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저자
로버트 L. 하일브로너, 윌리엄 밀버그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0-12-22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시장 경제의 출현에서부터 신자유주의까지 한권으로 읽는 자본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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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적 충동과 제도들에서 역사의 모든 원동력이 나오는 것은 아님.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이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에서였음. 자본주의가 앞으로 성공을 거둔다면 이는 그 경제적 여러 힘들을 길들이 정치적 의지와 정치적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임. 경제적 힘들만으로는 사회적 변화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경제적 변화를 이해하려면 경제가 묻어 있는 사회적 도덕적 맥락을 의식할 필요가 있음.

- 역사에서 자본주의가 차지하는 독특함은 그것이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를 발생시켰다는 점이지만, 이러한 역동성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으뜸가는 적이다.

- 관습적 경제학의 수사라는 베일을 벗겨보고 나면, 우리는 그 아래에 신뢰, 신앙, 정직성 등등과 같은 전통적 행태의 하부구조가 버티고 있음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은 저 사회의 은폐된 권력구조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시장 체제 작동에 필수적인 도덕적 기초가 되는 것이다.

1. 경제문제

- 지금까지의 역사를 볼때 생산과 분배의 두가지 경제문제에 대한 세가지 유형의 해결책이 진화해 왔음. 이는 전통, 명령, 시장 체제임. 전통이라는 방식은 친족체제등 여러 사회제도를 통해 사람들의 신분과 보상을 영구화시킴으로써 생산과 분배의 문제를 해결함. 전통이라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경제적 해결책은 정태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 특징. 여기에서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거의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음. 명령이라는 방식은 통치력을 가진 권위를 빌려 노력과 보상의 배분을 강제함으로써 경제문제를 해결. 명령 방식은 급속하고도 광범위한 경제적 변화를 달성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 이는 또 극단적인 전체주의 형태를 띨 수도 있고 온건한 민주적 형태를 띨 수도 있음. 시장체제는 겉으로는 통제가 없어 보이는 사회에서 질서와 효율성이 자발적으로 생겨나도록 사회는 조직하는 복합적인 양식임.

2. 시장 이전의 경제

- 어떤 사회이건 축적된 부가 어떤 사회적 형태를 취하는가를 살펴보게 되면 그 사회에 대해 실로 많은 것이 드러나게 됨. 누가 잉여를 가져가는가야말로 그 사회 내부의 권력구조를 어김없이 밝혀내는 등불이 되는 질문임

- 길드는 현대기업과 달리 돈을 버는 것이 최고 목적이 아니었음. 길드의 목적은 일정하게 질서잡혀 있는 생활방식을 보존하는 것. 물론 이 생활방식에서는 장인기술자들이 괜찮은 소득을 얻는 것을 상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 중 누군가가 대사업가나 독점기업가가 되는 것을 추호도 허용하지 않음. 오히려 길드는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그렇게 막가는 투쟁이 벌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이었음. 경쟁은 엄격하게 제한되고, 이윤도 미리 정해진 수준으로 묶여 있었음. 광고행위는 금지였고 심지어 동료길드 구성원들보다 더 나은 기술적 진보를 이루는 것조차 불충스러운 짓으로 간주됨.

- 고대사회에서 재산을 축적하던 이들은 모두 한점 부끄럼 없이 맘껏 온갖 재화를 게겔스레 축적했지만, 중세의 이윤 축적자들은 이득을 거두어들이면서도 항상 그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위험에 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림. 이런한 돈벌이에 대한 나쁜 사회적 평판은 고리대 즉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에 대해 카톨릭 교회가 보여준 경악에 가까운 혐오에서 잘 드러남. 고대에도 고리대금업은 평이 좋지 않은 활동이었지만 그 비판은 논리가 모호했음. 하지만 중세에 들어서 일단 이것이 교회의 깐깐한 감시하에 들어가자 이제는 심히 사악한 활동으로 낙인찍힘. 교황은 이제 고리대가 죽음에 이르는 대죄라는 칙령까지 내림. 이렇게 험악한 교회의 감정은 단지 신학적 양심 때문에만 생겨난 것은 아니었음. 고리대와 이윤추구에 대한 교회의 반대는 대부분 가장 세속적 현실에 그 뿌리를 둔 것. 기근은 중세 위기 전체를 휩쓴 재앙이었던 바, 이로 인해 가장 파렴치한 경제적 갈취가 나타나고 말았음.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이들에게 빵을 살 돈을 꾸어주고서 거기에 40~60%에 달하는 이자를 매긴 것. 이러한 인정머리 없는 관행이 중세기에는 넘쳐났으니 이윤추구와 이자수거에 대한 혐오는 대부분 그것을 이러한 파렴치한 관행과 똑같은 짓으로 본 것에서 기인. 이윤과 이윤이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또 있었음. 이는 경제적 생활의 조직 자체가 본질적으로 정태적이었다는 사실.

- 중세의 정태적 사회를 진정한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했을까?

(1) 경제생활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함 :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득을 추구해야 함. 그러려면 이윤, 변화, 사회적 이동성 등에 대한 의구심과 불편함 감정이 그런 태도와 행동을 고무하고 찬양하는 생각으로 전환되어야 함. 신분사회가 사라지고 대신 계약사회가 나타나야 함. 즉 사람들이 타고난 지위에 따라 제약받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의 지위를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누리는 세상이 되어야 함.

(2) 경제생활의 화폐화가 진행되어 완성되어야 함 : 사회에서 수행되는 거의 모든 일이 화폐로 보상되어야 함. 노동의 대가를 화폐로 지불하는 관행이 널리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곧 생산자를 위한 시장 또한 널리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 오늘날 우리의 생산활동을 지배하고 또 방향을 지휘하는 것은 구매력의 흐름이기에 화폐소득이 일반적 규칙이 아니라 예외적인 현상이던 사회에서는 구매력 비슷한 것조차 나올 수 없었음.

(3) 사회의 여러 경제 활동에 대한 규제와 조정이 사라지고 자유롭게 작동하는 시장 수요의 압력이 들어서야 함 : 고대와 중세를 통틀어서 경제문제를 해결한 것은 전통방식이거나 명령방식이었음. 사회적 보상의 배분을 규제했던 힘 또한 전통과 명령이었음. 하지만 시장사회가 되려면 또 다른 통제 수단이 나타나서 전통과 명령을 대체해야 함. 모든 것을 아우르는 화폐 수요의 흐름이 사회를 추동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이 되어야 하며, 이는 모든 경제적 활동이 화폐화됨에 따라 생겨나는 현상이기도 함

3. 시장 사회의 출현

* 시장사회로의 변화를 가져온 여러 세력들

- 유랑상인 덕분에 생겨난 아누 중요한 부산물 하나가 바로 새로운 도시와 촌락의 창출이었음. 도시가 봉건사회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과정 자체가 새로운 사회경제적 질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됨. 그 이전에는 도시란 어느 문명에서나 중앙정부의 전초기지였음. 이제 처음으로 도시는 사회적 권력의 중심틀에서 빠져나와 독립적 실체로 존재하게 됨. 그 결과 이들은 자신들의 법전과 사회적 행위규범 그리고 일련의 자치기구들을 스스로 정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 했음. 이런 것들이 나중에 가면 결국 봉건적 농촌의 법과 규범들을 대체하게 됨.

- 유랑상인의 출현과 도시의 발흥은 중세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서서히 진화해나오는 양대 요인이었음. 그리고 세번째 요인은 십자군 전쟁이었음. 십자군 전쟁은 유럽을 엄청 비옥하게 만드는 경험이었음. 토지에 기초한 예전형태의 부는 이제 새로운 화폐적 기초와 맞닿게 되고, 이 새로운 부의 기초가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이 입증됨. 더 부유할 뿐만 아니라 더 명랑하고 활기넘치는 문명의 존재를 흘끗 보는 것만으로도 예전의 삶의 관념 자체가 완전히 바뀌지 않을 수 없었음. 십자군 전쟁은 타성에 빠져 정체되어 있는 사회를 흔들어놓음으로써 유럽의 경제적 전환 속도를 올리는 데 엄청난 역할을 했음.

- 경제생활이 서서히 상업화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은 조각조각 나쥐어 있던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단위들이 조금씩 큰 덩어리로 합쳐지게 되었다는 것. 중세의 중기와 후기동안 내부적으로 통일된 시장을 가질 수 있었던 나라는 오직 영국 뿐이었음. 이는 영국이 최초의 거대한 유럽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르는 데 크게 기여. 군주와 부르주아들은 함께 힘을 합쳐 중앙집권정부를 서서히 키워나감. 정부가 중앙집권화되면서 법률과 통화가 통일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업과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직접적 자극도 마찬가지로 주어짐. 다른 영역에서도 국가권력이 증대됨에 따라 새로운 자극이 주어졌으니, 해군도 창설되고, 군대는 새로운 장비를 갖추어야 했고, 이 새로운 국가의 군대에 봉급을 주어야 했음. 이 모두가 화폐 유통의 펌프를 더욱 힘차게 눌러댐

- 정치권력이 서서히 공고해짐에 따라 생겨난 또 하나의 경제적 동력은 미지의 땅에 대한 탐험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장려한 것이었음.

- 종교적 분위기의 변화. 그 사람의 일과 그 사람의 가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태도가 나오게 되면 곧이어 어떤 사림이 큰 성공을 거둘수록 그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라나게 됨. 칼뱅주의는 카톨릭과는 반대로 부의 추구와 영리적 세계의 기질을 적극 장려하는 종교적 분위기를 깔아줌.

- 프로테스탄트 윤리. 칼뱅주의는 경제생활의 한 특정 측면을 크게 장려했는데, 그 측면은 지금까지 누구도 듣도보도 못했던, 검약이라는 것이었음. 소득을 마음껏 써버리고 즐기지 않고 이를 의식적으로 삼가는 미덕이 바로 저축. 또 투자라는 것도 있었음. 저축을 생산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투자야 말로 이윤의 도구일뿐만 아니라 종교적 경건함을 실천하는 도구라는 것이었음. 비록 다양한 전제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심지어 이자지불까지도 너그러이 보아줌. 사실상 칼뱅주의는 경제생활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낳음. 예전에는 분수를 알고 지킴으로써 사회적 경제적 안정성을 갖는 것이 이상이었지만 칼뱅주의는 경제적 성장, 물질적 개선 및 이를 위한 투쟁 등의 이상을 존경할만한 것으로 만듬.

- 장원체제의 붕괴. 예전에 현물로 지불되던 중세적 공납이 이제 서서히 화폐조세와 화폐지대로 바뀌어감. 그 이유는 첫째, 도시인구가 불어나면서 그 식량수요가 늘었기 때문. 예전 봉건제에서 영주가 거두어들이던 여러 봉납은 이제 고정된 액수의 화폐지불로 전환되는 것이 다반사가 됨. 이는 일시적으로 영주들의 현금사정을 좋게 해주었지만 곧 인플레가 닥치면서 영주들을 지독히 쩔쩔매게 만듬. 물가가 오르고 화폐화된 생활방식이 더욱더 확장되어감에 따라 영주의 현금지불능력도 바닥남. 게다가 귀족들은 자기들 토지의 경영자들로서는 영 실격인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적 쇠퇴의 과정은 훨씬 가속화됨.

 

- 경제학적으로보면 울타리치기 운동은 환영할만한 것임에 틀림없음. 그전에는 아주 조금밖에 소출이 나오지 않던 땅을 이제 생산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니까. 사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에 울타리치기야말로 영국이 농업을 합리화하여 마침내 전통적 장원의 지조체제의 비효율성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수단이었음. 하지만 잔혹한 측면도 있었음. 공유지에 울타리가 쳐지면서 소작인들이 살아가기가 훨씬 힘들어짐. 울타리치기 과정은 봉건적 유대가 해체되고 시장사회라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강력한 동력을 제공. 농민들을 알거지로 만들어버림으로서 새로운 종류의 노동력이 창출됨.

- 시장경제 이전에는 노동, 토지, 자본은 모두 노예와 농노 혹은 영주와 길드 장인이라는 존재 속에 서로 불가분하게 뒤엉켜 있었으며 일정한 가격에 제공되는 특정한 경제적 기능의 체현물 따위로서 제각각 생산과정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음. 노예는 노동자가 아니었고, 길드장인은 자본가가 아니었으며, 영주는 지주가 아니었음. 노동이 판매되고 토지가 임대되고 자본이 자유로이 투자되는 세상으로 사회체제가 진화한 뒤에야 비로소 경제학의 여러 범주들이 나타나게 됨.

4. 산업혁명

- 산업혁명은 본래 유럽대륙이 아니라 영국에서 벌어졌을까? 어째서 핀 공장이 스미스의 관심을 끌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18세기 영국이 당시 대부분의 유럽나라들과 확연이 구분되는 요인을 살펴보아야 함

(1) 영국이 더 부유했음. 한세기에 걸쳐 해외탐험, 노예무역, 해적질, 전쟁, 상업 등에 성공을 거두면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됨. 더욱 중요한 것은 영국의 부가 소수의 귀족들에게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상업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대규모의 중상류층에게도 돌아갔다는 점.

(2) 봉건사회가 가장 철저하고 가장 성공적으로 상업사회로 전환됨. 영국에서는 귀족계급이 일찍이 상업과 좋은 관계를 맺은 바 있음. 비록 옛날의 토지권력과 새로운 화폐권력 사이에 날카로운 이해상충도 남아 있었지만, 1700년경이 되면 영국의 지배질서는 시장경제의 여러 요구에 저항이 아닌 적응의 길을 돌이킬 수 없도록 선택하게 됨.

(3) 유독 과학과 공학에 대해 열광.

- 산업의 혁신기업가는 영국에서 그 이전부터 벌어졌던 독특한 경제적 준비 운동의 산물이었음. 물론 이들은 당대에 벌어졌던 수요의 팽창과 기술에 대한 갈증에서 혜택을 본 이들이었음.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이들을 볼 필요가 있음. 이 소규모 제조업자들 중 다수가 원래는 소토지 소유자였다가 울타리치기의 후반기 동안 땅뙈기를 팔아서 그 얼마되지 않는 자본을 제조업이라는 전망좋은 영역에 사용하기로 결심한 이들이었음.

- 초기자본주의 시대가 어마어마한 사회적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음. 하지만 산업자본주의의 탄생기를 회고할적에 명심해야할 몇가지 사실들이 있음

(1) 산업혁명의 빈곤상이 대중의 삶이 전반적으로 악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인지는 의문

(2) 초기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당대의 가혹한 비판은 경제학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환경에서 도출된 것임. 자본주의의 발흥과 동시에 정치비판의 관점에도 근본적 변화가 생겼고 또 이것이 자본주의의 탄생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음. 민주주의, 사회정의, 개인의 권리와 같은 새로운 사상이 태어나면서 당시는 비판적 사고가 충만한 때였고 따라서 그 어떤 경제체제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음.

(3) 산업혁명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장기적으로 경제적 안녕을 증진시켰다는 점.

- 영국에서는 또한 기존 경제체제의 인간적 노력의 일부를 자본축적의 용도로 돌리기 위해 노동자 계급의 소비수준을 아래로 묶어 놓아야 했음. 역사적 사실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아래로 묶어두기는 주로 시장의 압력을 통해 성취되었음. 물론 이러한 시장의 압력은 자유주의의 공세로 지원되었고, 이는 자본가들로부터 나왔거나, 또 상층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잽싸게 가로막고 나온 정부로부터 나왔던 것이 사실임. 하지만 사회적 불공평의 쟁점을 잠깐만 제쳐두자. 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아주 크게 올랐다면 소비재에 대한 수요도 크게 늘면서 결국 영국경제의 자원이 자본형성이 아니라 그러한 소비재 수요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돌려졌을 거라는 점은 엄연한 사실임. 이렇게 되었더라면 분명 영국 노동자들의 당장의 복지는 개선되었을 것. 하지만 사회전체의 생산력이 아주 큰 규모의 총산출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지체되었을 것임.

- 개도국은 어던 시점에서는 저축을 시작해야 함. 그 나라가 아직 가난하더라도 어쩔 수 없음.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빅토리아 시절의 영국에서 만났던 성장 초기 단계의 힘든 순간인데, 불행하게도 마르크스는 이러한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음. 어떤 경제에서이건 이는 어려운 국면이며, 그래서 대부분의 사회는 천재지면과 같은 비상한 힘을 빌려서 겨우 이 단계를 통과하게 됨. 맨체스터로 이주한 영국 노동자들에게 그 누구도 저축하기를 원하느냐고 묻지 않았음.....원시 스텝지역을 떠나 스베르들로프스크나 마그니토고르스크로 온 소련의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노동조건이나 임금에 대해 아무 발언권이 없었음. 오늘날 중국의 향진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임. (바버라 워드, 인도과 서구)

- 18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처음에는 영국 그다음엔 미국을 산업발전의 장거리 비행으로 들어올렸던 자본축적의 광대한 과정을 돌아볼 때, 그것을 추동했던 힘은 자연의 새로운 측면들에 대한 인간의 통제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열어준 일련의 발명품들과 혁신들이었음. 산업과학의 대약진이 이루어져 증기기관, 저렴하고도 효율적인 방직/방적기계, 철, 나중에는 강철등의 대량생산이 최초로 가능해졌고 이런 것들이 엄청난 자본축적의 길을 열어주었음. 이 위대한 발명들이 일단 진보의 앞길을 먼저 뚫어놓으면 2차적 개선과 보조적 발명들이 그 뒤를 따라 벌어지면서 또 중요한 지지의 역할을 맡았음. 비용절감을 가져올 혁신을 이룬 기업가에게는 시자엥서의 비용우위 그리고 그에 따른 높은 이윤이라는 상이 돌아갔음.

5. 산업기술이 가져온 충격

- 엄청난 규모의 자본구조를 가진 대기업들이 출현한면서 목줄끊기 경쟁이 벌어졌고 이는 관련된 기업들에게 위험한 것이었음. 따라서 기업합동, 트러스트, 지주회사, 합병 등의 수단을 통해 경쟁적 투쟁을 안정화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벌어짐. 거대 트러스트들과 기업 합동체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정치적으로는 반트러스트 입법이라는 댛아의 노력이 벌어졌고, 이는 셔면 반트러스트법(1890년) 그리고 나중에 클레이튼 반트러스트법(1914)과 합병을 더 어렵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몇가지 후속 수정조치들에서 절정을 이룸. 하지만 이러한 법들중 어떤 것도 대기업의 내적 성장을 가로막거나 금지할 수는 없었음. 그 결과 대기업들은 계속하여 팽창. 1933년 벌리와 민스의 유명한 연구는 만약 상위 200대 비금융 주식회사들의 성장률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전체 미국 경제가 그들의 소유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

- 19세기 후반동안 미국에서 변화를 추동한 행위자들은 그보다 1세기전 산업세계에 나타났던 선조들의 직계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음. 타우시그와 같은 경제사가들은 19세기 후반 선도적 기업가들의 경력을 조사하여, 평균적으로 당시의 혁신 기업가들은 가난하지만 근면성실한 이민 2세 따위가 아니라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이고 때로는 성공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이들임을 밝힘.

6. 대공황

- 대공황이 도래하면서 장기적 성장추세가 재난에 가까운 중지를 맞게 되었고, 이는 거의 10년간 지속됨. 대공황의 원인은 여러가지임

(1) 신용구조가 투기적이고 또 기반이 취약하였고, 여기에 29년 주식시장 폭락과 부적절한 통화정책이 겹치면서 붕괴

(2) 농촌의 구매력이 계속 악화되었고 농업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비탄력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심각해짐

(3) 기술적 실업의 역류가 상당하였음

(4) 소득분배가 좋지 못했고 갈수록 악화됨

- 이러한 원인들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엄청난 규모의 자본형성 붕괴가 나타남

7. 공공부문의 성장

8. 유럽에 현대 자본주의가 출현하다

- 미국의 자본주의는 새롭고도 강력한 기반위에 세워졌고 시작부터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체제였음. 그런데 유럽의 자본주의는 봉건적 기초위에 세워졌으며 뼛속까지 계급갈등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었음. 미국 자본주의는 하층 신분들의 충성스런 지지를 얻어내는 데 아무런 노력도 들일 필요가 없었음. 하지만 유럽의 하층 신분들은 1848년 혁명이 벌어질 당시 이미 자본주의가 자신들의 희망과 신념을 실현해 줄 것이라는 희망에 등을 돌려버림.

- 유럽의 경제적 후진성을 극복하려는 많은 시도들 중 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관세장벽이 없는 공동시장의 창출로서, 이는 유럽을 현대화하고 통일시키는 돌파구가 됨. 이러한 조치들이 합쳐지면서 유럽의 경제성장과 복지가 괄목할만큼 다시 살아나게 됨. 유럽자본주의는 소련몰락 이후로 코포라티즘적인 방향으로 움직임. 경영-노동협정(사회적 협약)을 맺을 뿐 아니라 에어버스 및 여타 공공-민간 사업체들에서 보듯이 정부와 재계가 민관 공동투자에 나서는 것을 장려. 이러한 조치들은 처음에는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지금은 일정한 의문에 처해있음.

9. 자본주의의 황금시대

- 전후 호황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는 여러 요인들이 복잡하게 결합된 것임. 부분적으로는, 국제적 차원에서 전후 호황에 유리한 여러 발전이 있었음. 그 첫번째는 여러 나라들의 경제정책을 서로 조율하기 위한 노력이 역사상 처음으로 확립되었다는 거. 여기에 IMF, 세계은행, 브레턴우즈 협정 등이 확립된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 IMF는 전쟁으로 무너진 유럽 각국을 원조하는 것이었고, 세계은행은 개도국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고, 브레턴우즈 협정은 안정된 환율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음. 여기에 GATT와 마샬 플랜이 합쳐지게 되면서, 자본주의 황금시대를 떠받치는 강력한 군사적-정치적 원동력을 제공.

- 자본주의 황금시대가 이렇게 냉전이라는 국제적 환경에서 강력한 추동력을 얻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핵심을 보자면 역시 각국 국내경제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또 유지되었던 호황이라고 보아야 함. 첫째는 미국 경제가 방대한 수요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이것이 시장의 재화를 흡수할 수 있었다는 것. 미국인들은 전쟁기간 동안 높은 소득을 벌어들인 바 있었고, 또 전쟁이 끝나자 자동차, 주택, 새로 발명된 텔레비전 같은 소비재들에 굶주려 있는 상태였음. 둘째, 2차대전 기간 중 새로이 발명된 기술과 신제품들이 또한 추동력을 제공하였으니, 새로운 대중 교통수단이자 관광업이라는 신규산업을 창출한 항공기술이 그 예임. 그밖에 임금을 생산성 향상과 연계시킨 새로운 단체협상이나 정부 역할의 확장 등을 들 수 있음.

10. 황금시대, 종말을 고하다

- 70년대가 되면 근본적 제도에 변화가 있었음. 그래서 사람들이 인플레로 인해 굳이 허리띠를 졸래매기 위한 몸부림을 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들이 존재했음. 새로운 소득 부양 체제(사회보장제도, 실업보험, 은행 예금자 보험, 임금계약에 내재되어 있는 생활비 산정체제 등)가 있었기에 예전처럼 갑자기 물가가 상승한다고 해서 소비자 지출도 확 줄어들지 않았던 것. 이렇게 30년대처럼 공황에 취약했던 자본주의가 이제 경기침체에 저항력을 갖는 황금시대의 자본주의로 넘어가면서 인플레에 대한 취약성도 함께 증가한다는 예기치 못한 효과가 생겨난 것.

- 불평등 문제의 아홉가지 용의자들(배리 블루스톤)

(1) 기술변화로 인해 숙련된 노동자들이 프리미엄을 얻게 된 반면 숙련도가 덜한 노동에 대한 수요 감소

(2) 고용은 상업용 비행기 생산과 같은 고임금 부문보다는 맥도널드 햄버거와 같은 저임금 서비스 산업에 집중

(3) 트럭화물 등과 같은 많은 산업들에서 규제가 완화되면서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유입됨

(4) 노조 조직률 자체가 크게 떨어져 한때 35%에 달하던 노조 조직률이 그 3분의 1이하로 감소

(5) 기업의 인사정책 또한 장기적 고용에서 단기간의 시간제 노동자로 중심 이동

(6) 현대적 미디어의 발전으로 대중적 명성을 누리는 이들이 생겨나면서 승자독식 시장이 생겨남

(7) 그전에는 국내 노동자들이 비교적 좋은 임금을 받으며 생산하던 재화들의 시장을 이제는 외국 생산자들이 점령

(8) 지구화 현상의 여러 모순의 결절점이라 할 국제적 자본 이동 또한 거의 똑같은 결과를 낳음

(9)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저임금 직종을 놓고 경쟁하는 노동공급이 늘어남

- 여기에 가난한 이들의 소득을 부양하는 데 적극적 원천이던 정부가 후퇴함

- 황금시대는 70년대 종언을 고했으며, 이는 어느하나가 아니라 여러 변화들 때문에 빚어진 결과. 이러한 파괴적 사태발전의 시작은 인플레였음. 67년 생계비의 상승률은 2.9%였는데, 7년이 지나자 11%로 뛰어오름. 최초에 점차 인플레가 나타났던 원인은 아마도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기간 동안 군비지출이 늘어났던 압력이었을 것임. 하지만 그후 인플레가 폭발하게 된 것은 오펙 카르텔이 두번에 걸쳐 석유수출 봉쇄를 단행했던 오일쇼크에 기인하는 것이었으니, 이로 인해 73년에는 가솔린 가격이 3배로 뛰었고 79년에도 같은 일이 벌어짐. 물가의 상승과 경제약화가 결합되면서 강력한 경제성장이 사라지고 스태그플레이션이 등장.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 케인즈적 경제 체제의 적실성이 의문에 처하게 되고 인플레와 싸울 주된 무기로서 통화권력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 미국에서 통화권력을 행사했던 것은 연준이었는데, 이는 그 산하의 은행들에 대한 금리를 인상함. 그 결과 호황은 침체로 바뀌었지만 통제를 벗어나던 인플레는 종식됨. 비록 연준의 정책이 효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경제가 언제 인플레로 빠져들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 이후로 유령처럼 떠돌게 됨.

11. 사회주의의 발흥과 몰락

- 영국에서 성인남성들의 보편선거권이 1860년대 말과 1870년대까지 주어지지 않았음. 한 역사가는 이렇게 말함. "만약 참정권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졌다면 산업혁명이라는 과업이 가능했을지가 심히 의심스럽다. 우리가 오늘날 향유하고 있는 거대한 양의 자본 총량은 우리 아버지 세대의 노동자들의 형편없는 저임금을 감수한 결과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더 의심스럽다."

12. 경제생활의 지구화

-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는 미국내의 여러 이유에서 벌어진 일이며 무슨 외부충격의 결과 따위로 벌어진 것이 아님. 이 체제의 규칙들은 대개 미국이 기획한 것이었는데, 미국 스스로가 그 규칙들(특히 스스로의 대외적자를 통제하고 달러 저하로 인한 금 유출 사태를 막겠다는)을 준수할 능력도 의사도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붕괴한 것임.

13. 어째서 어떤 나라들은 여전히 가난한가

14. 정보기반 시장사회의 형성

- 디지털 기술이 새로운 것이며 지구화와 새로운 생산물과 새로운 생산과정을 촉발시킨 것은 사실임. 또 그것이 생활방식에 가져온 결과들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옛날 세대의 기술변화보다 더 큰 것도 사실임. 하지만 그 경제적 결과들을 보면 과거의 기술변화에 미치지 못함. 생산성 증가가 어느정도 나타났지만, 소득 불평등 또한 증가. 생산이 이루어지는 방법과 장소라는 점에서는 경제적 생산에 변화가 벌어졌지만, 그러한 생산의 지구화는 그 이전부터 이미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었음. 그리고 이 새로운 기술이 나타났다고 해서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는 자본주의 경기순환의 경향성이 해결된 것은 분명히 아님.

15. 우리가 처한 문제들, 우리에게 놓여 있는 가능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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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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