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갑고 닫힌 마음, 능력주의 믿음의 부작용
저의 코넬대학교 동료인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교수는 2016년에 낸 책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냈다고 믿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 부작용이 큽니다. 자기 성취가 스스로 이룬 것이라 믿 을수록 세금 납부에 더 적대적입니다. 정부와 사회가 도와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실패한 사람을 운이 나쁘 기보다는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하므로, 이들을 돕는 일에도 소극적입니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의 성취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런 믿음이 타당하다고 할 수 없 습니다. 오늘의 내가 될 수 있던 것은 8할 이상이 공동체와 다 른 사람 덕분입니다.
- 한국전쟁도 태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이철희 교수는 1951년 전쟁이 한창일 때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학력이 더 낮고 좋은 직업을 가질 확률도 상당히 낮았다고 보고했습니다."
<2-6>는 2006년에 조사한 출생 연도별 전문직 · 비숙련 노 동자 비율입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전문직 종사자 비율이 늘 어나고, 비숙련 노동자 비율은 현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관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외가 존재합니다.
바로 1951년생입니다. 이들은 전후 세대에 비해 전문직 종 사 비율이 더 낮고 평생을 비숙련 노동자로 어렵게 산 사람이 유달리 많았습니다. 엄마 배 속에서 치열한 전쟁을 겪은 아이 들의 삶은 전쟁 전후에 태어난 아이들보다 더 고달팠습니다.
- 태아를 위한 좋은 정책, 나쁜 정책
좋은 정책은 아이들의 삶을 개선합니다. 1970년 제정된 미국의 대기오염방지법(<1970 Clean Air Act)은 획기적인 규제였습니다. 공해 물질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법안 도입 뒤 총부유입자Total Suspended Particles(공기 중 100μm 보다 작은 모든 입자)가 95.9mg/m2에서 8~12mg/m2가량 줄었습니 다. 공해 물질이 줄어들어 혜택을 본 태아는 30년 뒤 어른이 되어 소득이 1%가량 늘었습니다. 공해 물질이 뇌 발달에 영향 을 주고, 이것이 교육 성과로 이어졌기 때문이지요?
반면 나쁜 정책은 아이들의 삶을 악화합니다. 1967년 스웨 덴 정부는 다른 술보다 알코올 함량이 낮은 맥주를 더 장려하 려 했습니다. 몇몇 주에서 맥주를 일반 슈퍼에서도 팔 수 있게 했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다른 술 소비의 변화는 없었는데, 젊은이들 사이에 도수 높은 맥주의 소비가 무려 5배 늘었습니다(<27> 참조).
깜짝 놀란 정부는 황급히 정책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정 책을 펼친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일이 벌어졌습 니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비율은 전국 평균 83.4%보다 낮은 77.1%였습니다. 대학 졸업 비율도 19.3%에서 16.1%로 줄었습니다. 성인이 됐을 때 임금은 무려 24% 줄었습니다. 이 끔찍한 결과는 소득이 낮은 계층에서 훨씬 더 크게 나타났습 니다.
- 주목할 부분은 인지 기능 못지않게 비인지 기능도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가령 끈기 있는 학생은 교육에 더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임금도 증가하지요. 성격 좋은 사람은 회사 생활을 더 잘하지요. 인지·비인지 기능은 또한 상보적입니다. 이를 모두 갖춘 사람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할 확률이 훨 씬 높지요. 이런 형태는 교육·건강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드러 납니다.
요약하면 영·유아 조기교육 프로그램의 효과는 상당 부분 비인지 기능 상승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영·유아 프로그램 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장기적 효과의 비결입니다.
어린 자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투자는 학원과 과외 수업 등 인지 기능을 높이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소득 층 아이들을 가난의 대물림에서 구하려면 성적 향상보다는 자 존감과 참을성 등 비인지 기능을 개선하는 노력을 반드시 병행해야 합니다.
-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앞서 1970~1980년대 어린이집 확대가 아이들의 성적을 높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엄마가 집에서 아이를 돌보도록 유도했는데 성적이 높아졌다니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양질의 영·유아 교육 도입은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에 '평균적으로' 긍 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집에서 제대로 된 돌봄이 이 루어지기 어려운 저소득층 가정을 중심으로 효과가 컸습니다.
하지만 '평균적으로'라고 말했습니다. 모두에게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일부 아이들은 보육시설보다 집에 서 엄마의 돌봄을 받는 편이 더 나았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들어 엄마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유인이 제공되자, 엄마와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각 가정이 부모의 노동시장 참여를 스스로 결정했을 때 아 이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영·유아 돌봄의 무조건적인 시설화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볼 권리도 존중해야 합니다.
- 이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집에서 키우느냐, 보육시설에 보내느냐 따라 지원금 차이가 매우 컸습니다.
2021년 기준 만 0세의 보육료 지원 금액은 현재 최대 74만 8,500원인 반면,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 겨우 20만 원을 받습니 다. 만 1세의 경우 보육시설 보조금은 최대 65만8,500원, 양육 수당은 15만 원입니다. 만2세부터 보조금은 최대 54만6,000원, 양육수당은 불과 10만 원이고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죠.
그러나 2023년 우리나라도 '영아 수당'을 '부모 급여'로 전 환했습니다. 즉, 어린이집 등원 여부와 상관없이 만 0세는 월 70만 원, 만 1세는 월 35만 원을 지급받습니다.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중요한 변화입니다.
이렇게 부모가 원한다면 아이를 집에서 돌볼 수 있도록 도 와야 합니다. 모든 가정의 구성원이 노동시장 참여와 돌봄 방 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사회가 발전합니다. .
- 아빠가 엄마와 함께 아이를 돌볼 수 있는 10일의 힘은 대 단했습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할 확률이 14% 줄어들었습니 다. 정신과 약을 처방받을 확률도 26%나 줄었습니다. 아이 출 생후 첫 1년은 양육 과정이 가장 다사다난할 시기입니다. 가 령 육아휴직 중인 엄마가 아프면 아이를 돌보는 일이 여간 어 려운 게 아닙니다.
이때 아빠가 집에 달려올 수 있다면 엄마의 병을 키우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또 힘들고 불확실성이 높은 시기에 아빠 가 언제든 집에 올 수 있다는 사실은 심리적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아쉽게도 이 연구에서 아빠의 이런 참여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자료 부족으로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이 연구는 엄마가 이미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아빠의 추가적인 육아 참여가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시사합니다. 한국도 이런 제도의 도입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공부 잘하는 친구가 주변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득을 보진 않습니다. 하위권 학생의 경우 같은 반에 상위권 학생 이 늘어나도 성적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반면 상위권 학생들 은, 비슷하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늘어나면 큰 자극을 받아 성적이 오릅니다. 전교 1등은 전교 2등과 짝을 이뤘을 때 성적 이 가장 많이 오릅니다.
하위권 학생들은 오히려 중위권 학생이 많아질 때 성적이 오르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즉, 전교 1등과 전교 꼴찌의 조합 은 그 둘 모두에게 별 소용이 없습니다. 적어도 학업 성취도 점수 차원에서는요. 전교 꼴지에게 전교 1등은 도저히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근로 환경 조사에 의하면 제조업에 종사하는 남성은 같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여성에 비해 훨씬 더 큰 산업 위험에 시달립니다(<73> 참조). 남자 제조업 노동자는 진동. 소음. 먼지·유해물질 · 과로 등 산업 위험에 과다노출되고 있습니다. 또한 음주를 겸한 회식도 남성 위주로 이뤄집니다.
워낙 심각한 산업 위험 요인에 노출된 직장을 다녔기에 실 직후 오히려 건강이 좋아지는 게 우리나라 제조업 남성 노동 자의 현실입니다. 실직하고 오히려 건강해진다니 씁쓸한 마음 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산업 환경 개선을 위한 정부의 관심과 기업의 적극적 노력을 주문합니다.
- 한편, 여기서 살펴본 1980년대 미국과 덴마크, 2000년대 한국은 상대적으로 해고가 쉽지 않은(노동시장이 유연하지 않은) 환경에서 실직의 효과를 측정한 연구입니다. 경직된 노동시장 은 해고도 어렵고 신규 채용도 적습니다. 반면 유연한 노동시 장은 실직도, 신규 채용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실직의 부정적 영향은 경직된 노동시장에서 극대화됩니다.
OECD와 유럽의 주요 선진국은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안 정성을 동시에 높이는 '유연 안정성 제고를 중요한 정책목표 로 삼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덴마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나라도 같은 전략을 택해야 합니다.
특별히 해고될 염려도 거의 없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임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연공제의 폐해가 큽니다. 젊은 세대한테 지나치게 불리한, 공정하지 못한 제도입니다. 운 나쁘게 실직한 사람들이 새로운 직장을 찾기에도 불리해 실직의 부정적 영향이 커집니다. 기업의 경쟁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지요.
다만, 동시에, 실직해도 큰 걱정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 다. 사회안전망을 크게 강화해야 합니다. 서울시에서 시범 사 업 중인 '안심 소득은 확실하게 소득을 보장합니다. 가령 소 득이 없는 3인 가구에 월 170만 원을 지급합니다.
유연한 노동시장을 통해 기업은 능력 있는 노동자를 고용 할 수 있고 경쟁력을 높이며, 국가는 충분한 소득 보장을 제공 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그런데 장기요양보험은 아무래도 한정된 자원으로 운영하 다 보니 노인이 집에서 지내기에 충분한 돌봄을 제공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1~2등급을 받은 분들의 재가 서 비스 월 한도액이 2022년 기준으로 각각 167만 원, 149만원 정도입니다. 이는 하루 최대 4시간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준입니다(이 중 15%는 본인 부담금으로 지불합니다). 하지만 이 분들은 사실상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현재로서는 이런 분들이 낮 시간에 주간보호시설을 이 용하고 밤에는 가족이 돌보는 게 그나마 대안이지만, 여전히 지원이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보건복지부의 '2019 장기 요양 실태 조사'에 따르면, 조사 인원 중 47%가 재 가서비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 상황이 이렇다 보니 1~2등급을 받은 분들 중에는 집에서 지내고 싶지만 '요양원'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양 원은 하루 6만~6만5,000원의 20%만 부담하면(월 약 40만 원) 24시간 돌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양보호사가 노인 여러 명을 돌보는 형태로,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보 통 3~4명 이상이 한 방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개인이 부담 하는 비용은 비보험인 식비 및 이미용 비용 등을 포함해 대략 월 65만~80만원 정도입니다.
3~4등급인 경우는 최대 3시간 정도 재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특별한 사유가 아니고는 요양원에 갈 수도 없습니다. 결국 가족이 경제활동을 하려면 보험 혜택이 없는 추가적인 간병비를 들여야 하고, 이러한 틈을 '요양병원' 이 채우고 있습니다(<9-2> 참조).
등급 외 판정을 받았거나 3~5등급을 받았지만 돌봄의 필 요가 여전하다면 차선책으로 요양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 다. 요양병원은 원칙적으로는 질병 치료나 재활을 목표로 합 니다(그래서 건강보험이 비용을 보조합니다). 그러나 요양원처럼 입원에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꿩 대신 닭처럼 요양병원에 입원하곤 합니다.
요양병원의 병실당 평균 병상은 6~7개로 역시 단체 생활 을 합니다. 요양병원의 입원비는 4~6인실의 경우 약 40만~ 50만원(1~2인실의 경우 비용이 크게 상승)이지만 간병비 부담이 큽니다. 6인실에 간병인 1명을 두면 월 60만 원, 2명을 두면 월 120만 원이 추가로 듭니다. 가령 고관절 수술 등을 해서 개 인 간병인을 두면 간병 비용이 최소 월 300만 원에 달합니다.
- 그렇다면 현행 제도의 재가 및 시설 서비스가 필요한 도움 을 충분히 제공하는지, 가족이 정상적인 삶의 질을 누릴 수 있 는지, 또한 어르신의 건강에는 어떤 것이 더 나을지 따져보아 야 합니다. 그런데 시설과 재가 서비스 각각의 이용자를 단순 비교해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돌봄의 필요가 더 클수록, 건강이 더 나쁠수록, 또 돌보아 줄 가족이 없을수록 시설에 입소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따라 서 시설에 계신 노인들이 재가 서비스를 받는 노인들보다 더 아프다고 해서, 그것이 시설 혹은 재가 서비스 때문인지 다른 요인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 연구를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박사과정 때 장기요양인정점수는 거의 같으나 등급 판정이 아 슬아슬하게 갈려 (95점, 75점, 51점 전후) 받는 혜택이 달라지는 노인의 삶을 추적하는 연구를 했습니다'
결과는 노인의 상태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먼저 95점 전후 의 '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비교해봅시다. 95점(1등급) 노인은 94.9점(2등급) 노인에 비해 집에 있을 확률이 큽니다. 시설 입소로 인한 본인 부담금 차이 때문입니다. 95점(1등급) 이면 하루 6만5,190원의 20%인 약 1만3,000원을, 94.9점 (2등 급)이면 약 1만2,000원을 냅니다. 하루 1,000원 차이지만, 이런 작은 차이에도 시설 입소 확률이 2%포인트 줄었습니다.
이분들을 추적해보니 시설 혹은 재가 서비스로 인한 사망 여부, 건강 상태에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지내 는 분들은 시설에 입소하신 분들에 비해 의료비 지출이 크게 줄었습니다. 의료비를 적게 지출함에도 같은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집에서 지내는 게 이득이었습니다.
- 다음은 75점 전후의 '상당 부분' 도움이 필요한 분들입니 다. 75점(2등급)이면 시설 입소가 가능하나, 74.9점(3등급)이면 집에서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거의 비슷한 처지임에도, 아슬 아슬하게 2등급을 받으면 시설을 선택할 확률이 크게 증가합 니다.
이분들이 시설에 더 많이 입소한 결과, 자녀의 돌봄 부담 이 실제로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질병, 사망 및 의료 비 지출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노인 처지에서는 (특별한 건강 및 재정상의 이득도 없이) 아무래도 집보다는 불편한 시설에 입소 한 것이지만, 자녀 입장에서 보면 자유로운 시간을 얻게 된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51점 전후의 '일정 부분' 도움이 필요한 분들입 니다. 51점(4등급)이면 재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50.9점 은 (치매가 아니라면)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4등급을 받아 하루에 2~3시간이나마 돌봄을 받는다 할지라도 가족의 노고가 크게 줄지도 않고, 노인의 건강이 좋아지지도 않고, 의 료비가 절약되지도 않습니다. 돌봄에 지친 가족이 숨 좀 돌리 는 정도의 시간 여유 같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도움이 있을 수는 있었겠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요약하면 노인들에게는 재가 서비스가 (시설 서비스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나은 선택지였습니다. 돌봄을 제공하는 가족에 게는 시설 서비스가 더 많은 자유를 주겠지만 말입니다.
- 노인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의학적 치료가 긴급히 필요하지 않 는 한) 집에서 충분한 돌봄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돌 봄은 현재 하루 4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장기요양보험료 2배 인상에 동의해야 하루 8시간 재가 서비 스 그리고 더 양질의 시설 서비스가 가능해질 터인데, 단기간 에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돌봄을 제공할 건강한 배우자가 없는 한) 월 300만원 넘 는 막대한 추가 간병비를 감당할 수 있는 노인들만이 돌봄이 필요할 때 집에서 그나마 안락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노인 돌봄의 시설화를 낳았습니다.
장기요양보험 도입 이후 요양시설은 2008년 1,332개에서 2021년 4,057개로 늘었습니다. 장기요양보험과 무관한 요양 병원도 덩달아 증가해서 2008년 690개에서 2021년 1,464개로 늘어났습니다(<9-3> 참조).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인이 원하는 곳에서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있게끔 도와야 합니다. 즉, 어느 정도 돌봄의 탈시설화가 필요합니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노인이 시설보다 는) 재가 서비스를 택할 수 있도록 수가를 조정해야 할 것입니 다. 또한 중장기 과제로서 장기요양보험료 인상을 통해 재가와 시설 서비스 모두의 양적·질적 개선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급격한 노령화로 인해 지금 수준의 서비스를 유지한다 하더라 도 장기요양보험료 부담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 탈시설화를 한다면 집에서 양질의 돌봄을 제공할 수 있어 야겠죠. 간병 부담은 가족의 삶의 질이 떨어뜨립니다. “긴 병 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겠죠. 가족 이외 에 돌봄을 제공할 간병 인력이 모자라고, 그 비용도 월 300만 원을 넘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지금은 내국인과 중국 동포만 이 가능한 간병인 공급의 확충도 필요합니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외국인 간병인 모델을 우리 실정에 맞 게 수정해서 도입하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이들 국가 는 육아 도우미와 노인 간병인을 필리핀 등에서 월 100만 원 이하의 임금을, 숙식 제공을 기본 조건으로 수급하고 있습니 다. 이들이 본국에서 받는 임금이 약 20만 원 정도라 이 정도의 금액으로도 이주 유인이 충분합니다.
그 결과 홍콩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 며 쇼핑하고 산책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외국인 간병인에게 우리나라의 최 저임금을 적용하면 월 200만 원이 넘는 수준입니다. 이 중 상 당액을 장기요양보험제도를 통해 국가가 보조한다면, 우리 국 민은 실질적으로 훨씬 낮은 금액으로 돌봄 혜택을 누릴 수 있 을 것입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저렴한 비용으로 돌봄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 우리나라는 2002년부터 40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2년마다 암 검진을 제공합니다. 처음엔 국가 암 검진이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저를 경제학 공부로 이끈 그 촌부 같 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했죠.
분석 결과, 실제 국가 암 검진을 받은 사람들은 위암과 유 방암을 더 많이 또 일찍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암 검진은 사망 률 감소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암의 조기 발 견을 도왔는데 암 검진의 궁극적 목적인 죽음을 막지 못했다니 의아했습니다. 그 이유를 집요하게 파헤치며 박사과정의 마지막 해를 보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우리 국민이 국가 암 검진 외에 다른 경로로도 쉽게 암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료 접근성이 높 은 한국에선 속쓰림 같은 증상으로 병원에 방문해 내시경 검 사를 하거나 민간 암 검진도 받습니다.
국가가 나서지 않아도 6개월 안에 이런 경로로 암을 발견 합니다. 결국 국가 암 검진으로 암을 약간 더 빨리 발견한다고 해서 사망률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건 아니었던 셈이죠.
둘째 이유는, 국가 암 검진 혜택이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전 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 암 검진을 받지 않은 사람은 받은 사람보다 흡연이나 과음 등으로 (암종에 따라) 암으로 죽을 확률이 2~13배나 높았습니다. 암 검진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 검진에 참여하지 않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 기본소득은 가난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하후상박厚上薄 이 아닌, 모두에게 동일한 액수를 나누어주는 방식입니다. 이 는 소득 재분배 효과가 매우 떨어집니다. 같은 수준의 부의 재 분배 효과를 위해서 기본 소득은 안심 소득에 비해 훨씬 더 많 은 지출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기본소득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누진세를 대폭 강화하는 등의 세제 개선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렇게 해야만 안심 소득 수준의 부의 재분배 효과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결국 기본 소득의 성패는 소득세제를 얼마나 누진적으로 바꿀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혹은 이 엄청난 비용을 감당 할 다른 재원을 마련해야죠. 과감한 증세가 없다면, 기본 소득은 푼돈 수준의 매우 적은 금액을 국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부의 재분배 기능도 실제적인 사회 보장 기능도 미미한 정책이 될 것입니다.
안심 소득과 기본소득 모두 공통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기존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비해, 두 제도 모두 일을 할 유인을 충분히 유지합니다. 일을 한다고 해서 복지 혜택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문제를 원천 차단했기 때문이죠. 이 점에서는 둘 다 기존 소득 보장 제도의 허점을 극복하는 좋은 방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 소득은 적어도 지원 과정에서 자산·소득 조사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혹자는 안심 소득보다 기본 소득이 낫다고 주장합니다. 안심 소득은 선별을 해야 하고 기본 소득은 선별 과정이 없어서 행정 비용 감소에 우위 가 있다는 거죠. 하지만 기본소득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소 득세제 개선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므로, 결국 소득에 의한 선별은 모든 제도에 해당하는 셈이죠.
학자로서 저는 같은 재원으로 불평등 개선 효과(부의 재분 배 효과)가 월등한 안심 소득을 지지하는 쪽입니다. 기본 소득 은 강력한 누진세제를 도입하는 데 따른 국민의 동의가 반드 시 있어야 고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 소득은 낮은 불평 등 개선 효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당분간 도입하기는 어렵다 고 생각합니다.
- 그럼 의료 취약 지역에서 일할 의사는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오지에서 일하는 의료인 선발 방식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연구가 있습니다. 잠비아 정부는 국가 보건 요원을 선발 할 때 24개 시군구에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보건 요원에 지원 하라"고 선전하고, 나머지 24개 시군구에는 "(의사가 될 수 있는 자리에 지원해) 커리어를 극대화하라"고 선전했죠(<14-3> 참조). 그 결과 실제로 전자에는 사회봉사 정신이 높은 사람들이, 후 자에는 자기 인생의 성취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선발되었습 니다.
이들이 지역사회에 실제 배치되고 나서 누가 더 일을 잘했 을까요? 놀랍게도 후자였습니다. 방문 진료 횟수, 응급 진료 처리 속도, 영·유아 백신 접종률 등 모든 척도에서 자기 인생 의 성취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사회봉사 정신이 높은 사람들을 압도했죠.
이 연구는 아프리카에서 이뤄졌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해줍니다. 
- 선별 효과와 인센티브 효과
어떻게 해야 일 잘하는 사람(경제학 용어로 '생산성이 높은 사람')을 뽑을 수 있을까요? 자명한 방법은 보상을 높이는 겁니다. 보상 에는 임금뿐 아니라 고용 안정성, 노동시간, 사회적 존경 등 다 양한 측면이 포함됩니다. 경제학자들은 높은 보상이 어떻게 생 산성을 올리는지 밝혀냈습니다.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별 효과screening effect'입니다. 임금이 높은 자 리에는 좋은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능력자를 채용할 가능성 도 높습니다. 두 번째는 '인센티브 효과incentive effect' 입니다. 높은 보상은 고용 이후에도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높이는 유인 을 제공합니다.
인센티브 효과는 크게 2가지 채널로 설명합니다. 우선, 만일 해고당해 실직하거나 다른 직장으로 부득이 옮기게 되면 손해가 큽니다. 또 높은 보상을 받은 기쁨 및 감사의 의미로 더 열심히 일하는 '선물 교환gift exchange'이 있습니다.
먼저 임금부터 살펴보죠. 높은 임금이 노동자의 생산 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최초로 연구한 사람은 인사경제 학personnel economics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워드 러지어 Edward Lazear입니다. 그는 미국의 한 자동차 유리 생산업체가 1994~1995년 임금 지급 방식을 정액급제 hourly wage에서 성과 급제 piece rate로 변경한 것에 주목했습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더 벌 수 있게 된 것이죠. 그 결과 생산성 이 무려 44%나 상승했습니다. 
- 주 5일제는 연장 근로 비용을 상승시켜 회사가 노동자에게 초과근무 요구를 어렵게 하는 조처이고, 주 52시간제는 노 동시간 총량을 원천적으로 틀어막는 제도입니다. 사실 이렇게 노동시간을 일률적으로 규제하고 처벌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 향이 아닙니다.
지식 기반 경제 구조에서 고용 형태는 복잡하고 다양해지 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 52시간보다 더 일하고 싶 은 노동자에게 일하지 말라고 국가가 강요하는 게 과연 정당 한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정책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지 회사와 국민의 일상을 지나치게 규제하고 조정하는 구실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제도는 탄력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2023년 주 69시간제 논의의 방향성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제도의 요점은 주 69시간을 근무하라 는 의미가 아니라, 근로자의 근무시간에 유연성을 더하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 69시간제가 반대에 부딪힌 것은, 우리 사회의 지나친 과로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 다. 우리나라 근로자의 연평균 실제 근로시간은 2021년 기준 1,910 시간으로 OECD 36개국 중 5위입니다(<16-4>). 10
우리와 비슷한 경제 수준의 유럽 국가들은 1,300~1,600시 간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더해 평균 출퇴근 시간이 58분으로,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입니다(<16-5>)." 결국 가정에서 보 낼 수 있는 시간이 매우 부족하고, 이것이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출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명합니다.
- 숨 가쁘게 나열한 등교 제한의 대가는 앞으로 100년에 걸 쳐 코로나19 시대를 겪은 아이들이 모두 사망하는 그날까지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형성된 비인지 기능은 잘 변하지 않고, 교육은 수명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유 럽에서 인구당 감염률이 우리나라의 무려 50~100배 수준인 시절에도 가급적 등교 수업을 진행한 이유입니다.
- 등교 제한의 피해는 저소득층에 집중됩니다. 학력 저하가 저 소득층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는 얘깁니다. 고소득층과 저소득 층 아이 사이에 벌어진 학력 차이는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소득층의 경우 온라인 수업을 위한 환경도 좋지 않고, 사교육을 통한 학업 손실 해결도 어렵지요. 이에 비해 여건이 좋은 상위권 아이들은 학원과 과외 수업을 통해 학업 효율성 을 올릴 수 있습니다. 불평등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20장에 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 아쉬운 우리 교육계의 대처
코로나19 사태 초기, 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학교 문을 닫아 감염을 최소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 다. 하지만 등교 제한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과학적 증거가 나 온 다음에도 이를 지속한 것은 매우 부적절한 결정이었습니다. 한국의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은 앞다투어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며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실태 파악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학력 격차가 커졌다 더라'라는 교사·학부모의 경험담과 추측만 무성할 뿐이죠. 격 차가 커졌다면 얼마나 커졌는지, 어떤 아이들이 주된 피해자 인지, 학력 손실이 보호자 부재 때문인지 혹은 원격 수업 장비부족 탓인지 제대로 된 분석 자료가 부족합니다.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학생들의 학력과 관련한 체계적인 자료가 부재합니다. 사실 전국 단위 시험 결과가 있어야 하는 데, 우리나라의 유일한 전국 단위 시험인 학업 성취도 평가는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하고, 그나마도 전체가 아닌 3% 샘플입니다. 더구나 초등학생은 전국 단위 시 험이 없어 등교 제한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그것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에 미친 영향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지나친 시험 부담을 주는 것은 문제지만, 코로 나19 사태를 겪으며 저는 적어도 1~2년에 한 번씩 학생들의 성취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 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학생들의 학력뿐만 아니라 이른바 비 인지 기능(가령, 사회성, 끈기 등)에 대한 체계적 조사도 필요하 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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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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