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역사

경제 2024. 1. 14. 08:24

- 사람은 누구나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거죠. 그런데 저금리가 2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어느 누가 내일 금리가 크게 뛰어 오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현재의 금리 하향 흐름, 혹은 저금리 기조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할 겁니다. 우리 나라의 외환위기 이후 단순히 저금리가 나타난 것뿐 아니라 경제 주 체들의 마음 속에 '저금리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합리적 기대가 쌓여 갔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지나 2021년 하반기부터 금리가 급등했 습니다. 그러니 이 금리 변화가 사람들에게 더욱 큰 부담으로 느껴진 겁니다.
-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서 우리나라 경제는 큰 변화를 겪었죠. 외환위기로 인해 기업의 설비투자가 큰 폭으로 축소되었고, 이는 실업 대란과 함께 장기 저성장 기조를 낳았습니다. 저성장을 메우기 위한 유동성 공급이 있었지만, 주요 자금의 수요처 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의 투자 대출 수요가 줄어들면서 금리 역시 하 락세를 나타내게 되었죠. 기업으로 흘러가지 못한 자금이 가계와 부 동산으로 쏠리면서 가계 부채의 급증과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야기 했습니다. 기업의 만성적인 투자 부진, 일자리 부족, 가계 부채 증가, 그리고 부동산 버블 우려에 이르기까지................ 지금 겪고 있는 우리 경 제의 문제점들은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외환위기는 그걸 겪어내는 시기에 받는 충격도 크지만 이후 남는 상흔 역시 상당합니다. 그런 충격을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두 차례나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 레벨이 한 단계씩 다운되는 현상이 나타났죠.
- 어느 국가나 수출 혹은 내수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부동산 버블 붕괴와 갑자기 들이닥친 고베 대지진이라는 재 해로 인해 일본의 내수 성장은 침체일로에 있었죠. 내수가 어려우면 수출로 성장해야 하는데요, 슈퍼 엔고의 파고 앞에서 일본의 수출은 전례 없는 고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경제가 이른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을 맞게 된 것이죠. 퍼펙트 스톰이란 개별적으로는 위력이 크지 않은 태풍 등이 다른 자연현상과 동시에 발생하면서 엄 청난 파괴력을 보일 때를 일컫는 기상 용어입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나쁜 상황이 겹쳐서 심각한 경제위기가 생겨나는 상황을 말하죠.
일본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1995년 4월 대표적인 선진국 회담인 G7(Group of Seven: 세계 7대 주요 경제 선진국인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 랑스, 이탈리아, 캐나다의 대표가 참석)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요청 내용은 '내수 침체와 함께 슈퍼 엔고로 인해 급격하게 진행되는 수출 둔화를 막기 위해 엔화를 약세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거였죠. 결국 일본의 요청이 받아들여지며 각국은 엔저를 유도하기로 합의했 고, 이는 1985년 엔고를 유도했던 '플라자합의'와는 반대되기에 '역 플라자합의'라고 불리게 됩니다.
- 일본의 엔貨가 5개월여 만에 달러당 97엔 선을 회복했다. (1995년 8월) 15일 뉴욕을 비롯한 세계의 주요 외환시장에서 달러는 美日獨통화당국의 협 조개입에 힘입어 강세를 보였으며 엔화는 달러당 하루 동안에 3엔 이상 떨 어졌다. 이처럼 3국이 적극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은 국내 경기를 부 양시키기 위해서는 엔화 약세와 마르크화 약세가 무엇보다 시급한 일본과 독일, 달러화 강세가 필요한 미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으로 일본의 외환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달러 강세를 통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장기금리를 인하시키고 경기가 후퇴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달 러 약세, 엔화 강세는 수출에는 유리하지만 수입 물가를 상승시킴으로써 인 플레이션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중략)
1995년 8월 기사입니다. 이때부터 이미 엔화의 약세가 빠르게 진 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미국, 독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고 이들 국가의 공조가 급격한 엔화 약세를 촉발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죠. 두 번째 문단에 미국의 입장이 나오 는데요, 1994년, 당시 미국은 강하게 올라오려고 하는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기 위해 빠른 금리 인상을 단행했던 바 있습니다. 3퍼센트 수 준이었던 미국 기준금리를 6퍼센트까지 빠르게 인상했었죠. 이 과정 에서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기는 했지만 높아진 금리로 인해 미국 경 제 성장이 둔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물가를 잡는 방법은 금리를 높이는 것도 있지만, 통화가치의 강 세를 만드는 것도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물가가 5퍼센트 오르는데 예금금리가 6퍼센트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물건을 사는 것보다는 예금에 돈을 넣어서 높은 금리를 취하고자 하겠죠. 물건 구입으로 돈이 쏠리지 않으니 물가 상승세가 주춤해질 겁니다.
다른 맥락에서 살펴볼까요? 해당 국가의 통화가 강세를 보이게 되면 그 국가의 수입 물가가 하락하게 되죠. 앞서 인용한 기사에 나 와 있는 내용으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달러가 약하고 엔화가 강할 때에는 1달러를 주고 70엔짜리 물건을 수입해야 하지만, 달러가 강 하고 엔화가 약해지면 1달러를 주고 97엔 수준의 물건을 수입할 수 있습니다. 달러 가치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따라 미국은 일본의 더 비 싼 제품을 같은 가격에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수입 물가가 내려간 다고 해석할 수 있겠죠.
-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로 수입 물가가 내려가게 되면 굳이 금리를 높게 유지하지 않아도 걱정거리인 인플레이션을 제압할 수 있습 니다. 달러 강세가 인플레이션을 제압해 준다면 금리를 낮게 유지하 면서 미국의 경기 부양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겠죠. 참고로 당시의 달 러 강세는 미국 내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그리고 낮아진 미국의 금 리는 미국의 내수 성장을 촉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닷컴 버블로 이어지게 되죠.
각국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며 미국, 일본, 독일 등은 상호 간 의 강한 공조하에서 엔화 약세 및 달러 강세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 다. 그렇게 1995년 4월에는 엔화 강세가 대세라는 분위기였죠. 그런 데 불과 4개월 만인 1995년 8월에는 달러당 100엔 수준의 약한 엔 화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는 쪽으로 분위기가 크게 바뀌어 버립니다.
- 자, 정리합니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합니다. 독자적인 통화 정책 을 유지하고자 갑국은 금리를 1퍼센트로 유지하죠. 그러면 미국으로 자본 유출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걸 막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자본 의 이동을 제한해야 하는데, 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미국만큼 갑국이 금리를 올려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그렇게 하면 독 자적인 통화 정책을 버리는 꼴이 됩니다. 불가능한 삼위일체, 동시에  가질 수 없는 세 가지를 모두 갖고자 하니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습니 다.
- 환율방어와 외환위기의 상관관계
세 가지를 모두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최후의 보 루인 외환보유고를 헐어서 고정환율, 즉 1달러에 1000원을 유지하 면 됩니다.
너도나도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서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환율이 1달러에 1500원으로 밀려 올라가 는 압력을 받죠. 이걸 막아서서 1달러에 1000원을 유지하려면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는 사람들 일색인 외환시장에서 누군가 과감히 등 장해 원화를 마구 사들이면 됩니다. 모두가 달러를 사들이려 하니 달 러가 강세를 보이는 것인데, 반대로 큰손이 등장해서 달러를 마구 팔 고 원화를 사들이게 되면 달러의 강세가 제한되면서 1달러에 1000 원 수준의 환율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바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미국이 금리도 더 주 고 있고, 다들 갑국에서 미국으로 탈출하려고 하는 상황인데, 누가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들이겠냐는 겁니다. 네, 일반적인 투자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들이지 않겠죠. 그래도 이런 행 동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누군가는 당연히 1달러당 1000원의 환율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경제 주체일 겁니다. 바로 갑국의 외환 당 국이라고 보면 되죠.
이들은 갑국이 보유하고 있는 외환보유고에서 일정 수준 달러를 꺼내 이를 외환시장에 매각합니다. 그리고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는, 정확히 시장의 현 상황과 반대로 거래를 하면서 1달러에 1000원 선 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환율방어'라고 합니다.
- 이제 정리를 해보죠. 외환위기 이전 우리나라는 불가능한 삼위일체에서 두 가지를 택하고 있었습니다. 관리변동환율제를 적용하면서 '안정적인 환율'을, 그리고 '독자적인 통화 정책'을 택하면서 국내 가 계 저축을 기업 투자로 끌어내기 위한 차원의,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제어하는 차원의 고금리를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를 가졌으니 다른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게 바로 '자유로운 자본 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 점진적으로나마 금융시장을 개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죠. 금융시장의 개방은 '자유로운 자본 이동'을 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 다는 겁니다.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들지 않으시나요? 참고로 외환위 기 이후 1999년 2월에 국회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한 원인을 분석했 는데, 당시 제시되었던 수많은 원인 중 하나로 '금융시장 개방'이 언 급된 바 있습니다. 잠시 기사 보고 가시죠.
- MF 외환위기 이전에 한국은 환율이 매우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관리변동환율제, 즉 안정적인 환율을 유지하고 있었죠. 그러니 달러 빚을 낼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던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외환위기 이전에는 달러당 1000원 밑에서 안정되어 있던 환율이 외 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말~1998년 초 달러당 2000원에 육박할 정 도로 크게 뛰어올랐습니다. 당연히 달러 부채를 크게 늘려 놓았던 기 업들의 빚 부담이 늘었고, 이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겁니다.
- 외환위기는 국내 경제 구조 때문이 아니라 외채 때문에 일어난다. 그것도 만기가 짧게 돌아오는 단기외채를 갚지 못하는 것이 외환 위기의 원인이다. 이것은 1997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시아 국가 중 아무리 부실한 기업과 금융, 불투 명하고 부패한 정부를 가진 나라라도 단기외채가 적은 나라는 외 환위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아무리 건전한 기업과 금융기관, 투명한 시스템을 가진 나라 라도 단기외채가 많으면 외환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Steil and Lithan, 2006, p.104). 실제로 1990년대 중반 중국은 아직 과거의 사회주의체 제로부터의 이행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국영기업과 금융기관 부실이 한국보다 더 심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단기외 채가 적었기 때문에 외환위기를 비켜갈 수 있었다.
범위를 동아시아 바깥으로 넓혀 보아도 기업과 금융기관 부실이 라는 구조적 문제는 개도국의 공통된 현상이지만 모든 개도국에 서 외환위기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 꼭 기억해 두셔야 했던 포인트는 외환위기 이전까지 우리 나라는 안정적인 환율(거의 고정환율에 가까운 관리변동환율제), 독자적인 통화 정책(한국 여건에 맞춘 고금리 상황)의 두 가지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대신에 자유로운 자본 이동이 일정 수준 제한되어 있는 상황 이었죠.
그런데 1996년 OECD 가입을 전후로 우리나라도 자본시장 개방 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자본시장 개방의 부작용을 우려 하여 단계적인 개방 계획을 진행했지만, 자유로운 자본 이동이 조금 씩 풀리게 되면서 외국 자금이 국내로 빠르게 유입되었죠. 국내로 유입될 때는 국내 금융기관들, 특히 당시 '종금사'라고 불리던 종합금융회사가 외국 자금 차입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관련 내용이 나와 있 는 책을 잠시 읽어보시죠.
정부가 은행을 통한 자본시장 개방을 추진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이렇다. 1990년대 중반 정부는 자유화와 '세계화' 드라이브하에서 금융기관의 외국 영업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1994~1996년 중 24개의 투자금융회사가 종합금융회사(Merchant Bank)로 전환되 면서 외국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은행들도 28개의 외국 지점 을 열면서 외국 영업이 확대되었다. 종합금융회사와 은행의 외국 영업 활동에는 단기 차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민, 외환위기와 그 후의 한국 경제, 한울엠플러스, 2017, p.121-122)
- 장단기 기간의 미스매칭, 달러화와 원화 통화의 미스매칭을 통해 국내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은 자금을 보다 유리한 저금리에 조달 할 수 있었죠. 금리는 '돈의 값'이라 했습니다. 가격이 저렴해지면 수 요가 늘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8퍼센트에서는 진행하지 않았을 투자 를 4퍼센트 금리에서는 진행할 수 있겠죠. 금리가 저렴한 만큼 돈에 대한 수요, 즉 낮은 금리에 대출을 받아서 투자를 하려는 수요가 늘 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또한 단기로 돈을 빌리거나 달러로 돈을 빌 리면 유리하다는 점을 보셨죠. 더욱 유리해지려면 이 두 조건을 합치 면 되지 않을까요? 단기로 달러 빚을 내서 장기로 대출을 해주면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겁니다. 단기로 달러 빚을 내는 것, 바로 '단기외채'입니다.
- 이제 정리를 해보죠. 지금까지 '외환위기가 왜 발생했을까?'를 짚 어봤습니다. 1990년대 초반 엔화가 강세를 보이고 반도체 시장에 대 한 전망이 매우 긍정적이었죠. 우리나라 수출 주력 산업의 비즈니스 여건이 긍정적이기에 국내 기업들은 투자를 늘릴 유인을 가지게 되 었습니다.
투자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고, 자금을 빌리면 빚을 지게 됩니 다. 그런데 그 빛이 단순한 국내 부채가 아니라 외채였던 것이죠. 당 시 국내 금융회사들의 외화차입이 가능해지면서 외채가 급격히 늘 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금융회사들은 저렴하게 자금을 조달해서 경 쟁력을 높이고자 단기외채를 끌어와서 국내 기업에 장기로 대출을 해줍니다. 대출의 장단기 미스매칭, 그리고 통화의 미스매칭이 동시 에 진행된 것이죠.
- 단기외채가 크게 늘어 있는 상황에서 1996년 하반기부터 우리나 라 수출 경기가 크게 둔화되기 시작합니다. 1997년 초부터는 국내 굴 지의 대기업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죠. 단기로 돈을 빌려 왔지만 장기 로 대출을 해줬으니 빌려준 돈을 당장 회수할 수 없습니다. 금융사들 은 단기로 빌려 온 돈을 계속해서 연장하는 방법으로 대응했지만 한 국 경제의 부진이 이어지고 외국 투자자들이 불안감을 느끼면서 단 기대출 연장이 어려워지게 되었죠. 그리고 그즈음 터져 나온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외환위기는 가뜩이나 불안감을 느끼던 외국 투자자들을 보다 강하게 자극했습니다.
관리변동환율제로 환율의 안정을 꾀하고 있던 외환 당국은 달러 의 급격한 강세를 제어하기 위해 환율방어 차원에서 외환보유고를 상당 수준 소진하게 되죠. 아울러 국내 금융기관들의 달러 자금 지원 역시 진행하면서 국내가용 외환보유고는 큰 폭으로 줄어들었습니 다. 1997년 말까지, 그리고 1998년 초까지 갚아야 할 단기외채가 여 전히 많은데 외환보유고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죠. 이에 1997년 11월 말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IMF 외환위기'가 시작된 겁 니다.
- 외환위기 당시에 비해 크게 높아진 외환보유고와 낮아진 단기외채비율, 2014년 이후 획득한 순대외채권국 지위, 그리고 한국 국 채의 위상 변화 등은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낮춰주는 요인입니 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짚어볼까 하는데요, 앞의 챕터에서 불 가능한 삼위일체를 설명했던 것 기억하시죠?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 유로운 자본 이동, 안정적인 환율(고정환율), 독자적인 통화 정책의 세 가지 중 두 가지밖에 선택할 수 없다는 이론이었죠. 외환위기 이전 한국은 안정적인 환율을 선택하면서 국가가 환율의 레벨을 관리하는 관리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독자적인 통화 정책 기조를 이어가면서 상대적인 고금리를 유지했습니다. 대신 '자유로운 자본 이 동'을 선택하지 못했었죠.
지금은 불가능한 삼위일체 중 무엇을 선택하고 있을까요? 직관적 으로도 '자유로운 자본 이동'이 가능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 고 한국은행은 국내의 경기 상황을 감안하여 기준금리를 인상하거나 인하하고 있죠. 독자적인 통화 정책을 채택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 면 무언가 하나를 포기했겠죠. 네, '안정적인 환율'을 포기했습니다. 기존의 관리변동환율제를 폐지하면서 변동환율제로 전환한 것이죠. 결론적으로 '자유로운 자본 이동'과 '독자적인 통화 정책'을 취하는 대신 '안정적인 환율'을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택하게 된 겁니다.
-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 및 LTCM의 파산 당시 연준은 발 빠른 금리 인하를 통해 금융시장을 혼란에서 구해 낼 수 있었습니다. 이후 연준 풋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Y2K를 앞두고 금리 인상을 몇 차례 멈추어 설 때에도 금융시장은 환호하곤 했죠. 그리고 2001년 연초 경기 둔화에 대한 두려움을 감안하여 진행된 금리 인하 초기에도 시장은 환희에 넘쳤었습니다. 네, 금리 인하가 하나의 만병 통치약처럼 인식되었습니다. 적어도 버블이 강해질 당시에는요.
그런데 신경제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고, 영원히 강할 것 같았던 주식시장이 방향을 바꾸게 되자, 금리 인하로도 막을 수 없는 장기 하락장이 이어졌던 겁니다.
- 금융위기는 어떤 충격을 주었길래 이른바 '100년 만의 위기'로 불릴까요? 뒤의 문장을 조금 더 인용하겠습니다.
주택 가격 하락은 주식 가격 하락(IT 버블)이 초래했던 충격보다 훨 씬 더 큰 충격을 금융시스템과 실물경제에 안겼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폭제와 취약성 개념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주택 가격의 하락과 주택담보대출의 손실은 하나의 기폭 제였습니다. 불쏘시개 위로 던져진 성냥 같다는 뜻이지요. 바싹 마 른 상당량의 가연성 소재가 주변에 놓여 있지 않았더라면, 대형 화재는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근 금융위기의 경우는 어떤 의미에서 주택시장 붕괴의 불똥이 경제에 그리고 금융 시스템에 내재한 취약성으로 옮겨 붙으면서 큰 화재로 번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다지 심하지 않은 경기 침체를 겪는 것으로 지나갈 수도 있었을 일이 금융 시스템의 약점 들 때문에 훨씬 더 격렬한 위기로 변형되었다는 것이지요. 벤 S. 버냉키, 김홍범 · 나원준 옮김,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와 금융위기를 말하다』, 미지북스, 2014, p. 91_
금융위기는 주택 가격 하락이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은행의 부실, 즉 금융 시스템의 부실에 불을 붙인 거죠. 닷컴 버블의 붕괴나 금융 위기 당시 주택 가격의 하락을 불이 나는 것으로 본다면 주변에 불이 옮겨 붙을 것들이 있었는지 아닌지가 상당한 차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금융위기 때에는 주변에 가연성 높은 소재들이 많았기 에 그 불이 크게 옮겨 붙은 것이지만, 닷컴 버블 당시에는 그런 소재 들이 없었기에 단기적인 침체로 마무리된 겁니다.
- 중국 위안화 절상의 영향력 
지금까지 본 기사 내용 등을 종합해 봤을 때, '중국이 미국의 압박 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위안화 절상을 받아들인 거구나'라는 느낌 을 받으실 겁니다. 물론 미국의 압박 때문에 등 떠밀려서 위안화 절 상을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도 위안화 절상 을 통해서 얻은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위안화 절상은 중국이 자국의 성장을 수출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수 소비를 통해서 이어갈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안화 절상되면 중국의 수출 경쟁력이 낮아지 면서 수출 성장이 둔화될 수 있습니다. 다만, 앞서 그래프에서 보신 것처럼 위안화 절상이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던 만큼 중국의 수출 기 업들은 대비할 시간이 있었죠.
- 위안화 가치를 끌어올리는 위안화 절상은 기본적으로 외국에서 중국으로 수입되어 들어오는 제품의 가격을 낮추는 역할을 합니다. 달러당 8위안이던 위안화가 7위안이 된다고 가정해 보죠. 기존에는 1달러 물건을 사들일 때 8위안이 필요했는데, 이제 7위안이면 해당 물건을 사들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위안화 절상으로 인해 수입 물가가 안정되는 효과가 생기지 않을까요? 물가가 안정되면 중국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줄어든 만큼 낮은 금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위안화 절상으로 물가와 금리가 안정되면 중국인들이 소비를 할 수 있는 보다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겠죠. 중국이 수출 중심의 성장보다 는 내수 소비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직관적으로도 맞는 것이, 10억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이 내수가 아닌 수출 성장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죠. 10억 명이 소비를 할 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요. 위 안화 절상은 중국이 수출 일변도의 성장에서 벗어나 내수 소비의 점진 적인 성장까지 유도할 수 있는 기회 요인이 되었던 겁니다.
중국의 위안화 절상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위안화 절상이 중국 이외의 다른 신흥국에게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미국의 무역 적자 문제 중 가장 큰 부분 을 중국이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외의 국가들 역시 미국에 수 출하면서 상당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들 국가에 게도 당연히 통화 절상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외의 다른 신흥국들은 이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중국은 수출 경쟁을 하는, 이른바 수출 경합국입니다. 위안화 절상되지 않는데 미국 등의 압박으로 성급하게 내 나라 통화만 절상해 버리면 중국과의 수 출 경쟁에서 매우 불리해지겠죠. 그래서 중국이 위안화 절상을 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자국 통화를 절상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중국이 위안화 절상에 나서게 되니, 다른 신흥국들도 자국 통 화 절상을 시작하게 된 거죠. 2005년 7월 22일 이후 신흥국 통화는 보다 전반적으로 강한 흐름을 이어가게 됩니다.
-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이 자본 유출 우려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기준금리 인하에 나서게 되면 무너질 것으로만 보였던 신흥국의 소비 성장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죠. 그렇다면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 무 너지던 미국의 소비를 일정 수준 메워줄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게 될 겁니다. 이는 글로벌 총수요의 급격한 위축으로 전 세계가 심각 한 경기 불황으로 치닫을 가능성을 낮춰주는 효과가 있죠. 미국이 신 흥국과의 통화 스와프를 통해 해당 신흥국의 파산, 혹은 성장 위축을 제어해 주는 것이 큰 틀에서 보면 미국 혼자 소비하면서 생기는 문제 인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겁니다.
이후 한미 통화 스와프는 한 차례 더 발표되었던 바 있는데요, 바 로 코로나19로 인해 글로벌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던 2020년 3월 입니다. 당시에는 2008년의 두 배 수준인 6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가 발표되면서 당시에도 외환위기의 뇌관이라고 할 수 있는 외국인 자본 유출의 우려를 신속히 잠재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해 많은 분들은 리 먼브라더스가 파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곤 합니다. 혹은 조금 디테일하게 미국 주택 가격 하락으로 인해 파생상품의 부실이 현실 화되었고, 금융기관들의 파산 우려가 커지며 나타난 신용경색이 금 융위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도 하십니다. 이는 미국 금융기관의 부실은 설명할 수 있어도 당시 글로벌 경제 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하 던 신흥국과 이들 국가들을 둘러싼 '글로벌 불균형'이라는 환경을 설 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줄어든 소비를 메워줄 수 있는 신흥국의 성장은 글로벌 불균형 문제를 일정 수준 해결하면서 이후 금융위기 극복의 핵심이 되죠. 
- 은행 위기의 극복 차원에서 양적완화를 설명하다 보니 양적완화가 은행의 현금 늘리기 정도로만 비쳐질 수 있는데요, 이외에도 양적 완화의 효과는 상당히 강했습니다.
가장 큰 효과는 연준이 돈을 찍어서 장기국채를 사들이면서 나타 납니다. 장기국채를 엄청난 규모로 사들이게 되면 장기국채 쪽으로 상당한 자금이 유입되겠죠. 장기국채 시장에 돈이 넘치니 장기국채 금리가 크게 낮아지게 될 겁니다. 장기국채금리가 크게 하락하면 이 에 연동되어 있는 다른 채권이나 대출의 금리 역시 함께 낮아지게 되 겠죠. 금리가 낮아진 만큼 실물경제의 부담 역시 줄어들게 되면서 내수 소비를 부양하는 효과까지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전 자산인 장기국채금리가 크게 낮아진 만큼, 장기국채 투자의 매력이 사라져 가죠. 그러면 조금이라도 위험한 자산에 투자를 해야 보다 높 은 금리를 받게 되지 않을까요? 네, 금융위기 이후 크게 위축되어 있 던 위험한 투자자산 쪽으로도 자금이 유입되게 하는 효과 역시 상당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양적완화의 도입 역시 쉽지는 않았죠. 너무 많은 돈을 풀게 되면 화폐의 가치가 크게 하락하고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 이션' 위험이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적완화를 시행하기 불과 2개월여 전인 2009년 1월에도 연준 내부에서 무분별한 양적완 화에 반대하는 위원들이 있었죠. 해당 기사를 읽어보시죠.
- 연준 내에서도 당시로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인 양적완 화정책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명시적으로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단을 보면 '은행에 무분별하게 유동성을 공급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적당한 목표치를 설정해서 진행하 자라는 제안을 하고 있죠.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연준 의장이 었던 벤 버냉키는 과감하게 양적완화 정책을 금융위기의 돌파구로 채택했고, 이후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양적완화 정책은 금융시장을 혼란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TARP를 통해 은행에 자본을 주입하고, 양적완화를 통해 은행의 현금 보유를 크게 늘려줍니다. 그리고 양적완화 효과로 시장금리를 크게 낮출 수 있었죠. 은행 파산에 대한 우려가 잠잠해지고 뱅크런의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 연준은 2022년 3월부터 강하게 치솟은 인플레이션을 제어하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에 나섭니다. 그리고 2022년 5월에는 0.5퍼센트 의 빅스텝 인상을 단행했죠. 연이어 6월, 7월, 9월, 10월에 0.75퍼센 트 자이언트 스텝 금리 인상을 네 차례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집필하고 있는 2023년 4월 현재 4.75~5.0퍼센트로 기준금리를 인상했죠. 2022년 3월 0~0.25퍼센트였던 기준금리가 2023년 4월 4.75~5.0퍼센트까지 인상되었으니 1년간 4.75퍼센트의 금리 인상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짧은 기간에 이렇게 높은 금리 인상은 1980년대 초 석유파동 당시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죠. 빠른 금리 인상이라고 했던 1994년의 금리 인상 도 3퍼센트였던 기준금리를 6퍼센트로 인상한 것이었고, 일본의 버 블 붕괴를 불러왔던 일본중앙은행의 금리 인상도 1년 반에 걸쳐 2.5 퍼센트였던 기준금리를 6.0퍼센트로 인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1년여의 기간 동안 5퍼센트에 가까운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 한 만큼 실물경제가 느끼는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죠. 2023년 1분 기 들어 나타나고 있는 자산 가격의 급변동이나 소규모 은행 파산 등 불안의 원인 역시 연준의 과격한 금리 인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겁니 다.
- 적절한 속도로 금리 인상을 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제압했다면 그 많은 금리를 짧은 기간 동안에 인상하지 않아도 되었겠죠. 금리를 인 상해야 하는 적기에는 금리 인상을 미루다가 뒤늦게 긴축에 나서고, 금리를 인하해야 하는 시기에는 너무 높은 금리를 장기간 유지하면 서 실물경제의 충격을 보다 깊게 만드는 실수를 연준은 과거부터 수 차례 반복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일시적' 물가 상승이라는 오판으로 40년 만에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깨우게 된 것이죠. 
- 1년 만에 기준금리 4.75% 인상
무언가 과거에 이런 어려운 상황을 이겨냈던 실전 매뉴얼이 있었 다면 보다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40년 만에 찾아 온 인플레이션이기에, 그리고 그 반대편인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 가 워낙에 컸기에 미국 정부나 연준은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우왕 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뒤늦게 금리 인상을 시작한 만큼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금리를 인상했죠. 2022년 3월 0~0.25퍼센트였 던 기준금리는 2023년 3월 FOMC의 추가 금리 인상으로 4.75~5.0퍼 센트로 인상되었습니다. 딱 1년 만에 4.75퍼센트의 기준금리 인상이 단행된 것이죠.
실제로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렸던 1980년대 초반 이후 가장 빠른 속도의 인상입니다. 미국 채권시장의 대학살과 멕시코 외환위 기를 만들어 낸 1994년의 급격한 금리 인상도 3퍼센트였던 기준금 리를 6퍼센트로 인상하며 1년간 3퍼센트 수준의 인상에 그쳤죠. 일 본 버블 붕괴 직전에도 끝없이 오르는 부동산 가격을 꺾기 위해 일본 중앙은행은 2.5퍼센트에서 6.0퍼센트로 금리를 인상하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3.5퍼센트의 금리 인상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2022년 이후의 긴축은 1년 동안 4.75퍼센트의 인상이 이루어진 겁 니다. 네, 늦은 만큼 너무나 가파른 금리 인상을 진행한 것이죠. 그러 면 이게 무언가 악영향을 주게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빠른 금리 인상의 악영향으로 미국의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3년 3월 실리콘밸리 은행(SVB)이 파 산하는 등 은행 시스템 위기에 대한 공포감 역시 고조되었죠. 이런 상황에서 물가를 제압하기 위한 빠른 속도의 금리 인상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 상황이 참 어렵습니다. 물가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으니 이 를 잡기 위해서는 긴축 기조를 더 이어가야 합니다. 반면에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부채가 많이 쌓여 있는 데다 성장 동력 역시 매 우 연약한 만큼 지금의 긴축 기조를 이어갔을 때 받을 충격이 클 수 있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연준과 미국 행정부는 긴축을 이어갈 수 있 을까요? 만약 계속해서 우왕좌왕하게 된다면 인플레이션을 제압하 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경제 체제가 인플레이션이라 는 병을 오래 앓게 되면 인플레이션은 고질병이 될 수 있습니다. 고질병은 한 번 걸리면 쉽사리 낫지 않죠. 
- 1970년대 이전 10년 이상 안정되었던 물가가 왜 오르기 시작했 을까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저는 1960년대 후반 린 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에서 부터 인플레이션의 싹이 텄다고 봅니다. 그린스펀과 에이드리언 올 드리지 (Adrian Wooldridge)가 공저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다음 과 같은 설명을 찾아볼 수 있죠.
1970년대 비관론이 횡행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이전 10년의 과도한 낙관론이었다. 승리에 도취한 자유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모델을 한계점까지 밀어붙였다. 정치인은 오래 유지하 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약속을 내걸었다. 노동자들은 생산성을 높 이지 못한 상태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경영자는 내일의 전쟁 이 아니라 어제의 전투에 초점을 맞췄다. 황금기에서 침체기로 나 아가는 과정의 핵심 인물은 린든 존슨이었다. (중략)
그린든 존슨)는 케네디가 암살된 지 6주 뒤 의회에 나가 '빈곤에 대한 무조건적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는 이 전쟁에서 이길 형편이 됩니다. 오히려 질 형편 이 안됩니다." 그는 “우리는 부유하고 강력한 사회만이 아니라 위 대한 사회 (Great Society)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며 1965~1966년 단 일 회기 동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수많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앨런 그리스펀 · 에이드리언 올드리지, 김태훈 번역, 장경덕 감수,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세종서적, 2020, p.356-357)
-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매우 뒤숭숭했다고 합니다. 당시 집권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소련 을 훨씬 넘어서는 살기 좋은 미국을 말하면서 거대한 복지 정책을 시 행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위대한 사회'였죠. 미국 정부 부채는 걷잡 을 수 없이 늘어났지만, 재정 지출이 늘어난 만큼 사람들의 소비 수 요 역시 강해집니다. 수요의 증가는 물가 상승을 자극하게 되죠. 린 든 존슨 대통령 이후 집권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그 런 경기 부양조의 재정 지출 기조를 보다 강하게 가져갑니다. 관련 설명 인용합니다.
닉슨은 체제의 균열이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존슨보다 더 크게 복지 정책을 확대했다. 의회는 무료 학교 급식 부터, 실업 급여 증액, 장애 혜택 개선까지 일련의 새로운 복지 제 도를 만들었다. 또한 사회보장연금을 10퍼센트 늘렸으며, 연금을 물가상승률과 자동으로 연계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중략)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연 복지 비용은 존슨 행정부보다 닉슨 행정부에 서 20퍼센트 더 빨리 늘어났다. 1971년 복지 지출액은 마침내 국 방 지출액을 넘어섰다. 모든 것이 과잉이었다. 그 현실적 대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앨런 그리스펀. 에이드리언 올드리지, 김태훈 번역, 장경덕 감수,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세종서적, 2020, p.360-361)
- 이후 취임한 닉슨은 복지 정책을 더욱 강화하면서 재정 부양 에 힘썼습니다. 닉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금 1온스당 35달러까지 찍을 수 있었던 당시의 금본위제를 폐 지하면서 달러의 공급을 금본위제라는 족쇄에서 풀어버립니다. 이후 연준은 보유하고 있는 금 수량에 관계 없이 달러화를 찍어서 공급할 수 있게 되었죠. 복지 정책을 통한 지출도 늘어났지만 돈 풀기와 같 은 통화 정책 역시 함께 진행한 겁니다.
이 시기에 물가가 오름세를 이어가자 닉슨 대통령은 물가 통제에 나서게 됩니다. 말 그대로 90일간 각종 재화의 가격과 임금, 에너지 가격 등을 동결하는 정책을 발표해 버립니다. 제품 원가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급등하고 있는데, 제품 판매 가격을 동결해 버리게 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판매를 할수록 손해를 보게 되죠. 인위적인 가격 통 제 정책으로 인해 기업들의 생산 활동이 크게 위축됩니다. 이후 가격 통제를 풀자, 눌려 있던 물가가 크게 뛰어오르면서 인플레이션을 보 다 심각하게 몰고 갔습니다.
- 이렇게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 터져 나온 것이 바 로 1973년의 제1차 석유파동이었습니다. 석유파동까지 가세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의 파수꾼인 연준이 제 역할을 해줘야 하겠죠. 연준은 빠른 긴축을 통해 끓어오르 고 있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선제적으로 제압해야 했을 겁니다. 그렇 지만 당시 연준은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죠.
이유는 첫째, 1950~1960년대 10년 이상 물가가 오르지 않는 현 상을 보면서 당시의 인플레이션 상승을 다소 쉽게 판단한 면이 있었 습니다. 이는 연준뿐 아니라 미국 행정부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물가 대안정기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미국 행정부는 과감한 경기 부양책을 도입해 재정 지출을 늘렸고, 연준 역시 여기에 동조하면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다소 느슨한 경계감을 보여줬습니다.
당시 연준 의장은 아서 번스(Arthur Burns)였는데요, 이분은 경제학자로서는 매우 저명한 분이지만 당시 연준 의장으로서의 정책에 있 어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번스 의장은 물가가 빠르게 높 아질 때에는 빠른 기준금리 인상을 통해 물가 억제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물가가 살짝 안정세를 보이면 성장의 둔화 역시 신경을 써야 한다며 빠른 속도로 기준금리를 인하했죠. 물가 안정과 경기 부 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했던 겁니다. 

- 네 가지 경제위기의 공통점 
우선 외환위기부터 잠시 되돌아볼까요? 외환위기 이전 한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차별적인 고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PC 붐에 힘입은 반도 체 시장의 강한 성장과 엔화 초강세를 통해 얻어낸 상대적으로 유리 한 수출 가격경쟁력 덕분에 호경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호경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론과 함께 OECD 가입 및 종금사와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 완화가 이어지면서 금융기관들은 단기외 채를 크게 늘렸고, 그런 금융기관들에게 기업들은 국내 금융보다 유 리한 조건으로 돈을 빌려 투자를 확대했죠. 그렇지만 누구도 예상하 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렇게 강하던 PC시장이 흔들렸고, 10년간의 강세를 끝으로 엔화는 빠른 약세로 전환했죠. 부채가 크게 늘어난 상황에서 맞이한 급격한 환경의 변화, 이에 견디지 못하고 외환위기의 파고에 휩쓸려 버린 겁니다.
닷컴 버블도 이런 방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터넷 기술 혁명에 힘입어 미국 경제는 '신경제'로 탈바꿈했다는 믿음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죠. 신경제로 인한 생산성 향상으로 미국 내 물가는 크게 오르 지 않으면서도 차별적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면 굳이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등의 긴축을 할 필 요가 없겠죠. 그리고 혹여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긴축을 이어가던 연 준이 언제든 돈을 풀면서 실물경기의 침체를 막아주는 이른바 '연준 풋'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호시절이 이어질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중앙은행이 돈 풀기로 막아줄 것이라는 낙관론이 미국 주식 을 비롯한 자산 가격의 폭발적인 상승을 촉발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너무 많이 올라버린 자산 가격은 사람들의 과잉 소비로 이어졌고, 이는 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물가의 상승을, 그리고 연준의 긴축을 자극하게 되었죠. 물가는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중앙은행은 긴축보다는 자산시장의 하방을 받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깨져버린 시장은 이후 2년 이상 하락하면서 닷컴 버블의 붕괴라는 어두운 터널로 접어들게 됩니다.
금융위기 역시 '낙관론'과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닷컴 버블 당시처럼 주식 같은 자산 가격은 하락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의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는 주택 가격의 강세 는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는 강한 낙관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주택 가격 강세에 대한 믿음은 당시 금융공학과 맞물려 파생상품을 통 한 시중 유동성 확대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글래스 스티걸법의 폐지 같은 규제 완화로 대형 은행들도 공격적으로 위험한 자산들에 과도 한 투자를 했죠. 당시 글로벌 경제 성장 역시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 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이어진 신흥국들의 강한 성장세 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탄탄한 강세장에 대한 의구심을 사라지게 만 들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호시절 역시 영원할 수는 없었죠. 고공비행을 하던 주택시장이 흔들렸고, 주택시장의 강세에 기반하여 설계된 파생상품 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파생상품에 많은 투자를 했 던 대형 금융기관들이 파산했죠. 믿었던 신흥국의 성장세 역시 미국 금융기관 파산으로 인한 충격과 급작스레 찾아온 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한 긴축으로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주택 가격 하락, 금융기관 파산, 그리고 신흥국의 성장 둔화 패키지는 전 세계를 금융 위기의 늪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마지막 코로나19 사태 및 인플레이션 상황 역시 비슷합니다. 글 로벌 금융위기 이후 찾아온 저성장 저물가 상황에서 미국을 중심으 로 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꾸준히 완화적 통화 정책을 이어왔죠. 그 러던 중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제한 돈 풀기가 시행되었고, 이는 지난 40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그리 고 앞으로 나타나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깨 워버리게 되죠. 인플레이션은 이 세상에서 멸종되었다는 안이한 생각 속에서 이루어진 무제한 돈 풀기 정책이 40년 만에 잠들어 있던 괴물을 깨워버린 겁니다. 이를 잡기 위해 단행된 중앙은행의 강한 긴 축 정책은 금융시장 및 실물경제를 힘겨운 상황으로 몰아갔죠. 물론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겠지만 지금의 인플레이션이 고질병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면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이 1970년대식 거대한 인플 레이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겁니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를 읽는 힘  (1) 2024.01.17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  (1) 2024.01.14
이강국의 경제 EXIT  (2) 2023.12.07
스태그플레이션 2024 경제전망  (2) 2023.11.24
빈곤의 가격  (3) 2023.11.19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