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의 대체 효과와 보완 효과를 명확히 구별하면, 왜 지난날 기술적 실업을 걱정했던 불안이 거듭 빗나갔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두 근본적 인 힘이 부딪힐 때, 우리 조상들은 엉뚱한 쪽을 승자로 골랐다. 언제나 보완하는 힘을 깡그리 무시하거나 보완하는 힘이 대체하는 힘에 압도되리라고 잘못 상상했다. 데이비드 오터의 말대로, 사람들은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수준은 과장하고, 자동화와 인간 노동의 강력한 상 호 보완성은 무시하곤 했다. 그 결과, 계속 남아 있을 노동 수요를 거 듭 과소평가했다. 크게 볼 때 인간을 고용할 수요는 언제나 충분했다. 개별 기술에서도 이런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자동현금인출기를 생각해 보라. ATM은 은행 창구 직원의 현금 출납 업무를 없앨 셈으로 발명한 기계였다. 20세기 중반에는 셀프 주유소, 셀프 계산대, 사탕 자판기 같은 셀프서비스 문화가 경제생활 곳곳에 퍼졌고, ATM도 그 일부였다. 첫 ATM은 196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처음 설치되었다고 한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유럽에도 널리 퍼졌는데, 갈수록 힘이 세지는 노조가 주중에 일하는 고객들이 은행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인 토요일에 은행 문을 닫기를 요구하는 데 맞선 해결책이기도 했다. 미국에 서는 1980년대 후반에서 2010년 사이에 ATM 대수가 네 배 넘게 늘어 서, 2010년에는 40만 대가 넘는 ATM이 작동했다. 이런 증가세를 들으 면, 미국 은행이 고용한 창구 직원의 수가 뚝 떨어졌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이 시기에 창구 직원 수는 20퍼센트가 늘었다.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앞에서 다룬 두 힘을 이용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엿볼 수 있다. 답은 ATM이 단순히 창구 직원을 대체만 하지 않고 보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ATM이 창구 직원을 직접 보완하기도 했다. 창구 직원의 현금 출납 업무 생산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직원들이 고객과 얼굴을 맞 대고 업무를 지원하거나 금융 지식을 전달하는 것 같은 다른 활동에 힘 을 쏟을 여유를 줬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은행 지점을 방문한 고객에게 더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 더 많은 고객을 사로잡았다는 뜻이다. ATM 덕분에 지점 운영비도 줄었으므로, 은행은 가격 경쟁력이 더 높은 상품 을 내놓아 방문 고객을 더 끌어들일 수 있었다.
동시에 ATM은 창구 직원을 간접 보완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파이 확 대 효과가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당시에 ATM과 무수한 다른 혁신이 경제를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소득이 올랐고, 따라서 은행과 창구 직원을 찾는 수요가 커졌다. 파이 탈바꿈 효과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더 부유해졌으므로 고객의 요구가 그 저 은행 계좌에 돈을 넣고 찾아 쓰는 쪽에서 요즘 창구 직원들이 제공하 는 관계형 금융elationship-banking'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것이다. 이 모든 유용한 효과가 함께 작용한 결과, 일반 지점에 필요한 창구 직원의 수가 1988년 기준 20명에서 2004년 기준 13명으로 떨어졌지만 이 시기에 지점 수는 은행 서비스 수요 증가에 맞춰 늘어났고, 도시 지 역에서는 무려 43퍼센트까지 늘었다. 따라서 창구 직원의 일거리가 전체적으로 늘어났고, 이들의 수도 떨어지기는커녕 늘어났다.
- 1220 년에는 대학 학위가 드물었으므로, 이때 숙련 프리미엄은 장인의 임금 과 단순 육체노동자의 임금을 비교하여 측정했다. 그림 2.4에서 보듯이 길게 놓고 보면 숙련 프리미엄이 그림 2.3에서처럼 치솟는 양상을 보이 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이 장기 그래프로 보건대, 기술 변화가 실제로는 특정 시기에 숙련자로 여겼던 노동자에게 언제나 이로웠던 것 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다른 직종의 노동자를 선호한 듯싶다. 19세기를 예로 들어 보자. 1장에서 봤듯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일 터에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생산 과정이 도입되었으므로, 노동자가 맡을 업무도 새로워졌다. 그런데 이런 업무를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 람이 알고 보니 당시 숙련 기술이라고 여겼던 능력이 없던 사람들일 때 가 많았다. 따라서 이때 기술은 숙련에 편향하기는커녕 '비숙련에 편향했다.
산업혁명을 보여 주는 어느 유명한 그림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기계들 이 수많은 저숙련 노동자를 업무에서 밀어내는 모습을 그린다. 두 손과 간단한 연장만으로 실을 잣고 옷감을 짜서 생계를 꾸리던 사람들이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거리를 잃는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이와 달랐다. 기계에 일자리를 위협받은 대상은 그때 숙련 노동자로 간주되 던 사람들이었다. 자동화에 맞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을 이끌었다는 네드 러드도 당시 미숙련공이 아닌 숙련 노동자였다. 만약 그가 실존 인물이라면, 네드는 전문가였을 것이다. 어쩌면 직물 업계 종사자들의 유명한 사교 클럽이던 직물직공 명예협회의 정식 회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직조기가 네드와 동료들을 밀어냈다는 것은 네드와 달리 숙련 기술이 없던 미숙련자가 네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새 기 계들은 과거에는 숙련 노동자들이 필요했던 고품질 제품을 미숙련자들 도 생산하기 쉽게 만들어, 노동을 탈숙련화deskilling한다.
영국에서는 15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 초반 사이에 미숙련 노동자의 비율이 두 배로 뛰었다. 이런 변화는 우연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제조업자들에게 경영 자문을 했던 영향력 있는 인물 앤드류 유어 Andrew VP는 “약아빠진 노동자에게서 업무를 빼앗아 “아이도 관리할 만큼 사 용이 간단한 기계로 대체하라고 부르짖었다. (그냥 비유로 한 말이 아니었 다. 당시에는 아동 노동이 용인되는 관행이었다.)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어의 말대로, 이런 흐름은 면화와 직물 업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처 음에는 소화기, 다음에는 시계, 펌프, 자물쇠, 수확기, 타자기, 재봉틀 그 리고 마침내는 엔진과 자전거, 부품 호환 기술이 끌과 줄을 들고 일하던 숙련공들보다 뛰어난 것으로 드러났고, 마침내 이들을 대체했다.
21세기로 들어설 무렵, 경제학자들의 통념은 때로 숙련에 편향하기도 하고 때로 비숙련에 편향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쪽에 서든 경제학자 들은 기술 진보가 언제나 노동자에게 대체로 이롭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실 경제학에서 주로 사용한 모델에서는 신기술이 숙련 노동자는 비숙 런 노동자는 어떤 노동자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일이 불가능했다. 이 모 델에 따르면 기술 진보가 때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 더 이득일지언정 언 제나 모든 사람의 임금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워낙 널리 퍼져서, 주요 경제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표준 모델canonical model 이라 부르다.
-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코스Archilochus가 이런 말을 했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안다.”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아르킬로코스의 시 가운데서 이 불분명한 구절을 찾아낸 아이 자이어 벌린은 인간을 이 구절에 빗대 두 부류로 구분하기로 유 명했다. 여우처럼 많은 것을 얕게 아는 사람과 고슴도치처럼 몇 가지를 깊이 아는 사람. 이 은유를 오늘날 상황에 맞게 바꿔 인간과 기계를 생 각해 볼 수 있다. 이때 기계는 고슴도치의 표본으로, 기계 하나하나가 좁 은 영역에 한정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과제 즉, 업무를 아주 강력하 게 수행하도록 설계되지만(딥블루와 체스, 알파고와 바둑을 떠올려 보라) 여러 다른 업무들을 수행하는 솜씨는 아주 형편없다. 이와 달리 인간은 우쭐 대는 여우와 같아서 어떤 일에서는 기계에 완전히 무릎 꿇지만, 다른 여 러 일에서는 여전히 기계보다 앞선다.
많은 AI 연구자가 지능에서 찾는 성배는 고슴도치가 아니라 여우인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 분야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들은 특정 업무만
- 상대 비용은 희한하게도 기술을 멀리하는 사례가 생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기계 세차가 줄어들고 있다. 주유소에 설치된 세차기가 2000년 9,000대에서 2015년 4,200대로 절반 남짓 줄어들 었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대개 손세차를 한다. 왜 세차 세계에서는 자동 화가 후진 기어를 넣었을까? 세차 연합회는 무엇보다도 이민을 탓한다. 2004년에 동유럽 국가 열 곳이 EU에 합류한 뒤로, 이들 나라의 이민자 들이 영국으로 건너와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바람에 생산성이 높은 만큼 비싸기도 했던 세차기보다 손 세차가 가격 경쟁력을 얻었다. 이 사례에서는 더 값싼 인간이 정말로 용케도 기계를 밀어냈다.
상대 비용의 영향을 가장 흥미롭게 보여 주는 사례는 국가 간에 나타 난다. 국가 간 비용 차이는 지난날 신기술이 국가에 따라 아주 불균형하게 적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경제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산업혁명이 프랑스나 독일이 아니라 영국에서 일어났느냐다. 경제사학 자인 로버트 앨런 Robert Allen 은 그 이유가 상대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영국 노동자의 임금은 다른 나라 노동자보다 훨씬 높았지만, 에너지 가 격은 매우 낮았다. 따라서 다른 나라와 달리 영국에서는 인건비를 아낄 뿐더러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값싼 연료를 쓰는 새로운 기계를 설치하 는 것이 경제적으로 타당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도 상대 비용 때 문에 신기술이 국가에 따라 불균형하게 적용될 것이다. 일본을 예로 들 어 보자. 일본에서 간호 로봇이 특히 빠르게 발달하는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은 고령 인구가 많기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로, 인구 25퍼센트가 예순다섯 살 이상이다. 더구나 노동 인구가 해마다 1퍼센트 씩 줄어드는데, 일본은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 이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그 결과 간호사와 간병인이 부족해졌으므로 (2025년 무렵에는 38만 명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용주들이 업무를 자동 화할 강력한 동기가 생겼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로봇을 못마땅하 고 당혹스럽게 여겨 거리를 두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치료용 아기 물개 로봇 파로뿐 아니라,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욕 조에서 침대로 옮기는 간호 로봇 로베어 obear, 춤을 가르치는 휴머노이 드 로봇 팔로all 등을 개발해 받아들이고 있다.
- 흔히들 이런 환상을 품는다. 기술이 진보하면 성에 차지 않는 지루하고 따분한 업무는 기계가 맡고 사람은 의미 있는 업 무만 맡을 터이므로, 일이 더 흥미로워지리라. 기계 덕분에 우리가 일에 서 벗어나 “정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무엇인가를 하리라.” (이 생각은 우리가 가동화를 말할 때 사용하는 바로 그 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로봇이라는 말 의 어원은 체코어 'robota' 로,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착각이다. 이미 볼 수 있듯이, 기술 진보가 인간에게 남겨 둔 일은 대부 분 노동시장 밑바닥의 저임금 일자리에 몰려 있는 틀에 박히지 않은 업무로, 많은 사람이 자동화의 손이 미치지 못하리라고 상상한 활동, 성 취감을 느낄 수 있는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미래는 이와 다르리라고 생각할 까닭도 없다.
- 마찰적 기술 실업이라는 개념은 일의 미래와 관련한 더 극적인 모습, 그러니까 그저 일자리가 사라지는 모습과는 다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마찰적 기술 실업이 진정한 기술 실업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노동 자가 적절한 숙련 기술을 배우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거나, 일이 있는 곳으로 이사하기만 한다면 마찰이 사라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근거로 문제를 묵살한다면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다. 이론으로는 마찰적 기술 실업이 일시적인 사안일 뿐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런 마찰을 해결하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동자의 처지 에서 보면, 손에 닿지 않는 일자리는 일자리가 아예 없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는 경제의 다른 곳에 고용이라는 섬이 있다는 이야기가 동화와 다를 바 없이 들릴 테니 말이다.
- 깊이 새길 교훈이 있다. 카스파로프는 자신의 체스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과 기계가 결합한 동업자 관계가 체스뿐 아니라 모든 경제 분야에서 승리할 공식이라고 선언했다. 많은 사람이 이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알파제로의 승리에서 보듯이 이는 틀린 생각이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기계가 인간 동업자가 기여하는 몫을 수행할 수 없을 때만 힘을 얻는다. 하지만 기계의 능력이 갈수록 향상하므로, 인간이 기여할 몫이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이런 동업자 관계가 끝나고 만다. 즉 '인간과 기계'에서 '인간'이 쓸모없어진다.
- 위에서 다룬 모든 주장을 공통으로 관통하는 한 가지 맥락이 있다. 일의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인간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제가 성장하고 바뀌면 어떤 상품이든 그 상품을 생산할 업무를 수행 할 가장 적합한 선택지가 보나마나 당연히 인간이겠거니 생각할 때가 너무 많다.
나는 이것을 '우월성 추정superiority assumption'이라 부른다. 역사에서 보완 하는 힘이 강하게 작용했던 다양한 사례를 들어 미래를 낙관할 때, 이런 추정이 바삐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업무의 생산성이 높아지면, 그 업무를 수행하기에 인간이 기계보다 유리하리라고 믿는다.
- 경제의 파이가 더 커지면, 새로 수요가 생긴 업무를 수행하기에 인간이 기계보다 더 유리하리라고 믿는다. 경제의 파이가 탈바꿈하면, 그에 따 라 새로 생겨난 업무를 수행하기에 인간이 기계보다 더 유리하리라고 믿는다.
지금까지는 우월성 추정이 들어맞을 확률이 높았다. 어떤 업무의 수요 가 늘어나면, 그 업무를 맡기에 기계보다 인간이 유리할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노동자를 찾는 수요도 늘어났다. 하지만 업무 잠식이 이어져 기 계가 인간에게서 갈수록 더 많은 업무를 앗아가면서, 이 추정이 갈수록 미심쩍어 보인다. 그리고 언젠가는 끝내 틀린 추정이 될 것이다.
- 19세기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lohn Stuart Mil이 일과 관련하여 남긴 말이 있다. “재화의 수요가 곧 노동의 수요는 아니다. 밀이 일의 미래를 염 두에 두고 이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염두에 뒀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재화' 즉 상품과 서비스의 수요가 곧 언제나 노동 수요는 아니다. 사실은 그런 재화를 생산하고자 수행해야 하는 업 무의 수요일뿐이다. 우월성 가정이 맞는다면 그런 업무를 실제로 인간 이 맡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런 업무는 인간의 몫이 아닐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생산성 효과 때문에 어떤 업무에서 인간의 노동을 찾 는 수요가 올라갈지는 몰라도, 인간보다 능력이 더 뛰어난 기계가 인간 을 밀어낸 뒤에는 이 유익한 효과가 사라진다. 파이 확대 효과가 어떤 업무에서 노동 수요를 늘릴지는 몰라도, 인간이 기계에 밀려난 뒤에는 이 유익한 효과도 사라진다.
- 어떤 영역에서 인간의 노동을 찾는 수요가 떨어질지라도 처음에는 일의 양이 아니라 일의 성격 이를테면 임금, 일자리의 질, 지위가 먼저 바뀌리라는 점이다. 그러다 마침내 일자리의 수가 영향을 받는다. 레온티예프의 말대로, “말의 먹이를 줄이면 말이 트랙터에 대체되는 속도를 늦출 수 있듯이, 노동자의 임금이 내려가면 기계에 대체되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대체 과정을 잠시 늦출 뿐이다. 기계의 능력이 계속 갈수록 향상하면, 많은 사람이 끝내는 일에서 밀려날 것 이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써 벌어지고 있음을 몇몇 경제학자들이 데 이터로 확인했다. 대런 애쓰모글루와 파스쿠알 레스트레포가 1990년부 터 2007년까지 미국의 산업 로봇 사용 현황을 살펴봤더니, 오늘날에도 대체하는 힘이 보완하는 힘을 앞질러 경제 전반에서 노동자 수요를 줄이는 사례가 있었다. 기억하는가? 신기술을 생각할 때 우리는 ATM 사 례와 같은 이야기를 익숙하게 떠올린다. 기계가 어떤 사람을 일자리에서 밀어내기는 하지만 다른 곳에서 노동 수요를 높이므로, 전체 고용률은 그대로이거나 심지어 오르기도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산업 로봇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평균으로 볼 때 노동자 1,000명 당 로봇 한 대가 늘수록 전체 경제에서 일자리가 5.6개씩 사라졌고, 임 금도 0.5퍼센트씩 내려갔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모두 10년도 더 전인 2007년에, 그러니까 앞에서 언급한 기술 향상 대다수가 일어나기도 전 에 벌어졌다.
- 레온티예프는 인간이 말과 똑같은 운명 즉, 실업을 마주하리라고 경고했다. 오늘날 레온티예프를 비웃는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 만 앞으로 몇십 년 안에, 그가 저 하늘 위 경제학 학회에서 우리를 내려 다보며 비웃을 것이다. 케인스가 기술적 실업을 예측할 때 그랬듯, 레온티예프도 시기를 잘못 판단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대단한 선견지 명으로 최종 목적지를 내다봤다. 오늘날 우리가 '마력'이라는 단어를 쓸 때 짐수레를 끄는 말의 견인력이 중요한 척도였던 시절을 떠올리듯이, 미래 세대들도 '인력'이라는 용어를 쓸 때 인간이 자신을 경제적으로 무척 중요한 존재로 여겨 측정 단위로 쓰는 영예를 스스로 부여했던 시절이 남긴 유산을 되돌아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능력과 기계의 능력을 비교할 때 우리는 우 월성 추정'이라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대다수 작업을 수행할 주체 로 처음부터 인간이 아닌 기계를 가정하는 상황에서는 기술과 일의 관계 를 생각하기에 더 적합한 시작점이 결국 '열등성 추정'일 것이다. 경제학 자들은 인간의 노동을 찾는 수요가 언제나 충분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인상 깊은 추론들을 무기고에 착착 쌓아 왔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런 주장들은 경제가 성장하고 바뀌면서 수요가 생기는 업무가 무엇이든 간에 그 업무를 수행하기에 인간이 기계보다 여전히 유리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끝나면 그래서 기계가 우리 인간의 자 리를 차지하면, 그런 주장들이 이용했던 무기가 우리를 겨냥해 왜 언제나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기계 작업을 찾는 수요가 더 많은지를 설명할 것이다. 이 장에서 정리한 기술적 실업의 위협은 말 그대로 예삿일이 아닌 듯 들린다. 오늘날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예외 현상처럼 보인다. 하지 만 잠시 뒤에 보듯이, 이는 매우 옳지 않은 생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술적 실업이 일으킬 위협은 이미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 는 어떤 문제가 더 극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 하다. 그 문제는 바로 불평등의 증가다.
- 불평등이 일으키는 현상과 기술적 실업이 일으키는 현상은 아주 밀접하게 관련한다. 대다수 사회는 경제의 파이를 나눌 때, 어떤 사람이 인적 자본을 소유하는 전통 자본을 소유하는 시장을 이용 해 그 자본에 대가를 지급하기로 했다. 불평등은 어떤 사람이 소유한 자본의 가치가 다른 사람의 자본보다 훨씬 떨어질 때 생긴다. 기술적 실업은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가치 있게 거래되는 자본을 전혀 소유하지 못할 때, 달리 말해 가치 있는 인적 자본은 확실히 없고 전통 자본도 없을 가능성이 클 때 생긴다. 그러므로 현재 존재하는 불평등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주변에서 이미 일어나는 현상에 비춰 일이 부족한 세상이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은 내일 기술적 실업이 나타날 것을 알리는 경고다.
- 앞에서 있듯이 세계 곳곳에서 불평등이 커진다는 큰 이야기 아래에는 세 가지 다른 추세가 있다. 첫째, 사람마다 다른 숙련 기술에 따라 보상 수준이 그게 다르므로 인적 자본이 길수록 덜 고르게 분배된다. 따라서 노 등 자에게 임금 형태로 돌아가는 파이 부분이 갈수록 불균등하게 나뉜 다. 둘째, 전통 자본에 비해 인적 자본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점점 더 줄어든다. 따라서 임금 형태로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파이 조각이 전통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조각과 비교해 무척 작아진다. 셋째, 전통 자본 자체가 터무니없이 불공평하게 분배되어 불평등이 최근 몇십 년 동안 더 뚜렷하게 커졌다. 이런 추세가 언제나 모든 곳에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영국에서 노동 소득 분배율이 실제로 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미국과 달리 중부 유럽과 일본에서는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소득 분배율이 실제로는 20세기 동안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 선사시대 조상들은 삶의 의미와 일이 서로 묶여 있다는 생각을 매우 희한하게 여겼을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수렵 채집인이 틀림없이 허리가 휘도록 일에 매여 살았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이들의 노동량은 대체로 “놀랍도록 적었다.” 경제 사학자 그레고리 클라크 Gregory Clark가 현대의 수렵 채집인 사회를 살펴본 여러 연구를 검토해 봤더니, 이들이 노동에 참여한 시간은 오늘날 영국 남성 노동자의 평균 노동 시간보다 한결같이 적었다(클라크가 일로 정의한 대상은 돈을 받는 노동뿐 아니라 공부, 집안일, 육아, 미용, 쇼핑, 출퇴근까지 포함한 다). 클라크가 파악한 데이터에 따르면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수렵 채 집인은 영국의 풍요로운 현대 사회에서 사는 노동자에 견줘 여가를 한해 평균 1,000시간 넘게 더 누린다.
수렵 채집인이 삶의 목적과 성취감을 일에서 찾았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들은 삶의 의미를 다른 곳에서 찾 았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인류학자 제임스 수즈먼ames Suzman 의 말 대로, “수렵 채집 사회가 보여 주는 증거로 보건대 ... 우리 인간은 삶에 서 노동으로 정의되지 않는 성취감을 충분히 느낄 줄 안다.”
고대에도 일을 바라보는 태도가 오늘날과 달랐다. 그때는 일을 의미 있는 행위가 아니라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으로 여기기 일쑤였다. 고대 이집트 도시 테베에서 공직을 얻으려면 이전 10년 동안 장사를 하지 않 은 사람이어야만 했다. 시장에서 상품을 만지는 것도 금기로 여길 만 큼 더럽게 여겼다. 용맹한 전사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스파르타에서는 시민들을 전사로 키웠으므로, 법에 따라 생산 노동을 멀리하게 했다. 장사는 스파르타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맡았고, 육체노동은 국가가 소유한 엄청나게 많은 노예가 맡았다.
- 플라톤은 이상 국가의 청사진을 그릴 때, 기술공의 계층 이동을 제한 해 이들이 국정 운영에 참여할 기회를 차단했다. “그지없이 질서정연한 국가라면 기술공이 시민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리스 토텔레스도 “시민이라면 기술공이나 장사꾼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 그 런 수치스러운 삶은 시민의 탁월함을 해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 레스는 삶의 의미를 오로지 여가에서만 얻을 수 있고 일은 여가를 얻고 자 치르는 대가일 뿐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여가를 즐기고자 일한다. 평 화를 누리고자 전쟁을 일으키듯이 말이다. 실제로 '일'을 뜻하는 그리 스어 ascholia(아스콜리아)는 말 그대로 “여가(schole)가 없는(a-) 상태를 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그리스인에게는 여가가 먼저였다.
고대 신화와 종교 경전에서도 일을 의미 있는 삶의 원천이라기보다. 형벌로 그릴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 는 신을 속여 살코기 대신 뼈다귀를 제물로 받도록 했다. 이 평범한 인 간의 속임수에 화가 치솟은 제우스는 모든 인간에게 일을 벌로 내린다. 시인 헤시오도스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들이 인간에게서 삶 의 수단을 앗아가 감췄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딱 하루만 일해도 한 해 내내 먹고살 만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약아빠진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화가 치민 제우스가 그 수단을 감췄다.
- 철학자이자 본인이 영국 귀족이기도 했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은 유명한 평론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에 자기와 같은 부유층을 어떻게 보는지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일이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믿 음이 현대 사회에 엄청난 해를 끼친다. 행복과 번영으로 가는 길은 일을 체계적으로 줄이는 데 있다.” 러셀이 보기에 유한계급은 “우리가 문명이 라 부르는 거의 모든 것에 이바지했다. ... 유한계급이 없었다면 인류는 결코 미개함을 떨쳐 내지 못했을 것이다. 러셀은 누구도 하루 네 시간 넘게 일하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이 마음껏 예술, 과학, 문학, 경제학에 전념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 우리 대다수는 유익한 고용 상태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하지만 유익한 실업 상태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고는 말할 수 없 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의 말대로 우리는 “노동이라는 족쇄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노동자 사회에서” 산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런 자유를 얻어낼 만큼 값진 더 고귀하고 의미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케인스가 걱정한 대로 "어떤 나라도, 어떤 사람도 여가의 시대와 풍 요의 시대를 두려움 없이 기쁜 마음으로 기대할 능력이 없다. 우리가 즐 기기보다 죽어라 애쓰도록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 존 스튜어트 밀은 물었다. “사회가 산업 발전을 이용해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발전이 멈출 때, 우리는 어떤 상태에 놓일까?” 아마 우리는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정부가 역할을 하기를 바랄 것이다. 지금껏 현대의 정치 세계는 이와 같은 철학적 물음을 교묘히 피해 왔다. 20세기에는 사회 대다수가 경제의 파이를 되도록 크게 키우자는 목 표를 추구하는 데 동의했다. 아이제이어 벌린이 쓴 대로, “목표에 합의하면, 남은 문제는 수단뿐이다. 이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 문제다. 달리 말해 기술자나 의사들 사이의 논쟁처럼 전문가나 기계로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제적 목표에 집중한 우리는 그 파이가 얼마나 끈질기게 커질지를 알고자 현대의 기술자에 해당하는 경제학자들에게 지금껏 의지했다. 하지만 일이 줄어든 세상에서는 근본적인 목표를 다 시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그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잘 사느냐'다. 그때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정말로 어떤 뜻인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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