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심리학

심리 2023. 8. 11. 16:11

- 셰익스피어 shakespeare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각자 주인공으로서 인생이라는 무대에 올라 자기가 맡은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뽐내고 안달한다. 하지만 특등석에서 지켜보던 죽음의 신은 언제든 그 무대 에 오를 수 있고, 그날이 오면 먼저 떠난 수십억 명이 그랬듯 나도 관 객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맥베스의 대사처럼 나는 "영영 사라져버린다."
-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가 가장 먼저 말했 듯,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필연성을 중립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나만 은 다르길 원치 않아야 한다. 지금은 과학의 진보 덕분에 잘 알려졌듯 이, 인간은 오래된 돌덩이 위 희박한 대기 아래서 시간당 10만km 속 도로 우주를 질주하다 언젠가 생명의 별이 지면 죽음을 마주하는 어설픈 유인원일 따름이다.
- 세계 여러 지역은 이제 '버리기 사회 throwaway society'가 됐다. 선진국에서는 TV 하나를 10년 이상 쓰지 않는다. 방마 다 설치된 스크린을 철마다 시장에 나오는 더 번지르르하고 얇고 큰 모델로 교체한다. 삶의 많은 영역에서 오래 써야 할 상품도 소모품 취 급을 받고 있다. 한 흥미로운 실험 연구에 따르면, 이와 같은 소비의 열기는 무의식적 죽음의 공포와 연결되어 있다. 28 미묘하고 숨겨진 방식으로 죽음을 떠올리게 하면, 물건을 사고 싶은 욕구가 극적으로 증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놀랄 일은 아니다. 돈을 벌고 쓰는 것이 현대 문화에서 곧 성공의 상징이다. 결국 항문이 달린 신은 위대한 존 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웃보다 앞서고 싶은 욕망, 왕이나 여왕으 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소비지상주의를 자극한다. 구매는 승리를 의미하니까.
- 인간은 죽음과 어둠을 두려워하는 한,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하는 한, 신을 창조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의식을 발명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가 될지 알 수 없다.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1949~2011))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일신교인 유대교는 4,000년 전 중동에서 시작됐다.  오늘날 유대인은 약 1,500만 명으로 파악되는데, 유대인 3분의 1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홀로코스트가 아니었다면 이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유대교의 신성한 경전 모음을 '타나크Tanakh' 라고 하며, 여기에는 (기독교인에게는 '구약'으로 알려진) 히브리어 성경의 첫 5권인 토라Toran가 포함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삶의 유한성에 대 한 해답은 신이다.  성경은 야훼가 "죽음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당시 죽음 후의 삶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고대 그리스와 로마부터 이어진)은 도 덕적으로 살았든 부패한 삶을 살았든, 모든 영혼이 같은 목적지로 향 한다는 것이었다. 내세 유대교의 '쉐she'ol)에서 살인자와 범죄자의 영 혼은 독실한 신자, 귀족, 여성과 나란히 어울릴 수 있었다.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토라의 일부 구절에 반영된 이러한 신념에 의문을 품었 다.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수의 종교에 굴 복하여 믿음을 버린 사람도 있는데, 정의의 하느님이 어떻게 이들에 게 같은 내세를 허락한단 말인가?
제2성전 시대(예루살렘에 제2성전이 존재했던 기원전 516년에서 서기 70년 까지의 시기 -역주) 이후로 히브리어 경전에는 개념적 전환이 일어났다. 내세에 모든 영혼이 공존한다는 개념에서 초점이 바뀌어 정의로운 자/사악한 자의 분리와 부활이 강조됐다. 히브리어 경전에 다음과 같 은 내용이 있다. "지구의 먼지에 잠든 자들이 깨어나 어떤 이는 영원 한 삶을 누리고 어떤 이는 수치 속에 영원한 경멸을 받을 것이다. 또 한 현명한 자는 저 높은 하늘과 같이 빛날 것이며, 많은 사람을 올바 른 방향으로 이끈 자는 영원한 별처럼 반짝일 것이다."28
유대교 '부활'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영혼의 불 멸성에 대해서는 보편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만, 일부 유대교 학자는 죽은 자가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형태로 부활한다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12세기에 활동했던 영향력 있는 유대교 철학자 마이 모니데스Maimonides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유대교 신앙의 13계명 중 하 나일 정도로 유대교의 핵심이었다고 확신한다.  유명한 신학자였던 그는 유대교가 설명하는 내세관의 저의가 불 보듯 뻔하다고 주장했다. "다수가 신념을 지키고 계율을 따르게 하려면 보상을 바라도 된다고 말해줘야 했다."
유대인들이 형벌과 학대의 역사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것을 보 면 믿음의 대가로 주어지는 영생은 귀중한 동기부여였던 듯하다. 기 원전 1세기에 글을 썼던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로마인의 고문을 견디는 유대인이 "고통 속에서도 미소 짓고 고문하는 자를 옅게 조소했으며, 결국 돌려받을 것을 굳게 믿은 채 기쁘게 영혼을 내려놓았다"고 칭송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유대교의 믿음과 관습에는 여전히 영생이 단단히 엮여 있다. 
- 이론적으로 예측한 바와 같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 사회의 가장 합리적인 구성원조차 문화적 가치에 도전하는 사람을 최대한 벌하려 한다. 판사들에게도 일반 대중에게도, 범죄 행위는 잘못된 것이고 벌을 받아야 한다. 문화적 가치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행동 규범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이고 공정한 의사결정이 직무인 판사도 그렇게 쉽게 죽음 의 힘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을 까? 우리 누구든 죽음을 상기하면 문화에 위협이 되는 사람을 공격할 것이다. 
- 불편한 결론이지만, 다른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떠올린 인간은 나의 문화적 신념에 도전 하는 사람을 해치려고 하며 내가 믿는 가치 체계와 문화를 완강히 밀어붙인다. 정치적 관점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료 학생을 고의로 해칠 수 있다면, 낯선 사람에게는 훨씬 더한 짓도 할 수 있지 않을까?
- 이란 실험에서 얻은 결과와 비슷하게, 자신의 죽음을 떠올린 미국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극단적인 군사 행동에 찬성했다. 죽음 현저성에 노출된 집단은 평균적으로 타국에 대한 선제공격, 핵 무기 및 화학무기 사용, 애국자법을 지지하는 정도가 높았다. 흥미롭 게도 참가자들의 정치적 지향은 중요한 변수였다. 정치 성향이 진보 적이라면 죽음 현저성 노출 여부와 관계없이 군사 행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군사적 개입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보 적 세계관 때문일 것이다. 반면 죽음을 떠올린 보수 성향 참가자들은 더 공격적인 문화적 세계관을 옹호했는데, 실험실의 통제된 환경에서 그 방법은 국가를 위협하는 대상을 처단하고 국가를 보호하는 행위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것뿐이다. 이번에도 죽음을 상기한 사람이 문화적 세계관에 집착하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자유주의자들은 관용을, 보수주의자들은 공격을 지지했다. 또한 연구진은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는데, 테러리즘에 대해 생각한 (9.11 테러를 떠올린) 집단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 사람들과 동일하게 행동했다. 사건으로부터 5 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9.11 테러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강력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했다.
-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죽은 뒤에도 지속될 문화적 신념을 강하게 지지하여 상징적 불멸성을 얻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 한 강력한 해독제다. 그러나 문화는 변하기 쉬우며, 오늘날 우리 문화 가 떠받드는 가치가 100년 후에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누가 문 화적 중요성과 상징적 불멸성을 얻는가의 기준은 계속 변화한다. 불 과 200년 전 미국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성공한 노예 상인이 명성을 떨쳤다. 문화적 세계관이 달라진 오늘날, 그런 사람들의 동상은 해체 되고 있다. 문화적 관습과 신념의 영구성을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념 체계의 지속에 기대지 않고 불멸성을 얻는 더 직접 적인 방법이 있을까? 내가 한때 살아 숨 쉬었다는 영구적 증거로 이 세계에 실재하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불멸성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 출간되지 않은 히틀러의 두 번째 책에 는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나온다. "평범한 자는 죽 음을 가장 두려워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비범한 자는 죽음에 대해 끈질기게 생각하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은 가장 적다."
히틀러는 천년의 제국을 세우고 이전에 존재한 어떤 문명과도 당 당히 비견할 만한 세계 수도를 건설하는 일에 몰두하며 죽음의 공포 를 누그러뜨렸다. 모든 이의 머리 위에 드리워질 지붕과 지구상의 어 떤 유사 건축물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개선문을 꿈꿨다. 그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유산을 남기길 원했다. 다행히도 게르마니아는 결국 꿈으로만 남았다.
히틀러처럼 거대한 건축물을 통해 불멸성을 얻고자 했던 사람들 은 대부분 평생을 바쳐 꿈꾼 바를 결국 이루지 못했다. 파라오 쿠푸처 럼 이를 성취한 일부의 경우를 보아도 여기에 쏟아부은 수많은 사람 의 노력을 생각하면 보상은 어쩐지 공허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영원 히 숭배되는 건물을 지으려 애쓰는 것보다 쉽게 실존의 문제를 해결 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불멸의 건축물은 아무리 창조적인 사람이라 해도 실현하기 너무 힘든 목표다. 이보다 훨씬 간단한 형태의 치료는 창작물 자체에서 죽음과 인간의 필멸성을 다루는 것이다. 이를 전략으로 삼는다면 오래도록 전해질 문학 작품이 가장 확실하다.
- 유령처럼 한때 사람이었던 불멸의 존재에 대한 집착에는 분명 더 심오한 동기가 있다. 유령을 믿는 미국인은 절반이나 되지만, 늑대인간 등 다른 신화 속 존재를 믿는 사람은 훨씬 적은 데 는 이유가 있다. 순수하게 무서움을 즐기는 것이라면 늑대인간의 이 야기도 뱀파이어나 유령 등 한때 인간이었던 불멸의 존재 이야기만 큼 많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죽어서 묘지로 간 이후에도 살 수 있 다고 믿고 싶은 내적 욕구 때문에 유령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다. 인간 은 스스로 키운 내면의 감각적 의식과 연결된 '자아'를 놓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했던 사람을 놓아주지 못한다.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 하고, 그가 죽은 뒤에도 존재하길 바라는 압도적인 열망을 느낀다. 윌리엄 리스William Rees는 이 부분을 연구했다. 그는 의사 생활을 했던 웨일스 지방의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놀 랍게도 사별한 사람 중 60%는 죽은 배우자를 영혼이나 유령 등의 형 태로 '만났다'고 믿었다.36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접촉했 다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도 이들은 이러한 만남을 긍정적으로 묘 사했다. 인간에게는 죽음을 부정하고 나 자신과 사랑했던 모든 것이 지속되길 바라는 간절한 욕구가 있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가까이에서 나를 자애롭게 내려다보며 관심을 쏟길 바란다
- 삶을 사랑과 죽음의 경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물론 언제나 죽음이 이긴다. 그러나 사랑은 그 승리를 공허하게 만든다. 그것이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다. (로버트 웹(Robert Webb, 1972~))
- 지금 우리에겐 너무나 명백하지만, 당시에는 혁명이었다. 심리학자 들은 이전 수십 년간 부모의 사랑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해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저명한 행동 심리학자 존 왓슨John Watson은 1928년 엄청나게 팔린 육아 지침서에서 이렇게 조언했다. "아이를 토닥여 주 고 싶어질 때면 엄마의 사랑이 위험한 것임을 기억하라. 너무 많은 입 맞춤을 받은 아이의 인생에는 심각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할로우 의 원숭이들은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넘치는 사랑이 아니라 모자란 사랑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히말라야 원숭이 실험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애착일 수 있다는 것이다.
- 가완디는 오늘날 우리가 "삶이 기울어가는 날들을 정신을 흐리고 신체를 무너뜨리는 가망 없는 치료에 허비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병원에서 죽음과 전투를 치른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신과 싸 워 이기려고 무슨 짓이든 한다. 노인을 집과 가족에게서 분리해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낯선 장소로 보내야 한다 해도, 방문자 수가 제한된 격리 병원에 가둬야 한다 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부자연스럽고 잘못됐다. 여러 국가, 문화, 시대에 걸쳐 인간은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집단에서 살고 죽었다. 아직 그 전통을 유지하는 문화권도 있지만 서양에서는 드문 일이 되었다. 죽어가는 환자는 병실에 틀어박혀 홀로 사신을 만난다.
- 자존감의 기준은 외부와 단절된 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 하다. 문화가 그 기준을 만들어낸다. 우리 문화가 명품 옷과 고급 승 용차에 성공의 이미지를 포장하여 판다면 우리는 사회의 소중한 구 성원이라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물질을 좇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성공은 최고의 사냥꾼이 되는 것이라고,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는 것 이라고, 또는 최고의 운동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 또 그것을 열렬히 추구할 것이다. 자존감과 문화적 세계관은 같은 동전의 양면 이다.
- 자존감이 높으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의 일반적 영향에 면역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는 아니다. 공포 관리 이론이 말하듯 실제로 자존감이 존재론적 공포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진화했다면, 죽음을 떠올렸을 때 자존감에 대한 욕구가 강해져야 한다. 즉, 내가 썩어 없어지는 존재임을 상기한 후에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느낄 만한 일에 관심이 커져야 한다. 연구에서 나타난 결과는 이러한 예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  정부에서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금연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죽음을 직접 논하는 시각 적인 건강 경고는 효과가 없고, 최악의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뿐 이다. 수십 년의 공포 관리 이론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상기한 인간은 자존감을 높이는 데 집착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죽는다 는 사실을 떠올리면 인간은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하며 상징 적 불멸성에 매달린다. 흡연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에 담배를 집어 들기도 하고, 선탠의 위험성을 알면서 해변으로 향하기도 한다. 인간은 말 그대로 죽도록 자존감을 높이려 한다.
- 문화는 무엇보다도 시신을 어떻게 흙으로 돌려보낼지에 대한 결정이다. (모코코마 마코노아나(Mokokoma Mokhonoana, 1985~),
<비관주의의 기록: 우습지만 심오한 격언 모음(P for Pessimism: A collection of funny yet profound aphorisms)》)
- 다양한 장례 의식의 핵심은 비슷하다. 어떤 공동체는 죽은 자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시신을 먹고, 또 다 른 공동체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유골을 파헤친다. 어떤 문화권에서 는 내세에 도달하는 것을 돕기 위해 망자를 미라로 만들고, 다른 문화 권에서는 같은 목적으로 불에 태운다. 장례 관습의 세부 사항은 시대, 종교, 정치, 지리적 위치에 따라 매우 다르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다. 가장 흥미로운 장례 관습들 을 돌아보면 하나의 선명한 그림이 완성된다. 죽음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전 세계 인류의 투쟁이다.
- 순전히 더 나은 내세를 얻기 위한 복잡한 장례 의식의 사례는 즉 신불 말고도 또 있다. 조장sky burial이라는 불교 의식의 목적도 비슷하 다. 티베트 전역에서 수행되는 조장은 산꼭대기에 시체를 두어 독수 리 등의 동물에 뜯어 먹히게 하는 것이다. 환생을 믿는 불교는 유대교 와 기독교 전통에 비해 시신을 훨씬 덜 중요하게 생각한다(2장 참조). 조장은 너그럽게 자신의 썩어가는 몸뚱이를 음식으로 내놓음으로써 좋은 카르마를 쌓으려는 최후의 노력이다. 마침 그날 새들이 배가 고 프지 않다면 틀림없이 하찮은 존재로 환생할 불길한 징조로 여겨진다. 힌두교, 불교,자이나교는 화장이 물리적 형태에서 영혼을 해방하여 다음 생으로 보내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식이라고 본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 역시 매장도 했지만 화장으로 시신을 처리하는 사례가 가장 흔했다. 이들 고대 사회에서는 시체의 몸이나 입 안에 동전을 넣 었는데, 이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를 가르는 스틱스강을 건너도록 망자를 안내하는 신화 속 뱃사공 카론Charon에게 주는 편도 요금이었 다. 이 요금을 내지 못한 영혼은 사후세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유럽에서 기독교가 세력을 늘리면서 화장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신체는 부활과 영생의 필수적인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시체의 중요 성이 높아지며 매장 비율이 높아졌고, 매장은 유럽의 표준 장례 방식 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죽은 뒤의 시체 보존이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 처음은 아니다. 기독교보다 수천 년 앞서 이집트인들은 최고의 상태로 시체를 보존하여 내세를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미라화는 완전한 보존을 추구하며 발명된 기술이었다.
- 방부 처리의 실제적 이점이 없다면, 왜 이런 복잡한 단계를 거쳐 야만 할까?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서 내장에 구멍을 뚫고, 와이어로 살을 찔러 고정하고, 발암성 화학 물질을 주입하는 모 든 과정의 목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시신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시신이 시신처럼 보이는 데 저항감이 심 한 나머지 이를 막으려고 1,000달러에 가까운 비용을 들인다. 18 박테 리아가 죽은 세포를 분해하고 심장이 혈액을 순환시키지 않아 얼굴 근육이 풀어지고 피부가 창백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는 시신에 독극물을 잔뜩 주입해서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어서 말끔하게 옷을 입히고 뺨과 입술을 화장품으로 붉게 칠한 다음 조문객 앞에 내보인다. 심지어 시신을 나무 관에 바로 눕히지 않고 고급 천과 부드러운 쿠션을 댄다. 화려한 장례 침 구는 부정의 마지막 시도다. 죽은 사람에게 벨벳으로 만든 시트와 쿠 션이 왜 필요하겠는가? 확실히 애도를 받는 사람보다는 애도하는 사 람을 위안하는 장치다.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트Jerry Seinfeld의 농담처럼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죽은 사람에게 베개를 준다는 것이 그 증거다. "
지난 세기 북미의 장례 절차를 지배했던 방부 처리는 죽음을 부정 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수용을 거부하고 아름다움을 택한다. 삶의 끝자락에서 망자의 자연스러운 외양을 받 아들이기보다는 시신에 구멍을 뚫고 물감을 칠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수천 년 전 배를 타고 내세로 간다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의 관습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조금이라도 진보했다고 볼 수 있을까?
- 말라가시 사람들은 왜 파마디하나의 전통을 이어갈까? 복수심에 불타는 망자를 달래기 위해서라고 한다. 파마디하나는 조상의 영혼 을 달래고 무덤에서 저주하는 것을 막는 방법이었다. 조상을 무시하 는 것은 자신이나 자식의 죽음을 부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기억할 만 한 조상의 죽음을 기리는 것에는 다른 목적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에 게 불멸의 느낌을 주는 것이다. 파마디하나 의식을 연구하는 인류학 자들은 이를 "타인의 대리를 통해" 불멸을 추구하는 기회라고 설명한 다.  소중한 고모할머니의 시신을 파내어 끌어안으면서 언젠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해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확신하는 것이다. 몇 년에 한 번은 누군가 나와 함께 춤추고 나를 소중히 안아주며, 무덤의 으스스한 어둠 속에서 내 뼈와 먼지가 나타났을 때 후손들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보다 개인적 수준에서는 이 미 죽은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그들이 여전히 함께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시신을 꼭 끌어안고 빙빙 돌며 최근 소식을 귀 에 속삭이고 속세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해준다. 수의를 갈면서 죽은 사람이 좋아하던 선물을 주기도 한다. 삼촌에게 담배 한 갑, 엄마에게 는 새 립스틱, 아이에게는 포장한 사탕. 몇 년마다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그렇게까지 끔찍하지는 않 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 너무 강렬하기에 바 스러지는 뼈가 한낱 먼지가 될 때까지 땅에서 파내어 품에 끌어안는 것이다.
- 우리는 말라가시 부족이 아니지만 죽은 사람과 연결되고 싶은 충 동은 똑같이 경험한다. 전 세계 문화에는 죽은 자의 유해와 접촉하는 의식이 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망자의 직계가족이 시신을 목욕 시키고 흰 면으로 만든 수의를 입힌다. 딸이 어머니를, 아들이 아버지 를 씻긴다. 일본의 코츠아게는 가족들이 화장한 잿더미에서 젓 가락으로 뼛조각을 줍는 의식이다. 재를 담기 전에 뼛조각을 하나하 나 조심스레 주워 작은 항아리에 담고, 이것을 따로 집에 간직한다. 애착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강력하고 보편적이다. 어떻게든 죽은 자 와 물리적으로 가까워지고 망자와의 유대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많 다. 이러한 욕구는 언제 문제가 될까? 때로는 죽은 이모와 가끔 춤추 는 것보다 훨씬 이상한 일도 일어난다.
- 애도의 슬픔을 절대 겪고 싶지 않다면 애착을 전혀 갖지 않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면 행복도 누릴 수 없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
-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집에 두는 데는 정서적 이유도 있지만 현실적 이유도 있다. 토라자의 장례식은 인생에서 가 장 중요한 날이다. 중산층의 평범한 장례식에도 5,000명 정도가 참석 한다. 여기 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해서 장례식을 준비하는 데 몇 년이 걸린다. 장례식에 필요한 선물과 제물로 바칠 동물을 구하려면 가족 들은 연봉의 최대 5배를 저축해야 한다. 토라자에서는 소를 잡고 매우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지 않으면 영혼이 사후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안 시신은 다른 가족과 마찬가지로 보살핌을 받으며 집에 머무른다.
심지어 매장이 끝난 후에도 토라자 사람들은 말라비틀어진 시신 과 곧 다시 만난다. 몇 년마다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어 수의를 벗기고 돌보는 마아네네ma'nene (시신 씻기기 의식)라는 의식이 있다. 토라자 사람 들은 시신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대하는데, 죽었다고도 하지 않고 마 쿨라macula(아픈)'라고 표현한다. 가족들은 죽은 자에게 행동 하나하나 를 설명하고(“이제 겉옷을 벗겨 드릴게요. 새 코트를 샀거든요.") 묻혀 있는 동 안 일어난 일을 말해준다("당신 딸이 다음 달에 농부와 결혼해요."). 시신은 산사람처럼 세워 둔다. 시신을 돌보는 행위는 여러 형태로 이뤄진다. 해골의 이에 담배를 물리기도 하고, 햇빛이 강하면 텅 빈 눈구멍에 선 글라스를 씌우기도 하며 벌레 기피제를 뿌려주기도 한다. 이때 방문 한다면 그리워했던 시신의 부서져가는 어깨에 한 손을 두르고 사진 을 찍는 가족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 1996년, 데니스 클라스Dennis Klass, 필리스 실버먼Phyllis Silverman, 스 티븐 닉먼steven Nickman은 지속되는 유대: 애도의 새로운 이해 Continuing Bonds: A new understanding of grief>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애도의 세계 를 뒤집어 놓았다. 저자들은 애도에 깔끔한 '단계'나 '순서'는 없으며, 살아가는 내내 형태를 바꿀 수는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지 속적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 소설가 앤 라모트 Anne Larnott Larnott의 표현을 빌려 설명한다.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을 잃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나쁜 소식은 이 상실을 절대 완전히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좋은 소식이다. 그 사람은 영영 다시 붙지 않을 나의 상처와 함께 영원히 살아간다. 물론 나도 회복한다. 이는 부러진 다리가 절대 완벽히 회복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날이 추워지면 다리가 다시 아프겠지만, 그 다리로도 춤추는 법을 배운다. 
클라스, 실버먼, 닉먼은 프로이트의 관점과 정반대로 죽은 사람과 의 유대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 해 유대를 끊을 필요가 없을뿐더러, 지속적인 유대가 상실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상실 을 견딘다. 망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유품을 간직하기도 하고, 망자의 무덤이나 사진에 말을 걸기도 한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의 유대를 유지하는 행동이다. 이 이론은 서구에서 많은 사람을 눈뜨게 했는데, 다른 문화권에서는 오히려 평범한 이야기였다. 사실 아시아와 남미 문화에서는 산 자들에게서 죽은 사람의 존재가 사라진다고 보지 않 는다. 죽은 사람은 여전히 산 사람과 함께 있으며 직간접적으로 소통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이런 문화권에서 죽은 자와의 유대 를 유지하는 기술은 매우 훌륭하다.
-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에서는 죽은 사람과의 유대를 이어가는 문화적 전략이 없다시피 하다. 사진 액자나 개인적으로 중요한 물건을 놓고 죽은 가족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문화에 깊이 배어들어 인구 절반이 행하는 의식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일본 에서는 죽은 남편의 존재를 느낀다고 답한 아내 비율이 90%였지만, 영국에서는 이 비율이 50%로 떨어졌다. 여성이 그런 증상을 호소했 을 때 어떻게 취급되는지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20세기 내내 이런 식의 애도는 병적이라고 치부됐다. 프로이트는 이들의 증세를 "희망 에 의한 환각적 정신병"이라고 말했다. 15 그러나 서구에서도 이후에 이뤄진 연구 결과, 죽은 사람과의 유대를 경험하는 사람이 슬픔을 더 잘 극복했다. 케이트 베넷Kate Bennett과 동료들은 2005년 수행한 연구 에서 남편을 잃은 영국 여성 92명을 인터뷰했다. 이 연구에서 참가 자둘 중 하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인사하거나 사진을 보며 말을 거는 식으로 죽은 배우자와 대화한다고 답했다. 
-  20세기 초중반에는 (운이 좋다면) 사진 한 묶음 정 도가 죽은 사람을 추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은 트 위터, 페이스북, 레스토랑 추천, 책 리뷰, 스포티파이 시청 목록 등 디 지털에 남은 흔적으로 우리 이미지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가 온라인에서 계속된다는 사후의 디지털 라이프는 조금 위 안이 된다. 그러나 이 기술이 불멸성의 환상을 가져다준다 해도 노후 화의 그늘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들 웹사이트는 시간 이 지나면서 망각의 묘지에 묻히거나 심지어 순식간에 흔적 없이 사 라질 수도 있다. 페이스북이 소셜미디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이 전에 성공적이었던 베보Bebo나 마이스페이스Myspace 같은 웹사이트는 완전히 밀려났다. 굿리드Goodreads에 자랑스럽게 올린 책 리뷰는 버튼을 한 번 클릭하면 사이버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2020 년 10월, 트위터에서 한 학자의 묘비 사진이 유명해졌다. 묘비에는 QR 코드가 새겨져 있어 스마트폰으로 스캔하면 죽은 사람의 출간물 과 인용 목록으로 이어졌다. 즐거움과 궁금증을 유발하는 창의적인 묘비였고 자기도 시도하고 싶다며 관심을 보이는 네티즌도 있었다. 그러나 QR 코드가 지금은 대유행이지만, 다른 형태의 기술이 나오 면 얼마나 빨리 대체될까? 그러면 묘비의 QR 코드는 쓸모없어질 것이다. 제대로 사용하면 기술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유대를 유지하는 한 가지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인간의 유한성 문제에 진정한 해결책을 제 공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가 계속된다는 개념은 유족들이 죽음에 대 처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자기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는 위안이 되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두려움이 극 심한 공포로 변해서 일상의 삶을 점점 더 침해하면 온갖 다른 문제의 가능성이 열린다
- 서서히 스며드는 정신질환은 치명적이다. 세계 곳곳에서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가난뱅이를 가리지 않고 놀라운 속도로 사람들을 쓰러뜨린다.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불러오고 목숨까지 앗아간다. 지난 몇 년간 필자들과 다른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죽음불안은 수많은 정신질환의 핵심이다.  이제는 환자가 죽음을 떠올렸 을 때 강박장애, 공황장애, 건강염려증, 공포증, 심지어 사회불안장애 같은 장애가 모두 심해진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우울증과 외상 후스 트레스장애PTSD도 죽음 현저성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연 구도 있다. 또한 죽음의 공포가 다양한 다른 정신질환의 심각성을 강 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정신 질환 치료에서 죽음의 공포가 직접 고려되는 일은 거의 없다. 치료사 들은 환자가 경험하는 특정한 표면적 공포를 극복하도록 돕는 데 집 중한다. 공황장애일 경우 심장마비의 공포를, 거미 공포증의 경우 거 미에게 물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해결하려 한다. 치료사들은 환자 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돕기보다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키려 한다. 최소한 그들이 걱정하는 방식으로는 죽지 않는다고 설명 한다. 통계 수치를 계속 보여주며 비행기 추락으로 죽을 확률이 얼마 나 낮은지, 손잡이를 잡았다가 HIV에 감염될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설명한다. 결국 환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은 망 각하고서 말이다. 환자들도, 필자들도,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흔히 사용되는 표준 정신질환 치료법에서는 심지어 그 주제를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환자들이 평생 새로운 정신 질환을 앓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정신건강의 위기가 찾아온 것도 놀랄 일은 아니지 않은가?
- 이 모든 것이 암울하게 들린다고 해도 절망하지 말자. 내 존재와 일상적인 활동이 무의미하다는 인정은 진짜로 살아가는 삶을 향한 첫걸음이자 실존주의 여정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신이 죽었 으니 인간만의 의미를 만들 수 있다. 열정으로 삶에 뛰어들고, 나만의 목적을 가질 수 있다. 그럴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목적과 의 미에 관한 연구 데이터를 기억하는가? 연구에서 의미 수치에 높은 점 수를 준 참가자 중에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목적 있는 존재가 되었고, 이는 다른 어떤 요인(정신질환 여부, 독실한 정도, 성별, 나이 포함)보다도 자살 경향을 확실하게 막아주는 요소였다. 니체는 “이것이 가능하며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10 나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목표다. 신이 죽어야 개인 으로 살 수 있다. 신을 섬기면 자신을 잃는다. 나를 다른 모든 타인과 구별할 수 없어지고, 신의 군대에 징집된 군인 1이 되어 그들의 북소 리에 맞춰 행진할 뿐이다. 그러나 니체의 은유대로 신을 죽이면 나는 나의 주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내 규칙에 따라 존재할 수 있다. 나보 다 중요한 것은 없다. 샌프란시스코 대학 철학자인 제라드 쿠페루스 Gerard Kuperus는 이렇게 깔끔히 요약했다. “무의미함은 고통을 초래하지 않는다. 신에게 바친 의미 있는 삶이 더 고통스럽다. 기쁨을 억압해서 만 얻어지는 (실재하지도 않는) 저 너머의 삶을 목표로 한 인생이기 때문 이다. 내세의 형태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환상을 넘어서야 고통에 서 해방되어 삶을 즐길 수 있다.”
-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는 좋은 죽음을 막는 장벽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심각한 오해를 극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른 문화적 편견인종주의, 성차별주의, 호모포비아- 역시 최근에야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죽음도 진실의 순간을 맞을 때가 되었다. (케이틀린 도티(Caitlin Doughty, 1984~),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유쾌하고 신랄한 여자 장의사의 좋은 죽음 안내서 (Smoke Gets in Your Eyes: And other lessons from the crematory)>>)
- 삶을 연장하고자 너무 많이 고민하는 자에게 걱정 없는 인생은 없다. 생명을 유지하려는 불안을 모두 지움으로써 기쁨 가득한 삶을 살아라. (세네카(Seneca, 기원전 4~기원후 65), <도덕 서신(Epistles)>)
- 에픽테토스는 이러한 접근을 잘 요약했다. “원하는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지 말고, 일어날 일이 일어날 것을 바라도록 하라. 그러면 삶이 잘 흘러갈 것이다."  영리한 접근이다. 통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인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반대로 이 사실을 찬양하라는 제안이다. 먼저, 통제력이 없다면 모든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일어날 일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결과가 일어나는 대로 기꺼이 받아들이면 슬픔을 이길 수 있다. 
- 스토아학파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주 되새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수의 스토아학자가 격동의 시기를 살았 고, 예측할 수 없는 황제들의 변덕을 마주하곤 했다. 세네카 역시  악명 높은 폭군 네로의 지도 교사이자 자문 학자였다. 네로는 10년간 그 를 섬긴 세네카가 반역을 꾀했다며(이 혐의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에게 자살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긴 세월 스토아 철학을 연마한 세네카는 실제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하다. 결국 세네카는 동맥을 그어 피를 흘리며 용감하게 죽음 을 마주했다. 스토아학파가 죽음을 대비하라고 강조한 것은 단순히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언제든 삶을 빼앗길 수 있는 사람들의 필수적인 과업이었다.
- 여러분이 집에 불이라도 난 듯 행동하길 바랍니다. 실제로 그러니까요.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2003~))
- 요약하자면, 죽음을 떠올리면 반짝이고 새로운 것을 찾는 욕구가 증가한다. 우리가 유한성에 대한 증오를 소유물의 산 밑에 묻으려 하기 때문이다. 톨킨Tolkien은 《실마릴리온The Silmarillion》에서 아주 적절한 표현을 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그들 사이에서 점점 어둡게 깔렸고, ・・・ 살아남은 자들 은 점점 더 많은 물건과 부를 원하며 즐거움과 쾌락을 간절히 추구하게 되었 다. (pp. 328~329)
- 당신이 모든 것을 잊을 때가 곧 올 것이요, 모두가 당신을 잊을 때가 곧 올 것이다. 늘 생각하라. 당신은 곧 아무도 아니게 되며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명상록(Meditations)>)
- 지금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몸과 다섯 가지 감각을 갖고 있다. 바다에 뛰어들 수도, 산을 오를 수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도 있다. 전 세계의 음식을 냄새 맡고 맛볼 수 있고, 타인을 사랑하고 끌어안을 수 있고, 베토벤과 비욘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삶을 낭비하지 말라. 인간 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가진 매 순간을 즐기고, 죽음의 운명 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라. 죽음의 신은 어둠의 존재가 아니라, 당신에게 휴식을 허락하고 다른 존재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러 오는 것이다. 모두가 태양 아래에서 자신의 시간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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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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