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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1 조셉 슘페터_고고한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고고한 경제학자

저자
이토 미쓰하루 외 지음
출판사
소화 | 2004-01-3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현실참여의 경제학으로 각광받던 케인즈와 반대로, 이론으로써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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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슘페터와 케인즈가 각각 미국과 영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로서 나란히 머물던 30년대와 40년대는 분명히 케인즈의 시대였음. 30년대는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불황이 세계를 뒤덮고 있었고, 40년대는 전쟁과 혼란의 시대였음.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에토스라고 생각한 기술혁신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음. 그러나 두 경제학자가 세상을 떠나고 60년대에 접어들자, 선진국 경제는 모두 기술혁신의 파도속으로 밀려들어감. 단순한 유효수요 조작에 의한 불황대책을 채용하고 생산구조 혁신을 2차적으로 채택한 국가는 국제경쟁 속에서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음. 지성 있는 엘리트가 공공의 이익을 고려하여 정부의 정책을 움직여 갈 수 있다는 견해는 70년대에 들어서 하베이 로드의 가설이라고 불리며 비판의 대상이 됨. 현실의 대중사회에서 정치가는 표를 위해 대중에게 아첨하느라 안이한 방법을 택하므로 국가의 지출은 방만해 지기 쉬움. 공공 투자의 확대는 그로 인해 이익을 누리는 기업의 힘 때문에 축소가 곤란해짐. 이리하여 불황기의 재정적자를 호황기의 재정흑자로 상환하려는 케인즈의 생각은 실현되기 어려움. 정부지출의 증대는 그로 인해 이익을 챙기는 기업과 정치의 유착을 낳아 재정 복합체를 만들어감. 케인즈의 이론이 추상적으로 옳더라도 그 정책을 현실에 적용했을 때 왜곡된다는 것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걸쳐 우익 진영이 케인즈 경제학에 가한 비판이었음. 2차대전이후의 이같은 현실을 살펴보면 슘페터가 케인즈에게 제기한 의문은 40년 후 많은 사람이 품는 의문이 되었음.

- 후진국 수도 빈의 경제학자들이 프로이센-독일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식을 갖고 선진국을 동경하며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정책으로 나아간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음. 슘페터 역시 그랬음. 젊은 슘페터가 경제발전의 이론을 집필한 것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문제의식에 따른 것

- 우리가 뜻하는 의미에서 경제발전은 유기적 성장과는 양태가 다름. 그것은 하나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각 통일된 법칙을 가진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 그리고 충격적으로 생겨나 이것들이 서로 다른 상승기에 서로 다른 특징을 부여함. 그 같은 상승은 마치 새로운 것에 자리를 양보하기나 하듯이 소멸함

-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마셜은 저서의 모두에 이 명제를 썼는데, 저서의 특색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음. 그러나 슘페터는 그에게 반대하여 인간 문화의 발전, 특히 지식의 발전은 다름 아니라 비약적으로 생겨난다고 주장. 강력한 비약과 정체의 시기, 넘쳐나는 희망과 쓰라린 환멸이 서로 바뀌며, 설령 새로운 것이 낡은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발전은 결코 연속적이지 않음. 우리의 과학은 그 점을 여실히 보여줌

- 슘페터는 신결합을 수행하는자(기업가)와 신용을 제공하는자(자본가)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었으나, 유의해야 할 점은 슘페터는 사업이 실패할 경우의 위험을 부담하는 것은 오로지 후자라고 생각했음.

- 슘페터에게 기업가 이윤이란 선두에 선 기업가 개인이 신결합을 성공시킴으로써 탄생하는 것이지 조직의 힘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님. 더욱이 슘페터는 기업가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첫째 사적 제국을 건설하려는 몽상과 의지이며, 둘째 승리자 의지이며, 셋째 창조의 기쁨이라고 했음.

- 독일의 제국주의는 두가지 기반을 갖고 있음. 첫번째는 자르의 철강자본으로 대표되는 중공업이며, 두번째는 동엘베의 융커였음. 이 두기반 위에 입각하는 독일제국의 경제정책은 융커의 주도 아래 움직이고 있었음. 영국이 비해 뒤늦게 발달한 독일 산업자본은 선진국 영국의 공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보호무역을 추구. 그러나 동엘베의 대토지 소유자이자 농장 경영자인 융커는 19세기 전반으로부터 자신들이 거두어 들이는 곡물의 수출을 위해 자유무역을 주장. 독일-맨체스터 학파(자유무역 학파)의 기초는 이 융커와 상업자본의 결합이며, 19세기 중반까지 그 주장을 실현시키고 있었던 것임. 자유무역을 내세우는 주체가 달라 영국에서는 자유를, 독일에서는 보호를 주장함으로써 선진국 영국과 후진국 독일의 역전현상이 발생하고 있었음. 그러나 이 구조는 1870년대에 전환함. 마르크스가 산업혁명에 필적한다고 했던 교통혁명의 거센 파도를 타고 미국의 저렴한 곡물이 영국에 밀려들어온기 시작하여, 융커는 영국 시장에서 쫓겨나야 했음. 이와 동시에 철도의 발달은 독일을 향한 러시아 농산물의 남하를 준비했음. 한편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이후 독일 중공업의 발전은 도시 인구의 증가를 불러와 국내시장이 확대되었음. 이러한 변화 속에서 융커는 종전까지의 수출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저렴한 수입 농산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보호무역으로의 전환을 도모하게 되었음. 다른 한편 1873년의 불황 이후 찾아온 세계적 침체 속에서 비스마르크는 자유무역에 대한 불신을 더해 맨체스터 학파를 내각에서 몰아내고 1879년 공업관세, 곡물/가축 관세를 도입. 여기에 관세정책의 보호하래 1870년대 이후 독일은 독점화 경향의 심화, 은행의 집중, 카르텔, 합병 그리고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유착이 진행됨. 그리고 이것이 해외시장으로의 덤핑을 낳아 자본수출이 되고 영국 자본의 기존 경제권을 침식하여 대립을 낳았으며, 또한 1884년 남서 아프리카, 토고, 카메론, 뉴기니 등을 식민지로 삼음으로써 식민지 창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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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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