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채권 금리 = 안전자산 금리 + 크레디트 스프레드 2. 채권 금리 = 실질금리 + 인플레이션 공식 1은 채권 금리는 무위험자산 또는 안전자산 금리에서, 채권 발행 기업의 위험보상정도를 더한 것을 의미합니다. 공식 2에 따르면 채권 금 리는 명목금리로서, 실질금리와 인플레이션의 합입니다. 특히 인플레이션 의 움직임에 따라 채권 금리가 결정되는 점, 꼭 기억해두십시오.
- "듀레이션 베팅은 그야말로 채권 금리가 내려갈 것이라고 확신이 들 때, 금리에 대한 채권가격 변동률, 즉 채권의 베타를 크게 해서 수익을 얻는 전략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간단한 전략이지요.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금리 방향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위의 예에서처럼 중앙은행이 확실하게 통화정책 방향을 트는 상황이 벌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실제 일별 금리 방향성에 대처해야 하는 저희 같은 기관투자자들은 듀레이션 베팅 을 잘하지 않습니다.
- "크레디트 스프레드 전략은 전체적인 채권 금리의 방향성과는 관계없이 발행사의 실적 개선, 펀더멘털 개선, 그리고 완화적인 통화정책 등으로 크 레디트 스프레드 축소에 베팅하는 전략입니다. 안전자산 금리 부분을 제거 함으로써 듀레이션 리스크를 없앴으나, 안전자산 선호 현상 및 개별 회사, 글로벌 경제에 부정적인 뉴스가 나오면 손실을 볼 수 있는 전략입니다. 그러나 투자등급의 크레디트 스프레드 변동성은 안전자산 금리의 그것 보다 훨씬 작습니다. 따라서 안전자산 포지션을 제거함으로써 금리 변동 성을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즉 시장가격 하락 위험을 어느 정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관투자자들이 경기확장기, 즉 금리 상승기와 크레디트 스프레드 축소가 동시에 나타나는 시기에, 이 크레디트 스프레드 축소 전략을 사용합니다."
- 1. 원래 동일한 발행자를 가정하였을 때, 만기가 긴 채권이 짧은 채권보다 원금을 잃을 확률이 더 크므로 높은 수익률을 요구하게 되며, 이에 따라 금리 커브는 우상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2. 그러나 인플레이션 등으로 중앙은행이 긴축정책을 펼치게 되면, 초단기인 기준금리 를 인상하게 되면서 만기가 짧은 순으로 순차적으로 금리가 상승하게 됩니다. 이 경 우장·단기 금리 차이가 좁혀지면서 역전되기도 합니다. 3. 장·단기 금리 차 전략은 개별 채권의 금리 하락을 예측한 듀레이션 베팅이나, 유사 만기의 안전자산과 크레디트 채권 간 차이 축소에 베팅하는 크레디트 스프레드 전략 과 달리, 동일한 발행사의 장·단기 채권 금리 차이 방향에 베팅하는 전략입니다. 4. 일반적으로 이 전략은 무위험 자산군인 정부채를 가지고 구성합니다. 5. 금리 차 축소일 경우, 단기 채권 매도, 장기 채권 매수이며, 확대일 경우 단기 채권 매수, 장기 채권 매도 포지션을 구축합니다. 6. 포지션을 감안한 두 채권의 가중평균 듀레이션은 0으로 합니다(개별채권 방향성 제거). 7.6에 의하여 각 채권별 투자금액을 감안한 개별 델타가 서로 같게 되며, 이 개별 델타 자체가 본 전략의 델타가 됩니다. 8. 매입 시, 그리고 매도(또는 평가) 시의 금리 커브 차이를 7의 델타에 곱하면 손익이 계산됩니다.
- "수요견인 인플레이션과 관련하여 수업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 미 연준의 통화정책 목표는 고용 극대화, 물가 안정, 그리고 경제 성장이다. 2. 물가의 경우 Core PCE 2% 달성을 목표로 한다. 3. 그러나 발표 시기를 감안할 때, CPI 지표 발표일에 채권시장이 더 민감하다. 4. 최근 연준은 Core CPI뿐만 아니라 Core Service(주거비 제외) 지표를 중시하면서, 채 권시장의 관심을 끌고 있다. 5. 인플레이션이 상승하면 '채권 금리 실질금리 + 인플레이션' 공식에 따라 당연히 채권 금리가 상승한다.
- 신규 실업급여 청구 건수는 매주 목요일 오전에 발표 (한국시각 밤 9시 30분, summer time 기준) 하는 적시성 높은 지표이며, 채권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큽니다. 최근 18~20만건 수준은 경기둔화 기준인 37.5만 건 대비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이를 감안할 때 연준은 현재 당면과제인 인플레이션 2% 이하로 낮추기 위해서는 고용시장을 둔화시켜 야 하며, 더욱 강력한 긴축 통화정책을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 1. ISM 제조업 지표는 채권 금리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며, 시의적절한 경기순환을 보여주는 민간기관 제공 대표적인 지표이다. 2. ISM 서비스업은, 제조업 지표 대비 덜 중요한 것으로 인식. 그 이유는 장기적인 추이 로 경기 상황을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임. 그러나 미국 GDP의 70%를 차지하는 소비 비중을 감안할 때, 예상치를 크게 벗어났을 때와 50 미만으로 떨어졌을 때의 채권시 장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3. 두 지표 모두 50을 기준으로 경기확장 또는 둔화를 판단한다. 4. 종합지표뿐만 아니라 세부지표도 꼭 확인해야 한다. 매월 종합지표에 영향을 끼친 주 요 요인, 그리고 종합지표 산출대상은 아니지만가 격지표(Price paid) 지표 등은 향후 주요 지표인 고용, 물가 등의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
- ETF는 운용사가 만든 상품으로 기초자산들이 신탁기관에 일괄 이전, 관리받게 됩니다. 즉 운용사의 신용상태와 관계없이 신탁된 기초 자산의 가치 변동에 따라 동 상품의 가격이 결정됩니더. 반면에 ETN은 증 권사에서 발행하는 일종의 만기가 있는 노트입니더. 즉 이것의 원금 및 수 익금의 지급 주체는 발행주체인 증권사입니다. 이것의 수익률은 발행 시 정한 기초자산지수의 수익률과 동일하며, 일별 수익률과 함께 증권사의 신용상태에 따라 동상품의 가격이 변하게 됩니다.
- 2013년 워런 버핏은 자신의 유서에 '내가 죽으면 전재산의 90%는 S&P500 을 추종하는 인덱스펀드에, 10%는 채권에 투자하라'라고 적었다고 한다. S&P500을 추종하는 인덱스펀드는 바로 ETF가 아닌가! 투자의 귀재마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니 ETF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워런 버핏의 유언은 다양한 종목에 전략적으로 투자하지 말고 S&P500을 추종하는 ETF에 편안하게 돈을 넣어두라 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종목 플레이를 하는 것보다 패시브 전략을 활용하는 ETF에 투자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말이다.
- ETF의 장점 * 다양한 상품에 대한 접근성 * 실시간 투명한 정보제공 *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
- ETF의 단점 * 원하는 가격에 거래가 힘든 유동성 문제 * 극단적 수요와 공급 불일치로 발생하는 괴리율 * 시차 때문에 발생하는 괴리율
- 미국 3대 대표지수 중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까?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지금 시점에서 필자의 선호도는 나스닥100> S&P500>다우존스30 순이다. 물론 투자자의 성향에 따라 지수의 특 징을 고려해 미국 3대 대표지수 추종 ETF를 골라야 하겠지만, 앞으로 의 수익성과 미국 증시의 대표성을 가진 상품에 투자한다는 의미에서 나스닥100 ETF와 S&P500 ETF를 선호한다. 2024년 상반기까지만 봤을 때 미국 증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 치는 주체는 중앙은행이다. 앞으로 금리 인하기가 시작된다면 주체는 기업과 정부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금리 인하 시기와 강도가 정해질 때까지 중앙은행의 입에 모두의 시선이 몰리겠지만 말이다. 그 러면 전반적으로 활기를 이어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 이는 미국은 이제 장기적인 추세 상승 곡선에 올라탔다는 의미다. '이미 반등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미 전 고점을 뚫었기 때문에' '이미 전 고점에 거의 다 왔기 때문에' 등과 같은 이유는 S&P500 ETF와 나 스닥100 ETF에 투자하지 않을 이유가 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미국 증시는 언제나 전 고점을 돌파하며 상승을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나스닥100 ETF를 가장 선호하는 이유는 '성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미국의 자본주의 특성은 기업들의 성 장성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금리가 낮아지는 경제 상황에서는 위험 선 호도가 올라간다. 변동성이 높더라도 더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는 투자 자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증시 주도권의 바통이 기업 과 정부로 넘어간다면 나스닥100 ETF를 선호할 이유가 더욱더 명확 해진다.
- 그렇다면 돈이 한정적일 때 어떤 ETF를 가장 먼저 사야 할까? 물론 때에 따라 매크로 환경이 변화하며 달라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 장 기적인 관점에서 어떤 나라를 대표하는 ETF에 투자해야 하는지 묻 는다면 필자는 나스닥100 ETF와 S&P500 ETF, 니프티50 ETF라고 말하고 싶다. 순위를 매긴다면 1순위는 미국, 2순위는 인도, 3순위는 일본, 4순위 중국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미국은 적극 매수 Strong Buy 인도와 일본은 매수Buy, 중국은 다소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에 지금 당장은 투자를 추천하지 않는다.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 리스크 측면에서 보자면 미국 빅테크 ETF <미국 반도체 ETF < 일본과 한국 반도체 ETF <메타버스 ETF 순이다. 필자는 리스크가 낮은 순서대로 선호한다. 그 이유는 아직 미국 대선 결과가 나오지 않 았기 때문인데, 미국 빅테크들은 대선 결과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AI 기술은 어떠한 국가도 빼앗기기 싫어하는 혁신 기술이며,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미국 반도체 산업도 반드시 지켜줄 것이다. 일본과 한국반도체의 경우 반도체 사이클 회복으로 장기적인 성장 국면을 맞이했 다. 따라서 AI와 관련된 새로운 반도체의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 전망 된다. 다만 트럼프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일본과 한국 반도체는 단 기적으로 흔들릴 수 있으며, 미-중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여파에 영향 을 받을 수 있다. 메타버스 세상이 오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나 상 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높다. - 선호도를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어려 운 점이 있지만 전기차, 자율주행, 2차전지 ETF는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수익이 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반대로 반향을 크 게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변동성은 크지만 높은 수익률을 목표로 한다면 포트폴리오에 담아볼 수 있는 ETF들이다. 그다음 성장성이 높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비만 치료제 산업인데, FDA 임상시험 결과와 승인 결과에 따라 크게 흔들릴 수도 있다. 이 역시 '리스크를 지더라도 수익률을 노리겠어'라고 생각하는 투자 자들은 고려해 볼 만한 ETF다. 럭셔리와 펫 ETF는 정치적·외교적 리스크, 매크로 리스크와 상관 없이 세대교체와 소비 패턴의 변화로 산업 자체가 커질 가능성이 크므로 조용하면서도 천천히 성장할 산업에 투자하고 싶다면 생각해 볼 만한 혁신 성장 테마형 ETF다.
- 지금 상황에는 채권보다는 주식 비중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4년 상반기 기준). 따라서 채권 ETF 전략을 짜기 위해 엄청난 노력 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기준금리 인하 시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 일, 매시간 바뀌지만 그럼에도 인하를 앞두고 있는 동결기인 것은 맞 다. 그러므로 이를 누릴 수 있는 채권 ETF로는 채권가격을 추종하는 미 국 장기채 ETF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준금리 인하 시기에 대한 불안 감이 불편하다면 매월 배당금을 주는 미국 장기채 ETF를 생각하는 것 도 방법이다. 단 3~5년 장기적으로 보유해야 하는 것이 아닌, 시황에 따라 사고팔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이번 파트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ETF 포트폴리오에 안정성을 더하기 위해 현금성 자산과 가장 가까운 초단기 금리 추종형 채권 ETF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웬만한 파킹 통장보다 이자율이 좋아 퇴직연금 계좌에서 안정적인 자산 보유 비율 때문에 현금으로 가지고 있던 부분을 투자할 수도 있다.
- 커버트콜 전략이란? 커버드콜 전략이란, 주식을 매수하면서 동시에 콜옵션을 매도하는 것 을 말한다. 간단하게 말해 미래의 불확실한 상승분을 포기하고, 현재 의 확실한 수익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커버드콜 전략을 사용하는 ETF의 월분배금 재원은 주식의 배당금 혹은 채권 이자 수익+ '옵션 프리 미엄'이다. 그래서 지수에 포함된 기업들이 급작스러운 이유를 들며 배당금을 깎더라도 옵션 프리미엄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있기 때문에 분배금을 지급할 수 있다. 물론 커버드콜 전략을 사용하는 ETF는 주가 상승 혹은 채권가격 상승으로 인한 수익이 제한된다. 미래 수익을 당겨 지금 당장의 현금 이익으로 바꾸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다만 옵션 매도 비중을 100% 가 아닌 40%, 15%, 10% 내외까지 줄일수록 상승을 제한하고 하방을 막아주는 정도가 줄어든다. 지수의 상승을 어느 정도 따라가면서 옵션 프리미엄으로 배당률을 높이는 전략이다. - 필자는 커버드콜 전략 월배당 ETF > 국내 리츠 ETF > 미국 리츠 ETF >엔화 ETF > 원자재 ETF 순으로 선호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 기하면 커버드콜 전략을 사용하는 월배당 ETF 중 옵션 매도 비중을 40% 이하로만 사용해 지수의 상승도 함께 누릴 수 있는 ETF를 가장 선호한다. 계좌에 담아보면 배당금을 받는 재미와 투자금이 늘어나는 재미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다. 국내 리츠 ETF의 경우 어두운 터널을 지나 조금씩 빛이 보이고 있다. 배당률도 미국 리츠 ETF보다 높기 때문에 배당 ETF를 포트폴 리오에 넣기 위한 일환으로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하다. 미국 리츠 ETF 의 경우 각 리츠 산업의 성장성을 고려한 뒤 투자하기 바란다. 그다음 엔화 ETF는 당분간 일본 정부의 의도대로 엔저 상황이 유지될 것으로 보이므로 지금 당장 포트폴리오에 담기에는 마이너스 리스크가 있다. 하지만 단기 트레이딩 관점에서는 접근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원자재 ETF에는 다양한 리스크가 산재되어 있다. 따 라서 원유 가격 폭등이 예상되거나 특정 원자재 가격의 변화가 예상 되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 포트폴리오에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좋다. (안전자산으로 금 ETF를 담고 싶다면 그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에 괜찮다.) 그 대신 새로운 혁신 소재 원자재들을 캐고, 제련하고, 생산하는 업체 들을 담고 있는 ETF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 영국은 강력한 라이벌 스위스의 등장으로 인해 무려 300년 동안 고수 해온 세계 황금의 집산지라는 지위를 잃고, 급기야 단순한 황금 거래 중 심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런던은 금 가격을 정하는 데 있어서의 우위만큼은 결코 잃지 않았다. 영국은 스위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계적 추세를 간파하고 있 었다. 장기적인 달러화 유동성 과잉 상태로 인해 금시장에서 거액의 자금 을 장악한 금융기관과 투기꾼의 자금력이 이미 실물 금의 최종 수요자보 다 훨씬 막강해졌으므로 금융 자본의 투자 수요를 꽉 틀어쥐는 것이 금의 유통망을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실물 금을 운반하는 '운반공이 되느니 차라리 세계 금 가격을 정하는 '가격 책정자'가 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스위스, 자네는 육체노동을 하게. 나는 사장이 되겠네"라는 말이 된다. 런던과 스위스의 이런 조합을 '전점후장식 시스템 에 비유하면 런던은 '점포', 스위스는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런던은 유럽 금융의 중심지라는 지위를 이용해 금값 책정 중심지로 일약 신분 상승을 했다. 반면 운송, 보관, 검사, 정제 등 힘든 일은 모조리 스위스에 '하청'을 맡겼다. 또 더 많은 황금 투자자를 확보하고 이들 투자자를 위한 맞춤형 상품 제 조와 공급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연히 금시장의 거래 장부를 자기 손에 꼭 틀어쥔 채 현물 인수, 결제 등 자질구레한 일은 모두 스위스가 맡아 처 리하도록 했다. 한마디로 스위스는 '마님'의 신분을 꿈꿨으나 결국 '무수리' 팔자를 면 치 못했다. - 루스벨트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실시한 금 보유 금지령은 놀랍게도 40년 넘게 유지됐다. 더 믿기 어려운 것은 이 법안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유효했다는 사실이다. 세계 금 보유고의 3분의 2를 독점한 나라, 한 때 세계 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나라인 미국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정당한 이유 없이 국민의 금 보유를 금지한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 까? 바로 금이 미국인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장기 '격리' 시킨 것이다. 사실 미국은 오래전부터 '금을 끼고 스스로 독립해 달러화로 천하를 제패하기 위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 '장기 격리' 정책은 확실히 효과를 거두었다. 1975년에 미국 정부가 국 민의 금 보유를 합법화한 후 우려했던 대규모의 금사재기 사태는 발생하 지 않았다. 일반 서민들이 금에 대한 좋은 기억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 이다. 기껏해야 200년밖에 안 되는 미국의 역사는 중국과 달리 매우 짧 다. 중국인들은 수천 년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경험과 교훈을 통해 "난세 에는 금을 소장해야 한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에 반해 미국 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국의 흥망성쇠 과정을 경험하지 못했고, 미국의 몰락 내지 역사의 윤회는 있 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 해 미국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성극이쇠', '물극필반'의 이치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상응하는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미국 제도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제도라고 믿는다. 따라서 미국이 세계 패권을 영원히 장 악하는 한, 달러화가 인류 화폐의 궁극적인 형태가 될 것이므로 금의 가 치를 운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미국식 사고방식이다. 1975년에 미국은 금시장을 개방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금 투자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수익을 목적으로 금에 투자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 상한 눈길로 바라봤다. 상품거래소에서도 금 선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은 거의 없었다. 금 트레이더는 당시 가장 인기 없는 비주류 직업이었다. - 미국은 앞으로도 달러화 환율 문제가 중대 위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혹 은 다른 국가들이 달러화를 배제하고 다른 방안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화 폐, 경제, 시장, 언론과 지역 분쟁 등의 복합적인 요소들을 모두 이용해 '콤비네이션 블로'를 꾸준히 선보일 것이다. 달러화를 남발하면서 그 달 러화를 빼앗기 위해 서로 싸우도록 하는 것은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전 략이라고 할 수 있다. 달러화 위상이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바에야 다른 화폐 가치도 바닥으 로 떨어뜨려야 한다. 또 신흥 국가들이 달러화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 이면 선수를 쳐서 이들 국가의 경제를 혼란에 빠뜨려야 한다. 이것이 미 국의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 2012년 말과 2013년 초 미국의 QE3 출범으로 촉발된 통화위기는 엔 화의 급격한 평가절하와 유로화의 마이너스 금리를 등에 업고 크게 확대 됐다. 브릭스 5개국의 달러화 배제 움직임은 달러화의 혼란 국면을 더욱 가중시켰다. 게다가 독일의 보유 금 회수 사태, 영국의 눈 가리고 아웅 식 의 어설픈 자작극에 이어 사이프러스 은행 예금과 관련한 아수라장까지 벌어지면서 세계 모든 화폐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고조됐고, 보이지 않 는 곳에서 부자들의 금 사재기 열풍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 기울어진 대세를 만회하고 무너져가는 달러화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 우는 유일한 방법은 금 가격을 폭락시키는 '백색 테러' 감행이었다. 구체 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선물시장에서 벼락같은 기세로 어마어 마한 매도 물량을 쏟아내 매수 세력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어놓는다. 이 경우 금 가격은 수직 하락하고 시장은 크게 동요한다. 공포에 질린 투 자자들은 보유하고 있던 실물 금을 모두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로써 한 편으로는 월스트리트의 큰손들이 공매도를 통해 폭리를 얻는 동시에 다 른 한편으로는 JP모건 체이스가 낮은 가격에 시중의 실물 금을 모두 흡수 해 고갈 직전에 처한 금 재고를 보충할 수 있다. 더불어 금 가격의 지속적인 폭락은 투자자들의 금 사재기 열풍을 미연에 막는 역할도 한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묘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4.12 황금 대학살'을 발동시킨 진짜 이유이다! 이 계획은 달러화의 위상에 비상이 걸린 미국 정부, QE3에 대한 논란 을 황급히 잠재워야 하는 Fed, 금 보유고에 대한 감사를 의도적으로 회피 하는 재무부, 나아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월스트리트의 큰손들까지 모두 의 이익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그야말로 최선의 방안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연의 일치'라고 할 만한 일련의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4월 초, 월스트리트의 매체들은 일제히 금 약세론자로 돌아섰다. 금값 거품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며 금은 만인의 사랑을 받던 '아'에서 졸지에 만인의 지탄을 받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4월 10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 와중에 세계 금융계의 거물 14명을 소집해 극비 회합을 가졌다. 또 이날 골드만삭스는 금값 약세를 전망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그 이 전까지는 줄곧 금값 강세를 주장했었다). 이는 투자자들에게 금 공매도를 명령하는 '나팔소리'나 진배없었다. 일순간 금시장에는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졌다. 4월 11일, 사이프러스가 금 13.9톤을 매각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떠돌 기 시작했다. 잇따라 포르투갈과 이탈리아가 각각 382톤 및 2,451톤의 금을 매각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도 터져 나왔다. 금시장은 삽시간에 공포 에 휩싸였다. 4월 11일, Fed의 회의 리포트가 '뜻밖에' 유출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리포트에 따르면 Fed 내부에서 QE3의 사전 종료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금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4월 12일의 '황금 대학살'을 위한 전주곡이었다. - 2013년 4월 금값이 폭락한 이후 중국 상하이 금거래소의 출고 명세서 를 보면 중국이 같은 시기 세계 금 생산량의 대부분을 매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도의 금 소비량도 중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중국과 인도 양국이 2013년에만 약 2,000톤 이상의 금을 매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중동과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매입량도 최소 1,000톤 이상은 될 것이 다. 이밖에 금값 하락에 따라 다른 지역에서도 실물 금 사재기 열풍이 빠 르게 확산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금값이 이미 금 생산원가 이하로 떨어졌는데도 금 생산원가는 연간 10%씩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점점 더 많은 금 생산업자들이 감산 혹은 폐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서 금 공급은 빠르게 위축 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새로 증가한 금 공급량이 빠르게 성장하는 수요를 만족시 키지 못해 기존 금 보존량의 재분배 추세가 불가피해진다는 문제가 발생 한다. 사실 이런 추세는 4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속돼왔다. 1971년 달러화와 금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뒤로 금의 이동 방향은 서방에서 동방, 기존의 선진국에서 신흥시장국가로 바뀌었다. 이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 쇠가 번갈아 일어날 때 발생하는 현상과 완전히 일치하다. 금의 이동 방 향은 부의 창조력의 이전, 번영과 자신감의 이전 및 글로벌 권력의 이전 방향을 보여준다. 금은 영원히 부의 창조를 존중하는 곳으로 이동한다.
- 매수 주문의 경우 이치대로라면 호가가 가장 높은 주문을 맨 앞, 호가가 같을 때에는 선착순으로 먼저 받은 주문을 앞에 놓 는 것이 마땅하다. 즉 가격 우선, 시간우선의 원칙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 초단타매매 플랫폼이 주문 순서를 배열할 때 '뒷 문’을 열어놓는다는 데에 있다. 특별 주문은 항상 주문 리스트의 맨 앞에 '숨겨져 있고 일반적인 제한주문은 뒤로 밀려난다. 따라서 매매 체결 시 에 특별 주문은 언제나 맨 먼저 가장 좋은 가격에 거래된다. 특별 주문은 또 호가 변화와 상관없이 항상 제한주문보다 우선시된다. 매도 주문의 경 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특별 주문은 매도 주문의 맨 앞에 배열돼 있기 때문에 매도호가의 등락과 상관없이 가장 좋은 가격에 가장 먼저 거래가 이뤄진다. 한마디로 특별 주문은 벌기만 하고 밑질 때는 없다는 얘기가 된다. 1 그렇다면 이미 내린 주문이 시세 변화로 인해 잘못된 주문'으로 판단되 는 경우 특별 주문도 손실을 입지 않을까? 대답은 '노(No)'라고 해야 한다. 초단타매매 알고리즘은 0.001초 사이에 매도 주문 리스트의 우위를 분 석해 시세가 곧 역전될 것이라고 판단되면 주가가 아직 변하기 전에 특별 주문의 주식을 원래 값에 매수자에게 팔아넘기고 빠르게 '주문 취소'를 해버린다. 본업인 초단타매매에 관해서는 남보다 아는 것이 훨씬 많다고 자부하던 햄이었다. 그런데 매치 시스템에 뜻밖의 꼼수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 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판매부장은 햄에게 이 비밀을 아무에게나 얘기하 지 말라고 부탁했다. 주식 거래의 먹이사슬에서 제한주문은 가장 하위 단 계에 있다. 이들이 상위층인 초단타 트레이더들에게 먹잇감이 되는 비밀 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모든 거래소가 다 이 같은 꼼수를 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초단 타매매의 핵심 이념이 '부정 출발'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스타트 라인에 선 주자들이 모두 출발 총 소리를 기다리는 사이에 부정 출발자들은 이미 앞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초단타매매 트레이더들은 부정 출발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미국의 양대 금융 중심지인 뉴욕과 시카고는 서로 700마일이나 떨어 져 있지만 케이블을 이용한 데이터 전송 속도는 0.007초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초단타매매 트레이더들은 0.007초도 너무 늦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초단타매매 회사는 거금 3억 달러를 들여 애팔래치아 산맥을 관통하는 케이블 터널을 구축했다. 이 방법으로 케이블의 길이를 줄이고 데이터 전송 속도를 0.006초로 단축했다. 이렇게 볼 때 초단타매매에서 0.001초의 가치는 3억 달러를 넘는다고 말할 수 있다.
- 2011년 9월부터 상장기업 CEO들은 회사 내부의 잠재 자원 발굴에 어 려움을 겪은 데다 글로벌 경제 침체로 말미암아 대외 매출도 부진했다. 그럼에도 기업 실적을 발표할 날짜는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기업 실적 이 월스트리트의 기대에 못 미칠 경우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경제적 어려 움은 물론 다음 분기까지 그 악영향이 미칠 것이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단기간 내에 주당 순이익을 올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자 사주 매입이었다. 개인의 돈도 아니고 회사의 돈을 쓰는 것이니 걱정할 것도 전혀 없었다. 자사 주식을 재매입하면 유통주가 감소해 공급이 딸리 게 된다. 특히 거액의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할 경우 유통주가 급감해 당 연히 주가가 상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사주 매입이 주가 상승을 부 추기는 첫 번째 원동력이다. 매체들은 기업이 자사주 매입을 선포할 때마다 "자사 주식이 저평가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여론을 조성한다. 다른 의미에서 이는 기업 의 주가가 향후 상승 가능성이 크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누가 뭐래도 기업의 경영 상황은 기업 내부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 아닌가? 회사 CEO가 자사 주식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니 다른 투자자들 역시 귀가 솔깃해져 주식을 매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자사주 매입 이 주가 상승을 이끄는 두 번째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의 총수익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사주 매입을 통해 유통주 규 모를 줄이면 주당 평균 수익은 상승하게 된다. 바꿔 말해 주당 순이익은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주당 순이익을 상승시켜 월스트 리트의 기대치를 만족시키면 언론 매체들은 한바탕 호평을 쏟아낸다. 그 러면 더 많은 투자자들이 주가상승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앞다퉈 주식 을 매입한다. 이것이 주가 상승을 부추기는 세 번째 동력이다.
- 마켓메이커의 역할은 채권시장의 유동성을 촉진하고 매매 당사자의 거래 원가를 낮추는 것이다. 이중 상위 21개는 국채시장의 1급 마켓메이커로 Fed와 직접 거래가 가능하다. 미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제 정한 금리정책은 21개의 1급 마켓메이커를 통해 실시된다. 이들의 지위 는 금본위시대 잉글랜드은행의 큰 신뢰를 받았던 5대 금 거래업자와 대 등하다. 마켓메이커들은 채권시장에서 때를 가리지 않고 채권을 사고팔 아 일정한 매매 차익을 얻는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5년 만기 국채의 매매 차익은 1/128%에 불과하다. 즉 100만 달러가 거래될 때 마켓메이커가 얻는 수입은 78.125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실제 거래에서는 대체 로 매수호가와 매도 호가의 중간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에 이들이 얻는 이윤은 절반인 39.06달러로 더욱 줄어든다. 이 39.06달러에서 다시 융자 비용, 프런트 데스크와 리스크 관리 부서 및 후선 지원 부문의 비용, 직원 연봉, 매출 상여금, 마케팅 비용, 시스템 지원비 등 잡다한 비용을 공제해야 한다. 이렇게 온갖 직간접 비용을 공 제하고 남는 순이익도 고스란히 주머니에 들어오기 힘들다. 여러 가지 리 스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수익에 영향을 주는 최대 변 수는 금리 변동이다. 국제 뉴스, 경제 데이터, 돌발 사건 등 금리의 등락을 유발하는 요인은 너무나 많다. 거래 도중 금리 변동으로 인해 국채 가격 이 1%만 변해도 100만 달러면 1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트 레이더들은 반응이 조금만 늦어도 39달러의 순이익을 얻기 위해 1만 달 러의 손실을 입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1만 달러는 100만 달러짜리 거래 를 250번이나 성사시켜야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 Fed는 양적완화를 실시한 이후 거의 매달 채권시장으로부터 대량의 국채와 MBS를 흡수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조폐국의 조폐기를 돌려 21개 1급 마켓메이커의 채권과 교환한 것이다. 물론 조폐기를 돌린다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Fed는 조폐기를 돌릴 필요 없이 그저 자판을 두드려 컴퓨터에 일련의 숫자를 입력한 다음 엔터키만 누르면 원하는 액수만큼 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힘들게 공장을 설립하거나 머리 아프게 경영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양적완화 조치의 결과는 마켓메이커의 채권 재고가 Fed의 대차대조표에 기입되고, 그들이 뉴욕연방준비은행에 개설한 계좌 잔액이 상응한 액수만큼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켓메이커의 손에 거액의 돈이 들어오고 금융시장의 통화량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것 이 Fed가 QE 정책을 통해 금융시장에 자금을 주입하는 과정이다. 수중에 돈이 생긴 마켓메이커는 그 돈을 가지고 미국 재무부에 가서 신규 발행 국채 경매에 참가했다. 이 결과 이번에는 정부가 돈을 벌었다. 이것이 발행시장이다. 이후 마켓메이커는 자체 유통망을 통해 수중의 국 채를 세계 각지에 유통시켰다. 요약하면 국채 매매는 최종적으로 마켓메 이커를 통해 이뤄졌다. 이것이 유통시장이다. 앞에서 예로 든 퇴직연금펀 드 매니저의 국채 매입 사례도 유통시장에서 발생한 것이다. 마켓메이커들은 동시에 최대 투자은행이기도 했다. 이들은 기업을 도 와 회사채를 위탁판매할 때 종종 본인의 돈을 먼저 내서 회사채를 전액 구매했다. 현금을 받은 기업은 그 돈으로 자사주를 매입해 주가를 올린 다음 CEO들에게 상여금으로 지급했다. 마켓메이커는 매입한 회사채를 보유하거나 연금펀드, 뮤추얼펀드, 헤지펀드, 화폐기금 및 대기업이나 외 국기관 등 채권 투자자들에게 되팔기도 했다. - 금융시장의 유동성이 대폭 증가하면서 펀드 매니저들은 계좌에 유입 된 거액의 자금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돈은 투자하 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는 유휴 자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 기업이 채권을 발행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펀드 매니저들이 한꺼번에 몰 려가 미친 듯이 채권을 매입했다. 그 결과 채권 가격은 수직 상승하고 수 익률은 수직 하락했다. 양적완화 횟수가 거듭될 때마다 유동성 과잉은 유 동성 범람으로 변질됐다. 이렇게 되자 펀드 매니저들은 마치 굶주린 늑대 처럼 수익률이 조금이라도 괜찮아 보이는 채권을 앞다퉈 매입했다. 양적완화 정책에 힘입어 회사채 발행 규모는 해마다 10% 이상의 성장 률을 보였다. 기업이 채권 발행을 통해 얻은 염가 화폐는 금세 자사주 매 입 자금으로 탈바꿈했다. 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 속에 S&P500지수의 상승폭은 16.7%에 달했다.
- 10년을 주기로 정크본드의 디폴트 비율을 관찰하면 정크본드의 본질 을 똑똑하게 알 수 있다. 분석 결과 BB급 정크본드의 디폴트 비율은 19%, B급의 디폴트 비율은 30% 이상, CCC/C급의 경우 6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정크본드는 장기간 보유하면 안 되는 상품이 다. 기관 투자자들이 정크본드에 투자할 때 단기 투자에 치중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수익을 얻은 즉시 팔아버리고 철수하는 것은 이 바닥 의 비밀 아닌 비밀이 돼버렸다. 일단 금리가 상승 추세로 돌아서면 정크 본드의 가격이 폭락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전염병이 유행하면 노인과 아이들이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된다. 금융 위기가 발발하면 채무사슬의 가장 취약한 고리가 우선적으로 끊어진다. 채무사슬의 붕괴 징후는 금리 추세가 반전되면서부터 나타난다. - 실물경제가 침체돼 회복이 부진한 환경에서 모든 경제체는 현금흐름 성장이 완만한 '노령화 자산'과 같다. 주요 국가들이 동시에 양적완화 정 책을 펼치자 넘쳐나는 자금은 제한된 규모의 자산을 빼앗기에 혈안이 됐 다. 그 결과 현금흐름은 근본적인 개선을 가져오지 못하고 자산 가격만 고평가되는 심각한 상황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저수익, 저리스크의 이런 현상을 듣기 좋게 '뉴 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이라고 칭하고 있다. 뉴 노멀 시대에 중앙은행이 무너지지 않고 양적완화 정책을 꾸준히 지 속하면 시장에는 더 이상 리스크가 존재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영구적 인 경제기관'을 발명한 듯하다. 조폐기만 꾸준히 돌리면 자산 가격이 무 한대로 상승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양적완화'-'자산 가치의 무한대 상 승' '영구적인 경제기관의 발상은 논리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가령 미국 채권시장이 완전히 폐쇄된 상태에서 중앙은행 이 끊임없이 돈을 찍어내 채권을 매입하는 방법으로 강제로 시장에 유동 성을 공급한다면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즉 Fed가 채권시장 에 있는 38조 달러 규모의 채권을 전부 매입해버려 채권시장에 동등한 액수의 유동성이 범람하고 Fed의 대차대조표도 동등한 규모로 증가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된다면 채권과 펀드 매니저들은 어떻게 될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굶어죽고 만다. 시장에 현금흐름을 발생시킬 자산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채권시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양적완화 책은 이론적으로 한계가 존재한다. 중앙은행이 무한대로 채권을 매입할 수 없기 때문에 자산 가치가 영원히 상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고, '영구 적인 경제기관'은 더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이 이치를 알기에 Fed는 2013년 5월부터 QE를 종료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자산 가격이 더 이상 상승하지 않자 수익률도 최저 한계점에 이르렀다. 모두가 자산 가격이 고공 행진하다가 특정 수위에 딱 머물러 하락하 지 않기를 바랐으나 현실은 무정했다. 자산 가격은 분사 추진식 제트기 비유할 수 있다. 제트기는 연료가 소진되면 땅으로 추락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산 가격도 자금의 뒷받침이 없으면 수직 하락하고 동시에 수익률은 하늘로 치솟는다. 문제는 자산 가격이 수직 하락할 때 중앙은행 이 투자자들에게 '낙하산'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일반인이 국채를 매입하면 만기일까지 기다리거나 중도에 매각하는 것 외에 다른 거래 방법이 없다. 이와 달리 금융기관은 보유하고 있는 '죽은 국채'를 '산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환매조건부채권 매매 (Repo, Repurchase Agreement)의 매력이다. 금융기관은 여윳돈이 있는 사람에게 국채를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릴 수 있다. 돈을 빌리면서 일정 기간 이후에 더 높은 가격으로 국채를 재매입 하기로 약속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차액을 바로 'RP 금리'라고 한다. 투자 자는 이 차익을 노리고 돈을 빌려주며, 수요자가 투자자에게 담보로 제공 하는 증서가 바로 환매조건부채권(이하 환매채)이다. 국채는 국가 신용을 담보로 발행한 채권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쉽게 현금화할 수 있다. 또한 상환 기간이 길지 않아 짧게는 하루, 길어야 수십 일에 불과하다. 여유 자금이 많은 금융기관과 개인의 경우 은행의 정기 예금은 입출금이 자유롭지 못해 불편하고 당좌예금은 금리가 너무 낮아 매력적이지 못하다. 이때 유연한 자금 회전과 비교적 높은 수익 및 안전한 투자,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RP 시장이다. 환매채 매매는 자금이 필요한 사람이 집에 있는 골동품을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리는 것과 같다. 환매채 매매에서 담보로 사용되는 국채가 '골동품'에 해당한다. 전당포 점원은 흔히 저당 잡힌 물건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 환매채 매매에서는 이 를 '헤어컷'이라고 부른다. 전당포에 물건을 저당 잡힐 때 저당 기간이 있는 것처럼 환매채 매매에는 환매 기간이 적용된다. 이 기간에 돈을 빌릴 때 부과하는 금리가 바로 RP 금리이 다. 만기일이 지나도록 저당물을 되찾아가지 않으면 전당포 주인은 저당물을 팔거나 본인이 소유하는 등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환매채 매매 역시 똑같다. 차입자가 계약을 위반한 경우 계약 담보물인 국채는 대출자의 소유가 된다. 환매채 매매의 원리는 매우 간단하고 운용 방법도 복잡하지 않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에서는 환매채 매매의 중요성이 크게 각광받지 못하고 있다. 환매채 매매는 현대 금융시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융자 채널 이자 가장 결정적인 유동성 공급 수단, 가장 중요한 화폐 창조 센터의 역 할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전반적인 금융 시스템을 움직이는 엔진 역할을 하지만 금융업계 종사자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 1급 마켓메이커들은 환매채 발행을 통해 얻은 자금을 들고 다시 RP 시 장에 쳐들어간다. 이번에는 대출자 신분으로 역환매조건부채권(Reverse Repo, 역RP)을 거래하기 위해서이다. 즉 앞서 RP 시장에서 환매채 매매에 담보로 제공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국채를 똑같은 규모로 빌리는 것이 다. 언뜻 보면 쓸 데 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채를 담보로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다시 국채를 빌리니 괜한 법석을 떠는 것이 아니고 무 엇인가. 그러나 1급 마켓메이커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속셈은 따로 있다. 사실 수천억 달러의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금 리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가끔 금리가 급변할 때에는 더욱 위험하 다. 금리가 변하면 채권 가격도 따라서 변하는데 거액의 채권 재고를 회전시키려면 일정 기간이 필요하다. 금리가 변하기 전에 채권 재고를 제때 처분하지 못할 경우 차익 거래를 통해 얻은 수익은 몽땅 물거품이 되고 심지어 본전까지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국채를 담보로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다시 국채를 빌리면 전자의 이자 비용과 후자의 이자 소득이 서로 상쇄된다. 만약 금리가 갑자기 상승하면 먼저 담보로 제공한 국채 가격은 하락하고 약정한 상환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높아지기 때문에 손해를 보 게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상대방이 담보로 제공한 국채 가격이 똑같 이 하락하고 상대방의 상환 가격도 시장가격보다 높아지기 때문에 이거 래에서는 수익을 얻는다. 이렇게 손익을 서로 상쇄하면서 금리 상승에 따 른 리스크 위험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다. 이 방법을 일컬어 대차대조표 의 '균형장부(Matched Books)'라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금리 위험을 배제 하고 나서 안심하고 채권 도소매 차익을 챙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오늘날의 금융 환경에서 보면 은행은 전통적인 예금 화폐 창조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 대신 그림자금융을 통해 그림자통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개발됐다. 대출을 통해 예금(부채)을 창조하던 방식은 이미 한 물가고 지금은 담보물을 이용해 환매채(부채)를 창조하는 시대가 도래했 다. RP 시장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폐 창조 중심지가 되었다. 화폐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화폐 진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화폐금융학 이론은 여전히 1980년대 수준 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고루하고 낙후한 지식으로 새로운 화폐 창조 원 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폐, 물가, 환율, 금리 및 금융시장에 대해 분석할 때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분지급준비제도를 모르는 사람은 20세기 금융의 본질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RP 시장의 신용화폐 창조 원리를 이해하지 못 하면 21세기 금융시장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없다.
- 100달러짜리 국채는 본래 헤지펀드의 자산이다. 펀드 매니저는 이자 산을 RP 시장의 1급 거래상인 골드만삭스에 융자 담보물로 제공한다. 그 러면 골드만삭스는 이 자산에 대해 '재담보 설정'을 요구할 수 있다. 즉 헤지펀드의 국채가 담보로 잡혀 있는 기간에 이 자산을 다른 사람에게 재 담보로 제공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말이다. 물론 헤지펀드는 골드만삭 스의 요구를 거절할 권리가 있다. 이 낌새를 눈치 챈 골드만삭스는 'RP 금 리'를 높이겠다고 선언한다. RP 금리가 상승하면 헤지펀드의 융자 비용 도 증가하게 된다. 헤지펀드 매니저는 속으로 주판알을 튕긴다. '골드만 삭스가 어떤 기업인가? 금융시장의 큰손 아닌가? 국채 자산을 골드만삭 스에 맡기면 절대적으로 안전할 것이다. 골드만삭스가 파산하지 않는 한 국채 자산을 재담보로 사용해도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더 낮은 금리에 자금을 빌릴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 이에 헤 지펀드 매니저는 골드만삭스의 요구를 수락한다. 골드만삭스는 이 국채를 지불 수단으로 삼아 크레딧스위스(Credit Suisse)와 파생상품을 거래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원래 헤지펀드 대차 대조표 상의 'RP 부채가 이제는 골드만삭스의 자산이 되었다는 사실이 다. 이를 전통 은행 업무에 비유하면 헤지펀드가 골드만삭스에게 '예금 계좌'를 개설해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로써 골드만삭스는 크레딧스위 스에 수표 결제가 가능해졌다. 골드만삭스가 크레딧스위스에 '수표'를 '지불하는 것은 헤지펀드의 국채 자산을 크래딧스위스에 이전하라고 명 령한 것과 같다. 이는 전통 은행 시스템에서 은행 수표 발행이 곧 준비금 이전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크레딧스위스도 같은 방법으로 이 국채 자산을 다른 MMF펀드에 '지불하고 현금을 얻는다. MMF펀드는 국채 자산을 처분하지 않고 잠시 보유하는데, 이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 겠다. 반복적으로 '재담보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할인율이 하락함에 따라 화폐 창조 에너지는 점점 줄어든다. 이 같은 방식의 재담보 화폐담보 횟수, 다시 말해 담보 사슬의 길이는 화폐 승수에 상당하며, 담보자산의 할인율(Haircut)은 준비율과 같다. 전통적인 은행 시스템은 '부분지급준비제도'를 통해 화폐를 창조하나 그림자금융은 '부분 담보자산'을 이용해 그림자통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RP 부채는 돈이 맞을까? 이 문제의 답안은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면 아 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RP 부채로 물건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 융시장의 기관투자자들은 돈이 맞는다고 할 것이다. 이들은 RP 부채를 이용해 필요한 금융자산을 마음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RP 부채의 담 보자산은 국채이다. 국채는 거의 현금과 다름없어서 '유사 현금'으로도 불린다. RP 부채는 바로 유사 현금의 인수증이다. 미국 속담에 "겉모습이나 울음소리, 걸음걸이가 오리와 같다면 그 동 물은 오리이다”라는 말이 있다. RP 부채는 은행의 예금 부채와 거의 똑같 은 기능을 갖는다. 양자의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은행의 예금 부채, 즉 은 행 화폐는 모든 경제 분야에서 상품과 용역 결제 수단으로 사용이 가능한 반면, RP 부채 즉 그림자통화는 금융시장에서 금융자산 매매에만 전문적 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 '자산 스와프' 거래는 환매채 거래와 유사하기 때문에 국채를 담보물 로 제공한 뒤에도 국채 자산은 여전히 연금기금의 대차대조표에 남게 된 다. 따라서 표면상으로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게다 가 만기일이 짧고 리스크가 적으면서도 수익률이 높았다. 대외적으로 문 제가 없고 대내적으로 리스크를 통제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돈벌이 가 어디에 있겠는가. 펀드 수익률이 목표치에 도달하면 배당금과 상여금 까지 두둑이 챙길 수 있었다. 정크본드를 며칠만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기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며칠 사이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도 아닌데 말이다. 일련의 담보물 스와프 거래가 끝난 뒤 헤지펀드 매니저는 신바람이 나 서 JP모건 체이스를 찾아가 대출을 받고, 연금기금 매니저는 편안하게 앉 아 초과 수익을 얻으며, 거래업자는 입이 귀에 걸린 채 집으로 돌아가 돈 을 센다. 그렇다면 정크본드는 대체 누구의 손에 있는 것일까? 이 문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헤지펀드 매니저는 정크본드로 국채를 교환한 다음 이 국채를 담보로 JP모건 체이스로부터 현금을 대출받았기 때문에 정크본드 가 그의 손에 없는 것은 확실하다. 거래업자는 중간상 역할을 했으므로 그 역시 정크본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 법률적으로 따지자면 연금기금 의 대차대조표에는 국채 자산만 기입돼 있고 정크본드는 없다. 한마디로 정크본드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금융 마술=법률의 맹점+ 회계 혁명'이라는 월스트리트의 환상적인 금융 마술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고위험 채권인 정크본드는 오늘날의 금융시장에서 독성쓰레기 자산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련의 '환상적인 표류' 과정을 거친 정크본드는 금융시장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헤지펀드의 회계장부에서 연금기금 금 고로 이전되었을 뿐이다. 법적 해석이 어떻든 간에 실제 리스크는 이미 연금기금 쪽으로 옮겨간 것만은 확실하다. 정크본드 가격에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이 게임은 끝도 없이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금리가 급등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가 령 정크본드 가격이 30% 하락한다면 연금기금 매니저는 즉시 거래업자 를 찾아가 "당장 내 국채를 돌려주든지 아니면 담보물 가치의 50%에 상 당한 추가증거금을 납입하든지 택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당신의 쓰레기를 처분하겠다”라면서 난리를 피울 것이다. 이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우려는 충분히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때 컴퓨터로 채권 시세를 보던 연금기금 매니저는 할 말을 잃은 채 식은땀만 흘리게 된다. 시장에 정크본드를 사는 사람은 없고 온통 파는 사람들로 득실거린다.
- 그림자금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헤지펀드이다. 현재 미국의 헤지펀드 자산 규모는 약 2조 달러에 이른다. 헤지펀드는 RP 시장에서 '채권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다시 채권을 사는' 방 법으로 꾸준히 자산 규모를 늘리고 있다. 헤지펀드는 또 전 세계 다양한 시장을 누비면서 차액 거래, 베팅, 공매도 및 공매수 등 다양한 게임을 즐 기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시세 변동이나 중대 사건 발생은 헤지펀드가 높 은 레버리지 수익을 창출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6조 달러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연금기금 역시 겉으로는 보수적 투 자에 주력할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연금기금은 채권과 기타 저 위험 자산에만 투자할 것이라는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암암리에 '자산 스와프' 거래에 참여한다. 또 환매채 거래를 비롯한 기타 그림자금 융 업무에 간접적으로 손대기도 한다. - 이밖에 수조 달러 규모의 자금을 보유한 보험회사와 ETF펀드 및 외국 국부펀드 역시 그림자금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인공이다. 이처럼 은행은 아니지만 은행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위의 몇몇 기관들 이 함께 그림자금융 시스템을 구성한다. 그림자금융 시스템은 대체적으 로 다음의 두 가지 사슬에 따라 업무를 전개한다. 첫 번째는 자산 증권화 사슬로서 주 업무는 은행을 도와 자산을 '진성 매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는 환매채 거래 사슬로서 주 업무는 은행이 보유한 자산을 담보로 제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 두 사슬은 나중에 하나로 연결된다. 자산 증권화의 최종 결과물은 MBS, ABS, CDO 등이다. 이 증권들은 RP 시장에서 융자 담보물로 사용 가능하며, 그림자금융의 본원통화 역할을 한다. 동시에 국채, 회사채 심지어 정크 본드와 함께 더 큰 규모의 그림자통화 창조 과정에 참 여한다. 달러화 환류 추세가 심화되는 와중에 전통 화폐와 그림자통화까지 가세하면서 미국 금융자산 가격이 꾸준히 상승하고 은행 수익률 역시 대폭 올랐다. 덕분에 '유사 은행'들도 떼돈을 벌 수 있었다. 진성 매각과 RP 담보 이 두 갈래 산업 사슬의 근본적인 목적은 은행 자 산을 가급적 빠르게 현금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산 보유 주기가 줄어들고 자금 회전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자산 품질의 악화 위험이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자산 가치 하락 위험을 피할 수 있다. 한마디로 수 익 창출의 중점을 금융자산 거래 업무에 두는, 자산 자체를 경시하고 거 래만 중시하는 수익 모델인 것이다.
- 1934년에 제정된 '글라스 스티걸 법(Glass-Steagall Act)'은 1930년대 대 공황을 유발한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성을 정확하게 조명한 결과물로 상업 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철저하게 분리시킨 것이 특징이었다. 이 법안 은 60여 년 동안 미국 금융 시스템을 안전하게 지켜줬다. 그러나 1999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월스트리트 금융가들의 로비를 이기지 못하고 상 업은행, 투자은행, 보험회사 등 금융 업종 간 겸업을 허용하는 이른바 '금 융서비스 현대화법(Gramm-Leach-Bliley Act)'을 도입했다. 하지만 전 세계 가 '금융서비스 현대화 시대를 맞이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심각한 금융위기가 도래했다. 2008년 금융위기의 규모와 파괴력은 1930년대 대 공황에 못지않았다.
- 금융위기 발생 후 금융기관들의 자산 증권화와 RP 거래는 크게 위축 되었다. 그러나 Fed가 '자산 재팽창의 기적을 창조하기 위해 단기 금리 를 사실상 0%에 가깝게 만드는 정책, 강렬한 정책 기대 효과에 의존해 중 기금리 상승을 억제하는 정책, 양적완화 조치를 통해 장기 금리 상승을 억제하는 정책 등 비상한 3단 콤보 정책을 선보인 덕에 금융시장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림자통화 창조 주역이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과 회사채에서 국채와 패니메이, 프레디맥의 MBS로 바 뀐 것이다. 이로써 금융 리스크는 점차 국가신용(Sovereign credit) 쪽으로 빠르게 집중되는 추세에 있다.
- 처음에 독일 은행이 '피그스 채권'을 보유했다고 하자. 독일 은행은 이 채 권을 영국 거래업자에게 재담보로 제공한다. 채권은 영국 거래업자에 의 해 런던 시장에서 다시 수차례 재담보 설정에 사용된 후 미국에 있는 MF 글로벌이나 리먼 브라더스 자회사에 흘러든다. 이어 잇따른 '자산 스와 프' 거래를 통해 헤지펀드에 넘겨진 뒤 최종적으로 미국 연금계좌에 자리 를 잡는다. 일단 위기가 발생하면 미국의 퇴직 노인들이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발행한 정크본드 역시 헤지펀드나 1급 거 래업자의 해외 지점을 통해 런던에 유입되거나 다시 홍콩의 금융기관에 재담보로 설정되다가 나중에 중국 의 QDII펀드에게 공급될 수 있다. 이로써 중국 서민 가계의 대차대조표에 잠복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 RP 담보 사슬은 마치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날수록 반발력이 더 커지 고 끊어질 위험도 더 높다. 이 '고무줄'의 첫 머리는 중앙은행이 쥐고 있 고, 고무줄 끝에는 수십억 가구의 재산이 걸려 있다. 안타깝게도 금융시 장의 높은 레버리지 비율은 중앙은행에까지 '전염됐다. 독일 분데스방크 의 레버리지 비율은 2007년 이후 2배로 상승해 75 대 1에 달했다. 전 세 계 중앙은행의 평균 레버리지 비율 역시 153 대 1에 달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RP 담보 사슬의 고무줄이 끊어지면 금융기관의 파산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이 '구세주'로 나서야 한다. 그런데 만약 중앙은행마저 채무초과 상태라면 어떻게 될까? 위기에 빠진 은행 시스템을 구제하려면 전 국민의 재산에 의존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 그림자금융이 진짜로 위험한 이유는 화폐 창조 기능 때문이다. 그림자 금융의 핵심은 RP 시장에 있다. RP 시장의 존재로 말미암아 1달러짜리 채권이 1달러짜리 '유사 현금'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때 유효 통화 공급량은 배로 증가한다. 여기에 재담보 기능까지 추가되면 통화 공 급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RP 시장의 중요 성은 그림자금융의 다른 모든 문제점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RP 시장의 화폐 창조 기능은 수많은 금융기관에 의해 악용됐다. 금융 기관들은 재고로 남아 있는 채권 자산을 이용해 현금을 얻고 이 현금으로 다시 채권 재고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자산 규모를 끊임없이 늘리는 한편, RP 이자비용과 채권 이자 소득 사이의 차액까지 손쉽게 챙겼다. RP 금리 가 비교적 낮은 상황에서는 이 같은 자금 회전 방식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RP 시장을 이용한 수익 모델은 부동산이나 주식시장, 산업 부문에 투자할 때보다 더 안전하고 유연하며 매력적이었다. 중국 금융시장에도 헤지펀드의 높은 레버리지를 이용한 월스트리트식 수익 창출 모델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원리도 거의 똑같다. 다른 점이 라면 중국 금융기관은 리스크 헤지를 거의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치 헤징'이 불가능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RP 시장의 융 자 비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경우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된다. 6월 돈가뭄 사태 발생 후 중국 금융기관들이 눈 빠지게 중앙은행의 구제금융 만 기다린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이때 중앙은행이 만약 유동성 공급을 거절한다면 금융 시스템 위기(Systemic financial crisis)가 발생하는 것은 자 명한 사실이다.
- 금을 화폐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은행의 화폐 창조 능력은 금의 증가량 과 매칭돼야 하며, 금의 증가량은 산업 성장에 정비례한다. 그런데 가령 특정 산업 부문의 성장 속도가 금의 증가 속도를 훨씬 초과해 이 산업 부 문의 상품과 서비스의 거래를 충족시키기에 금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될 까? 두말할 것 없이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떨어진다. 혹시 이 때문에 디플 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경제에 큰 피해를 주 지는 않는다. 요컨대 금은 상품을 교환할 때 가격 비교 역할을 하는 '계산 기'와 같다. 계산기 크기는 계산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상품 과 상품 사이의 가격 관계는 금의 수량과 무관하다. 한마디로 화폐 공급 이 안정적일 때에 화폐는 경제에 대해 '중성(性)적인' 영향을 끼친다. 세계 경제 발전사를 보면 실제로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영국은 1664년에 물가통계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의 물가지수를 100이라고 설 정한다면 250년이 지난 1914년에 물가지수는 91로 하락했다. 금본위제 도 아래에서 영국 물가는 장기적으로 하락세를 유지했으나 이는 영국의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산업혁명에 힘입어 생산성은 농업 시대 때보다 수천, 수만 배 향상됐다. 가히 천지개벽의 변화라고 할 수 있 었다. 또 제품 종류와 생산량은 농업시대 기준으로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늘어났다. 사실 경제성장의 본질은 생산성 향상과 생산원가 하락에 있다. 마찬가지로 각종 상품 가격의 하락 현상은 생산력이 상승했다는 증거라 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은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 더욱 명확해진다. 대표적인 예로 컴퓨터와 휴대폰의 가격 하락을 들 수 있다. 컴퓨터와 휴대폰 가격 이 끊임없이 하락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사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는가? 아니다. 더 자주 새 것으로 바꾸고 더 많이 산다. 이것이 바로 생산성 향 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산업은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으로 인해 침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빠르게 성장한다.
- 미국을 예로 들어보자. 1800년 미국의 물가지수를 100이라고 설정한 다면 1939년의 물가지수는 81로 하락했다. 즉 139년 동안 '디플레이션' 이 지속됐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미국 경제가 퇴보했 을까? 아니다. 미국은 변두리 식민지 국가에서 세계 최강대국으로 일약 탈바꿈했으며, 금본위제도 아래에서 경제 '기적'을 이뤄냈다. 서방 사상가 들이 금본위 시대를 일컬어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라고 한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화폐제도는 사회적 부의 분배에 대한 일종의 계약이다. 화폐가 안정되 면 천하가 태평해지고 화폐가 흔들리면 천하가 병든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얻은 노동 성과를 은행에 맡기고 은행으로부터 '영수증'을 받는다. 또 퇴직 혹은 실직 후 예전과 비슷한 수 준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이 영수증으로 과거에 사회에 기여했던 것만 큼의 노동 성과를 교환한다. 그런데 영수증 가치가 대폭 하락한다면 노동 성과를 남에게 사기당하고 약탈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 사회를 구성하 는 구성원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화폐'라는 계약을 믿기 때문에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힘을 합쳐 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 그러나 화폐 가치가 하락할 경우 사회적 부의 불공평한 분배와 사회의 심층적인 불신이 초래된다. 더 나아가 사회적 분업 체제가 파괴되고 노동에 대한 적극성에 타격을 주며, 투기와 사기를 조장하고 성실과 신의의 원칙을 파 괴해 최종적으로 거래 비용의 상승을 초래한다.
- 영국은 1914년 금본위제에서 이탈함으로써 쇠퇴의 길을 걷는 운명이 정해졌다. 미국도 1971년 금본위제를 폐지하면서 '성실, 창조, 근면, 절 약'의 건국이념을 버리고 탐욕, 투기, 향락, 사치의 타락 기풍을 조장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앞으로 닥쳐올 더 심각한 경제위기와 사회위기의 서막에 불과하다. 안타까운 것은 달러화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통화 평 가절하 열풍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화폐 가치 하락이 그림 자금융과 그림자통화를 만들어냈다. 1971년 이전 약 300년 동안의 산업 화 시대에는 은행이 수익을 얻는 데 '은행의 그림자'가 필요하지 않았고, 사회도 '화폐의 그림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림자통화 담보 사슬이 길어질수록 사슬에 내재한 장력도 함께 커지 면서 지금은 거의 끊어질 듯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 2013년 6월에 발생한 전 세계적인 돈가뭄 사태는 더 큰 금융 지진의 전조일 뿐이다. 금융 글로벌화 시대에 세계 각국은 자산담보 사슬에 의해 하나로 꽁꽁 묶여버렸다. 이는 향후 국부적인 위기가 필연적으로 글로벌 위기로 확산 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 RP 시장 게임의 주 종목은 병 10개에 뚜껑 3개를 끼워 파는 고난이도 게임이다. 만약 Fed가 매달 850억 달러씩 시장의 '병뚜껑'을 거둬들이면 1년 후 RP 시장에서는 1조 달러의 담보자산이 사라지게 된다. 미국의 삼 자간 환매채시장의 담보자산 규모가 2조 달러밖에 안 되는 만큼 이 속도 로 병뚜껑이 사라진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병뚜껑이 꾸준히 감소하면 서 RP 시장의 게임 기술도 '병 10개에 뚜껑 1개', 심지어 '병 20개에 뚜껑 1개'로 점점 까다로워졌다. 기술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손실 위험은 훨씬 더 커진다.
- BIS를 통제하는 극소수 사람들이 곧 전 세계의 진정한 주 인이다. 이들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은 데다 그 어떤 규제 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각국 정부 혹은 국민에 대해 그 어떤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극히 보기 드문 특별하고도 절대적인 권 력이다. 예측 가능한 장래에 이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이는 또 금융 글로벌화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절대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은 당연히 아니 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책임을 진다. 절대 권력을 가진 이런 극 소수의 사람들이 지혜와 능력마저 뛰어나다면 이들의 관리 아래 생산성 이 향상되고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적어도 BIS의 지배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란 쉽게 정의하면 시장 금리를 '왜곡시키기 위한 공개시장조작 방식의 일종이다. 채권 수익률 곡선을 '뒤틀기' 때문에 붙 여진 이름이다. 채권시장에서는 채권 가격과 수익률이 시시각각 변화한다. 만기일이 서로 다른 채권의 일정 시점에서의 수익률을 나타내는 것이 곧 수익률 곡 선이다. 수익률 곡선은 1개월부터 30년까지 만기가 서로 다른 모든 채권 의 특정 시점에서의 수익률을 반영한다. 미국의 양적완화와 오퍼레이션 트위스트 조치는 장기 금리를 떨어뜨 리기 위해 중장기 채권 매입에 중점을 뒀다. 이른바 오퍼레이션 트위스트 는 Fed가 단기 국채를 팔고 장기 국채를 사들여 장기 금리 인하를 유도 하는 방식이다. 수익률 곡선을 보면 장기 금리가 하락하고 단기 금리가 상승해 모양이 뒤틀린 것처럼 보인다.
- 미국 국회에서 해마다 한 차례씩 불거지는 부채 한도 논쟁은 마치 곡 마단의 공연처럼 코믹하면서도 흥미롭다. 미국이 부채 한도를 상향 조정 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적자 예산을 유지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두 가지 다 불가능하다. 미국의 부채 규모는 1990년대와는 차원이 다르 게 증가했다. 전통 부채와 그림자 부채를 합치면 무려 60조 달러로, 이미 GDP의 370%를 넘어섰다. 금리가 1%P 상승할 때 현금흐름 압력은 적어 도 6,000억 달러가 증가한다. 그런데 금리가 600bps 상승할 것으로 예상 되니 현금흐름에 적어도 3~4조 달러의 압력이 발생할 것이다. 이는 무려 미국 GDP의 20%를 차지하고 재정수입을 훨씬 초과하는 규모이다. 이쯤 되면 경기 회복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곧 닥칠 금융위기에 대비하는 일만 해도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초저금리 정책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 아니 미국의 치명적인 핵심 이익에 꼭 부합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미국이 금 가격 상승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이유는 금값이 전 세계의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금값이 상승하면 자금 코스 트에 대한 시장 평가가 변하고, 대출자들은 인플레이션에 따른 손실을 보 충하기 위해 대출 금리를 올린다. 한마디로 금값은 금리 상승 기대에 직 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금리 상승은 인플레이션 기대를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금값에 대한 평가도 변화시킨다. 물론 미국은 초저금리 기조가 영원히 유지되길 바란다. 초저금리 환경 에서는 자산 거품이 꺼지지 않고 무한대로 팽창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부동산시장이 호황을 누릴 때 모든 투자자들이 부동산 가격의 영 원한 상승을 바란 것처럼 말이다.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다. 따라서 Fed는 금리 급등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QE를 종료해야 한다. 금리 급등이 한 단계 더 발전해 금리 '화산'으로 변하면 필연적으로 더 큰 위기를 유발하게 된다.
-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흉인 은행들은 연방정부로부터 수조 달러의 구 제금융을 지원받은 것도 모자라 뉴욕 정부로부터 매년 2억 3,600만 달러 의 이자소득까지 얻고 있다. 뉴욕시 정부가 금리 스와프의 속박에서 벗어 나려면 무려 14억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은행은 액수를 좀 낮 춰달라는 뉴욕시 정부의 간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향후 수년 동안의 현금 흐름 가치가 계약서에 명시돼 있어서 방법이 없다는 태도였다. 뉴욕시 정부는 채권을 위탁판매하기 위해 이미 은행에 수천만 달러의 비용을 지불한 데다 해마다 거액의 보상금까지 지급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 돈이 모두 뉴욕 시민의 세금으로 충당된다는 사실이다. 뉴욕 시 민들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월스트리트를 구제하기 위해 '양털 깎기' 를 당한 데 이어 또 다시 '양털을 깎이고 있다. 이번 '양털 깎기' 역시 패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뉴욕 시민들이 왜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를 벌 였는지 이해가 되는가! - 더 한심한 것은 월스트리트 은행들이 파산해도 뉴욕시 정부가 금리 스 와프 계약 해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금리 스와프 거래를 하려면 원칙적으로 제3자의 담보가 필요하다. 그런데 뉴욕시 정부의 과 실이 아닌 제3자의 과실로 인해 계약이 해지되는 경우에도 뉴욕시 정부 는 여전히 은행에 지급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실례로 2008년 리먼 브라 더스가 파산했을 때 뉴욕교통국은 금리 스와프 계약 2건을 해지하기 위 해 은행에 940만 달러를 지불했다. 뉴욕주와 뉴욕시에서 월스트리트 은행들과 체결한 금리 스와프 계약 은 총 86건, 계약 금액은 106억 달러에 달한다. 교통 부문, 공공도서관, 수도관리국 산업발전국 등 다수의 정부기관이 금리 스와프 거래에 동참했다. 계약 기간은 평균 17년이며, 최장 2036년까지이다. 뉴욕시 인프라 정비에 사용돼야 할 정부 자금은 현재 월스트리트 은행 가들의 주머니로 흘러들고 있다. 양털은 결국 양의 몸에서 나는 법이다. 이 결과 1,800여 명이 실직하고 링컨 터널 통행료가 상승했다. 지하철 요 금이 상승하고 대중교통 차량은 감소했다. 행정 예산이 줄어들고 호텔에 서는 단수가 빈번히 일어났다. 뉴욕시 행정 서비스의 질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뉴욕시 정부가 금리 스와프의 올가미에 걸려 재정난을 겪는 것은 그나 마약과라고 볼 수 있다. 디트로이트는 이보다 더 엄청난 액운을 겪었다.
- 미노스의 계획은 대형 은행 신디케이트를 만들어 '유로달러채'와 유사 한 '유로달러 대출'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는 대규모의 달러화 대출을 통해 대기업과 정부의 융자 수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또 과감하게 혁신을 시도하는 투자은행들을 주요 라이벌로 생각했다. 그 는 로스차일드은행을 비롯한 일부 은행과 보험회사를 설득하고 잉글랜드 은행의 허락을 받은 후, 1969년부터 획기적인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 기 시작했다.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출 기간을 늘리는 것이었다. 거액의 자금 이 필요한 수요자들은 대부분 상환 기간이 5년 이상인 대출을 원했다. 그 러나 당시 상업은행에는 5년 이상의 장기 예금이 없었고, 대출자의 수요 에 맞춰 장기 대출 상품을 개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는 대출 규모를 늘리는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거액의 대출에 따르는 리스크를 혼자 부담하려는 은행은 없었다. 미노스가 은 행 신디케이트를 설립하려는 이유도 다 이 때문이었다. 그는 한 은행이 신디케이트의 관리를 책임지고 다른 은행이 구체적인 실무를 담당하면서 대내적으로 대출 조건을 통일하고 대외적으로 협력해 마케팅을 펼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미노스는 대출 기간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행 신디 케이트 회원들에게 일정 기간마다 금리가 변경되는 단기 대출을 새로 제 안했다. 3개월 혹은 6개월에 한 번씩 금리를 조정하면서 단기 대출을 같 은 기간의 단기 예금에 연동시키는 방안이었다. 미노스는 구체적인 실행 방법도 제정했다. 신디케이트 회원 은행이 단기 대출 만기 2일 전에 연합 회에 현재의 융자 비용을 보고하면 8분의 1%P까지 정확하게 가중 평균 을 구한 다음 여기에 은행의 이윤 포인트(Profit point)를 합해 다음 단기 대 출금리를 산출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Libor의 유래이다. - Libor는 선천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우선 18개 은행의 호가는 자체 적인 '추산'에 의한 것이지, 상호 간 실제 거래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 다. 따라서 문제가 생길 경우 추궁할 만한 '증거'가 없다. 5대 금 거래업자 가 고객들의 상호 간 거래를 기준으로 금 가격을 산정하는 런던의 '금값 책정 체제'가 Libor 산출 메커니즘보다 더 합리적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Libor는 실제 시장 금리가 아니다. 18개 은행이 한자리에 모여서 만들어 낸 '상상' 금리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참여 은행은 허위 금리를 제시할 만한 강렬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매일 발표되는 Libor는 이들 은행의 손 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심지어 치명적인 신용 의혹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Libor 산출 체제는 참여 은행들에게 금리 조작 동기 를 부여한 것은 물론이고 그럴만한 조건도 만들어줬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들의 금리 조작이 얼마나 더 광란적으로 팽창하느냐에 있다. - 미국 정부는 초저금리 정책의 최대 수혜자이다. 미국은 거액의 재정적 자로 인해 국채의 융자 비용이 끊임없이 절하 압력을 받았다. 2008년 미 국의 국채 규모는 10조 달러로 국채의 평균 금리는 4.5%, 연방정부가 매 년 지불하는 국채 이자는 4,510억 달러였다. 2012년 미국의 국채 규모는 16조 달러로 증가했다. 그런데 이때 국채의 평균 이자율은 2.3%로 하락 해 연방정부의 국채 이자 지출이 3,600억 달러로 하락했다. 미국 채권시 장을 대표하는 국채 10년물 평균 수익률도 1.75%에 불과해 심지어 인플 레이션율보다 낮았다. 이 모든 것은 Fed의 금리 조작 덕분이었다. 가령 국채 10년물 수익률이 2013년 9월의 2.75% 수준을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국채 평균 금리는 3.6%에 달해 연방정부의 국채 이자 지출도 6,000억 달러를 넘게 된다. 이는 미국 국방부 총예산과 맞먹는다. 만약 국 채의 평균 이자 비용이 2008년의 4.5% 수준으로 회귀한다면 이자 지출 은 7,650억 달러에 달하게 된다. 2012년 미국 세수 규모가 2조 4,500억 달러인데, 국채 이자에만 세수의 3분의 1을 지출해야 한다면 미국 채권자 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미국 정부의 채무 상환 능력을 의심하지 않 을 수 없다. 물론 미국은 돈을 찍어 빚을 갚을 수 있지만 남발되는 달러화 를 누가 계속 신뢰하겠는가? 미국 정부가 초저금리 정책의 확고부동한 지지자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재정적자를 줄이려는 미국 정부의 절박함, Fed의 자산 리플레이션에 대한 기대, 은행 시스템의 거액의 이윤을 향한 강렬한 욕망이 세 가지가 결합해 난공불락의 초저금리 기조를 형성했다. 이들은 서로를 이용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상부상조한다. 이런 배경에서 금리 조작은 개별적인 행 위가 아닌 집단행동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우선 중앙은행이 금리 추세 에 대해 '의도한 방향으로 움직이게끔 개입하고' '정책적으로 압박하면', 이어 은행들이 시장에 개입하고' '거래를 제한한다. 마지막으로 미국 정 부가 지역 분쟁, 전쟁 위기, 테러 등 다양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유발해 사 람들에게 '극도로 불안전한 세계에서 미국 국채만이 유일한 대피처'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Libor를 더욱 낮추면 국채 융자 비용 절감, 국채 가격 인상 및 자산 리 플레이션에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이들의 행위가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 킬 정도로 너무 노골적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 치안이 좋은 도시에서는 집집마다 육중한 방범용 창이나 문을 설치할 필 요가 없다. 이 이치를 모르는 도시 관리자들이 만약 근본적으로 빈곤 상 태를 개선하려 하지 않고 방법에 중점을 둬 범죄의 온상을 뿌리 뽑으려 한다면 아무리 비싼 방범 시스템으로도 창궐하는 도둑을 막을 수 없다. 시장 금리 변동의 역사는 적어도 5000년이 넘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대부터 금리 리스크는 문명의 진화와 함께 존재해왔다. 이는 현대 역사 에만 존재하는 고유한 문제가 아니다. 산업혁명 시대, 증기기관 시대 및 달 착륙 시대에도 금리 리스크는 존재했다. 다만 '유로 달러'가 나타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금리 변동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화폐 가치가 안정된 덕분에 금리 변동이 금융시장에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 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금본위제를 폐지하면서부터 화폐 가치의 안정성은 깨져버렸다. 달러화의 과잉 발행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 화폐가 불안정해졌 다. 금리가 심하게 요동치고 환율도 기복이 심해졌다. 금융시장은 마치 치안이 나쁜 도시처럼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투자자들은 너도 나도 리스크 헤지에 매진했다. 이는 금리 스와프, 통화 스와프, 신용부도 스와프 및 자산증권화 등의 파생상품이 빠르게 생겨나고 확장할 수 있었 던 근본 요인이었다. 요컨대 파생금융시장의 기형적인 팽창은 경기 회복 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화폐 혼란의 결과물이었다. 리스크 헤지는 보험과 같다. 세상이 점점 뒤숭숭해지니 보험이 더 필 요해지는 것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태평성대이기는커녕 말세가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리스크 헤지를 하려면 비용이 든다.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리스크 헤지를 할 경우 사회적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집집마다 방범용 창이나 문을 설치한다고 해서 치안이 좋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을 파 는 장사꾼만 좋은 일을 시켜주게 된다. 도시의 주민들은 안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갈망하지만 방범용 창이나 문을 파는 장사꾼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치안이 더 나빠지기를 바란다. 실물경제 기반의 대국에서는 파생상품시장 규모가 커질수록 산업 부 문이 지출하는 보험 원가가 상승한다. 이 비용은 실물경제 성장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하고 성실하게 본분을 지키는 사람들만 착취를 당한다. 이 토록 험악하고 열악한 생존 환경에서는 선량한 사람도 간악하게 변하고 근면한 사람도 교활해지게 마련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리스크 헤지로 인해 금융 리스크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파괴력이 큰 금융 재앙이 초래된다는 사실이다.
- 저장성 원저우(溫州)의 부동산 투기꾼 부대가 한때 중국의 각도 시를 휩쓸면서 부동산 가격을 뒤흔든 적이 있었다. 월스트리트 부동산 투 기꾼도 이와 마찬가지로 2012년 초부터 미국 동서 해안과 중부 지역을 휩쓸며 부동산 가격의 대폭 상승을 이끌었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압류주 택 재고는 크게 감소했다. 소문이 퍼지면서 세계 각지의 핫머니까지 대량 유입되자 부동산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금융자본을 이용해 부동산시장의 반응을 이끌어내려던 미국의 목적은 즉시 효과를 나타냈다.
- RBS 채권은 세계 최초로 주택 임대료를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이다. 월 스트리트의 수많은 자산 증권화 상품 중 최신 형태의 채권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채권을 만들어 내 일 발행한다"는 월스트리트의 이념에 꼭 부합했다. 이론상으로는 주택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다. RBS 채권은 규모, 신용등급, 만기일과 리스크가 각기 다른 수천 만 건의 임대료 수입을 하나로 묶어 표준화된 채권 상품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MBS (주택담보부 채권)와 성격이 같다. 차이점이라면 양자의 담보물 이 다른 것이다. MBS의 담보물은 월부금에 의한 현금흐름인 데 반해, RBS의 담보물은 임대료에 의한 현금흐름이다. - MBS와 RBS는 모두 주택을 담보물로 하는 채권이다. 블랙스톤이 1차 로 발행한 RBS 채권 규모는 약 2억 4,000만~2억 7,500만 달러로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담보로 삼은 주택자산 가치는 약 3억~3억 5,000만 달러 였다. 담보로 제공된 임대주택은 1,500~1,700채로 한 채당 평균 17만 2,000달러의 현금흐름을 발생시킬 것으로 예상됐다. 이는 주택 한 채당 월평균 임대료를 1,500달러라고 가정할 경우 약 10년 치 임대료 수입에 맞먹는 액수였다. 요컨대 RBS 채권이 기대 이상으로 잘 팔린다면 이는 블랙스톤이 보유 주택을 변칙적으로 매각한 것으로 리스크는 모두 채권 매입자에게 전가된다. 만약 채권이 디폴트에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 블랙 스톤은 담보로 제공한 주택을 투자자에게 기념품으로 넘겨주고 유유히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이미 챙길 돈을 다 챙겼으니까. - 미국 부동산시장은 2012년 3월부터 반등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부동 산시장의 진정한 회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동산시장은 매수자 시장이 아니라 투기꾼 위주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시장의 반등이 일반 서 민들에게는 별로 득이 되지 않는다. 부동산 가격 상승의 최대 수혜자는 주지하다시피 월스트리트 금융기관들이다. 2008년 금융위기 발생 후 중산층은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월스트리트 금융기관들을 구제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금융기관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중산층의 집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강제로 인비테이션 홈스에 입 성하도록 만들어 중산층의 고혈을 더 짜냈다. 이로써 중산층은 삼중의 피 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 본질만 따지면 은행은 사회 자산을 보관·관리하고, 사회에 화폐 서비 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수취하는 서 비스 비용이 곧 은행의 정당한 수익이다. 이를테면 차입자가 은행에 지급 하는 대출 이자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화폐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은행 의 전통 업무는 많이 변질됐다. 은행은 화폐 서비스 독점 공급자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이용해 다른 분야에서 점점 더 많은 수익을 얻고 있고, 최 종적으로 이를 합법화했다. 1930년대 대공황 이전에는 은행의 주식 투기가 허용돼 예금자의 돈이 높은 위험에 노출됐다. 주식 투기를 통해 번 돈은 모두 은행의 수익이 됐 지만 주식 투자로 돈을 잃고 은행이 문을 닫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예 금자에게 돌아갔다. 은행의 모험 행위는 예금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금자의 돈을 유용하는 강도짓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예금자의 돈이 이런 불 필요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엄격히 구분하는 글라스 스티걸 법이 제정되었다. 예금보호제도를 도입한 목적 은 납세자의 보증을 받는 상업은행으로 하여금 고위험 투기의 유혹을 물 리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투자은행은 여전히 위험한 투자를 할 수 있으나 유사시 국민 세금으로 구제금융을 받으려는 기대는 버려야 했다. 대영제국 시대에 은행은 모험의 대가가 상당히 컸다. 은행이 파산할 경우 은행가는 개인 재산을 털어 예금자에게 무한한 배상 책임을 져야 했 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유한책임 형태의 은행이 성행하기 시 작했다. 하지만 엄격한 금본위제도 아래에서 은행은 감히 고위험 투자에 손을 대지 못했다. 예전의 영국 은행이 보수적인 전통을 간직했다면 미국 은행은 카우보이처럼 모험을 즐겼다. - 1960년대부터 달러화 공급량이 대폭 증가하면서 금융기관의 '돈으로 돈을 벌려는 욕망도 점점 더 강렬해졌다. 탐욕은 모든 장애물을 밀어 던 지고 급기야 사람들의 이성마저 빼앗았다. 1970년대에 금본위제가 폐지 되고, 80년대에는 금융 자유화가 추진된 데 이어 90년대 말에는 글라스 스티걸 법마저 폐지됐다. 21세기에 이르러 금전만능주의가 팽배하면서 다양한 규제와 국경을 초월해 오직 이익만 좇는 광란의 시대가 열렸다. 18세기의 유럽, 19세기 의 영국, 20세기의 미국에서도 지금처럼 금전이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에 너지를 발산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끝이 없는 탐욕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했고, 또 다음번의 더 큰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 돈을 향한 무분별한 탐욕을 어떻게 다스리 느냐는 것은 전 세계적인 난제가 되었다.
- 미국에 있는 JP모건의 예금이 어떻게 런던으로 '날아갔을까? 또 CIO는 어떻게 이 돈을 투자금으로 굴릴 수 있었을까? 추측컨대 환매채 재담보 방식으로 자금을 런던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JP모건은 Fed 계좌에 수천억 달러의 초과지급준비금을 예치해두고 있 었다. 그런데 JP모건이 Fed로부터 0.25%의 쥐꼬리만 한 이자 수입을 얻 기 위해 이 자금을 대출로 내보내지 않고 그냥 '방치해 리 없었다. 이 는 고수익을 좇는 은행의 특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은 환매채시 장을 통해 자금을 이전하는 교묘한 수법을 동원했을 것이다. JP모건은 환매채시장에서 초과지급준비금 계좌의 '유휴 자금'으로 국 채를 수취해 담보물로 삼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역환매 조작'이다. - 회계 기준에 따르면 이 경우에도 유휴 자금은 여전히 JP모건의 대차대조 표에 남아 있게 된다. JP모건은 삼자 간 RP 시장의 양대 청산은행 중 하나 이기 때문에 담보물을 재담보 설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국채 자산을 런 던의 CIO 부서에 재담보로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런던 금융시장에서 는 재담보 횟수를 제한하지 않는다. 따라서 CIO는 이 국채를 재담보로 제공하고 런던의 RP 시장에서 자금을 빌린 다음 이 자금으로 고위험 고 수익성의 IG9 시장에 투자했다. JP모건이 CIO 부서를 런던에 설립한 것 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럴 경우 JP모건의 초과지급준비금 계좌에 있는 유휴 자금 액수는 한 푼도 줄지 않으므로 합법적으로 Fed로부터 0.25%의 이자까지 챙길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남은 것은 화폐의 '허울뿐이고, '영혼'은 벌써 RP 담보 사슬을 통해 런던으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 JP모건의 사례는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월스트리트의 다른 큰손들이라고 같은 방법으로 초과지급준비금을 이전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RP 시장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많은 학자들은 Fed 계좌에 미국 대형 은행의 초과지급준비금이 아직 2조 달러 이상 '방치돼 있어서 이 은행들의 재무 상황이 매우 좋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사실 거액의 자 금은 벌써 바다 건너 고수익성 도박장에서 투기에 사용되고 있는데도 말 이다. 이 자금은 당연히 예금자의 돈이다. 이 돈으로 위험한 베팅을 해서 돈 을 따면 열매는 JP모건을 비롯한 은행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반면 투자 실패로 파산이라도 하면 불쌍한 납세자만 피해를 입는다.
- 모든 기술 혁명과 사회 혁명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진정한 혁명은 발생 초기에 아무도 그것이 혁명이란 사실을 모른다. 반면 처음부터 혁명 이라고 떠들썩하게 거론되는 것은 결국 나중에 흐지부지되면서 사라져버 린다. 1990년대부터 혁명이라는 단어는 월스트리트에서 남용돼 왔다. '전 기자동차 혁명', '풍력에너지 혁명', '태양광 혁명', '에탄올연료 혁명'에 이 어 '셰일가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없 었다. 모두 금융권에서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 억지로 가져다 붙인 타이 틀에 불과하다. 물론 기술적 방향이 틀리거나 기술 자체가 나쁜 것은 아 니다. 단지 자본시장의 지나친 탐욕에 의해 과대평가된 것이 문제라면 문 제인 것이다. 굳이 혁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까지 붙여가면서 과대평가하는 이유는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부를 빼앗기 위해서이다. 월스트리트 이익집단의 목적이 재물이라면 석유, 군수산업이라는 특수 이익집단은 재물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사람의 목숨까지 해친다. 이익집단이 국가의 정책과 법률 을 제멋대로 주무를 때 특정 집단의 탐욕은 제도적 탐욕으로 변질된다.
- 전쟁은 부의 재분배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전쟁은 참전국 정부로 하여금 부자 집단의 소득을 가난한 참전자에게 나 눠주도록 강요한다. 즉 정부는 강제적으로 대규모적인 이전지급을 할 수 밖에 없다. 90%의 가난한 집 자제들은 전시에 군인에게 지급하는 임금, 전후 제대 군인에게 지원하는 대학 등록금 및 군인 의료복지 등 전쟁을 계기로 금전적 지원과 보다 더 평등한 발전 기회를 제공받는다. 1940년대 초부터 상위 10% 부자 집단의 국민소득 점유율은 대폭 하 락했다. 1927년의 50%에서 1942년에 35%로 하락했고, 1942년부터 1982년까지 미국 90%의 중하층은 국민소득의 약 67%를 차지했다. 상위 10%의 부자들이 국민소득의 33%밖에 차지하지 못한 이 시기가 바로 미 국 경제가 최고의 안정과 호황을 누렸던 '40년 황금시대'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의 분배 메커니즘은 부자 집단의 불만을 샀다. 특 히 미국 인구의 0.1%를 차지하는 최상위 부자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 다. 1927년에 국민소득의 10%까지 점유했던 이들이 1975년에 이르러 국부의 2.6%밖에 차지하지 못하자, 급기야 부자 집단의 불만은 분노로 이어졌다. 1970년대에 록펠러 가문을 주축으로 한 미국의 지배집단은 사회적 부 의 분배 메커니즘을 철저히 바꾸기로 결심했다. 대공황 이후로 서서히 수 립된 복지국가 제도를 전복하고, 부자의 자산 확장을 방해하는 각종 걸림 돌을 제거함으로써 예전처럼 소수의 부자 쪽으로 부가 집중되는 분배 구 조를 만들기 위해 앞장섰다.
- 1973년, 존 록펠러는 《제2의 미국혁명(The Second American Revolution)》 이라는 책을 통해 부의 재분배 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록펠러는 개혁을 통해 정부 권력의 분권화를 실현해야 한다면서 정부의 기능과 책임을 최 대한 개인에게 이전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일련의 경제 사 례를 인용해 정부의 금융, 상업 관리는 하등 필요가 없다는 사실, 사회복 지에 대한 지원은 국가 재화의 낭비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 자본이 그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상응한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만이 국가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역설했다. 록펠러의 <제2의 미국혁명》은 부자들의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욕망에 불을 지폈다. 부자들의 사회적 부의 재분배에 대한 갈망은 미국 전역에서 신자유주의 바람을 일으켰다. 부자들이 방향을 제시하면 문인들이 떼를 지어 여론을 조성했다. 사상계, 학술계, 언론계 인사들까지 가담해 그야말로 폭발적인 정부 비판 운동을 벌였다. '저효율, 무능, 낭비, 적자, 인플레 이션' 등 온갖 꼬리표를 붙여 정부를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기관으로 매도 했다. 상위 10% 부자들은 1970년대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불만을 가지 고 있던 중하층을 교묘하게 이용해 금융 부문과 다국적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까지 제거하고자 시도했다. 툭 까놓고 말해서 정부의 사회적 부의 재분배와 공공복지에 대한 지원 은 부자들이 국부를 자유로이 지배하는 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었다. 부자 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약육강식의 원시 생태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 정부는 부자들이 빈곤층의 부를 갈취하는 것을 제약할 수 없을뿐더러 가 난뱅이들이 반항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의무까지 감당해야 했다. - 부자 집단은 1976년부터 '제2의 혁명'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록펠러 의 금전적 지원 아래 엘리트들이 설립한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는 지미 카터 조지아주 주지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삼각위원회의 핵심 멤버 26명 은 대통령 측근으로 포진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카터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카터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 금융 규제도 서서히 완화 되기 시작했다. 이후 레이건 대통령은 탈규제와 사유화에 중점을 둔 정책 을 밀어붙였고, 조지 H. W. 부시 행정부도 레이건 정부의 정책을 이어받 아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도입한 '금융서비스 현대화법'은 금융 탈규제 정책의 완결판이었다. 이 법안으로 인해 정부는 금융업의 핵심 지대에서 철저하게 밀려났다. 이후의 조지 W. 부시 대통 령은 한 술 더 떠 정부 권력을 울타리에 가둬넣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버 락 오바마 역시 부자 집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빈부 격차를 미국 건 국 이래 최고 수준으로 심화시켰다. 제도적 탐욕에 의해 모든 규제가 타파되기 시작했다.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정부 권력을 밀어내는 것은 기득권 그룹의 목표이다. 이들은 공공부문 사유화, 금융 부문 자유화, 다국적기업 독점화, 은행의 거대화 등 모 든 업종에서 '탈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부자들이 주도한 제2의 혁명의 타깃은 당연히 정부와 가난한 사람들 이다. 1978년부터 2008년까지 40년 사이에 부자의 국민소득 점유율은 점차 상승해 1927년 수준을 다시 회복했다. 상위 10% 부자들이 국민소 득의 50%를 석권했고, 상위 0.1%의 최상위 부자들은 국민소득의 10.4% 를 차지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재정적자가 갈수록 증가하고, 국채 보 유고는 수직 상승했으며, 지방정부는 파산의 언저리에 이르렀다. 무엇보 다 90% 중하층의 실질 소득이 1970년 수준으로 퇴보했다. 역사는 놀랄 만큼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 상위 10%의 부자들이 국 민소득의 50%를 차지하면서 부의 분열은 한계점을 돌파했다. 2009년에 는 드디어 1930년대의 대공황과 비슷한 규모의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그 리고 그때처럼 고용 회복이 어려워지고 양적완화 정책이 효과를 내지 못 해 2013년에 이르러 빈부 격차는 2007년 때보다 더 심해졌다. 부자들의 국민소득 점유율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했다.
- 큰 잔치를 벌이려면 그럴듯한 메뉴가 있어야 한다. '자산 향연'의 메인 메뉴는 풍선처럼 점점 커지는 부채였다. 은행 장부상 대출은 자산으로 분 류된다. 국가 채무, 지방 채무, 회사채, 소비 대출, 모기지론, 학자금 대출, 자동차 대출, 신용카드 대출 등 다양한 명목의 채무는 모두 부자들의 자 산이었다. 금리의 꾸준한 하락과 더불어 자산 가치는 끊임없이 상승했다. Fed가 제로 금리를 유지한 데다 QE에 의한 채권 매입 효과까지 더해져 사실상 금리가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지자 부자들의 자산 가치는 천정 부지로 치솟았다. 1976년은 부의 분배 불균형이 시작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이 17세기 식민지 시대 때부터 1976년까지 350년 동안 축적한 총부채 규모는 5조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76년 이후부터 불과 35년 사이에 미국의 부채는 10배 이상이나 증가했다. 35년 동안 축적한 부채가 350년 동안 축적한 부채의 10배였으니, 부채 성장률이 100배에 달한 것이다. 금융위기 발생 이후 미국의 부채 규모는 서서히 증가한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늘어났다. 2008년과 2009년 2년 사이에만 5조 달러의 부채가 새로 증가했다. 이는 1976년까지 350년 동안 축적한 부채 규모에 맞먹는 액수였다. 부채는 현금흐름에 압력을 발생시키는 요인이다. 마찬가지로 거액의 정부 부채와 가계 부채는 국민소득에 큰 압력으로 작용한다. 부채가 급증 하면서 사회적 부의 흐름에도 변화가 생겼다. 부자 집단은 Fed를 등에 업 고 거리낌 없이 가난한 이들의 부를 탈취하기 시작했다. 부채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주식시장에도 충분한 자금이 흘러들었 다. 정부와 노조의 속박에서 벗어난 기업들은 직원 복지를 대폭 감축했 고, 글로벌화 전략을 통해 인건비를 한층 더 줄이고 관세 격차를 이용해 거대한 이익을 얻었다. 다양한 요인에 힘입어 기업 이윤은 놀랄 정도로 성장했다. 더불어 30년 동안 지속된 증시의 강세장 덕분에 주식 배당금까 지 꾸준히 받아 챙기면서 부자들의 지갑은 점점 더 두툼해졌다.
-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권력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 을 남겼다. "수천만 년의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귀중한 것은 눈부신 과학기술 성과도, 대가의 유명한 저작도, 정치인의 거창한 연설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통치자를 길들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치자를 우리 안에 가둬넣 은 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 안에서 당신들과 대화하고 있다." 부시 전 대통령의 말처럼 미국은 정부 권력을 우리 안에 가둬넣었다. 다만 그 우리는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우리가 아니라 금전과 자본의 우 리라는 것이다. 이는 곧 국가가 자본을 통제하느냐 아니면 자본이 국가를 통제하느냐의 문제이다. 민주의 형태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의 실질이 더욱 중요하다. 국민이 국가의 진정한 주인이 되려면 우선 부의 합리적인 분배가 이뤄져 야 한다. 결과가 나쁘면 그 동안의 과정은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
- 《세계사(A Global History)》를 쓴 스타브리아노스(L. S. Stavrianos)는 다음 과 같이 개탄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는 용감하게 개혁을 단행했다. 두 사람은 경선으로 선출된 호민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온화 한 방식으로 토지 분배 제도를 개혁하려고 했다. 그러나 과두 세력의 거 센 반발에 부딪혔고, 반대파들은 심지어 폭력적 수단도 서슴지 않았다. 그라쿠스 형제의 비극으로부터 온화하고 질서 있는 개혁은 절대 성 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마 공화정은 민주정치를 수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는 로마 공화정의 멸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 었다. 이때부터 약 100년 동안 유혈 사태, 혁명, 대규모 내전이 빈발하면 서 로마 공화정은 최종적으로 제정(帝)으로 이행됐다. 지배집단의 탐욕은 로마 공화정의 와해를 부른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했다.
- 화폐경제 시대에는 화폐를 지배하는 사람이 시장을 지배한다. 북송의 문인과 관리들은 “군량을 사는데 50만 관밖에 들지 않았는데도 동남 지 역의 세수입 360만 관이 상인의 주머니에 들어갔다"고 개탄했다. 이는 즉 상인과 은행가들이 50만 관의 원가로 국가 세수 360만관을 약탈했다는 얘기이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징세 대행업자들이 정부의 징세 업무를 하 도급 맡아 국가 세수를 착복하고 국민을 착취한 것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었다. 북송 왕조의 문인 정부와 로마 공화정의 귀족정권은 돈에 관해 서는 상인과 은행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심지어 이들은 상인 및 은행 가들과 한통속이 돼 공공재산을 횡령하기도 했다.
-교자가 크게 환영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관청에 충분한 준비금이 비치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교자 가격이 하락하면 철전을 풀어 시중의 과 잉 유동성을 흡수하고, 반대로 교자 가격이 지나치게 상승하면 즉시 교자 발행량을 늘려 가격 상승세를 억제했다. 이는 금본위 시대에 잉글랜드은 행이 금 매매를 통해 파운드화 가치를 조절한 것과 똑같은 원리라고 보면 된다. 익주 교자무는 사실상 철전 유통 지역에서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 1023년부터 1077년까지 54년 동안 관영 교자의 가치는 일관되게 안 정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이 때문에 가끔 사람들이 교자만 요구하고 철전 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1짜리 지폐를 사기 위해 철전 1관 100개를 지불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폐의 실제 가치가 액면가를 초과한 것이다. 대영제국이 전성기를 누릴 때의 파운드화, 2차 세계대전 종식 후의 미국에서 달러화 등이 발행 담보물인 황금보다 더 인기 있 었던 것과 같은 현상이다. 신용은 금보다 더 중요하다. 지폐가 신용을 잃지 않으려면 지폐 발행 자가 신용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게 불가능한 일이고, 정부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다.
- 탐욕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은 축적이 가능하고, 생산은 진보가 가능하고, 과학기술은 발 명이 가능하고, 물질은 개선이 가능하고, 생활의 질은 향상이 가능하지만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성은 영원히 진화하지 않는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다. 북송 왕조와 로마 제국은 몰락의 원인, 과정, 결과까지 놀랄 정도로 비 슷했다. 역사가 놀랄 정도로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는 것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본성이 놀랄 만큼 똑같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북송 정권은 군사적 실패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북송의 국력은 재정 위기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탐욕에 의해 무너졌다. 탐욕이 성행하면 토지 겸병이 일어난다. 토지가 집중되면 세수 불균형 이 생긴다. 국고가 비면 화폐 가치가 하락한다. 또 백성의 재력이 고갈되 면 내란과 외환이 잇따른다. 화폐를 살피면 탐욕이 보이고, 겸병이 일어나면 우환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제약회사는 식품산업과도 손잡고 함께 돈벌이에 나섰다. 맥도날드, KFC 등에서 파는 고칼로리에 지방 함량이 높은 정크푸드는 대중의 건강 을 해친다. 코카콜라, 펩시콜라와 같은 탄산음료는 위를 상하게 하고 아를 썩게 만든다. 이밖에 유전자 조작 식품도 인체에 심각한 피해를 초 래한다. 이런 음식을 습관적으로 섭취해서 환자가 많아지면 이제는 제약 회사가 나선다. 이들은 특히 빨리 죽지도 않고 꾸준히 약을 써야 하는 고 지혈증, 고혈압, 고혈당과 같은 만성질환자를 좋아한다. 제약회사 입장에 서 환자는 지속적으로 현금흐름을 창출해주는 '우량자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미국의 처방약은 유럽과 일본의 동종 약품보다 가격이 50% 이상 더 비싸다. 미국 정부가 의약품 가격에 대해 '방임' 정책을 실시하기 때문이 다. 미국을 제외한 대다수 선진국들은 제약회사가 멋대로 약값을 책정하 지 못하도록 감독하고, 제약회사의 마진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통제하고 있다.
- 생산성이 빠르게 향상되고 경제가 번영을 구가하는 시기에는 부자가 빨리 부유해지고 서민이 천천히 부유해져도 부자에 대한 사회적 태도는 그저 부럽다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 속도가 둔화되고 일부 지역 또는 일부 업종만 크게 발전할 때는 부자는 더 빠른 속도로 부유해 지는 데 반해, 서민의 실질 소득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한다. 이때에는 사 회적 인식이 부자를 질투하는 쪽으로 바뀐다. 만약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 는 상황에서 부자가 창출이 아닌 겸병을 통해 사회적 부를 탈취하고 엄청 난 이익을 얻게 되는 때는 진취적 성격이 무분별한 탐욕으로 변질된 경우이다. 이때 서민의 소득은 하락하고 사회적 인식은 부자를 증오하는 쪽으 로 흐른다. 부자에 대한 '동경'이나 '질투' 내지 '증오'의 사회적 태도는 한꺼번에 나타나지 않고 점진적으로 표출된다. 1980년대와 90년대의 대부분 시기 에는 전 사회적으로 부자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부터 금융위기 발생 전까지 부자를 질투하는 시선이 점차 증가했다. 2009년부 터는 '처우푸, 원수 같은 부자들)'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하기 시작했 다. 이는 중국 경제 성장의 질과 양 및 수혜 범위에 서서히 변화가 생겼다 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호황일 때에는 부자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부를 점 유해도 사회적으로 용인이 된다. 그러나 일부 지역이나 일부 업종만 호황 이라면 부자는 스스로 탐욕을 절제하고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정상 비율 에 따라 부를 나눠 가져야 한다. 한편 경기가 침체 내지 불황일 때에는 욕 심을 버리고 부를 양보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부 자에 대한 증오심' 확산을 막을 수 있다. 또 일반 서민의 소득과 소비가 증가하면 장래에 부자에게도 더 큰 득이 될 수 있다.
- 부동산세의 도입은 부동산시장의 공실률을 낮추는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이다. 부동산세를 도입하면 부동산 보유 비용이 대폭 상승 하기 때문에 부동산 수급 개선과 물량 부족 해결 효과가 곧바로 나타난 다. 부동산세의 주요 목적은 세수정책을 통해 부의 분배 흐름을 조절하고 경제 자원의 균형적인 재배치를 도모하려는 데 있다. 중국의 부동산시장은 분명 평평하지 않고 심하게 왜곡돼 있다. 오바마 의 의료개혁이 수박 겉핥기에 그친 것처럼 중국의 부동산세 도입도 난항 을 겪고 있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제도적 오류 시정 메커니즘이 효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부동산세 추진의 가장 큰 걸림돌은 지방정부이다. 땅값이 오르면 집값 도 오르고, 높은 집값은 역으로 땅값 상승을 부추긴다. 지방정부는 이런 토지 가격 상승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런데 부동산세의 도입으로 인해 부 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땅값도 따라서 하락하므로 자연스럽게 지방 재정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최근 많은 지방에서 인프라 사업에 거액을 투자 했다. 이 자금은 대부분 융자나 은행 대출을 받은 것인데, 이런 부채를 떠 받치는 토지 매각 수입이 줄면 큰 타격을 받을 것이 뻔하다. 금융 시스템도 부동산 가격 하락을 원치 않는다. 담보자산인 토지의 가격이 하락하면 건설업 대출과 주택 담보부 대출의 디폴트 비율이 상승 하면서 자본금 부족을 초래하고 수익 창출 및 주가에 영향을 미친다. 이 밖에 부동산산업 사슬은 위아래로 수십 개 산업과 연결돼 있다. 금융 시 스템은 이 수십 개 산업 분야에서도 톡톡한 이익을 얻고 있다. 그런데 부 동산시장에 불경기가 닥치면 관련 산업의 자산 품질이 하락해 수익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부동산 개발상은 직접 부동산을 통해 돈을 벌기 때문에 당연히 부동산세 도입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한다. 이에 반해 지방정부와 금융 기관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동산을 이용해 떼돈을 버는 부류이다. 이들 이 공통의 이익을 토대로 형성한 트라이앵글은 너무 견고해 깨기가 쉽지 않다. 중국 정부의 다양한 부동산 규제 정책이 이 트라이앵글 앞에서 속 수무책이라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 B. C. 451년 호민관이 '12표법'을 제정했다. 채무 때문에 병사를 노 예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로써 로마 최초의 성문법이 탄생했다. 이후 영토 확장을 거듭하며 여러 지 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통치자들은 모든 사무를 법률에 따라 다스리게 되었다. 이러한 로마법은 세계 금융체계를 완성하는 데 매 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법률 가운데 로마법을 계 승하지 않은 것이 없다. 로마법이 없었다면 유럽의 경제번영도, 은행 도, 주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법은 경제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을 만들어냈다. 바로 오늘날 금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과 권리와 의무의 동등성이다. 하지만 당시 로마는 노예제 사회로 이른바 사유재산, 자 유권 등은 노예주에게만 해당될 뿐 노예에게는 전혀 딴 세상의 이야 기였다. 노예 자체가 일종의 재산에 속하는데 어떻게 노예가 재산권 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물론 로마법 이외에도 고대 인류사회에는 여러 가지 법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로마법이 지금까지 이어지 고 있는 것은 법조항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다. 사실 로마법에는 고 대 노예제 사회의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가령 채권자가 채무자를 죽이거나 땅을 몰수하는 등의 조항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로마법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로마법에서 비롯된 법률이 비로소 독립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 문이다. 법률에 따라 공평한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반드시 재판을 통 해 죄를 정하고 형벌을 내려야 한다. 또한 특정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는 그에 부합되는 특정한 행위가 존재해야 한다. 법정을 통해 죄의 유 무가 확정되면 반드시 법으로 정한 권리나 의무를 집행해야 한다. 이 것이 바로 법의 신성함이다. - 로마 공화정은 군인들의 피로 세워진 나라로, 광활한 지역을 말발굽 으로 달리며 하나하나 정복해나갔다. 그러나 막상 유럽 지역 전체를 정복한 뒤에는 올림포스 신들의 현명함과 명석함을 저버리고 뻔뻔함 과 저속함만이 남게 되었다. 귀족들은 무자비한 약탈로 부를 축적하며 평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외면했다. 공화정 말기, 귀족과 평민들의 빈 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 소유자들 이 땅값을 올려서 팔 수 없도록 토지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결 과 원로원의 원로들과 귀족들의 반감을 사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 오늘날 고대 해저 유물을 발굴할 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저울 과 검이다. 바이킹족이 유럽을 약탈하며 모은 거대한 자금은 상업자 본이 되었다. 동양과 아라비아 지역에서 온 상인들은 바이킹족의 든 든한 자금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9세기 후반 북유럽 스칸디나비 아 지역의 황무지에는 어느새 번화한 상업지구가 들어섰다. 비르카 시장에서는 향료, 비단, 양모, 포도주, 유리, 청동기 등 당시 가장 사치스러운 소모품들이 집중적으로 판매되었다. 바이킹족은 본격적으로 상업활동에 나섰다. 862년 바이킹족은 슬라 브 지역에 키이우 공국을 세웠다. 이곳 역대 국왕들의 가장 중요한 업 무는 병사들을 이끌고 각 지역의 성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성을 약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성을 돌아 다니며 밀랍, 모피 등을 사들여 해마다 콘스탄티노플로 운송했다. 키 이우 공국은 작은 공국이었지만 흑해, 발트해, 카스피해 간의 교역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유럽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덕분에 그동안 아라비아 상인들이 지 중해 상권을 장악하며 값비싸게 팔던 동양의 상품들 가격이 크게 하 락하면서 대량으로 유럽에 유입되었다. - 911년 바이킹족의 수장인 롤로 Rollo 또한 노르망디 공국을 세우고 본격적인 상업활동에 나섰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북해까지의 항 로를 개척했다. 그 후 2세기 동안 아라비아-지중해 항로가 점차 시들 해지면서 이 항로가 유럽 해상무역의 주요 통로가 되었다. 과거 바이 킹족이었지만 해상무역을 하면서 그들 역시 해적의 출몰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해적은 바로 같은 바이킹족 출 신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쌍방 모두 상대방에게 위협적인 존 재였기에 쉽사리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이들은 육지에서의 안전한 상 품 운송을 위해 유럽 곳곳에 성을 세워 상품을 보관하고 무역거래를 했다. 이렇게 해서 바이킹족은 유럽에서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었 다. 1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발트해, 북아프리카, 인도까지 발길이 닿았다. 이처럼 왕성한 무역활동은 도시 발전과 경제 부흥에 도화선 역할을 했다. 벨기에의 사학자 앙리 피렌느Henry Pirenne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외부의 자극과 사례가 없었다면 농업문명 상태에 고착되어 있던 서유럽이 그토록 신속하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이킹족은 2세기 동안 유럽 대륙을 활보했지만 그 대가로 수만 명 이 목숨을 잃었으며, 모든 해적들이 돈을 벌어들인 것도 아니었다. 또 한 남편을 잃은 바이킹족의 미망인들은 비참한 생활을 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은 『덴마크 여인의 하프 연주에서 “...... 기나긴 밤 외로운 젊은 미망인은 슬픔을 억 누를 길이 없고......"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 10세기 후반 대부분의 바이킹족은 해상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북 유럽 본토에서는 씨족 부족사회 체제가 무너지면서 강력한 왕권체제 가 등장했다. 이제 바이킹족들은 평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다. 또한 1000년 무렵 북유럽인들은 그리스도교에 동화되어 대부 분 개종하게 되었다. 북유럽 사회는 서유럽을 약탈한 해적들의 세계였지만 서유럽은 북 유럽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서유럽 사회는 그리스도교를 통해 북유럽을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970년 덴마크 왕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1000년에는 아이슬란드 왕실이 다신 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1024년에는 노르웨이 교회가 정식 으로 설립되었다. 1066년 노르웨이가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바이킹 족의 신화도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 1119년 경건한 기사 아홉 명이 모여 템플 기사단을 결성했다. 그들 은 하느님 앞에서 가난, 고행, 신앙심, 복종을 맹세했다. 수십 년 뒤 템 플 기사단은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키는 가장 핵심적인 군사력이 되었 다. 훗날 성 요한 기사단. 튜턴 기사단도 템플 기사단을 본떠 만들어 진 기사단이다. 그런데 사실 템플 기사단은 전혀 가난하지 않았다. 그 들은 예루살렘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재물을 수중에 넣었다. 그들은 참회자와 약탈자로서 이중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심지어 일 각에서는 템플 기사단이 예로부터 전해져오던 로마 제왕의 묘에서 엄 청난 보물을 발굴했다고 주장한다. - 여하튼 템플 기사단은 예루살렘의 수호자로서 왕국을 세우고, 예루 살렘에 참배하러 오는 그리스도교도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템 플 기사단은 돈을 약탈하는 재주는 뛰어났지만 정작 전투력은 형편없 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셀주크튀르크족의 반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쫓 겨나고 말았다. 동방원정의 목표를 위해 교황과 왕실은 템플 기사단이 계속해서 활 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템플 기사단은 그들에게 실망만 안겼다. 더 이상 그들이 바라는 대로 무력을 휘두르 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템플 기사단의 주된 역할은 하느님을 위해 솔 선수범하여 목숨을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대신하여 하느님 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전장에 보내는 것이었다. - 교황과 왕실로부터 돈을 받은 템플 기사단은 그 돈을 밑천으로 새로 운 십자군에게 대출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 군단이 있는 곳 마다 분점을 설치했다. 그 후 십자군 원정이 수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템플 기사단은 유럽과 중동 지역에 1,000여 개에 달하는 분점을 보유한 하나의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는 세속과 그리스도교 교의가 일체화된 조직으로서 지역, 업종, 국가를 초월한 국제적 금융조직으 로 발전했다. 템플 기사단은 상업에 대해서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환전 이 매우 좋은 돈벌이라는 사실은 금세 알아챘다. 이로써 신십자군은 여러 나라에 분포된 템플 기사단의 분점에서 증명서 한 장만으로도 쉽게 현금을 바꿔 쓸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일반 상인들도 템플 기사단의 송금체계를 이용하게 되었다. - 독특한 규칙으로 템플 기사단은 대외적으로 명망을 쌓으며 명예를 얻었다. 템플 기사단은 사유재산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돈을 모으 게 되면 죽은 뒤에 템플 기사단의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신앙에 기 초한 이러한 징벌은 금융 활동의 위험부담을 크게 줄였다. 훗날 템플 기사단의 규칙에는 하느님을 대하듯 주군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서약이 추가되었다. 이는 오늘날 고객 당사자 이외에는 그 누구도 돈 을 인출할 수 없는 스위스 은행의 규칙과도 비슷하다. 템플 기사단의 독특한 규칙은 그들에게 명성과 신뢰를 가져다주었다. 1232년 영국 대법관이 체포되자 영국의 헨리 왕은 대법관이 템플 기사단에게 맡겨놓은 재산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사단 은 위탁인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재산을 내놓을 수 없다고 거 절했다. 1250년에는 프랑스의 왕 루이 9세가 이집트 정벌에 나섰다가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다. 프랑스 대신들은 템플 기사단이 관리하고 있던 루이 9세의 돈으로 국왕의 보석금을 지불하려고 환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템플 기사단은 이 역시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13세기 후반에 이르자 템플 기사단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세력 이 큰 조직으로 발전했다. 보유하고 있는 장원과 영지가 약 9,000곳에 달했으며 연간 수입이 600만 파운드를 넘었다. 당시 영국 왕실의 연 간 수입이 3만 파운드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라는 사실 을 알 수 있다. 이는 템플 기사단의 금융업이 본래의 단순한 저축에서 송금, 신탁관리로 확대되면서 전통적인 은행업을 담당하게 되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템플 기사단의 엄청난 부는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결 과를 초래하고 만다.
- 역사적으로 볼 때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1337~1453년) 역시 특 별한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전쟁의 결과가 매우 우연적이었으며 두 나라 모두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기는커녕 왕권 약화라는 결과를 초 래했다. 반면에 전쟁을 지탱하던 금융체계는 공전의 발전을 이루었 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도 그 전쟁으로 금융이 크게 발전하리라 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1328년 임종을 앞둔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는 매우 황당한 유언을 남겼다. 후사가 없으니 영국 국왕이자 그의 외조카인 에드워드 3세에 게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외국인을 국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프랑스 귀족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래서 귀족들은 샤를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를 내세워 왕위를 계승 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백년전쟁이다. 하 지만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하다. 당시 플랑드르는 프랑스의 모직공업 도시로 영국 양모의 집산지이 기도 했다. 플랑드르에 군침을 흘리던 프랑스 왕실은 급기야 플랑드 르에 있는 영국 상인을 체포하고 상회의 특권을 빼앗았다. 이로 말미 암아 프랑스 왕실은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었지만 영국은 주된 재정 수 입원을 잃게 되었다. 양모 판매 루트가 차단되자 이를 묵묵히 두고 볼 리 없는 영국이었다. 1337년 11월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 부대가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쟁이 100년 동안 이어지며 양국 모두 피폐해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 사실 전쟁은 이익 다툼에 불과하다. 돈과 양식을 훔치고 삶의 기반 을 빼앗는 것이다. 백년전쟁에서도 충분한 자금만 있었다면 프랑스 왕 은 궁수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영국 궁수들 도 모두가 용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영국 왕과 프랑스 왕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는 모두 '돈이 수행한 게 임'이었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매우 곤궁해서 전쟁을 벌일 만한 여유 가 없었음에도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엔 치욕적인 패배를 맞게 되었다. 1360년 영국과 프랑스는 브레티니 조약(Treaty of Brétigny, 백년전쟁 당 시 브레티니에서 맺은 휴전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칼레 항구와 아키텐 지방을 영국에게 할양했고 1364년에는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런던 감 옥에서 사망했다. 백년전쟁의 첫 번째 대결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 렸다.
- 가격혁명과 무역 발전이 반드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 다. 그렇지 않다면 스페인이 그토록 빨리 몰락하고 대신 네덜란드가 해상 강국의 위치를 차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즉 무역 발달은 부 국강병의 충분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필요조건은 반드시 재산을 보호 해줄 존재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점이다. 제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봤자 누군가가 빼앗아가거나 훔쳐 가면 무슨 수로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스페인은 국가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가 격혁명 과정에서 스페인 상인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 을 만큼 정치와 밀착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 가의 배후에는 항상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바로 독일의 야코프 푸거Jakob Fugger 가문이었다. 이 가문 때문에 스페인은 왕실 독점에서 상인 독점으로 바뀌어 부가 극소수 사람들에게 집중되 었다. 때문에 훗날 스페인은 세계 패권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 앞서 언급했듯이 통화팽창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스페인은 이 를 증명하는 좋은 사례다. 푸거 가문은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며 왕실 을 제멋대로 조종했다. 그 결과 해외에서 약탈한 금과 은은 왕실과 푸 거 가문이 독점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많은 돈을 흥청망청 써댔다. 부는 왕실과 부유한 상인에게 집중되었고, 교역상품은 대부분 사치품이었으며, 자본은 국내 상공업에 흡수되지 못했다. 즉 해외탐험으로 약 탈한 금과 은이 국민들에게는 전혀 혜택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투자방식은 푸거 가문을 통해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16 세기부터 푸거 가문은 유럽 각국의 왕실과 교황청에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푸거 가문은 유럽 전체의 채권자로 명성을 날렸다. 대신 스 페인이 해외탐험을 통해 애써 가져온 은덩이는 모두 국외로 유출되었 다.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의 피와 땀의 대가로 축적한 부는 영국, 프 랑스 등지로 유입되어 그 나라 자본시장의 화폐를 풍족하게 했다. 하 지만 정작 스페인은 해외 투자를 통해 얻은 수익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스페인이 해외탐험을 통해 금과 은 을 약탈하는 행위가 국가의 유일한 기간산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국가에게 이는 치명상과 다름없었다. 어차피 해외 식민지에서 약탈로 거액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에 자국의 국 가산업을 발전시킬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17세기에 들어 암스테르담의 금융업은 유럽 왕실을 대상으로 한 대 출을 전문으로 하게 되었다. 하지만 1756~1763년 동안 유럽에서 7년 전쟁 (1756~1763년에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 대국들이 둘로 갈라져 싸운 전쟁)이 터지자 네덜란드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7년 전쟁은 유럽의 모든 왕실에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유럽 대륙은 물론 지중해, 북아메리카, 쿠바, 인도, 필리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국내 금융업자가 각국에 빌려준 돈은 국내에 보유한 현금(금과 은)의 15배에 달했다. 세계적으로 유통 되는 화폐를 보유한 국가에게 이처럼 대규모 대출은 거의 재앙이나 다름없다. 일단 어느 한 은행에서 실물화폐로 교환하지 못할 경우 전 체 은행업은 물론 세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쟁이 7년 동안 지속되면 망하는 국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7년 동 안 지속된 전쟁은 참전한 유럽의 모든 왕실을 무너뜨렸다. 그중에서 도 가장 큰 낭패를 본 것은 네덜란드 은행이었다. 1763년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도 암스테르담은행은 대출해준 돈의 이자도 받지 못했고 여 러 은행에서는 대규모 인출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때문에 43개의 은행이 파산했다. 이때부터 암스테르담의 금융업은 쇠락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는 세계 패권을 다투는 최후의 보루를 잃게 되었다. 네덜란 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가 독점무역으로 크게 흥하는 동안 영국 은 명예혁명과 자산계급 혁명을 겪었다.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의 쇠락은 적수에게 화려한 장미꽃 한 다발을 바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패권을 장악할 국가가 새롭게 성장하면서 인류는 현대문명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 당시 영주의 토지는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었 다. 하나는 농노가 농사를 짓는 땅이고 또 하나는 장원의 공유지였는 데 양쪽 땅 모두 부업으로 목축업을 할 수 있었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목축업만을 하게 된 땅은 바로 장원의 공유지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인클로저 운동 당시 토지를 빼앗긴 농노와 산업혁명의 기반이 된 무산계급은 결코 동일한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 었다는 사실이다. 인클로저 운동은 16~17세기에 일어났고 산업혁명 은 그로부터 최소 1세기 뒤에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클로 저 운동으로 농경지를 잃은 농노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실 농경지를 잃은 농노는 없었다. 18세기 후반까지 영국의 농민 수는 계속해서 증가 추세를 이루었다. 그럼 농경지를 목축지로 바꾸 지 않았단 말인가? 목축지로 바뀐 땅은 모두가 공유지였다. 본래 농경 지가 아니라 목축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는 것이다. 전국이 목축업에 주력한다고 해서 강대국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전국이 목축장으로 변하고 농노가 농경지를 잃 고 떠돌이가 된다고 해서 주력 산업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어느 시대든 토지는 중요한 사회적 부다. 하지만 사회적 부의 증대 는 물질적 생산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토지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절실하다. 토지는 그저 토지일 뿐 다른 생산방식을 응용해야만 비로소 부의 증대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을 강대국으로 키운 토대는 목축업의 배후에 있는 수공업의 발 전이었다. 새로운 생산방식은 기존의 농업 노동력을 해방시킬 수 있었 다. 농업 노동자들이 그동안 생계 터전이었던 땅에서 벗어나게 된 것 이다. 이로써 영국 국내 방직업은 단숨에 성장하면서 유럽에 필요한 옷감의 대부분을 생산하게 되었다. 때문에 역대 역사가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통렬히 비판하지만 칼 마르크스는 오히려 이렇게 평가했다. "당시 혁명은 자산계급 시대의 서막을 열면서 새로운 시대를 창조 했다." 인클로저 운동이 잔혹했는가? 인클로저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양심 도 없는 사람들이었나? 농노들의 생활은 비참해졌는가? 대답은 모두 "그렇다"이다. 상당수 농노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땅을 떠나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잔혹한 수단으로 노동자를 착취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랑자가 되어 떠돌지언정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는 것은 꺼려할 정도였다. 그래서 1601년에 제정된 빈 민구제법의 법률 규정을 핑계로 건강하면서도 일을 하지 않고 떠도는 부랑자의 경우 3회 이상 체포되면 사형에 처했다. 이를 두고 왕실과 자산계급의 파렴치한 결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인류에게 삶은 고난이었기에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최고의 이상이었다. 죽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이상은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령 영국에서 방직기 술 발명을 두고 산업혁명이라고 일컬은 것도 사실 당시에는 옷을 입 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꿈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 가는 것조차 힘든 각박한 생존환경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당시 인 류 최고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서양인과 동양인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혹독한 자연환경에 맞서 싸웠고 이는 전혀 다른 생존 방식이 되었다. 가령 동양은 황제를 중심 으로 한 왕권체제, 유럽은 분권체제가 형성되었다. 이후 동양과 서양 에는 서로 다른 사회체제 속에서 각각의 가치관이 생겨났다. 오늘날 사람들은 왕권체제와 분권체제는 물과 불처럼 상반된 것이라고 여기 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수천 년의 역사를 거듭하면서 왕권체제와 분권체제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시대마다 제각각 다른 해답이 나 왔다.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이에 대한 정답을 내놓을 수 없다. 다만 분권체제가 왕권체제보다 우월해지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 부터다. 외부의 도전에 왕권체제는 비교적 유리한 편이다. 가령 백성들을 혹 사시켜 수십 년에 걸쳐 만리장성을 쌓는 동안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 을 잃었지만 결국에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거대한 장벽이 세워졌 다. 이 장벽은 명청시대까지도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견고한 대문 역할 을 했다. 하지만 왕권체제에도 단점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경쟁이 없다 는 사실이다. 왕권사회는 피라미드 구조를 띠고 있는데 그 꼭대기에 는 황제가 있고 황제는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백성들 을 핍박하고 자원을 얻어낼 수 있다. 피라미드 아래로 내려갈수록 권력은 약해지고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도 줄어든다. 이러한 구조 에서 왕권은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으므로 끝도 없는 착취와 약탈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착취가 피라미드 최하위층의 생존환경을 극한으 로 몰고가면 돌이킬 수 없는 폭력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왕권에 저항 하는 이들의 목표는 자신의 이득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 권을 창출하는 데 있다. 새로운 왕권이 창출되면 새로운 피라미드 사 회가 만들어진다. 동양의 사회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는 순환을 했다. 기득권 세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이 권좌를 차지한 통치자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약탈 하며 그들의 재산권을 빼앗고 개성을 억압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 게 부의 축적에 대한 욕망을 기반으로 한 산업혁명이 발생할 수 있겠 는가? 서유럽은 왕권체제를 원치 않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왕권사회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로마의 카이사르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등 서유럽의 통치자들 가운데 동양처럼 왕 한 사람 에게 권력이 집중된 전제군주 체제를 꿈꾸지 않은 이는 없었을 것이 다. 하지만 서유럽 민족의 변천은 연속성이 없었다. 로마가 아테네 도 시국가를 정복하고, 게르만족이 로마를 침공하고, 바이킹족이 게르만 국가를 침범하는 등 매시대 일어난 각 민족의 정복전은 한결같이 파 괴적이었다. 일단 이민족이 침입하면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한 부와 경 제적 기반이 초토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 역시 하나의 민족, 하 나의 왕조를 통해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서유럽은 원 시사회와 같은 권력 평형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 권력이 평형을 이루는 조건 아래에서 서유럽 각 지역의 실력은 균형 을 이루게 되었다. 약소국은 강대국과 정면충돌할 경우 무력으로 복 속되기 쉬웠으므로 충돌을 피하거나 양보했다. 때문에 서유럽의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10만 명 이상이 동원된 대규모 전쟁은 아테네와 로 마제국 시대의 몇 차례뿐이었다. 서유럽은 11세기까지만 해도 해적의 침입에 전전긍긍했고 도시와 영주는 작은 세력을 이루어 외적에 대항했다. 하지만 낙후된 농업생 산으로는 상비군을 유지할 수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를 때까지 도 유럽의 문명은 아테네 시절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 설적이게도 유럽의 낙후는 시행착오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봉 건영주제는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환경 조건을 제공했다. 영주에서 국왕에 이르기까지 일원화된 왕권체제가 세워져 있지 않아 각 지역은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이루었다. 비교적 우수한 해상운송 조건은 북유 럽 시장을 발달시켰고 기사도 정신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상업정신의 토대가 되었다. 서양의 분권체제는 이렇게 완성되어 갔다. 동양의 집권적 왕권체제와는 달리 유럽의 제도는 이성적으로 변천 했다. 물론 무수한 시행착오와 숱한 생명의 희생으로 얻어낸 합리적 이고 이성적인 제도였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유럽 민족문화에 통일성 을 부여했다. 마침내 영국에서는 의회와 보통법 체계가 마련되었고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유럽은 공업화와 시장의 변혁을 거쳤고, 시장교역은 현대 경제활동의 토대가 되었으며 인류가 생존경제(인간 다운 생활을 해나가기에 적합한 정도의 생산활동을 영위하는 경제)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전쟁은 세계 전쟁사상 하나의 기적이었다. 오 히려 전쟁이 경제발전을 촉진시켰으니 말이다. 독립전쟁은 아메리카 대륙의 경제활동을 제약하고 압박하는 영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로써 전 세계의 상선이 이곳을 분주히 오가며 활발한 교 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강국이 되는 길은 어쩌면 이처럼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 1840~1850년대의 서부 개척과 미국과 멕시코의 영토 전쟁은 광대 한 토지를 미국에 안겨주었고 철도와 운하는 상업 운송의 동맥이 되 었다. 낮은 운송 비용과 빠른 운송 속도로 상업 발전에 활기를 더해주 던 때에 캘리포니아 금광의 발견으로 화폐가 넘쳐났다. 이러한 조건은 산업혁명 이후 미국 기업에 광대한 시장을 형성해주었다. 그러나 그 시장도 한도가 있었다. 철도가 광활한 국토를 한데 잇고 국민들에게 충분 한 방직품을 제공해주었을 때도 상품 판매량은 일상 소비수준을 유지 했다. 하지만 시장이 사라지자 시장이 폭발할 때 쌓인 생산력은 당연히 과잉되었고 결국 이러한 악순환의 반복으로 위기가 찾아온다. 1861년 미국에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구 시장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장이 생겨났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이 다시 찾아왔다. - 1861~1865년 미국 남북전쟁의 결과로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고 미 국 경제는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이 없었다면 미국은 위 대한 국가가 될 수 없었을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 싶다. "독립전쟁과 마찬가지로 남북전쟁은 그 저 결과가 위대했을 뿐이다"라고 말이다. 전쟁은 북부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1861년에 파산한 북부 의 은행이 1857년 금융위기 시절에 파산한 은행보다 더 많았을 정도 다. 전쟁이 터져 남부 농장주들에게 빌려준 대출금 3억 달러를 받을 수 없게 되자 파산에 이른 것이다. 1857년의 경제공황은 증권시장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그래도 회생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뉴 욕 증권시장에 주가 폭락을 가져왔고 결국엔 모든 주식들을 휴지조 각으로 만들어버렸다. - 링컨은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데 도대체 어 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때 링컨이 생각해낸 방법은 너무도 단순하 고 어리석었다. 재무부 명의로 새로운 지폐를 찍어내는 것이었는데 바로 지폐 뒷면이 녹색으로 인쇄된 그린백 greenback이었다. 어마어마 한 규모의 그린백이 발행되자 사람들은 통화팽창의 위기에 대비해 집 안의 금고에 금을 쟁여두기 시작했다. 1863년 의회는 국가은행법을 통과시키고 정부에 그린백 3억 달러 를 발행할 권리를 부여했다. 상업은행은 그린백을 비축해야 하고 그 린백의 절반은 뉴욕 중앙은행에 보관하도록 했다. 이로써 링컨은 전 국의 화폐를 통일하고 중앙은행을 재건함으로써 전쟁 기간 중 혼란에 빠진 화폐 상태를 정리했다. 남북전쟁의 결과는 상당히 드라마틱했다. 전쟁을 하려면 물자가 필요하다. 전쟁 전 산업의 90%를 제조업이 차지했던 북부는 기존의 산 업을 기반으로 삼아 약간의 구조를 수정했다. 가령 수도관 생산라인 은 라이플총 생산라인으로 개조하고, 의류는 군복으로, 탈곡기나 파 종기 등은 전차 생산라인으로 각각 개조했다. 미국 역사상 새로운 공 업 투자가 시작된 것이다. 북부의 농업도 전쟁을 통해 발전 기회를 얻 었다. 전쟁으로 노동력이 감소하자 탈곡기, 파종기 등 대형 농업 기계 설비 생산량이 군수 제품과 함께 동반 성장했다. 그 결과 1861~1862 년 사이 영국으로 수출되던 북부의 밀은 수출량이 세 배나 증가했다. 어느 시대든 화폐는 증권시장을 자극한다. 화폐는 증권시장이라는 총의 탄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가 건강할 때에만 실물경제와 상호 원동력이 된다. 월스트리트는 지폐와 주식이 동시에 크게 증가한 것에 주목했다. 산업이 나날이 발전하자 월스트리트도 호황을 누 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다우존스 지수가 없었기 때문에 거래량이나 뉴스, 사건 등을 통해 당시 큰 호황을 누리던 증권시장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 1894년 중국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날 즈음 미국은 이미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공업품 생산량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생 산량을 합한 것과 비슷했다. 미국은 이미 패권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 고 미국에 대적하는 국가는 마음대로 응징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미국은 이러한 영광을 계속해서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제국들처럼 미국의 발전도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 바로 독점법이었다. 기업에게 독점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하물며 세계 최고의 기업을 보유한 경제대국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당시 US스틸, JP모건 등은 세계 시장을 요동시킬 만큼 막강한 기업이었다. 독점은 고이익을 창 출할 수 있고, 독점 단계의 기업은 자연히 자유경쟁 단계보다 개발 비 용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독점은 미국 경제에 엄청난 수익 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사회적 고통도 안겨주었다. 첫 번째 문제는 독점기업이 벌어들인 돈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다. 1913년 록펠러와 J. P. 모건의 재산을 합한 액수는 미국 전체 자산의 3 분의 1을 차지했고 세계적으로는 10분의 1에 해당했다. 참으로 엄청 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문제는 독점기업이 연방정부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의원들을 조 종했고 더 나아가 미국 정부의 내정과 외교정책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 문제는 노동자들이 가난에 찌들었다. 부가 소수의 사람들에 게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이 얼마나 궁핍한 생활 을 해야 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수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어떤 책에서는 유럽의 금융 대결이 제1차 세 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는 맞는 말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독일 두 나라의 금융전쟁이었다. 유럽의 경제 자원을 모두 소모하고 나서야 전쟁이 끝났지만 전쟁으로 승리의 왕관 을 차지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다. 군사력을 동원하여 무력 투쟁을 하기에 앞서 두 참전국은 금융 방면 에서 상대 국가의 경제를 와해시키려고 시도했다. 1914년 7월 말 영 국은행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어음 할인율을 3%에서 10%로 올려 자 금이 잉글랜드 땅에서 회전되도록 유도했다. 그러자 베를린은 즉각 패닉 상태가 되었다. 독일 은행에서는 대량인출 사태가 발생했으며 한 달 사이 예금액이 20%나 줄어들었다. 독일 은행의 처리 방식은 매우 단순하고 강압적이었다. 금태환을 중 단하고 국채를 화폐체계에 포함시켰다. 이는 화폐 발행량을 늘리는 것과 똑같이 매우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금본위제 시대에 금태환을 중단한다는 것은 외국에서 대출을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을 끊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때마침 사라예보 사건이 터졌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1914 년 8월 2일 독일이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했다. 무릇 전쟁은 돈을 필요로 한다. 이론적으로는 전쟁을 치르는 나 라는 세금 징수로 비용을 충당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다른 나라에서 전쟁 비용을 대출하여 조달한다. 그 이유는 첫째, 전쟁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거두거나 국내에서 대출을 할 경우 국민의 지지도가 하락할 수 있고 자금 조달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둘째, 전쟁에서 이길 경우 외국에 빚진 돈을 패전국에게 전가할 수 있기 때 문이다. 가령 중국은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일본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때 배상금의 대부분은 일본이 다른 나 라에게 빚진 돈을 대신 갚아주는 데 쓰였다. 독일의 선택은 국내 은행에서 대출하여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었다. 전쟁 시작부터 영국으로부터 융자를 받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미국은 중립을 표방하고 나섰기에 돈을 빌리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 "독일은 유럽 대륙의 경제 중심으로서 독일의 구매력을 회복시켜야만 영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때문에 독일의 부흥은 그 깟 배상금을 받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케인스의 건의에 따라 영국 정부는 독일의 전쟁배상금 정책을 다시 세우게 된 것이다. 미국 공화당도 이와 비슷한 의제를 의회에 내놓았 다. 전승국에 비해 독일은 전쟁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어서 나라를 재 건할 자금이 가장 절실한 상황이기 때문에 배상금이 적을수록 좋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영국과 미국의 지지 아래 독일은 더욱 대담해졌다. 당시 독일은 비르트 내각이 경제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총사퇴하자 11월 우 익 성향의 빌헬름 쿠노 내각이 들어섰다. 그런데 쿠노 내각이 전쟁배 상금 지불기한을 무기한 연장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프랑스는 크 게 반발하며 독일을 맹비난했다. 결국 1923년 1월 11일 프랑스는 목 재 인도를 불이행한다는 명목 아래 총 10개 사단 10만 명에 달하는 병 사를 독일 루르 지방으로 보내 그곳을 점령했다. 루르 지방은 독일의 주요 공업지대로서 독일 총인구의 10%가 거주하며 철강과 석탄 생산 량은 전국의 80%를 차지했다.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은 소극적인 저항정책을 펼 쳤다. 루르 지방의 관리들은 프랑스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며,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주민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프랑스의 루르 지방 점령은 미국과 프랑스,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급기 야 연합국의 전시 동맹관계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영국 수상은 미국을 방문하여 우호적인 회담을 통해 국제 정세 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즉 영국과 미국이 연합하여 프랑스의 독 주를 막고 독일을 돕자는 것이었다. 미국은 프랑스에 타격을 주기 위해 런던 시장에 프랑스 화폐를 대 규모 매도했다. 프랑스의 화폐는 순식간에 급락했고 프랑스 재무부의 신용도도 하락했다. 이어서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 정부의 루르 지방 점령을 비난하며 독일을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선포했다. 돈 앞에서는 친구도 없는 법이다. 이는 국제무대에서도 어김없이 통하는 진리였다.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이 아직 차갑게 식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적국과 연합하여 과거의 우방과 대적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독일은 영국과 미국의 지지 아래 프랑스의 폭력적 침공이 해 결되지 않는 이상 프랑스에 단 한 푼의 배상금도 지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루르 지방에서 단 1마르크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10억 프랑의 군사비를 배상하고 국제위원회를 재 소집하는 데 억지로 동의해야 했다. - 6월 17일 루스벨트는 런던세계경제회의에 참석한 대표단에게 협의 서에 서명할 수 없다고 전보로 통보했다. 미국은 달러의 변동을 막는 그 어떤 약속도 해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어 6월 22일 미국 대 표단은 워싱턴 당국은 화폐가치를 잠시 고정시키는 조치가 현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긴다며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7월 3일 루스벨트는 다시금 전보로 대표단에게 이렇게 밝혔다. "잠정적인 고정환율 정책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운송 금지를 해제하여 제품의 교역을 편리 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럽 시장의 문을 활짝 열어 미국의 수출 상품을 확대시 키려는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 전보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어 렵사리 합의를 이루었던 세 나라 은행가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런던세계경제회의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7월 4일 회의석상에서 맥도널드 영국 수상은 휴회를 결정한 뒤 결정문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6월 16일에는 금융 안정에 찬성했다가 7 월 3일 돌연 변덕을 부려 합의문을 체결할 수 없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고 밝혔다. 더불어 한 국가의 화폐정책 때문에 세계경제회의를 더 이 상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세계경제회의를 돌아보면 조폭사회의 우두머리가 만나 담판 을 짓는 것과 다름없었다. 영국과 미국 가운데 누가 세계의 1인자인 가하는 파워 게임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미국이 기존 의 강자였던 영국의 말을 따르지 않자 회의는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회의가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반 대로 회의가 결렬된 이후로 사람들은 영국의 파운드화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해결해야 할 국내문제가 산재해 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원화된 세계 경제체제 에서 그 어떤 국가도 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우두머리가 자신의 안위만 돌보고 부하들이 죽든 말든 외면한 다면 그것은 우두머리 자신에게도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다. 물론 우두머리에게 자신의 안위는 내팽개치고 부하들만 챙기라고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우두머리에게는 한정된 조건에 서 부하를 보살필 책임이 있다. 부하들이 잘 지내야 조직력도 훨씬 강 해질 수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세계 최강국이 되려면 후진국에게 적 절한 지원을 하며 그들의 경제력을 키워주는 것이 좋다. 7월 런던세계경제회의가 결렬된 그달 런던 은행가에는 대량인출사 태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2억 파운드의 금이 빠져나갔고 급기야 그해 9월에는 금본위제를 폐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후 세계 각국이 앞다퉈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미국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영국은 아예 영국령 식민지를 통 합하여 영연방을 구축했다. 프랑스는 1931년부터 미국으로부터 3억 5,000만 달러에 달하는 금을 찾아갔다. 금본위제를 유지할 능력이 있 던 프랑스 역시 자국의 식민지를 규합하여 독자적인 금본위제 그룹을 형성했다. 미국 역시 강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중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들과 연합하여 '달러 그룹'을 형성했다. 이로써 미국, 영국, 프랑 스가 금융 삼국지를 연출하면서 세계는 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 수많은 교과서나 학술 서적들은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이 미국 월스 트리트의 뉴욕 증시였다고 입을 모은다. 끝도 없는 탐욕이 경제를 무 너뜨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투자자들 가 운데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시장 에서 승자가 될 수 없는 법이다. 실상 1929년 대공황의 진짜 발단은 월스트리트의 뉴욕 증시가 아니 었다. 1929년 당시 미국 전체 증권계좌는 154만 8,707개에 불과했다. 이는 여러 개의 증권계좌를 가진 투자자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150 만 개의 계좌 중에 보증금을 가진 계좌만이 투자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계좌는 50만 개도 되지 않았다. 때문에 설령 당시 1억 2,000만 명 에 달하는 미국인의 계좌를 다 합치더라도 뉴욕 증시가 그처럼 막대 한 손실을 입을 수는 없었다. 물론 원인은 있었다. 다만 뉴욕 증시가 원인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제2차 산업혁명을 단행하여 산업마다 기계화가 이루어졌다. 자동차·라디오 · 청소기 · 냉장고는 이제 더 이 상 사치품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간편하고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고 익숙해졌지만 이러한 풍요로움은 얼마 가지 못했다. 산업이든 제품이 든 새로운 추세가 되고 유행을 타게 되면 처음에는 엄청난 폭리를 취 하기 마련이다. 1980년대 중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냉장고와 1990년대 에어컨을 떠올려보라. 당시 냉장고나 에어컨의 가격을 지금과 비교해보면 참으로 천문학적인 액수라고 할 만큼 터무니없이 비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치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의 자동차업종, 화 학섬유업종, 전자업종은 가히 세계를 뒤바꿔놓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인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폭리도 당연히 뒤따라왔다. 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유망산업이라는 생각에 많은 사업가들이 이업 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체 산업이 확장되면서 유사제품이 시장으 로 쏟아져 나오자 제품의 단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제품이 각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면 이윤은 적어지고 시장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투자금을 회수할 수는 없다. 공장에서는 새로운 제품이 계속해서 출시되지만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 다. 결국 판로가 막히면서 재고품이 창고에 쌓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생산력 과잉'이다. 이는 모든 업종, 모든 제품의 마지막 귀결이기도 하다. 한때 시대적 대세로 유행을 이끌던 산업도 결국에는 이런 운명 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만일 모든 산업이 쇠퇴하지 않고 무조건 성장 만 한다면 정체되는 것은 인류의 진보뿐일 것이다. 물론 산업이 쇠퇴한다고 해서 매번 경제적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아 니다. 폭리를 취한 제품이 전 국민에게 보급되면 시장 포화로 쇠퇴의 길에 접어들지만 곧 새로운 산업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회 의 부가 골고루 분배되지 못한다면 그 쇠퇴는 거의 재앙이 되어 돌아 온다. 앞서 언급했듯이 1920~1929년까지 미국은 독점기업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게다가 부의 불균형은 이미 미국 국내에만 국한된 문 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세계 금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었다. 반면 유럽 은 전쟁의 상흔으로 자금 부족에 시달리며 전쟁 채무조차 갚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할진대 무슨 돈으로 미국의 제품을 구입하겠는가? 부의 분배가 고르지 못하더라도 경제가 잘 돌아가면 대다수 사람들 은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저축이나 별도의 경제적 여 유가 없는 상태에서 경제가 쇠퇴하고 불경기가 닥치면 가난한 대다수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속수무책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수의 부자들은 바보가 아니기에 자신의 돈을 실물경제에 쏟아붓지 않는다. 이 때문에 거품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주식, 부동산, 골동 품, 보석 등 모든 것들이 거품이 될 수 있다.
- 연합국은 돈이 없고, 독일은 돈을 빌릴 데가 없고, 미국은 돈이 넘쳐나고 파죽지세로 뻗어가는 추축국들 앞에서 영국과 미국은 절망에 빠졌다. 자신들의 형제인 폴란드, 헝가리, 중국, 프랑스가 차례로 추축국에 함 락되고 이제 마지막으로 영국과 미국의 차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술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는 각자 진영을 구축하고 대치 상태에서 전쟁을 벌이 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기계화 부대를 이용해 속전속결로 적진 을 돌파해 깊숙이 침투하는 방식이었다. 이 전술로 폴란드는 2주 만에 함락되었고 유럽의 절반이 44일 만에 독일의 전차 바퀴에 짓밟혔다. 그뿐인가, 불과 한 달 만에 소련 내륙 800킬로미터까지 진군하여 수백 만 명의 소련군을 투항시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독일은 바로 이 전격전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 다. 번개전이라고도 하는 이 전격전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뚫고 전진하 는 속도전이다. 군대가 속도를 높이는 만큼 군사력과 무기 소모도 만만 치 않았다. 속도전을 내려면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전쟁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만반의 준비를 했다. 1937년 2월에는 '제국은행 신질서법'을 공표하여 총통이 제국은행장을 겸직할 수 있도록 했다. 1939년에는 '제국은행법'을 공표하여 지폐 태환을 중단시켰고 중앙은행이 제국에 제공하는 대출액을 총통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때부터 나치스는 중앙은행의 국유화를 통해 전국의 자금을 장악했다.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전쟁 전의 준비로 막상 전쟁이 시작되 면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전쟁 자금을 충당할 또 다 른 방법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대외 전쟁에서 가장 좋은 융자 방법은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 전에서 패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외국에서 돈을 빌리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은가. - 연합국에는 돈이 없었고 미국 군수품 산업체에는 이기적인 사업가 들이 득세를 했다. 이에 루스벨트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무기를 대여해주는 것이었다. 미 연방정부에서 무기를 사들여 연합국 에 대여해주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루스벨트의 싱크탱크는 산더미 처럼 쌓인 의회 문건 속에서 1892년도 판례를 찾아냈다. 공공의 이익 을 보호한다는 원칙에 의거하여 육군의 재산을 대여해줄 수 있는 권 한을 육군 사령관에게 부여한 판례였다. 이 판례에 의거하여 루스벨트는 렌드리스 법 Lend-Lease Act, 즉 무기 대여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판례의 육군 사령관을 대통령으로 바꿔 모든 종류의 국방물자를 대통령이 그 어떤 정부에게도 판매 · 대여 · 교 환해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1941년 5월 6일 루스벨트는 중국을 무 기대여법 적용 국가에 포함시켜 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국의 국민 당정부에 총 8억 4,500만 달러를 원조했다. - 영국 병사들도 현지의 화폐를 봉급으로 지급받았지만 본국의 고시 환율에 따라 달러로 환전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 해방구에는 암시장 이 성행했는데 고시환율보다 훨씬 높은 환율로 거래되었다. 병사들은 금세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들은 암시장에서 시장 환율로 현지의 화폐를 사서 군대 내에서는 고시환율로 달러를 환전했 다가 다시 암시장에 내다 팔아 이익을 챙겼다. 당시 전쟁은 근 3년 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지지부진한 전 투에 지친 독일 병사나 연합국 병사나 모두 주된 관심은 월급봉투였 다.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긴급화폐를 봉급으로 받는 독일 병사보 다 환율 차이를 이용해 돈벌이를 할 수 있었던 연합국 병사가 훨씬 사 기가 높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 무기대여법의 위대한 점은 전시에 연합군 작전을 지원한 것보다는 위급한 순간에 국제적인 협력정신을 발휘했다는 데 있다. 1942년 6월 11일 루스벨트는 연합국의 채무를 탕감해주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전쟁의 대가는 화폐로 계산할 수도, 비교할 수도, 상환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대가는 붉은 피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갚아야 합니다. 하지만 전쟁 비용은 평화 유지와 상호 번영의 방법으로 보상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새로운 전쟁 채무로 새로운 평화를 위태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승리의 평화야말로 우리가 상환받을 수 있는 유 일한 화폐입니다!" 덕분에 무기대여법은 각국의 분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1945년 8월 무기대여법의 효력이 끝나자 미국과 영국은 공동성명을 발표했 다. "무기대여법에 의거하여 연합국이 전쟁 중에 소실하거나 훼손, 소 비한 모든 미국 물자는 그 어떤 나라에도 재정적 부담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신을 근거로 1946년 미국은 영국에 공급한 모든 원조에 대한 구상권을 해지했고 이어서 인도,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벨기에,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노르웨이, 그리스, 네덜란드 등 여러 국가에 대한 채무도 모두 탕감했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경제력이 국가 경쟁력을 결정지어 준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원조가 있었기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 프랑스, 심지어 소련, 중국 등 전 세계가 앞다퉈 달러를 빌렸다. 달러가 오늘날 세계 공통 화폐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기인 한다고 할 수 있다.
- 브레튼우즈 체제는 금 1온스당 미국 달러 35달러를 고정시키고 다른 통화도 미국 달러에 고정시켰다. 다시 말해 달러와 금을 고정환율로 정해서 미국 달러를 국가 간의 결제나 금융거래에 기본이 되는 기 축통화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브레튼우즈 체제는 적잖은 단점이 있었고 일부 단점은 치명 적이기까지 했다. 실상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 부흥을 위해 1922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열린 제노바 회의의 새로운 버전에 불 과했다. 당시에는 미국이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없었지만 지금은 미국의 주도 아래 더욱 까다로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각 나라 의 화폐는 자율적으로 금태환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유일하게 태환 이 가능한 달러마저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만 미국에 금태환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는 세계 각국의 화폐가 '달러의 꼭두각시'가 된 것과 다 름없었다. 국제 금융거래 수단으로는 달러가 유일하며 미 연방은행은 국제 '중앙은행'이 되었다. 오로지 미국만이 달러를 감독 발행하여 자 본주의 세계의 무역과 금융을 조종하게 된 것이다. - 이러한 체제는 당연히 미국에 유리했다. 전후 초기 미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브레튼우즈 통화 시스템 덕분 이었다. 하지만 불평등한 조건 아래 구축된 통화 시스템이 합리적인 통화제도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브레튼우즈 체제에 적잖은 단점이 있었지만 세계 금융사에 진보적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다. 1920~1930년대 국제 금본위제가 붕괴된 뒤 국제통화 시스템은 사분오열되었다. 파운 드, 금, 달러로 대표되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 각자 독자적인 통화 그 룹을 형성했다. 설상가상 무역전쟁과 고관세, 외환 매도 등은 국제적 금융위기를 가져왔고, 결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발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는 국제 금본위제 붕괴 이후 분열되었던 국제통화 시스템을 안정시켰고, 더 나아가 서방 세계는 약 25년 동안 안정적인 금융체계 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이룩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미국의 달러와 금을 고정환율로 정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는 금 준비금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황이나 금융위기를 화폐정 책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달러가 국제화폐였기 때 문에 대출·증여·원조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국제무역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혹자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기타 국가의 수출과 자금 유동을 증대시켜 이 들 국가의 경제 회복과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금본위 체제일 때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경제적 번영을 이룩 했다."
- 1983년 3월 23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 대통령은 이 른바 전략방위구상SDI"을 천명하며 별들의 전쟁을 선언했다. 이를 위 해 레이건은 공개적인 의회 연설로 기금 모금을 전개했다. 별들의 전 쟁은 간단히 말해 미국이 우주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레이저 와 전자포를 이용한 유도탄으로 미국 본토와 동맹국을 공격하는 소련 의 핵탄두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별들의 전쟁 선포로 소련의 핵 은 더 이상 위협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1984년 6월 10일 남태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군은 유도탄을 발 사하여 캘리포니아 공군 기지에서 앞서 발사된 또 다른 유도탄을 160 킬로미터 상공에서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그날 미국의 모든 매스컴은 일제히 이 소식을 주요 뉴스로 알렸다. 이 실험의 성공으로 별들의 전 쟁 계획이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 1980년대는 미국에게도 매우 분주한 시기였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별들의 전쟁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강구했는데 그중 하나가 소련의 오일 달러를 바닥내는 것이었다. 별들의 전쟁이 가동되던 첫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상당히 돈 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사우디아라비아의 1일 원유 생산량은 200만 갤런에서 600만 갤런으로 폭증했고 가을에는 900만 갤런에 달했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내려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고 있는 경제학 원리다. 1986년 세계 원유 가격이 불과 반년 만에 1배 럴당 30달러에서 12달러로 하락했다. 원유 가격의 하락으로 소련은 100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이는 소련의 달러 준비금의 50%에 달하 는 액수였다. - 원유 가격이 하락하자 중동 산유국도 경제적 위기에 빠졌다. 이 때문에 소련의 무기 판매액도 20억 달러 감소했다. 이로 말미암아 소련 국민들은 경제적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또 다른 방법은 별들의 전쟁으로 기만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다. 오늘날 별들의 전쟁과 관련하여 적잖은 비밀 문건이 공개되고 있 는데, 그 문건에 따르면 별들의 전쟁의 유일한 목표는 소련이 군비 증 강에 더욱 많은 자금을 투입하도록 유도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1984년 남태평양 해군 기지와 캘리포니아 공군기 지에서 발사한 유도탄 명중 실험도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당시 실험 에서 미국은 유도탄에 추적장치를 부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모든 매스컴에서 이 실험을 크게 보도했던 것은 모종의 목적이 있었 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실험이 진짜였다면 설사 CIA나 FBI라 하더라도 그처럼 중요한 군사 기밀을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별들의 전쟁 계획이 추진된 1983~1993년까지 10년간 미국 의회가 승인한 예산은 350억 달러에 불과했다. 레이건이 호언장담했던 1조 달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달러가 세계화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브레튼우즈 체제 때문 이며 브레튼우즈 체제의 뿌리는 마셜 플랜이었다. 1945년 브레튼우즈 체제는 1929년 대공황의 교훈을 받아들여 '가격 안정, 시장의 융통성 과 다각적 자유무역'을 표방했다. 하지만 브레튼우즈 체제의 목표는 달러를 세계화폐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소련은 차치하고서라도 영 국, 프랑스도 동의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소련은 회의 관련 문건의 승인을 거부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문건의 일부 조항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될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각국에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947년은 인플레이션이 최고 절정에 달한 시기로 독일의 마르 크가 한때 시장에서 사라진 적도 있었다. 화폐제도를 재건하려면 화 폐에 대한 신뢰가 필요했다. 신뢰는 경제력에서 나오고 경제력은 금 보유량에서 나온다. 당시 충분한 금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밖 에 없었다. 각자 자국의 화폐에 대한 유럽인들의 신뢰감을 회복하려면 통화 시 스템이 미국의 달러와 연계되어 있어야 했다. 바로 이때 미국이 마셜 플랜을 통해 서유럽에 대량의 달러를 공급했다. 달러 자금이 여유로워지자 유럽 각국은 대외무역을 진행할 때 달러로 계산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해 달러로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유럽에 충분한 공산품을 제공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으니까. 이렇게 국제무역에서 달러로 계산하는 것이 당연시되자 연쇄효과 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불 범위가 점차 늘어나면서 달러가 서유럽 국가의 통화 시스템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고 마침내 세계화폐 의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마셜 플랜은 서유럽에 무엇을 원 조했을까? 서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나라는 영국이었다. 게 다가 해상 교통도 끊겨 미국으로부터 중고 선박을 대량으로 사들였 다. 독일은 비록 원조받은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미국으로부터 미국 평균 소비량의 두 배에 달하는 주스를 대량 매입했다. 이탈리아는 1억 7,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저렴한 스파게티 면을 구입했다. - 1948년 4월 3일부터 1952년 6월 30일까지, 즉 마셜 플랜이 시행된 지 4년 3개월 만에 미국의 달러는 영국의 파운드를 대신해 세계화폐 의 왕좌에 정식으로 올랐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유럽은 세계무대에서 제 목소리를 낼 만큼 위상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마셜 플랜이 아니었다면 서유럽은 영원히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셜 플랜은 우리가 상상한 만큼 유럽 대륙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늘날 미국의 GDP 비중으로 추산해보면 당시 마 셜 플랜으로 서유럽에 투입된 원조금은 5,000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 는 2009년 중국의 한 해 투자액 4조 달러에 비교하면 매우 적은 액수 였다. 마셜 플랜 시행 기간에 영국은 독일 연방의 두 배에 달하는 거 액의 원조금을 받았지만 마셜 플랜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반면 독일연방은 단기간에 경제적 위기를 헤쳐나와 1948년에는 미국과 여러 서 유럽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마르크화 개혁을 단행했 다. 마침내는 오늘날 유로화의 기반이 된 마르크화 통화체제를 구축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셜 플랜은 유럽 통합의 기점이 되었을까? 그렇지는 않 다. 마셜 플랜이 없었더라도 당시 서유럽 6개국 간에 석탄철강 공동 계획이 가동되고 있었기에 유럽의 부흥은 유럽 국내 시장에 의존하여 전개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주도 아래 조직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도 결국에는 해체되고 말았을 것이다. 미국이 "우리가 아니었으면 영 국은 진작 독일에 합병되었을 것이다"라고 비난해도 영국은 결국 유 럽 공동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마셜 플랜은 유럽 부흥의 핵심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마셜 플랜이 아니더라도 유럽의 80, 90% 국가들은 비록 과정은 힘들 었겠지만 결국 경제위기를 헤쳐나왔을 것이다. 그럼 마셜 플랜이 아 니었다면 서유럽은 소련의 세력 범위로 복속되었을까? 그것 역시 아니다. 마셜 플랜이 아니더라도 서유럽은 사회주의 체제를 견제하며 소련과 대립했을 것이다. -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에서 미국이 금태환을 못한 다는 것은 은행에 저축한 돈이 휴지조각으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했 다. 1960년에 이르러서는 금 가격이 1온스당 35달러에서 40달러까지 상승했다. 그야말로 달러 재앙이 덮친 것이다. 미국의 군사적 보호가 필요했던 서유럽은 그저 달러 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써 서 도울 수밖에 없었다. 서방 국가들은 달러와 금의 환율 가격을 억제했다. 하지만 1961년 5 월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무려 12년 동안 지속된 전쟁에서 베트콩을 상대하느라 미국은 해외 군수품 구입을 지속적으 로 확대해야 했다. 1968년 서방 국가의 국고에는 달러가 가득 쌓인 반 면 미국은 보유하고 있던 금이 점차 바닥을 드러냈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기 전인 1971년에는 급기야 건국 이래 줄곧 유지하던 잉여외환 보유기록이 끝을 맺었다. 남아 있는 금 준비금은 102억 1,000만 달러로 국가 단기부채인 678억의 15%에 불과했다. 서유럽도 달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가령 마르크는 서유럽에서 가장 강세를 이루던 화폐였는데 서독은 달러 환 율을 유지하기 위해 1971년 4월 연속해서 마르크화를 매도하고 대신 30억 달러를 매입했다. 그 결과 5월 5일에는 개장한 지 한 시간 만에 서베를린 외환시장에 10억 달러의 매도물이 나왔다. 이에 공정시장20 은 정부의 개입으로 폐장이 되었고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스 위스의 외환시장도 모조리 폐장되었다. - 결국 방법이 궁해진 서방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처럼 이중환율 제 double exchange rate system"를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서방 국가 중 앙은행의 금 준비금에는 개인용 금이 아니라는 의미로 녹색 리본을 부착했다. 개인 금의 달러 태환은 자유환율(외환의 수급에 따라서 자유로 이 변동하는 환율)을 적용하고, 녹색 리본이 부착된 금은 공정환율 official exchange rate28을 적용했다. 동시에 특별인출권을 만들었는데 바로 국 제통화기금의 SDR이다. 이는 국제수지가 악화되었을 때 국제통화기 금으로부터 무담보로 외화를 인출할 수 있는 권리다. SDR은 국제 결 제에 결제통화로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대체통화로 실제 상품을 구 입하는 데는 사용할 수 없다. 서유럽에서 달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처럼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미국은 한층 황당한 요구를 했다. 현재의 화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 각국에 자국의 화폐에 대한 평가절상을 요구한 것이다. 유럽 국가의 화폐가 평가절상되고 달러가 평가절하되면 유럽 국가의 국내 생산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유럽 국가들은 당연히 거부 의사를 표시 했다. 이에 미국은 세계화폐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결정을 했는데 이 는 곧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를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 의무를 중단하는 동 시에 해외 상품에 대해 10%의 부가세를 징수하는 조치를 내렸던 것 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금융 삼국지를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소련 세력을 와해시키기도 전에 서방 세력에 균열이 일어날 판국이었다. 미국의 경제력은 여전 히 강했고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무시할 수 없었던 유럽 국가들은 미 국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1971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서독 등 10개 국가는 워싱턴에서 회 의를 열었다. 서유럽 국가의 화폐를 일제히 평가절상하는 대신 미국 은 10%의 수입부가세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서는 국제 화폐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을 하루라도 빨리 착수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자메이카 회의였다. 1976년 1월 국제통화기금의 임시 위원회는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회의를 열고 킹스턴 체제 Kingston system에 합의했다. 킹스턴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각국에 환율제도의 재량권을 부여하여 변동환율제도 를 인정한 점이다. 이전까지는 각국의 환율이 달러와 금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각국이 환율제도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된 것 이다. 이 세상에 트리핀의 딜레마 Triffin's dilemma"에서 자유로울 수 있 는 화폐는 없다. 하지만 본위화폐 (standard money, 한 나라 화폐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화폐)가 없다면 트리핀의 딜레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에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는 법이다. 킹스턴 체 제는 좋게 말하면 국제화폐의 다원화였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다 원화 환율은 시장의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멋대로 이루어졌다. 자유자재로 변동하는 환율 은 경제를 조정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각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다. 가령 라틴아메리카의 채무 위기, 멕시코의 금융 위기, 브라질의 채무 위기,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 등이 있다. 이때부 터 세계 금융은 더 이상 평화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레이건 대통령이 퇴임할 당시 미국의 채무는 2만 6,000억 달러에 달 했고 그중 외채는 4,000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채권국 이자 동시에 세계 최고의 채무국이 된 것이다. 1987년 외국 자본이 미 국에서 얻은 수익은 미국 전체 해외 수익보다 높았다. 채무는 미국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급선무가 되었다. 레이건 집권 8년 동안 미국인들은 빚을 내어 소비하기 시작했다. 개 인 신용카드 사용액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가계 저축은 1987년 3.8% 이하로 떨어져 1947년 이래 최저 기록을 세웠다. 때문에 혹자는 말한 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레이건이 그 씨앗을 뿌렸고, 부시 부자 와 클린턴이 덩치를 키웠으며, 마지막에 오바마가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 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거품경제와 1990년대 후반 경제위기를 수면 으로 부상시킨 기폭제에 불과할 뿐 결코 원인이 아니었다. 허황된 거 품 속에서 일본인들은 이른바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일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고 금융 투자만으로도 국외의 자산을 매입 하고 고소비를 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를 나쁘다고만 할 수 는 없다. 돈이 넘쳐나면 그만큼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은 것은 인 지상정이다. 다만 돈을 버는 방법과 분배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일본에서 금융 거품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곳은 금융 산업자본이 었다. 일본 국민들은 눈부신 경제성장의 과실을 모두 누렸고 금융 거품 속에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만끽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등 상 당한 이득을 맛보았다. 하지만 금융 거품이 계속 이어졌다면 자본은 점차 한 곳에 집중되고 일반 시민들은 자신의 집조차 장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일본의 금융 거품이 무서운 이유는 거품 자체가 일종의 '부의 불공 평한 재분배 시스템'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 운 점은 이러한 부의 재분배가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어 얼핏 보기에는 공평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이다.
- 동남아시아 경제성장 모델의 결함 태국 바트화가 폭락했다. 바트화의 폭락은 경제 도미노 현상의 첫번 째 신호탄으로서의 시작을 알렸을 뿐 태국은 결코 최후의 경제 실패 국이 아니었다. 바트화의 폭락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긴 소로스는 다 음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바트화의 폭락이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를 몰고왔기 때문이다. - 겉으로 보기에는 인도네시아 경제환경이 태국보다 좀 더 건전해 보 였다. 인도네시아 화폐 루피아ruphia는 이미 태국발 금융위기가 닥치 기 전에 점진적으로 평가절하를 시행하여 경제위기에서 탈피했고 이 는 국민들에게 큰 신뢰감을 주었다. 7월 11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환율 변동폭을 12%로 확대했는데 이때까지도 인도네시아 증시는 경제 안 정이라는 확신 속에서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참모습이 아니었다. 1998년 1월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의 경제위기가 점차 안정될 즈 음 루피아화의 환율이 급락했다. 1997년 7월 환율을 기준으로 계산하 면 200% 하락했고 증시는 50% 하락했다. 이로써 사회에 심각한 혼란 이 야기되었고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 금융위기 중 가장 심각한 타 격을 입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도네시아는 기타 아세안 회원국에 비해 경제가 가장 엉망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인도네시아 경제의 참모 습이었다. 인도네시아의 금융시장은 상당히 경악스러운 모습이었다. 금융이 약탈자의 도구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인도 네시아 대통령 수하르토Suharto가 심복들에게 즐겨 전하던 선물이 바 로 은행설립 허가증이었다고 한다. 은행설립 허가증을 얻는 것은 국 민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는 수단을 얻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금융 시스템에서 부실 대출률이 높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은행이 아니라 국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기구였다. 1997년 초 인도네 시아의 부실 대출률은 이미 30%를 넘어섰다. 과거 10년간 수하르토 정부는 7% 이상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며 국 민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성장은 국민의 복지를 희생한 대가였다. 비록 경제성장으로 일자리가 늘어났지만 그 렇다고 국민의 복지까지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국민들의 재산상 손 실도 적지 않았다. 사건을 일으켜 국내 갈등의 씨앗으로 만드는 것은 수하르토 정부의 주특기였다. 권력자는 국민들의 무지와 분노를 이용 해 특정 계층 혹은 집단을 희생시켰고 더 나아가 극단적인 폭동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1998년 화교를 대상으로 한 인도네시아 학살 사 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지역의 경제가 조금씩 발전했지만 수하르토 정 부의 정치체제 아래 국민의 부는 특정 집단, 특정 권력자에게만 집중 되었다. 국민들이 저축한 돈은 금융 시스템에 의해 국가가 이미 탕진 한 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나쁜 시장'이다. 이런 상태에서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면 비록 국민들의 생활은 유지되겠지만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기는 어렵다. 쉬운 예를 들면 해외시장에 의존 하여 생산성을 높여도 국민들 개인은 그 부를 누릴 수 없다. 어떤 나 라도 순풍에 돛 단 듯 경제가 영원히 순조로울 수만은 없다. 미국도 그러한데 하물며 동남아시아는 오죽하겠는가. - 1990년대 초만 해도 세계는 동남아시아 경제의 기적에 갈채를 보냈 다. 하지만 1997년 이후 당시의 영광은 더 이상 재현되지 않았다. 이 후 상당수 사람들은 소로스를 비롯한 국제 유동성 자금이 아시아 외 환위기와 경제위기를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아시아 경제를 무너뜨리 기 위한 서방 세력의 음모라고 여겼고, 심지어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는 소로스에게 법적 소송을 제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영국을 보라. 영국 환율체계도 소로스에 의해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영국 총리가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미국이나 소로스에게 책임을 전가하 지는 않았다. 동남아시아의 경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체가 결점이 있는 모델 이거나 혹은 출발점부터 이미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로스의 투자 기법은 그저 동남아시아의 경제 실패를 크 게 부각시켜준 것에 불과하다. 동남아시아 경제성장 모델의 치명적인 결함은 정부의 불합리한 간섭이며, 정부 조직이 경제 간섭을 이익 획 득의 수단으로 삼은 데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설사 수하르토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권력자가 경제를 부정축재의 도구로 사용했을 것 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다. - 신경제의 가장 큰 결과는 미국이 신흥산업을 완전히 독점하게 된 것이다. 창의적 혁신산업으로 미국은 '고적자 고채무'의 생존모델이 지속될 수 있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신경제 시대부터 미국이 세계 금융 패권자의 지위를 악용해 전 세계를 착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착취하고 있다면 왜 전 세계 국가는 앞장서서 미국으로부터 착취를 당하려고 하는 걸까? 그것은 미국의 상품을 사지 않으면 안 되기 때 문이다. 오늘날 세계인이 인터넷 시대이자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미국의 창의력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 옷, 자원은 가장 효율적 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인데 그곳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시대 적 조류의 맨 앞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조류 자체가 미국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창의성의 근원은 개인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어떤 프로그램이나 기획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성은 심사나 승인을 필 요로 하지 않는다. 복잡한 과정의 심사나 승인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 은 창의성이 아니다. 또한 창의성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시장의 이윤이 그 가치를 인정해주니까.
- GM은 1918년부터 '관리자 지주 계획'을 시행했다. 관리층의 봉급 과 기업의 당기 실적을 연계시킨 것이다. 때문에 새로 부임하는 고위 급 관리자는 당기 실적 압박에 시달렸고 인수합병은 당기 실적을 확 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GM은 독일의 폭스바겐처럼 장기적인 기술 개발에 나서지도 않았고, 마이바흐처럼 최고급 수제 기술을 도입하지도 않았으며, 일본 자동차 회사들처럼 연비 문 제를 고려하지도 않았다. 노조와의 관계에서도 관리자가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경우 파업을 초 래하여 당기 실적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컸기에 온건적인 태도 를 취했다. 또한 대리점에게도 판매실적을 종용하지 못했다. 대리점 이 판매실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폐업할 경우 당기 실적에 지장을 초 래하기 때문이다. 대신 GM의 경영진은 해외 인수합병 추진에 총력을 기울였다. 인수합병을 통해 매번 해외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고 단기 간에 당기 실적을 향상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인수합병으로 GM은 공룡기업이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창의성은 점차 사라졌다. GM에게 창의성은 그저 창의적인 홍보 개념에 불과했다. 가령 비실용적인 바이오연료 기술이 그 예다. 1980년대 GM은 바이오연료를 사용하는 소형차 새턴을 출시했고 1990년대에 는 EV1 전기자동차에 투자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기 술 개발 투자액이 크게 줄어들면서 결국은 기술 개발까지 인수합병에 의지하게 되었다. 2000년대 후반 소형차가 시장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적 으로 석유파동이 일자 GM은 그제야 소형차가 자동차 시장을 장악하 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시장의 변화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동안 GM의 인수합병은 판매 루트 확장과 해외 브랜드 인 수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도 GM은 정부가 저유가정책을 유지하 도록 로비를 벌이는 데 거액의 자금을 쏟아부었고 심지어 EV1 전기자동차 개발 프로젝트도 폐기했다. 이 때문에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프리우스가 미국 시장에서 급성장하게 되었다. 장기적인 인수합병으로 GM은 최대 규모의 생산력을 보유하게 되었 다. 하지만 천하의 절세미녀도 나이가 들면 미모가 퇴색하기 마련이 다. 시간의 흐름에 맞게 연륜과 지성을 쌓지 않으면 단순히 미모만으 로 과거의 영광을 붙들 수는 없다. GM은 바로 세월에 미모가 퇴색된 절세미녀와도 같았다. 시대 변화에 맞게 끊임없는 기술력 향상을 도 모하지 않았기에 소비자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GM 스스로 생산력을 조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회사의 고위급 간부들은 판매상에게 강 경한 태도를 취하거나 생산량을 줄이거나 혹은 노조에 압력을 가해 임금을 줄일 능력이 없었다. 2005년 GM 직원의 1일 평균 임금이 80 달러에 달한 반면 도요타는 50달러에 불과했다. GM이 내놓은 전략은 그저 프리미엄 차 혹은 경차를 만들거나 아니면 연구개발 비용을 줄 이는 것이었다.
- 경쟁 상대보다 앞서려면 끊임없는 창조를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창조는 결코 말처럼 쉽지가 않다. 제도 창조든 기술 창조든 순서에 따른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이 때문에 중대한 창조는 매우 큰 의 의가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창조는 매우 어렵지만 각각의 창조마다 엄청난 이익이 따라온다. 하 나의 창조가 생기면 이를 본뜨는 모방자가 벌떼처럼 몰려들고 신흥산 업과 새로운 상품에 투자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로 인류 의 생활이 변화한다. 산업혁명 · 전기혁명 · IT 혁명 등이 그 예다. 모든 창조는 저마다 생명 여정이 있다. 창조의 처음 시작 단계에는 값비싼 사치품으로 생산되다가 점차 단가가 낮아지고 나중에는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면서 창조의 사명이 종료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흔히 생산 과잉이 발생한다. 그래서 서양의 초창기 경제위기 상황에서 는 남아도는 우유가 땅바닥에 버려졌고 넘쳐나는 제품과 기계설비가 부서져 나갔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경제위기의 요인은 국민의 구매 력이 극도로 위축된 것이다. 바로 서양 경제학에서 말하는 유효수요 부족이다. 과잉 생산능력은 구매력이나 유효수요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이는 경제성장 이론에서 '연속형 소멸'이라고 불린다. 창조가 소 멸되어도 투자는 지속된다. 그럼 산업 투자 루트가 없다면 돈은 어디로 갈까? 바로 거품이다. 거품은 매우 아름답고 다양하지만 그 결말은 항상 똑같다. 바로 소멸 이다. 하지만 거품이 소멸되어도 인간은 계속해서 생존해야 하고 지 속적으로 부를 창출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자연스레 약탈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약탈이 극에 달해서 발생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의 목적과 수단은 단 하나다. 돈을 미끼로 더 많은 돈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그 리고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기존의 부를 파괴 하고 새로운 부의 분배를 가져온다. 물론 과잉 생산능력을 위해 새로 운 수요도 창조해야 한다. 이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미 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탈을 반복하는 전쟁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하는 것은 불가 능하다. 이때 또 다른 창조가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기존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경제이론에서 말하는 소 위 '창조형 소멸'로, 간단히 말해 헌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여 이로써 또 한번 번영을 누리는 것이다. - 생존경제에서 벗어나 1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동서양 금융위기의 본질은 시종일관 바뀐 적이 없다. 동남아시아는 수출주도형 전략에 의존하고, 다른 나라의 창조를 모방하고,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경제 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값싼 노동력의 이점을 이용하는 것은 기존의 약탈 방식과 다를 바 없으며 독자적인 창조 능력 또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모방형 창조의 이점이 모두 소진되면 유동성 과잉이 발생하고 그다음에는 위기가 찾아온다. 서브프라임 위기는 본질적인 면에서는 1929년의 대공황과 똑같이 '창조의 잠재력 소진'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하나는 산업혁명의 잠재 력을 소진했고, 다른 하나는 정보화 창조 에너지를 소진했다. 인류의 이성으로 이룬 새로운 창조만이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
- 악순환의 첫 단추는 바로 플라자 합의였다. 플라자 합의는 일본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이 문제 삼았던 것은 대 일 무역 적자였는데, 이것이 비단 일본만의 잘못은 아니었기 때 문이다. 사실 그보다 한참 전부터 미국의 제조업은 계속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미국 소비자들이 자국 제품보다 일본 제 품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미국은 제 조업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노력보다 금융과 같은 서비스업을 키 우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런 선택의 결과로 시장에 일본 제품이 범람하게 되었고 대일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진 것이다. 물론 일본도 잘못이 있었다. '일본식 경영' 혹은 '일본 기업의 경쟁력'을 너무 심하게 자랑하고 다녔다. 하버드대나 MIT 같은 미국 유수 대학의 교수들에게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하고 경영 자 료를 제공하면서, 그들을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 기업의 우월 성을 홍보했다. 그 결과 미국 경영대학원에서 사용하는 교재들에 일본 기업의 성공 사례들이 넘쳐났고, 이것은 역으로 미국인의 감 정을 자극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들은 부동산, 영화사 등을 사들이며 미 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주요 건물들, 미국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영화사들이 하나둘 일본 기업 소유 로 넘어갔고 이러한 행태가 결국 국민적 반감을 유발했다. 일부 산업의 노동조합이나 일부 지역의 시민들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 을 시작했고, 때로 제품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그 리고 이것을 이용한 것이 미국의 정치가들이었다. 그들은 엔화를 평가절상해 일본 제품의 수출을 강제적으로 차단하려 했고, 그것 이 바로 플라자 합의였다. - 그런데 일본 정부의 양보는 플라자 합의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플라자 합의 직전인 1984년에 일본에 금융 협정을 요구해 관철시 켰고, 1986년에는 반도체 협정을 관철시켰다. 특히 반도체 협정은 상당히 일방적인 것이었는데, 일본 반도체 기업의 미국 수출을 제 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해외 반도체를 수입하는 것까지도 미 국이 원하는 대로 강제해 반드시 지키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제시한 반도체 수입 목표에 일본이 미달하 자 1991년 제2차 반도체 협정(신반도체 협정)을 요구했다. 이 신반도체 협정'은 일본의 해외 반도체 수입 목표를 30%까지 끌어 올 린 뒤 미국 반도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반도체까지 수입하도 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었 을까? 미국이 일본 기업의 팔다리를 묶어놓은 사이에 삼성전자나 TSMC 같은 외국 반도체 기업들이 급성장했고, 이것은 결국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요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에 추진된 '미일구 조협의' 내용을 보면 미국의 압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많았다.
- '인구절벽'을 경험한 최초의 선진국 우리나라도 비슷한 문제를 경험하고 있기에 모타니의 지적 중에 특히 새겨들어야 할 점이 많다. 그중 하나는 인구 감소가 수요 감 소를 유발하기 때문에 일본의 역대 정권들이 추진해온 공급 위주 의 정책으로는 문제해결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가 기업의 영 업이나 생산활동, 투자 등을 도와주더라도 인구 충격에 따른 수요 감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장기침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발상 을 180도 바꾸어 수요 위주의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사회 안전망을 촘촘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주는 것이다. 특 히 빈곤층과 한계 빈곤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을 두텁게 해야 한 다. 그래야 그들이 안심하고 소비활동과 생산활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령자들이 생산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생산 가 능 인구의 감소를 상당 부분 커버할 수 있다. 소위 생산가능 인구 의 상한선을 높여주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돈 많은 고 령자에게 충분한 인센티브를 주어서 그들이 소비를 늘리도록 도 와야 한다. 만약 그것이 힘들면 고령자의 자산과 소득을 소비활동 이 왕성한 자녀 세대나 손자 세대로 조기에 이전하도록 해서, 젊은 세대가 더욱 적극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비슷한 방법으로 여성 경제활동 인구를 늘리는 방법이 있다. 일본 사회는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여성들을 전업주부로 묶어두 거나 일을 하더라도 파트타임 잡에 머무르게 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불러내고, 또 파트타임보다는 전일제 로 일하게 하면 인구 충격을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 출산율이 떨어질 것이라 는 우려가 초기에 많았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나 타났다. 취업한 여성들은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고, 덕분에 출산율 이 오히려 더 높아진 것이다. 따라서 정책적으로 더 많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그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 출산, 육아, 교육 등을 지원하는 복지 제도를 더욱 체계적으로 빈틈없이 갖출 수 있 다면 출산율도 올라가고 생산가능 인구도 확대되며 수요도 늘어 난다. 이러한 정책이 공급 위주의 경제 정책과 맞물릴 때 경제가 장기침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모타니의 처방전이었다.
- 4.19 혁명으로 탄생한 장면 내각도 경제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놓았다. 1961년부터 1966년까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 계획에 맞추어 경제개발을 시동했고, 그 이후 5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계 획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이룩한 '한강의 기적'의 핵심은 바로 대기업에 의한 수출 주도 성장 정책이었다. 한정된 기업에 한정된 자금을 몰아주는 정책은, 일본이 경제발전 초기에 사용한 정책이었다.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군에서 근무한 박정희는 일본이 만주국에서 사용한 이 모델을 차용해 수출 주 도성장 정책을 실시했다. '경사발전 모델'이라고도 불리는 이 발전 정책은 은행을 국유 화한 뒤 중앙 관료들이 한정된 자금을 특정 기업에 몰아주는 방식 이다. 경제개발 초기, 열악한 자금 사정 하에서 이 자금을 받은 기 업들은 특혜 금융을 받은 것과 같았다. 인플레이션이 높은 상황에 서 실질이자가 마이너스 수준이다 보니 자금을 받는 것 자체가 특 혜였다. 이 자금을 받은 기업들은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쉽게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고 또한 빠르게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일본의 경우 기업은 자금 지원의 대가로 정치인들에게 '와이로(뇌물)'를 주었고, 정치인들은 이 자금을 활용해 자신들의 정치 적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또 이들은 관료와 은행을 움직여 또다 시 한정된 자금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성장 을 도모했다. 일본에서는 '철의 삼각편대', 즉 정치가와 관료 및 기 업이 서로 유착해 경제를 운영했는데, 이런 방식이 초기 자본주의 성장에는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구조에 더해 특혜 금융을 받은 기업들이 내 수 시장에 머물지 않고 수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더욱 빠 른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1960년대는 섬유, 신발 같은 경공업 제 품을 수출했고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제품으로 방향을 전환해 철강과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전기·전자 제품 등을 수출했다. 그 결과 1960년에 3,28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액이 1970년 에는 10억 달러, 1977년에는 100억 달러로 급증했다. 일본이 경 사발전 모델을 통해 수출을 1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로 늘리 는 데 16년이 걸렸는데, 한국은 7년 만에 100억 달러를 달성하 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 1960년에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도 1977년에는 13배 증가한 1,034달러가 되었다.
-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NTT 도코모가 애플보다 훨씬 앞서 스마트폰을 출시했지만, 내수 시장에만 몰두 하다가 세계 시장에서는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1999년에 도 코모는 세계 최초로 핸드폰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 모드-mode'를 내놓았다. 아이모드는 세계인의 일상생활을 바꿔 놓은 '스마트폰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 앱'이라는 앱 장 터에서 앱을 다운로드해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스템도 아 이모드가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핸드폰에 PC 기능을 결합한 아 이모드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06년 1월에 가입자 수가 4,568만 명을 넘어서면서 도코모는 세계 최대 무선 인터넷 공급자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인들이 열광한 아이모드는 글로벌 시장에서 외면받았을까? 이유는 바로 도코모가 지나치게 일본만의 독자성 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아이모드를 사용하려면 NTT 도메인 등록 이 필수였고, NTT가 자체 개발한 앱만 사용해야 하는 폐쇄적인 방식을 고수했다. 결국 2007년에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며 스마 트폰 시장을 새롭게 열었을 때 아이모드는 일본만의 스마트폰으 로 전락했다. 휴대폰에 인터넷 브라우저를 결합하고 앱을 통해 다 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식은 동일했지만 아이폰은 전 세계의 개발자들이 함께 서비스를 만들어가는 개방형 플랫폼open platform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전국의 중증환 자수를 팩스로 집계하는 모습이 뉴스에 나왔는데, 그걸 보고 모 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 선진국인 일본의 경우 1990년대까지도 팩스가 모든 국민에게 너무나 편리한 통신 수단이었기 때문에,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의 이점이 별로 와 닿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감각에 기름을 부은 것이, 앞서 설명한 ISDN 동 축케이블로 전국의 인터넷망을 구축한 일본 정부의 오판이었다. 우리나라는 ADSL 광케이블로 인터넷망을 구축했기에 국민들이 고속 인터넷을 경험했고, 빠르고 편리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팩스를 보내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동축케이블로 인터넷을 깔아버렸기 때문에 이용자 입장에서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에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는 일본 인 특유의 신중함과 '점진적 개선incremental innovation'이라는 일본 식 접근방법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또 광케이블은 속도는 빠르지 만 설치 비용이 동축케이블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투자비를 회수 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반면 동축케이블은 빠른 시간에 투 자비를 회수할 수 있다는 재무적인 판단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 디지털 기술은 신속하게 보급된 후 사용자가 급격히 늘어나야 투자비가 쉽게 회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처럼 광케이블 로 인터넷망을 구축한 선택은, 아날로그식 판단으로는 무모한 선 택이었다. 그것도 기간망뿐만 아니라 각 가정까지 광케이블로 연결하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 무식한 선택일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영역이다 보니 이러한 무모함과 과감함이 오히려 올바른 선택이 되었고, 일본의 합리적인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잘 못된 것이었다.
-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를 급소라 여기고 찌르려 했으니 한국도 그 보복으로 지방관광을 거부했다. 이것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한국 관광객이 발길을 끊자 지방 중소도시 자민당 의원들이 타격을 받았고, 그들은 서서히 아베 정권에 비판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권 교체의 중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이 현상이 아베 정권의 무모한 수출 규제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일 경제전쟁의 한 단면에 불과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보이지 않 는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 일본은 중국, 러시아 같은 대륙 세력 을 봉쇄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2012년경부터 해왔다. 그리고 이것 이 미중 패권경쟁으로 전이되면서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 선택하지 않는 것을 '전략적 모호성'이라고 비판하면서 어느 한쪽을 선택 하자며 '전략적 명확성'을 주장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그 리고 그 연장선에서 '안미경(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함께하자)'이니 '안 미경미(안보는 미국과, 경제도 미국과 함께하자)'니 하는 주장도 매우 잘못된 주 장이다. 우리나라는 전략적 자율성을 가지고 어느 나라든 자유롭게 교역 하면 된다. 이것이 자유무역이라는 글로벌 보편적 가치와도 일치한다.
- 그런데 국익을 지키기 위해 재미난 행보를 한 나라가 또 있다. 바로 대만이다. 대만은 미중 패권경쟁의 최전방에 위치한 국가로, 비슷한 상황인 우리가 특히 눈여겨봐야 한다. 2022년 8월 미국 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이 대만을 방문했고, 대만 또한 총통 이 미국을 방문해 미국으로부터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는 등 친미적인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미중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대만은 더욱 공격적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했다. 중국이 미사일을 쏘아대고 전투기로 영공을 통과하는 위협을 가해도 아 랑곳하지 않고 철저하게 실용주의 노선으로 나간 것이다. 이 틈을 타 중국 시장에서 우리나라를 제치고 수입 시장 점유율 1위를 차 지하기도 했다. 대만은 중국 시장에서 자국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 한 노력도 꾸준히 하고 있다. 국민당 마잉주 전 총통이 중국을 방 문하는 등 중국과 미국에 양다리를 걸치며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 자녀 세대의 경제 행동도 마찬가지로 달라질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6~7만 달러 시대를 살아갈 세대라면, 기존의 통념과는 다 른 선택을 해야 한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유명한 논문 <우리 손 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0년)에서 다다음 세대를 향한 조언을 유언처럼 남겼다. 그는 이 논문에서 "앞으로 2%대의 경제성장을 할 것이기 때문에 특히 2가지를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는 경제적 비관주의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라는 말이나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이라는 등의 경제적 비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존의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라는 것이다. 특히 돈이나 재화에 대한 지나친 사랑을 버리고 수단보다는 목적을, 효율보다는 선함을 추구하라고 조언했다. 1930년에 발표한 논문이지만, 주요 내용은 2030년의 우리 자 녀 세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국민소득 6~7만 달러 시대를 살 아갈 다음 세대는 경제가 제로 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할 것이라 는 비관주의를 버려야 한다. 선진국이 되었기에 과거와 같은 높은 성장률은 기대할 수 없어도 지속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일 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도 있 겠지만 평균적으로는 1~2%대의 안정적인 성장을 해나갈 것이다. 그러니 우선 경제적 비관주의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세대에 만연한 물질주의, 물신주의도 함께 버려야 한다. 돈이면 최고고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 다. 케인스의 조언처럼 수단보다 목적을, 효율보다 선함을 추구해 야 한다. 돈은 목적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리고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다. 특히 다음 세대는 우리 세대가 남겨준 사회적 자산social asset 향유하며 살아갈 것이다. 한국의 경우 전 국토에 사통팔달로 깔아 놓은 도로나 통신망 같은 인프라, 잘 개발된 관광지나 리조트 등 모든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자산이 축적되어 있다. 이것 은 개인의 자산으로는 계산되지 않지만,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자산이다. 다음 세대는 이것 또한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자산까지 고려한다면 1인당 평균 10만 달러 전후의 소득을 향유하는 셈이 된다. 그러니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 선진국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자주성의 확립 일부 소니 세대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리스펙트'한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 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한국은 어리석게도 근대화의 조류에 올 라타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울분도 함께 있다. 이러다 보니 함께 모여서 메이지 유신을 공부하고 그 본고장 인 야마구치현을 방문하기도 한다. 그러면 야마구치 하기시에 있는 요시다 쇼인의 기념관을 가보기도 하고, 그가 길러낸 후학들의 면면을 보며 메이지 유신의 대단함에 경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곳이 아베의 지역구이고 일본 보수 우익들이 그곳을 의도적으로 성역화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더구나 그 후학들이 조선 총독으 로 부임해 물자를 수탈했던 사실이나 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말 미암아 일본조차도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잘 모른 다. 그리고 그 군국주의는 태평양전쟁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는 사실도 잘 모른다. 일본 근대화의 입구인 메이지 유신만 봤지 그 말로인 태평양 전쟁의 참담한 내막은 잘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범들이 반공 을 기치로 정치가가 되고 일본 사회지도층으로 거듭난 것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패전을 종전이라고 하며 전쟁 책임을 회피하고, 미국을 숭상하고 아시아를 멸시하는 것도 모른다. 또 그들의 아들 딸이 대를 이어 정치가가 되고 사회지도층이 된 것도 잘 모른다. 강상중 전 도쿄대 교수도 메이지 유신의 비틀린 구조를 신랄 하게 비판했다. 국가는 떠올랐을지 몰라도 국민은 버려졌다는 것 이다. 약한 국민과 약한 사회 위에 강한 국가를 건설하다 보니 그 국가가 제국주의로 폭주하여 일본 국민뿐만 아니라 조선과 아시 아에까지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고 설명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강한 국민과 강한 사회를 가지고 있었기에 강한 국가를 견제하면 서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 화폐란 무엇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화폐라고 하면 역사적인 인물로 장 식된 직사각형의 정부 인쇄 종이를 떠올린다. 이것은 가장 잘 알려진 형 태의 화폐이지만 현대 금융 시스템에서 화폐를 구성하는 것의 일부에 불 과하다. 여러분의 지갑을 살펴보고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화폐를 소지 하고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급여는 은 행 계좌로 송금되어 전자결제를 통해 지출된다. 은행 계좌에 표시되는 숫자를 은행예금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부가 아닌 상업은행에서 만든 별 도의 화폐이다. 은행예금은 대중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을 차 지한다. - 실제로 은행예금(bank deposits)은 모든 은행이나 ATM 기기에서 실시 간으로 정부가 발행한 법정화폐로 원활하게 전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은 매우 다르다. 은행예금은 은행의 '차용증서(IOU)'이며 해당 은행이 파산할 경우 그 가치는 없어진다. 반면에 100달러 지폐는 미국 정부의 일부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줄여서 연준)에서 발행한다. 이 100달러 지폐는 미국이 존재하는 한 가치가 있다. 은행예금에는 지폐 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예금을 인출하면 은행에 현금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은행예 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실제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미국 정부가 계좌 소유자에게 25만 달러의 미 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예금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행예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법정화폐만큼 안전하다. 세 번째 유형의 화폐는 중앙은행 준비금(central bank reserves)으로, 연 준이 발행한 특수 화폐이며 상업은행(commercial banks)만 보유할 수 있 다. 고객의 은행예금이 상업은행의 '차용증서'인 것처럼 중앙은행 준비 금은 연준이 발행한 '차용증서'이다. 상업은행의 관점에서 볼 때 화폐와 은행 준비금은 서로 교환이 가능하다. 상업은행은 연준에 전화를 걸어 화폐 배송을 요청하여 은행 준비금을 법정화폐로 전환할 수 있다. 연준이 1,000달러의 화폐를 송금하면 연준 계좌의 준비금이 1,000달러 감 소하는 것으로 대금을 지불하게 된다. 상업은행은 은행 간 결제 또는 연 준 계좌를 가진 다른 기관에 돈을 지불할 때 은행 준비금을 사용하고, 그 외의 기관에 돈을 지불할 때는 화폐 또는 은행예금을 사용한다. 마지막 유형의 화폐는 국채로, 기본적으로 이자를 지급하는 화폐의 일 종이다. 법정화폐 및 중앙은행 준비금과 마찬가지로 국채도 미국 정부에 서 발행한다. 국채는 시장에서 판매하거나 대출을 위한 담보로 사용하여 은행예금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다. 여러분이 대형 기관투자자 또는 수 억 달러를 보유한 매우 부유한 자산가라고 상상해 봐라. 여러분은 은행이 아니므로 중앙은행 준비금을 보유할 자격이 없고, FDIC 보험 한도를 훨씬 초과하는 금액을 상업은행에 예치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엄 청난 양의 법정화폐(Fiat currency)를 집에 가지고 있는 것은 어리석다. 따 라서 여러분에게 미국 국채는 곧 돈이다.
-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는 중앙은행 커뮤니티에서 점점 인기를 끌고 있는 주제이며, 거의 모든 주요 중앙은행에서 이 아이디어를 검토 하고 있다. CBDC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중앙은행에 계좌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일반 대중은 CBDC를 통해 상업은행에 예금을 보유하 는 대신 중앙은행 준비금과 같은 것을 보유할 수 있다. CBDC는 잠재적으로 실물화폐와 은행예금을 모두 대체할 수 있다. CBDC의 핵심 이점은 보안과 효율성으로 선전되고 있다. 비은행은 상업은행 예금의 신용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중앙은행에 무위험 예금을 보유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중앙은행에 계좌를 보유하게 되므로 결제 는 더 빨라질 것이며, 서로 다른 CBDC 계좌로 돈을 이체하기만 하면 된다. 은행 간 결제도 필요하지 않다. 실제로 CBDC의 장점은 환상에 불과하다. 정부의 예금보험은 이 미 은행예금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전자결제는 이 미 즉각적이고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앙은행 디지 털 화폐의 진정한 목적은 재정 및 통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정책 도구이다. CBDC는 정부가 통화 시스템을 사실상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 게 만든다. 정부는 CBDC를 통해 모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 고 있고, 누구에게 송금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정부는 모든 사람의 CBDC 계좌에 마음대로 돈을 인출하거나 입금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 의 CBDC 계좌 이자율을 마음대로 낮추거나 올릴 수 있다. 현재는 이 러한 모든 권한이 민간 상업은행에 있다. 그러나 CBDC 세계에서는 탈세와 자금 세탁이 불가능해지고, 정부 가 국민에게 직접 돈을 지급함으로써 지출을 조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처벌을 위해 사람들에게서 직접 돈을 빼앗을 수 있다. 마이너스 5%의 금리가 경제를 활성화할 것이라는 모델이 있다면, 버튼 클릭 한 번으로 모든 사람에게 즉시 적용하거나 특정인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정부는 CBDC가 자신들의 권한을 크게 증가시키기 때문에 이를 선호한다. 하지만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CBDC는 프라이버시와 개인의 자유에 역사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 시중에 남아도는 현금 때문에 주식시장이 급등할까? 때때로 논평가들은 은행 시스템의 예금 수준을 보고 그 돈이 모두 소비 되면 금융자산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말한다. 중앙은행 준비금 수준이 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은행 시스템의 은행예금 수준은 주로 상업은행의 집단적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은행 예금은 상업은행이 자산을 매입하거나 대출을 만들 때 생성되며 대출 또 는 자산이 상환되면 소멸된다. 따라서 은행예금 수준은 은행 시스템의 대출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투자자가 은행예금으로 주식이나 채권을 매입하면 투자자의 은행예금 은 주식이나 채권을 매각한 사람의 은행 계좌로 들어간다. 하지만 은행 시스템에 있는 은행예금의 총액 수준은 변하지 않는다. 은행예금은 본질 적으로 상업은행 시스템에서 이동하지만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규모 투자는 은행예금의 총액 수준이 높든 낮든 관계없이 이루 어질 수 있다."
- 은행에서 준비금을 빌려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적완화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많은 시장 평론가들은 상업은행의 총 지급준비금 수준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고 왜 은행이 지급준비 금을 대출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중앙은행 준비금은 상업은행만 보유할 수 있으며 연준의 대차대조표를 벗어날 수 없다. 은 행이 보유한 중앙은행 준비금 수준은 연준의 조치에 따라 결정되며 상업 은행의 대출 금액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실제로 상업은행은 언제든지 준비금을 빌릴 수 있기 때문에 대출을 결정할 때 준비금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 상업은행의 대출 제약은 규제 또는 상업적 조건으로 인한 것이다. 상업 은행은 대차대조표 규모, 자산의 퀄리티, 부채의 구성을 제한하는 수많 은 규칙에 의해 엄격한 규제를 받는다. 이러한 규제는 은행 시스템을 더 안전하게 만들지만 대출 가능 금액도 제한한다. 또한 상업은행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경우에만 대출에 관심을 가지며, 디폴트 가능성이 상대적으 로 높은 경기 침체기에는 수익성 있는 차입자를 찾기가 더 어렵다. 2008 년 금융위기의 여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 모기지리츠(mREIT)는 주택저당증권(mortgage-backed securities, 줄여서 MBS)에 투자하는 투자 펀드로, 일반적으로 패니 메이 또는 프레디 맥이 보증하는 기관 MBS에 투자한다. 모기지리츠는 장기적인 자산에 투자하 기 위해 단기적인 대출을 받는 전형적인 그림자 은행이다. 일반적인 모 기지리츠는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1개월 레포 대출을 이용해 15~30년 만기 모기지 증권(주택저당증권)을 매입한다. 장기국채 수익률이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는 상황에서도 모기지리츠는 연간 10%가 넘는 이자를 제공할 수 있었다. 특히 이자 수익을 원하는 개인투자자에게 인기가 높다. 모기지리츠는 자본의 8배에 달하는 레버리 지를 통해 이러한 수익률을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기지리츠는 1 개월 만기 0.3%의 금리로 레포 시장에서 돈을 빌린 후 2.5% 수익률의 30년 만기 모기지 증권에 투자하여 2.2%의 순이자마진을 얻을 수 있으 며, 5배 레버리지로 연간 10% 이상의 이자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모기지 증권이 보증되는 범위 내에서 모기지리츠는 신용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다. 그러나 모기지리츠가 레포 대출을 갱신할 수 없는 뱅크런 같은 충격 에는 매우 취약하다. 이러한 충격은 2020년 코로나19 패닉 중에 발생했 다.
- 외국인이 해외에 달러를 보유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미국인이 미국에 달러를 보유하려는 자연스러운 편향이 있는 것처럼 외국인도 자국에서 달러를 보유하려는 자연스러운 편향이 있다. 이는 외국인이 자국 은행에 더 익숙하거나, 현 지에서 달러를 보유하는 것이 더 편리하거나, 미국 정부를 불신하기 때 문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련은 런던에 달러를 예치했다. 해외에 달러를 보유하는 것은 투자자가 통화 위험을 국가 위험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역외 은행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미국 내 은행보다 높은 예금 금리를 제공했다. 역외 달러 시장은 역외 달러 뱅킹과 역외 달러 자본시장으로 구성된다. 비은행 차입자에게 제공되는 대출만 고려해도 두 시장 모두 각각 약 6조 5,000억 달러로 상당한 규모이다. 역외 달러 시장 대출의 대부분은 미 국내 자금 출처가 아니라 다른 해외 자금 출처에서 나온다. 미국 내 은행 은 역외 비은행차입자에게 약 1조6,000억 달러의 은행 신용을 제공하 는 비교적 소규모 대출 기관이다. 미국 재무부의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 기반 투자 펀드가 역외 차입자가 발행한 2조6,000억 달러의 채권을 보 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여기에는 은행 차입자가 발행한 증권도 포함되어 있다. - 은행과 투자자가 역외 차입자에게 기꺼이 대출을 제공하는 이유는 포 트폴리오를 다양화할 수 있고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하기 때문이다. 역외 차입자는 일반적으로 달러 공급원이 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에 거주하는 차입자보다 더 높은 이자율을 지불할 의향 이 있다. 또한 많은 역외 차입자들이 높은 금리를 감당할 수 있는 높은 경 제성장률을 가진 이머징 마켓에 위치해 있다. 또한 은행과 투자자는 해 외 투자를 통해 여러 국가에 걸쳐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여 정치적 위험 을 줄일 수 있다. - 미국 정부는 미국 은행 시스템에 대한 통제를 통해 누구든 달러 은행 시스템에서 배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누군가를 제재해야 한다고 결정하면 그 사람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상업은행을 통해 달러를 송금하거나 받을 수 없게 된다. 은행은 이러한 제재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데, 제재를 위반한 사실이 적발되면 미국 은행 시 스템에서 퇴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은행에게 사형선고나 다 름없다. 2014년 6월, BNP 파리바는 수단, 이란, 쿠바가 미국의 제재 를 피하고 미국 은행 시스템을 통해 자금을 이동하는 것을 도운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은 90억 달러라는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다. -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정부는 달러 결제에 대한 통제권을 정책 추진에 활용하려는 의지가 강해졌다. 글로벌 달러 시스템에서의 배제는 대부분 의 국가를 석기시대로 되돌릴 것이다. 달러는 미국이 보유한 가장 강력 한 비살상 무기로 볼 수 있다. 미국과 유로존의 제재를 받고 있는 이란은 이제 석유를 팔아 금으로 돈을 지급받아야 한다. - 대규모 역외 달러 시장은 잠재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는데, 역외 시장 참여자들은 미국 은행들처럼 연준을 최후의 수단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 다. 만약 미국 내 은행이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인출이나 지급이 발생할 경우, 재무적으로 건전하다면 연준의 할인 창구에서 자금을 빌릴 수 있 다. 이러한 안전망은 뱅크런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반면 유로달러 시스템의 은행이 반드시 동일한 안전망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 지점이 있는 외국 은행들은 연준의 할인 창구를 이 용할 수 있지만, 많은 외국 은행들은 미국에 지점이 없다. 실제로 모든 대 형 외국 은행은 미국에 지점을 가지고 있지만, 소규모 은행은 그렇지 않 다. 연준에 계좌를 신청하고 유지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이며, 대형 상업은행에 예금으로 달러를 보유하는 소형 외국 은행은 일반적으 로 그만한 가치가 없다. 이러한 소형 외국계 은행에 자금이 부족해지면 이들은 도매 자금시장(wholesale funding markets)에 뛰어들어 달러 입찰 을 시작한다. 이러한 달러 수요는 단기 달러 금리를 상승시키고 금융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금융 위기가 발생할 때, 연준은 외국 은행에 대출을 제공하고 역외 달 러 시장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왔다. 2008년 금융위기와 2020 년 코로나19 패닉 당시 연준은 외국 은행에 최후의 수단으로 대출을 제 공했는데, 연준이 외국의 중앙은행에 달러를 빌려주고, 해당 중앙은행이 다시 관할권 내 외국 은행들에게 달러를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5" 연준은 신용 위험이 낮고 외환을 담보로 제공하는 외국 중앙은행에 대출을 해주 기 때문에 이 방식이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연준은 사실상 전 세계의 중 앙은행이자 달러 뱅킹 시스템의 궁극적인 후원자가 된 것이다. - 모든 미국 달러 자산의 기본 금리는 미국 국채 수익률(treasury yield) 이며, 이는 투자자가 미국 국채에 투자할 때 얻는 수익률이다. 이러한 수 익률은 무위험으로 간주되므로 모든 위험 투자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투자자는 미국 국채를 매수하여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살펴본 다음 해당 수익률을 다른 잠재적인 투자가 제공하는 수익률과 비교할 것이다. 투자자는 위험이 높은 투자에서 조금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것이며, 위 험도에 따라 투자자가 요구하는 추가 프리미엄이 증가한다. 따라서 국채 수익률 수준은 모든 자산의 기대 수익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국채수익률은 모기지 및 정크본드 투자자가 기대할 수 있는 수익 률 수준과 주식 가치 평가에 사용되는 할인율에 일부 영향을 미칠 것이 다. - 미국 재무부는 1개월에서 30년 사이의 만기로 국채를 발행하며, 이러 한국채의 수익률이 국채수익률 곡선을 형성한다. 수익률 곡선은 위쪽으 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만기가 긴 수익률이 만기가 짧은 수 익률보다 높은 경향이 있음을 뜻한다. 연준은 단기금리를 통제하지만 장 기금리는 주로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국채수익률 수준은 자산 가 격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수익률이 낮으면 자산 가격 평가액 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수익률 수준과 수익률 곡선의 형태를 분석하면 시장이 연준의 다음 조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시장의 기대치를 알 수 있다.
- 연준은 오버나이트 금리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바탕으로 국채수익률 곡선을 따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만기가 길어질수록 그 영향력 은 급격히 감소한다. 시장 참여자들은 연준이 설정한 오버나이트 금리를 참고하여 1주, 1개월, 2개월 등 국채의 만기수익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평가한다.53 연준이 목표 금리 범위를 조정하지 않을거라 예상하 면, 시장 참여자들은 이러한 단기 무위험 금리가 오버나이트 무위험 금 리(overnight risk-free rate)보다 약간 높을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그렇 지 않으면 대출 기관은 돈을 단기 자산에 묶어두는 대신, 원하는 날에 회 수할 수 있는 옵션을 유지하면서, 오버나이트 대출만 계속 제공할 것이 다. 하지만 수익률 곡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현재 오버나이트 금 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연준이 향후 경제 전망의 변화에 따라 오 버나이트 금리를 조정할 것이며, 금리의 만기가 단기에서 중장기로 갈수 록 경제 상황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중장기의 금 리는 주로 시장 참여자들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 장기 수익률(longer-term yields)에 대해 생각하는 일반적인 프레임워크 는 단기금리의 향방에 대한 기대와 기간 프리미엄(term premium)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년 만기 국채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률은 연준에 10년 동안 무위험으로 오버나이트 대출을 제공했 을때의 대출 금리와, 10년 동안 돈을 묶어두는 것에 대한 프리미엄을 더 한 값과 같다. 첫 번째 요소는 앞으로의 연준의 행동에 대한 시장의 인식 에 따라 달라지고, 이는 다시 향후 인플레이션을 시장이 어떻게 인식하 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다행히도 향후 정책 방향에 대한 시장의 시각을 쉽게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단기금리 선물시장은 향후 단기금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시장 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단기금리 선물은 유로달러 선물시장이다. 유로달러 선물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유동성이 풍부한 파생상 품 시장이다. 유로달러 선물은 기본적으로 향후 3개월 LIBOR 금리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시장의 최선의 추측이다. 3개월 금리는 연준의 통제 범위 내에 있기 때문에, 이는 주로 연준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 고 경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베팅이다. 모든 금융상품 중에서 유로달러 선물은 경제 펀더멘털을 가장 잘 반영 한다. 유로달러 트레이더는 연준이 경제 지표에 따라 반응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자산 클래스가 흥분하거나 공포에 휩싸일 때에도 경제지표에 집중한다. 종종 그들은 연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 예를 들어 2018년 9월 연준은 '점도표' 예측을 통해 2019년에 금리 를 75bp (0.75%) 인상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발표했다. 유로달러 선물 시장은 이를 보고 금리 인상을 가격에 반영했다. 연준은 12월 회의에서 2019년 금리 인상 예상치를 50bp(0.50%)로 소폭 낮췄다. 그러나 이번 에는 유로달러 시장은 연준이 2019년에 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예측했 다. 유로달러 트레이더들은 12월 주식시장의 큰 하락으로 연준이 생각 을 바꿀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시장의 예상은 적중했 고연준은 결국 2019년에 세 차례 금리를 인하했다.
- 머니마켓(단기금융시장)은 만기가 하룻밤에서 1년 정도인 단기 대출을 위 한 시장이다. 머니마켓은 금융 시스템의 배관과도 같아서 금융 시스템을 작동시키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시장이다. 그림자 은행과 상업은행은 머 니마켓에서 차입한 단기 유동성 부채로 장기 비유동성 자산의 자금을 조 달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머니마켓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 으면 은행은 운영이 불가능하다. 머니마켓이 붕괴되면 머니마켓펀드는 단기부채를 롤오버할 수 없고 대출 상환을 위해 자산을 매각해야 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머니마켓의 붕괴는 파이어 세일로 이어졌고 금융위 기를 촉발했다. 머니마켓에는 담보 및 무담보형 머니마켓이 있다. 담보형 머니마켓에 서 차입자는 단기 대출을 위해 금융자산을 담보로 제공한다. 무담보형 머니마켓에서는 차입자가 담보를 제공하지 않고 신용도에 따라 대출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금융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규제로 인해 무담보형 머니마켓에 불리한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바젤 III는 상업은행이 무담보형 머니마켓에서 돈을 빌리는 것을 그만두게 했 고, 머니마켓 개혁은 무담보형 머니마켓의 대출 규모를 크게 줄였다. 무 담보형 머니마켓은 여전히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중요성 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제 연준이 담보 오버나이트 기준금리(secured overnight reference rates)를 발표하고 지속적인 레포 운용을 통해 담보 오버나이트 금리를 조정하는 등, 머니마켓 시장은 점점 더 차입자와 규 제 당국이 선호하는 담보형 머니마켓 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 레포 시장은 미국 국채가 '화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인 연결고 리이다. 미국 국채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유동성이 풍부한 시장이지만 1 조 달러 규모의 오버나이트 레포 시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투자자가 보 유한 국채를 사실상 비용 없이 언제든지 은행예금으로 전환한 다음, 다 음날 동일한 국채를 반환해 준다. 물론 차입자는 오버나이트 레포 대출 을 원하는 기간만큼 연장하거나, 만기가 긴 레포 대출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국채를 은행예금과 교환 가능하게 만들어 국채를 화폐로 전환함으 로써 미국 재무부가 돈을 찍어낼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레포 시장은 또한 저렴한 레버리지를 위한 시장이기도 하다. 투자자는 자금의 일부를 자기자본으로 투자하고 나머지는 레포 시장에서 빌려서 증권에 투기할 수 있다. 이는 투자자가 증권을 매수하는 동시에 해당 증 권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레포 대출 계약을 체결한 다음, 레포 대출로부터 받은 돈으로 초기 증권 매입 대금을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채에 100달러를 투자하려는 헤지펀드는 보유금 1달러를 예치하고 레포 거래를 통해 나머지 99달러를 빌릴 수 있다. 거래 방식은 다음과 같 다: 1단계: 헤지펀드 A가 헤지펀드 B로부터 100달러의 미국 국채를 매입한다. 2단계: 동시에 헤지펀드 A는 딜러와 레포 거래를 체결하여 100 달러의 국채를 99달러에 매도하고, 매도한 국채를 내일 99.01달 러에 다시 매수하기로 합의한다 (0.01달러는 오버나이트 대출에 대한 이 자이다). 딜러가 담보 가치의 변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약간의 가격 인하를 요구할 것이므로 헤지펀드 A는 국채를 100 달러 전액에 매도할 수 없다. 이 경우 딜러는 국채를 매우 우량한 담보자산으로 간주하고 1%의 '헤어컷(haircut)' 62만 원한다. 3단계: 헤지펀드 A는 딜러로부터 받은 99달러에 보유 자금 1달 러를 더해 헤지펀드 B에게 100달러를 지급한다. 따라서 헤지펀 드 A는 자기 돈 1달러로 100달러의 국채를 매수할 수 있게 된다. 4단계: 다음날 헤지펀드 A는 딜러로부터 100달러의 국채를 99.01달러에 다시 매입해야 한다. 여기서 0.01달러는 오버나이 트 대출에 부과되는 이자이다. 헤지펀드 A는 대출을 갱신하거나, 시장에서 국채를 100달러에 매도하고 그 수익금으로 딜러에게 99.01달러를 지불하여 거래를 종료할 수 있다. - 실제로 레포 대출을 통해 레버리지를 원하는 차입자는 몇 가지 일반적 인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 매입한 증권의 가치가 상승하기를 바라거나, 레포 대출의 이자 비용을 초과하는 이자를 매입한 증권으로부터 얻거나, 포트폴리오의 일부분에 대한 헤지로 레포 대출을 활용하거나, 차익거래 전략의 일부로 증권을 사용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차입자는 레포 시장 을 통해 적은 자금으로 대규모 포지션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레포 시장의 현금 차입자는 주로 다른 딜러로부터 돈을 빌리는 프라이 머리딜러이거나 투자 펀드이다. 일반적으로 머니마켓펀드는 딜러에게 돈을 빌려주고, 딜러는 빌린 돈을 자신의 증권 재고를 조달하는 데 사용 하거나, 헤지펀드 고객에게 다시 대출을 제공하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 전문 투자자들은 머니마켓을 최고의 수익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자 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글로벌 시장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환헤지비용(FX hedging costs)을 고려하여 전 세계 머니마켓 상품이 제 공하는 이자율을 살펴본다. 예를 들어, 유로존 국채가 0% 미만의 금리 로 단기 채권을 발행하더라도 미국에 기반을 둔 투자자는 환헤지비용을 고려하면 단기 미국 국채의 플러스 수익률보다 유로존 국채가 더 매력 적일 수 있다. - 2019년 말 3개월 만기 프랑스 국채수익률은 마이너스 0.6%인 반면, 3개월 만기 미국 국채수익률은 1.5%였다. 겉으로 보기에 미국 투자자 는 3개월 만기 프랑스 국채보다 3개월 만기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1.5% vs 마이너스 0.6%) 하지만 환헤지 기준(FX hedged basis)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투자자가 달러를 유로로 스왑한 다음, 3개월 만기 프랑스 국채에 투자했다면, 달러를 빌려준 대가로 3개월 USD 리보 수익률을 얻고, 유로에 대해 3개월 EUR 리보 마 이너스 수익률을 지불하고(즉, 플러스 이자를 받는다는 의미), 외환스왑 베이시 스를 얻겠지만, 프랑스 국채의 마이너스 수익률에서 0.6% 손실을 입었 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1.9% (1.9% + 0.4% + 0.2% -0.6% = 1.9%)의 수익을 얻게 되며, 이는 3개월 만기 미국 국채보다 0.4% 더 많은 수익이다. 머니마켓은 글로벌이기 때문에 국내 금리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오 해의 소지가 있다. 한 국가의 금리 변동은 차익거래를 통해 자동으로 다 른 국가의 금리에 영향을 미친다. 투자자의 정교함과 위험 감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투자자가 차익거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기회는 계속 존재한다. - 가치투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가치투자는 '저렴한 기업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가가 상승하고 시장보다 높은 수익률을 내 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에 의존한다. 이는 주가 대비 장부가치를 가치의 척도로 사용한 파마-프렌치 연구(the Fama-French study) 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 연구는 패시브 투자 흐름이 시장을 지 배하기 전의 시절에 수행되었다. 저가 기업은 패시브 투자자들의 자금이 유입되는 주요 주가지수에서 대부분 빠져 있는 소규모 기 업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치주 기업들은 계속해서 실적이 저조 했다. 가치를 추구하는 액티브 투자자들은 주요 주가지수를 끌어 올리는 은퇴 자금의 꾸준한 유입을 따라잡을 수 없다. - 포워드 가이던스와 양적완화는 모두 10년 넘게 사용되면서 비전통적 인 연준의 도구에서 전통적인 도구로 바뀌었다. 두 가지 모두 금리 수준 에 영향을 미치는 데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2020년 연준은 수익 률 곡선 컨트롤(Yield Curve Control, 줄여서 YCC)에 대한 예비 논의를 시작 했으며, 이는 잠재적으로 금리를 더욱 정밀하게 통제할 수 있게 해줄 것 이다. YCC는 중앙은행이 금리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 수치를 발표하는 것이다. YCC는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준이 금리를 낮게 유지하여 전쟁을 지원하고자 할 때 처음 사용되었다. YCC에 따른 금리 통제는 중앙은행의 채권 매입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시장 참 여자들이 중앙은행이 무제한 매입을 통해 금리 목표를 달성할 의지와 능 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3 YCC는 중앙은행 커뮤니티에서 주목받고 있는 새로운 통화정책 수단 중 하나이다. 일본은행은 2016년에 10년 만기 일본 국채의 수익률을 약 0%로 고정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주요 중앙은행 중 최초로 YCC를 시행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은행이 금리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리를 올리기 위해 YCC를 발표했다는 점이다. YCC 이전에는 10년 물 일본 국채의 금리가 마이너스 0.5% 금리 내외에서 거래되었다. 일본 은행은 10년물 국채금리를 인상함으로써 일본 국채의 수익률 곡선이 가파르게 상승하여 상업은행의 대출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했다. 일본은행 YCC를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일본 국채의 수익률은 발표 이후 0% 내외의 좁은 범위 내에서 머물고 있다. 2020년 초, 호주 중앙은행(RBA)은 YCC를 시행한 두 번째 주요 중앙 은행이 되었다. 호주 중앙은행은 3년 만기 호주 국채의 수익률을 0.25% 로 고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만으로도 3년 만기 금리를 0.25%로 이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정책의 의도는 호주의 모기지와 기업 부채의 대 부분이 3년 만기이기 때문에 저금리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었 다. 호주 중앙은행은 발표 한 번으로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 경제질병은 병균의 침투와 같은 외부 충격에 의해서 경제의 생리적 기능이 붕괴됐을 경우에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이 문제 는 바로 뒤에 다시 거론한다). 따라서 병리학적 관점에 입각하여 접근해 야 비로소 경제질병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해명해낼 수 있고, 장 차 나타날 결과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야 경제위기 혹은 경제질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적합한 처방이 가능하며, 미리 예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경제위기나 경제파국에 대한 경제학계의 연구는 대중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 병리학적 접근이 라고 보기는 어렵다. 생물학에서는 생리학과 함께 병리학이 발전해 있다면, 생물학 의 이론체계와 흡사한 경제학도 생리학적 접근과 함께 병리학적 접근을 함께 추구할 필요가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병리학 적 접근방법을 도입하면 경제학은 경제현상을 지금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며, 여러 경제문제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책이나 해결책 역시 지금보다 훨씬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2022년 10월에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가 터졌다. 그 금액은 2 천억 원으로서 본원통화의 0.07% 그리고 총유동성의 0.003%에 불과했다. 이런 미미한 금액의 사태가 터진 뒤, 건설업계 전반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다른 산업에도 전염되 어 전반적인 유동성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경제병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원리 중 하나인 '신용파괴원리'가 본격적으로 작동했고, 이에 따라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진행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로 국내경기는 2022년 3분기부터 급격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분기별 성장률을 보면, 1분기와 2분기에 각 각 연률 2.6%와 3.0%를 기록한 뒤, 3분기에는 갑자기 성장률이 1.3%를 기록하여 반 토막이 났으며, 4분기에는 -1.5%를 기록함 으로써 축소재생산에 들어가고 말았다. 경제병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급속한 경기후퇴는 신용창 조의 역과정인 신용파괴의 원리가 작동하여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경제병리학은 위와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경제파국으로 치닫는 금융위기를 한창 집필 중이던 2022년 하반기 초에 이미 예측할 수 있게 해줬다. 그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쉽 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줬다. 간단히 말해, 그 원인은 미국의 고금 리와 강달러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고금리가 국내저축을 미국으로 이탈시켰고, 강달러는 국내에 투자되었던 국내 및 국제 금융자본을 미국으로 빨려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우 리 경제에서 유동성이 수축되는 일이 벌어졌고, 유동성 수축은 신용파괴원리를 본격적으로 작동시켰다. 그래서 국내경기는 위 에서 살펴본 것처럼 급속하게 하강하고 말았다.
- 그럼 금융위기는 왜 발생할까? 금융위기는 단독으로 발생하 기도 하지만, 외환위기가 금융위기로 발전하기도 한다. 특히 외 환위기가 발생한 경우에는 예외 없이 금융위기가 뒤를 잇거나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는 흔히 '쌍둥이 위기Twin Crises'로 불린다. 외환위기가 발생했던 거의 모든 나라는 금융위기를 함께 겪었으므로 외환위기를 금융위기에 포 함시켜도 무방할 정도이다. 참고로 그라시엘라 카민스키와 카르 멘 라인하트는 금융위기 Banking crisis가 선행한 뒤에 외환위기 Currency crisis가 발생한다고 주장했으나, 역사적으로는 그 선후관계가 바 뀌는 게 일반적이었다. 외환위기가 물밑에서 진행함으로써 금융 위기를 부르고, 금융위기가 외환위기를 물위로 끌어올려 심각하 게 진행시켰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 문제는 장차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를 살펴보면 확실해질 것이다. -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인 사례 즉, 주택시장을 중심으로 살펴 보자. 주택 수요는 저축이 충분히 이뤄져야 일어나므로, 주택가 격은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비로소 상승하기 시작한다. 주택가격 의 상승은 일반 물가의 상승이 이미 일어난 다음에 뒤늦게 시작 한 만큼 짧은 기간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단기간에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이 벌어지면, 2년이나 3년 더 저축해야 집 을 살 능력이 생기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유혹을 일으킨다. 무리 하게 많은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려는 유혹이 그것이다. 가격이 폭등하고 나면 2~3년 더 저축하더라도 집을 살 수 없는 일이 벌 어질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 많은 빚 을 내서 집을 사는 것은 미래의 수요가 현재로 이동해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에 나타나야 할 수요가 이처럼 현재로 이동해오면 부동산의 수요는 배가되고 그 가격은 폭등한다. 부동산 투기열풍 과 거품은 이렇게 일어난다. 이런 투기열풍과 거품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다. 미래 수요가 현재로 이동해 왔으므로,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가면 수요가 이동해 간 시기가 반드시 닥친다. 이 경 우에는 수요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 가격은 장기간 정체하거나 급락한다. 더 먼 미래의 수요가 계속 이동해 온다면 가격 하락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이것 역시 지속가능성은 없다. 현재 수 요와 미래 수요가 합쳐지는 경우에 비로소 폭등한 가격이 유지 되기 때문이다. 가격 폭등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정체하거 나 하락으로 전환하면, 현재 수요까지 미래로 이동해 가는 새로 운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면 그 거품이 꺼지면서 가격은 폭락한 다. 1990년대 초의 일본과 2008년 이후의 미국에서, 2022년 하반 기의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 '신용파괴원리'란 '신용창조원리'가 반대로 작동하는 것을 뜻 하므로 신용창조의 승수효과는 신용파괴 과정에서도 비슷한 위 력을 발휘한다. 한보사태의 신용파괴 압력을 이론적으로 계산해 보면, 당시 화폐발행액에 대한 광의유동성 신용승수가 약 30배였 으므로 그 금액은 약 200조 원에 이른다(한보 부실채권 6.6조원 × 신용승 수 30배 = 200조원). 이것은 광의유동성의 1/3 규모였다. 이 정도라면 금융위기가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우리 몸의 혈액 1/3 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상태였다. 외환위기 직후에 공적자금을 160조 원이나 투입한 것은 이런 신용파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공짜 자금'이라고 비아냥댔지만 이것은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말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외환위기 같은 중병에 걸렸다면, 이것을 치료하기 위한 약값과 수술비를 지불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 미국 대공황이 전례 없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한 가장 큰 이유는 위와 같은 은행공황 때문이었다. 대공황 기간에 네 차례의 은 행공황이 발생했는데, 은행공황으로 인해 예금인출 소동이 벌어 진 결과 예금통화가 파괴되었고, 이에 따라 통화공급이 급속히 감소하고 금리가 상승해 경기는 더욱 악화됐다.2 또한 은행공황 은 투자자와 소비자의 위기감을 부채질함으로써 총수요를 위축 시켰다. 한마디로, 신용파괴원리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사태를 방치한 것이 가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으로 대공황을 초래하고 말 았다.
- 영국이 세계 금융패권을 탈환하려 했던 정책 즉, 파운드 가치를 절상시켜 금본위제를 회복하려 했던 정책이 얼마나 심각한 후유증과 부작용을 빚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1차 세계대전 직후에 펼쳐졌던 영국의 환 율정책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실패가 영국경제로 하여금 1920 년대 내내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했으며, 결국 금본위제를 포기 할 수밖에 없게 했다. 그 덕분에 세계대공황이 발발했던 때는 영 국경제가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호조를 보였다. 반면에, 환율정책의 실패로 영국이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 던 1920년대 중후반에 프랑스의 환율정책은 운 좋게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국내경기를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경 제가 호조를 지속하자 프랑스는 경제패권을 노리고 영국의 뒤를 따라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데 집착했다. 결국 프랑스의 국내경 기는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급락했다.
- 경제난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던 1930년에는 프 랑스의 군사비 지출이 독일에 비해 세 배 이상 많았다.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인 1933년에는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정권 교체가 빈번했던 1935년부터 독일의 군사비가 프랑스보다 앞서 기 시작했고,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38년에는 독일의 군사비가 프랑스보다 8배 이상 많아졌다. 1937년의 독일 군사비는 1930년에 비해 20배 이상 증가했으나, 프랑스 군사비는 전년도에 비해 오히려 줄었다. 그만큼 프랑스는 1930년대 내내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이런 모든 원인은 금본위제에 대한 집착 즉, 환율정책이 실패한 데 있었다. - 물론 당시에 독일이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던 것 은 지속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물자 생산을 위한 동원경제 체제가 성장률을 일시적으로 상승시켰을 따름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소련과 중국 등의 공산권이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던 것도 동원경제 체제의 성과였다. 그러나 동원경제 체제 는 성장률을 일시적으로 높일 수 있지만, 유휴 노동력과 유휴자 원이 고갈되면 곧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소련은 1960년대 중 반부터, 중국은 1960년대 말부터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하기 시 작했다. 히틀러의 동원경제 체제도 실패하고 전쟁 역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약세가 좀처럼 멈추지 않자 1987년 2월에는 '환율을 현재 수준에서 안정시킨다.'라는 '루브르 합의'가 주요 국가들 사이에서 이뤄졌다. 달러 가치가 여기에서 더 하락하면 국제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짐으로써 세계경 제에 심각한 금융위기가 닥칠 수 있었으므로 이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일본은 저금리를 유지해 달러 시세를 지탱해줬다. 이 정책은 엔 강세를 억제하기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저금리가 지나치게 오래 유지됨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장 기간 상승세를 보였던 부동산과 주식 시장은 더 활황을 보였고 그 거품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엔 강세에 겁을 먹은 일본기업은 설비투자에 몸을 사렸다. 국 내 생산설비를 외국으로 옮기는 일까지 벌어져 '산업 공동화'라 는 화두가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 영향으로 기업의 국내 투자가 부진해지자 은행은 자금을 운용할 곳이 줄었다. 예금은 계속해서 쌓였으므로 대출 출구를 새롭게 찾아야 했는데, 그곳이 바로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일본의 국제수 지 흑자는 마냥 커졌고, 엔 가치는 계속 상승 압력을 받았다. 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은행이 달러를 사들여야 했으며, 이렇게 풀려나간 돈은 또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으로 흘러갔다. 이런 거품경기의 영향으로 일본경제는 1980년대 후반에 붐을 만끽했다. 부동산 투자로 벌어들인 수익률은 대략 연평균 30%에 달했다. 기업은 부동산 투자의 수익이 철강이나 자동차 혹은 TV 등의 제조에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은행 차입금을 이용해 부동산 투자자로 변신했다. 부동산 거품 은 1989년에 정점까지 부풀어 오른 뒤 1990년부터 순식간에 꺼 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신용파괴원리가 작동하면서 심각한 금 융위기가 닥쳤고 경기는 계속 하강했다. 왜 일본 정책당국은 이런 경기하강에 대비하지 못했을까? 1980년대 후반에는 엔 강세에 힘입어 주요 자원의 수입 가격이 계속 하락함으로써 물가는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물가만 안정 되면 경제성장은 지속가능하다는 미국식 인식이 정책당국을 비 롯해 경제전문가 사회를 지배했으므로 위기감이나 문제의식을 특별히 느끼지 못했다. 불행히도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거품은 언젠가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수요가 시간이동을 한 때가 반드 시 닥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하락하 여 거품이 붕괴되면, 신용파괴리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했 다. 아니, 몰랐다. - 도대체 무엇이 일본경제를 장기침체의 늪에 빠뜨렸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경제학계에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내생변수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에 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내생변수에서 원인을 찾는 대표적인 것 으로는 미야자기 요시카즈가 주장한 '복합불황론'을 들 수 있다. 그는 1992년에 발간한 『복합불황이라는 책에서 '유효수요 부족 에서 오는 순환적 실물경제의 후퇴와 금융부문의 신용경색에 의 한 유동성 부족이 겹친 중층적 불황'을 일본경제가 겪게 되었다 고 밝혔다. 141 이것은 경기침체의 원인으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경기침체 를 장기화시킨 원인으로는 설득력이 약하다. 실물경제의 후퇴와 신용경색이 겹쳤다고 하더라도 경기침체의 기간이 지나치게 길었 다. 무엇보다, 경기가 잠시 회복했다가 다시 하강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1995 년과 1996년에는 각각 1.9%와 2.6%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2년 연속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나 그 뒤부터 다시 경 기가 하강했다. 2000년에도 2.3%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경기가 잠시 회복됐으나 곧이어 연평균 0% 대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말 았다. 따라서 복합 불황은 1994년까지의 경기후퇴에만 해당한다 고 봐야 한다. 반면에, 구조론자들은 일본경제의 문제점을 제도와 문화에서 찾았다. 대표적으로 사이토 세이치로는 '일본경제가 역사의 공백 에 빠진 진정한 원인은 캐치업 체제에서 당연한 전제로 삼아온 국가적 국민적 목표가 1985년경에 거의 달성되었고, 일본 전체가 목표 상실의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했다. 142 "과거에 는 세 가지 사회적 구조가 성장장치로 자리를 잡아 캐치업 체제 를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첫째는, 은행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화 로 집약되는 안정적이고 확고한 전후 금융체제의 성립이었다. 이 른바 호송선단 방식이다. 둘째는, 일본식 경영 신화로 일컬어지는 확고한 일본식 기업시스템의 형성이었다. 셋째는, 민·관 협조 신 화와 정·관·재의 일본 사령탑 체제의 확립이었다."라고 그는 주장 했다. 143 간단히 말해, 선진국을 따라잡는 캐치업이 끝났을 때는 이런 옛 체제가 경쟁력을 잃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정부 주도 형 경제가 아니라 시장 주도형 경제로 탈바꿈해야 했고, 안정성 보다는 역동성을 추구해야 했으며, 탈락 없는 공존 형 사회에서 적자생존을 허용하는 사회로 진화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 은 배와 큰 배, 속도가 빠른 배와 느린 배를 가리지 않고 함께 끌 고 가는 호송선단형이 아니라 적자생존형의 신축적인 경제운영 이 이뤄졌어야 했다는 것이다. - 그런데 경제위기가 1991년 이래 30년 이상 지속됐어도 일본경제의 산업경쟁력과 국제경쟁력은 최근까지 세계 최강에 속했다. 초장기 불황 속에서도 경상수지는 대규모 흑자를 기록했을 정도 였다. 국내경기가 모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던 1996년에는 내수 가 살아나면서 경상수지 흑자가 658억 달러로 줄어든 적도 있지 만 곧 1천억 달러를 넘어섰다. 2001년에는 세계적으로 경기가 부 진하고 일본 생산설비의 해외이전이 활발해지면서 그 흑자 규모 가 878억 달러까지 줄었으나 그 뒤에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섬으 로써 2003년부터는 1천억 달러를 넘어섰고 2007년에는 2천억 달 러까지 넘어섰다. 2013년에는 경상수지가 몇 개월 동안 일시적으 로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2014년부터는 다시 안정적인 흑자 로 돌아섰다(2015년에는 1,356억 달러 흑자). - 따라서 일본경제가 초장기 경기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원인은 구조적인 데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데 있다고 봐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던 기업들의 동 력에 의해서라도 일본경제는 진즉 성장가도에 다시 올라섰어야 했다. 기업들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국가경제 가 침체의 늪에서 헤맬 이유는 하나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바로 경제정책이 실패를 거듭했던 데 있다. 정책 실패가 잠시 회복되던 경기를 다시 후퇴로 돌아서게 하곤 했던 것이다. 경제정책이 실패를 거듭했다면 새로운 정책을 다양하게 모색하는 것이 정상이고, 그중에서 어느 하나는 성공을 거뒀어야 하 는데, 왜 성공할 정책을 지금껏 찾아내지 못했을까? 그 이유도 딱 하나, 관념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현실에서는 오 히려 더 나쁜 결과를 빚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던 데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경 제학자들이나 경제전문가들이 경제를 회생시킬 정책을 찾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경제에 바람직하다고 굳게 믿었던 정책이 사실 은 경기후퇴를 불러오지 않고는 이런 일은 벌어지기 어렵다. '사 고의 벽'이 작동한 셈이다. - 경상수지 흑자의 누적은 외환보유 고 증가와 그에 따른 통화팽창 압력으로 작용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해외자산을 취득해야 하는데, 해외자산 취득은 수익성 이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게 쉽지는 않다. 또한 경상수지 흑자와 그에 따른 외환보유고와 해외자산의 증가는 환율의 하락을 부르기 마련인데, 이것은 해외자산의 평 가손을 부른다. 예를 들어 환율이 120엔일 때 구입한 1억 달러 짜리 해외자산의 가치는 120억 엔이지만, 환율이 100엔으로 떨 어질 경우에는 100억 엔으로 그 가치가 20%나 떨어진다. 그래서 일본 기업과 금융회사의 재무지표는 더욱 악화됐고, 이에 따라 금융기관의 부실이 쌓여 금융위기를 가속화시켰다. -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위와 같은 국내 자본의 해외 투자는 국내 소득의 해외 유출을 뜻한다는 것이다. 국내 소득이 이처럼 해외로 유출되면 내수는 부족해지고, 이것은 국내경기의 부진을 부른다. 국내경기가 부진해지면 부진해질수록 기업은 수출 증대 에 더욱 목맬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른 수출의 증가는 다시 경상 수지 흑자를 키움으로써 환율의 하락 압력을 가중시키고, 환율 하락은 수출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수출의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율을 안정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외환 의 해외 유출을 촉진할 수밖에 없다. 결국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 이다. 이 악순환은 일본경제가 장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다. 하지만 수출 증가와 경상수지 흑자는 클수록 좋다는 것이 경 제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런 인식이 '사고의 벽'을 형성하여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경상수지 흑자는 장 기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다. 경상수지 흑자가 장기간 지 속되어 축적되면 일본경제처럼 초장기 경기침체를 불러오기 때 문이다. 외국자본의 국내 투자가 감소하는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비유하자면,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이 급성질환을 일으킨다면, 경상수지 흑자의 누적은 만성질환을 일 으킨다.
- 그럼 일본경제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려울까? 경제를 살 려낼 방법이 전혀 없을까? 다소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국내경기의 급등과 급락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래야 경제성장이 지속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경기흐름에 대한 정확한 진단 과 적시의 금리 및 재정 정책 등이 요구된다. 둘째, 환율방어와 재정투입 등의 시장개입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 그 래야 시장기능이 살아날 수 있다. 셋째,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공 공부문을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야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 력을 강화할 수 있다. 넷째, 과도한 국가부채가 국가경제의 회생 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이것을 일본은행이 인수하여 재정 부담 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는 화폐발행이 점진적으로 증 가하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생산자물가 상승률을 초과하게 함 으로써 기업의 경영수지를 개선시킬 것이다. 다만 일본은행의 국 채 인수는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물가 폭발을 예방할 수 있다. 그리고 경기가 본격적으로 회복되면 긴축정책을 제때 펼쳐야 할 것이다. 끝으로, 경상수지가 약간의 적자를 기록하도록 환율 하락을 점진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해외로 유출됐던 일본의 자본이 되돌아올 것이고, 이에 따라 국내수요가 증가하여 성장 률도 상승할 것이다. 이처럼 성장률이 높아지면 수입이 증가하여 경상수지 적자는 더 커져 외환보유고가 계속 줄어들 것이고, 이 것은 일본은행이 국가부채를 인수하는 부담을 줄여줄 것이다. 그 러면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물가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경상수지 흑자가 장기침체의 근본 원인이므로 이것은 가장 핵심적인 정책이다. 물론 경상수지 적자가 지나치게 커져 환율이 폭등하거나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것은 미리미리 막아야 한다. 만약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또 다른 종류의 금융위기가 터짐으로써 경 제난은 더 악화될 것이다.
- 대규모 국제수지 적자의 근본 원인은 경기과열 수입이 수출보다 더 크게 증가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국내 생산능력보다 소비를 훨씬 더 많이 했던 것이 가 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럼 이런 일은 어떤 경우에 벌어질까? 국내경기가 느닷없이 과열되거나 정부가 경기부양 정 책을 과도하게 펼치면 이런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 과연 어떤 일 이 우리 경제에서 벌어졌을까? -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던 1993년에는 경제성장률이 6.8%를 기록했는데, 이때는 수입증가율이 수출증가율보다 더 낮았고, 경상 수지도 흑자였다. 그 직후인 1994년과 1995년에는 성장률이 각 각 9.2%와 9.6%라는 높은 실적을 기록하자, 이때부터 수입 증가 율이 수출 증가율보다 더 커졌으며, 경상수지 적자도 눈덩이 구 르듯이 커졌다. 경제성장률 9.2%와 9.6%는 당시 우리 경제의 잠 재성장률보다 훨씬 높았고, 이것이 경기과열을 일으켜 생산능력 보다 더 많은 소비가 이뤄지게 했던 것이다. 경기과열이 일어나 면 물가 불안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국내시장이 점점 더 많이 개방되는 경우에는 물가가 조금만 상승해도 수입 이 먼저 빠르게 증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국 제화와 세계화를 내세워 국내시장을 적극적으로 개방했다. 이에 따라 값싼 수입품이 물밀듯이 들어와 물가를 안정시켰다. 이것이 국제수지를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만약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이 높은 수준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경기과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수입이 급증함으로써 경상수지 적자가 대규모로 누적되는 일도 일어나 지 않았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성장률이 3년 동안이나 매 년 11%를 상회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경상수지가 대규모 흑 자를 기록했다. 당시는 성장잠재력이 이처럼 높은 성장률을 감당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림으로써 국내의 한정된 자원이 비생산적인 분야로 흘러갔고, 그 결과로 우리나라의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은 점점 떨어졌다. - 노태우 정권 이래 정책당국은 재정팽창을 은폐하기 위해 온 갖 수단을 동원했다. 각종 특별회계와 기금을 양산하고, 산하기 관을 신설하여 정부가 하던 일을 위임했다. 그래서 재정구조를 뒤틀릴 대로 뒤틀리게 만들었으며, 재정의 효율성과 신축성과 형 평성에도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재정의 생산성까지 크게 떨어졌 다. 중앙정부 일반회계는 1987년 이래 1997년까지 4.3배 증가했 는데, 특별회계는 9.2배나 증가했다. 그 결과로 일반회계의 1/5 수 준에 불과하던 특별회계가 외환위기 직전에는 일반회계의 절반 수준을 넘어섰다. 재정팽창을 눈속임하기 위해 각종 특별회계를 새로 증설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빚었다. 공공기금은 더 가관이 었다. 자산규모로 따져보면 1988년부터 1996년까지 6.3배 증가했 는데, 같은 기간에 팽창을 거듭했다는 재정지출은 4.8배 증가했 다. 기금의 운용액은 1996년 기준으로 62조 원에 달해 일반회계예산보다 4조 원이나 더 많았다.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은 법률에 의해 정부업무를 위임받아 수행하는 정부 산하기관이었다. 개인적으로 3년여 동안 조사하 여 1998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했던 내용에 따르면, 그 숫 자는 1996년 말 현재 총 583개였고, 자산은 약 570조원, 예산 규모는 162조 원, 재직 인원수는 41만 명에 이르렀다. 그 예산은 정부 예산의 2.8배를 넘었다. 산하기관 팽창률을 보면 문제가 얼 마나 심각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980년 이래 1996년까지 16 년 동안에 그 예산은 24배, 인원수는 48.7배 증가했다. 이 기간에 GDP는 10.6배 증가하는 데 그쳤으니, 경제규모가 성장한 것보다 산하기관의 규모가 2배 이상 빠르게 팽창한 셈이었다. 참고로, 위의 통계를 비교하는 기준 연도가 각각 다른 것은 내가 1996년부터 작성했던 서로 다른 보고서에 근거했기 때문으로, 그만큼 여 러 차례 외환위기를 경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환위기가 발발한 근본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공부문의 팽창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 다. 환란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잉태됐던 셈이다. 환란 같은 재 앙이 어찌 하루아침에 벌어지겠는가. 우리 경제는 재정팽창을 비 롯한 공공부문 팽창으로 경제체력과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져 있 었다. 한마디로, 외환위기라는 암 덩어리는 노태우 정권이 만들 었고, 그때부터 자라나 김영삼 정권 때에 터지고 말았다 - 1960년대 중반 이후 평균적으로 10%대를 웃돌던 성장률은 1970년대에 들어선 뒤부터 독재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차츰 떨 어지기 시작했다(참고로 민주화 없이 경제번영을 지속한 나라는 세계사에 단 하나도 없다). 1970년대 중반에는 재정지출을 확대시켜 잠시 10%대 성장 률을 회복했지만 곧바로 떨어지기 시작해 1979년에는 6.8%를 기 록했다. 경기가 이처럼 하강하자 정책당국은 또 재정지출 확대에 나섰다. 그 증가율은 1978년과 1979년에 각각 무려 38%와 37% 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하강은 멈추지 않았다. 재정팽 창은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려 물가 불안과 국제수 지 악화를 먼저 불렀을 따름이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8 년과 1979년에 각각 15%와 18%를 기록했고, 경상수지 적자도 각각 11억 달러와 42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런 높은 물가상승률 은 구매력을 떨어뜨려 경기를 하강시켰고, 대규모 국제수지 적 자는 국내 소득의 해외 이전을 초래하여 경기하강에 가세했다. - 1978년 말에 제2차 석유파동이 터진 데 이어 1979년 말에는 정 변까지 겹치자, 1980년 성장률은 -3.7%를 기록하고 말았다.(최근 통계기준으로는 -1.5%) 참고로 당시의 경기하강은 정변과 석유파동 때 문으로 알려졌지만, 뒤에 나타난 사태가 원인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 국내경기는 정변과 석유파동이 터지기 훨씬 이전에 이미 빠르게 하강했다. 다시 말해, 1979년 말에 외환위기가 터졌던 것 이 경기하강을 초래한 근본원인이었던 것이다. 국내경기가 위와 같이 추락하자 정책당국은 또 재정지출 을 확대하여 경기를 살려내겠다고 나섰다. 그 증가율은 1980년 에 37%에 달했고 1981년에도 29%를 기록했다. 재정지출이 이렇 게 대폭 증가하고 기저효과까지 가세함에 따라 1981년 성장률은 6.2%를 기록해 다소 높아졌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0 년과 1981년에 각각 29%와 21%를 나타냈으며, 경상수지 적자도 각각 53억 달러와 46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 두 해의 경상수지 적자는 평균 외환보유고의 2.5배에 달함으로써 외환보유고 고갈 위기를 일으켰다. 1982년에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구제금융을 해줬던 IMF는 경제신탁통치에 나서며 강력한 긴 축정책을 요구했다. 재정지출 증가율은 1982년과 1983년에 각각 4.4%와 6.1% 등으로 뚝 떨어졌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 졌다. 성장률이 1982년에 7.3%로 높아졌고, 1983년에는 더 높아 겨 10.8%까지 상승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당시는 중남미 각국에서 발생한 외환위기가 다른 대륙의 여러 나라에 전염되었고,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21.5%까지 인상함으로써 시티은행 등 대형 금융회사들까지 도산위기에 처하는 등 금융위기가 심각하 게 진행되었으며, 경기후퇴가 세계적으로 본격화했다는 사실이 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성장률은 1982년에 -1.2%를 기록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가 이처럼 뛰어난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기 적 같은 일이었다!
-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라도 진실이 은폐되면 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는 것은 역사의 철칙이다. 실제로 외환위기는 평균적으 로 5년을 주기로 반복하여 일어났고, 그때마다 국민은 혹독한 경 제난을 겪었다. 더 심각한 사실은, 외환위기가 항상 똑같은 원인 으로 터졌다는 점이다. 즉, 경기를 살려내겠다는 재정확대정책이 경기과열을 일으켰고, 경기과열이 우리나라의 생산능력보다 더 많은 소비를 초래함으로써 수입의 급증을 불렀으며, 이것이 국제 수지를 악화시키고 외채를 누적시켜 외환보유고를 고갈시켰던 것 이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는 동물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 가. 더욱 어이없는 일은 외환위기를 초래했던 경제정책을 주도적 으로 수립하고 집행했던 김재익(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등의 일부 경 제관료가 마치 경제를 살려낸 위인처럼 여전히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경제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더 있겠는가. - 신자유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개방화, 민영화, 규제완화 등 을 추구하는 정책노선이다. 이 정책노선을 배척하고도 경제번영 을 이룩한 나라가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을까? 그런 나라는 찾 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배척한 나라는 쇠락했고, 그 국민은 오랜 세월 경제난에 시달렸다. 반면에 신자유주의 정 책을 추진한 나라는 대부분 경제번영을 누렸다. 심지어 사회주 의 국가인 중국조차 개방화, 민영화, 규제완화 등의 개혁을 단행 한 뒤에야 비로소 오늘날 같은 경제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근래 에 상대적으로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한 베트남이나 인도도 마찬 가지이다. 비록 중국은 최근에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지만 말 이다. - 일부 진보주의자는 이념적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배척하지 만, 이것은 하나의 정책노선일 뿐 이념과는 거리가 멀다. 보수정 권과 진보정권을 가리지 않고 이 노선을 선택한 나라는 대체적 으로 경제번영을 누렸다. 오히려 진보정권이 신자유주의를 추구 하면 사회 안정과 국제 평화 속에 경제가 호조를 보였다. 영국 블 레어 정권의 노동당은 당시 우리나라의 민주노동당보다 훨씬 진 보적이었지만 그리고 미국 클린턴 정권은 당대의 노무현 정권보 다 훨씬 진보적이었지만, 장기간의 경기호조를 연출했다.
- 도대체 왜 파생금융상품의 가격은 하락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작동했다. 하나는 주택담보 대출의 상환부담이 감당 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못사는 사람들의 대 출금 상환부담이 가중됐던 것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다른 하나는 주택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이 하락함으로 써 대출금 상환부담을 안으면서까지 주택을 보유할 필요가 없어 진 것이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주택담보 대출을 받았을 경우, 주 택가격이 떨어져 그 가치가 대출금액보다 적어졌을 경우는 주택 을 은행에 돌려주면 그 채무가 면제된다. 잘못된 대출을 해준 은 행도 책임을 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이 두 원인을 시간을 거 슬러가며 차례로 추적해보자. 우선, 못사는 사람들의 대출금 상환부담은 왜 가중됐을까? 시장금리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시장금리는 왜 급등했을까? 여 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연방채권의 발행이 과다해졌던 게 가장 결정적이었다. 연방채권의 공급이 과다해져 그 가격이 떨어짐으로써 시장금리가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연방채권 금리는 2004년 2%대에서 2008년에 5%대로 급등했다. 그럼 연방채권의 공급은 왜 과다해졌을까? 2006년 재정적자가 8 천억 달러에 달하는 등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다. 도 대체 재정적자는 왜 이처럼 급증했을까? 조세수입은 감세정책 등 으로 인해 충분히 증가하지 못한 반면에, 재정지출은 이라크 전 쟁비용 등으로 인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는 이렇게 찾아졌다. 다음으로, 주택가격은 왜 빠르게 하락했을까? 그 이전에 주택 가격이 급등하여 거품을 형성했다가 붕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럼 주택가격은 왜 급등했을까? 너도나도 주택을 사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여 수요의 시간이동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은 왜 계속 상 승하여 수요의 시간이동을 초래했을까? 부시 정권이 550만 채의 주택을 무주택자에게 공급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각종 지원정 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이 급등하던 때는 주택 매입자금 의 전액을 대출받을 수도 있었다. 여기에는 주택담보대출 기관인 페니메이와 프레디맥 등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페니메이와 프레디맥 등은 왜 상대적으로 가난한 무주택자 의 주택매입을 대대적으로 지원했을까? 550만 채의 주택을 무주 택자에게 공급하려던 부시 정권의 공약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550만 채의 주택이 무주택자에게 순조롭게 분양되 기 위해서는 정책지원이 필요했다.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해야 무 주택자의 주택매입을 촉진할 수 있었으므로 정책지원은 더욱 필 수적이었다. 실제로 주택가격이 상승을 시작하자 자기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큰돈을 벌 수 있었으므로 무주택자는 너도나도 담보대출을 받았다. 드디어 수요의 시간이동이라는 변수까지 작 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책적으로 부양한 주택가격의 상승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다. 수요가 시간이동을 미리 한 때가 반드시 닥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은 무주택자는 금리가 낮은 경우에만 대출 이자를 상환할 수 있으므로 가격상 승의 지속가능성은 더욱 낮았다. 금리가 상승하면 주택담보대출 상환부담은 더 커지고, 그 부담이 커지면 서브프라임모기지는 부실해지며, 서브프라임모기지가 부실해지면 주택가격은 하락으 로 돌아설 게 뻔했다. 결국 주택가격이 하락으로 돌아서면서 서 브프라임모기지는 부실해졌고, 관련 파생금융상품의 가격은 폭 락했다. 파생금융상품 가격의 폭락은 상당수 헷지펀드들은 물론 이고 일부 대형 은행들까지 무너지게 했다. 이것이 신용파괴리 를 작동시킴으로써 금융위기를 일으키고 말았다. - 파생금융상품의 레버리지는 20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파생금융 상품의 가격폭락은 신용파괴원리를 본격적으로 작동시켰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2007년 7월에 베어스턴스 산하의 헷지펀드 2개가 고객 16억 달러를 잃은 뒤 파산한 사태였다. 이것이 트 리거 역할을 하면서 금융위기를 빠르게 진행시켰다. 물론 2007 년 상반기까지 경제성장은 탄탄했고, 주식시장은 신고가를 갱신 했지만, 물밑에서 빠르게 진행하던 신용파괴리는 금융기관들 의 경영수지를 빠르게 악화시켰다. 8월 초에는 미국의 파생금융 상품에 과도하게 투자했던 BNP Paribas가 큰 손실을 입어 휘청 거렸고, 중순에는 Countrywide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가지수가 급락하기 시작하며 신용파괴원리가 드디어 수면 위 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 만약 1996년에 주식시장의 과열을 진정시키기 위해 금융긴축 정책을 펼쳤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만약 2002년에 주 택시장의 거품을 차단하기 위해 금융긴축 정책을 펼쳤더라면 또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미국은 그 뒤로 2006년까지 이어진 경 기팽창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며, 미국 국민의 경제생활은 그만큼 윤택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학자가 진짜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은 이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 로 금융위기를 예방하는 일은 어느 무엇보다 어렵다고 보는 게 옳다. 얼마나 빨리 발견하고 얼마나 빨리 처방하느냐가 관건이다. 2008년의 세계적인 금융위기는 그 처방이 너무 늦게 이뤄졌고, 경제질병이 상당히 심각한 지경에 이르도록 진행한 상황이 었다. 한때는 세계경제를 무너뜨릴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심각했으 나, 다행히 2012년부터는 차츰 치유 과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중 병에 걸렸다가 회복하는 과정에서 후유증과 합병증이 나타나 건 강이 다시 악화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나듯이, 세계경제 역시 우 여곡절을 거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약 정책적 실패가 거 듭 벌어진다면 진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유 럽 중앙은행은 2009년에 강력한 금융긴축 정책을 펼침으로써, 신용파괴원리의 작동을 재개시켜 금융위기를 심화키는 결과를 빚었다. 실제로 유럽연합 EU은 2008년 말에 본원통화를 전년대비 37%나 증가시킴으로써 신용파괴원리의 작동을 차단해냈다. 그 덕분에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고 있던 폴란드, 헝가리, 아일랜드, 아이스란드, 라트비아 등은 2009년부터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은 위와 같은 통화팽창이 심각 한 물가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섣부른 판단으로 2009년에는 본원통화 증가율을 -0.9%로 낮추었다. 결국 이것이 신용파괴원 리를 재가동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로 유럽연합 각국의 경제회복 은 뒷걸음을 쳤고, 일부 국가는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여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특히 그리스와 스페인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가 동시에 터져서 아주 심각한 경제 난을 겪었다.
- 초인플레이션은 어찌하여 발생할까? 두말할 것도 없이 급격한 통화팽창이 발생시킨다. 그럼 급격한 통화팽창은 왜 일어날까? 이것은 신용창조에 의해 일어난다. 한국은행이 화폐발행액을 87조 원에서 1조 원을 더 늘리면 큰 영향이 없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화폐발행액 1조 원이 시중에 풀리면 그 중 상당 부분이 은행으로 돌아오고, 은행은 그 돈을 민간부문에 대출해 주는 등의 과정이 반복되며, 수표와 신용카드와 예금통장 등처럼 화폐의 역할을 하는 통화들을 경제에 남긴다. 결국은 신용승수가 작동하여 광의통화는 약 45조 원이 증가하는 압력을 받는다. 광 의통화에 대한 화폐발행액의 신용승수가 약 45배에 이르기 때문 이다. 이 과정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화폐발행을 늘리더라도 물가가 상승하는 일은 당장 일어나지 않으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 에야 물가는 본격적으로 상승한다. 통상적으로는 반년에서 1년 반이 지나야 물가가 본격적으로 상승한다. 그래서 초인플레이션은 무섭다. 증상이 곧바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제때 대비할 수 없 게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키곤 한다. 특히 경기가 부진할 때에 화폐발행을 늘리는 것은 흔히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경기가 부 진할 때는 호조일 때에 비해 통화의 유통속도가 상대적으로 느 려지고, 신용창조의 승수도 작아지며, 유사화폐의 통화기능 역시 떨어지므로, 이런 때는 화폐발행을 늘리더라도 당장은 물가 불안 이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경기가 본격적으로 살아 나거나 물가가 본격적으로 불안해진 뒤에는 통화의 유통속도가 빨라지고, 부동산 등 유사화폐의 통화기능이 향상되며, 신용승 수도 커진다. 그래서 경기가 부진할 때 화폐를 지나치게 증발하면 경기가 상승한 뒤나 물가 불안이 나타난 뒤에는 쉽게 초인플 레이션으로 발전한다. 그렇다고 화폐 발행의 증가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거래가 늘어나면 통화량도 함께 늘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통화량이 적절하게 늘어나지 못하면 거래가 부진 해져 경제활동에 제약이 가해지고, 경제성장도 억제당한다. 따라 서 적절한 수준의 화폐 발행은 계속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경제 가 성장하는 데 소요되는 것보다 더 빨리 통화량이 늘어나면 물 가 불안이 일어나고 자칫 초인플레이션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 경제질병의 종류와 그것이 드러내는 증상은 서로 달라도, 그 원인은 하나이고 그 전개과정에서는 금융위기를 반드시 경유한 다는 특징을 보인다. 첫째, 외환위기는 외환보유고의 고갈 및 환율의 급등과 함께 금융위기를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둘째, 초인플레이션은 금융 위기가 초래한 경제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정책당국이 경기부양 에 집착하다가 재정위기와 함께 나타나곤 한다. 셋째, 재정위기 는 금융위기가 부른 경기부진이 세수결손을 일으킴으로써 혹은 금융위기가 초래한 경기부진을 벗어나기 위하여 재정지출을 지 나치게 팽창시킴으로써 벌어지곤 한다. 넷째, 장기 경기부진은 금융위기가 초래한 경제공황이라는 급성질병을 막으려다가 만성질 병으로 발전시킨 결과이다. 다섯째, 거의 모든 경제공황은 금융 위기가 심각해짐에 따라 발생한다. 이처럼 경제공황, 초인플레이 션, 장기 경기부진, 외환위기, 재정위기 등은 거의 모두 금융위기 를 경유해 일어난다. 그럼 금융위기는 무엇이 발생시킬까? 역사적 사례를 보면, 경 기과열이 국제수지를 악화시켜 외환위기를 일으키거나 부동산시 장이나 주식시장에서 거품경기를 일으켰다가 꺼지면서 금융위기 가 발생했다. 이 금융위기는 경제상황에 따라 여러 종류의 경제 질병을 낳았다. 그 과정에서 석유파동이나 정치적 격변 등 외생변수가 작용하기도 했지만, 금융위기가 발발하지 않으면 그 영향 은 제한적이었다. 경기과열이 어떤 방향으로 영향을 끼치느냐에 따라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경제질병은 다양한 증상을 보였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질병은 모두 경기과열과 금융위기가 낳은 일 란성 쌍둥이라 부를 수 있다.
- 금융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비추어 보면 금융이 란 쇠를 의미하는 '금자와 녹이다라는 의미의 '융자가 결합한 것으로, 금전의 융통, 즉 돈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자금이 이전하는 것을 뜻한다. 금융에 해당하는 영단어인 'finance'는 태생적으로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는 끝을 의미하 는 라틴어 'fini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래 빚을 청산ending하거 나 대금을 지불payment 한다는 의미로 쓰이던 말이었다. 그러다 가 18세기 이후 영미권에서 finance'를 돈을 마련하고 관리하 는 행위를 일컫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 현대사회에서 금융이 발휘하는 기능은 앞에서 살펴본 정의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은행, 증권, 보험, 자산운용, 핀테크 등 다양한 형태의 금융 서비스를 통해 그 역할과 기능 이 세분화되어 발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금융 서비스 제공자 의 형태나 금융상품 종류는 천차만별이지만, 금융이 수행하는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금의 이전 과 중개 기능이다. 금융은 여유자금을 모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해주며, 중개 시스템을 통해 자금이 결제된다. 두 번째는 자금의 관리 기능이다. 금융은 우리의 자산을 안전 하게 보관해주는 기능을 넘어 적극적인 운용과 투자를 통해 재 산 형성에 기여한다. 세 번째는 위험관리 기능이다. 우리는 예 측할 수 없는 사고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마련이다. 하 지만 보험 같은 금융의 위험관리 기능을 활용하면 앞으로 닥칠 손실이나 재난에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 고대사회에서 신전은 종교, 정치, 문화, 경제 등 모든 생활의 중심지였다. 신을 기리는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기능이 가장 주 요했을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전은 세속의 혼란과 폭력으로 부터 차단된 가장 안전하고 튼튼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 때문 에 지배계층이나 여러 도시국가들은 돈이나 보물, 귀금속, 문 서 같은 중요 재산들을 신전에 보관했다. 신전 내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비밀의 방은 이런 용도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 다. 당시로서는 가장 안전한 금고와도 같았던 셈이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진 무렵, 파르테논 신전에는 약 3,600만 드라크마(부엉이 은화 한 개는 4드라크마에 해당)의 은화 가 보관되어 있었을 만큼 그 규모도 방대했다. 하지만 신전에 맡겨놓은 은화들이 비밀의 방에 고이 보관만 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신전의 사제들은 자금이 필요한 도시 국가나 개인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돈을 빌려준 대 가로 대략 10퍼센트 내외의 이자를 받았지만, 가난한 사람이나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무이자나 저리유대인과 더불어 중세의 금융 수요를 충족시켜준 사람들은 롬바르도Lombardo라 불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전당포 업자들이 었다. 게르만족에 뿌리를 둔 이들은 약 11세기 무렵부터 당시 유대인의 전유물이던 금융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북부 이탈 리아 지역을 기반으로 삼아, 이후로는 유럽 전역으로 활동범위 를 넓혀갔다. 롬바르도의 주요 고객층이나 영업 방식은 유대인 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들은 기사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상 대로 가축이나 의류, 책, 귀금속 등을 담보로 받고 비교적 소액의 자금을 빌려주었다. 이자율은 연간 30퍼센트에서 300퍼센 트에 이를 만큼 대단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 지, 당시 롬바르도라는 명칭에는 이들에 대한 경멸이나 멸시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롬바르도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편이었지만, 이들은 소시민 의 금융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유용한 창구였다. 이런 역할을 토대로, 12세기에 들어서는 각국 군주로부터 정식 면허를 받고 고리대금업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군주들은 이 과정에서 고액의 면허세를 부과해 별도의 수입원으로 삼았다. 군주들은 기독교 교리를 어기지 않은 채 실속을 챙길 수 있었고, 당시 사람들은 제한적이나마 금융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 기사단의 새로운 부업 기독교인들의 바람과 달리 성지 회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십자군이 점령한 지역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이슬람 세력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급기야 1187년, 지도자 살라딘을 앞세운 이슬람 세력은 예루살 렘을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성지를 되찾으려는 염원 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십자군 전쟁은 그 후로도 13세 기 말까지 이어졌다. 교황과 유럽의 왕실은 이 기간 템플기사 단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기사단은 초창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 다. 성지 회복과 기독교인 보호라는 본연의 임무보다는 부업에 더 치중했다. 바로 금융업이었다. 템플기사단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십자군의 주요 길목마 다 지부branch를 만들어두었다.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 는 수백여 개 지부는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네트워크를 능가할 정도였다. 촘촘한 조직망을 통해 물품 조달과 자금관리 업무를 도맡아 처리한 것도 이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환전, 결제 같은 금융거래 경험도 축적할 수 있었다. 기사단이 보유한 막대한 재산과 광범위한 조직망, 이들이 제공하는 금융 기능의 면면을 보자면 국제적 금융 조직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었다. 기사단이 제공했던 대표적인 금융 기능은 장거리 송금과 환 전 업무였다. 가령 로마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에 나선 여 행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템플기사단이 있는 한, 순례자는 거 금을 소지한 채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순례자는 로마에 있는 템플기사단 지부에 돈을 맡기고 이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받아 여행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목적 지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 돈이 필요하다면 현지의 템플기 사단 지부를 방문하면 된다. 로마에서 발급받은 증명서를 제시 하고 필요한 만큼 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증명서에 표시 된 화폐와 현지에서 쓰이는 화폐 종류가 다른 것 역시 큰 문제 가 되지 않았다. 현지의 템플기사단 지부가 제공하는 환전 서 비스를 통해 간단히 해결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편리함 덕분에 템플기사단의 서비스를 이용하던 고 객은 순례자나 군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교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템플기사단이 제공하는 송금망의 혜택을 보다 직접 적으로 누릴 수 있었다. - 금융이라는 부업에 몰두하는 동안, 템플기사단은 교황이나 왕실도 무시하기 어려운 초정부기관으로 성장해 갔다. 13세기 후반 무렵, 이들이 유럽 전역에 걸쳐 보유한 영지 는 9,000여 곳에 달했다. 연간 수입 규모는 영국 왕실의 200배 수준이었다.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템플기사단은 암흑의 중세 시대, 유럽의 경제와 금융을 떠받치는 중추와도 같은 역할 을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막대한 재산과 영향력은 다른 한 편으로 재앙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285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필리프 4세는 템플기사단의 주요고객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십자군 전쟁과 주변국과의 연이은 분쟁으로 인해 템플기사단은 물론 유대인 들에게도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다. 정상적인 채무상환이 불 가능하다고 판단되자, 필리프 4세는 빚을 면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데 골몰했다. 유대인들에게 진 빚은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외로 추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템플기사단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우상숭배와 신성모독, 부정부패 혐의로 단원들을 모 조리 체포하고 기사단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필리프 4세의 밀서를 통해 1307년 한 해에 프랑스에서만 3,000여 명의 단원 이 체포되었다. 또한 전임 교황을 살해하고 교황에 오른 클레 멘스 5세를 협박해 유럽 전역에 있는 단원들을 체포하고 기사 단의 해산을 명하도록 했다. 명백한 증거는 없었지만 단원들은 모진 고문에 못 이겨 혐의를 자백했다. 단장이었던 자크 드 몰 레Jacques de Molay를 비롯한 주요 단원들이 화형을 당하고 기사단 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필리프4세의 빚에서 비롯된 정치적 계 산으로 인해 템플기사단은 허무한 종말을 맞고야 말았다. - 환어음이 불러온 무역의 변화 환어음의 사용은 당시 교역을 주름잡고 있던 이탈리아 상인들의 영업 형태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시장이 형성되고 안정적인 판매 루트를 확보하게 된 이들은 차츰 순회 상인에서 정주상인 sedentary merchant 형태로 변모해갔다. 이탈리 아 내에 본점을 두고, 유럽의 주요 무역 도시마다 지점이나 대 리인을 두어 업무를 처리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무역과 더불어 금융업을 취급하던 일부 상인들 중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업무를 확장해간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가까운 형제나 친척을 파리, 런던, 바르셀로나 같은 교역 중심 지로 보내고, 그들만의 금융 영토를 개척해갔다. 환어음의 이 용은 교역 중심지를 따라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한 이 상인들 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환어음이란 이처럼 판매상이 구매상을 지급인으로 하여 발행한 것으로, 어음금액에 대한 지급의무가 표시된 증서를 말한다. 이때 은행은 무엇을 믿고 어음에 표시된 금액 (무역대금)을 판매상에게 미리 지급해준 것일까? 상인들이 서로 짜고 은행을 속이기라도 한다면 은행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초창기 은행들은 어음의 지급일을 의미하는 만기일을 통해 이런 위험을 관리했다. 환어음의 만기는 어음 작성일로부터 물 품이 도착할 때까지의 기간인 1~2개월로 정해지는 것이 보통이 었다. 이 기간에 은행은 어음의 진위나 물품의 선적 여부를 확 인함으로써 혹시 모를 금융사고 가능성에 대비할 수 있었다. 지급인으로부터 어음금을 회수하지 못할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환어음도 결국에는 만기일에 어음금이 지급될 것이라 는 믿음과 신뢰를 기초로 한 거래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급인이 신뢰를 저버린다면 그에 따른 은행의 손실은 불가피한 일이 었다. 대출거래에서는 이자를 통해 이러한 위험이 일부나마 상쇄 될 수 있었다. 이자는 돈을 빌려준 데 대한 대가이기도 하지만, 돈을 갚지 못할 경우에 대한 벌칙의 의미도 있었다. 환어음에 서는 환전 수수료가 이런 이자의 기능을 대신했다. 은행은 어 음에 표시된 금액을 현지 통화로 바꾸어 주는 과정에서 시세보 다 훨씬 높은 수준의 환율을 적용했다. 따라서 환전 수수료는 은행가들의 훌륭한 수익원인 동시에, 지급인의 부도 가능성에 대비한 위험관리 수단이기도 했다.
- 가문 초기, 메디치가의 구 성원들은 현실 정치에 직접 나서는 것만은 꺼렸다. 인근 국가 와의 전쟁이나 봉건 세력과 신흥 상인 세력 간 갈등에서 비켜 나 있기 위한 전략이었다. 대신에 고위 성직자나 권력층과 폭 넓게 교류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그 수단으로 쓰였던 것 이 바로 재량예금이었다. 이 시기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은 실상 대단한 재력가 들이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막대한 부를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청빈, 희생 같은 기독교 덕목에 반했기 때문이다. 불로 소득을 죄악시하던 교회법상 예금을 맡기고 이자를 받는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웠다. 교회법을 따라야 하는 왕실과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성직자나 고위 권력층에게는 자신의 돈을 은밀하지만 안전하게 불려줄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보다 절실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데 메디치 가문만 한 적임자는 없었 다. 메디치가는 고객의 신원과 재산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안심하고 돈을 맡길 수 있었고, 이들이 맡긴 돈에 대해 대가도 두둑하게 지급했다. 다만 그 형식은 이자가 아니라, 감사의 의 미로 재량껏 지급한다는 뜻에서 선물gift로 포장되었다. 교회법 에 따른 제한을 교묘히 비켜가기 위한 것이었다. 대가를 지급 하는 방식도 일반적인 예금과는 달랐다. 사전에 정해진 수준의 이자가 아닌, 은행의 이익에 따라 8~12퍼센트 수준의 대가를 가변적으로 지급하는 형태였다. 현대적으로 보자면 예금이라 기보다 자금 운용성과에 따라 보상 수준이 정해지는 투자 상품 에 가까웠다. 메디치 가문은 재량예금을 통해 규모를 키우고, 환전, 환어 음, 대출 같은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면서 위험을 분산했다. 이 로써 오늘날 은행 업무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근대적 은행의 면 모를 갖추었다. 이들이 마련한 은행 모델은 종교개혁 이후로는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 독일, 잉글랜드,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 메디치 은행을 표본으로 한 은행들이 생겨났다. 비록 메디치 은행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 만, 이들의 유산은 르네상스 예술과 현대 은행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여전히 남아 있다.
- 채권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주식보다 훨씬 이전인 12세기 무렵이었다. 지중해 북부 아드리아해의 지배권을 두고 이탈리 아의 도시국가 베네치아와 비잔틴제국이 벌이던 전쟁이 그 발 단이었다. 당시 비잔틴제국에 맞서 함대를 구축해야 했던 베네 치아로서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 흔히 쓰이던 방식은 자국민을 상대로 세금을 걷거나 금융가 집단으 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도 한계에 다다 랐을 즈음인 1172년, 베네치아 정부는 새로운 해결책을 떠올렸 다.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베네치아 정부가 생각해낸 방안은 시민들을 상대로 직접 돈 을 빌리는 것이었다. 물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돈을 빌려줄 리는 만무했다. 따라서 정부는 시민들이 보유한 재산 수준에 따라 국가에 빌려줄 돈을 강제적으로 할당했다. 국가에 납부해야 할 세금과는 엄연히 별도였다. - 시민들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사실은 '프레스티티prestiti'라 불 리는 증서를 통해 기록해두었다. 이 증서를 소지한 사람은 정 부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 지위를 인정받고, 연 5퍼센트 수준의 이자도 지급받을 수 있었다. 증서를 제3자에게 이전하는 것도 가능했다. 국가에 직접 채권액의 반환을 요청하지는 못했지만, 증서를 매각하는 방식으로 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정부의 사례에서 보듯, 채권이란 기본적으로 돈을 빌리는 자(채무자가 돈을 빌려주는 자(채권자)를 상대로 발행하 는 증서다. 이 증서에는 빌린 돈의 액수는 물론, 정해진 날짜에 원금과 이자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일반적인 대출 과정에서 작성하는 차용증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채권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는 수단으 로 활용되며, 채권증서를 통해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다는 점에 서 대출과는 차이가 있다. 채권은 그 발명 이래, 자금수요자들을 위한 훌륭한 금융 수 단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근대 유럽 국가들이 채권을 발행해 전 쟁자금을 조달하거나, 현대 국가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재정을 확충하는 것은 채권의 기능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채 권은 발행자 입장에서 훌륭한 자금조달 수단이 되는데, 발행 주 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구분되기도 한다
- 구조화 증권의 손익은 주식이나 주가지수 변동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금리나 통화, 상품 등 다양한 기초자산에 연동되게끔 설계할 수도 있다. 주가연계증권과 대비되는 파생결합증권Derivatives Linked Securities: DLS은 이처럼 주식 이나 주가지수 외의 기초자산 변동에 따라 그 손익이 결정되는 구조화 증권을 말한다. DLS는 수익을 결정하는 기초자산만 다를 뿐, 설계 방식은 ELS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금리 등 기초자산의 움직임에 따 라 지급되는 수익의 내용도 달라지는 구조다.
- 이메일은 보내고 난 뒤에도 내 컴퓨터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게 돈 이라면 상대는 내게 속은 셈이 된다. 지불된 돈이 내 컴퓨터에 남아 있 어서는 안 된다. 즉, 이중지불을 할 수 없어야 한다. 인터넷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금융기관과 신용카드사는 인터넷 시대에도 당당히 살아남았고 오히려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즉, 비트코인의 발명 전까지만 해도 이중지불 때문에 신뢰받는 제3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블록체인의 다른 이름은 '분산장부'다. 동일한 데이터를 여러 개의 독 립된 컴퓨터에 보관하며 서로를 인증한다. 데이터를 별도의 서버에 백 업해 분실이나 훼손의 위험을 줄이는 관리방법은 블록체인 이전에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이 온전히 보관되어 있었기에 오늘날 조선 왕 실을 중심으로 한 사극을 생동감 있게 즐길 수 있다. 실록의 복사본을 전국 각지에 흩어서 보관한 조선 건국 초기 선비들의 '시스템적 지혜' 덕 분이다. 블록체인은 분산된 데이터베이스가 동기화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검 증하는 엄격한 테스트 작업, 소위 '작업증명Pow: Proofs of Work'을 수행한다 는 것과 이를 감독하는 주체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프로그램 자체의 논리에 따른다는 것 그리고 분산된 서버들이 시스템 전체에 대한 결정 력에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유별나다. - 비트코인이 사용하는 해시함수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만들어 배 포한 SHA256이다. 해시함수는 불가역적인 특성을 갖는다. 즉, 암호값 을 가지고 원문을 찾는 것을 복호라고 하는데, 무작위 수를 삽입하는 방 식으로 SHA256을 복호하려면 슈퍼컴퓨터를 사용해도 수억 년이 소요 된다는 계산이 있을 정도로 연산량이 방대하다. 따라서 시간과 에너지 가 제한된 현실에서는 비트코인이 사용하는 해시함수를 안전하다고 간 주한다. 양자컴퓨터가 발명될 경우, 비트코인이 채용한 SHA256 체계가 무용지물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대세 의견은 양자컴퓨터로도 쉽게 뚫을 수는 없다는 쪽이다. 그럼에도 양자컴퓨터는 비트코인을 다루는 데 중요하다. - 비트코인에 모든 거래가 기록되고 오픈된다는 사실은 수사당국이나 사법당국에는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공개주소는 누구나 알 수 있게 오 픈되어 있는데, 수상한 거래를 한 공개주소를 하나 찾으면 그 공개주소 와 거래로 연결된 다른 공개주소를 모두 찾을 수 있다. 비록 돈을 갈취 할 수는 없지만 돈과 사람의 행적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는 있 다. 그리고 하나만 덜미를 잡으면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조직의 모든 거래망을 밝혀낼 수도 있다. 검찰 입장에서는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지 않고도 추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거래기록이 모두 남기 때문 에 증거 확보에도 크게 이롭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아 주 초기의 비트코이너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비트코인을 그다 지 선호하지 않는다. 주류언론들은 비트코인이 탈법적인 일탈 행위에 만 활용된다는 논조로 보도하지만, 이는 대체로 공부가 부족하고 실제 로 벌어지는 일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 비트코인에 열광했던 지하세계의 무법자들은 비트코인의 익명성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비트코인의 익명성은 제한적이다. 비트코인을 거래한 흔적은 영원히 남기 때문에 어느 한 지점에서 꼬리가 잡히면, 연 관된 거래처가 오히려 모두 드러나고 만다. 수사하는 입장에서 무엇보 다 좋았던 점은 피의자들과 관련자들 사이에 발생한 거래기록을 들여 다보기 위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이 다. 기존 금융회사들은 수사기관들의 요청에 제대로 답하지 않거나 답 하더라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언제나 투명하게 노출돼 있 으므로, 결정적인 꼬리만 잡으면 거미줄처럼 연결된 생태계를 모조리 밝혀낼 수 있다. 비트코인 관련 범죄를 수사했던 일선 실무자들도 이 같은 비트코인의 익명성을 오해하는 바람에 수사관들이 비트코인을 착복하는 일이 여러 건 발생했다. 비밀경호국의 션 브리지와 마약단속반의 칼 마크 포 스는 실크로드의 운영자 로스 울브리히트와 비밀리에 접촉해 수사 정 보와 비트코인을 맞바꾸려는 검은 거래를 시도했다. 압수 수색하는 와 중의 혼란을 틈타 울브리히트의 비트코인을 훔치기도 했다. 이들을 기 소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한 것도 검사 혼이었다. 검사였던 혼이 형사 절차를 밟아 비트코인의 경로를 추적했다면, 수 사기관에 있었던 브리지나 포스도 자신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수사를 방해하거나 증거를 은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 혼은 거래들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었 기 때문에 의심 가는 거래를 쉽게 찾았다. 범죄자들이나 수사관들 모두 비트코인의 투명한 속성을 온전히 이 해하지 못했기에 범죄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범죄집단이나 애초에 상 대를 기만하려고 하는 사기꾼들은 이메일로 소통하는 것을 피한다. 이 메일이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거래 기록이 모두 남는 비트코인도 마찬가지다. 범죄집단이나 수사기관이 캐서린 혼처럼 비트코인의 속성을 꿰뚫어 본다면 검은 거래에 비트코인 을 사용하는 것을 되도록 피하려 할 것이다.
-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금융 엘 리트들과 통화 시스템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 금융 분석가 제임스 리카즈James Rickards는 그의 책 <은행이 멈추는 날》에서 종이돈을 없애려 는 세계 통화당국의 야심을 경고했다. 그의 지적대로 달러 CBDC는 종 이돈을 없애고 자산을 모두 전산화하려는 오래된 기획의 일환일 수 있 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달러 CBDC를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기 어 렵다. 보고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미 통화 시스템은 상당부분 전자 화되어 있다. 연준이 달러를 발행할 때 종이돈을 찍어서 시중에 뿌리는 비중은 크지 않다. 본원통화의 상당부분은 상업은행들의 계좌에 전자 형태로 꽂힌다. 달러 CBDC가 전자화폐의 편리성을 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없다는 의미다. 게다가 CBDC는 상업은행들에 충격을 준다. 보고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할애한 부분이 바로 상업은행과의 협 업시스템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다. 호주 중앙은행이 발행한 CBDC 보고서에 따르면 호주 은행들의 예금자산의 60% 이상이 단기 예금이라 고 한다. 즉, 중앙은행이 전자화된 화폐를 발행하면 상업은행의 요구불 예금 상당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은행면허란 고객이 맡긴 단기 예금을 장기로 대출하면서 예대마진을 독점적으로 얻는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기 대출에는 고이율의 이자를 부여하는 대신에 고객들의 단기 예금, 요구불예금에는 거의 이자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단기 예금으 로 장기 대출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고객들이 한꺼번에 돈을 인 출하지 않는다는 경험에 따르면 이는 잘 작동하는 '돈놀이'다. 이런 방 식으로 상업은행은 화폐를 창출한다. 즉, 상업은행은 중앙은행이 발행 하는 본원통화보다 훨씬 많은 유동성을 시중에 공급한다. 그러나 신용 위기가 오면 고객들이 은행을 믿지 못해 예금을 인출하려고 길게 줄을 서는 뱅크런bankrun이 발생한다. 이런 위기가 발생하면 부도가 나지 않 을 은행이 거의 없다. 사업에 특별히 이상이 생겨서가 아니다. 이런 이 상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나선다. 중앙은행은 상업은행에 거의 무제한 신용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상업은행들을 구하기 위해 설 립되었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CBDC를 발행해 국민들에게 디지털 화폐 를 공급하면, 고객들은 얼마 안 되는 이자를 받기 위해 번거로움을 감수 하면서까지 CBDC를 다시 상업은행에 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상 업은행을 위기로부터 구해 내고자 설립된 중앙은행이 상업은행의 기둥 뿌리 하나를 철거한다는 자기모순에 직면하고 만다. 연준은 CBDC 보고서에서 블록체인이나 암호화 기술을 이용하려는 의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향후 달러 CBDC를 언급할 때 전제로 삼 아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개인정보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위조지 폐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는 디지털 현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달러 CBDC는 단순히 전자화된 달러가 아니다. 차라리 개인과 기업들의 중앙은행 계좌에 가깝다. 물론 중앙은행이 개인 들에게 직접 계좌를 주는 것이 현행법으로는 불법이기 때문에 보고서 는 중간에 지갑업자를 둔 간접적 시스템에 무게를 싣고 있다. 중간에 지 갑업자를 둔다면 일단은 현재 시스템과 큰 차이가 없다. 지금도 유동성 증가를 위해 그만큼 종이달러를 만들지 않는다. 상업은행 대차대조표 에 숫자를 써넣도록 해 주면 상업은행이 대출을 통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데, 이 과정이 모두 전자화되어 있으므로 간접 방식의 CBDC 와 상업은행을 통한 신용창출 간에는 큰 차이가 없다. 아무튼 어떤 디자인이건 간에 달러 CBDC는 사람을 인증한다. 그래 서 모든 거래 기록을 확보할 수 있다. 보고서에서는 이 특성을 직접 언 급하는 대신 달러 CBDC가 자금세탁 문제가 없는 해결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의 고성능 통화를 외국의 개인이나 기업들이 자유롭게 직 접 소유하는 것은 현행 시스템에서는 많은 문제를 유발한다. 그러나 보 고서에서는 이를 쟁점으로 다루지조차 않았다. 국경을 넘을 때 현행 시 스템보다 수수료를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을 설명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개별 국가의 통화 주권에 대한 위협은 문제 삼지 않았다. 이는 허가받은 지갑만이 디지털 달러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한다는 설계의 기본적인 특 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아마도 외국의 개인이나 기업은 자국 정부의 엄 격한 심사를 거친 뒤 미국 연준으로부터 지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달러 CBDC의 구조는 현금을 없애려는 통화당 국의 의도에 대한 리카즈의 추론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현찰을 없애려 는 의도는 무엇일까? 리카즈에 따르면 디지털 자산이 현금자산보다 통제와 조절이 쉽기 때문이다. 리카즈는 거시경제학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를 설명한다. 바로 유동성 함정 때문이다. 유동성 함정이란 경제주체들이 시장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완전히 잃어버려, 중앙은행이 막대한 양의 화폐를 공급해도 쓰지 않고 저축만 하려는 상태다. 이런 경우에는 통화정책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정부가 가장 큰 소비자로서 직접 소비를 창출하는 재정정책이 적절하다는 것 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주장이다. 그러나 경제주체들 이 정부가 프로그램할 수 있는 디지털 형태로 돈을 보유하고 있다면 유 동성 함정을 간단하게 극복할 수 있다. 그것도 화폐를 찍어 중앙은행의 부채를 쌓거나 정부가 세입보다 세출을 늘려 재정적자를 야기하지 않 고도 말이다. - 개인들이 달러 CBDC를 소유하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면, 보유 액수와 한도를 제한하고 마이너스 이자율을 적용하면 개인들 도 소비에 나설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사용하지 않는 돈은 점점 썩어 서 가치를 잃어버리는 셈이다. 디지털 통화에서 마이너스 이자란 돈이 썩어서 못 쓰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2021년 코로나 사태에서 사 용기간을 주고 기간이 지나면 사용을 제한하는 식으로 마이너스 이자 화폐를 경험했다. 공교롭게도 연준의 CBDC 보고서에서는 액수 제한과 차별적 이자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아무튼 경제주체들이 중앙은행 이 발행한 디지털 통화를 사용하면 정부는 거시경제의 정책 목표를 미 세한 조정을 통해 손쉽게 달성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사용처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생산자를 시장에서 간단하게 퇴출해 버릴 수도 있다. 즉, 달러 CBDC는 개인들의 편리함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부의 정책적 재량권을 확대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그 대가는 자유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라이 버시의 희생이다. - 보고서에서도 프라이버시 문제를 여러 쟁점 중 하나로 언급하지만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연준의 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관련 정보를 입수한 미국 정치권에서는 개인의 정보보호를 위해 CBDC 발행을 금지해야 한다는 법률 제안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의 결 과로 2023년 9월,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하원에서는 'CBDC 감시국가 금지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이 법안은 상원에서 민주당의 반발에 부 딪힐 가능성이 높지만, 미국의 국민들과 정치인들 상당수가 중앙은행 이 발행하는 디지털 캐시가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경제적 선택권을 크 게 제약하고 통제국가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심지어 2023년 민주당 내 대통령 경선에 가담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도 CBDC에 반대한다. 역시 개인 에 대해 정부 통제가 우려된다는 주장이다. 리카즈에 따르면 평소에는 가능하지 않던 발상이라도 코로나 팬데 믹이나 금융위기와 같은 격변에서는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정책적 재 량권을 확대하는 데 관심이 있는 엘리트들이라면 국민들이 빠른 해결 책을 원하는 위기상황이 열어준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연준의 보고서에서 전제하는 달러 CBDC는 절대 로 비트코인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중앙은행이 개인의 선택권을 제한하려는 의도로 디지털 통화를 밀어붙인다면, 비트코인의 의 미만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디지털 생활권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게 될 메타버스 시대에 정부통제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비트코인이 반드시 먼저 발명되어야만 했다. 이런 절묘한 타이밍 때문 에라도 대중은 비트코인의 발명을 역사의 보이지 않는 섭리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 금융은 빚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금융이 지속적으로 존립하기 위해 서는 빚이 청산되어야 한다. 마치 질량 보존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이 누군가는 빚을 청산해 주어야 한다. 금융에도 이상사회가 있 는데, 위험 대신 안전을 선택한 이들은 최대한 보호하면서 높은 수익을 쫓는 대신 위험을 감수한 이들에게 악성부채를 떠넘기는 것이다. 이는 주식투자와 채권투자의 관계이기도 하다. 주식투자는 크게 오를 거라 는 기대로 임하지만 채권은 그렇지 않다. 주식시장이 붕괴하면 경제가 침체하지만 채권, 즉 은행 시스템이 붕괴하면 사회붕괴로 이어진다. - 이론상 절대로 부도가 나지 않아야 할 AAA등급의 금융상품 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모험을 회피해 온 이들의 퇴직 이후를 책 임져야 할 연기금까지 녹아내렸다. 금융의 이상향도 이상향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모험을 기피하는 이들에게까지 부채 청산의 부담이 종종 전이 되곤 한다. - 이렇듯 높은 위험과 높은 수익을 동시에 추구하지 않으려 했던 이들 의 예금을 가진 은행이 부도를 내는 순간이 오면, 부를 미래로 보내거나 공간적 배치를 통해 시간적으로도 부를 분산할 수 있다는 금융의 본래 기능이 기본적으로 착각이라는 것을 모두가 한순간에 깨닫는다. 그리 고 이런 깨달음은 예금인출, 즉 뱅크런으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멀쩡한 은행까지 부도를 맞게 된다. 망할 것 같다는 사람들의 불안이 은행을 실 제로 망하게 만든다. 금융현상이 바로 재귀적 현상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간헐적으로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이런 청산과정이 언젠가 는 일어날 수 있다고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거대한 무리가 모여서 시간의 어긋남을 만들어 내기만 하면 현재의 산출물을 타인에 게 양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부를 미래로 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 고 살아간다.
- 비트코인은 무덤은 아니지만 열쇠가 없는 창고라는 점에서 매우 독 특한 시스템이다. 비트코인에는 백도어가 없으며 열쇠도 없다. 열쇠지 기도 없고 엘리트도 없다. 그런 제도가 무덤이 아니라 수시로 가치물을 꺼내 쓸 수 있는 창고가 될 수 있을까? 납득하기는 어려워도 가능하다는 것을 비트코인이 보여주고 있다. 인간들의 시간선호와 시간지평이 어긋날 때도 그러했지만 비트코인의 역사가 증명하는바, 패닉이 전염 되었을 때마저도 비트코인은 공포심의 최종적 해결자의 지원 없이 그 럭저럭 버텨냈다. 물론 기대감이나 패닉이 전염될 때마다 비트코인 가 격이 크게 요동치므로, 자의적인 요소들이 수많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열쇠가 없는 제도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비트코인은 문명사적인 사건이다.
- 금융과 관련해 계속 말을 바꿔온 국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뭐라 고 맹약해도 국민이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국가는 권 력의 속성상 힘의 최종적 근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응징할 수단이 있다는 것을 국민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 국가가 약속을 어겨도 응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국민이 깨닫는 순간부터 국가와 국민은 '맹약의 어려 움'에 빠져들고 모두에게 해로운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가 어찌할 수 없는 돈, 비트코인이 필요한 이유다. 개인은 물론 국가에조차 비트코인이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날이 올 것이 다. 바로 아르헨티나처럼 금융과 관련해 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을 때, 믿지 못해 저축하지 않고 믿지 못해 투자하지 않고 결국 믿지 못해 아무도 다른 사람과 장기적으로 협력하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정부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정부 스스로를 묶는 길밖에 없다. - 2013년 말 붐이 일었을 때는 인민은행장이 나서서 주 요 기업과 기관이 비트코인을 취급하지 못하게 엄포를 놓았으며, 2017 년에 붐이 일었을 때는 거래소를 폐쇄했다. 2021년에는 또다시 붐이 일 자 비트코인 채굴도 불법화했다. 중국이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비트코인이 중국 정부에 매우 불리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자본이동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외국, 특히 미국에 대해 무역경쟁력을 유지하려고 환율을 의도적으로 낮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독자적인 이자율정책을 펼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중국은 경제개발 과정에서 한국의 사례를 깊이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 다. 한국이 성공한 부분도 학습했지만 실패한 부분을 더 많이 연구했다 고 한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는 중국에 큰 교훈을 주었다. - 당시 한국은 OECD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외국인 투자를 비롯해 자 본시장을 개방했는데, 국제적인 핫머니에 노출되었다가 일시에 자금이 빠져나가면서 달러부채를 안고 있던 종금사와 기업들이 줄도산을 했 다. 당시 동남아시아도 비슷한 위기를 겪었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정 부가 무너졌고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요동쳤다. 중국 공산당은 외 국인들에게 자본시장을 개방하면 좋은 점도 있지만, 거대한 자본들이 휘젓고 다니는 것을 방임할 경우 한국과 동남아시아처럼 외환위기를 겪고 정권이 바뀌는 현상을 관찰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본시장이 붕 괴되면 정권의 위기로까지 치닫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자본시장만큼은 개방하지 않고 금융과 이자율, 통화량, 환율을 철저하게 정부가 규제하 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이 중국 수뇌부의 강력한 의지다. - 신원정보나 디지털 자산이 내 것임을 증명할 때 편리성과 프라이버 시를 둘 다 가지려면 어느 플랫폼에서든 개인정보를 제시하지 않으면 서 내가 나임을 그리고 디지털 자산이 내 것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 다. 신원정보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디지털 자산이다. 따라서 디지털 소유물도 플랫폼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생태계는 회사들의 막강한 권한을 견제할 수 있다. NFT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대체불가능한 토 큰NFT: Non-Fungible Token으로서 블록체인에 특별한 정보를 입혀서 고유성을 확보한다. 비트코인은 대체가능해서 1BTC는 1BTC와 등가로 교환되지 만 특별한 정보가 들어간 코인은 더 이상 등가물이 아니다. NFT는 디지 정보의 고유성을 보장하기 때문에 플랫폼을 옮길 때 소유권이나 신 원을 확인해 준다. 이를테면 국경을 넘나들 때 내가 나라는 것을 외국 정부에 인증하면서도 신분증에 담긴 개인정보를 우리나라나 외국 정부 에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즉, 메타버스의 편리성은 누리면서 프 라이버시는 지킬 수 있게 해준다. 게임 플랫폼에 있는 아이템들은 고가에 거래된다. 그러나 플랫폼 밖에서의 아이템 거래는 플랫폼 운영사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거래가 아 니다. 아이템 구매자는 플랫폼 외부에서 흥정한 뒤, 돈을 보내고 게임 내부에 접속해서 아이템을 인계받아야 한다. 게임 회사는 이런 거래를 알지만 묵인한다. 유저끼리 매매가 이뤄졌어도 실제 소유권이 확실하 진 않은데, 법적으로는 아이템들이 게임사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이때 게임사들이 게임 아이템을 NFT로 만들면 고객이 마음대로 처분하도 록 독려하는 셈이다. 얼핏 보기에 이는 게임사가 지배적 권한을 포기하 는 것 같다. 그러나 게임사들은 플랫폼 내에서 신과 같은 절대적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으면서까지 NFT를 선언하고 있다. 놀랍게도 자신이 가 진 절대권을 내려놓는데도 그 플랫폼에 대한 신뢰가 올라가므로 덩달아 주식가격도 오른다. 신뢰가 땅에 떨어진 정부가 자신이 어찌할 수 없 는 비트코인을 활용해 신뢰를 회복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플랫폼 회사 나 정부가 구성원들의 자산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구성원들이 인 지하면 생태계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구성원들 간에 더 많은 협 력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NFT로 만든 ID 덕분에 <리니지>나 <싸이월드>, <로블록스>를 옮겨 다니며 일일이 나라는 것을 검증할 필요도 없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내 정보를 넘길 필요도 없게 되었다. 신분증과 디지털 자산의 소유권을 확 인해 주는 이 놀라운 기술들이 바로 2008년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트코 인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은 섬처럼 떨어진 디지털 세계를 연결한다. 이 는 자산과 신원의 이동을 통해 가능하다. 자산의 소유와 신원을 인증하 는 중앙 없이도 이 일을 해낸다. 비트코인 그리고 블록체인 기반 신원인 증과 만나면 메타버스는 디지털 영혼들이 영생하는 공간만이 아니라 디 지털, 금융, 무역의 복합망으로서 세계 최대의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다. - 호모 사피엔스는 장부를 만들어 주관적인 사고의 세계를 하나로 연 결할 수 있었지만 장부에 대한 접근 권한 때문에 지독하게 흉물스러운 중앙을 만들어내야 했다. 초기 문명권에서는 문자 자체가 진입장벽이 었다. 이집트와 중국 두 나라 모두 평범한 뇌력의 소유자라면 거의 평생 토록 익혀야만 쓰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문자체계를 창안했다. 장부를 읽고 기록하고 고치는 자들, 즉 문해력을 가진 이들은 평민들과 는 다르다는 것을 굳이 따로 입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은 문자를 익 히는 거의 평생 동안, 생산활동을 하지 않아도 부양받을 수 있는 집안에 서 태어났다. 따라서 문해계층은 대를 이어 문자해독을 독점했으므로 장부의 접근경로를 장악할 수 있었고, 이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외부인 들의 진입도 막았다. 좋은 장부는 변경할 수 있으면서도 아무나 아무렇게나 변경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까 장부는 창고의 가상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많 은 경우 현실의 창고는 가상의 장부와 정확하게 대칭되어야 했다. 창 고 열쇠가 엘리트의 손에 있듯이 장부도 그러했다. 평생을 수련하도록 누군가의 지원을 받아야 했으므로 귀족 자제만이 문자를 익힐 수 있었 고, 그들 중에서도 일탈하지 않고 반복학습을 따라온 젊은이들만 시험 을 보고 서기가 될 수 있었다. 장부를 담당하는 서기와 창고 열쇠를 가 진 엘리트의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는 문자해독이라는 자기 능력을 증 명해야 했던 대신 후자는 창고 열쇠 (여기서 창고는 창고를 가지고 있는 성벽 도 의미한다)를 가진 가문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힘이 강해 창고 자체를 완력으로 빼앗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정도다. 동양에서는 특이하게도 장부담당 관리를 실력으로 뽑았다. 유교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장부담 당 관리들이 창고도 맡았다. 서양에서는 처음에는 힘으로 창고를 획득 한 귀족이 장부담당자를 고용했다. 그러나 두 문명권 모두 정치가 안정 될수록 장부관리와 창고관리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정부가 지식인 엘 리트와 무사 엘리트의 공조체제로 구축된 것도 장부와 창고의 떼어낼 수 없는 결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 트레이드렌즈는 전 세계 120여 개 기업과 조직이 참여한 세계 최대의 기업용 블록체인 프로젝트로서 4년간 7,000만 개의 컨테이너를 추적했 고, 약 3,600만 개의 전자 선적문서를 게시했다. 문서 작성 비용을 20% 절감할 수 있었고 수송 시간도 40% 감축하는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 러나 2023년 4월을 끝으로 서비스를 종료했다. 경쟁업체의 참여도 미흡 했지만 무엇보다 수익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기업형 블록체인은 블록체인의 가시성visibility을 활용하는 쪽 으로 제안되어 왔다.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제품, 금융, 정보의 흐름을 기록하면, 이 정보를 공급망 참여자 모두가 공유할 수 있어 공급망 전체 의 투명성이 증대된다. 즉, 공급망의 거래정보와 재고정보를 구성원들 이 모두 투명하게 볼 수 있다면, 과잉 재고와 과잉 주문이 감소하고 배 송 지연이나 오류도 줄어들어 공급망의 시장 대응 속도와 효율성이 개 선된다는 논리다. - 동일한 장부를 다수의 서버에서 동시에 갱신하고 보관하는 것이 핵 심인 블록체인은 비싼 시스템이기 때문에 서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즉, 블록체인이 반드시 토큰을 발행해야 하 는 것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토큰을 발행해야만 주도하는 기업의 서버 운영 부담이 줄어든다. 비트코인처럼 채굴자들이 달려들어야만 기업이 분산 서버 운영과 관련한 비용을 외부에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 나 기업형 블록체인은 토큰 발행을 꺼릴 뿐 아니라 서버를 불특정 다수 의 채굴자들과 공유하는 방안도 선택지에서 제외한다. 정부와 규제기 관 그리고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며 정보를 경쟁사와 공유 한다는 개념을 수용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식은 기업의 수뇌부들이 아직 블록체인 메인넷의 무궁무진한 확장성과 다양 한 쓸모를 이해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 농업혁명 시기에 서기의 장부가 실제 토지를 점유하는 것보다 더 실 제적이라고 인식한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메타버스상에서의 토지소유 권 거래 이력은 실제 거래 이력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메타버스 상에서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특정 토지가 담보화되어 그것을 기반으 로 금융상품이 거래되고 토지의 소유권 이전 거래도 활발하게 이루어 지는 데다, 그 정보를 투명한 메타버스상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면 구글의 토지 소유 장부는 이집트 서기의 장부와 같은 권위를 갖게 된다. 특히 등기소가 권위를 갖지 못하던 아프리카 오지의 국가들에서는 더 욱 그러할 것이다. 메타버스상에서는 동결된 문제의 자산을 현실에서 사고팔 때, 권리의 상당부분이 제약된다는 것을 피차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토지와 주택의 가격에는 사용가치만이 아니라 처분할 때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실제와 믿을 수 있는 가상의 장부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추론이 어렵지 않다. 즉, 인간에게는 장부를 현실보다 중시하는 감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뢰할 필요가 있다. - 삼성페이는 여러 신용카드를 모아 놓은 지갑에 불과하다. 삼성은 금 융서비스를 하는 것이 아니다. 결제정보도 모으지 않는다. 예치금도 없 다. 스타벅스마저도 선불카드로 예치금을 모아서 예탁자산이 웬만한 은행을 앞서고 있는데, 삼성페이는 삼성 스마트폰을 파는 데 도움을 주 는 킬러 앱일 뿐이다. 한편, 애플은 금융업에 뛰어들고 있으며 당연히 저축을 받는다. 애플 은 스마트폰을 단순한 모바일 기기로 보지 않고, 자신들이 구축하려는 거대한 애플 우주에 접근해 그 우주 내부를 이곳저곳 거닐 때 사용하는 수단의 하나로 보는 DNA를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 삼성은 스마트폰을 기기로만 인식하는 문화가 강하며 심지어 기계 마저도 애플을 능가하지 못한다. 기업의 DNA는 결국 기업 엘리트의 체 질이기도 하다. 이는 쉽게 바뀔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조직정치를 통해 걸러지며 성장한 엘리트들의 기업관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애플이 비트코인으로 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잭 맬러 스가 비트코인 맥시멀리스트이며 수수료가 비싼 비트코인으로 반드시 커피를 사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들을 위해 만든 라이트닝네트워 크 전문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때 애플이 비트코인이나 암호화폐의 개인지갑 앱을 차단한 적도 있지만 그것은 옛일이다. 그저 아이폰이 비트코인 지갑을 탑재하고 스마트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비트 코인을 보내고 받게 한다는 것으로는 뉴스가 되기 어렵다. 이는 이미 아 이폰에서는 물론 안드로이드폰에서도 되고 있다. 아이폰이나 안드로이 드폰이나 스마트 계약의 담보물로서 신용카드 회사와 금융회사를 생략 하고 글로벌 소비자 금융의 허브가 될 때 유의미하다. 비트코인은 최종성을 갖는 결제수단이다. 또한, 전자적인 형태로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담보자산으로서도 훌륭하다. 즉, 비트코인은 스 마트 콘트랙트의 전제를 모두 만족시킨다. 라이트닝네트워크는 바로 비트코인의 이런 속성을 이용해 거래가 빈번한 이들 간에 비트코인 블 록체인과는 별도의 장부를 만들어 수수료를 절감하면서도 서로가 상대 의 배신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게 한 결제방식이다. 예를 들어 단골로 이용하는 회사 앞의 카페 주인과 공통 지갑을 만들 수 있다. 이 지갑에 담긴 비트코인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둘 모두의 합 의가 필요하다. 여기에 담보로서 비트코인을 넣어두고 매일 커피를 사 먹을 수 있다. 비트코인은 커피값만큼 카페 주인에게 이동하지만 아직 비트코인 블록체인에 올리지 않기 때문에 수수료는 없다. 외지로 전근 을 가게 될 경우 더 이상 그 카페를 이용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 상태에 서 최신 장부를 블록체인에 올려 컨펌을 받는다. 이때 수수료를 한 번만 내면 되기 때문에 라이트닝네트워크는 수수료가 거의 제로라는 말이 나온다. - 라이트닝네트워크의 성장이야말로 단지 투자를 위해 거래소에서 비 트코인을 거래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 비트코인 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전 지구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실은 애플의 아이폰이나 삼성의 갤럭시에 특별한 메시지를 던진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는 평생토록 은행계좌를 만들지 않는 이들이 절반이 넘는다. 아이폰이나 갤럭시가 소유자들과 바로 1:1로 라 이트닝네트워크 채널을 만든다고 상상해 보자. 이 회사들이 가장 큰 허 브가 되는 셈이다. 사용자는 소량의 비트코인을 스마트폰에 예치하고 결제에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비트코인의 가격이 변동하므로 두 회사는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현재가로 동결하거나 매번 시간에 맞추는 선택권을 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가격을 동결하면 사용자는 변동 성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가격이 오르면 아이폰이나 갤럭시가 수익을 취하면 되고 가격이 내리면 회사가 손실을 본다. 그러나 사용자가 많으 면 이는 통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서 회사로서는 위험을 분산할 수 있 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로써 애플과 삼성은 어떤 은행보다도 많은 예치금을 보유한 금융회사로 거듭날 수 있다. 더구나 스마트폰은 닉사 보가 30년 전에 상상한, 전자적으로 통제 가능한 이상적인 담보자산에 가깝기 때문에 신용카드 사기와 같은 문제로부터도 자유롭다. 한 해에 전 세계적으로 280억 달러가 넘는 신용카드 사기 규모로 볼 때 이는 결코 작은 이점이 아니다. - 무엇보다 스마트폰과 암호화폐의 비밀키 자체가 인증이므로 더 이 상의 신원정보는 불필요하다. 즉, 사용자의 정보를 스마트폰에 두느냐, 신용카드 회사의 서버에 두느냐를 놓고 규제당국까지 합세한 씨름에서 자유롭다. 즉, 삼성페이를 만들 때 설득해야 했던 수많은 이해당사자들 과의 복잡한 절차가 모두 생략된다. 실행단계에서는 기술적 장애가 적지 않겠지만 기존 금융생태계를 설득하면서 모바일과 결합하는 것보다는 훨씬 간편할 수밖에 없다. 두 회사의 경영진이 비트코인과 스마트 계약 그리고 모바일의 결합이 가 져올 의미를 깨닫고 나면 기존 금융회사들은 쓰나미에 직면하게 될 것 이며, 금융망으로부터 소외되었던 20억 명 이상의 인구가 스마트폰이 라는 간편한 은행을 하나씩 소유하게 될 것이다. - 애플과 삼성중 과연 누가 이 의미를 빨리 깨달아 실행할까? 잭 맬러스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를 침공하면서 비트코인 업계는 지정학적 겨울로 진입했다. 다국적 기 업들은 미국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대 기업들의 블 록체인 프로젝트가 이때를 기점으로 모두 침묵에 잠겼다. 잭 맬러스가 암시한 것이 무엇이었든 당시 분위기에서라면 애플은 계획하던 일을 연기하는 쪽을 선택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침묵이 계속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잭 맬러스를 신뢰한다는 전제에서 추론하자면 애플 경영진은 스마트폰과 블록체인의 결합이 가져올 금융의 쓰나 미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다. 문제는 비트코인을 저주하는 지식인들이 여론을 장악하고 있는 한 국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아무리 기업에 지식과 자원이 있다고 해도 새 로운 도전을 하기 어렵다. 지금이라도 비트코인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 보자는 여론의 전환이 필요하다. 비트코인이 단지 비트코인에 머물지 않고 한국의 산업경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오래된 경고 에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서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 튤립버블 사건은 사실 확대, 과장 정도가 아니라 거의 날조된 사건이 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에는 이 비유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골드가가 발 견한 가장 비싼 튤립 영수증은 5,000 길더로 당시 좋은 집 한 채 값에 해 당한다. 그러나 그 거래는 예외적이었다. 골드가는 튤립 구근에 300길 더 이상 지불한 사람을 37 명밖에 찾지 못했다. 튤립 거래는 300명 정도 의 능숙한 업자들로 한정되었고 튤립버블로 법원에 파산신청을 한 사 례는 단 하나도 없었다. 튤립으로 돈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유명인들도 사실은 부동산 투기로 돈을 잃었던 것이다. JP모건 분석가의 통찰처럼 생산비용이 비트코인 거품이 아니라 튤 립버블 사건을 푸는 열쇠다. 당시 네덜란드 화훼업자들은 튤립의 생산비용이 얼마인지 잘 몰랐다. 투르크 제국에서 들여온 튤립은 유럽 의 습하고 추운 기후에서는 재배하기가 쉽지 않았고, 당시 네덜란드에 는 튤립이라는 사치품 수요를 생산이 따라갈 수 없다는 인식이 널리 유포됐다. 한 계절만 볼 수 있는 꽃이고 현지 재배가 어렵고 냉장시설도 없던 시절을 고려할 때 비용요소만 놓고 보면 튤립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실 투기적 거품이 일기 전에도 오랫동안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튤립 구근이 평균적인 집보다 비쌌던 것 은 아니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돌연변이가 일어나 무늬가 독특했던 튤립의 구근만 그렇게 비쌌다. 당시 튤립 구근의 가격폭락은 시장원리 때문이었다. 가격이 폭등하 자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어떻게 해서든 생산을 늘렸다. 돈을 쉽게 벌수 있다는 기대는 결과적으로 반대의 상황을 연출한다. 생산에서 혁신이 일어나므로 생산비용은 낮아진다. JP모건의 분석대로 생산비용과 간극이 큰 자산가격은 결국 붕괴하기 마련이다. 1980년 이후 튤립버블 사건 에 대해 진지한 학자들의 독립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는데, 미국 브라운 대학의 경제학자 피터 가버 Peter M. Gaber는 튤립의 가격변동이 우리가 흔 히 아는 대로 비이성적인 광기였다기보다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가 생산의 혁신이 일어나면서 가격이 안정되는 전형적인 시장조절 패턴 안에 있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튤립버블은 미시시피회사나 남해회사 파산과 같은 거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현상이었다. 18세기에 일어난 이 주식시장의 거품 사 건은 기본적으로 회계부정 사건이다. 이 두 회사는 회사의 미래를 장밋 빛으로 소개하거나 적자투성이인 현실을 감추었다.
- 미제스는 금속화폐의 내재가치를 따지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비판한다. 오히려 그는 비트코인처럼 모든 정보가 공개된 화폐를 지지 했을 법한 논리를 구사한다. 금이 화폐로서 좋은 것은 금의 상품적 기억 때문이 아니다. 미제스는 사람들이 정직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했 다는 정보가 담겼기 때문에 금이 좋은 화폐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가가 만든 화폐는 사회의 정보를 교란하기 때문에 결국 실패한다고 보았다. 화폐는 추상화된 장부다. 장부란 곧 다수가 믿을 수 있는 객관 적 정보를 의미하는데 어떤 물질이든 그 획득과 확산에 대한 정보를 믿 을 수 있다면 장부로 선택될 수 있고, 장부로 인정받으면 그 물질의 직접 적인 효용과는 무관하다는 걸 미제스는 알고 있었다. 미제야말로 화 폐를 사회적 정보 시스템의 한 축으로 이해한 구루Guru이므로 화폐사상 에 국한해서 보자면 사토시 나카모토의 직계 스승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스위스 디나르가 경제학자들에게 충격을 안긴 이유는 정부나 은행 같이 신뢰할 만한 기구가 보증하지 않는데도 한낱 종이에 불과한 사물 이 자생적이면서도 안정적으로 사회적 약속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스위스 디나르는 상품 화폐가 아니어도 정부나 은 행의 보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사례다. 만약 상품가치 없는 종이나 코드 쪼가리가 신용화폐로 기능하 기 위해서는 정부나 금융기관의 인정이 필수적이라고 전제한 뒤 비트 코인을 평가하는 경제학자들의 비판이 적절하다면 스위스 디나르 현상 도 발생하지 않았어야 했다. 독재정치와 전쟁 그리고 인플레이션이 활개 치는 사회에서 화폐란 단지 거래의 수단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수단이었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는 정부가 보증하지 않는 돈이 정부가 보증하는 돈보다 더 돈다 운 돈으로 인식될 수도 있음을 알려준 사례 중 하나다. 스위스 디나르는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사람들이 당시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의 장 부였을 뿐이다. 비슷한 일은 반복해서 일어났다. 흔히 차탈리즘chartalism, the chartal theory of money이라 불리는 화폐이론, 즉 정부가 발행하고 세금의 지불수단으로 삼는 것만이 화폐라는 이론에 매몰된 사람들만이 이 사실을 무시할 뿐 이다. 1991년 1월, 소말리아가 내전으로 붕괴되었을 때 소말리아 중앙은행 의 금고가 폭파되면서 모든 현금과 귀중품이 약탈당했다. 중앙은행의 보장이 사라졌는데도 소말리아 실링 지폐는 소말리아인들 사이에서 계속 유통되었다. 중앙 통화당국이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데도 당시의 실링은 오늘날까지 소규모 거래에 사용되고 있다. 흡연자가 없어도 담배화폐가 계속 쓰인다는 것을 알면 이는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중 앙은행이 약탈당하기 전까지 소말리아 국민들은 정당한 노동과 거래를 통해 실링을 얻었을 것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거래수단은 없었던 것이 다. '어디에 쓰느냐보다 어떻게 얻었느냐가 더 중요한 장부로서의 화폐 적 개념에서 보면 스위스 디나르나 소말리아 실링이나 모두 예측 가능 한 사례였다. 사람들은 좋은 장부를 찾는다. 그 장부가 반드시 이상적일 필요는 없다. 구할 수 있는 장부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하면 된다. 스위스 디나르 처럼 차탈리즘과는 정반대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정부가 장부를 조작 하면, 즉 화폐발행을 남발하면 정부가 금지한 정부의 예전 돈이 더 강력 한 화폐가 될 수 있다. 더 이상 정부의 손을 타지 않는 종이돈이 정부가 인정하지만 정부 마음껏 인쇄하는 돈보다 더 좋은 장부일 수 있기 때문 이다.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생각하지 않는다.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화폐의 위험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의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선택하는 장부를 관 찰해 선택하고 그런 선택이 모여서 하나의 화폐가 탄생하는 것이다. - 고트프리트 라이브란트Gottfried Leibbraner와 나타샤드 테란Natasha de Teran이 공저한 <결제파워payment power>에서 저자들은 인류학자들의 연구결 과를 인용하여 화폐보다 부채가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물물교 환의 불편함 때문에 화폐가 생겼다는 경제학자들의 사고실험이 실제로 화폐의 기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폐는 상품화폐에서 기원한 게 아니 라 부채를 해소하는 방식에서 기원했다는 인류학자들의 가설을 지지하 는 증거가 더 많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책에 나온 예시를 살펴보자. 어느 작은 섬에 있는 호텔을 찾은 관광객이 100달러짜리 지폐로 호텔비를 선불로 결제 한다. 호텔 주인은 관광객이 낸 100달러짜리 지폐로 정육점 주인에게 빚을 갚고, 정육 점 주인은 다시 그 돈으로 농부에게 진 빚을 갚고, 농부는 정육점 주인에게서 받은 돈 물 트랙터를 고쳐준 정비소 주인에게 주고, 정비소 주인은 지난달에 딸의 결혼식 장소 를 빌려준 호텔 주인에게 그 돈을 준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난 후 관광객이 호텔 프린트 에 나타나 마음이 바뀌었다며 호텔에 투숙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호텔 주인은 관광객에게 100달러를 돌려주고 관광객은 떠난다. 관광객이 등장하기 전과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섬에 존재했던 모든 빚이 청산됐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관광객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섬의 상태는 바뀌었다. 얼핏 보면 마술과 같은 현상이다. 그러나 화폐가 애초에 장부였다는 사실을 음미 해 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사실 관광객이 주었다 도로 가져간 100달러가 없어도 섬의 이해관계자들이 모여서 서로 장부를 펼쳐 놓고 순차적으로 바꾸면 될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섬의 사람들은 100달 러짜리 환어음을 발행하고 돌리면서 서로의 변제를 없앨 수도 있었다. 환어음이란 발행인이 받을 돈(매출채권)을 근거로 자신의 채무를 변제하 는 것이다. 수출업자는 수입업자를 지급인으로 환어음을 발행해서 은 행에 가져다주고 미리 돈으로 받거나, 아니면 수출할 상품의 원료를 제 공할 업자에게 물건값 대신 환어음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 원자재 업자 는 나중에 수입업자에게 환어음을 주고 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 경제학에서 비주류로 취급받는 오스트리안 학파austrian school들은 실체 가 있는 상품화폐가 진짜 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안들의 대부 미제스는 금이 가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정부가 금의 양을 마음 대로 늘리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돈이라고 주장했다. 미제스도 화폐는 추상적 장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화폐가 사회적 장부일 뿐이라는 생각을 못 받아들이는 쪽은 경제학 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이다. 매일 사용하는 신용카드나 온라인 뱅 킹이 디지털 수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 수치 뒤에는 뭔 가 값나가는 물질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화폐 없이 모든 것이 중앙컴퓨터의 기록에 의해 통제되는 폐쇄된 공 동체의 경제흐름을 디자인해 보면 화폐의 본질이 거대한 장부라는 것 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가격이 아 니라 중앙이 정한 교환비율이 작동하는 배급제 사회라고 해도 상품의 교환은 필요하다. 설계자는 그 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해 사회에 뭔가 공헌한 사람에게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는 포인트를 주려 할 것이다. 대체 로 노동시간에 따라 포인트를 주고 그 포인트를 다른 물건의 구입에 사 용할 수 있게 설계할 것이다. 다만, 화폐가 없다는 전제상 설계자는 포 인트를 구성원에게 주는 대신에 장부에 기록할 것이다. 구성원들은 포 인트를 사용할 때 장부관리자에게 보고하고 포인트의 주인을 바꿔달라 고 신청할 것이다. 결국 그 장부에는 구성원들의 생산 기여도와 생산된 물자의 양은 물론 포인트 거래내역의 최신 상태까지 기록될 것이다. 그 리고 설계자는 물건의 양을 초과해서까지 포인트를 발행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포인트는 물건에 대한 청구권을 의미하는데, 청 구권이 물건보다 많은 불균형은 사회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 다. 이 장부의 핵심은 구성원들이 내용을 함부로 고치지 못하게 하는 것 이다.
- 인류 최초의 문서는 회계장부다 인류학자들의 발견에 의하면 역사상 최초의 문서는 회계장부였다. 유발 하라리 Yuval Harari는 《사피엔스》에서 5,000년 전 수메르인들이 '보리 2만9,086 자루, 37개월, 쿠심'이라고 적은 점토판을 남겼다고 소개하며 인류 최초의 문서가 철학도, 시도, 전설도 아니고 빚이나 권리를 기록한 회계장부였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전혀 다른 문명권인 아메리카 안데 스산맥의 잉카제국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들은 아예 주판처럼 수체계 를 기록하는 데만 쓰는 결승문자인 키푸quipu를 남겼다. 키푸는 색색의 실에 매듭을 지어 수를 나타내는데 세금이나 빚, 재산의 소유권을 표시 했다.
-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경제적 자유주의의 거목인 프리드리히 하 이에크는 폭력으로는 정부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에 뭔가 우회적이면 서 지능적인 방법을 찾아야만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화폐를 만들 수 있 다고 말한 바 있다. 하이에크가 이 말을 한 해는 1984년이었고 그는 1992년에 사망했다. 그는 인터넷의 대중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The Bitcoin Standard』의 저자는 하이에크의 통찰력이 비트코인의 존 재 의의를 그 누구보다 잘 설명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나는 우리가 정부 손아귀로부터 권한을 빼앗아오기 전에는 다시 '좋 은 돈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정부에 폭력적으로 대항해서 화폐 권한을 빼앗을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이 방해할 수 없는 뭔가 '교활한 것'을 들여오는 방편을 취하는 것이다. - 역시 노벨상 수상자이자 자유시장의 옹호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말 년에 인터넷의 성장을 목격했다. 그는 인터넷에 의해 분산 시스템이 부 상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인터넷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화폐가 등장할 것을 예상했다. 그는 사실상 비트코인의 작동원리를 묘사하는 발언도 했다. 즉,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두 거래 상대가 인터넷을 이용 해 자금을 이전하면서 거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프리드 먼은 미국 중앙은행의 화폐 통제권을 회수해 화폐발행 스케줄을 자동 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해진 비율로 화폐 발행량이 늘어나야 한다 는 프리드먼의 아이디어를 알았을 게 분명한 비트코인의 창시자는 외 부의 개입 없이 정확한 일정에 따라 비트코인 발행량이 조절되도록 디 자인했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자유주의의 이 두 거두들은 무엇이 바람직한 가를 넘어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무턱대고 비트코인을 무시하는 오늘날 그들의 제자들과 다르다. - 소유권 때문에 중앙이 필요했다 농업사회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중앙집권화된 권력과 농민을 약탈로 부터 지키는 무사계급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농업이 동일 한 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재투입해야 할 양 이상을 생산해야만 중앙화 된 권력을 운영하는 관료들과 무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지리적으로 농업의 생산성이 높아 잉여물이 생산된다는 확신이 없는 곳에서는 중 앙화된 권력과 어려운 문자를 해독하여 장부를 기록하는 서기, 칼싸움 을 전업으로 하는 무사계급이 등장하기 어렵다. 즉, 척박한 곳에서는 서 기와 무사를 부양한 잉여 농산물이 없으므로 소유의 개념이 점유의 수 준을 넘지 못한다. 이런 곳에서는 장기적인 투자를 요구하는 농업혁명 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방만하고 오만한 무사계급을 부양해야 했으므로 농업혁명 이후 평 균적인 인류의 삶이 이전보다 후퇴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농업혁 명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인간들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소유개념 과 함께 윤리와 가족의 개념을 구축하는 토대다. 농업혁명이 이루어져야만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노인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것을 비롯해 사회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윤리개념 이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소유개념도 농업혁명의 연장선 위에 있다. 자본주의적 소 유개념도 하나의 도약이긴 하지만 채집에서 농업으로 갈 때처럼 소유 권과 윤리 관념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는 아니다. 농업에 투입되는 땅과 씨앗 그리고 노동이 자본주의 경제의 요소인 토지, 자본, 노동으로 치환 되었으며 산물에 대해 생산요소를 투입하는 이들 각자가 자기 몫을 가 져간다는 것도 동일하다. 물론 농업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급 사슬이 길어졌고 투자에서 산출까지 걸리는 시간의 개념도 늘어났으며 그 계산도 정교해졌다. - 호모 사피엔스의 추상화 능력은 한계를 뛰어넘곤 한다. 이골드의 금 괴 금고가 달의 뒷면에 있어서 FBI가 동결하러 갈 수 없었더라면 정부 는 간단하게 이골드를 폐쇄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트코인은 한 발 더 나 아가서 아예 근거자산이 없다. 마치 달의 뒷면에 둔 금고처럼, 바다 밑 바닥에 가라앉은 돌화폐처럼 비트코인의 근거자산은 누구도 점유할 수 없다. 왕이나 정부가 압류할 수 없는 추상화된 자산의 정의에 부합한다. 몸에 지닐 수도 없고 국경도 넘지 않으니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비록 비트코인 현상이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온 자산들의 추상화 과정도 상식을 배반하면서 시작했다. 가치 없는 종이 쪼가리들, 주 식과 채권과 종이돈이 갔던 길을 비트코인도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빚이 채권의 형태로 미분화되고 비인격화된 덕분에 오늘날 각국 정 부는 채무를 없앨 때도 추상적인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거대한 채 권자들을 잡아다가 족치는 방식이 아니므로 그 피해는 훨씬 광범위하 다.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이때 정부는 악마재판처럼 근사한 논리를 제 시한다. 대표적인 게 바로 근대화폐이론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정부는 부채를 갚지 않아도 되고 돈을 찍어내서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특권을 갖고 있으며 인플레이션이 경기를 활성화하고 불황에 빠진 경제를 구 해낸다. 이런 정부를 둔 주민들은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자산을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은행을 통제하기 때문에 달러나 신용카드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국경이나 실물에 매이 지 않는 권리물이 필요하다. 화폐는 국가가 인정하는 지불수단이라는 정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경제학자들로서는 도무지 인 정할 수 없는 주장이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비트코인의 무정부성이야 말로 약탈자와 다름없는 국가의 주민들에게는 일종의 복음인 셈이다. - 에너지원의 지리적 편중과 저장기술의 한계 그리고 수요의 불안정 성이 전기산업의 현실이다. 성수기의 피크타임과 비수기의 일상적인 수요는 두 배나 차이가 난다. 게다가 블랙아웃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므 로 정부는 성수기의 피크타임을 기준으로 발전설비를 최대화할 것을 요구한다. 당연히 남는 전기를 소비해 줄 유연한 수요처가 필요하다. 비트코인 채굴은 위치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또, 전기를 돌린 만큼 비트코인을 배당받는다. 꼭 완제품을 만들 때까지 시간을 투입하지 않 아도 된다는 뜻이다. 텍사스의 에너지 문제란 천연가스와 풍력 에너지가 풍부한데도 겨울철 한때의 추위에 대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전기 수요의 특성상 한편으로는 남은 전기를 버리면서도 한편으로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는 일은 흔하게 발생한다. 비트코인 채굴은 텍사스의 풍부한 잉여 전기를 활용하므로 발전소 입장에서는 발전설비를 최대치에 맞추어도 흑자 경 영이 가능하다. 텍사스의 사례는 전기 발전에는 특수한 경영전략이 요 구되며 비트코인 채굴이 유연한 소비처로서 발전산업의 비책이라는 것 을 증명하고 있다.
-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다음, 비잔틴 장군들이 각각 자기 권역을 지배하고 다른 장군들을 공격하면서 제국은 성장했던 속도만큼 빠르게 분 열되었다. 비잔틴 장군들의 문제라고 하지 않고 당나라 군대 문제라고 하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한 성을 점령하려고 성 주변에 각자 부대를 거느린 비잔틴 장군들이 모여들었다. 비잔틴 장군들은 독자적인 성격이 강한 개개의 컴퓨터나 프로세스를 상징한다. 이들이 공격시간을 정해 함께 공격한다면 성을 쉽게 점령할 수 있다. 그러나 분열되면 성공할 수 없다. 각 부대는 전령 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데 문제는 가짜 정보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장군 중에 한 명 이상은 공격을 무산시키기 위해 성에서 파견된 스파이인 데 성을 포위한 장군 중 하나로 위장했다. 이 스파이가 공격시간을 전달 받은 후 옆의 장군에게 시간을 바꿔 전달할 경우 충성스러운 장군들은 스파이로부터 받은 가짜 정보와 다른 쪽에서 전달된 진짜 정보를 모두 받고 고민에 빠진다(비잔틴 장군들은 성에 가려서 서로를 보지는 못하지만 강강 술래처럼 원을 구성하고 있다). 이 경우 장군들에게 정확한 정보와 가짜 정 보를 가려줄 사령관(중앙)이 없다는 게 문제다. 장군들 중에 명령권을 가진 사령관이 스파이거나 1/3 이상의 장군들이 스파이라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권위체 가 없는 분산 네트워크는 조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비잔 틴 장군 문제는 30년 이상 해결이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토시 나카모토가 발명한 비트코인은 비잔틴 장군들의 문제를 극복했 다. 분산된 노드들이 중앙 없이도 지금까지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 그 증거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잔틴 장군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한 전제는 크게 두 가지다. 비용과 다수의 선의다. 채굴 경쟁에 참여한 퓨터들은 전기를 소모해야 한다. 시스템에 참여하는 컴퓨터들 간에 주 고받는 중요한 신호는 비용을 들여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검증해 주 는 제3의 기관 없이도 그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 다수의 선의majority good will란 시스템에 참여하는 다수, 즉 51%로 표현 되는 과반 이상은 시스템의 붕괴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합리 적으로 추구한다는 의미다. 다수의 선의'라는 개념은 비트코인 협치의 핵심이다. 선의 good will란 대단한 공익정신이 아니다. 단지 참여자들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비트코인을 무력 화하고자 하는 몇몇 주체들은 악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 코인을 지킨 결과로 얻는 총이익이 누군가 비트코인을 붕괴시켜서 얻 을 수 있는 총이익을 압도하는 한 비트코인을 지키고자 하는 구성원들 의 힘이 더 크다. 이 개념은 코즈의 정리와도 맥이 닿는다. 즉, 이익의 총합이 큰 쪽으로 움직이도록 작용하는 압력이 그렇지 않은 쪽으로 움 직이게 하는 힘보다 훨씬 강하다.
- 경제 규모가 작을 때는 중앙은행이 화폐량을 통제할 수 있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고 민간이 보유한 화폐량이 늘어나면 문제가 생긴다. 중 앙은행이 화폐를 찍어내지 않더라도 가계와 기업이 장롱 속에 넣어두 었던 화폐를 꺼내 사용하면 시중에는 통화량이 늘어나는 효과가 발생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앙은행이 화폐를 찍어 유통시켜도 사람들이 이를 거래에 사용하지 않고 장롱 속에 넣어둔다면 시중에 유통되는 통 화랑은 늘어나지 않는다. 즉,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시중에 유통되는 화 폐의 총량은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것과 민간이 얼마나 이 화폐를 유통 시키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때 민간이 얼마나 화폐를 유통시키는 지를 평가하는 지표를 '화폐 유통 속도'라고 한다. 세상이 복잡해지자 중앙은행은 화폐랑을 직접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를 보유하는 일 종의 비용인 금리를 통제함으로써 통화정책을 펴는 방안을 만들어냈 다. 현재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은 통화정책의 표적을 화폐량보다는 금 리에 두고 있다. 정책의 기준은 바뀌었지만 금리를 조절하는 것과 화폐 랑을 조절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보통 기준금리 인하 결정은 많은 이들에게 환영받는다. 국민들은 당장 대출이자가 내려가서 좋고 정치권도 금리 인하로 경기가 살아나면 인기가 올라갈 것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반면 금리 인상은 강한 저항을 받게 된다. 미국도 (우리나라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금리에 대한 정 치적 압력이 없지는 않다. 2019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연준이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연준이 금리를 수차례 인상하자 트럼프 대통령 은 "파월과 시진핑 중 누가 미국의 적인가"라고 언급하며, 연준 금리 를 인하해줄 것을 강하게 압박했다. 2019년 7월, 결국 미국 연준은 트럼 프 대통령의 압박에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이처럼 '정치로부터의 독립' 은 한국은행을 비롯한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공통된 숙제다. 정치의 개 입이 강해지면 금리를 내리고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강해지면 금리를 올 리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도 우리나라 금리변동의 특징이다.
- 정책 면에서 보면 미국은 기축통화국의 이점을 최대한 누리면서 나름대로 현실을 진단하고 이에 대해 적절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도 기준금리를 내리지 못하고 올리면서 침체의 정도를 더 심하게 만드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면서도 미국처럼 공격적인 금리 인상이 어려워 향후 미국과 우리 나라의 금리차는 더욱 벌어져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은 효과도 미진하고 정 책 타이밍도 맞추지 못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경제적으로 미국이 기침 을 하면 우리나라는 독감에 걸리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규모가 작고 개방도가 높은 우리 경제의 숙명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지 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 경제 상황에 맞는 정책을 만들 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그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나라는 기준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통화정책을 통해 경기를 조절하는 기능이 취약한 편이다. 또한 금리를 일률적으로 예측하는 것 도 상대적으로 어렵다.
- 실리콘밸리은행이 파산한 이유 그런데 SVB 은행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 은행은 자산 부실화가 현 실화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급속한 긴축으로 금리가 가 파르게 오르자 채권 평가손실을 입었다. 대차대조표 상에서 채권 가격 이 떨어져 손실을 입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은행은 갖고 있는 채권의 대 부분이 미국 국채여서 채권 부실화가 진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 지만 채권값 하락으로 손실을 입게 되면 은행의 대차대조표상에서 자 산이 줄어들게 된다. 또 금리 급등에 따른 자산 평가손실도 자본을 줄 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SVB 은행은 20억 달 러 규모의 자본 확충을 통해 자산을 늘리려는 시도를 했다. 이런 시도 가 오히려 예금자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면서 '뱅크런'으로 이어졌다. 하루 사이에 예금자들이 420억 달러나 인출을 하자 은행의 자산으로는 이를 충당할 수 없게 됐고 결국 은행은 파산에 이르렀다. 은행의 대차대조표 구조를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가 어느 은행에서 나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면 채권의 평가손실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손실이 반영되면 예금 자들은 불안해하고 예금 인출에 나서게 된다. 에리카 장 교수는 미국의 경우 금리 인상으로 전체적으로 6,200억 달러 정도의 평가손실을 보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전체 은행 자산의 2.6% 정도다. 비율로는 높지 않지만 이런 평가손실이 어느 은행에서 현실화할지 그리고 이런 손실 에 대한 불안감으로 어느 은행에서 뱅크런이 발생할지 예측하기란 어 려운 일이다. 은행 시스템은 평상시에는 매우 평화롭게 보이지만 곳곳에서 문제 가 발생할 수 있는 '뇌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은행 과 예금자 사이의 신뢰다. 뇌관이 현실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 으면 예금자들은 부실 징후가 있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뢰가 깨지면 예금자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은행을 무너뜨릴 수 있다.
-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경제다. 한 마디로 수출 을 많이 해야 먹고 사는 나라라는 이야기다. 1960년대 수출주도형 경 제정책을 입안한 이후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최우선은 수출 증대였다. 수출을 많이 하려면 우선 물건을 잘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 라 경제 발전 초기에는 물건을 잘 만들 수 있는 기술도 없었고 시설도 부족했다. 그러면서 수출은 늘려야 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저임금이다. 우리나라는 저임금 근로자를 고용해 수출 단가를 낮췄다. 그 다음으로 실시한 정책이 고환율이다. 환율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면 우리나라 가 해외로 수출하는 물건 값이 싸지는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환율이 1달러당 1,000원이고 옷 한 벌을 만드는 데 1,000원이 들었다고 가정하 자. 이때 우리나라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옷 한 벌 값은 1달러가 된다. 그런데 환율이 1,200원으로 오른다면 우리나라 옷 한 벌 값은 0.83달 러가 된다. 우리나라 원가는 변함이 없는데 달러로 표시된 값은 17%나 하락하는 것이다. 물건이 싸면 많이 팔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환율 을 정책적으로 높게 유지해 우리나라 수출품의 가격을 낮추고 수출을 늘렸다. 지금이야 기술력과 자본력만으로도 충분한 수출경쟁력을 유지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경제 발전이 한창 이뤄지던 1960~1980년대는 고환율 정책으로 수출단가를 낮추지 않으면 수출이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우리나라 환율은 항상 시장의 균형 환율보 다 다소 높은 수준을 유지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변동환율제도를 유지하고 있고 환율시장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경우 '환율조작국'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환율 수준을 조절하는 정책은 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외환시장이 요동칠 때 손 놓고 있는 나라도 사실상 없다. 이렇듯 외환시장과 정부와의 관계는 회색지대로 남아 있 는 것이 일반적이다.
- 일반적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은 자국 통화의 값이 떨어져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보다 자국 통화의 값이 떨어질 때 외 국 자본이 이탈하는 것을 훨씬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환율이 일정 수 준을 넘어서면 환율부터 관리하는 것이 신흥국가들의 최우선 임무다. 통화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하고 외국 자본 이탈까지 겹치면 통화가치 하락과 자본 이탈이 악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이때, 국제적으로 활동하 는 환투기 세력들은 환율을 방어하려는 신흥국 정부의 노력을 역이용 해 차익을 노리는 환투기에 나선다. 이들은 일부러 취약한 국가의 통화 를 사고 팔면서 시장을 교란시키고 막대한 이익을 챙긴 후 떠난다. 이 들의 농간에 놀아나면 결국 외환 유동성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이다.
- 역사가 보여주는 환율 1,200원의 상징적 의미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와 시장은 이 선이 지켜지는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우리 나라와 국제 경제 환경이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해도 1,200원 이상의 환율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환율이 최고점에 오른다는 것은 우리나라 전체의 리스크가 높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통 화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국내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 각 종 자산의 가격이 오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환율 1,200원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투자 전체에 대해 다소 불안한 반응을 보이고 있 는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도 경제정책을 펼칠 때 환율이 1,200원 밑으로 내려가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국내 경기를 띄우고 실업을 줄이는 방향으로 시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환율이 1,200 원을 넘어서면 국내보다는 대외 경제 환경을 의식한 경제정책을 펴야 한다. 이 경우 금리를 내리기도 어렵고 국가의 빚을 늘려 확장적인 재 정정책을 펼치기도 힘들어진다. 환율이 1,200원을 넘어서면 우리나라 금리를 올려 외화 유출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한층 더 커진다. 2022년 이후 환율이 1,200원을 넘어서면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기준 금리 인상 여부를 결정할 때 환율의 움직임을 매우 중요한 변수로 고려 하고 있다. 이처럼 금리정책과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환율의 중요 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 연준은 중앙은행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아우르면서 중장기적 관점에서 판단하게 된다. 금리를 조정해서 물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핵심이지만 2%라는 수치 자체보다는 흐름을 중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물가지수가 2% 중반에 들어섰다고 해서 연준이 단번에 금리 인상 기조 를 늦추는 것은 아니다. 물가가 안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다 양한 지표로 확인되기 전에는 방향을 바꾸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정책이 오락가락해서 시장의 변동성이 커진다면 모든 경제주체들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8~9%를 넘나들던 물가가 2% 선까지 낮아졌다면 시장 참여자들은 연준이 금리를 관망하거나 경기 여건을 고려해서 인하를 할 것이라 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의 기대와 달리 연준은 상당히 '완고한 자세'를 견지할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 스톱앤고stop and Go 정책으로 곤욕을 치렀던 연준은 물가 등 여러 지표들을 통해 인플레이션이 완전 히 '진압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까지는 고금리정책을 이어나 갈 것이기 때문이다. 스톱앤고 정책은 1970년대 미국의 '그레이트 인 플레이션' 시대에 미 연준이 물가가 상승하면 긴축정책을 펼치다가 긴 축으로 인한 경기 침체로 실업률이 높아지면 완화정책으로 대응하는 것을 되풀이했던 것을 말한다. 통화정책을 냉탕과 온탕으로 번갈아 시행하자 시장에서는 오히려 인플레이션과 기대 인플레이션이 서로 상승 작용하면서 물가를 끌어올리는 악순환 고리를 만들어냈다. 미 연준의 판단이 늘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례 로 2021년 상반기 인플레이션에 대한 미 연준의 판단을 들 수 있다. 선 진국은 물론 신흥국까지 인플레이션 압박이 증대되고 있었으나 연준은 이것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발생한 글로벌 공급망의 생산 병목과 보 상소비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2021년 7월 발표한 세계경제전망(WEO)에서 글로벌 인플레이 션 압력이 일시적인 수요 공급 불일치에 기인하므로, 중앙은행들은 기 저요인이 명확해지기 전까지 통화긴축에 나서지 말 것을 권고했다. 미연준과 IMF는 워싱턴 DC에 소재하고 있고, 글로벌 경제 전망이나 정책 방향을 긴밀히 소통하고 있어 비슷한 입장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2021년 6월 미국 미시간대학교가 발표한 향후 1년간 기대 인플레이션 은 이미 4.2%를 기록해 물가목표 2%보다 2배 이상 높아졌다. 미시간 대의 기대 인플레이션 통계는 소비자가 예상하는 향후 1년간 상품과 서비스 가격 변동률을 토대로 작성되고 2주마다 예비치와 수정치로 발 표된다. 6월 이후 매월 기대 인플레이션은 꾸준히 상승추세를 보였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 미 연준이 2021년 하반기 중에 통화긴축에 나섰어 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는 곧 '실기론'으로 비화되었다. 미 연준은 2022년 3월 기준금리를 0.25%에서 0.50%로 0.25%p 인상하면서 금 리 인상에 첫 시동을 걸었다. 곧이어 5월에 다시 0.50%p를 올린데 이어 2022년 6월부터 4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0.75%p)을 밟았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잡히지 않았고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등 금융시장 불안이 초래되는 상황을 맞았다. - 2022년부터 이어지는 미국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은 중국을 겨냥 한 다목적 카드라는 주장이 있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구사하는 '경 제적 통치술 economic statecraft'의 하나라는 것이다. 미국의 국채를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는 중국은 금리 인상으로 가만히 앉아서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중국은 지속적으로 미국 국채 보유량을 줄여왔지만 여전히 규모가 가장 많은 편이다. 중국의 외환 보유고는 3조 1,845억 달러다 (2023년 1월 말 기준). 이중 미국의 국채가 8,594억 달러로, 지속적으로 미국 국채는 줄이고 대신 금 비중을 늘렸다. 중국의 금 보유량은 6,512 만 온스로 달러로 환산하면 1,200억 달러 상당이다. 2022년 5월에 중 국의 미국 국채 보유 규모는 12년 만에 1조 달러 이하로 떨어졌고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중국 관영 영자신문인 <차이나데일리>는 미국 연준의 고강도 통화긴축 정책이 미국 국채 값 하락을 초래했고 금융 취 약성을 높여서 달러 자산의 매력이 떨어졌다고 전했다. 언론 통제와 조 정이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중국에서 관영언론이 보도한 내용은 당국의 입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중국이 미국 국채를 시장에 매각하면 달러 유동성이 풀려서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하게 되므로 이 보도는 달 러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볼 수 있다. 공격적인 금리 인상으로 미국 국채 값은 큰 폭으로 떨어졌다. 미국 국채는 가장 수요가 많은 글로벌 무위험 안전자산으로, 신흥국들이 외 환보유고에 가장 많은 비중으로 편입해두고 있다. 따라서 중국뿐만 아 니라 신흥국들 역시 큰 손실을 떠안게 됐다.
- 중장기 요인과 단기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본다면 미국 기준금리가 4~5% 대에서 상당 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내 여러 경 제지표들이 쉽게 잡힐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미국이 고금리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보인다. 고금리 국면에 진입한다면 쉽게 금리를 낮출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린 다. 물론 돌발적인 경제·정치 이벤트가 생기거나, 금융이나 기업 쪽에 서 대형 사건이 발생한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미국 중소형 은행들이 추가로 파산 또는 부실화되고,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금리 향방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미국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금리정책을 펼친다면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다. 2023~2024년까지 미국 연준이 펼쳐 나갈 통화정책의 관전 포인트는 다음 3가지다. 첫째, 기준금리를 어느 수준까지 올릴 것인가? 둘째, 금리 정점을 찍은 수준에서 얼마나 오래 유지될 것인가? 셋째, 언제쯤 금리 인하로 전환할 것인가? FOMC 회의가 열리기 전에 여러 가지 경제지표들을 면밀히 점 검하고 분석한 다음 위원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다수결 방식으로 금리 를 정하는데, 연준이 목표로 잡고 있는 2% 선으로 물가가 떨어질 때까 지금리 인상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따른 비용 상승 요인이 해소되려면 오랜 시일이 걸릴 수 있고, 아예 비용 구조 자체가 높아진 상태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도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변 수는 고용지표의 움직임이다. 실업률이 완전고용 수준인 3.5% 내외에 상당 기간 머물게 된다면 미 연준은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를 접어두고 물가 잡기에 더욱 과감하게 나설 수 있게 된다. 물가 상승은 개인과 기 업 등 모든 경제 주체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준다. 민생 경제를 챙긴다 는 취지에서도 그렇고, 2024년 11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물가 잡기 는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에서는 물가 안정 목표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라는 목표에 너무 집착하여 경직적인 통화정책을 펼치다 보 면 한쪽에 치우친 의사결정으로 경제 전반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논리다. 꽤 일리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소수의견일 뿐이다. 물가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다고 해서 목표 자체를 변경하게 되면 축구에서 골대를 옮기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반론도 있다. 한번 잃어버린 신뢰는 회복하 기까지 아주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된다. 따라서 물가 목표 자체를 수정 하는 방식은 좋은 해결책이라고 볼 수 없다. 다만 물가 목표는 그대로 둔 채 실물경제와 금융시장, 국내외 경제 여건 등을 두루 살피는 유연 성은 발휘해도 좋을 것이다.
- 과거의 사례를 보면 한미 금리 역전의 원인은 전적으로 미국의 통화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한 마디로 미국이 우리보다 빨리 금리를 올리 면서 한미 간 금리 차이가 확대됐고 또 기준금리를 빨리 내리면서 금리 가 정상화됐다. 결국 미국과의 금리가 역전되는 기간 동안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입장은 그저 미국 의 금리정책을 기다리는 '천수답'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경제 상황은 물론 국가신용도와 이에 따른 국내 자본유출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기준금리를 정하는 방정식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우 리나라와 미국의 금리가 역전되고 그 차이가 커지면 우리나라에 빌려 준 투자 자금은 미국으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원화 값은 떨어져 환율 은 올라가고 금융시장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특히 무역수지 적자가 지 속되고 경기가 둔화 국면에 있을 때는 한미 금리 차이에 따른 자본이동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우리나라의 금리정책은 미국을 따라가긴 하지만 이렇게 딜레마에 처할 때도 있다. 2023년이 꼭 그런 상황이다.
- 금리인하요구권은 은행법으로도 보장되어 있고 저축은행·카드사 ·보험회사 등 제1, 2금융권 모두를 대상으로 신청할 수 있는 대출자들 의 권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초 대출 당시와 비교해서 현재 상환능 력이 개선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승진이나 이직, 전문자격증 취득 등을 통해서 소득이 늘어났거나, 자산 증가나 부채 감소로 인해 재산이 늘어났다면 금리 인하요구권을 신청해볼 만하다. 신용평가회사 가 운영하는 개인신용평점이 개선되었다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은행마다 조건이 다르고 개인마다 여건이 천차만별이어서 얼마나 금리를 낮춰줄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연봉이 올랐어도 이미 최저금 리를 적용받고 있다면 더 이상 금리가 인하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청 방법은 영업점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금리인하신청서 · 재직증명서·근 로소득원천징수 영수증·신용상태 개선 증빙자료 등을 제출하면 된다. 참고로 햇살론 같은 정책자금 대출이나 예적금이나 펀드·신탁 등을 담 보로 한 대출, 신용등급에 따라 금리 차이가 없는 대출 등은 금리 인하 요구권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