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원 아나운서가 들려주는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위한 신실재론이란 무엇인가?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 YouTube

 

이 책의 저자인 마르쿠스 가브리엘을 알게 된 것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책과 유발 하라리 등과 같이 저술한 '초예측'이란 책을 통해서다. 철학과 교수가 지은 책이라 좀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다소 존재한다. 

책의 제목이 우선 좀 자극적이긴 하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이른바 19세기의 국민국가의 부활이 일어나고 있는데, 19세기기는 유럽 최고 전성기였고, 그들이 지구의 패권을 거머쥔 패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영국의 브렉시트나 독일이 그 옛날 프로이센주의의 통합모델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 책은 현대세계의 다섯 가지 위기와 그 안에 숨겨진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각각 가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 테크놀로지의 위기, 표상의 위기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인터넷은,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플랫폼이 아니다. 사실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다. 검색 엔진만 봐도 지금은 구글의 독무대이며, 아무리 웹서핑을 해봐도 인터넷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침에 트럼프가 우산을 들었는지 들지 않았는지, 누구를 해고했는지 같은 인터넷 기사를 몇 분 훑어보고 나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진실은 가려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소설을, 드라마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저널리즘이란 쉬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백일하에 밝혀내는 것인데 지금은 비판적이지 않은 저널리즘이 횡행하고 있고, 이것이 인터넷 사회가 낳은 저널리즘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널리즘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저널리즘의 힘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려는 자세가 실종된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테크놀로지나 과학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데, 과학적 세계관은 과학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과학을 우상화하고 마찬가지로 잘못 이해된 종교와 가깝게 두는 의심스러운 비과학적 사고 탓에 좌초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이를테면 분자나 일식을 설명할 뿐이다. 결국 과학은 인간에 대한 가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인공지능이나 소셜미디어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환상이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지능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기계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종이폴더에 나에 대한 출생증명서나 졸업장이 있다고 해서 이것을 지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출생증명서나 졸업장이 웹상에 존재하고, 원하는 정보를 불러올 수 있다하더라도 종이폴더와 온라인이나 웹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는 없다. 따라서 웹, 프로그램, 알고리즘, 딥러닝 같은 것을 지능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종이폴더 역시 지능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대해서는 자신이 인생을 진정으로 향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보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표상의 위기로 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마주치는 현실을 보여지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실에 가까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을 통해 작성된 개인적 리뷰임을 밝힙니다.

 

- 나 자신을 예로 들자면, 이 책의 계약을 실현시키기 위해 서는 국세청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매우 완만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간신히 출간이라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법 적인 구조 안에서 명확히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바람직한 결과가 나온다. 결과까지 가는 과정에서 이 민주적인 제도가 '뭔가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느라 속도가 늦어지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절차를 인정해야 한다. 모든 일이 항상 바로바로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데 만족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적 사고다. 
비민주적 사고란 이것이 없어졌으면 좋겠어'라는 사고 방식이다. 어떤 일이나 상황이 언제나 완전하게 기능하고, 게다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형태로 기능하기를 원하는 사고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틀림없는 독재주의다. 중국과 같은 독재주의 국가에서는 자신의 적을 무너뜨리기가 훨씬 쉽다. 말 그대로 적을 살해하는 방법도 쓸 수 있다.
- 자본주의에는 악의 잠재성이 있다.
우리에게 공통된 문제 중 하나는, 소위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이론가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이 믿는 자본주의 이론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마르크스 의 이론은 너무나 불충분하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역할 분담에 대한 응답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역할 분담을 이용해 '한 사람의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모른다'는 사실을 가치로 변환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비즈니스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이점이 된다. 상대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시점에서 당신은 얼마의 금액을 청구할 수 있을지 를 계산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에게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져 있는 경우라면, 그 금액을 청구할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의 제품이 실제보다 훨씬 뛰어난 척을 해야 한다. 사실은 상대를 믿지 못하지만 믿는 척해야 한다. 당신의 제 품을 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자본주의의 '거짓' 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불투 명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에는 투명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자제가 반드시 '악'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에는 악 의 잠재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 사실을 이유로 대부분의 민주주의 이론가가 '자본주 의는 우리를 민주주의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민주주의에서는 투명성이 중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생산 상태를 좌 우하는 자본가에게 민주적인 사고 훈련을 받게 하는 일이 다. 유명한 자선가인 빌 게이츠나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투 자가 조지 소로스와 같은 수준이 아니라, 중간 수준의 자본가들에게 말이다.
- 일본과 독일은 중국이나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경제 성장이 훨씬 늦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변화 속도가 빨라서 10년마다 새 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것도 상당히 기발한 착상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마 다 새로운 기술 아이디어를 창안해내고 있다. 기술 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아이디어다.
일본은 디지털 테크놀로지 분야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 를 다양하게 선보였지만, 최근 한동안은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국가들, 특히 독일과 일본은 무언가 해야만 한다. 두 나라 모두 산업의 대부분을 자동차 산업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동차의 전자제어장치ECU. electronic control unit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 기술이 다음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확실히, 다음에 나올 아이디어는 환경 위기를 해결하는 쪽이 될 것이다. 내가 도덕적 기업을 강조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환경 위기를 해결하는 기업은 22세기의 정치 구조를 결정할 수도 있다. 과학자들이 친환경 핵에너지를 찾아내면 어떻게 될까. 독일은 최근 수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흡족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원자력발전의 대체물질을 발 견한다 해도 문제없이 작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벽히 제 기능을 해낼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쩌면 물리적으로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핵융합이 아니라 다른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발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 아이디어를 내는 국가는, 어디가 되든지 간 에 22세기를 대표하는 국가로 우뚝 설 것이다.
- 그 다음 단계는 도덕의 진보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윤 리자본주의'의 확립이다. 매우 단순한 방법이지만 지금까 지 착상한 것은 어떤 한 단체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과연 누구일까? 바로 가톨릭교회다. 내가 아는 한, 인류사상 가 장 성공한 '회사'다. 이집트 신관神官들도 꽤 상당한 단계까 지 추진했지만 근 5000년 동안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 기업은 가톨릭교회다. 그들은 무엇을 팔고 있는가? 아무것 도 팔지 않는다. 그들이 파는 것은 달성될지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약속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프로테스탄트를 모두 합치면 약 25억 명에 이른다. 상당한 인원이다. 페이스북 이용자보다 많다. 가톨릭교회가 팔고 있는 것은 도덕성이며,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가톨릭이나 프 로테스탄트로 있으려면 세금을 내야 한다. 급여에서 세금 이 공제된다. 약 6%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상당한 액수다. 어쨌든 다음에 일어날 큰 이슈가 윤리자본주의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 선진국에서는 물건이 넘쳐나 소비 의욕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 
- 대처리즘Thatcherism,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현재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굴복한 것으로 생각된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의도치 않게 신자유주의를 도왔다. 신자유 주의를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정당화하기는 쉽다.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거봐, 뭐든지 가능하잖아. 그러니 이것도 문제없어.”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 던 사상에는 비평의 힘이 없다. 포스트모던 사상이 유일하게 비판하는 것은 매우 독선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나 매우 강한 신조를 가진 사람뿐이다. 반대로 포스트모던 사상이 비판하지 못하는 대상은 통계밖에 믿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거기에는 명확한 관계성이 있다. 대부분의 신자유주의 이 론가는 직접적, 그리고 간접적으로 포스트모던 사상을 갖 고 있다. 통계적인 세계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포스트모던 성향을 띈다. 모더니티는 원래 비통계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용했고, 계몽은 통계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확률 계산 자체가 계몽시대에 발명되었다. 즉, 통계적인 세계관은 19세기에 탄생해서 20세기에 본격화되 었다.
신자유주의의 주술에서 벗어나려면 경영윤리를 바꾸고 경제에 윤리관을 되찾아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멸에 관 한 좋은 예가, 오늘날의 영국이다. 이는 가장 무능한 정치가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선출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매우 유능한 비즈니스맨이며 놀랄 만큼 성공한 사람이다. 이에 비하면 보리스 존슨은 단지 소인배일 뿐이다.
- 물리적인 종이 폴더가 있다. 출생증명서나 고교 졸업장이 들어있다. 실수로라도 그것을 '지능'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출생증명서 뒤에 고교 졸업증서가 있고 그 뒤에 이를테면 임대차계약서가 나란히 순서대로 포개져 들어있 다. 종이 폴더도 컴퓨터 데이터 처리와 똑같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공서에 있는 종이 파일과 온 라인 또는 웹 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는 없다. 온라인이 약 간 더 복잡하다거나, 다른 의미에서 복잡하다고 할 뿐 양쪽 모두 똑같다. 그러므로 웹이나 프로그램, 알고리즘, 딥러닝-이러한 것을 지능이라고 생각한다면 종이 폴더도 지능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인공지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변명이다. 혹은 약삭빠른 사람의 트릭이다. 메커니즘mechanism 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머신machine 이라는 단어에서 왔으며 머신의 어원은 그리스어 '메카네mechane' 이다. 메카네는 '트릭'이라는 의미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Homeros는 트로이의 목마를 메카네, 즉 '트릭' 이라고 했지만 실은 이것이 머신, 즉 기계라는 의미다. 따라서 기계가 지능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자명한 이치다.
- 미국에서는 이미지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몹시 크다. 2장에서도 언급한 파사드다. 미국에서는 모든 일이 파사드와 같다. 미국의 건축물을 보면 그 파사드(건물의 정면 부분)는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뭐든지 망가져서 사용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가령 대부호의 집에 초대받아 가도 에어컨 소리가 너무 크고 문은 꼭 닫히지 않아 엉망이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 그것이 파사드, 이미지다. 미국인은 단독 주택에 살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근사한 집이라고 생각할 것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뉴욕이 그런 식이다. 나는 뉴욕의 뉴스쿨대학교에서 교편을 잡 았었는데 대학에서 처음으로 사회조사 분야의 테뉴어Tenure 자격(북미 대학에서의 종신고용 자격)을 타진받았을 때 거절했 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도시인데 그곳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은 조금도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도시에서 사는 건 도저히 무리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의 생활은 비참했다.
어디를 가도 “대단해요. 뉴욕에서 오셨어요? 근사한 도 시죠?” 하는 말을 듣는다. 뉴요커들은 “그럼요, 멋진 도시예요.” 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밤에는 시끄러워서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으며 더럽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여름엔 지독히 덥고 뭐든지 고장 나 사용하기 힘들다. 지하철은 무질서한 혼돈 상태이고 거리에는 쥐와 오물 천지다. 지하철 안을 쥐가 뛰어다닌다. 도시의 어느 곳을 가도 형편없고 낭패를 본다. 한 달만 있어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 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뉴요커들은 이 도시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는 타인들이 뉴욕에 산다는 건 멋진 일'이라고 동경한다. 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유가 간접적인 동기를 만들 어준다. 자신은 전혀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도 남들이 멋있다고 부러워하니 그 사실이 좋을 뿐이다. 미국인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하면 독일인은 무척 현실 지향적이다. 남들이 '저 사람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든 말 든 아무 상관없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누리고 있느냐 아니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이 인생을 진정으로 향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보다, 타 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은 또 다른 표상 의 위기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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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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