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GDP 성장은 총계를 알려주는 척도이므로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은 국가 및 지역의 여러 현실을 숨긴다. 예를 들어 유럽, 라틴아메리카, 북아프리카는 실제 성장이 거의 0에 가깝다. 인접한 서유럽 또는 북유럽 국가를 경제적으로 따라잡아야 하는 중유럽 또는 동 유럽 국가로서는 그러한 저성장은 실망스럽다. 의욕적이고 교육 수준 이 높은 사람들은 고소득 국가에서 경제적 기회를 찾고자 하는 만큼 저성장으로 인해 인재 유출이 가속화되고 문제가 악화될 수 있다. 많 은 사람들이 중산층의 생활 방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데다 경제 적 안정을 제공하는 직업이나 사회보장 보험, 연금이 부족한 중동, 북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같은 지역도 마찬가지다.
- 성장률이 평균 이상인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같은 지역은 인구 성장률도 똑같이 높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연간 3%가 넘는 높은 성장률도 1인당 소득의 빠른 증가를 가져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최근 몇 년 동아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저소득 또는 중하 소 득 국가로는 케냐,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가나가 있다. 하지만 설령 가까운 미래에 연간 5%씩 꾸준히 성장한다고 해도 이들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이 두 배가 되기까지는 한 세대(15~20년)가 걸릴 수 있다. (그것도 경제성장의 과실 대부분이 널리 공유된다고 가정할 때의 이야기로 현실은 그렇지않은 경우가 많다.)
- 1950년대에 경제학자로 연구를 계속하면서 쿠즈네츠는 흥미로운 현상을 이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후에 경제 호황이 이어지면서 미 국의 소득 불평등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미국이 주요 경제 대국이 되었으나 소득과 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됐던 전쟁 전과 대조가 됐다. 정도는 덜했지만 다른 선진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 1950년대에 경제학자로 연구를 계속하면서 쿠즈네츠는 흥미로운 현상을 이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후에 경제 호황이 이어지면서 미 국의 소득 불평등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미국이 주요 경제 대국이 되었으나 소득과 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됐던 전쟁 전과 대조가 됐다. 정도는 덜했지만 다른 선진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 아세안 국가들이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앞서 중국이 했던 세계의 공장 역할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같은 국가는 임금이 대체로 중국보다 낮고, 중국 및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로 중 일부와 인접해 있어 전 세계 소비자에게 쉽게 수출할 수 있다. 이미 중 국, 미국, 유럽, 한국, 일본의 다국적 기업 수백 개가 이 지역에서 생산 을 하고 있다.
아세안 국가들이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세 계 양대 경제 대국에 우호적인 중립 지역이라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간에 진행 중인 무역 갈등으로 인한 관세를 피하고자 많은 기업이 생산 시설을 중국 외의 국가로 이전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지금까지 무역 전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아세안 국가들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입증되었다. 이 점에서 베트남은 확실한 승자였다.
아세안 국가의 지속적인 긍정적 경제 전망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는 지역 통합과 기술 혁신의 조합에 있다. 아세안경제공동체는 유 럽연합 이후 가장 성공한 지역 경제 공동체이다. 역내무역이 늘고 통 합이 증대되고 있다. 또한 국내 기술 유니콘(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 인 비상장 기업을 지칭하는 용어)도 여러 개 만들어졌다. 싱가포르에 본 사를 둔 차량 호출 서비스 기업인 그랩Grab이 가장 유명하지만, 인도네시아의 고젝Go-Jek, 토코페디아 Tokopedia, 트래블로카Traveloka, 싱가포르의 몇몇 스타트업, 베트남의 VNG, 필리핀의 레볼루션 프리크래프티드Revolution Precrafted 또한 (적어도 코로나19 위기 이전에는) 유니콘 기업이 되었다고 컨설팅 회사인 베인 앤드 컴퍼니는 말한다.
-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로 사람들은 상품을 거래해 왔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사치 품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인 로마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물건들은 훗날 실크로드로 알려지게 되는 길을 따라 수천 킬로미터를 운반되어 로마에 당도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거래하는 상인들은 한정 된 거리를 이동했지만, 그들이 사고판 물건들은 세계의 절반을 이동했다. 그렇다고 이때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일 반적으로 실크는 사치품이었고 아시아와 유럽 대륙 간 무역 품목으로 추가된 향신료도 마찬가지였다.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보면 이런 수출품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하지만 상품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까지 많은 중간상인이 관여했고 세계 무역 연결로가 확립되었으며 그 것은 관련자들에게는 노다지가 될 수 있었다.
실크로드가 번창할 수 있었던 부분적인 이유는 두 개의 거대한 제 국, 로마와 중국이 경로의 대부분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무역이 중 단된 경우는 대부분 지역 적군의 봉쇄 때문이었다. 몇 세기 후 결국 실크로드가 폐쇄된 것은 전적으로 제국의 몰락과 연관이 있었다. 중세 후기에 마르코 폴로가 다시 실크로드를 열었던 것은 몽골이라는 새로운 패권 제국이 부상했기 때문이다. 무역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때 번성하고 보호받지 못할 때 쇠퇴하는 법이다.
무역의 다음 장은 이슬람 상인들 덕분에 열렸다. 7세기에 이슬람교 가 아랍의 심장부에서 사방으로 퍼졌을 때 무역도 확대되었다. 이슬람 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마호메트는 상인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내 카디자Khadja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무역은 이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와 추종자들의 DNA에 있었다. 그 덕분에 9세기 초에는 이슬람 무역상들이 이미 지중해와 인도양 무역을 지배했다. 그 후 그들은 동 쪽으로는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는 인도네시아까지, 서쪽 으로는 스페인 무어 왕국까지 진출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 이슬람 무역의 주력 상품은 향신료였다. 실크와 달리 향신료는 주로 해상 무역을 통해 거래되었으며 아라비아에서 지중해까지 육로 교역은 적었다. 이 향신료들 가운데 으뜸은 전설적인 향신료의 섬인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에서 나는 클로브, 너트메그, 메이스였다. 그것들은 현지에서도 유럽에서도 몹시 비싸고 수요가 많았으며 주로 음식을 보존하고 양념하는 데 쓰였다. 실크처럼 향신료도 사치품이었으므로 교역량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중세 시대 까지 세계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실크로드와 향신료 항로까지 동서 교역을 위한 일대일로 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가 확립되었다. (이 일대일로 개념은 수백 년 후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철로, 항구, 파이프라인, 고 속도로, 디지털 연결을 통해 중국과 유럽, 아프리카, 중앙아시아를 더 잘 연결하려는 현대판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발표했을 때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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