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설명. 쉽게 말해 신은 세계를 설명하는 커다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에 비해 철학은 이야기를 거부함. 주인공이 없는 추상의 개념을 통해 세계를 설명
-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에리히 프롬)
- 존경이란 그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런 관계도 없다.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나'이다.
- 지금의 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려 할 때, 그 사람의 과거는 어떤 톤으로 물들게 될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 '그때 호되게 꾸짖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인사를 하는 사람. 그들은 지금의 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과거의 모든 것이 좋은 추억이 되는 것이다.
- 우리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열명이 있으면, 그 열명이 각기 다른 지금에 의해 채색된 각각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 과거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인간은 누구나 '나'라는 이야기의 편찬자이고, 그 과거는 '지금의 나'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다시 쓸 수 있다.
- 어떤 인간도 순풍에 돛 단 듯이 순탄한 인생을 살지 않는다. 누구나 슬픈 일도 겪고, 좌절도 하고, 이가 갈릴 정도로 분통 터지는 일을 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과거에 겪은 비극을 교훈이나 기억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현재까지도 그 일을 털어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이는 과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다. 그 과거를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더 가혹하게 말한다면, 비극이라는 안주에 취해 불행한 '지금'의 괴로움을 잊으려 하는 것이다.
- 설령 내가 '나쁜 그 사람'이나 '불쌍한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거 참, 힘들었겠군' 혹은 '자네는 아무 잘못도 없어'라고 동조하면 잠깐 마음은 편해질 것이다. 카운슬링 받기 잘했따. 이 사람에게 털어놓길 잘했다하고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래서 내일부터 매일이 어떻게 달라질까? 다시 상처받으면 위안받고 싶어지지 않을까? 결국 그건 의존이 아닐까? 그렇기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이다.
- 칭찬요구, 주목끌기, 그리고 권력투쟁, 전부 '나를 더 존중해달라'고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희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인간은 돌변해서 증오를 원하게 된다. 증오란 감정을 통해 나에게 주목해 달라고 생각하게 된다
- 부모나 교사에게 반항하는 것으로 권력투쟁에 나서는 아이들, 이 아이들은 반에서만큼은 영웅이 될 가능성이 있다. 권위에, 어른에 맞서는 그 용기를 칭송받으며, 하지만 복수의 단계에 돌입한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칭찬을 받은 적이 없다. 부모와 교사는 물론, 같은 반 친구들한테도 증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면서 서서히 고립된다. 그래서 더욱 증오를 받는다는 한가지 점이라도 이어가려 하는 것이다.
- 더 이상 나에게 기대하지 말라는 생각이 무능의 증명으로 이어진다. 인생에 절망하고, 자신을 마음 깊이 싫어하게 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절망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모든 과제를 회피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무능하니까 과제를 주지 마. 내게는 그걸 해결할 능력이 없어'라고 밝히는 것이다.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다. 잘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과제에 도전해서 실패할 바에야 처음부터 '잘할 리 없어'라고 포기하는 편이 속 편하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실의에 빠질 일은 없을 테니까.
- 그 아이들의 바람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내 일에 상관하지마'이다. 더 보태면 '나를 포기해'라는 뜻. 부모님과 선생님이 손을 내밀려고 할수록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무능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 외에는. 다만 무능의 증명을 시작한 아이들을 돕는 것은 전문가에게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흔히 말하는 문제행동은 대개 3단계인 권력투쟁 단계에서 그친다. 거기서 더 심해지지 않도록 아이들을 이끈다는 점에서 교육자에게 맡겨진 역할은 크다.
- 본인의 인생은, 매일의 행동은 전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줄 것. 그리고 결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예를 들어 지식과 경험)가 있으면 제공해 줄 것. 그것이 바람직한 교육자의 자세다
-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 결정을 지지해주고 도와주라. 그리고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려주되, 너무 가깝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리에서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비록 그 결정이 실패로 끝난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내 인생은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 인간에게 고립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고립된 인간은 몸의 안전뿐 아니라 마음의 안전까지도 위협받는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때문에 우리는 항상 타인과 강고한 유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는 공동체 감각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
- 타인을 구함으로써 자신을 구하고자 한다. 스스로를 일종의 구원자로 포장해서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려고 한다. 이는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한 사람이 종종 빠지는 열등 콤플렉스의 한 형태. 일반적으로 메시아 컴플렉스라 한다. 메시아, 즉 타인의 구원자가 되려는 심적 도착
- 분업에 관해 아들러는 이렇게 말함. "인간의 가치는 공동체에서 할당된 분업의 역할을 어떻게 완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치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님. 그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로 정해지는 것
- 원칙적으로 분업의 관계에서는 개개인의 능력을 중시. 예를 들어 기업에서 사원을 채용할 때도 능력이 판단 기준. 이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분업이 시작되고 나서 인물을 평가하거나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지를 따질 때에는 능력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은가'가 중요해짐. 그렇지 않으면 서로 돕기가 힘들어지지 때문. 그리고 '이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은가', '이 사람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최대요인은 그 사람의 성실함이자 일에 임하는 태도이다.
- 싸우고 헤어진 연인을 생각할 때, 한동안은 전 연인의 미운점만 떠오를 것이다. 그건 당신이 '헤어지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즉 본인의 결정에 미련이 남았다는 증거. 스스로에게 '헤어지길 잘했다'라고 타이르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으니까. 그런 단계라고 생각하라. 그런데 만약 전 연인의 좋은 면이 떠올랐다면, 그건 더 이상 일부러 싫어할 필요가 없어진, 그 사람에 대한 마음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 전부 '상대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좋아하느냐'를 묻는 것이다.
- 쌓아올리는 것이다. 빠지기만 하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 건 인생의 과제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없다. 의지력을 발판삼아 아무것도 없는 곳에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에 사랑의 과제가 어렵고 힘든 것이다.
- 아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지 못해. 우는 것, 즉 자신의 나약함을 호소함으로써 주변의 어른들을 지배하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니까. 막 태어난 아이들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혹은 성격이 제멋대로라서 우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는 '세계의 중심'으로 군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의식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무의식중에 사랑하는 것을 두려우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없이 행동에 나서고, 이쪽이 사랑을 하면 사랑을 받는 상대의 마음에도 사랑이 싹트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 사랑하는 것은 자네의 과제다. 상대가 그 사랑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는 타인의 과제다. 당신이 제어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과제를 분리하고,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것. 그것뿐이다.
- 결혼이란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 누군가와 만나서 운명을 느끼고, 그 운명에 따라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믿기'로 결심한 것일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결심이고 결단이고 약속이다" 만남의 형태는 아무래도 좋다. 진정한 사랑을 맺기로 결심하고, 두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와 마주할 수 있다면 어떤 상대와도 사랑할 수 있다.
- '편하고 싶다',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잠깐의 쾌락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행복은 얻을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오직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립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때만 공동체 감각에 도달한다
-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왔을 때 "이 사람과 만나서 함께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라고 납득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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