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악의 미덕, 탐욕

저자
스테파노 자마니 지음
출판사
북돋움 | 2014-06-1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탐욕’은 어쩌다가 인간 존엄까지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
가격비교

 

 

- 11세기에서 14세기 사이 유럽인구는 무려 3배 이상 증가. 막대한 농촌인구가 도시로 흘러간 것도 그 원인이었음. 특히 주목할 것은 7세기부터 지중해 지역에 이슬람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여러세기 동안 동과 서를 이어주던 가교역할을 하던 지중해가 두 세계를 사실상 차단하는 장애물로 변했다는 점. 이런 상황은 상업활동의 급격한 쇠락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상인이라는 존재를 사라지게 함. 농업이 다시 주요경제활동으로 떠오르면서 일차적인 부의 원천이 됨.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모델로 봉건제도가 형성됨. 봉건제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있음. 하나는 부동산에 대한 선호 때문에 동산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가 교역의 전략적 거점이 되지 못하면서 쇠퇴했다는 점. 본질적으로 폐쇄적인 영주 체제의 경제에서는 그 지역을 위한 물자만이 생산됨. 물물교환이 자연스러워 화폐유통은 무의미할 정도였음. 상업은 임시방편적 수단이었고, 상업활동을 통해서는 겨우 궁핍을 면할 수 있을 정도. 그 견고한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때가 11세기였음. 지중해 지역의 교역이 재개되고 대륙을 횡단하는 대상인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그런 움직임이 있었음. 또한 봉건영토가 확장되면서 새로 장인-상인 계층을 흡수하게 되었음.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이 계층은 새로운 직업을 창출해야 했음. 이와 더불어 사회질서의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점도 주요한 변화였음. 사실상 도시는 인구증가와 함께 점점 늘어난 새로운 시민이 정착하기에 좋은 조건을 제공했음. 도시에 살게 된 새로운 시민들은 자기가 꿈꾸는 삶을 이루기 위해 이동이나 계획이 자유로워야 했음. 도시가 제공하는 기회와 상업으로 집중된 부를 손에 넣은 몇몇 인구집단은 동산 형태의 부를 축적하는 데 유리했음. 부를 축적할 기회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음. 사실 자연의 복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능력과 역량을 안겨주지 않음. 하지만 그런 최고의 행운을 완전히 거머쥔 이들이 있었으니,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며 봉건경제의 메커니즘과 달리,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부를 쌓는 기술을 익힌 대상인들이었음. 이들에게는 혁신적 기술이 있었고, 큰 위험을 감수할 만한 열정도 있었음. 대상인이 태어날 때부터 대상인인 것은 아니었음. 그들은 처음 자기 사업을 시작하고 확장하기 위해 금융자본이 필요했음. 이런 점에서 중요한 자금줄이 되는 신용 대부업이 자율적으로 번성하게 됨. 처음에는 친척이나 친구, 또는 다른 상인들에게 도움을 얻었으나, 그러한 자금줄은 한계가 있었음. 그러자 조합형태의 대부업이 출현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아직도 그 최초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음. 베네치아의 투자회사, 제노바의 상단, 토스카나의 합자회사 같은 것이 그런 기원을 갖고 있음.
- 11세기 이후 상업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결과는 무엇일까?
(1) 사람이 거주하는 공동체 규모가 점차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 수백명 단위였던 이주민이 수천명 단위로 바뀌었고,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직접 얼굴을 맞대던 관계가 낯선 관계로 변하기 시작. 애초에 봉건영주와 그에 예속된 사람들의 관계는 인격적이었고, 농민과 지주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음. 하지만 이제는 금전관계로 인해 인격적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 영주에게 이행할 의무를 세금이나 돈으로 지불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직접 해야할 의무를 돈이 대신함. 상업분야에서 시작된 이러한 탈인격화는 시작부터 신뢰문제로 이어짐. "어떻게 잘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믿을 것이며, 심지어 어떻게 그런 사람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어찌 됐든 신뢰 없이는 계약서에 서명할 수도 없고, 계약 없이는 사업도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2) 화폐 유통은 한편으로는 시장의 발전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정비된 경제구조 안에서 농민과 장인들이 농노의 신분에서 해방될 기회를 얻었음을 의미하기도 했음. 이러한 초기 시장경제의 측면은 이제껏 논의된 적이 없었음. 화폐경제는 자본을 축적하게 해주고, 결국 노예제도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데도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음. 이 점에 관해서는 세계최초로 노예제도를 추방한 볼로냐 지방정부의 낙원의 책(1257)이라는 문서에 잘 정리돼 있음. 상업 거래에서 화폐사용이 늘어났다는 것은, 다시 말해 부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낯선 사람들의 역할을 인정했다는 의미. 화폐는 사실상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교역수단이 되었음. 동산은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부동산과 달리 축적하는 데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인구의 도시집중이 심화될 수 있었음. 그러나 여전히 봉건 사회질서에 대한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는 사회로서는 근본적으로 비인격적 화폐에 대해 쉽게 의심을 거두지 못했음. 더 큰 어려움은, 종교적 처벌보다 법적 처벌이 우세한 사회에서 돈에 대한 범죄를 다룰 만한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점에 있었음. 사실 상업시대 이전에는 이미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약과 같은 규약으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음. 윤리적 제재가 법적인 처벌보다 더 강했고, 윤리적 제재만으로 책임과 의무를 존중하는 데 무리가 없었음. 당시 도덕률은 명백히 반상업적이었으며 상행위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보였음. 심지어 교황 레오 1세는 매매행위에서 죄를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글을 남김. 그리고 그 근거로 "상업에 종사하는 삶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 새롭게 바뀐 현실과 옛 윤리규범 사이에 골이 깊어가는 동안 신자들은 깊은 혼란에 빠짐. 특히 그중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더욱 당혹스러웠다. 그들은 분명 매우 곤란하고 난처했을 것이다. 신자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양심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이런 불안감은 12세기 말가지 계속되었다.
- 욕망에는 끝이 없다. 재물의 사용은 정당한 기준 속에서 향유되어야 한다. 즉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그것을 사용할 만한 합당한 조건을 갖추었는지 따져봐야 한다. 이 기준을 넘어서는 것은 죄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추구하거나 지키려고 하면 그것은 곧 죄다. (신학대전)
- 1008년 볼로냐에 대학이 탄생한 것은 삶의 문화가 무르익어 피어난 상징적 사건으로 꼽을 수 있음. 이는 한편으로는 상업혁명의 눈부신 결과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에 집중된 사회질서의 모델로도 볼 수 있음. 이때 도시는 로마나 콘스탄티노플 같은 제국의 주요 대도시처럼 중앙집중된 권력의 집결지나 여러 민족의 교차로가 아니었음. 이 도시는 자유시민들의 공동체였고, 새롭게 만들어진 제도 및 기구들과 더불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음. 또한 새로운 도시민들은 같은 도시민이 아닌, 그래서 공식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치적으로 도시 성벽을 방어했음. 도시공간 역시 발전된 사회 모습을 부각할 수 있도록 설계됨. 고대 그리스 광장을 염두에 둔 중앙광장, 대성당, 총독관저, 상인들과 상회를 위한 건물, 계약과 교역의 장소인 시장, 부유한 유산 계급의 저택, 평신도가 묵을 수 있는 교회들이 만들어짐. 이런 장소 가운데, 무엇보다 전형적인 시민사회를 규정하는 덕이 계발되기도 함. 상호신뢰, 보조성, 형제애, 이타성에 대한 존중, 협동형태의 경쟁 등의 덕이 계발됨. 이렇게 생겨난 도시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됨. 거주지 군락에 불과한 농촌마을이나 봉건영주의 성에 연결된 촌락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런 도시 공동체는 그리 큰 차원은 아니었으나, 정치, 경제적으로 자율성을 표방했고, 사회적 결속을 현실화하는 역량도 대단히 컸음. 14세기 이탈리아 중북부는 도시문화가 좀더 쉽게 퍼질 수 있는 전형적 환경이었음. 이 지역에는 오천명 이상의 주민이 사는 도시가 96개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53개 도시는 주민이 만명 이상이었음. 이는 이탈리아 중북구 전체 거주 인구 26.4%에 이르는 수치였고, 유럽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9.5%에 달했음. 이런 이탈리아 모델을 빠르게 습득한 곳은 네덜란드뿐이었음. 이에 비해 영국은 16세기에도 도시인구의 비율이 4.6%에 불과했음.
- 도시의 확산과 확대는 도시문명을 꽃피우는 모티브가 되었다. 그 결과 전혀 뜻하지 않은 부작용도 낳음. 그것은 바로 당파심. 당파심은 사회의 응집력가 조화를 위협할정도로 매우 위험한 요소였음. 이를 간파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가 13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 단테라는 주장이 있음. 단테는 향연 4권에서 당파심의 기원이 탐욕에 있다고 단호하게 주장. 또한 이 같은 악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제안. 단테의 그 제안은 세계 제국에 관한 것으로, 오직 황제에게만 온 세계의 지배권을 부여하자는 것. 다시 말해 최고의 통치자에게 세상을 지혜와 정의로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한다는 것. 화가 암브로조 로렌체티는 선한 통치자의 비유라는 작품에서, 도시의 조화로운 발전을 침해하는 모든 것의 원인으로 탐욕을 꼽음. 더 나아가 선한 통치는 선한 상업과 동의어인 만큼 상인의 탐욕은 당파성을 더욱 크게 하고 결국 악한 통치로 이어진다고 했음.
- 유대인의 고리대금 사업은 특히 14세기 말 이탈리아 중북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의 부를 착취하는 주범으로 지목. 결국 고리대금업자는 반시민적인 방향으로 부와 돈에 집착하고 신학적으로는 사악한 자였음. 프란치스코회의 설교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에 적대감을 갖게 된 것도 이들 집단이 경제적 채산성을 떨어뜨리고 반사회적인 결과를 낳는 주범이라 여겨졌기 때문. 1462년 페루자에 처음 설립된 자비의 산이라는 경제기구에 특히 프란치스크회 회원들이 헌신했던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음. 이 기구의 목적은 고금리 대부업을 봉쇄하고 고리대금업이 파괴해 버린 공동체의 관계망을 복구하는 것이었음. 또한 이 기구는 사설담보 대출기관을 없애고 다양한 시민층의 이해를 전달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음. 이에 따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신용보증을 해주고, 상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예금자들에게 투자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음. 처음에는 예금이자가 없었다. 그러다 예금이자는 4%, 대출이자는 6%가 되었다. 예대차이는 기구의 운영 및 유지비로 쓰였다. 자비의 산 활동의 경제적 의미를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펠트레의 베르나르디노였음. 그는 이탈리아 중북부의 주요 도시에서 무려 3600회 설교하는 동안 자비의 산을 홍보. 이 기구는 특히 빈곤문제나 재정면에서 늘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는다면 그 우수성을 높이 평가. 베르나르디노의 설교의 핵심은 첫번째로 기구의 장점에 있었음. 개인이 주도적으로 하는 것보다 기구가 운영하는 것이 더욱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말. 두번째는 다수성에 관한 입장. 자비의 산은 여느 자선과 달리 많은 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음. 세번째는 거룩함에 관한 것으로, 특히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에게 친숙한 개념. 자비의 산에 기부하는 것은 결국 자비를 베푸는 행위인 만큼, 교회를 꾸미는 일보다는 좀더 학실한 천국행 티켓이 될 것임. 결국 자비의 산은 부유한 상인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기구로 부각되면서 그들의 반대와 강경한 공격에 맞서야 했지만, 공동선을 돕는 기구로 확실히 자리매김. 이러한 프란치스코회의 운동으로 상업과 교권은 각각 근거를 찾고 균형을 이룸
- 15세기 이후의 교역 기회가 눈에 띄게 확대될 뿐만 아니라 도시-국가간 전쟁으로 인해 신용거래의 필요성도 크게 증가. 따라서 보험계약, 신용거래, 은행간 거래가 새로운 재정적 수단으로 등장. 15세기 말까지 유럽재정과 산업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의 하나였던 피렌체의 경우는 좋은 예가 될 것임. 피렌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한 국제화폐(플로린 금화)를 발행했고, 공공부채를 운영하는 정책에 힘입어 정교한 관리제도를 갖추었음. 국채를 발행하는 2차시장이 개발되었고, 이 때문에 투기바람이 불기도 함. 그리고 이런 현상은 투기수익의 윤리적 정당성에 관한 뜨거운 논쟁을 야기. 교회법학자와 설교자들은 대부분 고리대급업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을 발전시켜 투기적 사업을 맹렬히 비난.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엠폴리의 프란치스코는 통찰력 깊은 반론을 펼침. 국채 투기자를 고리대금업자로 간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밝혔다. 우선, 채권시장에서의 거래는 담보가 아닌 매매계약으로 이루어진다. 전통적 해석으로 볼 때, 담보계약만이 고리대금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 둘째, 이때 구매대상은 상품이 아니라 권리다. 다시 말해, 채권을 사는 것은 지방정부가 약속한 수익 혹은 자본을 받을 권리를 사는 것이다. 셋째, 이런 권리의 가치는 불확실하다. 투기자는 다른 이에게 채권을 팔아 다시 자본화할 수 있지만, 투자가치가 계속 변하므로 가격이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더우이 지방정부는 액면가의 고정비율(15%까지)로 이자를 지불하지만, 국채의 시장가격이 변화무쌍하므로 실질적인 이자율은 불투명하다. 다시 말해 국채구입은 위험성 있는 구매이므로, 이때 발생한 수익은 고리대금업자의 이자로 볼 수 없고, 일종의 위험수당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언젠가부터 교회가 보험료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것처럼 국채 역시 합법적으로 보아야 한다.
- 17세기 중반무렴 두 노선의 사상이 생겨남. 이 두가지 사상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하나로 모아짐. 그것은 우선, 앞에서도 봤지만 과거의 중심 개념이던 공동선이 공동이익으로 나눠 가졌다는 의미는 아님. 다만 각자 자기가 원하는 바가 있고, 어떤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다른 이가 원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다고 판단할 근거 또한 없어졌다는 의미다. 바로 여기서 공공성과 개인의 대립점이 나타나게 됨. 다시 말해, 공공성의 공통분모와 개인의 더 좋은 것이 충돌하게 된다. 두번째, 경제적 관계의 변화로 인해 사상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지리적 탐험의 결과로 상업이 놀랍도록 확산되었고, 지역과 국가간의 가격차가 줄어들면서 전반적으로 수익이 하락. 다른 한편으로 수익이 감소하면서 시장이나 농촌이 아닌 공장출신의 자본가 계층이 성장하기 시작. 이렇게 성장한 새로운 자본가 계층의 관심사는 하루빨리 상인-생산자층과 부딪혀, 이윤이 어디어 창출되는지 그 근원을 따지는 것이었다. 그들의 논리로, 이윤은 생산부문에서 창출되는 것이지, 유통부문에서 창출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통부문에는 단지 잉여가 놓이기만 할 뿐이었다. 따라서 신흥 자본주의자 계급은 낡은 관료기구를 청산하는 것은 물론이고, 윤리적, 신학적 속박도 없애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 시민사회의 전통을 철저히 공격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맨더빌이었음. 개인의 악덕은 사회의 이익이라는 부제가 달린 꿀벌의 우화(1714)라는 그의 책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킴. 이 우화는 이기적 꿀벌들이 모여사는 벌집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꿀벌들이 탐심 덕분에 풍족하게 산다는 내용. 그런데 어느날 욕심많은 꿀벌들이 마음을 바꿔 이타적이고 선하게 변해버림.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벌집은 황폐해짐. 맨더빌은 꿀벌의 우화에 앞서 윙윙거리는 벌집(1705)이라는 시를 익명으로 발표. 이 시는 벌들의 행태를 이야기하지만, 실은 인간사회의 기능을 빗대고 있음. 벌들의 사회는 탐욕이라는 악덕에 깊이 파묻혀 있으나, 그것이 곧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메시지. 그러나 그 탐욕 때문에 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피터 신이 벌집에서 악덕을 없애고 대신 미덕을 채우기 시작. 그런데 그것이 곧 쇠퇴의 시작이었다. 꿀벌의 우화가 출판되기 150년 전에 독일에서 이기심을 찬양함(1564)이라는 책이 출판됨. 이책에서 농민, 상인, 장인은 오직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만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런 행동이 모두를 위한 질서와 번영을 만들어낸다고 저자는 주장.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된 당시는 그런 주장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논의할 만큼 성숙한 사회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이런 현상에 주목한 저자는 기원전 450년 경 그리스 얌블리쿠스라는 소피스트로 추정됨. 그는 상인들의 이기주의가 번영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펴냄. 그는 이 책에서 황금이 많지 않지만 부자인 그리스 도시국가와, 왕에게 엄청난 황금이 있지만 가난한 페르시아를 비교하면서, 그리스에 부를 가져다준 것은 상인들의 활동이라고 결론 맺음. 그가 볼 때, 그리스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그리스어권의 공용어인 코이네를 사용하는 도시국가들 사이에 그물망처럼 촘촘히 얽혀 있던 신뢰관계 덕분이었음.
- 맨더빌의 우화는 또 다른 가치를 말해줌. 즉 개인에게 악덕(탐욕)을 충족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할때 더 쉽게 공적인 번영이 이루어질 수 있고, 더욱이 근검절약 같은 미덕은 사회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점. 풍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라는 말이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이렇게 말함. "사기와 사치, 그리고 교만은 우리에게 득이되는 한 살아남아야 한다. ... 단순히 미덕만으로는 국가의 번영을 이뤄내지 못한다. 황금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정직하게 도토리나 먹어야 할 것이다." 홉스의 이런 생각을 맨더빌이 부연한다. 미덕이란 가족이나 촌락처럼 작은 공동체에서나 유익하고 장려할만 하다고 말이다. 만일 큰 기업을 미덕으로 운영하려 한다면 비참함과 궁핍함을 면할 수 없고, 정직과 도토리만을 맛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맨더빌은 죽기 전, 관심주제를 번영에서 행복으로 바꿈. 영광의 근원에 대한 연구(1732)의 머리말에서 다음 대목을 살펴보자.
'나는 무한한 욕망에 내맡기는 것보다 이성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훨씬 낫다고 확신한다. 결국 사회의 평화와 참된 행복을 위해서도, 미래가 어찌 되든 현재의 행복을 위해서도 미덕이 악덕보다 훨씬 유익하다.'
몇년 지나지 않아, 안토니오 제노베시(이탈리아 철학자)도 맨더빌의 이런 변화된 태도에 동의하며, "악덕은 어쩌면 시민사회에 유익하지 않은 것이 수 있다."라는 입장을 지지. 그렇다면 맨더빌은 탐욕을 옹호했다고 볼 수 있을까? 맨더빌은 탐욕이라는 악덕이 공공의 이익을 창출하며, 거의 미덕에 가깝다는 관점을 지지하는가? 그렇지 않음. 흥청망청 사치품 소비에 탐닉하는 것이 근검절약하는 태도보다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하는 것은 사실. 그런데 탐욕가는 소비하기는커녕, 오히려 재산을 쌓기만 하는 사람이다. 탐욕가에게 돈이라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고, 돈이 목적이 되면 시장은 발전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 화폐 유통의 속도가 확연히 감소하기 때문.
- 경제에 관한 스미스의 성찰이 18세기 중반의 스코틀랜드 문화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님. 당시 스코틀랜드 문화는 "고칠것은 고친다"는 15세기 피렌체 문화와 매우 흡사했음. 그 위대한 도시문명이 위대한 시민의 가치를 만들어냈는데, 그런 시민의 가치가 스코틀랜드의 상공업 중심지 글래스고의 문화 및 경제를 꽃피우는데 초석이 됨. 유럽 정치 사상가 존 포콕이 "스미스가 사용한 어휘들이 상당부분 시민인본주의의 용어와 겹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밝힌 것도 그런 배경. 결국 탐욕은 나름대로 이로운 점이 인정되면서 더는 끔찍한 악덕으로도 부조화와 가난을 낳는 화근으로도 취급되지 않았음. 오히려 탐욕은 시민의 덕이 됨.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머리말에 다음가 같은 말이 있다. "인간은 본성상 이기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런만큼, 우리는 분명 타인의 행운에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하고, 그것이 타인의 행복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다른 대목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인간은 본성상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려고도 한다. ... 사랑받는 사람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중 어느쪽이 더 행복할까?" 중세 말이나 근대 초기의 인간학에서 이런 식의 가설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음. 이 가설에 따르면 탐욕가도 당연히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 인지심리학자들은 탐욕은 이성을 눈멀게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기 보다, 진화론의 논리에 충실한 태도라고 한다. 탐욕스러운 태도가 사회적 교환을 조장해서 환경적응을 수월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감정가 정서가 자신의 신체적 능력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다윈의 입장과 일맥상통함. 이런 의미에서 탐욕은 사치의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음. 신경과학자들이 증명한 사실이지만, 사치하는 태도는 일반적으로 음식과 성에 반응할 때 활성화하는 대뇌부분을 자극함. 다시 말해, 순수하고 극단적인 이타주의가 대뇌에 내재해 있는 것처럼, 대뇌의 다른 편에는 쾌락의 근원이 있어서, 탐욕가의 태도가 쾌락의 근원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이런 논리라면, 도덕의 근원은 생물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더불어 사치 같은 탐욕도 악덕이 아니라, 대뇌 피질의 특성의 결과라 할 수 있음. 이 문제는 아주 흥미롭지만 여기서 더 깊이 논할수는 없다. 다만 도덕이 인간 뇌에 내재한다고 볼 때, 도덕성의 하락을 단지 뇌의 화학작용으로만 설명하는 것을 문화로 보기는 어려움. 그렇게 보는 관점은 우선 죄의식을 없애고 다음으로 자유의 여지와 개인의 책임간을 없애며, 궁극적으로는 악을 의학적인 현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 탐욕을 악덕으로 여긴다면 탐욕가의 죄의식을 강조하게 되고, 탐욕을 병이나 생물학적 기질로 본다면 탐욕가의 수치심을 강조하게 됨. 다시 말해, 탐욕가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이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때 탐욕은 수치심을 준다는 의미. 수치심은 타인에게서 부정적 평가를 들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 느끼는 고통이라고 함. 반면 죄의식은 자기가 믿고 있는 도덕규범을 위반했다는 자각에서 나옴. 수치심이 들면,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서 사라지려고 함. 반면, 죄의식이 들면, 깊이 후회하며 건설적인 태도로 타인을 향해 나아가려는 경향이 강함
- 5세기초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의 본인 자신의 불순종이 본인 자신을 거슬러서 발생한다면 인간에게 다른 불행은 없을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던 것을 바라지 않았던 탓에 이제는 할수 없는 것을 바라는 처지가 되었다. (신국론)" 탐욕가는 자기가 얻을 수 없는 것을 미친듯이 바란다. 그렇기에 탐욕가가 깊은 우울감에 빠지는 것이다. 경험과 기대사이, 이미 얻은것과 바라는 것 사이에 골이 점점 깊어지면서 생기는 우울감, 그것이 바로 탐욕이다.
- 탐욕가가 행복할 수 없는 이유.
(1) 탐욕가는 자기자신에게 인색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음. 탐욕가는 스스로 호혜주의 원칙의 의무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 가치마저 박탈해버림. 사실, 사람이 세상에서 환영받으며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할 때 뿐임. 애덤 스미스는 이런 존재감을 도덕감정론에서 자기존중, 자존감이라고 설명
(2) 그는 자신의 무수한 욕구를 오직 소유욕이라는 하나의 욕구로 축소해버리기 때문.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인간의 욕구는 구조화되었을 뿐 아니라 단계별로 서열화되어 있음. 욕구가 서열화되어 있다는 말은 욕구가 서로 이질적이란 의미. 그런데 탐욕가는 욕구의 이질성을 동질성으로 바꾸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하나의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토마스 아퀴나스가 언급했던 다양성의 혜택을 스스로 누리지 못하도록 차단함. 로마 시인 푸블릴리우스 시루스의 다음 문장이 이를 잘 비유하고 있다.
'가난한 이에게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 하지만 탐욕가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 부의 축적이 사라질 때, 사회적으로 다른 중요한 의미가 생기고 도덕법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다. ... 우리는 돈의 정당한 가치를 찾는 일에 힘써야 한다. 돈을 소유의 대상으로 사랑하는 것과 돈을 삶의 기쁨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이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병적이고 약간은 혐오스러운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반은 죄수같고 반은 환자같은 이 소름끼치는 이들을, 우리는 정신과 전문의에게 보내야 할 것이다.  (케인즈,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1930))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티글리츠 보고서  (0) 2014.11.09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  (0) 2014.11.09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  (0) 2014.11.06
천재 자본주의 vs 야수 자본주의  (0) 2014.11.06
모든 것의 가격  (0) 2014.11.06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