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의 덫

과학 2020. 6. 1. 08:21

- 테크놀로지의 모든 변화는 거의 필연적으로 어떤 이들의 복지는 개선하고 어떤 이들의 복지는 악화시키고 만다. 파레토 우위(Pareto superior)인 생산 기술의 변화를 확실히 떠올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든 개인이 시장의 성과라는 평결을 수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혁신을 채택할지의 결정은 비(非)시장적 메커니즘과 정치적 행동주의를 통한 패자들의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산업혁명 동안 영국의 우위는 기술 변동에 맞선 저항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부가 혁신을 위해 계속 적극적으로 혁신 관계자의 편을 들어준 데 있었다. ........프랑스에서 기술 진보에 대한 저항은 영국에서보다 성공적이었던 듯한데, 아마도 이런 차이가 영국의 산업혁명이 왜 최초였는지에 대한 또 다른 이유를 제공하는 듯하다.
- 질문의 핵심은 왜 이런 기술적 독창성이 경제 발전으로 변환된 게 별로 없는가이다. 어쩌면 노예제가 노동 대체 기술을 도입하는 데 방해 요인이었다는 데 답변의 일부가 있을 듯하다. 역사가 베르트랑질 (Bertrand Gille)이 과학기술이 고대에 번성했다는 이 논지를 비판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풍족한 노예는 과학기술적 통찰이 생산에 거의 응용되지 않은 까닭을 밝혀줄 수 있다. 게다가 노예제의 존속은 곧 고대 문명의 인구 중 대부분이 산업 활동을 추구하기에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과학자이자 역사가 존 버널(John Bernal)이 제기한 설명은 산업혁명의 기계들을 고대에 생산하지 못한 이유가 경제적 인센티브의 결여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자들은 수제품에 돈을 낼 수 있었고, 노 예들은 필수품이 아닌 것은 무엇도 살 형편이 안 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술 발전은 가끔 차단당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플리니는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치하 때 어떤 남자가 깨지지 않는 유리를 발명한 일 화를 들려준다. 티베리우스는 그 발명가에게 독창성에 대한 보상을 해준 게 아니라, 성난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 남자를 처형했 다. 정부가 기술 발전을 통제하려 했던 좀더 직접적인 증거는 수에토니우 스(Suetonius)가 제시하는데, 그는 69~79년에 통치한 베스파시아누스 황 제가 노동 대체 기술의 도입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술한다. 카피톨리 누스 언덕으로 돌기둥을 운반할 장치를 발명한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 오자 베스파시아누스는 그 기술의 사용을 거부하며 분명하게 말한다. “나 보고 어떻게 백성을 먹여 살리라는 말이냐?" 돌기둥은 크고 무겁기 때 문에 광산에서 로마까지 운반하려면 수천 명의 인부가 필요했다. 이는 정 부에 어마어마한 부담이었지만, 로마인에게서 일감을 빼앗으면 정치적 불안을 초래할 거라는 우려 때문에 기술적으로 현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일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매력적인 선택이 되었다. 돌기 등 운반은 노동자들에게 생계를 제공했고, 그들을 계속 바쁘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사회 불안의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 1801년 영국의 소득자 중 상위 5퍼센트는 (실질적으로) 전체 가구 소득의 3분의 1 이상을 점유했고, 1867년 에는 약간 늘어나기까지 했다. 그해에 역사학자 이폴리트 텐 (Hippolyte Taine)은 상원의사당을 방문한 뒤 “그 자리에 있던 주요 귀족들은 내가 지명하자 자신들의 막대한 재산의 세부 사항을 댔다. 최대 재산은 연간 30만 파운드에 달했다. 베드퍼드(Bedford) 공작은 토지로 연간 22만 파운드를 번다. 리치먼드 공작은 단일 보유 자산으로 30만 에이커를 갖고 있 다. 런던의 한 구역 전체의 지주인 웨스트민스터 후작은 현재의 장기 임 대 기간이 다 차면 1년에 100만 파운드의 소득을 얻을 것이다”라고 언급 했다. 이런 불평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데번셔 공 작과 웨스트민스터 후작처럼 부유한 귀족의 소득은 노동이 아닌 자본에 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자본은 제인 오스틴의 영국에서 소득 격차의 기저에 있는 지배적 요인이다. 경제사학자 피터 린더트(Peter Lindert)의 추정에 따르면, 1810년 인구의 상위 10퍼센트가 영국 부의 80퍼센트 이상을 갖 고 있었다. 이 부의 대부분은 땅에서 나왔다. 국부는 대개 국민소득 가치의 7배였고, 농경지는 국부의 절반가량이었다. 바꿔 말하면, 지주 계급 의 재산은 한 가지 중요한 기술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 로 농업이다. 농업이 없었다면 18세기 영국의 지주 계급은 절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석기 혁명의 선물이 무려 1만 년이 지난 18세기에도 여 전히 사회를 결정했다는 사실은 수천 년간의 기술 변동에도 불구하고 경 제생활은 아직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사람들 대부분 은 아직도 가내공업제의 농장에서 일했고, 이는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 진보가 거의 없었음을 가리킨다. 떠오르는 중산층이 있긴 했지만, 사회적 지위와 부는 여전히 땅에서 나왔다.
- 농업의 도래로 생활 환경이 악화했다는 사실은 수렵채집인이 무엇 때 문에 자신들의 삶을 공산당 선언에서 “농촌 생활의 어리석음”이라고 부른 것과 자진해서 맞바꿨는지를 고민하던 많은 경제학자, 인류학자, 고 고학자를 당혹감에 빠뜨렸다. 물론 한 가지 가능성은 개체군 압력, 그리고 수렵채집인의 인구 밀도가 빙하 시대 말기에 점차 높아짐에 따라 식량 채집의 어려움이 증대한 결과 농업의 채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가령 생태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인구를 줄이느냐 아니 면 식량 생산을 늘리려 노력하느냐 사이에서 택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인류는 후자를 선택했고, 결국 기아·전쟁·폭정을 겪게 됐다”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정반대 방향으로도 작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은 생산성 증대가 1인당 소득 증대는 전혀 없이 단지 인구 증가만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농업은 애초 대다수 인구에게 소득 증대 를 발생시키는 더 나은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에 채택됐다. 그런데도 농업의 도래로 자녀를 많이 낳는 데 드는 비용은 줄었다. 엄마들이 아기를 데 리고 더 이상 음식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아진 소득이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으므로 인구 증가는 치솟았고, 그리하여 1인당 소득의 증가분을 모조리 상쇄시켰다. 물론 인과관계가 어느 쪽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양쪽의 설명 모두가 필시 어느 정도 장점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농업의 채택으로 인구가 급증했다는 점이다. 수렵채집인의 인구 밀도는 1제곱마일당 1명을 좀처럼 넘지 않 았고 사실상 그보다 낮을 때도 많았던 반면, 농부는 평균적으로 그 밀도의 40~60배였다.
- 산업화 이전 시대의 비교적 값싼 노동이 노동력 대체 기술을 널 리 사용하게끔 하는 인센티브를 덜 창출했다는 생각은 꽤 타당하다. 실제 로 로버트 앨런은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된 이유가 애초에 다른 곳에 서는 그것이 경제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앨런은 영 국에서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은 흑사병에서 비롯됐는데, 이것이 장기간 인구 감소를 유발했고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인 노동력 부족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소작농이 농노제 대신 자유를 요구함에 따라 인건비 인상을 억제하는 법안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임금은 상승하기 시작했 다. 발견의 시대에 영국이 무역에서 성공을 거두자 임금은 더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공에는 새로운 도전 과제도 따라왔다. 높은 인건비를 고려할 때 영국은 어떻게 무역에서 계속 경쟁력을 가질 것인가? 앨런은 영국 기업가들이 정말 운 좋게도 석탄산(石炭山)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이른 석탄 산업의 출현은 영국을 네덜란드 공화국 같은 다른 고임금 경제국들과 차별화시켰다. 낮은 에너지 비용과 높은 인건비에 직면해 영국 산업은 다른 곳에서라면 비용 효과가 높지 않았을 기계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매력적으로 보이긴 해도 새로 수집한 데이터에 의하면 영국의 임금은 예전에 생각했 던 것만큼 빠르게 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의 임금이 비교적 높았다. 고 가정한다 해도 윌리엄 리의 메리야스 편직기와 기모기 같은 초창기의 노동력 절감 기술은 산업혁명 한참 전에 개발됐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 사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언뜻 보기에 필요성 때문에 등장한 기술 발 전 사례가 거의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조엘 모키르는 산업화 이전 세계의 기술 발전에 대한 권위 있는 논평에서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라는 문구 가 산업화 이전의 발명 활동을 더 정확하게 기술한다고 표현한다. 기존 의 수요에 대응해 기술이 개발된 게 아니라 산발적인 기술 발전이 예전에 는 인식하지 못했던 욕구와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기술 진보는 거기서 이따금 출현한 수요가 그랬듯이 흔히 무작위인 데다 예측 불가 능했다. 예를 들어 책에 대한 수요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으로 이어 진 게 아니라 인쇄기가 책, 교육, 문해력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발명들은 그저 뜻하지 않은 우연한 발견의 결과였다. 빙 하기의 수렵채집인이 처음 석회석의 잔여물을 알아보고 난로에서 모래를 태웠을 때, 수천 년간의 우연한 발견이 로마의 창유리 탄생으로 이어지리라고는 도저히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도 공기에 무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증기 기관 발명에서 정 점을 찍을 연쇄적인 사건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 영국 정부 역시 오랫동안 대체 기술의 확산을 막으 려 했다. 17세기에도 찰스 1세는 기모기 보급을 반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예혁명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이 썼듯이 “튜더 왕조나 스튜어트 왕조의 영국이었다면 파팽(풀다의 선원들이 그의 증기 찜통을 박살냈다)은 비슷하게 적대적인 대접을 받았겠지만, 이 모든 것이 1688년 이후에는 달라졌다. 사실 파팽은 그것이 파괴되기 전에 자신 의 배를 타고 런던까지 갈 작정이었다.” 1688년 이전에는 노동자 대체 기술을 차단하는 영국 국왕의 사례가 많았지만, 이후로는 그런 예를 찾 기 힘들다는 사실도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부분적 이유는 의회와 명예 혁명 이후 강화된 경쟁으로 말미암아 길드가 약화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길드는 1835년 지방자치단체법(Municipal Corporation Act)이 나오고 나 서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한참 전부터 회원도 힘도 잃기 시작한 상 태였다. 앞서 논의한 대로 길드는 기술 발전이 회원들의 기능을 향상시킬 때는 그러지 않았지만, 회원들을 쓸모없게 만들 위험이 있을 때는 저항했 다. 따라서 길드 세력의 약화는 노동자 대체 기계에 의존하는 산업혁명의 전제 조건이었다.
- 이것은 시장이 더욱 통합되면서 자연스레 일어났다. 길드의 영향력 은 자신들의 도시 너머로 확대되지 않았고, 따라서 도 간 경쟁이 커짐 에 따라 그들의 정치력은 작아졌다. 가령 전모공(shearer: 모직물 표면에 있는 잔털을 깎아 올을 뚜렷하게 만드는 사람 옮긴이) 길드는 모직 산업에서 가장 힘 이 센 곳 중 하나로 회원들의 괜찮은 급료를 보장하는 데 성공해왔다. 청 원과 폭력 행위를 통해 그들은 수십 년간 영국 서부의 기모기 도입을 용케도 차단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경쟁이 게임의 법칙을 바꿔놓았다. 길 드들이 오랫동안 기모기에 맹렬하게 반발해온 윌트셔(Wiltshire)와 서머싯 (Somerset)에서는 글로스터(Gloucester)에 주문을 빼앗기기 시작하면서 저 항이 끝났다. 그곳의 전모공들이 기계를 사용하면 생산비가 줄어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겠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과거 농촌이었던 지역에 출현한 버밍엄과 맨체스터 같은 신도시 또한 길드의 규제로부터 자유로웠 고 자연스럽게 산업혁명의 엔진이 되었다.
- 1780~1850년 세 세대도 안 되어 인류 역사상 전례 없이 지대한 영향을 미칠 혁명이 영 국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그때 이후 세상은 더 이상 같지 않았다. (어떤 혁명도 신석 기 혁명 정도를 제외하면 산업혁명만큼 획기적으로 혁명적이지 않았다. (카를로 치폴라(Carlo M. Cipolla), 《폰타나 유럽 경제사(The Fontana Economic History of Europe)》)
- 다수의 인구가 이 증대된 부를 생산하는 데 들인 노력에 비해 그들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두 계급은 대립한다. 한쪽은 수가 늘어난 데 반해, 다른 한쪽은 재산이 늘 어났다. 한쪽은 더 많은 노동으로 겨우 불안정한 최저 생계비를 버는 데 반해, 다른 한쪽 은 고상한 문명의 혜택을 있는 대로 누린다. 이런 상황이 어디서나 속출하고, 어디서나 똑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진 운동이 뒤따르고 있다. (폴 망투(Paul Mantoux), 《18세기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 in the Eighteenth Century)》)
- 산업혁명의 거시경제적 영향은 경제적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크지 않 았지만, 1750년 이후 테크놀로지의 혁명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변인(變因) 이 있다. 1760년대에 연평균 특허 출원 수가 이전 10년에 비해 2배가 넘 었고 이후로 계속해서 증가했다.4 분명 일부 특허의 경제 관련성에 의문 을 제기할 사람이 있겠지만, 특허가 급증한 타이밍은 역사학자 애슈턴(T. S. Ashton)의 인상적인 다음 구절을 뒷받침한다. “1760년경 도구의 물결이 영국을 휩쓸었다. 그때쯤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와 와트의 증기 기 관용 분리 콘덴서를 비롯한 산업혁명의 결정적 발명품이 다수 등장했고, 두 사람 모두 1769년에 특허를 냈다. 경제적 혁명의 부재는 절대 수수께끼가 아니다. 단순히 더 나은 기술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 성장이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폭넓은 채택이 필요한데, 산업혁명은 처음에는 집합적으로 전체 경제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소수의 부문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초기의 산업혁명은 종합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경제사학자 마이클 플린(Michael Flinn)이 설명했듯이 “통계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대단히 역동적인 소수의 부문들이 꾸준히 성장세에 있는 경제의 중첩 중 하나일 듯하다. 통계 학상으로 이 부문들은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국민 생산에서 지극히 적 은 비중을 차지할 뿐이었지만, 그것들의 성장은 기존의 전체 경제 성장률 을 2배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산업혁명은 직물 공업에서 시작됐고, 그 것은 노동자들이 가장 예민하게 기계화한 공장의 위력을 느꼈던 부문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기계화는 경제사학자들이 서구가 나머지 세 계보다 훨씬 더 부유해졌던 산업혁명 이후를 일컫는 대분기의 수레바퀴를 굴러가게 했다. 그런데 산업화 초기에 영국에서도 대분기가 일어났다. 임금은 정체하고, 수익은 급증하고, 소득 불평등은 하늘로 치솟았다.
- 방적기가 물레를 몰아내자 수작업을 하던 방적공들도 축출됐다. 따라서 그것을 반긴 노동자들이 거의 없었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하그리 브스가 이 기계를 개발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블랙번(Blackburn) 주민들 은 그의 집에 침입해 그것을 때려 부쉈다. 사실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는 사건은 영국의 고전적인 산업화 시기에 자주 일어났다. 그러니까 기계 화로 이익을 보는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권력이 넘어가기는 했지만, 발명가들이 자신의 기술이 노동자를 대체한다거나 심지어 노동력을 절감한다고 설명할 가능성은 아직 없었다. 경제사학자 제인 험프리스(Jane Humphries)는 이렇게 설명한다. 18세기 초의 발명가들은 자신의 혁신이 노동력을 절감했다고 좀처럼 주장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지역의 고용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고 홍보하는 게 현명하 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고용 창출, 특히 여성과 아동 고용을 약속할 공산이 컸는데, 이들이 없었다면 암암리에 고용률이 부담스러 울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발명품이 노동을 대체한다고 말하는 것 이 좀더 용인되었고, 1790년대에 들어서면 직물, 금속 및 가죽 사업, 농업, 밧 줄 제조, 입거(docking), 양조 분야의 발명가들이 모두 그런 장점을 내세우면 서 특허권자를 억제하는 모든 요인이 사라졌다. 그렇다 해도 절감은 모든 노동 력이 아니라 주로 숙련된 성인의 노동력에 관한 것이었다. 발명품은 흔히 체력과 어린이로 쉽게 대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홍보했다. 자신의 (그리고 루이스 폴의) 방적기를 변호하면서 존 와이어트가 했던 계산에서는 배울 게 많다. 특히 여성과 아동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 형편없는 관계 당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였던 주도면밀함이 그렇다. 와이어트는 노동자 100명을 고용한 직물상이 그들 중 최고 30명을 해고하더라도 10명의 어린이나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35퍼센트 더 부유해지는 한편 교구에서도 과거의 빈민 구제 비용 에서 5파운드를 절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노동 대체가 신기술에 대한 노 동자 반란의 핵심이었던 만큼 이런 말을 하려면 상당한 배짱이 필요했다. 그리 고 이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많은 발명품이 이러한 목적을 겨냥했을 것임을 시사한다.
- 경제학자라면 산업화 과정이 본인들의 효용성을 감소시키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왜 거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동의하려 했는 지 의아할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설명은 공장 일을 갖는 데 따른 기회 비 용이 가내수공업에서 꾸준히 줄고 있던 사람들의 소득 잠재력에 의해 감소했다는 것이다. 산업화는 제조품의 가격을 가차 없이 떨어뜨렸고, 농 촌의 공업을 경쟁력 없게 만들었고, 농촌 노동자의 소득을 끌어내려 어 쩔 수 없이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게끔 했다. 이런데도 그들에게 어떤 다 른 선택이 있었다고 믿는다면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 다 사람들이 왜 가내공업제에서 공장제로 갈아탔는지는 그저 수수께끼 일 뿐이다. 일부 노동자는 점점 더 기계화해가는 공장에 맞서 반란을 일 으켰다. 그러나 기계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영국 정부가 산 업의 선구자들 편에 서면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폴 망투가 썼듯이 “(노동자들의 저항이 본능적이었든 심사숙고한 것이었든, 평화적이었든 폭력적이었든 그것은 확실히 성공할 가망이 없었다. 사건의 모든 흐름이 거기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 1850년대 어린이들의 노동 참여는 극적으로 줄어들었 다. 인과관계가 반대 방향으로 흘렀을 가능성도 있지만, 근로 시간을 규 제하고 공장 아동들의 여건을 개선한 1830년대의 공장법으로 아동의 인 건비가 올랐고, 그로 인해 증기 동력의 채택에 박차를 가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어쨌거나 1830년대 이후로 더욱 확대된 증기 기관 채택, 그리 고 그 뒤로 이어진 더 큰 기계의 도입은 더욱 숙련된 직공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기계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공장 설비와 그것을 작동하는 데 필 요한 인적 자본 사이의 상보성이 커졌다. 피터 개스켈 같은 동시대인들은 1830년대에 이미 이런 추세를 관찰한 터였다. 개스켈은 “증기 직조기가 수직기를 넘어설 만큼 대단히 일반화한 이후로는 공장에 종사하는 성인 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증기 직조기를 담당할 만큼 더 이상 유능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 전력화의 결과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나가고 있었을까? 8장에서 이 문 제를 다시 짚어보겠지만, 앞서 기술했던 건강이라는 혜택 외에 미국 노 동자들의 소득이 급속히 상승하고 있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대 량 생산은 일반 미국인 가정의 손이 닿는 곳에 신제품을 진열해놓은 것만 이 아니었다. 제조업의 폭발적 성장으로 더 많은 자본이 기계에 묶일수록 더 가치가 높아지는 기능을 갖춘 오퍼레이터들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지 는 선순환 주기에 노동을 공급하기도 했다. 공장 일은 오늘날 첨단 산업 에서 부상하는 일자리와 비교하면 단순했고, 노동자는 현장에서 대부분 의 업무를 신속하게 배울 수 있었다. 역사가 데이비드 나이(David Nye)가 지적한 것처럼 “업무 단순화의 한 가지 장점은 모든 일을 빨리 습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포드에서는 사실 누구나 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노 동자들이 부서를 옮겨 다닐 수도 있었다". 22 7장에서 논의하겠지만, 물론 노동 시장의 급작스러운 혼란은 일부 적응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전반 적으로 197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임금 상승을 기대할 수 있었다. 경제학자 프레더릭 밀스(Frederick C. Mills)가 1930년대에 관찰했듯이 “기계 화의 압박 아래서 인간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제롬은 가령 유리 산업에서 “입으로 불어서 유리를 만드는 공 예가들의 잠재적 실업은 ......... 유리병 공예가들이 기계의 영향을 받지 않 는 다른 유형의 제품을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쪽으로 전환하거나, 아니면 기계 노동자의 자리에 배치됨으로써 용케도 충족됐다”고 언급했다. 유리뿐 아니라 많은 산업에서 수작업은 기계 보조 작업으로 전환됐다. 공장이 전력화함에 따라 일부 노동자는 정비와 운송 업무에 배치됐지만, 기계 업무의 확대는 더욱 생산적이고 나은 보수의 일자리가 그들을 위해 나타 났다는 뜻이다 (8장). 2차 산업혁명의 최대 장점은 보통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함과 동시에 그들이 구입할 수 있는 신제품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미국 가정에 밀려든 전기용품의 홍수는 소비자와 생산 자로서 지위 양면에서 사람들에게 혜택을 줬다.
- 전력화는 대개 노동자에게 축복이었고, 공장을 더 밝고 더 쾌적하고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 전기가 쇼크와 감전사도 공장에 가져오긴 했지만 말 이다. 난생처음 전기의 힘과 접촉한 이민자들이 주요 희생자였다. “갓 도 착한 17세의 크로아티아 청년이 젖은 장갑을 낀 채 불꽃이 튀는 것을 바 라보며 스위치를 갖고 장난을 치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전 력화는 안전과 관련이 있었다. 공장 사고의 주요 원인은 벨트와 기어와 축으로 노동자들의 손가락, 팔, 목숨에 끊임없이 위협을 가했다. 유닛 구동 스위치는 정글처럼 얽힌 벨트와 축 및 그것들과 연관된 사고를 없앴 다. 전기 기기는 또한 먼지를 덜 일으켜 더 깨끗한 공기와 더 건강한 근로 환경을 만들기도 했다. 가스를 전기 조명으로 교체한 것은 공장의 습기를 줄이고 산소를 늘리는 동시에 산성 연기를 과거의 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점점 더 자동화한 기계는 궁극적으로 수고를 덜어줬다. 그러므로 공장 전 력화가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환영받았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6장). 실제로 산재 빈도율에 관해 최초의 종합 통계를 취합한 1926~1956년에 는 제조업에서 장애를 초래한 부상의 평균 횟수가 광산업에서 그랬듯 절 반으로 줄었다.17 1955년 포드의 리버루지 공장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가 경탄했듯이 말이다. “자동화는 나를 구해줬다. ...... 만일 그 무거운 물건들을 전에 내가 운반하곤 했던 위치까지 날라야 한다면 나는 65세까지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는 80세까지 일하기를 바란다.” 그의 유일한 불만은 기계의 도움을 받은 이래 몸무게가 33파운드 늘어난 것이었다.
- 농촌에서 일이 사라짐에 따라, 특히 대공황 당시 일부 농장 노 동자들이 고통을 겪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체로 농 장 노동자들은 대량 생산이 제공하는 일자리 기회에 이끌려 도시로 향했 다. 남부의 시골에서 시카고와 디트로이트 같은 산업 도시로의 흑인 대이 동(Great Migration)은 미국 경제사의 중대 사건이었다. 제조업의 노동자 수 요를 증대시킨 동시에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차단한 제1차 세계대전에 힘입어 많은 사람이 농장을 떠나 공장으로 갔다. 50 결과적으로 이것은 농 장의 기계화를 자극했다. 아이오와주 농무부의 아이반호 휘티드(Ivanhoe Whitted)가 1919년 <뉴욕타임스>에 “아이오와주 농부들은 농장 노동력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의 해결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트랙터로 전환하는 중이다”라고 썼듯이 말이다. 그는 40년 전에는 대도시가 거의 없었고, 농 초의 노동력은 풍부하고 저렴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제조업 덕분에 대 도시가 농촌 지역을 희생시키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여분의 농장 노동력은 남지 않게 됐다. 그는 트랙터가 궁지를 벗어나게 해줬다고 덧 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값싼 노동력이 고갈되고 난 후에야 열광적으로 채택됐다. 거의 한 세기 동안 미국의 성장 원동력이었던 2차 산업혁명의 굴뚝 산 업 도시들은 반숙련 노동자에게 더 안정적이고 보수가 나은 일자리를 잇 달아 쏟아냈다. 사람들이 도시에 매료되었다는 가장 좋은 증거는 아마도 1879년 이후 기계화에 대한 반란의 부재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2차 산업혁명 이전에는 농업의 기계화에 대한 일자리 공포 때문에 발생한 소요 사건이 여럿 있었지만, 그 이후 농업 기계에 대한 반발은 사실상 사라졌다.
- 산업혁명은 중산층을 창출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들의 성장을 용이 하게 해줬다. 공장제의 확산은 산업 자본주의의 부상을, 아울러 그와 함 께 상업·산업 부르주아의 팽창을 촉발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역사는 자본의 승리만은 아니었다. '화이트칼라'라는 용어가 19세기 상반기에 처 음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산업화가 속도를 높임에 따 라 노동 시장이 급속한 변화를 겪었음을 말해준다. 19세기 중반에 가면 화이트칼라 직업은 우리가 중산층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비교적 유복한 가정을 뒷받침했다. 기계화한 산업의 부상은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생 산직 노동자의 소득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임금 양극화를 수반했 다. 앞서 논의했듯이 고전적 산업혁명기의 기계화는 비교적 숙련된 장인 기능공을 미숙련 노동자가 가동하는 기계로 대체했다. 중간 소득 기능공 의 일자리는 기계화한 공장 생산이 장악하면서 사라졌다. 장식장 제작자, 시계공, 제화공 등 모든 종류의 장인은 공장이 점점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함에 따라 가게 문을 닫았다. 그러나 시설 규모가 커지고 전문직 관리자 들이 더 많이 필요해지면서 1850년부터는 화이트칼라 일자리가 팽창했 다. 더욱 미묘한 그림은 장인 기능공에게는 불이익을, 화이트칼라 중산층 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준 노동 시장의 공동화를 드러낸다. 미국에서 새로 수집한 데이터에 의하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임금은 이미 독립전쟁 이전에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미국 노동자들은 단지 소비자 역량의 측면에서만 기술 변동에서 이득 을 얻은 게 아니었다. 아마도 더욱 중요한 것은 20세기의 기계화는 주로 증강의 성격을 띠었고, 기계로 실직한 소수의 앞에는 대부분 선택할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 대안이 놓여 있었고, 이것이 블루칼라 미국인이 집 에 가져간 전례 없는 임금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일 터이다. “산업 노동자의 임금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간 상승함에 따라, 남편들은 점점 더 좋은 집, 자동차, 넉넉한 음식과 옷, 그리고 어쩌면 진입로에 주차한 캠핑 카를 이용한 휴가 여행까지 포함될지 모를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뒷받 침할 수 있었다. 점점 더 많은 노동 계급 가정이 폭넓은 미국 중간 계급 의 하위층에 도달할 만큼 충분히 벌었고 충분히 소비했다.”89 베이비붐은 부분적으로는 젊은 가족의 낙관주의 확대를 반영한 것이었고, 이는 제품 과 서비스의 추가 수요를 창출하고 제조업의 지속적 팽창과 새로운 노동 집약적 서비스의 창출을 촉발했다. 이 시기에 고졸 청년은 임금이 괜찮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미국 경제는 블루칼 라 노동자가 오로지 자신의 임금만으로도 중산층의 생활 양식을 영위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정점에 이른 중산층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다양한 혼합이었다. 그 결과는 소득 분배의 압착 에 반영되어 있으며, 이것이 존 F. 케네디로 하여금 “밀물은 모든 배를 들 어 올린다”고 말하게끔 만들었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구성원들은 중산층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이는 기계화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이 아득 한 추억이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미국의 반기계 반란이 2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종식됐다는 사실 을 무심결에 보여준다. 19세기에 당대 노동자들은 기계화에 맞서 저항했다. 그러나 20세기에는 그런 사건을 목격할 수 없었다. 테크놀로지 말고 다른 요인도 부차적일지언정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다.
- 2004년 선구적 저서 《신(新)분업(The New Division of Labor)》을 집필한 매사추세츠 공대의 두 경제학자 프랭크 레비(Frank Levy)와 리처드 머네인(Richard Murnane)은 아우터와 더불어 이 패턴을 처음으로 언급한 이들이다.
컴퓨터가 경제 성장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주는 사이, 전혀 다른 임금을 받 는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직업이 수적으로 증가해 있었다. 근로 빈곤층이 차지 한 건물 관리인, 구내식당 직원, 경비원 같은 직업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커 졌다. 그러나 더 큰 일자리 증가는 경영자,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교사, 기술자 등의 임금 분포 상위권에서 일어났다. 후자의 직종과 관련해 세 가지 사실 이 눈에 띈다. 보수가 좋고, 폭넓은 전문 기술이 필요하며, 종사자 대부분이 생 산성을 높이기 위해 컴퓨터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늘어난 건물 관리인과 늘어난 경영자라는 이 직업 구조의 공동화는 업무의 컴퓨터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 오늘날 만일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살아 있다면, 컴퓨터 시대에 관해 뭐 라고 썼을까? 산업화한 서구의 근로 환경은 확실히 어둡고 사악한 공장들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1인당 생산량과 사람들의 임금의 궤 적은 극도로 유사하다. 1979년 이래 미국에서 노동 생산성은 시간당 보상 보다 8배 더 빨리 증가해왔다. 37 미국 경제의 생산성은 훨씬 더 높아졌음 에도 불구하고, 실질 임금은 정체했고 실업자는 늘어났다. 그 결과 소득 에서 노동의 비중이 떨어졌다. 기업의 수익은 국민소득에서 갈수록 더 큰 몫을 쓸어가는 반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이렇게 작았던 적은 좀처럼 없었다. 그리고 노동 보상의 공식 측정 안에는 CEO와 음악·스포츠 · 미디어계 슈퍼스타들의 급료가 포함됐으므로, 이는 곧 일반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퍼센티지가 훨씬 더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고전적 산업혁명기에 그랬듯이 경제 성장의 이득은 소득 분포의 하위에서 상위로, 노동자에 게서 자본가에게로 옮겨갔다. 전후 시기에 노동의 비중은 64퍼센트 주변 을 맴돌았지만, 1980년대 이래로는 대침체 이후의 전후(戰後) 최저 수준까 지 꾸준히 하락해 최근에는 평균 58퍼센트 정도였다. 이는 그림 9에 나타난 추세와 일치하는데, 여기서 노동 생산성과 1980년대에 다시 떠오르 던 노동자 보상 사이의 격차 확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가령 경제학자 루카스 카라바르보니스(Loukas Karabarbounis) 와 브렌트 니먼(Brent Neiman)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민소득 중 노동에 돌아가는 몫이 1980년대 이후 극적으로 줄었다고 기록했는데, 그들의 주 장에 따르면 이는 값싸진 컴퓨터 덕분이다.
- 수익 증가와 노동자가 받는 몫의 하락은 틀에 박힌 중간 소득 직종(가령 기계 조작원, 회계, 모기지 보험업자)의 자동화와 저소득 서비스직(가령 건물 관 리인, 웨이터, 안내원)으로의 노동력 이동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2017년 국제통화기금(IMF)은 “장기적인 투자 상품의 상대적 가격 변동으로 측정한 기술 진보는 업무의 관례화에 대한 초기 노출과 더불어 선진 경제국에서 노동 소득의 비중이 하락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해왔다”고 밝히는 보고서를 발간했다.40 컴퓨터 제어 기계가 중산층의 일자리를 대 체한 데 따른 노동 시장의 공동화와 일맥상통하게 국제통화기금은 특히 중간 숙련 노동자들한테서 노동자 몫의 하락이 급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고 나면 그래픽 디자이너의 평균 시급은 최근 정체 상태였다. 모든 종류의 디자이너의 평균 임금은 1970년대 이래 사실상 하락해왔다. 디자이너가 식자공보다 평균적으로 약간 더 받기는 하지만, 2007년의 평균 디자이너는 1976년의 평균 식자공보다 시간당 1달러가량을 더 번다. 디자이너 는 이 기술의 혜택을 거의 공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상당한 새 기능과 직무 책임을 습득했는데도 왜 디자이너는 평균적으로 더 많이 벌지 못하는 걸까? 디자이너를 위한 테크놀로지와 직장 구조가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인 듯하 다. 식자공을 대체한 인쇄 디자이너는 웹디자이너로 일부 교체되었고, 그중 일부는 모바일 디자이너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다. 첨단 기술은 계속해서 출판의 정의와 방식을 재규정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매번 일어날 때마다 새롭고 전문화한 기능 - 학교에서보다는 주로 경험을 통해서나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익 히는 기능을 요구한다. 변화를 따라잡으려면 디자이너는 매년 새로운 소프 트웨어와 표준을 배워야 한다. 몇 년 전에는 플래시(Flash)를 배웠는데 이제는 HTML5이다. 다음 해에는 아마 또 다른 걸 배워야 할 것이다.
- 《일자리의 신지리학(The New Geography of Jobs)》에서 경제학자 엔리코 모레티(Enrico Moreti)는 캘리포니아의 두 곳, 즉 멘로파크(Menlo Park)와 비 세일리아(Visalia)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는 1969년 멘로파크에 있는 휴렛팩커드(실리콘밸리의 중심에 있다)의 일자리 제안을 거절하고 자동차로 세 시간 떨어진 비세일리아라는 중소도시로 옮겨간 한 젊은 엔 지니어로 시작된다. 당시 많은 전문가는 도시를 떠나 더 작은 지역사회로 이주하는 중이었고, 그곳은 가족의 삶을 위해 더 나은 장소로 여겨졌 다. 그때 캘리포니아의 두 곳은 번영하는 중산층, 유사한 범죄율, 비슷한 학교 수준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멘로파크의 소득이 더 높기는 했지만, 미국은 평등화의 경로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멘로파크와 비세일리아는 서로 다른 우주에 있다. 실리콘밸리는 성장해서 세계의 혁신 허브가 된 반면, 비세일리아는 낙후 지역 이 되었다. 이곳은 미국에서 대졸 노동자의 비중이 두 번째로 낮고 높은 범죄율은 상승세에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소득은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비세일리아만의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전반적인 국가적 추세다. 미국의 신경제 지도는 사람들 사이뿐 아니라 지역 사이의 격차도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적절한' 산업과 인적 자본의 탄 탄한 기초가 있는 소수의 도시는 계속해서 우수한 회사를 끌어들이며 고임금 을 제공하고 있는 반면, 반대편 극단의 '부적절한' 산업과 한정된 인적 자본을 가진 도시는 장래성 없는 일자리와 낮은 평균 임금에 쩔쩔매고 있다. 이런 격차 나는 이를 대분기라 부르고자 한다는 미국의 도시를 점점 더 거주자의 학력 수준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1980년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 미국의 지역 사회는 인종 차별을 철폐하고 있는 동시에 학력과 소득의 측면에서는 점점분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 사회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중산층이 위축되기 시작하면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될까? 빈부 격차가 심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과두정치와 포퓰리 즘 혁명에 더욱 취약했었다. 많은 정치과학자가 지적했듯이 두터운 중산 층은 안정적인 민주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기둥이다. 사실 장기간 지속 된 극심한 불평등은 자유민주주의가 왜 더 일찍 도래하지 않았는지를 설 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서 지주 엘리트는 선거권 확대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빈민은 굶주림을 면하는 게 주된 관심사였다. 다양한 기대를 가진 중산층이 없었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도 거 의 없었다.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의 고전적 저서 《독재와 민주주 의의 사회적 기원(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은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직설적인 발언으로 아마 가장 많이 알려져 있을 것이다. 비록 이 주장에는 많은 비난이 쏟아졌지만, 무어의 요점은 부르주아가 언제나 꼭 민주주의를 만들어낸다는 게 아니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영국 산업화가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장을 마련한 곳-에서 그랬듯이 지주 엘리트의 교체가 민주주의를 불러오는 데 필수라는 것이었다. 사회과학자들은 오랫동안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 계가 있다고 말해왔지만, 무엇이 그 관계를 촉발하는지는 즉각 알아차리 기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유력한 설명은 산업화가 더욱 잘 살게 되자 더 많은 정치권력을 요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 집단을 파생시킨다는 것이다. 《정치 질서와 정치적 부패》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산업혁명 이 어떻게 과거의 독재적 질서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근본 성격을 변화시켰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민주주의의 부상은 평등을 선호하 는 가치의 확산과 확실히 많은 관계가 있지만, 이런 생각은 진공 상태에 서 생겨난 게 아니었다. 산업혁명으로 시동이 걸린 심오한 변화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운 집단의 사람들, 특히 부르주아와 공장 노동 계급을 만들어내고 동원함으로써 사회 구성을 급격히 바 꿔놓았다. 이렇게 후쿠야마의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 계급 이론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낡은 봉건 질서로 부터 등장한 최초의 신흥 사회 계급은 부르주아였다. 이 계급에는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되고 공장제에, 즉 산업혁명에 엄청나게 투자한 상인 시민들 이 속했다. 산업화는 결과적으로 떠오르는 공업 도시를 찾아 농촌 지역을 떠난 마르크스의 두 번째 신흥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를 집결시켰다. 이들 집단은 봉건 질서 내에서는 정치적 참여로부터 배제됐지만, 더욱 부유해 지고 조직화하면서 더 많은 정치권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것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압력을 만들어냈다. 후쿠야마는 이렇게 썼다. 산업화의 확대는 소작농이 농촌을 떠나 노동자 계급으로 유입되도록 유도했고, 20세기 초에 그들은 최대의 사회 집단이 되었다. 무역 팽창의 영향 아래 중산층의 수는 처음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그다음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그리고 19세기 말에는 독일과 일본 및 기타 ‘후발 개발도상국에서 불어나기 시작했 다. 이는 그 후 20세기 초의 주요 사회적·정치적 대립의 기초를 닦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민주주의는 사회의 한 특정 집단, 바로 중산층이 가장 강력하게 원했던 체제라는 것이다.
- 대량 생산 시대에 집단 구동에서 유닛 구동으로 전환했던 것처럼 컴퓨 터화와 조직 재편은 어떻게 회사가 돌아가는지를 재고해야만 하는 점진 적 과정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말의 생산성 수수께끼가 모든 사람에게 수수께끼였던 것은 아니다. 경제사학자들은 예전에 이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장 전력화의 진화를 연구한 옥스퍼드 대 학의 폴 데이비드는 1882년 토머스 에디슨이 최초로 발전소를 건설한 이 후 전기가 생산성 통계에 등장하기까지 대략 40년이 걸렸다고 썼다. 6장 에서 논의했듯이 전기의 신비스러운 힘을 활용하려면 조직의 원칙에 많 은 실험이 필요하므로 공장의 완전한 재편과 유닛 구동으로의 전환이 필 요했다. 그래서 전력화의 생산성 향상이 1920년대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이어서 컴퓨터 주도의 생산성 증대와 관련한 유사한 궤적을 예측했다. 그리고 그는 정곡을 찔렀다. 1920년대와 1990년대 사이의 유사성은 흥미를 돋우었다. 양쪽의 10년간 생산성은 꽃을 피웠고 범용 기술(1920년대의 전기와 1990년대의 컴퓨터)의 적용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경제학자들은 전자가 후자의 결과라는 데 동의한다. 1991~1995년 과 비교하면 1996~1999년의 생산성 가속화의 약 70퍼센트는 컴퓨터 기술 덕분이었다. 그리고 생산성 반등은 단지 몇 부문에 국한해 집중된 게 아니라 도매 무역, 소매업, 서비스업이 상당한 이익을 보이는 가운데 대 단히 광범위했다. 이는 범용 기술이 작동 중이라는 암시였다.
- 자동화로 인한 승자와 패자 간 격차 확대는 만일 미해결 상태로 내버려둘 경우 직접적으로 일자리에 영향을 받은 개개인이 감당할 수준을 한 참 넘어서는 심각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10장 참조). 이미 경제 적 격차의 확대는 자유민주주의 조직 자체를 시험대에 올리는 정치적 분 열의 심화로 옮겨왔다(11장 참조), 20세기에 꾸준한 소득 상승은 기정사실 로 받아들여졌고,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물질적 수준이 향상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자동화 시대에 정부가 그 약속을 이행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중산층의 임금 인상이 생산성 증가보다 뒤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포 퓰리즘 역풍은 대부분 경제 성장으로 발생한 이득을 더 많은 이들에게 배분되도록 하지 못한 정부의 실패를 반영한다. 사실 비대졸자 노동자의 임 금은 30년이 넘도록 하락세였다. 대침체로 인해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 던 지난한 과정이었다 (11장 참조),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했듯이 “선진국 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는 사라져가고 있는 중산층의 문제를 다루는 능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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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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