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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06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저자
한재훈 지음
출판사
갈라파고스 | 2014-03-1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21세기 훈장 한재훈이 전해주는 생생한 서당공부의 풍경 옛공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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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아이가 글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이 아이가 세상을 인식하는 틀을 제공해줄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뜻함. 지식은 많이 축적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전에 올바른 방향을 먼저 정립하는 것이 중요. 왜냐하면 방향이 그릇된 지식은 높게 쌓고 날카롭게 벼를수록 위험한 것으로 변질되기 때문. 또한 아이는 글공부에서 배운 내용을 옳음으로 수용함으로써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몸에 새기게 됨. 그리고 그렇게 새겨진 방식에 따라 움직일 때 자연스러움을 느낌. 그것이 이른바 습관임. 글공부의 시작은 앞으로 쌓아갈 지식의 올바른 방향을 잡고, 몸이 올바른 방식을 자연스러워하도록 습관을 들이는 첫걸음임. 그런 점에서 사자소학은 관계윤리를 중시하는 전통교육의 마중물로서 제격이라 할 것임
- 서당의 아침공부는 선생님께 그날 공부할 새로운 글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됨. 제자들은 선생님께 수업할 내용을 그전날 저녁에 예습해 놓았다가 아침에 점검을 받고 설명을 들음. 전날의 예습은 가자 내일 새로 배울 글의 분량을 스스로 정한 다음, 글자 하나하나에서 글의 내용과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스스로 찾아보고 해석하면서 미리 준비함. 이런 예습과정을 서당에서는 토를 뗀다는 말로 표현. 토는 한문을 읽을 때 쉽게 이해하도록 그 구절끝에 붙여 놓은 우리말 부분을 가리킴.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토를 단다고 해야 옳지만 서당에서는 구절단위로 끊어져 있지 않은 한문문장을 구절단위로 끊고 거기에 토를 다는 것을 아울로 토를 뗀다고 표현
- 수업은 낮은 과정에 있는 어린 제자들부터 시작하는데, 선생님의 수업방식은 수업을 받는 제자의 수준과 상황에 따라 달라짐. 사자소학이나 추구 등을 배우는 제자들은 선생님 앞에 가서 글자를 읽음. 그러면 선생님은 제자가 알아온 글자를 바탕으로 음과 새김을 읽는 법을 알려줌. 물론 이런 기초적 수업은 경우에 따라 선생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고, 제자들 중에서 수제자쯤 되는 제자가 대행하기도 함. 그보다 조금 높은 단계인 소학 정도의 과정에 있는 제자들은 이미 토가 달려 있는 책을 가지고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수업을 진행하게 됨. 즉 제자는 자신이 전날 준비해두었던 새김을 선생님 앞에서 읽으면서 자신의 준비가 어떤지를 점검받음. 이렇게 낮은 과정에 있는 제자들은 배우는 분량 또한 많지 않고 글에 대한 이해도 떨어지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글자 하나하나부터 글을 해석하는 방법에 이르기가지 세세하게 지도함. 한편 사서삼경을 배우는 높은 과정에 있는 제자들은 토가 달려 있지 않은 책을 갖고 배움. 이 정도가 되면 토가 달려 있는 책은 곧잘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토가 달려 있지 않은 글의 구절을 나누고 토를 다는 훈련을 하게 되는 것. 따라서 제자들은 선생님 앞에 와서 자신이 구절을 나누고 토를 단 글의 음을 읽게 됨. 선생님은 제자가 음을 읽는 것만 들어보면 굳이 해석하는 것을 듣지 않아도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음.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제자가 떼어온 토가 잘못되었으면 이를 수정해줌으로써 잘못을 바로잡음. 예를 들면 제자가 '학이시습지요 불역열호아'라고 읽었다면 선생님은 '요'라는 토를 '면'으로 잡아주기만 한다는 것. 그러면 제자도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글을 잘못 해석한 것인지 알게 됨. 또한 이런 수준의 제자들은 배우는 분량도 많고 이미 글에 대한 이해도 높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제자가 잘못 보았거나 놓친 부분만을 바로잡아 주시고 제자가 묻는 내용에 대해 답해주시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 서당에서는 제자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 다른 책을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 특별한 경우에는 비슷한 과정에 있는 제자들을 묶어서 진도를 맞추기도 하지만 대체로 수학능력이 다른 제자들은 이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시 나뉘기 마련. 그렇기 때문에 서당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의 수는 10명 내외의 소수지만, 선생님은 제자들 숫자만큼의 수업을 하시게 됨. 그래서 제자들이 15명 이상이 되면 새벽부터 시작된 수업은 점심을 넘어서까지 진행되는 경우도 있음. 이런 이유때문이라도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도들의 숫자는 웬만하면 15명 이상을 넘지 않음
- 글을 외우기 위해 서당에서는 적어도 100번 이상 그 글을 읽어야 한다고 말함.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 글이 입에 오르게 됨. 입에 오른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입에서 줄줄 외울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말함. 어제 외운 글을 일과로 쓰는 것은 입에 오르도록 읽어서 외운 글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음. 한문에는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도 많고, 또 여러줄의 글을 외우다 보면 어떤 구절을 간혹 빼먹고 외우는 경우도 있음. 아직 한문이 익숙하지 않은 어린 학동들의 경우 이런 것들이 소리로만 외워서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붓글시로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
- 서당에서의 글 읽기는 소리내어 읽는 이른바 성독을 원칙으로 함. 글을 눈으로만 읽는 것을 묵독이라고 한다면 성독은 소리내어 읽는 것. 하지만 무작정 소리를 내서 읽는 것을 성독이라고 하지 않으며, 그렇게 읽어서는 도저히 100번을 읽을 수 없음. 성독은 글 읽는 이의 소리와 장단과 강약이 들어간 가락을 띠면서 읽는 것. 이처럼 성독은 가락의 장단과 강약이 중요한데, 이러한 것들은 음표로 정해져 있지 않고, 해당 글을 읽는 이가 글을 읽을 때 느끼는 감정의 흐름이 소리로 드러나는 것. 즉 성독은 해당 글을 읽는 이가 그 글을 읽어가면서 그 글의 의미와 소통하면서 갖게 되는 흥취의 정도를 소리에 실어 표현한 것. 그래서 한 사람이 같은 내용의 글을 같은 자리에서 읽더라도 그 글의 내용을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면 성독하는 소리는 매번 다를 수밖에 없음. 하물며 같은 글이라 해도 읽는 사람이 다르다면 성독하는 방식과 느낌이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함. 한 선생님 밑에서 글공부를 한 사람들마다 성독하는 것이 다르고, 더 나아가 서당마다 성독하는 것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음
- 원숭이와 팬더를 같은 동물이라고 범주화한 것은 원숭이나 팬더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지만,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한다고 보는 것은 우리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원숭이와 바나나 사이에 실제로 형성된 관계에 주목한 것. 이를 조금 더 나아가 해석하자면 그들 스스로는 전혀 동질성을 느끼지 못하는 원숭이와 팬더를 동물이라는 범주로 묶어버리고 이를 당연히 생각하는 우리의 관점은 어쩌면 폭력적인 시선으로 해석될 수 있음. 하지만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한다는 데 주목하는 관점은 그들의 관계에 공감하고 그들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겸손하고 친절한 시선을 느낄 수 있음
- 공감능력과 실천의지 등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님. 어려서부터 이를 가능케 하는 환경 속에서 가르침을 받고 길러짐으로써 차근차근 갖추어나가게 되는 것. 이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환경적 요소는 인간관계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환경속에서 생활하는 것. 인간관계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란 인간관계가 내맘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뜻함. 인간관계는 하고싶을 때 접속만 하면 언제든 할 수 있고, 싫증나거나 불리하다 싶으면 곧장 끝내버릴 수 있는 컴퓨터 게임이 아님. 컴퓨터 게임은 그 시작과 중단과 종결이 오로지 게임을 하는 사람에 맞추도록 설계되어 일방적 성격을 갖지만, 인간관계란 동등한 권리와 상이한 입장을 가진 주체들끼리 최대공약수를 찾아가는 쌍방적 성격을 가짐. 그러니 누군가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와 그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함께 고려할 줄 아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환경에서 생활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런 점에서 보면 매일매일 한 방에서 함께 생활하고 공부해야 하는, 그리고 학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 끝날지도 모른채 지금의 관계를 유지해가야 하는 서당은 곰삭은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직접 느끼고 그러한 정서가 자신의 관계인지망 속에 오래도록 입력되게 하는 중요한 환경을 제공해줌. 학교처럼 방과후에 단절되었다가 이튿날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당은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함께 생활하는 생활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거나 무시해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됨. 또한 학교처럼 관계의 유효기간이 이미 1년 단위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당은 애당초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관계를 맺기 대문에 적당한 위선이나 가식으로는 그 긴 시간을 배겨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 오로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성실 그리고 인내와 존중이라는 효소로 자신들의 관계를 숙성시켜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생활할 때 서로가 편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서당에서는 자연스레 체화하게 됨
- 옛 사람들이 어린 새의 날기 연습과정을 본따서 '습'이라는 글자를 만들고 이 글자에 익힘이라는 뜻을 담았을 때, 어쩌면 다음과 같은 물음도 함께 담아두었는지 모름. '왜 어린 새는 편안한 둥지를 버리고 몸을 던져서 죽기 살기로 몸부림치며 날갯짓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당연히 날기 위해서임. 날지 못하는 새가 나는 새로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서임. 옛사람들이 준비한 물음은 또 이어짐. '그렇다면 알지 못하고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당연하게도 어린 새처럼 낯설고 위험한 상황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용기와 죽기살기로 몸부림치는 절실함을 가져야 함. 그런 용기와 절실함 없이 그저 바라기만 해서는 결코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음. 지금의 나의 상황이 뭔가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성찰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변화와 성장으로 이어지게 하는 실질적 노력이 필요. 그것은 새로움과의 만남을 통해 중요한 계기를 맞지만, 만남이 곧 변화와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음. 참으로 변화하고 곧 변화와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을 기꺼이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내 것이 되게 하려는 노력이 더해져야 함. 그 과정은 새가 익숙하고 편안한 둥지를 버리고 낯설고 위험한 둥지 밖으로 몸을 던지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과정.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변화와 성장을 기대할 수 없음. 이런 점에서 옛사람들이 어린새가 날기 연습하는 모습을 통해 익힘이라는 뜻을 전달하려 한 것은 기막힌 탁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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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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