 복지국가가 중요하다는 것은 유럽과 미국을 비교하면 됨.
- 부자나라들은 절대적 빈곤을 거의 완전히 척결했을지 모르지만, 국민 일부는 상대적 빈곤과 높은 수준의 불평등으로 고통받고 있음. 상대적 빈곤율과 지니계수가 나라에 따라 큰 격차를 보인다는 사실은, 미국처럼 불평등의 정도와 빈곤율이 높은 나라는 공적개입을 통해 불평등과 빈곤을 상당히 낮출 수 있다는 것을 의미.
누가 가난하게 살게 되는지 또한 공적개입에 많이 달려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가난을 떨쳐 버리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더 공평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고용시장에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하고,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시장을 조작하는 것을 막아야 함.
산업화 이전에는 한국에는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라는 속담이 있었다. 이 말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이제 세계는 절대적 빈곤을 완전히 없애기에 충분한 양을 생산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소득재분배를 하지 않더라도, 극도로 빈곤한 나라 몇 곳을 제외하고는 각 국가 자체적으로 그럴 역량이 충분하다. 불평등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정책을 채택하면 우리도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사람처럼 굉장히 평등한 사회에서 살 수 있다.
- 바나나공화국이라는 말은 요즘은 글로벌 의류회사 갭에서 만든 바나나리퍼블릭이라는 브랜드로 더 잘 알려짐.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어두운 출생배경이 있다. 20세기 초 온두라스, 과테말라, 콜롬비아 등 중남미 바나나 생산국들을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라는 기업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때 나온 말. 가장 끔찍한 비극은 28년 콜롬비아에 있는 UFC 바나나 농장에서 파업하던 노동자들이 대량학살된 일이다. 당시 미 해병대가 UFC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자, 콜롬비아 정부는 자국군대를 파견해 수천명으로 추정되는 노동자를 죽였다. 이 사건은 콜롬비아이 위대한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명작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소설화되기도 했다. 미국의 초국적 기업들은 미국 군부우파 및 CIA와 손잡고 60년대와 70년대 중남미 좌파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적극 협조.
장기적으로 볼 때 외국인 직접투자의 부정적 영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투자대상국이 생산능력을 향상시키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 일단 초국적 기업들이 투자대상국 안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자국기업들이 생존하기 어려워짐. 바로 이런 이유에서 현재의 부자 나라 중 많은 나라가 자국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외국인 직접투자를 엄격하게 제한했던 것임. 예를 들어 토요타의 첫 대미 자동차 수출시도가 큰 실패로 끝난 후, 많은 전문가가 충고한 대로 일본정부가 50년대말 자동차 산업에 외국인 직접투자를 허용했다면, 당시 일본 자동차 산업상황으로 볼 때 일본기어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초국적 기업들에게 전멸당했을 것. 55년 당시 GM의 한 회사에서 생산하는 자동차가 350만대에 달한 반면, 일본 자동차 산업 전체에서 생산하는 자동차를 다 합쳐도 7만대에 불과했다.
- 누가 이득을 보는가?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가끔은 어떤 경제학적주장에 정치적 색채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알아차리기 쉬울 때도 있다. 특정 그룹에게 노골적으로 유리한 미심쩍은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자명한 경우. 예를 들어 낙수효과 이론은 총생산량에서 더 큰 부분을 부자에게 주면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실현되지 않은 가정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어떤 때는 특정 경제학적 주장이 뜻하지 않게 일부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함. 예를 들어 사회 구성원 어느 누구도 손해는 보지 않으면서 누군가 이익을 보는 형태의 사회적 향상만을 변화로 규정해 단 한명의 구성원도 사회로부터 짓밟힘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파레토 기준은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히 유리할 것 같지 않아 보임. 그러나 이 기준은 한 사람에게라도 피해를 주는 변화는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기득권층에 유리하다.
- 겉으로 보기에 가지중립적인 결정, 예를 들어 시장의 경계를 규정하는 결정 등에도 정치적, 윤리적 판단은 항상 깃들어 있다. 시장에 어떤 것으르 포함시킬지를 결정하는 것은 상당히 강도높은 정치적 행위다. 무엇인가(물)를 시장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 1원 1표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게 되고, 부자들이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가 쉬워짐. 반대로 무엇인가(아동노동)를 시장의 영역에서 제외시키면 그 문제를 둘러싼 결정에 돈이 힘을 발휘하기가 불가능해진다.
물론 경제학이 정치적 논쟁이라 해서 어떤 주장이든 다 대등하다는 것은 아님. 상황에 따라 어떤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더 나을수도 있다. 그러나 가치판단을 배제한 과학적 분석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는 절대 믿어서는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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