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들은 그들의 견해, 경험, 이성을 철저하고 객관적으로 조사하려는 시도를 환영 (사실 자기조사를 바라는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가 다소 지루할 때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종교인들은 누구라도 자신들의 견해를 조사하고 싶어하면 무례함, 결례, 신성모독을 예상하고 화를 버럭낸다. 나는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항변하고자 한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고대의 전통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전통은 잘못되었고 그래서 계속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그 주문은 지금 당장 깨져야 한다. 종교를 믿고 종교가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만일 그들 자신이 자신들의 신념을 현미경 아래 놓고 보기를 꺼린다면, 종교에 회의적인 우리에게 우리의 의심을 표현하지 말고 자제하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들이 옳다면, 특히 좀더 깊이 반성한 후에 그들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면, 우리 회의론자들은 그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들의 대의에 열정적으로 합류할 것이다. 우리도 그들 대부분이 원한다고 말하는 것, 즉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이 적고 모두에게 자유와 정의와 행복과 의미가 골고루 돌아가는 평화로운 세계를 원한다. 따라서 만일 그들의 길이 옳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면, 그들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해야 한다.
- 철학은 결코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종교는 결코 질문할 수 없는 답들이다
- 통념으로 전해오는 거짓들과 신화들이 때때로 무한정 살아남는 이유는, 금기가 그에 대한 폭로 자체를 무섭거나 어색하게 만들기 때문. 말도 안되는 공통의 가정이 여러 해 또는 심지어 여러 세기 동안 허공에 떠다니며 살아남을 수 있는 까닭은, 다른 누군가 그것을 유지할 매우 분명한 이유를 알고 있다고 각 사람이 추측하고 그래서 아무도 그에 도전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과학은 종교가 하는 일을 대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하는 일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 어떤 훌륭한 것들(식물, 동물, 악기)은 분해를 하면 종종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지만 다른 훌륭한 것들(시, 교향곡, 이론, 사법제도)은 비록 힘들더라도 분석을 하면 오히려 발전을 하고, 더 나아가 식물, 동물, 악기의 경우에도 몇몇 표본을 해부하면 다른 동식물과 악기들에게 그 이익이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음. 수백년에 걸친 그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학적 연구 때문에 어떤 가치있는 현상이 파괴되거나 심하게 손상을 입은 사례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 내가 킨제이와 매스터스, 존슨의 선구적 연구가 제공한 지식은 섹스를 파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섹스를 더 좋게 만들었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의 비교에 달려들어, 종교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선언할 것이다. 즉 킨제이등이 섹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가르친 것처럼 과학적 탐구도 종교에 대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 만일 수치심 없이 자위하는 것, 동성애를 용인하는 것, 여성이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방법을 더 많이 아는 것 등이 과학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이익이라면, 그것은 과학에 오히려 안 좋은 일이다. 섹스를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어떤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과학은 포르노와 타락의 폭발적 유행에 기여하고 부부의 신성한 교합을 더럽혔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모르는 편이 나으며, 이 더러운 정보로부터 우리 자녀들은 보호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 한 개인으로서 나는 당신의 신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오만함,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믿는 당신의 비이성적 확신이 소름끼칠 뿐이다. 나는 과연 종말론을 믿느 어느 신자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을만한 용기와 지적인 정직함을 갖고 있을지 의심스럽다
-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산타클로스의 진실을 깨우치는 것은 조금도 해롭지 않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산타클로서 신화가 여전히 매력을 발산하는 한가지 이유는, 산타를 기다리는 순수한 기븜을 더 이상 직접 경험할 수 없게 된 어른들이 아이들이 흥분하는 것을 보면서 짜릿한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 사람들은 상당한 노력과 비용을 들어 산타클로스의 신화를 지속시킨다. 무엇때문에 그럴까? 잃어버린 유년의 순수함을 되찾으려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베푸는 관대함보다 그들 자신의 만족에 더 직접적으로 이끌리는 것일까? 사회적 면죄부가 주어지는 공모의 쾌감(예컨대 간통, 횡령, 탈세 등을 공모할 때 느끼는 죄의식 없는 순수한 쾌감)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많은 비용을 지출할 정도로 짜릿한가?
- 공진화는 식물과 동물의 거래를 승인했고, 우리 조상들에게 달콤함으로 당을 식별하는 능력을 키워주었다. 다시 말해 진화는 동물에게 입안으로 들어가는 먹거리에 고에너지 당이 농축되어 있으면 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별한 수용체를 선사. 거칠게 표현하면 그 수용체 분자를 탐색장치에 영구적으로 배선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것들이 달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거꾸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 즉, 어떤 것들이 단 것은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함.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그런 배선을 가진 우리 조상들이 조금 더 불안한 배선을 가진 동료들보다 번식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었기 때문. 당 분자는 본질적으로 단(이것이 무얼 의미하든) 것이 아니다. 당 분자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유기체들에게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고, 그래서 진화가 유기체들에게 특수한 고에너지 탐지기를 간질이는 것들에 반응하는 선천적이고 강력한 선호성향을 부여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단 음식을 좋아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일반적으로 달면 달수록 좋다.
- 변호사들은 '쿠이 보노' 라는 라틴어 표현을 흔히 쓴다. '이것은 누구에게 이익인가?'라는 의미. 법률보다는 진화생물학에서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다. 생물계에서 외관상 기능성을 초과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무엇이든 설명을 요구한다. 이유없는 지출은 한마디로 비경제적이고 경제학자들이 끊임없이 이르는 것처럼 공짜 점심 같은 건 없기에, 그때마다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놓치고 있을 거라는 의심에 사로잡힌다.
- 화폐가 특정한 발명가나 저작권자가 없는 유일한 문화적 발명품인 것은 아님. 언어나 음악 역시 아무도 발명한 사람이 없다. 동전과 지폐 형태로 발행되는 화폐의 옛 이름이 species와 어원이 같은 정화(specie)라는 사실은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정화의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는 가까운 미래에 약해질 수 있고 신용카드를 비롯한 전자식 자금이동 수단의 여파로 소멸할 수 있음. 바이러스처럼 정화도 홀가분하게 여행한다. 정화는 자신의 번식 장치를 지니고 다니기보다는 기주생물인 우리에게 의존.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값비싼 번식장치(인쇄기, 타출기, 형판)를 만들고 그 장치로 그들의 사본을 만들게 한다. 개별적인 동전과 지폐는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짐.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만들고 채워넣지 않으면 화폐체계는 소멸할 수 있음. 그러나 화폐는 좋은 비결이기 때문에, 소멸하는 정화가 생태적소를 비우면 다른 종의 화폐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시체는 질병의 잠재요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체와 거리를 두는 강한 보상성 혐오 메커니즘을 진화시켰다. 갈망이 앞으로 당기고 혐오가 뒤로 미는 와중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 앞에서 혼란스러움을 겪는다. 이 위기가 모든 곳에서 종교의 탄생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매우 당연한 추측. 보이어가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시체에 대해 어떤 일을 했을 것이고, 그것은 독재자처럼 막강한 힘을 가진 두 선천적 충동을 충족시키거나 가라앉히는 어떤 일이었다. 모든 곳에서 진화한 것으로 보이는 것, 즉 절망적 상황을 처리하기 위한 좋은 비결은 매장이나 화장으로 위험한 시체를 일상적 환경에서 제거하는 공들인 의식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죽은 자를 보이지 않는 행위자(혼령 즉 생존자들의 혼란스런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거의 살아 있는 개인만큼이나 생생하고 확실한 가상적 개인)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끈질긴 지향적 해석이 결합했다.
- 언어는 현재 우리의 감각에 와닿지 않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힘, 자칫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는 주제들을 깊이 생각하는 힘을 우리엑 주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아 있지만 우리 곁에 없는 자들과, 사라져지만 잊히지 않고 있는 죽은 자들 중 우리에게 특별히 중요한 행위자들이 거주하는 가상의 세계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가상의 행위자들이 거주하는 가상의 세계의 집중하게 되었다. 이 가상의 행위자들은 현실 세계에서 실제적인 만남을 통해 비현실적인 모습이 올바로 수정되는 압력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에서 자유롭게 진화해 인간의 갈망이나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없으면 더 보고 싶거나 더 두려워짐. 사실 없는 사람이 무서운 법이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을 종교로 이끈 것은 아니지만,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고습관을 꾸준히, 더 나아가 집요하게 연습하고 가다듬게 만들었을 것이다
- 생물학적 사고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선사시대를 거꾸로 추정할 때 우리는 언어가 출현한 것과 똑같이 민속종교도 의식적, 의도적 설계 없이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 의존적 과정을 통해 출현했을 것으로 추측하게 된다. 신에 대한 믿음의 근저에는 민감한 상황에 대한 본능이 놓여 있다. 움직이는 모든 복잡한 것을 행위 (믿음과 욕망, 그리고 그 밖의 정신상태들)의 원천으로 취급하는 성향이 놓여 있는 것이다. 활동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행위자를 찾으려는 우리의 과잉 성향이 울리는 잘못된 경보들이 바로 종교라는 진주를 키우는 자극물이다. 그중 단지 가장 훌륭하고 정신에 가장 친화적 형태들만이 깊은 심리적,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또는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임으로써) 증식에 성공하고, 그런 다음 끝없이 가지를 치는 선택과정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 전지의 개념, 즉 신은 당신의 자동차 키가 어디에 있는지, 1000조보다 작은 수 중 가장 큰 소수가 무엇인지, 바닷가의 모래알이 모두 몇 개인지를 포함해,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모든 것을 안다는 개념은 나중에 출현한 묘안이고 신학자들이 훨씬 최근에 채택한 작은 지적 세련 또는 지적 치장이라는 것이 보이어의 주장이다. 약간의 실험적 증거가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사람들은 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그래서 그렇다고 맹세하지만, 신에 대해 자의식을 배제하고 사고할 때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신학적 옳음을 걱정하지 않을 때 실제로 의존하는 근본적 생각은, 조상들이나 신들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안다는 것, 즉 은밀한 갈망과 음모와 근심과 죄책감을 안다는 것이다. 속담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들은 모든 시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를 안다
- 만일 당신이 채임을 떠넘기려 한다면,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에게 책임을 떠넘겨라. 그러면 상황이 나빠질 때 그것이 책임을 질 것이다. 그리고 적응형태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 합리적 근거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제인스가 생각 또는 의사결정의 초심리적 수단이라 부른 점이 생겨난 것은 단지 우연히 점을 친 사람들이 그 결과를 좋아해 반복해서 점을 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모방해 결국 아무도 왜 그것을 하는지 모른 채 행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줄리안 제인스가 제기한 그럴듯한 주장 중 하나는, 외부의 결정수단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방법이 이렇게 늘어난 것은 인간집단이 더 커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들의 자기 통제가 점점 더 어려워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주장. 그리고 좀 더 최근에 크레이그 파머아 라일 스테드먼이 지적했듯이, "점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의사결정을 할 때 떠안는 책임을 줄이고 그럼으로써 나쁜 결정을 내려받을 수 있는 호된 질책을 줄인다는 것이다."
- 애초에 인간은 위약효과에 민감할까? 이것은 인간 특유의 적응형태일까, 아니면 다른 종들에게서도 식별되는 공통적 효과일까? 이것은 현재 진행중인 연구와 논쟁의 주제다. 현재 논의중인 가장 독창적 가설중 하나는 니콜라스 험프리의 경제적 자원관리 가설이다. 신체에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많은 자원이 있다. 가장 유력한 몇가지를 언급하자면, 활동을 억제하여 더 심한 부상을 막아주는 통증, 감염과 싸우는 열, 소화계에서 독성을 제거하는 구토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효과적이지만 비용이 들고, 신체가 과용하거나 미숙하게 사용하면 사실상 도움보다는 해가 됨. (전면적 면역반응은 특히 비용이 높고, 아주 건강한 동물들만이 완벽한 항체군단을 유지할 수 있다) 신체는 언제 빠른 치료를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아야 할까?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전할 때나, 혹은 도움이 임박했을 때다. 그렇지 않으면 신체로서는 값비싼 자가치료에 인색하게 구는 것이 현명할 것. 이 가설에 따르면 위약효과는 면역반응을 방출하는 방아쇠로, 신체에게 희망이 있으니 모든 면역장치를 가동시키라고 명령한다. 다른 동물들의 경우에 이 희망변수는 그 동물이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주워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에 따라 조율될 것이다.
- 종교는 어떻게 도둑정치를 지원할까? 물론 정치 지도자와 사제들의 동맹에 의해서다. 무엇보다 지도자는 신성한 인물이나 신들의 핏줄로 또는 다이아몬드의 표현을 빌리면 적어도 신들과의 직통선을 가진자로 표현됨
- 제도화된 종교는 부가 도둑 정치가들에게 이전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 외에도 중앙집권적 사회에 다른 두가지 중요한 이익을 불러옴. 첫째, 이데올로기나 종교의 공유는 혈연이 아닌 개인들이 서로를 죽이지 않고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됨. 개인들에게 혈연에 기초하지 않은 유대를 제공하기 때문. 둘째, 이데올로기나 종교의 자유는 개인들에게 타인대신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 있는(유전적 이해와 무관한)동기를 제공. 전투에서 싸우다 죽는 소수의 사회 구성원 덕분에 전체 사회는 훨씬 더 효과적으로 다른 사회를 정복하거나 공격에 저항한다
- 현대의 유신론자들은 아마도 바알과 황금송아지, 토르와 보탄, 포세이돈과 아폴로, 미트라와 아몬 라에 대해서는 자신이 사실 무신론자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인류가 믿어왔던 대부분의 신들에 대해 무신론자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신 하나를 더할 뿐이다. (악마의 사도, 리처드 도킨스)
- 정의상 유신론자는 신을 믿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무신론은 유신론의 부정이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유신론적 윤리학을 제공하려면 신은 어떤 종류의 초자연적 실재라는 생각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칭 유신론자들이 있는 한,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연구하기는 거의 불가능. 만일 신이 어떤 종류의 초자연적 실재가 아니라면, 당신이나 내가 그것을 믿는지 안 믿는지 누가 알겠는가? 셜록 홈즈, 페가수스,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마녀에 대한 믿음, 이것들은 쉬운 경우로, 세부적인 것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아주 쉽게 해결 가능. 반면 신의 경우는 오해의 안개를 헤치고 이 주제에 관한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는 직접적 방도가 전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심지어 논증을 위해서도 자신들이 슬그머니 앉혀 놓은 신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거부하는 데에는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몰이해와 불통의 안개는 엄격한 논박을 저지하는 방해물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는 종교의 설계 특성이다.
- 이제 여러분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려 하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할 것인가? 아니, 여러분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구태여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려 할까? 왜 여러분은 내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면서도 내내 그 자리에 앉아 있을까?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등을 돌리지 않도록 여러분을 설득하는 것이 내 과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물리학을 전공하는 나의 학샌들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물리학자들은 이 문제의 해결방법을 안다. 그들은 어떤 이론이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는 본질적 문제가 아님을 이해할 줄 안다. 그보다 문제는 그 이론이 실험과 일치하는 예측을 제공하느냐 못 하느냐다. 그것은 어떤 이론이 철학적으로 즐거운가, 이해하기 쉬운가, 또는 상식의 관점에서 완벽히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자연이 아주 이상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등을 돌리지 않기를 바란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길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은 마지막에 나처럼 즐거워질 것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상한 이론, 파인만)
- 상대방의 외모, 경제적 능력, 지능지수가 당신의 최소기준에 맞는다고 중얼거리면 통계적으로 옳은 말이라 해도 그 순간 낭만적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을 것이다. 상대방의 심장에 도달하는 방법은 어쩔 수 없어서 사랑에 빠졌다고 정반대로 말하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 이 입증된 또는 적어도 열정적으로 공언된 무력함은 당신이 더 이상 배우자를 쇼핑하러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고의 보증서다. 그러나 모든 신호들이 그런 것처럼 만일 당신이 서약신호를 쉽게 위조할 수 있다면 그 신호는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는 동물 신호의 영역에서 종종 그런 것처럼 값비싼 신호의 나선형 인플레이션이 될 것이다. 지갑을 털어 애인에게 선물공세를 퍼붓는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원사새의 정자도 값비싼 투자의 예이고 나방, 딱정벌레, 귀뚜라미 등의 수컷들이 결혼 예물로 주는 먹이나 물건도 그런 예에 속한다. 낭만적 사랑을 하는 우리의 진화한 능력을 종교적 밈은 이용했을까? 그것은 확실히 좋은 비결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화를 내는 것, 모든 회의주의자들을 맹렬히 공격하는 것,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거칠게 달려드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생각하게 만든다
- 실업계의 거물들이 우리는 부호 정치가가 아니므로 전문적 금융거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의 거래를 조사할 자격이 없다는 말로 얼버무리는 것을 우리는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 또한 장군들은 장군이 하는 일은 제복을 입은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시민의 감시를 피할 수 없고, 의사들도 그들의 방법과 관습을 의사가 아닌 전문가들이 자세히 조사할 수 있게 공개해야 한다. 소아성애를 겪어본 사람들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소아성애 환자들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의무를 방기하는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단지 신성함을 깊이 이해하는 신자들만이 종교적 현상을 탐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들은 사실 원칙 양쪽에서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제하려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탐구력을 잘못보고 있으며, 종교연구를 신앙인들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을 어떤 근거로든 정당화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정중하고, 확고하고, 빈번하게 이것을 말한다면, 그들은 비록 신앙의 결핍을 이유로 우리를 방해하겠지만, 결국 이 방법을 철회하고 우리의 탐구를 인정할 것이다.
- 과학자들은 다양한 종교의 역사, 의례, 교의를 연구하기 위해 정열과 상상력을 쏟아부은 것처럼 인문학의 수호자들도 열과 성을 다해 진화생물학과 인지신경학을 연구할 때에야, 그들이 두려워하는 연구에 대한 가치있는 비판자가 될 것이다. 취리히 고전학자 발터 부르케르트는 1989년 기포드 강연에서 대담하게도 동료 인문학자들에게 종교의 기원에 대한 생물학적 사고를 노출시켰고, 이로써 그는 간극을 뛰어넘어 반대편으로 진입을 시도한 최초의 인문학자가 되었다. 부르케르트는 인류학, 언어학, 사회학에 박식한 고대 종교역사가로, 진화생물학이 자신의 이론화 작업에 기초가 될 것을 확신하고서 진화생물학을 공부. 그의 저서 '신성함의 창조: 초기 종교에 남은 생물학의 흔적들'을 읽을 때 느끼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역사적 통찰이 빛나는 그의 보석 같은 수집물이 생물학적 질문의 맥락에 놓였을 때 얼마나 가치 있는 것으로 판명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당황스러운 것은 그가 이 두려운 생물학적 개념들을 인문학의 세계에 소개할 때 동료 인문학자들의 민감한 촉수를 피해 얼마나 조심스레 발끝으로 걷는지를 보는 것이다.
- 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내 생각에 여호와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능과 위대함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정말로 노여워할 것이다. 구약이 여러 이야기에서 여호와를 그렇게 매력적인 관여자로 만드는 것은 그의 제왕다운 질투와 자존심, 찬사와 제물에 대한 엄청난 욕구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을 넘어섰다. 우리 진화론자들이 자연선택의 산물이라 생각하는 이 모든 설계작업을 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가정하는 창조적 지성은 질투를 할 수 있는 부류의 존재는 아니지 않을까? 내가 아는 어떤 교수들은 당신이 그들의 저술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척하면 심하게 화를 낼 수도 있지만, DNA와 대사순환과 맹그로브 나무와 향유고래를 발명한 창조적 지성이 무엇 때문이며 자신의 창조물이 저작권을 인정받는지 아닌지 여부에 신경을 쓸지 의심스럽다. 열역학 제2법칙은 누군가가 자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에 신경쓰지 않고, 그래서 나는 모든 존재의 근원도 그와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자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이웃과 거래를 하러 갈 때 당당한 걸음을 보인다고 한다. 이웃 부족의 거주지까지 도보로 파견된 사자는 그 마을에 도착한 후 하루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 공식적 업무를 수행하는 데, 이는 그의 영혼이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다. 그 문화에서 영혼은 걸음이 느린 것이 분명. 많은 신자들이 대단히 인격적인 신에서 좀더 추상적이고 상상하기 어려운 신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그와 비슷한 시차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단지 본질에 불과한 신에 대해 이야기할 대에도 여전히 인격화된 언어를 사용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명백. 그렇게 해야 신에 대한 개인적 사랑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함축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 어쩌면 사람들은 어떤 법칙에게 애정이나 고마움을 느끼고서, '친절하기도 하지, 중력은 단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숭배의 적절한 대상은 말을 하고 날개가 없고 두 발로 걷는 우리와 아무리 다를지라도 개인에 속해야 한다. 개인만이 당신이 잘못 행동했을 때 실망하거나,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거나, 당신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을 계속해서 하늘의 현명한 노인으로 상상하는 신학적 오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용인될 뿐 아니라 미묘하게 장려된다.
- 종교를 도덕성의 보루로 보는 유명한 견해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천국의 보상이 좋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준다는 생각은 품위 없고 불필요하다. 종교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빠진 위선적 함정에 의해 위태로워진다. 종교적 권위가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기초를 제공한다는 생각은 진정한 세계주의적 탐구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성과 도덕적 선의 관계를 가정하는 것도 착각이다.
- 종교는 말하기보다 읽기에 가깝다. 읽을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이 발생하고, 아마 신자가 되는 것과 비슷하거나 더 큰 이익이 발생. 그러나 사람들이 종교가 제공하는 어떤 이익들과도 무관하게 종교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종교가 생존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종교는 수천년 동안 가지치기, 수정, 편집을 거치면서 그 과정에서 수백만개의 변이체를 낳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많은 특징들, 바로 그 특징들을 위한 제조법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많은 특징들, 적과 경쟁자를 피하거나 물리치고 충성을 확보하는 많은 특징들을 가짐. 사람들은 단지 점차적으로 그 특징들의 이유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종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의미. 어떤 사람들에게 종교적 밈은 상리공생자이고, 다른 곳에서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종류의 부인할 수 없는 이익을 제공함. 우리 모두 음식을 소화시킬 때 장내 박테리아에 의존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위해 종교에 의존함. 종교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한 동기적 조직을 제공하고, 사회정의, 교육, 정치활동, 경제개혁 등을 위해 일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적 밈은 좀 더 유독하고, 그들의 심리의 덜 쾌적한 측면들을 이용하며, 죄의식, 외로움, 자기존중과 중요성에 대한 갈망 등을 이용한다. 종교의 많은 측면들을 포괄적으로 볼 수 있는 견해를 세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미래의 종교에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확고한 정책을 공식화할 수 있다.
- 신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고 믿는 것이지 (마크 트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