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천재들

인문 2019. 4. 29. 12:40

- 아버지는 나보고 성직자가 되라고 하셨다. 내가 점점 밖으로 나도는 게으른 인간이 되는 걸 끔찍이 싫어하셨는데, 당시에는 그것이야말로 내게 꼭 맞는 길인 것 같았다. 나는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찰스다윈 자서전)
- 다윈은 자신의 책이 과학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리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여파로 시골에 꾸려놓은 조용한 삶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 이러한 예상에 다윈이 양가감정을 느꼈던 것도 쉽게 이해할 만하다. 또한 다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다. 자신은 신앙에서 멀어졌지만 여전히 신자의 남편이었으며 독실한 아버지의 충실한 아들이었다. 다윈은 아버지의 마음이 상할까봐 걱정스러웠다. 종의 발생 과정에서 신의 손길을 제거하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닐 터였다. 게다가 다윈은 완벽주의자였다. 다른 훌륭한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윈도 꼼꼼하고 철저했음. 체계를 중시하는 다윈으로서는, 수십년 동안 미룬 행동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명료하게 이해하고자 했던 과학자의 합당한 책임감으로 정당화했을 수 있다. 그에게는 언제나 진행해야 할 실험과 확인해야 할 내용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책을 출간했을 때도 다윈은 자신의 획기적 저서를 초본이라 부르길 고집. 마친 책의 내용이 미흡하다고 생각할 사람들에게 미리 사과라도 하는 것처럼.
- 누구든 얼마든지 많은 양의 일을 해낼 수 있다. 그 일이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유머작가 로버트 벤틀리, 일을 해내는 방법 중)
- 미루는 행동에는 보통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들 한다. 역사와 문학 속에서 할 일을 미루는 이들은 언제나 나약한 인간, 시간을 낭비하는 인간, 업신여겨도 될 만한 인간으로 그려짐. 우리는 항상 불편한 눈총을 받는다. 심지어 스스로의 굳건한 의지로 일을 미루고 있는 사람조차 자신이 뭔가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불편해질 지경이다. 아마도 그래서 딴짓이 종종 킬링타임이라 불리는 것 아닐까.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말이다.
- 굳이 일을 미루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음. 하지만 일을 미루고 싶다는 강력한 유혹, 미루기의 심리적 효용을 예민하게 느끼는 것은 도움이 된다. 다른 충돌과 마찬가지로 미루기는 불안에 휩싸일 수도 있었을 시간에 잠시나마 가짜 통제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 통제감을 느끼게 해주는 이 충동이 사실은 우리의 진을 빼놓는 일상의 카오스를 한층 악화시킨다는 점은 신경쓰지 말 것. 일을 미루려면 몇 가지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 나는 미루는 행위를 사랑하고 또 싫어한다. 일을 미루며 죄책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루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 삶의 중요한 결정을 놓고 머뭇거리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함. 다윈의 아버지는 집안의 수치가 될 작정이냐며 다윈을 꾸짖었음. 그가 보여준 망설임의 어디까지가 명백한 고집이요 세상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결심인지 궁금증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미루기 에 미덕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해야만 하는 일을 미루는 건 세상이 내게 바라는 일이 정말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의심하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음. 어쩌면 다윈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다윈은 과학적인 인간이자 선장의 동지로서 비글호에 함께 타달라는 제안을 받은 뒤에야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찾을 수 있었음. 위대한 인물이 된 말련의 다윈은 자기 갚에 놓인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미뤄둔 채 보내던 시기를 돌아보았음. 또한 켐브리지의 잘난 상류 스포츠광과 어울렸던 그 모든 시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본 다음, "그렇게 보냈던 낮과 밤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걸 안다"고 인정. 그렇다고 실제로 부끄러워 한 건 아니지만, 사실 그는 무얼할지 고민하며 보낸 시간들이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고, 스포츠를 즐기는 청년들과 목청껏 노래를 불렀던 날들도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긴 생각에 잠겨 있던 다윈은, 결국 다시 돌아가도 달라지는 건 없을거라고 말했다.
- 오늘 현명할 것, 미루는 건 미친 짓이다. 다음 날이면 돌이킬 수 없는 전례가 다시금 찾아올지니, 그렇게 지혜는 삶에서 빠져나간다. 미루는 건 시간을 도둑맞는 짓이다. (에드워드 영, 삶과 죽음, 불멸에 관한 불평 또는 밤의 상념 중에서)
- 노벨상 수상자인 동물학자 피터 메더워가 정신분석을 가리켜 "20세기의 가장 거대한 지능적 신용사기"라고 칭했을 때 많은 이들이 공감. 언제나 직설적이었던 엘리스는 "프로이트는 헛소리꾼"이라는 말을 즐겨 했다. 그 자신이 소파에 누운 환자에게 말을 시키는 치료법으로 어떤 효과도 보질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엘리스의 처방은 간단했다. "끔찍한 과거는 잊고" 행동에 나서라. 엘리스는 신경증을 "투정을 고급스럽게 표현한 말"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파헤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다 큰 아기였다.
- 자기 불구화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주저앉히는 방식을 이미.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뭐든 간에 그 일에 실패하는 게 두려워서일 수도 있고 성공하는 게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자기 불구화 전략으로서 일을 미루는 사람은 일이 자기 능력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을 미룸. 이들은 그저 두려움 때문에 마비되어 있는 게 아니다. 미루는 행동이 이들을 실패로부터 보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건 열심히 달려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최후의 순간가지 기다렸기 때문이고, 될대로 되라고 여겼기 때문. 미루는 행동은 이들에게 실패의 원인인 동시에 실패에 대한 변명이 됨. "미루기는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페라리가 말했다. "만석적으로 일을 미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능한 인간으로 여겨지기보다 노력을 안 하는 인간으로 여겨지길 바라지요."
- 만성적으로 일을 미루는 사람에게 '그냥 하라'고 말하는 건 우울해하는 사람에게 '이봐, 기운내!'하는 것과 같다. 페라리는 미루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을 미루는 사람이 처음 환경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미루기가 결국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기분과 감정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을 미루는 이유는, 무언가를 해내려면 그에 적절한 기분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리고 언젠가는 기분이 변할 것이기 때문에 미래야말로 행동에 나서기 더욱 적합한 때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일을 미루는 건 기분을 관리하려는 노력, 해야만 하는 일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는 노력 때문. 지금 낮잠을 자면 더욱 잘 집중할 수 있을거야. 지금 트위터를 하는 건 글쓰기 전의 좋은 준비 운동이 될거야. 페라리는 연구에서 미루기가 불안에 대처하는 수단이나 두려운 결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방식을 거듭 분석함. 문제는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러한 시도가 오히려 자멸적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페라리와 다이앤 타이스의 연구에서, 대학생들은 별 의미는 없고 그저 재미로 시험을 치르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하는 의미있는 시험을 치르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시험 준비를 더욱 미루는 경향을 보였다. 즉, 일을 미루는 사람들은 시험이 중요할수록 준비를 미룬다. 시험이 중요하지 않으면? 일을 미루지 않는 사람과 별다를 것 없이 행동한다. 미루는 사람이 노력하지 않는 것은 노력이 중요한 경우뿐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결과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들은 더욱 절박하게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 티머시 피칠은 기분이 행동을 좌우하게 놔두지 말고, 대신 행동이 기분을 좌우한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여태것 미뤄왔던 일을 하면 기분이 나아짐. 실제로 미뤄왔던 일을 하는 건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미뤄왔던 일이라는 게 내가 한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바로 그 일이기도 하다는 거다.
- 다른 모든 의례와 마찬가지로, 미루기는 혼란스럽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을 조금은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임.
- 심리학자 피어스 스틸은, 이 모든 미루기의 핵심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선호라고 강조. "우리가 일을 미루는 것은 대개 현재는 구체적으로, 미래는 추상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 우리 모두는 자기 인정과 자기 미화의 판타지를 위한 공간을 남겨두기 위해 특정 종류의 애매모호함을 필요로 한다.
- 내일을 향한 믿음은 일종의 신앙이다. 내일까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나고 희망이 부활한 것이다. 일을 미루는 사람에게 있어 희망은 언제나 경험을 이긴다
-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삶을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유예"라 부른 건 가능한 한 빨리 낙원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런 확신이 없다. 우리에게는 가장 완벽한 상황에도 저항하고자 하는 타고난 양가감정이 있다. 천국은 좋은 곳 같아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 중요한 일은 긴급한 경우가 드물고, 긴급한 일은 중요한 경우가 드물다
- 자신만만하게 약속했다가 낙심하고 미루기를 반복하는 게 레오나르도의 기본적 작업방식이었다. 그의 머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지만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귀족들의 부탁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레오나르도는 여유가 있을 때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나서는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 그에게도 나름의 계획은 있었다. 막대한 과제를 쉴 틈 없이 설정했고, 언제나 놀아울 정도로 야심찬 투두 리스트를 만들었다. "구름이 어떻게 형성되고 해체되는지 묘사할 것"은 그의 리스트에 있는 대표적 과제 중 하나다. "재채기에 대해 묘사할 것"도 있다. 내가 아는 많은 계약직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 또한 새로운 과제를 거절할 줄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작업을 끝마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처음으로 레오나르오의 전기를 쓴 조르조 바사리는 완벽주의가 문제였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는 많은 많은 일을 벌였지만 자신이 상상한 것을 그대로 구현할 완벽한 기술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하는 레오나르도에게 실망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그 무엇도 끝내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헬리콥터나 잠수함, 심지어 로봇의 도안을 보며 감탄했다. 하지만 그 시절 레오나르도를 고용한 이들이 궁금해했떤 건 단 하나였음. 과연 이자가 약속한 날에 약속한 일을 마칠 것인가?
- 미루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많다. 미루기는 저항이자 오만한 권위자에게 날리는 경고가 될 수도 있고, 전 세계에 만연한 자본주의 윤리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다. 드 퀸시나 오스카 와일드같은 작가들에게 있어 미루기는 일종의 스타일이었다. 작가는 누구보다도 가장 끈질기게 일을 미루는 사람들이다. 참 이상하다. 이들은 마감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 할 만한 업계에 속해 있기 때문.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감이 좋다. 마감이 내 옆을 지가날 때 슝 하고 내는 소리가 진짜 좋다." 애덤스가 사망한 2001년 그의 마지막 책은 마감이 12년이나 지나 있었다.
-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자유는 우리를 두려움에 덜덜 떨게 만든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모르기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른다. 어떤 나는 이걸 원한다. 또 다른 나는 다른 걸 원한다. 가장 근본적 분열 가운데 하나는 바로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의 분열이다. 현재의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때려 치우고 싶다. 미래의 나는 그렇게 해서 발생활 결과를 고려해야만 한다. 미루기는 우리 안의 국회에서 서로 개싸움을 벌이는 정당을 화해시키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이 너무 맹렬해질 때면 얼마간의 자제력이 필요해짐. 이처럼 외부이 유혹과 자제력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그리스신화의 오디세우스다.
- 나는 왜 주사맞기를 미룰까? 어느 정도는 언어에 책임이 있다. 주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따라서 피해야 할 일이 되어버린다. 이게 바로 일을 미루는 사람이 익히는 기술 중 하나다. 망설이면서 행동에 나서기를 미루다가, 망설임이 종종 합리화로 이어지고, 이 합리화 덕분에 계속해서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기술.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다소 자기애가 과한 설명이다. 마치 탁월한 지적 능력이 주인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여서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일 미루는 사람의 진짜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는가. 망설임은 사고의 방향이 행동에서 무위 쪽으로 바뀌는 것 뿐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충분히 오래 생각해보라. 그러면 대가 그 일을 꼭 팔 필요는 없게 된다.
- 다윈은 하루를 15분 단위로 나누어 계획을 세우고 활용했음. 아마 그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책을 출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윈이 엄청나게 일을 미루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자기관리에 대단히 능했다.
- 레오나르도는 임종 때 이렇게 스스로를 비난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끝내질 못했어!" 해야 할 일을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엔 후회하게 된다는 교훈을 전하는 이야기다.
- 미루기의 거장들이 내게 가르쳐준 게 있다면 그건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대부분 진짜,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거다. 다른 나라의 언어 배우기, 그동안 겁내고 있던 프로젝트에 착수하기,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에게 말 걸기,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임무들이다. 실패와 고통, 난처함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야 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경우라도 유혹은 여전히 남아 일을 미루고 싶게 만든다. 그럴수록 과제는 더 어려워지고, 도전 정신을 더 많이 발휘해야 하고, 그러므로 더욱 흥미로워진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루기의 전문가들이 눈앞에 놓인 일에 당장 덤벼들기보다는옷장을 정리하거나, 음악 스티리밍 서비스의 재생 목록 이름을 전부 다시 붙이거나, 따개비 연구를 하며 수년을 보내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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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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