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은 어떻게 내 삶을 바꾸는가

저자
김태일, 좋은예산센터 지음
출판사
코난북스 | 2014-07-2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출산 보육 노후부터 교통 보건 교육까지 200조 머니게임 지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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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충성의 원칙은 정부간 업무배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 간의 역할분담에 관한 원칙임. 이 원칙은 31년 로마 교황 비오 11세의 선언문에 잘 나타남. "저 작고 더 낮은 사회에 의하여 실효성 있게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더 크고 더 높은 단체가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이는 사회 철학의 흔들림 없는 근본원리이다. 모든 사회활동의 진정한 목표는 사회구성원을 돕는데 있는 것이지 그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하는 데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보충성의 원칙은 유럽연합을 만들때 유럽연합과 개별회원국 간의 권한 배분기준으로 적용되면서 널리 알려짐. 개별 국가가 존재하면서 연합체를 만들 경우에는 이 원칙이 마땅해 보임. 유럽연합을 만들었다고 해서 기존에 개별국가가 수행해오던 일을 빼앗을 수는 없기 때문. 하지만 이 원칙을 한 국가내에서 상하위 정부간 업무배분에 엄격하게 적용하기는 힘들다. 엄격히 적용하자면 상하위 정부가 둘다 할 수 있지만 상위정부가 더 잘할 수 있는 경우에도 하위정부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완화된 기준을 제시. 둘 중에 더 잘할 수 있는 정부에게 맡기자는 것. 하위정부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하위정부가, 상위정부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상위정부가 담당하게 하자는 이야기임.
- 지방정부 재정의 가장 큰 특징은 사업비의 일부를 중앙정부가 주는 돈에 의존한다는 점. 그래서 자체재원만으로도 사업비를 충당해야 한다면 결코 하지 않을 사업도 중앙정북 돈을 지원해 주기 때문에 하게 됨. 이런 사업은 국가전체로 보면 편익보다 비용이 큼. 그러나 지역 입장에서 보면 지역에 돌아오는 편익이 지방정부 자체 재원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용보다 크다. 그러니 지역의 정치인이나 주민이나 한마음으로 이런 사업을 선호함. 소위 지역 숙원사업 중에 이런 것들이 많음. 물론 지방자치가 아니라도 지역구 국회의원의 활약과 대통령 선거마다 등장하는 선심성 지역공약으로 낭비성 지역 숙원사업이 실행되기는 함. 하지만 지방자치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 것은 분명함
- 지방화에 대한 강조는 대략 20세기 후반부터였음. 세계적 석학이나 저명한 미래학자, 이를테면 다니엘 벨이나 앨빈 토플러 같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지방화를 강조. "국가는 삶의 큰 문제를 다루기에는 너무 작고 작은 문제를 다루기에는 너무 크다." 다니엘 벨의 말은 중앙집권적 국가기능의 쇠퇴와 지방화의 도래를 상징하는 문구로 인용되기도 했음. 서구역사를 보면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20세기 중반까지 산업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복지국가가 발전되어온 과정은 모두 중앙집권적 국가기능의 확대를 가져왔음.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탈산업사회와 복지국가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중앙집권적 국가기능의 비효율성이 부각됨. 이에 따라 시장화와 더불이 지방화(분권화)가 강조된 것. 지방화 주창자들이 강조한 만큼이나 국가(중앙정부)의 기능이 쇠퇴한 것은 아님. 국가는 여전히 중요함. 하지만 지방의 중요성이 커진 것도 사실. 이에 따라 20세기 후반부터 선진국들은 국가운영의 효율화를 위한 지방화(분권화)를 추진. 우리도 20세기 후반에 지방자치를 재개하였으니 시대조류에 부응한 셈이기는 하다. 선진국에서 국가운영을 효율화하기 위해서 추진했다면,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서 했다는 점이 다름. 이 차이는 중요함. 지방자치를 국가운영의 효율성과 연결하여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지방자치가 그토록 비효율과 낭비를 양산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 이제는 지방자치를 효율성 관점에서 따지고 개선안을 논의할 때도 된 것 같음. 효율성을 높인다고 민주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님. 오히려 우리 지방지차의 현실을 보면 효율성과 민주성은 함께 갈 가능성이 훨씬 높음. 이제는 우리도 국민생활을 더 윤택하게 하는 지방자치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 보조금 배분이 정치적 산물인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님. 미국 정치용어 중에 포크배럴 정치라는 말이 있음. 보조금이 특정 집단이나 지역에 유리하게 배분되는 현상을 말함. 포크배럴은 옛날 미국 남부에서 농장주들이 노예들에게 주는 훈제 돼지고기를 보관하던 통을 말함. 지역구를 위해 보조금을 따내려고 달려드는 정치인들 모습을 농장주가 돼지고기 한 조각을 꺼대 던져줄 때 모여드는 노예들이 빗댄 표현임. 또 어느 일본학자는 국고 보조금은 정치인들이 표밭에 뿌리는 비료라고 말하기도 했음.
- 지방정부는 자체수입으로 지출을 모두 충당하지 못했음. 그래서 부족분은 중앙정부가 지원해줌. 이런 물렁한 예산제약이 존재할 때 지방정부는 스스로 노력해서 수입을 늘리고 비용을 절감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중앙정부 지원을 더 받으려 하거나, 어차피 자신의 노력보다는 중앙정부의 지원에 따라 재정형편이 좌우된다는 생각에 나태해짐. 지방교부세는 의존재원이긴 해도 법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배분되며 일반재원으로 사용되므로 이 돈자체가 낭비될 소지는 별로 없음. 그러나 형편이 어려우면 지원이 늘어나므로 자력으로 재정여건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꺾는 효과가 생김. 인구가 많을수록 많이 받기 때문에 일부 지자체에서는 인구를 늘리려고 꼼수를 쓰기도 함. 대행사업은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떠맡겨서 하는 것. 마지못해 하는 것이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집행하는 경향이 있음. 그래서 효과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 지방교부세와 대행사업보다 훨씬 심각한 효율성 문제는 자체사업에 대한 국고보조금에서 발생. 국고보조는 지방정부의 입장에서 비용을 실제 사업비용보다 작게 만듬. 그래서 국고보조금이 없다면 하지 않았을 사업, 더욱이 하지 말았어야 할 사업도 시행하게 됨. 뿐만 아니다. 지원여부가 사업의 필요성과 타당성보다 정치력에 의해 결정된다면 지방정부는 저마다 좋은 사업을 개발하기보다 정치력을 동원하는 데 더 힘을 쏟게 됨. 이런 왜곡된 행위에 따라 발생하는 무형의 낭비가 효율성을 더 떨으뜨릴지도 모른다
- 국가보조금, 민간투자, 공기업이라는 수단이 없다면 지방정부는 대형 개발사업을 벌이기 힘들다. 국고보조금은 중앙정부가 거저 주는 돈이니 많이 따올수록 이익이라고 생각하게 됨. (실제는 자체재원으로 매칭해야 하는 돈이 만만치 않음) 민간투자나 공기업의 빚도 남의 돈이라고 생각하게 됨. 그러니 꼼꼼하게 따지기보다 일단 벌여놓고 보자는 경향이 강함. 더구나 신중하게 일하던 지자체도 다른 지역에서 이런 방법으로 통크게 사업을 벌이는 걸 보게 되면, 가만히 있는 자신만 무능하게 비춰질까 두려워하게 됨. 국가보조를 받는 국제대회나 민자사업, 공기업 사업 중에는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예산을 낭비하고 재정을 위험하게 만든 사례가 차고 넘친다
- 공기업 부채의 원인
(1) 원가에 못미치는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해서 생긴 부채. 한전 부채의 대부분은 값싼 전기요금 때문.
(2) 정부사업을 수행하면서 생긴 부채. LH공사의 상당부분은 신도시 건설과 공공주책 공급과정에서 생긴 것임.
(3) 정부가 무리하게 강요한 개발사업때문에 생긴 부채. 수자원공사의 부채의 많은 부분은 4대강 사업을 떠맡아서 생김. 석유공사, 광물공사 같은 에너지 공기업들 부채의 상당액도 정부가 독려한 해외자원개발 사업에서 발생.
(4) 공기업 자체의 경영과실에서 비롯한 부채. 공기업도 기업인 이상 경영상의 판단착오로 손실이 생긴 것이고 이것이 부채로 연결되기도 했을 것임. 하지만 전적으로 자율경영을 하는 공기업은 거의 없을테니 순전히 경영진의 판단착오에서 비롯한 부채크기가 얼마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움. 용산 역세권 개발사업의 실패로 철도공사가 지게 된 부채가 여기에 해당
(5) 방만경영. 어차피 수익에 민감할 이유가 없고 자율경영도 아닌 바에야 경비절감이나 구조조정을 위해 애쓸 필요도 없으니 경영이 방만해지는 것은 당연함
공기업 부채문제를 따질 때는 입장에 따라 이 다섯가지 중에 몇가지를 강조함. 정부는 방만경영을 강조하고 공기업 노조는 원가에 못미치는 가격의 서비스 제공과 정부사업 대행을 강조. 언론도 색깔에 따라 정부입장을 더 강조하기도 하고 공기업 노조입장을 옹호하기도 함. 부채 규모로 보면 (1), (2), (3)의 원인이 대부분
- 지키지 않는 게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기 어렵고, 집행과정에서 부패가 발생하기 쉽다는 것. 그리고 이런 부패를 없애려면 애초에 그런 규정을 만들지 말아야 함. 우리 사회 버벶도 곳곳에 이런 규정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공무원의 관행적 부조리도 어느정도 이런 측면이 있음. 과거에 공무원 급여를 인상하는 대신 초과근무수당이나 관내출장비를 급여를 보충하는 수단으로 써도 눈감아 주었음. 또 부서경비를 적정하게 책정하는 대신 관외출장비 등을 부서경비로 전용해도 모르는 척했음. 이럴 바에야 공무원 급여와 부서경비를 합리적으로 책정하고 초과근무수당과 출장비는 원칙대로 집행하는 게 훨씬 나음. 관행적 부조리는 그 자체도 문제임. 하지만 은연중에 모두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서 상사나 동료의 진짜 부정과 비리마저 눈감게 만드는 것이 문제
- 지역의 정치와 행정을 엘리트주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이론 중에 성장기구라는 이론이 있음. 성장기구는 지역의 성장을 이끄는 수단이란 의미. 부동산 개발을 중심으로 뭉친 집단과 그 영향을 받는 지방정부가 성장기구에 포함된. 부동산 개발로 이득을 보는 사람끼리 성장연합을 결성해서 지방정부로 하여금 부동산 개발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는 것. 성장연합을 구성하는 첫번째 계층은 지역의 건설업자, 투자자, 부동산 소유주임. 이들은 부동산을 개발하면 직접 이득을 얻는 집단임. 두번째 계층은 지역의 정치가, 언론인과 가스/수도/교통 등 지역 SOC공급자임. 첫번째 계층만큼 직접적이지 않지만 역시 부동산 개발로 상당한 이득을 얻는 집단임. 이 두계층이 성장연합의 핵심임. 이들 외에 보조역할을 수행하는 집단이 있음. 바로 지역의 대학, 예술/문화계임. 이들은 부동산이 개발되었을 때 과실을 간접적으로 누리기도 하고, 핵심 성장연합 집단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게 이득이 되는 집단임. 성장연합은 지역의 정책결정을 좌지우지함. 지방정부에 부동산 개발을 독려하는 것은 물론이며 지역주민들이 이를 지지하도록 여론을 형성. 부동산 개발 혜택이 실제로는 소수에게 집중됨에도 지역을 개발해야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주민의 자산가치도 올라간다는 식의 성장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전파. 이로써 지역의 정치, 행정, 경제는 결국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한 부동산 개발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됨. 그러나 이렇게 부동산 개발을 중심으로 성장하면 결국 지역동동체가 훼손되고, 중산층 이하 계층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으며, 지방정부 재정도 멍이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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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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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심부름꾼

심리 2014. 10. 2. 17:20

 


주인과 심부름꾼

저자
이언 맥길크리스트 지음
출판사
뮤진트리 | 2014-02-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좌뇌와 우뇌가 벌이는 배신과 정복의 역사를 말하다" 지금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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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와 같은 비교적 영리한 동물에서는 전두엽이 두뇌 전체 부피의 약 7%를 , 하위 영장류에서는 약 17%를 차지하는 데 비해, 인간의 두뇌에서는 약 35%를 차지. 사실 대형 영장류도 이와 비슷하지만, 인간의 전두엽과 대형 영장류의 전두엽은 백질의 비율에서 차이를 보임. 백질은 일부 신경세포에서 축색, 즉 길게 이어져서 두뇌 밖으로 나가는 메시지를 소통시키는 신경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인지질층인 미엘린 껍질때문에 흰색으로 보임. 이 미엘린 껍질은 메지시의 전달속도를 엄청나게 빠르게 해줌. 인간의 전두엽이 크다는 사실은 전두엽에서의 상호연결이 더 풍부하다는 뜻
- 새들은 양쪽 눈에 각기 다른 전략을 배당하는 방식으로 먹는 일과 살아남는 일을 공존시키는 난제를 해결. 많은 동물에게는 전체 종의 차원에서 왼쪽눈(우반구)으로 포식자를 지켜보는 편향이 있음. 마모셋원숭이류의 경우, 편중화가 잘된 원숭이는 더 유능함. 먹이를 찾고 포식자를 경계하는 쪽으로 반구의 전문화가 더 잘 이루어졌기 때문. 특정 앞발을 사용하는 쪽으로 편중화된 고양이는 그렇지 않은 고양이보다 반응속도가 더 빠름. 편중화가 발달된 침팬지는 그렇지 않은 침팬지보다 개미를 더 잘 잡음. 인간의 두뇌도 어떤 이유에서든 편중화 정도가 평균이하인 경우에는 전체적으로 결손을 보임. 한마디로, 편중화는 특히 두 종류의 상이한 관심이 필요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진화적 이점을 가져다줌
- 일반적으로, 좌반구는 먹이를 얻도 먹여주고자 좁고 집중된 관심을 발휘한다고 할 수 있음. 우반구는 경계적인 관심을 폭넓게 발휘하는데, 그 목적은 주위에서 발생하는, 특히 잠재적인 포식자나 짝 또는 적이나 친구가 될 수 있는 다른 생물들에게서 오는 신호를 인지하기 위함으로 보임. 그것은 사회적 동물간의 연대와 관련되어 있음. 그렇다면 인간 두뇌의 분리도 세계에 대한 양립불가능한 두가지 관심을 동시에 담아내야 하는 필요에 따른 결과일 수 있음. 하나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지시되는 좁고 집중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향해 열려 있는 폭넓은 관심이다. 동물이나 새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경우에도 각 반구는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며, 그 처리방식에는 일관성이 있다. 우반구는 관심의 넓이와 유연성을 강조하며, 좌반구는 집중된 관심을 담아냄. 여기서 이어지는 결과가 우반구는 전체 사물을 그 맥락에서 보고, 좌반구는 맥락에서 추출된 파편화된 사물을 보고, 거기에서 각 사물의 특성과는 아주 딴판인 어떤 전체를 조합해 낸다는 것. 세계를 향한 것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관심이 포함된, 인간으로서 우리가 타인과 연대를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능력인 공감과 감정적 이해같은 것들은 대체로 우반구의 기능임
- 좌반구는 수렴적으로 작동하여 당장은 관련이 없는 의미를 억압하고, 우반구는 관련된 의미들을 광범위하게 활성화시키며 비수렴적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함. 의미론적/어휘론적으로 가까운 관계는 좌반구에 더 많이 의존하고, 느슨한 의미론적 연결은 우반구에 의존. 우반구는 사용빈도가 낮거나 관계가 먼 단어들의 의미까지 활용하므로, 서로 동떨어진 단어를 조합하여 특이한 단어를 만들거나 대상의 새로운 용법을 창안하는 데서 우반구의 개입이 잦아질 수밖에 없음. 이것이 우반구에 자유롭고 창조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임
- 전체 맥락안에서 말해진 내용을 받아들이는 우반구는, 화용론과 의미의 맥락적 이해기술, 은유의 사용을 전문으로 취급. 언어의 비문자적 측면을 처리하는 것이 우반구임. 좌반구가 발언의 고차원적 의미층을 이해하는 데 서툰 것은 이 때문임. 예컨대 '오늘은 좀 덥구나' 같은 발언은 왜 우반구가 유머의 감상을 강화하는지 보여줌. 유머는 말과 행동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 맥락이 말과 행동의 의미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 우반구가 손상된 사람은 여러가지 면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들과 비슷하지만, 그들과 달리 함축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관례적인 발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임
- 비언어적 행동, 언어, 얼굴표정, 억양, 몸짓은 사람들 사이의, 또 사람들과 세계 사이의 모순되고 압도적으로 감정적인 복잡한 관계를 확립하는 데 중요. 어개를 건드리고 악수하고 쳐다보기만 해도 장황한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는 우리의 발언이 충분히 정확하지 않기 때문. 오히려 그와 반대임. 발언이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고 애매모호한 것을 표현하는 데 부적절하도록 만드는 바로 그 언어의 정확성과 확정성 때문.
- 말하기는 일차적으로 좌반구의 기능이지만, 노래에 쓰이는 가사의 제작은 우반구의 폭넓은 활동과 관계되어 있음. 좌반구에 발작이 일어나 말을 하지 못하게 된 환자도 노래가사는 어려움 없이 읊을 수 있음. 그러나 우반구에 손상을 입으면 음악을 감식하고 이해하고 연주할 능력을 잃은 음치가 됨. 실어증은 없지만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할 수 없는, 또 그러면서 일상적 발언이나 이해에는 장애가 없는 음치는 거의 대부분 우반구에 손상이 생긴 경우임.
- 유명한 작곡가이자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였던 비사리온 쉐발린은, 왼쪽 측두엽과 두정엽에 발작이 일어나 심각한 실어증이 생겼지만 작곡능력에는 이상이 없었음. 지휘자이자 작곡자인 다른 음악가도 좌반구의 발작을 겪은 뒤 단어를 읽을 수 없게 되었지만, 악보는 어려움 없이 읽고 쓸 수 있었음.
- 좌반구는 사실을 잘못 파악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론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자기가 옳은 결정을 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함. 이렇듯 좌반구는 확실성을 필요로 하고 옳을 필요가 있다. 우반구는 한가지 결과를 불완전한 채로 유지하면서 여러가지 모호한 가능성을 붙잡고 유보시킬 수 있다. 오른쪽 전전두엽 피질은 불완전한 정보를 처리하는 데 핵심적인 구역으로, 완전히 구체화되지 않은 상황을 추론하는 역할을 담당. 우반구는 좌반구의 섣부른 해석에 좌우되지 않으며 모호한 정신적 표상을 유지할 수 있음. 이처럼 불확실성을 포용하는 특성은, 은유와 아이러니 또는 유머를 사용하는 우반구 특유의 능력에 내장되어 있음. 은유와 유머 등은 모두 모호성을 성숙하게 처리하는 자세에서 나옴. 지각적 경쟁(예를 들어 오리인지 토끼인지 모호한 그림)을 받으면 우반구 피질은 더 활성화됨. 우반구에게는 흐릿하거나 불분명한 이미지가 별 문제가 안되지만, 좌반구는 이를 문제로 받아들임. 과제의 특성상 우반구에게 더 문제가 될 만한 상황에서도 그러함. 반구간 전문화 현상과 관련하여 초기에 발견된 내용중 일관된 것은, 어떤 영상을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보거나 형체의 상태가 너무 열악하여 부분적 정보밖에 얻을 수 없는 경우에는 항상 우반구가 우월성을 나타낸다는 것. 그 재료가 언어적인 것일 때도 마찬가지
- 질병에 관한 깨달음은 일반적으로 우반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반구가 손상된 사람들은 자신의 질병을 부정. 자신이 신체의 절반을 갑작스럽게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대폭 축소하는 질병인식불능증이라는 특이한 현상이 그런 경우. 왼쪽 팔다리가 완전히 마비된 환자는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왜 왼쪽을 움직일수 없느냐고 물으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을 늘어놓기도 함. 이런 증상은 신체 왼쪽에 영향을 주는 발작을 겪은 대다수의 사례에서 발생하지만, 신체 오른쪽의 발작으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음. 이처럼 자기질병을 부정하는 현상은 문제가 생신 우반구를 활성화시키면 일시적으로 뒤집힐 수 있음. 마찬가지로, 우반구를 마취하면 질병의 부정현상을 유도할 수 있음
- 복내측 전두엽에 병변이 있는 환자들은 충동적이고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며, 감정적으로 타인들과 차단되어 있음. 특히 변연계 구조와의 상호관련성이 풍부한 오른쪽 복내측 전두엽 피질은 도덕적, 사회적 행동의 모든 측면에 결정적으로 중요. 도덕적 판단에는 복잡한 우반구의 네트워크가 개입되며, 특히 우측 복내측과 완와 전두엽 피질 및 좌우반구 편도체가 다 관련됨. 그래서 우측 전전두엽 피질이 손상되면 사이코패스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음. 우리의 정의감은 우반구에 의해, 특히 오른쪽 배외측 전전두엽 피질로 보강됨. 이 구역이 활성화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더 이기적으로 행도하게 됨. 이는 아마 타인의 관점을 고려하는 일반적인 공감능력, 즉 오른쪽 전두엽의 능력과 관계가 있을 것임.
- 우측 전두엽의 일부인 우측 안와전두피질은 사회적, 공감적 이해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영장류의 경우 오른쪽이 왼쪽보다 큼. 아기와 어머니가 놀이로써 상호작용하는 생후 6개월 이후 1년 사이의 기간에, 또 자아감각이 나타나는 생후 1년에서 2년사이에 두뇌의 이 부위가 크게 자람. 앨런 쇼어는 우측안와전두피질이 자아성장의 핵심임을 발혔음. 우반구는 좌반구보다 더 일찍 성숙하며, 유년기 초반에 이루어지는 정신적 기능의 발달 과정 및 사회적, 공감적 존재로서 자아의 거의 모든 면모에 좌반구보다 더 많이 개입함. 유년기의 사회성 발달은 언어발달과는 별개로 진행되는데, 이는 그 기원이 우반구에 있음을 가리키는 또 한가지 징표임. 앞에서 자아감각의 진화, 그리고 타자를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 느끼고 그럼으로써 공감과 이해를 유발하는 감각의 진화가 오른쪽 전두엽의 업적이라고 언급했는데, 이 두가지 진화 사이의 관계는 자아감각과 마음이론 발달간의 긴밀한 관련으로 입증됨. 예를 들어, 뇌영상 검사를 해보면 자기인식과 마음이론의 상관요인들이 모두 우측 전두엽과 우측 대상피질에서 발견됨.
- '일관되고 지속적이고 통합된 자아감'을 담당하는 것도 우반구임. 반구와 시간에 관한 짧은 논의에 이미 함축되어 있듯이, 인간어른들이 자신을 바로 그런 자아,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른 피질 및 피질 하부구조와 협력하는 오른쪽 피질임. 그래서 오른쪽 전두엽이 손상되면 시간속에 있는 자아감각, 즉 이야기 줄거리가 있고 지속적인 흐름처럼 존재하는 자아의 감각이 해를 입음
- 우리는 이제 두뇌 기능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으므로, 언어가 한쪽 반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주장이 참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언어기능은 두 반구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언어의 실제 내용인 구문과 어휘의 대부분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좌반구에 수용되어 있다는 것은 참이지만, 어떤 맥락에서 전체 구절이나 문장의 의미, 어조와 감정의 의미, 유머, 아이러니, 은유 등을 이해하는 언어의 고급기능을 도와주는 것은 우반구임. 이를테면 그림에 색을 칠하는 것은 우반구이지만, 물감통은 좌반구가 갖고 있는 격이다. 따라서 좌반구에 발작이 일어나면, 우반구는 그림재료를 잃는다. 좌반구가 지배자라는 오래된 견해는 그렇게 하여 성립되었다. 좌반구가 없으면 아무런 그림도, 일관된 발언도 나올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가 한 장소에 묶여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좌반구가 확장되었다는 주장은 참이 아니다.
- 사실 과거에 시는 모두 노래로 불려졌다. 그러므로 문학적 기술의 진화는 우반구의 음악에서 우반구의 언어(은유적 시 언어)로, 나아가 좌반구의 언어(참조적인 산문언어)로 진행되었다. 음악은 십중팔구 언어의 조상일 것이며, 대체로 우반구에서 출현했다. 우반구는 타인들과의 소통수단, 사회적 응집력을 촉진하는 수단이 생기는 장소이다
- 언어로 명시적으로 사유하는 시절이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는 이유로, 언어가 사유에 필수적이라고 믿도록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된다. 가령 상상의 혹은 혁신이나 직관적인 문제해결, 영적인 사유, 예술적 창조성 등의 거의 모든 형태는 언어를, 아니면 적어도 기존에 사용되던 참조적 암호의 언어를 초월하라고 요구한다. 거의 모든 소통이 그렇듯이, 거의 모든 사유가 언어없이 진행된다.
- 언어는 엄밀성과 고정성을 가져다주는데, 이 두가지는 우리가 세계를 제대로 조작하는 데 필요한 성질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특히 다른 인간을 조작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 비언어적 소통으로는 진실을 숨기기 힘들지만 언어로는 쉽게 숨길 수 있음. 언어가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계획을 수행하도록 함들기 힘들다. 먼 거리에서 언어 없이 행동할 수 없다. 언어는 제국주의적 열망이라 할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 물론 조작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우리가 통제하고 바꾸고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므로, 이런 것들은 확실히 인간의 기본특질이며, 문명의 절대적 기초를 이룸. 이런 의미에서 관례적인 표현이지만 단순하게 인식한다면 언어는 엄청나게 귀중하고 중요한 선물임
- 최근까지도 우반구에 관한 모든 것은 어둠속에 가려져 있었음. 결국 그것은 침묵하는 반구로 알려져 있음. 언어적인 좌반구적 사고방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바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쥐기(grasp)와 외연적 언어를 기준으로 볼 때, 좌반구가 이룬 업적에 비할만한 것들을 우반구에서 담당하는 것은 우측 전두엽 아닌가? 실제로 언어가 하는 것 중 좌반구가 담당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이룰 수 있도록, 즉 공감하고 유머를 사용하고 아이러니를 활용하게 하고, 사실의 전달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소통하고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우측 전두엽임. 여기서는 언어가 그저 조작의 도구가 아니라 타자에게 다가가는 수단이 됨. 사실 인간 존재가 지닌 놀라운 점들, 동물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것들은 대부분 우반구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우반구가 팽창한 부분인 우측 전두엽의 활동에 의존함. 인간과 동물을 궁극적으로 구분해주는 특징을 열거해 보라고 했을 때, 이성과 언어라고 하는 것은 고전적이며 변변찮은 대답이다. 이성 및 언어와 관계가 있는 추리능력은 다른 동물도 일부 갖고 있음. 반면 동물에게는 전혀 없는 특징들이 우리 인간에게는 더 많음. 이런 것들 가운데 많은 부분, 혹은 대개의 경우 가장 주된 부분은 우반구의 활동에 의거하며, 대개는 우측 전두엽의 활동에 따른 것임. 좌반구와 세계의 관계가 손을 내밀어 쥐고 일은 하는 관계라면, 우반구는 단지 다가가는 관계임. 사실 두 반구의 존재방식상 나타나는 주된 차이는, 좌반구는 항상 '눈에 보이는 목적'과 용도를 갖고 있으며, 의식적인 의지의 도구로서의 측면이 우반구보다 더 많다는 점이다.
- 좌반구는 항상 목적에 개입되어 있음. 좌반구는 항상 목표가 설정된 상태이고, 도구적 목적이 없는 것은 곧바로 평가절하된다. 이와 달리 우반구는 아무런 설계도 없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아무런 선입견 없이, 미리 규정된 목표없이 주의력을 발휘한다. 우반구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이나 보살핌의 관계를 맺는다. 두 반구로서 매개된 경험들 간의 주된 차이, 그 두가지 존재양식을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좌반구의 세계는 지시적 언어와 추상에 의존하며, 알려지고 고정되고 정지적이고 고립되고 탈맥락화되고 명시적이고 신체를 벗어나 있고 일반적 본성을 지니면서 궁극적으로는 생명이 없는 것들을 조작하는 힘과 명료성을 발휘한다. 우반구는 개별적이고 변화하고 진화하고 상호관련되고 묵시적이고 신체를 가졌고, 살고 있는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지만 사물의 본성상 절대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고 항상 불완전하게만 알려지는 세계를 제시한다. 이러한 세계에 우반구는 보살핌의 관계로 존재한다. 좌반구가 중개하는 지식은 폐쇄 시스템 속의 지식이다. 그것은 완벽하다는 이점이 있지만, 그런 완벽성은 궁극적으로 공허함과 자기 참조성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얻어진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다른 사물들의 기계적 재배열이라는 기준에서만 지식을 중개할 수 있다. 그것은 절대로 뭔가 새로운 것을 알고자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그 자체의 표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물 그 자체가 우반구에게 존재할 때 좌반구에게는 표상될 뿐이고, 그렇게 하여 사물의 관념이 된다. 타자라는 것이 어떤 것이든 우반구는 그것을 의식하지만, 좌반구의 의식은 그 자체의 의식이다.
- 다마지오는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신경학적 용어를 써서 감정의 우선성을 지적함. '전통적으로 신피질적이라고 추정된 합리성의 기관은, 생물학적 규제가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은 합리성의 기관을 생물학적 규제기관 위에다 구축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과 함께 구축한 것 같다.'
- 85년 벤저민 리벳은 의식적 의지를 신경심리학적 관점에서 탐구한 연구논문 한편을 출간. 리벳은 불특정한 실험대상자들을 모아서 두피에 전극을 붙이고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여 보라고 요청한 다음, 뇌파 전위 기록장치로 손가락 움직임에 따른 두뇌속 변화를 기록했음. 그 결과, 한스 코른후버라는 독일 신경학자가 그전에 발견한 내용이 확인되었음. 코른후버는 같은 실험을 통해 손가락 움직임이 일어나기 1초쯤 전에 순간적인 변동이, 즉 준비성 잠재력이라 알려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냄. 하지만 리벳이 발견한 것은, 놀랍게도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의지적 충동이 준비성 잠재력보다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약 0.2초 뒤에 일어난다는 것이었음. 마치 주체가 어떤 행동을 할지 두뇌가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았음. 이는 분명히 우리가 어떤 일을 할지를 의식이 결정한다는 통념과 맞지 않음. 이로써 인간이 창조될 때 신이 인간에게 부여했다는 자유의지에 대한 의혹이 피어올랐고, 광범위한 철학적 논쟁 및 연구가 행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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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1

인문 2014. 10. 2. 17:18

 


이미지 인문학. 1

저자
진중권 지음
출판사
천년의상상 | 2014-06-0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진중권의 이미지 인문학 프로젝트디지털 이미지 속에 감추어진 섬뜩...
가격비교

- 근대 철학은 진지를 정신과 실재의 일치로 규정. 하지만 일치해야 할 정신과 실재는 성격이 다름. 즉 자연은 연속적이나 숫자는 단절적임. 따라서 수를 자연에 들이대면 자연은 수와 수 사이의 빈틈으로 빠져나오게 됨. 17세기의 과학자들이 자연의 수학화를 시도했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가 바로 이것임. 자연을 인식하려면 먼저 이 연속과 불연속의 모순부터 극복해야 함. 이 '근대의 패러독스'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손으로 해결된다. 그들은 미적분으로 숫자들 사이의 간극을 채움으로써 자연의 모든 것을 형식화할 수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전지하고 전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이론적 가능성일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미분방정식은 곧 현실에는 응용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실생활에서 해결이 필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너무 복잡하여 인간의 계산능력으로는 풀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아직 지식을 권력으로 전화할 수 없었다. 전지하나 전능하지는 못한 이 답답한 상태가 해결되려면 계산기가 필요했다. 17세기에 계산기 제작붐이 일어난 것은 이와 관련되리라. 라이프니츠 자신도 1670년경부터 모두 다섯개의 모델을 고안한 바 있다. 적어도 계산이라는 면에서 기계는 인간보다 우월하다. 17세기의 계산기들은 모두 십진법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당시 라이프니츠는 기계적 계산에 적합한 언어는 이진코드라는 인식을 이미 갖고 있었음. 하지만 이진법에 기초한 계산이라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기까지는 230여년을 더 기다려야 했음. 38년 독일의 공학자 콘라드 추제는 디지털 원리로 작동하는 계산기 Z1을 인류 최초로 제작함. 이진코드로 짧은 시간에 무수히 많은 연산을 수행하는 컴퓨터와 더불어 17세기 이후 그저 이론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자연의 정복이 비로소 실천적 가능성으로 전화됨
- 고대인의 상상력이 주술적 상상력이라면 현대인의 상상력은 기술적 상상력임. 인간이 세계를 표상하는 상징형식의 변화를 플루서는 이렇게 요약함. "먼저 인간은 생활세계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그것을 상상한다. 이어서 그는 상상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그것을 기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선형적 문자로 쓰인 비판으로부터 물러나 그것을 분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상상력에 힘입어 그 분석을 통해 얻은 합성 이미지를 투사한다."
- 오늘날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미디어를 통해 매개된 것.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남이 본 것을 보고, 남이 들은 것을 듣는다. 반면 미디어에 매개되지 않은 체험은 대부분 사회적 의미가 없는 사소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귄터 안더스는 이 매개된 체험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사실이라 부르는 것의 어원은 만들어진 것(faktum)이라는 라틴어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우리가 사실로 알고 있는 것이 실은 이미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 디지털 가상이 아날로그 세계를 그대로 베끼는 것은 적어도 한가지 장점을 갖는다. 인터페이스에 관한 별도 학습 없이도 대중이 운영체계를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디지털 기기의 인터페이스는 아날로그 현실과 디지털 가상이 봉합선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임. 디지털 대중도 전자책의 책장을 넘길 때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고 싶어함. 그래서 디지털 문화는 탈육체화에서 재육체화로, 비물질화에서 재물질화로 나아가고 있음. 산업혁명의 인터페이스는 기계를 상수로 놓고 인간을 변수로 간주해 인간을 기계에 꿰맞추려는 경향이 있었음. 그때 인간은 기계를 지향했음.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을 지배했던 무기물의 미학, 즉 추상과 몽타주는 그런 기계화의 예술적 반영이리라. 반면 정보혁명의 인터페이스는 인간을 상수로 놓고 기계를 변수로 놓는다. 여기서 디지털 가상마저도 아날로그 현실과 똑같이 디자인하려는, 이른바 디지로그의 복고적 경향이 발생한다. 오늘날 예술에서 유기체의 미학이 부활하는 것은 이런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대중의 의식에 일어나는 변화다. 그것이 가상현실이든 증강현실이든, 오늘날의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가상과 현실을 봉합선 없이 중첩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런 인터페이스에 이미 익숙한 대중은 가짜마저 진짜처럼 대하는 파타피지컬한 태도를 자연스레 갖게 된다. 디지털 대중은 가상과 현실, 관념과 실재의 구별을 괄호 안에 집어넣어버리는 현상학적 판단중지, 즉 존재론적 중립의 태도를 취하려 한다. 이것이 디지털 대중의 새로운 세계감정이다.
-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에 따르면 미디어의 발전은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가 공존하면서 상대의 전략을 차용하는 식으로 이루어짐. 이를 재매개라 부름. 이를테면 윈도우가 아날로그의 은유(오피스, 폴더, 파일, 휴지통)를 사용하는 것은 과도기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미디어의 발전에서 쉽게 발견되는 일반적 현상이라는 것. 칼라TV의 중계과정에서 자연스레 발생한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방송이라는 올드미디어가 게임이라는 뉴미디어 전략을 차용한 재매개 현상이라는 것. 중계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채팅창 혹은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시청자 견해가 올라왔음. 네티즌들은 방송으로 지켜본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촬영팀에게 전달되었음. 이를테면 광화문에서 시민들을 인터뷰하다가 "시위대가 사직터너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려 한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방송팀은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감. 카메라로 비친 영상을 보고, 지금 도로에 스티로폼으로 연단을 쌓는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봐달라고 구체적 지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음.
- 방송이 게임의 포맷을 차용했따는 사실의 바탕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음. 기실 방송의 보도는 진지한 현실에 관한 것이고 게임은 허구속에서 이루어지는 놀이일 뿐이다. 하지만 촛불집회 현장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정치와 오락을 가르던 뚜렷한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 현장에서는 불과 100미터 거리를 두고 치열한 투쟁과 즐거운 놀이가 공존했다. 촛불시위 속에서 저개발의 정치, 즉 투쟁의 정치는 과개발의 정치, 즉 놀이의 정치와 하나가 되었다. 서사학과 유희학은 앞으로 정치학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분야가 될 것이다. 저개발의 정치에서 과개발의 정치로 이행하는 데는 당연히 물질적 근거가 바탕에 깔려 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오면서 노동과 오락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정보사회에서는 생산의 수단과 여가의 수단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중은 컴퓨터로 노동하고 컴퓨터로 놀이한다. 노동과 여가가 시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것이 종종 노동을 감시해야 할 자본에는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노동자들이 클릭 한번에 근무모드에서 오락모드로 넘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종종 외부로 연결되는 인터넷을 제한하거나 아예 차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구술문화에서는 로고스보다는 뮈토스가 중요. 거기에는 객관적 기술보다는 주관적 상상이, 논증의 정합성보다는 플롯의 개연성이, 이성적 비판보다는 정서적 공감이 더 잘 어울림. 구술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태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제공하는 능력이 아니라 현실의 복잡한 사태를 영웅적 스토리로 압축, 변환하는 능력임. 토론토 학파 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전자매체는 문자문화가 무너뜨린 공동체 의식을 복원하는 경향이 있음. 실제로 나꼼수 청취자들은 버스나 전철에서 독특한 손동작으로 같은 상상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무언의 교감을 낯선 이들과 나누곤 했음.
- 인쇄술로 무장한 문자문화는 한때 구술문화의 비논리를 비웃었음. 새로운 구술문화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무장하고 나타나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문자문화의 논리를 비웃음. 서구사회가 오랜시간에 걸쳐 비교적 탄탄한 문자문화를 형성해왔다면 한국에서는 문자문화의 역사가 매우 짧았음. 공동체적 구술문화의 전통이 강고하다는 점은 인터넷이나 SNS위에 가상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유리한 조건이 되어줌. 하지만 그것이 문자문화의 비판적 이성으로 뒷받침되지 못할 때 그 발달한 테크놀러지를 들고 1차 구술문화로 함몰하기 쉽다.
- 나꼼수는 탈정치화한 디지털 세계에서 내면에 숨은 정치적 욕망을 발견하고 끌어냈으며,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의 연대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디지털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도 보여주었음. 나아가 유저가 제작하는 콘텐츠가 신뢰도와 영향력에서 기존 언론을 능가할 수 있음을 입증했고, 기능전환으로 테크놀러지를 정치적 목적에 전유하는 탁월한 예를 제시하며 정치의식에 유희정신을 결합한 새로운 유형의 정치적 주체들을 낳았음. 나꼼수의 한계는 우리 사회의 의식이 아직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진보적 잠재성을 올바로 활용할만큼 성숙하지 못했음을 의미함
- 차별을 당하는 자들이 왜 타인을 차별하려고 할까? 이유가 있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에서 신분체 철폐에 가장 반대한 것은 외려 상민들이었음. 신분제가 철폐되면 천민을 차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 사무라이로부터 받는 차별의 수모를 견디게 해준 것은 그들이 마음놓고 차별할 수 있는 천민계층의 존재였음. 일베의 심리도 다르지 않음. 현실에서는 차별의 대상이지만 적어도 일베에서 그들은 차별의 주체가 될 수 있음. 일베의 고학력 인증 사태도 이와 관련됨. 그것은 학력으로 차별받는 이들이 차별에 항의하는 대신 타인의 고학력을 내세워 차별하는 위치에 서보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다.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회원들이 굳이 학력을 인증할 필요를 못느낄 것이다. 일베에서는 다르다. 거기서 그것은 실재계를 가리는 스크린 역할을 한다. 즉 자신을 소수 고학력 회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가 학벌사회의 루저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차별받는 현실을 잊으려고 차별하는 권력에 동승할 때 병신게임의 무정부주의적 해학은 곧바로 파시스트적 공격으로 전화하게 됨. 자신을 병신이라 부르려면 보통은 존재의 여유가 필요하다. 자신이 병신이 아니라 믿는 이들만이 자신을 병신이라 부르는 놀이를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일베회원들은 다르다. 그들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자신을 병신으로 여긴다. 그들이 자신을 병신이라 부를 때 거기에는 놀이의 여유가 아니라 실존의 절박함이 묻어 있다. 이것이 그들이 인정하기 싫은 실재계다. 이를 공격적으로 망각하려고 억지로 차별대상을 만들어보지만 그런다고 실재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반복적으로 표출되기 마련, 그래서 혐오발언을 마치 오토마톤처럼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개인의 기억은 항상적이지 않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주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기억된다. 역사라는 이름의 집단적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역사학은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보존하는 작업이 아니다. 집단의 기억을 끊임없이 재조직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이 할 일이고, 또 이제까지 해왔던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집단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과거의 기억을 다시 조직하는 것은 그리 신기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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