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가격

경제 2023. 11. 19. 17:54

- 가격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다. 가격은 인간의 삶에 너무나 김 숙이 들어와 있기에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조차 잊 는다. 가격은 모든 것의 가치를 규정하므로 우리는 가격이 어디에 붙 든 당연하게 생각한다. 가격이 나타내는 가치는 전 세계의 구매자와 판매자가 끊임없이 협상을 벌인 결과다.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거래 는 기후위기나 정치 혁명, 인구 변화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그 영향 을 가격에 '반영한다. 가격의 역할은 세상을 설명하고 몇 자리 숫자로 단순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격은 식량, 연료, 공산품, 예금, 주식, 부채가 전 세계로 움직이도록 조정하는 장치다.
가격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자연스러운 질서를 가져오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준다. 가격은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지역에 살지, 자녀를 몇 명이나 가질 수 있고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를 좌우한다. 가격이 이런 일을 워낙 자주 하다 보니 우리는 가격의 보이지 않는 힘이 일상을 결정하다시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 는다. 이것은 평범한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와 대통령, 총리, 심지어 테 러리스트와 반군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가격이 지배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문제는 그런 가격이 급변할 때다. 가격이 급격히 흔들리면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이 벌어지며, 우리가 견고하다 믿었던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가격은 급작스러운 대기근과 대규모 난민을 유발하거나 지 배 계급을 갈아엎는다. 가격은 폭동과 혁명, 전쟁을 일으키고, 왕실과 경찰국가 그리고 외세의 침략에 자금을 댄다. 가격은 우리의 빗장을 열어 괴물을 풀어놓는다.
- 식량 가격이 폭동을 유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폭동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얹은 지푸 라기 하나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는 속담처럼 모래사태를 일으키 는 것은 마지막으로 얹은 모래 한 알이지만, 이는 곧 많은 모래알이 일 찌감치 쌓여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패, 극심한 가난, 높은 실업 률, 인종 박해 등이 사회에 쌓이는 모래알들이다. 사회를 통제하는 정 권은 이 모래알들을 억눌러 안정적인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지만, 겉 으로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혼돈의 가장자리에 아슬 아슬하게 서 있는 셈이다.
- 느닷없이 튀어 오르는 식량 가격은 마지막 모래 한 알이다. 이 모래 알이 떨어지면 다른 모래알들을 쳐 제자리를 벗어나게 만들며, 점점 더 많은 모래알(더 많은 원성, 더 많은 불평불만)이 우르르 굴러떨어지면 서 작은 소란이 본격적인 사태로 번진다. 그러나 사태가 일어나는 동 안 원인이 된 모래알(식량 가격)은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기억에서 잊히 기 쉽다. 그 대신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더 깊이, 더 오랫동안 묻혀 있 던 다른 모래알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폭동이나 혁명을 볼 때 오랫 동안 쌓인 불만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그런 불만 자체가 폭포 같은 사 태를 촉발하고 시위에 불을 붙인 계기는 아니다.
- 빵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중동에서 빵은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사회계약을 떠받치는 주춧돌이다. 식민제국들이 무너졌을 때, 혁명 지도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아랍 사회주의'나 '아랍 민족주의'를 시행해 모두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보조금으로 식량 가격을 낮추고, 일자리를 보장해 누구도 배를 곯지 않도록 하겠 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계약은 권위주의적 합의의 일환이었으며, 아랍인들은 이 계약으로 자유와 경제적 안정을 맞바꾸고 '투표의 민주 주의' 대신 '빵의 민주주의를 누렸다.
그러나 빵은 먹거리로서의 빵이기도 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하루에 섭취하는 열량의 35퍼센트를 빵에서 얻는다. 이들이 먹
는 빵은 전 세계 공급망에서 조달한 밀로 만든 것이다. 중동과 북아프 리카는 여느 지역보다 많은 밀을 수입하며, 이집트는 세계 최대 밀 수 입국이다. 밀 수입 가격은 시카고, 애틀랜타, 런던의 국제원자재거래 소에서 정해진다. 이집트, 튀니지, 시리아, 알제리, 모로코 등지에서 는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데도 많은 사람이 수입의 35퍼센트에서 55퍼센트를 식비로 쓴다. 이들은 식량 가격이 조금만 높아져도 가난 과 굶주림에 빠질 수 있기에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듯 빵은 상징적인 의미와 필수적인 영양 공급원이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기에 식량 가격 상승은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한다. 
- 하이에크는 가격을 정보를 취합하는 장치로 보았다. 가격이 취합하는 정보가 가격에 마법의 힘을 부여한다. 가격은 경제를 조정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가격의 기능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기능은 국가의 계획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무 엇을 얼마나 만들어야 할지 알려주는 데 '중앙 부처에서 명령을 내리 는 관료'는 필요하지 않았다. 가격은 하이에크가 '자생적 질서'라 부른 탈중앙화된 네트워크로 조정 작용을 할 수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곧 하이에크의 생각을 더 밀고 나갔고, 가격만큼 정보를 잘 모으고 종합하는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기술관료나 정부의 규제 기관, 헤지 펀드 매니저나 슈퍼컴퓨터도 이미 가격이 반영한 정보보다 더 나은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경제학자들은 그 이유를 가격이 대중의 집단 지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라 보았다. 가격은 사람들이 각자 가진 돈으 로 투표한 결과다. 대중은 각자 삶터에서 얻은 지식을 이용하며, 이 지식을 가격에 즉각 반영한다. 반면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대중 의 삶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기에 늘 한 발짝 뒤처진다. 이 후 경제학자들은 가격의 정보 취합 기능을 '효율성'이라 칭하기 시작 했다. 가격이 인간이 고안할 수 있는 어떤 도구보다 효율적이라는 생 각은 1970년 효율적 시장 가설로 정립되었다. 머지않아 효율적 시장 가설은 한낱 '가설'을 넘어 경제학계에서 당연시하는 정설로 자리매 김했다.
- 1998년, 그린스펀이 브룩슬리 본 앞에서 가르치듯 설명한 대로 파 생상품 가격은 본래 '기초 자산 시장의 가격에 대응해야 했다. 모기 지 보험 파생상품은 실제 주택을 사고파는 현실의 부동산 사업에 관 한 정보를 종합해야 했다. 그러나 2000년 상품선물현대화법이 통과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관계가 역전되었다. 퀀트 공식은 주택 가격 이 상승하면 주택 소유자들의 부도 위험이 줄어든다고 계산했고, 이 에 따라 신용파생상품의 가격도 낮아졌다. 그러자 은행은 이를 모기 지를 더 발행해도 문제가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퀀트 공식은 주 택 시장 전체를 고려해 위험을 계산했으므로, 은행과 신용평가기관들은 AAA등급으로 평가되는 모기지 묶음에 구체적으로 어떤 모기지가 들어 있는지 알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혹은 그렇게 믿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지름길을 앞에 둔 은행들이 그 '정보'에 의문을 품을 이유가 없 었다. 은행이 버는 수익 대부분이 모기지를 발행하고 이를 유가증권 으로 묶어 연기금과 다른 은행에 판매하는 데서 나왔다. 그리고 은행 이 더 많은 돈을 빌려줄수록 주택 가격이 상승했고, 퀀트 모형은 사람 들이 모기지를 상환하지 못할 위험이 낮아진다고 평가했다. 퀀트들이 사용한 모형은 부정확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위험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시장에 모기지가 더 안전해진다는 신호 를 보냈기 때문이다. 퀀트 모형이 보낸 신호는 주택 시장을 조정해 거 품을 키우는 되먹임 고리를 만들었고, 부동산 건설업계는 호황을 맞 았다.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들었고, 마법이 현실 세계를 지배하고 재 정리했다. 모두 정보 비대칭과 기만적인 가격을 만든 잘못된 공식 덕 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 그린스펀은 보이지 않는 손에 관한 동화를 믿었다. 그는 은행이 파 생상품을 받아들인 이유는 가격 시스템의 마법 같은 힘을 활용해 금 융 위험을 이해하고 관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은행이 마법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은행의 사업 모델은 그린스펀의 상상과 사뭇 달랐다. 그 사업은 인류학자들이 기록한 멜라네시아의 화물신앙처럼 인간 사회에서 오랫동안 행해진 일종의 마법이었다. 은 행들은 마법을 받아들여 지식을 전파하는 투명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 들을 속이고 조종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 금융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금융화는 원자재 가격이 금융상품 가 격의 무리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원자재 가격은 물리 적 현실에서 떨어져 나가며, 기후나 전쟁, 신기술 등 현실에서 일어나 는 생생한 변화와의 관계가 끊어진다. 원자재의 금융화는 금융 자본 이 원자재를 하나의 '자산군'으로 취급함에 따라 여러 원자재의 가격 이 최초로 상관성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주목을 받았다. 2007년, 주택 시장이 붕괴하자 부동산에서 빠져나온 자본은 부동산과 명백히 관 련이 없는 다른 금융 자산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다. 원자재 가격은 수년째 오르고 있었으며, 먹을 음식이나 난방 연료는 누구에게나 필 요하기에 원자재는 금융 자본이 피난할 수 있는 안전한 '비상' 자산 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자본이 주택에서 원자재로 움직이자 금융화된 두 자산 사이에서 거품도 함께 '이주했다. 2007년, 식량 생산량이 계 속 늘어나는데도 식량 가격이 치솟기 시작한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실제 소비자들이 아니라 부동산 시장이 무너진 후 안전 자산을 찾던 기관투자자들이 원자재 수요'를 좌우했다.
그러나 식량과 연료는 연기금의 안전 자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처럼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은행들이 기관투자자에게 파생상품을 팔려고 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원자재 인덱스펀드를 원자재 에 손쉽게 투자할 수 있는 수단으로 소개했다. 여기서도 월가는 화물 신앙의 사업 모델을 활용했다. 파생상품은 어지러울 만큼 복잡했기에 갖가지 파생상품 거래가 연금 수급자와 대학에서 은행으로 부를 이전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 화물신앙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예 언자는 자신이 얻을 막대한 이익에 관해서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은행들은 원자재 파생상품과 공급망 투자로 어림잡아 수백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파괴(1억 명을 기근에 빠뜨리고 폭동과 혁명을 촉발한 세계 식량 위기)는 그보다 몇 배로 심각했다.
- 1980년대 중반, 하버드대학교에서 갓 종신교수직을 얻은 한 경제 학자가 이와 비슷하게 오랫동안 금융계를 어지럽힌 문제를 연구했다. 당시 가장 악명 높은 투기자였던 조지 소로스는 현실 세계의 기초 여 건을 고려하지 않고 투기 세력이 어디로 몰려드는지 알아맞히기만 해 도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로스가 말한 것은 양의 되 먹임을 만드는 추세추종 전략으로, 이 젊은 경제학자는 프리드먼과 대다수 경제학자가 장기적으로 이익을 낼 수 없다고 보았던 추세추종 전략을 분석했다. 경제학자와 그의 동료들은 소로스처럼 추세에 편승 하는 거래자의 수가 충분하다면, 실제로 꾸준한 수익을 낼 수 있음을 밝혀냈다. 이들은 많은 추세추종자가 가격을 끌어올리다 보면, 가격 의 질서가 번성과 붕괴를 반복하거나 혼돈에 빠지는 임계점에 이른다 고 보았다. 추세추종자의 존재는 로버트 메이가 말한 다이얼처럼 계의 번성붕괴 성질을 바꾸며, 추세추종자 수의 증가는 다이얼을 더 높 은 숫자에 맞추는 일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문제의 연구를 한 경 제학자는 바로 래리 서머스였다. 그는 훗날 클린턴 행정부에서 그린 스펀과 의기투합해 2000년에 함께 상품선물현대화법을 만든 인물이 기도 했다.
서머스는 투기를 제한하던 문을 열어젖히면 잠재적으로 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변화가 어떤 방향 으로 일어날지는 지배적인 투기 전략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었다. 처 음에는 원자재 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passive' 투자가 우세했다. 기관투자자들은 2004년에서 2008년 사이 원자재 인덱스펀드에 자본을 투자해 가격을 밀어 올렸고, 2008년 주택 시장이 무너지자 원자재 투 자에 더 집중해 슈퍼스파이크super-spike*를 일으켰다. 그리고 2009년 에는 추세추종자들이 금융위기의 아수라장 속에서 돈을 번 운 좋은 소수였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추세추종 펀드로 자본이 몰렸다. 서머스 가 수십 년 전의 연구에서 예측했듯 투기자들은 시장 내부에서 혼돈 을 일으키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었으며,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소란 을 거대한 조류로 증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가능성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2010년, 투기자들은 연준이 채권을 매입해 양적완화를 시행하면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이 치 솟으리라 우려했다. 그들은 다가올 인플레이션을 헤지hedge*하기 위 해 가진 돈을 원자재에 쏟아부었다. 게다가 그해 여름에는 러시아에서 대형 산불이 일어나 밀밭을 휩쓸었다. 투기자들은 전 세계 밀 공급이 줄어들 것을 예상하고 농산물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양적완화와 러시 아의 산불은 원자재 가격을 밀어 올리며 하나의 추세를 형성했다. 추 세추종 자본은 언제든 이러한 추세를 증폭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 제로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2010년 12월에는 식량가격지수가 야니 어바얌이 말한 임계점인 210을 넘어섰고, 곧 아랍의 봄이 일어났다.
- 돌이켜 보면 양적완화와 러시아의 산불이라는 두 소란은 현실 세 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양적완화는 인플레이션을 일 으키지 않았고, 전 세계에서 밀 공급이 부족해지는 일도 없었다. 오히 려 그해 미국에는 풍년이 들었다. 2008년과 마찬가지로 식량 생산량 은 여느 때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가격 시스템의 마법은 현실을 벗어 나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금융 세계로 들어갔다. 이 사실을 누구보 다 잘 아는 것은 직접 매매를 하는 투기자들이다.
"나는 경제의 기초 여건이 더 큰 힘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포지션을 세워놓고 작은 관찰자 역할만 해도 좋아요. 가격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고 싶은 마음은 없고, 다른 투기자들도 그랬으면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일을 기대하기가 힘들어 보여요. 투기자 들은 수많은 붕괴와 혼돈을 초래하고 있죠."
제리 파커의 말이다.
가격이 본래 해야 할 일은 조정이다. 가격은 정보를 종합하고 거대 한 공급망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가격 시스템의 '마법'은 세상 에 '평화와 조화'를 가져다줘야 한다. 그러나 정작 가격은 세상을 혼돈 에 빠뜨렸다. 가격이 본래 해야 할 역할과 다른 마법을 부린 결과였다.
- 가격은 화물신앙 사업과 똑같은 마법을 부렸다. 화물신앙 사업은 마 구잡이로 파괴를 벌임으로써 사람들을 속여 부를 이전한다는 사실을 숨겼다. 가격이 사용한 마법의 도구는 순식간에 증식하는 파생상품이 라는 서류였다. 세계 경제에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리라 여겨지 던 파생상품은 세 번의 폭발을 연달아 일으켰다. 2007년에는 주택에 서, 2008년과 2010년에는 식량에서 전 세계를 가난과 굶주림에 빠뜨 리는 충격파가 발생했다. 식량에서 일어난 세 번째 폭발은 결국 중동 을 혼돈의 가장자리 너머로 밀어넣었고, 공포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 자를 열었다. 하지만 이것은 10년간 이어질 혼돈의 시작에 불과했다. 훨씬 많은 폭발이 잇따를 것이며, 미로의 벽이 계속 무너져내려 새로 운 괴물들이 풀려날 것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혼돈으로 가득한 10년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 4년 전 튀니지에서 목격한 일이 모술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먼 저 폭발이 있었다. 야니어 바얌이 말한 대로 '물이 끓어오르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다음 끓어오르던 물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혼돈 에 빠졌던 물 분자들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분자들은 식으 면서 서로 결합했다. 그들은 한 덩어리의 액체로 응결되어 작은 물방 울을 이뤘다. 다만 이 분자들을 구성하는 것은 수소와 산소가 아니라 관계로 묶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사회열역학의 생생한 사례를 보고 있었다.
- '차가운 안정기에 독재자들은 모든 사회관계(사회적 자본)를 정권으 로 흡수하려 한다. 경쟁 파벌을 정부의 요직에 임명하거나 특별한 권 리를 부여해 매수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적 자본 중 일부 는 독재자의 통제를 벗어나 있기 마련이다. 재계 엘리트, 종교 단체, 전문가 협회, 노동조합, 종파 연합, 범죄 조직, 정권 내부의 파벌 등이 끈질기게 통제를 벗어난다. 갈등이 충분히 '뜨겁게 달아올라 사회가 끓어오르면, 이처럼 정권의 통제 밖에 있는 연대들이 살아남는다. 그 리고 갈등이 다시 '차갑게 식으면, 이 연대들이 새로운 정치적 동맹을 형성한다.
아랍의 봄에 들고일어난 시위자들이 엄청나게 다양했는데도 시위 이후 과거와 비슷한 정치적 갈등이 반복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튀니 지와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이 오랫동안 억압받으면서도 끈질 기게 살아남은 사회적 자본의 원천이었으며, 이들은 아랍의 봄 이후 가장 먼저 정치 세력을 조직했다. 무슬림형제단의 주적은 또 다른 사 회적 자본의 주 원천인 구정권의 잔당으로, 이들은 경찰과 군대를 제 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시리아는 종교와 인종 구성이 다양 한 덕분에 사회적 자본의 공급원들이 아사드 정권에 흡수되지 않고 전국적인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랍의 봄 이후 형성된 민병대들은 각지에 있는 사회적 자본의 공급원을 활용해 탈영병, 종 교 공동체, 범죄 조직의 조직원 등을 모집했다. 시리아에서 아사드에실러는 경제의 거품에 관한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거품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어야만 이야기가 가 격을 움직인다고 보지 않는다. 실러에 따르면 이야기는 시장의 고유 한 특성이며, 모든 시장은 늘 이야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금융 시장이 완벽하고 효율적이라 믿는 사람은 미래에 관한 이야 기가 가격을 결정한다고 흔쾌히 인정할 겁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사 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합리적이며 미래에 관한 최적의 예측을 제공한 다고 믿는다는 점이죠. 효율적 시장 가설에 따르면, 주식 시장이나 다 른 투기 시장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미래에 벌어질 일을 두고 한 투표 결과를 대변해요. 반면 나는 투기 시장을 내러티브*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시장은 분명 이야기에 반응하 지만, 그 이야기는 최적의 예측이 아니에요. 그것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이야기이며, 이런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전염되면서 시장가격에 반영됩니다. (...) 내러티브가 가진 힘은 객관적인 현실에서 나오지 않아요. 그 힘은 이야기의 되먹임과 전염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 투기자는 가격에 반영되는 모든 '정보'를 이야기의 형 태로 받아들이며, 투기자의 해석에서 자유로운 순수한 정보는 존재 하지 않는다. 그리고 투기자가 내리는 해석은 감정적이고 주관적이 다. 어떤 이야기가 매매자들 사이에서 유별나게 인기를 끌면, 그 이야 기는 단순히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을 넘어서서 자기강화적self- reinforcing인 가격 상승 장치로 변모한다.
- "투기 거품을 만드는 되먹임 고리는 이런 식으로 작동합니다. 먼저 투자자 A가 주가를 끌어올립니다. 그러면 돈을 번 A를 보고 부러워하 는 투자자 B가 가격이 오른 이유를 설명하는 논리를 찾아냅니다. 근 거가 무엇이든 B는 낙관적인 논리를 찾아내죠. B는 이 논리에 따라 거품에 투자해 가격을 다시 한번 밀어 올립니다."
실러의 설명이다. 요컨대 가격이 상승하리라는 낙관적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가격을 밀어 올리는 요인이며, 실제로는 틀린 이야기라도 가격 이 높아지면 사실로 '확정'된다. 이로써 이야기는 자기실현적 예언으 로 바뀐다.
- 베버가 말하기를, "정의 종결"은 "종교의 역사에서 특정 시기를 예언적 카리스마의 축복을 받은 시대"로 지정하는 일이었으며, 랍비 들은 이 시기를 모세부터 알렉산더대왕까지로 보았고, 로마 가톨릭에 서는 이 시기를 사도 시대로 보았다"고 했다. 이렇듯 가톨릭과 유대 교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난 일이 헤븐스 게이트에서는 고작 2년만 에 일어났다. 하지만 이들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신은 이제 당신들에게 말을 걸지 않으며, 우리에게만 말을 건다는 것이다. 베버는 영적 교리에서 이러한 공통점이 나타나는 이유는 모든 종교가 같은 사업 모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보았다. 사제와 예언자들은 평신도들에게 성스러운 지식을 전하는 대가로 돈, 식량, 토지 같은 물 질 재화를 받아 종교 관료제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급여로 쓴다. 따라 서 평신도들이 종교 지식을 직접 생산할 수 있다면, 사제들은 영적 독 점권과 함께 물질적 수입을 잃을 것이다. 사제들의 권력은 정보를 통 제하는 데서 나온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보기에 이 내러티브는 평신도에게서 물질 적부를 얻어내 경제적 생산성이 없는 사제 계급을 부양하려는 전략이 자 속임수에 불과하다. 평신도들은 '대중의 망상'에 속아 넘어간다. 그
- 두 해서웨이를 혼동한 알고리즘들은 이라크에서 아즈완과 모아야 드를 집어삼킨 전쟁에 관한 기사도 읽고 있었다. 알고리즘은 사람들 이 '이라크'와 '전쟁'이라는 단어를 눈으로 채 인식하기도 전에 둘을 연 결해 유가 상승을 예상하고 원유 선물을 매수했다. 알고리즘은 틀린 동시에 옳았다. 원유 공급이 차질을 빚으리라는 예상은 틀렸지만, 다 른 거래자들(다른 알고리즘) 역시 똑같이 판단하고 원유 선물을 매수하 리라는 예상은 옳았다.
"당시의 머리기사들을 보던 알고리즘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 어요."
킹의 설명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민감성은 혼돈계, 즉 작은 것을 크게 만드는 나비 효과의 주된 특징이다.
컴퓨터는 혼돈이나 가격을 높일 수 있는 작은 소란을 찾아 전 세계 에서 쏟아지는 머리기사들을 훑으며 사람들이 기사를 검증하기는커 녕 채 읽기도 전에 자동으로 매매한다. 어마어마한 규모로 이루어지 는 알고리즘 매매는 혼돈이 일어날 기미(가령 군대가 정유소로 접근하는 일)만 보여도 이를 현실을 뒤흔드는 가격 충격으로 부풀릴 수 있다. "오늘날 가격은 여태 본 적이 없을 만큼 심하게 요동칩니다. 걸프전이나 금융위기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요."
킹에 따르면, 가격 변동의 원인은 “원자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있다.
- 가격은 이해하려 다가갈수록 더 기이해 보였다. 본래라면 가격은 정보를 종합하고, 전 세계 공급망을 조정하며, 사람과 재화, 서비스 를 경제의 가장 생산적인 부분에 배치해야 했다. 그러나 가격은 현실 이 아니라 현실에 관한 집단적 인식, 즉 통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게임에 휘둘렸다. 이 게임에서는 숭배 집단이나 종교에서처럼 새롭게 떠오르는 통념을 재빨리, 공개적으로 받아들이면 부나 지위같은 물질적 이익을 축적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통념은 무너질 때가 많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진실과 부를 결정하는 통념은 의심할 수도 물리칠 수 없는 존재로 보일 수 있다.
- '사회주의' 베네수엘라든 '민족주의' 러시아든 '신정주의' 사우디아 라비아든 관계없이 모든 원유 수출국이 횡재한 돈을 어떻게 쓰는지는 세 욕망(돈을 빼돌리고, 지지자에게 보상을 주고, 군사력을 키우려는 욕망)과 관련이 있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가 이러한 욕망을 실현하 도록 도우며 돈을 벌지만, 금융과 부동산, 방위산업이 경제의 중심인 영국은 유달리 여기에 집중한다. 이 점에서 영국은 과거 제국의 전성 기 시절부터 외국의 부를 약탈하면서 혼돈을 조장하던 행태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방식이 과거와 다를 뿐이다. 나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 금융을 따라 오일달러를 추적하면서 산유국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돈과 뒤이은 약탈이 별개의 거래가 아니 라 부메랑처럼 돌고 도는 하나의 거래임을 알게 되었다. 앞서 우리는 금융 시장(연기금, 대학기금, 은행, 헤지펀드 등)에서 나온 자본이 어떻게 원유 선물로 흘러들어가 가격을 밀어 올리고 원유 수출국들의 계좌를 두둑이 채웠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계좌에 있던 돈은 곧 군 수업체나 투자 은행으로 들어가거나 주식 시장과 부동산을 거쳐 가까운 은행의 다른 계좌로 들어갔다. 그 돈은 뉴욕과 런던에서 출발해 리 야드, 모스크바, 카라카스를 거친 다음, 부메랑처럼 뉴욕과 런던으로 되돌아갔다. 사실상 돈은 같은 서구권 은행의 다른 계좌들 사이를 왔 다 갔다 하며 왕복 여행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디지털 공간에 서 돈이 춤추듯 움직이는 동안, 산유국들은 무기를 사고 반대 세력을 매수하는 대가로 부를 약탈당했다.
- 수르코프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선전원이 아니다. '막후 조종자, '흑막', '오즈의 마법사', '어둠의 군주' 같은 별칭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자신만의 신화를 가진 신화 제작자다. 사무실 책상에 푸틴과 래퍼 투 곽의 사진이 든 액자를 올려둔 수르코프는 크렘린의 평범한 기관원과 는 거리가 멀다. 그는 중앙에서 당의 유일한 노선을 정한다는 소련 시 절의 원칙을 무너뜨렸다. 수르코프는 갱스터랩과 초현실주의 화가,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 냈다. 그의 전략에 따르면 오늘날 진실은 파편화되었으며, 거대 서사 는 죽었다. 모든 것은 연극일 뿐이다. 이제 러시아의 새 민주주의에서 는 모든 갈등이 대본에 따라 일어날 것이었다. 수르코프는 야당을 만들고 시위 단체를 조직하고 그들이 읽을 연설문을 작성한 다음, 그들 이 정부의 통제를 받는 가짜임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서로 모순되는 음모론들이 널리 퍼진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누구도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수르코프가 사용하는 전략의 핵심이다. 그는 진실로써 사람들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무엇도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퍼뜨리려 한다. 그는 냉소와 피해망상이 팽 배한 분위기를 조장함으로써 푸틴의 통치에 진짜 위협이 될 만한 모든 저항 운동을 질식시킨다.
2013년 11월, 수르코프가 막으려 한 이상주의적 저항운동이 키이우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로서는 협력자인 야누코비 치를 권좌에 앉혀둘 필요가 있었으므로, 수르코프가 그를 돕기 위해 키이우를 드나들었다. 곧 수르코프가 꾸민 연극이 시작되었다. “동성애는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이다!"
새로운 시위대가 마이단 광장에 오랫동안 진을 치고 있던 시위대를 향해 구호를 외쳤다. 이 반대 시위대는 유럽을 지지하는 마이단 시위 가 "우크라이나를 동성애의 늪에 빠뜨릴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 그러자 때마침 광대 같은 화장을 한 친동성애, 친유럽연합 시위대가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나타났다. 이후 소셜미디어에는 그들이 가짜임 을 보여주는 증거가 올라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가짜 시위대가 페이 스북으로 모집되었으며, 옷을 차려입고 유럽연합을 사랑하는 사악한 동성애자인 척하는 대가로 150달러를 받았음을 입증하는 사진들이었 다. '동성애 논쟁'을 벌인 두 진영은 모두 가짜였다. 이것은 시위를 대 본에 따라 움직이고, 마이단 운동을 분열시키며, 저항의 분위기에 피 해망상이라는 독을 타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수르코프의 전략은 실패 로 돌아갔고, 마이단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 러시아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전 총리 대행 예고르가이다르 는 저서 <제국의 붕괴: 현대 러시아가 주는 교훈Inbeabumtepun. Yporn ASI cobpeMeHHon Poccun》에서 러시아의 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로에 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하에서든 자본주의하에서든 러시아 의 부는 광활한 시베리아에 매장된 천연가스와 석유에 달려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탈린이 점령한 동구권은 소련 제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1960년대, 스탈린의 후계자 니키타 흐루쇼프는 러시아에서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동독을 비롯한 바르 샤바조약기구의 회원국으로 천연가스와 원유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 하는 파이프라인망을 건설했다. 천연가스와 원유의 공급량과 가격을 통제하는 러시아 정부의 권한은 당근과 채찍 어느 쪽으로든 쓰일 수 있었다. 가령 폴란드에서 일어난 연대(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 운 동이 폴란드 정권을 위협하자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 국민의 불만을 달래고 다시 자신들을 따르도록 만들기 위해 천연가스 가격을 대폭 낮췄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처럼 러시아의 영향권을 벗 어나려는 이들은 국제 가격대로 천연가스를 사서 쓰는 수밖에 없었 다. 1970년대에 들어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러시아가 쓸 수 있는 회유책의 가치도 덩달아 오르고, 에너지 부족에 허덕이는 위성 국가들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은 더욱 강해졌다. 1979년에는 유가가 또 한 번 치솟았고, 소련은 제국을 확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하여 소련의 탱크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소련의 힘은 무너지기 쉬웠다. 소련에서는 수십 년에 걸친 농업 '집단화' 계획이 실패하면서 농업 부문이 붕괴했고, 원유 수익을 줄곧 농업 부문의 실패를 메꾸는 데 써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까지만 해도 제정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밀 수출국이었지만, 1960년대에는 세계 최대의 밀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원유를 팔아 번 달러로 식량을 수입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유가가 폭 락하자 에너지 제국 소련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원유를 팔아 벌어 들이던 막대한 달러 수입이 사라지면서 러시아 정부는 인민이 먹을 식 량을 수입하기 위해 서방의 은행과 정부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이제 원유와 천연가스를 쥐어짜 달러를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러시 아는 동구권 위성 국가들에 에너지 가격을 보조해줄 여유가 없었다.
1988년은 수확이 부진한 해였고, 러시아는 원유 수입을 전부 외채 를 상환하는 데 쓰고 있었다.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인 민이 굶어 죽는 일을 막기 위해 또다시 돈을 빌려야 했다. 그러자 서방 의 정부들은 소련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하려 들었다. 그들은 대출을 허용하는 대가로 소련이 무력으로 자국민을 억압하는 일을 금지할 것 을 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제 경제적 지원 이라는 당근도, 군사력이라는 채찍도 쓸 수 없게 된 러시아는 동유럽 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게다가 아무리 돈을 빌려도 날로 심각해지 는 위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식량가격을 올려야 했고, 빵 가격은 30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더는 인민을 먹여살릴 수 없게 되자 체제가 무너졌다.
1999년 집권한 푸틴은 러시아를 경제적 에너지 제국으로 재건하 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우선 전임 대통령 옐친이 사영화한 석유·천 연가스 기업의 지배권을 되찾아왔다. 때마침 상품선물현대화법이 통 과되면서 금융 기관들이 원자재 인덱스펀드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 은 덕분에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았다. 그 결과 월가에서 러시 아와 다른 산유국으로 곧장 부가 이전되었고, 러시아는 '가스 무기'를 되찾았다.
이제 푸틴은 옛 소련의 위성국가들에 다시 한번 후한 천연가스 보 조금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러시아의 영향권하에 묶어둘 수 있었다. 
-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인 가격 전쟁은 중동에서 목격한 가격 전 쟁과 달랐다. 중동에서는 높은 식량 가격이 불안과 폭동, 혁명을 촉발 했고, 여기서 괴물이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가 탄생했다. 이 괴물들은 파탄에 이른 국가들의 무질서 속에서 힘을 키웠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가격 전쟁은 정반대다. 괴물은 국가가 붕괴하면서 혼돈이 펼 쳐졌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부강해졌기 때문에 위세를 떨칠 수 있 었다. 이렇듯 가격 전쟁은 국가가 제 앞가림도 못할 만큼 약하거나 이 웃 나라에 싸움을 걸 만큼 강해질 때처럼 양극단의 상황에서 벌어진 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가격 전쟁이 발발한 배경에는 금융 투기 가 있었다. 러시아에서 금융 투기는 푸틴이라는 괴물을 가두던 우리의 자물쇠를 열었다.
- 나는 자원의 저주가 어떻게 부패, 권위주의, 군국주의 같은 정치적 동인과 무관하게 경제적 고통을 유발하는지 설명하는 연구를 찾았다. 연구에 따르면, 가장 온건한 정부가 집권한 산유국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치명적인 경제 논리가 존재한다. 그 논리의 핵심은 원자재 가격 의 급등이다.
“자원의 저주라는 개념의 기본 발상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는 시 기에 자원 수출국의 통화 가치가 크게 상승하면 국제 무역이 이뤄지 는 다른 경제 부문(식량이나 비료, 각종 공산품 등)을 국내 시장에서 생산 할 때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컬럼비아대학 교수이자 이 연구 논문의 저자 중 한 명인 제프리 삭스의 설명이다.
"통화 가치가 크게 높아지면 비료든 산업에 쓰이는 다른 원료든 필 요한 물건을 모두 수입할 수 있게 되고, 곧 이것이 국제 무역을 하는 주된 방식으로 자리 잡습니다. 석유를 수출해서 살 수 있는 다른 물건 을 전부 수입하고, 부를 국내 경제를 부양하는 데만 쓰는 겁니다. 그러 면 아마 건설이나 주택, 서비스 부문이 호황을 이루겠죠. 공산품, 식량 생산·가공 관련 제품은 모두 수입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다 원자재 호 황이 끝나면 농업, 식품 가공, 비료 등에는 교역할 수 있는 상품을 생 산하는 분야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런 분야를 유지하는 것도 수지가 안 맞는 마당에 뒤처진 분야를 개선해서 현대적 투자와 기술 수준을 따라잡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죠. 따라서 자원 수출국은 두 배로 손해를 보는 셈입니다.”
통화 가치 상승이 국내 산업을 파괴하는 현상은 1960년대 네덜란 드에서 처음 관찰되었다. 당시는 네덜란드가 주요 천연가스 수출국 으로 올라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후 이 현상에는 '네덜 란드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삭스는 베네수엘라가 처한 위기의 핵 심이 바로 네덜란드병이라고 말한다. 베네수엘라가 석유 수출로 큰 수익을 올리는 동안에는 볼리바르화의 가치가 상승했고, 각종 수입 품이 베네수엘라로 흘러들어왔다. 그사이 베네수엘라의 농업과 제 조업은 값싼 수입품과 경쟁하지 못하고 쇠퇴했다. 그러다 2014년 유 가가 급락하자 볼리바르화의 가치가 떨어지고 수입품 가격은 급등하 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농경지는 이미 황폐해졌지만, 농부들 은 다시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기계나 비료를 수입할 돈이 없었다. 베네수엘라는 결국 '두 배로 손해를 보았다. 식량 가격이 급등하면서 폭동이 일어났다.
- 차베스는 석유로 얻은 막대한 부를 사회주의 이데 올로기를 실현하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더 굳건히 장악하 는 데 사용했다. '후견주의'라 불리는 이러한 전략은 민족주의 러시아, 신정주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을 비롯한 대부분의 산유국에서 나 타난다.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거창한 수사를 한 꺼풀 벗겨내고 보 면, 각기 다른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정권들이 거의 같은 방식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견주의가 성행하는 산유국에 서는 정부가 쓸모없는 일자리를 만들어 지지자들에게 나눠주면서 공 공부문이 비대해지며, 이를 통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석유 경제로 통 합된다. 공공 부문 일자리는 충성에 대한 보상인 동시에 충성을 강요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관리자가 노동자를 감시하면서 정권에 반대하는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가가 자기 힘으로 사업을 일구는 데 성공하면, 정권은 갖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 여 그 사업을 순식간에 '국유화한다. 러시아에서는 푸틴과 정권에 유 착하는 세력들이 기업을 급습하고, 사업 규정을 위반한 일이나 사기 행위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기업을 강탈한다.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 들에서는 종종 부패를 단속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러한 재분배를 시 행한다. 가령 사우디의 왕세자 모하마드 빈 살만은 사우디의 엘리트 계층을 리츠칼튼호텔에 가두고 100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걷어 국 고에 환수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부를 재유용하는 일은 차베스가 텔 레비전에 나와 느닷없이 회사 건물로 쳐들어가서는 '몰수하시오!'라고 명령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바탕에 깔린 논리는 같다. 경제를 개인의 통제하에 두려는 것이다.
후견주의에는 돈이 많이 든다. 차베스가 처음 당선될 무렵 유가는 배럴당 8달러였다. 따라서 이때는 후견주의를 활용하는 일 자체가 불 가능했기에, 후견주의를 거부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원자재 시장의 규제가 풀리고 미국의 연기금이 원자재 지수 파생상품에 돈을 쏟아부 으면서 차베스는 후견주의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월가로부터 쏟 아진 막대한 돈은 차베스를 우리에서 풀어놓았고, 부시 행정부는 차 베스를 수차례 들쑤시며 그를 권위주의적인 괴물로 키웠다. 
- 주택 위 기는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주택은 차고 넘친다. 문제는 노숙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주택 가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노숙자들에게 빈집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회를 선택했다. 우리 사회는 '가격 시스템' 에 따라 주택을 배분한다. 그러므로 주택 위기는 실제 건물이 '절대적' 으로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정한 게임의 규칙에 따라 생긴 문제다. 식량과 기근 역시 마찬가지다.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야 센은 이 문제에 대해 통찰함으로 써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센은 현대의 기근이 런던의 주택 문제와 마찬가지로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 아님을 입증했다.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 곧바로 굶주림에 빠지는 사람은 투르카나의 뉴턴처럼 농경과 목축으로 자급자족하는 이들이다. 뉴턴 이 기르는 염소들이 아프거나 굶주리거나 도둑맞으면 뉴턴의 가족들 은 더는 염소젖을 먹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자급 자족하지 않으며, 물건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제공해 먹을 것으로 바 꾼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키베라에 사는 마르타처럼 가격에 따 라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 속에서 살아간다. 마르타에게 중요 한 것은 맬서스주의에서 말하는 식량 생산량이나 인구수가 아니라 지 역의 식량 가격과 그녀가 팔 수 있는 노동의 가격이다. 센은 20세기에 일어난 대규모 기근이 두 가격의 조화가 깨지면서 벌어진 사태였음을 밝혀냈다. 기근이 발생할 때도 식량 자체를 구할 수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노동자가 받는 임금에 비해 식량 가격이 너무 비싸졌다는 점이다. 그나마도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사람은 형 편이 나은 축이었다. 기근은 기후가 끼친 직접적인 충격 때문에 벌어 진 일이 아니었다. 기근은 우리가 시장이라 부르는 사회적 게임의 정 교한 규칙 속에서 만들어진 일이었다.
- 퀀트 펀드들은 위성자료를 근거로 거래하며 다른 펀드들도 그렇다 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위성 자료를 활용해 경쟁자들의 거래까지도 예 측할 수 있다. 위성 자료가 정말로 실제 공급과 관련 있는 설명을 제 공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이라크나 앤 해서웨이에 관한 기사를 근거로 매매하는 알고리즘과 마찬가지로 데이터가 주도 하는 자기실현적 '미인 대회' 현상이다. 이 현상을 만드는 프로그램들 은 전쟁이든 기후 충격이든 관계없이 현실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면 이를 증폭해 가격을 순식간에 끌어올린다.
“원자재 시장에서 전자 거래 플랫폼의 거래량과 이용자 수는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봐요. 전체 거래 중 75퍼센트에서 80퍼센트 정도가 알고리즘 방식의 매매 전략을 따를 겁니다.”
- 식량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분쟁, 즉 '프로그램들이 벌이는 투기 전쟁이다. <위험한 전쟁> 의 WOPR 같은 알고리즘은 디지털 세상과 현실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알고리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반격을 가하는 것만을 훈련한다. 밀과 옥수수 가격을 둘러싼 알고리 즘의 베팅은 헤지펀드들이 서로의 금고를 터는 수단일 뿐이다. 알고리즘이 수행하는 각각의 매매는 월가와 시티오브런던의 좁은 거리를 가로질러 발사된 한 발의 포격이지만, 그 포격이 일으키는 폭발은 머나먼 이국의 땅을 뒤흔든다.
헤지펀드들이 사용하는 디지털 무기는 기후 혼돈을 이용하고 증폭 한다. 세밀한 위성 자료를 보고 매매하는 알고리즘은 지극히 사소한 기후 변화에도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알고리즘 매매가 원자재 시 장을 지배한다는 말은 지구 기온이 꼭 2~4°C까지 상승하지 않더라도 세계 식량 공급에 교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알고리즘은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적은 상황이 오지 않더라도 공급에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 계기는 사소한 기후 충격으로도 충분하다. 위성이 충격을 인지 하면 위성 자료를 근거로 예측이 이루어져 알고리즘에 전달된다. 그 러면 각 알고리즘은 다른 알고리즘들도 같은 예측을 받았으리라 예상 하므로 결국 모든 알고리즘이 매매에 나설 유인이 생긴다. 이에 따라 벌어지는 디지털 전쟁은 세계 식량가격을 끌어올리며, 급격히 팽창하 는 개발도상국의 대도시들을 혼돈의 가장자리로 몰아넣는다. 수많은 이주민이 시골의 삶을 뒤흔드는 기후 분쟁을 피해 도시로 향하지만, 도시에서는 또 다른 분쟁이 그들을 기다린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이 싸우는 새로운 형태의 세계 기후 전쟁이다.
- 나는 앞서 당시의 식량 가격 상승이 어떻게 중동에서 폭동과 혁명 을 촉발했는지를 추적했다. 하지만 소말리아에서 높은 식량 가격은 다른 효과를 발휘했다. 식량 가격이 오르자 잔혹한 내전에서 굶주림 을 무기로 사용할 조건이 마련되었다. 헤지펀드와 알샤바브는 비슷한 전술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힘을 합쳐 금세기에 인류가 겪은 최악의 참사를 초래했다. 헤지펀드들은 각지의 식량 가격을 끌어올려 전세 계에 영향을 끼쳤다. 알샤바브는 소말리아의 식량 가격이 오르자 사 람들이 궁핍해진 상황을 기회로 삼아 더욱 잔혹한 일을 벌였다.
그러나 헤지펀드와 알샤바브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알샤바브 는 민간인의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반면 가격 급등을 유발한 금융 투기자들은 아무런 질책이나 비난을 받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들에게 정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 경제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커피 시장에 거품이 생겼다고 보았다. 커 피 시장에서 투기자들은 근본적인 수요 공급과 관계없이 커피 가격을 밀어 올렸다. 그러나 2018년에는 전 세계에서 커피 공급 과잉이 나타 나리라는 이야기가 퍼지며 헤지펀드들이 커피 가격을 필요 이상으로 눌렀다. 종전의 거품이 가격을 밀어 올렸다면, 이번 거품은 가격을 끌 어내렸다. 2014년에 목격한 것과 같은 역거품 현상이었다. 2014년에 도 셰일오일 호황과 사우디의 증산, 중국의 수요 감소로 원유 시장에 공급 과잉이 발생하리라는 이야기가 빠르게 퍼졌다. 이 모든 이야기 는 현실에 뿌리를 두었지만, 시장이라는 기구는 가격 변동을 완만한 조정에서 끝내지 않고 급격하고 파괴적인 충격으로 증폭했다.
- 그리하여 나비는 마침내 국경 지역의 혼돈이라는 형태로 미국에 돌 아왔다. 나비는 클린턴 행정부가 원자재 시장의 규제를 없앤 20여 년 전 여정을 시작했다. 나비의 날갯짓은 세계 구석구석까지 혼돈의 파 도를 밀어 보냈지만, 미국에 위기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 나 2018년에는 달랐다. 투기자들은 커피 가격을 끌어내림으로써 이 미 혼돈의 가장자리에 있던 과테말라가 임계점을 넘도록 몰아붙였다. 게다가 과테말라의 경제를 떠받치는 커피 산업은 기후 변화로 더 불 안정하고 취약해졌으며, 국제 커피 가격에 가해지는 작은 충격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나는 폭발이 금융 중심지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은 이유를 알기 위 해밀턴 프리드먼이 말한 시장 속 '게임의 규칙'과 '정해진 규칙을 해석 하고 집행하는 심판(들)'을 파고들었다. 알고 보니 심판들의 존재와 그 들이 내리는 해석은 규칙 자체보다 훨씬 강력했으며, 그들의 판결은 경제적 폭탄이 폭발할지, 폭발한다면 누가 그 폭발에 휘말릴지를 결 정했다. 나는 게임의 규칙이 처음 만들어진 때로 거슬러 올라가 기후 충격이 벌어진 직후인 17세기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나는 매일 새로운 소식, 전쟁과 전염병, 화재, 홍수, 절도, 살인, 학 살, 유성, 혜성, 빛의 띠, 영재, 유령, 프랑스, 독일, 튀르키예, 페르시아, 폴란드의 점령당한 마을과 포위당한 도시에 관한 일상적인 소문을 듣 는다."
영국 출신 작가 로버트 버턴은 《우울증의 해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1638년 당시의 피드, 즉 책과 팸플릿, 코란토coranto*와 입소문을 통해 매일 전해지는 "방대한 혼란"을 묘사한다. 버턴 역시 전쟁과 기근, 전염병, 각종 공포가 세상을 뒤흔드는 파란만 장한 시기를 살았다. 이 혼돈의 배경에는 전 세계의 수확을 망친 기 후 충격이 있었다(이 충격은 오늘날 소빙하기 Little Ice Age로 일컬어진다). 20년간 세계 각지에서 농작물이 얼어붙고 물에 잠겨 결실을 맺지 못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물가가 치솟으면서 기근이 뒤따랐고, 폭동이 일어나 군주가 끌려 내려왔으며, 길고도 잔혹한 전쟁이 벌어졌다. 난 민들이 먹을 것과 안전을 찾아 새로운 곳으로 떠나면서 그들이 가지 고 있던 질병도 함께 퍼졌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썩거나 설익은 농작물로 만든 '구황 음식을 먹었고, 이는 많은 사람의 건강에 기 아만큼이나 악영향을 끼쳤다. 거대한 재앙이 죽음과 질병을 몰고 다 니며 세계를 휩쓸었다.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희생양을 찾아 나서면서 마녀사냥의 광기가 들불처럼 번졌다. 이 혼돈을 피해 달아난 난민 중 에는 토머스 홉스도 있었다. 영국 내전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홉스 가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고 짧다는 결론을 내린 것도 당연했다.
17세기는 오늘날과 많은 면에서 비슷한 시기였다. 기후 충격은 가 격 충격으로 이어졌고, 가격 충격은 눈사태처럼 커지는 연쇄 위기 를 촉발했다. 이 위기는 오늘날 '17세기의 일반 위기'라 불린다. 또한 17세기는 가격 혁명이 일어난 시기였으며, 우리가 막 지나온 10년간 의 혼돈은 바로 이 가격 혁명에서 유래했다. 이 혁명의 배경에는 계몽 주의가 있었다. 토머스 홉스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17세기의 격동 속 에서 계몽주의의 토대를 놓았다. 계몽주의가 나타나면서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정점을 찍고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멀쩡한 사람을 장작더미에 던져 넣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일 아닐까? 혼돈 은 초자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물질적인 원인, 즉 인간이 스스로를 조 직한 방식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은 지식인들은 점 차 미신을 과학으로 대체해 나갔다.
17세기 말이 되자 일부 계몽주의 지식인은 문제의 원인을 가격으 로 보고 가격에서 해결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소빙하기가 끝났는데 도 물가가 여전히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인구는 1720년부 터 늘어났지만, 농업 생산량은 늘어나는 식량 수요를 간신히 충족하 는 수준에 머물렀다. 특히 프랑스는 혼돈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고, 기 후가 약간만 변해도 식량 가격이 급등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이었다.
- 혁명은 괴물을 물리치는 이야기다. 우리는 혁명이 벌어지는 동안 잔혹한 괴물이 아니라 자비로운 존재가 권력을 잡기를 꿈꾼다. 그러 나 혁명의 이야기는 곧잘 비극으로 흘러가곤 한다. 혁명 이전의 악몽 같은 세상을 낳은 구조 자체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미로 를 이루는 벽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팬데믹이 유행하는 동안 뚜렷 한 변화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선거로 선출되지 않는 중앙은행의 심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권좌의 뒤에서 비민주적인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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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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