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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과학공부

과학 2024. 3. 19. 07:16

- 몸의 기능을 연구하는 생리학 physiology에서 파생한 피지션physician은 의사, 특히 내과의사를 뜻한 다. 오랫동안 의사는 곧 피지션이었다. 피지션이 되려면 대학에서 생리학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아야 했다. 피지션은 환자를 주로 약 으로 치료했다. 반면 외과의사를 뜻하는 서전surgeon의 어원은 그리 스어 cheiros (손)와 ergon(일)의 합성어다. 이것이 라틴어로 chirur- gus, 다시 영어로 surgeon이 되었다.' 요컨대 외과의사는 '손 기술 자'란 뜻이다. 수술surgery도 결국 손 기술이란 뜻이다. 서전은 대학 도 나오지 않았고 생리학도 몰랐다. 아버지나 선배로부터 배운 칼 쓰는 기술로 환자를 치료했다. 게다가 그 칼로 면도와 이발도 해 주었다. 그래서 이발사 ·외과의사barber surgeon는 하나의 직업으로 분 류되었다. 서전의 지위는 제빵사나 양조업자와 비슷했다. 당연히 피지션은 서전을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
- 마취제는 일견 사소해 보이나 의학은 물론 사회에도 엄청난 영 향을 미쳤다. 백신, 항생제와 함께 의학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 히기에 손색이 없다. 마취제를 사용하면서 외과의사들은 환자의 고통에 대한 부담과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리스턴의 다리 절단 30초 세계 기록(무슨 올림픽도 아니고)도 별 의미가 없어졌 다. 이제는 복잡한 수술을 얼마나 정밀하게 할 수 있는가가 관건 이 되었다. 요컨대 외과가 마취제를 계기로 현대화한 것이다. 인 체 깊숙이 위치한 복강, 흉강 등은 기존 의사들의 손이 닿지 않던 곳이었다. 마취제를 통해 비로소 이곳들이 의사 앞에 모습을 드러 냈다. 또한 뇌, 장기 이식 등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고난도 수술 도 가능해졌다. 마취가 가져온 효과는 수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수면 내시경의 보편화로 좀 더 많은 사람이 손쉽게 몸 안의 위협 요인을 미리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최근 10여 년 동안 대 장암 사망자 수가 꾸준히 감소한 것은 내시경 검사의 확대와 연관 이 깊다.
- 연합군의 승리 요인으로 페니실린을 빼놓을 수 없다. 인류의 가 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는 이 약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부터 대 량 사용되어 강력한 효과를 입증했다. 물론 약의 원리 자체는 과 학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평상시였다면 이 약이 그토록 단기간에 널리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페니실린의 상용화에는 과학 못지않 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 전장에 공급된 페니 실린은 수많은 부상 병사를 살려 전력 강화에 공헌했다. 페니실린 을 원자폭탄, 레이더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기술 적 요인으로 꼽는 이유다.
- 1941년 플로리와 히틀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정부든 제 약회사든 설득해서 대량생산을 해볼 요량이었다. 이 선택은 그대 로 적중했다. 우선 미국 농무부의 노던 리저널 연구소와 협업해 옥수수 찌꺼기를 배양물질로 써서 생산량을 여섯 배 늘렸다. 이 연구소가 미국 중서부의 넘쳐나는 옥수수를 산업에 응용할 방법 을 연구하는 곳이어서 가능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진주만을 공 습당한 미국이 마침내 참전을 결정했다. 선전포고 5일 뒤 미국 정 부는 페니실린의 긴급 생산 계획을 입안했다. 미국 농무부, 영국 의 연구자들, 그리고 머크Merck&Co.와 화이자fizer 등 제약회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그래도 여전히 대량생산은 어려웠다. 1942년 6월까지 미국의 전체 생산량은 겨우 환자 열 명분에 불과했다.' 너무 귀해서 임상시험 환자의 오줌을 걸러 페니실린을 다시 회수 할 정도였다.
1942년 가을 화이자에서 묘안이 나왔다. 지금이야 화이자가 굴 지의 제약회사지만, 원래는 싸구려 레몬을 수입해 콜라에 넣는 구 연산을 추출하던 업체였다. 1919년 화이자는 설탕을 곰팡이로 발 효시켜서 구연산 제조 원가를 6분의 1로 낮춘 이력이 있었다. 여 기서 힌트를 얻은 엔지니어 재스퍼 케인Jasper Kane은 크고 깊은 발효조를 사용하는 딥탱크deep tank 발효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은 구연산보다 의약품 원료에 더 적합했다. 덕분에 화이자는 제약회사 로 변신했고, 페니실린 컨소시엄에도 참여했다. 화이자도 처음에 는 과학자들에게 배운 대로 소형 플라스크를 써서 푸른곰팡이를 배양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걸로 대량생산은 택도 없었다.
케인은 딥탱크 발효법을 페니실린에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도박이었다. 성공을 장담하기도 어렵지만, 핵심 생산 라인 을 푸른곰팡이 배양에 사용하면 다른 제품에 타격을 줄 것이 뻔 했다. 화이자는 회사의 명운이 걸린 이 문제를 두고 장고했다. 결 국 이사회 표결 끝에 케인에게 개발을 맡겼다. 도박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1944년 3월 브루클린의 옛 얼음 공장에서 페니실린 생산이 시작되었다. 계획의 다섯 배가 넘는 생산량이 쏟아졌다. 미 국 정부는 화이자의 동의를 얻어 이 제조법을 19개 회사에 공유하 고, 지원 물품과 자금을 마구 살포했다. 페니실린이 전략 물자여 서 가능한 일이었다. 옥스퍼드 연구소의 페니실린 생산량은 푸른 곰팡이 1세제곱미터당 1~2단위에 그쳤다. 이것이 1944년 상반기 6840억 단위, 1945년에는 7조 5000억 단위까지 치솟았다. 말 그 대로 '천조국' 미국의 위엄이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 전에 투입된 미군의 90퍼센트는 페니실린을 갖고 있었다. 페니실 린은 폐렴, 패혈증에 의한 사망과 부상으로 인한 사지 절단을 현 격히 줄였다. 그 결과 연합군 병사의 약 12~15퍼센트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 페니실린의 위력은 전쟁 후에도 이어졌다. 일단 대량생산으로 가격이 크게 떨어져 누구나 쉽게 구하는 약이 되었다. 1943년 미 국 정부는 페니실린의 자연 추출을 넘어 인공 합성하는 연구도 추 진했다. 14년 뒤 마침내 합성법이 개발되었고, 페니실린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범용약물로 여러 증상에 맞는 변형체들을 만드 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매독, 임질, 결핵, 폐렴, 괴저 등 답이 없던 질병들이 페니실린으로 극복되었다. 페니실린이 구 한 생명은 1942년 이후 2억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약이 이렇게 많은 생명을 구한 사례는 없었다. 
- 과학사적으로도 페니실린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페니실린으로 거대과학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페니실린 개발사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의 직업적 정체성은 다양하다. 예컨대 플레밍은 과학적 발견에 천착한 과학자였고, 히틀리는 정제 기술을 개발한 엔지니어였으며, 케인은 대량생산을 조직한 기업가였다. 이렇듯 페니실린은 정부, 기업, 재단, 대학 등을 망라 하는 집단작업의 결과였다. 또한 페니실린을 계기로 과학 연구에 서 국가 역할이 부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페니실린 대량생산 의 결정적 순간은 미국 정부가 화이자의 제조법을 (특허 따위는 무시 하면서) 공유하고, 엄청난 자금과 자재를 지원한 데에 있었다. 이는 과학 발전이 국가 규모의 지원이 필요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함의한다. 이후 맨해튼 계획, 아폴로 계획 등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과학과 국가는 불가분의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 왓슨과 크릭이 그저 우연히 프랭클린의 사진을 본 것만으로 DNA 구조를 규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사진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으면 진작에 윌킨스나 프랭클린이 해냈을 것이기 때문이 다. 왓슨과 크릭에게는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친, 그들만의 뛰어 난 역량이 있었다.
첫째로 직관이다. 왓슨과 크릭은 주어진 정보들을 조합하여 창의 적 결론을 도출해 내는 직관력이 뛰어났다. 51번 사진을 보자마자 유레카를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샤가프 본인도 의미를 몰랐던 샤가 프의 법칙을 응용할 수 있었던 것도, 네 종류 염기의 복잡한 결합 구 조를 완벽히 맞춘 것도, 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둘째는 융합이다. DNA 구조 규명은 기존 유전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과업이었다. 예컨대 화학물질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고, X 선 결정학으로 대표되는 물리학적 방법론도 갖춰야 했다. 이 점에 서 왓슨과 크릭은 환상의 콤비였다. 원래 동물학과 유전학을 전 공한 왓슨은 DNA 연구를 하고자 생화학과 물리학도 익혔다. 크 릭은 비슷한 시기 많은 학자가 그랬듯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전 환한 경우였다. 양자역학을 확립한 닐스 보어와 에르빈 슈뢰딩거 는 생명 현상의 물리학적 이해를 강조하여 이러한 전환에 큰 영향 을 미쳤다. 이로써 근본적인 요소에 근거하여 거시적 현상을 해석 하는, 물리학의 환원주의가 생명과학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DNA 구조 규명을 계기로 생명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연구하는, 분 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낸다. 가장 근본적인 유전물 질을 규명함으로써 생명 현상 전반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는 점 에서, 분자생물학과 물리학은 유사한 방법론적 기초를 공유했다.
- 그 과정은 이렇다. 우선 세포 속의 DNA가 어떤 단백질을 만들 지에 대한 정보를 RNA에 전달한다. 이것이 전사transcription다. 이때 전사된 RNA가 mRNA다." mRNA가 세포핵 밖으로 나가면 리보 솜이 부착된다. 그러면 가져온 유전정보에 부합하는 아미노산만 차례로 붙어 사슬(폴리펩티드)을 이룬다. 이를 번역transl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폴리펩티드는 여러 형태로 가공되어 단백질을 만들 어낸다. 비유하자면 RNA는 우리 몸의 설계도(DNA)를 암호화해 서 생산 공장(리보솜)으로 가져가, 몸의 기본 재료(단백질)를 만들어 내도록 복호화한다.
이렇게 DNA의 유전정보가 RNA로 복제되고 단백질 생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생명과학의 중심 원리 central dogma라고 한다. 이때 생성된 단백질은 인체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호르몬과 효소 가 만들어지며, 면역과 대사 등의 활동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 mRNA 연구 60년
mRNA는 1961년 DNA의 단백질 생성 메커니즘을 밝히는 과 정에서 알려졌는데 발견과 함께 의학적 활용 가능성도 크게 주목 받았다. mRNA가 생명 현상의 원초적인 조절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1976년, 헝가리의 한 대학원생이 중요한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mRNA를 바이러스 방어에 이용하자는 발상이었다. 이 대 학원생이 바로 커털린 커리코다. 후일 바이오엔테크의 부사장으 로서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 개발을 이끄는 인물이다.
백신은 후천면역의 기억이라는 특징을 이용한다. 즉 병원체의 전부 혹은 일부를 인체에 사전 노출해서 감염이나 증상 없이 면역 학적 기억이 생기게 만든다. 그러면 실제 병원체가 침입해도 인체 는 그 면역 기억을 살려서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다. 가공된 병 원체가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항원이 되는 원리다. 기존의 백신 발에는 이 항원이 꼭 필요했다.
mRNA 기반 백신은 항원 대신 항원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넣어줌으로써 패러다임을 바꿨다. mRNA가 수행하는 이 설계도 전략의 장점은 신속성과 유연성이다. 병원체의 유전정보, 즉 설계 도만 알면 빠르게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발 플랫폼이 정비 되면 기간은 더욱 단축된다. 초기 개발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들어 서 환자의 수가 적은 병도 대비할 수 있으며, 기존 대비 소규모 설 비로도 생산 가능하다. 안전성도 강점이다. mRNA는 인체 내부의 물질이므로 독성이 없다. 또한 제조 과정에 정제된 효소를 사용하 므로 위험한 물질이 들어갈 우려도 적다. 기존의 어떤 백신보다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물론 실제 개발은 쉽지 않았다. 일단 세포에 존재하는 mRNA를 필요한 만큼 만들어낼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는 1980년대 유전자증폭 기술의 개발로 해결되었다. DNA의 특정 부분을 복제·증폭 하여 mRNA를 대량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합성 한 mRNA를 동물에 주사했더니 또 문제가 생겼다. mRNA가 세포 안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공률이 0.01퍼센트 에 불과했다. 게다가 심각한 면역반응이 일어나 동물들이 죽기도 했다. 10년을 넘게 이어온 개발 과정은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다시 10여 년이 지나서야 한계를 돌파할 기술이 등장했다. 매 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교수 로버트 랭거와 다니엘 앤더슨이 개 발한 지질나노입자라는 물질이다. 이것으로 mRNA를 감싸면 세 포 내부까지 안전하게 도달시킬 수 있었다. 2005년 커리코는 펜실 베이니아대학교 동료 교수 드루 와이스먼과 함께 지질나노입자로 면역반응을 유발하지 않는 변형 mRNA를 개발했다. mRNA 백신 의 기반 기술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 사람, 자본, 지식의 선순환
기술이 확립된 다음부터는 기업의 몫이었다. 스탠퍼드대학교의 박사후연구원 데릭 로시는 커리코와 와이스먼의 논문을 읽고 유레 카를 외쳤다. 그리고 지질나노입자 개발자 랭거를 만나 2010년 벤 처기업을 설립했다. 그게 바로 모더나다. 모더나는 'Modified RNA', 즉인공 RNA의 줄임말이다. 이름에서 보듯 mRNA를 기반으로 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주력 사업이다. 특히 2011년 스테판 방셀이 CEO에 취임하면서 성공 가도를 내달렸다. 방셀은 특유의 사업 감 각으로 벤처캐피털과 글로벌 제약회사들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 고, 미국 연방정부의 연구비 지원도 받아냈다. 모더나는 민관협력 의 구심과도 같은 기업이었던 셈이다. 창업 10년이 채 안 돼 노벨 상 수상자를 비롯한 최정상급 인력과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이것 이 바탕이 되어 mRNA 체내 전달 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커리코와 와이스먼도 연구실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자신들 의 기술에 특허를 내면서 사업화에 뛰어들었다. 2011년 커리코는 변형 mRNA 기술의 사용 권한을 바이오엔테크라는 신생 기업에 넘겼다. 튀르키예 이민자들이 설립한 이 독일 회사는 이를 계기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커리코도 25년간 재직하던 펜실베이니아대학교를 떠나 바이오엔테크의 부사장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2017년 에는 화이자와 협약을 맺고 mRNA 백신 개발을 본격화했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의 '대박'이 원천기술 덕분만은 아니었 다. 기업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돈이다. 특히 스타트업은 초기에 안정적인 투자를 확보하여 런웨이를 늘 려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도 이 과정을 거 쳐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보스턴 근교 케임브리지 의 켄들스퀘어 Kendall Square로 상징되는 혁신 클러스터가 중요했다. 켄들스퀘어는 한마디로 미국 생명과학의 총아다. 하버드, MIT 같 은 명문대학을 필두로 1000개가 넘는 글로벌 제약회사와 벤처캐피털이 모여 있다. 뛰어난 과학자, 의사, 엔지니어, 사업가, 투자가 등이 매일 부대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혁신적 지식 이 나오고, 이것이 곧바로 창업과 투자로 이어진다. 이렇듯 켄들 스퀘어에는 고위험 고수익 high risk, high return 연구와 투자에 거리낌 없는 문화가 존재한다. 어제까지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학생이 갑 자기 창업에 나서고, 듣도 보도 못한 사업 모델에 투자가 몰리는 일은 이곳에서는 일상과 같다. 사람, 지식, 자본으로 이어지는 선 순환이 혁신 산업의 붐을 일으킨 것이다.
- 17세기 인류는 극심한 식량 위기를 겪었고, 사망률도 높아 졌으며, 전쟁도 잦았다는 것이 골자다. 특히 유럽에서는 반유대주 의와 마법에 대한 맹신이 팽배하기도 했다.' 이렇게 흉흉했던 사 회 분위기는 소빙하기의 추운 날씨와도 연결된다. 따라서 온난한 기후는 걱정보다는 바람의 대상이었다. 마침 산업혁명이 본격화 하고 벨 에포크가 도래하면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높아졌다. 지금 이야 따뜻해지는 기후가 부정적 뉘앙스를 띠지만, 당시에는 안락 함과 풍요의 의미가 더 컸을 것이다.
- 킬링은 1960년 남극의 측정치를 근거로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2005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측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 47년 동안 이산화탄소 농도는 평 균 연 2피피엠씩 증가했다. 이 추이를 기록한 그래프, 즉 킬링 곡 선은 그대로 기후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킬링 곡선은 해를 거듭 하며 마치 파도처럼, 지수함수적으로 치솟았다. 이는 세계에 충격 을 던져주었다. 흔히 알고 있는 온난화의 위험, 즉 빙하가 녹고 해 수면이 높아져 도시들이 물에 잠길 수 있다는 예상이 현실의 위협 으로 여겨졌다. 온실효과를 실험으로 입증한 틴들로부터 100년이 넘게 걸려 도달한 결론이었다.
킬링 곡선의 가파른 상승은 과학자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겼다.
이제 기후변화는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75년 《사이언스》에 실린 월리스 브 로커Wallace Broecker의 논문은 기념비적이었다. 이 논문은 1800년부 터 지구 온도의 장기 변화를 추적하여, 산업혁명 이후 온실가스 배출이 바다의 탄소 흡수 능력을 약화시켰음을 논증했다. 브로커 는 뛰어난 과학 커뮤니케이터이기도 했다. 과학의 논리를 대중의 언어로 쉽게 바꿔 설명했다. 일례로 지구온난화는 브로커가 1975 년 논문의 제목으로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브로커는 의회나 언론 에 나가서 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는 사람 들이 온난화를 칵테일 마시는 시간의 호기심 거리로 여긴다며, 기 후라는 변덕스러운 야수가 인간을 파국으로 몰 것이라고 독설을 쏟아냈다.

- 천조국의 위엄
이론적 가능성만 있었던 원자 에너지의 현실적 구현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 과정은 육군이 미국과 캐나다 곳곳에 대규모 실 험 시설을 짓고, 과학자들이 이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반적인 연구소를 만드는 규모를 훨씬 넘어섰다. 오펜하 이머는 집단연구와 보안 유지를 위해 사람이 없는 오지에 인력 을 몰아넣는 방법을 제안했다. 즉 외부와 격리된 실험 단지를 조 성하여 각 프로젝트를 집중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동의한 그 로브스는 미국 전역을 돌며 적당한 부지를 골랐다. 시카고에서는 페르미의 주도로 핵분열 연쇄반응의 제어 장치, 즉 원자로를 만들고 테스트했다. 오크리지에서는 콤프턴이 폭탄의 재료인 우라 늄-235의 대규모 농축 작업을 지휘했다. 버클리에서는 로런스가 사이클로트론으로 우라늄-235 와 플루토늄을 분리했고, 워싱턴주 핸퍼드에는 플루토늄 추출 시설이 들어섰다. 로스앨러모스는 이 를 화룡점정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오펜하이머가 각 프로 젝트의 결과를 종합해 최종적으로 폭탄을 설계하고 조립했다. 이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맨해튼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핵물리학 관련 논문이 아예 사라졌다. 또 계획에 동원된 수만 명 의 인력 중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 다. 원래 살던 주민들은 집 근처에 이런 연구시설이 있는지도 몰 랐다.
- 어떤 방법이 성공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모 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OSRD는 우라늄과 플루토늄 폭탄을 모두 시도하기로 했다. 가장 난제였던 우라늄-235의 분리에는 전자기 분리법, 기체확산법, 열확산법이라는 세 가지 기법이 쓰였다. 효율 성만 따졌을 때는 셋 다 실패에 가까웠다. 들이는 자원과 노력에 비해 결과가 너무 적어서였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모 든 것을 정당화했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결정하기까지는 오 랜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만들기로 한 뒤에는 약간의 가능성만 보 여도 인력과 물량을 쏟아부었다. 난다 긴다 하는 과학자들도 그렇 게 조건 없는 대규모 지원을 받으며 연구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계획은 단 3년 만에 성과를 냈다. 1945년 7월 뉴멕시코 앨라모고도에서 테스트에 성공했고, 한 달 뒤 히로시 마와 나가사키에 두 방의 폭탄이 떨어졌다. 1억 총옥쇄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준비 중이던 일본은 곧바로 항복했다. 3년간 총 13만 명의 인력과 2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된 결과였다. 2023년 기준 330억 달러, 원으로 환산하면 약 39조 9600억 원이다. 그러니까 2023년 한국 국방 예산(약 57조원)의 70퍼센트 정도 된다. 이러한 대규모 물량과 천재적 두뇌의 조합은 맨해튼 계획의 성공,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전 세계에서 오직 '천조국' 미국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 가속기 실험은 입자에 전기장을 걸어서 속도를 빠르게 높이면 서 이루어진다. 이때 가속하는 입자에 따라 장치의 종류와 실험 목적도 나뉜다. 우선 입자가속기는 전자, 양성자, 중입자, 중이온 등을 다른 입자나 물질에 충돌시켜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한다. 양성자가속기는 주기율표 1번인 수소에서 양성자를 분리하여 물질에 충돌시킨다. 여기서 쪼개져 나오는 소립자를 반도체, 소재 연구 등에 활용한다. 중입자가속기는 암세포 사살의 명사수다. 수 소보다 무거운 탄소 입자를 빛의 속도 70퍼센트 정도까지 가속하 여 암세포에 쏜다. 기존 방사능 치료에 비해 암세포를 더 많이 죽 이고 정상세포는 덜 죽인다. 중이온가속기는 우주에 존재하는 수 많은 원소를 연구한다. 무거운 원소(탄소, 우라늄 등)를 이온화하고 가속해서 표적 원자핵에 충돌시킨다. 그럼 핵반응이 일어나고, 알려지지 않았던 희귀동위원소가 생성될 수 있다. 즉 중이온가속기 실험에서 뭔가 나오면 화학 교과서의 주기율표가 바뀐다.
반면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가속하여 빛을 생산한다. 전자는 만들기가 쉽고 무게도 수소의 180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래서 속 도를 빛의 99.9퍼센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렇게 가속한 전자 로 만들어낸 빛은 태양 밝기의 100억 배에 달한다. 이걸로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관찰할 수 있다. 몇 년 전 국내 연구진은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해 물 분자H2O가 만들어지는, 1000조 분의 1(펨토)초 순간을 포착했 다. 방사광가속기가 초고성능 거대 현미경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 러한 특징 때문에 물리학과 화학은 물론 구조생물학, 의약학 등에 도 폭넓게 쓰인다.

- 요컨대 아폴로 계획은 과학이 정치, 경제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 면 어떤 위업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순수하게 과학 연구만 의 목적만 있었다면 아폴로 계획은 시작조차 못했거나, 금방 좌초 했을 것이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시대적 목표 가 있었기에 반대 여론과 천문학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폴로 11호로 목표의 상당 부분을 이뤘기에 더 이상 계속되기 어려웠음을 함의하기도 한다. 원래 아 폴로 계획은 20호까지 계획되었으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17호 로 끝났다. 그리고 냉전 질서가 완전히 해체된 이후, 더 이상 달에 가려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을 이유도 없어져 버렸다.

- 과학과 기술의 연결
요컨대 과학혁명은 과학 자체의 위상과 성격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기존의 과학이 철학에 가까웠다면, 근대부터는 기 술에 훨씬 가까워졌다. 오늘날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당연하게 들 리지만 연원을 따져보면 별로 당연하지 않다. 과학과 기술은 별개 의 전통을 갖기 때문이다. 두 전통이 합쳐지는 것은 과학혁명이 초래한 자연관과 방법론의 변화 때문이었다. 이것이 18세기 산업 혁명의 지적 기반이 되었다. 다만 이 과정이 흔히 생각하듯 과학 적 발견을 기술이 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과학 의 이론적 발전이 산업혁명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는 뜻 이다. 과학과 기술이 한층 가까워진 것은 분명하나, 그 연결의 형 태는 간접적이고 모호했다. 그것은 과학적 방법의 공유와 인적 연결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기술자들이 과학의 방법을 수용했다. 즉 기술자들이 과학 적 연구 방법, 실험적인 분석 태도를 통해 기존 기술을 혁신할 수 있게 되었다.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도 이런 경우였다. 와트가 의 뢰받은 뉴커먼 증기기관을 그저 수리만 했다면 혁신도 없었을 것 이다. 그는 기계의 구조와 시스템을 분석하고, 열효율 문제의 원 인을 파악함으로써, 분리형 응축기라는 기술적 대안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여기에 고도의 수학이나 과학 이론은 필요하지 않았 다. 기존 데이터를 귀납적으로 분석하여 더 효율적인 조합으로 재 구축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기에는 이 정도만으로도 상 당한 기술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과학 지식을 매개로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 등이 활발히 교류했다. 근대과학의 꽃을 피운 뉴턴주의자들은 과학과 기술을 그 렇게 딱 떨어지게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식으로 현실의 개선 을 이뤄야 한다는 베이컨의 과학관에 따라, 이론적 탐구는 물론 기 술의 개발과 혁신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 었던 계몽주의는 바로 이러한 실용적 배경을 두고 있었다. 흔히 산 업혁명의 지적 기원으로 꼽히는 루나 소사이어티가 그 전형이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과학자, 사업가, 교수, 의사, 수리기사 등 다 양한 직업을 가졌지만, 과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매개로 교류했 다. 그리고 여기서 근대를 만든 다양한 발명과 사상들이 나올 수 있 었다. 와트의 증기기관만 해도, 그가 이 모임에서 윌킨슨을 통해 알 게 된 배럴 기계가 아니었다면, 개발이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 서양과 동양의 운명이 갈린 1776년
과학혁명, 산업혁명, 경제성장은 16세기 이후 서양과 동양의 차 이를 가른 핵심 사건들이었다. 이는 아주 긴 시간대를 거치며 진 행되어 단기간에 극적인 변화가 포착되지 않는다. 그만큼 특정 시 점, 또는 계기가 결정적이었다고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떤 기준에서 봐도 1776년이 상징적인 해였음은 분명 하다. 그해 《국부론》이 출간되었고, 개량된 증기기관이 시장에 등 장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세 가지는 서양과 동 양의 가장 큰 차이였던 과학기술과 자유사상의 결정판과도 같은 사 건들이었다. 이로써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불이 댕겨지고, 근대라 는 새 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 그 선구자인 세 사람, 즉 애덤 스미스, 제임스 와트,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루나 소사이어티의 회원이었다는 것. 세 사람은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들의 연대를 상징한 이 모임에서 활동하며 역사를 바꿀 성과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것은 이 모임이 지향한, 새 로운 지식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라는 기조 덕분이었다. 공통의 관 심사로 묶인 이 개인들에게 전공 분야나 국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 았다. 심지어 식민지 출신이었던 프랭클린은 이 모임에서 모국인 영국에 비수를 꽂을 지식체계를 갖추기까지 한다.
둘째는 과학자가 아님에도 과학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 스미스 는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의 부탁을 받고 그 아들의 견문을 넓혀주고자 함께 프랑스를 여행했다. 이때 중농주의 경제학자 프랑수 아 케네를 만났다. 중농주의는 physiocracy라는 영어 이름에서 보 듯 생리학physiology에 기초한 경제학 사조였다. 의사 출신 케네는 체액이 원활히 순환하면 인체가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듯, 정부 통 제를 줄이고 자연법 체계에 경제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감명을 받은 스미스는 과거 《도덕감정론》에서 정립한 이 기심 개념과 중농주의의 자유방임 논리를 결합해서 《국부론》을 저술했다. 수리기사였던 와트도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증기기관 개량의 단서를 얻었고, 프랭클린은 일찍부터 전기에 관심을 가져 번개 실험도 해보았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쓸 때는 <프린키피 아》의 논리 구조를 적용하여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절대적 진리 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보이도록 구성했다.

- 1차 산업혁명이 기술자와 사업가의 혁신으로 이루어졌다면, 2차 산업혁명은 과학의 난제 해결이 산업적 파급력으로 이어졌다는 차 이가 있다. 이때부터 과학은 인류의 진보를 이끄는 학문으로 위상 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초창기만 해도 전자기학이 그렇게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음은 아무도 몰 랐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순수하게 궁금했던 질문, 예컨대 전기와 자기는 다른 종류의 힘인지, 서로 변환될 수 있을지를 탐구했을 뿐 이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패러데이의 실험실로 정부 관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전자기 실험을 보고 물었다. "이 런 걸 어디다 씁니까? 이거 돈이 됩니까?" 패러데이의 답이 걸작 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훗날 이것에 세금 을 매길 수 있을 겁니다."사실 이런 연구가 돈이 되냐는 현대과학에서도 꾸준히 반복되는 질문이다. 하지만 전자기학의 발전 과정 에서 보듯, 과학 연구는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과학자 본인도 대부분 알 수 없다. 그저 시대가 당 면한 난제의 해결에 최선을 다하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인 류의 삶이 진보하기도 하는 것이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전자기 학은 이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준다.

- 코페르니쿠스도 본래는 프톨레마이오스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복잡성 때문에 결국 스승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를 철학적, 심미적 직관에 따라 문제 삼았다. 신이 창조한 우주는 간단명료해야 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영 향을 받은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우주는 신비한 힘으로 충만하고 수학적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아름답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는 80여 개의 원이 난무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이렇게 받아들였을 것이 다. "나의 신이 만든 우주는 이렇게 너저분하지 않아!"
- 코페르니쿠스 필생의 목표는 이 체계를 조화롭게 단순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맞바꾸면 많 은 문제가 해결됨을 깨달았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발상 은 분명 상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생각도 아니었 다.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타르코스가 이와 같은 주장을 했 기 때문이다. 즉 역사 최초의 지동설 제창자는 코페르니쿠스가 아 니라 아리스타르코스다. 하지만 철저한 비주류 견해였고, 프톨레 마이오스가 천문학을 평정하면서부터는 완전히 잊혔다. 그로부터 1700년이 지나서 코페르니쿠스가 묻혀 있던 이 학설을 꺼내어 복 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새로운 '발견'보다는 '선택'에 더 가까웠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훨씬 간결하고 우아해진 지동설 체계 를 선보였다. 이로써 태양계는 각 행성이 조화를 이루며 질서정연 하게 궤도를 돌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오컴의 면도날, 즉 경제성 원칙에 근거한 논리적 추론의 전형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책머리에 교황 바오로 3세에 대한 헌사를 썼다. 다음의 문장이 유명하다.
이는 한 화가가 각각 다른 모델로부터 잘 그려진 손, 발, 머리 등을 모아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나, 그것이 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조각들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으므로 그 결과물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계산한 지동설 체계와 실제 행성 운동 사이에는 오차가 존재했다. 겉보기에 복잡해도 수 학적으로 완벽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는 대비되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도 죽을 때까지 이 문제를 고심했으나 이유를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오차가 누적되자 결국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궤도 보정 장치 (주전원, 이심원) 를 똑같이 가져다 썼다. 그 결과 천동설과 지동설은 태양과 지구의 위치라는 근본 발상만 다를 뿐, 세부 논리와 방법론은 서로 비슷해졌다.
오차는 행성들이 등속원운동을 한다는 잘못된 전제 때문에 발 생했다. 코페르니쿠스도 원이 완벽한 도형이라는 과거의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기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학문으로 서의 과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험 방법론도 정립되지 않았고, 관측에 필요한 망원경도 발명되기 전이었다. 요컨대 천문학이 과 학보다는 철학에 훨씬 가까웠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책에는 과학 연구서로 보기 힘든 요소들이 눈에 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 분이다.
모든 것의 중심은 태양이다. 이 가장 아름다운 신전에서 사방을 비출 수 있는 이곳 말고 대체 어디에 눈부시게 빛나는 이 불빛을 둘 수 있겠는가? ... 그래서 태양은 왕좌에 앉아 그 주위 를 돌고 있는 그의 가족, 즉 행성들을 지배한다."
마치 고대의 서사시 같다. 코페르니쿠스가 고대의 세계관을 완 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코페르니쿠 스의 한계는 그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의 후배들이 극복했다. 요 하네스 케플러는 행성들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 을 밝혀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이용해 지동설의 경 험적 증거를 관측했다. 아이작 뉴턴은 행성 운동의 법칙을 수학으로 정립했다.
이렇듯 코페르니쿠스는 '경계'를 상징하는 학자였다. 중세와 근 대, 철학과 과학, 프톨레마이오스와 뉴턴의 경계에 그가 서 있었 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은 역사에 이런 복합적인 경계들 을 함께 만들어냈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그를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로 규정한 이유이 기도 하다.'

- 중세의 연쇄적 균열
흔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성경에 반하는 내용 때문에 교 회의 탄압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 다. 교회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한 것은 출간 73년 뒤인 1616년이 다. 즉 교회는 꽤 오랫동안 이 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 교회는 출간 훨씬 전부터 지동설을 인지하고 있었다. 1533년 지동 설 강의를 들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추기경들이 코페르니쿠스에 게 출간을 재촉할 정도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평생 가톨릭에 봉직 한 사제로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교황에게 헌정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중세 사상체계의 급소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세의 천문학이 신학, 물리 학, 화학, 의학 등과 구분이 어려울 만큼 통합되어 있었다는 사실 에서 기인한다. 일례로 천상계는 신학의 성경과 곧바로 연결되었 다. 또한 점성술 및 의학에서는 행성이 인간의 기질에 영향을 미 친다고 이해되었다. 행성은 지상의 금속과 관련이 있었고, 인체는 소규모의 우주로 여겨졌다. 코페르니쿠스도 천문학자인 동시에 점성술사였으며 신학자이자 또 의사였다. 그래서 천문학이 한 번 뒤집히자, 사상의 전 체계가 연쇄적으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 다. 천장지제궤자의 혈潰, 작은 개미구멍으로 인해 높 은 둑이 무너지는 모양새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가 뒤바뀌었다는 세계관의 전환을 상징한다. 지구는 천지창조의 중심에서 우주의 변방으 로 밀려났다. 신이 만든 세계에서 보살핌을 받는다고 믿었던 인간 들은 강제로 홀로서기를 당했다. 그리고 각성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물질 중 일부일 뿐이라 고. 이로써 인간은 중세를 지배한 종교적 믿음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근대를 만든 새로운 세계관, 과학적 사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 뉴턴역학에 열광한 것은 과학자뿐만이 아니었다. 철학자들도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당시 절대왕정과 교회의 지배에 맞서 계몽 주의가 퍼지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한 계몽주의자들은 사회계약론과 무신론을 받아들였다. 그럼으로써 오직 이성에 의 해서만 운영되는 사회를 꿈꿨다. 당연히 왕권신수설과 같은 신 중심 세계관과는 대립했다. 계몽주의자들은 구체제를 무너뜨릴 이 론적 무기를 뉴턴역학에서 발견했다. 어떠한 신비나 권위도 인정 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뉴턴역학과 계몽주의는 궤를 같이했다.
이는 뉴턴역학의 일반화 과정이라고 할 만했다. 뉴턴의 후예들 에는 이과생뿐만 아니라 문과생도 있었다. 라플라스와 르 베리에 같은 이과 후예들은 뉴턴역학을 정교하게 다듬어 과학 전반으로 확장했다. 반면 볼테르Voltaire, 존 로크John Locke 등의 문과 후예들은 뉴턴역학의 원리를 적용하여 새로운 사회를 설계했다. 이러한 시 도들은 기존의 가치와 지식 체계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동반했다 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중세의 인류는 이 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로 나아가게 되었다.

- 과학적 사유의 방법
과학혁명, 편지 공화국, 계몽주의, 시민혁명은 뉴턴에서 촉발된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학과 철학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뉴턴의 후예를 자처한 로 크, 볼테르, 벤담, 제퍼슨은 요즘으로 치면 문과생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과학과 철학은 다른 학문이 아니었다. 과학도 자기 전공 의 일부로 여겨 공부하고 연구했다. 물론 이들의 과학 지식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볼테르는 15년 동안 뉴턴을 공 부하고 번역했지만 <프린키피아>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이었다.
다만 자연보다는 인간, 과학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시했 다. 계몽주의자들이 과학에 열광한 이유는 어떠한 권위나 독단 없 이 합리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그 '방법'에 있었다. 이러한 과학적 방법, 과학적 사유는 그들이 설계했던 사회에 꼭 필요한 핵심원 리였다. 근대세계를 만든 청사진에는 이렇게 과학의 지분을 무시 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이에 대한 이해는 문과와 이과처럼 완 벽히 분리되어 있다. 계몽주의는 문과의 세계사에, 뉴턴은 이과의 물리학에 갇혀서 서로 다른 지식으로 기능한다. 어디서 접근하든 반쪽짜리 이해에 머무른다. 인문학과 과학의 통섭을 지식의 확장 보다는 시원으로의 회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다.

- 《종의 기원>으로 다윈은 진화론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다 윈을 진화론과 동일시하는 관념은 다른 각도에서도 볼 필요가 있 다. 첫째로 진화가 다윈만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전에도 생물이 진화한다는 관념은 막연하게나마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 에도 시간에 따른 생물의 변화라는 발상이 있었고, 중세 이슬람에 서는 동물이 생존투쟁을 거치며 변형된다는 이론도 등장했다. 《종 의 기원》 출간 즈음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진화를 연구하고 있었 다. 다윈의 공로는 진화를 자연선택이라는 논리적 설명을 통해 과 학으로 정립한 것이다. 둘째로 다윈은 진화 개념의 사용에 매우 신중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의 오해와 달리 다윈은 《종의 기원>초판에서 evolution(진화)이라는 명사를 쓴 적이 없다. evolved (진화했다)라는 동사를 마지막 문장에서 단 한 번 썼을 뿐이다. 《종의 기 원》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기도 하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 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 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 는,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1859년 초판에 대한 서울대 장대익 교수의 번역이다. 여기서 '전개'로 번역한 원문의 단어가 'evolved'다. 기존 역자들은 '진화' 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다윈은 1872년 6판부터 진화라는 명사를 썼다. 이전까지 다윈이 썼던 표현은 “변이를 수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었다. 진화라는 간단한 명사를 두고 이렇게 여러 단어 를 조합한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진화가 '더 나은 상태로 의 진전'이라는 목적론적 함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즉 진화는 진 보와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윈이 정의한 자연선택은 어떤 목 적이나 진전, 개선을 전제하지 않았다. 자연선택은 특정 종이 우 월해서가 아닌, 우연히 그 환경에 적합해서 이루어진다. 장대익 교수의 번역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 상보성의 개념
플랑크, 아인슈타인, 드 브로이, 슈뢰딩거의 혁신은 어디까지나 고전물리학 내에서 제기된 논점에 고전물리학적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존 체계를 허물고 새 패러다임을 도입하려는 의도 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들 모두는 후일 양자역학에 부정적이었 다. 이들의 연구가 양자역학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을 생 각해 보면 역설적이다.
양자역학이라는 뉴웨이브의 선두에는 보어가 있었다. 보어는 원자핵을 발견한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원자 모델이 가진 오류를 해결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것은 전자의 궤도나 에너지가 정수로 떨어지고 불연속적이라는 양자적 가설을 도입해 가능했 다. 보어는 연구도 잘했지만 리더십도 뛰어났다. 코펜하겐대학교 에 이론물리학연구소를 세우고 많은 학자를 초청했다. 양자역학은 그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일종의 집단연구 성과였다. 이들이 공유한 양자역학의 표준적 해석을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과학에 해석이란 단어는 좀 낯설다. 이는 양자역학의 독특한 성 립 과정을 반영한다. 뉴턴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은 기본이 되는 공 리를 토대로 세워졌다. 한 명의 천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 어서 완결성도 높다. 반면 양자역학은 그렇지 않다. 양자가설이나 광양자가설에서 보듯 기묘한 현상을 이리저리 해석하면서 결과가 짜 맞춰졌다. 완결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장 권위 있고 표준적인 해석이 필요했다. 그걸 체계화한 이들이 보어와 그 무리였기에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보어가 제창한 상보성이 그 핵심 개념이 된다. 원자 내부에는 물체의 여러 상태가 동시에 존재한다. 보어에 의하면 서로 배타적 인 두 명제를 보완적으로 합쳐야 비로소 이러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서로 배 타적인 관계에서 둘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것은 거짓이어야 한 다. 실제로 고전물리학의 논리가 그러하다. 입자와 파동은 상호배 타적 개념이며 하나의 현상에 동시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원자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상식을 버려야 한다. 보어의 설명이다.
처음 보면 이러한 현상이 대조적이겠으나, 원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보편의 언어로 모호함 없이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둘 다 가상보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 "대립적인 것은 보완적이다Contraria sunt complementa." 1947년 보어 가 기사 작위 문장에 직접 써넣은 라틴어 문구다. 과학의 명제가 아니라 철학의 선문답 같다. 장자의 제물론을 생각해 보라. "저것 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서 비롯된다." 만물 어느 곳 이든 도가 있다는 장자의 철학은 기나긴 시공간을 건너 양자역학 과 만난다. 실제로 보어는 주역을 비롯한 동양철학에 관심이 지대 했다. 그래서 위의 문구와 함께 음양을 상징하는 태극 문양으로 기사 문장을 만들었다. 음양론에 의하면 음과 양이라는 대립적 성 질이 균형을 이뤄 만물의 존재 양식을 이룬다. 신기하게도 양자역 학의 입자파동 이중성과 서로 뜻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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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9

Quote of the day 2024. 3. 19.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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