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이자 문화이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쉽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환경 파괴, 경제 위기, 전쟁 등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겠지만, 100년 뒤에도 인류가 존재할지를 생각하면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도 인류는 틀림없이 존재할 거라고 단언하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세상이 종말을 고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때문이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세상 을 뒤덮은 사회시스템은 자본제(資本制)이며 이 자본제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현대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영국의 비평가인 마크 피셔(Mark Fisher)는 '자본주의가 유일하 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이며 그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의식이 만연한 상태'를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어떻게 자본제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자본주의의 끝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멍하니 있는 사이 인류는 종말을 맞고 말 것이다.
- 사실 마르크스는 무엇이 자본제 사회라고 딱 부러지게 써놓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자본론』의 전체 내용에 근거해 자본제 사회를 정의해보자. 자본제 사회는 물질대사 대부분을 상품의 생산과 유통(교환), 소비를 통해 이루는 사회이며 상품에 의한 상품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 즉 가치 생산이 목적이 되는 사회라고 할수 있다.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다.
- 고전파에서 시작한 근대적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은 이 '부'와 '상품'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시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방대한 상품 더미로 나타나며'라는 표현에는 부는 모든 시대와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부가 주로 '상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뿐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부와 상품을 섞어버리면 부라는 초역사적 개념이 곧 상품이라는 말이 되며, 상품도 초역사적인 것이 된다. 그러면 원시시대부터 자본주의가 존재했고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이 되는데, 마르크스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물질대사의 대부분이 상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뿐이며, 다른 사회에서는 상품을 매개체로 삼지 않아도 물질대사가 이루어진다. 그런 사회에서 부는 상품이 아니다. 바꿔 말하자면 부가 반드시 상품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의 기본 형태가 '상품'으로 존재한다. 그러므 로 『자본론』은 상품의 분석에서 시작된다. 상품이란 대체 무엇인 가부터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해석해야 비로소 『자본론』의 첫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가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자 마르크스는 잊히고 애덤 스미스가 다시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논리적인 결말이다. 자본주의에 종말이 없다면, 즉 자본주의가 초역사적이라면 자본주의에는 시작도 없다는 말이 된다. 인류는 탄생한 이래 줄곧 자본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품은 애초부터 부와 동의어이며 영원한 것으로 취급 받게 된다. 이는 아직 상품화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남김없이 상품화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마이클 샌델의 책은 이런 상황에서 정말 그것을 돈 주고 사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훨씬 오래전에 이 질문에 담긴 본질을 고찰한 바 있다.
- 마르크스는 상품이 태어나는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상품교환은 공동체의 경계선, 즉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또는 다른 공동체의 구성원과 접촉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물건들이 한번 공동체의 대외적 관계에서 상품이 되기만 하면 그것들은 반사적으로 공동체 안에서도 상품이 된다. (제2장 교환과정)
- 마르크스는 '종속'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 생산방식은, 자본에 대해 노동이 형식적으로 종속한다는 토대위에서 자기 자신의 방법·수단·조건을 만들어내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한다. 이 발전과정에서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은 실질적 종속으로 대체된다. (제16장 절대적 상대적 잉여가치)
- 현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인류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것은 자본가 계급의 계급투쟁이다. 갖지 못한 자에게서 가진 자에게로 재분배 되는 것이다.'라고 기술한다.
-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 노동자와 그 가족의 전
체 생활시간을 자본의 가치 증식에 이용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바꾸
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변한다. (제15장 기계와 대공업, 제3절 기계제 생산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가장 직접적인 영향)
-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은 기계 를 말한다. 기계를 도입하면 생산성이 증가하여 더 적은 시간에 같은 양을 생산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렇다면 노동 시간은 감소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계 도입이 '노동자와 그 가족의 전체 생활시간을 자본의 가치 증식에 이용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바꾸어 버린다. 기계 도입이 노동시간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좋은 예가 컴퓨터다. 1980년대에는 컴퓨터가 도입되면 업무 효율이 경이적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분명 실제로 그렇게 되긴 했다. 그런데 그렇게 능률이 오르면 일거리가 줄어 편해지리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직장에 컴퓨터가 도입된 이후 노동시간은 오히려 길어졌다.
- 잉여가치의 형성, 따라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은 판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한다는 것으로써도, 또 구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구매한다는 것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다. (제5장 자본의 일반공식의 모순)
생산수단(Pm)도 노동력(Ar)도, 원칙대로라면 등가교환된 것 이어야 한다. 공장, 기계, 원료 등을 공짜로 가져온 것도 아니고 공짜로 부려먹는 노예를 데려온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G는 어떻게 G'가 될 수 있을까?
- 이러한 자본 증식이 가능한 이유, 바꿔 말하면 '잉여가치의 원천’ 은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상품의 소비에서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 소유자는 유통 영역의 내부, 시장에서 운수 좋게 그것을 사용하면 가치가 창조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 - 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노동을 대상화하여 가치를 형성하게 되는 그런 상품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실상 화폐 소유자는 시장에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이것은 노동 능력 또는 노동력이다. (제6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여기서 화폐 소유자는 자본가의 초기 형태를 말한다. 앞서 말 한 산업자본 공식에 대입해보면, 마르크스는 잉여가치가 노동력 (Ar)에 의해서만 생긴다고 지적한 것이다.
- 임금노동에서는 잉여 노동(즉 지불받지 않는 노동)까지도 지불받는 노동으로 보인다. (제19장 노동력의 가치(또는 가격)가 임금으로 전환)
즉 자본가를 위해 하는 노동마저 노동자 자신을 위해서 하는 노동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자본에 봉사하는데, 자신을 위해 일한다고 느끼게 된다.
자본제의 특징은 이처럼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을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바로 거기서 자본을 위해 생산성을 높이고 있는데 자신을 위해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는 착각이 발생한다.
- 노동자를 착취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소비자로도 취급하자는 발상이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특징을 가장 빨리 구현한 것이 미국 포드 사의 생산과 노동 체제다. 그래서 이 체제를 포디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든 것이 유동화되었다고 말한다.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능력, 고용 형태 등이 짧은 시간 내에 변화해 안정되지 않는 것이다. 고용의 탈정규화가 바로 전형적인 예다.
같은 표현을 쓰자면 포디즘의 시대는 '고체 근대(solid modernity)' 였다. 본래 자본주의하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변화하고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생산방법 등의 혁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무엇도 같은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게 자본제 사회의 본질인데, 포디즘은 그런 변화에 어떤 틀을 제공하고 고정했다고 할 수 있다. 고체그대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주력 상품들의 특성상 부득이하게 발생한 면도 있다. 포디즘에서 발전의 열쇠가 된 상품은 자동차나 가전제품 같은 내구소비재와 주택이었다. 즉 제조업이 중심이었던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주택 소유가 일반적인 일이 된 것도 이 시대가 처음이다.
위에서 열거한 상품들은 생산공정이 복잡하므로 생산하는 데 대규모 공장이 필요하다. 유행이 지났다고 해서 만들지 않거나 바꿀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나름의 고체성을 갖게 되었다.
- 현재는 사회가 액상화되어 사람들이 의지할 곳 없는 초기 노동자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과거 30년 동안의 포스트포디즘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우선 상대적 잉여가치를 추구하면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할 것 이고 사회의 안정성과 건전성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되 었음이 증명되었다.
자본이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방법을 두고 기든스와 라이시는 혁신을 꼽았지만 『자본론』이 훨씬 이전에 지적했듯 혁신을 통해 잠깐 수익을 낸다 한들 금방 타자에게 따라잡히고 만다. 20세기 말에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이 정체되자 자본주의는 세계화로 활로를 찾는다. 세계화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이는 절대적 잉여가치를 추 구하는 방향으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활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진국은 노동력이 훨씬 저렴한 개발도상국으로 공장을 이전하고, 그 노동력을 써서 낮은 비용으로 상품을 생산한다. 노동자보호법이 갖추어지지 않은 지역이나 국가에서라면 선진국에서 금지된 장시간 노동이나 위험한 환경에서의 노동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저렴한 노동력을 선진국 내로 옮겨 오기도 한다. 그로 인해 기업은 큰 이익 을 올렸지만 노동자의 반발이 각국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브렉시트가 그 결과다.
-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를 전제하고,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하며,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 생산자들 수중에 상당한 양의 자본과 노동력이 이용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운동은 끝없는 순환 속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 여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시초 축적(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이전의 축적),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라 그 것의 출발점인 축적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26장 시초 축적의 비밀)
- 자본주의 체제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가 소유하던 노동조건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른바 시초 축적은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 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제26장 시초 축적의 비밀)
- 자본가 계급의 형성에 지렛대로 기능한 모든 변혁들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그들이 생존수단에서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 레타리아들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노동시장에 내던져진 순간이었다. (제26장 시초 축적의 비밀)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영원한 자연법칙'이 자유롭게 작용하도록 하고, 노동자와 노동수단 사이의 분리를 완성하며 한쪽 끝에서는 사회의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쪽 끝에서는 인민대중을 임금노동자로, 즉 자유로운 '노동빈민’ - 이것은 근대사의 인위적인 산물이다ㅡ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수고가 필요했다. 만약 화폐가, 오지에(Emile Augier. 프랑스의 극작가 - 옮긴이)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한쪽 볼에 핏자국을 띠고 이 세상에 나온다.”라고 하면,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제31장 산업자본가의 탄생)
- 미국이 세계공황의 타격을 완전히 불식할 수 있었던 것은 케인스주의적 뉴딜 정책 덕분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덕분이었다. 전쟁은 그 자체로 수요를 불러일으키고 거대한 파괴 후에는 거대한 부흥 수요가 생긴다. 전쟁이 바로 유효수요 부족에 대한 특효약인 것이다. 미국은 이미 전쟁을 통해 공황에서 벗어나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대국이 된 경험이 있다. 
유사 이래 전쟁은 부의 수확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경제적 동기는 잉여가치 획득 요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이 여러 나라에서 벽에 부딪친 지금, 전쟁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 잉여가치를 획득하고 싶다는 유혹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날을 세우고 있는 요즘, 최악의 시나리오는 패권국의 지위를 둘러싼 싸움과 자본적 요구가 합치 되어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 이 책은 『자본론』입문서이지만 배경에 깔린 테마는 신자유주의 타도다. 현재는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전제한 상태에서 그것에 대한 대항책으로서 『자본론』을 생각하고, 다양한 방향에서 신자유주의를 조명할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조명하는 관점 중 하나가 제4강에서 소개한 데이비드 하비 의 말처럼, '신자유주의는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계급투쟁'이라는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계급투쟁은 자본가 계급이 독점한 잉여가치를 노동자 계급이 요구하는 형태로, 아래에서 위를 향해 벌어진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서는 그 방향이 정반대다. 20세기 후반, 포디즘형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 양보하고 재분배한 자신들의 몫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 신자유주의다. 지난 20년간을 보면 자본가 계급은 이 투쟁에 성공한 듯하다.
-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에 관해 쓴 저서 중 가장 유명하고 역사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이 『공산당 선언』이다. 엥겔스와 함께 쓴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서두 부분을 읽어보자.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도, 길드 조합원과 직인, 요컨대 변함없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각 시기마다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 모두가 함께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투쟁을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벌여왔다. (제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 사회를 구조로서 파악하는 방법론을 구조주의'라고 부르겠다. 『자본론』에서는 자본제 사회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 및 구조로 보는, 구조주의적인 관점이 핵심을 이룬다. 거기서 인격적 주체성은 구조를 구성하는 부분 중 하나일 뿐이다. 악덕 자본가도 결국 전체 구조 중 일부에 불과하다. 『자본론』은 그 점을 분명하 게 언급한다.
자본가는 오직 인격화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혼은 자본의 혼이다. 그런데 자본에는 단 하나의 충동이 있을 따름이다. 즉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키고, 잉여가치를 창조하며, 자기의 불변 부분인 생산수단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잉여 노동을 흡수하려는 충동이 그것이다. (제10장 노동일, 제1절 노동일의 한계들)
이 문장은 인격적인 범주에서 자본제 사회를 파악하려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고성 발언으로 들린다. 자본가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인격화되었기에 가치를 증식시키려는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즉 『자본론』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여기서는 그것을 계급투쟁 대 구조주의'라고 부르겠다. 한쪽에는 자본주의와 구조를 분석하는 마르크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계급투쟁 투사인 마르크스가 있다.
- 자본의 종속 공세에 아무 반격도 하지 않으면 인간의 기초 가치는 점점 떨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점령한 과거 수 십 년간 그 일이 진행되었다. 인간의 기초 가치를 낮추고 자본에 봉사하는 능력으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리고 '능력이 없으니까 자네의 임금은 이게 다야. 이걸로 가치에 준한 등가교환을 한 거니까 불만 없지?'라고 압박한다. 그 공세에 맞서려면 인간의 기초 가치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더 사치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사치를 누리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풍요로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종속되고 그 가치관에 길든 주체는 그 점을 잊어버린다. 이 망각을 강제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성과였을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문화가 되 었다고 강조해왔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다. 신자유주의 의 특징은 인간의 사고 감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실질적 종속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서 우리 몸을 분리하는 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 시작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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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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