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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4.02 음식의 역사
  2. 2016.03.30 진짜 세계사, 음식이 만든 역사

음식의 역사

역사 2016. 4. 2. 10:09

- 네안데르탈인 이후 등장한 보다 발달된 인종들은 일시적으로 온화한 기후조건 속에서 세련된 도구들을 개발할 수 있었는데, 그 도구들은 후기 구석기인들에게 이전보다 더 넒은 영역을 제공. 그들은 뼈와 뿔을 재로로 삼아 새롭고 가벼운 사냥무기들과 가시로 만든 것보다 더 나은 낚시바늘과 다가올 빙하기에 대비한 의복을 꿰매는데 사용할 바늘을 만들었다. 기원전 11000년경에 빙하가 마지막으로 물러나자, 인간, 동물, 식물은 다시 한번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인간의 기술은 그가 환경에 적응하기에 충분할 정로로 발전. 이때 이미 음식은 인류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문명의 태동기인 기원전 10000년경부터 7000년 동안 음식은 인류역사의 형성에 그 어느때보다 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빙하가 북쪽으로 물러나자 초목지대의 모습일 달라짐. 순록과 그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들은 얼음 주변에서 자라나는 이끼와 양치류를 따라 이동. 작은 동물들은 자라나기 시작하는 숲의 주변부에서 번식하기 시작. 그리고 따뜻한 바람의 영향으로 야생 곡물들이 자라나는 대초원이 중동의 여러지역에 생겨남. 이전에는 인간은 목자가 아니라 사냥꾼이었고, 식물을 재배하기 보다는 채취하는 데 그쳤었음. 그러나 빙하가 물러나고 2천년이 지나자, 식물경작과 가축사육이 시작되고, 촌락이 세워지기 시작. 경작지식은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서서히 알려짐. 이윽고  중동의 농부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경작방식이 옥토를 사막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됨.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관개시설을 개발. 이 관개시설은 비록 수원지 근처의 평지에서만 가능했지만 풍부한 수확을 가져올 수 있었고, 잉여생산물의 발생은 인류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기원전 5000년경 이후에는 촌락들이 무리지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동일한 강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공정한 물의 공급을 위해 다투기도 했고 때로는 배수로와 운하건설을 위해 협력하기도 함.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행정조직이 생겨나면서 그 중심지는 소도시, 도시로 점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들은 도시의 특징적인 조건과 구성원, 제도 등을 갖추어 나감. 이리하여 문명이 발생. 100만년전 빙하가 처음으로 도래했을 때엔 지구상에 50만명의 원인이 존재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기원전 10000년경인 신석기 혁명 직전에 호모사피엔스의 수는 300만명으로 증가. 농경을 시작한지 7000년이 지난 기원전 3000년경에는 세계인구가 1억명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 비록 많은 채소들은 고고학적 흔적들을 남기지 않으나, 렌즈콩이나 이집트콩 등 여러가지 콩이 야생형태로 중동과 중앙아메리카, 유럽일부지역에서 애용되었고, 상당수의 식물종자들이 채집되어 조미료료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음. 사람들은 겨자씨를 고기와 함께 씹어먹었고, 원시형태의 밀과 보리의 씨를 구워 다른 음식위에 뿌려 견과 같은 맛을 즐기기도 했음.
- 토기와 청동기가 출현하기 이전에 적어도 한가지 형태의 용기가 널리 사용됨. 이 용기는 방수성과 내열성이 다 있어서 불속에 넣지는 못해도 불위에 매달아 놓을 수는 있었음. 이것은 동물의 위였다. 구석기 시대에 사냥군이 사냥감을 잡은 후에 운반하기 좋게 살코기를 베어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사냥한 공로로 상하기 쉬운 부분들(심장, 간, 뇌, 안구뒤 지방, 연한 내장기관)을 갖고 잔치를 했따. 20세기 에스키모처럼 그는 그 희생물의 부분적으로 소화된 위의 내용물들을 특별한 별미로 간주했을 것이다. 조리된 음식을 선호하는 습관이 생기면서 전개된 발전과정을 추리해보면, 처음에는 동물의 밥주머니 속에서 그 내용물을 요리했고, 그 다음엔 바로 그 용기를 사용하여 다른 요리들을 하게 됨. 그 밥주머니들은 최종적 효과 면에서 오늘날의 내열냄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됨. 유목민인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도 적당히 큰 솥이 없을 때는 여전히 밥주머니에서 음식을 요리. "그들은 모든 살코기를 그 동물의 위에 집어넣고 물을 섞어, 그 동물의 뼈로 불을 지핀 모닥불 위에서 끓인다. 뼈들은 매우 잘 타며, 위는 껍질을 벗긴 고기가 전부 들어갈 만큼 넉넉함. 이런 식으로 수소나 다른 제물은 기발하게도 그 자체의 재료들로 삶을 수 있다고 헤로도토스는 기록. 18세기 까지도 그런 방법이 사용됨. 영국 탐험가 새뮤얼 헌은 베아티라는 음식이 만들기 쉽다는 것을 발견. 이것은 일종의 해기스(양의 내장을 다져 오트밀 따위와 함께 그 위속에 넣어 삶은 스코틀랜드 민속음식0인데, 혈액, 작게 토막낸 다량의 지방, 가장 연한 살코기의 일부를 그 동물의 심장 및 허파와 함께 작은 조각으로 자르거나 찢어서 위속에 넣고 불위에 매달아 굽는다. 후추나 소금 또는 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아주 맛있는 음식이다. 그런데 위에 내용물을 너무 많이 넣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 그렇지 않으면 터지는 수가 있음. 기원전 13000년 경에는 가죽 가공기술이 대단히 진보하여 가죽이 예전의 여러가지 용기를 대체하게 되었다.
-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빙하기가 물러가기 전에 인간과 순록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 동물은 고기뿐 아니라 도구로 사용되는 뼈와 불을 제공해줌. 순록은 눈이 녹아 습해진 땅에서 자라는 이끼와 양치류를 먹었다. 그러나 눈 녹은 물에 의지하는 동물들은 염분부족 때문에 정기적으로 해변이나 내륙의 지표에 노출된 암염지로 원정을 가야했다. 그러다가 순록이 사람의 오줌을 염분의 급원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 발견됨. 이를 미끼로 사람은 그의 야영장 부근까지 순록을 유인할 수 있었고, 동물들을 길들이는 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한 상호의존관계를 맺는 데 성공. 결국 순록(동쪽지역의 가젤)은 진정한 가축이 되는데는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그에 대한 경험으로 인간은 동물세계의 특정한 종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터득. 신석기 혁명 이전의 1천년 동안 한 종류의 동물이 길들어졌는데, 육식동물이고 상황에 따라 인간을 잡아먹기도 하는 이 동물은 보통은 인간의 자연적인 적으로 보였다. 이것은 아시아의 작은 늑대였따. 그러나 생후 6주 정도까지 새끼늑대는 분명히 붙임성이 있는 귀여운 짐승으로 친근한 접근에 대해 즉시 반응을 보였다. 아시아의 늑대는 기원전 11000년경부터 이미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으로 추정됨.
- 20세기의 의사이며 여행가, 앙드레 미고는 티벳 사람들이 구운 보리가루와 차를 갖고 음식을 만드는 방법에 관해 묘사. "그릇에 버터를 넣은 차를 조금 담아라. 그 위에 큼직한 트삼파 덩어리를 올려놓고 집게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저어라. 그 다음으로 손으로 반죽을 하면서 그릇을 빙글빙글 돌리면 당신이 먹을 커다란 둥근 반죽덩어리 하나가 만들어진다. 이제 차를 마시면서 그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겨라. 그 모든 과정은 고도의 손재주를 요한다. 또한 얼마만큼의 차를 갖고 얼마만큼의 트삼파를 반죽할 것인지 정확히 판단하려면 어느정도 경험이 필요하다. 이 비율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완성된 음식이 말라붙은 반죽 덩어리가 되거나 아니면 손가락에 들러붙는 곤죽상태의 반죽이 되기 십상이다. 트삼파를 만드는 과정은 손 씻는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수적 이점이 있다. 그 일을 시작할 때 손이 아무리 더럽더라도 다 마치고 나면 손들이 아주 깨끗해진다." 다소 불쾌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곡물반죽은 선사시대의 획기적 발견이다. 이는 그 기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귀리나 밀 등 작고 비실용적인 종자로부터 많은 양의 고체상태의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필요할 때마다 액체를 첨가하여 먹을 수 있는 구운 곡식의 형태로 여행시 갖고 다닐 수 있었다. 최초의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이 발명된 것은 불 옆의 뜨거운 돌 위에 놓아둔 곡물반죽의 일부가 맛있고 바삭바삭한 빵껍질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일 것이다. 아니면 그것은 물과 날곡식가루로 만든 가루반죽을 갖고 보다 의도적인 실험을 행한 결과였을지도 모음. 어느 편이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만 후자가 보다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
- 밀가루와 물로 만든 납작한 무발효 빵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아직도 남아 있으며, 때때로 여기에 약간의 지방을 첨가하기도 하고 보통 소금으로 간을 맞춤. 멕시코의 토르티야, 스코틀랜드의 귀리빵, 인도의 차파티, 중국의 사오빙, 아메리카 인디언의 옥수수빵, 에티오피아의 인제라는 모두 신석기 시대의 빵이 그대로 전수된 것으로 사실상 그 재료의 비율이 같다. 완성된 음식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주로 기본곡식의 차이에서 비롯됨. 고대의 납작한 빵은 한가지 약점이 있다. 금방 만들어져 따뜻할 때는 맛이 좋으나, 식으면 딱딱해지고, 소화시키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는 점. 이런 이유로 보존성이 뛰어난 평범한 곡물반죽이 구운빵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열을 가하지 않고도 타작이 가능한 밀과 보리가 개발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곡물반죽을 계속해서 만들어 먹기 위해 집에서 낟알을 구웠다. 토기시대가 오기 전에 곡물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두가지 더 있었다. 그 어느방법도 곡식을 요리할 필요는 없었으며, 모두 고대 신석기 시대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첫번째 방법은 부분적으로 탈곡된 날곡식을 이용하는 것. 밀이나 보리종자들에 수분을 공급하고 발아하도록 방치해주면 여기서 콩나물과 같은 아삭하고 영양이 좋은 작은 줄기들이 올라옴. 또한 발아과정중에 건조한 날곡식 상태에서는 소화할 수 없는 종자의 전분질이 소화가능한 엿당으로 전환됨. 그러나 신석기 시대의 한 가족이 1년동안 1톤의 발아밀을 먹어치울 정도로 곡식이 준비되어 있었는지는 의심해 볼만하다. 더욱이 이 방법은 아직 방수성 용기가 귀하던 그 당시에 많은 수의 용기를 점유해버리는 불편함이 있었을 것. 그러나 발아된 곡식은 훗날 맥주의 발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 두번째 방법에는 왕겨가 제거된 완전한 형태의 굽지 않은 종자들이 필요하다는 불편함이 뒤따랐다. 통밀을 불 옆의 더운 물에 담가두면 몇시간이 지난 후에 팽윤하면서 호화되어 하얗고 투명한 고기젤리 비슷한 맛있는 음식이 됨. 이런 형태의 음식은 나중에는 인도에서 쿠바, 중국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나타남. 그 방법은 전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신석기 시대에 이미 개발되었던 것 같다. 마침내 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자 요리사의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방열, 방수용기들이 원활하게 공급되어 용기들이 쉽게 깨지더라도 손쉽게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곡식에 다량의 물을 넣고 끓이기, 소량의 물을 가하여 부글부글 삶기, 고기와 곡식으로 스튜 만들기, 납작한 빵을 더 맛있게 굽기 등 여러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하고 이전의 음식들을 개선하는일이 가능해짐. 그리고 토기가 깨지지 않는 금속용기로 대체되면서 현대적 요리가 발달하기 시작
- 양과 염소 중에서 어느것이 최초로 길들여진 동물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염소일 가능성이 높음. 염소는 자극적인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어린잎을 먹어치우는 파괴적 습성 때문에 사람에게 상당히 해를 끼침. 그러나 농토를 확장하던 초기에 경작을 위해 관목숲을 제거해야 했던 지역에서는 잎사귀를 먹어치우는 염소의 재능은 염소를 유용한 일꾼으로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양을 길들이는 첫단계가 시작된 것은 명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8920년경 이라크 자위 케미 샤니다르와 루마니아 도브루자에서였다. 혹은 카스피해 동쪽 카라쿰 같은 추운지방에서 사냥꾼들이 길들여왔을 수도 있다. 방적 및 직조기술이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양털을 갖고 따뜻한 천연펠트를 만들수도 있었는데, 이 펠트는 추운 기후에서는 매우 귀중했다. 그러나 한마리의 양은 일주일 동안 자기 체중의 100배나 되는 녹색식물을 먹어치울 수 있으므로 초창기의 목자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계속 이동해야만 했을 것임. 많은 사람들이 서쪽의 풀이 많은 이라크 초원으로 이동해갔을 것이며, 이런 유목민들로부터 자위 케미 샤니다르 같은 새로 정착된 마을의 주민들은 양치는 기술을 배웠을 것이다.
- 돼지는 세번째로 농가의 헛간에 등장하는데, 앞의 두 동물에 비해 늦은 기원전 7000년 경에야 사육이 시작됨. 그 잉유들 중 하나는 돼지가 되새김동물과는 달리 밀짚, 풀, 잎사귀 또는 잔가지들을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상 돼지 사육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음식의 일부를 그 사업에 투자하게 되면서 부터. 주된 식용동물 중에 제일 늦게 사육된 것은 소였다. 소 사육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기 때문. 오늘날 고고학적 논쟁의 결과에 의하면 터키의 차탈 휘위크와 마케도니아의 네아 니코메디아에서 기원전 6100~5800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됨. 17세기에 원형종이 사멸되기는 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뮌헨과 베를린에서 그것을 다시 만들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왔다. 성질이 사납고 몸이 날랜 현대종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신석기인들은 그 원래의 품종을 갖고 매우 애를 먹었을 것. 그러나 일단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오면 소들은 조악한 사료, 비좁은 우리, 두다리를 한데 묶는일, 그리고 황소의 경우 보통 거세에 의해 굴복되었다. 인간은 수렵시대부터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염소는 고기 외에도 윤기나는 방수성 털과 1등급 물주머니를 만들 수 있는 가죽을 제공해준다는 것, 양은 양털과 상당량의 지방을 제공하는 데 이 지방은 요리뿐 아니라 의약용 연고재료나 골풀양초와 등불을 위한 수지로도 쓸모가 있다는 것, 대지의 뻣뻣한 털은 돼지기름인 라드와 가죽만큼이나 가치 있다는 것, 암소의 가죽은 질기고 튼튼하며 배설물은 불을 피울 때 우수한 연료가 된다는 것 등. 그러나 사람이 우유와 그것의 여러가지 이용 및 보존법에 관해 알게 된 것은 이 동물들이 사육되고 난 후의 일이다. 이 새로운 식표품들은 동물 사육에서 예기치 않았던 두가지 이점 중 하나였으며, 그 후의 세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됨. 두번재 이점은 염소, 양, 거세된 수소들을 씨를 뿌리고 쟁기를 끌고 수확한 곡식을 타작하는 일에 부릴 수 있다는 것. 가축들은 사실상 인간의 최초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 이집트는 그 식량공급을 재생력이 있는 나일강물에 의해 보장받고 있었으므로 국제무역 없이도 생존가능했음. 그러나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의 토양이 거의 고갈되어 외부와의 거래없이는 생존 불가했다.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후에는 그리스도 그과 같은 처지가 되었는데, 후세 사람들의 정신에 근본적 영향을 미친 바로 그 문명에 의해 미약한 천연자원마저도 빠른 속도로 파괴되어 갔기 때문. 그래서 그리스인들도 식품의 수입에 의존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무역상인인 페니키아인을 앞세워서 지중해 연안의 대부분 국가들을 개방시켰으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에 발판을 마련했고, 동쪽으로 가서 흑해 연안의 부유한 나라들과도 접촉했다. 그들은 구리, 주석, 직물, 유리 등을 수입하고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수출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험적 사업을 자극했던 긴박한 동기는 곡물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이었다.
- 로마역시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수세기동안 밀의 공급이 행정, 경제, 국제적 정책을 수립하는 데 지배적 역할을 했다. 로마제국의 대부분 국경지방은 고대세계의 밀 재배지역들의 경계와 거의 일렬로 접해 있었다. 밀은 로마제국의 영토확장 뿐 아니라 항해사에서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동물이 1~2톤의 곡식을 100마일의 거리를 운반해 오는데 일주일이 걸렸으므로, 부피가 크고 가치가 낮은 물품이 육로를 거쳐 오면 값이 두배로 뛰었다. 그러나 1000톤 정도를 운반하는 배들이 순풍을 만난다면, 북아프리카에서 오스티아에 이르는 300마일의 여정을 4일 이내에, 알렉산드리아로부터 1000마일의 여정을 13일만에 마칠 수 있었다. 곡물을 실은 배들을 위해 특별히 부두와 등대들이 세워졌으며, 영국조차도 로마제국의 곡물창고가 되기에 먼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사회가 더욱 고도화됨에 다라 향신료에 대한 수요가 증가. 이들 동방의 사치품들은 수백년간 아시아와 무역로에서 중요한 지점들을 장악하고 있던 아랍인들의 중재로 그리스와 로마에 들어왔다. 그러나 서기 1세기 초에 로마는 이집트의 홍해연안으로부터 멀리 인도까지 항해할 수 있는 큰배들을 제작함으로써 아랍의 독점을 무너뜨리기 시작. 이 여정은 길고 위험했으므로 처음에는 향신료가 귀해서 후추값이 한때 12온스당 50파운드라는 천문학적 가격으로 폭등하기도 했음. 그러나 1세기 중엽에 유럽 선원들이 계절풍을 발견하자, 인도남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1년도 채 안걸리게 됨. 곧이어 인도 말와 지역의 무지리스항에는 외국의 아름다운 배들이 자주 나타나게 되었고, 그들은 금을 갖고와서 후추와 바꾸어 갔으며 무지리스는 그런 소동으로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로마가 인도의 향신료를 다 가져가 버리자, 인도의 상인들은 할 수 없이 공급처를 찾아 차례차례 국경을 넘어 동남아까지 진출. 그들은 카르다몸의 시장인 타콜라나 장뇌 산지인 카르푸라드비파 섬 같은 곳에서 향신료를 구해왔다. 이렇게 하여 동서간의 바닷길은 길고 험한 육로인 비단길보다 먼저 안정됨. 비단길은 로마제국의 황제들보다는 중국의 한나라 황제들의 노력에 의해 열림. 바다에서 해적들은 단지 이차적 위협에 불과했으나,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서 횡행했던 호전적 유목민들은 육로무역을 심각하게 방해. 한나라는 결국 군사력을 동원하여 그 지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고, 무역조건들이 안정됨에 따라 중국의 사치품에 대한 로마의 갈망은 지칠 줄 몰랐다. 서기 2세기 경에 사막의 대상들은 정기적으로 중국의 뤄양에서 비단, 생강, 계피, 계피잎을 싣고 출발하여 둔황, 뤄부포 호수, 카슈가르를 경유하는 수백마일의 꾸불꾸불한 여정을 돌아서 파미르 고원 북쪽에 위치한 큰 교역장소까지 왔다. 그곳 중앙아시아의 황야에서 지극히 아름다운 중국의 비단들과 색다른 향신료들이 로마가 그 대신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유리그릇, 도기, 산호구슬, 무늬를 새긴 보석, 황제를 위한 포도주 등과 무엇보다도 금, 은)과 물물교환 됨.
- 맥주양조는 처음에 특별한 빵제조법으로부터 개발된 것 같다. 신석기 시대의 가정주부는 날곡식의 싹을 틔워 소화성을 좋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현대의 양조기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함. 그 방법은 보리를 발아하도록 방치했다가 말려서 가볍께 빻아 으갠다. 그것을 더운물에 담갔다가 건더기를 걸러내고 남은 액체를 발효되도록 놓아둔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악한 맥주는 아마 걸쭉하고 혼탁했겠지만 순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발아된 곡식을 말린다음 빻은 가루로 만든 빵이 재래식 밀가루로 만든 빵보다 더 오래 보존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발아된 뒤 말린 곡식으로 특별한 반죽을 만든다음 부분적으로 굽고, 그 덩어리를 부수어 물에 담가두었다. 그 혼합물을 하루 정도 방치하여 발효시킨 후에 걸러내면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기원전 3천년기 말기에는 이집트 양조업자들이 양념과 풍미를 각각 달리한 맥주빵을 만들어냄에 따라 고객들의 선택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의 기본적 식사는 곡물반죽이나 왕겨가 많이 섞인 거친 빵, 수수로 만든 폴렌타 같은 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음료로는 주로 물을 마심. 주방설비가 조악하고 연료도 부족하여 요리법은 원시적이었음. 대다수의 로마시민이 살고 잇는 고층의 비좁은 공동주택 인술라에서는 화재위험도 높았음. 따라서 빈민들은 가능하면 요리를 하지 않고 그냥 먹었다. 대개는 빵이나 곡물반죽에 올리브, 날콩, 무화과 혹은 치즈를 곁들여 먹고, 가끔씩 구운 돼지고기 조각이나 소금에 절인 생선을 길거리에 펼쳐놓고 파는 지저분한 음식점들로부터 구입할 수 있는 수준이었음. 이에 반해 부자들의 음식은 매우 다양했고 고도로 세련되었을 것으로 여겨짐. 많은 사람들이 요리의 최종효과인 풍미에 관해 호기심을 가졌으며 그 재료들도 확실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유베날리스와 같은 겸손함을 자처하는 사람은, 무리중에서 가장 연하고 포동포동한, 몸속에 피보다는 젖이 더 많이 들어 있는 새끼염소, 약간의 야생 아스파라거스, 달걀을 넣은 어미닭과 함게 건초뭉치 속에서 꺼낸 온기가 있는 고급스런 계란들, 그리고 후식으로 먹을 포도, 배, 사과와 간소한 음식들을 흡족한 마음으로 먹었다. 부자들의 식사는 물론 이와는 매우 달랐다. 이들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식탁을 지위의 상징으로 간주. 이런 허례는 정교한 상차림의 형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미식법에 관한 표준원전인 페트로니우스의 트리말리키오의 향연에 따르면, 연회에서는 손님들에게 페가수스처럼 보이도록 날개로 장식한 산토끼, 그 뱃속에 살아 있는 개똥지빠귀들을 잔뜩 넣은 야생 암퇘지, 성게처럼 보이게 가시를 꽂츤 마르멜로 열매, 생선, 새, 거위 등의 모양으로 조각한 구운 돼지고기 등을 제공했다. 이런 종류의 상차림이 자산가를 파산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색다른 외국 식품들의 유행이 또다른 문제였다. 먹을만한 가치가 있는 창꼬치는 로마의 티베르섬과 클로아카 막시마를 연결하는 두 교각 사이로부터 손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절인 야채는 스페인에서 들여왔고, 햄은 갈리아, 포도주는 쥐라, 석류는 리비아, 굴은 영국, 그리고 향신료는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달팽이도 양식했는데, 우유를 먹여 지나치게 포동포동해서 자신의 껍질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살을 짜움. 산쥐류는 질그릇 항아리속에 가둬놓고 견과류를 먹여 사육하다 충분히 살이 찌면 식탁에 내놓음. 비둘기는 날개를 자르거나 다리를 부러뜨려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음 잘게 부순 빵을 먹여 살짜움. 사치의 극치는 비텔리우스 황제가 여신 미네르바에게 바친 요리들에서 나타남. 그 요리들에는 파르티아 국경으로부터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는 제국의 방방곡곡에서 수집된 여러가지 희귀하고 값비싼 종류의 고기들 대신 창꼬치의 간, 꿩의 뇌, 공작의 뇌, 홍학의 혀, 칠성장어 알 등 몹시 넌더리나는 혼합물이 사용됨
- 양과 소는 텐트용 펠트나 갑옷을 위한 가죽이 되든 아니면 스튜냄비를 위한 고기가 되는 간에 유목민들의 대부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육류의 대부분은 양고기였을 테지만, 몸집이 더 큰 가축이 번식이 잘 되는 경우나 말이 너무 늙어서 격렬한 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되면, 유목민들은 틀림없이 소의 허리고기나 낙타의 혹 구운 것, 또는 진한 말고기 국물 한사발을 맛있게 먹었을 것. 낙타의 구운 혹은 대단히 맛이 있었으며, 그 발을 찌거나 혹위를 기름에 살짝 튀긴 후 약한 불에 끓인 것도 훌륭한 음식이었다. 말고기는 소고기보다 여러 면에서 더 우수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빈민들의 부실한 식사를 개선하기 위해 말고기를 일반화하려는 시도가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는 여전히 말을 먹는 것이 거의 식인 풍습만큼이나 대단히 혐오감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소고기, 낙타 또는 야크의 고기보다 말고기를 더 자주 먹을 수 있었을 것. 스텝지대에서 떼지어 서식하던 가축의 종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보다 황량한 지역에는 소떼가 별로 없었을 것. 암소는 사실상 혹독한 기후에는 전혀 적응하지 못한다. 낙타는 3년간격으로 단 한마리의 새끼를 낳으므로 음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비경제적이었을 것이며, 야크도 그 진하고 풍부한 젖때문에 희생하는 것보다 살려주는 것이 유익했다.
- 유목민의 가장 특징적 식품 하나는 살아있는 동물의 혈액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몽골 군대가 먼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할 때 그들이 어떻게 식량을 조달했는지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몽골의 기병은 10일 정도의 여정에서 자주 바꿔 탈 수 있도록 각각 18마리 정도의 수말들과 암말들을 끈으로 꿰어서 데리고 다님. 그들은 장거리 여정 중에 아무런 식량도 갖고 다지니 않았으며 불을 피우지도 않았고 단지 그들의 말들에 의존하여 연명했는데, 기수들은 각자 자신의 말의 정맥에 구멍을 내어 그 혈액을 마심. 10일 간격으로 말 한마리당 0.5파인트의 피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정도면 그의 탈 것들의 효율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기수의 체력을 유지하기에도 충분. 식품으로서 혈액의 이점은 그것이 특별한 수송이나 준비 또는 요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 불은 스텝지대 사람들에게 종종 문제가 되었다. 연료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요리할 때 피운 불꽃은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눈에 띌 수 있기 때문
- 서기 1천년경 유목민들은 보다 재래식 유제품들을 이용. 말의 수가 많은 지역에서 말젖은 가장 중요한 식품으로, 유목민들의 원기왕성함에 결정적 요인이 됨. 식사에서 고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유목민들은 단백질, 지방, 비타민A와 B는 충분히 섭취했으나 비타민 C를 얻는 방법은 제한되어 있었음. 스텝지대에서는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매우 휘귀했기에 당연히 유목민들은 비타민 C 결핍증인 괴혈병으로 맥없이 죽어갔을 것이며, 적어도 그 병의 특징인 나태와 무기력 증세를 나타냈을 것임. 그러나 유목민들에게서는 이런 증상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말젖을 많이 마셨기 때문. 말젖에는 비타민C가 모유의 2배, 우유의 4배나 들어있기 때문. 만약 그들이 말젖을 매일 다량으로 마시는 습관을 들였다면, 그들은 이 급원만으로도 비타민C를 적절히 공급받을 수 있었을 것임
- 유목민들은 아마 다른 동물들의 유즙으로부터도 응유나 요구르트 형태의 많은 식품드을 만들어냈을 것. 응유제품들은 신석기 시대의 초깅 인간이 젖을 짜는 일에 관해 알게되자마다 거의 그 즉시 발견된 것으로 보임. 중동의 기후에서는 유즙을 몇시간만 방치해도 곧 굳어버림. 다른 요인들, 즉 기온과 공기중에 떠다니는 미생물들의 종류에 따라 응유가 부드러워질수도 있고 거칠어질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드러운 종류는 맛이 짜릿하고 상큼한 제품으로 개발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발칸반도의 요구르트, 스칸디나비아의 타에타, 인도의 다히 등이 대표적. 거친 응유는 걸러내어 우선 부드럽고 신선한 치즈를 만들었고, 차차 응유를 침전시키는 방법을 발견함에 따라 채소즙 등을 첨가하기도 하고 송아지의 위로 만든 용기 속에서 발효시키기도 하여 (송아지의 위에는 레닌이라는 효소가 들어 있는데 이것이 응유 촉진제인 레닛을 생성함) 각각의 특성을 지닌 여러 치즈를 만들게 되었다. 응유를 바구니틀이나 구멍을 낸 질그릇 속에 넣어 압착한 다음에 발효, 숙성하도록 놓아두면 되었다. 또다른 주요 유제품인 버터는 보다 한랭한 지역에서 개발된 듯하며, 버터를 만드는 교반 방법은 어떤 여행자가 여행중 유즙용기를 갖고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터를 가열하여 수분을 증발시킨 다음 불순물을 걸러내거나 단순히 제조과정에 소금을 첨가함으로써 그 품질유지 기간이 연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됨.
- 응유, 치즈, 요구르트, 버터는 모두 인간의 당연한 요구에 대해 잉여분의 유즙을 보존하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분유도 마찬가지. 마르코폴로는 몽골족이 어떻게 분유를 만들고 이용했는지에 대해 기술. "우선 유즙을 끓인다. 적당한 순간 표면에 뜨는 크림을 걷어내고 그것을 다른 용기에 넣어 버터를 만든다. 크림이 남아 있는 한 유즙이 건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 유즙을 햇볕에 내놓아 수분이 증발하도록 방치한다. 그들은 원정에 오를 때 이 건조된 유즙을 10파운드 쯤 갖고 가서, 매일 아침 그중 반 파운드 정도를 꺼내 호리병박처럼 생긴 작은 가죽 용기에 넣고 물을 적당량 붓는다. 그러면 그들이 말을 타고 있는 동안 용기에 들어 있는 유즙분말이 용해되어 액체상태가 되는데, 그것이 그들의 아침식사이다." 마르코 폴로가 유즙을 끓인다고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즙은 크림이 이미 표면에 떠오른 다음에는 아마도 야트막한 용기에 넣어져 비등점 보다 몇도 아래의 온도에서 천천히 가열되었을 것이다. 그때쯤에는 크림이 걸쭉하고 쭈글쭈글해져서 냉각시킨 다음 걷어내기가 쉬워졌을 것이다. 만약 몽골인들이 유즙을 말리기전에 크림을 걷어내지 못했다면, 그 분유는 매우 빠른 속도로 산패되었을 것. 걷어낸 크림으로 만든 버터는 오늘날 고형 크림이나 데번셔 크림으로 알려져 있는데, 교반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버터와 다른 것은 아니다.
- 신선한 상태나 분말 상태로 이용한 것 외에도 유목민들은 말젖을 영양가도 많고 기분을 돋우는 또다른 음료로 전환시켜 이용. 그것은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로 보통은 몽골식 명칭인 쿠미스로 잘 알려짐. 낙타젖을 발효시킨 것은 케피르, 야크젖을 발효시킨 것은 아이란이라고 함
- 유목민들은 결코 동물의 젖이 모자란 적이 없었으나, 다른 사회에서는 그 대용품이 광범위하게 이용됨. 견과류는 유즙을 대신하는 주된 급원으로, 비록 동물성 식품만큼 영양가가 풍부하지는 않았어도 매우 유용했음. 인도와 동남아에서는 코코야자를 널리 이용했는데, 덜 익은 과육에서는 맑은 천연과즙을 추출하고, 잘 익은 과육은 물에 걸러 우려냈다. 북미 인디언들은 히코리넛과 피칸으로부터 유즙같은 과즙을 추출하여 죽이나 옥수수빵을 만드는데 이용. 유럽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호두와 아몬드를 살짝 데쳐 가루로 만든 다음 물에 불린 것이 주된 유즙 대용품이었음. 그 당시 대부분의 아몬드는 이탈리아와 프로방스에서 수입되었는데, 이들 지역에 그 나무가 소개된 것은 아랍 정복에 따른 결과였다. 유즙 같은 액체는 강낭콩이나 다른 콩류에서도 추출 가능. 콩을 약한 불로 삶은 다음 약간의 조리용매로 푸레처럼 걸쭉하게 만들어 걸러내면 됨. 두유는 세계 여러지역에서 이용되었으며, 특히 중국인들이 즐겨 마셨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 달리 방목하는 가축이나 그것들이 제공하는 유제품에 거의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식량생산이 증가하자 인구도 증가. 17세기 말엽 독일의 한 지역의 인구는 로마시대에 비해 4배나 증가했던 것으로 추정됨. 몇세기가 지나면서 신형쟁기는 북유럽과 서유럽으로 전파됨. 그러나 그것은 그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훈련을 요하는 부담을 주었다. 보습쟁기를 제작하고 유지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고, 그것을 끄는데 8마리의 수소가 필요했으며, 넓고 광활한 장소에서는 멋지게 기능을 발휘했으나 협소하고 개별적인 토지에서는 부피가 너무 커서 다루기 힘들었다. 부유층은 자신들의 쟁기를 가질 수 있었으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인 사회적 조정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들은 하나의 쟁기와 한데 맨 짐승들을 공동소유하고 각자의 작은 토지들을 합병하여 공동을 일하는 너른 들판으로 만들기 시작. 이제부터 그 토지로부터 수확한 것은 그전처럼 어느 한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그가 어떤 공동기업에 기부한 것의 상대적 가치와 연관되었다.
- 성장하는 도시에서 일반 가정의 주방설비는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편리하지 않았다. 이는 구운고기 판매업자들의 증가를 가져옴. 물론 전문적으로 요리된 음식이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음. 네부카드네자르 시대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이미 음식점이 있었고, 중동의 주민들은 중세에 들어서도 여전히 집에서 요리하기보다 시장에서 고기경단, 구운 양고기, 생선튀김, 팬케이크, 아몬드가루로 만든 단것 등을 사다 먹는 것을 더 좋아했다. 사실상 요리된 음식을 사다 먹는 풍습이 유럽에 다시 소개된 것은 아랍세계로부터 스페인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으로 유럽에 화폐경제의 부활이 없었다면 별로 진척되지 않았을 것이다. 1183년 런던 어느 대중음식점에서는 "계절에 따라 굽거나 튀기거나 삶은 요리, 크고 작은 생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조잡한 고기, 부자를 우한 사슴고기 같은 맛있는 고기, 크고 작은 조류 등의 음식을 구입할 수 있었다. 만약 여행으로 지친 친구들이 갑자기 방문한다면, 그리고 신선한 식품을 사다가 요리해줄 때까지 굶주림을 참고 기다릴 수 없다면 그들은 급히 강둑으로 갔을 것이며, 거기에는 모든 음식들이 바로 먹을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12세기의 물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363년에 구운 양다리 하나를 1페니(날품팔이 농사꾼의 하루 임금)에 살 수 있었고, 같은 값으로 세마리의 비둘기를 구입할 수 있었음. 통째로 구운 돼지 한마리는 3.2페니정도였고, 구운 피리새 10마리에는 0.4페니, 손님이 자신의 수탉을 잡아 고기파이를 만들고자 한다면 반죽, 연료 및 수고의 대가로 0.6페니를 지불하면 되었다.
- 뜻밖에도 기독교 신앙이 아주 낙관적인 상인조차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염장산업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전 40일의 단식기간으로, 염장산업에 가장 유익한 기간이었다. 이대는 생선이 필수식품이었으나, 내륙에는 신선한 생선이 부족했다. 또한 1년내내 금요일마다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특히 소도시에서는 거의 사순절 기간만큼 유익했다. 심지어 16세기 중반까지도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잉글랜드 사람은 교수형이 처해지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다. 청어는 절인 생선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 14~15세기에 발트해와 북해는 이 생선으로 가득차 있었다. 한자 동맹의 상업도시들은 거의 200년간이나 발트해의 절인 생선 거래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북해연안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지들은 잉글랜드 동쪽 해안에 위치한 야머스와 스카버러, 그리고 네덜란드의 브릴이었다. 청어는 풍부하긴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산패되는 지방질이 많은 생선. 그것을 소금에 절여두고자 한다면 잡은 뒤 24시간 이내에 시작해야 함. 생선 판매시기에는 고도의 조직력이 요구되었으며, 심지어 발트해 연안에서는 수산회사들이 매일 들어오는 어획량을 인수하기 위해 늘 가까이에 대기하고 있었다. 15세기 경 북해에서는 전문적인 어부들이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획물을 처리해야 했다. 노퍽의 네덜란드 어선들은 1톤이 넘는 소금과 아주 많은 수의 통이나 통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 뿐만 아니라, 몇달 동안 5~10명의 선원들에게 양식으로 공급될 곡물과 에일, 베이컨, 소금에 절인 생선, 소고기와 버터를 싣고 초여름에 아이슬란드 근해를 향해 출항했다.
- 따뜻하고 습한 지역에서 식품을 건조시키려면 기후로부터의 보호와 무한정의 연료공급이 필요. 그러나 날씨가 무덥거나, 건조하고 바람이 부는 기후가 계속되는 지역에서는 만족스럽고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이었다. 중동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대추야쟈, 무화과, 포도는 뜨거운 모래사막에 파묻는 간단한 방법으로 건조시킴. 고기는 돌로 두드려서 육즙을 제거한 다음 햇볕에 말렸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후자의 방법을 북쪽 기후에 적용하여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와 서늘한 바람이 효과를 높여준다는 것을 알았다. 노르웨이의 스토크피스크는 내장을 제거하고 나무로 만든 선반에 수천마리식 매달아 건조시킨 대구인데, 중세 사람들의 값싸고 거의 변질되지 않는 저장식품이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요리사가 다루기에 그다지 편리한 재료는 아니었을 것이다. 14세기에 파리의 한 상인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추천했다. 10~12년 된 대구 말린 것을 요리할 때는 "한시간 동안 나무망치로 두들긴 다음 더운물에 두시간 이상 담가두고, 익힌 다음에는 잘 문질러서 물에 씻어낼 필요가 있다. 그다음 그것을 겨자에 찍어 먹거나 버터에 적셔 먹는다."
- 14세기 역시 대부분의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의 식사는 별도의 부류에 속했다. 그것은 여전히 호밀, 보리, 잡곡으로 만들어진 검은 빵과 수프냄비에서 떠낸 콤파나티쿰, 치즈 약간 또는 식사를 부드럽게 마무리할 응유 한 사발로 이루어졌다. 시골 대지주의 노예들이 자신의 오두막에서 사는 농부보다 훨씬 더 잘먹었다. 이따금 그들은 잡곡밥, 완두콩 푸딩, 소금에 절인 청어, 말린 대구, 치즈, 재배지에서 만든 에일뿐만 아니라 소고기나 거위고기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 요리법의 독특한 특징은 소도시의 부유한 상인이나 시골의 2류 귀족이 베푼 중류사회의 정찬모임에서 아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중세의 메뉴는 현대의 것과 거의 관련이 없었따. 사실상 정식과 메뉴에서 골라먹기(알라카르테)는 같은 것이었다. 각 코스는 모든 것이 식탁 위에 동시에 차려지는 각양각색의 요리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식사하는 사람들은 제공된 음식들 가운데서 골라 먹었다. 그 코스들은 오늘날처럼 수프-생선-고기-단 음식의 순서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으마, 우연히 어느정도 분류가 되기도 했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코스가 어느정도의 단일성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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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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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는 그대로는 장기간 보존 불가. 수확시기도 한정돼 있어 1년내내 수확할 수도 없음. 오랜 시간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온 인디오들은 감자를 장기간 보존할 방법을 고안해냄. 스페인 사람과 인디오의 혼혈인으로 페루 정복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가르실라소 데 라베가는 이 지역 사람들이 감자를 어떻게 보관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땅에 짚을 깔고 그 위에 감자를 놓는다. 이 지역의 밤은 거의 1년내내 몸이 얼어붙을 만큼 추워 감자가 금세 어는데 언 감자를 그냥 밖에 둔다. 이렇게 언 감자는 마치 요리를 한 것처럼 부드러워진다. 그것을 짚으로 싸서 조심스레 밟으면 감자속 에 있던 수분이 빠져나온다. 수분이 모두 빠지면 그것을 다시 햇볕에 바짝 말린다. 그러면 감자도 장기간 보존할 수 있다. 이것을 추뇨라고 한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냉동건조 보존법. 냉동건조라고 하면 근대적 느낌이 들고, 인스턴트 라면에 들어 있는 건조 야채 같은 것으리 떠오르지만, 일본에서도 옛날부터 한천,언두부, 동결 곤약 등을 이런 방법으로 만들었음. 이런 두부나 곤약은 냉동건조시키는 과정에 바람이 들면서 구멍이 생기므로 음식을 만들 때 국물이 잘 스며들어 생두부나 곤약과는 다른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음. 인트턴트 라면에 들어 있는 동결건조 감자는 그런대로 원래 맛에 가까운데, 이는 좋은 조건에서 단시간에 만들었기 때문이고, 두부와 언 두부가 다르듯이 추뇨는 가공전 감자와는 전혀 다른 음식이다. 현지 케추아어 속담에 '추뇨 없는 수프는 사랑 없는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금도 추뇨는 안데스 고지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식. 먹는 방법도 졸이거나, 수프의 건더기로 넣는 것뿐만 아니라 쪄서 치즈를 뿌리고 돌절구에 찧어 가루로 만들어 고기요리를 할 때 넣는 등 쓰임새가 매우 다양하다. 추뇨를 처음 먹어본 유럽인들 중에는 맛이나 씹는 느낌이 크로크같다고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리를 잘해서 그랬는지 맛있다는 사람도 있음. 어쨋든 스페인으로 돌아온 정복자들은 남미에서 접한 이 신기한 작물을 항해할 때 필요한 보존식품으로 여겨 약탈품과 함께 배에 실었다.
- 벨기에에서는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프리츠,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프리텐이라고 함. 모두 튀김이라는 의미로 메인요리에 곁들여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간식으로, 또는 주식대용으로 사랑받음. 프리츠를 국민음식이라고 단정하는데 저항을 느끼는 벨기에 사람이라도 푸짐한 홍합와인찜과 프리츠가 같이 나오는 요리라면 벨기에가 자부하는 요리라고 자신있게 말할 것이다. 벨기에에는 어느 동네든 반드시 프라이드 포테이토 전문점이 있고, 일반 가정에서는 시스템 키친에 프라이드 포테이토 튀김기가 포함되어 있음. 감자를 자르는 것 기계가 아닌 손으로 해야 한다는 등, 튀김온도를 처음에는 160도에서 10분, 두번째는 몇도에서 몇분이라는 둥, 벨기에 사람 나름의 철칙이 있다. 나아가 프라이드 포테이토에 곁들이는 소스도 마요네즈, 타르타르 소스, 머스터드 소스 등 여러가지 중에서 선택한다. 프라이드 포테이토는 홀랜드, 즉 지금의 네덜란드에서 탄생하여 원정지에서 이를 본 나폴레용이 프랑스로 가져갔고, 이윽고 미국에 전해졌다는 설이 있음. 하지만 현재는 벨기에세서 생선튀김 대용식으로 프라이드 포테이토가 탄생했다는 설이 유력. 18세기말 무렵, 어느 여행자가 남긴 기록에는 가잉 얼어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자 생산을 튀기듯 감자를 썰어 튀겨먹었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프렌치 프라이라고 하는 이유는 정확하지 않음. 프랑스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일수도 있고, 미국에서 프랑스어를 하는 벨기에계 이민자를 프랑스인으로 착각했을수도 있다.
- 18세기 아일랜드 농민은 1년 중 10개월을 감자와 우유로, 남은 2개월은 감자와 소금으로  살아갔다고 한다. 하루에 먹는 감자는 어른 한명당 10~14파운드로, 6킬로그램 정도. 이처럼 식량을 한가지 식품에만 의지하면, 만에 하나 그 식품이 손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당시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1845년 아일랜드 감자밭에 입고병이라는 전염병이 엄습. 그 뒤 수년간에 걸친 대기근은 기근에 익숙하다는 아일랜드 농민조차 절망적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개략적으로 100만명이 기근에 희생되었고, 100만명이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들이 간 속은 잉글랜드 외에 미국, 캐나다, 멀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였다. 이 공전의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본국인 영국 정부의 대책은 거의 없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일랜드는 예부터 영국의 속국으로 취급받아 자주 침략을 당해왔다. 특히 16세기 영국의 왕 헨리 8세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결별한 이래 영국 성공회는 아일랜드에 깊이 뿌리내린 카톨릭 교도를 거듭 탄압. 켈트족의 피를 이어받고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과 이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앵글로 색슨계 프로테스탄트 영국인의 대립적 구조는 수백년에 걸쳐 고착했던 것이다. 대기근에 대한 영국 정부의 차가운 대응은 두고두고 아일랜드인에게 깊은 원한을 샀고, 결과적으로 아일랜드가 독립하는 계기가 됨. 1922년 아일랜드가 일단 독립한 뒤에도 영국의 일부로 남겨진 북붜 얼스터에서 최근까지 테러행위를 계속해온 아일랜드공화국군은 대기근과 그뒤 계속된 민족의 비극을 배경으로 탄생한 무장혁명조직이다. 이런 북아일랜드 문제의 원인은 감자만을 단일경작했던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대기근을 계기로 세계사의 흐름이 변한 사례가 있다. 현재 미국에선느 아일랜드계 주민의 총 인구의 20%를 차지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감자기근을 피해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 당시 아일랜드 이주민은 시끄럽고 거친 술주정뱅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했지만 이윽고 그 안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나온다. 아일랜드에서 대규모로 탈출한 농민들 중에 패트릭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패트릭은 미국으로 향하는 배안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해 보스턴에 정착. 그는 비록 빈곤과 이민자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의 손자는 하버드대를 졸업하여 정재계에서 이름을 날림. 그래도 여전히 뒤에서는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지만,그의 차남 즉 패트릭으로부터 4대째가 되는 손자는 훗날 미합중국의 35대 대통령이 된다. 그가 바로 존 에프 케네디다. 케네디의 증조부는 감자기근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농민이었다.
- 아마도 유럽에서 처음으로 토마토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인 나폴리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제면기에 걸어 얇고 길게 뽑나낸 가느다란 파스타, 즉 스파게티를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개발. 지금 스파게티를 이탈리아 국민은식으로 일컫는데, 경질의 밀인 세몰리나를 원료로 만들어 씹는 맛이 있는 건조 파스타는 원래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남부 음식이었다. 그것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진데는 파스타와 토마토의 행복한 만남이 매우 큰 영향을 끼침. 파스타에 토마토 소스를 섞은 요리 나폴레티나가 언제부터 일반적이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17~18세기라고 추정하는데, 19세기 말 나폴리의 풍속을 그린 그림을 보면 마을 사람들이 거리에서 고개를 쳐들고 손을 국수를 집어 입안 가득히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 무렵 스파게티는 포장마차에서 선채로 간편하게 먹는, 말하자면 다치구이소바와 같은 것이었다. 지금처럼 파스타가 코스요리의 첫 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은 의외로 20세기 중반정도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파스타 이상으로 토마토와 관계가 깊은 음식이 바로 피자인데, 이것 역시 기원은 나폴리다. 이탈리아인이 잘 먹는 마르게리타 피자는 토마토 소스에 모차렐라가는 하얀 치즈를 올린 심플한 피자다. 갓 구운 피자 위에 생 바질 잎을 올리면 바로 이탈리아 국기의 3색과 같은 배색이 된다. 마르게리타 피자는 1889년 이탈리아 국왕의 왕비 마르게리타를 위해 나폴리 요리사가 고안해 낸 것. 마르게리타 국기의 3색을 배합한 소박한 서민요리를 매우 흡족해 하며 자신의 이름을 쓸수 있게 했다고 한다.
- 타바스코는 미국,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팔리고 있지만, 정작 지명을 따온 멕시코에서는 타바스코 소스병을 볼 수 없다. 고추를 이용한지 수천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멕시코인들은 시장에 나와 있는 것만 해도 100종이 넘는다는 수많은 고추 중에서 요리나 기호에 따라 몇가지를 선택해서 매운 정도나 향이 어울리는 살사 소스를 그때그대 만들어 쓰기 대문. 타코스나 로스트 치킨에 반드시 곁들여 나오는 살사소스에는 다진 양파나 토마토, 라임즙, 코리앤더 잎이 들어가는데, 아무리 싸구려 식당의 소스라도 병에 들어 있는 고추소스와는 전혀 다른 신선한 맛을 지님
- 마야 사람들은 거의 1년 내내 건조시켜 저장한 옥수수를 삶아서 껍질을 벗긴 뒤에 으깨어 빚어 먹었다. 지금도 옥수수를 그대로 삶아 먹기보다는 가루를 내어 반죽한 것을 얇고 넓저갛게 구운 토르티야나, 반죽에 재료를 넣고 치마키처럼 옥수수 껍질이나 바나나 잎으로 싸서 찐 타말레스로 만들어 먹는다. 옥수수는 콜럼버스가 유럽에 전한 것. 옥수수는 한랭지에서도 잘 자라고, 덥고 건조한 기후에서도 강하며, 생육이 빠르다는 것 등 여러 이점이 있음. 그런데 유럽에서는 좀처럼 널리 재배되지 않안따. 옥수수 가루에는 밀가루처럼 글루텐이 없어 부드럽고 푹신한 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 또 낯선 곡물은 이교도들이 먹는 음식으로 그리스도교도에게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긴것도 보급이 차단된 이유였음. 얼마전만 해도 유럽 사람에게 옥수수는 가축의 사료에 지나지 않았따. 그래도 이탈리아에서는 옥수수가 비교적 빨리 식용되었따. 단지 멕시코의 토르티야처럼 빵 모양으로 굽는 것이 아니고, 끓는 가루를 부어 걸쭉하게 될 때까지 저어 떡과 비슷한 폴렌타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먹음. 일본의 소바가키 같은 음식인데, 매시드 포테이토처럼 고기요리에 곁들이거나 조금씩 떼어 토마토 소스를 곁들여 먹고, 식어서 굳은 것을 다시 오븐에 넣어 굽기도 한다. 옥수수 폴렌타는 북이탈리아의 명물요리인데,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보리죽까지 거슬러 올라감. 코르시카 섬에서는 밤가루,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 폴렌타로 먹는다. 루마니아의 마마릴기,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프릿카도 소바가키 모양의 옥수수 요리임. 아프리카에서도 옥수수를 뜨거운 물로 반죽한 우갈리를 주식으로 함. 우갈리도 그 요리의 기본은 수수와 같은 잡곡으로 만든 것. 지금은 밀가루나 남미가 원산인 카사바를 이용하는 지역도 있지만, 케냐에서는 맛 좋은 옥수수로 만든 우갈리가 사랑받음.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옥수수를 가리키는 영단어 콘은 원래 곡식 일반, 혹은 그 땅에서 재배하는 주요 곡식을 말함. 즉, 영국에서 콘은 밀이고, 스코틀랜드에서는 귀리가 된다. 나아가 독일에서 콘은 호밀이다.
- 캐서린 드 메디치가 즐겼다고 하는 아티초크를 최음제로 여겼다고 했는데, 양이 아주 적으면서 값비싸고, 신기한 물건에 대해 특별한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본성임. 예부터 사과같은 과일이나 꿀, 그리고 동양에서 들여온 여러종류의 향신료, 타아가 트뤼프와 아스파라거스 같은 값비싼 채소까지 사치스런 음식에는 한결같은 에로틱한 이미지가 따라다님. 미약을 몸을 튼튼하게 지켜주는 약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며, 이에 도움이 될 만한 음식은 꽤 있을 것임. 그러나 사람들이 화제로 삼은 것은 좀더 노골적인 최음효과였다. 예를 들면 트뤼프에 관해서는 19세기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사바랭도 정설을 확인하고자 여러 방면으로 조사한 끝에 다음과 같이 조심스런 결론을 내림 '트뤼프가 결코 뚜렷한 효과를 내는 최음제는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부인들을 한층 순종적으로 만들고 남성들을 좀더 상냥하게 만든다' 숫돼지의 성 페로몬과 같은 종류의 화학물질을 포함한 트뤼프가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나, 이 정설은 고대에도 알려져 있었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검은색을 불길한 색으로 여겼지만, 르네상스 시대부터는 다시 귀하게 대접한 모양이다. 18세기에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이 왕을 위해 고안한 요리에 트뤼프가 자주 쓰인것도 왕의 정열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을까...
- 포테이토 칩은 기묘한 계기로 생겨났다. 19세기 중반, 뉴욕주 사라토가 스프링스에 있는 식당 문 레이크 로지의 요리사였던 조지 크럼은 어느날 한 손님의 불평에 심기가 불편해 있었다. 프렌치프라이가 너무 두꺼워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크럼은 감자를 평상시보다 더 얇게 썰어 튀겼지만, 그래도 손님은 만족하지 않음. 화가난 크럼은 화풀이로 감자를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포크로 찌를 수 없을만큼 바삭하게 튀겨 손님에게 내놓았다. 예상과는 반대로 그 손님은 매우 기뻐하며 접시를 비움. 크럼이 노릇하게 구운 얇은 프라이드 포테이토는 순식간에 큰 인기를 끌었고, 사라토가 칩이라는 이름으로 문 레이크 로지의 스페셜 메뉴가 됨. 그리고 20세기 전반에 감자껍질을 벗기는 기계가 등장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포테이토 칩은 전국으로 확산됨
- 포테이토 칩과 닮은 프랑스 폼수플레 역시 우연한 계기로 탄생. 1837년 파리와 생제르맹앙레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던 날, 철도회사는 손님을 레스토랑으로 초대. 그런데 기차가 늦게 도착해 요리사가 준비한 감자 프라이가 식어버림. 일행이 도착한 다음에 식은 감자를 다시 기름에 넣고 데우자 프라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 터키는 동서문명의 교차로에 위치한 덕에 다양한 문화요소를 받아들여 독특한 식문화를 형성. 터키 요리라고 하면 보통 양고기 꼬치구이 시시케밥이나,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터키인들이 경영하는 노점에서 볼 수 있는 도네르케밥이 유명한데, 꼬치구이처럼 단순한 음식만이 터키요리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음. 궁중요리의 흐름을 이어받아 온갖 정성을 들인 요리나 수많은 종류의 과자는 프랑스 요리나 중국요리와 비교할만 하다. 간 고기를 채소에 채워 넣은 요리가 많은 것이 터키요리의 특징. 고기를 피망이나 토마토, 가지에 채워 넣거나, 양배추나 포도잎에 싼 것을 모두 돌마라고 하는데 그 종류가 매우 많음. 필라프라 주로 중동에서 동쪽으로 전해진 것에 비해, 돌마나 사르마라고 부르는, 속을 채운 요리는 아랍의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그리스나 발칸반도의 동유럽 여러나라에 전해졌다. 사실 롤 캐비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터키에 있다. 도한 간 고기를 가지속에 넣지 않고, 가지와 고기를 번갈아 몇층으로 겹겹이 쌓아 굽는 무사카는 그리스 요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터키에서 발칸반도에 걸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요리. 마찬가지로 고기를 갈아서 경단처럼 빚어 구운 요리도 중동, 그리스, 동유럽에 많음.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남은 자투리로 고기를 다져서 동물의 장에 채워 넣는 요리가 보통이지만 독일의 영향이 강한 곳을 제외한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의외로 이런 음식을 볼 수 없음. 대신 미트볼 같은 요리는 각지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원래는 터키의 쾨프테라는 간 고기 요리의 총칭에서 유래. 원래 이슬람권인 터키에서는 대개 양고기를 사용하는데, 발칸의 여러나라에서는 쇠고기나 돼지고기도 사용. 터키가 발상지인 음식은 그밖에도 많이 있는데 또 하나 의외의 음식이 있다. 바로 불라리아 명물인 요구르트. 이는 터키계 유목민이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명칭도 터키어 요우르트에서 유래. 본고장인 터키에서는 샐러드나 수프 등 다양한 요리에 쓰는데, 그리스나 불가리아 등지로 이와 같은 요리가 전해짐. 요구르트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등 동방으로도 전파됨.
- 밀가루 루로 끈기를 내는 일본식 카레가 영국의 인도식 스튜를 응용한 것이라는 사실은 상식. 인도 사람들은 일본의 카레라이스를 먹어도 자기나라의 요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에는 카레라는 요리가 없다. 16~17세기 인도의 서해안을 식민지로 한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이 현지에서 항상 사용하는 향신료를 많이 넎은 수프나 끓여 졸인 국물요리를 커리라고 기록한 것이 카레의 영어 어원임. 하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이 타밀어라든지, 말라바르어로 카레라고 하는 커리는 인도나 인도 식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향신료가 잔뜩 들어간 국물요리나 졸인 요리를 총칭한다 해도 좋음. 들어가는 재료는 채소, 콩, 육류, 어패류 등으로 다양한데, 사용하는 향신료도 다양함. 매운 향신료를 의미하는 믹스 스파이스인 가람마살라가 유명한데, 인도의 남부에서는 가루로 된 것보다는 그때그때 갈아서 쓰는 경우가 많고, 가람마살라가 만능의 카레가루는 아니다. 이런 스파이시한 인도요리가 대영제국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고, 프랑스에서도 이국적 요리로 변형되었는데, 18세기에 영국의 크로스 앤 블랙웨사가 향신료를 조합한 카레가루를 상품화하면서 흔히 말하는 카레맛이 본격적으로 확산됨. 20세기 초,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에드워드 7세식이라는 요리에 카레맛이 나는 것은 당시 영국왕이 인도황제도 겸했기 때문. 일본의 카레라이스는 영국을 경유해 들어온 것이지만, 남아공 인도계 이민들이 직접 카레맛의 요리를 가져간 예도 있음. 중미의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비교적 인도계 이민이 많은 나라에서는 카레맛이 널리 퍼졌다. 예부터 중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고추에 구대륙이 원산지인 향신료가 잘 어울린 것이 이른바 카레가루가 되어 돌아온 셈
- 현재 치즈왕국이라고 하면 단연 프랑스이고, 그 다음으로 스위스나 이탈리아를 들 수 있는데, 발상지는 서아시아임.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앙아시아, 몽골의 유목민이 치즈를 발명했다고도 하지만, 지금도 몽골에서 사랑받는 이 유제품은 가열한다든지 식초를 첨가한다든지 해서 우유를 응고시킨 음식으로, 효소로 우유를 응고시켜 발효, 숙성시키는 일반적 유럽치즈와는 제법이 다르다. 아라비아에는 유명한 치즈탄생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상인이 양의 위를 말려 만든 물통에 우유를 넣고 사막을 여행하다가, 막상 마시려고 보니 안에서 나온 건 우유가 아니라 투명한 물과 흰색 덩어리였는데, 그 덩어리를 먹어보니 의외로 매우 맛있었다는 이야기다. 양의 위에는 레닌이라는 효소가 들어 있어 이것이 우유를 응고시키는데, 투명한 물은 훼이이고, 흰색 덩어리는 치즈의 원료가 되는 커드이다. 치즈는 이미 기원전 4000년부터 3000년경에 만들어진 것 같다. 사막의 상인이 치지를 발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치즈 만들기의 원점은 정말로 동물의 위 속에서 우연히 일어난 화학변화였는지도 모른다
- 이누잇의 식사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생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상식. 실제로 그들의 전통적 식생활은 사냥해 잡은 동물을 날로 먹는 비율이 매우 높음. 이것은 열을 가하면 귀중한 비타민C를 잃어버리게 되므로 채소나 과일을 먹기 어려운 환경에서 나온 습관. 사실 북극 탐험가들 대부분, 그리고 1948년 프랭클린 탐험대 129명이 전멸한 가장 큰 원인은 생고기를 먹지 않아 비타민C가 부족해져 생긴 괴혈병이 만연했기 때문. 생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스런 행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 영어의 프루트는 즐거움을 뜻하는 fructus에서 나온 말로 달콤한 향과 맛을 즐기는 먹을거리라는 의미. 이렇게 페르시아 멜론은 로마로 건너가 페르시쿰으로 불림. 로마제국의 확대와 함께 지금의 프랑슬 전해져 페슈, 그 다음 영국으로 건너가 피치가 됐다. 일상 회화 중에서 피치는 멋지다, 훌륭하다, 멋있는 여자를 표현할 때 쓰는데, 이것이 원래는 페르시아였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미국사람들은 현재의 이란에 대해 무슨 일이 있어도 멋진 나라라고 말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 중국에서는 전한 무렵부터 서아시아로부터 실크로드를 경유하여 맷돌과 함께 제분법이 전해짐. 처음에는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는데, 후한 무렵에는 가늘고 긴 끈상태, 즉 면국수가 등장. 대략 2000년 전의 일이다. 호식이라고 한 밀가루 요리는 실크로드의 기점인 장안을 중심으로 당나라 시대에 발전하여 송나라 시대에는 중국 전역에 보급됨. 당초 서쪽으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것은 가마에 구운 넓적한 발효빵과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 그것이 중국에서는 언젠가부터 찐빵 형태의 만두로 변화. 밀가루 생지를 가마에서 구운 빵 계통의 식품이 왜 중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빵의 분포는 굽는 가마, 영어로 말하면 오븐의 분포와 일치하는데, 중국인은 신석기 시대부터 증기로 찌는, 서양에는 없는 독특한 가열법을 발전시켜 왔다. 빵을 굽기 위해 가마를 설치하는 것보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찜통에서 빵 생지를 쪄서 만두로 만드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름. 나아가 이 조리법은 바오쯔나 국수 등 중국의 독자적 밀가루 요리로 대단히 많이 발전. 일본어로 면이라고 하면 당연히 가늘고 긴 것으로 생각하고, 밀가루로 만드는 우동이나 소면, 메밀국수가지 합쳐 면류라고 한다. 하지만 원래 면은 그 형태보다는 원재료가 밀가루인 것이 중요. 중국에서 면이라면 기본적으로 밀가루를 가리키고, 밀가루로 만든 식품은 모두 병이라고 총칭. 일본에서 말하는 가늘고 긴 면은 중국에서 보통 몐타오라고 함.
- 중국의 면 중에는 끓는 물에 밀가루 반죽을 칼로 잘라 던져 넣는 산시성 명물인 다오샤오몐과 같은 특이한 종류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늘고 긴 면은 일반적으로 가공법을 기준으로 하여 크게 세종류로 나뉨. 먼저 긴 막대기 모양의 반죽을 잡아 당긴 다음, 계속하여 둘로 접기를 반복하는 수타식. 한가닥을 두가닥으로, 두가닥을 네가닥으로 하는 작업을 반복하는 수타면의 대표적인 것이 라멘이다. 납은 손으로 잡아당기는 것을 의미. 다른 설도 있지만 일본 라멘의 어원은 라멘으로 보고 있다. 한편 반죽을 얇게 펴서 칼로 가늘게 썰어 만드는 칼국수도 일본인에게는 수타식 우동 등으로 친숙함. 중국어로는 이 면을 치에몐이라고 하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손으로 반복하여 접어 만드는 수타식 면과 칼로 가늘게 썬 칼국수가 중국에서 밀가루를 면으로 가공할 때 쓰는 일반적 방법인데, 스파게티는 양쪽 방식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 중국에서 가늘고 긴 면을 만드는 세번째 방법은 우무를 가공할 때 쓰는 방식과 같이 압출하는 방식. 압출식은 일본에서는 낯선 방식이지만, 녹두전분으로 만드는 당면이나 쌀가루로 만드는 비훈 등 압출식 면은 그 종류가 다양함. 한반도에서 냉면 등에 쓰는 아주 찰기가 강한 독특한 면도 메밀가루와 전분으로 만든 압출식 면이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일대에서 보통의 밀가루가 아닌 다른 재료로 면을 만들 때 쓰는 방법인데, 이탈리아 마카로니나 스파게티는 원리를 본다면 압출식 면이다.
- 손님을 냉대한다는 의미로 식은 어깨고기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손님에게 정성이 담긴 요리를 대접하는 것은 동서양, 시대를 불문하고 마찬가지다. 따뜻한 것은 따뜻할 때, 차가운 것은 차가울 때, 각각의 요리가 가장 맛있는 상태일때 대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차가운 어깨고기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없는 요리를 상징. 반가운 손님이라도 너무 오래 머무르면 식은 어깨고기를 냄으로써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넌지시 비치는 것이다. 단, 현대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cold shpulder의 shoulder는 어깨고기가 아니라, 어깨를 쳐서 넘어뜨리다. 어깨를 돌린다 등에서 사용하는 어깨의 의미와 같은 느낌으로 푸대접이라는 뜻을 나타냄. 또한 하이픈이 들어간 cold-shoulder는 냉대하다는 동사가 되기도 함
- 구운지 오래된 빵은 딱딱해서 그대로 먹기 어려움. 이것을 어떻게든 먹기 쉽게 하기 위해 뜨거운 국물이나 와인 등의 액체를 부어 불렸는데, 이것을 속라틴어로 suppa라고 했다. 프랑스어의 수페, 영어의 수프, 독어의 주페, 이탈리아어의 주파, 스페인어의 소파의 어원이 suppa다. 잔다르크는 물을 탄 와인에 적신 빵을 좋아했다고 한다. 얼마 안가서 수프라는 말은 불린 빵보다 그 빵을 불리기 위한 국물을 가리키게 됨. 그런데 18세기 이후 프랑스의 부유층은 수프라는 말이 천박하다고 하여, 대신 포타주라는 말을 쓰기 시작. 이것은 항아리를 뜻하는 속라틴어 potus가 어원. 즉 프랑스어러 포라고 부르는 항아리, 혹은 그 끓인 내용물이 포타주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걸쭉한 수프를 포타주, 맑은 장국 같은 것을 콘소메라고 하는데, 이렇게 나누어 부르는 것은 영어의 용법에 따른 것이다. 본래 프랑스어의 포타주는 스튜처럼 졸인 국물부터 콘소메처럼 맑은 포타주까지를 포함한 국물의 총칭. 또한 고기나 채소의 정수만을 추출한 고급스런 콘소메는 완벽하게 하자는 의미의 동사 consommer의 파생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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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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