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르시아와의 갈등을 불러오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시장에 은이 많이 풀리자 은의 희 소성이 떨어지면서 물건의 가격이 오른 것이었다. 아테네가 과 도하게 풀어버린 통화(은)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물 건의 가치가 커지면서 가격이 오른 것이다. 이는 아테네와 같 이 '드라크마'를 사용하던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상대적으로 희소성이 커진 품목이 하나 더 있었다. 바 로 금이었다. 아테네는 은에 비해 금의 보유량이 현저히 적었 다. 희소성 때문에 금의 가격은 계속 올라갔다. 셈이 빨랐던 페 르시아 상인들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페르시아 가은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물건을 거래할 때는 금을 주로 썼 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보다 사용하는 은의 양이 적었기 때문에 금이 은보다 비싸기는 했지만 그리스처럼 금과 은의 가격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반대로 그리스 전체가 가진 금의 양은 많지 않았다. 은의 사용량이 급증하다 보니 금의 가치가 은보 다 상대적으로 높아져 금과 은의 가격 차이가 많이 벌어져 있 었다. 페르시아보다 그리스에서 금과 은의 환율의 격차가 상대 적으로 더 커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은을 기준으로 봤을 때 금 은 페르시아보다 그리스에서 더 비싸게 거래되고 있었다. 이에 페르시아 상인들은 금을 그리스로 가져가면 더 많은 은을 받 을 수 있다는(비싼 값에 처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 은 다른 나라 상인들이 이런 상황을 알아채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다. 페르시아 상인들은 금을 가지고 그리스로 가서 더 많은 은으로 교환했다. 더 큰 시세차익을 얻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환차익을 노렸다 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스 는 물건 가격을 정할 때 은을 기준으로 매기고 거래에 은을 사 용하는 은본위제를 유지했지만, 페르시아는 상거래 행위를 할 때 금을 기준으로 거래하는 금본위제 국가였기 때문이다.
상인 한두 명으로 시작된 환차익거래로 이익이 발생했 다고 소문나자 많은 상인이 큰돈을 벌기 위해 금을 가지고 그 리스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페르시아의 금이 대량으로 그리스에 유출되면서 금본위제 국가인 페르시아에 금이 부족해졌고 통화 시장이 왜곡되면서 상품이 거래되는 내수시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리스는 대량의 은 광산을 보유한 덕분에 유리한 고지에 있어서인지 이러한 상황을 조용히 즐겼다. 반대로 페르 시아로서는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심각한 상태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아나톨리아반도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페르시아가 군대를 보내면서 두 세력 간 의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졌다. 결국 서기전 480년, 페르시아는 군대를 태운 함대를 그리스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테미스토클 레스의 예상대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금의 급격한 유출은 페르시아 경제에 혼란을 가져왔고 살림살이가 힘들어진 페르 시아인들의 불만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페르시아는 전쟁이라는 선택을 어쩔 수 없이 강요받았다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는 대군을 앞세 워 아티카를 점령하는 등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살라미 스해전에서 대패하면서 후퇴했다. 역사를 통해 알고 있듯이 그 리스의 승리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동양 의 고대문명으로부터 문명 태동의 씨앗을 받았던 과거의 종속 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 다. 페르시아를 물리친 뒤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그리스는 지중해 일대에 식민지를 건설해 그리스만의 문화를 전파 했다. 향유된 문화는 그리스를 동경한 로마가 성장하는 데 기 초가 되었으며 중세로 이어져 독자적인 유럽 문화의 뿌리가 되 었다. 즉 오늘날 서구 문명의 원류는 그리스 문명이다.
은광으로 구축된 해군력이 없었더라면 그리스가 패했 을 가능성이 높다. 페르시아는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전쟁을 치르다 보니 경제적인 뒷받침이 부족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물자 보급 능력이 전쟁의 승리를 좌우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 하다면 두 세력 간의 전쟁에서 페르시아가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은광을 통한 안정적인 은 확보가 가능했을 뿐 아니 라 페르시아로부터 대량으로 유입된 금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물자 조달을 비롯한 전쟁 지속 능력이 훨씬 앞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제적 차이는 결국 전쟁의 승패를 넘어 국가와 세력의 흥망에도 영향을 주었다.
현대의 많은 나라가 이 같은 역사적 사례를 거울삼고 있다. 실제로 세계 초강대국이라고 불리는 미국마저도 군수물 자조달을 분산하지 않으려고 전선을 두 곳으로 나누지 않는다.

- 1848년에 스위스가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연방국가로 발돋움하면서 더 이상의 용병 수출은 금지하고 있다. 다만, 예 외인 데가 한 곳 있다. 바로 교황의 안전을 책임지는 바티칸 교 황청 근위대다. 바티칸시국에서 전 세계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이탈리아 군인이 아닌 스위스 용병이 다. 으레 용병이라고 하면 전투력은 강하지만 충성심은 기대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된다. 하지만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스위스용병은 달랐다. 이런 역사적 배경들로 로마교황청의 안전은 스위스 용병들에게만 맡긴다는 전통이 생겨났다.

- 돈을 모아 부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 중 하나가 메디치 가문일 것이다. 한때는 왕과 귀족이 터부시하던 돈을 관리한다는 이유로 천시를 받았지만 루이 11세Louis XI 같은 왕과 여러 유 력 가문의 귀족들과 관계를 맺고 높은 인품으로 신망을 얻으면 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다스리는 귀족으로 편입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시대의 흐름이 변화 하면서 상공업도 조금씩 쇠퇴하게 되었고 메디치 가문의 재정 도 점차 어려워졌지만 예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대를 이어가 며 계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 Anna Maria Luisa de Medici는 사망하기 직전에 가문이 소유한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 로 피렌체에 기증했다. 후대에 문화적 자산과 역량을 남김으로 써 피렌체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예술 품들은 우피치미술관에 전시되어 관람객을 맞고 있다.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메디치 가문이 남긴 예술의 숨결을 누리고 있다. 피렌체 사람들은 관광객들로부터 얻은 관광 수입 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의 부의 영향력이 지금 도 계속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영향력은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이 남긴 예술품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1568년 중세 유럽에서 염장 생선은 중요한 식재료 중 하나였다. 중세 유럽 사회를 장악했던 종교의 영향 으로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종교적인 삶을 강요받았 는데, 이에 금식 기간 동안 취식이 금지되었던 붉은색 육류와는 다르 게 생선은 취식이 가능했기 때문에 육류를 대체하는 식재료로 주목 받았다.
- 청어는 크기에 따라 50~300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반면, 대구는 일반적으로 5~15킬로그램까지 자라고 경우에 따 라서는 20킬로그램까지 나간다. 이러한 차이는 육질에 따른 식감의 차이뿐만 아니라 맛의 차이까지도 만들어낸다.
청어와 대구 모두 염장을 하지만 대구의 저장 기간이 좀 더 길었다. 청어가 최대 2년 정도라면 대구는 환경에 따라 5년 까지 가능하다고 알려졌다. 대구는 청어와 달리 기름기가 적어 염장을 하지 않고 말리기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 청어의 경제적 역할은 네덜란드를 통해 빛을 발했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대부분이 바다보다 낮은 지역을 간척해 만 든 곳이어서 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했다. 그런데 연근해에 사는 물고기를 잡는 수준이었기 때 문에 주로 작은 배를 탔고 원양어업에는 맞지 않았다. 어느 날, 평상시처럼 배를 타고 조업을 나갔던 어부들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천운이었다. 그것도 길운이었다.
하늘이 정한 운명을 천운이라고 한다. 천운. 그것이 네 덜란드에 불쑥 찾아왔다. 수온 변화로 해류가 바뀌면서 발트해 에서 주로 서식하던 청어 떼가 터전을 바꾸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네덜란드 연안에서 가까웠던 것이다. 발트해와 스카니아 에서 유명하던 청어가 네덜란드 바다 연안에서 잡히자 어부들 도 처음에는 평소와 다른 어종이 잡힌 것에 신기해했다. 갑작 스러운 생선 떼의 출현으로 놀란 어부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이 내 정신을 차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계속해서 청어가 잡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시적으로 발생한 현상이 아님을 알게 되자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네덜란드 어부들 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청어를 잡으려고 열심히 노를 저어 바다에 나갔다.
조업을 나갈 때마다 청어가 끊임없이 잡히자 지리적으 로 유리한 곳에 위치해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더 많은 물고 기를 잡기 위해 큰 배를 만들기 시작했고 부족한 인력을 확보 하기 위해 주변에 청어와 관련한 소식을 널리 퍼뜨렸다. 많은 사람이 기회를 잡기 위해 소문을 듣고 바닷가로 모여들었다. 청어가 발트해에서 북해로 터전을 바꾸면서 시작된 변화는 어부들의 생활이 나아지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청어가 불러 온 잔잔한 나비효과는 어느새 거대한 파도에서 폭풍이 되어 세 상을 변화시켰다. 청어는 네덜란드를 독립시키는 것은 물론이 고 자본과 금융의 중심지로까지 성장시켰다. 힘을 비축한 네덜 란드가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유럽을 넘어 아시아로 진출하 게 된다. 네덜란드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아시아와 유럽의 경 제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세계경제사에 또 다른 나비효과를 일으켰는데 파급력이 증폭되어 다양한 변화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대부분의 나라가 청어를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먹거리로 활용했지만 네덜란드는 달랐다. 청어의 장기저장이 가능해지면서 네덜란드인의 장사수완이 발휘되었다. 그들은 청어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구하러 올 정도로 귀한 특산품이라고 소문냈다. 그 덕분에 거래하러 오는 상인들이 늘어나면서 청어는 부를 획득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자리매김 했다. 네덜란드의 청어잡이는 단순한 어부의 밥벌이를 위한 손 놀림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가적인 산업으로 자리를 잡았고 주 변 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도약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몰려든 청어가 처음부터 돈이 된 것은 아니었다. 맛은 좋았지만 저장시설이 없던 당시에 생 선은 빨리 상하는 먹거리여서 오랜 보관이 어려웠다. 많은 시간을 들여 잡은 청어를 빨리 소비하지 못하면 모두 버려야 하 다 보니 많이 잡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던 중 1358년, 평범한 어민이었던 빌럼 뷰켈슨Willem Beukelszoon이 사용하기 시작한 작은 칼을 다른 어부들도 쓰면서 청어잡이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빌럼은 청어 머리와 내 장을 한칼에 베어낼 수 있는 작은 칼을 발명했는데, 이 때문에 청어를 잡은 뒤 배에서 바로 손질하고 소금물에 절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청어의 배를 갈라 내장에 소금을 치면 삼투압 이 일어나면서 내장이 쪼그라드는데 이때 내장에 들어 있던 수 분과 각종 효소가 밖으로 빠져나와 물고기에 스며들어 독특한 맛을 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청어를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면서 청어는 한낱 물고기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곧 '돈'이 되었다. 갓 잡은 청어를 배에서 바로 손질하고 염장 처리하면서 이런 작업을 위한 공간과 보관 장소가 필요해졌다. 그 때문 에 청어잡이 어선은 점점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 청어를 잡 기 위한 조업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어획량은 획기적으로 증가 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청어를 손질하다 보니 선원들의 손놀 림도 점점 빨라졌다. 이는 작업 속도를 늘리는 연쇄작용을 가 져와 염장 청어의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이 런 영향으로 여러 지역에서 소비되는 청어 물량이 엄청났음에 도 모두 감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항해 시간이 길던 해군과 무 역 상선에게 판매되던 염장 청어는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여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하며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
- 한편 중세 유럽을 장악하고 있던 가톨릭에서는 사순절, 부활절을 포함해 1년에 3분의 1이 넘는 140여 일을 금식 기간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육류와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빵 같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당 시에 성욕을 부른다고 알려진 육류는 금식 기간 동안 더욱 금 기시되는 식재료였다. 사람들은 신앙심은 있었지만 신이 아니 었다. 허기를 견디기 어려워 배를 채워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때 예외적으로 허용된 먹거리가 맥주와 생선이었다. 금식 기간에 먹을 수 있는 생선을 보관하기 좋게 염장까지 해 놓았으니 주변 지역뿐만 아니라 먼 내륙에 있는 상인들은 청어를 구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그로 인해 숙박업도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네덜란드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향신료 무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주식회사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인도네시아 에 현지 상관을 개설해 현지 직원을 상주시켰다. 그 직원은 향 신료의 가격이 내려가면 이를 대량으로 사들여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 그리고 상선이 오면 향신료와 다른 무역품을 실어 보 냈는데 이런 형태의 발 빠른 운영 덕분에 다른 나라보다 더 많 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향신료 시장을 선점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아시아에서 결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최 종 승리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향신료에 눈이 먼 네덜란드가 반다제도와 수리남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대신 영국에 뉴욕을 넘겨주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으니까 말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중해를 벗어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지 만 돈을 향한 사람들의 집념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시작된 '대항해'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바꾸어놓았다. 한 알의 크기라고 해봤자 4~5밀리미터 정도인 후추가 세상을 바꾸는 방아쇠가 된 것이다. 향신료 무역은 정당한 값을 치르며 상거래를 했던 아라비아 상인을 서양 선원들이 대체하면서 식민지 건설을 통한 강탈과 탄압을 앞세운 약탈로 변했다. 상도의를 무시한 약탈은 열강의 식민지 쟁탈로까지 이어지며 오랜 시간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혼란에 빠뜨렸다.
- 시간이 지나면서 리무쟁숲에 심은 나무는 선박을 만드는 데 사용해도 될 정도로 자랐지만, 정작 선박에는 사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오크나무의 쓰임새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원래 계획했던 용도로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나무가 주는 특유 의 매력과 분위기 덕분에 근래에는 고급 요트 같은 선박 내부 의 가구나 시설을 꾸미는 데에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또 포도주나 증류주 같은 술을 담는 통을 만들 때도 사 용하면서 오크나무만의 또 다른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오 크나무로 만든 오크통에 포도주를 숙성하면 그 과정에서 화학 적 작용이 일어나 과일 향이나 나무 향 같은 특유의 향이 만들 어지는데 나무통에 담겼던 포도주를 비워내도 나무의 결 사이 에 잔향이 남아 있다 보니 거기에 갓 증류한 브랜디나 위스키 를 넣어 향을 침출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는 삼투압을 활용한 특유의 침출 작용을 한다.
포도주가 들어 있었던 오크통의 나뭇결에 남아 있는 술의 과일 향과 성분, 또 나무 고유의 색깔과 함께 담겨 있던 리그닌 향을 뽑아낸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스카치위스키를 비롯한 증류주 를 생산하는 여러 회사가 포도주를 담았던 오크통을 서로 가져 가려고 눈독을 들인다. 오크통에 담긴 포도주가 비워지지 않았 지만 비싼 돈을 주고 선점하는 경우도 있다. 리무쟁숲에 처음 나무를 심을 때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용도는 생각지도 못했 을 것이다.
게다가 포도주 못지않은 전통을 품고 있는 리무쟁숲의 역사는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재탄생해 또 다른 부를 창출해내 고 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프랑스의 후손들은 선조들의 선견 지명 덕분에 오크나무의 또 다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 이 콩은 6~7세기경 에티오피아고원에서 양을 치던 어린 목동 칼디Kaldi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라고 알려졌다. 이후 525년 예멘을 무너뜨리고 지배했던 에티오피아 악숨왕국에 의해 예멘으로 전해졌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당시 홍해 제 해권을 가지고 있던 악숨왕국은 예멘에서 재배한 콩이 무역상 품으로 큰 인기를 끌자 다른 지역에서는 이 콩을 재배하지 못 하도록 콩의 종자를 볶아서 수출하는 꼼수를 부렸다. 이로 인해 독특한 풍미를 갖게 된 콩은 유럽에서 재배되기 전까지 400여 년간 예멘에 독점적인 부를 안겨주었다. 예멘에서 콩의 종자와 묘목을 관리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부를 대물림하는 것으로 간 주될 정도였다.
- 특히 볶은 콩을 곱게 갈아 그 위에 물을 부어내려 마셨던 음료는 후에 '카흐와quhwa'와 '카흐베kahve'로 불리며 사 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네덜란드어로 '코피Koffie'라 불린 이 음료는 1582년 「모르겐란더의 쌀이라는 저서에서 '커피 coffee'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포도주가 로마의 세력 확장과 함께했듯이, 아라비아 지역에서 태동한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를 비 롯해 발칸반도로까지 팽창하면서 커피도 그 길을 따라 남유럽까지 전해졌다. 십자군전쟁 중에 커피가 일부 유럽에 알려졌지만 동방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베네치아를 거점으로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여러 차례의 충돌로 감정의 골이 깊어져 이슬람에 대 해 감정이 좋지 않았던 가톨릭 신자들은 커피콩을 '악마의 콩' 이라고 부르며 저주했다. 심지어 유럽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교 황에게 공식적으로 금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도 한다. 1600년 경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는 커피를 맛본 뒤 이 음료를 이교도에게만 마시도록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반대를 무릅 쓰고 커피에 축복을 내렸다는 풍문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이야기를 타고 커피는 유럽에 급속한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커피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곧 돈이 되었다.
초기에는 유럽이 커피를 전량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커피가 인기를 끌수록 원두를 생산해 수출하던 예멘은 돈을 쓸 어 담았다. 예멘의 커피는 모두 모카항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 되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커피와 모카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유럽으로 커피를 실어 나르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계무역만으로도 많은 돈을 벌었지만 예멘에 쌓여가는 부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 거대함을 알았기에 야욕을 드러냈다. 예멘의 독점적인 지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네덜란드 상인 피터르 판 덴 브뤼케Pieter van dan Broeck는 위험을 무릅쓰 고 일을 저질렀다. 1616년 모카에서 볶은 커피콩을 가지고 네 덜란드로 돌아오는 배편으로 예멘에서 수출이 금지되었던 종 자와 묘목도 숨겨 가져온 것이었다. 암스테르담식물원에서 기 후적응의 어려움으로 몇 번의 실패 끝에 유럽에 뿌리내린 커피 나무는 이후 새로운 유럽 커피 역사를 쓰게 된다. 네덜란드 커피는 유통비용이 줄어들면서 가격경쟁력이 생겼다. 네덜란드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예멘에서 수입되는 원두의 양은 줄어들었고 그 대신 네덜란드의 이익은 증가했다.

- 4차 십자군은 돈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 중의 하나다. 성지 탈환을 위해 이슬람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집트를 공략하려고 했던 십자군은 사탄으로 돌변해 동 방무역의 이익을 노리는 베네치아와 손을 잡고 비잔틴제국의 수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성지 탈환이 라는 명분을 상실했고, 가톨릭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서 완충지 대 역할을 해왔던 비잔틴이 힘을 잃음으로써 두 세계 간의 직접적인 충돌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이 원정에서 가장 이득을 본 베네 치아는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 4차 십자군의 만행은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십자군은 이제 이슬람 세력 못지않게 응징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비 잔틴제국 곳곳에 있던 육군 병력과 알렉시오스 3세를 지지하 던 비잔틴의 주요 인사들은 공적이 되어버린 십자군을 물 리치기 위해 대립 관계에 있던 불가리아군까지 끌어들여 연합 전력을 구축한 뒤 십자군을 사실상 궤멸시켰다.
최초의 십자군은 유럽의 방파제였던 비잔틴을 구하고 기독교의 이념을 지키고 따르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되 었지만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변질되었고 끝내 파문당한 뒤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혀 먼 이국땅에서 씁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4차 십자군전쟁에서 최대의 이익을 얻은 것은 베네치아 였다. 에게해 주변의 섬들을 차지하고 해상 교역권을 장악하며 막대한 이익을 쌓았다.
베네치아는 이후에도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항로 를 개척하면서 키프로스와의 교역도 많이 늘어나게 된다. 전쟁 으로 물자 수송이 활기를 띠자, 물자 확보를 위해 플랑드르를 비롯한 다양한 상업지와 농업 생산지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이 활발해졌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많을수록 해운업은 많은 이 윤을 남겼다. 항구를 중심으로 한 거래량이 많아지면서 이슬람 으로 가기 위한 사람과 물자가 베네치아로 모였듯이 유럽의 돈 도 베네치아로 모여들었다. 베네치아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마 진으로 새로운 항로와 무역 지대를 개척하는 비용으로 사용했 다. 또한 이슬람과의 무역을 통해 이슬람문화가 유입되었는데 이를 활용하면서 유럽의 과학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 과세 문제로 촉발된 두 차례의 혁명
영국을 절대왕정에서 의회주의로 만든 대표적인 사건이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이다. 이 사건이 종교와 정치적 이슈에 영향 을 미치기는 했지만 두 혁명이 일어난 절대적인 이유는 단 하 나였다. 바로 돈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조세 때문이었다. 즉 왕이 세금을 더 걷으려고 하자 주된 납세자들이 반발한 것이라 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세금 납부를 재산을 빼앗기는 것이라 고 생각한 귀족과 젠트리는 힘을 합쳐 의회를 점령한 뒤 왕을 쫓아냈다. 다시 말해 영국의 혁명은 겉으로는 권력을 두고 왕권 과 의회가 맞붙은 다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귀족과 젠트리의 조세불복의 몸부림이었던 셈이다.
- 두 사건에 대한 역사적 시각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다만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를 원 했던 우리나라의 교육부는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이 영국의 민주주의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는 데 기여한 사건들이라고 아름답게 포장해서 가르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같은 교과서의 내용이 실제와는 굉장한 괴리감이 있다는 것을 염두 에 두었으면 좋겠다. 사건들의 명칭부터가 승자들의 정당성을 확보해주기 위해 계산된 틀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 돈을 벌기 위해 중독성 물질 아편을 자국민에게 방임했던 나라 영국. 아편의 폐해를 알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정부 주도 하에 다른 나라에 아편을 판매하며 가면 뒤에 비신사적인 모습 을 감추었던 나라 영국 부정한 이익을 침해당하자 부끄러워하 기보다 이를 유지하고자 다른 핑계를 끌어와 전쟁을 할 수 있 도록 승인한 의회를 보유한 영국.
아편 때문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던 당시의 영국을 지금의 영국은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억한다. 아편전쟁은 고삐 풀린 자유와 끝없는 이익을 추구한 영국의 천박한 자본주 의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청나라는 아편으로부터 백 성을 보호하기 위해 정당한 행동을 했음에도 열강의 힘의 논리에 무너지며 혹독한 뒷감당을 치러야 했다.
아편전쟁은 국제 관계에서 정의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지금도 국 제사회에서는 힘의 논리가 우선시된다. 힘 있는 나라들은 정치 적 명분을 확보하고자 국제기구들을 만들어 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꾸몄지만 세상은 여전히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국 제기구를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강대국들이며 그 나라들의 목소리에 따라 약소국의 운명이 좌우되기도 한다. 아편 전쟁과 같이 직접적으로 무력을 사용한 전쟁은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경제력이나 외교력을 수단으로 해 약소국을 압박하는 식의 힘에 의한 지배 방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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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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