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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인문학

인문 2015. 5. 15. 14:11

 


음식인문학

저자
주영하 지음
출판사
휴머니스트 | 2011-03-3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식사로서의 음식은 일상이지만, 역사와 문화로서의 음식은 인문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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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대다수의 배추는 결구배추로 불림. 하지만 20년대 초반까지 한반도에서 주로 재배하던 배추는 개성배추와 서울배추여다. 이들 배추는 다른 말로 조선배추라 불린다. 당연히 비결구배추로 재래종이다. 개성배추는 배추 잎 끝이 푸른 탓에 개성보쌈 김치를 담그는 데 적절했다. 이에 비해 배추김치의 재료로는 서울배추가 널리 사용되었다.
- 독일 민속핮가 군터 비겔만은 한 사외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시기동안 음식과 관련된 기술적 혁신은 사회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도시에서 지방으로, 상류층에서 하류층으로 전파한다고 주장. 가령 독일사회에서 커피는 감자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계층이동을 했는데, 부유층에서 먼저 향유하고 그 이후에 점차 저소득층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비겔만은 1800년대에 커피가 일반적으로 널리 애용됨으로써 더 이상 사회적, 지역적 전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 20년대 이후 우시장의 확산으로 인해 육회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늘고, 결국 식당용 비빔밥에 그것이 들어감. 그렇다고 우시장이 열렸던 모든 곳에서 육회가 소비된 것은 아니었음. 노동에 필욯나 소만을 주로 판매하던 소규모 우시장보다는 쇠고기용 소도 유통하던 대규모 우시장위 위치한 곳에서 육회비빔밥이 만들어짐. 그곳이 바로 20년대 진주였다. 육회비빔밥의 등장과 함께 고추장이 중요한 양념 역할을 하기 시작. 20년대 이전의 조리서에 소개된 비빔밥의 양념은 모두 간장이었다. 하지만 육회비빔밥의 등장과 함께 고추장이 양념으로 쓰이는 조리법이 등장. 그 이유는 고추장의 공급이 이전에 비해서 훨씬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
- 일본 식품학자 기마라 슈이치는 한국의 고추가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다면, 왜 일본에는 정착되지 못하고 한국에만 정착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게 된 배경을 설명. 그의 실험실 팀은 흰쥐를 갖고 실험했는데, 고추의 매운 성분인 캡사이신을 첨가한 군의 경우 선택하는 식염농도가 낮아 식염 섭취량도 감소했다는 결과를 얻음. 고추가 곧 식염절약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 이런 결과를 전제로 일본의 경우 바다에 접한 면적이 많아 일반 서민들도 소금을 구하기 비교적 쉬었으나, 한국의 경우 서민들이 소금을 많이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판단했다. 기무라 슈이치의 이론을 수용하여 18세기 조선사회에서의 소금부족 현상을 추적. 17세기 이후 관혼상제가 피지배층에까지 널리 퍼지고, 향교,서원의 증가로 제사가 급속히 확대되자 제수용품으로서 어물의 수요가 증가. 어물은 쉽게 부패하므로 어물량의 20%에 해당하는 소금으로 절여야 유통, 보존이 가능함. 당연히 소금 수요가 증가했음. 특히 서해안에서 해물을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여 젓갈제조가 보편화되면서 소금의 수요는 더욱 급증했을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 이앙법과 대동법의 실시는 곡물중에서도 쌀의 생산을 증가시켰다. 이로 인해 이전에 곡물을 섭취하는 양이 증가하고, 밥중심의 식단구조가 진행되면서 반찬들이 짠맛 중심으로 변해갔을 가능성이 있음. 왜냐하면 곡류 위주의 음식소비 습관은 반찬을 짜게 먹는 소금 과잉섭취의 식단을 야기하기 때문. 이에 짠맛을 상쇄하면서 동시에 밥맛이 좋아지는 방법 중 하나로 모든 음식에 고추나 고춧가루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음. 특히 기왕의 짠지형태에서 양념김치 형태로 변화하면서 염분의 양을 간접적으로 늘리는 젓갈의 사용하 보편화됨. 이로 인해 쌀밥+양념김치가 기본적 식단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고추와 고춧가루는 향신료로 음식에 쓰임. 1800년경에 집필된 규합총서에는 생선요리를 할 때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향신료로 들어가면 맛이 좋다고 적혀 있음. 이것은 고추가 지닌 기능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줌. 아울러 고추가 지닌 방부제 기능은 고춧가루가 들어간 김치를 더욱 장기간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결국 짠맛 위주의 짠지와 장아찌 대신에 고춧가루가 들어가서 채소의 원래 맛을 유지시키는 양념김치가 더욱 많이 소비되었다.
- 20세기 이래 음식은 특정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문화요소 중 하나로 인식되어 왔음. 학술적으로 민족음식이라고 불리는 음식은 20세기 이래 확산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근대적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형성되어 왔음. 최근 지구촌화가 습속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이용한 민족음식의 유행은 그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음. 이런 면에서 80년대는 전 지구적으로 민족음식이 유행을 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 한국음식은 80년대 이후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그리고 한국인의 해외여행 자유화 등에서 한국인의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 더욱이 한국사회가 외국에 개방되면서 한국음식은 어떤 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산물인 동시에 영양학적으로도 어떤 민족의 음식에 비해서도 우수하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다시 말해 88 올림픽과 해외여행 자유화, 그리고 한일월드컵은 한국사회를 급속하게 개방시킨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서 자국과 외국을 구분하게 되는 타자화 과정을 한국인들 다수는 경험했다. 사실 여행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다른 민족의 음식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외국 또는 다른 민족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기 위해 특정한 민족음식을 먹기도 한다.
- 매운맛은 90년대 중반이후 세계적으로 유행. 이 매운맛은 종래 한국음식의 매운맛을 만들어낸 고추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멕시코 음식의 살사가 지닌 칠리소스와 같은 핫소스가 개입됨. 본래 한국음식의 매운맛은 달짝지근한 매운맛인데, 칠리소스의 매운맛은 혀에 불이 난 것처럼 매움. 그런데 불닭을 비롯해 90년대 말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매운맛은 핫소스의 매운맛이다.
- 한국음식의 매운맛은 캡사이신이 주를 이루지 않는다. 특히 양념으로 만들어진 매운맛은 마늘이나 생각, 심지어 설탕과 함께 버무린 것이기 때문에 핫소스의 매운맛과는 다르다. 이것을 대표하는 음식이 바로 고추장이다. 한국의 고추장은 결코 고춧가루가 주된 성분이 아니다. 순창 전통 고추장의 성분배합 비율을 보면 대략 찹쌀(23.8)+고춧가루(27.8)+메주가루(8)+소금(12.5)+물(22.9)+엿기름(5) 라는 보고가 있다. 이 고추장의 배합비율은 비교적 재래방식의 고추장이다. 공장제 고추장은 찹쌀 대신에 밀가루나 보릿가루 따위를 더 많은 배합비율로 섞는다. 특히 엿기름이 5%이상 들어가기 때문에 한국 고추장은 매우면서 동시에 달다
- 고추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서유럽으로 전래된 초기에 서유럽 사람들은 고추를 약으로 이해. 고추를 먹으면 몸에 원기가 생기가 마음이 가라앉고 가슴의 병을 고치는 데 효과가 있다. 고추는 몸의 중요한 기관을 따뜻하게 해주어 병의 증상을 가라앉히는 데 좋다. 고추는 그 맛이 맵지만 그 약효는 최상급에 가깝다는 내용이 16세기 스페인 의사 니콜라스 모나르데스가 쓴 책에 나옴.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도 매운맛은 습윤한 지역에서 몸에 열기를 불어넣는 데 효과적인 약리기능 때문에 소비한다. 이에 비해 한국인이 매운맛을 즐기는 이유는 앞의 사례에서 밝혔듯이 이열치열에 있다. 17세기 후반에 온돌이 서민층의 집에까지 보급되면서 한국인은 겨울에 몸에 열기를 내기 위해서 굳이 매운맛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한국인의 살림집과 식사구조에서 겨울에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역할은 온돌과 뜨거운 국물과 찌개에 있었다. 이 점은 쓰촨 지역과 최근 일본에서 겨울에 매운맛 음식을 즐겨먹는 양상과는 다른 이유다.
- 왜 고추가 18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확산과 적응과정을 거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고추를 비교적 빨리 수용한 일본의 경우에도 고추재배는 18세기 중엽 이후에 들어와서야 문헌에 등장하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조선사회가 고추에 적응한 것은 상당히 빠름. 사실 오늘날 일본음식에는 고추를 넣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심지어 일본 속담에는 고추를 먹으면 머리가 벗겨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비록 시치미라는 향신료에 고춧가루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은 고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본의 한 학자는 비록 일본의 음식이 중국이나 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형성되었지만, 고추와 같이 자극성이 강한 향신료는 환영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일본음식은 온난한 기후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온화하고 섬세한 맛과 향이 발달했다고 주장. 하지만 이런 논리로 일본인이 고추를 적극 수용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에 부족. 고추의 매운맛보다 더 보편적인 일본의 매운 맛은 와사비임. 와사비에 대한 일본 문헌의 기록은 10세기 초반에 이미 등장. 사시미를 먹을 때 매운맛이 나는 와사비를 먹으면 콧구멍이 뚫리면서 순간적으로 비린내를 없애준다. 와사비를 사시마와 스시의 향신료로 본격적으로 사용한 대는 19세기 초반이라고 한다. 스시나 사시미가 유행하면서 와사비는 생선의 비린내를 제거해주는 향신료로 자리 잡았다. 일본인들은 와사비를 먹으면 맵고 맑으며 상쾌한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 비록 그 타당성을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관습적으로 겨울에 고추를 먹으면 습윤한 기후에서 걸리기 쉬운 풍습을 제거할 수 있고, 땀이 나서 한기를 막을 수 있으며, 습하고 더운 지역에서 생기는 풍토병인 장기를 피할 수 있고, 위장을 강하게 해주며, 입맛을 좋게 해주고, 혈액 순환을 도와준다는 주장이 매운맛의 유행을 뒷받침하는 논리다. 그래서 지금도 쓰촨 사람들 중 노인들은 '겨와 나물이 겨울의 반 식량이며, 고추는 겨울을 이겨내는 옷이다'라는 속담을 기억한다. 겨울에 고추와 산초를 섞은 마라의 매운맛이 첨가된 음식들을 먹으면 습윤하면서 냉기가 강한 날씨를 이겨내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그들은 믿음. 여기서 쓰촨 사람들과 한국인의 공통점이 발견됨. 고추가 전래되기 이전에도 두 지역 사람들은 매운맛을 좋아했다. 쓰촨은 이른바 천초라는 매운맛을 내는 향신료로 이름난 지역. 그만큼 쓰촨 지역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매운맛을 좋아했다. 이성우는 동의보감에 천초가루로 천초장을 만드는 조리법이 나온다는 점을 통해서 고추가 유입되기 이전에도 후추, 겨자, 천초, 마늘 등을 이용해서 매운음식 맛을 냈던 전통이 있었고, 이 전통으로 인해서 고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즉 쓰촨인과 한국인은 공통적으로 천초를 통해서 매운맛을 즐기는 습관이 있었다. 다만 쓰촨인의 경우 지금까지도 여전히 천초와 고추를 함께 사용해서 음식을 조리한 반면, 한국인은 고추를 위주로 해서 매운맛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 일본은 16세기에 고추가 유입되었음에도 매운맛을 적극적으로 선호하지 않았음. 이런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일본에서의 매운맛 전파는 다이어트와 연결시킨 마케팅 전략을 통해 확산됨. 80년대 이후 에스닉 푸드이 유행은 매운맛을 한국, 중국 쓰촨, 타이 등의 국가적 이미지와 연결시켰다. 중국의 경우에는 다양한 맛의 경향성을 지역체계 내에서 유지해 왔기 때문에 매운맛은 단지 쓰촨의 지역음식을 내세우는 것으로 충분했다. 중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지역문화와 지역음식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미 20세기 중반이후 고추의 매운맛이 전국적으로 퍼졌기 때문에 매운맛 자체가 단맛과 결합하여 상품 고추장이 탄생했거나, 재래종 고추와 멕시코 고추를 결합한 처양고추의 유행으로 매운맛이 강화되는 변환이 있었다.
- 특히 80년대 이후 도시 거주자와 외식업의 증가와 함께 고추장이 비빔밥의 양념으로 사용됨. 87년 강인희가 펴낸 한국의 맛이라는 조리서에는 밥 위에 각종 재료를 올릴 뿐 미리 비비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호에 따라 볶은 약고추장을 곁들일 수 있다고 적었다. 결국 8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서는 비빔밥을 먹을 때 고추장을 양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게 됨. 고추장의 상품화는 60년대에 이루어짐. 63년 1월 16일자 경향신문 2면 하단에는 샘표 고추장 광고가 실림. 이미 조선후기부터 집에서 담근 고추장이 중요한 양념으로 사용되었지만, 그렇다고 고추장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에 들지 않았음. 60년대 이후 고춧가루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미국과 독일로의 이민이 증가하면서 고추장의 상품화가 진행됨. 이 과정에서 고추장은 비빔밥에서 가장 중요한 양념으로 인식됨. '별건곤'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20년대 말에 진주비빔밥에 고추장이 사용됨. 적어도 70년대까지 한국음식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싶어했던 대학의 몇 안되는 한국음식 조리학 교수들은 비빔밥에 고추장이 들어간다는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음. 실제로 그들은 유럽과 미국에서 영양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배교수들에게 상당한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신들의 조리법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경향이 강했음. 그만큼 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비빔밥이 나름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다고 보았음. 더욱이 미리 비빈 비빔밥의 조리법만이 고급스러운 궁중음식이라는 인식도 갖고 있었음. 하지만 80년대 이후 외식업의 증가는 더 이상 그들이 고집했던 비빔밥의 정통성을 지켜주지 못했다.
- 일본인은 미리 비벼놓은 비빔밥이나 먹는 사람이 먹기 직전에 비벼야 하는 비빔밥에 대해서 일정한 기피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클로드 레베스트로스는 사람이 특정 음식만을 선택적으로 먹는 이유는 그것이 생각하기에 좋은 음식이기 때문이라고 주장. 비빔밥=음식물 쓰레기라는 일본인의 태도는 분명 비빔밥이 생각하기에 좋지 않은 음식이란 인식에서 나옴. 마빈 해리스는 음식이 생각하기에 좋은지 나쁜지는 그것이 먹기 좋은지 나쁜지에 달려 있다고 보았음. 왜냐하면 음식은 집단정신을 채워주기 전에 집단의 뱃속을 채워주어야 하기 때문. 그래서 마빈해리스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을 패러디하여 먹기에 좋은 음식이 생각하기에 좋은 음식보다 우선적으로 사람들에 의해 선택된다고 보았음. 그는 우유 애호가와 우유 혐오가의 문제는 우유 효소를 분해할 수 있는 락토스의 보유와 관련이 있지, 종교적 지향과는 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돼지고기 회피나 힌두교도의 쇠고기 회피도 생태적 조건이 절대적 이유가 된다고 주장. 일본인이 비빔밥에 대해 보여주었던 기피의 태도가 생각하기에 나쁜 결과라고 한다면, 한국인이 비빔밥을 즐겨먹는 이유는 마빈 해리스의 주장처럼 먹기에 좋은 음식이기 때문. 왜냐하면 주식인 밥과 반찬을 비벼 먹는다는 사실은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미리 비벼서 간편하고 빠르게 수요자에게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또 비빔밥을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입속에서 밥과 반찬을 비빌필요 없이 아예 그릇에 한데 담아 각종 양념을 넣고 비벼서 맛을 극대화시켜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 비빕밥은 70년대 이후 전주비빔밥으로 일원화됨. 그 과정에서 비빔밥의 유래는 제사음식설에서 동학혁명설과 농번기 음식설로 전환됨. 최근 다시 궁중음식설이 강력하게 전주비빔밥을 부각시키려 함. 실제로 윤서석이 특미비빔밥을 만드는 조리법이라고 소개했던 "양지머리 고은 맑은 육수에 밥을 짓는"방법은 현재 전주비빔밥만의 특징이 되었다. 여기에 성인병과 비만을 해결할 수 있다는 비빔밥의 영양학적 우수성은 양념으로 쓰이는 고추장의 항암작용으로까지 확장됨. 심지어 이 아름다운 비빔밥을 만들어내는 비빔밥 정신을 전주의 정신으로 삼자는 주장도 나옴. 이기형은 "담론은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생성되거나 매개되지만, 특히 사회제도적 층위에서 주도적으로 발생, 교환, 수용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담론은 복잡하게 얽힌 의미망을 형성한다"고 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비빔밥과 관련된 담론은 비빔밥의 유행과 전주비빔밥의 부각이 전주라는 지역사회의 정치경제적 목적과 결합하고, 여기에 저널리즘이 결합하여 생성과 확장을 거듭해왔따. 또 음식물이 지닌 특성으로 인해 영양학적 지식도 전주비빔밥의 담론을 생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 심지어 전주가 정치적으로 불안한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비빔밥 정신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도 만들어냄. 오늘날 비빔밥 담론은 전주라는 지역사회에서 지자체와 외식업체는 물론이고,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중. 이 과정에서 비빔밥은 먹기에 좋은 음식에서 생각하기에 좋은 음식으로 변화. 면접조사에서 만난 전주 토박이들은 비빔밥을 식당에 가서 굳이 사먹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 그들은 집에서도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 곧 먹을거리가 풍부해진 오늘날에도 전주 토박이들으 여전히 비빔밥을 먹기에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비빔밥은 생각하기에 좋은 음식으로 전환되고 있는 중이다.
- 적어도 근대적인 사회시스템에서 조선사회의 외식업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발달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비빔밥은 주로 가정에서 소비되었고, 그에 대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20년대 이후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서 근대적 도시가 형성되오 인구집중과 경제의 중심지가 되면서 근대적 외식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됨. 이 과정에서 비빔밥은 밥과 재료를 미리 비벼서 그릇에 담는 음식에서 흰밥위에 재료를 올려서 손님이 직접 비벼먹는 음식으로 진화되었음. 더욱이 20년대 이후 지방 도시에서 운영되기 시작한 우시장은 쇠고기의 소비를 증대시켰다. 그 결과 진주에서는 쇠고기 육회를 비빔밥에 올리는 새로운 조리법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고추장이 비빔밥 양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음. 결국 비빔밥의 진화과정에는 20세기 초반 근대도시의 형성과 외식업의 전개라는 사회적 변화가 개입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진화과정에는 비빔밥이 지닌 물질적 특성이 작용. 한국인의 일상식사를 구성하는 '밥+국+반찬'의 구조중 하나인 '밥+반찬'의 조합이 비빔밥을 만들어냈다. 곧 비빔밥은 먹기에 좋은 음식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선택되었다. 이 점은 20세기 이후 각 지역의 식당메뉴에 비빔밥이 등장한 이유이기도 했다. 국밥과 함께 비빔밥은 공급자나 수요자가 끼니를 해결하면서 보다 편리하게 만들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한국사회의 도시화도 비빔밥의 담론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사건이었다. 농촌과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대거 서울과 그 주변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70년대에는 서울에는 지역음식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식당들이 들어서기 시작. 특히 경제개발의 성공이 가져다준 혜택을 누리기 시작한 80년대 초반에 지방에서 기반을 다진 식당들이 서울에 분점을 냈다. 전주비빔밥 혹은 전주곱돌비빔밥과 같은 음식을 판매하는 전문식당이 서울에 등장한 것도 이쯤이었따. 이미 60년대부터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전주비빔밥은 80년대 초반부터 전국적인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한국인이 생산, 소비하는 음식물은 결코 물질적 속성만을 갖고 있지 않다. 20세기 1백년을 거치면서 한반도에서 생산, 소비되는 음식에는 사회문화적 맥락이 담겨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 사회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시기동안 음식과 관련된 기술적 혁신은 특정음식을 전체사회로 확산시킨다는 독일 민속학자 군터 비겔만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 20세기에 들어오면 사회문화적 의미체계에 포섭된 특정 음식은 국가와 지역사회, 그리고 기업에 의해서 또 다른 변신을 하면서 더욱 적극적인 담론을 만들어냈다.
- 식품학과 영양학은 근대 이후 문명개화를 위한 도구로 출발한 학문. 다시 말해, 이들 학문은 근대 국가가 지향하는 위생과 영양, 그리고 몸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서양의 과학적 합리성에 근거하여 실천하려는 경향이 강함. 이런 탓에 음식의 생산과 소비과정이 지닌 사회문화적 의미체계를 읽는 작업을 소홀히 하는 편이다.
- 강화도 조약 이전부터 조선인 관리들은 서양의 독주를 무척 좋아했음. 1868년 흥선대원군의 양부인 남연군 구의 묘지를 손상시킨 일이 발생. 이때 사건을 일으켰던 오페르트는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1886)에서 조선에 상륙하여 조선관원을 만났을 때 자신들이 갖고 있던 위스키 한병을 선물로 주자 대단히 좋아했다는 기록을 남김. 조선관료들의 독주 애호는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효종 3년(1652)에 "근래 젊은 관원들이 술을 많이 마신다 한다. 마시지 않는 자는 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니 임금이 직접 여러 관서의 벽에 금주의 방문을 써 붙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음. 또 영조 4년(1728)에 형조판서가 "판매업자가 날로 번성하여 어떤 자는 하루에 100여석의 술을 판다. 이로 인해 살상사건이 빈발하니 엄하게 다스리겠다"고 선포하기도 했음. 영조는 1733년 1월 금주령을 내렸고, 더불어 밀주 제조 단속도 엄격히 함.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제사에도 술을 올리지 못하고 냉수를 떠올림. 심지어 1757년 영조는 백관에게 금주를 명할 때 내린 말을 기록한 어제계주윤음을 펴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법적 통제에도 조선관료의 독주애호를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서 서양독주를 접한 조선관리들은 특히 위스키와 진을 좋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위스키는 한자로 유사길이라 적었는데, 이것은 중국어 발음으로 웨이쓰지 이기 때문에 그 발음을 유사하게 하여 붙인 이름. 진은 한자로 두송자주라 썼다. 진이 노간주나무인 주니퍼향을 곁들였기 때문에 그 내용물을 근거로 하여 이런 이름을 붙임. 이미 알콜도수 50도가 넘는 소주에 길들여 있던 조선관리들은 서구의 위스키나 진을 맛보자 너무나 좋아했다고 함.
- 외식의 탄생은 상업도시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문적인 직업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집이 아닌 음식점에서 식사를 한다. 전근대의 주막은 집을 떠나서 이동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된 시설이었다. 조선후기 한양과 개성만이 도시적 상가를 구성하고 있었기에 내외주점이 있었다. 그런데 내외주점이 근대에 들어와서 근대적 퇴폐성을 지니게 됨. 근대적 외식으로서 조선음식이 과연 제대로 자리를 잡았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전근대 시기 주막 혹은 여막 등의 음식점이 근대적으로 적응했는가와 관련이 있음. 조선후기의 주막은 전문식당으로 자리를 잡지 못함. 술을 먼저 대접하면서 그 안주로 끼니를 해결하도록 했던 조선후기 주막은 결코 근대적 의미의 전문식당이라고 보기 어려움. 주막은 숙박업소의 성격이 강했지 결코 전문식당은 아니었다. 장국에 만 밥 정도를 판매하던 주막이 19세기 말 근대적 도시 공간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서울에서도 색주가와 내외주점, 주점 혹은 선술집으로 분화되면서 그 전문성에서 음식을 으뜸으로 삼지 않았음. 그보다는 술을 팔고 매음을 하는 곳을 바뀜. 음식을 상업적으로 판매하면서 전문적 경영을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근대적 음식점의 출발을 주막에서 찾기는 어렵다. 주막은 술집이며, 술에 딸려 나오는 음식은 그 자체가 안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주막은 술집으로서의 면모는 지니고 있어도 음식점으로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움. 이 점은 오늘날 한국음식점이 지닌 한계와도 맞닿아 있다. 주된 음식을 주문하면 반찬은 무료로 제공되는 점은 오늘날 한국음식점이 지닌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다. 결국 조선요리옥, 색주가, 선술집, 주점, 밥집 등과 같은 근대시기의 한국음식점은 결코 음식을 먹기 위해 소비가 일어나는 곳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기생의 접대를 받으며 술을 마시기 위한 목적으로 가는 조선요리옥과 색주가, 혼자서 혹은 몇사람이 어울려 술을 먹으면서 안주로 음식을 먹는 선술집과 주점이 주류를 이루었다.
- 한국인의 생선 소비량이 일본을 추월. 그만큼 한국인의 생선 소비량이 증가했음을 보여줌. 그런데 문제는 한국인이 주로 소비하는 생선이 바다생선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19세기 이전까지 한국인의 생선소비는 주로 민물에서 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다생선으로 변했다. 오늘날 전국의 바닷가에 자리잡은 횟집은 한국인이 얼마나 생선회를 즐겨 먹는지를 보여줌. 더욱이 생선은 육고기에 비해 건강에도 좋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민물생선을 익히지 않고 먹을 경우 기생충에 의해 디스토마에 걸리게 되는데, 국가 공중보건정책으로 말미암아 민물생선의 소비경향마저 변화시켰다. 여기에 바다생선이 건강에 좋다는 매스미디어의 캠페인은 바다생성 위주의 소비경향을 만들어냈다. 특히 수산업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어획되는 바다생선의 종류도 지난 20세기 1백년 사이에 상당이 달라짐. 80년대 중반이후 원양어선에서 잡힌 참치가 통조림으로 변하여 한국인의 식탁에 등장. 통조림 참치를 이용한 김밥과 비빔밥, 김치찌개도 일상적 음식이 됨. 게다가 일본식 참치회의 유행은 기름기 있는 회도 먹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본 스시의 유행이 그것을 설명한다. 아울러 최근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현상은 한국인이 그동안 즐겨 먹어온 바다생선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이제 동해에서 잡은 명태나 오징어를 먹기가 전처럼 쉽지 않게 되었다.
- 해방이후 도시에서 지역명이 붙은 향토음식이 부각되는 지점에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향수와 관련되어 있다. 1908년대 이후 홍어를 재료로 한 음식이 서울에서 외식업의 메뉴로 자리를 잡게 된 까닭은 1960년대 이후 전라도 출신들이 서울로 대거 이주했기 때문. 해방 이후에 서울의 중앙시장 인근에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자리를 잡은 배경에는 북한 출신 월남민들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지를 형성한 데서 찾아야 함. 따라서 70년대 이후 매스컴에 언급되는 향토음식은 도시에서 만들어진 외식의 결과라고 보아야 함. 80년대 이후 향토음식 담론에는 정부가 개입한 흔적이 많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전두환 정부가 주도한 국풍81 축제다. 각 시도 행정부서 주도로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이 선정되고, 그것을 판매하는 전문적 먹자촌이 축제의 현장인 서울 여의도에 개설됨. 지금도 지역축제에는 이런 방식의 먹자촌이 빠지지 않음. 향토음식의 먹자촌에는 고향과 어머니, 혹은 장터라는 향수가 개입되어 있음. 당시 국풍81에 관람자로 참여한 사람들은 아직 전국을 다녀보지는 못했지만, 매스컴을 통해서 확보한 지역의 명물음식을 한꺼번에 구경하고 맛볼 수 있다는 장점에 매료되었다. 이로써 향토음식이란 말에는 지역의 대표적 음식을 통해서 지역적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남. 문제는 각 지역의 세분화된 향토음식이 얼마나 존재하는가임. 적어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팔도개념에서 향토음식을 언급할 수는 있지만, 세분화된 지역적 특성을 지닌 향토음식을 내세우기는 어려웠기 때문. 결국 향토음식의 발굴 필요성이 식품학계 일부에서 제기되었고, 이에 부응하여 문화재관리국이나 지방행정부서에서 향토음식 발굴 프로젝트를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몇몇 향토음식을 제외하면 그것이 지역적 변별성을 지니는 향토음식으로 이해되는 데 매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서울의 외식업에서 지역명칭을 붙이고 등장한 음식들이 향토음식으로 부각되기 시작. 이미 일제시대부터 명성을 얻었던 평양냉면을 비롯하여 80년대 부각된 전주비빔밥, 홍탁, 춘천막국수, 마산아귀찜, 그리고 90년대 이후에 안동간고등어, 포항과메기, 안동찜닭 등과 같은 새로운 음식들이 전국적 연계망을 통해서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감. 이런 경향에는 90년대 이후 매스컴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텔레비전 방송국은 향토음식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고, 시청자들은 그들이 제공한 정보에 대단한 신뢰감을 보여주었다. 항상 새로운 음식을 찾는 대도시의 소비자들을 위해서 향토음식은 해당지역과 연결되면서 대도시에서 새로운 상품으로 소비되었다.
- 적어도 당나라 초기 이전까지 중원에서는 식사를 할 때 별도의 식탁이 없었음. 공자나 진시황도 도마와 같은 낮은 상에 식기를 두고 식사. 이때 사용한 식기는 후한 이전까지 대부분 무거운 청동기였다. 여기에 음식을 담으면 더욱 무겁고, 게다가 뜨거운 음식을 즐겨 먹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식기를 들고 식사를 하는 방법은 아예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찰기가 없는 조나 수수로 지은 밥이 주식이었기 때문에 젓가락을 사용하여 입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반비라고 불리는 전문적으로 밥을 먹는 숟가락이 필요했다. 이에 비해서 청동기나 도자기로 그릇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6~7세기 일본열도의 지배자들에게는 숟가락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천에 깔린 나무로 만든 식기는 뜨거운 밥이든, 국물이든 열기를 쉽게 전달하지 않았기에 손에 들고 먹기도 편했을 것이다. 일본열도에서 청동기 숟가락은 특별한 연회에서만 자신들이 중원의 문명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후한 때 칠기가 유행하면서 식기를 들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밥의 주재료는 여전히 조나 수수였다. 심지어 중국남방에서 주식으로 먹었던 멥쌀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인디카 계통의 남방미였기에 숟가락은 당연히 필요한 도구였다. 그러다가 당나라 중기에 들어와 오랑캐의 풍속이라고 비아냥거렸던 식탁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 더욱이 실크로드를 통해 전수받은 서아시아의 유약처리기술이 도입되면서 중원에서도 도자기가 만들어짐. 도자기로 만든 큰 대접은 많은 음식을 상에 펼쳐 놓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결국 칠기는 잠시 유행으로 멈추고, 도자기가 식기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숟가락이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청동기로 만든 숟가락은 밥을 먹는 데 쓰였다. 왜냐하면 도자기로 숟가락을 만들기 어렵고 쉽게 깨지기 때문이었다. 송나라 이후 더욱 가볍고 튼튼한 도자기가 개발되었고, 도자기로 만든 숟가락 보다는 가벼운 젓가락이 더 많이 만들어졌다. 숟가락은 이전의 습관처럼 밥을 먹을 때 여전히 필요했다. 하지만 북송에서 남송으로, 그리고 원나라로 옮겨가는 약 1백년의 짧은 시간에 왕조가 망하고 흥하면서 기름을 이용한 음식조리가 이동이나 보관에 매우 효과적이란 사실을 발견. 더욱이 기름으로 코팅한 음식은 쉽게 부패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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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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