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초년기에 이미 '사춘기'라는 시험지를 받은 적이 있다. 사춘기의 심리적 과제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답안을 쓰면 되었다. 그런데 중년의 심리적 과제는 고유성을 요구한다. 즉 보편적 답안지는 교과서에서 배울 수 있지만 고유성의 답안지는 오직 내가 누구인지를 탐구할 때 발견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이것이 중년의 심리적 과제가 자신의 내밀한 정신구조 속에서 그 비밀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 사춘기는 영어로 puberty다. pube는 음모陰毛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puberty는 생식기능이 완성되는 시기를 말한다. 즉 puberty는 생리학적 조망을 주축으로 한다. 그런데 이 puberty 를 동양에서는 사춘기思春期로 번역했다. 말하자면 동양의 언어 선택은 생물학적 조망보다 심리학적 조망이 더 우선되어 있다고 볼 여지를 가진다. 사춘기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생각의 싹들이 한껏 피어오르는 시기’라는 말이다. 봄에는 꽃과 잡초를 가리지 않고 온갖 생명들이 오른다. 어느 것이 곡식이고 어느 것이 잡초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에 좌충우돌하기 마련이다. 마구잡이로 자라던 생 각들은 사춘기를 지나는 동안 사회적으로 적합하지 않는 것들을 가려내면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위주로 생각의 나무를 키운다.
사전에는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지만 갱년기를 표현하는 또 다른 용어는 '사추기思秋期' 또는 '행년기 幸年期'이다. 갱년기가 육체적 변화에 중심을 둔다면, 말 그대로 사추기는 정신적 변화를 통한 정신적 성숙을 함의하고 있다. 사추기는 청년기 동안에 사고의 토대가 되었던 심리적 과정들 을 점검하고 거둬들이는 시기다. 행년기는 이러한 사추기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즉 성숙한 생각들을 추수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인생 최대의 은총을 누리는 시기가 시작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인생의 진정한 안정기로 전환되어야만 하는 시점에서 많은 이들이 마음의 브레이크에 걸리고 있다. 그것은 사추기가 되지 못하고 갱년기가 되어 버릴 때 일어난다. 중년을 그야말로 몸의 변화에 맞춘 갱년기라는 음울한 들판이 될 것인지, 아니면 삶이 무르익는 황금의 들판이 될 것인지는 중년을 맞이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
- 마음의 병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병이 없는 것이 더 좋아 보이지만, 병을 앓는 것 역시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건강을 위협 받을 때 우리는 건강에 대해 생각하고 보다 더 조심스럽게 건강을 챙기기 때문이다. 만일 중년에 공허감을 느끼지 않으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공허감을 내면세계를 탐험하기 위한 초대장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자기 삶의 훈장이라고 말해도 결코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일이다.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사람만이 자기 감정과 생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의식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중년이 되어서도 남을 탓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억울함의 연속, 불행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자기 자 신을 알 수 있다면, 고통은 더 없는 지혜와 성숙의 원동력으로 환원된다. 표면적인 출세, 표피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자기 인식으로 연결되지 못할 때 공허감은 그를 사로 잡고 말 것이다.
- 동물적인 것에 집착하는 현상은 영혼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현대 과학이 인간의 가치 중심을 육체적인 것으로 옮겨 놓았다. 섹스가 강조되는 사회, 사랑이라는 말이 곧 섹스와 동의어가 될 때, 사람은 자연을 거스르는 이상 행동을 하도록 강요된다. 폐경기의 여자가 우울증에 걸리고, 약화된 남성성으로 심리적 위축을 겪는 것은 모두 육체적인 것에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젊음엔 젊음의 가치가 있고 늙음엔 늙음의 가치가 있다. 늙음 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한 늙음은 불행이고 슬픔이며 고통이 된 다. 젊음의 가치가 육체적인 것이 우선되었다면 늙음의 가치는 정신적인 것이 우선되는 게 옳다. 늙음은 질주하던 삶을 멈추어 정비하고 마무리하는 시기다.
- 중년의 갈등과 혼란은 공동체 안에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는 깨우침이다. 부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자신과 동일시하면 서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가족은 내가 아니었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린 것이다. 가족은 '나'가 될 수 없다. '나'가 될 수 없기에 나의 입장에서 내가 되어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릴 때의 충격은 참으로 크다. 가족에 대한 동일시가 크면 클수록 그 충격 또한 커진다. 그러므로 중년의 갈등은 공동체로부터 개인이라는 독자성에 대한 일깨움이다. 가족이 아닌 나 자신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중년이다.
- 중년이 되면 마음을 쉴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어도 그들의 외로움은 달래지지 않는다. 그래서 찾아오는 것이 우울증이다. 섹스가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바로 중년을 더욱 혼란 속 으로 몰고 간다. 섹스가 사랑을 확인하는 요소가 되면, 자연스러 운 성적 감퇴 현상은 비정상이 된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려고 약을 복용하고, 새로운 대상을 찾 아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 그러나 자연은 유한한 것이 법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유한한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너무나 명백하고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의 변화를 부정하려고 할 때 사람은 변칙적인 행동도 불사하게 된다.
이것은 정신의 영역이 육체적 영역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중년의 문제를 육체적 관점에서만 해결하고자 한다면 균형은 깨지고 만다. 중년에 서서히 허물어지는 육체는 그 육체를 넘어서라는 자연의 법칙은 아닐까? 마지막 낙엽을 떨어지지 않게 누군가 실로 묶어준다고 해서 겨울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봄에 찬란한 생명들이 새롭게 피어나는 것은 가을의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 본능적 에너지를 심리학에서는 리비도라고 말한다. 리비도가 섹스 에너지로만 한정되어 버리면, 섹스나 행복에 집착하게 된 다. 반면에 리비도가 내적 탐구를 여는 충동 에너지가 되면, 내 면의 '신비한 힘의 경험'과 더불어 '나'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준다. 그래서 칼 융은 리비도가 자기 탐구적 에너지로 바뀌면 '정신적 창조로의 변환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 중년이 지나서도 성적 본능에 집착하거나 행복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충동력은 생물학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성적 충동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자 이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과 이해가 있을 때만이 인간은 동물적 차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육체적 영역에서 정신적 영역으로의 변환은 중년에 찾아온 '허무'라는 손님을 잘 영접함으로써 일어난다.
허무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허무가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것을 융은 육체적 충동이 정신적 충동으로 변환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허무는 중년에 주 어지는 존재의 숙명이다. 그 숙명을 잘 받아들인다면 정신적 성장의 길로 인도되겠지만, 거부한다면 정신적 퇴행으로의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 융에 의하면 콤플렉스는 정신적 체질과 같아서 미리 정해져 있다. 각 개인의 성격적 특성은 미리 정해진 콤플렉스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가 개인마다 고유한 견해를 갖는 것도 이런 정신 적 구조에 기인한다. 콤플렉스는 우리에게 심적인 동요를 일으 키는 본질적인 근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콤플렉스를 강한 의지 로 억압할 수는 있지만 콤플렉스를 없애버릴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콤플렉스는 자율적 정신이다. 자율적 정신이란 의식의 지 배를 받지 않고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 억압이 느슨해지면 언제든지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융은 개인의 삶이 안락할지 아니면 고통 속에 있을지 는 콤플렉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 콤플렉스에 대한 공포는 강한 선입견을 의미한다.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문제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동일시를 하게 되면 상대의 감정과 나의 감정은 밀접하게 연결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감정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집착하면 나의 행 복과 불행이 상대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의 행복이 타인 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 관계는 심리적인 거리를 둘 때에만 가능하다고 융은 말한다.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네 것으로 동일시되어 있으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건을 눈앞에 너무 바싹 갖다 대면 정확하게 볼 수 없다. 본다는 것은 대상과 나 사이에 볼 수 있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너와 나 사이에 거리가 없으면 진정한 심리적 관계가 일어나지 않는다.
- 중년에 일어나는 심리적 문제, 심리적 현상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그리고 사랑의 결실로서 자식을 얻는다. 가족이라 는 이름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들이 '나'와 분리된 객체 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에 오히려 죄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그 들이 '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마주할 때 누구나 공포를 느낀 다.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믿었던 견고한 믿음의 대지에 예고 없는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그 과정은 중년에게 엄청난 충격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정밀하게 경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 아는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이 무너지는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결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 나쁜 일, 위험한 일 조차도 합리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든다.
- 무엇보다도 중년이 느끼는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소외감 이다. 중년에 마주해야 하는 현실적 삶은 뚫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처럼 그를 가로막고 있다. 죽음의 절벽 앞에서 숨이 멎을 것 같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구원의 손길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중년이 할 수 있는 해결책은 혼란한 자기 자신을 잊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주 성실하기만 하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 으로 변해 버렸다는 하소연을 많이 듣는다. 드라마나 영화의 가 장 뜨거운 주제 중의 하나인 중년의 사랑도 바로 중년의 심리적 혼란에 기인하고 있다. 사랑은 복잡하고 혼란한 자신을 잊게 해 줄 가장 강력한 중독 현상이다. 그것은 이성을 온전하게 마비시킬 수 있는 본능적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중 그냥 일어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만일 어떤 것이 이유도 모른 채 자기 삶 안에서 자꾸만 반복되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자신이 반드시 의식해야만 하는 내면세계의 메시지다. 그러므로 중년은 '나'를 떠나 방황하는 시기가 아니라, 외면했던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사색하는 시기여야 한다.
- 나를 위한 삶이 아닌 것은 타인을 위한 삶도 되지 못한다. 자 신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타인을 지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헌신이 커질수록 상대에 대한 바람도 커진다. 우리는 모두 가족을 위해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조금만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보는 사람이라면 가족을 위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 다. 가족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일 뿐이다.
가족과 내가 하나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각자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때 느끼는 허망함과 배신감은 참으로 클 수밖에 없다. 부부로 살다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마음이 변했을 때 배신감을 느끼면서 나오는 말은 어김없이 '네가 나한테 어찌이럴 수 있어?'이다.
-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이라는 말은, 인간은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라는 말이다.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더 아름답다. 융은 '완전 한 인간'이 아닌 '온전한 인간'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정신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정신의 추함까지 인식해야만 온전한 정신본연을 회복한다.
즉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비도덕적이고 비지성적인 사람인지 를 처절하게 알아차리는 사람만이 균형적 삶을 살 수 있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의 완벽하지 못함을 참지 못한다. 헌신하는 사람은 자신의 헌신에 대한 자부심 또한 크다. 자부심이 커질 때 헌신적이지 못한 상대의 태도에 더 분개하게 되는 것이다.
- 현실적 삶에 뿌리 내려야만 하는 젊은 시절에는 내적으로 여러 가지 욕망과 충동이 일어나더라도 잘 견디어 나간다. 바꾸어 말하자면 삶에 대한 긴장감으로 인해 내면의 충동을 느낄 여지 가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 삶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갖추어지면서 억압되어 있던 욕망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이 욕망 중에서 흔히 가장 강하게 인식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 적인 문제다. 이것이 중년의 나이에 불나방 같은 사랑을 찾아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융은 이 성적 충동을 단순히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말하자면 중년 갈등의 문제를 정신의 구조 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다. 중년의 위기는 영혼의 탯줄을 잘라내 라는 소명의 목소리라고 본다. 탯줄이란 무엇인가? 탯줄은 엄마 와 아기의 혼연일체다. 즉 엄마도 아기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에 탯줄을 잘라야 한다. 이것을 심리적으로 해석한다면, 나약한 자아의식은 무의식이라는 정신의 어머니에게 정신의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자아가 무의식 상태로 있다. 는 말이다. 무의식 상태란 바로 집단의식의 상태를 말한다.
지금껏 가족이라는 집단의식 속에서 습관적으로 살아왔다. 습관적이라는 말은 의식하지 않아도 살아지는 삶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무의식적 상태다. 집단의식에는 '나'라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년은 집단의식에서 자신의 존재 를 인식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을 가족을 떠나라는 말로 오해한다면 곤란하다. 다만 가족이라는 의존적 정신 상태에서 개체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망하는 마음은 의존하는 마음에서 온다.
- 모든 의존적 삶은 서로를 정신적 탯줄에 묶어 놓는 것이다. 정신적 탯줄을 끊는 일은 서로를 살리는 일이다. 생명력을 키우고 힘을 얻어내는 일에는 고통이 필수적으로 따른다. 모든 신화의 주체는 바로 영웅이다. 영웅은 바로 이처럼 험난한 정신적 삶을 극복해 내는 사람이다. 이 영웅의 길은 중년에 이르면 어차피 가 야 한다. 다만 그 길을 자발적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운 명에 떠밀려 문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그 순간까지 나오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 나에게 아픔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 아픔을 통해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다. 아픔 속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아픔은 그저 고통일 뿐,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육체가 심각한 노동을 감수하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아픔은 마음의 노동이다. 힘겨운 마음의 노동을 하고서도 아 무런 보상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고통을 통해서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은 고통이 나에게 주는 보상 이다. 보상은 그 의미를 아는 만큼 커진다. 아픈 과거를 그대로 묻어버리고 찬란한 미래를 상상하면서 빈자리를 채우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미래는 과거라는 징검다리 가 있기 때문에 올 수 있는 것이다.
신경증은 변환의 시점에서 변환을 거부할 때 발생하는 마음의 질병이다. 변환은 자기 문제를 인식하고 이해하여 수용함으로써 일어난다. 변환은 삶의 자세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다. 과거에 집 착하거나 과거를 단절하려는 것은 모두 자기 인식에 대한 거부 이다. 어느 쪽이든 좁은 통 속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을 참고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 사람은 고통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못한다. 중년에 일어나는 갈등과 고통을 힘들지만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중년의 고통은 무의식적 삶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자각이다. 그 자각이 말하고 있는 것은 미성숙에서 성숙 으로의 요구이고, 의존적 삶에서 홀로서기를 하라는 명령이다. 이 명령에 충실한 사람은 개성화라는 고유한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이 진정한 창조의 세계다.
삶을 창조적으로 살 수 있을 때 사람은 감성적 면을 유지하면서도 의식적 질서를 잘 잡을 수 있다. 그는 상황에 따라 소녀소년으로 행동해야 할지 어른으로서 행동해야 할지를 잘 판단한다. 물론 이러한 판단이 자유자재로 가능하려면 자신에 대한 정 직한 인식 훈련이 깊어진 경지까지 가야 한다. 심리적 홀로서기 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이혼하고 혼자 살아야만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심리적 홀로서기는 흔히 말하는 철든 사람이다. 철든 사람은 자기만의 이기적인 인식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홀로서기는 진정한 조화다.
- 삶의 경우에도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즉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 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심리적 독립을 위해서는 내면에 근원으로 있 는 어머니 상, 아버지 상이 현실적으로 투사된 가족과 사회에 자 신이 어떻게 의존되어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의존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일어나지 않을 때 의존되었던 지난날을 그리워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서 자기기만 속으로 들어가기 쉽다.
하지만 과거에 매달리는 것도, 미래의 판타지에 열광하는 것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회피하는 일이다. 물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직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자기 비하에 쉽게 빠져 버린다.
- 중년까지는 외적인 욕망으로 치달아 왔었다. 외적인 욕망을 위해서 우리는 자연의 본성을 벗어나야만 했다. 즉 문화와 지식 으로 자신을 다듬고,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잘할 수 있도 록 훈련되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훈련들이 자신 의 본성을 외면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학습된 자신 의 모습을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착각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 본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되살아난 다. 왜냐하면 본성이 바로 정신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년의 위기가 대부분 도덕적 갈등에 직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비도는 본능적인 충동력이다. 이 충동력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그것이 옳다거나 옳지 않다는 판단의 문 제 안에 있지 않다고 융은 말한다. 왜냐하면 융이 보기에 모든 문화의 발전은 본성의 충동력에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능적 충동을 의지로 억압하고 있어서 그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일상적 삶을 습관적으 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림으로써 내적 변화가 일어나 게 된다. 몸의 피가 골고루 흐르지 않으면 육체는 병에 걸린다. 마찬가지로 정신 에너지도 골고루 흐르지 않고 특정한 곳에 비정상적으로 집중되어 있으면 신경증이 발생한다.
정신적 에너지가 무의식으로 흘러들어가 버리면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없어진다. 의식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에너지가 사라졌을 때 사람은 우울증을 앓게 된다. 무의식의 내용들이 활성화되면 부정적인 생각들에 시달리게 되고, 자아의식이 위축되는 심리적 증상이 일어나며, 식욕이 저하되거나 두통·소화장애 같은 신체 생리적 증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의식으로 흘러든 에너지를 의식으로 되돌리려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한다. 즉 자기 내면에 어떤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인식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잊어버리려고 애를 쓸수록 더 깊이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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