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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혁명

사회 2024. 3. 14. 07:03

- 우리 한가운데서 망령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그 망령을 똑똑히 바라 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오래된 유령이 아니다. 컴퓨터의 지휘 아래 최대의 물질적 생산과 소비에 온 힘을 쏟아 붓는 완전 기계화 사회라는 새로운 망령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과정 속에서 인간 자신은 기계의 한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잘 먹고, 즐겁 게 대접받지만, 수동적이고, 활기 없고, 감정조차 거의 없는 존재로 말이 다. 새로운 사회가 승리를 거두면서 개인주의와 사생활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타인을 향한 감정은 심리적 조건화나 다른 장치, 혹은 약물을 통 해 조작될 것이고, 이것이 또한 새로운 종류의 자기성찰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정보 화사회 technetronic society에서는 매력과 흡인력을 갖춘 개인이 최신의 통신수단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면 쉽게 수많은 사람의 감정을 조작하고, 이 성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조직화하지 않은 수백만 시민의 개별적 지 지가 한데 모이는 방향으로 추세가 흐를 듯하다." 조지 오웰 George Orwell 의 《1984 Nineteen Eighty-Four》와 올더스 헉슬리 Aldous Leonard Huxley의 《멋진 신 세계 Brave New World》 같은 소설에서 이런 새로운 형태의 사회상을 예측한 바 있다.
어쩌면 지금 가장 불길한 것은 우리가 시스템의 통제권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컴퓨터가 계산을 통해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면 우리는 그저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길 뿐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목적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도 하려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도 않는다. 우리는 핵무기로 멸종의 위협 을 받는 동시에, 책임지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위치에서 배제되어 수동적 인 존재가 되는 바람에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갈 위협도 받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자연을 두고 승리의 정점에 서 있던 인간이 어 쩌다 자기 창조물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할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됐을까?
과학적 진리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우연히 발견하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기술과 물질 소비만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 및 생명과의 교감을 상실했다. 종교적 신념 그리고 그와 얽힌 인본주의적 가치 를 잃어버린 인간은 기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에만 집중해서 깊은 정서 적 경험을 하고, 거기에 따라오는 기쁨과 슬픔을 느낄 능력을 상실해버 렸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가 워낙 막강해지다 보니 기계가 자체적으로 자신의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고, 이제는 기계가 인간의 생각마저 결정하 게 됐다.
현재 우리의 시스템에서 가장 심각한 증상 중 하나는 우리의 경제가 무기 생산(거기에 더해서 전체 방위 시설의 유지)과 최대 소비의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자신을 물리적으로 파괴 하겠다고 위협하는 제품을 생산하고, 개개인을 완전히 수동적인 소비자 로 전락시켜 소리 없이 죽게 만들고, 개개인이 무력하다고 느끼게 하는 관료주의를 창조한 조건 아래서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해결 불가능한 비극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일까? 경제가 건강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병자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일 까? 아니면 물질 자원, 발명품, 컴퓨터가 인간의 목적에 복무하게 만들 수 있 을까? 제대로 기능하는 강력한 조직을 갖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반드시 수동 적이고, 의존적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 희망이란 존재의 상태다. 준비가 되어 있는 내면의 상태, 열정적이지 만 아직 쓰이지 않은 능동성 activeness*이다. '활동activity' 이라는 개념은 현 대 산업사회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인간의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우 리 문화 전반은 활동에 맞춰져 있다. 활동은 바쁘다는 busy 의미이며, 바 쁘다는 것은 비지니스의 바쁨busyness(비즈니스business에 필요한 비지니 스busyness)을 의미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너무 '활동적이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멈춰 있을 수가 없다. 심지어 사람들은 소위 여가도 또 다른 형태의 활동으로 바꾸어놓는다. 돈 버는 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드라이브를 즐기고, 골프를 치고, 무의미한 잡담을 나눈다. 사람들 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순간이다. 이런 종류 의 행위를 활동이라 부를지 여부는 용어 선택의 문제다. 진짜 문제는 자 기가 대단히 활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이 그런 '비 지니스' 상태에 있는데도 대단히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다는 점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잡담이든, 영화 관람이든, 여행이든, 소 비에서 오는 다른 형태의 짜릿한 쾌감이든 끊임없이 외부에서 자신을 자극해줄 것이 필요하다. 심지어 섹스 파트너로 삼을 새로운 남자나 여 자를 찾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을 '자극하고', 흥분시키고, 유혹해줄 대 상이 필요하다. 이들은 언제나 달리기만 할 뿐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이들은 항상 무언가에 빠져들 뿐, 거기서 결코 깨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 직면했을 때 생겨날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 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을 뿐인데도 자신을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이 라 상상한다.
- 양적 증가가 과연 좋은 것인지, 혹은 이 양적 증가가 대체 무엇에 좋은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더는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 는 사회에서는 이런 부분을 간과하는 모습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양 이라는 한 측면이 나머지 모든 측면의 목을 조르기 때문이다. '많을수록 좋다'라는 이 원칙이 지배하면 시스템 전체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것 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모든 노력이 그저 무언가를 더 많이 하 는 쪽에 집중된다면 삶의 질은 그 중요성을 모두 상실하고, 한때는 수단 에 불과했던 활동이 목적이 되어버린다.
- 마르크스는 소비가 증가했을 때 생기는 영향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경제학 및 철학 원고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1844)에 나오는 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쓸모 있는 것을 너무 많이 만들어내면 쓸모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지는 결과를 낳는다."
"기계는 나약한 인간을 기계로 바꾸기 위해 인간의 나약함에 맞춰 조정되어 있다."
“(사유재산의 시스템 안에서)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필요를 불러일으켜 그를 새로운 제물로 삼고, 그에게 새로운 의존 성을 갖게 하고, 그를 새로운 종류의 쾌락으로 유혹해서 경제적으 로 망쳐놓을 궁리를 하게 된다. 따라서 사물이 많아짐에 따라 인간이 종속되는 낯선 존재의 영역도 함께 늘어난다. 새로 나오는 모든 생산품은 사기와 약탈의 잠재력을 새로이 갖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점점 가난해진다."
- 논리적 사고가 생명에 관한 관심을 지침으로 삼지 않고, 생명의 전체 적 과정에 대해 구체적인 부분과 모순되는 부분까지 모두 탐구하지 않 고 그저 논리만을 추구해서는 합리적일 수 없다. 반면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까지 더해지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 했다. "마음은 이성 reason이 알지 못하는 이유 reasons가 있다." 감정이 있는 삶에서 합리성이란 사람의 정신 구조를 지지하고 도와 조화로운 균형을 유지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 성장을 돕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합리 적인 사랑이란 사람의 의존성을 강화하여 불안과 적대감을 키우는 사랑 이고, 합리적인 사랑은 사람과 사람을 긴밀하게 이어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독립성과 진실성을 보존해주는 사랑을 말한다.
이성은 합리적인 사고와 감정의 조합에서 흘러나온다. 이 두 가지 기 능이 서로 분리되면 사고는 조현병 같은 지적 활동으로 악화하고 감정 은 신경증적으로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열정으로 악화한다.
- 사고와 감정의 분리는 가벼운 수준의 만성 조현병으로 이어진다. 기술정보화 시대의 새로운 인간들이 앓기 시작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인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런 문제와 연관된 느낌에 대해서는 언 급하지 않는 것이 유행이 됐다. 마치 과학적 객관성을 위해서는 인간에 관한 사고나 이론에서 인간에 대한 모든 감정적 고려를 배제해야 하는 것처럼 가정한다
- 여러 세기 동안 확실성을 보장해준 것은 신이라는 개념이었다. 전지 전능한 신은 세상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의심할 여지가 없 는 행동의 원칙도 알려주었다. 교회는 이런 원칙을 구체적으로 '해석'했 고, 교회의 규칙을 따름으로써 교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안전하게 확보한 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신은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과학적 접근이 시작되고 종교적 확실성이 침식되면서 인간은 새로 운 확실성을 찾아 나서야 했다. 처음에는 과학이 확실성의 새로운 근거 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세기의 합리적 인간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삶이 인간적인 부분을 모두 상실하고 점점 복잡해지고, 개인은 점점 무기력과 고립감을 느끼게 되면서 과학 지향적인 인간은 이제 합 리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기를 멈추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할 용기, 삶 에 대한 온전한 지적, 감정적 책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릴 용기도 잃어 버렸다. 그는 합리적인 생각으로 얻을 수 있는 '불확실한 확실성 Certainty'을 '절대적 확실성 absolute certainty', 예측 가능성을 바탕으로 하는 '과 학적 확실성이라 주장하는 것과 바꾸고 싶어 했다.
이런 확실성을 보장하는 존재는 인간의 믿지 못할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라 예측을 가능하게 하여 확실성을 보증해주는 컴퓨터다. 대기업의 사업 계획을 예로 들어보자. 컴퓨터의 도움으로 기업은 여러 해 앞서서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있다(인간의 정신과 취향을 조작하는 것도 포함). 경 영인은 더는 개인적 판단에 의존할 필요 없이 컴퓨터가 말해주는 진실 을 따르면 된다. 경영인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그 의사결정 과정은 불신할 필요가 없다. 그 경영인은 컴퓨터의 예언을 자 유롭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독실 한 기독교도가 신의 의지에 반해서 행동할 자유가 없듯이 그 역시 사실 상 컴퓨터의 예언을 거부할 자유가 거의 없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다. 신, 혹은 컴퓨터가 제시한 해법보다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확실성에 대한 이런 필요성 때문에 컴퓨터화된 계획 방식의 효율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라 할 만한 것이 필요해진다. 그럼 경영인은 의심으 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조직에 고용된 사람들도 자유로워진다. 컴퓨터 에 기반한 계획 수립이 신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의사결정 과정에 인간의 판단이나 감정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 우리 시대는 신의 대체품을 찾아냈다. 인격이 배제된 계산이다. 이 새로운 신은 모든 인간이 희생해야 할 우상이 되었다. 신성함과 확실성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계산 가능성 calculability, 개연성 probability, 사실성 Factuality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우리가 컴 퓨터에 모든 사실을 제공해주면 컴퓨터가 미래의 행동에 대해 가능한 최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원칙이 뭐가 잘못일까?
사실이란 무엇일까? 사실 그 자체는 정확하고 개인적, 정치적 편견으 로 왜곡되지 않았더라도 그 안에 아무런 의미도 담기지 않을 수가 없다.
- 사실이라도 선택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의 주의를 정말 중요한 사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거나 사람의 생각을 흩어놓고 파 편화시켜서 더 많은 '정보'를 받고도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만 드는 것이다. 사실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평가와 선택을 암시한다. 사실 들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런 점을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사실에 대해 중요한 말을 했다.
그는 이성의 기능 The Function of Reason》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든 권위의 밑바탕은 생각보다 사실이 우선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사실과 생각의 이런 대비가 잘못 인식될 수 있다. 사실을 경험할 때 생각 이 그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전의 사실은 부분적으로는 그 인식에 수반되는 생각의 사고력을 통해 사실이 된다."
- 모든 위대한 예술은 본질적으로 자기와 공존하는 사회와 충돌한다. 예술은 진실이 해당 사회의 생존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든, 방해하는 것 이든 따지지 않고 실존에 대한 진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혁명적이다. 인간의 현실을 건드리고, 인간 사회의 다양한 과도 기적 형태의 현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반동분자인 예술가는 위대한 예술가이기만 하다면 자기네 사회의 특정한 형태만을 반영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socialist realism' 예술가보다 더 혁명적이다. 전체 역사에서 과거와 현재의 권력자들이 예술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것이 참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예술이 없다면 인간은 영적으로 굶주려 어쩌면 사회의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술 가가 자신의 독특한 형식과 완벽함 때문에 '외부인'에 대항했고, 자극을 주고 생명을 부여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예술을 정치적 용어로 번역하지 않으니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외로도 예술은 보통 교육을 받거 나 정치적으로 덜 위험한 사회계층만 누리는 것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예술가는 궁정 어릿광대였다. 이들이 진실을 말하도록 허락받은 이유는 특별하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제약이 있는 예술 형태로 진실을 표현했 기 때문이다.
- 에고 대 자아, 소유 대 존재에 대한 강조가 커지면서 우리 언어의 발달에서도 화려한 표현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가고 있다. "나 잠을 잘 못자 I cannot sleep" 대신 "나 불면증이 있어 I have insomnia", "나는 슬프고 혼란스러워 I feel sad, confused" 대신 "나 문 제를 갖고 있어 I have a problem", "내 아내와 나는 서로를 사랑해My wife and I love each other" 대신 "나는 행복한(때로는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갖고 있 어 I have a happy(successful) marriage"라고 말한다." 존재 과정에 해당했던 모 든 범주가 소유의 범주로 바뀌었다. 정적이며 움직이지 않는 에고는 대 상을 소유한다는 측면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지만, 자아는 참여하는 과 정을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현대인은 자동차, 집, 일자리, '아이', 결 혼, 문제, 골칫거리, 만족 등 모든 것을 갖고 있다 have.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심리분석가도 갖고 있다I have my psychoanalyst'. 현대인은 '소유'할
뿐 '존재하지 않는다.
- 이제 2차 산업혁명에서 발달해 나온 산업사회를 인간화할 가능성을 살피려 한다면 경제적, 심리적 이유로 우리 사회를 완전히 붕괴시키지 않고는 제거할 수 없는 제도나 방법을 고려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부, 기업, 대학, 병원 등에서 발달한 중앙집중 식 대규모 사업. 이런 중앙집중화 과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머지않 아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주요 활동이 대규모로 진행될 것이다.
(2) 중앙집중화로 각각의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계획.
(3) 중요한 이론적, 실용적 제어 원리이며, 컴퓨터를 자동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고 있는 사이버네이션, 즉 사이버네틱스와 자동화.
하지만 이 세 가지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시스템에서 등 장하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바로 인간 시스템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 만 인간의 본성이 유연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제한된 숫자의 잠 재적 구조만 허용하기 때문에 일부 확인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게 된 다는 뜻이다. 기술사회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대안은 인간이 수동적이 고, 지루하고, 감정이 없고, 일반적으로 지성에만 의지한다면 불안, 우울, 인격상실, 생명에 대한 무관심, 폭력 같은 병적인 증상들을 키울 것이다. 실제로 로버트 데이비스 Robert H. Davis는 한 날카로운 논문에서 이렇게 적 었다. "컴퓨터로 자동 제어되는 사이버네이션 세계가 정신 건강에 미칠 장기적 영향을 생각하면 심란해진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 관료들은 자신도 관료주의 기계의 일부라 느끼고, 대부분 책임을 지 려 하지 않는다. 즉 비판받을 수도 있는 결정을 자신이 내리려 하지 않는 다. 그는 규칙에서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 아니면 자기가 결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다른 관료들에게 넘겨버린다. 그럼 그 관료도 똑같이 한다. 관료주의에 찌든 기관과 상대해본 사람은 이렇게 이 관료에서 저 관료로 넘어가고, 또 넘어가다가 아무도 자기 말 을 들어주지 않고 출발점으로 다시 왔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기 말을 들어줄 때도 보면 상냥한 경우도 있고,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 만 이들의 태도를 보면 거의 항상 무기력, 무책임,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 을 향한 우월감 같은 것이 뒤섞여 있다. 우리의 관료주의적 방식은 개인 에게 관료주의적 기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혁신하지도, 조직하지도 못할 거라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 결과 혁신은 마비되고, 깊은 무력감이 생겨난다.
- 인간이 생산과 조직화의 과정에서 수동적이 면 여가 시간에도 수동적으로 변한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다하여 참여하지 않고 물러난다면 인생의 다른 모든 측면에서도 수동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자기를 돌봐주는 사람에게 의존하게 될 것 이다. 이미 오늘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인간은 예전보다 여가 시간이 늘어났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여가 시간에 도 소외된 관료주의 방법으로 강제된 이런 수동성을 보인다. 여가 시간 은 대부분 관람이나 소비의 형태로 이루어질 뿐, 능동성의 발현인 경우 가 드물다.
- 19세기에 글을 썼던 초기 정치경제학자들도 점점 생산을 늘려가는 경 제적 과정은 목표를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님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일단 물질적인 삶이 적당한 수준까지 올라오면 생산에 투입하던 에너지를 사회의 진정 인간적인 발전으로 전 용할 것을 그들도 예상하고, 또 바랐다. 더 많은 물질 재화의 생산을 최 종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그들에게는 낯선 개념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 은 이렇게 적었다.
혼자 있다는 의미로서 고독은 어느 명상에서나 사람에게나 필수적 인 부분이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 속에서 맞이하는 고 독은 생각과 열망의 요람이며, 이것은 개인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사회도 이것이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활동을 자연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만족감도 찾아 들지 않는다. 땅은 한 뼘도 남김없이 모두 인간의 식량을 재배할 경작 지로 변하고, 꽃을 피우는 불모지나 자연적인 목초지도 모두 밭으로 일구어버리고, 가축으로 길들일 수 없는 네발짐승과 새들은 모두 식 량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라이벌로 취급해서 몰살하고, 모든 생울타 리와 불필요한 나무는 뿌리째 뽑아내고, 야생의 관목이나 들꽃은 농 업 생산력 개선이라는 명목 아래 잡초 취급을 하며 모두 근절하여 그 들이 자랄 땅마저 남아나지 않는다면 무슨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
- 더 나아지고, 행복해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더 많은 인구를 감당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부와 인구의 무제한적 증가로 사라질 것이 생기고, 또 거기에 빚을 지고 있던 지구의 쾌적함도 상당 부분 함께 잃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라면 나는 후대를 생각해서라도 필 요 때문에 강요당하기 전에 정체하는 것에서 스스로 만족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본과 인구의 정체가 인간의 발전도 정체한다는 의미가 아님은 굳 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온갖 종류의 정신적 문화와 도덕적, 사 회적 진보에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기회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삶의 기술 Art of Living을 정진할 여지도 커지고, 인간의 정신이 성공의 기술 에 더는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삶의 기술이 발전할 가능성도 더 높아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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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4

Quote of the day 2024. 3. 14.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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