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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1.08 기후의 힘
  2. 2025.01.08 경제학의 모험
  3. 2025.01.08 20250108

기후의 힘

etc 2025. 1. 8. 07:15

- 20세기 초만 해도 지리학계에서는 과거 문명의 성쇠가 대부분 기후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이 팽배했음. 이런 시각을 견지한 대표적 학자로 문명과 기후를 쓴 미국 엘스워스 헌팅턴을 들 수 있다. 이후 과거사회를 연구하는 데 환경결정론적 방식은 빠르게 인기를 잃음. 문화, 역사, 지리학자들은 인간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환경결정론적 연구가 갖는 논리적 비약을 경계. 오랜 기간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문제는 고대사회의 부침에 영향을 미친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견해가 전반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가 점차 바뀌고 있음. 기후변화가 고대사회의 성쇠를 결정했다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음. 환경 결정론적 접근이라고 터부시하기에는 무척 정교하다. 결과가 과거보다 정확해지고 다양한 종류의 고기후 프록시 자료가 생산되면서 환경결정론적 해석이 다시 힘을 얻고 있음. 과학기술이 제대로 무르익기 전, 기후의 급격한 변화가 고대사회에 준 충격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을 것임. 

- 최종빙기 최성기의 전 세계 평균기온은 산업혁명 이전과 비교할때 대략 6도 낮았던 것으로 추정됨. 전 세계평균 해수면은 현재와 비교할 때 대략 125미터 낮았음. 당시 영구적인 빙하가 지구 표면의 8%, 육상부의 25%를 덮고 있었다. 참고로 지금은 지구표면의 3%, 육상부의 11% 정도가 빙하로 덮여 있음. 빙하가 생성되려면 기온도 낮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강수량이 충분해야 함. 최성기에는 동아시아 지역도 북미나 북부유럽 못지 않게 추웠는데 빙하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베리아와 만주에 있던 강한 고기압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부족했기 때문.

- 최종빙기 최성기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호모 사피엔스는 특징적인 수렵, 채집사회를 형성. 대략 3만년 전부터 동유럽과 시베리아에 나타난 그라베티안 문화와 2만 2000년 전부터 유럽에 들어선 솔뤼트레안 문화는 최종빙기 최성기를 대표하는 구석기 문화. 그라베티안 문화는 대략 2만 2000년 전에 크게 위축되었는데, 이때는 최종빙기 최성기 중에서도 기온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지구의 빙하면적이 최대로 넓어짐. 이 추위로 인해 유럽을 주심으로 주거지수는 현저히 감소.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창의력이 더욱 빛을 발하는 존재다. 이들은 뼈바들의 머리부문에 구멍을 뚫어 바느질의 효율성을 높였다. 구멍이 뚫린 바늘은 의류제작기술을 한차원 끌어올리는 혁신이었다. 바니즐이 편리해지며 옷감을 더 튼튼하게 이을 수 있었고, 가죽과 털을 손쉽게 봉합할 수 있었다. 호모사피엔스의 끊임없는 진보는 혹독한 기후변화 속에서도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였다.

- 유럽에서 최종빙기 최성기의 후반부를 주도한 솔뤼트레안 수렵채집민들도 불리한 기후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사냥기술이다. 그들은 창던지는 방식을 혁신하면서 사냥의 효율성을 대폭 높임. 최근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활과 화살을 사용했을 가능성 또한 대두되고 있다. 이 주장이 맞다면 사냥기술의 일대 혁명이라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창, 활, 화살 등의 사냥무기 덕에 그들은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추운 기후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은 한층 높아짐.

- 토기는 최종빙기 최성기의 혹독했던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남. 당시 부족했던 먹을거리로부터 영양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섭취하기 위해서라도 찌거나 끓이는 요리행위는 수렵채집민들의 중요한 삶의 방식이었다. 토기는 불을 이용한 요리의 편의성을 한단계 높인 획기적 발명품이었음. 또한 식량을 제때 구하기 어려웠던 시기였던 만큼 여분의 식량을 보관할 저장도구도 필요했을 것. 양쯔강 이남은 벼농경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기도 함. 토기를 사용해 식량을 저장하기 시작하면서 정주문화가 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정주생활이 시작된 후에 식량 저장을 위해 토기를 활용했을 수 있다. 혹시 토기 사용이 이곳에서 벼농경이 가장 먼저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닐가.
한편 양쯔강 이북의 수렵채집민은 최성기의 추위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생존에 유리한 해안으로 꾸준히 이동한 것으로 보임. 바다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했던 해안은 최성기에도 온대삼림이 존재했고, 주변에서 어패류의 채집도 용이했기 때문에 지역 수렵채집민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 아메리카 들소가 다른 대형 포유류와 다르게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동물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과학적 추정이 가능. 반추동물이 되새김질을 하는 목적은 식물을 잘게 부수고 분해함으로써 쉽게 흡수하기 위함. 최종빙기 최성기가 끝나고 기온이 꾸준히 상승하면서 툰드라 스텝식생은 북쪽으로 이동하고 빈자리에는 숲이 자리잡았음. 먹읅리가 부족해 많은 대형 포유류가 사라졌지만 반추동물인 아메리카 들소는 예외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음. 그들은 일반적 초식동물이 소화할 수 없는 나뭇잎을 먹으며 어려운 시기를 버텨낸 것이다.
보통 지하부의 뿌리성장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는 초본류와 달리 나무들은 햇빛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에너지의 대부분을 지상부에 집중. 따라서 수목류는 초본류보다 지상부의 생체가 초식동물에 훼손되는 것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초식동물의 공격을 받더라도 초본류는 큰 지장이 없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다. 지상부가 췌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들은 여러가지 진화적 전략을 발전시킴. 그중 하나가 2차화합물을 생산하는 것ㅇ니데, 떫은맛을 내는 탄닌이 잘 알려져 있음. 초식동물은 탄닌을 섭취하는 순간 소화기능을 잃어 영양분을 잘 흡수하지 못하게 되므로 보통 나뭇잎을 먹을거리로 선호하지 않음. 대형 초식동물에게 숲의 확장은 분명 재앙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들소는 그 재앙을 용케 빠져나옴. 그들은 되새김질을 통해 나뭇잎이나 나무껍질의 탄닌을 무력화하면서 갑작스런 환경변화에도 생존.

- 중동지역과 달리 동북아에서는 농경문화가 수렵채집문화를 완전히 대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림. 이는 농경과 수렵채집이 오랜기간 함께 이루어졌음을 의미. 중국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돼지나 닭뿐만 아니라 야생동물(거북, 사슴, 멧돼지 등)의 뼈도 함께 발견되며 도토리도 많이 확인됨. 농경문화의 전파속도 또한 유럽의 경우와 비교해 느린 편이었음. 예를 들어 양쯔강 이남에서 시작된 벼농사가 동남아나 한반도로 전달되기까지 3000년 이상 걸릴 정도로 속도가 더뎠다. 동북아에서는 홀로세 후기에 들어서야 벼농경에 더 많은 비준을 두는 생계방식으로 변해갔는데, 인간의 교란으로 삼림의 훼손이 가속화됨에 따라 야생동식물 자원이 부족해진 것이 주된 이유였다.

- 8.2ka 의 기후악화는 동북아 수렵채집민이 대거 남하하는 계기로도 작용. 한반도에서는 8200년 전에 와서야 해안을 중심으로 토기가 출현하기 시작.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많이 늦은 편. 당시 한반도에 토기문화를 처음 전파한 사람들은 갑작스레 닥친 추위를 피해 남하하던 아무르강(흑룡강) 유역의 수렵채집민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해안뿐 아니라 러시아 극동지역의 해안으로도 움직임. 이후 8.2ka의 추위가 지나가고 홀로세 기후 최적기를 맞아 따뜻해지자 두 지역에서 모두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모습이 나타남. 

- 한반도 시기별 주거지수를 복원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략 5600년전에 주거지 수가 빠르게 증가한 후 한동안 그 수가 유지되다가 4800년 즈음에 급감. 홀로세 기후최적기의 풍부한 자원은 정주인구의 증가로 이어졌고, 5500년 전붙 시작된 조, 기장 위주 소규모 원시 농경의 기반이 됨. 그러나 4800년전 한반도의 홀로세 기후최적기가 끝남과 동시에 주거지수가 급감하는 모습이 나타남. 수렵채집민의 생업활동이 최적기말의 기후악화에 타격을 받은 것임. 4800년 전은 중국 북동부 랴오허 유역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던 훙산 문화가 쇠퇴한 시점이기도 해, 이때의 기후변화가 동북아 전역에 광범위한 혼란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됨.
8200년 전의 단기 한랭기와 이후 시작된 최적기의 온난화는 인간사회에 제한적 영향만을 미침. 당시 절대 인구도 많지 않았으르 뿐 아니라 수렵채집민이여전히 전 세계 사회의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 그러나 최적기 후반부로 접어들며 인구증가와 함께 곳곳에서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고대문명들이 나타나기 시작. 홀로세 후기의 기후변화는 이들 고대사회의 성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임. 물론 여전히 관련 증거가 부족하다며 이를 믿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개선된 연구방법을 통해 어느정도사실로 입증된 사례들이 늘고 있다. 

- 기후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 중간산 지대의 초지가 도대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그 과정을 여러 학자가 궁금해했다. 화전농업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소규모 화전행위로 중산간 지대에 광활한 초지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일부는 중산간에 초지가 형성된 이유를 몽골군이 여몽전쟁 승리 후 이곳에 설치한 말목장에서 찾기도 함. 몽골군이 13세기에 목장을 설치한 후 중산간 지대의 초지면적이 좀더 늘어난 것은 사실. 그러나 몽골인들이 제조두에 목마장을 설치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이곳의 초지경관이 고향 땅의 초원과 유사하다고 느꼈기 때문. 몽골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중산간지대는 제주도에서 살아가던 고대인의 목축활동 때문에 크게 교란된 상태였다. 현재 중산간지대의 독특한 초지경관은 결국 제주도의 초기농경민들이 목축의 가능성을 발견한 오름에서 비롯한 셈이다. 제주도의 오름이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 13세기초는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이 집중된 시가. 동시에 지난 1000년을 놓고 봤을 때 몽골지역에서 가장 강수량이 높은 시기이기도 했다. 초원의 생산성은 최고에 달했고, 말을 먹일 수 있는 풀은 흔했다. 풍부한 사료는 기마병을 주축으로 하는 몽골군대에 큰 힘이 되었다. 사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몽골의 정복활동은 기후악화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견해가 강했다. 가뭄에 시달리다 살아남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었는데, 최근 연구결과들은 정반대의 가설을 지지함. 반면 같은 시기 고려에서는 가뭄과 기근으로 많은 백성이 빈궁한 삶을 견뎌내야 했으며, 불안정한 정치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고려는 물리적 전력에서도 몽골에 현격하게 모자랐지만, 13세기의 가뭄은 고려에게 제대로 맞서 싸울 사기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 기후변화와 왕조교체
기후가 왕조의 성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은 자연과학자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 이웃 중국의 예를 들어보자. 08년 미국 사이언스에 중국왕조의 흥망성쇠와 기후변화가 직결되어 있다는 과감한 글이 실렸다. 저자들은 석순의 산소동위원소 분석결과를 토대로 지난 1800여년간의 동아시아 몬순기후를 복원했다. 그들은 태양활동의 변화, 중국기온의 증감, 고산빙하의 전진과 후퇴 등이 모두 연관되어 있으며 기후악화가 중국 왕조들의 멸망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 당, 원, 명 사회가 불안해지고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모든 순간에 태양활동은 저조했고 몬순은 약해 가문이 들었다는 것. 반면 몬순이 강했던 북송 초기에는 반대로 농경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인구가 급증. 

-  홀로세 중기에 접어들며 서남아를 중심으로 우르크와 같은 초창기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 이후 수많은 도시국가의 탄생과 소멸이 이어짐.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시기별로 도시의 사회변동을 유발한 내외부적 요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기후와 연관되어 있었음이 분명. 그중에서도 대략 4200년 전에 발생한 가뭄은 특히 치명적이었다. 이 시기의 가뭄은 북반구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아카드 제국, 이집트 고왕국, 인더스 계곡 문명 등 당시 주변을 호령하던 문명들 중 대다수가 비슷한 시기에 무너짐. 4200년 전의 사회격변은 기후변화가 인간사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 홀로세후기 기후변화는 대략 500년 주기로 반복되었으므로 기후변화에 따른 사회변동이 4200년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님. 그 이후로도 시간을 달리하며 전세계에서 유사한 상황들이 끊임없이 발생
4200년 전의 가뭄으로 큰 혼란을 겪은 서남아와 동지중해 지역은 1000년이 흐른 3200년 전에 다시 한번 가뭄으로 심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임. 그리스 남부 필로스만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이에 존재하던 많은 도시가 갑자기 훼손되고 버려짐. 지중해 연안지역 청동기 후기를 상징했던 거대한 궁들은 가뭄을 겪은 후 고립되고 낙후된 마을들로 대체됨. 사실 에게해와 동지중해 연안헤 산재해 있던 서남아 청동기 문명이 3200년 전 미스터리하게 소멸한 사건은 오랫동안 풀지 못한 지중해 고고학계의 수수께끼였다 주로 지진, 해적, 민란 등이 닷이 청동기 문명의 쇠락을 불러온 원인으로 간주되었으나, 최근 들어 고해상의 기후변화 프록시 자료가 다수 보고되면서 기후변화 또한 유력한 가설 가운데 하나로 대두되고 있음. 기후변화 가설을 옹호하는 측은 3000년간 이어진 대가뭄으로 기근이 발생하고 이주가 빈번해지면서 정치적, 경제적 불안이 증폭되었고, 그 결과 도시사회들이 몰락했다고 주장한다. 무척 건조한 편인 지중해 연안지역 농업생산량은 지금도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한다. 과거에는 아마도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 쇠락의 원인으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동지중해 청동기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철기시대의 도래를 부추긴 요인으로 대가뭄이 자주 언급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 지구온난화에 대한 음모론이 잦아들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짧은 기간의 날씨나 기후변화에 민감하기 때문. 예를 들어 17-18년 겨울에는 지구온난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추위가 미국, 유럽, 중국 등을 덮쳤는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17년 11월 중순부터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이듬해 2월초까지 한파가 지속됨. 1월말에는 철원 기온이 영하 25도 아래로 떨어지는 등 맹추위가 절정에 달했고 동파사고와 한랭질환 환자가 급증. 이렇게 추위를 겪게 되면 지구 온난화라는 말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이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대체로 미국인이 이러한 회의론자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14년 여론조사결과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화석연료 사용 때문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미국에서는 54%에 불과했다. 중국의 93%와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인다.

- 온난화 기세가 주춤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산화탄소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02-13년까지 연평균 기온이 거의 오르지 않았는데, 이는 지구온난화가 소설이라는 회의론자의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로 활용됨. 이 시기를 학계에서는 지구온난화 휴지기라 부름. 회의론자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휴지기 이후 14년부터 전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매년 연평균 최고기온기록을 경신하고 있음. 우리나라도 18년 엄청난 여름철 폭염을 겪음. 19-20년 겨울은 73년 우리나라에서 전국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따뜻한 겨울이었다. 회의론자의 바람과는 달리 지구온난화는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는 중

- 우리는 흔히 여러 온실기체 중 지구대기의 온실효과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기체가 이산화탄소라고 오해함. 그러나 정답은 수증기다. 맑은 날 수증기는 전체 온실효과의 60%를 책임진다. 이산화탄소 기여율 26%보다 두배 이상. 대기에 존재하는 수증기 분자수는 이산화탄소 분자의 수보다 월등히 많을 뿐 아니라 분자 한개의 효과도 수증기가 더 높음. 그런데 온실효과에 있어 수증기의 역할이 훨씬 중요한데도 주지하다시피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것은 수증기가 아니라 이산화탄소다. 
왜 그럴까? 지구 온난화로 증발량이 늘어나 대기중에 수증기가 꾸준이 증가하면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양의 피드백이 나타날 수 있다. 반면 수증기의 증가는 구름의 증가로 이어지게 마련이므로 대기의 반사도를 높이는 음의 피드백도 나타남. 그러나 대기중에 포함된 수증기의 변화량을 측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 수증기 증가가 기온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다하기 어려움. 혹여 대기중 수증기량이 증가하더라도 그 영향이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수증기가 흡수할 수 있는 파장대의 지구복사 에너지는 이미 현재 대기중에 분포하고 있는 수증기에 의해 대부분 흡수되고 있기 때문.
반면 대기의 이산화탄소량 변화와 기온간의 관계는 비교적 뚜렷한 편. 1700년대 중반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채굴하고 나무를 벌채해 태우면서 지구의 탄소순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 이전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280피피엠에 불과했다. 지금은 400피피엠을 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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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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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모험

경제 2025. 1. 8. 07:13

- 교역이 번성하면서 금융도 따라 번창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상인은 재산을 안전한 환전상 금고에 보관. 당시 상인은 환전상에게 이 계좌에서 저 계좌로 돈을 옮기도록 시켜서 빚을 갚았다. 그뿐 아니라 환전상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리하여 환전상은 자연스레 최초의 은행가가 되었다. 동시에 악독한 고리대금업자도 되었다. 한편 값비싼 화물을 싣고 위험한 바다를 건너야 하는 위험에 대비해 또 다른 분야가 발전했다. 상인이 보험을 개발한 것. 누군가에게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그 대가로, 가령 태풍으로 배가 바다에 침몰한다던지 하는 불운으로 인해 입은 손실을 보상했다.
북적이는 도시로 인해 봉건제가 흔들렸다. 농노가 땅을 떠나 도시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기 때문. 와글거리는 소리에 묻혀 전통적인 교회 가르침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밀라노의 수호성인 암브로시우스가 고리대금업자에게 죽음을 선고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밀라노 도시민이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통해 부유해지는 상황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경제활동이 점점 돈이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전통은 더욱 뒷전으로 물러났다. 수도승조차 대금업이 경제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대금업자가 돈을 돌려받지 않는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사실 아퀴나스도 빌려준 돈에 이자를 붙이는 일도 때때로 용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채권자가 돈을 빌려줄 때 포기해야만 했던 이익을 벌충하기위해서라면 이자를 물려도 괜찮았다. 점차 성직자도 고리, 즉 채무자를 망가트릴 만큼 높게 매긴 이자율과 은행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만큼 합리적으로 붙인 이자율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
11세기가 시작할 무려 교황은 상인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했ㄷ. 12세기가 끝날 즈음 교황은 호모보노라는 상인을 성인으로 추대했다. 신에게 가까이 가려면 가난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취를 감추었다. 예수는 제자에게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살던 시대의 상인은 그럴 수 있따고 믿었다.
1253년 한 이탈리아 회사에서 손으로 쓰는 통장을 개설. 거기에는 '하느님과 영리의 이름으로'라고 쓰여 있었다. 하느님의 섭리가 상업이라는 신세계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 피구가 쓴 저서는 얼마간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책을 쓰던 시기인 20년대와 30년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 어느 경제체게가 최선인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던 때였다. 그런데 피구는 더 협소한 문제를, 개개 시장이 작동하는 원리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었따.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나고 적어도 경제학자에게 커다란 문제가 하나씩 거의 정리되자, 상당수 경제학자는 자본주의가 최선의 경제체제이긴 하지만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정부개입이라는 강력한 처방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 피구는 예를 들어 페인트나 어류나 석유 등 특정 시장의 기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 몇가지를 글에서 제시. 오늘날에도 여러 경제학자가 피구의 이론을 이용해 정부가 세금이나 보조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연구하며 사회자원을 더욱 잘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 피구의 스승은 빅토리아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로 시장에 관한 기초이론을 세운 인물. 이 시장이론은 오늘날에도 여러 경제학자가 즐겨 애용. 마셜은 이 제자를 천재라 불렀다.
피구는 스승이 전개한 이론에서 한단계 더 나아감. 특히 시장이 항상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냄. 경제학자 대다수는, 심지어 자본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경제학자 조차 시장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음. 즉 이따금 시장이 경제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실패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가 커다란 재앙에 맞닥뜨리고 위기에 빠진다는 의미는 아님. 이따금 어류나 휘발유 같은 특정 시장이 실패할 때도 경제 전반이 무너지지 않았다. 피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짚어내며 후생경제학이라 알려진 경제학의 한 분야를 개척. 후생경제학은 사회에 골고루 돌아가는 이익을 살피는데, 이 이익은 사람들이 사고 팔고 일하는 행위에 대해 내리는 결정이나 기업이 생산과 고용에 대해 내리는 결정 등 모든 결정에서 비롯함. 이 내용이 규범경제학 일부를 이루며 경제학의 한 갈래가 되어 경제상황을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시장이 제 기능을 잘 해내는지 아니면 잘못해내는지 가려낼 수 있다.


- 똑같은 기업만 무수히 존재하는 완전경쟁체제처럼 극단적 상황에 맞은 이론이나, 오로지 한 기업만 존재하는 독점상황을 설명하는 이론이 세우기는 더 쉽다.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까다로움. 시장이 완전경쟁으로 내몰리거나 아니면 독점이 될 때 그 양상은 하나다.하지만 시장이 양극단 사이에 존재하면, 즉 불완전 경쟁 속에서 서로 각축을 벌이면 그 형태는 셀 수 없이 많음. 그래서 하나의 이론으로 온갖 가능성을 다 아우르기가 어렵다. 
오늘날 경제학자는 게임이론 분야를 이용하는데 이 방법으로 다양한 상황에 처한 기업행동을 면밀히 검토할 수 있다. 게임이론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특정 결과를 낳는 여러 상황을 연구한다. 이 이론은 소수 독점 행동을 연구하는데 특히 유용. 그래서 경제학자는 이 게임이론을 적용해 시장 장악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가리는 기업 사이에서 복잡하게 발생하는 상호작용을 탐색한다.

- 신흥부자는 이익배당금으로 살았으며 별다른 수고없이 재산을 물려받음. 폴리네시아 추장처럼 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여가를 즐긴다거나 명품을 산다거나 하면서 사회적 인정을 받음. 대저택을 구입하고 모피코트를 사고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으로 여행을 떠나는 행위를 베블런은 과시소비라 부름. 이것저것 사면서 자랑하는 셈이다. 이렇게 특권을 누리는 소수에게 베블런은 유한계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한계급에 속한 남자는 연미복을 입고 실크 스카프를 맴으로써 자신은 땅을 일구거나 버스를 모는 생산직 노동에 종사하지 않음을 강조. 그리하여 이런 옷차림이 농부가 입는 수수한 마 셔츠보다 더 아름답다고 여기게 됨. 하지만 베블런은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왜 부자의 에나멜 가죽 구두에서 반짝이는 광택이 빈자의 닳을대로 닳은 겉옷 소맷부리에서 반질거리는 윤기보다 더 아름다워야 하는지를.
여자는 옷찰미이 특히 비실용적이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은 손에 물을 묻혀 감자를 씻거나 창문을 닦지 않는다고 드러낼 수 있따. "우리가 끈질기게 치마에 집착하는 이유는 실제로 다음과 같다. 일단 치마가 비싸고 몸을 돌릴 때마다 거치적거려 쓸모있는 노력을 온전히 기울이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자남편을 둔 아내는 남편재력을 과시해야 했다. 극단으로 흐를 경우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 탓에 실크 드레스 가격이 오를 때조차 수요가 떨어지기는 커녕 도리어 올라갔다. 가격이 높으면 더 소수의 사람만이 살 수 있고, 이때 드레스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수단이기 때문. 그래서 더 부유한 사람이 드레스를 사고 싶어한다.

- 자본주의가 지닌 활기에는 어둠의 씨앗이 숨어 있어 언제든 이 활기가 시들어버릴 수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슘페터는 경제학자로서 보기 드문 일을 했다.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학과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에 대한 논의를 전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미래가 왜 암울한지 경제학 용어로 설명. 자본가가 생산물 가운데 이윤으로 점점 더 챙겨가고 노동자 몫이 점점 더 줄어 체제가 송두리째 무너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슘페터에게 자본주의 경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라면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태도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특히 기업이 점점 커지는 경우에 그 영향력도 비례해서 세어진다.

- 기업가가 성공하면 기업도 따라서 성장. 결국 거대기업이 출현한다. 이들은 한발 앞선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상품을 쏟아낸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종종 기업내 전문 연구부서에서 혁신을 이룰 수 있다. 예를 들어 애플에는 다양한 연구팀이 있다. 어떤 연구팀은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어떤 연구팀은 더 빠르고 가벼운 아이폰을 개발한다. 천재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속에나 있던 물건이 이제 기업가에 의해 확실한 검증을 거쳐 현실로 탄생. 경제발전은 기업정책과 위원회 회의를 통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일이 바람직하다. 새 상품 개발은 미리 구상안을 마련하여 예측이 가능하다. 문제는 너무 따분하다는 점. 회사가 거대 조직이 되어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으로 가득찬다. 슘페터가 그리던 기업가는 용감무쌍한 영웅으로 출발했더라도 도착할 즈음에는 학교를 싫어하고 숙제를 내팽개치는 싫증난 10대에 오히려 가까워짐. 넥타이를 매고 일터로 출근하고 지루한 회의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일상을 질색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삶이 무료하고 삭막하게 변하는 모습을 혐오한다. 이제 대개 사업이나 돈벌이를 불신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끝내 반자본주의 지식인이 되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거나 자본주의 비판서를 펴낸다. 이들은 하나같이 정부가 사업가로부터 경제권을 넘겨받아야 하며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슘페터 생각에 이런 경향이 30년대와 40년대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상당수 지식인이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고 정부가 경제운용에 보다 중추적 역할을 맡기 시작한 시기였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고 예견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음. 자본주의는 정부개입을 상당히 허용하면서 오늘날까지 쇠멸에 이르지 않았다. 이를 소위 혼합경제라 한다. 그럼에도 슘페터 덕분에 우리는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경제는 쉬지 않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여기서 슘페터는 마르크스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처럼 사회주의는 피할 수 없다고 주장. 슘페터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좌절한 사회 상류층, 불만 많은 지식인 때문에 최후를 맞는다. 반면 마르크스가 보기에 사회를 전복하는 힘은 불우한 노동자에게서 나온다. 마르크스가 그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실패하기 때문에 도래한다. 그런데 이런 마르크스와 달리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였으며 떠밀리다시피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추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 슘페터는 또한 케인스가 제시한 새로운 이론에 반대했다. 케인스는 30년대불어닥친 유례없는 불황과 같은 파도에 경제가 휩쓸리지 않도록 정부가 막아야 한다고 주장. 자본주의가 변화라면 종착점이란 없다. 이제 겨우 그 성과를 가늠하기 시작했을 뿐. 역사는 흐르기 마련이어서 말을 타고 소식을 전하던 전령은 어느덧 온데간데없고 대신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지 않은가. 정부에게 경제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할 때의 문제는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근시안으로 바라보고 조속히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점. 하지만 슘페터 생각에 그런 해결책은 단지 기업가 정신을 옥죄고 자본주의에 생명유지장치를 달아 잠깐 목숨을 연장해 놓은 것뿐이지 결국 숨통을 끊어놓는 짓과 다름없었다.

- 죄수의 딜레마가 경제학에서는 늘 돌연히 일어난다. 발전소에서 사용하는 터빈 발전기처럼 대형제품을 예로 들어보자. 60년대 미국 제조업을 진두지휘하던 두 회사, 제너럴일렉트릭과 웨스팅하우스는 발전기에 수지맞는 가격을 매기고 싶었다. 한 가지 방법으로는 서로 뭉쳐 발전기를 더 적게 판매하고 가격을 더 높게 부과하자고 합의하면 된다. 이때 문제는 가격이 높으면 두 회사 모두 상대회사를 속여 조금 더 낮은 가격에 발전기를 더 팔아보고자 하는 유혹을 느낀다는 점. 하지만 그리하면 가격이 곤두박질쳐서 양측 모두 이윤이 급격히 낮아지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이들 회사 사이의 균형은 두 깡패가 자백하는 모양새와 같다. 똑같은 문제에 산유국도 부딪친다. 60년대 석유 판매량을 줄여 단가를 비싸게 매기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가격이 오르면서 산유국은 석유를 더 많이 생산해 팔고 싶은 유혹을 다시 받았다. 
사업에서도 정치에서도 인생에서도 사람들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한다. 게임이론은 그 얽히고 설킨 관계에 대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언제 서로 힘을 합치고 언제 물고 뜯고 싸울까? 죄수의 딜레마에서 협력은 언제든 깨질 위험을 안고 있다.

- 어떤 게임에서는 유달리 복잡한 전략을 구사한다. 순서대로 결정을 내려야 할때, 즉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고나서 다음에 무엇을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특히 더 그렇다. 만약 상대바잉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한다면 응징을 가할 수 있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70년대 미국 양대 커피회사격인 맥스웰하우스와 폴저스는 미국시장 점유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폴저스가 동부로 시장을 확대해서 사업체 인수를 꾀했는데, 이미 동부는 맥스웰하우스가 주 공급업체로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ㄷ. 맥스웰하우스는 가격전쟁에 돌입했다. 가격을 대폭내려 폴저스를 시장에서 쫓아내려 했다. 일련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 시장에 들어오려 하면 가격을 대폭 내릴 작정을 한다. 이 때문에 상대가 아예 처음부터 시장진입을 미적미적 망설이길 바라면서. 문제는 이런 으름장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런 협박을 실천에 옮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여길 수 있다. 가격을 낮추면 그만큼 수익도 줄어들테니까. 그런데 맥스웰하우스와 폴저스의 경우는 이런 위협이 통했다. 맥스웰하우스가 보기 좋게 성공을 거두어 폴저스는 뉴욕시로 시장을 넓히려던 애초의 의욕을 접고 말았다.

- 빅셀은 정부가 완전히 이타적이며 오로지 공공선을 실현할 수 있는 정책 시행에만 관심이 있다는 생각을 낱낱이 해체했다.
뷰캐넌은 빅셀의 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학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음. 경제학자는 정부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가정. 그런데 정부는 실제로 무엇일까? 뷰캐넌의 주장에 따르면 정부는 관리나 고문이나 장관 등 사람이 모인 집단이다. 이전까지의 경제학이 지닌 문제는 이들 인격이 둘로 나뉘어 있다고 여겼다는 점이다. 품질 좋은 신발을 한 켤레 구하거나 자동차를 얼마에 팔지 계산할 때 정부관리는 합리적 경제인간처럼 행동. 즉 확고하게 자기 이익을 좇으며 득은 최대한으로 늘리고 실은 최소한으로 줄인다.
하지만 관공서로 들어서는 순간 오로지 머릿속은 국익만을 생각하고 사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기존의 경제학은 가정했다. 한 점 의혹 없이 올바르게 정책을 집행하고 책상에서 잠깐 눈 붙이는 일도 없으며 점심 한 끼 먹는데도 세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마치 이기심으로 똘똘 뭋인 경제적 인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정치적 인간이 들어선다. 이 인간은 철저하게 이타적인 인간으로 사회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따져 그대로 행동한다.
이는 모순이라고 뷰캐넌은 주장했음. 사업으로 돈을 벌려고 애쓸 때와 똑같은 태도로 정부활동을 꼼꼼히 검토해야 한다. 정치인도 정부관리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익을 좇는 사람이다. 뷰캐넌이 새로 개척한 경제학 분야를 공공선택이라고 함. 그리고 이를 가리켜 뷰캐넌은 낭만없는 정치라고 표현. 정치인은 이타적 영웅이 아니었다. 뷰캐넌에게 이는 어리석고 감상적인 생각이었다. 실제로 정치인은 지위를 지키는 데 더 혈안이 되어 있고 경제학자가 생각한 이상으로 몹시 추잡하고 매우 이기적이며 못 믿을 족속이었다.
미정부는 60년 내내 흥청망청 써댔고 뷰캐넌은 이론을 통해 이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 비대한 정무는시장이 더 원활하게 굴러가도록 도움을 주기는 커녕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정치인이나 관료와 더 관계가 깊다고 주장. 정부문제는 빅 빌 톰슨 시장이 저지른 황당하고 무분별한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회색양복을 차려입은 공무원이나 워싱턴의 존경받는 정치지도자도 못지 않게 썩었다.

- 지대추구는 소비자에게 해를 끼침. 자동차 시장이나 우산시장이 외국경쟁으로부터 보호받는다면 사람들이 자동차나 우산을 살 때 그만큼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 하지만 문제는 소비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도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이런 보호조치를 막기 위해 소비자단체를 조직하는 일에 시간을 들일만한 가치가 있는지 개개인은 결코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면 생산자는 종종 규모가 크고 눈에 띄지 않는다. 힘이 있어 정부에 압력을 넣어 특혜를 얻는다. 하지만 기업가를 탓해서는 안 된다고 뷰캐넌이 말했다. 문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정부, 이 힘을 이용해 경제에 개입해서 재선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돕는 정부에 있다.
뷰캐넌은 케인스 주의 경제학자에게도 맹공격을 퍼부었다. 이들은 경기가 침체한 시기에는 정부가 나서서 지출을 늘려 경제를 부양해야한다고 주장했음. 이 부양책을 시행하느라 정부예산이 적자로 기운다. 정부가 거두어들이는 세금보다 더 많기 때문. 하지만 케인스주의자에 따르면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유는 부양정책을 실시해 경제가 다시 원만하게 돌아가면 지출을 삭감해서 적자를 없앨 수 있기 때문.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정부지출이 유권자의 환심을 산다는 점. 정치인은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물불 안가리고 지출삭감을 피해서 유권자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지출은 늘고 또 늘어 정부적자 역시 계속 증가해 간다. 이것이바로 6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봤자 문제만 낳는다는 프리드먼의 기본적인 철학은 대처와 레이건 속에, 그 계승자들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케인스가 보기에 경제가 불안정하면 정부가 개입하여 통화량을 투입해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제 체제 내에서 지출이 충분한지, 다시 말해 수요가 충분한지 꼭 확인하라고 충고. 프리드먼은 경제를 그냥 내버려 두면 오히려 더 안정된다고 확신. 불안적, 즉 70년대 고삐풀린 물가상승과 30년대 불경기는 정부가 간섭한 결과. 시장을 그냥 숨쉬게 놔두자. 그러면 경제가 건강해지고 안정을 이룬다. 여기에 이르는 길은 경제가 수요가 아니라 공급을 제고하면 된다. 경제학자가 생각하기에 정부가 법인세를 없애고 시장규제를 풀면 기업이 자극받아 생산을 늘리고 노동자를 더 고용한다. 이런 이론을 공급중시 경제학이라 한다. 그리고 불만의 겨울에 뒤이어 수십년 동안 바로 이런 정책을 정부가 추진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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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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