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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3.15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 11
  2. 2024.03.15 20240315

- 한편 유전 변이를 분석한 결과 작물화가 꽤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됐 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전에는 작물 대다수가 야생 식물에서 한 차례 작물화가 일어나 퍼진 뒤 지역이나 문화에 맞게 재래종이 확립되고 때 로는 이들 사이에서 교잡이 일어나곤 했다는 시나리오를 따른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작물과 야생 근연종의 유전자 또는 게놈을 비교하자 작 물화 과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앞의 시나 리오를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다수는 다음 세 가지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먼저 야생 식물 한 종에서 한 차례 작물화가 일어난 뒤에도 야생식 물과 작물 사이에 교잡이 일어나 유전자를 주고받는다는 시나리오다. 벼와 밀, 기장과 조, 사과와 토마토 등 많은 작물이 이 시나리오를 따른 다. 이처럼 야생 식물과 작물이 서로 유전자를 주고받다 보니 기장처럼 진짜 야생 식물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야생 식물 한 종에서 두세 차례 독립적으로 작물 화가 일어나고 그 뒤 작물 품종 사이 또는 야생 식물과 작물 사이에 교 잡이 일어났다는 시나리오다. 보리와 수수, 코코넛, 강낭콩 등의 작물 이 이런 과정을 겪었다.
끝으로 두 종의 야생 식물에서 잡종이 나오고 여기서 작물화가 일 어나거나 작물 두 종의 교잡으로 새로운 작물을 얻는 시나리오다. 감귤류와 바나나, 땅콩, 딸기 등의 작물이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 태 어났다.

- 아시아벼의 학명은 분류학의 아버지 칼 린네가 지었다. 속명 'Oryza'는 쌀을 가리키는 라틴어이고 종소명 'sativa'는 재배한다는 뜻 이다. 그런데 린네는 벼를 꽤 다른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서구에서 벼는 주요 작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상태로 150년 이 흘렀다.
1920년대 일본의 저명한 육종학자 가토 시게모토 박사는 북방 계 벼와 남방계 벼가 생김새도 꽤 다를 뿐 아니라 교잡해도 자손이 불 임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관찰로부터 둘을 별개의 아종으로 봐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에서 주로 재배하는 북방 계 벼에는 자포니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인도와 동남아에서 주로 재배 하는 남방계 벼에는 인디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둘 다 꽤 재배하는 중 국은 애매해 대신 인도를 택한 것 같다. 중국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작명이지만 이미 정해진 거라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인도식당에서 몇 번 인디카 쌀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밥알의 생 김새가 길쭉하고 서로 달라붙지 않고 나풀거려 식감이 꽤 달랐다. 인도 정통 카레에는 인디카 쌀로 지은 밥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에도 오늘날 인디카 벼 재배 면적이 더 넓고 쌀 생산량도 자포니카 의 두 배가 넘는다.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 쌀은 전체 생산량의 30%가 채 안 된다.
- 흥미롭게도 쌀 뿐 아니라 다른 곡물도 찰기가 많은 종류가 있고 쌀 과 마찬가지로 앞에 '찰'을 붙인다. 찰보리, 찰기장, 차조, 찰수수, 찰 옥수수가 있다. 곡물의 찰기는 녹말을 이루는 두 고분자인 아밀로오스 amylose와 아밀로펙틴amylopectin의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
아밀로오스는 포도당 분자 수백~수천 개가 일렬로 붙어 있는 고 분자다. 반면 아밀로펙틴은 포도당 24~30개당 하나꼴로 곁사슬이 난 고분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해 먹는 멥쌀은 아밀로오스가 15~20%이고 아밀로펙틴이 80~85%다. 반면 찹쌀은 거의 아밀로펙틴 이고 아밀로오스는 0~2%에 불과하다.
멥쌀은 아밀로펙틴 사이 공간에 아밀로오스가 박혀 있어 단단한 녹 말 과립이 형성된다. 반면 찹쌀의 녹말 과립은 물이 침투하기 쉬워 녹 말이 풀어지며 찰기가 커진다. 한편 우리가 먹는 멥쌀보다도 찰기가 덜해 밥알이 따로 노는 인디카 멥쌀은 아밀로오스 함량이 25%를 넘는다.

- 보리는 옥수수, 밀, 쌀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이 생산되는 곡물임에도 연간 생산량이 1억 5,700만 톤(2020년)으로 2, 3위권인 쌀과 밀에 한 참 못 미친다. 게다가 옥수수와 마찬가지로 주식으로서 소비되는 보리 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아 전체 생산량의 5%에 불과하다. 보리 생산량의 75%는 가축 사료이고 나머지 20%는 맥아, 즉 엿기름의 형태로 변형 돼 쓰이는데 주된 용도는 맥주와 위스키 양조다. '몰트 위스키malt whisky' 의 몰트가 바로 맥아를 뜻하는 영어다.
식혜를 만들 때는 엿기름을 걸러낸 용액의 아밀레이스가 익은 쌀알 표면의 녹말을 맥아당(엿당)으로 분해해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것이라 면 맥주를 만들 때 몰트는 아밀레이스가 보리 알곡의 배젖 주성분인 녹 말을 맥아당으로 분해하는 것이다(따라서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린 다). 맥아당은 포도당 두 분자로 이루어진 이당류다. 그 뒤 효모가 맥아 당을 먹고 배설물로 에탄올을 내보낸다. 바로 알코올 발효다. 홉을 더 한 상태에서 발효해 얻는 게 맥주이고 홉 첨가 없이 발효해 얻은 술을 증류한 게 위스키다.
- 보리의 부활을 꿈꾸며
1965년 우리나라 사람 1인당 연간 보리 소비량은 36.8kg로 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곡물이었지만 한 세대가 지나는 사이 급감해 1998 년에는 1.5kg에 불과했다. 보리는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서 재배 면적이 가장 가파르게 줄어든 작물이다. 대신 그 자리의 태반을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곡물인 밀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보리가 건강 곡물로 재인식되고 있다. 보리의 식이섬유 함량은 16%로 쌀의 열 배에 이른다. 그 결과 수분을 많이 흡 수해 장의 활동을 돕는다. 특히 수용성 식이섬유로 저밀도 콜레스테롤 LDL을 흡수해 혈중 수치를 낮추는 효과가 있는 베타글루칸 함량이 5%나 된다. 고지혈증과 비만, 당뇨 등 대사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쌀밥만 먹 는 것보다 보리를 섞어 먹는 게 좋다. 

-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논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앙리 파브르)
- 글 앞에 인용한 파브르의 말은 육천 년 빵의 역사』 1장에서 야콥이 인용한 글귀다. 1장에는 '풀들의 경쟁'이라는 절이 나오는데 저자는 여 기서 밀의 작물화 과정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풀 가운데 기장이 가장 먼저 작물이 됐고 뒤이어 보리가 선택돼 기장을 밀어내고 사 랑받다가 마침내 밀이 작물화된다. 보리와 밀은 다정하게 공존했으나 고대 이집트에서 밀가루로 효모(이스트) 발효 빵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 하면서 밀은 '곡식의 왕이 됐고 그 지위를 오늘날까지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밀에는 글루텐이 풍부해 반죽에 효모를 넣고 숙성시키면 효모가 토 해내는 이산화탄소 기체가 글루텐 막을 빠져나가지 못해 반죽이 부푼 다. 이를 오븐에 구우면 보들보들한 빵이 나온다. 반면 보리는 딱딱한 빵만 만들 수 있다. 참고로 반죽이 부풀어 부드러운 빵을 만들 수 있는 건 밀과 호밀뿐이다. 참고로 호밀빵이 다소 부푸는 이유는 다른 성분이 기체를 잡아주기 때문이다.
책에는 밀의 재배 과정도 소개돼 있다. 야콥은 “이집트에서 재배한 밀은 오늘날 미국, 캐나다,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들판을 뒤덮고 있는 밀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초기 재배종인 엠머밀emmer wheat이었다"라 며 “고대 로마인은 이 최초의 밀과 다른 밀을 교배하여 얻은 개량품종 을 이집트 전역에 심었다”고 쓰고 있다.
우리가 밀이라고 알고 있는 작물이 이 개량품종으로 보통밀common wheat 또는 빵밀bread wheat 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엠머밀은 거의 재배되지 않고 거기서 유래한 듀럼밀durum wheat이 재배되고 있는데 주로 파스타용 으로 쓰이기 때문에 마카로니밀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듀럼밀은 카 로티노이드가 들어 있고 단단해서 스파게티 면은 빵밀로 만든 면과 달리 색이 노르스름하고 더 오래 삶아야 한다. 듀럼밀은 전체 밀 생산 량의 5%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95%는 차지하는 게 빵과 면, 과자를 만드는 빵밀이다. 야콥 의 설명과는 달리 빵밀은 엠머밀의 개량품종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 른 종으로 엠머밀과 염소풀의 게놈이 합쳐져 생겨났다. 90년 전 우장 춘 박사가 발견한 '종의 합성', 즉 배추와 양배추 게놈이 합쳐져 유채라 는 신종이 나온 것과 같은 원리다. 사실 엠머밀도 다른 종의 밀과 다른 종의 염소풀의 게놈이 합쳐서 생겨난 신종이다.
오늘날 밀의 경작 면적은 2억 2,000만 헥타르로 작물 가운데 가장 넓다. 한반도 면적이 2,200만 헥타르이므로 10배에 해당하는 넓이다. 밀의 수확량은 7억 6,100만 톤으로 11억 톤이 넘는 옥수수 다음으로 많고 쌀과 비슷하다.
- 이 엠머밀과 듀럼밀은 이배체 밀(AA)과 이배체 염소풀(BB)의 게놈 이 합쳐서 생겨난 사배체 신종(AABB)이다. 빵밀은 엠머밀과 다른 이 배체 염소풀(DD) 사이 잡종에서 전체게놈중복이 일어난 육배체 신종 (AABBDD)이다.
식물 게놈이 하나둘 해독되면서 식물의 진화 과정에서 전체게놈중복 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것으로 밝혀졌다. 속씨식물의 경우 10만 번에 한 번 꼴로 다배체가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게놈중복이 일어나 면 유전자도 중복되므로 세대를 거치며 점차 소멸한다. 이 과정에서 염 색체가 재배열하기도 한다. 그 결과 다시 이배체로 돌아가는데, 이 과 정을 '이배체화diploidization'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배체 게놈을 지닌 식물 도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다배체 조상을 만난다는 말이다."
- 글루텐의 두 얼굴
미국의 저술가 마이클 폴란은 2007년 펴낸 책 『요리를 욕망하다」에 서 빵밀을 이렇게 평가했다.
"에이커당 더 많은 칼로리를 생산하고(옥수수, 쌀) 재배가 더 쉬우며(옥수수, 보리, 호밀) 영양소가 더 많은(퀴노아) 곡물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밀의 세계정복은 믿기 어렵고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성공 비결이 뭘까? 바로 글루텐이다.”
폴란이 말한 밀은 물론 빵밀이다. 사실 빵밀이 듀럼밀에 승리를 거두 게 된 데 기여한 또 다른 요인도 바로 글루텐gluten이다. 글루텐은 밀가루 를 반죽하는 과정에 형성되는 단백질 네트워크로 반죽을 탱탱하면서도 유연하게 만든다. 우동 면발의 쫄깃함이 바로 글루텐 덕분이다. 쌀이나 메밀 같은 곡물의 가루로 반죽을 빚어 면을 만들면 뚝뚝 끊어지지만, 밀가루 면은 글루텐 네트워크로 형태를 유지한다.
한편 밀가루에 효모라는 발효 미생물을 넣고 반죽한 뒤 숙성하면 효 모가 증식하며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글루텐 네트워크에 갇혀 반죽이 부풀어 올라 구우면 폭신한 빵이 된다. 쌀은 물론 같은 밀족인 보리에 서도 불가능한 현상이다. 오늘날 빵밀이 곡물의 왕이 된 건 효모를 만 났기 때문이다.
글루텐은 7세기 중국 승려들이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속세 시절 고 기 맛을 못 잊어 식물성 식재료로 고기의 촉감을 낼 수 없을까 고민하 다가 우연히 밀가루 반죽을 찬물 속에서 주무르자 녹말이 빠져 나오면 서 고무 같은 덩어리만 남았던 것이다. 이 가운데 글루텐이 70~80%나 된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콩고기나 버섯고기의 핵심 재료도 알고 보면 글루텐이다.
밀알도 다른 씨앗처럼 배와 배젖으로 이뤄져 있다. 배는 식물체로 자 랄 부분이고 배젖은 싹이 광합성을 할 때까지 영양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밀알의 배젖은 탄수화물(녹말)과 저장단백질이 엉겨 있는 상태로 싹이 트면 이들을 분해하는 효소가 활성화돼 영양분으로 쓰인다. 밀의 저장단백질은 글리아딘aladin과 글루테닌olutenin 두 종류다.
물론 다른 곡류의 배젖도 비슷한 방식으로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저 장해 공급하지만, 종마다 저장단백질 종류가 다르다. 예를 들어 쌀의 배젖에는 글리아딘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반면 밀 족 곡식인 호밀과 보리의 배젖에는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있다.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하면 글루테닌 단백질이 서로 결합해 스프 링처럼 되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글리아딘이 그 사이에 들어가 완 충재 역할을 한다. 바로 글루텐이다. 반죽을 치댈수록 글루텐 네트워크 가 더 치밀해져 탄성이 커진다.

- 쌀, 보리, 기장, 조, 콩(대두),
우리 조상들이 주식으로 여겼던 오곡이다. 쌀의 파트너였던 보리 와 된장, 간장, 두부의 재료인 콩은 수긍이 가는데 기장과 조는 뜻밖이 다. 기장과 조는 낟알이 너무 작아 도무지 주식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좀스러운 사람이나 행위에 조의 낟알인 '좁쌀'이라는 은유를 쓸까. 기장과 조 대신 밀이나 수수 또는 팥이 오곡에 들어가야 어울릴 것 같다. 다만 옥수수는 한반도에 들어온 역사가 짧아 어색하다.
사실 일반인은 기장과 조의 낟알을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기장이 조보다 확실히 더 크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이 둘에 전혀 다른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만큼 두 작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기장과 조는 한자어처럼 보이지만 둘 다 순우리말이다. 흥미롭게도 영어에 서는 둘뿐 아니라 작은 낟알을 지닌 여러 볏과 작물을 아울러 'millet'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수수조차 'great millet'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과학문헌에서는 포함하지 않는다. 번역가가 영어 원서에서 millet를 만나면 앞뒤 문맥을 파악해서 적당한 번역어를 골라야 할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식량에서 기장과 조의 비중이 달라서였을 것이다. 즉 서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지금도 주식인 밀과 보리가 최초의 작물이라 뒤에 들어간 기장과 조의 중요도가 낮았다. 반면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작물화 된 곡식이 바로 기장과 조다. 앞서 1장에서 벼를 가장 먼저 소개하는 이 유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주식 작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벼가 주 식이 된 것은 수천 년 동안 기장과 조를 주식으로 먹고 난 뒤의 일이다. 이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식량작물로서 기장과 조의 비중은 워 낙 낮아 연간 생산량이 각각 500만 톤에 불과하다. 쌀과 밀의 1%도 안 되는 양이다. 조의 상당 부분은 새 모이로 쓰인다. 기장과 조에 다른 작 은 낟알 곡물millet을 다 합쳐도 연간 생산량은 3,000만 톤이 채 안 된다. 참고로 수수는 6,000만 톤으로 보리에 이어 생산량 5위인 곡물이다. 

-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기장과 특히 조는 중국과 한국의 주식 작물이었다. 그러나 벼농사 기술과 벼 품종 향상으로 쌀수확량이 급증하고 밀을 수입하면서 사람들이 기장과 조, 수수를 외면하자 재배 면적이 급 감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이들 세 작물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고 있다. 당뇨, 심혈관계질환 등 성인병에 좋은 곡물이라는 인식이 퍼지며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실제 기장과 조, 수수에는 쌀(백미)에 비해 각종 미네랄과 비타민, 피토케미컬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특히 기장은 쌀과 궁합이 잘 맞아(기장밥) 수요가 많이 늘었지만, 아직은 국내 생산량이 턱없이 모자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다행히 수년 전부터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기장을 재배하기 시작해 2019년 1,257헥타르에서 1,265톤을 생산했다. 이는 전국 재배 면적의 70%에 이르는 넓이다. 기장은 재배 기간이 짧아 무, 양배추, 당근 같은 월동 채소의 사이 작물로 적합하다(이모작). 지난 수년 사이 제주 지역 에 적합하고 수확량이 많은 한라찰, 올레찰 등 신품종이 잇달아 개발됐 고 시험재배를 거쳐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될 계획이다. 한국인 의 소울푸드 기장이 많은 가정과 식당의 식탁에 다시 오르기를 바란다.

- 하지만 왜 다른 작물은 안 심고 옥수수와 콩만 심는가?
"우리는 이곳에서 산업적 음식사슬의 맨 밑바닥에 있어요. 이 땅에서는 대부분 동물에게 먹일 단백질과 에너지(탄수화물)를 생산하고 있죠. 옥수수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고, 콩은 단백질을 생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죠." (마이클 폴란, 잡식동물의 딜레마)
- 전이인자 transposable element 또는 transposon는 염색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특정한 염기서열을 지닌 DNA 조각으로 다른 위치로 이동하거나 사본 을 만들어 다른 위치에 들어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전이인자 자체 는 개체의 생존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는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지 않 다. 따라서 게놈에 무임승차하고 있는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전이인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매클린톡이 발견한 DNA 트랜스포존DNA Transposon으로, 염색체에 박혀 있다가 활성화되면 빠 져나가 다른 위치로 옮겨 들어간다.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용어로 '잘라 붙이기 cut and paste'인 셈이다. 따라서 전이 자체로 전이인자 수가 늘어나 는 건 아니다.
- 다음으로 레트로트랜스포존retrotransposon은 '복사해 붙이기 copy and paste' 방식이다. 즉 염색체에 박혀 있는 DNA 조각을 주형으로 해서 RNA 복사본이 만들어지고 이를 주형으로 다시 DNA 복사본이 만들어진 다. DNA 주형에서 RNA가 만들어지는 게 전사이므로 RNA 주형에서 DNA가 만들어지는 건 '역전사retrotranscription'라고 부른다. 레트로트랜스포 존에서 레트로는 역전사를 뜻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DNA 조각은 게놈에서 특정한 염기서열을 인식해 그 사이에 끼어 들어간다. 원본 DNA 조각은 그대로 있으므로 레트로 트랜스포존이 활성화될 때마다 수가 늘어나고 따라서 게놈도 커진다. 대다수 생물체의 게놈에서 레트로트랜스포존이 차지하는 비율이 DNA 트랜스포존보다 크다.
- 게놈에서 전이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그 결과 게놈 크기도 큰 차이를 보인다. 같은 볏과 작물임에도 보리와 밀 게놈이 벼나 조 게놈보다 열 배 이상 큰 것도 전이인자 때문이다. 식물 에 따라 게놈에서 전이인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이처럼 다른 이유는 아 직 잘 모른다. 다만 어떤 환경의 변화가 전이인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으 로 보인다. 특히 잡종이나 전체게놈중복처럼 게놈에서 큰 변화가 일어 났을 때 이런 경향이 크다고 한다.
전이인자는 한동안 게놈에 존재하는 일종의 '기생체'로 여겨졌다. 하 는 일도 없으면서 '숙주인 게놈에 자리하면서 세포분열 과정에서 게놈 이 복제될 때 무임승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 게놈의 45%를 차지하는 전이인자를 없앨 수 있다면 게놈 크기가 31억 염기에서 17억 염기로 줄어든다.
게다가 전이인자가 자리를 옮기거나(DNA 트랜스포존) 복사본을 끼 워 넣을 때(레트로트랜스포존) 자칫 숙주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생존에 중요한 유전자 중간에 들어가 유전자를 망가뜨리거나 유 전자 발현 조절 영역에 들어가 전사가 안 되거나 지나치게 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숙주 게놈은 전이인자가 날뛰지 못하게 비활성 화하는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고 그 결과 전이인자 대다수는 비활성 상 태다.
그럼에도 전이인자의 활동이 숙주에 꼭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 니다. 드물게는 생존이나 번식에 더 유리한 특성을 갖게 만들 수도 있 고 이런 개체가 선택돼 우점종이 되거나 새로운 종으로 분화할 수 있 다. 야생 식물의 작물화 과정에서 트랜스포존이 기여한 예도 발견되고 있다. 옥수수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옥수수
- 잡종 작물 시대 열어
20세기 100년을 거치며 곡물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화학비료로 작물의 성장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농약을 써서 병충해 손실을 줄 인 것과 함께 새로운 품종을 개발한 덕분이다. 특히 옥수수는 단위면적 당 수확량이 100년 사이 8배나 늘었다. 여기에는 앞의 요인과 함께 잡 종 옥수수를 개발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잡종 옥 수수 재배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 재배되는 옥수수는 대부분 잡종이다. 밀 등 다른 작물에서도 잡종이 개발돼 널리 재배되고 있다.
잡종 옥수수는 '잡종강세hybrid viger'라는 현상을 이용해 수확량을 늘린 옥수수다. 품종이 다른 암수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의 몇몇 특성이 부모의 중간이 아니라 부모 양쪽보다 더 우세하거나 양쪽의 장점만을 지닌 경우가 종종 나타나 이를 잡종강세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수확량이 많 은 A품종과 병해충 저항성이 큰 B품종 사이에서 나온 1세대 잡종(F1) 은 수확량이 A보다 더 많으면서 병해충에도 강한 식이다.
다만 잡종 작물은 재래종이나 순계 품종과 달리 농부들이 해마다 종 자회사에서 씨앗을 사서 심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잡종 작물에서 열 린 씨앗(2세대 잡종(F2))은 먹을거리로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감수분 열 과정에서 염색체 재조합이 일어나 게놈 조성이 제각각이다. 즉 재배 한 잡종 작물에서 얻은 씨앗을 이듬해 심었다가는 농사를 망치게 된다. 종자회사가 씨앗을 매년 팔아먹으려고 일부러 이런 유전적 조작을 했 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잡종 작물의 본질적인 문제다.

- 곡물의 파트너 작물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콩과 식물이 작물화된 데에는 크게 두 가 지 이유가 있다. 먼저 콩은 작물 가운데 단백질 함량이 단연 많다. 수렵 채집 대신 농사를 택한 인류는 사냥을 나갈 여유가 없어졌지만 그렇다 고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을 대규모로 키울 수도 없어 육류 섭취가 부 족해졌다. 따라서 고기를 대신할 단백질 공급원인 콩이 탄수화물(에너 지) 공급원인 곡물(물론 단백질도 약간 들어 있기는 하지만)의 파트너 로 함께 작물화된 것이다. 서아시아에서는 밀, 보리와 함께 렌틸콩과 병아리콩이 작물화됐고 동아시아에서는 벼와 대두가, 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와 강낭콩이 짝이었다.
다음으로 땅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보통 같은 자리에 작물을 반복 해 심으면 토양 영양분이 고갈돼 수확량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콩과 작물은 토양미생물과 공생으로 질소고정을 하는 능력이 있고 그 결과 땅을 비옥하게 한다. 따라서 다른 작물과 콩을 번갈아 심으면 땅 심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농사법을 윤작 또는 돌려짓기라고 한다. 콩 의 단백질 함량이 높은 것도 질소 원소가 단백질 구성단위인 아미노산 의 뼈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콩과 작물 게놈이 해독됐지 만 여기서는 콩과 작물 생산량에서 압도적인 1위이면서 원산지에 한반 도가 포함된 대두의 게놈을 주로 다룬다.
- 질소고정 박테리아는 토양에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다. 주변에 콩과 식물이 없어도 자연계에서 식물들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유다. 그럼 에도 토양이 척박해 질소고정 미생물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면 질소 화합물이 부족하고 그 결과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 질 수 있다.
그런데 속씨식물의 진화 과정에서 대략 1억 년 전 몇몇 식물이 질소 고정 박테리아와 공생하는 길을 찾았고 그 결과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 에 유리한 지점에 올라섰다. 물론 식물도 거저먹는 건 아니고 박테리아 를 위해 뿌리조직까지 변형시켜 미생물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뿌리혹 을 줄줄 달고 있고 그 안에 사는 박테리아에게 지상부의 잎이 광합성으 로 만든 영양분을 운송해 공급한다. 식물과 박테리아 사이에 탄소화합물과 질소화합물을 물물교환하는 셈이다.
때로 콩과 식물만이 질소고정 능력이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 있는 데, 실제로는 10개 과의 식물들이 질소고정 능력이 있다. 다만 콩과 식물은 종이 워낙 많고 구성원 대다수가 질소고정 능력이 있지만, 나 머지 9개 과는 일부 속의 종들에서만 질소고정이 일어난다. 공생하는 질소고정 박테리아의 종류도 다른데, 콩과와 삼과(장미목) 식물은 그 램음성균인 리조비아hizobia이고 나머지 8개 과는 그램양성균인 프란키 아Frankia다." 아무튼 380여 과로 이뤄진 속씨식물 가운데 10개 과에서 만 질소고정을 할 수 있는 식물이 존재하므로 여전히 예외적인 능력인 셈이다.
- 뜻밖에도 질소고정 관련 유전자 대다수가 질소고정 능력이 없는 속 씨식물의 게놈에도 존재한다. 즉 앞서 4개 목의 공통조상 식물에서 질 소고정을 위해 새로운 유전자들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유전자들이 새로운 기능을 갖거나 새로운 네트워크를 이뤄 질소고정 박테리아와 공생할 수 있게 진화한 것이다. 이 역시 C4 광합성과 비슷한 패턴이다.
지난 2019년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콩과 식물 뿌리혹의 진화적 기원 을 유전자 네트워크 차원에서 밝힌 연구 결과가 실렸다." 토양에 질소화 합물이 충분하면 콩과 식물도 굳이 뿌리혹을 만들지 않는다. 이들과 공 생관계를 맺는 박테리아인 리조비아rhizobia도 토양에서 혼자 살 수 있다. 그런데 질소화합물이 부족해지면 식물 뿌리에서 유인물질을 내보내 고 이를 감지한 리조비아가 이동해 뿌리털에 감염한 뒤 노드 인자Nod factor를 내보내 뿌리털에서 뿌리 피질세포로 이어지는 관인 감염사infection thread를 만들게 하고 피질세포의 일부가 분열해 혹원기 nodule primordium를 만 들게 유도한다. 감염사를 따라 이동해 혹원기를 이루는 세포의 내부로 들어간 리조비아는 일종의 세포소기관으로 자리잡고 질소 분자를 암모 늄으로 바꾼다. 혹원기가 커지면서 뿌리혹root nodule 이 된다.

- 고구마와 감자가 구황작물이라지만 한반도에서 재배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고구마는 18세기 중반 일본 대마도에서 들어왔고 감자는 이보 다도 늦어 19세기 초반 청나라에서 들어왔다. 즉 이들이 우리 조상들에 게 구황작물 역할을 한 건 100여 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 이전 수천 년 동안은 메밀이나 조, 마 같은 작물로 배고픈 시기를 버텼을 것이다. 고구마와 감자 모두 중남미가 원산지이자 작물화된 곳으로 15~16 세기 유럽인들이 가져갔고 아시아로 퍼졌다. 중국에서 고구마는 감저 藉 또는 감서'로 불렸다. 여기서 서와 저는 마를 뜻한다. 마는 동북 아시아가 원산인 식물의 이름이자 그 덩이줄기 이름이다. 즉 고구마의 생김새가 마와 비슷하면서 단맛이 특징이라 감저, 즉 직역하면 '단마'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사실 한반도에 처음 고구마가 도입된 시기는 18세기 후반이 아니라 17세기 초 광해군 시절로 보인다. 다음 왕인 인조 11년(1633년) 고구 마를 보급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효과적인 재배 법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된 것 같다. 고구마의 원래 이름이 감자였다는 사실이 이 역사를 뒷받침한다. 감자는 한자어 감저가 한글화된 이름이 다. 지금도 고구마를 감자 또는 감저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소설가 김동인인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감자의 감자는 사실 고구마다.
한편 감자는 중국어로 마령서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북감 저라고 불렀다. 그 뒤 지역에 따라 감저 또는 감자로 부르면서 혼란 이 생겼다. 그러다 고구마보다 재배가 쉽고 저장성이 좋으면서 채소로 쓸 수 있는 감자가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 이름 까지 빼앗은 것이다. 대신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리키는 일본어 '고코사실 한반도에 처음 고구마가 도입된 시기는 18세기 후반이 아니라 17세기 초 광해군 시절로 보인다. 다음 왕인 인조 11년(1633년) 고구 마를 보급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효과적인 재배 법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된 것 같다. 고구마의 원래 이름이 감자였다는 사실이 이 역사를 뒷받침한다. 감자는 한자어 감저가 한글화된 이름이 다. 지금도 고구마를 감자 또는 감저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소설가 김동인인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감자의 감자는 사실 고구마다.
한편 감자는 중국어로 마령서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북감 저라고 불렀다. 그 뒤 지역에 따라 감저 또는 감자로 부르면서 혼란 이 생겼다. 그러다 고구마보다 재배가 쉽고 저장성이 좋으면서 채소로 쓸 수 있는 감자가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 이름 까지 빼앗은 것이다. 대신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리키는 일본어 '고코이모'가 우리말화돼 쓰이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 고구마의 당분이 4%라지만 생으로 먹으면 그렇게 달지는 않다. 그런 데 요리를 하면 꽤 달아지고 특히 군고구마는 더 달다. 이 역시 베타- 아밀레이스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고구마의 베타-아밀레이스 효소 활 성은 5°C에서 가장 높고 75°C가 넘으면 열로 변성되면서 활성을 잃는 다. 따라서 조리 과정에서 베타-아밀레이스가 녹말과립 표면의 녹말 상당량을 맥아당으로 분해해 단맛이 강해진다. 맥아당의 단맛은 설탕의 3분의 1 수준이다. 고구마를 구울 때는 찔 때보다 고구마 내부의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므로 효소가 더 오래 작용해 더 달다.

- 감자를 재배할 때 씨가 아닌 씨감자를 쓰는 이유도 상동염색체 사이 의 차이인 이형접합성이 이렇게 크기 때문이다. 감수분열 과정에서 염 색체 재조합이 일어나면서 게놈 구성이 제각각인 생식세포가 얻어지므 로 이형접합성이 클수록 이게 수정해서 맺히는 씨앗의 편차 역시 크다.
게다가 오늘날 재배되는 감자는 대부분 동질사배체, 즉 상동염색체 두개가 아니라 네 개가 쌍을 이루고 있어 이런 경향이 더 심하다.
수천 년 전 남미 안데스 산지에서 감자가 작물화될 때부터 농부들은 식물체의 특성을 유지하는 무성생식 방법, 즉 씨감자로 다음 해 농사를 지었다. 씨감자에서 나온 싹은 모체와 게놈이 동일한 클론이므로 매년 같은 특성의 감자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씨감자 농사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먼저 씨에 비해 씨감자는 덩치가 훨씬 크므로 수확량에서 손실을 보기 마련이다. 또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에 감염된 상태가 다음 개체로 이어질 위험성도 크다.
- 싹이 난 감자를 먹으면 안 되는 이유
제철 감자가 싸다고 상자로 사서 두고 먹다 보면 어느 순간 싹이 난 감자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이 부분을 칼로 도려내지 않으면 맛 도 쓰지만 몸에 안 좋고 많이 먹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솔라닌 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지속 식물은 잎과 열매에 글리코알칼로이드glycoalkaloid 라는 구조의 피토케미컬을 지니고 있다. 감자에는 솔라닌solanine과 차코닌chaconineo 있고 토마토에는 토마틴tomatine이 있다. 이 가운데 감자의 덩이줄기에도 존재하는 솔라닌이 널리 알려져 있다. 솔라닌은 1820년 역시 가지속 식물인 까마중(학명 Solanum nigrum)의 열매에서 처음 분리돼 이런 이름을 얻었다.
가지속 식물이 만드는 글리코알칼로이드는 이를 먹은 동물의 세포막 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을 분해하는 효소의 작용을 방해한다. 그 결과 소화계와 신경계를 교란시키고 고농도로 섭 취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다만 글리코알칼로이드는 맛이 쓰기 때 문에 보통은 치사량을 먹기 전에 피하기 마련이다.
식물의 작물화 과정에서 맛이 쓰거나 독성이 있는 피토케미컬은 농 도가 낮아지는 쪽으로 선별이 이뤄졌다. 따라서 작물 감자와 토마토 역시 야생 식물에 비해서는 글리코알칼로이드 함량이 꽤 낮지만, 감자처럼 상황에 따라서는 많이 만들어져 독성을 띨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감자를 빛에 노출한 채 보관하면 싹이 나면서 껍질에서 솔라닌 합성이 활발해지고 엽록체가 많아져 녹색을 띤다. 이때 껍질째 감자를 요리해 먹으면 다량의 솔라닌을 섭취할 수 있다. 참고로 솔라닌 은 안정한 분자라 웬만한 열로는 분해되지 않는다. 의학사를 보면 소위 '솔라닌 중독'으로 불리는 사례가 여럿 보고됐는데, 2,000여 명의 발생 사례 가운데 사망자가 30명이나 된다.
토마토 역시 잎과 열매에서 글리코알칼로이드인 토마틴이 만들어진다. 다만 작물화 과정에서 열매의 토마틴 함량이 크게 줄었을 뿐 아니라 열매 가 성숙하면서 토마틴이 인체에 무해한 라이코페로시드lycoperosides와 에 스큘레오시드 esculeosides로 바뀌기 때문에 감자처럼 위험하지는 않다.

- 2017년 사이언스에는 현대 상업 품종 토마토의 향미가 떨어진 이 유를 밝힌 논문이 실렸다." 향미 lavor는 맛과 향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오늘날 토마토 열매가 과일이 아니라 채소로 취급되는 건 단맛과 함께 향기도 약해졌기 때문이다.
상업 재배품종과 야생종, 재래종 등 398가지 토마토를 분석한 결과 상업 재배 품종에서 향미와 관련된 휘발성 분자 13종의 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들쩍지근한 토마토 특유의 향을 부여 하는 2-메틸-1-부탄올2-methyl-1-butanol nol과 바나나 향인 3-메틸-1-부탄
-3-methyl-1-butanol, 은은한 꽃향기인 베타-아이오논-ionone 같은 화합물이다. 생산량과 저장성, 질병 저항성 등에 집중해 개량하다 보니 이런 대 사산물을 만드는 유전자 네트워크가 부실해져도 방치한 결과다. 연구 자들은 관련된 유전자들의 변이를 야생 또는 재래종 형태로 되돌린다 면 향미가 풍부한 토마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새 술은 새 포대에
2018년 학술지 네이처 생명공학에는 맛과 향이 진한 토마토를 만드는 새로운 전략을 소개한 논문 두 편이 나란히 실렸다. 즉 기존 상업 재배품종 토마토에 잃어버린 유용한 특성을 복구시키는 대신 야생 토 마토에 게놈편집기술로 작물 토마토의 특성을 부여해 향미는 유지하면 서 열매 크기 등 단점은 개선한 작물로 만드는 것이다. 지난 수년 사이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 일어난 게놈 변이가 많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 런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시간은 줄일 수 있을지 몰 라도 재배 품종에 야생 토마토를 교배하는 전통 육종법과 같은 결과물 이 나오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게놈 차원에서 보면 기존 육종법은 염색체가 재조합되 는 과정이고 이때 표적이 되는 유전자에 가까이 있는 여러 유전자들도 같이 바뀐다. 그 결과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게놈편집 기술을 쓰면 원하는 유전자만 콕 집어서 바꿀 수 있으므로 이런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
- 연구자들은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 이는 유전자 6개를 바꾸기로 했다. 즉 3세대 게놈편집기술인 크리스 퍼/캐스을 써서 족집게 분자육종을 시도한 것이다. 식물체의 성장에 관여하는 SP 유전자와 열매 모양에 관여하는 유전자, 열매 크기에 관여하는 FAS 유전자와 FW2.2 유전자, 열매 개수에 관여하는 MULT 유전자, 영양분(라이코펜lycopene)에 관여하는 CycB 유전자를 작물형 또 는 바람직한 특성을 띠는 변이형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야생종에 비해 열매 크기가 3배가 됐고 개수는 무 려 10배가 됐다. 즉 식물 한 개체 당 열매가 양으로 30배 더 달린 것이 다. 게다가 라이코펜 함량도 두 배로 늘었다. 이는 시장에 나와 있는 토 마토의 라이코펜 함량의 5배에 이르는 농도다. 라이코펜은 항염증 작 용이 있고 심혈관계질환 및 암 위험성을 낮춰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라이코펜 관련 유전자인 CycB는 라이코펜을 베타카로틴으 로 바꿔주는 효소를 지정하고 있다. 기존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는 이 유전자의 활성이 강화돼 라이코펜 함량이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방울 토마토의 라이코펜 함량은 60~120mg/kg인 반면 야생 토마토는 최대 270mg/kg에 이른다. 그런데 게놈편집으로 이 유전자를 아예 고장내 자 라이코펜 함량이 500mg/kg까지 올라갔다. 이 경우는 기존 작물화 와 반대 방향으로 바꾼 것이다.
- 수입 관세 때문에 법적 다툼
토마토가 채소든 과일이든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1893년 미국에서는 이 문제가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한때 뉴욕 관세청장 을 지내기도 했던 미국 21대 대통령 채스터 아서는 관세를 낮춰 달라는 여론에 1882년 관세 인하 검토를 지시했다. 그 결과 위원회는 10% 인하 안을 의회에 제시했으나 보호론자들의 입김으로 이듬해 관세법을 평균 1.47% 인하하는 데 그쳤다.
- 이 과정에서 수입 과일은 무관세가 돼 서민들의 부담을 꽤 덜어줬다. 반면 수입 채소에는 여전히 10%의 관세를 매겼다. 이때 토마토는 과학보 다는 관습(상식)에 따라 채소로 분류됐고 그 결과 관세 대상이 됐다. 이 에 수입업자들이 불만을 품었고 이 가운데 뉴욕에서 가장 큰 과채류 수 입업체였던 존닉스&컴퍼니가 뉴욕항 세관 책임자 에드워드 헤든을 상대 로 재판을 걸어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다. 원고측은 열매인 토마토가 식물학적으로 엄연히 과일이므로 틀린 분류 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사전까지 갖고 가 들이밀었지만, 법정은 "어떤 단 어가 무역이나 상업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일상의 의미 로 쓰여야 한다"며 사전을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판결을 맡은 그레이 판사는 “토마토는 덩굴식물에 열리는 열매이지만 디저트보 다는 주요리에서 주로 먹기 때문에 채소로 봐야 한다"며 "호박과 오이. 완두, 강낭콩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일은 목본 식물의 열매에 한정하고 초본 식물의 열매 는 채소로 본다. 채소는 먹는 부위에 따라 엽채류(잎)와 근채류(뿌리), 과 채류(열매)로 나뉜다. 토마토는 고추, 호박, 오이, 참외, 수박과 함께 과 채로 분류된다. 완두나 풋콩은 씨앗이지만 과채류로 본다.

- 후추와 마늘도 그렇지만 양념 작물이나 기호 작물의 정체성은 해당 작물이 만드는 이차대사물secondary metabolites에서 온 다.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같은 영양분, 즉 일차대사물primary metabolites. es을 섭취하려고 먹는 음식에 맛을 돋우기 위해 넣는 양념 작물은 종류에 따 라 독특한 이차대사물 프로파일을 지니고 있다.
이차대사물은 대부분 식물이 각종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분자다. 특히 식물체를 공격하는 생물체에 대항하는 무기 로서 이차대사물은 식물의 진화 과정에 따라 특화돼 있다. 고추속 식물 은 캡사이시노이드capsaicinoid로 불리는 알칼로이드 합성 전문가들이다.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분자로 알려진 캡사이신capsaicin은 대표적인 캡사 이시노이드다. 한편 알칼로이드alkaloid는 질소를 함유한 염기성 유기화 합물을 가리킨다.

- 토마토와 고추의 차이
토마토와 고추는 가짓과 식물로 가까운 사이이지만 열매가 익는 과 정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토마토는 전형적인 열매의 길을 걷는 것이므로 고추 열매가 별난 경우다. 식물이 씨방을 부풀려 영양분이 들 어 있게 하는 건 씨를 퍼뜨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씨가 여물기 전까지 는 열매가 딱딱하고 타닌과 유기산이 많아 맛도 떫거나 시고 색도 녹색 이다. 씨가 성숙하면 열매의 세포벽이 약해지고 떫은맛과 신맛 대신 당 분이 올라가 단맛이 난다. 여기에 달콤한 향이 더해지고 색도 빨갛거나 노랗게 바뀐다. 동물들에게 빨리 와서 먹으라고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토마토 열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 최 교수는 "토마토씨를 본 적이 있느냐?"며 고추씨보다 작은데다 미 끌미끌한 젤에 싸여 있어 포유류가 씹어 먹어도 거의 파괴되지 않고 장 을 통과할 때도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대변에 섞여 온전하게 빠져나온 다고 설명했다. 반면 고추씨는 상대적으로 크고 노출돼 있어 설치류 같 은 작은 포유류가 씹어 먹게 되면 십중팔구 상처를 입고 장의 소화 작 용으로 파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열매를 진 화시켰다.
고추에서는 씨가 여물면 열매의 색이 녹색에서 붉게 바뀌기는 하지만 세포벽이 약해지지도 않고 캡사이신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포유동 물이 먹기에는 여전히 꺼리는 상태다. 반면 새들에게는 먹기 좋은 열매 다. 빨간 열매가 녹색 잎과 보색대비를 이뤄 눈에 잘 띄고 새들은 캡사이신의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고추 열매를 먹은 새들 이 어디론가 날아가 배설을 하면 배설물 속의 소화되지 않은 씨앗이 발 아해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 고추가 새를 선택한 것
생태계 현장 조사 결과 이 가설이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추의 원산지인 중미와 북미 남서부에 사는 새인 굽은부리쓰래셔(curve-billed thrasher. 지빠귀와 비슷하게 생긴 앵무과의 새)는 고추를 즐겨 먹는데 배설물을 조사해 보니 온전한 고추씨가 들어 있었고 그 결과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실제 발아율이 70%에 이르렀다. 반면 이 지역에 사는 소형 설치류인 숲쥐나 선인장쥐는 야생 고추를 외면하고 심지어 캡사이신이 없는 재배 품종 고추를 줘도 망설이며 조금밖에 먹지 않는다는 발견이 지난 2001년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포유류와 조류는 거의 3억 년 전에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 따라서 둘 의 TRPV1 역시 지난 3억 년 동안 각자 진화하며 구조도 꽤 달라졌을 것 이다. 예를 들어 조류는 체온이 포유류보다 4°C 정도 높은 40~44°C이기 때문에 TRPV1이 활성화되는 온도도 그만큼 더 높아야 한다. 실제 조류 의 TRPV1의 활성화 온도를 측정해 보면 46~48°C로 그만큼 더 높다. 세 팅 온도의 차이는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반면 토마토와 고추는 약 2,000만 년 전에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 즉 고추의 조상이 이차대사물인 캡사이신을 발명한 역사는 2,000만 년이 안 된다는 말이다(아마도 수백만 년일 것이다). 결국 고추 조상은 포유류 로부터 씨앗을 물리적으로 보호하는 대신 열매 자체를 못 먹게 화학적으 로 지키는 전략으로 시행착오를 거쳐 포유류의 TRPV1에만 달라붙는 구 조의 화합물, 즉 캡사이신을 만드는 생합성 유전자 네트워크를 진화시켰 다는 말이다.

- 프룩탄은 소장에서 소화가 잘 안 되는 탄수화물인 가용성 식이섬유로 대장으로 넘어가서 장내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즉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로 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섭취하면 문제를 일 으키기도 한다. 미생물 발효가 왕성해지면 배에 가스가 차고 복통, 설 사 같은 증상이 생길 수 있다. 프룩탄을 포함해 소화가 잘 안 돼 장내미 생물 발효로 문제를 일으키는 물질을 가리켜 포드맵FODMAP이라고 부른 다. FODMAP은 '발효가 되는 올리고당류, 이당류, 단당류 및 폴리올 fermentable oligosaccharides, disaccharides, monosaccharides, and polyols'의 머리글자다.
개인에 따라 포드맵이 소장에서 소화되는 정도와 대장에서 발효되는 정도가 다르다. 예를 들어 우유에 들어 있는 이당류 젖당(유당)도 포드 맵이지만, 소장에서 젖당분해효소가 충분히 나오는 사람에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반면 효소를 전혀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우유를 조금 만 마셔도 배탈이 난다.
마늘에는 프룩탄이 많이 들어 있지만, 양념으로 먹는 양으로는 별문 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늘이나 양파를 즐겨 먹는데 평소 속이 더부룩하다면, 섭취를 줄일 때 속이 편해지는가를 살펴보는 게 좋다. 참 고로 프룩탄은 밀에도 들어 있다. 빵이나 면 같은 밀가루 음식을 먹고 나서 속이 안 좋다면 역시 포드맵에 민감한 체질이 아닌가 의심해 볼 만하다. 한편 쌀에는 프룩탄이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이 주식 은 잘 정한 것 같다.

- 종의 합성은 오늘날 용어로 이질배수성allopolyploidy이라고 부르는 현상으로 당시로는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앞서 3장 밀의 게놈에서 설명했듯이, 오늘날 많은 작물의 등장에는 이질배수성이 한몫했다. 엠머빌과 빵밀도 이질배수성, 즉 종의 합성으로 생겨난 작물이고 앞으로 나올 딸 기와 인삼 등 많은 예가 있다.
종의 합성은 단순한 잡종과는 다른 얘기다. 배추와 양배추 사이에서 잡종이 종종 나오지만 생식력이 없다. 배추는 염색체(2n)가 20개, 양배 추는 18개라 그 사이의 잡종은 염색체가 19개다. 부계 생식세포의 염 색체(n) 10개(또는 9개)와 모계 생식세포에서 9개(또는 10개)가 수정돼 합쳐진 결과다. 그런데 1세대 잡종 개체가 생식세포를 만들려고 하면 짝이 안 맞아 감수분열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불임이 된다. 그런데 드물게 감수분열 없이 염색체 19개를 지닌 상태 그대로 생식 세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우연히 이런 생식세포 둘이 만나 수정되면 염색체 38개로 이뤄진 세포를 지닌 개체가 나온다. 바로 유채다. 이경 우 배추와 양배추 염색체를 온전히 지니고 있고 감수분열의 결과인 생 식세포는 염색체 19개를 갖고 있다. 배추와 양배추 두 종의 게놈이 합 쳐져 새로운 종인 유채가 나왔으므로 종의 합성이라고 부른다. 우 박사 는 오래전 자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실험실에서 재현해 증명했다.

- 작물화로 쓴맛이 많이 지워졌지만...
가끔 오이를 먹다가 특히 꼭지 쪽에서 꽤 쓴맛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눈치를 보는 자리가 아니라면 씹던 음식을 뱉어낼 정도다. 예 전에 참외를 먹다가도 이런 '쓴맛을 본 적이 있다. 오이나 참외뿐 아니 라박과 식물에는 공통으로 이처럼 쓴맛이 강하게 나는 물질인 큐커비 타신cucurbitacin이 들어 있다. 분자 이름도 박과cucurbitaceae에서 따왔다. 큐 커비타신은 탄소원자 30개로 이뤄진 트리테르펜triterpene으로 몇 가지 종 류가 있다. 오이는 큐커비타신C, 멜론은 큐커비타신B, 수박은 큐커비 타신E를 지니고 있다.
쓴맛이 나는 다른 피토케미컬과 마찬가지로 큐커비타신은 동물을 쫓 아내는 방어물질이다. 대부분의 식물에서는 씨앗이 여물면 열매가 익 으면서 쓴맛이나 신맛이 나는 물질은 사라지고 대신 조직이 물러지고 단맛이 올라가지만 박과 식물의 열매는 익어도 쓴맛이 남아 있다. 이는 쓴맛에 둔감한 대형 포유류만을 끌어들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열매를 대충 씹어 넘기면 손상되지 않은 씨앗이 장을 통과해 똥에 섞여 빠져나와 발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과 식물의 작물화 과정에서 중요한 개량 포인트가 바로 열 매에서 큐커비타신의 쓴맛을 최대한 줄이는 것으로, 수박에서는 완전 히 성공했지만 오이속 작물인 오이와 참외에서는 완벽하게 없애지 못 했다. 최근 당뇨에 좋은 걸로 알려져 찾는 사람이 늘고 있는 여주(학명 Momordica charantia)는 예외인데, 작물화됐음에도 여전히 쓴맛을 꽤 지닌 채 몇몇 요리에 식재료로 쓰이거나 술을 담글 때 들어간다.
- 박과 식물이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분자인 큐커비 타신cucurbitacin은 미량 존재해도 과육이 굉장히 쓰다. 따라서 작물화 과정에 서큐커비타신생합성을 억제하는 쪽으로 선별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오이 와 참외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반면 수박을 먹다가 쓴맛을 느낀 적은 없을 것이다. 큐커비타신 생합성 경로가 완전히 막혀있기 때문이다.
게놈 분석 결과 이런 변화는 에구시수박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번에 분석한 16개 유전자원 가운데 12가지에서 쓴맛이 없었는데, 큐커비타 신생합성 경로를 조절하는 Bt 유전자 변이가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 다. 그리고 달콤한 수박의 경우 전부 변이형 Bt 유전자였다. 작물화 초 기 일찌감치 쓴맛이 없는 형질이 고정됐다는 말이다.
작물화 과정에서 열매가 커지고 방어물질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면 식 물은 각종 병충해에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수박도 예외는 아니어서 덩굴쪼김병(곰팡이), 흰가루병(곰팡이)이나 선충의 공격에 시달린다. 또 가뭄 같은 스트레스에도 취약하다.
육종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생 식물의 유전자를 이 입introgression하는 전략을 즐겨 쓴다. 달콤한 수박 역시 이 목적으로 쓴사 과수박이나 시트론수박과 교잡을 한 흔적이 이번 게놈 분석을 통해 드 러났다(267쪽 그림). 즉 이들 종에서 여러 스트레스 저항 유전자들이 이입된 것이다.

- 와인의 역사가 수천 년에 이르다 보니 세계 각지에서 재배되는 포도 (비니페라)의 품종이 7,000가지에 이른다. 비록 한 종이지만 수천 년, 수백 년 동안 따로 재배된 결과 서로 게놈이 꽤 다르다. 최초로 해독되 는 품종이 포도 참조 게놈이 될 것이므로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대표적인 와인용 포도 품종을 잠깐 살펴보자. 앞서 언급했듯 이 프랑스 서남부의 보르도 지방과 중북부의 부르고뉴는 자웅을 겨루 는 와인 산지다. 보르도를 대표하는 적포도주 품종인 카베르네소비뇽 Cabernet Sauvignon은 독특하고 강한 향과 짙은 색, 타닌의 떫은맛이 조화된 남성적인 와인을 만든다. 와인용 포도의 왕이라고 할 만하다.
반면 부르고뉴 일대에서 재배되는 피노누아Pinot Noir는 화사한 꽃이 연상 되는 향과 투명한 붉은색으로 우아한 여왕이 떠오른다. 타닌도 적어 어 찌 보면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을 블렌딩한 것 같다. 그런데 실제는 그 반대다. 카베르네소비뇽은 떫은맛이 강해 향이 풍부하면서도 타닌이 적 은 메를로Merlot 품종과 종종 블렌딩하지만, 피노누아는 너무 섬세해 다른 품종이 섞이면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에 100% 피노누아로 술을 빚는다. 카베르네소비뇽 와인은 저가에서도 잘 고르면 꽤 괜찮은 맛을 찾을 수 있지만 피노누아는 싼 게 없을뿐더러 고가 제품에서야 제대로 된 맛 과 향을 느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 향에 관여하는 유전자 많아
과일이 다 그렇지만 포도는 특히 향이 풍부하다. 다른 술에 비해 와 인에서 향을 중요시하는 것도 원재료 덕분이다. 냄새 분자는 종류도 많고 구조도 다양하지만 꽃이나 과일 향기의 많은 부분은 모노테르펜 monoterpene이라는, 탄소원자 10개를 기본골격으로 하는 분자들이 기여한 다. 포도의 경우 장미가 연상되는 꽃향기가 나는 제라니올과 리날롤을 비롯해 시네올, 알파-테르피네올 등이 주성분이다.
- 포도 게놈에는 테르펜합성효소TPS 유전자가 89개로 30~40개 수준 인 애기장대나 벼, 포플러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이 가운데 모노테르펜 합성효소가 40%나 돼 15%에 불과한 애기장대의 대여섯 배에 이른다. 참고로 분자 골격이 탄소원자 10개 단위인 화합물을 테르펜이라고 부 른다. 10개는 모노테르펜(1×10), 20개는 디테르펜diterpene (2×10), 30 개는 트리테르펜riterpene (3×10)이다.
한편 프랑스 사람들이 비슷한 식단인 영미권에 비해 심혈관계질환에 덜 걸리는 게 와인에 들어 있는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 때문이라는 얘기 가 널리 알려져 있다. 포도 껍질에 많이 들어 있는 레스베라트롤은 폴 리페놀의 일종인 스틸벤bene이라는 기본 구조를 지닌 분자로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다.
포도 게놈에는 스틸벤합성효소STS 유전자가 43개나 있다. 물론 사람 건강에 좋으라고 포도가 레스베라트롤을 만드는 건 아니다. 흥미롭게 도 포도에 노균병을 일으키는 난균류를 감염시키면 STS 유전자 20개 가 발현된다는, 게놈 해독 이전의 연구 결과가 있다. 즉 레스베라트롤 은 병원체가 침입했을 때 방어물질 역할을 한다.

- 복숭아의 맛과 향이 뛰어남에도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과피에 까끌 까끌한 솜털이 나 있기 때문이다. 과피에서 떨어진 솜털이 몸에 묻거나 제대로 씻지 않은 복숭아를 껍질째 먹으면 피부가 벌겋게 되거나 입술 이 부풀어 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기도 한다.
복숭아 과피의 솜털은 전문용어로 트리콤trichome이라고 부르는데, 표 피세포가 변형된 구조로 외부 스트레스에서 식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 트리콤은 잎 표면에 많은데, 특이하게도 복숭아는 과피에도 존재한다. 일부 사람들에게 복숭아 트리콤에 있는 단백질이 항원으로 작용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 이런 사람들이나 솜털이 난 복숭아가 먹기 번거로운 사람들이 찾는 게 바로 천도복숭아로 과피에 솜털이 없다. 그뿐 아니라 맛과 향도 다 소 달라 천도복숭아는 백도나 황도와는 다른 종인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영어로 천도복숭아는 nectarine으로 복숭아peach와 전혀 다른 이 름으로 불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복숭아와 자두 사이의 잡종 같기도 하다.
그러나 천도복숭아는 복숭아의 한 종류일 뿐으로 자두와는 관계가 없다. 교배 실험을 통해 천도복숭아가 솜털이 없게 한 유전자 변이는 열성으로 밝혀졌다. 즉 대립유전자 둘 다 변이형이어야 과피에서 트리 콤이 생기지 않는다. 천도복숭아는 2천여 년 전 이미 중국에서 알려져 있었는데, 앞의 황도처럼 변이지, 즉 체세포 돌연변이로 생겨났을 것이 다. 참고로 천도복숭아도 과육 색에 따라 백도와 황도로 나눌 수 있다.

- 탐스러운 사과는 곰의 작품?
사과 50여 종의 열매는 체리나 살구 크기에 시큼한 맛이지만 유독 시에비르시만은 자그마한 사과 크기까지 자라고 단맛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에비르시의 자생지에 그 답이 있다. 우즈베키스탄과 중국 의 국경지대에는 동서로 텐산산맥이 펼쳐져 있는데, 지형적인 영향으 로 토지가 비옥하고 수량도 충분해 각종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과일나무가 많은데 사과만 해도 여러 야생종이 자생한다. 이들은 크기 도 제각각이고 맛도 차이가 많다.
이들 사과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 다. 큼직하고 달콤한 종, 즉 재배사과의 조상인 시비르시와 체리만한 사과가 열리는 다른 야생종의 유전자가 매우 비슷했던 것이다. 이들의 관 계를 연구하자 이 일대에 사는 불곰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밝혀졌다.
불곰은 나무에 올라가 달린 열매를 먹거나 땅에 떨어진 열매를 갈퀴 같은 발톱으로 긁어모아 먹는다. 원래 육식성이었다가 잡식성으로 진 화한 불곰의 턱은 과일을 씹기에는 여전히 비효율적인 구조다. 대충 어 석어석 씹어 삼킨 사과는 위 소장 대장을 거쳐 과육은 소화되고 씨는 배설물과 함께 땅에 뿌려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크기가 작은 사과 는 제대로 안 씹혀 거의 온전한 채 배설된다. 사과를 비롯해 많은 열매 에는 씨앗이 붙어 있는 자리인 태좌에 씨가 발아하는 것을 억제하는 물 질이 함유돼 있다. 따라서 온전한 채 배설된 사과에서는 씨가 발아하지 않는다. 한편 체리나 살구만한 열매는 주로 새나 작은 포유류가 먹고 씨를 퍼뜨리므로 발아에 문제가 없다.
불곰이 먹을 때는 열매가 클수록 제대로 씹혀 과육과 태좌가 소화되 면서 씨가 노출돼 배설된 곳에 싹을 틔웠다. 이런 식으로 열매가 큰 사 과의 씨가 발아될 확률이 높았으므로 점차 알이 굵어졌다. 한편 곰은 단것을 무척 좋아해 배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달콤한 열매가 열리는 사 과나무만 골라 공략했을 것이다. 결국 곰이 많이 사는 이 일대에서 오 랜 세월에 걸쳐 열매가 크고 달콤한 사과나무가 진화했다. 
- 한국 능금의 씁쓸한 역사
한반도에 자생하는 사과속 식물은 2종으로 야광나무(학명 M. baccata)와 능금나무(학명 M. asiatica)다. 이 가운데 능금은 달콤하고 살구 크기라 먹을만했다. 그래서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능금나무를 재 배했다.
그러다 17세기 후반 중국에서 빈과로 불리는 사과가 한반도에 소 개됐다. 숙종은 북악산 뒤 자하문 밖 일대에 빈과나무를 심게 했고 다 른 곳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다. 구한말 자하문 밖 과수원에 봄이 오면 빈과나무 20만 그루에서 핀 사과꽃으로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그렇다 면 빈과의 실체는 무엇일까.
- 앞서 말했듯이 재배 사과는 톈산산맥 일대에 자생하는 시에베르시 와 서아시아의 코카서스사과, 유럽의 유럽꽃사과 사이에 태어난 잡종 이다. 그런데 실크로드를 따라 톈산산맥 동쪽으로 간 시에베르시는 중 국 각지에 분포한 야광나무와 만났고 잡종이 태어났다. 대략 2,000년 전 중국인들이 이 잡종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바로 빈과다. 즉 유럽에 서 완성된 재배 사과와 마찬가지로 중국 재배 사과 역시 시에베르시의 후손들이다.
과일의 관점에서 빈과가 능금보다는 나았지만 오늘날 상업 품종의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조상 대다수는 여전히 능금을 재배하고 즐겨 먹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서양 선교사들이 서구의 개량 품종 을 하나둘 들여오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 농민들이 한반도에 본 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서구의 재배 사과를 도입했다. 그 결과 빈과와 능금 재배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사라졌다.
이때 일본 사람들이 들여온 사과 품종들 가운데 대표적인 게 바로 홍 옥과 국광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부사에 밀려 지금을 볼 수 없거 나 가을에 잠깐 시장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후지라는 일본 이름으로 더 알려졌던 부사는 국광과 레드딜리셔스Red Delicious라는 품 종을 교배해 얻어진 품종이다.
1930년대 말 일본 아오모리현 후지사키의 농림수산성 과수시험장에 서 만든 후지는 1962년 시장에 나왔고 그 뒤 승승장구해 오늘날 '사과 의왕'이 됐다. 레드딜리셔스를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국광물이 많아 시원하다)과 레드딜리셔스(달콤한 맛과 향)의 장점만이 발현된 품 종이 부사인 것 같다. 국광의 경우처럼 더 뛰어난 개량 품종에 밀려 사 라지는 건 과일뿐 아니라 작물의 숙명 아닐까.

- 세계로 눈을 넓히면 바나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과일이다. 바 나나의 연간 생산량은 1억 6,000만 톤이 넘어 1인당 소비량이 20kg이 나 된다. 특히 더운 지방에서는 수백kg에 이르는 곳도 많다. 실제 지구 촌에서 4억 명이 바나나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과일을 어떻게 밥으로 먹는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먹는 바나나가 바나나의 전부는 아 니다.
바나나는 먹는 방식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디저트 바나나이고 다른 하나는 요리용 바나나다. 보통 바나나는 과일로 생 식하는 디저트 바나나를 뜻하고 요리용 바나나는 플랜틴plantai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플랜틴은 디저트 바나나에 비해 당 함량이 낮고 녹말 함량이 높다. 따라서 생으로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워 쪄먹거나 요리 재료로 쓴다.
연간 생산량을 나누면 디저트 바나나가 1억 1,983만 톤이고, 플랜틴 이 4,312만 톤이다(2020년), 플랜틴의 주요 생산국은 콩고민주공화국, 카메룬, 가나, 우간다, 나이지리아 등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나라 들이다. 이 지역에서는 플랜틴이 주식, 즉 식량작물이라는 말이다.
사실 바나나와 플랜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생김새는 둘 다 바나 나로, 다만 플랜틴이 좀 더 크고 생김새가 각진 경향이 있다. 당도와 녹 말 함량이 어중간한 경우 바나나로 부르건 플랜틴으로 부르건 관계없 이 생으로 먹기도 하고 요리해서 먹기도 한다. 식물 분류학의 관점에서 는 디저트 바나나 사이의 다양성이 오히려 더 크다. 즉 플랜틴은 바나 나의 몇몇 계열에서 나온 저당 고녹말 품종들의 별칭이다.
- 밀과 감자, 딸기 등 많은 작물이 다배체 식물이지만 삼배체인 바나나 처럼 홀수인 경우는 드물다. 기본염색체 세트가 홀수일 경우 감수분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제대로 된 성세포가 나오기 어렵고 따라서 수정 이 일어나 씨가 맺힐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연히 삼배체 식물이 나오 더라도 자손을 보지 못해 사라진다는 말이다.
다만 유성생식과 함께 무성생식 수단을 진화시킨 식물에서는 삼배체 로 유성생식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더라도 무성생식, 즉 복제 식물체인 클 론clone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바나나도 이런 경우로, 땅속에 저장조 직인 알줄기com가 있고 여기에서 흡근sucker이라고 불리는 새순이 나온 다. 바나나 농사는 이 새순을 베어내 옮겨심는 방식으로 이어 나간다.
- 바나나 게놈에서 가장 관심이 많은 건 병해충 방어 관련 유전자와 숙성 과정과 관련한 유전자로 각각 바나나 재배와 유통에서 중요한 변수 다. 숙성 관련 유전자를 먼저 살펴보자. 산지인 열대 또는 아열대 지역 에서는 수많은 종류의 바나나가 재배되고 있지만 세계 각지로 수출되 는 바나나는 거의 캐번디시 계열로 전체 바나나 생산량의 40%가 넘는 다. 캐번디시의 대성공은 과일에서 중요한 요소인 맛과 향이 좋아서라 기보다는 오랜 운송 기간을 버텨내고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수출용 바나나는 껍질이 녹색인 덜 익은 상태에서 수확해 운송된 뒤 식물 호르몬인 에틸렌을 처리해 어느 정도 숙성시켜 밝은 노 란색으로 바뀐 상태(끝에 연둣빛이 여전히 남아 있다)에서 마트에 오 른다. 이때 바로 바나나를 먹으면 당도가 덜하고 약간 떫은맛도 느껴 지며 과육이 다소 단단하다. 일단 숙성이 시작되면 과일 스스로 에틸 렌을 만들어 숙성 속도가 빨라진다. 그 결과 며칠 지나면 식탁에 둔 바나나가 샛노랗게 바뀌고 군데군데 짙은 갈색 점인 소위 '슈가 스팟 sugar spot'이 보인다. 이때가 바나나를 먹기에 최적인 상태로, 달콤한 맛 과 향에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다. 이처럼 바나나는 후숙, 즉 덜 익 은 상태에서 수확한 뒤 익어가는 과일로 이 과정의 유전자 네트워크 를 이해하면 맛과 향은 뛰어나지만 숙성 속도 조절이 어려워 운송과 유통을 버티지 못하는 다른 여러 품종의 저장성을 개선하는 데도 도 움이 될 것이다.
숙성 과정에 따른 유전자 발현 패턴, 즉 전사체를 분석한 결과 597 개 유전자의 발현량이 바뀌었다. 세포벽을 허무는 효소의 발현이 크게 늘어났고 (그 결과 육질이 부드럽게 된다) 녹말 합성효소 유전자 발현은 줄고 녹말을 당으로 분해하는 효소인 아밀레이스 유전자의 발현은 늘었다. 식탁 위의 바나나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달콤해지는 이유다.
- 그런데 바나나는 무성생식으로 재배하므로 특정 품종의 모든 개체가 클론, 즉 복제 식물체다. 게다가 대규모 상업 재배는 주로 그로미셸 한 품종이고 특히 수출용은 99%를 차지했다. 따라서 그로미셸에 치명적 인 병원체가 등장하면 세계 바나나 산업 자체가 휘청거릴 위험성이 있다. 20세기 들어 파나마병이 등장하면서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됐다.
당시 중남미에서 바나나 농장을 운영하던 미국 기업들은 파나마병이 생긴 농장을 폐쇄하고 숲을 개간해 새 농장을 여는 방식으로 수십 년 동안 대응했지만, 범위가 점점 넓어지며 한계에 이르렀다. 결국 파나마 병에 저항성이 있는 기존 품종을 찾거나 새 품종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 었다. 지역 재래종 가운데는 저항성을 보이는 종류가 꽤 있었지만, 수 출용으로 적합한 특성도 지녀야 했고 그 결과 찾은 게 캐번디시다.
캐번디시 역시 그로미셸에 비해서는 상품성이 떨어졌지만 대안이 없 었다. 1953년 스탠더드프루트(1964년 돌Doll로 사명을 바꿨다)가 캐번 디시를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했고 1970년이 되자 수출용 바나나 농장 은 거의 모두 캐번디시를 심었다. 오늘날은 몇몇 지역에서만 그로미셸 이 재배되고 있다. 만일 파나마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로미셸을 먹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가롭게 그로미셸을 아쉬워할 때가 아니다. 꿩 대신 닭 이라고 생각하며 먹는 캐번디시 역시 파나마병으로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로미셸을 공격한 건 푸사리움 옥시스포룸 쿠벤스 가운데 열대종1Tropical Race1 (이하 TR1)이고 이에 대해서는 캐번디시가 저항성이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초 동남아시아에서 캐번디시를 비롯해 TR1 저 항성이 있는 여러 품종을 공략할 수 있는 새로운 변종인 열대종4TR4가 등장한 것이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호주, 서아시아, 아프리카 모잠비크까지 퍼 진 TR4는 2019년 마침내 남미 콜롬비아에 상륙했다. 중남미는 캐번 디시 최대 생산지로 수출 바나나의 85%를 차지한다. TR4 역시 마땅한 농약이 없어 농장마다 철저한 격리와 검역을 통해 확산 속도를 늦추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캐번디시도 그로미셸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그 전에 TR4에 저항성을 띠는 대안을 찾아야 바나나가 세계인 의 과일로 남을 수 있다.

- 사탕수수 생산량 1위 작물로서 연간 수확량이 18억 6,970만 톤에 이른다(2020년). 2위인 옥수수가 11억 톤이니 큰 차이다. 물론 사탕수 수 생산량은 수숫대 무게이므로 산물인 설탕으로 따지면 옥수수는 물 론 쌀과 밀에도 밀린다. 설탕의 연간 생산량은 1억 8,500만 톤(2017 년)으로 이 가운데 80%를 사탕수수에서 만들고 나머지는 사탕무, 단수 수 등에서 얻는다.
최근 화석연료가 고갈되고 이산화탄소 배출로 지구온난화가 심각해 지면서 사탕수수가 재생가능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탕수수 수액을 발효시켜 만든 에탄올이 휘발유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 제 오늘날 바이오에탄올의 40%를 사탕수수 발효에서 얻는다. 사탕수 수 연간 생산량이 7억 5,710만 톤으로 세계 1위인 브라질에서 에탄올 자동차 보급률이 높은 이유다.
품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설탕 1톤을 얻으려면 대략 수숫대 9톤이 있어야 한다. 만일 사탕수수가 좀 더 빨리 자라고 더 높은 농도로 수액 을 저장할 수 있다면 재생가능 에너지원으로서의 가치는 좀 더 올라갈 것이다.

- 인삼이 약초의 왕 자리에 오른 건 진세노사이드라는 유효성분 때문 이다. 진세노사이드는 사포닌saponin의 일종으로 탄소원자 30개로 이뤄 진 스테로이드 골격이 배당체에 붙어 있는 구조다. 흥미롭게도 인삼속 식물만이 진세노사이드를 만들 수 있고 종류는 150가지가 넘는다.
만병통치약을 뜻하는 라틴어가 학명일 정도이니 많은 과학자들이 인 삼의 약리효과를 검증했고 실제 여러 질병에 유효하다는 사실이 드러 났다. 즉 종양 억제, 고혈압 완화, 항바이러스 활성, 면역조절 활성 등 의 효과가 보고돼 있다.
물론 다른 식물처럼 인삼 역시 사람의 건강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진세노사이드를 만들게 진화한 것이다. 진세노사이드는 뿌리의 안쪽인 수질medulla보다 바깥쪽인 주피periderm와 피질cortex에 더 높은 농도로 존재해 병원체로부터 식물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세노사이드는 꽤 복잡한 분자이고 종류도 많아 생합성에 관여하 는 효소 유전자가 무려 5,000개에 가깝다. 전체 유전자의 10% 가까이 가 투입된 셈이다.
인삼 제품을 보면 '6년근'을 강조하는 문구가 많다. 6년은 재배해야 약성이 제대로 나온다는 말인데 일리가 있다. 인삼은 나이가 들수록 진 세노사이드 함량이 올라가기 때문에 적어도 4년근은 돼야 쓸만 하다. 유전자 발현 패턴을 분석한 결과 이는 진세노사이드 합성이 아니라 수 송이 활발해진 결과다. 진세노사이드는 지상부(잎과 줄기)에서 합성돼 뿌리로 이동해 축적된다.

- 커피나무가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두 종으로 나뉘듯이, 차나무는 한 종이지만 중국 변종(Camellia sinensis var. sinensis)과 아삼 변종(var. assamica)으로 나뉜다. 중국 변종은 나무가 작고 잎도 작은 대신 상대 적으로 추위에 강하다. 향과 맛이 섬세하고 카페인 함량이 낮은 중국 변종은 녹차와 홍차 등 다양한 차로 만든다. 녹차를 즐겨 마시는 우리 나라에서 재배하는 차나무가 바로 중국 변종이다.
인도 북동부와 중국 남서부 등지에서 재배하는 아삼 변종은 나무가 크고 잎도 크지만 추위에 약하다. 그 자체로는 중국 변종에 비해 품질 이 좀 떨어지지만 카페인 함량이 높고 홍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향미가 살아나므로 대부분 홍차용으로 쓰인다. 중국 변종이 아라비카라면 아 삼 변종은 로부스타인 셈이다.
- 음료에 들어 있는 카페인 함량을 나타내는 자료를 보면 커피가 차 보다 두 배 이상 많고 코코아는 미미하다(대신 다크초콜릿에는 꽤 들 어 있다). 커피도 종이나 추출방식에 따라 카페인 함량이 다르듯이(로 부스타가 아라비카의 2배이고 드립커피가 에스프레소보다 1.5배 정도 다), 차도 변종과 추출조건에 따라 다르다.
즉 아삼 변종이 중국 변종보다 카페인 함량이 높고 추출할 때 물의 온도가 90°C 이상인 홍차에서 80°C 내외인 녹차보다 카페인이 더 많이 우려진다. 즉 아삼 홍차는 우전 녹차에 비해 카페인 함량이 서너 배나 돼 커피에 육박한다. 홍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카페인이 걱정된다면 오 후에는 중국 변종으로 만든 다즐링Darjeeling을 추천한다.
- 커피 향에는 약 655가지, 차에는 467가지 휘발성 성분이 들어 있다. 딸기에는 약 360가지, 토마토에는 400가지 향기 분자가 존재한다. 심지어 냄새가 약한 쌀에서도 100가지 화합물이 발견된다. 감자에는 140가지가 있다. - A. S. 바위치, 「코가 뇌에게 전하는 말 
- 아라비카 커피는 아버지인 로부스타 커피에 비해 향이 섬세하고 카 페인 함량이 적다. 반듯이 그런 건 아니지만 아라비카가 부계와 모계의 중간 특성이라면 어머니인 유게니오이데스 커피는 향이 더 섬세하고 카페인 함량이 더 적은 걸까.
오늘날 유게니오이데스(EE 게놈)는 케냐와 우간다 등 동아프리카에 자생하고 있다. 아마도 수만 년 전에는 에티오피아에서도 자랐을 것이 고 이때 로부스타(CC 게놈)를 만나 수정이 일어나 가끔 잡종 나무(CE) 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잡종에서 감수분열 오류로 사배체인 아라 비카(CCEE)가 태어났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아라비카의 특성 가운데는 정말 로부스타와 유게니오이 데스의 중간인 경우가 있다. 나무 키를 보면 부계인 로부스타가 10m에 이르고 모계인 유게니오이데스가 2~3m인데 아라비카는 4~5m다. 원 두의 카페인 함량 역시 로부스타가 2.7%이고 유게니오이데스가 0.6% 인데 아라비카는 1.5%다. 그리고 유게니오이데스 원두로 내린 커피의 맛과 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유게니오이데스는 상 업 작물이 되지 못한 걸까.
무엇보다도 생산성이 너무 낮다. 유게니오이데스는 나무가 작을 뿐 아니라 열매도 적게 열리고 그나마 원두 크기도 아라비카의 절반 수준 이다. 그 결과 나무 한 그루에서 불과 320g의 원두를 수확할 수 있다. 몇몇 커피 농장에서 유니오이데스를 재배해 아는 사람들에게 고가에 공급하고 있지만 웬만한 커피 마니아도 맛볼 기회를 얻기 힘들 것이다.

- 카카오 열매가 익으면 수확해 카카오 콩이라고 부르는 씨앗을 빼 내 발효시킨 뒤 말린다. 그리고 껍질을 벗겨내고 빻아 코코아 매스cocoa mass를 얻는다. 코코아 매스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 혼합물로 지방 이 약 50%를 차지한다. 코코아 매스에서 분리한 지방이 바로 코코아 버터 cocoa butter다. 나머지가 코코아 가루cocoa powder로 흔히 코코아라고 부 른다. 코코아에는 여전히 지방이 남아 있어 함량이 14% 수준이다. 오 늘날 카카오 콩과 코코아의 연간 생산량은 각각 580만 톤과 370만 톤 에 이른다(2020년).
씨의 배젖 세포에 저장된 중성지방인 코코아 버터에도 초콜릿의 향 과 맛을 내는 성분이 일부 녹아 있지만 대부분은 코코아에 들어 있다. 화이트 초콜릿이 초콜릿 느낌이 날 뿐인 것도 코코아매스 없이 코코아 버터로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 한편 코코아에 많이 들어 있는 플라보노이드flavonoid는 식물이 만드 는 이차대사산물로, 페놀 고리(C6) 두 개와 헤테로사이클릭(탄소 원 자 외에 다른 원자가 포함된 고리) (C3) 하나로 이뤄진 기본 골격(C6- C3-C6)을 지닌 구조다. 플라보노이드는 분자에 따라 식물체에서 여러 기능을 하는데, 특히 스트레스 대응에 관여하는 종류가 많다. 즉 해충 이나 병원체에 대해 독성을 지니고 있거나 세포에 해로운 자유 라디컬 이나 자외선을 흡수한다. 어떤 종류는 유익한 공생 생물이나 수분 동물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카카오 씨에 많이 들어 있는 프로안토시아니딘proanthocyanidin은 플라보 노이드 여러 개가 결합된 고분자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심혈관계나 신 경계 건강에 좋고 암 화학요법의 부작용을 줄이는 작용을 한다는 보고 도 있다. 코코아 함량이 높은 다크초콜릿이 건강에 좋은 이유다. 게
- 테오브로민은 카페인에 비해 각성 효과가 약하지만 혈관 확장 효과가 있고 이뇨 작용도 한다. 과량 복용하면 심박수 증가, 두통, 속쓰림 같은 부작용이 있지만 초콜릿에서 섭취하는 양 정도로는 별문제가 없다. 그 런데 동물, 특히 개와 고양이가 먹게 되면 큰일이 날 수 있다. 사람과는 달리 이들은 테오브로민을 제대로 대사하지 못한다. 단맛을 못느끼는 고양이가 초콜릿을 먹을 일은 거의 없지만 개는 그럴 위험성이 있어 조 심해야 한다. 소형견은 다크초콜릿을 5g만 먹어도 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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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of the day 2024. 3. 15.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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