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디에 대해 말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지면서 역사적 사실처럼 애호가들을 매료시켰다. 비록 칼디가 우리를 관능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커피의 향미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칼디의 존재 덕분에 커피 마시는 자리의 이야깃거리는 더욱 풍성해짐. 이야기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버전으로 전해지는 칼디의 이야기의 허점을 파고들면 한두가지가 아니다. 칼디를 양치기라 해놓고는 커피체리를 먹고 춤추는 염소를 보았다고 말하느 모습. 2-3세기의 일이라면서 칼디가 이슬람 수도승에게 커피를 전했다는 역사적 착각,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것이 610년이니, 7세기 초 이전에는 이슬람 수도승이 있을 수 없다.
- 우리도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 1896년 아관파천 때라면서 고종황제에게 융드립한 커피를 제공하는 어느 영화속 한 장면은 커피 애호가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커피를 필터링해 마시는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인 1908년 독일의 멜리타 벤츠가 도구를 만듦으로써 가능해졌다. 어쨌든 아랍의 적지 않은 역사학자가 자신들의 논문이나 저서에 칼디를 예멘의 목동이라 기록하고 있다.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커피가 자랑스런 이슬람의 문화라는 논리를 완성하려면 커피의 기원 역시 이슬람 국가 어느 곳이 필요했을 것. 그러나 진실은 세월이 드러내준다. DNA분석을 통해 커피나무의 기원이 예멘이 아니라 에티오피아 고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이야기는 힘을 잃었음. 지금 이 순간에도 에티오피아 고원에서는 재래종 커피나무가 속속 발견됨. 커피의 기원지라 말하려면 이처럼 원종이 있어야 설득력을 지님
- 에티오피아인들은 왜 커피의 기원에 대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걸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야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퍼트리지 못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4대 커피 기원설 중 칼디, 셰이크 오마르, 마호메트의 전설은 커피의 각성효과를 토대로 이슬람에서 만든 이야기라보 본다. 나머지 하나인 에티오피아 기원설은 각성효과가 아니라 에너지 원천으로서의 커피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로 흐른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유래설은 기록이 아니라 구전인 탓에 생명력을 지니기에는 부족했음. 커피의 기원에 대한 인류의 첫 기록은 이탈리아 로마대학 언어학 교수 안토이 파우스투스 나이론이 1671년에 쓴 '잠들지 않는 수도원'이다. 이 책에 '이슬람 수도승이 칼디가 준 커피열매의 쓰임새를 몰라 불에 던졌는데, 기분 좋은 향이 나자 볶은 콩을 갈아 따뜻한 물에 타서 먹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때 이미 커피씨를 볶아 먹는 단계를 깨우쳤다는 말인데, 비약이 이 정도면 대단한 이야기꾼임이 분명하다. 이 이야기는 22년 커피의 기원을 심도있게 추적한 윌리엄 우커스의 '올 어바웃 커피'에 인용되면서 정설처럼 되었다. 반면 에티오피아 기원설은 "커피나무 열매를 다른 곡류와 함께 갈아 식량으로 먹었다"는 기록 말고는 별 재미가 없다. 그렇다 보니 칼디나 셰이크 오마르, 심지어 지극히 종교적인 마호메트 기원설보다 파급력이 떨어졌음. 하지만 에티오피아 기원설은 뿌리가 더 깊고 이야깃거리도 풍성함. 커피 그 자체에 대한 첫 기록은 안토니 파우스투스 나이론보다 770년 이상 앞선 기원후 900년쯤 페르시아의 의사 라제스가 남겼다. 그는 커피를 분첨이라 적었는데, 따뜻하면서도 독한, 그러나 위장에 유익한 음료라고 표현. 이어 1000년 쯤 무슬림 의사이자 철학자인 이븐 시나는 커피나무와 생두를 분, 그 음료를 분첨이라 구별해 적으면서도 약리효고도 기술. 두 사람의 기록은 커피의 기원지가 에티오피아임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지구상 어디를 뒤져도 커피를 분나, 부나, 분, 분첨이라 부르는 곳은 에티오피아밖에 없다. 커피 원산지로 꼽히는 에티오피아의 카파에서는 지금도 커피를 지칭할 때 c나 k는 발음조차 하지 않느다. 에티오피아인들이 스토리텔링을 잘했다면 오늘날 분첨으로 불렸을지도 모름
- 에티오피아에 소를 키우며 사는 오모로족이 있다. 오모로족은 힘이 있는자를 의미하는데, 에티오피아 인구의 35% 가량을 차지. 갈라족이라고도 불렸는데, 갈라는 '미지의 사람들'이라는 부정적 느낌을 주는 바람에 점차 그 말이 사라졌음.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가 오로미아주의 법률상 주도다. 유목민인 이들은 자주 이동해야 했기에 간편하게 지니고 다니며 먹을 수 있는 것을 잘 만들었다. 그러던 중 체리처럼 빨간 열매를 씹으면 힘이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매를 통째로 먹다가 그것의 에너지가 씨앗에 농축되어 있음을 깨닫고, 오랜 세월을 거쳐 열매를 동물성 기름과 섞어 볶아 당구공 또는 골프공만하게 뭉쳐 갖고 다니며 힘을 써야 할 때 꺼내먹었음. 이 방법은 여러 먼에서 유용했음. 사냥을 하거나 새 주거지를 찾으려고 산속을 헤맬 때, 커피 당구공은 비상식량으로 제격이었음. 입에 쏙 넣으면 곧 에너지가 불끈 솟아오르고 집중력도 바짝 높아지는 커피의 놀라운 능력은 다른 부족과의 전투를 앞두었을 때 더욱 요긴했다. 그 장시 에티오피아 부족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주거지를 옮겨야 했기에 부족간 마찰이 일었고, 크고 작은 전투는 부족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다. 목숨을 건 전투를 앞두고 각 부족은 커피의 각성효과를 높이는 방법을 찾기에 골몰. 전투에 앞서 커피를 마시는 성스러운 의식도 생겨났다. 의식은 커피 마시는 방법을 더욱 발전시킴. 그들은 그 효과가 씨앗에 농축되어 있음을 깨닫고 씨앗만 골라내 볶기 시작.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기분 좋은 향기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키웠고, 톡톡 터지는 커피 파핑 소리는 그들에게 승리를 약속하는 신의 응답이었다.
-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유래에 관한 멋진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지만, 에티오피아 기원설은 이슬람 문화권의 메카를 방문하는 '하지'라는 풍습에 무릎을 꿇고 만다. 당시 커피를 몸속에 넣고 죽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커피는 순식간에 전 세계 이슬람 국가에 퍼졌고, 결국 커피는 이슬람의 문화가 되었음. 그리스도 국가인 에티오피아가 커피의 원조이면서도 주도권을 잡지 못한 역사적 사실은 콘텐츠가 아무리 좋아도 유통이 약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교훈을 준다.
- 17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부의 커피를 뜻하는 아인슈패너 커피가 유행 마부들이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커피를 흘리지 않도록 생크림을 얹어 즐겼다. 훗날 비엔나 커피로 불렸는데, 이탈리아의 카페 콘 파나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 신체의 나른함을 일깨우는 커피의 각성 효과는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낸 요인의 하나로 종종 언급됨. 커피를 즐겨 마신 힌두 인물의 파워보다 커피를 마시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몽사상가들과 시민들의 교류와 공감대가 구체제(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리는 동력을 만들어냈음. 1686년 문을 연 프랑스 최초의 카페 르 프로코프는 이 점에서 온갖 사연이 깃든 곳이다.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으로 꼽히는 총 28권짜리 백과전서가 공동 편집장 드니 디드로와 장 르 롱 달랑베르에 의해 처음 기획된 장소가 이곳이고, 이후 26년 동안 백과전서가 완간될 때까지 계몽사상가들의 아지트로 활용됨. 볼테르, 루소, 빅토르 위고, 아르튀르 랭보 등이 단골이었으며, 비운의 급진주의적 혁명가 장 폴 마라를 비롯해 조르주 당통,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등 공화주의자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카페 르 프로코프의 터줏대감으로서 커피에 관한 어록을 남긴 인물로는 볼테르와 루소가 손꼽힌다. 프랑스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철학자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볼테르의 면모는 백과전서 집필 참여뿐 아니라 모차르트와의 악연에서도 드러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모차르트가 볼테르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악당의 괴수가 드디어 죽었습니다, 라는 기쁨의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냈다는 일화는 역설적으로 당시 볼테르가 지닌 사회적 무게감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 일본에서 커피 대중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1865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후가 아니라 1868년 왕정복고에 따라 메이지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보는 게 타당. 특기할 것은, 커피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유를 마시기 위해 커피를 곁들이는 데에서부터 일본의 커피 문화가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불교 전래의 영향을 받아 덴무 일왕이 675년 육식 금지령을 선포. 이 조치는 약 1200년간 지속되다가 1868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해제된다. 메이지 정부는 국민들의 작은 체구를 키우는 것도 유신의 일환이라며 육식을 적극적으로 권했던 것이다. 이때 우유와 버터의 소비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졌는데, 1000년을 넘게 고기를 먹지 않던 일본사람들로서는 우유 특유의 비린내를 극복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자 메이지 정부가 "소젖을 짜서 그 상태로 마시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면 커피를 끓여 혼합해 마시면 맛과 향기가 좋다"며 대국민 홍보전을 펼쳤다. 일본인에게는 원활한 단백질 섭취를 위해 커피가 요긴하게 쓰이면서 일상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 커피가 처음 한국에 전해진 것은 기록상으로 구한말. 이어진 일제 강점기에 일부 지식인들이 다방을 열어 계몽의식을 불어넣고자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하루 각박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커피는 부자나 특권층의 사치품으로 비칠 뿐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작지만 의미있는 커피 대중화 움직임이 일기 시작. 6/25 전쟁 대는 미군을 통해 인스턴트 커피가 물고를 텄다. 종전과 함께 커피는 서민들의 일상까지 깊이 파고들었으며, 반세기를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지칠 줄 모르고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 커피가 전해진 모든 나라에서 그랬듯, 조선 땅이 일제의 지배를 받는 와중에도 일단 발을 들여놓자 후퇴를 모르고 급속히 퍼졌다. 커피는 곧 다방을 벗어나 가정에 파고들었다. 미국의 외교관과 선교사 행렬에 섞여 들어온 커피 브랜드 맥스웰은 30년부터 전단지를 만들어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 뿌리는 등 적극적인 홍보전을 펼쳤다. 핵심 메시지는 가정에서 즐기는 커피, 맥스웰이었다. 조선인삼원은 커피를 섞은 인삼 커피를 선보였다. 물에 타 손쉽게 내놓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인삼 커피라 주부들 사이에서는 손님 접대용으로 인기를 누렸다.
- 인스턴트 커피는 1901년 일본계 미국인 과학자 사토리 가토가 착안한 발명품이지만, 인스턴트 커피가 양산된 건 거의 40년이 흐른 뒤였음. 38년 브라질에서는 커피가 과잉 생산되어 증기기관차의 땔감으로 커피생두를 사용할 정도였다. 추락하는 커피 값으로 인해 세계 시장이 요동치자 스위스 네슬레가 커피를 액체로 추출한 뒤 물을 날려 보내 가루로 만드는 방식으로 인스턴트 커피를 대량 생산
- 39년 9월 3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2차대전이 발발하고, 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참전해 전 세계는 전쟁에 휘말림. 네슬레는 미리 만들어둔 어마어마한 분량의 인스턴트 커피를 미군과 연합군에게 납품하면서 돈방석에 앉았음. 커피는 보초를 서는 군인들에게 잠을 쫓는 효과가 있었으며, 식곤증을 단숨에 날려보내는 요긴한 음료이기도 했다.
- 봉건제도와 식민잔재 등 근대의 낡은 가치를 털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분단을 고착화한 6/25 전쟁의 고통을 치러야 했다. 커피도 이 과정에서 각성과 계몽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고, 지식인과 모던 보이를 상징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한결 가벼운 행보로 대중에게 스며들었음. 일제 강점기 다방은 원두커피를 다루었기에 추출기술이 필요했다. 지식인들은 직접 커피를 내리며 즐기는 것을 격조 있는 문화행위로 존중. 그러나 해방공간과 전쟁 속에서 미군을 통해 퍼져나간 인스턴트 커피는 뜨거운 물을 붓고 설탕과 크림으로 달달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어서 기술적 장벽이 높지 않았다. 인스턴트 커피에는 다방의 대중화라는 폭발적 가능성이 잠재해 있었던 것. 50년대 초반 부산 시절의 다방은 아직 일반인에게는 문턱이 높았다. 주요 고객은 여전히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이었다. 일제강점기와 바뀐 점이 있다면 계몽과 각성이 아니라 잔잔히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전쟁의 공포에서 위안을 찾는 공간으로 애용되었다는 사실. 전장에서의 충격과 상실감, 허무함은 지식인들 사이에 염세주의를 낳았음. 이 시기, 다방에서 자살한 몇몇 유명인이 있었다. 50년 남포동 스타다방에서 시인 전봉래가 음독자살하고, 51년에는 부산 밀다원에서 시인 정운삼이 음악을 들으며 유서를 쓰고 음독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사람이 많은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 충격이 컸다. 56년에는 서울 인사동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에서 대위 계급장을 단 군인이 유서를 남기고 권총자살을 했다.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 때문. 이처럼 커피는 시대를 반영한다. 전쟁이 끝나고 1공화국이 출범한 뒤 사회가 다소 안정되자 커피는 중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림. 55년 금용도서주식회사가 편찬한 '가사교본: 요리실습서'는 커피 끓이는 법을 수록한 최초의 교과서다. 커피가 대중화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지표다. 구하기 힘든 원두커피 대신 상대적으로 값이 저렴하고 누구나 쉽게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의 유행덕분이었음. 당장의 생계문제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여유를 갖고 마시는 커피 한 잔은 혹독한 전쟁을 치러낸 국민에게 커다란 위안과 자부심이었음
- 한국 다방 역사에서 60년대는 가장 변화무쌍한 시기임. 6/25전쟁과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혼돈의 터널을 겨우 빠져나와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때다.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다방도 더는 지식인만의 전유물일 수 없었음. 대학생들에게는 시를 읊고 팝송을 듣는 문화공간으로, 대중예술인게게는 데뷔 무대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다방에서 미니 콘서트를 열며 대중문화의 불씨를 키웠다. 흔히 먹고살기 급급했던 시절로 기억되는 60년대에는 영화제작도 활발해 국민 1인당 1년에 5-6편을 본 것으로 기록된 시기이기도 하다.
- 야간 통행금지 해제는 젊은이들이 드나들던 다방에 상대적으로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들 다방은 간판을 커피숍으로 바꿔 달며 마담다방과 차별화를 시도. 이들에게 돌파구가 마련된 것ㅇ느 88년 서울 올림픽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와 적극적인 문화개방과 교류 덕분에 서구의 선진화한 커피 전문점에 대한 정보가 풍성해졌고, 인테리어를 따라 하는 이국풍의 커피숍이 증가. 이에 앞서 87년 커피수입 자유화 조치까지 시행되면서 사치품으로 묶였던 원두커피를 자유롭게 수입하는 업체가 늘었다. 88년 12월 서울 압구정파출소 앞에 문을 연 쟈뎅을 시작으로 마침내 국내에서도 원두커피 전문점 시대가 열렸다. 이는 20-30년대 지식이들이 손수 추출하던 원두커피로 귀환하는 것이자 원두커피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 71년 창립한 스타벅스 소식이 외신을 타고 국내에 전해지는 일이 잦아진 것도 이즈음. 신세계는 95년 비밀리에 미국 시애틀 스타벅스 본사로 특공대를 보내 국내 론칭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일이 마무리될 무렵, 한국에서는 외환위기 한파가 몰아치면서 스타벅스 프로젝트는 무기한 연기. 이때 시애틀로 급파되어 스타벅스의 노하루를 익힌 강훈은 신세계에 사표를 던지고 귀국했다. 스타벅스와 같은 커피전문점의 성공을 확신한 것이다. 그는 98년 6월 강남역 지하상가에 약 46제곱미터짜리 할리스 커피 매장을 오픈한다. 한국 최초의 에스프레소 전문점 할리스커피는 국내 1호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브랜드라는 기록도 세움. 할리스는 영어로 신성함을 의미하는 홀리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다. 강훈은 "할리스는 스타벅스 본사에서 일을 배울 때, 항상 웃는 얼굴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하던 여직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밝힘.
- 97년 IMF체제는 커피 생두를 볶아 파는 로스터리 카페의 탄생을 이끌었다. 고환율로 인해 원두 구입 부담이 가중되자 커피숍들은 가격이 낮은 생두를 구입한 뒤 로스팅해 파는 전략을 펼침. 한편 외환위기는 주춤하던 커피믹스 소비에 다시 불을 질렀다. 많은 회사가 구조조정으로 비서실이나 업무지원팀 인력을 줄이면서 직원들이 봉지커피를 직접 타 마시는 문화가 퍼짐. 커피믹스 시장은 2000년 2000억원에서 04년 7000억, 06년 1조원을 넘어섬. 기세는 꺾일 줄 몰라 20년 1.25조에 이어 12년에는 1.35조억을 찍음. 그러나 철옹성 같던 커피믹스 시장의 성장은 정체기에 접어들더니 13년에는 감소세(1.17조)로 돌아섬. 15년에는 마침내 9700억으로 1조원대가 무너짐. 스타벅스를 위시한 커피전문점의 영향이 컸다.
- 99년 7월 스타벅스가 이대 정문 앞에 1호점을 낸 뒤로 원두커피 붐이 일었다. 01년 커피빈티리프, 이디야커피, 탐앤탐스가 오픈했고 02년 투썸플레이스, 파스쿠치가 문을 열어따. 06년과08년에는 엔제리너스와 카페베네가 가세. 한국 다방 역사에서 2000년대는 커피전문점의 춘추전국시대로 기록됨. 마니아층에 국한되었던 원두커피 음용문화가 일반인이 즐기는 문화로 보편화산 시기이기도 함. 사람들이 다양한 원두커피 브랜드를 소비하면서, 어떤 커피 브랜드를 선택하느냐가 그 사람의 특성을 말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원두커피가 음용자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 처음에 커피는 약이었다. 기원전 에티오피아 부족들은 커피나무 잎을 씹거나 줄기 끓인 물을 마시며 에너지가 솟는 효과를 누려다. 7-8세기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로 전해딘 뒤에 커피는 무슬림 사이에서 졸지 않고 밤새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각성제로 애용되었다. 1258년 예멘의 이슬람 학자 셰이크 오마르는 커피로 병을 치료하고, 역병을 막기도 했음. 커피는 17세기 초 유럽 땅을 밟은 뒤 더 빨리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커피를 마신 사람들은 쉽게 그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카페인 때문인지를 안 건 한참 뒤였다. 1819년 독일 화학자 프리들리프 페르디난트 룽게가 커피에서 카페인을 분리. 이어 1827년에는 차에서 테인이라는 물질이 추출되었는데, 분자구조가 카페인과 일치함에 따라 카페인으로 불리게 됨. 각성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음료가 많아졌는데도 커피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커피를 일단 마시기 시작한 국가에서는 그 소비량이 줄어든 사례를 찾기 힘들다. 무어이 인류를 이토록 커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 그것은 맛이다. 와인처럼 다양한 향미를 뿜어내는 커피의 매력이 인류를 커피애호가로 꽉 묶어두고 이다. 알콜 음료가 비단 와인뿐만이 아니라 와인 마니아를 만들어내는 것과 카페인 음료가 오직 커피만이 아닌데 커피 애호가로 하여금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솓게 하는 것은 향미로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약효로 존재감을 과시하던 커피가 이제는 와인처럼 향미로 즐기는 음료의 반열에 오름. 커피가 문화적으로 격조를 높여가는 과정은 와인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르는 듯 하다. 기원전 6000년쯤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한 와인이 제각기 맛으로 평가되어 격에 맞는 대접을 받기까지는 거의 8000년이 걸렸다.
- 1855년 보르도에서는 지역내 61개 포도밭에서 나는 와인을 5개등급으로 분류해 위대한 포도밭 또는 훌륭한 포도밭을 의미하는 그랑크뤼라는 명칭을 부여. 이러한 관리와 노력이 보르도와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효과를 거두자, 보르도는 포도 재배지역을 지리적으로 좀더 명학히 나누기 시작.
- 보르도는 32년에 더 만은 와인의 품질을 평가해 그랑크뤼의 뒤를 잇는 와인 450여개를 크뤼 부르주아로 지정. 급기야 35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나서 전 지역의 와인을 등급화한 원산지 통제 명칭 '아오세(AOC)'를 실시. 와인을 품종, 재배법, 알콜 함량 등 양조기준에 따라 나누어 관리하고 품질에 따라 등급을 매긴 덕에 프랑스 와인은 더 깊은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 와인을 제티고 최고의 명성을 떨치게 됨. 세계 곳곳의 와인 마니아들은 프랑스 와인을 테루아 와인이라 부르며 한없이 신뢰했으며,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은 프랑스 와인을 즐겨 찾았다. "와인을 마시는 것은 곧 자연을 마시는 것이다." 라는 낭만적 이야기가 나온것도 이때부터다. 와인애호가들은 아름다운 꽃향과 기분을 좋게 만드는 고소한 너트향, 입안을 풍만하게 채워주는 바디감과 골격미를 느낄 때마다 그 와인을 생산한 땅과 기후를 떠올린다. 한 모금의 와인에서 피어나는 향미를 음미하고, 자연과 신에게 그리고 와인을 이토록 잘 표현해낸 재배자의 노력에 감사하는 태도는 와인 애호가들로 하여금 긍지를 갖게 하는 멋진 문화다.
- 프랑스가 아오세를 통해 와인의 품질을 성공적으로 관리해 소비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내자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도 속속 등급제를 도입. 바야흐로 이곳저곳의 와인을 뭉뚱그려 병에 담아내는 풍토는 사라지고 산지, 품종, 재배법, 품질에 따라 면밀히 따져 따로 병에 담아내는 테루아 와인의 시대가 열린 것
- 커피가 단순한 음료에서 향미를 추구하는 문화적 음료로 발전하도록 작용한 원리는 와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이야기는 1855년 보르도가 아니라 1974년 미국에서 처음 언급된 스페셜티 커피에서 시작
- 와인처럼 향미를 즐기자는 스페셜티 커피운동의 진정한 가치는 문화적 소비형태로 진화하는 데 있는 게 아님. 그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하는 바를 착실히 수행해 한 잔의 향미로 오롯이 담아내는 과정을 통해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되새기자'는 데 있다
- 브라질 커피는 종종 재나 흙의 향미를 지니면 감미롭고 부드럽기로 정평. 이 때문에 에스프레소 블렌딩의 기본재료가 됨. 브라질 커피를 넣은 블렌딩은 부드럽고 바디감과 단맛을 높여줌. 버번종과 일부 특별한 작은 밭(마이크로랏)에서 생상되는 생두를 제외하고, 브라질 커피는 콜롬비아나 중미에서 생산되는 밝은 산미의 스페셜티 커피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향미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고 브라질이 스페셜티 커피를 생산하지 않는 게 아니다. 세하두 지역에 있는 샤파당 데 페후와 세하 데 사리타는 스페셜티 커피를 즐기는 애호가들이 주목하는 산지다.
- 브라질 커피는 결점두의 수에 따라 등급이 나쥠. 커피 재배지의 해발고도가 큰 차이가 없고, 경작지마다 평균기온 역시 생두생육에 차이를 유발할 정도로 편차가 크지 않기 때문. 재배지의 환경이 이런 경우 생두의 크기나 밀도를 측정해 분류한다는 것은 차별성이 떨어짐. 이에 따라 브라질은 생두 300그램을 기준으로 상하거나 부서지는 등 흠이 있는 결점두가 4개 이하면 No.2, 12개 이하면 No.3, 26개 이하면 No.4, 46개 이하면 No.5, 86개 이하면 No.6으로 명명. 등급명에서 No.1은 없는데, 이는 커피생두에 결점두가 하나도 없을 수 없다는 판단.
- 브라질은 커피의 품질을 고급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 이를 위한 노력의 하나로 향미에 따라 커피생두의 등급을 6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품질이 좋은 것부터 strictly soft(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맛이 좋음), soft(잡맛이 없어 맛이 균형을 이루어 부드러움), softish(소프트급보다는 향미가 조금 모자람), hard(쓰고 떫은 자극적인 맛이 있음), rioy(요오드와 같은 신맛이 남), rio(쓴맛과 요오드 냄새가 강함) 등이다. 그러나 브라질 커피의 향미를 표현하는 리오는 등급이 낮은 커피를 묘사하는 결점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지방의 이름에서 따온 이 용어는 요오드 성분을 함유해 떫은 맛이 나는 커피를 묘사함. 소독냄새와 유사. 커피열매를 나무에 달린 채 건조하는 과정에서 미생물이 작용해 생성되는 향미적 특성인데, 로부스타 품종에서 잘 발생함. 그러나 북유럽의 커피 애호가 등 이 맛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재배자들이 일부러 요오드 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재배와 가공을 하기도 함. 이런 커피를 총칭해 카페 리오테라 부르기도 함
- 커피가 몸에 유익하다는 연구결과들을 종합하면, 그 성분들은 대부분 커피나무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화학물질들이다. 커피나무의 방어기제 역시 다양함. 잎과 열매 표면의 왁스층은 수막을 형성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곰팡이 포자가 발아하거나 세균이 증식할 수 없도록 함. 화학물질로는 폴리페놀이 식물들에게 보편적 방어무기다. 폴리페놀은 식물이 광합성 과정에서 당분에서 만들어내는 2차산물이다. 커피에 들어 있는 대표적 폴리페놀이 클로로겐산인데, 활성산소를 제거함으로써 인체의 노화를 방지하는 것으로 유명. 커피나무에는 쓴맛과 떫은 맛을 유발함으로써 초식동물의 공격을 물리치게 해줌. 클로로겐산 등의 폴리페놀은 또 벌레나 곤충의 소화기에서 침전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치명상을 안김. 카펭니 역시 다른 식물이 주변에 자라지 못하게 하거나 쓴맛과 자극으로 살충, 살균효과를 냄. 역시 농축해 주입하면 치명적이지만, 하루 섭취량을 지키면 암과 치매를 치료하는 성분으로도 주목받고 있음
- 코피 루왁은 우리에게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것은 그리움이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깊고 깊은 야생의 한 구석에서 살며시 맺은 커피 열매를 긴꼬리 사향고양이를 통해 맛보고 싶어하는 원초적 그리움이다. 코피 루왁과 시벳 커피는 코두 긴꼬리 사향원숭이가 소화시키지 못한 커피씨앗을 정제해 만든 커피를 일컫는 말. 인도네시아어로 코피는 커피, 루왁은 긴꼬리 사향고양이를 의미. 예전에는 동물의 소화기관을 거쳐 발효되는 커피라고 하면 단연 코피 루왁이었지만, 이제는 아디다. 희소성 탓에 돈이 된다고 하니, 베트남은 족제비 배설물에서 골라낸 위즐커피와 다람쥐에게 커피 열매를 먹이고 받아낸 다람쥐똑 커피를 내놓음. 예멘에는 원숭이똥 커피가, 필리핀에는 토종 사향고양이가 만들어내는 알리미드 커피가 있다. 여기에 태국과 인도에서는 코끼리까지 가세하면서 코피 루왁 대량생산시대를 열 태세다. 코끼리가 한 번에 배설하는 양이 200킬로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인도네시아에서 야생 코피루왁을 채집하는 농민들이 반년 동안 열심히 산속을 뒤지며 모아야 할 분량을 단숨에 해결하는 양이다. 에티오피아의 염소커피, 베트남의 당나귀커피, 서인도제도의 박쥐커피까지 있다는 말이 있다.
- 값이 비싼 고급커피를 고르라면 특히 국내에서는 거의 20년째 3종이 손꼽힘. 커피의 황제로 불리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마크 트웨인이 사랑한 하와이안 코나 엑스트라 팬시, 커피의 귀부인으로 불리는 예멘 모카 마타리 등. 이 중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는 오크통 모양의 특별한 통에 담겨 판매됨으로써 고급스런 이미지를 자아냄. 18세기 들어서야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한 짧은 역사의 자메이카가 어떻게 블루마운틴 커피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웠을까? 자메이카 블루마운팀 커피를 맛이 최고라고 해서 커피의 황제라고 부르는 것은 마케팅적 요소가 다분함. 일본인의 교묘하면서도 대담한 상술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임. 그 진원지를 알 수 없지만,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즐겨 마셨다는 소문도 나돌면서 이 커피에 왕실의 커피라는 닉네임도 붙었다. 황제의 커피라는 비유까지 가끔 등장하는데 이 묘사는 다소 억지스러움. 많은 커피 애호가가 좋아하지만 비싼 값 때문에 선뜻 주문하기 힘든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내추럴 커피가 1만원이라고 할 때,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는 5만원을 훌쩍 넘는다. 포장이 멋지거나 마시는 곳의 분위기가 근사하면 10만원까지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음. 이 때문에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는 거품이 많이 낀 커피 중 하나로 꼽힘
- 일본은 1868년부터 추진한 하와이 이민정책을 통해 커피에 대한 농업기술을 축적한 상태였다. 세계 제일의 커피로 손꼽히는 하와이안 코나커피의 70-80%가 일본인 재배자들의 손에 의해 생산됨. 일본은 69년 자금난에 처한 자메이카 정부에 외환을 지원해주고, 그 대가로 블루마운틴 커피를 전량 인수하다시피 했다. 일본은 하와이 코나에서 실시한 품질관리법을 그대로 자메이카에 적용해 명품산지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최고봉 블루마운틴 주변지경에서 나는 커피들만이 블루마운틴 커피라는 이름을 달 수 있었다. 일본은 자메이카커피산업협회로 하여금 품질 보증서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커피의 고급화를 꾀함. 생두크기(3개 등급), 재배지 고도(4개 등급)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넘버원이라는 최고등급의 커피를 만들어냄. 당시 세계 최고의 커피로 찬사를 받던 하와이안 코나 엑스트라 팬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품질과 스토리를 지닌 커피를 만듬. 일본은 한걸음 더 나아가 블루마운틴 커피를 하와이안 코나커피보다 비싸게 팔 수 있는 기발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 일본은 블루마운틴 커피 중에서도 최상급인 넘버 원 커피를 전량 선점해 90%를 일본으로 가져가고, 나머지 10%만을 세계에 유통시킴. 예컨대 92년 일본이 확보한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넘버 원은 688톤이었는데, 미국과 영국이 가져간 물량은 각각 75톤, 59톤에 불과했음.
-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넘버 원은 이와 같은 인위적 희소성 때문에 값이 치솟아 단숨에 하와이 코나커피를 제치고 비싸게 팔리며, 커피의 황제라는 닉네임을 얻음. 생두를 마대자루가 아닌 오크통에 담아 팔아 비싸게 보이도록 하는 전략도 통했다.
- 블루마운틴급의 커피에는 자블럼이라는 명칭이 있다. 이는 로스팅된 뒤 포장까지 마친 완제품. 블루마운틴 명성 때문에 가짜가 극성을 부리는데, 블루마운틴이라고 표기되어 있어도 산지가 자메이카인지 확인해야 함. 더불어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원두가 몇 퍼센트 들어있는지도 따져야 함. 혹 볶은 커피를 포장한 완제품이 자블럼 표기가 없다면 진품이 아니다.
-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는 프랑스, 네덜란드, 예멘 등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에티오피아 원종인 것이다. 원종은 병충해에 약해 키우기 힘들고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인위적으로 조작한 품종은 넘볼 수 없는 풍성한 향미를 자랑. 블루마운틴 커피는 습식가공하므로 맛이 깨끗하다. 잼처럼 끈적이는 듯한 단맛이 뒤를 받쳐 주어 산미가 잘 익은 귤이나 복숭아, 살구처럼 부드럽고 활달하다 풍성한 성분들이 균형을 이루면서 목을 넘긴 뒤에도 향미가 길게 이어진다. 하와이안 코나 커피와 예멘 모카 마타리 등 세계적 품질을 과시하는 커피들이 이와 같은 티피카 원종이다
- 왜 에티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코스타리카 등 게이샤 품종이 거쳐온 나라에서는 명품의 맛이 나지 않았던 것일까? 현재 중님미에서 자라는 게이샤 품종은 31년 영국이 에티오피아 게샤 숲에서 채집한 종자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이 부분에 대해 프랑스의 저명한 식물육종학자인 장 피에르 라부시는 에스메랄다 농장을 비롯해 파나마에서 자라고 있는 게이샤 커피는 에티오피아 게샤숲에서 자라는 커피나무들과 공통된 유전자가 있지만, 그렇다고 서로 동일한 품종은 아니다고 밝힘. 게이샤 품종이 파나무의 풍토에 맞게 적응하면서 향미가 풍성해지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 로부스타는 향미와 산미가 적고 쓴맛과 바디감이 강해 흔히 인스턴트 커피용이라 말하며, 값이 통상 아라비카의 절반 이하임. 반면 아라비카는 향미가 좋아 커피 애호가들은 대부분 드립방식을 추출해 즐긴다. 최근 세계적을 일고 있는 스페셜티 커피는 모두 아라비카 종이다. 우간다 로부스타는 로부스타 중에서도 품질이 좋기로 소문이 나 인스턴트용 커피보다는 에스프레소 블렌딩 용으로 특히 유럽의 카페에서 인기가 높음. 베트남이나 인도에서 생산되는 로부스타에 비해 향미와 단맛이 좋기 때문. 로부스타 원종은 처음 발견된 곳이 1858년 빅토리아 호수 서쪽인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간다에서 1년 내내 생산되며 아라비카보다 면적당 2배 이상 생산량도 많아 가히 로부스타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로부스타를 질이 낮은 커피로 간주하면서 공업용이라 업신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한데, 사실 로부스타는 다이어트에 효과적인 클로로겐산 함량이 아라비카보다 2배나 많고 단백질과 지방도 풍부하므로 향미가 부족할지언정 요긴한 쓰임새가 있다.
- 우간다에서 많이 재배되는 로부스타종 원두는 아라비카종과는 달리 볼록하고 둥글며 홈이 곧고 회색빛이 도는 푸른빛이다. 로부스타종은 전 세계 생산량의 20-30%를 차지하지만, 아라비카 종에 비해 카페인 함량이 많으며 쓴맛이 강하고 향이 부족해 스트레이트커피(우수한 품질의 원두 한가지만을 추출한 커피)로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음. 하지만 경제적 이점이 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재배해 인스턴트 커피의 주원료로 이용되고 있음
- 코나커피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처럼 토양가 기후가 커피를 재배하기에 최적이기 때문. 아울러 수확률을 높이거나 병충해에 강하도록 개량한 품종이 아니라 원종을 재배해 향미가 뛰어나다. 토양은 화산재가 넉넉하게 쌓인 화산 토양으로 미네랄이 풍부하고 물 빠짐이 좋아 커피나무가 자라는 데 최적이라는 평가. 하와이에는 주기적으로 거대한 회오리인 토네이도가 발생하지만, 코나는 두 화산 사이의 완만한 경사에 걸쳐 있는 특이한 지형 덕에 안전함. 커피는 고산지대에서 수확한 것이 향미가 깨끗하고 좋은 것으로 평가받는데, 코나의 커피벨트는 사실 해발고도 250-900미터에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코나는 햇볕이 강한 날에도 오후 1-2시가 되면 구름이 생겨 커피나무에 그늘을 드리우는 프리셰이드라는 특별한 현상이 나타남. 이 덕에 평균기온이 낮아지고 고산지대에서 수확한 커피와 같은 면모를 갖춘다.
- 브라질, 베트남, 콜롬비아 등 3개국이 생산하는 커피 생두가 전체의 63%를 차지. 이에 따라 국제커피협회는 커피생두를 크게 4개 그룹으로 나누어 각종 지표를 점검함. 세계의 커피는 일단 아라비카(63%)와 로부스타(37%)로 나뉨. 아라비카는 다시 콜롬비아 마일드와 그외 지역 마일드, 브라질 내추럴 등 3개로 나뉨. 3개 그룹 가운데 콜롬비아 마일드가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고 아더 마일드, 브라질 내추럴 순으로 뒤를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