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모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04.03 경영의 모험

경영의 모험

경영 2015. 4. 3. 16:41

 


경영의 모험

저자
존 브룩스 지음
출판사
쌤앤파커스 | 2015-03-16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빌 게이츠가 자신의 홈페이지와 《월스트리트저널》을 통해 “내가 ...
가격비교

- 자본이득 조항은 제공하는 이익이 주로 부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는 점에서 특정 비과세 채권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있음. 자본이득 조항은 두가지 세금 구멍 중에서 훨씬 편리하다. 사실. 이것은 다른 세금구멍을 낳을 수 있는 일종의 어머니 세금구멍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납세자가 자본이득의 혜택을 받으려면, 그전에 먼저 자본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함. 그런데 자본을 손에 쥐기 전에도 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됨. 그리고 50년에 법으로 제정됨. 그것은 바로 스톡옵션 조항임. 스톡옵션은 회사가 중역에게 그 회사 주식을 일정 기간(예컨대 5년)안에 언제라도 옵션을 얻은 시점의 공개시장가격 혹은 그 비슷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만약 나중에 그 주식의 시장가격이 크게 치솟는다면, 중역은 옵션권리를 행사하여 이전 가격으로 주식을 사서 적당한 시점에 공개시장에서 팔 수 있음. 그리고 이런 일을 볼썽사납게 서둘러 처리하지만 않는다면, 그 차액에 대해 자본이득에 해당하는 세율로 계산한 세금만 납부하면 됨.
- 소득세법은 경상소득보다 자본이득을 우대함으로써 아주 수상쩍은 개념 두가지를 낳는 것처럼 보임. 특정 형태의 불로소득은 근로소득보다 가치가 있다는 개념. 자본이득의 특별대우가 공정성 면에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음. 이 문제에서 이 측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헬러스타인의 견해에 쉽게 동의할 것임. 헬러스타인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근로소득보다 재산가치 상승에서 얻는 이익에 훨씬 많은 세금을 매겨야 할 이유가 많다."라고 썼다. 반면 자본이득을 옹호하는 쪽은 다른 근거를 내세움. 먼저, 자본이득에 대한 소득세를 완전히 면제해야 한다는 경제학 이론이 있음. 이 이론은 임금과 배당금 또는 투자에서 얻는 이자는 자본이라는 나무에 생긴 열매이므로 과세소득인 반면 자본이득은 나무 자체가 자란 것이기 때문에 소득이 아니라는 논리를 편다. 이런 구별은 실제로 일부 나라의 세법에 포함돼 있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국 세법인데, 영국은 64년까지는 원칙적으로 자본이득에 과세를 하지 않았음. 순전히 실용적 측면에 중점을 둔 또 다른 주장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본을 가지고 위험을 무릅쓴 투자를 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자본이득 조항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하게, 스톡옵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회사가 유능한 중역을 끌어들이고 계속 붙잡아두려면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함. 마지막으로 거의 모든 세무당국은 대부분의 개혁가가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소득과 정확하게 똑같이 자본이득에 과세를 하려면 기술적으로 아주 큰 어려움이 따른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 1962년 위기의 원인은 여전히 불가사의로 남아 있음. 분명한 사실은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과 그와 같은 위기가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것. 월가에서 나이든 익명의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염려하긴 했지만, 29년과 같은 일이 반복되리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우지수가 400으로 떨어질 것이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500이라고 말했어요. 요점은, 지금은 29년과는 대조적으로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정부가 기업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월가에 사과장수들이 다시 넘쳐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해 5월에 일어났던 일이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럴 수 있어요. 나는 사람들이 1~2년 동안은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일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는 다시 투기행위가 쌓이다가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올테고, 그런 양상은 신이 사람들을 덜 탐욕스럽게 만들때까지 반복될 거에요." 혹은 데 라 베가가 한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꿀의 단맛을 보고 나서도 증권거래소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 누르길 기다리는 단추, 작동할 때 나는 윙윙거리는 소리, 트레이에 사뿐히 떨어지는 복사지, 이 모든 것은 자극적인 경험을 부추긴다. 그리고 복사기를 처음 만지는 담당자는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모든 문서를 복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일단 복사기를 사용한 사람은 거기에 푹 빠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중독이 초래하는 가장 큰 위험은 서류철이 많은 무서로 넘쳐 어수선해지고 중요한 정보가 그 속에 묻혀 사라지는 것보다는 원본에 대한 부정적 태도(즉 복사되지 않은 것 또는 복사물 자체가 아닌 것은 중요해보이지 않는 느낌)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음. 제로그래피가 제기하는 더 직접적 문제는 저작권법을 위반하도록 주추기는 유혹이 아주 크다는 것.
- 연방준비은행에 보과된 금은 70여객국의 외국정부가 맡긴 것인데, 금을 가장 많이 맡긴 나라는 유럽국가들임. 이들 정부는 금을 이곳에 보관하는 게 편리하다고 판단하여 계속 맡기고 있다. 원래는 대부분의 금은 2차대전 때 안전을 위해 이곳에 맡겨 두었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국가들은 그 금을 뉴욕에 계속 남겨두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가 회복되면서 오히려 그 양을 더 늘렸다. 리버티 스트리트에 예치된 외국계 예금은 금뿐만이 아니다. 68년 3월 다양한 종류의 투자에 투입된 외국계 예금은 모두 280억불이 넘음. 뉴욕의 연방준비은행은 비공산권 세계 중앙은행들의 은행이자 가장 중요한 통화를 대표하는 중앙은행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세계 통화의 핵심요새임. 이런 위치 덕분에 연방준비은행은 국제금융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투시능력이 있어, 여기저기서 병에 걸릴 조짐을 보이는 통화난 비틀거리는 경제를 한눈에 간파가능. 예를 들어 영국이 외환거래에서 적자를 보고 있다면, 이것은 즉시 연방준비은행의 회계장부에 잉글랜드 은행의 잔고감소로 나타남. 64년 가을에 바로 그러한 잉글랜드은행의 잔고감소가 나타났음. 이 사건은 많은 나라와 중앙은행들이 미국과 연방준비은행의 지휘하여 가끔은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위기를 겪어 가면서 용감하게 펼쳤지만 결국은 패배하고 만 긴 투쟁의 시작을 알렸음. 그것은 파운드화의 가치를 저하시킴으로써 기존의 세계 금융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벌인 투쟁이었다.
- 무엇보다 나쁜 것은 만약 평가절하가 일어난 통화가 파운드화처럼 국제거래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이라면, 그 질병(혹은 더 정확하게는 치료법)이 전염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 평가절하가 일어난 퉁화를 외화보유금고에 대량 보유한 나라들의 경우 그 효과는 금고를 털린 것과 똑같이 나타남. 이런 나라들과 그 밖의 나라들은 그 통화의 평가절하로 무역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자국통화를 평가절하하는 데 나설 수 있음. 그러면 일종의 하강 소용돌이가 생겨남. 평가절하가 추가로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고, 다른 나라 통화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외국과 국제거래를 하려는 의욕이 떨어지며, 전 세계 수십억명의 식량과 주거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제무역이 감소하게 됨.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평가절하가 일어난 뒤에 바로 그와 같은 재앙이 잇따랐는데, 31년에 파운드화가 전통적인 금본위 제도를 포기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은 지금도 일반적으로 30년대에 세계적인 대공황을 촉발한 하나의 주요원인으로 꼽히고 있음. 그 과정은 브레턴우즈 협정의 결과로 생겨난 국제기구인 국제통화기금 회원국 100여개 나라의 모든 통화에 대해 비슷하게 작용함. 어떤 나라의 국제수지가 흑자이면, 그 나라의 중앙은행에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언제든지 금으로 바꿀 수 있는 달러가 쌓이게 됨. 만약 그 통화에 대한 수요가 충분히 크다면, 그 나라는 61년에 독일과 네덜란드가 그랬듯이 자국통화의 가치를 절상할 수 있음. 이것은 평가절하의 정반대에 해당. 반대로 국제수지가 적자라면 결국 평가절하를 강요당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남. 어떤 통화의 평가절하가 세계무역에 초래하는 혼란의 정도는 그 통화의 국제적 비중에 따라 다름. 66년 일어난 인도 루피화 평가절하는 비록 인도에서는 큰 문제였지만, 국제시장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 그리고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을 들여놓고 있는 이 복잡한 게임의 규칙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국제통화의 제왕인 달러조차도 국제수지 적자나 투기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 물질주의 시대에 파운드화는 한때 왕에게 부여되었던 것과 거의 맞먹는 상징적 중요성을 지님. 파운드화의 상태는 영국의 상태와 거의 같다. 파운드화는 오늘날 사용되는 통화중 가장 오래된 것. 파운드 스털링이라는 용어는 노르만 정복 이전에 색슨족 왕들이 은화를 발행하던 시절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임. 그 은화를 스털링 또는 스탈링이라 불렀는데, 가끔 은화에 별을 새겨 넣었기 때문. 이 은화 240개는 순은 1파운드와 같았음. 따라서 파운드라는 화폐단위가 나타난 후 영국에서는 큰 액수를 지불할 때는 모두 파운드로 계산했다. 하지만 처음 몇 세기 동안 파운드화는 결코 완벽한 통화가 아니었다. 고질적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때마다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왕들의 유감스런 버릇이 주요원인이었음. 책임감 없는 왕은 많은 스털링을 녹이고 거기다가 은을 넣는 대신 값싼 금속을 섞어 동전을 주조함으로써 마법과도 같이 100파운드를 110파운드로 만들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61년에 신중하게 계획한 기습조치를 통해 그런 관행을 폐지하고 전임자들이 값싼 금속을 섞어 발행한 동전들을 모두 회수. 이 조처는 영국의 무여성장과 결합하여 파운드화의 명성을 단기간에 크게 높이는 데기여했고 엘리자베스 1세의 이 조처가 있고 나서 1세기가 지나기 전에 스털링이란 단어는 '모든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훌륭한' 이란 뜻의 형용사로도 쓰이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
- 17세기 말에 정부의 재정을 다루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었을 때 지폐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은뿐만 아니라 금으로도 그 신용을 뒷받침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금은 통화로서의 명성이 은에 비해 꾸준히 높아져갔지만, 영국이 금본위 제도를 채택한 것은 1816년이 되어서였음. 즉, 지폐의 액면가에 해당하는 금을 언제든지 금화나 골드바로 바꿔준다고 약속한 것. 배젓보다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더 안정과 부와 심지어 기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소브린 금화는 1817년 처음 주조됨
- 영국의 번영은 모방을 낳음. 다른 나라들은 영국의 번영을 지켜보면서 금 본위제도가 적어도 일부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믿고서 차례로 그것을 채잭. 독일은 1871년, 스웨덴과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1873년, 프랑스와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는 1874년, 네덜란드는 1875년, 미국은 1879년에 각각 금 본위 제도를 채택.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들 중 금방 부유해진 나라는 하나도 없었고, 영국만 세계 무역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제왕으로 계속 군림.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영국은 금 본위 제도 때문에 번영을 누렸다기 보다는 금 본위 제도에도 불구하고 번영을 누린 것으로 보임. 1차대전 전까지 반세기 동안 런던은 국제 금융의 중개인 역할을 했고, 파운드화는 준공식적인 매개체였음. 훗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추억하듯이 쓴 것처럼, 1914년 이전에는 "런던이 보증한 신용장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즉 런던 은행의 서명이 있는 파운드화 표시 신용장은 "문명 세계의 모든 항구에서 금이 울리는 소리만큼 좋았다." 하지만 전쟁은 파운드화의 지배를 무너뜨릴 강력한 도전자인 미국 달러화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이 목가적 풍경을 종식시킴. 1914년 영국은 전쟁경비 조달에 쪼들린 나머지 파운드화 대신에 금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는 조처를 취했고, 그럼으로써 금 본위 제도를 이름만 남긴 채 포기. 한편, 달러로 표시한 파운드화의 가치는 4.86달러에서 20년에는 3.2달러까지 떨어짐.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영국은 25년에 완전한 금본위 제도를 다시 시행해 파운드화를 금과 연계시킴으로써 옛날과 마찬가지로 파운드당 4.86달러의 비율을 회복시킴. 하지만 이 용감한 평가절상의 대가로 국내경기는 만성적 불황을 겪었고 그 조처를 지시한 재무부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약 15년 동안 정치권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30년대에 일어난 전반적 통화붕괴는 실제로는 런던에너 시작된 게 아니라, 31년 여름 유럽대륙에서 시작되었는데, 오스트리아의 주요 은행인 크레디탄슈탈트가 갑자기 일어난 예금인출 사태를 버티지 못하고 도산한 것이 그 시발점. 그러자 은행 도산의 도미노 효과가 작용하기 시작.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이 참사에서 독일이 입은 손실 때문에 독일 전역에서 은행위기가 일어났고, 그러자 막대한 영국 자금이 유럽 대륙의 도산한 은행들에서 동결되는 바람에 공황사태는 영국 해협을 건너 제국 파운드화의 본산까지 침범. 파운드화를 금으로 바꿔달라는 요구가 빗발치자, 잉글랜드 은행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빌린 대출의 도움으로도 그 모든 요구에 다 응할 수 없었음. 영국은 자금을 런던에 묶어두고 금의 유출을 견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8~10%로 고리대금 수준으로 높이든가 금 본위 제도를 포기하던가 해야 하는 암울한 기로에 섰다. 첫번째 안은 실업자 수가 250만 이상이나 되는 국내경기를 더 침체시킬 우려가 있어서 양심상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음. 그래서 31년 9월 21일 영란은행은 금을 판매해야 할 책임을 중단한다고 발표. 이 조처는 금융계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음. 그때까지 파운드화의 명성은 절대적이어서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스는 스털링이 금을 떠난 것이 아니라 금이 스털링을 떠난 것이라고 말했는데, 순전히 비꼬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음. 어쨌든 낡은 제도의 계류장은 사라져버렸고, 그 결과로 혼돈만 남음. 몇 주일 안에 그 당시 전 세계의 광대한 지역에서 영국의 경제적 또는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던 나라들은 모두 금 본위 제도를 포기.

'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괴자들  (0) 2015.04.09
디스럽션  (0) 2015.04.09
슈퍼잼 스토리  (0) 2015.04.03
파괴자들, ANTI의 역습  (0) 2015.03.26
샤오미 쇼크, 레이쥔  (0) 2015.03.26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