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없는 세계

경제 2020. 2. 20. 08:32

- 1차대전까지 국제금융의 중심지는 런던. 17세기말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세워진 영란은행은 약 2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영국의 무역금융에 있어 신용의 최종 대부자 역할 수행이라는 다른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음. 그리고, 그 중앙은행 역할의 중심에는 프라이빗 뱅크의 대표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다. 로스차일드에 관한 자세한 서술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니, 두 가지 측면에서 필요한 요점만 살펴보자.
(1)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을 제패했던 시기는 유럽 대륙의 전쟁시기였음. 유럽은 영란은행이 세워진 1694년부터 워털루 전투가 있었던 1815년까지의 약 120년 기간중 약 60년은 전쟁을, 나머지 60년은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음. 로스차일드가는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각국 왕실에 접근해 프라이빗 뱅크의 자금을 채권인수 형태로 공급해주고 다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여 자금을 회수한 후, 전쟁이 끝난 후에 여러 방식으로 인수한 채권을 되파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금융권력을 장악.
(2) 로스차일드 가문이 런던, 파리, 빈, 나폴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대륙 산업의 중심지에 어음인수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증가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이전의 시대에 비해 무역규모가 커졌고 신용거래 규모 역시 이에 비례해 커졌다는 점에서 유럽 시장 전역을 아우르는 어음인수 은행의 운영은 시대의 흐름에 부합했음. 이전까지의 은행이 왕실과 귀족들의 자금을 관리하는 규모에 불과했다면, 무역이 발달하고 민간의 자본이 축적되면서 신용공급자로서의 은행 필요성이 커졌던 것
- 위 두가지 측면의 결과로 로스차일드하는 유럽 왕가들의 자금을 관리ㅎ주면서 쌓인 신용을 바탕으로 유럽대륙의 중심지를 아우르는 규모로 상거래 어음을 인수하고 수금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은행을 운영하면서, 각국의 전쟁자금에 대한 신용을 공급할 수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815년 워털루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이 전비조달을 위해 발행한 국채의 약 60%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후 아예 영란은행 주식을 대부분 사들임. 19세기 초반에 드디어 그들은 영란은행의 채권발행과 인수를 주도하는 중앙은행의 실질적 주인이 됨
- 미국은 연방 국가라는 특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중앙정부, 즉 연방정부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각 주 정부가 견 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남북전쟁 이후 1900년대 초까지 경제에 있 어서 독점의 규제나 중앙은행 같은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경기의 변동에 따라 대출이 급증했다가 경기가 하강하면 급속히 유동성이 부족해 지면서 금융위기가 닥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100년의 기간 동안 14번의 금융위기를 겪었는데, 평균적으로 7년에 한 번씩 위기를 겪었다는 얘기다. 사실 이것이 바로 고도로 집중된 대형 자본이 탄 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위기를 조장하고 위기에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부풀려 탄생한 것이 당시 미국의 신흥 재벌들로 지금도 잘 알려진 모건, 카네기, 록펠러 등이었던 것이다.
- 1907년 미국에 금융위기가 터지고 급속한 유동성 고갈의 위기 상황이 되 어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 닥치자, 신흥 재벌이었던 존 모건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최종 신용 공여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정부와 독점 재벌 모두에게 변화와 타협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 규모를 키울 만큼 키운 미국의 독점 자본들은 서서히 해외 진출을 위해 중앙은행과 같은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대서양 너머 영국은 민간은행들이 상업어음을 거래할 수 있는 충분한 시장-투자자들이 있었고, 그 투자자들 덕분에 시장에 풍부한 유동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일시적으로 자금이 부족해지면 어음을 할인해서 팔아 자금을 마 련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어음을 거래할 수 있는 충분한 규모의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물론 그때까지는 위기를 통해 약육강식의 논리, 즉 독점 자본을 일굴 수 있었다-해외의 투자자들이 자신 들이 축적한 달러 자산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의 입장에서는 너무 거대해진 독점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정부의 영향력하에 있는 중앙은행이라는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 국가의 특성상 독점 자본이 좌지우지하는 경제에 중앙정부가 간섭을 하려고 하는 것조차 주 정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달성되기 어려운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1915년이 되면서 전쟁이 길어질 듯한 기미를 보이자 국채를 발행하고 지폐를 찍어서 전비를 감당하고 있던 영국 금융시장에서 금 대비 파운드의 가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쟁이 1916년까지 이어지자 영국 정부는 미국 정부가 제공한 달러 신용에 점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1918년 전쟁이 끝 나고 나자 파운드화는 달러 대비 30% 이상 평가 절하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런던에서 파운드로 무역 결제를 해왔던 제3국, 즉 남미와 아시아의 무역 업자들은 이제 금에 대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미국 달러가 점점 매력적으 로 보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편 미국이 주로 연합국을 지원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비 조달에서 한계에 봉착한 동맹국은 결국 패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전의 전쟁과는 달 리 수십 년 예산을 단기간에 사용할 정도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 이 세 계대전은 패전국만이 아니라 승전국에서도 기존의 질서를 바꿔 놓았다. 그 들은 모두 미국과 달러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 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질서의 중요한 의미는 바로 사적 금융권력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세기 유럽 대륙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대였다.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빈, 나폴리에 다섯 아들이 은행 지점을 설립하여 한편으로는 독자적으로, 한편으로는 서로 돕는 방식으로 유럽 각국에 가문의 자금을 조달하고 운용했던 이 가문의 방식을 칼 폴라니는 고도금융(Haute Finance / High Finance)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강력한 정부인 영국과 프랑스의 정부조차 로스차일드의 유럽 대륙 금융 네트워크의 독립성을 해칠 수 없고, 어떤 특정 정부에도 종속되는 일없이 모든 정부와 접촉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 고도금융의 특징이었다. 어떤나라의 중앙은행도 이것의 독자성을 해칠 수는 없었으며 동시에 모든 중앙은행은 이것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건과 록펠러가 연방준비제도의 계획을 입안할 때 로스차일드의 고도금융을 모델로 했던 것임은 명백했다. 즉, 중앙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중앙정부가 연방준비은행의 독자성을 해칠 수 없는 형태 말이다. 결과적으로 연방준비제도법은 비록 동상이몽이었을망정 모건과 록펠러가 원했던 바가 충실히 반영된 결과였다는 말이다.
- 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들이 연합국에 패배한 배경에는 전비 조달능력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영국에서 연합국으로 약 100억 달러에 달 하는 자금이 이전된 사실도 포함되었다. 이미 연합국의 전쟁 수행 능력은미국의 신용에 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전시 재정의 핵심 중 개인은 모건 주니어-잭 모건 였다.길어지는 전쟁으로 자금 조달에 차질이 생긴 영국 정부는 1915년 초 J.P. 모건을 전시 자금 조달 및 무기매입 대리인으로 지정했고, 프랑스도 곧 그 뒤를 따랐다. 잭 모건은 남북전쟁 때부터 무기공급 사업을 같이했던 미국 최대의 화학독점기업 듀퐁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공장을 세워 화약류를 대량생산해 유럽에 공급했다. 동시에 미국에서는 전시공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 연합군에 자금을 빌려주고 높은 수수료를 벌어들이는 한편, 이 기 간 중 자신이 조성한 자금으로 연합국의 무기매입 대리인 자격으로 동업자 인 듀퐁 및 계열사였던 US 스틸 등으로부터 화약과 대포 등 각종 군수물자를 독점가격으로 고가에 사들여 연합국에 비싸게 공급하는 등의 방법으로전쟁 특수를 누렸다. 이는 이전에 유럽 대륙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했던 일을 파운드에서 달러로 통화만 바꿔서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 결과적으로 1차 세계대전이 미국과 유럽의 경제에 미친 중요한 영향은 두가지였다. 유럽의 부가 미국으로 이전되면서 유럽의 가문 형태의 사적 금융 권력이 저물고 미국의 합자회사 형태의 사적 금융권력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것과 이전까지 세계 무역금융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달러가 공식적으로 세계 무대에 데뷔했다는 것이 바로 그 두 가지였다.
- 1942년,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니 콜라스 스피크만(Nicholas J. Spykman)은 『세계 정치에서 미국의 전략(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미국이 고립주의를 고 집한다면 반드시 실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는데, 당시 CFR 에서 주도하던 '전쟁과 평화에 관한 연구의 영토분과 위원장이었던 보우먼 (Isaiah Bowman)이 이 책에 대해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들은 향후 20년간 이 책을 1년에 한 번 이상 읽어야 한다”고 높게 평가한 이 유는 굳이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스피크만의 사망 1년 후인 1944년 그의 이론을 통합한 책 『평화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Peace)』이 출간되는데, 여기서 그는 마한의 해양세력론과 맥킨더의 심장부 이론을 종합 하여 미국의 향후 전략적 방향성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 그는 2차 대전 중 미국이 연간 수천 대의 전투기와 전함을 생산하고 운용한 것을 분석한 결과, 전후의 세계는 해양과 항공 수송체계가 맥킨더가 상상했던 것보다 비약적으로 발달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심장 부의 중요성 감소를 의미한다는 것도 말이다. 즉, 해운의 비용효율이 맥킨 더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급격하게 높아지기 때문에 해양세력의 자원과 시장 확보는 맥킨더가 지적한 것만큼 대륙세력보다 불리하지 않다 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도 맥킨더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떨어져 있는 섬으로 유라시아의 자원과 인구는 미국의 그것을 상회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도 맥킨더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 에서 떨어져 있는 섬으로 유라시아의 자원과 인구는 미국의 그것을 상회 며, 따라서 유럽이나 아시아 중 한 세력에 의한 유라시아 대륙의 지배는 경 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미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주어진 조건을 미국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심 장부-구소련-와 주변 해양세력-미국-의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지역을 주 변지역(Rimland)이라고 칭하고, 이들 주변지역이 심장부 (Heartland)가 해운의 중 요한 부동항으로 접근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가 제시한 결론은 이 지역(Rimland)에서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여 대륙세력의 해양으로의 진출을 막고, 해양세력이 우위에 있는 해운과 항공운송 능력을 활용해 자원과 시장을 효율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향후 미국의 이익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주변지역(Rimland)이 향후 오랜 기간 동 안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각축의 공간으로 작동할 것이며, 이 지역을 통 제하는 자가 결국 세계를 통제할 것이라는 것 말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의 전략가들이 지정학적으로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전략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겼다는 것은 실제 역사의 진행 과정을 통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라도 원조를 보낼 것이 라는 백지 수표를 발행하겠다는 선언이 트루먼 독트린이라면, 마셜플랜은 서 유럽을 수취인으로 그 수표에 금액을 써넣은 것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육군참모총장으로 1차,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해 유럽의 상황에 밝았던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경제적으로 강하고 안정된 유럽이 곧 미국의이익에도 부합한다면서 유럽에 대한 원조 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미국은 생산수단이 거의 파괴된 유럽에 수입 대비 거의 7배에 달하는수출을 하고 있었다. 유럽은 당연히 수입 대금을 지불하기 위한 달러가 턱없이 부족했고, 원조된 달러는 어차피 미국의 상품을 수입하는데 사용될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를 공급하지 않으면 미국의 수출 시장 역시 고갈될 것이고, 그것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경기 침체와 공황의 기억을 상기시킬 것이었다. 결국 1948년 4월 우여곡절 끝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서독 · 벨기에 등 서유럽 총 16개국에 원조가 집행됐는데, 대부분의 원조는 미국으로부터의 직접 보조금 형태였다.
- 봉쇄정책의 마지막 단계는 직접적 재군비 정책으로 주변지역 (Pimlant) 전 역에 걸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의 시작이 바로 1949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캐나다, 그리고 여타 서유럽 8개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설립한 것이었다. 마셜플랜을 시작한 미국이, 1940년대 말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달러 부족이 유럽을 미국의 수출 시장으로 삼으려는 미국의 목표에 심각한 장애물임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화폐 경 제적 측면은 그 자체로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달러 유동성 부족이라는 근본적 문제 앞에서 마셜플랜이나 다른 원조 계획은 언 발 에 오줌 누기에 불과했다. 훨씬 포괄적으로 세계에 달러 유동성을 순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이미 CFR을 통해 미국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고 확실한 이윤을 보장하는 군수 산업을 계속해서 성장시키고 싶어 하던 미국의 대기업 집단의 존재, 전쟁이 끝나고 군수물자 생산이 감소하면서 다시 실업률이 상승하고 경제가 불황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국민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의 민주정부에 대한 위협이라는 세 가지 요인은 이 상황에서 세계역사상 평화 시에 가장 대대적으로 무장을 추진하는 정책을 가능하게 만든 삼박자였다. 미국 의회는 1949년 당시만 해도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봉쇄정책의 최초 입안자인 조지 케넌은 유럽에서의 소련 봉쇄는 유럽의 국가들이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마셜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이 된 딘 애치슨(Dean Acheson)-CFR 회원이며 군수업체인 듀퐁의 고문 변호사였던과 국무부 정책실장 폴 니츠(Paul Nitze)-록펠러 가문 산하기업인 스텐다드 오일 집안의 사위는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액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9년 9월 애치슨과 니츠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일이 일 어났다. 미국의 핵무기 독검을 깨트린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그 며칠 후 중 국에서 이뤄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 를 물리치고 중국 본토를 장악한 일이었다. 이들은 이 일들을 계기로 미국이 위기에 처했음을 강조하고, 국방예산 증액의 필요성을 건의하는 NSC68 (National Security Council Report 68)'로 알려진 국가 안보정책 재검토 보고서를
트루먼에게 제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보고서에서 건의한 서독의 NATO 가입과 미군의 유럽 주둔, 국방예산의 증액이 이루어지게 된 직접적 계기는 다름 아닌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훗날 애치슨은 “한국이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고 밝혔다. 미국으로서는 하늘에서 연이어 동아 줄이 내려온 셈이었다. 사실 그들이 NSC-68에서 제안한 정책 노선, 즉 미국과 유럽의 대대적 재무장은 미국 경제 정책의 주요 문제에 대해 뛰어난 해결책을 제공했다. 한국전쟁 중, 그리고 그 후의 대대적인 재무장이 전후 세계 경제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일단 빗장이 풀리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일본이 중국과 소련의 영향 력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1951년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같은 1951년 호주, 뉴질랜드와는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했고, 1954년엔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를 만들어 태국, 필리핀과 반공 군사동맹을 맺어 미국의 동맹국 범위에 포함시켰다. 당시 동남아시아에는 유럽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하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세력이 있었는데, 소련의 자금 지원을 받은 공산당이 이들을 이끄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이 군사, 경제적 지원을 통해 그 지역에 거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를 지지한 미국과 서방세계의 최종적인 합의의 군사적 형태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 되고, 미국의 동맹국은 미국의 군사 활동에 필요한 기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 재건이 시급했던 동맹국에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할 테니, 동맹국은 빠르게 경제를 재건해 함께 공산주의 세력이 넘볼 수 없는 안정된 세계를 건설하자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바뀐 것은 아니었을지는 역사가 평가하는 것을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쨌든 미국은 당시 이 체제에 참여하는 국가들에 미국이라는 큰 시장도 제공할 것이고, 그 시장에 팔 수 있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산업화와 경제 재건에 필요 한 달러 자금도 지원할 것이고, 거기에 더해 다른 동맹국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용을 부담하여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적 보호 활동까지 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이 사실이다. 서유럽의 연합국은 말할 것도 없고, 패전국이었던 서독과 일본은 두 팔을 벌려 환영해도 모자랄 제안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의 원인이 결국 잉여생산물을 판매할 시장과 생산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원 확보 때문이었는데 미국이 판매 시장도, 자원도 모두 확보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보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과 같은 군비 경쟁을 하지 말라는 조건이 붙 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할 필요 자체 가 없었다는 점에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미국의 대기업, 유럽과 아시아의 정부 모두 윈-윈 하는 상황이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런 체제의 성립은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 주변부의 주요 조임목(Choke Point)'에서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석유를 포함한 해운의 안전을 단독으로 책임지는 상황이 수십 년간, 현재까지 지속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마한, 맥킨더, 스피크만의 지정학적 이론의 결정판이 현실에 적용된 것이었다.
- 1950년부터 1971년까지의 약 20년간의 기간은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형태에 서유럽과 아시아 국가 일부가 적응하는 기간이었다. 말 이 좋아 적응이지 사실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더듬어 가보면서 갈 수 있는 길인지,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야 하는지 불안한 상태에서 어둠 속을 헤쳐 나가는 시기였다.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는 것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비록 미국이 주도하긴 했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유럽, 일본 등의 국가들에 있어 사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보이지도 않았던 기간이었다.
- 1950년부터 1971년까지 세계는 자본주의의 황금기(Golden Age)를맞이했다. 비록 미국과 서유럽, 일본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유례없는 장기 호황이었다. 이 시기가 자본주의의 황금기인 이유는 특히 경제 성장이 노동 소득의 높은 분배로 이어져 인류 역사상 최초로 소비력이 있는 중산층의 형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71년 미국의 중산층이 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에 달했는데 이는 대공황 이전대비로는 거의 2배 증가한 것 이었으며, 2015년 대비로도 약 11%가 더 높은 것이었다. 하지만,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군산복합 대기업과 미 국의 CFR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계층이 고안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황금기를 누리는 동안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수혜를 입은 중산층은 증가하고, 그 시스템의 고안에 깊이 관여한 군산복합 대기업을 비롯한 자본가들은 오히려 자본 이동을 통제받고 높은 세율 등 악조건을 그대 로 감수하고 있었다는 것이 뭔가 앞뒤가 안 맞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들은 그 시스템의 A to Z를 다 이해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 그렇다. 사실 그들은 이전 시대와는 달라진 환경에 맞춰 민주주의와 복지 국가라는 겉으로 드러난 체제의 그림자 속에서 충분한 이익을 누리면서 자 본을 키우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 동안 군산복 합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민간 자본이 충분한 이익을 통해 잉여 자본을 축 적할 수 있었던 구조적 이유가 크게 네 가지나 있었다.
첫째는 풍부한 저임금 노동자의 공급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 에 동원된 군인들이 전역하면서 저임금의 노동력이 풍부하게 공급되었고, 산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일자리와 고임금을 찾아 농 촌을 떠난 농민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대기업들은 충분한 저임 금 노동자를 쉽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기술 혁신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2차 대전 동안 각종 군수물자를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충분한 자금 지원을 받은 대기업들 은 이미 기술력과 생산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 레튼우즈 체제에서 유동성 공급을 위해 군수 산업에 대한 지출이 증가하 자 그들의 기술 혁신을 더 가속화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1970년까지 약 20년의 기간 동안 미국의 기술 개발 예산의 절반이 군수 산업과 우주개발산업에 투여되었는데, 이는 산업 전 분야의 기술 혁신을 자극해 내구소비재와 중화학공업의 기술 혁신으로 이어졌다. 냉장고, 세탁 기, TV 등의 가전제품부터 자동차, 항공기, 선박 등 수송기기, 그리고 철강 산업과 석유화학 제품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전 분야에 걸쳐 급속한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론에 기반한 중산층의 확대다. 높은 세 율, 각종 연금제도의 정착 등 사회 안전망의 확보와 함께 성장한 두터운 중 산층 덕분에 민간 소비가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1960년대 말이 되자 전체 가구의 약 87%가 TV를 소유했고, 75%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중산층은 베이비붐 세대를 낳았고 이렇게 형성된 가족은 새로운 소비문화 를 만들어 냈다. 1955년 7월,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는 어린이와 가족을타깃으로 한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다.
네 번째는 이 기간 동안 꾸준하게 유지된 낮은 에너지 가격이다.
- 1950년대 말 미국 의회는 메이저 회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벌어들 이는 이익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 주는 대신, 그 면제분만큼을 사우디아라 비아에 추가 이익금으로 지불하도록 한 협정을 통과시켰다. 사우디의 이익 은 증가하고, 메이저 회사들의 이익은 보존해 주면서 미국의 세수는 감소하 게 되는 이 협정이 통과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미국 정부가 산유국 정부와 메이저 석유 회사들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보조 금으로 서유럽과 일본은 중동산 석유를 저가에 수입해 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고, 중동 국가들과 메이저 석유 회사는 달러를 손쉽게 벌어들일 수 있 었다. 이런 경향은 대체로 1960년대 말까지 유지된다. 국민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소련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오랜 세 월이 지난 지금 그것이 진실이었는지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국민들만이 아 니라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행정부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을 가능 성이 높을 테니 말이다.
- 브레튼우즈 체제가 근본적으로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로 시작했던 이 유는 누차 언급했듯이 2차 대전 직후가 무역불균형을 고민할 상황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오직 미국만이 시장이 될 수 있었고, 오직 미국만이 자본 을 공급할 능력이 있었다. 여타 국가들은 일단 원조를 받아 재건을 해야 그 다음에 무역흑자가 나든 말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년도 되기 전에 이미 무역불균형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미국이 계속해서 과도한 양의 달러를 공급하자 결국 1960년대에 들어서 면서 미국의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물가가 올라가자 환율이 고 정되어 있는 서독, 일본과 같은 수출국의 물건들은 그 덕분에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다. 이는 수출국들의 경상수지 흑자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의 동반 증가로 이어졌다. 그런데, 환율의 고정이라는 요인이 수출국들에 인플레이션을 전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환율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경상수지 흑자가 증가하면서 달러가 유입되고 자국 통화가치가 상승해 국내 금리는 상승하고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은 하락해야 했는데, 고정환율이 그 메커니즘의 작동을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환율을 고정하기 위해 각국의 중앙은행이 나서서 시장에서 달러를 매입하고 자국 화폐를 발행하면 국내 물가가 상승하여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수입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불태화 조치를 취해야 했는데, 이는 국고에서 불필요한 이자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래도 저래도, 미국은 미국대로, 수출국은 수출국대로 불만이 쌓이는 상황이었다.
- 미국은 오랜 기간 전 세계에 과도한 달러 유동성을 공급했고, 그 결과 나타날 국내의 인플레이션을 서유럽과 일본에 수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은 국내 물가 상승을 막을 수 없었고 달러 가치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달러 유동성 공급을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서유럽과 일본은 미국이 공급한 달러 유동성에 기대어 산업을 재건하고 미국 시장에 수출함으로써 경제를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인플레이션의 수입해야 했지만 달러 유동성과 미국이라는 수출 시장을 대체할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닉슨 행정부의 선택은 각자도생'이었다. “달러는 우리의 통화지만 당신들의 문제야” 라는 재무장관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달러 유동 성 공급은 축소하고,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물가를 통제하고 수입을 억제하겠다는 것이 닉슨 행정부의 선택이었다. 서유럽과 일본이 이런 결정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서유럽(서독), 일본의 삼자는 달러 유동성의 공급, 미국으로의 수출은 유 지하면서 미국의 인플레이션 수입은 줄일 필요가 있었다. 반면 미국은 국내 물가의 안정이 달성되어야 달러 유동성의 공급과 수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의 수출은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 내 물가의 안정을 위해서는 공급하는 달러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달러 가치가 하락하지 않을 방법이 필요했다. 마법이 필요했다. 마법을 찾지 못한 닉슨은 결국물러났다. 1973년 삼각위원회를 설립한 록펠러와 브레진스키는 닉슨 행정부의 국무 장관이던 헨리 키신저, 1976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카터를 삼각위원회 창립 멤버로 참여시켰다. 그리고, 1973년 10월 패러다임의 본격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4차 중동전쟁 이 발발했다. 10월 12일 닉슨 행정부는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결정하자 이 에 반발한 중동 국가들은 10월 16일 유가를 17% 인상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0월 19일 닉슨 행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긴급 구호자금 지원 을 의회에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아랍 국가들은 한 발 더 나가 석유 수출 금지 조치(Oil Embargo)를 취했다. 전쟁 시작 전 배럴 당 3달러 선이던 유가는 단 3개월 사이 11달러를 넘었고 1974년 봄이 되어서는 12달러 선을 돌파했다. 이 전쟁은 삼각위원회가 필요로 했던 한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즉각 제공했다. 유가가 수개월 사이에 4배나 폭등하자 서유럽 각국의 달러 보유 고가 산유국으로 급격하게 흡수되면서 고갈된 것이다. 유럽은 필요한 원유 를 수입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다. 비싸진 유가를 감당하기 위해 달러에 대한 수요도 덩달아 높아졌다. 금과 결별하면서 폭락이 예상되었던 달러에 회생의 동아줄이 내려온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후의 결과를 고려해 봤을 때 그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후의 결과를 고려해 봤을 때 그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삼각위원회가 중심에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 그 림은 대략 이렇다. 미국은 계속해서 서유럽과 일본에 대해 수출 시장 역할 을 유지하고, 달러는 서유럽과 일본을 거쳐 원유 수출국으로 유입된다. 원 유 수출국에 달러가 쌓이면 그들이 인플레이션 수입국이 되므로 이는 다시 원유 가격의 상승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원유 수출국이 달러를 다시 역외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원유 수출 국이 만족할 만한 잉여 달러의 투자 방법을 제공해 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러면 원유 가격의 안정, 달러 유동성의 공급, 서유럽과 일본의 수출과 미국의 수입이 모두 달성되는 만족스러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다. 1974년 삼각위원회가 그린 이런 그림을 바탕으로 미국은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상대로 설득에 나섰다. 그해 6월 키신저는 사우디 를 상대로 양국 간 경제와 군사분야의 광범위한 협력에 대한 동의를 이끌 어 냈고, 그로부터 한 달 뒤 닉슨이 직접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결국 1975년 석유의 수출 대금은 달러로만 받는 대신 미국이 무기와 안보, 인프 라 건설 등을 제공한다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합의에 이르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OPEC이 석유 수출 대금을 달러만으로 받기로 하게 된 것이다. 이를 키신저는 페트로달러 재활용(Petrodollar Recycling)이라고 불렀다.
- 금융위기 즈음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쑹홍빙, 윌리엄 엥달의 책들은 '페트로달러라는 말이 대중들에게 널리 익숙해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핵심적인 논리는 이렇다.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있을 무렵 사우디가 석유 수출의 결제를 달러만으로 하기로 합의하는 대신 미국은 사우디에 무기를 제공수출하고 안보를 보장해 주기로 했다. 이 과정은 미국이 패권을 추구하기 위 한 음모의 일환이고 이를 설계하고 추진한 것이 데이비드 록펠러와 헨리 키신저를 중심으로 한 삼각위원회, 빌더버그 회의의 세력들이라는 것이다. 앞장을 모두 읽었다면 이런 음모론적 사건의 구성이 사실 상상과 사실이 취약한 조합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닉슨이 사우디의 국왕과 1975년 조약을 맺을 당시에는 이란과 이라크가 사우디보다 더 친미 성향 국가였다는 점, 닉슨은 삼각위원회 입장에서는 제 거하고 싶은 대상이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은 그들에게 한창 공격당하고 있었다는 점, 정작 사우디아라비아가 스윙프로듀서 역할을 하 게 된 것은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이 미국과 단교하고 이라그와 전쟁을 한 1980년대에 들어서라는 점 등의 사실만으로도 모두 위의 음모론이 제시하 는 가설을 반박할 수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라는 점 등의 사실만으로도 모두 위의 음모론이 제시하 는 가설을 반박할 수 있다. | 이런 정황 외에 유로화 출범의 과정만으로도 음모론이 얼마나 허황된 것 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닉슨의 금태환 정지 선언이 있기 1년 전 인 1970년 이미 유럽에서는 유럽의 단일 통화를 출범시키기 위한 베르너보 고서(Werner Report가 만들어졌다. 달러에 대항할 수 있는 유럽의 단일 통화 에 대한 구상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2차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상승하며 달러가 다시 신뢰를 잃고 금값이 급등하던 1979년에는 유럽통화체제(European Monetary System)가 출범했다. 이것이 말해 주는 바는 독일(서독), 프랑스 등 삼각위원회의 서유럽 회원들이 결코 자발적으로 달러 기축통화 시스템의 구축에 참여했을 리 없다는 점이다. 유로화는 달러의 대항마란 말이다!
- 레이건 시대는 사실상 금에 고정되지 않은 불환지폐, 즉 화폐를 발행하 는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인 신용화폐(Fiat Currency) 시대가 처음으로 시작된 시기다. 항상 처음이 그렇듯이 레이건의 재임기간은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물가와 실업률이 잡힌 것은 실제 임기 후반이나 되어서였고, 복지 를 축소하고 법인세를 낮추면서 재정은 확장하는 것은 정적들의 공격대상 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마침 이를 돌파하기 위한 훌륭한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소련이었다. 소련의 핵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적자 재정을 감수할만한 그럴듯한 이유 가 될 수 있었고, 레이건은 1983년 3월 소위 스타워즈 계획을 발표했다. 요지는 소련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우주 공간 또는 대륙의 상공에서 요격하는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미사일, 레이저, 인공위성 등 첨단 우주 장비를 개발이 필요한 계획에 군수 산업계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국방예산은 다시 한번 급격히 증대되었고 이에 맞춰 본원통화도 술술 풀려나갔다. | 신용화폐를 찍어 내야 할 그럴듯한 이유와 방법은 갖추었지만 이렇게 찍 어 낸 화폐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게 만들 방법도 역시 필요했다. 인 플레이션을 수출할 수 없다면 화폐 가치의 급변동이 나타나고 더 이상 화폐 공급을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브레튼우즈 체제 동안 인플레이 션을 수입했던 유럽과 일본은 삼각위원회를 통해 함께 인플레이션을 수출할 곳을 찾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각국 정부의 지원하에 인 플레이션을 수출할 곳을 찾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닐 민간 거간꾼 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었다. 이 사기 진작의 방법이 바로 감세와 규제철폐라는 공급주의 경제였다. 민 간 거간꾼들은 인플레이션을 수출할만한 인구가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 고 세계 방방곡곡 달러를 침투시켰다. 신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개척이 만만치 않을 경우 정부의 도움을 요청하면, 정부는 주저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보탰다. 브레튼우즈 체제 동안은 국가의 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가 있었지만, 이제 공산권을 제외하면 어느 곳이라도 화수 분에서 막 꺼낸 달러를 아무런 제한 없이 투입할 수 있었다. 화수분 경제와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때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화수분 경제는 애초에 돈을 찍어 내지 않으면 어떤 혼란이 닥칠지 모르던 상황에서 해결책으로 제시된 방안이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시 작될 때부터 이어진 흐름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30여 년간 지속된
방향을 더 확대하는 것에 해당했다. 마치 정지하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자 전거 타기와 같이 끊임없이 돈을 찍어 내서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무게로 붕괴될, 샘솟는 지하수와 같아서 어딘가로 계속 흘려보내지 않으면 스 스로를 서서히 물에 잠기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시작한 것이었다. 여 기서 통화주의는 화수분에서 돈을 꺼내는 속도를 관리하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했고, 규제철폐와 금리인하는 찍어 낸 돈이 흘러갈 곳을 찾아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 수익률 곡선의 역전이 일어났다가 급격한 정상화(Steepening)가 일어난 사례가 1989년, 2000년, 2006년 이렇게 세 차례 있었다. 그런데 위의 그림을 보면 스티프닝(Steepening)에 대한 재밌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수익률 곡선의 역전 후 일어난 스티프닝은 모두 장단기 금리가 함께 하락하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스티프닝이 일어날 때는 단기 금리뿐만 아니라 장기 금리 역시 하락했다는 것이다. 수익률 곡선이 평탄화되는 현상은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고 했다. 돈이 너무 많아서 빌리기가 너무 쉽거나 아니면 빌려봤자 수익을 내기 어려울 정도로 경기가 침체되어 있거나. 그런데, 그린스펀은 평탄화나 역전이 나타날 때마 다 어김없이 금리를 인하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연 침체된 경기를 살린 행위였냐는 것이다. 경기가 살아나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수익 이 크다고 기대할 만한 프로젝트에 자금이 공급되면서 금리가 높은 장기 채권에도 수요가 생긴다. 그런데, 이제까지 스티프닝이라고 불렀던 현상들은 모 두 인위적으로 단기 쪽 수요의 증가를 장기쪽 수요의 증가보다 더 크게 만들 어 생긴 현상이었다.
- 은행들은 예금액이 증가하거나 자본금이 증가하지 않는 한 대출 한도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신용 부도스왑(CDS)이라는 마법의 도구는 은행들이 같은 대출한도 내에서 기업이나 정부와 같은 자금 수요자들에게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을 조달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었다. 시장에 훨씬 많은 채권이 공급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린스펀의 미소가 보이는가? CDS는 보호매수자 입장에서는 보험과 흡사한 구조이지만 신용 위험의 회피 대상이 되는 대출채권에 해당하는 기초 자산을 직접 인수하지 않고도 위험만 인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험과는 구분되었다. 그렇다고 대출이 나 채권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적용할 수 있는 법의 테 두리가 모호했다. 기초 자산을 직접 인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레버리지 효과는 컸고, 유동성이 낮은 채권을 기초 자산으로 할 경우에도 CDS 자체 의 유동성은 컸기 때문에 채권 시장과 투자은행에는 신천지가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갑자기 오랜 친구라며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미 1970년대부터 모기지 채권을 담보로 한 자산유동화 증권은 시장에등장했고, 1980년대에는 다시 이들 유동화 증권을 시장에서 소화하기 쉽 도록 위험 수준에 따라 트렌치(Tranche)를 나눠 만든 신용 구조화 채권(CMO, CDO)이 등장했다. 1990년대에 CDS와 이런 신용 구조화 채권들이 만나 합성 구조화 채권까지 등장하자, 이제 사실상 어디의 무엇이라도 현금흐름만 있다면 이를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 돈을 만들수 있는 방법이 만들어졌다. 물론, 장외파생상품을 돈을 찍는 수단으로만 이해한다면 말도 안 되는 오류다. 이것이 신용 리스크의 효과적 관리 수단의 개발이기도 했던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아시아, 러시아와 남미의 외환위기를 거 치면서 합성 구조화 채권의 운용 경험이 쌓이고,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의 붕괴, 엔론(Enron)과 월드컴(MCI WorldCom)의 파산 등의 사태가 일어났음에 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았던 것은 이런 파생상품들의 공도 컸다. 문제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시장의 시각이 너무 한 방향으로 치우쳤다는 것이다.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는 2002년 CDO, CLO, CDS 등의 신용 파생 상품의 빠른 성장과 적절한 가격 결정이 신용 위험을 잘 분산시켜 닷컴 버 블의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어찌 보면 단 몇 년 후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조금의 단서도 가지고 있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돌아봤을 때, 당시 이들 합성 구조화 채 권의 급격한 성장은 신용 리스크의 관리도구와 신용 창출의 기폭제 역할 중 후자에 더 충실했던 결과였음이 맞아 보인다.
- 중국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자본(Capital)과 기술(Technology)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모두 이를 충분히 이해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소 련이라는 체제 경쟁자에 대한 유용한 펀치라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잉여 자본을 수출할 수 있는 큰 영토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시작해 볼 만한 거래였다. 중국 역시 마오쩌둥의 실패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개혁개방에 대해 더 이상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의 문제로 인식이 변화한 상태였다.
- 클린턴이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간 것은 그들이 미국 내의 여론을 유리하게 바꾸는 데 활동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대규모 사절단은 클린턴의 의도에 맞게 정관계를 설득하는데 적극적으
로 나섰고 여론은 건설적 관여 정책에 점점 호의적이 되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클린턴은 중국의 WTO 가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중국의 상황은 이미 살펴보았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와 장쩌민의 권력 공고화 이후 중국의 보수파의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개혁론자들은 경제 선 진화 전략으로 WTO 가입을 적극 추진했다. 저임금을 활용해 제조업을 키 우고, 수출길을 열기 위해선 중국산 상품의 판로를 개척하고 기술과 자본을 투자받아야 했다. WTO 가입이 지름길이라는 결론이었다.
-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 세대-침묵의 세대(Silent Generation-는 1, 2차 세계 대전을 겪었고 큰 빈부격차, 농촌에서 도시의 교외로 이주한 공업화 1세대 에 해당했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와는 달리 2차 대전이 끝난 후 대공 황, 전쟁과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대가족을 이루는 기쁨 을 맛보았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늘어난 가족, 특히 자녀 세대-베이비 붐 세대에게 안전한 삶, 안정적인 삶, 더 나은 삶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이들 침묵의 세대들은 자녀들인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기본적으로 안정 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대전의 참상을 몸으로 겪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대공황을 직접 겪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침묵 의 세대와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이들의 부모 세대가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1970년대까지는 미국 유권자들의 요구는 '일자리와 복지' 로 요약할 수 있었다. 대공황과 실업의 공포와 공업화의 혜택을 모두 느껴 본 이들 세대는 자녀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가 실업이라는 문제로 고통받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설사 경제 위기가 닥치더라도 말이다. 이런 욕구 는 정부에 대한 복지 증대’ 요구로 이어졌고, 스스로도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높은 저축률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어질 베이비붐 세대와 비교하면 소비 성향은 현저히 낮았고, 저축 성향이 높았으며 확장적 재정정책에 대해 서는 비판적인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1960년대 히피즘의 자유(Freedom)라는 용어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의미했다. 마약, 섹스, 반전 등은 기성세대에겐 금기시되어 있던 것들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 행위였다. 하지만, 이런 탐구를 통해 얻은 결과물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대는 물질적 편안함에 대한 거대한 욕구가 있었다. 부모 세대는 2차 대전 이후 점점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 해도 한 번 형성 된 가치관을 바꾸기 어려웠다. '절약' 말이다. 실제 2013년 영국에서 발행된 영국 베이비붐 세대의 소비 성향과 관련된 연구에는 이것이 잘 요약되어 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직접 만들거나 (Make Do) 고쳐서(Mend) 쓰는 세대였다면 베이비붐 세대는 사서 쓰는 세대였다. 압축적이지만 위의 비교는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자신들이 당장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지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당장 감당할 수 없다면 신용-부채-을 동원해서라도 지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대였다. 절약과 저축에서 소비와 투자'로 사고의 관점이 이동한 것 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저축은 절약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 반면 투자는 소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부모 세대는 죽어 서 상속을 하는 순간까지도 내일을 대비했다. 생존 그 자체를 중시했던 것 이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달랐다. 그들에게 '투자'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 큰 편안함, 편리함을 추구하는 과정이 '투자'였다. 그들의 부모세대는 먹고살기 위해 소비했다면, 베이비붐 세대는 소비-투자를 위해 부채를 일으키는 것을 합리적인 행동으로 여기게 된 세대였다.
- 부모 세대와 아주 큰 사고방식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그들은 겉보기가 어떠했든 부모 세대와 비교해서 근본적으로 미래가 더 밝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지금보다 미래가 더 밝을 것이므로 부채는 미래에 갚을 수 있을 것이며, 적절한 소비는 밝은 미래를 위한 투자로 간주되었다. 자녀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것은 교육에 지출한 비용보다 그 결과 얻게 되 는 소득이 더 높을 것이라는 기대에 기초한 투자, 큰 자동차를 사는 것은 자동차를 타고 더 먼 곳으로 출퇴근하고 더 많은 물건을 실어 나름으로써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투자, 더 크고 좋은 TV를 사는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접해 스스로를 개발하는 투자라는 사고방식에 의해 합리화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다이너스 클럽을 필두로 좁은 지역에서만 사용되면서 나 타난 신용카드업체들이 1970년대가 되면서 미국 전역으로, 그 뒤로 전 세계 로 확장되어 나간 것은 세대의 사고방식의 변화와 때를 같이했던 것이다. 존 레논의 「Imagine」에 열광했던 세대는 처음엔 미래는 더 밝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탐구'로서의 자유(Freedom)'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히피즘이 추구하는 추상적인 밝은 미래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눈치 빠른 젊은이들은 부유한 부모에게 다시 돌아가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최신 지식에 대한 교육을 받고 도시에서 지적인 직업 에 종사하는 것이 진정한 밝은 미래라는 것을 곧 알아챘다. 히피들은 여피 (Yuppie)로 대대적으로 전향했다. 여피족이 추구하는 '자유(Freedom)'는 '자 유로운 자본주의의 자유였다. 어쩌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물질적 풍요의 혜택을 세대 전체가 받았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었던 현상이었다. 이 세대가 부모 세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아 시대의 주류로 나서기 시 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1970년대 후반 무렵부터였다. 1976년 아칸소 주 의 법무부 장관으로 선출되었다가 2년 뒤 불과 32세의 나이로 주지사가 된 이 세대의 선두주자가 1946년생인 빌 클린턴이었다. 1975년 불과 26세에 상품 (Commodity) 선물 트레이딩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자 회사를 설립했던 레이 달리오는 1949년생이다. 1955년생인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가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설립한 것은 각각 1975년과 1976년이었다. 레이 거노믹스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들 세대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다. ERISA는 부모 세대와 이들의 합작품이었지만, 확정기여형(DC) 퇴직연 금은 바로 그들 스스로를 위한 자작품이었던 것이다. | 레이건의 선거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화수분의 돈을 소 비와 투자라는 형태로 흐르게 만들 베이비붐 세대를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 다. 망설이지 말고 풍요를 추구해라. 그것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길이다.
- 본원통화를 공급하고 신용을 창출해도 이로 인한 총수요의 증가가 총공급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금리를 인하해서 신용을 더 창출해서 총 수요를 더 자극해야 했다. 실제로 20여 년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예상대 로 인플레이션이 달성되면 우주는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는 통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필립 스 곡선에 의하면 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지면 실업률이 증가하게 되고 이는 경기가 침체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를 방치하면? 이제까지 발행한 어마어마한 양의 통화가 수축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엄청난 질량이 한 점에 모여 생긴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더 수축하듯이, 멈출 수
없는 디플레이션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할 것이 예상되었다. 디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가 생겨 소비가 감소하고 저축이 증가하면, 이제까지 꾸준히 공급 한 통화에 의해 높아진 자산의 가치가 하 락하고, 이는 신용을 축소시켜 다시 경기를 침체시키고, 다시 물가가 더 하락하는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악 순환 말이다. 좌냐 우냐, 통화정책이냐 재정정책이냐는 사실 오바마의 불평처럼 진정한 쟁점이 아니었다. 지고의 가치는 어떻게든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 었다. 버냉키도, 옐런도, 서머스도, 크루그먼도, 숨 고르고 있는 과거의 탈규제 시장만능주의자들도 이 점에서는 모두 한 팀이었다. 크루그먼은 그런 점에서 특히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신케인스주의자들 중에서도 가장 왼쪽에 가까운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돈도 풀고 이자율도 낮추고, 거기에 더해서 미래에 소비할 여력 까지 다 끌어와서라도 소비를 자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 1980년대 이후로 중산층이 감소하고 소비 여력은 감소했는데 그 원인 중 첫 번째는 바로 통화 공급의 증가와 낮은 이자율로 자본을 조달하기가 쉬워진 상태에서 기술(Technology)이 자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는 것 이다. 공급망을 관리하거나, 신기술을 개발하는 등 반복적이지 않은 숙련 된 기술을 요하는 고숙련 근로자들은 오히려 숙련 프리미엄(Skill Premium)을 인정받아 소득이 더 증가한 반면, 기술의 발달에 의해 추가적인 자본 투입 으로 대체되기 쉬운 반복성이 높은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일자리는 로봇이나 정보통신 기술에 의해 대체되어 오히려 감소했다. 분명한 것은 기술과 자본의 도움으로 근로자 1인당 생산성은 전 영역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는 것이다. 노동 생산성의 증가에 비해 근로자 의 임금이 적게 증가한 것은 자본과 기술의 몫이 투자자와 기업의 몫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급 측면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난 논리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중산층은 감소했고 덕분에 수요의 측면에서 소비 여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 2004년 마이클 둘리와 그의 동료들은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지원으로 '재건된 브레튼우즈 시스템’이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브레튼우즈 시스템은 미국이라는 중심부(Center)와 서유럽과 일본이라는 주변부(Peripheral)를 구조의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중심부 미국이 금에 고정된 기축통화 달러를 주변부로 공급하면 주변부에서 공급받은 달러를 바탕으로 미국이 수출하는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달러가 순환되는 구조였다. 이 구조는 주변부 국가인 일본과 독일의 수출 경쟁력이 미국을 앞서기 시작하면서 흔들리게 되었다. 금에 고정된 달러의 가치가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는 WTO 체제는 어떤 면에서 변형된 브레튼우즈 체제와 흡사했다. 일단, WTO 체제 역시 군사적 측면에서는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경찰 역 할을 하고 있었고 군산 복합 기업들이 건재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체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측면은 어떠했을까? 기본적으로 새롭게 되살아난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경제적 측면 역시 중심부에는 여전히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있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주변부 역할을 해줄 국가가 있어야 했다. 이 보고서에서 지적한 주변부 국가들은 무역수지 흑자국들, 그 러니까 동아시아의 외환 보유고 축적국들이었다. 바로, 중국, 한국 대만 등의 국가들 말이다. 중심부 국가인 미국은 여전히 달러를 주변부로 공급하고, 주변부 국가들은 이 달러로 생산시설에 투자하고 다시 미국으로 달러 를 순환시켰다. 과거에는 미국이 무역 적자국이 되면서 달러를 회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스템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 새로운 체제는 달러를 회수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미국은 소비를 부추기고 있었고 동아시아 국가들은 수출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고 있었다. 양측의 이해관계는 미국 국채라는 매개체를 통해 맞아 들어갈 수 있었다. 주변부 국가들은 달러를 생산능력 확대에 투자했고 이 를 통해 재화를 미국이라는 시장에 수출했다. 주변부 국가들은 수출 경쟁 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급망의 분화를 통한 생산성의 향상 역시 수출 경쟁력 향상 과정에서 벌어진 결과물이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수출 경쟁력 유지를 위해 자국 통화가치가 상승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주변부 의 각국 중앙은행들은 계속해서 기업이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를 사 들이고 자국 통화를 발행해야 했다. WTO 체제하에서 수출 중심의 동아시아 국가가 통화가 절상될 경우 낙오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사들인 달러는 최대한 안전하게 투자되어야 했다. 상상해 보라. 한 차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의 지휘로 피눈물 나는 강제 구조조정을 당하며 알짜 자산을 해외 자본에 빼앗기다시피 했던 경험이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과연 위험 자산에 투자할 배포가 있었겠는지 말이다. 미국 국채는 수출국들에 달러의 유일한, 궁극의 투자처였다.
-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주요 수출국들이 자국의 화폐 가치 절상을 막기 위해 달러를 매입한 것은 결코 룰을 무시하거나 깨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미국 국채에 대한 투 자가 최고의 옵션이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단지 그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주도한 WTO가 구축한 자유무역 시스템은 그렇게 돌아가는 바퀴였다. 바퀴의 축은 중심부 국가였 고, 바큇살은 주변부의 수출국들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에 충실했기 때문에 바퀴가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이다. 화폐 가치의 절상을 막기 위해 달러를 사들이는 만큼 자국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은 자국 물가 상승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미국이 인플레를 주변부로 수출했던 것은 이때도 변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재건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주변부 국가들이 어떻게 자국 물가 의 상승을 억제할 수 있었을까? 뼈를 깎는 공급 측면의 생산성 향상의 노 력이 있었다. 수출국의 국민들은 뼈를 깎아가며 생산성을 향상시켜서 더 싼 달러로 표시했을 때- 값에 물건을 생산했고 미국의 국민들은 수출국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대가로 가만히 앉아서 더 싼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출국들이 미국의 국채에 끊임없이 투자하니 미국은 중동에서의 전쟁 수행이나 복지제도의 개혁에 들어가는 비용을 조달하기 가 수월했다. 정부의 재정을 해외에서 조달할 때 얻어지는 효과는 바로 민 간의 투자 여력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민간 부문은 자금시장에서 정부와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FANNG과 같은 기업들이 모험적인 도전을 시도할 때, 그들은 주변부 국가들과 비교해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가 용이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본받아야 한다는 논리의 한계가 여기 있다. 실리콘 밸리는 정부와 자금을 놓고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전제 조건이 달랐던 것이다. 중국은 조립생산을 담당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경쟁력이었다. 농촌의 유휴 노동력을 도시로 계속 끌어들여 임금 상승을 억제한 것이 바로 뼈를 깎는 노력이었다. 한국이나 대만의 경우 자본 투입을 통해 이룬 기술의 발 달이 노동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뼈를 깎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외환 보유고를 축적 한 수출국들은 미국이 주도한 자유무역 질서가 작동할 수 있게 자국민들의 뼈를 깎는 노력을 제공한 쪽이라고 볼 수 있었다.
- 금융위기 이전까지 중국의 입장은 어땠을까?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와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직접 투자는 명백하게 중국이 재건된 브레튼 우즈 체제로부터 얻고 있는 이득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지불하는 대가 도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첫 번째 대가는 국내적으로 불균형이 쌓여 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생산 공장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낮은 생산비용을 유지해야 했 다. 임금 상승은 억제하면서도 중앙은행이 달러를 흡수하고 시장에 통화를 공급하는 고난이도 곡예 비행을 해야 했다.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거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일본이나 한국이 그러했듯이 공급된 통화를 주로 수출 산업 발달의 자본으로 공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영기업이나 수 출 기업들에 특혜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결과적으로 국내적인 불균형 이 커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과거 산업화 시절에 우리나라의 수출 중심 의 대기업 육성 정책의 결과와 유사했다.
두 번째 대가는 무역을 통해 벌어들여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고로 쌓은 막대한 달러준비금을 미국에 헐값으로 빌려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이렇게 수출국들이 저리로 빌려준 달러가 미국의 거품 생 성에 일조했다는 입장이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 가 있었다. 만약 미국의 국채가치가 하락하거나, 달러 가치가 폭락하는 경 우 공든 탑이 무너져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전까지 후진타오의 중국은 재건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미국 이 중심부, 중국이 주변부 역할에 충실한 것이 서로 호혜적 106 관계라고 받 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위기의 발생 직전까지 중국은 국내적으로 저 두 가지 문제를 감수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공산당 지도부에 부패-미국 기 업자본과의 결탁-가 만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금융위기가 없었다면 중국이 언제까지 저 문제들을 감수하 고 이 체제의 주변부 역할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을까? 수출주도 성장전략이 한계에 도달하게 될 때, 즉 낮은 생산비용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까지 이어갔을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의 추가 공급의 한계점, 그러니까 동쪽 해안의 도시에서 점점 내륙의 도시로 개발을 이어가면서 내륙의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때를 그때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근로자들의 임금 수준이 어느 수준 이상에 도달하여 수출 주도에서 내수 중심으로 경제 성장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 위안화의 가치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개입할 필요성이 없어져 달러를 중앙은행이 흡수해서 미국채에 투자할 이유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그 시기가 오기 전에 산업구조를 안정적으로, 주변국들의 견제를 덜 받으면서, 고부가 가치 산업 중심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간재를 수입하여 조립한 후 최종 수출하는 위치에서 중간재를 수출하는 위치 로 전환시키는 것 말이다. 그런데,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집권하면서 리쇼어링 정책을 천명 하자 중국은 즉각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 미국이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중국도 바빠질 수밖에 없었 다. 새로운 판을 준비해야 했다. 2009년 오바마가 3박 4일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맞이하는 중국의 태도는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클린턴 과 부시가 방중했던 1998년과 2001년에는 구속 중이던 반체제 인사를 석방 하는 유화 제스처가 있었는데, 오바마 방중 당시에는 오히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유혈 사태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전격 단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 2011년 오바마가 실리콘밸리의 주 요 기업인들을 초대해 가진 만찬 자리에서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미국 에서 생산할 수 없겠냐고 요청했을 때 스티브 잡스가 그건 어려울 것 같다. 고 거절을 표시한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트럼프에 앞서 리쇼어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바로 친노동자 성향의 오바마였던 것이다. 하지 만 오바마는 최종적인 문제가 소비’라면 어떤 형태로든 해외에서 수출을 통 해 이익을 잘 내고 있는 미국의 기업들이, 더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미국으로의 회귀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지적을 인정할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헷갈린다면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중국에 하부 공급망을 두고 있는 미 국의 기업들이 미국으로 공급망을 옮기게 되면 미국 노동자의 파이가 커지 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미국이 벌던 파이 전체가 작아지는 것일 뿐임을 오바 마는 부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친기업적이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공화당 소속의 트럼프는, 사실 미국 기업의 이익을 깎아 먹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빼앗긴 노동자들의 몫을 되찾아 오겠다며 과감하게 다자간 자유무역 협정의 틀을 깰 것을 선언했다. 역시 오 바마의 실패를 부각시키고 지지자들에게 세일즈할 수 있는 모양의 행동이었다.
- 2016년 1월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와 카일 배스(Kyle Bass) 등 서양의 헤지 펀드 매니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위안화가 과대 평가되어 있다며 위안화 평가 절하에 베팅하는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 헤지 펀드들이 중국의 내부 권력 투쟁의 결과 자본의 대규모 유출이 일어날 것을 파악했 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상해방은 오랜 기간 서구의 투자자들과 이해관계를공유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해 놓았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사실 이들 헤 지 펀드 공격의 자금이 사실 상해방 그들 자신이 제공한 것이라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시진핑 정부는 2015년 홍콩을 통해 빠져나가는 자본을 급하게 틀어막는데는 성공했지만, 이어서 해외 세력들의 위안화에 대한 공격적인 매도가 지속되자 딜레마에 빠졌다. 당시 중국은 수년에 걸쳐 위안화의 국제화 작업에 공을 들여 왔고, 한창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에 위안화를 포함시키 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위안화의 가치가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국제 거래에서 광범위하고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따라서, 자유로운 거래는 보장하면서도 위안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막아야 했기에 위안화를 직접 매수하는 시장 개입을 무리해서라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2014년 최대 4조 달러를 기록했던 중국 의 외환 보유고(FX Reserves)는 이 과정에서 상해방의 주식 매도 공격 이후인 2015년 말에는 3조 3천억 달러까지 감소했고, 헤지 펀드들의 공격이 이어진 후인 2016년 말에는 결국 마지노선이라 여겨지던 3조 달러 선마저 위협받는수준까지 도달했다.
시진핑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 유출을 억제하 는 통제정책의 시행 말이다. 자유로운 위안화 거래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중국 정부의 목표에는 부합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야장천 위안화 를 매입하는 것은 중국 내부의 부패한 세력들이 합법적으로 자금을 해외 로 빼돌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은 중국 내 비금융기업의 역외기업대출액을 자기자본의 30%로 제한하고, 중 국에서 사업 중인 외국 기업들이 해외송금을 할 경우 당국의 승인을 받도 록 한 규제의 기준을 기존의 5,0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로 낮췄다. 중국 자국 기업은 100억 달러 이상의 해외 투자를 금지하는 한편, 모기업의 주력 사업과 관계없는 10억 달러 이상의 해외 인수합병을 금지하고, 유니온페이 신용 및 직불카드를 통해 홍콩 보험 상품에 가입하는 것을 제한하여 위안화의 홍콩 유출 역시 통제했다.중국 당국의 목표가 어떤 목적을 가진 세력의 의도된 자금 유출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중국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 해외의 투기적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는지는 아마 앞으로도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위안화 환율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헤지 펀드들은 조용히 손을 뗐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헤지 펀드들은 굿만 본 것이 아니라 떡도 충분히 먹었을 것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수십 년간 미국 달러는 기축통화 역할을 해왔다. 송금을 달러로 해야한 다는 규정은 없었지만 가장 많은 송금 거래는 역시 달러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이란을 제재한다는 명목으로 스위프트에서 이란의 은행들을 배제 한다는 것은 이란과 무역을 하는 국가나 기업은 돈, 즉 달러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앞 장에서 언급했던 국가 간 자유무역에 있어 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나 상기해보자. 언어나 문화의 차이 따위는 얼마 든지 극복 가능하다. 하지만 무역을 위해 주고받을 돈의 가치가 안정적이지 못하면 무역은 활성화될 수 없다. 이것은 과거에나 앞으로나 변함없을, 근 본적인 부분이다. 그러니까, 미국이 스위프트에서 이란의 은행을 배제하는 제제가 의미하는 것은 미국이 안정적인 화폐, 즉 기축통화인 달러의 사용에 제한을 둠으로써 전 세계 무역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 줬다는 것이다. 아니 왜 달러 사용을 못 하냐고? 계좌에 달러를 충분히 쌓아 두고 있는 중국이 제재를 무시하고 이란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자. 쿤룬 은 행의 계좌에 쌓아 둔 달러를 스위프트를 거치지 않고 이란 은행에 송금하려 고 한다고 했을 때, 만약 두 은행 간에 서로 계좌 이체를 완료했다고 선언한 들 국제 은행네트워크는 그들의 장부가 바뀐 것을 인정할 수 없다. 달러를 발권하는 중앙은행, 즉 미국의 연준이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은행들 이 인정하려고 한들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은행 간 거래는 단지 장부의 숫자를 동시에 바꾸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장부들의 기 록을 전 세계 모든 은행들이 신뢰할 수 있어야 국제간 결제가 작동하는 것이 다. 그래야 어떤 돈이 생기거나 이동할 수 있다. 바로 스위프트와 국제결제은 행,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그 장부의 신뢰를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중국과 이란 간의 양자 간 거래는 그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스위프트를 거치지 않고 달러로 거래하고자 한다면 가능한 방법은 제3국에 있는 차명 계좌를 이용해 양국이 거래하거나, 아니면 달러 현찰을 물리적으 로 비행기나 선박을 이용해 옮기는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