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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2.17 금융의 역사
  2. 2020.02.17 프레디쿠스
  3. 2020.02.17 인공지능이 나하고 무슨 관계지

금융의 역사

경제 2020. 2. 17. 12:10

- 금융의 기본요소
* 시간을 넘나들며 경제적 가치를 재할당한다
* 위험을 재할당
* 자본을 재할당
* 이러한 재할당 과정을 접근하기 용이하고 정교하게 만듬
- 가족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 가치를 서로 다른 시점으로 옮기는 제도 중 가장 기본적인 것. 예컨대 부모가 늙으면 자녀가 돌본다는 사회적 약속은 퇴직연금과 마찬가지. 동일하게 가족, 친구,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선물을 받으며 보답한다는 약속은 금융대출과 같은 기능을 함. 하지만 대출과는 달리 미래에 받는 보상이 이자가 아니라 사회적 의무이므로 사회 연결망을 느슨하게가 아니라 탄탄하게 만든다. 이런 약속은 정식 금융계약보다 훨씬 전에 나타났다. 금융은 시점같은 기능을 한다. 하지만 대출과는 달리 미래에 받는 보상이 이자가 아니라 사회적 의무이므로 사회 연결망을 느슨하게가 아니라 탄탄하게 만든다. 이러한 약속은 정식 금융계약보다 훨씬 전에 나타났다. 금융은 시점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한 문화에서 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금융계약은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시점문제를 해결하는 전통방식을 대체하거나 개선하면서 등장하여 기존 균형상태에 도전했다.
- 드레헴 서판은 고대 서남아에서 발견된 금융문서 가운데 가장 흥미로움. 금융 사고방식이 발전한 과정을 거의 모두 보여주기 때문. 이 서판을 보면 늦어도 기원전 제3천년기에는 사업을 상상하고 계량하며 미래가치를 평가하는 기본도구가 전부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구체적 숫자로 예측해야 할 필요가 절박하지 않았다면 드레헴 서판되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 자체에도 가격이 매겨지는데, 그 가격의 근본은 동물의 번식에 기초를 둔 경제라는 근본 통찰이 서판에 담겨 있음. 이 서판은 추상적 금융 사고방식이 낳은 놀라운 결과물이다. 드레헴 서판에 숨은 사업계획에는 소 떼뿐 아니라 소 떼가 떠받치고 있는 사회의 성장과 변화를 예상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 소가 번식할수록 속 지탱하는 사회 역시 성장할 수 있다
- 이웃간의 협동은 공동체에 닥친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인 반면, 대출은 선물에 이자가 붙어 돌아오는 것으로서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빌려준 것을 되돌려 받아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다. 이처럼 암묵적 계약과 명시적 계약이 이루는 대조에는 문명이 대출을 보는 양면적 감정이 숨어 있다. 도시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상호 협동으로 위기에 대응했기 때문에 친구나 이웃에게 이자를 청구하는 행동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인류는 에덴동산이 지척인 곳에서 이자를 발명하면서부터 타락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명시적 계약, 장부기록, 노동력/배급량의 문서화는 공동체를 기본으로 생활하던 이상적 세계와 고대 도시국가를 확실히 구분하는 특징. 도시와 국가의 규모를 키운 것도 이러한 도구임이 분명함.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개인끼리도 금융계약을 했다. 수메르에서 기원전 24세기 중반에 작성된 기록 중 하나는 개인과 신전이 아니라 최초로 개인끼리 맺은 대출계약으로 보임. 문서 내용은 이렇다. "우르가리마는 푸주르에시타르에게 은 40그램과 보리 900리터를 받아야 한다."
- 고대 수메르인은 서로 이자를 매긴다는 발상을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언어학적 근거에 실마리가 있다. 수메르어로 이자를 가리키는 단어인 마시는 송아지를 의미하기도 함. 고대 그리스에서 이자를 가리키는 토코스는 소 떼에서 태어난 새끼를 가리키기도 함. 라틴어로 짐승 데를 일컫는 페쿠스는 '돈과 관련한' 이라는 영단어 피큐니어리의 어원이다. 이집트어로 이자는 수메르어와 비슷하게 므스인데 출산한다는 의미. 이 모든 용어를 살펴보면 이자개념은 가축이 자연히 번식하는 데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소 서른 마리를 1년 동안 빌려준다면 서른 마리보다 많은 소를 돌려받으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소는 번식한다. 따라서 소 떼 주인의 재산은 소 떼가 번식하는 속도와 같은 비율로 자연히 늘어난다. 소가 표준화폐 역할을 했다면 가치가 비슷한 물건을 대여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새끼를 칠 것이라 기대했을 법하다. 수렵, 채집사회와 달리 농경, 목축 사회에서는 이자라는 발상이 자연스레 출현했던 듯하다. 고대 수메르 사회는, 특히 그중에서도 양떼의 도시라 불리기도 했던 우르크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는 관습이 진화할 만한 환경을 완벽하게 갖추었던 셈이다. 드레헴 서판이 바로 그러한 발상을 자세하게 표현한 것이다.
- 밀 문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치가가 될 자격이 없다. (소크라테스)
- 고전 시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서는 금융경제가 화폐와 시장에 기초를 두고 정교하게 발전. 그리스인은 은행, 화폐, 상사법정을 발명했음. 로마인은 이러한 혁신을 토대로 금융을 발달시키는 한편 주식회사, 유한책임 투자와 일종의 중앙은행을 덧붙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는 인근에서 생산한 물건을 재분배하는 데 중심을 두고 이를 장거리 교역으로 보조했지만, 아테네와 로마는 인근의 농업 생산력만으로 뒷받침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하여 주로 해외무역에 의지하게 됨. 아테네는 필요한 밀 대부분을 멀리는 흑해에서까지 수입. 로마는 필요한 곡식을 나일 삼각주의 비옥한 농지에서 얻었다. 이처럼 대담하게 경제를 운영하려면 새로운 금융구조가 필요했음. 아테네와 로마는 곡식이 중앙으로 흘러오게 만들어야 했다. 두 국가의 경제는 해외의 농부들이 곡식을 재배하고 선원과 선장이 목숨을 걸고 곡식을 실어 오며 투자자가 배와 교역품에 투자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한편, 국제무역에 수반되는 불확실성에도 견딜만큼 확고한 결제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해결책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예측 불가한 바다에 대응할 금융기술, 어디서나 통용되는 가치 기준에 기반을 둔 화폐경제였따.
- 고대 우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세계에서도 대출과 해상무역 자금조달로부터 금융이 발전. 그런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코언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에서는 언어와 세계관 모두에 만연한 특유의 이분법 사고방식 덕분에 새로운 금융제도가 출현했다. 예컨대 토지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 가시적 재산은 실제 세계의 일부다. 반면 예치금, 장부, 계약은 추상적 재산이다. 이러한 자산은 법적 권리, 쌍방간 계약, 은행가가 수탁하는 계좌 형태로 존재했다. 코언은 추상적 재산은 고대 우르에서 금융업자가 대출 서판을 보관했던 것처럼 그리스인이 등장하기 전에도 존재했지만, 금융을 개념적으로 사업과 분리하여 가깝게는 장거리 해상교역에 적절하도록, 멀게는 제국의 요구에 부응할 만큼 유연하게 만든 것은 아테네 은행이었다.
- 곡식교역을 위해 흑해로 향하는 항해는 위험했고, 갤리선을 노잡이, 상인, 선장, 선원으로 채우는 비용은 비쌌다.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항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항해비용을 댈 만큼 부유한 사람은 바다 건너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모험을 떠나기보다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아테네에 머무르는 편을 선호했을 것임. 교역에서 20-30%의 이익을 얻으려고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수천 드라크마를 건네주도록 투자자를 유도해 낸 금융제도는 놀라운 발명품이었다. 이는 아테네 경제의 기반 자체였다. 한편 아테네 정부는 재산권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할당하는 수단과 분쟁해결 방법을 이용하여, 항해나 다름없이 위험한 탐사, 채굴 사업에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이러한 유인책 덕에 투자자는 해양항해뿐 아니라 제조사업이나 채굴사업에까지 다양하게 분산투자할 수 있었다. 아테네가 보유한 금융제도는 투자를 촉진하고 위험을 분산했으며, 위대한 도시에 필요했던 복자한 수입기반 경제를 뒷받침했음
- 아테네 민주주의와 금융이 함께 발전하면서 역설적 측면도 나타남. 교역경제는 자본투자를 분산하고, 보이지 않는 손이 곡식교역에 자본을 배분하도록 함으로써 움직였다. 아테네 민주주의에도 통치력을 분산하는 구조가 필요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기꺼이 세금을 내고 공공봉사를 제공할 추상적 기구 앞에 시민을 하나로 묶는 수단도 필요했다. 민주주의는 정치구조일 뿐 아니라 경제구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운영하려면 종교적 상징까지도 포함한 여러 기술이 다양한 계층에서 작동해야 함. 아테네의 화폐제도는 시민이 충성하는 대상을 가문이나 부족 같은 기존 집단으로부터 새로운 구조, 즉 국가로 옮겨냄. 아테네는 아테나를 국가의 상징으로, 돈을 사람들이 국가를 끊임없이 경험할 매개체로 활용. 돈은 보상체계이고 측정체계이자 공동의 부를 저장하는 수단이었다.
- 군주국에서 공화정을 거쳐 제국으로 변하는 내내 로마를 지배한 것은 혈통과 재산으로 획득한 후 계속 존속한 소규모 과두집단이었다. 6천만명이 사는 제국을 지배한 집단은 많아야 약 1만명이었다. 로마를 통치하는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25만 데나리우스를 넘는 재산을 보유하고, 기존 원로원 의원의 표결을 통과해야 했으며, 제정 시절에는 황제에게도 승인받아야 했다. 공화정 시절 로마는 주기적으로 인구조사를 하며 가문의 지위와 부를 평가하고 기록하여 시민의 서열을 매겼다. 재산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원로원 의원 자격이 박탈됨. 원로원 의석을 확보한 가문들은 매년 나오는 빈자리를 자기 가문 사람으로 채우려고 경쟁했다. 원로원 의원이 될 자격을 갖춘 사회계급은 두가지였다. 그중 로마에서 가장 유서깊은 지배가문의 후손인 귀족계급은 가장 배타적인 특권층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기사계급. 이들은 대대로 로마군에 기병을 공급하여 높은 지위를 얻음. 기사계급에 들려면 재산이 10만 데나리우스 이상 있어야 했다. 기사계급이라는 용어대로 말을 소유하거나, 말과 병사 유지비를 내기에 충분한 재원이 있어야 이 정도 재산요건을 맞출 수 있었다. 기사계급에 들려면 처음에는 혈통을 이어받아야 했지만, 나중에는 재산을 모아서도 가능해짐. 로마 사회의 하층에는 평민과 해방노예가 있었다. 이처럼 재산과 계급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금융분야에서 벌어지는 협력, 경쟁, 음모는 정치전략을 이루는 차원 중에서도 특히 중요했음. 그렇다 보니 정치가가 사업을 할 때는 법에 따라 제한을 받았다. 예를 들어 기원전 218년 원로원에서 통과된 클라우디아 법안은 원로원 의원이 소유한 상선이 실어나를 수 있는 물량을 제한. 법안의 의도는 원로원 의원이 정치력을 활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하게 막는 데 있었다. 원로원 의원이 돈을 벌어도 좋은 곳은 땅이었음. 다시 말해 원로원 의원은 넓은 땅에서 밀, 포도, 올리브를 길러 주변에 팔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리고 땅에서 농작물을 거두어도 큰 배가 없기 때문에 수출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기사계급이 일단 원로원 의원이 되면 이론적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교역에 참여하여 큰 이익을 내지 못하게 되지만 대출 같은 간접투자는 할 수 있었다. 원로원 의원은 부유해야 했지만 한편 자본을 굴리는 데도 심한 제약을 받았다. 이는 명시적 자격요건이었다.
- 요약하면 원로원 의원은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재산을 소유해야 했다. 따라서 사업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기위해 금융행위를 위임하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능력이 중요했음. 바로 그러한 기회를 원로원 의원에게 제공하는 제도가 로마 금융체계에서 발달했다.
- 타키투스에 따르면 원로원 의원은 사실상 모두 대부업자였다. 법 때문에 교역을 하지 못하게 된 원로원 의원에게 대부업은 재산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음. 로마사 연구자 네이선 로젠스타인이 원로원 의원의 재산상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농업만으로 재산을 유지할 만큼 큰 이익을 올린 원로원 의원은 많지 않았다.
- 33년 위기를 다룬 역사기록은 비록 짧지만 로마 금융의 일상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처럼 주요 대부자가 서로 관계를 맺은 결과 체계적 위험이 나타났다. 33년에 로마는 이미 여러번 신용위축과 부동산담보대출 채무불이행 때문에 일어난 금융위기를 겪은 경험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상태였다. 위기가 새로 나타나면 통치자는 앞선 위기에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살펴 지침을 얻었다. 그러면 로마 재무 담당자는 미국이 금융위기를 맞을 때 재무부가 해온 방식대로 움직였다. 즉, 대출을 통해 신용부족을 경감하고, 중개기관을 사용하여 해결책을 실행했다. 33년 위기는 고대로마에서 정치와 금융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보여주기도 함. 위기는 정치 불안기에 뒤이어 발생했다. 정치 박해에 이어진 금융박해라는 특징도 엿보임. 그렇다면 복수는 원래 의도한 범위를 넘었던 셈이다. 티베리우스는 위기를 원로원을 공격하는 무기로 썼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국고를 열어 금융이 더 이상 무너지거나 정치까지 붕괴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 고대경제 연구 권위자인 윌리엄 해리스는 서기 33년 위기를 분석하여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을 짚어냄. 엄청난 금액이 오갈 때 은화를 주고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돈은 금융중개인, 즉 은행업자로 이루어진 정교한 체계 안에서 오갔다. 황제가 은행을 통하여 구제금융을 공급했다는 타키투스의 말을 생각해보자. 정부는 여러 은행을 사용하여, 만기 3년에 무이자로 자산가치의 150퍼센트까지 담보대출을 제공했다.
- 투자자가 노예에게 사업자금을 대고 재량권을 주었다면 페쿨리움이라는 계좌를 통해 노예에게 투자한 자본금까지만 책임을 졌다. 채권자는 페쿨리움에서 추심할 수는 있어도, 해당 대출이 주인의 지시에 따라 발생했다고 입증하지 못한다면 노예 소유주의 자산에서 추심할 수 없었다. 로마의 법과 금융에서 나타난 혁신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이러한 제도구조이다. 개별투자에서 발생할 잠재적 피해가 페쿨리움으로만 한정된다면 투자자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 징세인 조합은 왜 사라졌을까? 공화정 시절 로마법은 유연하고 적응력도 뛰어난 체계였으리라고 말멘디어는 주장. 하지만 로마가 빠르게 확장하며 제국으로 변모하자 경제적 수요는 제도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이때 국가가 관료제를 갖추지 않고 필수 서비스를 외주하는 수단이 징세인 조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징세인 조합은 결국 쇠퇴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에서는 관료조직이 징세인 조합을 대체한 것이다. 징세회사는 제국 초기에는 로마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 몰라도 도급계약의 공개입찰이 줄어들면서 점점 사라져갔다. 심지어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가 야심차게 만든 법전에서는 징세인 조합을 관장하는 법이 빠졌다. 법은 금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만, 금융기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면 법으로 뒷받침해 봤자 소용없다. 로마의 법과 금융은 모두 정치, 경제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고대 주식회사를 다룬 울리케 말멘디어의 연구결과를 보면, 금융이 발전해야 했을 때 로마법은 금융발달에 필요한 요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 해리스는 로마경제에 화폐 공급량을 물리적 한계 이상으로 팽창시킨 주체는 은행업과 대부업이었다고 말한다. 계좌통화가 없었다면, 그리고 투자와 장거리 교역을 뒷받침하는 금융제도가 없었다면 로마는 대병력을 주둔시키지도, 바다를 가로질러 상품을 운송해야 할 만큼 광활하게 확장된 제국을 유지하지도 못했을 것임. 한마디로 로마는 화폐제도나 투자, 신용제도 같은 금융기술 덕분에 제국이 되었다. 금융은 로마의 곁가지가 아니라 생명선이었다.
- 로마는 조폐제도, 은행, 해상계약, 담보, 부동산담보대출, 공공금고, 중앙은행 등 이미 존재했던 금융도구를 도입했음. 하지만 이를 사용한 로마의 상황은 독특했다. 재산이 지배계층에 속하기 위한 명시적 조건으로 제시된 로마에서는 부를 창출하고 기록하며 보여주기 위하여 금융체계가 발전. 통치와 직접적 경제 이해관계를 애초부터 법으로 분리했기 때문에 정교한 신용장이 탄생. 원로원 의원도 돈을 빌려줄 수는 있었지만 직접 사업에 관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금융중개분야에는 투자사실을 숨기거나 독립적 관계로 운영하는 등 방법이 다양했다. 문제를 해결할 수많은 방법 중에는 페쿨리움이라는 법적 형식이 있었다. 최근 학계는 특히 금융중개분야에서 로마경제가 얼마나 정교했는지 입증했다. 로마 금융체계는 오늘날 시각에서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친숙해보일 때가 많다. 은행 같은 현대적 기관과 로마시대 기관이 얼마나 유사하냐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계속 일어난다. 하지만 기관의 이름보다는 기능이 중요. 로마처럼 거대한 제국이 상업을 장려하고 수입을 안정시키녀 위기에 대응하려면 화폐, 공공부채, 구제금융, 징세대리 같은 금융도구를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금융구조가 유연했음은 로마의 오랜 역사로 증명됨. 금융경제 실패를 해결하기 위한 금융수단은 채무탕감 칙령에서 화폐가치 절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징세인 조합의 출현은 로마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특히 눈에 띈다. 로마의 부는 대부분 민간에 속했다. 지배계층은 정복활동 덕분에 부유해졌다. 이렇게 얻은 재산은 어디에든 투자되어야 했고, 실제로도 신용체계를 통해 아래로 흘러갔다. 하지만 신용만으로는 차이자와 대부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 채무 불이행과 분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불황이 오면 정치가들은 채무를 탕감하여 안정을 유지하려 했다. 반면 주식회사 구조에서는 모든 주주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이윤을 주식수에 따라 배분한다면 회사의 이익이 늘어나는 데 비례하여 투자자의 재산도 증가. 주식이 공공연히 거래된다면, 특히 무기명으로 소유할 수 있다면 주식은 이해당사자 사이에 벌어질지도 모를 분쟁을 중재하는 도구가 됨. 로마 정치와 연관하여 보면 징세인 조합주식은 원로원 의원, 기사, 황제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황제가 모든 권력을 쥐게 되자 당연히 징세인회사도 쓸모를 잃음. 따라서 주식회사라는 형식이 정치, 경제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처음 등장했다는 결론을 낼 만한 것이다.

- 중국이 최소한 현대 유럽 관점에서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더 일찍부터 발전하지 못한 데는 이처럼 민간부문을 몰아낸 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음. 국가가 약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강했기 때문. 중요한 금융혁신 중에서 국채는 중국보다 서양에서 훨씬 빨리 나타났다. 유럽에서 서로 끊임없이 싸우던 약소 도시국가들은 투자자들에게 돈을 빌리고 나중에 갚기로 약속하는 방법을 터득했음. 12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국채가 등장했고, 13세기에는 온전한 채권시장이 등장. 같은 시기에 중국에는 지폐가 있었지만 채권은 없었다. 이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전에는 각국별로 돈을 빌려 전쟁비용을 조달하곤 했다. 중국에서는 다양한 금융계약을 다루는 기술이 오래전부터 확립되어 있었고, 서기 1000년 전부터 상업분쟁이나 금융재산권 문제를 재판으로 해결했다. 따라서 중국은 국채시장을 운영할만한 기술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가 될 때까지 중국 정부가 국채를 발행한 적은 없었음. 반대로 정부가 신용을 공급한 사례는 가끔씩 나온다. 중국의 정부는 민간 신용기관을 이용하여 국영사업에 돈을 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간 신용기관과 경쟁했던 것이다.
- 인류학자 벤저민 리 워프는 사고가 언어에 영향을 끼치는 것 못지 않게 언어도 사고에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표현방식과 내용은 서로 뗄 수 없다는 이론을 처음 세운 학자이다. 언어라는 기술은 마치 금융과 같이 개념체계로서 기능함. 언어마다 모두 다른 구조를 지니는데, 이러한 구조 안에서 살다 보면 관점도 영향을 받음. 부호가 과연 자기 부장품이 상징하는 새 경제 매체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후에 쓰인 문헌을 보면 중국 지배자들은 돈과 시장이 지닌 잠재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조개껍데기를 나타내는 기호를 한자에 내포했다는 말은 이후 중국식 사고의 구조에 금융이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관자'의 저자는 정부가 상품가격을 통제하는 편을 지지하면서도, 시장가격체계가 엄청난 사회적 이익을 준다는 사실 역시 잘 알았다. 자유롭게 거래하면 모두 더 잘 살게 되기 때문. '관자'에는 '만물이 유통돼야 비로소 변화가 있고, 변화가 있어야 비로소 가격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옴. 다시 말하면, 시장이 있다면 거래가 일어날 것이고, 거래가 자유로워지면 가격은 내려가고, 그 이익은 모든 지역이 나누어 가지게 된다. 오늘날 세계무역기구 고위층도 시장과 가격의 원리를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 고대도시 중에서도 진시황의 중국통일에 맞서 마지막까지 버틴 임치를 살펴보자. 그는 지배자가 편 실용적 경제정책 때문에 흥미를 끈다. 수공업과 교역에 기반을 두고 경제발전을 도모하 임치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사상가로 꼽히는 관중이 활동했다. 관자를 한사람이 썼는지 한 학파가 썼는지는 중요치 않음. 이 책은 돈이 경제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인식하고 보기 드문 수준까지 상징적 가치를 추상화했다. 관자는 돈이란 재화의 공급과 수요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 위한 기본도구라고 파악. 그리고 돈을 국가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라고 인식했음. 관자가 제시한 통화정책은 아마 실제로도 실행되었을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관자는 이윤추구라는 동기가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강조하기도 햇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것은 이윤이라는 동기 때문. 관자가 제시하는 절묘한 도구는 대부분 이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활용한 것이었다.
- 송나라 지폐는 오늘날에도 천연색 책을 인쇄할 때 쓰인느 4색 동판인쇄술로 찍어낸 최초의 인쇄물. 닥종이는 뽕나무를 비단 생산에 사용한 사천 지역에서 발전하고 완성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유통되어도 버틸만큼 튼튼한 최초의 지폐용지였다. 금융혁신이 일어나려면 문서화, 기록, 계약기술이라는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점토 서판을 발명하고 유라시아 대륙 이곳저곳에서 금속화폐가 탄생한 것처럼, 중국은 내구성이 좋은 종이에 금속판으로 인쇄함으로써 금융혁신의 역사에 유산을 길이 남겼다.
- 중국 과학자들은 수력공학을 연구하여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운하망을 만들어냈고, 또한 철광채광과 금속공학에서도 세계 최고였다. 증기력도 알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중국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대체 뭘까? 제임스 와트, 로버트 풀턴,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왜 중국인이 아니었을까? 중국은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하여 그토록 앞선 기술을 보유했으면서, 또한 관료제 역시 그토록 발달했으면서 세계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기술변혁인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비틀거렸던 것일까? 단순하게 답한다면 우연 때문이다. 와트, 풀턴, 벨 같은 천재는 드물다. 어쩌면 산업혁명은 특정한 역사의 순간에 천재성이 우연히 한데 모여 생긴 유전자의 장난일 것이다. 이러한 우연이론에 반론들 제기한 사람은 대만 경제학자 저스틴 린(린이푸)이다. 린은 유전자 변이만큼 확률규칙이 잘 들어맞는 것도 드물다고 지적. 엄청난 천재가 태어날 가능성은 인구의 함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송나라 시절에 세계에서 중국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 주장을 확장하여 천재가 태어났더라도 흥미로운 문제에 노출시키며 육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 교육제도는 오로지 평등을 추구했으니, 에디슨이 중국 고전을 외우느라 6년을 보내야 했다면 전기를 갖고 놀 시간이 있었겠느냐는 의문도 품을만 하다. 어쨌든 송나라 시절 중국 도시의 밀도는 창조적 지식이 흘러넘쳐 혁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린은 우연만으로는 차이를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소위 니덤 수수께끼에 매달린 명석한 학자는 수도 없이 많다. 린은 서양의 과학적 실험방법론이 우연에 따른 발견과정을 체계적으로 가속하고 조직하며 최적으로 활용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차이를 만들어낸 요소는 과학적 방법론이다. 중국 문명이 계속 달성했던 성공자체도 또 다른 요소다. 금융해법을 보면 중국은 계획, 자원배분, 위험 최소화 등 수없이 많은 복잡한 문제를 잘 풀어왔다. 자기 나름대로 경로를 밟으며, 화폐를 발행하고, 시장을 발달시키기도 했다. 역사학자 마크 엘빈은 송나라가 높은 균형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 제1 천년기의 농업을 살펴보면 중국은 더 혁신할 필요가 없어 보일만큼 성공적으로 발전. 반면 유럽은 낮은 수준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술을 급격히 바꿔야 할 필요가 더 컸다. 캘리포니아대 케네스 포메란츠 교수는 지리결정론이라는 급진적 사상을 제시. 그에 따르면 중국의 천연자원은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광석은 운송이 편리한 하천과 거리가 먼 곳에 주로 매장되어 있었다. 중국의 집약적 산업화를 막은 것은 바로 지형이었다. 그런데 이런 설명에는 기술발전을 뒷받침하는 금융의 역할이 무시되고 있다. 기술에는 천재성이 필요하지만 도한 자본도 필요함. 철도가 존재하려면 철로를 깔고 열차를 살 자금이 필요. 하지만 투자에 성공하면 수익이 난다. 그리고 사업가에게는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는 대신 모험을 계속할 동기가 있어야 한다. 사업가가 혁신으로 돈을 벌려면 특허 같은 법적 보호수단이 있어야 함. 사업가가 이룬 혁신을 국가가 빼앗아 간다면 인적자본을 투자할 이유가 없어짐. 자본시장과 지식재산권 보호는 사업가의 동기와 자본투자를 지탱하는 보조요인. 중앙집권화한 중구 정부는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는 개인에게 보상할 여력을 갖췄지만, 한편 시장이 새로운 발상에 자금을 대지는 못하게 했다.
- 산업혁명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 중에도 19세기 유럽의 금융제도가 필수적 보조요소였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유럽에서는 소득불균형이 심화하고 소득이 투자자에게 집중됨. 손꼽히는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은 기술을 전문으로 연구함. 그는 영국 산업혁명 시기의 소득 불평등을 연구한 2005년 논문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공장방식을 도입하는 데 드는 자금을 공급하려면 소득이 자본가에게 이전되어야 한다. 이윤배분 폭이 커졌기 때문에 자본수요를 충족하고 산출을 늘리는 데 드는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불평등 심화라는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투자자에게 이윤으로 보상하는 금융체계가 투자를 촉진하고 기술발전을 뒷받침했다. 투자에 보상하는 체계를 개발하는 과정은 주로 유업에서 오랫동안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중국과 서양의 차이는 기술발전에서 벌어지기 전에 금융 발달에서 먼저 벌어졌다는 것이 가장 강력한 근거임. 유럽 금융시장은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생산공정이 기계화될 때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님. 상업은행과 조직화한 증권시장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최소한 2세기전부터 유럽에 존재했음. 19세기에 철도회사가 철로를 깔고 기차를 만들어 자본을 얻으려고 접촉한 폭넓은 투자자 층은 거액을 내고 미래에 돌려받기로 하는 방식에 익숙했다. 당시 서양에는 투자기회를 얻으려는 수요와, 이 수료를 충족하는 상품을 개발할 구조화된 노하우가 존재했다. 반면 중국에는 기술 우위를 지닌 사업체와 자본을 지닌 민간 투자자를 한데 모아 줄 체계적 수단이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중국에는 재화와 상품을 거래할 거대하고 체계적 시장이 있었지만, 자본시장의 발달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 유럽의 금융발달을 핵심단계별로 나누면, 첫째는 금융제도의 출현, 둘째는 증권시장의 발달, 셋째는 주식회사의 출현, 넷째는 주식시장의 갑작스런 폭발, 다섯째는 위험의 수량화, 마지막은 전 세계를 향한 제도전파다. 서기 1000년 이후 유럽 금융구조가 이처럼 급격하게 재편되자 여러 문제가 놀라울 정도로 신기하게 해결되었지만, 이 해결책은 미묘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때때로 사회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 결과 새로운 혁신과 변화가 이어졌다. 제2천년기 동안 유럽은 금융을 시험하는 거대한 실험장이 되었다. 현대금융기술이 발달한 과정은 절대 일직선이 아니었음. 새로운 발상은 제대로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대실패를 겪기도 했다.
- 은행이라는 조직은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하고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함. 그리고 다른 일도 한다. 영업하는 지역의 법적 환경에 적합하다면 지분투자를 하기도 하고, 증권발행을 주선하기도 하며, 회사 경영에 참여하기도 함. 이러한 기준으로 본다면 성전기사단은 어엿한 은행이었음. 성전기사단의 자사을 다른 기사단으로 이전하거나, 기사단을 해산하라고 명령할 권리는 교황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 은행을 최종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카톨릭교회였다. 하지만 이런 소유권에 의미가 있으려면 일단 기사단이 종말을 맞아야 한다. 기사단은 존재했던 대부분의 기간동안 입단과 운영구조 승계규칙을 세심하게 정해 둔 일종의 조합으로 운영되었다. 조직의 사명을 확장하려는 수단으로 기사단의 자산은 기사단원만이 관리할 수 있었다. 성전기사단은 교황에게 조직설립을 인가받았으며, 그리하여 통합된 기관으로서 움직일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음. 이 말은 예컨대 파리 지부가 진 채무는 런던지부의 채무로도 취급되었다는 이야기다. 은행은 공립이든 사립이든 비영리든 두 가지 이점을 누림. 금융전문성이 첫째이고 자본이 둘째다. 금융 전문성은 차입자를 평가하고 채무불이행이 위험을 통제하며,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예금, 출금, 수입, 지출을 평가, 나열, 문서화, 기록하는 능력을 포함함. 이러한 기술을 성전기사단은 처음에 순례자 금융에 진출하며 발달시키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의 사실상 재무담당자로 일하며 완벽하게 갈고 닦았다. 게다가 기사단에는 자본도 있었다. 성전기사단의 최종 자산상태를 기록한 장부는 없지만 서유럽 전역에 소유한 재산이 엄청나게 많다는 말은 돌았다. 이러한 재산은 어떻게 얻은 것일까? 재산 중 일부는 기부형식으로 들어왔다. 독실한 신자가 돈, 땅, 보물을 기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 수도자가 기사단에 입단하면서 가져온 개인재산에서 얻기도 했음. 놀랄만큼 많은 재산이 유산 형태로 들어오기도 했다.
- 양도가능한 봉건적 권리는 이후 유럽 금융구조 전체의 기반이 되었다. 12세기초 국가와 도시는 지대, 농산물, 통행료, 세금, 해상관세, 광업권, 전통적 노역 등 봉건시대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현금화하여 재정을 마련했음. 이런 금융 시스템 덕에 봉건제적 채무를 사용하여 통치자와 지주는 돈을 빌리고, 투자자는 이익을 받고 재투자했다. 성전기사단은 관할권의 제도와 센서스 계약이 출현한 지 오랜 후에야 등장했음에도 이를 다른 진취적 대부자와 마찬가지로 자기자본을 굴리는 데 이용했다. 이러한 계약에는 이를 부여하는 나라나 통치자의 권력을 잠식한다는 위험한 문제가 있었다. 백작, 공작, 도시, 공화국이 이러한 금융방식으로 필요한 현금을 조달하자 국가의 통제력이 감소했을 뿐 아니라 채무불이행 또는 몰수 위험도 커졌다. 대략 1세기 동안 성전기사단은 토지 수천 곳과 복잡하게 얽힌 계약권리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유럽의 주요한 경제세력이 된 동시에 돈이 필요한 군주가 기회를 엿보는 표적이 되었다.
- 돈이 필요했던 유럽 통치자들은 성전기사단의 자산을 분할하고 금융의무(압류하거나 재양도한 재산, 센서스 계약, 왕실 대여금 등)에서 해방되어 잠시나마 한숨 돌렸지만, 성전기사단이 만들어낸 국제적 예치 및 결제체계가 파괴됨으로써 손실을 입은 것은 결국 유럽 전체였다. 성전기사단이 몰락하며 초래된 제도의 진공상태를 메꾼 사람들은 종국에는 이탈리아 은행업자들이었다.
-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성전기사단이 처음부터 은행업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염두에 두고 설립된 것은 아니다. 필요와 기회에 따라 그렇게 발전한 것이다. 역사가 다르게 굴러갔다면 예치와 중개라는 역할은 예컨대 에드워드 1세에게 돈을 빌려준 루카(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민간은행업자가 맡았을지도 모름. 또 역사가 달리 흘러갔다면 신성로마제국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되어, 중국에서처럼 황제가 권력과 재정관리의 중심에 있으면서 유럽 전역을 장악하고 예치와 중개역할을 맡았을 수도 있다. 금융기술은 중복되고 적응하며 때로 변덕스러움. 어떤 제도를 두고 사람들은 절대 침해하면 안되고 필연적이며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역사적 사건이 우연에 따라 귀결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같은 금융문제를 해결하는 제도가 지금과 달리 발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금융혁신이라 시간, 장소, 기회의 변덕이 연속적으로 빚어낸 역사적 우연이다.
- 성전기사단은 안정적이고 수명이 긴 체계를 제공함으로써 미래에 이렁날 결제를 두고 체결한 계약을 신뢰할 수 있게 했다. 기사단은 청빈을 서약한 윤리적 개인을 선별하여 받아들였기에 부정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았다. 게다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영업망 덕분에 시간뿐 아니라 공간을 넘나들며 돈을 송금할 방법도 제공. 하지만 성전기사단을 이상적 금융기관으로 만든 이러한 특징은 동시에 기사단이 실패한 원인이기도 함. 기사단은 소유한 부 때문에 정치적 표적이 되었고, 원래 사명이 없어지자 14세기 초반부터는 카톨릭교회에조차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성지를 잃었으니 성지의 수호자도 불필요해진 것이다. 사실 성전기사단이 지닌 부는 교회 전체가 지닌 재산규모에 버금갈 정도였음. 성전기사단 이야기는 한동안 안정적으로 발달했던 대안기관 금융구조 사례이기에 중요하다. 기사단은 오늘날 중앙은행과 달리 특정 국가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특징 때문에 결국 몰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중앙은행을 성전기사단에 비추어 보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13세기에 고리대금업 금지가 더더욱 강조된 데는 종교뿐 아니라 법과 사상의 영향도 있다. 사상 쪽 뿌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다. 중세 후반에 다시 학문적 주목을 받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따르면 고리대금의 폐해는 다음과 같다.
그 중에서도 고리대금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 되는데, 지당한 일이다. 화폐의 본래 기능인 교역과정이 아니라 화폐 자체에서 이득을 취하기 때문. 화폐는 교역에 쓰라고 만든 것이지 이자를 낳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돈의 증식을 '돈이 낳은 돈'이라는 용어로 가리키는 것은 새끼가 어미를 닮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리대금은 어떠한 재산 획득 기술보다도 자연에 어긋난다.
이 글을 보면 금융의 악덕 중에서도 가장 악한 것은 차입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금융업자가 오만하게도 생명을 창조하여 신에게 도전한다는 것. 금융업자가 지닌 돈은 돈을 낳는다. 돈은 무생물이면서도 자손을 만드는 일좆의 자동인형이자 인간이 신의 특권에 손을 뻗어 만든 괴물이다. 돈은 '죽은 것'이므로 번식하게 두어서는 안된다. 이처럼 금융이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석한 소위 스콜라 철학자들은 금융의 악덕 목록에 한 가지 죄를 덧붙였다. 바로 시간 자체를 도둑질한다는 죄목이다. 기욤 도세르는 1220년에 "고리대금업자는 모든 생명에 주어진 시간을 팔기 때문에 자연법칙을 위배한다"라고 썼다. 금융계약은 주기적으로 이자를 매김으로써 시간에 가격을 매기고, 존재의 흐름을 현금의 흐름으로 전락시킨다. 그러고 보면 베네치아 영구채의 만기는 정말로 신에게만 허용된 시간인 영원이었다.
- 새로 등장한 베네치아 채권과 이를 거래하는 리알토의 2차시장은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중요한 금융기술이었다. 국가에는 미래에서 현재로 자원을 옮겨 자본을 집중하고 군사적 목적에 사용하는 수단이었음. 전략적 위협과 기회에 자원이동으로 대응할 만하게 된 것임. 그리고 미래에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 베네치아에 있는지 채권보유자가 확인할 유인이 생겼다는 부산물도 발생. 베네치아는 국가부채를 늘리고 유지하는 데 시민이 발언권을 가진 자치공화국이었으므로 시간을 넘나들며 돈을 움직이고 궁극적으로 국가자웡늘 유지하고 성장시킬 책임을 공유하는 합작회사이기도 했다. 이처럼 새로운 자본이 등장하자 마찬가지로 새로운 관점에 따라, 즉 시간 자체가 세상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이라 재정의하고 시간을 세속화하게 되었음. 베네치아 리알토의 금융구조는 이탈리아 전체로, 그리고 유럽 각지에 있는 금융중심지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시간에 가격이 매겨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새로 등장한 재산과 투자방식으로 돈을 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리알코의 산자코모 성당에 이상하리만치 큰 시계를 건 것은 의미 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옛날 이탈리아 금융업자는 시계를 보고 시간이 중요한 차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중국에서는 중앙정부가 방대하고 복잡한 관료체제를 통제하려다 보니 회계혁명이 일어난 반면, 유럽에서는 사업이 시간흐름에 따라 어떻게 발전해나갔는지 계산하기 위해 수량화하고 기록하는 수단으로 회계가 출현. 기록수단이 불라에서 서판으로, 파피루스에서 죽간으로, 다시 양피지에서 종이로 변해가는 와중에도 사업과 금융의 근본은 언제나 숫자를 세고 기록하며 특정 시점의 경제가치를 검증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은 절차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결정하다고 정언한 바, 현실이 기술을 만드는 한편 기술도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올바르게 파악했다.
- 민간 소유대 공공 소유 쟁점을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과연 제분회사 소유주가 경영책임을 온전히 위임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 주식회사에서 드러나는 천재성고 동시에 문제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경영자가 제분소에서 나오는 이익을 대부분 가져가고 주주에게 성과를 왜곡해서 보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사상가와 회계 담당자가 옛날부터 제기한 대리인 문제는 공기업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툴루즈 회사는 위임, 경영, 감독 문제를 푸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오늘날 바자클 회사는 현대적 주식회사의 시조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로 시조가 아니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해 시조가 아니라고도 하기 어렵다. 제분소는 중세 후기 유럽 어디에나 있었다. 수력을 활용한 것은 당시 가장 중요한 기술진보였고, 제분소를 제대로 지으려면 상당한 자본을 투자해야 했다. 프랑스 남부에 있던 다른 회사도 틀림없이 주주자본주의, 유한책임, 환금성 같은 발상을 툴루즈에서 빌려왔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툴루즈 회사가 그러한 발상을 빌려왔을지도 모른다. 툴루즈 회사가 알려진 것은 역사기록이 우연히 남았고, 학자들이 이를 근거로 분석하는 데 기여한 덕분임. 사실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여러 사업을 가까이서 관찰하다 보면, 현대 주식회사의 조상일지도 모를 유사한 사업체가 있었다는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독일 광업회사들은 쿡센이라는 주식을 발행했다. 스웨덴의 유서 깊은 회사 스토라엔소는 기원이 13세기까지 올라가는데, 1347년에 받은 칙허장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지분을 나눈 합작 채광회사로 설립된 스토라엔소의 형태은 아마 툴루즈 최초의 제분회사와 비슷했을 것임. 카사 디 산조르조 역시 현대적 주식회사의 특징을 여럿 지녔다는 사실도 앞에서 살펴보았다. 유럽 중세 후기는 사업체의 형태를 다양하게 만들고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실험한 시기였던 듯 하다.
- 이처럼 중세 유럽 이곳저곳에서 주식투자를 통해 자본을 출자받은 제분회사와 채광회사를 살펴보면 자본주의란 역사에 반복하여 출현하는 경제적 해결책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계보는 단선적이지도 유일하지도 않다. 오히려 경제적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고도 흔히 나타나는 돌연변이에 가까움. 앞에서 본대로 로마 공화정 시절에도 등장했다가 황실의 후원제도에 희생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경제를 압돟며 지배한 것이 아니라, 등장했다가 사라지면서도 미약하게 살아남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사실 주주자본주의는 제대로 된 주변환경과 정치적 조건을 갖추어야만 번영 가능한 연약한 제도일지도 모른다. 모택동은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라 보았지만 자본주의 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등장할 수 있는 만큼 사라질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수많은 균형상태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 영국이 탐험 항해를 시작한 초기에는 재정확충이 시급했던 왕실이 사업기회를 제공하여 탐사가 시작된 사례가 대부분이었음.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버지니아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골칫거리였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가 반란에 실패한 후 왕권을 강화하는 등 영국이 강력한 힘을 떨쳤던 시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 재임기 영국의 금융은 취약했다. 국내 자본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는 신용장을 개설하려고 벨기에 안트베르펜 은행업자에게 사절을 보내고, 정부 세수와 왕실의 재산을 담보로 잡히며, 단기 차입금을 만기마다 연장하고, 영국이 채무를 불이행할지도 모른다는 매우 그럴듯한 가능성을 반영하여 점점 높아지는 이자를 물면서도 끊임없이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려가며 연명해야 했다. 영국의 신용도는 형편없었다. 차입금을 새로 들여오려면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는데, 제노바의 카사 디 산조르조 같이 신용도가 좋은 회사 주식의 배당률이 3-4%에 불과하던 시절에 영국 정부는 이자로 14%를 내야 했다. 유럽 대륙에 있는 도시국가와는 달리 영국 도시에는 채권을 발행하던 전통도 없었고, 증권을 사서 거래하려는 투자자층이 국내에 폭넓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영국은 금융발달이 더딘 탓에 전략적 열위에 처했다. 영국 정부에는 대안이 없다시피했다. 세금을 매기거나 차입하거나 혹은 권리를 파는 수밖에 없었는데, 팔 수 있는 권리라면 이미 대부분 팔린 뒤였다. 예컨대 해외무역 대부분을 독점할 권리는 오래전부터 상업모험가 회사 소유였음. 이 회사는 지분을 나눈 회사라기보다는 무역권을 독점하려고 서로 연합한 상인조합에 가까웠으며 따라서 길드 기능을 했다. 회사 구성원은 영국과 저지대 국가 사이 직물교역을 장악하고, 다른 북유럽 항구에서는 독일의 한자동맹과 경쟁하면 무역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상업모험가 회사에 부여한 무역권을 재조정하려다가는 영국의 국제경쟁력에 문제가 생길 위험이 었었다.
- '상업모험가'가 독점한 무역권에는 흥미로운 허점이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까지 영국 상인이 자주 접촉하지 않던 새로운 지역, 사람 항구와 교역할 권리를 다른 회사에 줄 수 있었다. 원한다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역과 독점적으로 교역할 권리를 허가할 수도 있었다. 만약 어떤 영국인이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땅이나, '상업모험가'가 아직 장악하거나 그러려고 시도하지 않은 무력로 또는 항구를 발견했다면 그는 새로 독점권을 가질 수 있었다.
- 캐세이 회사는 모험회사로서 실패했지만, 탐험을 위해 설립된 영국 회사가 살아남아 번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식회사라는 형태는 자본을 사업체로 끌어올 유연한 사업구조를 제공했다. 영국은 비록 캐세이 회사에 실망했어도 계속하여 탐사와 해외무역을 전담하는 회사에 칙허를 내주었음. 예컨대 버지니아 회사는 미국 대서양 해안 중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유명하고, 허드슨만 회사는 지금의 캐나다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영업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동인도 회사는 1600년에 칙허를 받은 후 남아시아 교역에서 영국의 교두보를 마련했고 인도에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데도 앞장섰다. 이 회사들은 모두 설립될 때부터 위험한 사업을 영위했고,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다. 투자자들은 품질이 의심스러운 금광석, 신대륙에서 살아남지 못할 확률, 태평양에서 스페인인과 마주치면 일어날 싸움,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을 상대로 벌이는 경쟁 등 심각한 불확실성과 마주하면서 돈을 쏟아부었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오노르 델 바자클이 설립될 때와 흡사한 방식으로 몇몇 네덜란드 도시의 상인들에게 후원을 받은 여러 무역회사가 합병하여 1602년 탄생. 1600년에 상인들이 한 회사 아래 연합하여 설립된 영국 동인도 회사 사례를 따른 것. 두 회사는 포르투갈과 경쟁하여 이윤이 많이 남는 아시아 향신료 무역에 참여하려고 했고, 마침내 성공. 그 후 2세기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무역을 장악했고,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와 중국무역을 지배. 아시아로 통하는 해양항로과 신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지만 이를 지배한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 VOC와 오늘날 주식회사의 모든 특징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암스테르담에 자본을 거래하는 주식시장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금융혁신이다. VOC는 주식을 거래하는 공개시장 덕에 여러가지가 달성되었다.
(1) 투자자는 주식을 샀다면 팔 수도 있다는 구체적 증거를 시장에서 얻었다. 이제 베네치아 프레스티티 이래 유럽에 존재했던 채권과 마찬가지 권리를 주식도 지니게 되었기 때문에 유동성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2) 시장은 도박하고 투기하려는 인간 고유의 경향을 활용했다. 어떤 매매자는 천성부터 비관적인 반면 어떤 매매자는 천성부터 낙관적이라 묘사한 드 라 베가는, 몇 년 동안 배당을 지급하지 못한 회사의 재산을 두고 자연스레 거래가 이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VOC 주식이 공개발행되자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는 미래 향신료 무역을 예상하는 여론 측정기가 되었음. 바자클 회사 주식은 15세기에도 자유롭게 거래가능했고, 툴루즈 곡식시장은 분명 투기가 벌어지는 장소였지만, 결국 이때까지는 낙관론자와 비관론자가 광란을 벌이는 주식시장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암스테르담 투기꾼들로부터 탐욕을 이끌어 낸 요소는 엄청난 부를 가져올 잠재력과 심각한 재앙을 맞을 위협이 공존하던 사업체, 바로 VOC의 불확실성과 위험 자체였을 것이다.
- 주식회사가 해외교역,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식민지 확장에 적합한 형태였느냐는 문제는 지금도 논쟁 대상임.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우월한 금융기술 덕분에 비교적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목표가 지나치게 많은 (그리고 이를 달성할 자금이 없는) 왕실보다는 카사 디 산조르조와 마찬가지로 상인들이 장악한 통치기관이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전략적 판단을 내리기에 적합했을 것임. 하지만 금을 찾으로 배핀섬 탐험대를 조직하거나, 부유한 부르주아가 지갑을 열 만큼 독특한 향이 나는 씨앗을 가지고 오기 위해 배를 아프리카 너머로 왕복시켜야 하는 회사 주식에 큰 돈을 들이려는 사람들은 무모하리만큼 낙관적이었다. 두번째로 탄생한 주식회사와 주식시장은 신중함과는 거리가 매우 멀어보인다.
- 네덜란드공화국의 국력이 절정에 달한 1687년 11월, 공화국 통령이던 오라녜공 빌럼 3세(윌리엄 3세)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4배 규모에 이르는 함대를 편성하고 영국해협을 건너 데본에 상륙했다. 항해자금은 암스테르담에서 손꼽히던 상인 은행업자들에게 빌려 마련했음. 독일, 스코틀랜드, 스위서, 스칸디나비아 출신 용병으로 조직한 침략군은 저항다운 저항을 겪지 않았다. 사실은 환영하는 이도 많았다. 심지어 영국 육해군이 속속 네덜란드군에 합류하기도 했는데, 이는 카톨릭교도인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민심을 크게 잃었기 때문이다. 여러 도시에서 카톨릭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해 말이 되자 영국 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사실상 증발해 버렸다. 심지어 상류층에 속한 지주조차도 싸워봐야 손해만 보리라고 생각했다. 제임스 2세는 빌럼이 합법적 권력의 마지막 상징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하려고 영국 옥새를 템즈강에 던져버리고 프랑스로 도주했고, 빌럼과 메리 2세는 공동왕으로서 영국을 다스리게 됨. 대부분 개신교도였던 영국 대중은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침략을 환영했고, 정권은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바뀌었지만, 어쨌든 1688년 네덜란드가 영국을 정복한 사건은 두 나라 모두에 깊고 오래가는 충격을 남겼다. 정치사에서는 이를 영국 왕권이 축소되고 의회민주주의가 완전히 자리잡도록 자극한 중요한 단계라 평가한다.
- 금융사에서 1688년은 대영제국이 국제적 금융강국으로 떠오르는 분수령이다. 네덜란드에서 왕을따라 온 은행업자와 금융업자는 개방된 자본시장으로 가는 지침, 채권을 사용하여 정부 운영자금을 대는 방법, 투기심리를 자극할 복권, 불로소득자 계층에게 제공할 종신임차료와 종신연금, 그리고 재정정책 도구로 쓸 만한 중앙은행 등을 망라하는 네덜란드 금융의 유전자정보를 가져왔다. 그리고 영국인은 이런 도구에 넘쳐나는 상상력을 더하여 1688년 이전 영국 사회가 감히 상상하지 못하던 방식으로 적용. 명예혁명은 영국인의 금융 상상력을 해방했다. 대영제국이 들어선 새로운 금융시대를 가리켜 작가이자 사업가인 대니얼 디포는 '기획의 시대'(projecting age)'라 명명
- 영국에서 새로 등장한 회사를 산업별로 보면 광업, 인양, 어업, 임업, 농업, 직조 등 기계를 이용한 제조업, 해외교역, 기반시설 건설업, 부동산, 대여, 금융 등으로 나뉨. 영국이 독점법을 도입한 1623년 이후에는 새로운 발명을 통해 이익을 얻을 독점권이 발명자 몫으로 돌아갔다. 1688년 이후 새로 등장한 금융시장은 창의력과 지식재산권을 자본과 혼인시킨 것이다. 혁신동력이었을 주식회사가 경제에서 지닌 중요성은 다른 구성요소에 비하여 극적으로 커졌다. 역사가 윌리엄 로빈슨 스코트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주식회사는 1695년에 대영제국 국부 중 1.3%를 차지했지만 1720년에는 13%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 주식회사는 무역독점 특권에 의존하는 소수상인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회사 모임에서, 서로 무관한 투기꾼들이 부자가 될 꿈을 꾸며 새로운 발상이나 특허에 열광적으로 투자한 자본이 가벼운 규제만을 받으며 한데 모인 장소로 바뀌었다.
- 일반적 시각에 따르면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중반에 생산공정 기계화와 공업의 분업으로 경제적 전환이 완료되며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윌리엄 로빈슨 스코트는 세 권에 달하는 대규모 연구결과에서, 산업혁명의 씨앗은 그보다 훨씬 앞서 1720년까지 이어진 기획의 시대에 뿌려졌다고 주장. 명예혁명 이후 설립된 회사목록을 살펴본 후라면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기계화, 혁신, 재산권, 자본 등 모든 요소가 그때 존재했다. 기획의 시대에는 이렇게 새로운 회사들이 폭발하듯 출현하는 사건이 왜 네덜란드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17세기가 저물무렵 암스테르담에는 런던이상으로 세련된 금융기법이 있었음. 17세기 초 런던 시장이 등장하는 데는 명예혁명과 함께 들어온 네덜란드 금융업자도 공헌했다. 영국 증권과 은행제도의 기본구조 및 작동방식은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빌려온 것이다. 채권시장, 연금 및 기타 저축 수단이 발달한 네덜란드 등 유럽 대륙 경제권에서는 자본이 공급되면 투자증서 시장이 움직인다는 사실도 이미 입증되었다. 네덜란드인은 VOC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주식시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왜 다이빙벨 계획, 종이회사, 제련사업이 거래되는 주식시장은 없었을까? 아마 명예혁명 자체가 변화의 정신에 촉매역할을 했을 것임. 마찬가지로 왜 90년대에 유럽이나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만 기술주 거품이 일었는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임. 세 시장 모두 금융제도와 활발하게 돌아가는 기술연구 프로그램을 갖추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변혁을 일으킬 가능성, 새로운 마케팅 모형과 통신수단, 옛 기술의 죽음, 이익보다는 클릭수와 판매량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새 시대의 금융 등을 논하며 진정한 열기가 시작된 곳은 분명 미국이었음
-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잇는 그 유명한 삼각무역은 1711년에야 시작됨. 삼각무역은 18세기 서양사회에서 경쟁력이 순환하는 주된 방식이었다. 공업화된 영국 북서부 도시의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은 아프리카로 실려 가 노예와 교환되고, 노예는 악명놓은 중간항로(아프리카 서해안과 서인도제도를 잇는 항로)를 통해 카리브해 섬으로 실려와 조직적으로 억압받으며 본토에 팔 작물을 생산. 그리고 노예를 팔아 남은 이윤으로 구입한 설탕과 사탕수수 같은 상품이 유럽으로 실려왔다.
- 노예무역 분야에서 손꼽히는 역사가 조지프 이니코리는 삼각무역이 활성화된 덕분에 대영제국이 18세기에 기계화, 공업화가 발생했고, 재화와 사람이 멕시코만류를 따라 크게 순환하며 간접적으로 현대 유럽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함. 그 말이 맞을 것이다. 1711년에 남해회사에 투자한 투자자는 이 회삭 교역하여 세계경제를 바꾸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임. 하지만 금과 은과 남아메리카 플랜테이션 농업 이미지를 덧칠하며 맹목적 자국중심주의를 주장한 대니얼 디포의 글은, 영국 정부에 받을 돈이 있는 채권자가 연체되는 채권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누구도 아닌 총리가 설립하고 운영하며 아시엔토까지 소유한 새 회사에 기꺼이 운을 걸게 만들 만했다
- 금융시장의 실수를 기록한 '어리석음을 비추는 위대한 거울'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지혜를 실었다. 여기에 실린 묘사가 서브프라임 위기가 일어난 08년에도 딱 들어맞아 보이는 것도 사실. 하지만 책의 분석결과에는 우의의 언어라는 한계가 있음. 존 로가 낙낙한 옷을 걸치고 하늘에 떠 있는 신들로 묘사될 뿐 상세한 통화정책을 나타낼 수 없었듯이, '어리석음을 비추는 위대한 거울'을 그린 화가들이 쓴 우의의 언어로는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에서 새로 발전하던 주식시장이 대표하는 복잡한 혁신, 도구, 시장, 계약, 그리고 정보흐름을 나타낼 수 없었다. 이 형상들이 그토록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이유는 원형에 호소하기 때문. 우의라는 언어는 수학과 시장의 논리에 비하여 의식의 훨씬 깊은 곳에 박혀 있음. 이성적인 존 로와 그가 만든 시스템이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었듯이 수학적 사고가 저지른 명백한 실수에 맞닥뜨리자 사회는 붕괴를 이해하기 위하여 더 오래된 언어로 되돌아갔다. 지금도 같은 실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최근에 붕괴한 일 주택저당대출 유동화는 손쓸 수 없이 복잡하여 결국 실패한 금융혁신으로 일축되고, 사회는 현대에 일어난 위기를 유명 금융업자가 악당으로 출연하는 단순한 도덕극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원형은 무의식에 보편적으로 호소력이 있기 때문에 위험다. 선출된 공무원들이 유권자와 소통해야 할 민주주의 사회에선 더욱 그러함. 두뇌를 이루는 여러 부분 중에서도 신화와 이야기를 통해 사고하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마치 오래전부터 인간의 행동을 점점 더 많이 장악한 이성적 사고에 불만을 품고 질투하다가 이성이 실패를 겪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 유럽은 1720년에 대규모 주식 거품 붕괴를 겪고 움츠러들었고, 그 후 수십년 동안 금융기술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 거품방지법은 영국에서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지분을 거래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제외한 주식거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스타트 로테르담과 같이 성공을 거둔 회사주식조차 현금화하기 어려웠다. 주식거래는 18세기 말까지 사실상 중단되었다가 1820년대가 되어서야 시장이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주식금융이 죽은 한 세기를 보냈다. 18세기 내내 인가를 받은 회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프랑스에서는 미시시피회사 주식이 계속 거래되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눈에 띌 만큼 활발하게 대중을 상대로 발행되는 주식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주식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법적 규제로 심했던 18세기와 19세기 초반에 산업혁명에 일어나는 사실은 굉장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 미국 독립전쟁 지도자 중 다수는 토지투기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됨. 오하이오 회사를 설립한 버니지아 부자 중에는 조지 워싱턴의 아버지와 형제 두 명이 끼어 있다. 회사는 1748년에 왕에게 인가받고 오하이오 계곡 땅 800제곱킬로미터를 할당받았다. 프렌치-인디언 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이 버지니아 연대를 지휘하여 이름을 알리게 된 듀케인 전투의 전장이었던 지금의 피츠버그가 바로 오하이오 회사가 얻은 부지이다. 프랑스는 이 땅의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써 영국의 지배력뿐 아니라 유명한 버지니아 땅투기꾼의 토지 소유권에도 도전하는 셈이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서부개발에 관심있던 투자자들은 불쾌해했다. 전쟁이 끝난 후 1763년에 의회는 앨러게니산맥 서쪽 땅을 원주민 소유지로 보존한다고 선언한다. 오하이오 회사는 서부지역 토지에 투기하기 위해 설립된 수많은 회사 중 하나였다. 1749년 설립된 로열 컴퍼니 오브 버지니아에는 앞으로 대통령의 아버지가 될 피터 제퍼슨이 연관된다. 이 회사는 1763년 선언문 때문에 프렌치-인디언 전쟁 이후 인허가를 갱신받지 못한다. 서부지역 토지에 관심 있던 식민지인은 버지니아 사람들 말고도 많았다. 1773년에는 저명한 필라델피아 상인들이 원주민의 당을 매입하여 개발하려고 일리노이 회사와 워배시 회사를 설립. 벤데일리아 회사는 현재 웨스터버지니아에 속한 땅을 요구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아들도 이 회사 이사였다. 버지니아인과 펜실베니아인들은 서부 소유권을 두고 험악하게 대립했지만, 서쪽으로 팽창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영국의 정책이 걸림돌이기는 둘다 마찬가지였다.
- 조지워싱턴은 아메리카 토지회사가 설립되던 초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역사학자 바버라 라스무센에 따르면 워싱턴의 월폴 주식회사, 미시시피 회사, 군사모험회사, 디즈밀 습지회사 주식을 통해 보유한 땅은 총 250제곱킬로미터가 넘었다. 이러한 토지회사가 제시한 사업계획은 비옥하고 넓은 땅을 취득하고 여러 구획으로 분할하여 기본 기반시설을 개발한 다음 여기에 정착할 미국인 또는 외국인에게 파는 것이었다. 사실 오하이오 회사의 토지소유권에는 일정 기일 안에 토지에 정착할 의무가 명시적으로 못 박혀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가 소유권 분쟁을 벌여야 하고, 개발에 투자할 경화가 부족하며, 정착민 입장에서도 땅을 취득할 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달성하기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자금제공은 필수였다. 오하이오 지역 정착민에게는 부동산을 담보로 하는 금융조건이 필요했을 것이다. 토지회사가 세운 계획이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신용뿐이었다. 결국 식민지의 부동산담보대출은 토지은행과 마찬가지로 제약을 받았고, 초창기 아메리카 토지회사가 설립될 당시 품었던 희망은 서부개척에 걸린 제약 때문에 꺾였다. 그러니 워싱턴, 애덤스, 제퍼슨, 프랭클린 가문이 왜 독립을 지지할 마음을 먹었는지 이해가 한다.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하면 서부 토지개방, 부동산담보대출, 최적통화정책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었다. 금융은 주식회사를 통한 담보대출이나 부동산 투기와 관계가 밀접하므로 독립을 추진할 중요 요인이 되었다.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의 금융 역시 거품방지법이나 1763년 포고령에서 자유롭게 풀려나 해방된다.
- 마르크스나 엥겔스라면 자본시장이 만들어낸 이 엄청난 숫자를 어떻게 보았을지 잠시 생각해 보자. 1870년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시세를 발표하던 금융자산 가치는 대략 36억 파운드로, 당시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2파운드씩 나누어줄 수 있는 금액이다. 마르크스가 가치평가 척도로 선호한 노동단위로 환산해보면 더 충격적이다. 1860년대 런던에 보통 노동자는 한 주에 20실링, 즉 1파운드를 받았으니 1년에는 52파운드를 번 셈이다. 노동가능기간이 50년이라고치면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던 자본은 노동자 140만명이 평생 일한 만큼과 동일하다.
- 1870년 당시 마르크스는 런던 자본시장이 우선은 노동자에게 노예와 같은 임금을 지급하여 가치를 빨아들인 후 초과이윤으로 바꾸고, 마지막으로는 실체가 없지만 증권거래소에서 매일 가치가 매겨지는 자본증서로 저장하여 엄청나게 많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착취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라면 이러한 가격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인베스터 먼슬리 매뉴얼에 나오는 숫자는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을 법하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현실이란 그 숫자로 들어간 노동이다. 1870년 새해 첫날에 빈에 있는 노면전차 회사 주식을 살지 러시아 철도 대기업 주식을 살지 고민하던 우리의 갑부 친구들은 여러 세대에 걸친 노동자를 착취하여 살아가는 악당일까, 아니면 자신의 경제적 미래를 기꺼이 위험에 빠뜨려 가며 전 세계 기반시설을 현대화하려던 투자자일까? 둘 다 아닐까? 아니면 둘 다 일까?
- 이번에는36억 파운드란 영국 및 기타 국가의 투자자들이 1870년까지 소비하지 않고 아껴 확보한 순저축액이라고 생각해보자. 이 자본은 다른 사람을 착취해서가 아니라 투자자 자신이 노동한 데서 나왔다고 상상하자. 그렇다면 이 금액은 엄청나게 큰 노동의 가치가 시간을 뛰어넘어 전달된 것인 셈이다. 비축한 자본은 런던의 일용직 노동자 임금으로 생각하면 140만명을 50년 동안 부양햘 만한 양이다. 영국 인구는 1870년에 대략 2000만명이었으니 1인당 금융시장 규모는 180파운드가 된다. 동일한 주식과 채권이 암스테르담, 파리, 베를린, 브뤼셀 같은 자본시장에서도 거래되었고, 1870년 유럽 인구는 모두 3억명 쯤 되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숫자에는 속임수가 약간 들어 있다. 그래도 어떤 기준에서 보든, 런던 자본시장이라는 기술은 엄청나게 많이 저장된 인간의 에너지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중개하고 있었다. 주식과 채권을 발행한 나라와 주시고히사는 결국 이렇게 비축한 자본의 현재가치를 증권 소유자에게 약속한 셈이다. 투자자는 자신의 생애주기가 흐름에 따라 그 가치 이상을 소비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자본은 도둑맞은 노동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라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막대하게 모아 둔 비축물자였다. 1870년 런던 증권거래소는 현재에 심은 받침대 위에 올라 과거의 저축과 미래의 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거대한 경제 지렛대였다.
- 17세기와 18세기에 벌어진 무역대국이 국가차원에서 국제무역을 보호하려던 결과이다. 반면 19세기에 주권을 잃게 되는 과정은 차츰 계약 위반의 결과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투자자 권리보호라는 명목은 주권침해를 정당화했다. 금융계약은 역사의 임계점에 도달하여, 이제 정치권력을 재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1차 아편전쟁 전 중국에서 유일한 개항장이던 광저우에서 처음 설립된 서양회사들은 공식허가를 받은 공행을 써야만 했다. 이는 1843년부터 필수요건에서 제외되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국에 있는 무역회사를 크게 좌지우지한 이들 중국인 관리자를 가리키는 역사용어가 매판(comprador)이다. 매판은 무역회사가 속한 중국인 대리인이자, 아편, 비단, 차, 면화 같은 상품교역을 처리하고 수수료를 받는 중개인이기도 했다. 이들은 외국 회사의 핵심 고용인으로 치외법권을 누리는 한편, 중개자라는 처지를 이용하여 스스로 무역하기도 했다. 조약항이 늘어나자 매판자리도 많아졌는데, 이 자리를 채운 사람은 광저우 상인들이었다. 매판의 핵심성격은 신뢰보증, 가문에 기반한 인맥으로 중국 국내 사업체와 접촉하는 접점이었다. 바로 이 인맥에 서양회사가 신뢰할 만하다고 보증해주는 것이 매판의 일이다. 어느 한쪽이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피래를 보는 사람은 매판이기 때문에 보통 높은 보수를 받았다. 매판 중 매우 많은 사람이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금융 노하우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매판은 언어구사에서 두 가지 또는 그 이상 능한 전문가일 뿐 아니라, 두 금융제도에 익숙한 전문가이기도 했다. 이들은 상품과 제조품뿐 아니라 금융기술로도 동양과 서양을 중개했다. 그 형태는 은행업 참여와 중국 자체 증권거래소 설립이었다.
- 중국은 매판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특히 금융 및 기술 근대화를 배우려고 학생을 유학시켜 단 40여년 만에 주식회사 자본주의의 교훈을 흡수했다. 중국 상인과 관리는 주식을 발행하고 은행을 설립하며 철도를 부설하고 국제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하는 방법을 빠르게 배워 나갔다. 외국이 아편전쟁을 개시하고 배상금을 부과하며 치외법권과 조약을 통해 중국 영토와 중국 상업에 대한 주권을 침해하는 와중이었는데도 말이다. 이 이야기는 금융혁신이란 정치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나타나는 결과라고 해석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비교적 보수적인 관점에 따라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중국에서 급격하게 일어난 금융혁신이 놀랍고도 예기치 않은 결과를 불러 왔다고 해석해도 충분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과 18세기 미국 독립전쟁은 예상보다 공통점이 많다. 미국에서도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경제발전을 보던 식민지 관리들이 중앙정부의 통제에 반발했다. 미국에서는 세금, 토지회사, 해외무역 규제가 촉매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는 발전에 깊이 개입하던 중앙정부가 중요 요소였다.
- 공화국이 새로 들어선 후 중국 금융시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 시기에는 장점과 약점이 모두 드러났다.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는 중국 철도권을 국내 투자자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부족한 정부재정을 회복하려면 외국 자본시장에서 돈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13년에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연합체로부터 선후대차관을 도입했다. 미국은 원칙에 따라 참여하지 않았다. 차관조건은 중국 신정부에 매우 가혹했다. 한 마디로 자금을 빌려준 나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과 같았다. 혁명 이후 중국은 소위 군벌시대에 만연한 정치불안에 신음했다. 국채는 대부분 1921년에 채무불이행이 선언되었으나 해상무역 관세로 보증받은 국채의 원리금은 계속 납부되었다. 1939년에는 사실상 모든중국 국채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이 시점에 중국 금융이 죽어가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사람도 있을텐데 그렇지 않다. 39년 당시 상하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금융중심지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하이 와이탄 지역 강변에 금융사 건물로 이룬 위풍당당한 벽이 건설된 시기가 바로 20세기 초이다. 그리고 이때 중국의 주식시장도 번영했다. 중국의 정치와 경제는 혼란에 빠졌어도 상업과 금융기반은 호황을 누렸다. HSBC가 1865년에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얻었고, 룬촨자오상쥐가 설립되면서 1872년 중국인 전용 주식시장이 출범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보자. 중국 회사와 외국 회사의 주식이 모두 활발히 거래되고 영어신문과 중국어신문을 가리지 않고 주가가 실리기 시작한 때가 그 시점이다.
-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1720년 전후에 회사를 만드는 실험을 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한 시기는 1704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1830년까지는 지나친 투기를 우려할 정도로 주식이 거래되었다. 투기열풍은 1869년과 1893년에 불었는데, 이 중 1893년에는 주식담보대출 규제가 완화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따라서 러시아 시장의 역사는 미국 주식시장 발전가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 IMF의 중요한 특징은 국가채무를 보증받는 옛 방식을 없앴다는 데 있다. 예컨대 이제는 채무를 상환받기 위하여 루르 지역을 담보로 잡힐 필요가 없다. 원리금을 직접 상환받기 위하여 채무국 관세나 운하 사용료 징수권을 차압하지도 않는다. 이제 IMF는 거시경제지표를 미래 대출조건으로 설정했고, 부채수준이 심각하다면 체계적인 경제조정을 요구했다. 그 수단은 이기적인 채권보유자 또는 대출은행이 아니라 거시경제학자가 설계한 해결책인데, 재정긴축, 화폐가치 절하, 수출증대, 무역자유화 정책 및 민영화 도입 등 다양했다. 이처럼 IMF로부터 조건을 부여받은 국가들은 조건이 가혹하다거나 처방이 잘못되었다면 불평하기도 했다. 예컨대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 사례를 보자. IMF와 유럽연합이 요구한 대로 재정을 긴축한 그리스 경제는 호전되기는 커녕 실업률 악화 등 고통을 겪었음. 그런데 최근 그리스 채무 불이행 사태를 1898년 그리스 채무재조정 사태와 비교해 보자. 당시 그리스는 크레타섬 영유권을 두고 벌인 전쟁에서 오스만제국에 패하여 지금과 마찬가지로 국제채무를 상환할 수 없었다. 그리스 정부는 IMF와 협상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영국 채권자협의회아 협상했다. 그리하여 구제금융을 얻은 대가로 마치 1878년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했듯 각국이 참여한 위원회가 그리스 금융을 장악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정부수입을 대신 가져가 채권을 상환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패전으로 오스만제국에 지급해야 할 전쟁배상금 재원도 가져가는 결과를 낳았따. IMF는 최소한 국가의 주권은 보전해 준다. 이처럼 새로 등장한 구조를 케인스가 혼자 설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주요 참여자라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 이유는 일찍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경험한 데 있었다. 현대 그리스는 케인스에게 어느 정도 고마워해야 한다. 비록 구제금융을 제공하며 온갖 불쾌한 일을 일으켰지만 최소한 국가로서의 주권은 보전해 준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만약 언제나 순현재가치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투자여부를 결정하다면 새로운 것은 절대 나타날 수 없다. 기술진보가 진행되는 것은어리석게 도박하는 사업가 덕이다. 케인스가 존 로를 얼마나 깊이 알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1720년에 대중의 마음과 자본을 사로잡은 새 기술과 새로운 회사의 꿈과 희망 때문에 거품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이 특별한 해에 투기의 밀도가 높아지자 그동안 잠재해 있던 자연력이 새로 나타나 자본시장이 금융의 관심을 순식간에 극복하고 모든 가능성을 움직였다. 케인스는 이를 경제의 강력한 잠재력으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이 힘을 정부가 길들여 거시경제 균형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경제정책이 대중의 기대를 관리할 수 있다고 통찰했다. 미래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 주면, 사람들은 현재에 지갑을 열고 소비한다. 시장 심리는 사람들이 비이성적 공포를 느낄 경우 경제를 억누를 수 있지만, 제대로 관리되면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올 힘이 된다. 케인스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정부는 호황을 없애는 방식으로 불황을 공격하지 말고, 거품이 절정에 달할 때 개입하고 시장심리를 자극하며 관리함으로써 하방 나선을 멈추게 해야 한다. 케인스의 계획은 경제를 호황 비슷한 상태로 영구히 유지하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투자수익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주가가 하락하며, 투기꾼이 별 도리 없이 판돈을 회수할 수밖에 없고 공장에 주문이 끊기기 시작할 바로 그때, 정부는 당나귀가 척박한 상황을 곱씹고 있지 말고 보상에 눈을 돌리도록 막대기 끝에 매단 당근을 눈앞에 두면 된다는 영리한 생각을 했다.
- 29년 시장붕괴가 미국인에게 금융시장이 불확실하다고 경고했다면, 대공황은 거시경제의 엄청난 위험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위험에 대응할 금융해법이 필요했음. 30년대에 실업가 빈곤이 만연하자 미국이 저축과 사회보장에서 절박한 위기에 직면했따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대공황이 닥치기 전 미국에는 민영보험, 다양한 개인저축상품, 연방/주/시/회사 차원의 퇴직연금제도가 모두 존재했지만, 경제위기가 닥쳐 체계적 충격에 노출되자 이들 모두 취약하다는 사실이 밝혀짐. 20세기 초 미국은 주식회사에 희망을 걸었지만 불황이 오자 수많은 회사가 실패하면서 일자리와 퇴직연금도 같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사를 대신하여 현재와 미래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까? 바로 정부가 그 답이다.
- 후손에게 엄청난 빚을 물려주는 것이 옳으냐는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됨. 반면 할아버지 세대가 현대 인구추세를 무시한 결과를 빤히 내다보면서도 그런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보장 제도의 결손금을 떠넘긴 사람들은 할아버지 세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와 친척이 최소한도로나마 부양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사회보장제도는 보기 드문 금융혁신이다. 그리고 정부가 약속한 배분액보다 부채가 커질 미래가 되면 정부세입을 사용해야 파산을 막을 수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미래 입법자에게는 구조를 수정하여 계속 유지할 책임이 있다. 35년에 설립된 사회보장제도를 살펴보면 금융사의 교훈이 절묘하게 부각된다. 가격을 잘못 산정한 채 종신연금을 발행하여 재정을 충당했떤 18세기 유럽 각국 정부를 떠올려보자. 보험통게는 앞으로 등장할 민족국가의 존속에 그토록 중요한데도 어떻게 철저히 무시당했을까? 20세기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설계과정을 살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가격책정 오류가 일어난 것은 장기비용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치구조 때문에 단기 분쟁 해결에 가중치를 두었던 때문이라고 할 만하다.
- 노동자와 은퇴자 비율이 변하면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연금이 돈줄을 완전히 쥔 상황이라면, 점점 더 많은 세계의 자본은 노년층의 소유가 되어 노년층을 위해 투자되거나 또는 그렇게 약속될 것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다시 말해 자본을 가진 노인과 자본을 가지지 못한 젊은이 사이에 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엄청난 연금 지급준비금을 뒷받침하는 자산이 그저 정부의 약속일 따름인 상황이 더 그럴듯하다. 미국 사회의 보장제도는 운천징수방식을 기본으로 30년대에 설립되었거, 1770년대 프랑스 종신연금제도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기 때문에 파산했다. 역사는 미래를 거의 똑같이 찍어내는 틀이다 수학과 통계로 아물 세세하게 예측한다 한들 제대로 된 연금저축과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맬서스의 예언은 통렬할 정도로 옳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은 금융이 소용없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지금 돈을 받고 미래에 돈을 주겠다는, 금융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계약은 5천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발명된 이래 지금껏 쓰이고 있다. 하지만 퇴직 이후를 관리하는 방법을 전 세계 차원에서 만들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08년 금융위기와 제도구조 재건에 지난 10년 동안 많은 관심이 쏟아졌지만, 세계가 직면한 도전 중 가장 근본에 있는 것은 저축에 관련한 금융 그리고 정치다. 미국에서는 금융실패라는 미래가 이미 다가왔다. 디트로이트시가 파산하자 은퇴자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경찰, 소방관, 교사, 미화원 등 퇴직한 시 공무원은 돈이 가장 필요할 때 디트로이트시가 약속을 파기할 가능성에 맞닥뜨렸다. 프랑스혁명은 기억하는 편이 현명하다. 가장 기본적인 저축기구를 둘러싸고 정부와 시민이 맺은 사회협약을 위반한다면, 정치제도 전체가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금융채무 재조정으로 비칠 행동이 벌어진다면 현재 수혜자인 은퇴자는, 그리고 정부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젊은이는 깊이 영향을 받고, 다양한 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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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쿠스

IT 2020. 2. 17. 12:08

- 인공지능이라는 멋진 단어는 56년도 다트머스 회의에서 처음 등장했고, 이름에 걸맞은 연구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 당시 학자들은 체스를 두는 기계나 미로찾기 알고리즘 같은 것을 구현하기 위해 총력을 쏟아부었다. 초기에는 기호주의 혹은 규칙기반이란 방법론을 통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외부에서 규칙을 컴퓨터에게 주입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기존지식을 잘 활용하여 지식을 추론할 수 있는 전문가 시스템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인간의 신경망을 모방하는 퍼셉트론이라는 인공신경망 컴퓨터가 57년도에 등장. 인공신경망은 기계가 학습한다는 의미의 머신러닝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머신러닝은 전통적 규칙기만 방법론과 함께 인공지능 연구의 양대 축으로 발전.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하여 위 두가지 방법론은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갔지만 결국 각자의 기술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90년대 이후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06년도 딥러닝이라는 것이 갑자기 등장하여 인공지능이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딥러닝은 인공신경망이 진화발전된 것이며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컴퓨터에 이식하면 컴퓨터가 지능을 갖고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뜻 보면 이런 발상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그럴듯하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검색하고 세금을 정산하고 비행 스케줄을 최적화하고 심지어 자동차를 만드는 작업까지 컴퓨터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성능을 자랑한다. 비록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프로그래밍 작업이 선행되지만 어쨌든 컴퓨터는 잘 작동한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나 추론 같은 인간의 고등한 지능을 컴퓨터로 구현하자니 무한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보고 듣고 움직이는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지능의 활동은 애초 그 규칙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널리 회자되는 폴라니의 역설이다. 66년 마이클 폴라니는인간의 인지특징을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라고 요약하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암묵지가 우리 지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반복학습을 통해 자전거를 타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나 타는 법을 모두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개와 고양이를 구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식으로 구별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보면 안다. 이런 지식이나 지능은 말로 도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규칙이나 논리로 변형해서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폴라니의 역설은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지만 '기계가 인간을 모방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되었다. 세상이 모두 놀란 알파고의 등장은 딥러닝이 폴라니의 역설을 돌파했다는 상징을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이 암묵지의 형태로 지식을 흡수하면서 지능이 향상하듯이 이제 컴퓨터는 데이터를 통해서 스스로 학습을 하면서 세상의 규칙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규칙을 손수 컴퓨터에 가르치는 성가신 작업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아기가 말문이 처진 것처럼 딥러닝은 이제 알아서 암묵지를 형성해 나간다
- 예측적 지각 : 우리 시각 시스템은 과거의 정보를 바탕으로 0.1초 이후의 상황을 예측하여 미리 예상 이미지를 생성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음. (인지과학자 마크 창기지)
- 소송 전에 방대한 문서를 분석해야 하는 인간의 수작업 업무는 컴퓨터와 분석기술에 의해 조금씩 대체되고 있다. 전자증거개시제도가 도입되는 시기에 이미 블랙스톤 디스커버리같은 회사가 등장했고, 예츠코딩기술이 퍼지면서 관련 산업이 활성화됐다. 예측코딩 산업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에버로라는 회사 변호사가 원하는 대로 방대한 문서를 검색하고 관련문서를 추출해준다. 광범위한 사용자 제어 기능을 통해 변호사 및 법률 종사자는 검색결과를 60%, 75% 등 사용자가 지정한 예측률 범위내로 설정하여 검토할 수 있다. 에버로 사용자는 최종검색결과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직접 2차 검수한 문서를 바탕으로 검색범위를 좁히거나 확장시킬 수 있다. 한편, 예측기반 법률 시스템은 자료검색과 분류에 탁월한 예측코딩과는 달리 자료분석보다는 예측에 무게중심을 둔다. 예측기반도 본질적으로는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데이터 마이닝 기술에 의존한다. 이 분야의 대표회사는 렉스 마키나다. 이 회사는 09년 설립됐는데, 데이터 마이닝을 기반으로 법률과 판례추이 등을 분석해 어떻게 판결이 날지를 예측하며 세심한 소송전략을 제시해준다. 또한 연방법원 판사들을 모두 분석해서 사건 경험, 평균소요시간, 관련 사건의 기각률, 손해배상 인용액 등의 자세한 판사비교표를 제공하고 있다. 렉스 마키나의 예측 분석 시스템이 큰 성공을 거둔 후 유사한 예측 시스템이 많이 등장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송무와 괄년한 예측분석을 넘어 법률 자체를 예측하는 서비스 모델의 탄생이다. 미국의 피스컬노트라는 회사는 예측분석 기법을 입법으로 확장했다. 이 회사의 핵심 서비스는 연방정부와 50개주에서 발의된 법안을 추적하고 법안 통과가능성을 예측해주는 것이다. 온라인 인상에서 미국 연방정부 법과 50개주 법안, 그리고 법안을 만드는 데 참여한 상하원 의원들과 통과 여부를 확률로 보여준다. 입법 예측은 예측 법률세계에서 예측 본연의 개념에 가장 근접하고 있다.
- 17년 구글의 인공지능 챗봇 2대가 서로 대화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모습이 실시간 방송됐다. 두 챗봇은 각각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재치있는 별명이다.
- 기호주의 혹은 규칙기반 인공지응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이 직접 기호화하거나 규칙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의 측면에서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는 인공신경망 같은 학습기반 혹은 연결주의 방식의 머신러닝 연구도 물밑에서 활발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이런 도전들도 역시 기술적 벽을 넘지 못하고 2차 인공지능 겨울과 함께 시들해짐. 튜링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인류의 꿈은 이렇게 하나의 추억으로 사라졌다가 딥러닝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지금의 인공지능은 오랫동안 축적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 법률은 의료분야와 함께 대표적인 전문지식 영역에 속한다. 두 종류의 전문가 시스템(규칙기반과 사례기반)의 형식을 잘 살펴보면 놀랍게도 법률세계와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법률의 형식과 내용을 보면 그 자체로 이미 규칙으로 표현된 텍스트다. 민법, 형법, 저작권법 같은 법률은 개개의 논리와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엄격한 법적 규칙을 담고 있다. 법률은 그 자체가 컴퓨터 프로그래밍 코드처럼 작동하며 법적 분쟁해결과정도 법률을 기초로 하여 정교한 논리 추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법률가들은 이런 규칙덩어리를 갖고 그 규칙에 따라 연역적 추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일찍부터 법률세계를 주목하면서 규칙기반 법률 시스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법률가들은 법률규칙에 따라 컴퓨터 알고리즘처럼 추론하기도 하지만 유사한 사례를 기억에 떠올려서 귀납적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인지과정은 사례기반 시스템과 잘 어울린다. 결론적으로 법률세계는 규칙기반과 사례기반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법률 전문가 시스템 연구는 규칙기반 시스템이 등장한 이후에 시간이 좀 더 흘러 사례기반 시스템 연구가 시작됐다. 규칙이냐 사례냐 하는 이분법은 오랫동안 대립하면서 격렬한 논쟁을 가져왔다. 법률추론이라는 것이 주로 연역의 과정이라는 관점과 법 이론을 유추하는 과정이라는 관점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법률가의 추론은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면이 있다. 실제 변호사는 법률적 상담을 할 때 의뢰인이 처한 상홍을 분석하여 특징을 잡아낸 후 법률논리에 대입하게 된다. 그러나 법률용어의 추상성과 애매성 등의 이유로 규칙에 의해 일의적으로 분명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는 과거 유사한 사례나 판례를 근거로 유추한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로 사람이 다치면 교통사고특례법, 도로교통법, 형법 등의 관련법을 잘 검토하고 조항 하나하나를 논리적으로 따지면서 추론을 한다. 그러나 변호사는 실제 처리했거나 기억 속에 있는 유사한 판례를 머릿속에서 검색하여 단번에 결론을 내기도 한다. 이런 변호사의 해결전략은 매우 일반적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유추할 수 있는 사례가 부족하고 없다면 법률조항을 하나씩 따져가면서 법률 규칙 알고리즘을 작동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변호사는 연역과 귀납을 동시에 사용하는 셈이다.
- 전문가 시스템 연구는 기존에 존재하는 지식과 인간의 상식을 모두 주입하면 인간 의사나 변호사처럼 추론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전문가 시스템은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능력과는 비교되지 못하며 매우 제한적으로만 작동한다. 전문가 시스템은 형식적으로 인간을 단순하게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실제 인간의 복잡한 인지과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님. 뇌과학이나 신경생물학 같은 학문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우리는 뇌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뇌는 난공불락의 세계다. 인간의 뇌를 모방해서 인공지능을 구현한다는 관점에서는 그 당시 학문 수준으로 인간처럼 추론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형식적으로나마 인간의 인지과정을 모방한다고 해도 지식을 추출하고 규칙을 입력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해야 하기 때문에 무한한 시간과 비용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은 인공지능 구현에 학습개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파이겐바움의 그 원대한 꿈은 끝이 났다. "어려운 것은 쉽고 쉬운 것은 어렵다"는 모라벡의 역설처럼 기계에게 복잡한 계산이나 연산은 쉽지만 걷고 움직이고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물을 보고 인식하거나 상식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기계에게 어떤 규칙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애매하고 막막하다. 우리는 물, 나무, 바람 같은 것들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런 상식은 고도의 지능에 의존하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별 생각없이 반복했던 언어훈련에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것이다. 단어의 상식적 의미나 개념은 다른 단어에 의해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외부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감각적으로 체득되는 면이 있다. 따라서 몸이 없는 기계는 그런 것을 애초 가정할 수 없고 상식을 가르칠 뾰족한 방법도 없다.
- 전문가 시스템은 인간의 지식을 잘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지식의 의미를 잡아내기 위해 또 다른 지식의 표현이 필요한데 이런 식으로 계속 연결하다 보면 상식 수준의 지식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식은 컴퓨터가 그 의미를 직접 잡아내지 못하므로 또 다른 지식이나 단어가 필요하고 끝없는 반복을 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지식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추론지능을 만드는 것은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작업임을 암시한다. 결국 초기의 생각하는 기계는 전문가 시스템으로 진화했지만 이런 본질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머신러닝과 같은 학습기반 인공지능과 융합할 때까지 긴 정체기를 가진다. 법률 전문가 시스템도 이런 운명의 길을 걷는 것은 당연하다. 재미있는 것은 전문가 시스템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훨씬 전인 57년에 이미 컴퓨터를 이용한 법률 자동화연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법률의 자동화는 인공지능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법률정보학, 법률 인공지능, 컴퓨테이션 법률학과 같은 다양한 종파들이 생겨났고 리걸테크라는 새로운 산업을 잉태하게 된다. 법률과 컴퓨터의 성공적 결합은 알고리즘과 컴퓨터를 이용하는 방법론이 세상의 모든 학문과 지식에도 적용가능함을 암시한다. 또한 '생각이 알고리즘이며 알고리즘이 곧 생각'이라는 컴퓨테이션 철학이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 케플러 추측은 위대한 물리학자 케플러가 1611년 제안한 것으로 여러 개의 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쌓는 방법은 과일가게가 오렌지를 진열하는 것과 같은 방법(피라미드식)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도 수많은 수학자가 도전했지만 일반적인 증명에 실패했고 300년이 더 지난 98년도에 와서 수학자 토마스 헤일스와 그의 제자 숀 맥러플린이 케플러 추측을 증명. 그런데 기존 방식과는 달리 증명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헤일즈는 그들의 증명을 수학연보에 제출. 이후 12명의 수학자들이 심사위원으로 투입되어 증명의 오류를 검토하였고 4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헤일즈가 제출한 증명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파일도 있었는데, 심사위원들이 컴퓨터 프로그램 오류를 모두 검증하기 어려웠다. 최종적으로 수학연보는 증명이 참이라는 것은 99% 확신한다고 발표했다. 수학역사에서 보기 힘든 희대의 발표였다. 한편 헤일즈는 지루한 검토과정을 보면서 증명과정을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자동을 검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플라이스펙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03년도에 시작하여 14년에 최종 마무리되었다. 결국 컴퓨터가 등장해서 헤일즈의 증명이 100% 참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컴퓨테이션을 기반으로 증명의 증명, 소위 메타증명의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컴퓨테이션 수학은 이산수학처럼 컴퓨터를 위한 수학에서 나아가 수학자체를 위한 수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바야흐로 컴퓨터는 증명의 검토뿐 아니라 가설을 세우거나 증명을 하는 단계에서 인간과 협업할 준비를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자동계산과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하는 컴퓨테이션은 인간사고의 초절정 영역인 수학의 영역에 소리없이 침투하고 있다. 이제 컴퓨테이션은 수학과 과학을 넘어 인문학, 사회학, 예술, 법률에도 적용되면서 우리의 생각방식을 확장하고 있다. 소위 컴퓨테이셔니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 머신러닝에는 인공신경망 외에도 선형회귀, 로지스특회귀, 의사결정나무, 나이브베이즈, 서포트벡터머신 등 다양한 모델이 있다. 그런데 인공신경망 중에서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딥러닝이다. 우리는 보통 인공지능, 머신러닝, 딥러닝이라는 단어를 구별없이 사용한다. 이들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집합의 포함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간명하다. 즉 인공지능의 부분집합이 머신러닝이고 머신러닝의 부분집합이 딥러닝이다. 새로운 인공지능 시대를 열고 있는 딥러닝은 머신러닝의 일종이며 인공신경망의 후손인 셈이다.
- 초기의 신경망 모델인 퍼셉트론은 입력층과 출력층만을 가지는 간단한 형식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인공신경망은 입력층, 중간층(은닉층), 출력층 등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다층 네트워크 구조를 가진다. 각층은 여러 개의 노드로 이루어져 있고 노드와 노드의 연결에 의해 전체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각 노드는 뉴런의 몸체이며 연결선은 축삭돌기이고 연결자체는 시냅스 연결을 의미한다. 정보의 전달과 연산은 실제 인간의 뉴런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유사하다. 노드는 일정 크기 이상의 자극을 받으면 반응을 하는데 그 반응의 크기는 입력값과 노드 연결선의 계수(또는 가중치)를 곱한값에 비례. 일반적으로 노드는 여러 개의 입력을 받으며 입력마다 다른 계수를 가지고 있다. 이 계수가 바로 각 입력에 대한 가중치가 되며 실제 시냅스의 신호전달 가변성을 대변함. 각 노드는 들어오는 모든 입력값과 각 연결선의 가중치를 곱한 값들을 전부 더한 후 그 값을 입력값과 각 연결선의 가중치를 곱한 값들을 전부 더한 후 그 값을 최종 판결자인 활성함수의 입력으로 보낸다. 활성함수의 결과가 그 노드의 출력에 해당한다. 이런 식으로 노드는 층층이 배치되어 정보입력과 출력을 이어간다. 데이터를 입력받아서 학습한다는 것은 노드와 노드를 연결하는 연결선의 가중치를 변화시키면서 최종응답(출력)의 오류를 최소화하는 과정이다. 학습이 끝나면 이 가중치가 특정 수치로 결정된다. 인공신경망은 보통 2,3개의 중간층을 가지는 신경망 구조로도 좋은 성능을 보이며 학습도 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언어지능이나 시각지능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영역에서는 중간층의 개수가 여러 개인 깊은 구조로 만들어진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다층신경망 혹은 심층신경망) 그러나 무작정 중간층(은닉층)을 많이 늘린다고 좋은 것은 아님. 층이 늘어나면 연산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학습자체가 부족하면 오답을 학습할 가능성이 높아짐. 더 큰 문제는 융통성 없이 학습한다는 것. 주어진 학습 데이터에 기반을 두고 학습하다보니 조금이라도 변수가 생기면 적합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현상을 과적합이라고 하며 실제 데이터에 대한 오차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 다층신경망은 80년대부터 연구가 진행됐지만 실전에서 큰 활약을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 힌튼이라는 영웅이 등장하여 수렁에 빠진 다층신경망을 구해낸다. 힌튼과 그의 동료들이 86년에 발표한 오차역전파 기법에 의해 다층신경망은 기적적으로 회생을 하게 됨. 이것이 바로 1차 신경망 구출작전이다. 극적으로 부활한 신경망은 영상처리, 제어분야, 자연어 처리 등에서 제법 활약을 하는 듯하였지만 과적합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2차인공지능 겨울과 함께 90년대 이후에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2차 인공지능 겨울은 대부분의 학자들과 투자자들이 인공지능을 외면하는 시대였고, 인공신경망은 더욱더 심한 냉대속에 있었다. 이런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도 힌튼은 '인공신경망이 바로 인공지능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불굴의 힌튼과 그의 동료들의 노력에 의해 꺼져가는 신경망의 불씨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06년도에 와서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온 힌튼팀은 한편의 기념비적 논문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딥 빌리프 넷을 위한 패스트 러닝 알고리즘이다. 이 논문은 인공신경망의 고질적인 문제가 데이터의 사전학습 등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을 밝혔고, 인공신경망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힌튼의 2차 신경망 구출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 논문 이후에 딥러닝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 흥미로운 것은 논문제목에서 신경망이란 단어대신 딥 빌리프 넷이 사용된 점이다. 200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논문에 신경망의 neural이란 단어만 들어가도 탈락당할 정도로 신경망은 죽은 분야였다. 이런 참단한 시기에 힌튼은 색다른 단어를 선택해서 악마의 프레임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후 6년의 세월이 지난 2012년 세계 최대의 이미지 인식 경연대회 ILSVRC에 출전한 힌튼 팀은 마치 다른 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압도적 기록으로 우승하면서 딥러닝의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게 된다. 힌튼의 신경망 구출작전이 성공하면서 우리가 보는 지금의 인공지능 시대가 열린 것이다.
- 과일 분류기와는 달리 아파트 가격예측의 경우만 하더라도 결정적 피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일반 상식보다 더 깊은 전문가의 지식이나 경험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좀 더 복잡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암을 판정하는 기계를 머신러닝 방식으로 만드는 경우, 역시 일단 세포에 대한 이미지 데이터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런데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구별할 수 있는 피처(특징)를 어떤 식으로 정의해서 데이터를 모아야 할까? 정교한 의료지식이 없다면 이 단계에서 벌써 막히게 된다. 이제 눈치를 챘겠지만 머신러닝 방식의 결정적 단점은 도메인 특징을 반영하는 피처를 정의하거나 좋은 피처를 찾아내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피처에 대한 감이 온다면 이미지 이식의 경우로 돌아가보자. 사물을 구별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 것 같은데 이미지의 어떤 것을 피처로잡아서 입력으로 사용해야 할지 분명하지가 않다. 이미지의 개별 픽셀 하나하나를 입력으로 해도 되고 털을 먼저 검출하여 그것을 피처로 잡아도 된다. 눈, 코, 입 등을 모듈로 구분하여 피처로 잡아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좋은 성능을 내는 최적의 피처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수작업으로 하나씩 잡아서 모두 검토해야 한다. 또한 하나의 얼굴이라고 보는 각도 등에 따라 수많은 경우가 발생하므로 그것을 모두 반영하는 피처를 설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머신러닝 방식도 고전적인 규칙기반 시스템이 갖고 있는 문제로 수렴한다.
- 여기서 자연스럽게 컴퓨터가 자동으로 피처를 잡아주는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 바로 딥러닝이다. 딥러닝은 피처를 사람이 선택하는 고전적인 머신러닝과는 달리 적절한 피처(입력값)를 스슬 생성해낸다. 딥러닝은 엄청난 양으 데이터를 학습하여 스스로 피처를 만들고 인간이 인식하지 못한 숨은 특징도 찾아낸다. 이런 의미에서 딥러닝을 표현학습 혹은 특징학습이라 한다. 고전적 머신러닝은 이미 만들어진 입력 피처를 받아서 분류기를 학습한다. 그러나 딥러닝은 입력 데이터에서 스스로 피처를 찾아내고 그것을 입력값으로 변환하여 다시 분류기로 넘기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한다.
- 컨볼루션 신경망은 기계적 시각지능을 구현한 일등공신이며 딥러닝의 철학을 만든 장본인이다. 컨볼루션 신경망의 핵심은 피처를 자동을 잡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컨볼루션 신경망은 이미지의 특징이나 피처를 잡아내는 필터의 집합체다. 단계별로 나누어진 필터는 사물의 피처를 잘 잡아낼 수 있도록 학습을 통해 최적화된다. 피카소가 사물의 피처를 멋지게 잡아내서 표현하는 것처럼 기계는 학습을 통해 사물의 피처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고양이와 개를 구별한다고 해서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미지를 분류할 수 있을 뿐이다. 기계는 딱 거기까지 가능하다. 따라서 기계는 모나리자보다 피카소가 만든 얼굴이 더 인간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 이미지 인식의 신기원을 이룩한 컨볼루션 신경망은 입력 이미지에서 자동으로 피처를 뽑아내는 것이 주특기.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하여 피처맵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뽑아내면 어떨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컨볼루션 신경망은 위계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단계별로 피처를 잡아낸다. 이런 피처를 역으로 이용하여 이미지를 복원하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7년도에 들어와 구글 브레인 연구팀은 저해상도의 흐릿한 얼굴 이미지에서 뚜렷한 고해상도 이미지를 생성하는 알고리즘 '픽셀 리커시브 슈퍼 레졸루션'을 발표했다. 흐릿한 8*8 픽셀 사진을 입력하면 컴퓨터는 원본사진을 복원하여 출력으로 보낸다. 이미지 복원기술은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다. 사진을 확대할 때 사진이 깨지거나 일그러지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구글은 이미 고해상도 이미지 변경 기술을 통해 사진을 깨지지 않게 확대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한 상태. 한편 이런 이미지 기술들은 범죄 현장이나 범인의 얼굴을 찍은 CCTV 영상을 깨끗하게 복원하는 데 응용이 될 수도 있다. 최근에 차량 블랙박스의 흐린 이미지를 깨끗하게 복원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뺑소니 사고 등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 컨볼루션 신경망은 자율자동차 개발에도 빠질 수 없다. 자율자동차는 전통적인 자동차 기술뿐 아니라 센서기술, 자동제어 기술, 이미지 인식기술 등 거의 모든 첨단 기술들이 필요. 특히 움직이는 주위 환경을 인식하는 기술은 자율자동차의 생명이다. 급변하는 환경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다른 차와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곧바로 사고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미지를 분류하거나 이미지 속에서 한 객체의 위치를 알아내는 수준으로는 자율자동차에 적용하기 어렵다. 자율자동차의 영상정보에는 다양한 객체들이 다양한 위치에 존재함. 사람, 신호등, 차량, 표지판 등 수많은 객체들이 총 동원되어야 함. 객체의 위치를 특정해서 분류해야 하고(분류 및 구역화), 여러 객체들을 인식해야 하고(객체 탐지), 객체의 윤곽을 잡아서 독립된 파편으로 분할해야 하는(객체 분할) 등 자율자동차 등 거의 인간 수준의 시각지능이 필요하다. 여기서 객체분할은 객체의 윤곽을 잡아내는 것으로 세그멘테이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5년 켐브리지 대학은 이 기술을 자율자동차에 적용할 수 있는 세그넷이라는 시스템을 공개했다. 이 시스템은 컨볼루션 신경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위치추적 시스템을 통한 위치측정과 함께 도로위의 표지판과 도로표지, 거리의 모습, 보행자, 심지어 날씨까지 인식할 수 있다. 세그넷은 지금까지 본 적인 없는 거리의 풍경을 분석하고 도로 및 도로 표지판, 보행자, 건물, 자전거 등 12개의 다른 카테고리 별로 사물과 풍경을 분류한다. 요즘은 이 시스템을 능가하는 모델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자율자동차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컨볼루션 신경망은 자율자동차의 꿈을 실현하는 데 일등공신임에 틀림없다.
- 인공신경망을 트윈모듈로 연결하여 경쟁을 시키는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 모델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기존 신경망과는 달리 실제 자연의 생태계처럼 진화할 수 있는 상호작용 시스템을 구현한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경쟁하는 다중 모듈로 계속 확장한다면 점점 인간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컨볼루션 신경망의 완성자 얀 르쿤 교수가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는 최근 10년간 머신러밍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응용분야가 무궁무진하다.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를 만든 이언 굿펠로우는 대강의 그림만 그려놓으면 나머지는 인공지능이 완성하는 형태의 시스템이 구현가능함을 강조했다. 실제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는 이미지 분야뿐 아니라 음성인식 분야나 예술분야 등으로 계속 응용되고 있으며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의 변종들이 계속 탄생하고 있다. 시각지능은 이제 창조지능이 되고 있다.
- 리걸테크 산업의 종류는 변호사의 업무 영역만큼 다양하지만 서비스 형태를 기준으로 간단하게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능형 법률정보 검색, 변호사 소개 서비스, 법률 데이터 분석 및 예측, 전자증거개시 분석, 법률 프로세스 자동화, 법률문서 자동화 등이다. 결국 인공지능 변호사라는 닉네임을 달고 나타나는 모든 서비스는 하나로 볼 수 있다. 리걸테크는 요즘 갑자기 등장한 것 같지만 그 뿌리는 매우 깊다. 컴퓨터와 법률의 만남 자체가 리걸테크의 시작이며 가시적으로는 법률정보검색 서비스이 형태로 나타났다. 50년대 이후에 컴퓨터는 문헌이나 자료를 검색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로 자리잡았따. 법률 영역은 판례나 법률자료를 검색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분야보다 일찍 컴퓨터가 응용되었다. 60년대에 이미 미국 오하이오 변호사협회는 판례를 검색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이후에 민간영역에서 법률 정보검색 서비스가 본격화되었다. 렉시스 넥시스가 민간영역에서 최초로 법률검색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웨스트로가 방대한 법률문서의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검색 서비스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두 회사가 법률검색 서비스를 거의 독점하면서 리걸테크는 그 자체의 산업으로 다양성을 확보하지는 못하였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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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큰 위험은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건 곧 실패로 이어진다. (마크 주커버그)
- 다른 분야처럼 의료 분야에서도 인공지능과 인간의 융복합이 중요함. 또한 인공지능이 의사를 온전히 대체할 수도 없다. 구글에서 의료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릴리 펭 프로덕트 매니저 역시 의사와 인공지능의 조합은 의료분야 문제를 개선하는 좋은 해결책은 될 수 있지만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영역이 있기 대문에 이를 인공지능으로 완전히 대체하긴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머신러닝을 통해 반복작업을 수행하거나 의사의 판단을 돕는 좋은 도구는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데이터는 많지만 전문지식이 적은 분야에서 머신러닝 활용도가 높기 때문. 인공지능은 사람에 비해 월등히 많은 데이터를 짧은 시간에 훑어보고 파악할 수 있고, 사람은 기계로만 판단할 수 없는 세밀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서로 협력을 통해 의료 서비스가 더욱 발달하게 된다면 앞으로 못 고칠 병이나 놓치고 지나칠 병은 획기적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공지능과 사람의 긍정적 협업의 모습일 것이다.
- 아마존 고 매장 천장에 달린 100여대의 고해상도 CCTV와 센서를 통해 무인상점이 이루어짐. 센서가 부착된 카메라가 고객의 동선을 따라다니며 구매목록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인공지능 무인점포는 중국에도 있음. 알리바바 그룹이 선보인 타오카페가 그것이다. 알리바바 그룹이 보유한 빅데이터아 인공지능 기술이 활용된 무인편의점으로 ,아마존 고와 비슷한 형태다. 타오바오 앱과 알리페이 앱만 있으면 현금이나 카드가 없어도 이용할 수 있으며, 매장 이용법도 아마존과 거의 동일하다. 타오카페를 시작으로 중국의 많은 기업들이 무인매장을 선보이고 있는데, 베이징에 위치한 중국 제2의 전자상거래인 징둥의 X무인슈퍼는 안면인식 기술까지 더해진 매장이다.아마존 고와 동일하게 매장에 들어가기 전에 앱을 깔고 QR코드를 활용하는데, 이때 고객의 얼굴과 QR코드를 매칭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여기에 안면인식이 적용되는 것이다. 다음에 방문할 땐 핸드폰이 없어도 안면인식으로 출입이 가능하다. 결제는 계산구역에서 카메라로 얼굴 사진을 찍으면 이루어진다. 이 점이 아마존 고와는 차별화된 방식이다. 첫 방문 이후부터는 안면인식기술로 출입과 결제가 모두 가능한 것이다.
- JR동일본은 18년 10월부터 2개월간 동경 아카바네역에서 무인매점을 시범운영했음. 이용방법은 아마존고와 비슷한데, 스마트폰앱이 아닌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이용되는 스이카 같은 교통카드를 입구에서 찍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물건을 골라 담고 매장에서 나올 때 카드를 한번 더 찍으면 자동으로 계산이 끝나고 열린 문으로 나올 수 있다. 매장 천장에 설치된 20대의 카메라가 3명으로 제한된 매장 내 고객들을 정확히 구분하고 매대마다 달려 있는 6대의 카메라가 구매물건을 촬영함. 수차례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거나 엉뚱한 곳에 가져다 놓아도 구매를 위해 갖고 나온 제품을 정확하게 계산해준다. 19년 9월 국내에서도 신세계 I&C가 계산대 없는 무인점포를 선보였다. 운영방식은 아마존고와 유사함
- 에드몽 등 벨라미의 초상화는 파리의 예술공학단체 오비우스의 프로그래머들이 개발한 것으로 14-20세기 그림 1만 5천여 작품을 학습한 끝에 이 그림을 그려냈다. 이 학습에는 상호 경쟁 방식의 생성적 대립 신경망 기술이 사용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단어를 제시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했을 때 사라들의 경우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서로 다른 그림을 그려내듯, 인공지능 또한 스스로 학습한 결과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 방식은 14년에 처음 등장했는데, 객체에 대한 개념을 이해한 인공지능은 사람의 개입없이 실제와 똑같이 그려내게 된다.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머신러닝은 사람이 데이터를 제공하고, 이에 대한 학습결과도 사람이 확인한다. 그러나 GAN의 경우는 다르다. 대립 쌍을 이루는 두 개의 네트워크가 서로 상호 대립과정에서 훈련 목표를 자동으로 생성하고 학습시킨다. 즉 인공지능 스스로가 반복적으로 평가하고 수정하며 데이터 자체에서 정보와 지식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 렘브란트는 인공지능과 친숙한 화가인 것 같다. 렘브란트로 오해할 만한 오비우스는 그림과는 달리 아예 렘브란트의 화풍을 그대로 살려낸 더 넥스트 렘브란트도 등장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화가인 더 넥스트 렘브란트는 마이크로소프트로와 렘브란트 미술관, 네덜란드의 과학자들이 개발한 안면인식기술을 활용하는데, 렘브란트의 작품분석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토대로 그가 자주 사용한 구도, 색감, 유화의 질감까지 그대로 살려 3D 프린팅으로 그림을 그려낸다. 렘브란트가 활용했던 붓질, 비례와 음영기법뿐 아니라 물감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화가로 유명했던 그만의 특성까지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딥러닝 기능으로 스스로 데이터를 쌓고 학습하며 원하는 형태의 그림을 그린다. 이를 통해 이 인공지능 화가는 렘브란트가 그렸던 수많은 40대 남성의 평균치인 한 남자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16년 세상을 놀라게 한 그림이 되었다.
- 구글의 인공지능화가 플랫폼인 딥드림은 특정 이미지를 입력하면 그 이미지를 재해석하여 반 고흐 화풍으로 그려준다. 결과물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추상적인 이미지를 닮았다고 하여 그 이름도 딥드림이다. 대상에 제한이 없어 내 사진을 업로드해 딥드림이 재해석한 고흐풍의 작품을 얻을 수도 있다. 16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딥드림을 통해 그려진 29점의 그림을 소개하는 전시회도 열렸다. 이렇게 창조적인 작품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딥드림이 수백만개의 이미지를 소화하고 학습하여 이를 시각적 패턴으로 새롭게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인공지능이 너무 글을 잘 쓰는 바람에 오히려 비공개를 결정한 사례도 있음. 인공지능을 우려하는 일론 머스크 드잉 세운 오픈AI가 개발한 글짓기 인공지능이 바로 그것이다. 글짓기 인공지능인 GPT-2는 기사, 학교과제 등 모든 분야의 글짓기가 가능하다. 무려 800만개의 인터넷 페이지 속 15억개 단어를 학습한 GPT-2는 사용자가 특정 문장을 넣으면 그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문장을 논리정연하게 만들어낸다. 이는 책 한페이지 분량을 어색하지 않게만들어낼 정도이며 인간과 유사한 수준이라고 한다. GPT-2의 글끄시 실력은 오픈AI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기존 소설 중 한 문장을 넣으면 원작소설에는 없는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 문장은 전체적으로 작품 분위기와 유사한 것들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능력이 너무 출중해 이를 악용할 여지가 있다 하여 원천 기술을 비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모든 연구결과와 기술을 무료로 공유해온 오픈AI의 첫 비공개 사례다
- 인간에게 쉬운 것은 컴퓨터에게 어렵고, 반대로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컴퓨터에게 쉽다. (모라벡의 역설)
- AI가 보급된 사회에서 가장 희소성을 갖는 것은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다. (사티아 나델라)
- 머신러닝의 경우 인간이 먼저 처리한다.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도록 주어진 데이터를 알맞게 분류하는 것을 사람이 먼저 하고, 그 다음 컴퓨터가 데이터에 포함된 특징을 분석하여 그 내용을 축적한다.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미지의 특징을 종합해 답을 내는 것이 머신러닝이다. 딥러닝은 이 머신러닝에서 사람이 하던 일도 모두 컴퓨터가 수행한다. 컨벌루션 신경망을 이용하여 스스로 분석한 후 답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는 머신러닝과 딥러닝은 사용하는 데에도 차이가 있다. 머신러닝의 경우는 자신의 연구를 포함시킬 여지가 남아 있고 처리시간이 짧은 반면, 딥러닝은 이용자의 많은 지식과 노력이 없어도 높은 정밀도를 얻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아울러 딥러닝과 머신러닝은 전문가에 따라 다르게 개념화하기도 한다. 토마 디트리히는 유럽에서 머신러닝은 엔지니어링에 감성을 결합한 기술의 형태에 뿌리를 두고, 미국에서는 인공지능이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한 과학소설의 느낌을 반영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정보 및 지능형 시스템 부문 책임자인 린 파커는 머신러닝은 데이터의 추세나 범주를 인식해 적절한 예측을 가능하게 하고, 딥러닝은 깊은 신경망, 즉 여러 계층에 배열된 대규모 신경시스템을 이용하여 학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딥러닝은 인공지능에 있어서 현재 가능 진화된 알고리즘이다. 딥러닝을 통해 인공지능이 사람처럼 판단할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또한 앞으로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쉽게 예측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존재한다. 인공지능도 간혹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오류의 원인을 즉각적으로 알지 못하거나, 인공지능이 딥러닝을 통해 어떻게 이런 결정을 했는지 개발자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을 바로 인공지능 블랙박스라 부름. 이 때문에 설명가능한 인공지능(XAI, expalinable AI)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XAI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동작과 최종결과를 해석하여 결과물이 생성되는 과정을 설명해주는 기술이다. 인공지능이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차트와 분석을 통해 사용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공지능 블랙박스의 한게를 극복할 수 있다.
- 사업에 쓰이는 기술 모두에 적용되는 첫번째 규칙은, 효율저인 작업을 위해 적용된 자동화 방식은 효율을 극대화시킨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비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적용된 자동화방식은 비효율화를 극대화시킨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
- 기존 사업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은 앉아서 재난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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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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