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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3.08.11 적을수록 풍요롭다
  7. 2023.08.08 신대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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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23.06.05 기후를 위한 경제학 2
  10. 2023.05.24 거대한 변화

지금 다시 일본 정독

경제 2023. 9. 29. 08:13

- 근면 혁명은 일본 고유의 사건이 아니다
한때 높았던 가계 저축률이 일본인의 근면함과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의 노동 시간이 긴 것은 분명 하고, 또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직장에서 묵묵히 버티며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장인과 같은 일본 노 동자의 모습은 과연 언제부터 정착된 것일까? 도쿄대학 명예 교 수 다케다 하루히토武田晴는 그의 저서 《일본인의 경제관념日本人 》에서 공업화 사회에서 보이는 일본인의 근면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획득한 노동의 에토스ethos라고 설명한다. 즉 '시 간'이라는 요소가 노동 속에서 큰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근 대에 들어서 '고용 노동'이 일반화된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다 케다 교수의 설명대로라면 '근면한 일본인 상'이라는 것은 겨우 80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1882년 요코하마에서 발간된 영자신문에는 당시 서양인에 비친 일본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게으르고 향락을 즐기는 이 나라 사람들의 성정은 문명사회로 의 진보를 방해하는 요소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 게으른 일 본인을 질타하는 서양인의 견문록적 성격의 글은 이 외에도 다수 존재한다. 일본인 스스로도 인정하는 '근면일본인의 DNA'라는 뿌리 깊은 믿음은 어쩌면 심각한 오해일지도 모른다.
한편, 일본인의 근면함을 전근대 시대의 극적인 변화에서 찾는 연구도 있다. 경제학자이자 세계적인 역사인구학자인 게이오대 학 명예 교수 하야미 아키라融는 에도 시대 농민의 근면함에 대해 산업 혁명을 본떠 '근면 혁명 Industrious Revolution'이라고 명명했 다. 17세기 일본은 인구가 늘면서 토지 생산성도 향상되었다. 이 는 산업 혁명 이전에 '맬서스의 함정'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된 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구가 증가하면 더 많은 노동력이 농업 에 투입되지만 한계 생산이 체감되므로 생산성이 하락해 생활 수 준이 저하되고 결국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14세기와 17세기 유 럽에서 벌어진 기근, 질병, 전쟁 등의 위기 상황은 이와 같은 맬 서스의 함정이 작동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일본이 이러한 맬서스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하 야미 교수는 근면 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에도 시대에는 늘어나는 인구를 농업에 투입하고, 그 대신 소와 말을 더 이상 농사에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소와 말이 쓰던 농기 구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작은 사이즈로 개량됐다. 이뿐만 아니라 수확량이 많은 품종을 개발하고 시비법을 개선하여 농업 생산성이 크게 높아지면서 생활 수준도 개선되었다. 에도 시대 농민의 삶이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근근이 살아갈 수 있는 수준 은 유지되었다.
근면 혁명이 일본 고유의 역사적 사건이라면 이는 일본인의 근면함을 뒷받침하는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하야미의 영향을 받은 얀 더프리스Jan de Vries는 17~18세기 유럽에서도 비슷한 유 의 근면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영국과 네덜란드 에서 도시는 주변 농촌 지역의 교역 거점으로서 역할을 했다. 이 시대에는 책, 거울, 자명종 같은 새로운 상품이 등장하면서, 농촌 에서도 이러한 신제품의 소비를 위해 환금 작물의 생산에 더 많 은 노동력을 투입했다. 남성들은 시장에 판매하기 위한 환금 작 물 재배에 집중하고, 대신 아이들이나 여성들은 자가 소비를 위 한 작물을 재배하는 식의 분업이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사람들 은 이전보다 더 근면하게 일하게 되면서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 었고, 더 많은 신제품을 소비할 수도 있었다. 산업 혁명과 같은 극적인 기술 진보 없이도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 생산력이 향상된 셈이다.
- 다시 근면한 일본인 얘기로 돌아가 보자. 얀 더프리스의 연구를 통해 근면 혁명이 딱히 일본의 고유한 경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 게 되었다. 또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소와 말이 감소한 이유는 하 야미의 주장대로 농업 경영상의 의도적인 선택이 아니라, 전염 병이나 소농 경영의 한계로 인해 가축 수가 줄어들었다는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또 17세기에 늘어나던 인구가 18세기에는 반대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맬서스의 함정에서 탈출했다는 설명과도 배치된다.
- 그뿐만 아니라 17~18세기에는 일본을 포함해 동아시아 사회 여기저기에서 소농 경영을 바탕으로 한 노동 집약적인 농업 생 산성의 향상이 관찰된다. 증가한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 더욱 근 면하게 일하고 농기구와 농법의 개량 등을 통해 생활 수준의 향 상을 꾀하는 것은 이미 우리 역사에서도 익숙한 스토리이다. 결 국 하야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근면함이 일본인의 덕목 으로 형성된 것은 불과 수백 년에 지나지 않는데, 이마저도 일본 인 고유의 경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아직도 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근면=일본인의 DNA'라는 등식은 결국 어느 시점부터 확증 편향성을 갖게 된 허구가 아닐까?

- 돈가스와 단팥빵은 둘 다 원래는 서양에서 들여온 것이었으나 일본풍으로 개량된 음식이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인들은 이렇듯 서양의 음식을 들여와 일본적인 음식으로 재탄생시키는 하이브 리드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돈가스와 단팥빵만이 아니었다. 인도에서 영국을 거쳐 들어온 커리curry가 일본풍의 카레가 되었고, 프랑스의 크로켓croquette 이 고로케가 되었다. 개량 능력은 음식 이외의 분야에서 도 발휘되었다. philosophy를 철학으로, society를 사회찬술로, copyright를 판권版権으로, baseball을 야구로 번역한 것은 메이 지 시기의 지식인들이었다. 근대화 시기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 자어는 서양에서 만들어진 개념들을 당시에 일본인들이 자신들 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개량의 흔적들이다. 메이지 시기의 근대화 과정은 화혼양재和魂洋, 즉 서양의 문물을 재로 삼아 일본의 혼을 담아내는 정신이 강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양의 기술과 일본다움을 결합하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화혼양재의 개량 능력은 산업 혁명기에 접어든 일본 경제를 견인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 도쿄대학 명예 교수 와다 가즈오는 그의 저서 《모노즈쿠리의 우화503 <b>에서 “토요타 시스템은 미국의 포드 시스 템을 일본에 도입하고 이식하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된 금전적.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와다 교수가 타이틀에 '우화'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우리가 지금까 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던 내용들이 사실은 '허구적인 이야기'라 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포드 시스템과 토요타 시스템이 전 혀 다른 생산 시스템이 아니라, 포드 시스템을 모방하는 과정에 서 토요타 시스템이 탄생한 것이라는 설명은 매우 흥미롭다.
사실 일본은 중일 전쟁 시기부터 항공기와 선박 생산에 포드 시 스템을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포드 시스템은 다양한 전용 공작 기계들로 가공한 매우 정밀도가 높은 부품을 전제로 가동된다. 당시 일본에는 포드 시스템을 도입할 만한 자본도 기술력도 없었다. 결국 자동화된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을 포기한 대신에, 일본은 다기능 작업자를 배치하고 부품을 공급하는 외부의 하청 업체까지도 포함해 전체 생산 프로세스를 하나의 조립 라인처럼 편성했다. 말하자면 수공업 생산과 결합한 가상의 컨베이어 벨트 가 탄생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수공업적인 성격은 생산 비용이 높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토요타는 수십 년에 걸친 다양한 '가이젠 생산과 관련된 모든 활동에 대해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는 일)'을 통해 생산 비용을 절감해 갔다. '낭비를 극한까지 줄이는 토요타 시스템'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100년 넘게 다양한 분야에서 관찰되던 화혼양재의 개량 능력은 1990년대 이후 좀처 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최근 10년간 삼성전자와 애플이 경쟁 하듯이 혁신적인 차세대 스마트폰을 선보이자, 처음에는 두 기업 을 모방만 하던 중국 기업들도 최근에는 꽤 가성비가 좋은 제품 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 중에는 세계 시장에서 팔릴 만한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발명보다 혁신이 장점인 일본인들에게 최근의 제품 개발 속도가 너무 빠를 수도 있다. 또 베타 버전을 출시하고 버그를 수정해 나가는 식의 최근의 제조업 트렌드가 완벽한 품질을 보장하려는 일본 스타일 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 하지만 일본 기업들이 외국 기업에서 뭔가 배우려는 노력을 예 전보다 덜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작은 1980년대부터였 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 되자 일본인 누구나가 “이제 서양 을 캐치 업catch up 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고 다녔다. 사실이 그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는 당위론이 득 세하고, 지금의 한류처럼 일본 문화가 전 세계 젊은이들을 매료 시키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다들 알다시피 영광은 그리 오래가 지 않았다. 혹독한 겨울이 잃어버린 10년, 20년을 넘어 30년 이상 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이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관건은 깊은 잠에 빠진 화혼양 재의 개량 능력을 다시 깨울 수 있을지의 여부이다.

- 반복되는 역사 속 데칼코마니 불황
머나먼 유럽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은 일본에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래 역사상 최고의 호황이 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전쟁 중인 유럽에서 물건이 수입되지 않자 국내 기업에 주문이 쇄도했고,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일 본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기업은 일손 부족을 호소 했고, 임금은 상승했지만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노동자 의 실질 임금이 하락한 탓에 전국에 쌀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 20세기 초만 해도 개발 도상국 수준의 경제력에 불과하던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중진국 수준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 다. 그러나 이후 1920년 반동 공황, 1923년 관동 대지진, 1927년 금융 공황, 1930~1931년 쇼와 공황을 연달아 겪으면서 10년 동안 기나긴 장기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공교롭게도 일본은 70년 후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1980년대 후반 명실공히 세계 제일의 선진 국으로 도약한 일본이었지만 1990년대 초에 버블이 붕괴되면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 불황의 늪에 빠졌다.
이러한 데칼코마니 같은 상황에 흥미를 느낀 많은 경제학자들 은 다양한 비교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장기 불황의 터널이 단지 10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확신으 로 바뀌면서, 경제학자들의 문제의식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1920년대의 일본은 어떻게 장기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는 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었다. 만약 위기를 극복한 비책이 있다면 장기 불황을 겪고 있는 현재의 일본에도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여러 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대장성 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였다.

- 1980년대까지 전 세계를 주름잡던 일본 전자제품 기 업들의 몰락을 설명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과잉 기술, 과잉 품질 문제이다. 소니가 그랬듯이 많은 일본 기업들은 목표 가 정해지면 궁극의 수준까지 연마하는, 일종의 장인 정신으로 물건을 만들어 왔다. 일본어로 모노즈쿠리0<)라고 하는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한 제조 문화'는 일본 기업들을 품질 제일주의의 세계적인 기업들로 키워냈지만, 반대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기 업들로 변질시키기도 하였다.
일본 기업들은 10년 동안 품질을 보증하는 반도체를 만들었지만 시장은 품질보다 값이 싼 반도체를 원했고, 100년이 가도 고장이 나지 않는 튼튼한 컴퓨터를 만들었지만 5년 지난 컴퓨터는 성능 문제로 쓸 수가 없었다. 장인 정신에 매몰되어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갔건만 정작 시장의 요구에는 둔감했던 것이다.

- 초강대국 미국의 지위를 위협한 것은 일본의 급성장이었다. 1960년대 초반 5배 이상 차이 나던 미일 간 GDP는 30년 뒤인 1991년에 2.5배 수준까지 좁혀졌다(<그림 2-2> 참조). 1990년대 초 반 인구는 미국(2억 5천만)이 일본(1억 2천만)의 두 배였으므로 1인 당 실질 GDP는 큰 차이가 없었고, 1인당 명목 GDP에서는 이미 일본이 미국을 앞서 있었다.
미국인 입장에서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대일본 무역 수지 적자의 확대였다. 미국의 대일본 무역 수지 적자는 1985년 기준 GDP 대비 1.2% 수준까지 늘어났다. GDP 대비 1.2%라는 숫자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미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같은 해 미국의 총 무역 수지 적자 비중이 GDP 대비 2.8%임을 감안하면 대 일본 무역 수지 적자 규모가 결코 작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미국인들이 일본인들에 대해 느꼈던 공포감은 할리 우드 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1982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블 레이드 러너>는 2019년의 LA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전광판에 는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등장하고, 주인공 릭 데커드는 젓가락 을 들고 일본풍의 노점에서 우동을 먹는다. 37년 뒤 LA에서는 일 본식 옷을 입고, 일본식 식사가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을 것이라 는 상상력이 엿보인다.
- 1988년 개봉한 영화 <다이 하드>에서는 주인공 존 매클레인이 일본계 기업 나가토미 코퍼레이션에서 테러범과 전투를 벌이는 데. 뉴욕의 마천루를 장악한 일본 자본에 대한 불편함이 은연중 에 드러난다. 1993년의 영화 <로보캅 3>에서 일본 기업이 악역으 로 설정되어 사무라이 로봇이 적으로 나온다든지 <데몰리션 맨>에 서 미국인들이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는 등 이러한 흔적은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진다. 2020년 5월 넷플릭스 에서 공개된 드라마 <스페이스 포스>에서는 중국의 테러 위성이 미국 우주군이 발사한 군사 위성을 파괴하고,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표면에 꽂은 성조기를 중국의 월면차가 밀어 버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지금 중국에 대해 미국인들이 느끼는 적대감 이상으로 당시 일본의 존재에 대한 미국인의 공포심은 상당했다.

- 종신 고용. 연공서열, 직장 내 교육 훈련 제도, 기업 특수 기능은 서로 맞물려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였다.
고용 시스템은 일본인의 생활 양식과 기업 문화에도 영향을 미 쳤다. 입사하면 30년 이상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생겼으니, 인생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능해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30년 장기 대출을 받아 집도 장만한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히 수입이 늘어날 것이 예상되고, 퇴직 이후에도 퇴직금과 연금이 있으니 큰 걱정 없이 나이에 맞게 소비 규모를 결정한다. 일본형 고용 시 스템은 팀워크로 일하는 방식에 유리한데. 그렇다 보니 직원들은 회사에 대한 귀속 의식이 강하다. 선배에게서 후배로 경험과 훈 련에 의해 몸에 쌓인 암묵적 지식이 전수되고, 회사 내 동료들과 의 관계는 물론 거래처와의 의사소통도 중요하다 보니 회식도 많 고 직원 행사도 많다. 많은 직원들이 회사와 운명 공동체라는 생 각을 하게 되고, 회사의 이익과 직원들의 이익이 일치하는 경향 이 강하다 보니 노사 관계 또한 안정적인 경우가 많다.

- 2000년대 이후 일본 경제는 상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소설 《상실의 시대》와 달리 일본 경제에서 상실의 대상은 명 확하다. 두 번의 호황을 통해 확인했듯이, 2000년대 이후 일본 경 제는 '온기'를 상실했다. 그리고 이러한 저온호황이 이제는 일본 경제의 뉴 노멀이 되었다.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새로운 균형이 기 때문에 앞으로 찾아올 수차례의 호황은 예전처럼 뜨거운 고온 호황이 될 가능성이 없다. 불운한 타이밍 때문에 아베노믹스 경 기가 끝내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올드 노멀(고온 호황)에 맞춰진 눈높이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 1957년 제프리 크라우더 Geoffrey Crowther가 제시한 국제 수지 발전 단계설은 경제의 발전 단계에 따 라 국제 수지가 어떤 특정한 패턴을 그리면서 변화하는지를 다룬 이론이다. <그림 3-10>을 보면 경제 발전 단계상 제1단계는 '미 성숙한 채무국'인데 경제 발전의 초기에는 국내 저축이 부족해 산 업 개발 자금을 외국으로부터 조달하고 각종 재화도 수입한다. 그 결과 무역 수지와 소득 수지가 모두 적자를 나타내게 된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기간(1868~1880년)이 이에 해당한다.
제2단계인 '성숙한 채무국은 경제 발전과 함께 수출 산업이 성 장하여 무역 수지가 흑자로 전환되지만, 소득 수지는 여전히 적 자인 상태이다. 일본에서 제2단계는 두 번 관찰되는데 1881년부 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 (1914년)하기까지의 기간과 전후 고도 성장기의 처음 10년(1955~1964년) 정도이다. 제3단계인 '채무 변제 국'에 진입하면 수출이 확대되어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소득 수 지 적자 규모를 넘어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된다. 일본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 활황기 (1914~1920년)와 1960년대 후반(1965~1969 년)이 이에 해당한다.
제4단계부터는 대외 순자산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전환된다. '미성숙한 채권국' 단계에서는 무역 수지 흑자가 지속되고 대외 자산 증가와 함께 소득 수지도 흑자로 전환된다. 일본의 경우, 안정 성장기 이후 2010년 정도까지 오랫동안 이러한 4단계에 머 문 것으로 생각된다. 제5단계인 '성숙한 채권국'에 접어들면, 생 산 비용 상승으로 자국 제품의 국제 경쟁력이 하락하여 무역 수 지는 적자로 전환되는 반면, 해외 투자의 증가로 소득 수지 흑자 폭이 커지면서 경상수지는 흑자를 보이게 된다. 2011년 이후 현 재일본은 제5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된다. 언젠가 일본이 제 6단계 '채권 붕괴국'이 되면 무역 수지 적자 규모가 더욱 확대되어 소득 수지 흑자 규모를 넘어서게 되고, 결과적으로 경상 수지가 적자로 전환될 수도 있다.
- 1980년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동차, 해외여행, 명품을 경쟁적으로 소비했지만, 2020년 대 젊은이들은 저렴하고 적당한 품질에 만족하며 절약을 인내가 아닌 매력적인 소비 스타일로 평가한다.
앞으로 20년 뒤 이들이 가계 소비를 주도하는 중장년층의 소비 집단으로 성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비에 대한 효용은 집 단의 기억처럼 뇌리에 박힌다. 지금 나이가 지긋한 우리나라 어 르신들 중에는 형편이 그렇게 어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절약하 는 습관이 몸에 밴 분들이 많다. 일본의 젊은 혐소비 세대는 지금 보다 소득이 늘어난다고 해서 당장에 소비 행동이 바뀔 가능성이 크지 않다. 하물며 앞으로 임금 상승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소비가 앞으로도 지속적인 하락 을 할 가능성이 큰 이유이다.
- 쓰루, 마에다, 무라타는 '니게키레타逃切te' 고령층이라는 표 현을 사용했는데, 우리말로 옮겨보면 치고 빠지는 데 성공한 고 령층이라는 뜻이다. 현재 고령층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태어 나 청장년기에 고도성장과 버블 경기를 경험한 세대이다. 이들은 젊은 시절에 여유로운 소비를 경험했고, 경쟁적인 소비 지출을 통해 만족감을 느꼈으며, 충분한 저축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금도 충분한 연금과 금융 자산으로 여유로운 소비를 즐기고 있 다. 일본 역사상 가장 축복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현재 젊은 층은 과거 세대와 달리 비관적인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가 성비를 따져 가며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더 늘리고 싶지만, 임금 이 상승하지 않으니 뜻대로 저축이 늘지도 않는다.
고령층의 금융 자산을 자식 세대나 손자 세대로 이전시켜 소비활성화를 도모하려는 시도는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상속 세나 증여세에 관한 제도 개선은 부의 세습이라는 비판에서 자유 롭지 못하기 때문에 진척이 더디다. 보다 현실적인 대안은 부모 가 자식 세대에게 직접적인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3세대 소비라고 해서 고령인 부모가 자식 세대나 손 자 세대와 근거리에 살면서 경제적 지원을 하는 가정이 많다. 노 무라연구소의 추계에 의하면 60세 이상 고령층은 소비 지출액의 5% 이상을 자식 세대를 위해 지출하고 있다.
- 생산자 중심의 과잉 기술이 일본 제조업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그 해결책은 아주 단순하지만 소비자 중심의 적정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소비자 중심의 적정 기술 개발에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는 기업들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기업들이다. 2017~2018년 무렵에 중동과 인도 등에서 현지화에 성공한 한국 기업에 대한 특집 기사들이 자주 소개되었는데, 그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자물쇠 달린 냉장고 였다. 자물쇠 달린 냉장고라니, 생경한 디자인은 차치하고서라 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물쇠의 용도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1998년 대우전자가 개발한 자물쇠 달린 냉장고는 중동 지역에 서 인기를 끌었는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중동 사람들의 기질을 감안한 디자인이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인도 시장에 진출한 LG전자도 자물쇠 달린 냉장고를 출 시했는데 가사 도우미를 두는 일이 흔한 인도의 중산층 이상 가 정에서는 자물쇠 달린 냉장고는 가사 도우미가 음식을 마음대로 꺼내 먹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뛰어났다. 사실 냉장고에 자물 쇠 구멍을 뚫는 것은 특별한 기술도 아니고 탁월한 디자인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소비자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한 적정 기술이었고, 이러한 눈높이 전략은 현지에서 제대로 먹혀들 었다.
한국 기업들의 적정 기술 전략은 자물쇠 달린 냉장고만이 아니 다. 2003년에 LG전자는 중동에서 메카폰이라는 것을 출시했는 데, 성지인 메카 방향을 자동으로 알려 주는 소프트웨어가 내장되어 있었다. 이 모델은 현지에서 매우 인기가 좋아서 나중에는
코란을 음성과 문자로 제공하는 기능, 기도 시간을 정시에 알려 주는 기능까지 추가되었다. LG전자의 눈높이 전략은 여기에 그 치지 않았다. 2004년에는 대추야자 냉장고를 출시해 인기를 끌었 다. 중동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인 대추야자를 최적 상태로 보 관해 주는 대추야자 냉장고는 우리의 김치냉장고를 응용한 가전 제품이었다. 현대자동차는 인도에 수출하는 자동차의 차체 바닥 을 높게 디자인했는데, 비포장도로가 많아 집중 호우로 침수가 잦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반면 중동에 수출하는 자동차는 천장을 높였다. 머리에 쓰는 터번 때문에 천장이 낮은 차를 불편 해하는 소비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 모든 제품을 모듈형과 통합형이라는 양극단으로 구분할 수는 없지만 모듈형에 가까운 제품, 통합형에 가까운 제품은 존재한 다. 전자 제품은 모듈형 제품에 가깝고 자동차는 통합형 제품에 가깝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일본의 가전업체들은 노동 집약적 인 모듈형 제품 생산을 한국과 중국 기업에게 차례로 넘겨주면서 시장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그래도 통합형 제품의 성격이 강한 자동차 시장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배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 었다. 그런데 최근 자동차 산업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 다. 통합형 제품인 자동차에 엔진이 없어지고 배터리와 모터 그 리고 모듈적 성격이 강한 소프트웨어 및 각종 정보 시스템이 도 입되고 있다. 이제 자동차는 사람을 싣고 움직인다는 본질만 그 대로 둔 채 모바일 기기로 변하고 있다. 미래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모듈형을 향하고 있는 가운데, 통합형 제품의 강자 일본 기업들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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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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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니그의 반대가 시작된 것은 2010년이 되어서부터였고 이것은 연준이 미국의 화폐 공급을 앞으로도 제로 바운드에서 유지할 방침 으로 보였을 때부터였다. 2010년의 FOMC 회의들에서 호니그가 한 발언(연준 회의록은 5년 뒤에 공개된다)과 그 시기에 호니그가 했던 연 설, 강의, 인터뷰 등을 보면 그가 인플레이션은 거의 언급한 적이 없 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경고한 것은 인플레이션과는 꽤 다른 것이었 고 선견지명이 있는 경고였다. 하지만 화폐 정책의 제반 내용에 꾸 준하고 면밀하게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하기가 굉장 히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호니그는 금리를 제로 바운드에서 더 오래 유지하는 것이 일으킬지 모를 '배분 효과allocative effect' 를 자주 언급했다.
- '배분 효과'는 사람들이 이발소에서 이야기하는 화젯거리가 아니 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호니그가 말한 배분은 화폐 의 배분이었다. 즉 그는 연준이 화폐를 경제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 분으로 옮겨놓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호니그가 보기에 연준의 정책은 경제 전반적으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연 준의 정책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서 돈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연준의 정책은 월가의 투기처럼 금융 붕괴를 가져올지 모르는 행동을 촉진할 수도 있었고 그러한 행동을 하 지 않도록 유도할 수도 있었다. 연준과 관련해 제기될 수 있는 이 모 든 논의는 매파 대 비둘기파라는 단순한 구도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호니그가 지적한 우려는 연준이 물가 인플레이션과는 상관없는 종 류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호니그는 FOMC 회의실의 닫힌 공간에서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2010년 5월에 자신의 견해와 자신이 반대하는 이유를 <월스트 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통화정책은 단지 인플레이션 목표를 설정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보 다 훨씬 더 강력한 수단입니다. 통화정책은 우리가 이제 잘 알게 되 었듯이 배분적 정책이기도 합니다."
- '배분 효과'라는 말로 호니그가 설명하고자 한 것은 제로금리가 어떻게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냈는지였다." 금리가 제로에 도달하고 돈이 싸지면 은행들이 더 위험한 대출을 하도록 내몰리게 된다. 돈 을 안전한 데 저축해서는 수익을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금리가 더 높은 시절이었다면, 가령 금리가 4%인 세계였다면, 은행은 미국채 같은 지극히 안전한 곳에 투자해도 꽤 괜찮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 을 것이다. 하지만 제로금리의 세계에서는 상황이 달라서 아주 안전 한 채권에 돈을 넣어서는 거의 수익을 올리지 못했으며, 이는 은행 들이 더 위험한 황야로 수익률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더 위험한 대출을 하면 더 높은 금리, 즉 더 높은 '수익률yield' 을 얻을 수 있을 지 모른다. 수익률을 사냥하는 수렵 활동에 나서기 시작하면 은행들 은 '수익률 곡선'에서 점점 더 먼 쪽으로, 즉 점점 더 위험한 쪽으로 돈을 움직이게 된다.
제로 바운드에서의 삶은 은행들을 수익률 곡선에서 먼 쪽으로 밀 어붙인다. 은행이 잃을 게 무엇인가? 위험한 베팅이라도 아무것도 못 얻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것은 단지 제로금리를 유지하는 데 부수적으로 따라온 부작용이 아니었다. 훗날 호니그는 '그것이 바로 제로금리의 핵심이었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사람들이 더 위 험한 것을 기꺼이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경제가 다시 시동 을 걸게 하려고요. 하지만 이것은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기도 합니 다. 그 돈이 어디로 갈지를 배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 호니그는 연준이 안전한 투자처에 있던 모든 돈을 위험한 투자 쪽 으로 밀어내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를 우려했다. 돈이 수익률 곡선 의 바깥쪽으로 점점 더 이동하면 호니그가 2010년에 경고한 두 번 째의 커다란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바로 자산버블이다. 2008년 에 붕괴한 주택 시장이 자산버블이었다. 2000년에 폭락한 닷컴 주 식도 자산버블이었다. 버블이 터지면 대중은 재앙의 현장에 있는 사 람들을 비난하기 마련이고, 그들은 으레 탐욕스러운 월가의 사람들 이었다. 주식시장에서 단기적 이익을 위해 자꾸만 가격을 높여 거래 한 중개인이나 주택 버블에 기름을 부은 부정직한 모기지 브로커 같 은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이 두 번의 자산버블과 뒤이은 붕괴의 시 기에 호니그는 FOMC에 있으면서 그 버블들을 일으키는 데 연준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직접 목격했다. 2010년 11월의 그날 호니 그는 연준이 그 실수를 되풀이할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 벤 버냉키는 2015년에 출간한 회고록의 제목을 《행동하는 용기 The Courage to Act>라고 지었다.18 버냉키주의를 실로 잘 나타낸 표현 이었다. 이 제목은 연준의 통화 개입이 필요한 일이고 용기 있는 일 이며 나아가 고귀한 일이라고 말한다.
2008년 이후 연준이 본원통화를 전에 없던 수준으로 늘리고, 금 리를 제로로 낮추고, 금리가 앞으로도 계속 제로에 머물 것이라고 약속하는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로 은행과 투자자들이 위험을 더 많이 지도록 유도하는 등의 전례 없는 일들에 나서도록 밀어붙인 사람이 바로 버냉키다. 이토록 공격적인 조치는 버냉키의 품행이나 태도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는 말투가 부드럽 고 친절하며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었다. 깔끔한 외양과 회색 수염이 삼촌 같은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그린스펀이 오래도록 의장으로 재 직한 뒤 그 자리를 이어받은 버냉키는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으면서 신중하고 조용하게 통화정책의 레버를 당기는 관리자형 의장이 되 는 데 충분히 만족하는 듯했다. 하지만 2008년 위기는 버냉키를 미 국 재무장관 행크 폴슨Hank Paulson, 뉴욕 연은 행장 티모시 가이트 너Timothy Geithner와 더불어 전지구적 유명인이 되게 만들었다. 이들 이 거대 보험회사 AIG를 구제하고, 리먼브라더스를 파산하게 두고, 7,000억 달러 규모의 은행 구제금융을 밀어붙이는 등의 그 모든 일 에서 핵심 삼인방이었다. 버냉키는 미국 경제를 구하기 위한 노력의 얼굴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양적완화의 목적과 메커니즘은 사실 꽤 간단하다. 양적완화는 은행들이 돈을 안전한 곳에 저축할 인센티브가 없는 상황에서 수조 달러를 새로 만들어 은행 시스템에 주입하는 프로그램이며, 연준은 이를 위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강력한 도구를 사용할 것이었다. 그 도구는 뉴욕 연은의 트레이더들이다. 뉴욕 연은의 트레이더들은 '프라이머리 딜러'라고 불리는 약 스물네 곳의 금융기관과 늘 금융 거래를 한다. 프라이머리 딜러 등 은행들은 연준에 금고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지급준비금 계좌(지준 계좌)'라고 부른다(물론 현대에 이 계좌는 물리적 금고가 아니라 디지털 장부상의 디지털 계좌다). 양적완화 를 실행하려면, 뉴욕 연은의 트레이더가 프라이머리 딜러 중 하나, 가령 JP모건 체이스에 전화를 해서 그곳이 보유한 국채 80억 달러어 치를 사겠다고 제안한다. JP모건 체이스가 국채를 팔기로 하면 연은 트레이더는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고서 JP모건 체이스에 지급준비 금 계좌를 확인해보라고 말한다. 짜잔, 연준은 80억 달러를 즉각 만 들어서 JP모건 체이스의 지급준비금 계좌에 넣어주었고 거래는 완료되었다. 이제 JP모건 체이스는 이 돈을 더 큰 시장에 가서 자산을 구매하는 데 쓸 수 있다. 이것이 연준이 돈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프 라이머리 딜러로부터 금융 자산을 사들이고 그쪽 계좌에 새로 만든 돈을 넣어주는 것이다.
- 버냉키는 연준이 자산을 총 6,000억 달러어치 사들일 때까지 이 와 같은 거래를 계속할 계획이었다. 다른 말로, 연준은 새로운 돈 6,000억 달러가 월가의 지급준비금 계좌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돈 을 만들어 금융 자산을 사들일 계획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것을 몇 개월 만에 할 계획이었다. 금융위기 전에는 이 정도 규모로 본원통화가 증가하는 데 60년쯤 걸렸다.
양적완화가 매우 이례적이고 강력한 정책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 다. 버냉키는 이 프로그램에서 10년 만기 미국채 같은 장기 국채를 사들일 계획이었다. 언뜻 들리는 것과 달리 이것은 매우 중대한 결 정이다. 연준이 사들이는 것은 늘 단기 채권이었다. 연준의 일이 단 기 금리를 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연준은 한 가지 전략적 이유에서 장기 채권을 매입하려 하고 있었다. 월가에서 장기 채권은 예금 계좌나 마찬가지다. 즉 투자자가 의지할 만한 수익을 올리면서도 돈을 안전하게 묻어둘 수 있는 장소다. 그런데 연준은 양적완화로 그 안전한 장소를 없애려 하고 있었다. 연준이 장기 국 채를 대량 매입하면 시장에서 장기 국채의 공급량이 줄게 된다. 그러면 연준이 새로이 창출한 돈은 안전한 장기 국채로 들어갈 수 없 으니 막대한 압력에 놓이게 되고, 이 모든 새로운 돈이 수익률 곡선 에서 더 먼 쪽으로, 즉 위험한 투자 쪽으로 몰리게 된다. 양적완화의 논리에 따르면 은행들은 이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돈으로 [기업 등 에] 대출을 해줄 수밖에 없다. 요컨대, 양적완화는 시스템에서 안전 하게 돈을 보관할 수 있는 은신처를 크게 줄인 다음에 그 시스템에 막대한 돈을 풀어놓는다는 계획이었다. 2010년에 경제성장이 취약 했다면, 양적완화가 더 많은 돈과 값싼 대출과 쉬운 신용을 살포함 으로써 은행들이 예전 같으면 자금을 대지 않았을 비즈니스에까지 자금을 대도록 유도할 수 있을 터였다.
- FOMC 위원들은 양적완화가 불분명한 이득과 위험을 지닌 대규 모 실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FOMC 회의에서 이에 대해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당시에 FOMC 위원들 사 이에서는 양적완화에 대해 반대가 많았다. 호니그만 강하게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지역 연은 행장 중 찰스 플로서와 리처드 피셔, 그리 고 리치몬드 연은 행장 제프리 래커 Jeffrey Lacker도 우려를 제기했다. 하지만 버냉키는 양적완화가 급진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비상한 시기에는 급진적인 조치가 요구되는 법이라고 반박했다.
- FOMC 9월 회의에서 호니그는 연준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가 장 밀도 있고 직설적인 비판을 했다.24 그는 미국 경제의 깊은 병폐 가 은행들이 대출을 적게 해주어서 생긴 게 아님을 지적했다. 은행 들은 빌려줄 돈이 이미 아주 많았다. 진짜 문제는 은행 시스템 밖에 있었다. 깊은 문제들이 곪고 있는 곳은 실물 영역이었고 연준은 그 것을 고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금리를 제로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 그리고 투기와 위험한 대출 외에는 갈 곳이 없는 6,000억 달러를 은 행 시스템에 새로 주입하는 것은 미국 경제의 근본적인 역기능을 해 결하지 못할 터였다.
"저는 고금리를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요. 제 주장은 제로에서 벗어나자는 것이고 1조 달러를 또 쏟아부으 면 모든 게 좋아지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모든 게 좋아지지 않을 테니까요."
- 미국 헌법에는 중앙은행의 설립을 정한 부분이 없고 중앙은행 설 립을 요구한 부분조차 없다. 하지만 근대국가가 중앙은행 없이 생 존하기는 불가능하며, 미국이 그 증거다. 미국은 한 세기 동안이나 어떻게 해서든 중앙은행 없이, 즉 정부가 운영하는 은행을 설립해 통화를 통제하지 않고 가보려고 했다. 1776년부터 1912년 사이에 중앙은행을 두 번 설립했지만 두 번 다 기한을 연장하지 않고 설립 특허장에 명시된 기한이 만료되었을 때 소멸시켰다. 너무 많은 권력 을 소수의 손에 집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은 미국의 건국이라는 프로젝트 자체를 훼손할 수 있었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미국의 건국이라는 프로젝트는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시민들의 손에 주자내는 것이 아닌가. 1836년에 앤드루 잭슨Andrew adune 은 중앙은행의 두 번째 설립 특허장을 철회하면서 국 가 중앙은행이 국민의 자유에 위협이 된다'고 언급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 은행이 전체 금융 시스템을 관장하고 있고 그 은행을 이끄는 사람들이 누가 대출을 얻고 누가 못 얻을지 결정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 람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반미국적이었다.
- 은행 패닉 외에 중앙은행이 필요한 이유가 또 있었다. 통화 공급량 자체를 전반적으로 관리할 곳이 필요했다. 통화에 대한 수요는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는데 통화 공급량이 저절로 그에 맞춰서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해마다 가을이면 농민들은 수확을 하기 위해 지역 은행에 서 돈을 인출해 일꾼을 고용했는데, 이는 중서부 지역 은행들의 제 한된 현금 준비금에 압박을 가했다. 농촌 지역의 은행들은 농민들의 인출 요구에 응하는 데 필요한 현금이 부족해질 것 같으면 시카고 같은 도시의 큰 은행에 가서 현금을 빌렸다. 다시 이들 도시 은행은 뉴욕에 있는 은행들에 의존했고 뉴욕의 은행들은 유럽의 큰 은행들 에 의존했다. 이는 모두가 재앙에 빠지는 패닉으로 전환될 수 있었 다. 1873년의 은행 패닉은 6년이나 지속된 불황으로 이어졌다.
- 연준이 열두 개 지역 연은의 연방체로서 '미국적'으로 보이게 구 성되기는 했지만 의회에서 연준 설립 특허장의 개정안이 통과될 때 마다 연준의 지배 구조는 점점 더 워싱턴으로 집중되었다. 현재 연 준의 권력은 대체로 워싱턴의 연준 이사회에 속해 있다. 이곳에는 일곱 명의 이사가 있는데 대통령이 지명하고 의회의 인준을 받는 공 직자다. 연준 이사들과 지역 연은 행장들 사이의 긴장은 FOMC에 서 가장 첨예하게 나타난다. 이사들이 과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거의 이들이 의제를 설정한다. 그리고 비상 시기 때는 이사회의 권력이 더 강해진다. 연준이 최종대부자가 되어야 할 상황이면 연준 이사들 은 FOMC 전체의 승인 없이도 행동을 개시할 수 있다.
- 연준이 대인플레이션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한 가장 상세한 설명은 2,100쪽이나 되는 세 권짜리 대작 《연준의 역사The History of the Federal Reserve》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의 읽기가 불가능할 정도 로 밀도 있고 상세한 이 저술에서 경제학자 앨런 멜처Allan Meltzer는 FOMC 회의록 및 공개된 여타의 자료, 경제 분석, 경제 데이터 등 을 사용해 1970년대에 연준이 내린 의사결정을 추적했다. 그리고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놀라운 유죄 판결을 내 렸다. 이 문제의 주된 원인이 연준의 통화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대 인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을 막거나 줄이는 것보다 완전고용 혹은 높은 수준의 고용을 유지하는 데 훨씬 더 방점을 둔 정책적 선택으 로 야기되었다. 이 시기의 대부분 동안 이러한 선택은 정치적 압력 과 여론조사로 드러나는 대중의 견해 모두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
이는 (연준의 역사에 대한 논의가 그럴 수 있는 한에서) 공격적이고 발화성 있는 언명이었다. 멜처는 기본적으로 연준이 1970년대에 자신 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마도 더 치명적으로, 연준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 같은 독립적인 기구가 아니 라고 말하고 있었다. FOMC 위원들은 전문적인 경제 이론에만 의 거해 화폐 공급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똑똑한 전문 관료들이 아 니라 여느 사람들처럼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정치적 압력에 흔들 리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멜처에 따르면, 연준이 계속 돈을 찍어내 면서 일자리를 창출하려고 고투를 벌인 것은 경제 방정식에 따라서 가 아니라 대중과 정치인들이 연준에 원한 게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FOMC는 실업률이 4% 근처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보았는데 1975 년에서 1977년 사이에 실업률은 6%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고 1978 년에도 6% 근처였다. 그래서 연준은 계속 돈을 찍었고, 그러면서 자 산 가격 버블과 인플레이션을 일으켰으며, 이는 결국 1980년대 초 에 10%라는 높은 실업률을 일으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 2001년 9월 11일, 테러리스트가 비행기를 공중 납치해 미국을 공 격했다. 3,000명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는 대혼란에 빠 졌다. 안 그래도 비상 상황이던 경제에 덮친 또 하나의 위기였다. 연 준은 타격을 완화하기 위해 금리를 더 내렸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 았다.
하지만 12월에 호니그는 그해의 두 번째 반대표를 던졌다. FOMC 회의에서 발언 차례가 오자 호니그는 '길고 가변적인 시차' 를 염두에 두면서 신중하고 제한적으로 접근할 것을 다시 한번 주장 했다. 그는 금리가 불과 1년 전에 6%가 넘던 데서 이미 2% 수준으 로 낮아졌음을 지적했다. "의장님, 저는 정말로 우리가 여기에서 잠 시 멈추고 숨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방기금 금리가 2%라는 것은 경기 진작적인 수준입니다. 우리는 경기가 나아지는 징후들 을 보고 있고 경기 진작은 아직 다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인플레이 션이 당장은 문제가 아니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 가 조금 더 장기적인 시각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호니그는 이번에도 졌고(이번에도 그가 유일한 반대표였다) 연준은 금 리를 낮췄다. 그리고 한 달 뒤에 호니그는 의결권을 갖는 순번이 아 니게 되었다.
이후 2년에 걸쳐 원래 긴급조치였던 것이 거의 영구적인 것이 되 었다. 2001년에 내린 금리는 그 수준에서 계속 유지되었고 2004년 중반까지 단기 대출 금리가 2% 아래였다. 이 시기는 연준의 통화정 책이 경제 붕괴로 이어지는 길을 닦았던 1960년대와 비견할 만한 시기가 되었다. 하지만 차이가 있었다. 물가 인플레이션은 통제하되 자산버블은 무시하기로 하는 그린스펀의 정책은 이후 2000년대를 거치며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연준은 대공황 이래 최악의 위기로 이어질 커다란 자산버블에 불을 때는 데 결정적 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한번 호니그는 그 과정의 모든 단계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그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FOMC에서 던진 표결에 대해 거의 후회하지 않았지만, 주택 버블이 생기던 시기에 대해서는 후회했다. 호니그도 그 버블을 불러오는 데 일조했다.
- 호니그는 2004년에 금리를 너무 낮게 유지해 주택 버블에 불을 지핀 기억이 여전히 괴로웠다. 그리고 2010년에 연준은 금리를 제 로에서 계속 유지했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제로에 머물 것이라고 은 행들이 확신하도록 포워드 가이던스를 주었다. 그러면 은행들은 더 확신을 가지고 투기적인 베팅을 하게 될 터였다. 제로금리는 은행들이 수익률 추구에 나서고 위험한 대출을 하도록 유인을 제공했다.
또다시 연준은 자산버블을 일으켜 경제성장을 촉진하려 하면서 나 중에 버블이 붕괴하면 그 혼란을 연준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는 데 도박을 걸고 있었다.
8월에 버냉키는 연준의 노력을 한층 더 밀어붙이려는 계획을 발 표했다. 경제가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도 양적완화로 은 행에 6,000억 달러를 더 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업률이 여전히 높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2010년 말까지 계속 높으리라는 것은 이미 경제학자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연준의 고위층은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경제가 회복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통화를 한층 더 완화함으로써 회복 속도를 높일 수 있으리라 희망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것이 일종의 보험 같은 정책이며 필 요하면 언제든 철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흔히 FOMC가 단기 금리를 설정한다'고 이야기한다. 더 정확하 게 말하면, FOMC는 단기 금리의 목표치를 설정하고 뉴욕 연은의 트레이더들이 그 목표를 현실로 만든다. 수십 년 동안 뉴욕 연은의 트레이더들은 증권을 사고팔아서 돈의 비용이 FOMC가 원하는 것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만들었다. FOMC가 금리를 내리기를 원하 면 뉴욕 연은의 트레이더들은 새로 만든 달러를 가지고 국채를 매 입한다. 그러면 국채가 연준으로 흡수되고 새로 찍은 달러가 시중 에 풀리는 효과가 난다. 더 많은 달러가 유통되게 되었으므로 돈을 빌리는 값이 낮아지고, 이는 단기 금리가 낮아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FOMC가 금리를 올리기를 원하면 뉴욕 연은의 트레이더들은 국채를 매각하고 시중에서 돈을 흡수한다. 그러면 돈이 더 귀해지므 로 빌리는 비용이 더 높아진다. 즉 금리가 오른다. 뉴욕 연은 트레이 더들은 피아노 조율사 같은 전문성과 기술로 이 일을 수행하면서 화 폐 공급이 FOMC가 요구한 금리 수준에 정확히 일치하도록 조절한 다. 낙후한 많은 인프라와 달리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연준의 시스템은 새것처럼 잘 돌아가고 매우 열심히 유지·관리되며 이것의 권한과 범위는 어마어마하다.
- 11월부터 연은 트레이더들은 월가 금융기관들의 준비금 계좌에 수천억 달러가 들어갈 때까지 이 거래를 계속 반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프라 이머리 딜러들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보유하고 있는 것만 팔아야 했다면 연준이 새로 창출할 수 있는 돈 의 양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프라이머리 딜러라고 해도 직접 보 유하고 있는 채권의 양은 유한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연준은 프라 이머리 딜러들이 중간상인 역할을 하는 공정을 만들었다. 이 공정은 연준 밖에서, 헤지펀드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 헤지펀드 회사는 프라이머리 딜러가 아니지만 큰 은행에서 돈을 빌려 국채를 매입한 뒤 프라이머리 딜러에게 그 국채를 연준에 팔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연 준은 새로 창출한 돈으로 대금을 치른다. 헤지펀드는 빌린 돈으로 수십억 달러어치 채권을 매입해 마진을 남기고 연준에 되팔아서 수 익을 올릴 수 있다. 이 공정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마법처럼 채권을 흡수하고 돈을 내어놓는다. 그리고 이 돈은 지급준비금 계좌에 안전 하고 건전하게 머물러 있지 않고 더 수익성 높은 새 거처를 찾아 은 행 시스템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돈은 세계를 바꾸어놓았고, 주로 이 변화는 전에도 돈이 많았 던 사람과 기관의 행동을 바꿈으로써 일어났다. 양적완화로 창출된 새 달러는 물이 넘치는 수영장에 물을 더 부은 것처럼 기존에 있던 달러에 압력을 가했다. 이 압력은 연준이 이미 단기 금리를 제로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강해졌다. 본질적으로, 연준은 헤 지펀드, 은행, 사모펀드가 부채를 일으키도록, 그것도 더 위험한 방 식으로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말하자면, 이 전략은 협공 작전이었 다. 한쪽에서는 새로 만든 돈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돈을 저축하려 는 사람은 모두 처벌하는 낮은 금리로 공격한 것이다. 월가는 이전 략에 대해 제로금리 정책, 줄여서 ZIRPzero interest rate policy라는 이름 을 붙였다. 경제학자들은 ZIRP를 금리에 대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지만 월가에서는 새로 창출되어 쏟아진 돈과 저금리의 결 합이 갖게 될 강력한 힘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헤지펀드와 투자자들은 이것이 세계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 는데, 바로 이들이 ZIRP 체제의 지시대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ZIRP의 영향을 이해하는 데는 ZIRP가 만든 세상에서 고수익에 목마른 헤지펀드 경영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유용하다. 이 헤지펀드 경영자는 채권을 흡수하고 돈을 내놓는 공정에 참여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국채를 연준에 팔아 100만 달러의 수익을 얻었다 고 해보자(100만 달러는 헤지펀드로는 비현실적으로 작은 수익이지만 계산의 편의를 위해 이렇게 가정하자). 100만 달러가 들어왔을 때 이 헤지펀드 경영자가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현재의 금리다. 금리는 이들이 모든 것을 보는 렌즈다. 100만 달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내어줄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를 금리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장기 국채 금리가 4%인 세상에서는 그 돈을 국채에 가만히 넣어두 었을 때 매년 4만 달러를 벌 수 있고 여기에 리스크는 기본적으로 제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헤지펀드 경영자를 찾아와서 돈을 국채에 묻 어두지 말고 자기가 밀고 있는 사업에 투자하라고 설득한다. 투자를 받으러 오는 사람은 매우 다양하다. 한심할 정도로 낙관적인 텍사스주 석유회사 경영자는 셰일가스를 채굴하기 위해 수압파쇄식 유정을 뚫으려고 한다. 마이애미주의 부동산 개발업자는 초호화 아파트를 지으려고 한다. '다각화'라는 말을 마법의 주문인 양 내내 이야기 하는 주식 포트폴리오 매니저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줄줄이 찾아와 파워포인트로 발표를 해가며 헤지펀드 경영자를 설득한다. 이들 의 머리 위에서는 4% 금리라는 칼이 늘 흔들리고 있다. 이들 모두 자신의 프로젝트가 10년 만기 국채에 안전하게 돈을 묻어두었을 때 의 수익률 4%보다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다고 설득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일은 이렇게 돌아갔다. 그런데 2010년부터는 일이 이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단기 금리가 너무 오랫동안 제로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은 다른 금 리들도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양 적완화는 이 효과를 의도적이고 전략적으로 강화했다. 양적완화의 주된 목적은 돈을 안전하게 저축할 때 얻을 수 있는 장기적 이득이 매달 점점 더 낮아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뉴욕 연은 트레이더들은 이를 위해 특정한 국채를 매입했는데, 10년 만기 미국채 같은 장기 국채였다.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원래 연준은 단기 채권 거래 로만 통화 공급을 조절했다. 그런데 이번에 장기 채권을 사들인 이 유는 그렇게 하면 월가 투자자들이 돈을 안전하게 묻어둘 수 있었던 금고 하나를 닫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금융 붕괴가 시작되기 전인 2007년에는 돈을 10년 만기 국채에 저축할 때 5% 수익을 올릴 수 있었는데 2011년 가을에는 이것이 2% 수준으로 떨어졌고 여기 에 연준이 일조했다.
ZIRP의 전반적인 영향은 현금을 파도처럼 쏟아내고서 그 현금이 새로운 투자처를 맹렬히 찾아 나서게 만든 것이었다.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동태적 과정을 '수익률 추구'라고 부른다. 한때는 모호한 개념이었는데 이제는 미국 경제를 묘사하는 핵심 개념이 되었다. 돈을 가진 사람들, 그러니까 투자할 돈 수십억 달러를 가진 사람들은 제 로보다 높은 수익이라면 무엇이라도 잡기 위해 새로운 투자처를 찾으러 나섰다.
이제 한심하게 낙관적인 수압파쇄 만능주의자가 헤지펀드를 찾 아오면 전보다 훨씬 귀담아듣는 태도를 접하게 된다. 그들의 파워포인트 자료에는 뚫으려는 유정의 생산성이 위험하게 부풀려져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지펀드 매니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의향이 전보다 훨씬 더 크다. 안 될 게 무언가? 제로보다는 나은데. 마이 애미주의 호화 아파트 개발업자는 아파트의 수요를 엉성하게 예측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로보다는 나으니 기회를 주어보는 게 어 떻겠는가? 말쑥한 차림의 주식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그의 포트폴리 오에 포함된 회사들이 실제 영업 성과에 비해 주가가 너무 고평가된 듯 보이지만, 제로 수익률보다는 낫지 않은가?
수익률 추구 압력은 높은 위험이라도 기꺼이 추구하며 고수익을 좇는 헤지펀드 매니저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연금기금 이나 보험회사처럼 투자 성향이 가장 보수적인 기관들도 수익률 추 구의 압력에 처했다. 이러한 기관들은 방대한 운용 자금을 보유하고 있고 이 자금에서 나오는 이자 수익이 재무 건전성 유지에 핵심이었 다. 이자율이 4%인 세계에서는 가령 연금기금이 1,000만 달러만 국 채에 저축해도 모든 연금 청구액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4%씩 이자가 꼬박꼬박 들어왔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금리가 제로 가까이 로 떨어지면 이 연금기금은 갑자기 재무 건전성이 악화되고, 따라서 수익률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제 연금기금 같은 보수적인 기관마저 수압파쇄식 유정과 호화 아파트 개발 프로젝트를 귀담아듣는다.
이것이 ZIRP가 자산 가격 상승을 유발하는 이유다. 사람들이 수 익률을 찾아 나설 때 그들은 자산을 구매한다. 이는 자산 수요를 증 가시켜 회사채, 주식, 부동산, 심지어는 미술품에 대한 가격까지 밀 어올린다. 자산 가격 인플레이션은 양적완화의 의도치 않은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양적완화의 목적이었고, 자산 가격이 높아지 면 '자산 효과wealth effect'를 일으키고 이 이득이 더 폭넓은 경제로 확산되어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지리라는 기대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이러한 자산 효과가 일어나려면 제로금리가 우선 미국에서 가장 부 유한 사람들부터 이득을 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연준의 고위 의사결 정자들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미국의 자산 소유가 폭넓은 사람들 에게 분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연준 자체의 분석으로도 그렇 다. 2012년 초에 미국의 가장 부유한 1%가 전체 자산의 25%를 소 유했고 하위 50%가 소유한 비중은 6.5%에 불과했다. 연준이 자산 가격에 불을 땠을 때,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는 별다른 기별이 없이 상층의 매우 소수에게만 이득을 주었다.
- 처음에는 ZIRP가 경제 전반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고무 적인 징후가 있었다. 양적완화가 끝나고 몇 달 동안 실업률이 느리 지만 꾸준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버냉키 등이 희망했던 더 폭넓은 이득은 흐지부지 사라졌다. 11월에 양적완화가 시작되었을 때 실업 률은 9.8%였는데 2011년 여름에 양적완화가 끝났을 때도 실업률은 여전히 9%였다. 경제성장은 연준 자체의 추산으로도 여전히 미약하 고 불확실했다. 연준은 이러한 작은 이득을 위해 금융 시스템을 되 돌리기 어렵게 왜곡했다.
- 버냉키는 외곬이 되어 연준의 개입을 더더욱 강화하는 쪽으로만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번의 양적완화가 약간밖에 효과가 없었다면, 더 큰 양적완화를 하면 효과가 커지지 않을까? 은행들이 ZIRP의 압력으로 연준이 기대한 것만큼 돈을 많이 대출하지 않았다면, ZIRP 를 한층 더 강화하면 되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2012년 여름에 버 냉키가 제안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2010년보다 더 큰 반대에 직면했다. 2012년 여름의 FOMC 회의에서 위원 12명 중 6명이 양적완화를 한 차례 더 하는 안에 의구심을 표했다. 이 중 세 명 만 반대표를 던져도 연준이 자신이 하려는 실험을 확신하지 못한다 는 것이 외부 세계에 드러나게 될 터였다. 버냉키는 이런 일이 일어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연준의 개입 강도를 높 이려는 계획에 대해 FOMC 내부적으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정치 적 작업에 들어갔다.
버냉키의 계획에 가장 강하게 반대한 사람은 연준 이사 세 명이었 는데, 이들은 버냉키의 계획을 늦추거나 막기 위해 공조하기 시작한 터였다.10 한 명은 ZIRP의 강력한 비판자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FOMC의 닫힌 회의실에서는 그랬다). 그의 이름은 제롬 H. 파월 이었다. 2012년에 버락 오바마에 의해 임명된 파월은 FOMC에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 파월도 호니그가 제기한 것과 같은 우려를 많이 제기했다. 하지 만 파월이 그러한 우려에 도달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경로는 호니그와 달랐다. 그는 사모펀드의 세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는 위험한 부 채를 만들고 파는 것을 도우면서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연준에 합 류한 뒤에는 이러한 부채가 경제 전체에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호니그의 말과 달리 제롬 파월의 말은 사람들이 귀담아들었다. 사실 나중에 그는 연준 권력 서열의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그사이의 시기에 그는 양적완화의 잠재적 위험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경고를 표명한 사람이었다.
- 이번의 테이퍼 탠트럼은 ZIRP와 QE가 금융 시스템에 심어놓은 근본적 취약성을 드러내게 될 여러 차례의 시장 충격 중 첫 번째였 다. 금융 시스템을 시소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시소 한쪽에 는 주식이나 회사채 같은 위험한 투자처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10 년 만기 미국채 같은 매우 안전한 투자처가 있다. 돈은 대담한 투자 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양쪽을 왔다 갔다 한다. 2010년 이래로 연준은 돈이 10년 만기 미국채가 앉아 있는 안전한 쪽에서 점점 더 멀리 이동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QE의 핵심이었다. 즉 투자 자들이 시소의 더 위험한 쪽으로 돈을 옮기게 하는 것이 QE의 핵심 이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연준이 10년 만기 국채를 사들여서 그 것의 금리를 낮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버냉키가 10년 만기 국채매입을 줄일 것이라는 암시를 주자 돈이 위험한 쪽에서 멀어져 안전한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시소 방향이 바뀌는 시점이 며, 연준의 개입이 더 극단적이었을수록 시소의 방향이 바뀌는 속도 가 더 급격할 것이다.
테이퍼 탠트럼의 가장 가시적 징후는 주식 가치의 갑작스러운 하 락이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연준 의장의 발언 직후 1.35% 가량 떨어졌다. 하지만 주식시장은 사실 부수적인 쇼에 불과했다. 진짜 위험은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토대라 할 10년 만기 국채시장에 서 나타났다.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버냉키의 발언 이후 0.126%p 상승했다. 큰 상승 같아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초안전한 채권 치 고는 어마어마한 상승이고 매우 교란적인 움직임이었다. 이 금리는 몇 주 사이에 0.5%p가 더 상승해 버냉키의 기자회견 전날 2.2%였 던 데서 2.73%가 되었다. 대부분의 미국인에게는 이 움직임이 금융 위기나 시장 붕괴로 여겨지지 않았겠지만 월가에서는 위기의 시작 으로 여겨졌다. 돈이 안전한 쪽으로 움직여 위험한 투자를 했던 사 람들이 더 적은 돈으로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 질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위험의 균형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국채 수익률이 오르면서 월가에 돈을 안전하게 묻어둘 수 있는 금고가 다시 생겼고 투자자들이 수익률 곡선의 저 멀리 위험한 쪽에 돈을 놓아둘 필요가 없어졌다.
- 이러한 사실이 명백해지자, 투자자들은 레버리지론이나 기업 정크본드 등 자신이 매입했던 위험한 자산들을 다시 점검했다. 이제는 그것들을 팔고 돈을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했다. 6 월 말과 7월 초에 그러한 일이 벌어졌고, 주로 QE로 풀린 돈이 홀 러 들어갔던 불가해한 시장들에서 벌어졌다. 부동산투자신 탁REIT: Real Estate Investment Trust 회사들은 모기지 금리가 조정되면서 보유 자산을 투매하기 시작했다. 회사채 시장에서도 돈이 빠져나왔 고, 빚을 진 기업들은 더 높은 금리에 직면했다.
- 기자회견을 하고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벳시 듀크는 집무실의 텔 레비전과 실시간 블룸버그 통신 터미널에서 테이퍼 탠트럼이 펼쳐 지는 것을 보았다." 국채 금리가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듀크는 가슴 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것은 연준이 한 일 전부를 한꺼번에 쓸어 없 애고 있었다. 연준이 쏟아부은 수천억 달러가 국채 금리를 낮추려는 것이었는데 그 금리 하락이 사라지고 있었다. 듀크는 이렇게 설명했 다. "그 시점에, 상황은 연준이 양적완화를 오히려 한층 더 강하게 지속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매입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시점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냥 계속해야 했고, 계속할 것이라고 시장을 안심시켜야 했습니다."
테이퍼링을 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 연준은 자산 매입에 꼼짝없이 묶여 있었고 양적완화는 미국의 기업 세계에서 새로운 수준의 부채를 일으키면서 자산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있었다. 이것은 QE의 의도치 않은 결과가 아니었다. 이것 자체가 QE의 목적이었다.
연준 경제분석가 데이비드 라이프슈나이더 David Reifschneider는 2012년의 한 FOMC 회의에서 ZIRP가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채널 이 자본 비용, 자산 효과, 환율 이렇게 세 가지라고 명확하게 설명한 바 있다. 20 해석하면, QE가 부채 조달 비용을 낮추고, 자산 가격을 올리며, 달러 가치를 절하(그러면 수출이 증가한다)하리라는 것이었다.
- 성인이 된 제이 파월은 무언가의 중심부에서 작동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 권력의 장 중에서도 정부 영역과 민간 금융 영역이 딱 만나는 핵심 지점에서 경력 전체를 보냈다. 그가 거친 일 자리들은 워싱턴의 세계와 월가의 세계를 연결하는 자리였다. 그는 거대 자본과 거대 정부 사이에 일이 부드럽게 돌아가게 도와주는 해결사였다. 이 지극히 소수만이 아는 세계에서 그는 평판이 아주 좋 았다. 파월은 신중하고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단단하고 듬직했다. 하지만 권력의 회랑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CEO나 선출직 공직자 등은 해본 적이 없다. 그는 그의 일을 흠 없이 해냈다.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깊이 존중받았다. 파월이 2018년에 연준 의장으로 지명되었을 때 거의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있었다. 2017년에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투자 매니저 마이클 파Michael Farr는 파월에 대해 '매도 비둘기도 아니다' 라고 말했다. 매와 비둘기라는 표현은 연준 내부에서 입장차를 지칭 하는 표현이다. 그 시점에 파월은 5년째 연준 이사로 일하고 있었고 연준의 정책과 관련해 매우 첨예하고 복잡한 논쟁에 관여했는데도, 마이클 파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파월을 고정된 신념에 집착하지 않 으며 일이 되게 만드는 데만 집중하는 사람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 는 실용주의자입니다. 경제적으로 좋은 것을 추구할 뿐 정치적인 것 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실 파월은 정치적인 것에 늘 귀를 기울였다. 그의 귀는 민감했 고 판단은 예리했다. 그가 밟아간 경로는 모든 단계에서 꼼꼼하게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를 배우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사람의 경로 였다. 로스쿨을 나왔기 때문에 '변호사'라고 불리긴 했지만 그의 경 력은 '변호사'라고 칭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로웠다.
197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파월은 프린스턴대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의회의 전문위원이 되었다. 그다음에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나와 뉴욕 연방 항소법원에서 로클럭을 했다. 그리고 아버 지의 발자취를 따라 기업 전문 변호사가 되기로 하고 '데이비스 포 크 앤 워드웰'이라는 로펌에 들어갔다. 하지만 서른한 살이 된 1984 년에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법의 세계를 떠나 투자은행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파월은 딜런 리드 앤 컴퍼니'라는 회사에 들어갔고, 이로써 그가 기업 부채의 세계에서 막대한 부를 얻게 될 긴 경로가 시작되었다.
-  2012년 5월에 포프는 은퇴 자금을 CLO에 투자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문서를 하나 작성했다. 이 문서는 '백서'라고 불렸고 크레디 트스위스의 '크레디트투자그룹Credit Investment Group'에 의해 발간되 었다.
이 백서는 보수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기관투자자들이 직면한 난 제를 다루고 있었다. 연준이 금리를 제로에 고정한 상황에서 그들이 가진 현금으로 어떻게 수익을 올릴 것인가? 연기금과 보험회사로서 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지난 수십 년간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이 자 수입에 의존해 매년 지급해야 할 보험금과 연금을 지급하던 이들 기관은 제로금리 때문에 갑자기 자금 압박에 처하게 되었다. 포프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쓴 백서는 애절하게 들리는 단순한 질문 하나로 시작했다. "10년 만기 국채의 실질 수익률이 마이너스 일 때 투자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행히 포프는 이 딜레마에 해법이 있었다. 그의 백서는 기관 투자자들에게 한때는 너무 난해하 고 모호하다고 여겨져 기피했던 레버리지론에 투자를 고려해보라고 예의 바르게 제안했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할 의사가 있다면 기업 부 채 시장에서 중순위 기업 채권을 활용해 약 4.4%의 이자 수익을 대할 수 있었다. 가장 안전한 선순위 기업 채권은 수익률이 1.2% 밖 에 안 되는 것과 비교해보라. 가장 위험한 후순위 기업 채권에 투자 하면 수익률이 5.6%까지도 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연기금은 안전한 회사채의 낮은 수익률에 만족했다. 그러한 채권은 마치 포드자동차의 '모델'처럼 표준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채권은 SEC가 감독했고 공개된 시장에서 거래되었 다. 요컨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레버리지론 계약은 매우 복잡했고 각기 매우 다른 조건과 조항이 들어가 있었으 며 규제 당국이 주식이나 회사채만큼 강하게 감독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CLO였다. 레버리지론을 표준화해서 연기금 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든 것이다.
CLO의 핵심적 혁신은 그 꾸러미 안에 포함된 레버리지론을 표준 화한 방식과 관련이 있었다. 하나의 CLO 꾸러미는 리스크에 따라 다시 세 덩어리로 나뉜다. 여기에서 리스크는 그 꾸러미에 포함된 레버리지론으로 돈을 빌려간 사람들이 매달 이자를 상환할 때 이자 를 받는 줄에서 투자자가 어디쯤 서 있게 될지를 의미한다. 
- 몇 년이 지나고 되돌아보는 시점에서 위험한 기업 부채의 탑을 쌓았다고 월가의 트레이더들을 손가락질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들 은 연준이 인센티브를 준 대로 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현상 중 어 느 것도 연준의 의사결정자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어야 한다. FOMC가 가장 큰 규모의 양적완화를 진행하던 2013년에 댈러스 연 은행장 리처드 피셔는 명시적으로 이 정책이 주로 사모펀드에만 득 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이 파월이 있었던 칼라일그룹 같은 곳 말이다. 피셔는 높은 자산 가격이 버냉키가 기대한 방식대로 '자산 효과'를 일으켜 즉 주식, 주택 등 자산 소유자들이 부가 증가했다고 느끼게 되면 이들 의 소비가 촉진되어] 이것이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와 더 높은 임 금으로도 이어지리라는 전망에 의문을 제기했다. 12
피셔는 그때 FOMC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자 산 효과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부자들과 시장을 잘 읽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버핏이나 KKR이나 칼라일이나 골드만삭스나 파월 같은 사람들에게만 그 효과가 있었 습니다. 아마 피셔 같은 사람들도요. 이들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돈을 빌려서 채권과 주식과 자산의 가격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수익은 그들의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피셔는 이것이 연준이 바라 는 정도로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신나고 흥분되는 기회는 호황을 구가하던 주식시장에 있었다. ZIRP 시대의 희한한 현실 중 하나는 전체적인 경제성장은 비실비 실해도 자산 가격은 놀랍도록 높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애 덤스 같은 경영자들이 한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금융 기법을 활용 해 주가 인플레이션에서 돈을 벌 기회를 제공했다. 이 기법은 '자사 주 매입'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렉스노드가 추구하기 시작한 전략이 었고 그밖의 미국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사주 매입은 1982년에 합법화되었고, 말 그대로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 가 현금을 써서 자신의 주식을 사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득이 된다. 주식이 매 입되면 그만큼이 시장에서 빠지니까 남아 있는 주식의 가격이 올라 간다. 또한 많은 경우에 자사주 매입은 CEO 보수와도 관련이 크다. '주당순이익'을 기준으로 CEO 성과를 측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이다. 주당순이익은 기업이 한 주당 얼마를 벌었는지를 나타내는데, 자사주 매입으로 주식수가 줄면 주당순이익이 올라간다. 이런 식으로, 자사주 매입은 새로운 고객을 얻거나 제품을 혁신하거나 운영을 개혁하지 않고도 주당순이익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자사주 매입이 이미 그 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할 때, 여기에는 그 회사의 경영진도 포함된다.
경영자와 주주에게 이렇게 득이 되는데도 자사주 매입은 1990년 대의 상당 기간 비교적 드물었다. 하지 않는 게 좋을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사주 매입은 반드시 부채 비율을 증가시키게 되어 재무 건전성 지표를 악화시킨다. 가지고 있던 돈이 아니라 빌린 돈으로 자사주 매입을 하면 부채 비율은 더 높아진다. 하지만 돈을 빌리는 비용이 너무 싸고 주가가 너무 빠르게 오르고 있다면 이 전략은 쓰 지 않기가 어려워진다.
- 세상에서 제일 지루하게 들리는 기업들이 첨단 금융공학에 나서 서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자신의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밀어 올렸 고 종종 경영진의 더 높은 보수를 정당화했다. 경영진에게 회사의 실제 사업은 점점 덜 중요해졌다. 중요한 것은 부채 시장에 접근하 는 것과 상승하는 주가였다. 예를 들어, <포브스>에 따르면 맥도날 드는 2014년과 2019년 사이에 210억 달러를 채권으로 빌렸는데, 이 돈을 350억 달러어치의 자사주를 매입하고 주주에게 190억 달러의 배당금을 지급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사용했다. 이 회사의 수 익은 310억 달러밖에 안 되었는데 같은 기간에 주주를 위해 500억 이상이 지출되었다. 
- 예보 부의장 시절 호니그의 일은 이러한 종류의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은행의 영업 범위가 제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은행이 더 많은 자본을 쌓아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납세자의 돈으로 유지되는 안전망에 지나치게 의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호니그 는 좌파 쪽의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과 우파 쪽의 <월스트리트저 널> 사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워싱턴에서 실질적인 추진력을 얻지는 못했다.
전방의 싸움에서 고전하는 와중에, 호니그는 후방에서도 승산 없 어 보이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예보가 은행의 권력을 제한하려고 애쓰던 동안 연준이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2007년 에서 2017년 사이에 연준의 대차대조표는 거의 다섯 배로 늘었다." 그 10년 사이에 연준이 설립 후 첫 100년 동안 찍어낸 돈의 다섯 배 가 될 정도로 돈을 많이 찍어냈다는 뜻이다. 이 모든 달러가 저축하 면 벌받는 제로금리의 세계로 들어갔다. QE로 풀린 3조 5,000억 달 러 각각이 어디로 갔는지 추적하기는 불가능하다. 이 돈은 수영장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즉각 더 큰 전체로 합쳐졌다. 하지만 수영장
물의 수위는 측정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매킨지 글로벌 연구소 McKinsey Global Institute'는 연준의 정책이 기업 부채 시장에 돈이 쏟 아져 들어가게 함으로써 2007~2012년 동안에만도 기업들이 3,100 억 달러에 해당하는 이득을 얻었다고 추산했다. 같은 기간 동안 돈 을 저축한 가계는 이자를 얻지 못해 3,600억 달러에 해당하는 손해 를 보았고 연금기금과 보험회사도 2,700억 달러에 해당하는 손해를 본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ZIRP 시대의 초기에 불과 했다.
돈이 시스템으로 밀려들어 오면서 모든 주요 금융기관이 수익률 추구에 나서도록 내몰렸다. 많은 월가 트레이더가 무슨 일이 벌어지 는지 명백히 알고 있었고 여기에 다음과 같은 별명을 붙였다. "모든 것이 버블 everything bubble."
연준의 정책은 너무나 강도 높고 광범위한 수익률 사냥 활동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모든 곳에서 리스크가 누증되고 있었다.
- 양적완화는 주식시장에 인플레를 일으킬 목적으로 고안되고 실 행되었다. 그리고 효과가 있었다. 2010년 이후 10년 사이에 주가가 크게 올랐다. 연준이 개입 근거로 들었던 것처럼 전반적인 경제성장 은 약세였고 임금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정체되어 있었으며 해외에 심각한 위기 요인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2010년에서 2016년 사이에 77%나 상승했다. 천성이 다소 신랄한 어느 헤지펀드 트레이더는 실속 없이 부풀어 오르던 2016년의 주식 시장을 타이타닉호가 가라앉기 직전에 갑판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상황에 빗댔다. 갑판에 사람들이 몰린 것은 갑판이 너무 좋은 곳이어서가 아니라 거기 말고는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매킨지 글로벌 연구소는 양적완화로 투입된 달러의 흐름을 추적 했을 때 수십억 달러가 멕시코, 폴란드, 튀르키예 같은 개도국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 국가는 미국보다 신용 위험이 더 크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돈을 빌려줄 사람을 유혹하려면 더 높은 이자를 제시해야 했다. 튀르키예는 2009년과 2012년 사이에 2005년과 2008년 사이에 빌렸던 것보다 여섯 배나 많은 돈을 채권 을 발행해 빌렸다. 튀르키예 대통령 레젭 타입 에르도간Recep Tayyip Erdogan은 빌린 돈으로 건설 붐을 일으켰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했 으며 2018년 경제성장률을 7%로 밀어 올렸다. 빌린 돈은 이스탄불 의 옛 쇼핑몰 옆에 새로운 쇼핑몰이 지어지는 데 일조했다. 새 아파 트, 새 교량, 그리고 사파이어라고 불리는 새 고층건물이 들어섰다. 건설 분야는 외화표시채권 덕분에 거의 560억 달러를 조달할 수 있었다.
지어진 쇼핑몰은 거의 빈 채로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 지어졌다. 빌린 돈으로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차입은 부채 시장 에서 어떤 변화라도 생길 경우 그 나라 금융이 극도로 취약해지게 만들었다. 버냉키가 2013년에 연준이 양적완화를 테이퍼링할 수도 있다고 발표하자 시장은 즉각 조정에 들어갔고 투자자들은 위험한 국가의 채권에서 돈을 빼기 시작했다. 이후 3개월 사이에 튀르키예 의 채권 42억 달러어치가 매각되었다. 폴란드에서는 24억 달러어치 가 빠져나갔다. 외국 투자자들이 채권을 투매하면서 이들 국가의 화폐 가치가 떨어졌다. 튀르키예, 브라질, 멕시코, 폴란드의 화폐 가치 는 2013년의 테이퍼 탠트럼 동안 4~5% 가량 낮아졌다. 화폐 가치 는 여러 요인에 영향을 받지만(튀르키예와 브라질은 이미 평가절하가 진행 중이었다) 연준의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연준이 경 로를 되돌려 테이퍼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리라나 페소 같은 통화의 가치가 2% 뛰었다. 개도국 채권 수요가 다시 강해졌고 대출 시장이 되살아났다.
- 마이너스 금리의 논리는 양적완화와 동일하다. 투자자들이 위험 한 수익률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에 유인을 제공하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벌을 주는 방식을 사용 한다. 즉 돈을 저축할 때 말 그대로 벌을 받는 것이다. 마이너스 금 리 채권은 빠르게 효과를 낸 뒤 없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그다음에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투자자들이 이러한 채 권을 사겠다고 줄줄이 몰려든 것이다. 2016년에 마이너스 금리 채 권은 전 세계 총부채의 29%를 차지했고 7조 달러어치의 채권이 마 이너스 금리로 발행되었다.
- 연준의 조치와 시장의 요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가려지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단기적으로는 시장의 불안정을 설명 할 그날의 뉴스가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기술주가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뉴스는 페이스북과 구 글 같은 테크 기업의 반독점법 위반 혐의에 대한 정치계의 관심을 이 유로 들었다. 맞긴 맞았다. 테크 기업을 규제하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실제로 세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주식시장 하락의 배경에 있는 더 큰 요인은 연준의 정상화 조치였다. 연준이 돈이 주식으로 몰려가게 하는 압력을 줄이자 투자자들은 가치가 가장 과대평가되어 있던 데 서부터 돈을 빼기 시작했고 여기에는 기술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ZIRP 시절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너무나 많이 쏠린 영역이었기 때문 이다.
세계 경제가 둔화되기 시작하자 언론의 헤드라인은 트럼프 대통 령이 중국과 시작한 무역 및 관세 전쟁을 보도했다. 이것도 맞긴 맞 았다. 트럼프의 움직임은 전례가 없었고 시장에 충격을 주었으며 세 계 무역을 둔화시켜 투자자들이 공급망을 다시 검토하거나 재조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연준의 정상화 조치가 더 큰 요인 이었다. 연준에 더해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는 점도 중요했다. 2018년 12월에 유럽중앙은행은 자신의 양적완화 를 중단했다. 이렇게 금융 여건이 경색되자 글로벌 부채 시장에 형 성되었던 병폐가 드러났다. 중국이 이를 특히 잘 보여주는 사례였 다. 중국은 부채 위기와 오랫동안 중국 정부와 중국 중앙은행이 생 성에 일조했던 일련의 자산버블을 겪고 있었다. 연준은 2018년의 한 보고서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설명했다. "중국의 경제 성장 속도가 최근 둔화되고 있으며 지난 몇 년간의 빠른 신용 팽창 이 최근의 경제 둔화에서 대부자들이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게 만든 요인 중 하나다." 중국의 민간 영역 부채는 2008년 이래 두 배가 되 어서 중국 연간 GDP의 두 배가 넘었다. 이렇게 막대한 수준의 부채 는 '역기능적인 움직임을 추동할 수 있었다. 돈을 빌린 사람들이 경 기 둔화 국면에서 상환불능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 국과의 무역 전쟁은 중국 경제의 더 근본적인 문제가 값싼 돈 및 부 풀어 오른 자산 가격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려버렸다.
- 레포 금리가 9%를 돌파했을 때, 이것은 무섭기는 해도 추상적인 숫자로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숫자이기만 한 게 아니었고 여 기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 숫자는 실제 사람들 사이에 벌어 지고 있는 고투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 고투의 한쪽에는 JP모건같이 돈을 빌려주는 쪽, 레포 대출을 해주는 쪽이 있었다. 다른 쪽에는 영 업을 이어가려면 절박하게 레포 대출이 필요한 쪽이 있었다. 이들의 고투가 심화되면서 레포 금리가 점점 높아졌다. 금리가 9%를 쳤을 때, 이것은 누군가가 너무나 절박해서 전적으로 안전한 담보가 있는 초단기 대출에 대해 원래는 2% 정도인 금리를 놀랍게도 8%까지도 내겠다고 했는데, 더욱 놀랍게도 돈을 빌려주는 쪽이 그 전적으로 안전한 레포 대출을 8% 이자를 받고도 해줄 의향이 없어서 더 높은 9%를 원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빌려주는 쪽이 빌리는 쪽에 대해 매우 의구심을 가지고 있 었다는 뜻이었다. 은행들이 준비금이 고갈되었다고 인식한 것은 그 우려가 드러난 징후였지 그 우려를 만든 원인이 아니었다.
ZIRP 시대에 레포시장은 완전히 변모했다. 금융위기 전에는 주로 은행들이 이 시장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현금이 너무 많아서 레 포시장을 전처럼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일군의 새로운 금융 플레이어들이 레포시장으로 들어왔다. 바로 헤지펀드였다. 헤지 펀드 등 비은행 행위자의 오버나이트 레포 론 거래 규모는 2008년에 서 2019년 사이에 두 배로, 금액으로는 1조 달러 규모이던 데서 2조 달러 규모로 늘었다. 2조 달러라는 숫자도 레포시장이 헤지펀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이 되었는지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헤지펀드는 레포 부채를 훨씬 더 큰 부채 구조를 만드는 토대로 사용했다. 레포시장에서 돈을 빌린 뒤 그 돈으로 시장에서 더 큰 베 팅을 하는 자금으로 사용한 것이다. 월가는 이 기법을 '레버리지 업' 이라고 부르는데, 가령 1달러를 빌려 10달러짜리 도박에 돈을 지불 한다는 뜻이었다. 헤지펀드는 오버나이트 레포론으로 빌린 2조 달 러를 사용해 시장에서 그 레포론 자체보다 훨씬 더 큰 포지션을 쌓았다.
- 연준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헤지펀드가 레포 대출을 전보다 훨씬 많이 받는다는 것은 명백했지 만 그 이유는 명백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에 자금을 대기 위해 이 돈을 빌리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이것은 알 수 없었다. 헤지펀드가 은행만큼 강하게 감독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헤지펀드는 그림자 은행 시스템의 일부여서 예보나 도드-프랭크법 의 감독을 받지 않았다. 이러한 약한 규제의 근거는 헤지펀드는 충 분히 전문적인 내용을 잘 아는 투자자이므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 기 책임하에 자기 능력대로 거두는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2019년에 레포시장이 붕괴하고 몇 달이 지나서도 재무부는 헤지 펀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폭발 이후 잔해를 발굴하는 법의학 분석가처럼 실마리를 발견했다.
헤지펀드는 '베이시스 거래'라고 불리는 매우 특수한 거래를 늘리 고 있었다. 베이시스 거래는 연준이 수년 동안 양적완화와 ZIRP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시장 안정성 덕분에 가능해진 기법이었다. 베 이시스 거래는 인위적으로 강제된 안정성의 환경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즉 격한 시장 요동이 발생하면 연준이 들어와 개입해줄 것이 라고 트레이더들이 믿을 때만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이 만족 되면, 시장의 요동이 없는 한 헤지펀드는 수천억 달러를 빌려서 리 스크가 사실상 제로인 거래를 할 수 있다.
- 설계는 간단하다. 헤지펀드 트레이더는 금융시장에서 거의 언제 나 자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인, 약간의 거래 차익을 올릴 만한 구 석을 찾아낸다. 이 경우에는 미국채 현물 가격과 선물 가격 사이의 아주 미세한 차이다. 미국채를 오늘 사는 가격과 그것의 선물 가격 사이의 차이를 '베이시스'라고 한다. 헤지펀드는 국채 현물을 매수 하고 동시에 같은 양의 국채 선물에 대해 매도] 포지션을 취해서 베이시스만큼의 매우 작은 차익을 얻을 수 있다. 그 국채를 보유했 다가 만기가 되면 인도하고 베이시스만큼의 수익을 올린다.
이 대목에서 레포시장이 등장한다. 베이시스 거래의 마진은 본질 적으로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액수가 극히 작다. 수익성이 있으려면 헤지펀드는 이 거래를 수천 번쯤 되풀이해야 한다. 헤지펀드들 은 바로 이 반복 거래를 위해 레포시장을 이용했다. 매수한 국채를 담보로 레포시장에서 현금을 빌려 선물 거래 포지션을 한껏 쌓아올 리는 데 사용한 것이다. 어떤 헤지펀드는 50대 1의 비율로까지 레 버리지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진 돈 1달러당 50달러를 빌려 거래에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헤지펀드는 미국채, 레 포대출, 미국채 선물의 상호 강화적인 세 축으로 위험의 삼각대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1원짜리 동전을 수백만 개 주워 모으는 것처럼 쉬운 돈이었다. 헤지펀드는 이러한 거래에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지 당국에 보고할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 재무부가 진행한 조사에서 그 규모를 추산해볼 수는 있었는데, 2014년에서 2019년 사이에 미국채 선물 시장에서 헤지펀드가 보유한 '숏 포지션의 가치가 2,000억 달러에서 거의 9,000 억 달러로 늘었다. 선물 시장에서의 숏 포지션은 이러한 베이시스 거래의 작동에서 핵심이었다. 그리고 베이시스 거래 시장은 '상대가 치형 relative-value' 헤지펀드라고 불리는 펀드들이 거의 장악했던 것으 로 보이는데, LMR 파트너스, 블루크레스트캐피털 매니지먼트 같은 생소한 이름을 가진 곳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레포 대출의 가격이 낮고 안정적인 동안에는 베이시스 거래가 잘 돌아갔다. 하지만 레포 대출의 가격이 올라가자 베이시스 거래의 수익성이 즉각 무너졌다. 헤지펀드는 선물 거래 포지션을 유지하기 위한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레포 대출을 롤오버하는 비용이 높아진 상황에 처했다.
- 연준은 혁신적이거나 새로운 것 은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았다. 연준은 금융 세계의 어느 곳이 화염에 휩싸였는지 보고서 새로 찍어낸 돈을 그쪽으로 보내 불을 끄는 일 을 하고 있었다. 연준은 2008년 금융위기 동안 개척한 몇 가지 법적 도구들을 다시 사용하려 했다. 그중 하나가 특수목적회사SPV: special purpose vehicle다. 기본적으로 SPV는 연준이 재무부를 파트너로 삼아 연준에 부과된 대출 영역 제한을 피해갈 수 있게 해주는 페이퍼 컴 퍼니다. 3월에 있었던 전화 통화의 상당수는 새로운 SPV를 설립하 기 위한 워싱턴의 연준 변호사들과 뉴욕의 연준 금융팀 사이의 통화 였다. 기본적으로 각각의 SPV는 연준과 재무부의 합자회사와 비슷 하다. 이 회사는 10달러 정도의 비용으로 델라웨어에 법인 등록을 한다. 각각의 SPV에 재무부가 납세자의 돈으로 출자를 하고 연 준이 그 돈을 종잣돈으로 삼아 기업에 대출을 해준다. 재무부가 출 자한 1달러당 10달러까지 대출할 수 있다. 연준이 SPV에 직접 자금 을 대고 기업 부채를 매입하는 것과 같다. 바로 여기에 출자된 납세 자의 돈이, 연준이 제약을 벗어나 위험한 부채를 사들이면서 전에는 직접 대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영역에 대출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요소다. 손실이 발생하면 우선 이 납세자의 돈으로 메워지므로 연준이 자신이 사실은 위험한 대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법리 를 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파월은 이를 이 프로그램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제시할 것이었다. 
- 2차 대전 이래 미국이 공적 자원을 가장 많이 지출한 2020년의 구제금융은 그 이전 10년간 대체로 연준에 의해 조용하고 꾸준하게 형성되어왔던 경제 체제를 강화하고 고착했다. 구제 금융은 ZIRP와 QE 정책에 의해 크고 강력해진 곳들에 주로 들어갔다. 빌린 돈으로 경쟁사를 사들인 거대 기업들에, 미국 전체 자산 중 방대한 부분을 소유한 매우 부유한 사람들에게 빌린 돈으로 글로벌 마켓에서 위태 로운 포지션을 취하는 월가의 가장 위험한 금융 투기 세력에 망하게 두기에는 너무 크다고 다들 믿게 된 미국의 거대 은행들에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현대 역사의 어느 순간보다도 미국인들이 혼 란에 빠지고 사면초가에 몰리고 재정적으로 고통을 겪던 시기에 일 어났다. 이제껏 벌어진 일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이해하 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그 영향은 수개월, 수년, 아마도 수십 년에 걸쳐 스스로를 드러낼 터였다.
- 많은 중요한 면에서 2008년의 금융위기는 결코 끝난 적이 없었 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오랫동안 경제에 탈구를 일으킨 '긴 붕괴' 였다. 금융위기를 야기했던 문제들은 거의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 고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 금융 붕괴는 미국의 민주적 기관들이 가 진 역량의 긴 붕괴로 한층 더 다루기가 어려워졌다. 미국이 경제 문제의 해결을 연준에 의존했을 때, 이는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는 수 단에 문제 해결을 의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준의 돈은 승자와 패자 사이의 거리를 더 넓혔고 더 큰 불안정성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취약해진 금융 시스템에 팬데믹의 타격이 닥쳤고 연준 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더 많은 돈을 새로 찍어내 이전의 왜곡을 증 폭했다.
2008년의 긴 붕괴는 2020년의 긴 붕괴로 진화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아직 다 치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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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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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곡가정책
고도성장기의 경제정책으로, 쌀을 일부러 저가에 팔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주식인 쌀이 저렴해야 월급을 적게 받아도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기 때문에 시행했죠.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저임 금정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식비가 오르면 생활비가 올라 저임금 을 더는 유지하기 어렵다는 논리로 저곡가정책을 폈어요. 한편 값싼 노동력을 도시로 불러올리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농사만 지어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 으면 굳이 고향을 떠나 열악한 공장으로 들어오지는 않을 테니까요. 농사를 지 을수록 빚이 늘어나기 때문에 1970년대에는 농가부채가 큰 문제였습니다. 국 회에서 식량자급률 붕괴가 저곡가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어요.
- 광주대단지 사건은 꽤 독특한 시위입니다. 우리나라 시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폭력성을 띤 동시에 정치구호가 없는 생존권 시 위였죠. 당시 보수우익 세력은 광주대단지 사건을 폭력 난동이 라고 불렀고, 진보 좌익 세력은 민중항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정 치적 역동성이 큰 우리나라의 경우 민주화운동 이외의 시위는 풍부하게 재해석되거나 오래 주목받기 쉽지 않아요. 주류인 민 주화운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 싸우기도 시간이 모자 라거든요. '8.10성남(광주대단지)민권운동'이라는 공식 명칭도 성 남시청 주도로 2021년에야 결정되었을 정도입니다.
으레 그렇듯 시위 주동자들이 경찰서에 끌려가서 간첩으로 몰려 고문받기도 했지만, 시위대의 요구는 시위 이후 모두 관철 됩니다. 요구 조건은 1 토지 가격을 평당 1,500원 이하로 인하 해줄 것, 2 총대금을 10년 동안 매년 나눠 갚게 해줄 것, 3 향후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해줄 것, 4 영세민 취로사업(공공근로) 일자리를 제공해줄 것, 5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환경을 개선 할 구호 대책을 세울 것 등이었습니다.
요구 조건에 따라 정부는 1974년과 1976년 성남에 산업공단 세 곳을 만듭니다. 서울 성수동에 있던 공장들이 많이 이전해 왔죠. 도시 자급자족을 위해 독자적인 산업단지를 세우려는 성 남시의 노력은 이때부터 시작된 도시 특성이에요. 정부의 부당 한 조치에 반발해서 개선을 이뤄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인 만큼,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열악한 노동 환경도 참지 않았습니다.
- 1980년대 초반 성남공단은 서울 구로공단, 인천공단과 함께 수 도권 노동운동의 3대 거점으로 불렸어요. 이때 성남공단에서 노 동운동을 주도한 성남노련이 나중에 우리가 아는 경기동부연합 이 됩니다. 동시에 1968년부터 계속된 도시 개발은 폭력조직이 둥지를 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2020년대까지도 조직 이 름이 언론에 오르내렸던 성남 국제마피아파는 1970년대부터 모 란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해요.
1973년 7월, 경기도 성남출장소가 경기도 성남시로 승격하면 서 상권이 발달합니다. 수도권 폭력조직 입장에서는 여기가 바 로 새로운 건축물과 새로운 유흥업소가 들어서는 블루오션이었 어요. 1980년대 후반에는 도시 개발에 따라 수십 개의 폭력조직 이 생겨났다는 보도가 있었죠. 물론 고도성장에 따라 전국에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됐기 때문에 폭력조직의 성행은 성남뿐 아니라 거의 모든 도시의 문제였습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할 만큼, 그리고 조직폭력배와 정치권의 유착이 우리나라 영화의 클리셰가 될 만큼 큰 문제 말이에요. '천당 위에 분당, 분당 위에 안남!'이라는 영화 대사 한 마디에 이렇게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1960년대 정부의 저곡가 정책이 나비효과를 부르고 다시 나비효과를 불러서 오늘날의 성 남이 탄생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가난해지니 사람들 이 농촌을 떠나 서울로 와서 일자리를 찾았고, 일자리를 찾다 보 니 살 곳이 없어서 무허가 판자촌을 지었고, 무허가 판자촌이 문 제가 되니 정부가 이를 철거하고 사람들을 황무지로 이주시켰고, 철거 및 이주 과정의 부당함에 맞서 저항하는 과정에서 성남 시 특유의 거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의 성남은 도시 안의 산업단지 성격과 높아진 도시 소득, 서울보 다 비싼 아파트를 가진 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 강남을 서울의 중심으로 만든 정책이 북한과의 전쟁준비에서 시작됐다면 믿으시겠어요?
현 강남지역은 1962년 12월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시흥과 경기도 광주였습니다. 정부가 강남지역을 서울로 편입하고 개발 계획을 세운 것은 1 이촌향도로 인한 서 울 인구 급증, 2 한강대교 폭파라는 한국전쟁 트라우마를 자극 한 북한 무장공비 출몰, 3 영남권 공업단지 경제개발이라는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어요. 1970년대와 1980년대 정권이 두 번 바 뀌는 사이 강남지역을 효과적으로 개발해 낸 도구 역시 세 가지 였는데, 바로 교육과 교통과 아파트였습니다.
- 명문고 강남 이전 계획이 처음 발표된 1972년, 명문고와 명문 고 동창들의 사회적 반발은 어마어마했습니다. 하지만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정부를 상대로 오래 저항하기 어렵지요. 결국 경기 고를 시작으로 10여 개의 명문고가 지금의 강남 3구로 오게 돼 요. 이런 흐름은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9년까지 계속됐습니다. 1974년, 서울에서는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고등학교 입시가 완 전히 폐지되고 11개 학군으로 나눠 주거지 근처 고등학교에 배 정하는 학군제가 시행됩니다. 8학군이라는 번호를 부여받은 강 남 학군의 인기는 하늘을 찌릅니다. 이미 강남 3구에 명문고가 몰려 있는데, 학군제에서는 강남에 살아야만 8학군에 배정받을 수가 있으니까요.
명문고 이전과 함께 등장한 정책이 바로 아파트 건설입니다. 학생들과 그 가족을 불렀으면 살 집도 마련해줘야죠. 1974년에 는 현 동작대교 남단에 위치한 매립지에 반포주공아파트가 완공 됩니다. 1976년에는 아파트 말고 다른 건물은 지을 수 없는 아파 트지구제도가 신설돼 반포, 압구정, 청담, 도곡 등 영동지구(지금 의 강남)가 아파트지구로 지정됩니다. 여기에 한신 · 대림·한양·경남우성 아파트가 들어서지요. 은마아파트(1978)도 이 시기 강남에 완공됩니다. 당시 영동지구 부동산을 구매할 때는 양도소득 세나 취득세 같은 세금 면제 혜택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건설된다는 건 다른 인프라도 따라온다 는 이야기죠. 단독주택이나 소규모 연립주택과 달리 아파트단지 는 도로 계획과 상권 형성이 무척 편리합니다. 동시에 사대문 안 구도심인 종로구·중구·서대문구에는 결혼식장, 호텔, 술집, 백 화점, 도매시장, 제조업체, 대학 및 학원의 신설과 증설을 금지합 니다. 도로 신설과 확장도 금지했고요.
게다가 중동에서 벌어온 돈까지 아파트 개발에 투기 자본으 로 밀려들어 오면서 강북은 쇠퇴하고 강남이 무서운 속도로 발 전하기 시작합니다. 1963~1979년 사이 중구의 땅값이 20배 오 르는 동안 강남구의 땅값은 1,000배 이상 올랐답니다.
- 경기도 시흥군과 광주군은 한강만 건너면 바로 서울과 연결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정부는 한강에 다리를 놓고 서울을 확장 해 인구를 분산시키기로 합니다. 1962년, 일제강점기부터 번화 했던 영등포의 동쪽이라서 '영동지구'라 불리던 경기도 시흥군 과 광주군이 서울로 편입됩니다. 1965년에는 강북과 (영등포를 거 쳐) 영동지구를 잇는 다리 중 양화대교가, 1969년에는 한남대교 가 완공됐어요. 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영동지구 개발이 본격적 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영동지구가 얼마나 낙후되어 있었는지는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수기에 잘 나타납니다. 농업이 국가 경제를 지탱하던 시기인데 뭘 심어도 안 자라는 땅이라든가, 갈대밭이 고 뻘밭이라 아주 개흙이라고 투덜거리는 내용(대치동)이 많아 요. 일본인들이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를 치고, 누에에서 나온 생 사로 스타킹을 짜서 미국에 수출했다는 내용(잠원동)도 있습니 다. 서울 강북 개발이 한창일 때 남쪽에서 일자리를 찾아 인부들이 올라왔는데, 싼값에 셋방을 찾는 인부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었다든가(청담동) 강남까지 개발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한동안 룸 살롱이나 다방뿐이어서 '색시들이 세를 내고 사는 집들이 몰려 있었다는 내용(신사동)도 있지요.
- 이제 우리는 1970년부터 오늘날까지 50년 넘는 강남 발전의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경부고속도로가 강남에서 출발하거나 도착하기 때문에 물건이 귀하던 시절 강남 에 모든 물건이 모여들고, 또 물건이 모여드니까 회사도 모여들 게 됩니다. 회사가 모여드니까 사람도 모여들고, 사람이 모여드 니까 정부가 자꾸 인프라를 짓고, 인프라가 지어지니까 부동산 값이 더욱더 상승 자극을 받는다고요.
물론 강남의 부동산 투기가 경부고속도로 준공과 연관된 방 식은 조금 더 직접적입니다. 앞에서 명문고 이전도, 아파트지구 지정도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아니라면 어려웠을 거라고 했 죠? 이 영동지구 구획정리는 경부고속도로 준공이 아니면 불가 능한 일이었습니다.
- 고속도로를 준공하려면 정부는 도로를 놓을 땅을 마련해야 해요. 보통 땅 소유자에게 보상금을 주고 땅을 수용하지요. '토지 보상'이라고 하는데, 1960년대에는 정부도 돈이 없었습니다. 그 래서 생각해 낸 기가 막힌 방법이 바로 체비지 (替費地)예요. 특 정구역을 개발할 때 정부 돈이 아니라 원래 토지 보유자의 돈으 로 개발 비용을 마련하는 거죠. 그럼 토지 보유자는 그 돈을 어 디서 만드냐 하면 개발 예정으로 지정된 땅 일부를 팔게 됩니다. 그 땅이 체비지예요. 이해를 돕기 위해 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영동지구에서는 체비지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땅값이 오르면 오를수록 체비지를 비싸게 팔 수 있으므로 체비지를 나눠 가진 서울시와 땅 주인 모두 땅값이 크게 오르기를 바랐어요. 이런 바람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장 현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체비지를 활용해 공공사업 재원을 마련했다면 정말 영리한 방식이라는 칭찬을 받아야 해요.
문제는 당시 정권과 서울시에서 체비지를 이용해 조직적인 투기 행각을 벌였다는 거예요. 1970년 1월, 서울시장은 헬기로 영동지구를 순찰하면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를 대동했 어요. 도시계획과장은 돈이 될 만한 곳을 물색해 청와대 돈 12억 8,000만 원으로 삼성동 일대 약 25만 평을 사들였습니다. 이 땅 은 다음 해 일부만 남기고 되팔아 18억 원의 차익을 얻었는데, 당시 18억 원이면 남산2호터널 공사에 들어간 비용과 맞먹습니 다. 물론 이 돈은 정치자금으로 사용됐지요. 민간인의 투기를 막 을 대책도 없어서 오늘날 강남 일대 투기 과열의 문을 열어젖히기도 했어요.
- 그린벨트가 서울 땅값이랑 집값을 올려줬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린벨트 지정이 서울을 비롯해 그린벨트에 감싸인 도시 땅값을 크게 올리고, 아파트 선호 성향을 강화했다는 연구 결과가 많습니다. 도시 확장을 엄격하게 제한한 상황에서 한정 된 너비에 더 많은 주택을 건설하려면 역시 아파트가 답이죠. 수 요는 끝없이 늘어나는 반면 공급에는 제한선이 분명히 그어져 있으니, 그만큼 가격이 오르게 되고요. 그리고 그린벨트가 도시 근교에 녹지를 유지해주기도 하니 도시를 쾌적하게 만들어 값을 올리기도 한답니다. 서울은 여기에 하나 더 얹었습니다. 바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에요.
- 경부고속도로를 놓으면서 서울 강남을 개발할 때 정부는 민 간 소유 땅을 모두 사들일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체비지라는 개념을 도입했다고 앞에서 말했죠. 체비지가 제 몫을 하려면 체 비지로 지정된 땅을 누군가가 사줘야 합니다. 서울 외곽이 그린 벨트로 묶였기 때문에 어떤 부동산회사든 서울을 더 개발하고 싶다면 체비지를 사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린벨트가 지정된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죠. 도시를 개발하고 싶다면 외곽으로 확장하는 게 아니라 체비지를 사야 하고, 민간 자본 사이에서 체비지 매매가 일어날수록 정부가 개발하고 싶었 던 지역의 땅값은 올라갑니다.
1971년부터 1997년까지 그린벨트로 지정된 지역은 전국 국토 면적의 5.4%인 5,397km2였습니다. 그린벨트는 외환위기 발 생 직후인 1998년 부분 해제됩니다. 특히 수도권을 중심으로 그 린벨트가 풀리기 시작했어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건설산업을 활성화하고, 신도시를 개발해 서울의 인구과밀과 지나친 부동산 가격 상승세를 막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린벨트가 해제 되고 신도시가 들어서면 그 과정에서 토지 수용과 보상이 일어나면서 또 부동산 시장이 커지게 되지요. 2000년대 이후에는 그린벨트가 꾸준히 축소되는 추세입니다. 그린벨트가 해제되면 당연히 개발이 뒤따르고요. 그린벨트가 본의 아니게 대도시 부동산 개발의 중심에 서게 된 거죠.
- 2020년대 들어서면서 전세가 소멸할 거라는 전망이 나왔는 데, 2010년대와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다들 빚을 내서 집 을 사는 바람에 가계 부채가 빠르게 늘어나 우리나라 경제의 건 전성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터져 나간 유동성도 가계 부채의 폭발적 증가에 한 술 얹었어요. 그래 서 정부는 웬만하면 주택 관련 대출을 내주지 않는 쪽으로 방향 을 설정했지요. 그러면 갭투자도 어려워지고 전세를 새로 구하기도 어려워집니다. 대출을 받을 수는 있어도 금리 상승기라 이자가 부담스러우니 차라리 월세를 구하기도 하지요.
어쨌든 전세 수난 시대라는 이야기인데, 앞으로도 월세 거래 비중이 늘어나고 전세 거래 비중은 줄어들겠지만 전세가 단기 간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전세가 사라지려면 현재 전세를 주고 있는 모든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자금을 돌려줘 야 하는데, 전세보증금으로 받은 목돈들 대부분은 갭투자에 활용되느라 어딘가 묶여 있을 테니 말이에요.

- 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기르자(1961~1965)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1962)
내 힘으로 피임하여 자랑스런 부모되자(1970~) 
나 한사람 빠진 통계 나라살림 그르친다(1970~)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1973~) 
하나 낳아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1980~) 
낳을 생각 하기 전에 키울 생각 먼저 하자(1980~)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1983) 
무서운 핵폭발, 더 무서운 인구폭발(1983)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과 달리 1980년대에는 아직 인구 증가에 대한 공포가 사회에 만연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4,000만 명을 넘긴 1983년 7월 신문 보도를 보면 1990년에는 인구가 4,400만 명이 되고 2000년에는 5,000만 명을 넘어서고 2050년 에는 무려 6,100만 명이 되기 때문에, 땅덩어리는 좁고 부존자원 도 없는 처지에 이렇게 과한 인구라니 답답한 마음이 든다는 비 관이 드러나 있기도 해요. 인구 증가 억제를 위해 정부에 강력한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는 논조도 등장합니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는 있으나 가임여성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평균수명이 길어져 "2050년 6,130만 명에 이를 때까지 계속 불어난다는 우울한 예고"라는 문장을 현시점에서 보니 좀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요. 또 다른 보도를 살펴볼게요. 당시 우리나라는 국토 평균 면적 으로 따졌을 때 km2당 404명이 살고 있었고(세계 3위), 산지를 제 외한 가용면적만 따지면 km2당 평균 1,198명으로 인구밀도가 세 계 최고라고 했어요. 높은 인구밀집도에 따라 극심한 생존경쟁 이 벌어지고, 이에 따라 국민의 정신적 불안이 커질 것으로 우려 된다고 했죠. 무척 맞는 말이긴 한데, 2020년 기준 서울의 인구 밀도는 km2당 무려 1만 5,839명이거든요. 부산은 km2당 4,389명, 경기도는 km2당 1,326명이 살고요.
- 산업화가 완료된 국가는 보통 출산율이 높지 않습니다. 자녀 가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노동력이기보다는 투자의 대상이기 때문이에요." 자녀가 일종의 '사치재'가 되는 거죠. 하지만 우리 나라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인구 변화 를 겪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생활 수준을 개선하고 구직난 을 해결하기 위해 산아제한을 실시했고, 고도의 경제발전에 성 공했으나 출산을 장려해야 할 시점에 가족 친화적인 분위기를 도입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도시-농촌 격차와 지방 소멸에 시달 리고 있습니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구조 변화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 훨씬 큰 문제예요. 변 화 속도가 너무 빠르면 사회도 시장도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부 족해 충격이 흡수되지 않습니다.
1980년대까지 출생아 감소에 큰 역할을 한 사회현상이 초혼 연령 상승이었다는 말 기억하세요? 인구 증감은 어쩔 수 없이 큰 부분 가임기 여성에 달렸습니다. 우리나라처럼 혼외출산율이 낮은 국가에서는 여성의 혼인 연령이 높아지면 출산가능인구가 자연스레 줄어듭니다. 가임기 여성의 수가 줄어들면 합계출산율 이 같아도 출생아는 줄어들지요. 그런데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여성 태아를 골라 임신중절을 했기 때문에 이후 가임기 여 성의 모수 자체가 적어졌어요. 게다가 이제는 늦게 결혼하거나 아예 결혼하지 않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편이 사 회적 경쟁에서 유리해진 시대가 와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를 갖게 하려면 가족정책과 사회 분위기 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출산과 육아에 친화적인 상 황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1980년대에 그토록 걱정하던 인구 과밀에 따른 사회적 경쟁 과열은 부존자원 부족과 인구과잉이 아니라 수도권 집중 현상으로 인해 심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 최저임금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 이슈 중 하나였습니다. 노동계와 사회의 요구에도 정부는 최저임금을 부활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임금이 인상되면 저임금에 기 초하고 있는 기업경쟁력이 약해지고 물가가 오른다고 생각했으 니까요.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는 박정희 정부도 임금이 지 나치게 적다는 점을 인정하고 임금 인상 기조를 마련합니다. 그 러나 1980년대 들어 전두환 정권은 다시 강력한 임금통제 정책 을 시행합니다. 결국 최저임금제도는 1986년, 법정근로시간 주 44시간(연장근로 미포함)은 1989년, 이렇게 민주화를 전후해서야 도입됩니다. 비로소 헌법상 기본권으로서 우리 피부에 와닿는 노동권이 마련된 거지요.
- 제도 하나를 두고 국가와 정부, 사람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실 랑이가 이어져 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최저임금에 매달 려 사는 사람이 많기에 최저임금을 올려야만 많은 사람의 생계 가 이어진다는 노동계, 최저임금을 무리하게 올리면 영세 자영 업자들이 한계에 내몰리고 결국 전체 고용이 줄어든다는 기업계 의 입장이 매년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최근 수년간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영향률은 최대 20~25%로 추정됐습니다(최저임금위원회). 쉽게 말해 최저임금보다 적게 받 는 사람이 전체 임금근로자 네다섯 명 중 한 명꼴이라는 뜻이에 요. 최저임금 영향률만 보면 여전히 저임금 흐름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에요.
-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게요.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법률을 보 면 노동이 근로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법에는 임금채권보장법, 근로복지기본법, 고용정책기본법, 최저임금법, 근로기준법 등이 포함되거든요. 결국, 고용주에게 직접 고용되 어 임금을 받고 움직일 때는 근로가 자연스럽고, 돈을 받거나 안 받거나 내가 일을 하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노동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일을 노동이라고 부를지, 근로라고 부를지 결정하는 것이 현실에서 법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혼 자 일하는 영세업체 사장님을 근로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프 로젝트별 단기 계약을 맺은 프리랜서는 어떨까요? 만약 프리랜 서에게 근로성이 인정된다는 법적 판결이 나오면, 그 프리랜서와 계약을 맺은 상대방은 바로 고용주가 되는 셈입니다. 고용주는 근로자에게 법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편의가 많아요. 하지만 근로성 이 인정되지 않는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따지기 시작하니까 머리가 복잡해지죠? 평소에 이런 주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노동법이 제정된 해가 1953년이고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된 해가 1987년, 우리나라에 서 가장 큰 노동조합 두 개 중 하나인 민주노총이 합법노조가 되 고 교원노조법이 제정된 해가 각각 1997년과 1999년이에요. 다 시 말해 이 주제는 민주화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회적인 논 의와 합의 과정을 통해 한 차례 정리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0년대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대체 어디부 터가 근로이고 어디까지가 노동인 건지, 다시 헷갈리게 되어버 렸습니다. 이런 키워드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에요.
공유경제, 긱 이코노미, 라이더, 플랫폼, 온 디맨드, 크리에이터, 사이드잡, N잡러, 부캐.
- 1997년 이후 IMF가 구제금융 제공 조건으로 요구한 구조조 정중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요건 완화, 그리고 민간 직업소 개 사업 및 임시고용소개 사업 허용이 바로 이런 이중구조의 기 원이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통하고 있어요. 위기를 겪으면서 기업은 비용을 절감해야 했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정규직을 대 량 해고합니다. 그런데 정규직이었던 자리에 인력을 다시 채용 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하죠. 정규직 대량 해고와 빠른 회복, 비정규직 대량 채용이 일어난 겁니다. 이런 변화는 주로 영세기 업과 저학력자. 청년·여성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이 런 양극화가 IMF 체제가 도입한 '노동유연화'에서 시작되었다 고 생각하는데, 이건 오해입니다.
- 2010년 IMF 총재가 외환위기 당시 아시아 국가들에게 필요 이상의 고통을 요구한 부분이 있다고 사과했듯이, 외환위기와 IMF 체제가 양극화를 심각하게 악화시키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비정규직 증가나 노동 시장 이중구조의 모습은 외환위기 이전인 1990년대 초중반부터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여기에 따른 기업과 노동조합 사이의 정치적 갈등도 외환위기 직전에 절정을 맞았습니다. 친인척 비리와 함께 김영삼 대통령의 레임덕을 불 러온 사건 중 하나,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사건입니다.
- 외환위기 직전부터 임금 불평등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 극화가 진행되며 더욱 심화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여기 대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경제의 밑그림 자체를 바꿔놓은 사건이 바로 외환위기예요. 당시 우리나라 고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중소기업은 일단 대량 해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는 인건비를 들여 사람을 채용하는 대신 자동화에 투자했습니다.
- 중소기업의 산업구조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 중심의 자본 집약적 산업으로 고도화되면서 이런 추세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새로 채용하는 인력은 1996~1997년의 노동법에 근거해 비정규 직을 늘렸지요. 수출을 주로 하는 대기업들도 적극적으로 자동 화에 투자하고 하도급을 확대하며 공장을 해외로 옮겨 저렴한 노동력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경영 전략을 세웁니다. 이러면 경 제성장을 해도 좋은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아요. 고소득자의 비 율도 줄어들겠죠.
노동법 날치기로 노동계만큼이나 타격을 받은 쪽이 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신한국당이에요. 2011년 12월, 당시 한나라 당 최고위원이던 홍준표는 한나라당의 2011년도 예산안 날치기를 비판하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1996년 12월 26일 아침에 노동법을 기습 처리한 뒤 당시 우리는 승리했다고 양지탕에 가서 축배를 들었는데 이것이 YS 정권 몰 락의 신호탄이 됐고 곧바로 한보 사건이 터지고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50년 보수 정권을 진보에 넘겼다.
김영삼은 당시로부터 약 20년 전인 1979년 YH 여성 노동자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에서 노동자의 편을 들어 군사독재 세력에 맞선 덕분에 정치적 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노동법을 날치기했으니 역풍이 더욱 거셌을지도 모르죠.
- 1970년대 후반에는 국가 주도 경제개발이 한계에 부딪힙니다. 경제도 클 만큼 커져서, 이제는 기업의 개별적인 경쟁력과 개개 인의 소비력도 중요해진 시점이었어요. 수출이 아무리 늘어나도 무역수지 적자 폭이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났어요. 노동력을 제 외한 다른 생산 요소는 모조리 수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재 도 부품도 장비도 수입해서 조립·가공해 수출하니까 수출이 늘 어날수록 수입도 늘어나는 거예요. 기술도 매년 사용료를 주고 빌려 왔으니까요. 이걸 수입대체 공업화와 수출지향 전략이라고 하는데, 환율을 강제로 낮춰놓고 임금도 억누르지 않으면 지속 이 불가능한 경제 전략입니다. 아무리 성공적이라 해도 영원히 지속 가능한 전략은 아니죠.
- 경제 규모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내수도 키우고 기술 독립도 해야 산업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일단 사람들의 생활 수준과 학력 수준이 받쳐줘야 하지 않겠어 요? 197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는 바로 그 시기를 지나가고 있었 던 거예요. 낮은 임금에도 기꺼이 일하러 도시로 이동할 농촌 인 구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2차 오일쇼크까지 터 져 물가가 치솟으며 누적된 불만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부 산과 마산처럼 경공업 공장이 많았던 지역은 중소기업들이 흔들 리면서 민심이 나빠졌어요. 여기에 부동산 가격까지 폭등한지라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은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버립니다. 즉 1978년에 치른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과 무소속이 민 주공화당을 이기고 부산과 경남에서 4석이나 더 가져가죠.
- 1979년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가 됩니다. 이때 앞서도 언급했 던 YH무역 사건이 터지는데요, 이 사건은 YH무역의 부당 행 위에 반발한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면서 시작됐습니다. YH무역은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회사 문을 닫아버리려고 했 어요. 일자리를 잃기 싫었던 사람들은 공장에서 농성을 벌이며 신민당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김영삼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서 YH무역 사람들에게 임시로 지낼 수 있도록 신민당사를 내주기 도 해요.
정부는 이 사건을 강경 진압했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 가 나오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도 폭행을 당해 골절상을 입을 정 도였어요. 파업의 배후라며 의원직마저 박탈당했고요. 다행히 미국 국무부가 나서서 우리나라 정부를 뜯어말리는 바람에 사태가 더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 197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 경제는 외국 차관 도입과 정책금융,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외화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중공업 대기업이 수출경쟁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전에 경공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노동력 제공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받았으면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 기업 사이의 차이는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했고, 커다란 흐름 은 변하지 않았거든요. 1987년 민주화까지는 저임금 장시간 근 로 정책이 지속되었고, 웬만한 노조 활동은 계속 불법이었습니 다. 따라서 노동운동도 노동자 개인이 광범위하게 활동할 수 있 는 산업별 노조에서 업장에 묶이기 쉬운 기업별 노조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어요. 탄압에 버틸 수 있던 노조는 그나마 대 기업 노조뿐이었죠.
민주화 이후, 노조는 근속연수에 따라 직급과 임금이 오르는 연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어요. 기업 노조로서는 조합원의 직업 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었으나, 외부적으로 는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과 격차를 벌리는 방향이었습니다. 모 든 기업이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었다면 괜찮았을 테지만 고른 성장과 분배라는 면에서 우리나라의 장래는 썩 밝지 못했지요. 10년 후인 1997년, 우리는 무리한 차관 도입과 대기업의 양적 부풀리기가 불러온 외환위기를 맞았습니다. 민주화 이후 줄어들 던 임금 불평등은 외환위기로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가 크게 벌어졌습니다. 고용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장할 시간은 너무 나도 짧았어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노동 시 장 이중구조가 탄생한 순간이에요.
노동 시장 이중구조란 노동 시장이 임금이나 고용안정성 등 여러 가지 근로조건에서 큰 차이가 나는 두 개의 세상으로 나뉘 어 있다는 뜻이에요. 노조가 있는 대기업 정규직이 1차 노동 시 장을, 노조가 없을 가능성이 큰 대기업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정 규직, 중소기업 비정규직이 묶여 2차 노동 시장을 이룹니다. 1차 노동시장과 2차 노동 시장 간 이동은 자유롭지 못해요.
노조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실증 연구마다 다르지만 노조의 존재가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런데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은 전체 회사의 10~14% 정도이기 때문에 중소기업 대부분은 노조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다시 말 해 노동자 대부분에게 노조 가입 선택권이 없다는 거예요. 노조 가 있어서 무엇이 어떻게 좋고, 무엇이 얼마나 나쁜지를 따지기 이전에 도사린 문제예요.
-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오후 8시를 기해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습니다. 원래대로 라면 입법권을 가진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논의를 통해 법안 을 상정하고 시행령을 만드는 등의 절차를 거치게 되죠. 하지만 금융실명제는 이전에 논의를 많이 했던 데다, 국민 찬성 여론도 높았거든요.
부정부패가 원체 심하다 보니 금융실명제는 금융개혁을 넘어 사회개혁에 가까웠습니다. 김영삼은 대선 공약에 금융실명제를 포함시킬 만큼 강력한 정책 의지를 갖고 있었어요. 다만 언제, 어떻게 실시할지는 비밀로 하고 있다가 한 달 보름 만에 후다닥 준비해서 실시하도록 합니다. 재무부와 KDI가 대치동 휘문고등 학교 앞 빌딩과 과천 시내 주공아파트에 비밀 작업실까지 마련 해가며 첩보작전 하듯 정책을 설계한 뒷이야기들을 찾아보면 굉장히 재미있어요.
이렇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정기국회가 개최 되기도 전에 긴급명령권을 행사해 빠르게 실시한 덕분에 행정 부며 정치권, 재계에까지 널리 존재하는 반대 세력의 저항을 넘 어설 수 있었다고 해요. 아마 정보가 샜으면 어려웠겠죠. 우리와 여러모로 비슷한 사회구조를 가진 일본만 해도 아직도 비실명제 를 유지하고 있어요. 개혁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거든요.
- 거대한 지하경제의 원인으로 지목돼 왔던 비실명제가 이렇게 사라집니다. 실상을 까보니 비실명거래는 전체 금융 거래자의 단 2%가 저지르던 관행이었어요. 그동안 2%의 목소리가 나머 지 98%보다 컸던 셈입니다. 금융 시장 혼란은 1년 안에 수습됐고 실명거래는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정착됐습니다. 그간 금융전산화가 진전되어 기술적 여건이 뒷받침해 준 것은 덤입니다. 다 만, 우리나라의 금융실명제는 자금세탁 방지 기능이 다소 약해 요. 일단 금융실명제 자체에는 차명 계좌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 습니다. 차명 계좌, 즉 실사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 리거나 도용해 만드는 대포통장은 2014년에야 금지됩니다. 그 전까지는 여러 대기업이 차명 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하 거나 불법적인 거래를 행하며 문제를 일으켰어요. 금융위원회 도 주민등록상 실명으로 개설된 계좌는 차명이라고 해도 금융 실명제에 따른 비실명이 아니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 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만든 통장이라도 일단 그 이름이 누군가의 실명이기만 하면 괜찮았습니다. 그러니까 1993년의 금융실명제 실시는 정말 첫걸음이었을 뿐이죠. 하지만 시작이 반이란 말은 언제나 유효한 것 같아요. 방향성이 분명해지는 거 잖아요.

- 은행이 대출 돌려막기를 하고, 경영 상태를 공시할 때 허위 정 보를 공시하고, 수사를 못하도록 정치권에 로비하는 등 부정부 패가 만연했어요. 그 와중에 대출을 가장 많이 해준 회사들이 제 때 원리금을 갚지 못하게 됐죠. 저축은행은 높은 이자를 받고 건 설사를 위주로 대출을 해줬거든요.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라고, 아파트 한 단지 짓는 프 로젝트, 지하철 몇 구간 건설하는 프로젝트, 한강 다리 하나 만드 는 프로젝트 등 건설 프로젝트에 비싼 이자로 대출을 해주는 거 예요. 그런데 2008년에 세계 금융위기가 터졌잖아요. 그 뒤로 부동산을 포함해 세계 경기가 침체됩니다. 저축은행의 PF도 건설사의 부도로 이자도 제대로 못 받게 되죠. 그렇게 2011년, 원래 안 좋았던 경영 상태와 PF 부실화가 지옥의 이름으로 합체합니다.
사실 이렇게 경영이 부실하면 한국은행이나 금융감독원, 금 융위원회가 감독해서 걸러내야 해요. 현실은 비루했죠. 감독기관들이 분식회계도 못 알아채, 정밀검사를 했다고 하는데도 뭐가 잘못됐는지 잡아내지도 못해. 이 과정에서 금융감독원 출신 검사가 장부조작을 도와주기까지 했다고 해, 뱅크런이 벌어지고 있을 때는 일반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은행 문을 막고 정치인이 나 대주주, 임직원 친인척부터 현금을 빼가게 해. 정부와 기업 의 부정부패가 화려한 꽃놀이를 벌이고 있었던 거죠.

-  계는 제도권 금융에 접근할 수 없는 여성들 의 사금융 조직이었는데, 1960년대까지는 계의 자금 동원력과 정교함이 제도권 은행보다 뛰어났습니다. 당시 산업은행 조사에 의하면 부산 시내 상공업자금의 약 70%가계와 기업용 계인 무 진(無盡)을 통해 조달됐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소기업 다니는 계주 김 대리에게 대기업이 연 리 50%를 줘가면서 사채를 빌려 쓰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 습니다. 이러다 보니 기업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는 전문 사금융 이 생깁니다. 기업 상대 사채업자는 대개 옛날 경찰 간부라든가 일제강점기에 군수나 면장을 지낸 지역 유지라든가 하는 토호인 데, 개발도상국이란 대개 학연·지연·혈연이 시스템을 대신하는 인맥 천국이죠. 금융회사가 돈이 필요해 찾아온 기업에게 아는 기업 사채업자를 연결해 주겠다며 '커미션'을 받고 소개해 줄 정 도가 됩니다. '삼거리투자금융 모 지점이 과장이 소개해 줬다고 하면 그분이 사정 잘 봐주실 거야.' 다른 금융회사뿐 아니라 은 행에서도 벌어지는 일이었어요.
언제나 그렇듯이 사채는 세금을 안 내니까 탈세도 문제지만 일단 이자율이 너무 높아서 사고 나기 쉽습니다. 아무리 기업이 제대로 된 법이 없어 회색 지대에서 민간인들끼리 돈을 주고 받은 걸 정부가 개입해서 마음대로 조정했다는 건, 사실 민주주 의 시장경제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독재 정권이니 까 할 수 있었던 일종의 국가폭력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고된 금액만 당시 통화량의 80%나 됐던, 시중은행이 갖고 있 던 총잔고의 절반이나 되는 금액(5,000억 원 이상 추정)의 고리 사 채를 그냥 내버려 뒀어야 할까요? 우리나라 경제사를 평가할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런 데에 있습니다.
거시적으로 옳은 방향이고 결과적으로 성공했으니까 정당했 던 것 아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죠.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로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었는데, 정부가 갑자기 3년간은 이 자도 원금도 받을 생각 하지 말라는 바람에 생활이 어려워지거나 거리로 나앉은 소액 투자자들이 많았으니까요. 신고된 사채 건수의 약 90%가 300만원 미만 소액 채권자들의 사채였다고 해 요. 사채를 빌려 쓴 기업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으니, 기업 이 서민의 돈을 떼어먹고 달아났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녜요.
- 어쨌든 8.3 사채동결조치는 대기업 연쇄 부도를 막고 떨어지 던 경제성장률을 다시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해 당 조치 이후 저축은행(상호신용금고)에 이어 신용협동조합, 마 을금고 같은 단기금융회사가 생기면서 제도권 금융이 다양해졌고요.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채 시장은 다시금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오일쇼크라는 외부적 충격이 컸기 때문에 말이죠. 은행과 사채업자는 외환위기 직전까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사채업자들은 단자회사(투자금융회사)라는 합법적이 지만 원래 하던 사채업과 다를 바 없는 금융회사를 차립니다. 은 행은 정부로부터 저금리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수익을 내기 위 해 '꺾기'를 하는데, 실제로 내주는 돈을 명목상 대출금보다 적 게 주는 거예요. 1조를 대출받으면 7천억 원만 주고, 실제로 7천 억 원도 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음으로 줍니다. 그 어음을 들고 단자회사로 가면 단자회사에서 수수료를 떼고 현금으로 바 줬습니다. 이 단자회사가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종금사 예요. 이처럼 '꺾기' 과정에서 돈세탁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채업자들이 합법적으로 기업의 돈을 갈취할 수 있었습니다.

- 한진해운의 갑작스러운 파산은 세계적인 물류대란을 불러왔 어요. 세계의 어느 누가 한국 정부가 고작 4,000억 원을 지원해 주지 않아 회사를 그냥 망하게 둘 거라고 예측했겠어요? 그때 한진해운이 운반하던 화물들이 전 세계 어느 항구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유령선처럼 바다를 떠도는 모습이 충격적인 장면으로 남 아 있어요. 배에 실린 화물 주인 수만 2,000명에 달하던 한진 그 리스호는 열흘이나 공해를 맴돌았습니다.
이후 세계의 화물 주인들은 우리나라 선사에 보이콧을 선언 하기도 합니다. 한국 해운, 못 믿겠다는 거죠. 2022년 초에는 중국 등 다른 나라 선사들이 우리나라 물건을 잘 실어주지 않아 수출용 컨테이너가 대부분 취소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해외 영업망은 붕괴했고 한진해운 소유의 알짜배기 물류 인프라는 해 외 글로벌 선사들에 헐값에 팔려나갔어요. 우리나라 해운업계가 몰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진해운 을 왜 파산하도록 놔뒀는지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다 음 정부가 또 다른 국적 선사인 HMM에 수조 원의 공적자금을 지원해 배를 20척이나 주문하면서 죽어가던 산업은 위기를 넘 겼고, 팬데믹 시기 다시금 호황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한진해 운이 파산하기 전의 물동량이나 세계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회복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 기분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생각해 보면 '권력자 마음 대로 내리는 결정'의 위험은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적어도 불확 실성이 최고의 적인 경제 분야에서는 말이에요.

- 막상 누군가가 나에게 수돗물을 정수기 없이, 끓이지 않고 그냥 마시라고 하면 마음이 영 불안하기 때문이에 요. 물론 각 지역마다 수질을 꼼꼼하게 관리하는 기관들이 있지 만, 여전히 내가 마시는 수돗물이 안전하다고 확실하게 믿을 수 는 없습니다.
반면 사 마시는 생수는 비교적 책임 소재가 명확합니다. 품질 관리에 실패하면 소비자가 돈을 주고 사 먹지 않을 테니, 수돗물 보다는 더 엄격하게 관리할 거라는 믿음이 생기죠. 공장이 아무 리 커도 전국의 수돗물을 다 관리하는 것보다는 힘이 덜 들 것 같고요. 어떻게 보면 편의점이나 슈퍼에서 사 마시는 물값은 이 런 책임과 신뢰에 지불하는 비용이랍니다.
- 서로를 믿지 못하는 저신뢰는 문화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 시에 경제적인 맥락을 품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시장거래는 신뢰를 기반으로 이뤄지므로 이렇게 사고가 잦거나 문화적으로 충돌하는 문제가 생기면 비어 있는 신뢰를 채우기 위해 그만큼 의 비용이 더 듭니다. 이렇게 문화와 경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신뢰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사 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죠. '유능 하면 조금의 부정부패와 비리는 괜찮아!'라는 사고방식이 위험 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적으로 엄청난 비용으로 돌아 오거든요. '믿을 수 있는 상품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 치와 가동인력 등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시장에는 명확한 규제가 필요하고, 그 규제를 어길 땐 강력한 처벌이 뒤따라야 합니다. 미래의 더 큰 비용을 막기 위한 현재의 작은 노력인 셈이죠

- 1945년 패전 분위기가 짙어지자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일본 본토로 도망갈 준비를 하며 그간 벌어놓은 돈을 인출하려고 은 행에 달려가죠. 그렇게 한반도 최초의 뱅크런이 일어납니다. 일 본 본토와 조선총독부가 이 뱅크런을 어떻게 해결했냐면, 돈을 사람들이 달라는 만큼 무차별적으로 찍어내서 뿌립니다. 순식 간에 통화량이 두 배 가까이 불어났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런 환경에서 미군이 들어와서 자유로운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 버린 거예요. 1945년 하반기, 서울의 도매 물가는 1944년 대비 2,364% 상승합니다. 놀란 미군정이 얼른 다시 통제경제를 도입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 1945년 패전 분위기가 짙어지자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일본 본토로 도망갈 준비를 하며 그간 벌어놓은 돈을 인출하려고 은 행에 달려가죠. 그렇게 한반도 최초의 뱅크런이 일어납니다. 일 본 본토와 조선총독부가 이 뱅크런을 어떻게 해결했냐면, 돈을 사람들이 달라는 만큼 무차별적으로 찍어내서 뿌립니다. 순식 간에 통화량이 두 배 가까이 불어났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런 환경에서 미군이 들어와서 자유로운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 버린 거예요. 1945년 하반기, 서울의 도매 물가는 1944년 대비 2,364% 상승합니다. 놀란 미군정이 얼른 다시 통제경제를 도입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 1950년대 미군은 한국전쟁을 치르기 위한 기지를 가까운 일본 에 건설하고 군수물자를 대량으로 주문했습니다. 일본의 공장은 미국의 주문을 받아 쉴 새 없이 돌아갔죠. 인플레이션 따위는 미 국에서 직접 받은 달러로 충분히 해결 가능했습니다. 일자리도 어마어마하게 생겨났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때의 부활을 '조선 특수'라고 부르죠. 조선 특수를 통해 일본은 한때 G2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1970~1980년대 버블시대 때만 하더라도 일본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어요.
- 국가 자원을 전쟁 수행에 쓸어 넣는 경제 시스템을 전쟁경제 라고 합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 을 통해 전쟁경제를 이용했어요.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동북아 시아 경제질서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고, 주한미국경제협조처 (USOM)나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를 통해 우리나라 경제에 개입했어요. 이 개입이 느슨해진 것은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 파병한 이후입니다. 미국이 그린 그림은 기본적으로 일본이 기 술과 자재를 제공하면 한국이 단순 가공해서 미국에 수출하는 한·미·일 트라이앵글이었어요. 물론 이승만 정부부터 박정희 정부까지 모두 자립적 공업화를 원한다는 입장이었지만요. 여기 서 시작된 정치·경제적 맥락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 미국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갈등을 싫어하는 것도 GVC 때문 입니다. 일본 기업은 GVC에서 주로 소재·부품·장비를 공급합 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와 함께 일본산 소재·부품·장비를 이용 한 중간재를 생산하죠.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GVC가 깨지면서 글로벌 산업 전반이 삐걱거리게 됩니다. GVC 팀플의 팀장인 미국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갈등이에요. 우리 나라와 일본으로서는 결국 미국의 의향을 따라가게 되겠지만, 미국의 힘이 예전만 못한 모습을 보면 좀 불안하긴 해요.
2020년 이후 세계적인 역병이 글로벌 공급망을 무너트리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GVC는 다시 지역가치사슬 (RVC)과 신뢰가치사슬(TVC)로 분화합니다. 똑같은 가치사슬인 데, 세계적으로 효율성에 기반해 일거리를 나누겠다는 게 아니라 안보를 함께하는 동맹국끼리만 중요한 무역을 하겠다는 이야 기예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일본과 함께 미국의 정치·경제·군 사적 동맹에 참여하는 한 일본과는 완벽하게 화해할 수도, 아주 끝장을 낼 수도 없는 애증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겠지요. 일본 하 나 때문에 모든 경제 시스템을 버리고 미국 주도의 RVC와 TVC 에서 이탈할 순 없잖아요. 오히려 전쟁 억제를 위해서는 GVC에 서 더욱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 현실이 에요.

- 박정희 vs 전두환
정책을 만들어 시행하고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데요, 이 를 정책시차(policy lag)라고 해요. 한국 경제의 골조를 만든 게 박정희 정권 때 인데, 경제 성적이 눈에 띄게 좋았던 건 전두환 정권 때거든요. 박정희를 지지 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 때 중화학공업 수출 중심 산업구조가 정착했으니 까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대로 수출만 순조롭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나 하고 여깁니다. 전두환은 정책시차의 수혜자라는 거죠. 일단 박정희 정권 말기에 체 감할 수 있는 경제 사정이 나빴어요.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고 어떻게든 돈을 빌려와서 공장 세우고 설비 집어넣고 하다 보니 과잉 투자, 과잉 설비 문제가 생겼거든요. 거기다가 오일쇼크까지 일어나서 유가는 치솟고, 물가는 하늘 높 은 줄 모르고.. 정책시차도 있지만 전두환 정권 당시 산업합리화 노력이 있었 다는 점은 짚고 넣어가야 할 거 같아요. 부실기업을 정리하면서 경제성장이 아니라 경제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경제자유화를 추진하기도 했죠. 그 결과 1980년대엔 1970년대보다 대기업들이 정권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알아서 경영하는 면이 있었어요.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는 훨씬 심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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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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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망상

경제 2023. 9. 7. 11:57

- 「요한계시록」의 난해함과 모호함은 이 세상이 언제 어떻게 끝나 는가에 대한 다양한 은유와 해석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에 영향력이 증폭된 측면이 있다. 이에 대해 종교 역사학자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종교인들이 내면에 정립하는 종교적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다 양하다. 이를테면 텍스트의 모호성, 독자의 선택적 기억, 오해의 소지 로 인한 의역 등의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변주되기 때문이다. 하지 만 의미론적인 영향력이 제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시의적절하게 치되는 은유metaphor와 우화allegory의 힘을 따라올 수 없다. 이런 장치에 의해 하나의 문장이 순식간에 전혀 다른 의미로 전환될 수도 있다.
- 인간은 대체로 서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종말론 서사는 그가 운데서도 가장 설득력 있는 축에 속하겠지만, 정확도를 따지자면 하늘의 별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보다 못할 것이다. 예측에 관 한 학문적 연구를 살펴보면 우리 인간이 미래를 내다보는 일에 얼 마나 무능한지를 알게 된다. 또한 무엇인가를 예측하는 데 과거의 사례들에 대한 '평균치'를 추종하는 것만으로도 자의적 서사에 기반 한 추론보다 정확도가 높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분명한 것은 종말 론에 대한 수많은 예측의 정확도가 현재까지 0%라는 사실이다.
종말론의 예측 정확도가 0이라는 사실 앞에서도 우리는 왜 잘 짜 인 서사에 그렇게 마음을 빼앗길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면, 서사에 기반한 추론은 왜 그렇게 오류가 많은 걸까? 심리학자들 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다. 그래서 엄격한 분석보다는 휴리스틱heuristics을 택하기 쉬운데, 설득 력 있는 서사야말로 가장 강력한 휴리스틱이 된다.
- 또 다른 학자들에 따르면, 설득력 있는 허구적 서사는 분석 과정 자체를 무력화한다. 오하이오주립대학교의 두 심리학자 멜라니 그 린Melanie Green과 티머시 브록Timothy Brock은 게릭의 논지를 더욱 확장했 다. 그들은 서사와 이야기가 세련된 논거들보다 훨씬 더 대중의 관 심을 받는 현상에 집중했다.
사람을 매혹하는 것은 광고나 설교, 논설, 게시판 공고문보다는 소설이 나 영화, 드라마, 노래 가사, 신문의 사연, 잡지 기사, TV와 라디오 같은 것들이다. 믿음을 뒤흔드는 서사의 힘은 언제나 옳았고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다.
- 한 신경외과 의사 벤 카슨Ben Carson은 백신의 안전성을 묻는 말에 백 신과 자폐증 간에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점을 명확한 수치를 통해 설명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자폐증이 전염병처럼 퍼져가고 있다"라며, 백신 접종 후 자폐증이 생긴 어느 노동자의 '그 예쁜 아이' 사례를 전했다. 대다수 시청자는 트럼프에게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 한 언론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나 열하는 것보다 어린 소녀의 이야기로 호소하는 편이 월등히 효과적 이라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다. " 당신이 만일 누군가를 설득하고 자 한다면 사실과 수치가 필요한 시스템 2가 아닌, 서사로 호소할 수 있는 시스템 1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 음악은 서사장치보다 더욱 강렬하게 시스템 1을 자극한다. 청각 정보는 내이의 유모세포hair cells를 통해 청각 신경으로 전달된 다음, 중계장치 relays를 통해 하부 뇌간에서 상부 뇌간으로 전달된 후 시상 thalamus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청각 정보는 시스템 1과 시스템 2로 배 분된다.
시상 한 쌍은 뇌간 상단에 놓여 있으면서 전달되는 감각 정보를 뇌로 이송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데, 결정적으로 시스템 1, 특히 측좌핵과 편도체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서 각각 쾌락과 혐오감을 자극한다.  시상은 또한 청각 정보를 시스템 2의 청각 담당 부위로 보내는데, 시스템 2는 헤슬 이랑Heschl's gyrus으로 알려진 측두엽 일부와 그 위의 연합피질 영역 cortical association areas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위 영역cortical들이 활성화되면 우리는 소리를 해석하고 의식으로 인지하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스템 2가 시스템 1에 비해 간접적이고 느린 속 도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시상이 시스템 1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공포스러운 음악 이 귓가에 들려올 때 그 소리가 우리의 의식에 도달하기 전에 측좌 핵이 먼저 활성화되어 척추에 오한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영화에서 악당이 등장하거나 주인공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에 들리기 마련인 어두운 분위기의 단조 음악에 우리의 편도체 는 거의 동시적으로 활성화된다.
따라서 진화론에 따르면 음악은 우리의 감정과 연결되는 고대 의 직통 도로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시스템 2를 거치지 않는 효과 적인 방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그 유용성은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 다. 이를테면 멜로디는 구문론적으로 인간의 복잡한 언어보다 훨씬 일찍부터 발달해왔다. 어머니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아기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전 세계 대부분 종교와 애국 행사에는 음악이 동원된다.

- 인간은 심리학이라는 언어를 통해 패턴을 추구하는 영장류다. 이것은 새로 만들어진 개념이 전혀 아닌데, 1620년경 베이컨은 인 간이 "본래적으로 세상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많은 질서와 규칙 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를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경향이 과학 작가인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가 여기에 '패턴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요아킴의 설득력 있는 수비학 도식 역시 그 예로 볼 수 있다. 
- 진화론의 자연선택설 또한 어떤 현상에서 패턴을 찾아내려는 인 간의 준비된 답변일 수 있다. 먼 옛날 인간은 낯선 '쉿' 소리나 노랗 고 검은 줄무늬가 번쩍이는 등의 심각한 위협 요소들을 알아채지 못했을 때는 치명적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뱀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호랑이의 접근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과도하게 긴장해 야 하지만, 이런 수고는 뱀에게 물리거나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에 비하면 감수할 만한 기회비용이다. 따라서 진화라는 것은 인간에게뿐 아니라 신경계가 기능하는 모든 유기체에게서 현상을 과도하게 해석하는 쪽으로 발전돼왔다. 

- 16~17세기 무렵 북유럽인들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강렬한 종 말론 서사가 제공하는 환희의 세상으로 도피하여 위안받고자 했다. 슈바벤 농민전쟁의 경우, 토마스 뮌처의 묵시론 신학이 초기에는 세속적인 포퓰리즘 봉기에 불과했지만 결국 재앙으로 마감됐다. 이 에 반해 재세례파의 광기와 제5왕정파의 반란은 처음부터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종말론 신앙이 압도했다.
18세기가 시작되자 유럽의 나라들은 하느님이 아닌 재물의 신 맘몬에게서 구원을 찾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기존의 종교 문제와 이후의 경제 사건들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벌어진 일들처럼 보 이지만, 사실상 동일한 사회·심리적 기제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기제를 추동하는 세 가지 공통적인 양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누구 도 저항할 수 없는 서사장치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유추 하여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핵 심 인물을 추종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맹신이다. 마지막이자 무 엇보다 중요한 셋째 요인은 타인을 모방하려는 인간의 맹목적이고 도자기 파괴적인 성향이다.

- 경제사학자들은 그에게 다소 우호적인 평가를 했다. 로의 시대 에는 금이나 은에 일대일로 연동되지 않는 화폐로 경제를 운영한다 는 생각이 너무나 혁명적이었고, 심지어 터무니없는 발상으로 여겨 졌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토지나 사람들의 보석 함에서 나오는 귀금속의 양에 기초하여 통화 공급을 결정하는 것 이 훨씬 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금본위제 연구 의 권위자인 경제사학자 배리 아이컨그린Barry Eichengreen은 여러 국가 가운데 금화나 은화 같은 금속 주화를 포기한 순서대로 대공황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38 본질적으로 우리는 팅커벨 Tinker Bell 경제 속에 살고 있다. 사람들 모두가 종이 화폐에 대한 환상을 굳건 히 품고 있기 때문에 현실 경제가 원활히 작동한다. 마치 헤라클레 스의 기둥 너머 지중해에서 항해의 끝을 맞이한 고대 선원들처럼 로의 계획은 (대중의 미망이 합세하고) 경험의 부족이라는 약점을 드러내며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물론 이 항로가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밝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그들은 지역의 기후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북극에서는 카약을 만들고 아마존에서는 입으로 불어 발사하는 바람을 만들면서). 그러려면 홍적세 Pleistocene 시기의 불규칙적으로 급변하는 환경에 대한 뛰어난 적응 능력 이 필요했는데,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에는 필연적으 로 하나의 조건이 요구된다. 빠른 사회적 학습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기만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그덕 에 인간은 저렴한 기회비용으로 카약이나 바람과 같은 놀라운 물건 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누구나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전통이 기득권적인 탐욕으로 바뀌면, 그 집단은 영속적인 부적응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 지난 5만 년 정도의 시간 동안 인류는 고향인 아프리카에서 말 그대로 지구 곳곳으로, 북극해안에서 광활한 태평양 중앙의 외딴 섬으로까지 번성해 나아갔다. 후기 홍적세를 살던 인간이 북극지방 에서 마젤란해협으로 이동하는 동안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모방할 줄 아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 도, 석기 시대를 지나면서 인류가 적응하여 취득한 많은 부분이 오늘날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섭취하는 영양소인 지방과 설탕은 인체의 에너지가 되고 생명 유지에 필수 적인 성분일 뿐 아니라 구하기도 몹시 힘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는 값싼 정크푸드의 주요 성분이며, 지나치게 섭취하면 건강을 잃 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모방을 최우선으로 하던 고대인의 성향 은 이제 과할 경우 부적응자로 낙인찍히는 취향일 수 있으며, 더 나 아가 맥케이의 유명한 말처럼 "대중의 거대한 환각이자 광기"를 불러일으기도 한다.

- 사업가이자 의회 의원이었던 제임스 모리슨 James Morrison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은밀한 탐욕의 독이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 번졌다. 고관대작의 화려한 집무실에 앉아 있는 남자부터 보잘것없는 오두막에서 칩거하는 빈민 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감염자였다. 공작부인은 증권 잉크로 손이 얼룩 졌고 늙은 하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주가를 확인했다. 결혼을 앞둔 젊은 숙녀들은 초청자 목록이나 함께 기뻐할 친족 목록을 나누기보다 황소 와 곰(주가의 등락을 뜻함옮긴이)의 근황을 궁금해했다. 의상 전문가들 은 클럽에 모이기보다 주식 중개인들과 더 자주 어울렸다. 무역을 하던 사업가들은 주식에 전념하기 위해 사업을 멀리했으나, 결국은 사업과 주식 모두에서 멀어지게 됐다. 
- 철도회사들 가운데 셋 중 둘은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안겼고, 그럼에도 산업의 필수 기반시설을 담당했던 사업장들은 수익성과 관계없이 운영을 계속해야 했다. 1838년에서 1848년 사이에 선로 의 총길이는 10배나 증가했으며, 당시 부설한 영국의 철도들은 지 금 운행되는 노선의 대략적인 근간을 이뤘다. 그해의 선로 총길이 가 2배로 늘기까지는 100년이나 지나야 했다.
불운했던 철도회사 투자자들 덕에 영국은 세계 최초의 대규모 고 속 운송 시스템이라는 소중한 공공재를 가질 수 있게 됐다. 19세기 초 이전에 영국의 1인당 GDP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여러 선진국이 매년 약 2%씩 성장했다(한 세 대에 2배 정도). 이런 급성장의 동력은 당연히 증기로 구동되어 효율 이 극대화된 육상과 해상 운송 시스템이었다. 53 하지만 투자자들의 손실을 발판으로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될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 숫자 신비주의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패턴에 지나치게 의지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본디 특성상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서사 장치를 삽입하고, 날짜를 예단하는 등의 행위가 쉽게 허용되기 때 문에 열심히 공부하는 종말론주의자들은 수많은 경우의 수를 들어 종말의 시간을 예측하는 미망에 빠져들게 된다. 1843년을 종말론 이 실현되는 해로 규정하면서 성서의 숫자 신비주의를 활용한 사람 이 밀러가 처음은 아니었다. 1946년에 르로이 에드윈 프룸 Leroy Edwin Froom이라는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목사가 선조들의 예언적 신 앙The Prophetic Faith of our Fathers」이라는 네 권짜리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종말의 때를 계산한 사례들이 소개되는데 그 가운데 열두 번째 사례로 1843년을 지목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윌리엄 밀러와 같이 극단적으로 숫자 신비주의를 맹신하지는 않았다. 
숫자 신비주의는 인간이 일단 하나의 가설이나 신념 체계에 집 중하면, 그 가설에 부합하는 데이터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부합하지 않는 데이터는 회피한다는 또 다른 유명한 심리학 현상인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의 오류에 빠져들게 한다.

- 인간은 가장 행복할 때 가장 쉽게 속는다. 많은 돈을 벌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실제로 돈을 잘 벌고 있을 때, 누구나 돈을 잘 벌고 있다고 생각할 때, 바로 그때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기를 치는 이들에게 행복한 기회가 찾아온다. 그때 사람들은 세상 모든 것을 믿고 싶어 한다. (월터 배젓)

- 하이먼 민스키 Hyman Minsky는 학자들이 금융 버블을 논할 때 가장 많 이 거론하는 미국 경제학자의 이름이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큰 주목을 받았던 인물로,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불안 정하다고 믿었던 장발의 우상파괴주의자였으며 경제학 연구자 카 를 마르크스보다 많이 연구됐다(현대적이고 대중적인 21세기의 카를 마르 크스로 불릴 만하다). 그는 20세기의 어떤 학자보다 깊이 경제의 버블 과 붕괴 이면에 있는 인간의 병리생리학pathophysiology을 연구하고 집 필 활동을 했는데, 버블의 붕괴에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고 주 장했다. 첫째는 금리 인하로 인한 신용의 확대(완화)이고, 둘째는 유 망한 신기술의 출현이다.
- 1929년까지 선진국들은 주기적인 금융 격변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와 같이 버블이 형성되고 붕괴되는 현상을 질병의 발생과 치유 과 정에 대입하여 이해한다면, 역사가는 물론이고 일반인이 경제 현상 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의사들은 질병을 이해하기 위 해 대체로 세 가지 방식으로 관찰한다. 첫째는 질병 기저의 생화학 과 생리학을 들여다보는 병리생리학이다. 둘째는 증상을 보이는 신 체 부위에 대한 해부학이며, 셋째는 환자가 느끼고 의사가 옆에서 관찰하는 증상과 예후다.
-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버블의 형성과 붕괴를 이해할 수 있다. 예 를 들어 병리생리학은 변덕스러운 인간의 심리와 은행의 불안정한 신용 공급 시스템을 점검하는 일이고, 해부학은 4장에서 언급했듯 이 4P로 요약되는 사업가 Promoters. 대중Public.정치인 Politicians. 언론Press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증상과 예후는 적은 노력으 로 큰 부를 일구려는 욕망이 보편화되는 현상과 사업가의 오만함이 극심해지고 이들에 대한 대중의 추종이 심화되는 상황을 주시하는 일이다
- 민스키가 명시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버블이 형성되기 위 해서는 변위 요인과 신용 확대 외에도 두 가지 조건이 더 충족되어 야 한다는 사실을 그의 독자들이라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첫째 는 과거의 호황과 불황에 대한 기억의 상실이고, 둘째는 상식적이고도 신중한 투자가치 평가법의 외면이다.
기억상실증은 불안정성 가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금융 위기 의 여파로 고통스러운 손실의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 은행과 투자 자들은 위험을 회피한다. 은행은 가장 안전한 대출만 실행할 것이 고, 투자자는 주식을 매수하기를 꺼릴 것이다. 시장이 서서히 회복 되고 불쾌한 기억이 점차 사라짐에 따라 시장 참가자들은 안전자산 에서 위험자산으로 자금을 옮긴다. 그리고 불안정성의 주기가 다시 시작된다. 그럴듯한 서사가 횡행하고 재정 건전성이 무시될 때도 금융 광기가 고개를 치켜드는 시기다. 배당은 고사하고 이익도 내 지 못하는 기업의 가치를 계산하는 일처럼 난해하고 복잡한 작업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더 간단한 분석법을 택하여 우회하곤 한다. 
- 버블이 붕괴하는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돈이 가진 탄력성을 조금만 이해하면 된다. 지름이 약 3센티미터이고 길이가 수십 미터 인 고무줄을 상상해보자. 고무줄 주위에 수백 명이 둘러서 있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그들 중 몇십 명이 달려들어 고무줄을 늘이 기 시작했다고 가정하자. 누군가가 나서서 고무줄을 함께 당기는 사람에게 현금을 지급하겠다고 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일에 뛰어들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고무줄이 영원히 늘어나리라고 믿겠지만, 많은 이들은 머지않아 줄이 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후자 의 사람들은 고무줄의 상태가 위태로워 보이면 대열에서 이탈할 준 비가 되어 있고,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일부가 대열을 이탈하면 남아 있는 사 람들의 부담이 가중된다. 부담이 정점에 달하면 사람들은 서둘러 손을 털고 나간다. 고무줄은 원래의 길이로 수축할 뿐 아니라 접힌 용수철처럼 주름이 생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주름진 고무줄을 늘이는 일이 매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게임은 다시 시작 된다.

- 내연기관, 비행기, 자동차, 라디오, 전력의 상용화 등 다섯 가지 변위 요인은 광란의 1920년대 Roaring Twenties(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괴된 유럽을 대신하여 전후 특수를 누리던 미국의 호황기를 말함옮긴이)를 촉진했 다. 여기에 헨리 포드Henry Ford의 대량생산 기술이 가세했고, 근로 현 장에 스톱워치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등 19세기 후반부 터 '효율성 운동'을 주도했던 기계 엔지니어 프레더릭 원즐로 테일 러 Frederick Winslow Taylor의 영향도 지대했다. 1922년에서 1927년 사이 에 미국 근로자의 생산량은 매년 3.5%씩 증가하여 회사 주주들에게 큰 수익을 선사했다. 물론 회사 직원들의 노동 만족도가 높을 수 는 없었다. 20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테일러주의 Taylorism라는 단어가 만들어져 영어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빠르게 성장하던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 레닌과 스탈린을 추종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테일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1920년대에는 민스키의 두 가지 버블 형성 요건 가운데 나머지 하 나인 신용 확대가 일어났다. 민스키는 변위 요인이 기술적인 방식 뿐 아니라 재정적인 방식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1920년 대에는 레버리지 방식도 발전을 거듭했던 시기여서 자금을 융통하 는 데 중개인의 대출은 물론 투자신탁과 지주회사들의 자금 운용이 손쉬워졌다. 이 모든 것이 새롭고도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되어 주 식시장에 자금이 넘쳐흐르게 했으며,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이 마르 지 않는 부가 샘솟는 듯한 투자시장으로 모여들게 했다.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금융계는 늘 새로 발명된 바퀴에 환호를 보낸다. 그 바퀴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
- 라디오와 자동차, 비행기가 발전을 거듭하던 1920년대에 사람 들은 급변하는 기술 환경에서 더 이상 기존의 정적인 밸류에이션 으로 기업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세기 의 위대한 투자자 존 템플턴John Templeton은 ““이번에는 다르다This time it's different'는 영어에서 가장 비싼 문장이다"라고 했다. *
당시의 상황에 대해 벤저민 그레이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어떤 공공기업의 주식이 호황 이전 기준인 평균 수익의 10배가 아 니라 최대 평가 수익의 35배에 거래가 됐다면, 사람들은 주가가 높다고 생각하기보다 가치의 기준이 높아졌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 모든 상한선이 사라진 것인데, 그것은 주식을 팔 수 있는 가격의 상한 선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그 주식을 팔 필요가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가치의 상한선이 사라진 것이다. . 이런 원칙에 사람들이 수긍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됐다. 
1929년에 이르기까지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휴리스틱들, 이를테 면 당대의 놀라운 신기술이라는 돌발성, 여러 해 동안 주가 상승이 지속돼왔다는 근시간성, 신용의 확장에서 비롯된 가용성 등이 주식 가격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이성적인 사고를 압도해버리고 말았다.
경제학자 맥스 윙클러Max Winkler는 이런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규 정했는데, 1929년 주식시장의 붕괴를 목격한 뒤 당시 횡행하던 배당할인 모델에 대해 미래가치를 할인했을 뿐 아니라 내세의 가치도 할인했다고 비꼬았다.
- 국가 지도자들은 경기 상승기에는 투기적 과잉에 대한 언급을 자 제하고, 경기가 하강할 때는 공포나 패닉이라는 표현의 사용을 극 도로 꺼린다. 192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는 1928년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다음 과 같이 엄숙하게 이야기했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빈곤에 대한 승리의 순간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난한 가정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 경제가 추락하는 시점에도 후버와 재무부 장관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은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건전하다'며 국민을 안심시켰다. 후버는 또한 경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오늘날 전 세계 지도자들이 참고할 표준 대응책을 보여줬다. 국가의 정치·금융·산업계 지도자 들이 백악관으로 소집되어 회의를 하기도 했는데, 존 케네스 갤브 레이스는 이를 '할일 없는 회의'라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회의"였기 때문이다.

- 세대주의 종말론이 도덕률처럼 확산된 사회는 그에 상응하는 사 회적 비용을 지출해야만 한다.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 Richard Hofstadter가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양상The Paranoid Style in American Politics』을 펴낸 이후로 음모론에 취약한 미국의 경향성이 잘 설명되고 있다. 정치과학을 연구하는 J. 에릭 올리버J. Eric Oliver와 토머스 우드 Wood는 최근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음모론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믿음을 제시했다. 첫째 는 세상이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믿음이고, 둘째는 인간을 선 과악 사이에서 투쟁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마니교적 복음주의 또는 세대주의적 믿음이다. 우리와 같은 편에 선 사람들은 선과 빛의 존재이며,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이들은 악마와 동맹을 맺은 것이라 는 믿음이 그것이다. 올리버와 우드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주 로 사탄과 하느님에 대한 세대주의적 이야기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 는 반면,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9·11 음모 이론처럼 보이지 않는 세 속 권력에 대한 이야기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인간은 사실과 수치보다 서사에 무의식적으로 빠져들 뿐 아니라,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타인을 도덕적으로 정죄하는 유일한 유 인원이다. 그래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타인을 악마화하기 위해 우스 꽝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신학을 만들어 마니교의 야수로 군림하기도 한다. 
- 진화심리학자들은 마니교적 사고방식은 고대의 초기 수렵채집 사 회에서 부족의 결속을 위해 발현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가정했다. 원시 부족은 같은 부족의 구성원끼리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부족을 무자비하게 배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이처럼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집단 성groupishness'이라고 불렀는데, 내집단은 신의 은총하에 다양한 미덕 을 구현하는 데 비해 외집단은 악의 세력(일신교에서의 악마)과 동맹 을 맺고 악을 유포하고 있다는 세계관이다.

- 1980년대 종말론 신앙을 가졌던 어느 미국 대통령은 그 신념을 버렸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휘하 부대의 지휘 체계에 뿌려져 조직 의 상단으로까지 줄기를 내뻗고 있다. 데니스 마이클 로한이 정신 병을 감추고 있다가 템플마운트에 등유 한 병을 뿌려 방화를 시도 한 것처럼, 예를 들어 미국이나 러시아, 이스라엘 또는 파키스탄의 고위 장교가 불현듯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누른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 1929~1932년의 약세장은 개인과 기관 투자자들의 부를 지나치리만큼 가혹하게 갉아먹었고 국가의 정체성마저 뒤흔들었다. 그래서 이후 수십 년 동안 주식은 신중한 사람들이라면 피해야 할 투자 대상으로 간주됐다. 예를 들 면 1945년 말에 신뢰할 만한 통계가 시작된 첫 사례로, 자산 대부분 을 저축으로 보유하고 있는 개인들의 평균 주식 투자 금액은 30센 트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매우 드문 사례인 대형 운용사의 기업연 금펀드였다.
미국인의 약 10%만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1929~1932년의 약세장에 손실을 봤고 뒤를 이은 대공황으로 더욱 많은 사람이 피 해를 봤다. 일정 연령의 대부분 미국인은 가족 전체가 우울증을 앓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이 사례 제공자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먹다 남은 음식이 생기면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라도 싸서 가져오는 증상이 생겼다고 한다). 수백만 명의 미국인에게 잔혹했던 1929~1932년의 생생한 기억은 한 세대가 넘도록 주식의 매력을 떨어뜨렸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도 주식 버블이 발생했는데, 이때의 버블은 수십 년 전 물리학자 윌리엄 쇼클리 William Shockley가 이 끄는 벨연구소Bell Labs 연구팀이 반도체 트랜지스터를 발명하면서 시 작됐다. 장치들이 더욱 소형화되고 성능도 개선되면서 투자의 열풍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한세대 후에 '닷컴dot-com'을 붙이는 경우에 그랬듯이, 1959년 당시 에는 회사 이름에 '트로닉스tronics'만 붙이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주 가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축음기와 LP를 제작하는 아메리칸 뮤지 컬 길드 American Musical Guild라는 회사는 상장하면서 사명을 스페이스톤 Space-Tone으로 바꿨는데, 주가가 7배로 급등했다. 이 시대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회사 이름들을 살펴보면 '소닉스sonics'로 끝나는 여러 회 사를 비롯해 아스트론Astron, 벌카트론vulcatron 등이 있으며, 가장 인상 적인 이름으로는 파워트론 울트라소닉스Powertron Ultrasonics가 있다.

- 투자은행들은 지분을 다량으로 보유한 내부자들을 선호했기에 더 많은 대중이 구매할 수 없도록 금액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다. 이런 과정에서 대중의 광적인 지지가 한풀 꺾였고, 1962년에 이르 자 지지자들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이전의 모든 버블 형성기 때 그 랬던 것처럼 시장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트로닉스 열풍은 주식시장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으며, 당시 주식 을 보유한 미국인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에 강 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10 1990년대에 평균적인 미국 시민은 사회 전반에 거대한 충격을 줬던 마지막 주식 버블이 발발하고 2세 대가 지난 후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또 다른 버블이 도래 했을 때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이 힘없는 세 그룹 뿐이었다. 첫째는 과거의 버블을 직접 경험한 90세 이상의 투자자 들, 둘째는 경제사학자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찰스 맥케이의 「대중의 미망과 광기』 앞부분 세 장을 읽고 그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들이다.

-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부 분의 인간은 정신적으로 게으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최소한 심 리학에서 말하는 '인지적 구두쇠' 본능에 따라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설명한 휴리스틱과 같은 분석적 지름길을 직관적으로 찾아내려 한 다. 엄격한 합리성이 요구되는 고된 인지적 추론은 전혀 유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을 회피한다. 한 학자의 말에 따 르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이 실패한 경우에 비로소 두뇌를 사용한 다. 물론 그런 경우에조차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

- 닷컴 시대는 금융 버블의 모든 고전적인 징후와 증상들을 보여줬 다. 첫째, 일상적인 대화에 주식 이야기만 등장한다. 둘째, 안정적 인 직업을 버리고 전업 투자자로 나서는 사람이 많아진다. 셋째, 상 승론자들이 하락론자들을 비난하고 조롱한다. 넷째, 극단적인 예측이 난무한다.
시장의 강세와 약세가 지금처럼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실시간 생중계되며 관찰되고 분석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런 투자 열기가 실리콘 밸리는 물론 월스트리트, 포트리의 CNBC 스튜디오 등 테크 산업의 신경 집합소를 강타하긴 했지만, 일상의 대화마저 집 어삼킨 일반 대중의 투자 열기는 시장과 사교 모임과 투자 모임 등 지에서 가장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매사추세츠주 케이프 코드에 있는 노동자들의 집합소인 어느 이 발소에서도 이와 같은 불행한 사건이 여지없이 벌어졌다. 평상시 이런 장소에서는 주로 스포츠와 정치 관련 논박이 벌어지며, 그곳 에 텔레비전이라도 있으면 야구나 축구, 농구 경기의 응원전이 벌 어지곤 한다. 하지만 세기가 바뀌던 20여 년 전은 평범한 시기가 아 니었고, 빌 플린Bill Flynn이 소유하고 운영하던 매사추세츠주 데니스 시빌의 이발소Bill's Barber Shop는 평범한 이발소가 아니게 됐다.
- 철도 버블부터 1920년대 대공황을 거쳐 인터넷 버블에 이르기까 지는 일정한 논리의 흐름이 있었다. 투자 열풍을 추동하는 동력을 제공한 것이 당대 최고의 신기술이었다는 점이다. 허드슨은 철도를 이용해 사무실과 건설 현장, 주주회의, 의회 등을 빠르게 오갈 수 있 었다. 1920년대 버블 형성기의 투자자들은 원거리 운항선에서조차 무선 선상 거래 신호로 발행되는 티커테이프ticker tape (실시간 거래가를 알려주던 종이 테이프-옮긴이)를 활용해 주식을 거래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인터넷 대화방과 온라인 거래는 인터넷을 통해 거래되는 인터넷 기업들의 주식에 더욱 열광하게 했다.

- 우리는 석기 시대가 끝난 후 약 300세대밖에 거치지 않았으며 여 전히 고대의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 300세대는 분석적 인지 능력을 더 발전시킬 만큼 충분히 길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사 개선된 인지 능력을 갖춘다고 해도 앞으로 도래할 더욱 인간적인 후기 산업사회에서 그것이 현실 생활에 도움이 될지 심히 의심스럽 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석기 시대의 정신을 장착한 채 우주 항공시 대를 살아가는, 시대의 부적응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우리가 하는 행동 대부분은 매우 오래된 뿌리에서 비롯되 는데, 식욕을 조절하는 유전자와 같이 본능을 관장하는 수억 년 된 유전자들은 상당수가 지렁이류와 공유된다. 진화적 필요에 따라 선호됐던 에너지 가득한 설탕과 지방은 모든 척추동물에게 필요한 요소들이지만, 값싼 설탕과 지방질이 넘쳐나는 현대 세계에서는 전 적으로 부적응을 대표하는 요소가 됐다.
「대중의 미망과 광기의 관점에서 모방은 아마도 인간의 고착된 진화적 특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인간은 섬세한 인 지 능력과 언어 능력 외에도 북극에서 카약을 만들고, 대평원에서 들소를 사냥하고, 아마존 분지에서 바람총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만들고, 타인의 기술을 빠르게 학습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리 고 이런 능력 덕분에 행성 대부분의 지역에서 큰 무리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방에 대한 인간의 본능은 부적응 행위나 종종 혐오스러운 행동에 대해서도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 불행한 경향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실험은 아마도 스탠리 밀그램 Stanley Milgram의 '복종 실험'과 필립 짐바르도 Philip Zimbardo의 '스탠 퍼드 감옥 실험'일 것이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피험자(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오답을 말할 경우 실험자들의 권위에 설득되어 종종 치명 적 충격이 될 수 있는 전기충격을 가했다. 이와 비슷하게 스탠퍼드 감옥 실험에서는 피험자들에게 죄수와 간수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 러자 불과 며칠 만에 두 집단은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할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모방하고 내면화했다.

- 두 실험은 모두 극심한 비판을 받아야 했지만, 도덕적 양심과 판 단력이 권위에 의해 무력화되는 현상은 이론적이고 실험적인 범주 내에서만 논의될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는 일정한 통제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행동하던 이들의 일탈 행동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0년대의 엔론 스캔들은 비합리성과 도덕적 부패 가 얼마나 강력하게 전염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케네스 레이, 제 프리 스킬링, 앤드루 패스토 중에서 누구도 자신을 비윤리적이거 나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그들이 미국 경제에 혁명을 일으키는 훌륭하고 지적인 선각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의 실험에서 고의로 선 길이를 잘못 측정하는 이들 사이에 배치된 피험자처럼, 엔론 직원들도 거의 한목소리로 잘못된 주장을 하는 동료와 언론인들 사이에서 바른 판 단을 하지 못했다

- 수학적으로 생각해볼 때 인간이 정말로 합리적이라면 '베이지안 추론 Bayesian Inference'에 따라 현상에 대한 의견을 정립할 것이다. 이 추 론법은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가 만든 분석 법으로, 주어진 사실들을 대입하여 예측을 정교히 하고자 마련됐다.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인이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50%라고 가 정할 때, 베이지안 추론에 따르면 새롭고 강력한 무죄의 증거가 나 타나는 경우 유죄의 확률은 50% 미만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 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어떤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하면 서 그와 반대되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더는 자신의 오류 를 부인할 수 없는 때가 되어도, 도로시 마틴의 UFO 망상처럼, 오히 려 믿음의 강도를 한층 더 끌어올리는 악수를 두곤 한다. 인간은 합 리적인 베이지안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은 신념 을 서로에게 유포하는 '반-베이지안'이 되기도 한다.

- 맥케이는 또한 의심하기 힘들 정도의 정교한 서사는 마치 기하급 수적으로 확산되어 접촉자를 무차별적으로 감염시키는 전염성 병 원체인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슈퍼 전파자처럼 작용할 수 있다는 사 실도 이해했을 것이다. 특히 선 길이를 구분하는 애시의 실험이 보 여주듯 잘못된 믿음이 주위에 충만하면 임계 질량을 얻게 된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이 같은 신념을 가졌을 때 그것을 공유할 가 능성이 크며, 또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유포하곤 한다. 이 로 인해 분석적 비상 제동장치가 없는 악순환의 질주가 시작된다.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망상의 전염이 계속되는 상황 에서 폭주하는 광신도들은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 전까지 추진 력을 잃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맥케이는 인간의 삶이 마니교적으로 선과 악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흑백 투쟁이라고 여러 차례 주장했다. 다윈의 『종의기원이 한 세대 일찍 출간됐다면 그도 종의 투쟁을 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진화론 꾸러미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믿 음 역시 대상을 재빨리 모방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여 투쟁하는 가운 데서도 생존의 가능성을 높였으며, 이를 통해 살아남은 이들은 스 스로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믿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맥케이의 책은 물론 이 책에서도 자신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은 지옥행을 예약한 것이며 심지어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고 믿는 이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 IS는 이 마니교적 망상의 퍼레이드에서 가장 최근에 등장했을 뿐 이다. 한동안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빈곤과 전쟁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고 기분 좋은 이야기를 설파했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정의의 편이 되어 흑백 투쟁에 참여해왔으며, 알라께서는 곧 악의 본질을 구현하는 폭압자들에 대한 최종적이고 영원한 승리를 그들에게 가져다주신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21세기 이슬람 종말론은 16세기 존 보켈슨과 20 세기할 린지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린지의 후기 공산주의 대적 자들, 예컨대 사회주의자, 사탄주의자, 점성가들은 합스부르크제국이나 이스라 엘과 서방 군대의 힘에 비하면 정말로 약한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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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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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에는 상위 3%의 지층이 약 64%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1955년에는 상위 6%의 지주층이 소유한 토지가 18% 로 줄어들었다. 반대로 이 기간에 소작농의 비율은 49%에서 7% 로 감소했다. 15 이렇게 자작농이 늘어나면 사회가 안정되기 마 련이다. 왜냐하면 '지킬 것이 생긴' 사람들은 재산권을 위협하는 이에 대해 저항할 것이며, 더 나아가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 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 4월, 주한 미국 대사 존 무John Muccio는 농민이 더는 사회적 불만 계층이 아니라 "사회 안정을 가장 바라는 계층"이라고 분석했다. 16 6.25 남침 이후 북한의 기대와 달리 남한 지역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벌어지지 않은 데에는 농지 개혁이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물론 한국의 농지 개혁이 긍정적인 면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농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의 권력 독점이 심화되었다. 24 이승만 대통령은 오랜 기간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외면을 받았기에 미국 정부 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미군정 출신의 관료를 집권하자마자 몰 아냈다. 이후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사사오입 개헌에 이어 3.15 부 정 선거까지 저지르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
그러나 농지 개혁으로 육성된 자영농의 자녀들은 이승만 정부의 독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4.19 혁명 당시 시위대의 주력은 중학생과 고등학생 등 이른바 광복 세대(혹은 해방둥이)였는데, 이들은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길러진 세대였기에 이승만의 독 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나아가 많은 고등 교육 기관이 생기며 취 업난이 심각해진 것도 혁명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약 10년 동안 대학생 수가 3만 5,000명에서 14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이들에게 제공된 일자리는 한정적이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불만이 높아졌다.
물론 이들 광복 세대는 이후 등장하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으로 변신하게 되지만, 이로 인해 박정희 정부는 끊임없이 경제 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압박도 함께 느끼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적산 기업을 민간에게 매각하는 법(귀속 재산 처리법)이 1949 년 12월에 제정되었지만, 곧바로 한국 전쟁이 터져 본격적인 매 각은 한국 전쟁 이후로 미뤄졌다. 1954년부터 이승만 정부는 군 수 물자 공급을 늘리고 재정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적극적인 매 각에 나섰다. 1958년 5월까지 총 263,774건의 적산이 매각되어 90% 이상 처리가 완료되었다.27 귀속 사업체는 생산 시설이 좋 은 대규모 기업이 대부분이었고, 대한석탄공사와 대한조선공사 등 일부 기업만 매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직후에 적산 매각이 이뤄졌기에 매우 저렴 하게 매각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조선방직 부산 공장의 경우, 정부가 평가한 가격은 35억 원이었으나 실제 매각액은 22억 원에 불과하였다.  삼척 시멘트 공장의 경우 감정가가 7억 원임에 도 판매가는 4억 5,000만 원에 그쳤다. 귀속 사업체의 매각 가격 은 책정 가격에 비해 평균 62% 수준이었다. 더 나아가 15년 동 안 분할 납부하게 되어 있었고, 이마저도 은행의 특혜 대출을 받 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흥은행 등 당시 5대 시중 은행의 대출에서 1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953년 1~5% 수준에서 1960년 10~30% 수준으로 높아졌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 특히 한국 전쟁 이후 물가가 수십 배 상승하는 동안 15년에 걸쳐 매각 대금을 갚았기에, 귀속 재산을 매수한 이들은 엄청난 차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적산 매각은 정경 유착과 부 패의 온상으로 여론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적산 매각이 한국 경제의 성장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이때를 고비로 제조업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기 때 문이다. 제일 먼저 성장 궤도에 올라탄 것은 이른바 '3백 산업(밀 가루, 설탕, 방직)'으로 식료품은 연 15.7%, 방직은 10.9%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했다.

- 결국 5.16 쿠데타(1961년)는 민주주의 싹을 꺾은 비극임이 분 명하지만, 경제 발전의 측면에서는 큰 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쿠데타 세력(이후 '군사 정부')이 집권하자마자 제일 먼저 환율 인상을 단행한 것이 그 전환점이었다. 물론 군사 정부는 1963년 10월 민정이양(제5대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2년간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2부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1962년의 증권 파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급격히 경제 구조를 바꿀 목적으 로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이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금융 시장이 불안정해지고 군사 정부도 부패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부 정적 인상을 심었다.
그러나 1962년 12월부터 수출이 갑자기 증가하기 시작하 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달의 수출은 839만 달러에 이르러 평 년 수준보다 거의 두 배 수준이었다.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1963년 1~4월 신용장(수출 주문) 내도액이 3,400만 달러로 전년 도동 기간의 2배나 되었다. 5월 초 상공부 장관은 기자 회견에서 "수출 실적이 기록적"이며, 이런 추세라면 금년도 목표치를 달성하는 것은 무난하다고 장담하였다. 그는 수출이 갑자기 증 가한 것이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가 근대화하여 공산품의 수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수출선이 종래의 일본 중심에서 미국, 동남아시아, 홍콩 등으로 다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수출 증가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이 면방직 제품에 대 한 수출을 허가했기 때문이지만, 환율이 인상되는 등 군사 정부가 적극적으로 제조업 육성에 나선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사 정부가 이른바 '부정부패 척결'을 외친 것도 수출의 증가 요인으로 작용했다. 

- 1962년 화폐 개혁은 1945년 해방 이후 3번째 단행된 것이 었다. 첫 번째 화폐 개혁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수도 서 울을 잃었을 때 북한이 혼란을 가중시킬 목적으로 화폐를 발행한 데 대응할 목적으로 이뤄졌다. 두 번째 화폐 개혁은 1953년 한국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화폐단위를 기존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는 한편, 식민지 시기에 발행되었던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3차 화폐 개혁은 투자 재원을 마련하고 인플레이션을 완화할 목적으로 시행되었으나, 미국의 반대 및 국민들의 불신으로 큰 실패를 경험했다. 은 행에 대한 신뢰만 추락한 상황에서, 결국 군사 정부는 다시 미국에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50년대처럼 한 국에게 무상 원조를 해주기 어려운 여건이었기에, 군사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대신 미국의 지원을 요구했 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지만,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종 종 경제에 큰 호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 1964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한국 경제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 미국의 추가적인 자금 지원 및 전 쟁 물가 공급 등의 직접적인 혜택뿐만 아니라, 컨테이너로 대표되는 거대한 물류 혁명에 올라탈 기회를 잡을 수 있었 기 때문이다. 만일 세계 경제의 블록화 흐름이 높아지고 무 역 장벽이 새롭게 세워지는 시기에 수출 주도 산업화 전략 을 채택했다면 비슷한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국의 산업화는 운도 상당히 따랐고, 그 운을 잡아내는 역량 덕분에 이뤄낸 결과였다고 도 볼 수 있다.

-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 조약은 한국 경제의 발전 경로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인접한 일본과의 교역이 급격히 늘어 났을 뿐만 아니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해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등 숙원 사업을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 히 수출 제조업 육성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자본과 기 술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는 면에서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평가가 결코 낮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정적 면도 적지 않았다. 해외에서 낮은 금리의 자금 도입이 이뤄지다 보니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이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고, 일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 위험이 높아졌던 것이다. 특히 경 제 규모에 비해 과도한 자금 유입이 벌어지며 '과잉 투자' 문제가 발생해, 이후 박정희 정부는 포용적인 정책 기조를 버리는, 이른바 '8.3 조치'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 1997년에 발생했던 외환 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주장 이 있지만, 필자는 1972년의 사채 동결 조치가 가장 중요한 배 경에 있다고 판단한다. 연이율 40% 이상의 사채를 은행 대출 금리 수준(16.2%)으로 인하하고 3년 동안 갚지 않아도 되며 이후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특혜였고, 이는 한국기업들이 부채에 의지한 '브레이크 없는' 성장 전략을 더욱 강하 게 추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8.3 조치 이후 기업들 의 경영 실적은 크게 개선된 반면, 금융비용 부담률은 5% 아래 로 떨어졌다.
그러나 기업들의 반대편, 즉 가계와 자산가들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 없었다. 은행 이자율이 인플레이션 수준보다도 낮은 상황에서 예금자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기보다 사채 시장에서 운용하는 게 훨씬 이익이었다. 특히 자본 시장의 발달이 미약해 안정적인 배당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70년대 초에 는 저축 자금을 고리 사채로 운용하는 것이 가장 수익이 높고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8.3 조치로 자금이 묶이고 심 지어 낮은 금리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으니,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 8.3 조치 등 박정희 정부의 정책이 큰 효과를 거두기는 했지 만, 세 가지 문제를 일으켰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첫 번째로 산권이 상시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국내 저축이 늘어나고 자본시장이 성장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부가 은행 중심의 경 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 기업의 상장을 촉진하는 등 다양한 노력 을 기울이긴 했지만, 그 성과는 미미했다.
두 번째는 성과 부진 기업에 채찍을 휘두르는 과정에 '사심' 이 개입될 여지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정부가 저금리 대출을 배 분해 주는 과정에서 많은 부패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점 점 한국 경제의 짐으로 작용하게 된다. 중화학 공업의 공급 과잉 문제가 부각되어 이른바 산업 합리화 조치가 취해질 때 많은 기업이 부당한 처우라고 반발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더 나아가 기업들이 많은 대출을 받아 공격적인 경영에 나섬 으로써 외부 충격에 취약한 경제 구조로 변모하게 된 것도 무시 하지 못할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은 1984년부터 시작되는 3저 호황으로 보상받게 되지만, 이때부터 경기 변동의 폭 이 커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1972년 8월 3일 단행된 사채 동결 조치는 한국 경제에 많 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높은 사채 이자에 신음하던 수출 대기업들은 기사회생의 계기를 잡았지만, 재산권에 대한 심대한 침해를 일으킨 것은 물론 정부의 힘이 다른 경제 주 체에 대해 일방적인 우위를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70 년대 중후반 한국 경제는 연평균 7.3%의 고속 성장을 기록 할 수 있었지만, 1979년 발생한 이란 혁명을 계기로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게 된다.

- 1979년에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은 한국 경제를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1979년 2월에 발생한 이란 혁명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한 데다, 10월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 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80년 미국의 볼커 의장 이 강력한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외채 이자가 급등한 것 도 외채 위기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행 히 1980년 1월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대폭 인상하고 강 력한 통화 긴축 정책을 펼침으로써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 화하고 무역 적자의 확대를 억제할 수 있었다. 특히 전두환 정부가 추곡 수매가 인상을 억제하는 등 강력한 재정 긴축 을 펼친 것도 대외적인 평가를 높인 계기로 작용했다. 1982 년에 멕시코와 브라질 등 상당수 신흥 공업국이 외채 위 기를 겪었던 반면, 한국은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는 1984년부터 시작된 3저 호황의 기틀을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 1982년 멕시코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수많은 신흥 공업국 이 외채 위기를 겪을 때, 한국은 이에 휘말리지 않은 소수의 국 가에 해당되었다. 1980년 1월에 단행된 강력한 긴축 정책(환율 및 금리 인상)으로 무역 수지가 개선된 데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1982년부터 낮아지며 은행 예금 금리를 인하할 여력이 생긴 덕 분이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했던 것 도 외채 상환 독촉을 피해 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라는 격언 그대로, 한국 경제는 1983 년부터 본격적인 회복세가 시작되었다. 가장 큰 도움이 된 것 은 수출 여건의 개선이었다. 연준의 볼커 의장이 1983년부터 금 리를 인하하자 미국 등 선진국의 소비가 살아난 것이다. 1967 년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을 살펴보면 의류(18.4%)와 섬유 제 품(13.4%) 등 경공업 제품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1982년이 되면 의류(17.3%)의 비중이 조금씩 낮아진 대신 운송기계(15.4%)와 전자 기기(9.9%)의 비중이 올라온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의류와 자동차 그리고 전자 제품은 경기가 좋을 때 매출이 늘 어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제품군은 한 번 구입하고 나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옷은 조금 낡았다고 해도 수 선하면 입을 수 있고, 전자 제품은 자주 고장 나더라도 바로 바 꾸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금리 인하다.
-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체결 이후 대일 무역 적자의 누적으 로 한국이 고통받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이는 일종의 '복권 당 첨'에 비길만한 소식이었다. 일본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지만 원 화 가치가 안정적이었기에 기업들의 경쟁력이 크게 개선되었던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만든 베스트셀러 모델인 포니의 미국 수출 이 1986년에 이뤄진 것도 원화 가치의 하락에 힘입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코롤라가 대당 2만 달러에 팔리고 있는데, 현대의 엑셀이 1만 달러라면 이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현대자동차는 미국에서 "신차 한 대 값이면 엑셀 두 대를 살 수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판매에 나설 정도였으니 말이다. 115 공격적인 판촉 활동에 힘입어 1986년에만 16.8만 대가 팔렸고, 1987년에는 무려 26.3만 대 를 팔 정도로 히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이 없는 잔치는 없는 법.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정 점으로 호황이 저물기 시작했다. 경제 성장률이 정점을 치고 떨 어지는 가운데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 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2~3% 수 준으로 안정되었지만, 1988년에는 7.1%까지 상승했다. 특히 1987년 6월 이후 민주화 열기가 높아진 가운데 임금 상승률이 급격히 높아진 것도 경쟁력을 약화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정부가 1979~1982년 같은 강력한 긴축 정 책을 펼쳐야 했으나, 대통령 선거와 미국의 시장 개방 압력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 1983년의 미국 금리 인하, 1984년의 국제 유가 폭락 그리고 1985년의 플라자 합의로 한국 경제는 역사상 가장 강력 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유가가 하락하고 국제 금리가 인하하며 대외 지출이 크게 줄어든 반면, 엔화 가치가 급격 히 상승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크게 개선된 것이 다. 이 영향으로 한국의 무역 수지가 통계 작성 이후 처음 으로 흑자로 전환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기가 과열됨에 따라 인플레이 션이 발생했고, 이는 시장 금리의 상승을 유발해 경기의 탄 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민주화 흐름 속에서 대기업 근로자 들의 임금이 급등하며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된 것도 이 후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 1988년 한국 경제는 '절정'의 호조를 보였다. 경제 성장률이 12.0%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88.9억 달 러에 이르렀으며, 주식 가격도 역사상 최고 수준을 연일 경신하 는 강세였다. 그러나 몇 가지 면에서 불안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 었는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인플레이션이었다. 1988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7.1%를 기록해 1982년(7.2%) 이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금리 의 상승이다. 신용도가 높은 우량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 즉 기 업이 발생한 차용증서에 표시된 이자율이 1987년 12.6%에서, 1988년에는 14.2%로 치솟은 데 이어, 1989년에는 15.2%로 올라서고 말았다.
- 그럼 1980년대 후반에 한국 경제의 경쟁력은 얼마나 약화되었을까?
여러 연구 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1986~1990년 한국의 생산성은 8.5% 높아졌지만, 임금은 10.1%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 다. 119 반면 같은 기간 일본의 생산성은 4.5% 개선되었는데 임금 상승은 단 3.2%에 그쳤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1990년대 전반기 까지 계속되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의 엔화 강세로 획득했던 대일 경쟁력 개선이 불과 10년 만에 모두 소멸된 셈이다.
단위 노동 비용의 급격한 상승이 이뤄지는 가운데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급락한 것도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88년 미국 정부는 한국과 대만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 함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되면 미국 해외민간투자공사OPIC. Overseas Private Investment Corporation를 통한 자금 지원이 금지되고, 미국 정부의 조달시장에 참여가 금지되며, 무역 협정 협상에서의 압력이 강화된다.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 된 데 따른 직접적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한국 정부도 원화 가 치가 저평가 상태임을 인정하고 환율 인하에 나서게 된다. 1987 년 말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861.4원이었지만, 1988년 말에 는 684.1원으로 떨어졌고, 1989년 말에는 679.6원을 기록했다. 더 나아가 1988년에 미국이 무역 적자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내놓은 이른바 '슈퍼 301조'도 큰 변화를 가져온 요인이었다. 121 슈퍼 301조는 무역 상대국을 우선 협상 대상국으로 지정하는 한편 광범위한 보복 조처를 할 수 있게 허용한 법안이다. 
- 물론 원화 강세 및 시장 개방 그리고 강력한 임금 상승이 경제에 나쁜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다. 원화의 가치가 높아지고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한 덕분에 1989년과 1990년 한국 경제 성장률은 각각 7.1%와 9.1%로 고성장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때를 고비로 국내 기업들의 생산 설비 해외 이전이 본격화되고 기업들의 매출액 대비 영업 이익률이 뚝뚝 떨어졌음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다. 
- 금리가 상승하는 가운데 원화 가치도 오르는 데다 임금마저 급등하는 이른바 '3고 현상'이 시작되었다는 평가가 1988년 하 반기부터 제기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124 3고 현 상의 충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1979~1982년 같은 적극적인 긴축 정책이 필요했지만, 당시 노태우 정부는 더욱 강력한 경기 부양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는 한편 무역 수지의 악화를 유발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압력으로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떨어뜨리는 중이었던 데다, 1986~1989년 발생한 주택 가격 급등 현상으로 인해 분당과 일산 등 '1기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기 때문이 다. 1989년 2월 24일 노태우 대통령은 "서민들을 위한 영구 임 대주택 25만 가구를 포함해 주택 200만 호를 짓겠다."라고 약속 한 후, 이를 실행에 옮겼다. 125 이 부분은 부동산 시장을 다루는 3 부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겠지만, 경제에 미친 충격은 대단히 컸 다. 단번에 200만 호에 이르는 주택을 공급하느라 인플레이션이 더욱 심화되었고 인건비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특히 인력난이 심각했던 건설 부문의 임금이 폭발적으로 상승해 단위 노동 비용이 급격히 상승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경제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이 곪아가기 시작했으며, 이 문제는 결국 1997년 외환 위기로 폭발하게 된다.
- 1988년부터 한국 경제는 세 가지 장애를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장애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금리 상승이었고, 두 번 째는 미국의 압력 속에 원화 가치가 상승한 것이며, 마지막 은 민주화 흐름 속에 시작된 가파른 임금 상승이었다. 이 결과 한국 기업의 수익성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단위 노동 비용이 상승해 경쟁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1979~1982년 같은 공격적인 긴축 정책이 요구되었지만, 당시 노태우 정부가 신축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을 실행 에 옮김으로써 건설업을 중심으로 인건비 부담이 더욱 커 지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것만으로 한국 경제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96년 반도체를 비롯한 한국 전자 산업이 큰 불황을 겪으면서 외환 위기의 역풍을 맞게 된다.

- 일본 기업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반도체기업의 방심 그리고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덕분이었다. 129 1984년 미국의 FBI가 인텔 본사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서 함정 수사를 벌여 인텔의 설계 비밀을 구입하려 한 히타치와 미쓰비시의 직원을 체포한 것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일본 반도체 업계의 승전보를 막을 수 없었다. 특 히 1984년 업계를 덮친 심각한 공급 과잉은 일본 기업들이 노린 바였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일본 기업들이 자국 내에서 파는 메 모리 칩의 가격은 높게 책정하고, 외국에서 파는 가격은 경쟁 기 업들이 도저히 제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낮추는 식이었다. 130 이에 미국의 반도체 업계는 1985년 6월 14일 무역대표부에 일본 정부가 민간 기업을 지원하는 반도체 정책이 부당하다며 제소했다.  같은 해 9월 플라자 합의까지 체결되며 일본 반도 체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86년 미국 정부와 일본 반도체 기업은 "일본 반도체 업체는 생산 원가를 공 개하고 미국 업체의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높인다."라는 내용 을 담은 제1차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는 한 국 기업들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서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인텔이 메모리용 반도 체 시장에서 철수한 공백을 한국 기업이 밀고 들어간 것이다. 132 한국 기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적기에 저렴한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반면 당시 일본 기업들은 기업용 컴퓨터에 사용하는 고성능 반도체를 만들었기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쌌 고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 이상의 오버 스펙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때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게 행운이 따랐다. 윈도우 3.1 과 윈도우 95로 대표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운영 체제가 90년대에 출시되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고, 이는 2~3년마다 제품 교체 주기에 맞춰 대규모 수요가 발생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한국과 대만 등 반도체 업계의 후발 주자들은 오버 스펙의 기업용 시장보다 개인용 중저가 시장에 집중함으로써 시장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경제의 주력 수출품으로 부상한 반도체는 소비자들의 사소한 지출 변화에도 가격이 크게 흔들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94년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금리 인상, 1995년 이후의 엔화 약세 속에 한국 기업들의 설비 투자 붐까지 겹쳐 1996년 반도체 수출 가격이 폭락하 는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때 정책 당국이 환율 조정 및 산업 구조 조정 등의 조치를 신속하게 취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97년에 접어들며 기아와 한보 등 주요 기업의 연쇄 도산이 시작되고, 태국 등 아시아 외환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고 말았다.

-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경제의 주력 수출품으로 부상한 반도체는 소비자들의 사소한 지출 변화에도 가격이 크게 흔들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94년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금리 인상, 1995년 이후의 엔화 약세 속에 한국 기업들의 설비 투자 붐까지 겹쳐 1996년 반도체 수출 가격이 폭락하 는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때 정책 당국이 환율 조정 및 산업 구조 조정 등의 조치를 신속하게 취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97년에 접어들며 기아와 한보 등 주요 기업의 연쇄 도산이 시작되고, 태국 등 아시아 외환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고 말았다.
-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경제의 주력 수출품으로 부상한 반도체는 소비자들의 사소한 지출 변화에도 가격이 크게 흔들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94년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금리 인상, 1995년 이후의 엔화 약세 속에 한국 기업들의 설비 투자 붐까지 겹쳐 1996년 반도체 수출 가격이 폭락하 는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때 정책 당국이 환율 조정 및 산업 구조 조정 등의 조치를 신속하게 취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97년에 접어들며 기아와 한보 등 주요 기업의 연쇄 도산이 시작되고, 태국 등 아시아 외환 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고 말았다.
- 외국과 활발하게 무역하고 자본이 자유롭게 오가는 가상의 나라를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이 나라의 주력 수출 제품(가령 반도체) 가격이 갑자기 폭락해 수출이 급격히 줄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일 먼저 무역 수지가 악화되는 한편 고용과 GDP가 감소할 것이다. 이 나라의 중앙은행이 경기를 살릴 목적 으로 금리를 인하하면, 이 나라에 투자했던 돈이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나라로 대거 유출될 것이다. 무역 및 자본 수지가 함께 악화하여 달러 공급이 크게 줄어들 것이며, 달러에 대한 환율이 급등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 정부가 고정환율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빚어진다. 왜냐하면 환율을 일정 수준에서 유지하 기 위해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외환 시장에서 내다 팔아 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가 달러를 팔고 자국 통화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시중의 돈이 정부로 모이게 된다. 이 결과 시 중에 풀린 돈이 줄어들고 경기가 더욱 악화될 것이다. 경기가 나 빠지니 해외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 무역 수지가 다시 호 전되며 위기가 종료된다. 그러나 무역 수지의 개선에 시간이 걸 릴 경우, 이 나라 정부가 가지고 있는 외화가 고갈되며 결국 국 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 등 국제기구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는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반면 이 나라가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통화 가치가 낮아지는 것을 방치하기만 하면 된다. 달러에 대한 환율이 급등하는 가운데 해외 상품에 대한 수요는 자연스럽 게 줄어들 것이고, 수출 기업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여 더 많 은 수출을 달성하며, 무역 수지가 흑자로 전환될 것이기 때문이 다. 물론 환율이 급등해서 달러로 환산된 1인당 국민 소득의 감 소가 나타날 수는 있지만, IMF에 굴욕적인 조건으로 도움을 청 하는 일은 막을 수 있다.
- 그러나 태국과 한국 모두 고정 환율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무역 적자가 심화되는 가운데 해외 투자자들 의 이탈이 이어지는 데도 환율을 일정 수준에서 유지하려 노력 하다 외환 보유고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1997년 7월 태국이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것을 보면서도 위기의 심 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때라도 고정 환율 제도를 폐지하고 금리를 인상했다면, 외환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97년 8월에 기아그룹이 사실상 파산하고, 10월에 홍콩마저 외 환위기를 겪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지경이 되고서도 고정 환율 제도를 유지하려 집착했던 이유를 정확하게 알 방법은 없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4월 감사원은 "정부가 1인당 국민 소득 1만 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환율방어에 나선 것이 외환 위기를 가중시킨 원인"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조사 결과만으로 모든 의문이 풀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외환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에 따라 정책의 우선순위 조정이 당연히 이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 환 위기 위험이 높아질 때 1인당 국민 소득을 유지하기 위해 발 버둥 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더 나아가 '무능한 정부'라 는 후대의 평가를 받는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 국 당시 김영삼 정부가 고정 환율 제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던 것 은 글로벌 금융 시장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거나 혹은 종금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 당시 종금사는 해외에서 만기 1년 미만으로 돈을 빌려왔기에 구조상 해마다 대출의 만기가 도래했었다. 반면 종금사의 대출 은 통상 10년 만기 대출이었기에 만에 하나 해외에서 빌려온 돈 의 만기 연장이 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에 빠진다. 그런데 해외 의 금융 기관 입장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연이어 외환 위기를 겪 는 데다, 한보와 기아 등 대기업마저 연쇄 부도가 나는 것을 보 면서 한국 종금사에 대출을 연장해 주는 게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결과 종금사들은 원화를 달러로 환전한 다음 해외 금 융 기관에게 원금을 갚아야만 했다. 1996년 말에 단기 외채가 1,000억 달러에 달했는데, 1997년 11월에 889억 달러로 줄어들고, 12월에 685억 달러까지 떨어진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한국 경제를 홀로 지탱하던 반도체 산업마저 1996년에 무 너지면서 한국 경제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종금사 를 활용해 해외에서 빌린 돈의 만기가 짧아서, 만기 연장이 되지 않는다면 곧장 위기에 처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게 문제를 심화시켰다. 1997년 7월에는 태국이 외환 위기 를 맞았고, 8월에는 기아그룹이 파산했으며, 10월에는 홍 콩이 외환 위기를 맞았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 정부가 제 대로 된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는 가운데 외환 보유고가 고 갈되고 말았다.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함으로써 외환 부 족 사태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한국 경제는 고금리와 재정 긴축 시행으로, 한국 전쟁 이후 가장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 1997년 12월에 IMF는 한국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다. 144 IMF가 한국에게 요구한 조건은 돈 을 빌려준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한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과 비슷 했다. 민사 소송을 걸어 재산을 압류하고 상대의 소득 일부를 떼 가는 방식처럼, 한국이 빚을 갚아 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러면 국가는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될까? 2010년 재정 위기 이후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이 겪은 일처럼 지속적인 내핍을 강요당한다. 즉 금리를 인상하고 재정 지출을 줄여서 어 떻게든 저축을 모아 무역 수지를 흑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저축이 늘면 무역 수지가 흑자가 될까? 금리가 인 상되고 재정 지출이 줄어들면 소비와 투자가 급격히 줄어든다. 즉 저축액은 늘어나고 지출은 줄어드니, 경제 전체적으로 돈이 남아돈다. 특히 기업 투자의 상당 부분은 해외에서 수입되는 기계와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해외로부터의 수입이 줄어든다. 더 나아가 국내 소비가 급격히 줄어드니, 유통업체는 남아도는 재고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 해외로 수출하는 게 더 이익 이 될 것이다. 이 결과 무역 수지가 급격히 개선된다. 145 무역 수 지가 개선되면 외화가 유입되니, IMF로부터 빌린 돈을 신속하게 갚을 수 있다.

- 1998년 여름부터 한국 경제는 두 가지의 호조건을 맞이했 다. 대규모 무역 흑자를 기록하며 IMF의 개혁 프로그램이 완화되었고, 미 연준이 LTCM 사태로 인한 금융 시장의 혼 란에 대응해 금리를 인하한 것이다. 이 덕분에 1998년 한국 은 400억 달러에 가까운 무역 흑자를 기록했고,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전자 제품의 수출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등 선진국으로의 수출 기회를 갖지 못한 기업 들의 어려움이 지속된 끝에, 1999년 7월에 대우그룹 사태 가 터졌다. 외환 위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채 주 도 성장 전략을 고집하던 대우그룹의 파산은 한국 경제의 방향을 바꾼 전기로 작용했다. 이후 한국의 고용률은 지속 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며, 기업들의 투자는 과 거에 비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가 2001년부터 시작된 카드 관련 규제 완 화였다. 다음 편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본다.

- 1999년 여름, 대우그룹 사태를 전후해 강력한 금융 규제 완 화가 이뤄졌다. 신용 카드사의 현금 서비스한도를 폐지하 는 한편, 신용 카드 소비가 많은 사람에게 연말 정산 혜택 을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이후 약 2년에 걸 쳐 비약적인 카드 소비의 증가가 출현했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이 카드를 보유하게 되고 일부 자영업자들이 카드 돌려막기에 나서면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말부터 정부가 카드사의 과도한 마케팅에 제동을 걸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2003년 말에는 무려 370만 명의 1999년 여름, 대우그룹 사태를 전후해 강력한 금융 규제 완 화가 이뤄졌다. 신용 카드사의 현금 서비스한도를 폐지하 는 한편, 신용 카드 소비가 많은 사람에게 연말 정산 혜택 을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이후 약 2년에 걸 쳐 비약적인 카드 소비의 증가가 출현했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이 카드를 보유하게 되고 일부 자영업자들이 카드 돌려막기에 나서면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1999년 여름, 대우그룹 사태를 전후해 강력한 금융 규제 완 화가 이뤄졌다. 신용 카드사의 현금 서비스한도를 폐지하 는 한편, 신용 카드 소비가 많은 사람에게 연말 정산 혜택 을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이후 약 2년에 걸 쳐 비약적인 카드 소비의 증가가 출현했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이 카드를 보유하게 되고 일부 자영업자들이 카드 돌려막기에 나서면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목한 미국의 부시George Walker Bush 행정부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며 급등했던 유가가 안정을 되찾음에 따라 한국 경제에도 회복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가가 하락하면 물가 상승 압 력이 약화되고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특 히 이라크 전쟁의 승전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금리 인하까지 가 세하자 폭발적으로 소비 증가가 나타났다. 한국은 선진국을 대 상으로 수출하는 산업(반도체, 자동차 등)을 대거 보유한 나라이 기에, 선진국 소비 회복은 바로 수출 증가로 연결된다.
여기에 한 가지 호재가 발생했으니, 바로 중국 경제의 가파른 성장이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 가입이후 중국의 수출 주도 성장이 시작되자 조선과 화학 등 이른바 중화학 공업의 대중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세계무 역기구 가입은 중국의 시장 개방이 본궤도에 오른 것을 의미하 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호적인 조건에서 중국 제품이 해외 시장 을 공략할 수 있게 된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중국 경제 성장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복합적이다. 당 장은 한국산 배와 기계, 원재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니 이른바 '중국 붐'을 만끽할 수 있었다. 2002~2008년의 연평균 대중 수출 증가율이 26.6%에 달하고, 누적 무역 흑자가 1,173.2억 달러에 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강력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90년대부터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생산 기지를 만든 것 그리고 2000년대 초반의 불황에서 선진국 경제가 회복된 덕을 동시에 누렸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중반의 대중 수출 붐은 외환 위기와 카드 대란 의 충격을 씻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2006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의 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발흥은 우리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만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이 가공 조립형 경제 구조에 마냥 머물러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가 공 조립형 경제 구조는 수출의 대부분을 외국계 기업이 담당하 고 생산직 근로자는 중국인으로 구성되는 형태의 산업을 뜻한 다. 1990년대 한국의 섬유 및 신발, 의류 산업이 중국에 대거 진 출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한국의 설비를 뜯어서 중국의 해 안 지역에 공장을 새로 설치하고 월 50달러도 되지 않는 임금을 지불하는 근로자들을 모아서 만든 물건을 미국이나 유럽에 수출 하는 식이다. 참고로 1993년 중국의 평균 연봉은 3,371 위안으로, 달러로 환산하면 583달러 남짓했다. 월 5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 는 월급을 주어도 수많은 사람이 일하겠다고 연안 지역 공장으 로 몰려들던 시절이었다.
-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한국 경제는 약 10년 가까 운 시간 동안 큰 호황을 경험했다. 중국의 부품 및 원자재 그리고 각종 기계 장비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 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카드 대란과 SK주식회사의 분식 회계 사태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 수출 붐이 끝 없이 이어질 수는 없었다. 중국의 인건비와 토지 가격이 급 등하면서 과거처럼 가공 조립에 치중하는 방식으로는 성 장세를 이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70년대 한국 처럼 중화학 공업 및 정보 통신 산업 육성에 거대한 자본이 투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부분 중국이 한국의 기술 수 준을 따라잡았고, LCD 디스플레이처럼 아예 압도적인 경 쟁력을 확보한 산업도 생겨났다. 그러나 중국의 미래가 그 렇게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생산 요소 가격의 급 등세가 지속되는 데다, 명령-지시 체제가 지니는 문제가 점점 더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한국이 어 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중국을 따돌릴 기회를 갖고 있는 시기로 판단된다.

- 한국 경제가 세계적인 불황 이후 경쟁력이 개선되는 두 번째 이유는 환율 때문이다. 1999년 말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1,138.0원이었지만, 2000년 초반 정보 통신 거품이 붕괴된 이 후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2000년 말에는 1,264.5원으로 상승 한데 이어, 2001년 말에는 1313.5원까지 수직 상승했다. 이런 현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다르지 않았다. 2007 년 말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은 936.1원이었지만, 2008년 말에 는 1,259.5원으로 급등했다. 이처럼 환율이 금융 위기 때마다 상 승하는 이유는 1997년 외환 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한국에 투자했던 외국인 투자자들은 환율 상승과 주식 가격 폭락으로 큰 고통을 겪었기에, 이때부터 한국 원화 자산을 '불황에 약한 위험자산'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즉 불황이 닥칠 때마다 한국 에서 해외로 달러가 빠져나가기에 환율이 급등하는 것이다. 물 론 수출이 잘 안되면서 무역 수지가 악화되는 것도 환율 상승 요 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 경제는 세계 경기의 하강이 마무리된 다음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경쟁자들이 연구 프로젝트를 접고 심지어 개발 인력을 해고할 때도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기 때문 이다. 더 나아가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마저 급등함으로써 수출 기업의 경쟁력이 개선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 결과 한국의 세 계 수출 시장 점유율이 꾸준히 상승했으며 이제는 일본을 추월 할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 시장 경제는 끊임없이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 2000년 정보통신 거품의 붕괴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대 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세계적인 불황이 닥치면 한국이나 대만처럼 내수 시장이 작은 수출 공업 국가들은 큰 곤경에 처한다. 내수 시장으로는 도저히 소화하기 어려운 막대한 생산 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수출 제품 대부분이 경기 에 민감한 전자 제품 및 자동차 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 이다. 따라서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는 글로벌 경기의 변화 에 따라 수출이 급증하고 급감하는 사이클을 피하기 어렵 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도 약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황에 더 공격적으로 연구 개 발 투자를 단행하는 데다,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도 급등하 기 때문이다. 즉 남들이 투자 안 할 때 더 열심히 투자하고 체력을 길러 경기가 회복될 때 세계 시장 점유율을 매번 올 렸던 과거의 경험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0년 이후 한국 경제는 역사상 가장 물가가 안정된 시기 를 누렸다. FTA 체결에 따른 시장 개방과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 노력 그리고 세계 경기의 둔화가 저물가 구조를 만든 주역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2022년 발생한 러시아-우크라 이나 전쟁 이후 강력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앞으로도 저물가 현상이 지속될 것인지 논란이 제기된다. 필자의 입 장은 한국 경제가 당면한 강력한 인구 고령화의 압박을 감 안할 때 앞으로도 여전히 저물가 기조가 이어진다는 것이 다. 물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점차 확대되는 가운데 이전 처럼 해외에서 값싼 공산품과 농산물이 무제한으로 공급되 기는 어려워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삼성 전자를 비롯한 한국의 거대 수출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혁 신을 추구하는 만큼, 지난 10년만큼은 아니더라도 물가가 지속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저축은행 사태는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경제에 미친 후 유증도 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3년에 발생한 동양그룹 사태가 될 것이다. 동양그룹 사태란 2013년 10월에 동양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동양네트웍스, 동양시멘트가 잇달아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기업 어음과 회사 채를 보유한 4만여 명이 1조 7,000억 원 규모의 피해를 입은 사 건이다. 이 사건 뒤에는 동양그룹의 경영 환경 악화가 자리 잡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축은행 사태로 금융 시장이 꽁꽁 얼 어붙지 않았다면 그토록 고금리 부채에 허덕이지 않았을 것이라 는 아쉬움도 있다. 

- 2002년에 발생했던 카드 대란과 2010년에 벌어진 저축은 행 사태는 여러 면에서 판박이다. 정부가 금융 규제를 완화한 이 후 공격적인 마케팅 및 사업 확장이 발생하고, 이게 경기 여건이 악화되면서 부실로 전이되는 전형적인 흐름을 보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주기적인 '소형 금융 위기'를 겪었다. 2002년의 카드 대란 그리고 2010년의 저축은행 사 태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 는 이유는 조급증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이를 정 공법으로 해결하기보다 손쉬운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위 기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1999년 대우그룹 사태 이후 카 드 규제가 완화되고, 카드 대란 이후에 저축은행에 대한 규 제가 완화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금융 규제 완화가 위기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규제 완화가 개입되지 않 은 금융 위기를 찾기 힘든 게 현실인 것 같다. 

- 1962년 5월의 증권 파동 이후 주식 시장은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왜냐하면 주식 가격이 왜 급등하는지도 모르 고 유상 증자(신주를 발행하여 돈이나 현물을 받아 자본금을 늘리는 일)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들이 심각한 손실을 본 데다, 1963년에 진행된 특별 조사단의 수사 결과가 너무나 실망스러웠기 때문이 었다.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특별 조사단의 발표에 따 르면, 1962년에 이뤄진 중앙정보부 강성원 조사실 행정관(소령) 과 윤응상 일흥증권 사장 간의 만남에서 정부 주도의 작전이 시 작되었다. 당시 '투자의 귀재'로 불리던 윤 사장은 "농협중앙회 소유 한국전력 주식을 빌려주면, 이를 크게 불려주겠다."라는 취 지의 말로 증시 문외한이었던 중앙정보부를 꼬드겼다. 이후 한 국전력 주가를 끌어올린 뒤 팔아서 폭리를 취했고, 이 돈으로 다시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을 매점매석해 폭리를 취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 특별 조사단이 파악한 증권 파동의 실체였다.
특별 조사단의 발표 이후 윤응상, 강성원 등 14명이 구속되고 검찰로부터 징역 7년 등의 구형을 받았으나, 그 후 군법회의에 서 '의혹의 원인이 없다'며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다. 즉 증권 파 동으로 손실을 본 국민들은 넘쳐나지만, 사태를 만든 이들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셈이다. 윤응상을 비롯한 증권 파동의 주범들은 이후 일상으로 복귀했으며, 윤응상은 1997년에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증권 파동을 겪은 후 국민들은 "주식 시장은 못 믿을 곳”이라 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한국 주식 시장은 개점 휴업 상태가 되었다. 특히 주식 시장에 상장해 자금을 조달하려 는 기업들도 자취를 감춰 1971년 상장 기업의 숫자는 단 50개에 불과할 정도였다.
- 기업의 주주는 회사가 잘못되더라도 자기 지분만 포기하 면 끝이다. 그런데 하영기 부총재는 기업의 경영진과 기업을 하 나로 취급하고 기업이 잘못되면 기업주도 망하는 게 당연하다고 역설했다. 사채 동결로 이득을 보았으니 보유한 주식을 시장에 싸게 내놓음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라는 이야기다.
결국 거듭되는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 이 1974년부터 대거 상장하게 된다. 1971년에는 상장 기업이 단 50개에 불과했으나, 1974년에는 128개로 불어나고, 1978년에는 무려 356개 기업이 주식 시장에 상장하면서, 한국 주식 시장은 외형적인 면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재벌 총수' 혹은 '사주'라는 말이 일상화된다. 왜냐하면 하영기 부총재가 지적했듯, 기업의 주 인으로서 기업의 흥망성쇠에 책임을 지는 이가 존재하기 때문이 다. 총수나 총수 일가는 기업의 경영에 책임을 질 뿐만 아니라, 헐값에 주식을 상장시키는 등의 큰 희생을 겪었기에 당연히 기 업의 경영권을 쥐고 중요한 의사 결정을 누리는 존재로 격상된 셈이다. 특히 1976년 12월에 '증권거래법이 개정되면서 기업이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경영권을 둘러싼 적 대적인 기업 인수 합병M&A, Merger and Acquisitiond을 기대하기는 어 렵게 되었다. 
이후 한국 주식 시장은 중요한 특성을 한 가지 갖게 된다. 총수와 그 일가는 아주 소수의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소불위의 경영권을 행사한다. 월급쟁이 최고 경영자를 임명하 고 해고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사회에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 들을 자유자재로 채워 넣을 수 있다. 반면 소액 주주는 경영 참 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아무리 IRInvestor relation (증권 투자자들 에게 경영 활동과 그에 따른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 담당자에게 전화해도 의견이 상층부로 전달되는 일은 드물고, 주주 총회에 서 발언하는 것도 대단히 힘들다. 소송을 통하지 않는 한 기업의 최상층부에 의견을 전달하고 또 압박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 사태가 이렇다 보니 한국 주식 시장은 적어도 '주주 보상'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하위권에 위치하게 된다. 주 주 보상이란 순이익에서 배당금 및 자사주 매입 · 소각이 차지하 는 비중을 뜻한다. OECD에 가입한 선진국은 대부분 그 비율이 60% 선에 있지만, 한국은 수십 년째 20% 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기업이 성장하고 발전하면 자본금을 투자해 준 이들에게 보 답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 총수들은 "귀한 주식 을 너무 싸게 시장에 내놓았다."라고 판단하기에, 자신의 지분을 매입한 이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들을 귀 찮은 손님 정도로 취급하는 게 현실인 것 같다. 물론 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상장한 기업 총수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상장 가격에 대한 규제가 풀린 다음에도 주주에 대한 보상은 지속적 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 1972년부터 시작해 1978년까지 이어졌던 건설주 장세는 한국 증시의 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실기업이 대 거 상장되며, 금방 부자 될 꿈에 부푼 투자자들이 시장에 유입되고, 큰 손의 주식 매도가 합쳐지며 거품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특히 주가 상승의 막차를 탔던 이들은 1/4 혹 은 그 아래 수준으로 떨어진 주가를 보며 넋을 잃었고, 주 식 시장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이로부터 6 년 뒤에 시작된 3저 호황 상승이 끝날 때도 1978년 같은 일 이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경험이 되었다.

- 1977년에 기록했던 KOSPI 고점을 1986년에 만회할 수 있었지만, 증시의 봄날은 생각보다 짧았다. 1989년 봄에 KOSPI가 1,000포인트를 기록한 직후 주식 시장이 붕괴되 었는데, 국민주 상장과 부실기업의 연쇄적인 부도가 시장 의 수급 불균형 심화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88년 부터 시작된 환율의 급락과 금리 상승은 기업의 실적 부담 을 악화시켜, 시장의 폭락을 막으려는 정부의 개입에도 불 구하고 1992년까지 50% 이상의 주가 폭락을 경험하고 말 았다. 1977년 건설주 버블의 붕괴에서 나타난 '한국형 거품 붕괴' 패턴이 1988년부터 다시 나타난 것을 알아차린 투자자가 있다면, 그는 1989년부터 시작된 주가 붕괴가 뜻밖의 사건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 1992년은 한국 주식 시장의 역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진 해였다. 첫 번째 사건은 1989년부터 시작된 주식 시장의 하락세가 멈추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이다. 물론 1980년 대부터 코리아 펀드 형태로 외국인의 간접적인 한국 주식 매수 가 가능했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직접 한국 주식을 매입하는 것 은 불가능했고, 코리아 펀드가 폐쇄형 펀드라는 특성이 있었기 에 투자자들의 불편함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노태우 정 부는 1991년 9월 3일에 주식 시장의 점진적인 개방을 발표하고, 1992년 1월 3일부터 시행하였다.
외국인 투자자에 의한 경영권 위협을 막기 위해 정부는 종목 별 외국인 한도를 설정했다. 기관이나 개인 투자자 등 외국인 전 체 기준으로 상장 기업 지분의 10% 한도 내에서만 투자할 수 있었으며 금융, 항공, 통신 등은 사업의 공익성을 감안해 지분 한도가 8%로 제한되었다. 더 나아가 외국인 1인당 투자 한도는 3% 그리고 공익성이 강한 기업에 대한 한도는 1%로 제약되었다. 매 우 타이트한 규제였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의 미래 를 낙관하며 개방 첫해부터 대규모 순매수를 기록했다. 1992년 한 해 동안의 순매수 규모는 1.5조 원에 달했고, 1993년에는 4.3 조 원까지 확대됨으로써 1992년 여름부터 증시가 본격적인 상승세로 돌아서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 1992년부터 시작된 주식 시장 개방은 한국 증시의 구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무엇보다 해외의 주도주 및 주도 테마 가 한국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주식 시장 도 해외 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필 자를 비롯한 수많은 경제 분석가들이 전날 밤 미국에서 발 표된 경제 지표를 분석하느라 밤잠을 못 이루게 된 것도 이 때의 일이며, 앞으로도 이런 흐름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 1996년 말부터 시작된 미도파 경영권 분쟁은 한국 증시의 흐름을 갈라놓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신동방 측은 결정적 승기를 잡았음에도 전경련과 정부의 개입으로 결국 화해 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발생한 외환 위기 과정에서 경영권 분쟁에 참여한 모든 주체들이 파산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 문이다. 이후 '투기 세력에 의한 경영권 위협'이라는 표현 이 일상적으로 언론 지상에 등장했고, 재벌 총수의 경영권 에 도전하는 국내외 세력은 매번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외 국인의 지분율이 낮은 기업 총수는 흔들림 없는 경영권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상속세와 증여세를 회피할 목적으로 이뤄지는 물적 분할과 지주사 전환 그리고 전환사채 발행 등 수많은 방식으로 투자자들의 손실을 강요하게 되었다.

- 1998년부터 시작된 강력한 주가 상승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촉발되었다. 첫 번째는 미국 나스닥 시장의 강 세, 두 번째는 저금리 환경 속에서 시작된 '바이 코리아 펀 드 붐' 때문이다. 특히 국내 주식 시장으로의 대규모 자금 이동이 기업들의 주가를 밀어 올림으로써 기업들이 자금 을 조달하기에 용이한 환경을 가져왔다. 1998년부터 5년간 시가 총액의 10% 이상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 조달이 벌어 진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당시 주가가 액면가를 밑도 는 기업들은 유상 증자가 어려웠기에 주가 수준이 높은 기 업들에만 혜택이 집중된 면이 있었다. 특히 대우그룹은 대 부분의 계열사가 액면가를 밑돌았기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2002년을 고비로 한국 주식 시장은 5년에 걸친 대세 상승 을 기록했다.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과 매력적인 밸류에이 션 그리고 중국 주식 버블 때문이었다. 특히 SSECI는 2005 년 말 1,000포인트에서 2007년에 6,000포인트까지 상승하 는 역사적인 상승세를 펼치며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신 흥국 주식 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그러나 비유통 주식의 매 각이 늘어나고, 신규 상장 기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가 운데 시장의 수급이 무너지며, SSECI는 2009년에 2,000포 인트 선까지 폭락하고 말았다. 중국 증시에서부터 시작된 신흥 시장의 거품은 현재까지도 악영향을 미치는 중이며, 신흥 시장에서는 한국과 대만 정도만 역사적인 고점을 넘어선 상태다.

-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오랜 기간 고통 받았다. 2009~2018년 세계 경제 성장률은 단 3.4%로, 금융 위기 이전 10년 동안(4.2%)에 비해 거의 0.8%포인트 낮아 졌기 때문이다. 즉 경기 회복이 신속하게 이뤄지기는 했지 만, 성장 잠재력의 훼손이라는 대가를 기록해야 했다. 그러 나 한국 주식 시장은 이런 경제 환경에 굴하지 않고, 2011 년 봄에는 KOSPI 최고점 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증시가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전고점에 도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세계 경기의 빠른 회복뿐만 아니라 '불황에 투자하는' 한국 기업들의 도전 정신도 큰 영향을 미쳤다. 금융 위기 이후 최악의 불황이 닥쳤음에도 연구 개발 투자를 멈추지 않고 근로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지 않았기에, 호황이 시작되 는 순간 누구보다 빨리 품질 좋은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물론 단호한 결단 뒤에는 총수 경영 그리고 소 액 주주에 대한 짜디짠 주주 보상이 자리 잡은 것 또한 사실이다.

- 신규 사업에 진출하는 기업이 늘어날수록 해당 산업의 공급과잉 가능성이 커지며 태양광 업계처럼 고통받을 가능성이 높아 질 것이다. 더 나아가 투자자들의 자제심이 무너졌다는 신호로 도 볼 수 있다. 화장품을 비롯한 주요 산업에는 이미 진입한 플 레이어들이 존재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해자를 만들어 놓았다.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형성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대규모 생산 설비를 마련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막 시장 에 진입한 기업이 기존의 강자를 이겨낼 수 있을까? 설령 운이 따른다 해도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자금이 투입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 '성장 산업 진출이라는 발표 하나만으로 주가가 급등하는 것은 이 테마에 거품이 끼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2021 년 하반기의 NFT 테마, 즉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 관련 주식의 급등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93 블록체인을 활용 해 디지털 콘텐츠에 별도의 고윳값을 부여해 세상에 단 하나밖 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아이디어는 멋있었지만, 경쟁 자들이 뛰어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가격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기아가 2022년 3월에 출시한 NFT 작품은 자사 디자 이너가 직접 디자인하고 구매자에게 신차 체험 기회를 주는데도 점당 가격을 40만 원대로 낮게 책정했다.
필자가 아무리 역사적인 테마주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한들 앞 으로도 테마주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사람들의 귀에 착 달라 붙는 신기한 이름(태조이방원? BBIG?)을 만들어 낼 사람들이 넘 쳐나는 데다, 미래 전망이 밝아 끝없이 상승할 것처럼 생각되는 기업의 리스트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자문사 7공주' 혹은 'NFT 장세'가 준 교 훈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경쟁자가 일제히 공급 확대에 나서고, 신규 진입자가 나날이 늘어날 때는 테마주에서 언제든지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 2020년 봄, 코로나 팬데믹 발생 이후 한국 주식 시장은 격렬한 주가의 등락을 경험했다. 2020년 봄에는 KOSPI가 1,500포인트 아래로 무너졌지만, 2021년 봄에는 대망의 3,000포인트를 넘어서는 강세장을 기록했으니 말이다. 수 출 경기가 부진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 시행으로 내수 경기 마저 침체되었음에도,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으로 인한 성 장주 강세 현상이 주가 상승을 견인했다. 성장주는 현재의 재무적 성과가 뛰어나지 않지만,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간주되는 기업으로, 정부가 적극적인 경기 부양 정책을 펼칠 때 각광받는다. 그러나 2021년 이후 상황은 정반 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 위험이 부각되는 가 운데 금리가 상승하고 주식 시장에서의 자금 조달 규모가 늘어나며 수급 여건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2020년에 세계 에서 가장 큰 폭의 주가 상승을 기록했던 한국 증시가 2022 년에는 세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든 것을 보면, 시장의 전환점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인식하는게 성공 투자의 핵심 요인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 강남 개발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공유수면 매립 덕분 이었다.10 60년대 후반 강남에서는 "남편이나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잦은 홍수에 시 달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조선총독부가 쌓은 제방이 있긴 했지만, 이 제방은 강북에 만들어졌기에 강남 지역은 항상 홍수에 시달렸다." 지금 서울 종합 운동장이 자리 잡은 잠실이 60년대에는 섬이었다. 잠실섬 북쪽에는 신천강이 흘렀고, 지금 의 석촌호수 방향으로 흐르던 강은 송파강이라고 불렸다.
한강에 이렇게 큰 섬들이 즐비했던 이유는 60년대 중반까지 한강의 강폭이 100미터에서 최대 2,000미터 안팎으로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홍수가 발생하면서 한강의 여러 모래 섬이 물에 잠기고, 둑이 없는 곳으로 강물이 범람하는 게 일상이 었다. 이렇게 물에 잠겼다 가뭄에 뭍이 되는 주인 없는 땅이 공 유수면인데, 여기에 둑을 쌓아 땅을 말리면 훌륭한 택지가 될 수 있다.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부촌인 압구정과 반포가 바로 공 유수면 매립으로 만들어졌다. 13 압구정은 세조를 도와 쿠데타를 일으킨 한명회가 지은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곳으로, 60년대 초반에는 현재의 압구정동과 강 건너 옥수동 사이의 저자도라는 섬에 위치해 있었다. 이 섬은 풍광이 아름다워 자산가들이 별장 을 지어 놓고 즐기던 곳이었지만, 1925년 대홍수 이후 폐허가 된 채 버려진 상태였다.
현대건설은 "건설 공사용 콘크리트 제품 공장을 위한 대지조성"을 명목으로 1968년 하반기에 압구정 일대에 매립 면허를 신청했고, 1972년 12월까지 제방 및 매립 공사를 진행한 후 해당지역은 곧바로 택지로 변경되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세워졌 다. 공유수면 매립 사업은 무조건 남는 장사였기에 1970년 1월 부터 시작된 반포 매립은 현대건설 외에 삼부토건과 대림건설 등 3개의 건설사가 사업을 진행해 역시 큰 수익을 남길 수 있었다.
- 60년대 후반에 대한민국 역사상 첫 번째 부동산 붐이 발생 했는데, 이는 경제 발전 및 대규모 신도시 공급이 유발했 다. 통상적으로 공급이 확대될 때는 주택 가격이 하락하기 마련이지만, 60년대의 강남 개발 및 고속도로 건설은 부동 산 시장의 미래에 대한 낙관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 다. 더 나아가 신도시 착공에는 시간이 걸리기에 입주가 후 행적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주택 가격 급등 원인으로 작용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후에도 지속적으 로 한국 정부를 괴롭히는 요인이 된다. 공급이 주택 가격을 장기적으로는 잡을 수 있지만, 건설 초기에는 토지 보상금 을 노린 매수세뿐만 아니라 밝은 미래를 꿈꾸는 전국의 실 수요자들이 모두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 1967년 그리고 1978년 두 차례의 부동산 정점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주택 공급의 확대는 단 기적으로 더 강력한 가격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 둘째, 주택 가 격의 급등세를 꺾은 것은 강력한 주택 시장 안정 대책 시행과 함께 경기가 나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0~70년대 한국 부동산 시장의 사이클을 연구한 이들에게 80년대 후반의 주택 가격 급등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제공했음이 분명했으리라 생각된다.
- 70년대 중반 시작된 강력한 부동산 상승 사이클은 경기 둔 화 및 정부의 부동산 억제 대책으로 꺾이고 말았다.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지는 가운데 대대적인 개 발 붐이 시작되며 주택 가격이 폭등하고, 이에 대응한 정부 의 강력한 억제 대책 시행 그리고 경기 악화가 주택 가격 의 급등세를 꺽었다. 이러한 '한국형 주택 시장 사이클'이 1978년에 더욱 확실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90년의 부 동산 시장 3차 사이클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숨 가쁘게 부동산 시장 안정 대책이 발표된 끝에, 1991년부터 주택 시장이 안정세로 돌아섰다. 주택 시장 안정 대책 발표 이외에 경기 여건이 악화된 것도 주택 가격 의 급등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89년 이후 3저 호황 이 저문 데다, 국민주택 200만호 건설 과정에서 강력한 인플레 이션이 발생한 것도 주택 가격의 급등을 억제했다. 건설 부문에서 촉발된 인플레이션은 결국 시장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져, 경제성 장률을 낮추고 미래 소득 전망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 1978년 이후 12년이 지난 1990년에 한국 부동산 가격은 또 한 번의 큰 봉우리를 만들었다. 80년대 초중반의 주택 공급 부족과 3저 호황으로 촉발된 강력한 주택 수요가 거침없는 가격의 상승을 이끌었다. 특히 전세 가격 상승이 주택 매매 가격을 끌어올리는 한국 주택 시장 특유의 현상도 이때 시 작되었다. 주택 공급과 경기(실질 금리 등) 그리고 전세 가 격의 변화가 주택 시장의 흐름을 좌우하는 일은 1997년 외 환 위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한국 부동산 시장 의 법칙이니 꼭 기억해 두면 좋을 것 같다.

-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한국 부동산 시장에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약세 국면이 이어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주택 통계 작성 기관인 KB부동산에서 발표한 아파트 매매 가격 지수를 보면 1991년 평균이 33.2포인트인데, 2000년에도 30.3포 인트에 불과하다.32 반면 같은 기간 소비자 물가는 70.8% 상승했 으니 실질적인 전국 아파트 매매 가격은 거의 반토막 난 셈이다. 긴 시간에 걸쳐 부동산 가격이 꼼짝하지 못하면서 가계의 고통 은 날로 심해졌고, 미분양 주택이 급격히 늘어나는 가운데 한양 부터 우성, 신동아 등 한국을 주름잡던 건설사들이 차례대로 파 산하고 말았다. 1997년 외환 위기는 반도체 불황과 종금사의 해 외 대출 연장 실패가 주된 원인이기는 하지만, 건설 경기의 장기 불황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 결국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수도권과 지방의 양극화는 수요와 공급뿐만 아니라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된 중국 붐의 몰 락 그리고 혁신도시 건설 효과 소멸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2022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중화학 공 업의 업황이 개선되는 중이니, 2020년대에는 다시 지방 부동산 시장의 부활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식 경제로의 전 환이 가속화되는 중인데 과연 2010년 초반처럼 강력한 상승이 나타날지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 2010년을 전후해 동남벨트를 중심으로 지방 부동산 가격 의 반등이 나타났다. 특히 보금자리 주택 공급 충격 속에 수도권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었기에 지방 부동산 시장의 호조는 더욱 관심을 끌었다. 당시 동남벨트 부동산 시장의 호조는 혁신 도시와 행정 중심 복합 도시 건설 그리고 중국 붐에 기인한다. 중국 경제 성장으로 촉발된 조선과 철강, 자동차 등 중화학 공업 제품에 대한 수요가 지방 주택 수요 를 증가시킨 데다, 혁신 도시의 건설로 촉발된 인구 이동이 심리를 개선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흐름은 2010년대 중 반에 중국의 수요 위축과 함께 빠르게 소멸되고 말았다. 그림자 금융에 대한 규제와 공급 과잉 우려가 부각되는 가운 데 혁신도시 건설의 효과도 서서히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부동산 시장은 강력한 가 격 상승을 경험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저금리와 공 급 부족 그리고 임대차 3법의 효과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결과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도시 주택 가격은 소득이나 이자율에 비춰볼 때 심각한 버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버블이 형성된다고 해서 곧바로 붕 괴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실한 기초 체력은 외부 충격에 손 쉽게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인구 감소로 '잃어버린 30년'을 보내고 있다는 일본 동경의 아파트 가격이 최근 급등세를 보이는 것처럼, 주택 시장은 어떤 단일한 지표로 설명되기 어려운 복잡한 곳이다. 2022 년에 한국 부동산 시장이 금리 상승과 정부의 강력한 규제 그리고 수출 부진으로 무너진 것처럼, 잘 나가던 시장도 환 경이 달라질 때는 언제든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행히 한국은 거대한 클러스터가 존재하 며 공급도 축소되는 중이기에 인구 감소로 인한 역풍을 잘 이겨낼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모든 지역의 부동산이 함께 상승할 거라 기대하기보다는 일자리의 증감 여부 그리고 공급 문제 등을 따져 가며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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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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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수록 풍요롭다

경제 2023. 8. 11. 16:10

-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서울을 걸으면서 한국 경제의 엄청난 생산 역량을 살펴보세요. 이 모든 에너지와 자원들이 매일의 생 산을 위해 동원되고 있습니다. 광고판과 텔레비전을 뒤덮은 광고 상품들을 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바랍니다. 이 모든 생산 역량이 무엇을 위해 쓰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핵심적 필 요를 충족하기 위해 쓰이고 있나? 아니면 기본적으로 자본축적 의 이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나? 이렇게 생산력이 큰데도, 인 구의 15퍼센트가 빈곤선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은 고소득 국가들이 오래전에 지나간 일정한 지점을 넘어 서면 GDP와 사회적 지표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깨진다는 것 입니다. 좋은 삶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무엇이 관건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양질의 공공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 괜찮고 저렴한 주택 공급, 적절한 수준의 임금 등이죠. 좋은 소식은 경제를 자본축적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생태적 안정성을 중심으로 재조직함으로써, 이런 것들이 훨씬 적은 에너지와 자원을 가지고 도 충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의 모든 부문들이 언제나 성장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대신 에, 우리는 좀더 합리적인 접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경제의 어 떤 부문들(대중교통, 재생에너지, 저렴한 공공주택 등)이 여전히 확대될 필요가 있고, 어떤 부문들(SUV, 호화 주택, 공장식 축산 으로 생산된 소고기, 개인 전용기, 패스트 패션, 광고, 군비 등)이 사회적 필요성이 적으며 적극적으로 축소되어야 하는지를 결정 해야 합니다.
- 탈성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고소득 국가들이 불필요한 형태의 생산 규모를 축소하고, 동시에 공공 서비스와 주택에 대한 접 근을 확대하며, 소득 불평등을 줄이고,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완 전고용을 위한 일자리 보장제를 도입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어머어마하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구의 위험 한계선 내에서 모두를 위한 좋은 삶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 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성장주의의 폭정에서 해방시키고 보다 나은 길을 개척해야만 합니다.

- 생태적 가치를 내재한 애니미즘 논리는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에 직접적으로 반한다.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는 빼앗는 것이며, 더 중요한 점은 당신이 돌려준 것보다 더 많이 빼앗는 것이다. 사 실상 이것이 우리가 보게 될 성장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한때 애니미즘을 후진적이고 비과학적이 라고 경시했다. 그들은 애니미즘 사상이 자본주의 확장에 장애물 이라 여겼고 필사적으로 애니미즘 사상을 근절하려고 했다. 하지 만 오늘날 과학이 따라잡기 시작했다.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독립 된 개체가 아니라 주로 소화작용 같은 기본적인 기능을 의존하는 미생물 유기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식물 주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중요하다는 것과 특정 식물이 인간의 복잡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생태학자들은 나무가 생 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 소통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토 양 속 균근 네트워크를 통해 영양분과 치료제까지 공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자물리학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 이는 개별 입자들이 심지어 먼 곳에 있는 다른 입자들과 뗄 수 없 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지 구시스템과학자들은 지구 자체가 살아 있는 거대한 유기체처럼 움직인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의 그물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생각하는 방 식을 바꾸고 있고, 새로운 존재 이론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고 있 다. 지구가 생태적 재앙으로 빠져들어가는 바로 이 시점에, 우리 는 나머지 생명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래전에 잊었던 비밀, 선조들의 속삭임처럼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비밀을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 자본주의의 등장은 자연스럽고 불가 피한 과정이 아니었다. 흔히들 짐작하는 것과 같은 점진적인 '이 행'은 없었으며, 분명히 평화롭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조직화된 폭력, 대규모 빈곤, 자급자족 경제의 체계적인 파괴에 기반해 등 장했다. 자본주의는 농노제를 종식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농노 제를 폐지한 진보적인 혁명을 없애버렸다. 실제로 생산수단 전 반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존을 빌미 삼아 그들을 자본가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 농노제의 원리 를 새로운 극단으로 바꾸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에 저항했다. 산업혁명으로 향 하는 15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의 기간은 세계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격동의 시기였다.
- 요점은 유럽의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이 무릎에서 발생하지 않았 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식민자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에서 노예 노 동자들이 생산하고, 인클로저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유럽 농민들 이 배치된 공장에서 가공된 상품에 의존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별개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두 같은 프로젝트의 일부이며, 동일한 기본 논리로 운영되었다. 인클로저는 국내에서 일어난 식민지화의 과정이었고, 식민지화 는 인클로저의 과정이었다. 유럽의 농부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선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땅에서 쫓겨났다(비록 명백히 후자 가 인권, 더 나아가 인류의 영역에서조차 배제되면서 더 나쁜 대 우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노예무역은 무엇보다 신체의 인클로 저와 식민화 과정이었다. 이때 신체는 토지와 마찬가지로 잉여를 축적할 목적으로 사용되며, 토지와 동일한 방식으로 자산으로 다루어졌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었던 폭력의 순간들을 단지 일탈로 경시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순간들 은 자본주의의 기반이다. 자본주의하에서 성장은 새로운 개척지 를 필요로 하며 늘상 개척지로부터 가치를 뽑아내고는 가치에 대한 지불은 하지 않는다. 즉 자본주의는 성격상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적이다.
- 식민지 개입은 자본주의 등장에 마지막 퍼즐 조각을 더했다. 유럽의 자본주의자들은 대량생산 체계를 만들어냈다. 그러고 나 니 어딘가 팔 곳이 필요했다. 누가 이러한 생산물을 전부 소화해 줄 것인가? 인클로저가 부분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인클로저는 자급자족 경제를 파괴함으로써 대량의 노동자뿐 아니라 대량의 소비자도 양산했다. 소비자는 식량, 의복, 그밖에 다른 필수품을 얻기 위해 자본에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자들은 해외의 새로운 시 장에 침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반구, 특히 아시 아는 세계에서 가장 품질이 좋다고 인정받는 수공업을 갖고 있었 고, 자국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물품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식민주의자들은 남반구의 지역 산업을 파괴하는 불균형한 무역 규칙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식 민지가 유럽의 대량 생산품을 위한 원자재 공급처뿐 아니라 전속 시장이 될 것을 강제했다. 이것으로써 자본의 순환이 완성되었다.
- 영향력 있는 스코틀랜드 상인 패트릭 콜크훈은 빈곤을 산업화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보았다.
빈곤은 개인이 잉여 노동을 예비해놓지 않은 사회, 다시 말해 삶의 다양한 직업에서 늘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얻는 것 외에 재산상의 잉 여나 생계수단을 갖지 못한 상태와 조건이다. 그러므로 빈곤은 사회 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빈곤이 없으면 국가와 공동체가 문명 상 태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빈곤은 인간의 운명이다. 부의 원천이다. 빈곤이 없으면 노동이 있을 수 없고, 그러면 부를 소유하는 사람들에 게 재물, 교양, 안락, 이익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데이비드 흄(1752)은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희소성'에 대한 이론을 딱 부러지게 구축했다. "지나치게 심하지 않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희소성의 시기에 더 많이 일하며, 진정으로 더 잘 살게 된다는 사실이 항상 관찰된다." 27 이러한 구절들은 주목할 만한 역설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지지자들은 성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유럽이 식민지를 개척하는 기간 동안 이와 같은 전략이 전세계 의 수많은 지역에 적용되었다. 인도에서 식민지 개척자들은 자급농업을 아편. 인디고·면·밀·쌀 같은 영국 수출용 환금 작물로 전 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변화 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저항을 꺾기 위해 영국 정부는 세금을 부과했다. 세금이 농부들을 빚더미로 밀어넣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 동인도회사 그리고 이후 영 국의 인도 통치는 사람들이 의존하는 공동의 지원 체계를 해체함 으로써 변화에 속도를 내려 했다. 그들은 곡물창고를 파괴했고, 관개시설을 사유화했으며, 사람들이 목재·사료 · 사냥감을 얻는 데 이용했던 공유지에 울타리를 쳤다. 전통적인 복지제도가 음식 을 쉽게 구하고 여가를 누리는 데 익숙해지게 해 사람들을 '게으 르게' 만든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그것들을 제거함으로써 굶주 림의 위협을 가르치고, 토지에서 더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 농업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자 급 농업과 공동의 지원 체계를 파괴함으로써 농부들을 시장 변동 과 가뭄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였던 19세기 의 마지막 25년 동안 인도인 3000만명이 헛되이 굶어 죽었다. 역 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를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 E’Late Victorian Holocausts 라고 불렀다. 헛되다고 한 것은 기아가 최고 조에 달했을 때에도 식량의 순 잉여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로 인도의 곡물 수출은 1875년 300만톤에서 1900년 1000만톤으로 세배 넘게 증가했다. 인도인들의 죽음은 인위적 희소성이 초래한 새로운 극단으로, 유럽에 가해졌던 그 어떤 것보다도 끔찍했다
- 더 부족할수록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돈 을 빼앗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물처럼 풍부한 자원을 차단하고 독 점권을 얻으면, 사람들에게 사용료를 부과할 수 있으므로 사적 인 부가 증가한다. 동시에 메이틀랜드가 '개인적 부의 총합'이 라고 칭했고, 오늘날 우리가 GDP라고 부르는 것을 증가시킬 것 이다. 그러나 이는 한때 풍부하고 자유로운 이용이 가능했던 것 에 대한 접근권을 빼앗아야만 달성될 수 있다. 사적인 부는 증가 하지만 공공의 부는 감소한다. 이것은 '로더데일의 역설' Lauderdale Paradox로 알려지게 되었다.
메이틀랜드는 이 역설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식민지 개척자들이 과일과 견과류를 생산하던 과 수원을 불태웠고, 그래서 자연의 풍요로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임금노동을 하게 되었으며, 유럽의 식량을 구매할 수밖에 없 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때 풍부했던 것이 부족하게 되 어야만 했다. 아마도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영국이 인도를 식민 통치할 당시 인도에 부과한 소금 세금일 것이다. 소금은 인도의 전 해역에서 자유롭게 얻을 수 있었다. 허리를 굽혀 주워 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 정부의 세입을 창출할 계획 의 일환으로 사람들이 소금을 얻을 권리에 돈을 지불하도록 만들 었다. 공공의 부는 사적인 재산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다. 즉 커먼즈는 성장을 위해 파괴되었다.
-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연상시키는 생산주의적인 행동은 자연스럽거나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러한 피조물은 500년 동안 문화적으 로 다시 프로그래밍된 산물이다.
몸에 관한 데카르트의 이론으로 인해 인간 노동이 자기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추상화될 수 있으며, 자연과 마찬가지로 시장에 서 교환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졌다. 대지와 자연이 그랬던 것처럼 노동도 단순한 상품으로 바뀌었다. 이는 한세기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개념이었다. 인클로저가 낳은 난민들은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성장을 위해 훈련되고 통제되어야 할 노동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 인클로저와 식민지 건설은 값싼 노동의 전유도 가능하게 했다. 자본은 보잘것없는 정도라 해도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 (주로 남성들)에게 임금을 지불했던 반면, 그들을 재생산하는 노 동자들(대부분 여성)에게는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았다. 여성들 은 남성들의 음식을 만들었고 아픈 남성들을 돌보았으며, 다음 세대에 노동자가 될 이들을 양육했다. 사실상 생계수단과 임금노 동으로부터 여성을 단절시키고 재생산의 역할로만 제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가정주부의 전형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 인 클로저였다.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지배층은 잠재적인 여 성노동자 집단을 사실상 공짜로 착취했다. 이러한 과업에도 데카 르트의 이원론이 활용되었다. 이원론적 틀 안에서 육체는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졌다.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고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종속되고 통제되고 착취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41 보상은 필요 없었다. '자연'의 범주로 치환된 모 든 것과 마찬가지로, 추출의 비용이 외부화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이 식민지에서도 나타났는데 그곳에서는 한층 더 나 아갔다. 식민지 시대에 남반구의 민중들은 언제나 '자연'과 같은 것, '야만적'이고 '야생적'이며 인간 이하의 것으로 묘사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의 선주민들을 자연과 같은 것naturales 이 라고 지칭한 것은 시사적이다. 식민지의 대지와 식민화된 그들 의 육체에 대한 전유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원론이 이용되었다.
- 이원론은 유럽의 노예무역에서도 확실한 역할을 했다. 결국 어떤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려면 우선 그들의 인간성을 부정해야 한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과 아메리칸 선주민들을 물건으로 묘사 했고 그렇게 착취했다. 마르티니크 출신 작가 에메 세제르가 말 한 것처럼, 식민지 건설은 기본적으로 물화의 과정이다. 
한편 또다른 일도 일어나고 있었다. 식민화된 이들은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적 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원시적'이라고 간주되었다. 43 유럽의 식민지 개척자들과 선교사들의 저술에서 우리는 그들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세 계가 살아 있고, 산·강·동식물 심지어 대지조차 주체성과 정령을 가진, 의식이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들이 경악했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민주의적으로 전유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출량에 관한 자료는 북반구의 산업화가 '대기 절도행위'atmospheric theft라 할 수 있는, 대기권을 전유하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식민지화의 첫 단계가 남반구 전 역에서 생태 파괴와 인간 파괴를 낳았던 것처럼 현재의 대기 식 민화도 마찬가지로 파괴를 낳고 있다. 기후위기에 사실상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음에도 남반구가 기후 붕괴에 따른 영향의 대부 분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북반구가 겪는 피해를 알고 있다. 미국을 강타하는 허 리케인, 겨울마다 영국을 물에 잠기게 하는 홍수, 유럽을 타들어 가게 하는 폭염, 호주를 황폐하게 만드는 사나운 산불. 북반구에 서 벌어지는 파괴적인 이야기들이 우리의 헤드라인을 독차지한다. 언론들이 이 이야기들을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호들갑은 남반구에 가해진 재난 앞에서 무색해진다. 카리브해 지 역과 동남아시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파괴한 태풍, 중앙아메리 카·동아프리카·중동에서 사람들을 굶주림에 빠뜨리고 고향을 떠 나도록 만드는 가뭄 등의 재난은 우리의 텔레비전 화면에 아주 잠깐 등장할 뿐이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북아메리카·유럽·호주 는 기후변화의 영향에 가장 취약하지 않은 나라에 속한다. 실질 적인 피해가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정말로 디스토피아급 규모다.
이러한 불평등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식은 화폐로 환산된 비용 의 분포를 살펴보는 것이다. 기후 취약성 모니터 climate Vulnerability Monitor 라는 단체의 데이터에 따르면 남반구는 기후 붕괴로 인한 전체 비용 중 82퍼센트를 부담했다. 2010년 가뭄·홍수·산사태 · 태 풍·산불로 인해 총 5710억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28 연구자들은 이러한 비용이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30년까지 남반구는 9540억달러에 달하는 전세계적인 재난 비용 중 92퍼센트를 부담하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사망자 역시 남반구에 편중되어 있다. 2010년 데이터에 따르면 기후 붕괴와 관련된 위기, 주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인해 약 40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사망자의 98퍼 센트는 남반구에서 발생했다. 또한 사망자의 대다수인 83퍼센트 는 세계에서 탄소배출량이 가장 낮은 나라에서 발생했다. 2030년 까지 기후로 인한 사망자 수는 연간 53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 된다. 사실상 이 모든 일이 남반구에서 일어날 것이다. 기후 관련 사망자 중 단지 1퍼센트만이 부유한 국가들의 국경 안에서 발생할 것이다.
- 기후변화의 영향은 왜 이렇게 불균일하게 분포하는가? 첫번째 이유는 기후변화로 인해 강우 패턴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 문이다. 그 결과 남반구의 가뭄에 취약한 지역은 지금보다 더 물 이 줄어들 것이다. 이로 인해 농작물 수확량이 세계 평균보다 빠 르게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는 이 지역의 농업은 파괴적인 결과 를 가져올 것이다. 질병은 또다른 요인이다. 기온 상승은 말라리 아·수막염 · 뎅기열·지카바이러스 등 열대성 질병의 영향 범위를 확장시킨다. 한편 이는 오랜 기간의 식민지배와 구조조정을 겪은 남반구의 지역사회가 기후 붕괴에 대한 적응력이 가장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뭄과 홍수에 취약한 경작 한계지에 살 가능 성이 높고, 재난을 뚫고 나갈 재정적인 여유가 없으며, 쉽게 이주 하거나 새로운 생계수단을 찾기 어렵고, 자신들의 인권을 옹호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히 그렇다. 몇몇 부유한 나라들의 과도한 배출이 가난한 나라의 수십억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 은 비인도적 범죄이며, 우리는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 야 한다. 유엔의 극빈과 인권에 관한 특별보고관 필립 올스턴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후변화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가난한 사람 들에게 가하는 부도덕한 공격이다. "
- 성장에 대해 말하자면, 성장은 너무 좋게 들린다. 성장은 자연 의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데 있어 깊이 뿌리박힌 강력한 비유다. 아이가 자라고, 작물이 자라고. 그러므로 경제도 자라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레임은 잘못된 비유로 작용한다. 성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은 항상 유한하다. 우리는 아이들이 성장 하기를 바라지만 9피트(약 2.74미터)까지는 아니다. 끝없는 기하급 수 곡선을 그리듯 크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이 성숙한 지점에 다다른 다음에는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기를 바란 다. 우리는 농작물이 자라기를 바라지만 다 익으면 수확하고 새 로 심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세계에서 성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균형을 유지하는 성장이다.
- 우리가 성장의 한계에 언제 부딪힐 것인지 예측하려고 애쓰는 것이야말로 실은 성장의 한계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우리 는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기 훨씬 전에 생태계 붕괴로 빠져드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한계에 대해 생 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정치생태학자 요르고스 칼리 스가 말한 것처럼 문제는 단기적인 성장의 한계가 아니다. 그런 건 없다. 인류세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성장이 외적 한계에 부딪 힐 때까지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 우리 스스로가 성장을 제 한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경제가 지구의 위험 한계선 내에서 작 동하도록 재조직하고, 우리가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지구의 생명 시스템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 핵융합 동력에 관해 늘 하는 농담이 있다. 엔지니어들이 지금 까지 약 60년 동안 줄곧 10년 남았다고 말해왔다는 것이다. 우리 는 성공적인 융합 반응을 만들었으나 융합 과정이 에너지를 생산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현재 프랑스에서 진 행 중인 대규모 핵융합 실험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근접했을지 모르지만(그리고 어쩌면 대단한 일일 수도 있지만) 가장 낙관적 인 예측조차도 핵융합은 앞으로 10년 동안은 일어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한다. 그 이후에 핵융합 전력을 그리드에 공급하는 데 에 10년이 더 걸리고, 확대하는 데는 수십년이 더 걸린다. 흥분되 는 전망이지만 지금까지의 기록은 고무적이지 않다. 어떤 경우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금세기에 핵융합 동력을 갖게 될지 모 르지만, 안전한 탄소 예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핵융합 동력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기적적인 기술혁신이 없다면 에너지 전환은 주로 태양과 풍력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 이미 드러났다시피 부유한 나라의 자원 집중에 관한 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이 어떠한 개선도 가져오지 않았다. 서비스업은 1990년대 제조업이 쇠퇴하기 시작한 이후 급격하게 성장했다. 고 소득 국가에서 서비스업은 GDP의 74퍼센트를 차지하지만 고소 득 국가의 물질 사용은 GDP 성장을 앞지르고 있다. 실제로 고소 득 국가는 GDP 기여 측면에서 서비스 점유율이 가장 높지만 1인 당 물질 발자국도 가장 높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전세계적으로 도 마찬가지다. 세계은행의 데이터에 따르면 서비스업은 1997년 GDP의 63퍼센트에서 2015년 69퍼센트로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전세계적으로 물질 사용이 가속화되었다. 즉 서비스로 전환하는 동안에도 세계경제에서 물질 사용은 증가했다.
이 이상한 결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분적인 이유는 사 람들이 서비스 경제에서 번 소득을 결국 물질적인 재화 구매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유튜브에서 돈을 벌 수 있지만, 그 돈으로 가구나 자동차 같은 물건을 구입한다. 또다른 이유는 서 비스업 자체가 자원 집약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광 부문을 예로 들어보자. 관광업은 서비스업으로 분류되지만, 관광업을 계 속 유지하려면 물질적으로 엄청난 인프라, 즉 공항·비행기·버스· 유람선 · 리조트·호텔·수영장· 테마파크(전부 서비스업이다)가 필 요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진 데이터를 고려해볼 때, 서비스업으로 전 환하면 어떻게든 마법처럼 자원 사용이 줄어들 것이라고 믿을 이 유가 없다. 그 신화는 내려놓을 때가 됐다.
또다른 일도 일어나고 있다. 해가 갈수록 지구에서 동일한 양의 물질을 추출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지표면에 가깝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물질은 이미 다 손에 넣었다.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광물과 금속의 매장량을 소진함에 따라 우리는 더 많 은 것을 얻기 위해 점점 더 깊은 곳을, 더 격렬하게 파헤쳐야 한 다. 석유회사들은 남아 있는 매장 석유에 도달하기 위해 파쇄, 심 해 시추, 타이트오일(셰일오일) 추출 등으로 방식을 전환할 수밖 에 없다. 동일한 양의 연료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와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채굴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유엔환경계획 UNEP 에 따르면 오늘날 한세기 전보다 금속 단위당 세배 더 많은 물질이 추출되었다." 이 중 일부 금속은 금속 광석 의 품질이 저하되었는데 지난 10년 동안에만 최대 25퍼센트 감소 했다. 이는 동일한 양의 완제품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양의 광석을 추출하고 가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8 다시 말해, 광산 기술 은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채굴의 물질 집약도는 점점 더 나빠질 뿐 나아지지 않았다. 유엔의 과학자들은 이 골치 아픈 현상이 계속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 1865년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 는 다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제임스 와트는 단지 이전 방식보 다 훨씬 더 효율적인 증기엔진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와트의 증 기엔진은 산출량 단위당 석탄이 덜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와트의 엔진이 총석탄 소비를 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났다. 영국의 석탄 소비가 급증했다. 제번스는 효율성 개선이 비용을 절감했고 자본 가들이 절감된 비용을 재투자하여 생산을 확장했기 때문임을 발 견했다. 효율성 향상은 경제성장으로 이어졌고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더 많은 석탄을 소비했다. 이 이상한 결과는 제번스 역설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카줌 브룩스 공리 Khazzoom-Brookes Postulate 라고 부른 다. 1980년대에 이 현상을 묘사한 두 경제학자의 이름을 땄다. 카 줌 브룩스 공리는 단지 에너지만이 아니라 물질 자원에도 적용된 다. 에너지와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혁 신하면, 총소비는 잠시 감소했다가 훨씬 더 높은 비율로 빠르게 반등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기업들이 절감된 비용을 재투자하여 생산을 늘리기 때문이다. 결국 성장이 미치는 엄청난 효과는 가 장 극적인 효율 향상조차도 무력화한다.
- 분명하게 말하지만 기술혁신은 우리 앞에 놓인 싸움에 절대적 으로 중요하다. 사실상 필수적이다. 경제의 자원 집약도와 탄소 집약도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얻을 수 있는 모든 혁신과 효 율성 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기술과 관 계가 없다. 문제는 성장과 관련되어 있다. 거듭 반복하건대, 성장 의 정언명령이 최고 기술이 주는 모든 이익을 없애버린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혁신을 장려하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는 그렇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혁신에 잠재된 생태적 이익이 자본 자체의 논리에 제약을 받는다. 혁신 이 꼭 이럴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성장 중심 경제가 아닌 다른 종류 의 경제에 살고 있다면 기술혁신은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작동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포스트 성장경제에서 효율성 개선은 실제로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것이다. 우리가 성장의 정언명 령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러 종류의 혁신에 집중하는 데 자유로 워질 것이다. 추출과 생산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고안된 혁신이 아닌 인간의 행복과 생태적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혁신 말이다.
- 끊임없는 확장에 대한 자본의 필요가 더 나은 제품만을 만들 것이라고 가정하지 말자. 너무 순진한 가정이다. 과거에 자본이 이윤 증가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자본은 식민화, 구조조정 프로 그램, 전쟁, 제한적인 특허법, 사악한 공채증서, 토지 탈취, 민영 화, 물과 종자 같은 커먼즈 차단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이번에는 왜 다른가? 실제로 생태경제학자 베스 스트랫퍼드의 연구는 자 본이 자원 제약에 직면했을 때,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 난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본은 공격적으로 지대를 추구하는 행동 을 한다. 38 자본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공적 영역의 수입과 재산을 개인의 소유로,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부유한 사람에게로 빨아들 여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등 교묘한 메커니즘을 통해 기존 가치를 차지하려고 한다.
자, 이제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가 이론적으로는 완전히 비물질적인 재화에서 성장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 표면상으로는 좋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비물질적인 재화란 이미 풍부하고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경향이 있거나 공유하기가 매우 쉽다. 새로운 가치가 모두 비물질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서 어려움 없이 이윤을 계속 늘리기 위해, 자본은 현재 풍부하고 공짜인 비물질적 커먼즈를 인위적으로 부족하게 만들어 사람들 에게 비용을 지불하게 할 수 있다. 물이나 종자뿐만 아니라 지식, 노래, 녹색 공간, 심지어 육아, 신체적 접촉, 어쩌면 공기 자체도 사적으로 소유되고 상업화되어 돈을 받고 사람들에게 되파는 경제를 상상할 수 있다. 나머지 우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공짜로 얻던 비물질적인 것의 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더 많이 해야 할 테고, (어쩌면) 판매할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일반적인 해결 방법(자연으로부터 추출)을 차단하면 다른 해결책을 찾도록 만드는 자본의 압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장이 지닌 폭력적인 측면이다. 500년 동안 의 데이터가 현실과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하는 해결책이라고 해서 마법처럼 해롭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하다.
- 의미는 사람들의 삶에 현실적 · 물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2012년 스탠포드 의과대학 연구팀은 코스타리카의 니코야 반도를 방문 했다. 이 지역에서 나온 흥미로운 데이터를 해석하기 위해서였다. 코스타리카인들은 평균 수명 80세 정도로 오래 산다. 하지만 연구 자들은 니코야 지역 사람들이 그보다도 오래 산다는 것을 발견했 다. 이 지역의 기대수명은 85세에 달하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상한 결과다. 재정적인 면으로 보자면 니코야는 코스타리카 내에서도 가장 빈곤한 지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니코야는 전통적으로 농업 기반의 생활양식을 가지고 사는 자립 경제 subsistence economy 지역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들을 설명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코스타리카는 최상의 공중보건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니코야 사람들의 긴 수명이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 다. 식생활도 유전자도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공동체 말이다. 가장 장수하는 니코야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가족·친구· 이웃들과 견고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들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느낀다. 실제로 가장 빈곤한 가구들이 가장 긴 기대수명을 갖는데, 왜냐하면 그 들은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의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
상상해보자. 코스타리카 농촌에서 자립 생활양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 속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건강한 삶을 누린다. 북미와 유럽은 고속도로, 마천루, 쇼핑몰은 물론 큰 저택과 자동차, 화려한 제도들을 가졌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발전'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중 어느 것도 인간 진 보의 핵심 지표에 관한 한 니코야의 어부나 농부들보다 이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데이터는 차고 넘친다. 거듭 말하지만, 가장 부 유한 나라들의 특징인 넘치는 GDP로는 정말 중요한 그 어느 것도 얻지 못한다.
-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총량적 성장이 필수적이 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우리를 끔찍한 진퇴양난 속으로 밀어넣 는다. 인간의 복지와 생태적 안정성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든 다. 누구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불가능한 선택지다. 그러나 불 공평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고 나면, 갑자기 선택이 훨씬 쉬워진다. 좀더 공평한 사회에서 사는 것과 생태적 재앙의 위험 을 감수하는 것 사이의 선택.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선택이라 면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공평한 사회를 성취하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현 상태를 지속함으로써 어 마어마한 이익을 챙겨온 이들에 맞서는 거대한 투쟁을 요구한다. 어쩌면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이런 행동 경로를 피하기 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들은 지금과 같은 세계 소득분배를 유지하기 위해 지구를 희생시키는 편을 택할 것이다.
- 물질과 에너지 사용은 정치인과 경제 학자들이 GDP 성장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증가하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팽창의 정언명령에 기 반하여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좋은 삶의 계측 을 선택할 수 있겠지만, 이제까지 그랬듯 그 배후에 산업 활동이 계속 확대된다면, 생태적 곤란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이는 신체 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당신이 혈압을 점검하는 대신 매주 술집에서 열리는 퀴즈 점수나 매일 웃는 횟수 점검에 치중한다면, 해당 지표상으로는 삶이 향상될지 몰라도 당신의 신체는 여전히 어려운 상태에 처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이 있다. GDP는 경제적 성과에 대한 임의적인 계측이 아니다. 일종의 실수, 그저 수정되기만 하면 되는 계산상의 오류 같은 게 아니다. GDP는 자본주의의 복 지를 측정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되었다. GDP는 사회적·생태적 비용을 외재화한다. 자본주의가 사회적·생태적 비용을 외재화하 기 때문이다. 정책가들이 GDP 측정을 멈춘다면 자본이 계속 증 가하는 이득에 대한 끝없는 추구를 자동으로 멈출 것이며, 우리 의 경제가 보다 지속가능하게 될 거라는 상상은 순진하다. 좋은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며 이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 요점을 비켜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를 성장의 정언명령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현명해 져야 한다.
-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 채굴·생산·폐기의 미친 속도를 늦추고, 우리 삶의 미친 속도를 늦춰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의미하는 '탈성장'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탈 성장은 GDP를 줄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의 물질과 에너지 처리량을 줄여 생명세계와 균형을 이루도록 되돌리는 것, 그러면서 소득과 자원을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사람들을 불필요 한 노동에서 해방시키며, 사람들이 번영하는 데 필요한 공공재에 투자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이는 보다 생태적인 문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GDP가 천천히 성장하거나, 또는 성장을 멈추거나, 어쩌면 하락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더라 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GDP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상적 상황하 에서라면, 불황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황은 성장 의존 경제가 성장하기를 멈출 때 일어나는 재난이다. 탈성장은 완전히 다르다. 탈성장은 전체적으로 다른 종류의 경제로 전환하는 것이 다. 일단 탈성장 경제는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의 끝없 는 축적 대신, 인간의 번영과 생태적 안정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경제다.
- 여기에 역설이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합리적 효율성에 기반 하여 건설된 체제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정확히 반대다. 계 획적 진부화는 일종의 의도된 비효율성이다. 비효율성은 이윤을 극대화한다는 측면에서 (기괴하게도) 합리적이다. 하지만 인간 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는 미친 짓이다. 낭비하는 자원의 측면에서도 미친 짓이고, 불필 요한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측면에서도 미친 짓이다. 단지 계획적 진부화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빈 구멍을 채우기 위해 스마 트폰·세탁기·가구들을 만들어내느라 수백만시간을 쏟아붓는 것 을 생각해보면, 인간 노동의 측면에서도 미친 짓이다. 이건 마치 생태계와 인간의 생명을 밑 빠진 수요 항아리에 퍼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빈 구멍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이 나라 부의 40퍼센트 가까이를 가지고 있다. 하위 50퍼센트는 겨우 0.4퍼센 트만 가질 뿐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39 세계적 수준에서는 불 균형이 더욱 악화된다.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전세계 부의 거의 50퍼센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불평등이 갖는 문제는 부유층이 채굴 임대업자가 된다는 점이다. 돈과 자산을 쓸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축적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부를 외부로 임대한다(그것이 주택이나 상업 자산이든, 특허권이든, 대부든 상 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부유층이 이것들을 독점하고 있는 탓에, 다른 사람들은 임대료와 부채를 갚아야만 한다. 이는 노동력 없 이 자본만 가진 이들에게 자동적으로 축적되기 때문에 '불로소 득'passive income 이라 불린다. 하지만 부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이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히 마이너스 정도가 아니다. 사람들 은 단지 부자들에게 임대료와 빚을 갚기 위해, 실제로 필요로 하 는 것 이상을 얻으려고 더 많이 일을 하고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 이다. 거의 현대판 농노제나 다름없다. 그리고 농노제와 똑같이, 이는 우리의 생명세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농노제는 영주들 이 농민에게 토지에서 필요한 것 이상으로 생산물을 뽑아내도록 강제하는 생태적 재앙이었다. 이 모든 게 공납을 바치기 위해서 였다. 공납은 산림과 토양의 점진적 황폐화로 귀결되었다. 오늘날 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백만장자와 억만장자들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 지구를 약탈해야 한다.
- (부채탕감은) 그것이 실제 인간의 고통을 경감해주기 때문만이 아 니라, 화폐가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우리 스스로에게 환기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유익하다. 부채를 지불하는 것은 윤리의 핵심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배치한 장치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뭔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배치하는 데 동의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하지만 부채 탕감은 일회성 해법일 뿐이다. 그것은 문제의 뿌 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우리가 다뤄야 할 더 깊은 이슈가 있다.
우리 경제가 부채를 이고 있는 주된 이유는 그 자체가 부채인 화 폐체제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은행에 가서 대부를 받을라치면, 은행이 다른 누군가의 예치금들을 모아서 어딘가의 보관 금고에 저장해둔 보유고에서 돈을 꺼내 빌려준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부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은행들은 대부하 는 화폐의 대략 10퍼센트 가치 또는 그 이하의 보유고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라고 알려진 방법이다. 말하자면, 은행들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대략 열배 이상의 돈을 빌려준다. 돈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추가적인 화폐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은행들은 당신의 계좌를 평가하여 허공에서 돈을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빌려서 만드는 것이다.
우리 경제 속에 돌고 있는 화폐의 90퍼센트 이상이 이런 방식 으로 창출된 것이다. 즉 우리의 손을 거쳐 가는 거의 모든 달러 한 장 한장은 누군가의 부채를 표상한다. 그리고 부채는 이자를 쳐서 되갚아야 한다. 더 많은 노동, 더 많은 채굴, 더 많은 생산을 통해 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기이한 일이다. 은행은 무에서 공짜 로 생산한 제품(화폐)을 효과적으로 판매한다. 그런 다음 사람들에게 현실 세계로 가서 이를 지불하기 위해 실제 가치를 채굴하 고 생산하도록 요구한다. 상식을 침해할 정도로 기괴하다. 사람 들은 이게 진실일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 한다. 헨리 포드가 1930년대에 썼듯이, “아마도 이 나라의 사람들이 은행과 화폐 시 스템에 대해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보 는데, 만약 그들이 안다면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혁명이 일어 날 거라고 생각한다."
자,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은행들은 대부하는 모든 것에 원칙을 만들지만, 자기들이 지불해야 할 이자에 필요한 돈은 만들지 않 는다. 언제나 적자고 언제나 희소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희소성은 격심한 경쟁을 만들고, 모든 이들이 더 많은 빚을 지는 걸 포함 해서) 부채를 되갚기 위해 돈을 벌 방법을 찾아 나서게 한다.
- 다수의 원주민 공동체에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기술은 특히 주술사에 의해 연마된다. 20세기 대부 분 동안 인류학자들은 주술사의 역할이 인간과 조상들 사이의 매 개에 국한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많은 경우 주술사들은 인간 공 동체와 인간이 의존하는 더 넓은 존재 공동체 사이도 매개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주술사들은 다른 존재들을 친밀하게 인식하면서 성장한다. 아 마존의 주술사들은 최면과 꿈을 통해 다른 존재와 소통하며, 메다수의 원주민 공동체에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기술은 특히 주술사에 의해 연마된다. 20세기 대부 분 동안 인류학자들은 주술사의 역할이 인간과 조상들 사이의 매 개에 국한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많은 경우 주술사들은 인간 공 동체와 인간이 의존하는 더 넓은 존재 공동체 사이도 매개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주술사들은 다른 존재들을 친밀하게 인식하면서 성장한다. 아 마존의 주술사들은 최면과 꿈을 통해 다른 존재와 소통하며, 메시지와 의도를 서로에게 전달한다. 그들은 비인간 존재 이웃들 과 상호작용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생태계가 어떻게 작 동하는지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을 갖고 있다. 주술사들은 한 계 절에 어떤 종류의 물고기를 얼마나 많이 잡아도 되는지를 정확히 알며, 다음 해에는 얼마나 많이 나올지를 예견할 수 있다. 무리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원숭이를 얼마나 사냥해도 좋을지를 안다. 유실수가 언제 건강하고 언제 병들었는지를 안다. 주술사들은 숲 이 안전하게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식물과 동물 이 웃들로부터 취하지 않도록 하는 데 이 지식을 활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술사는 일종의 생태주의자와 같이 기능한다. 그들은 정글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깨지기 쉬운 상호 의존성을 이 해하고 유지하는 전문가이며, 가장 명성 있는 대학 교수가 자랑 하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식물학과 생물학 지식을 지니고 있다.
-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의 산림보전학과 교수 수잰 시마드 박사는 식물들 사이의 균근 네트워크가 인간이나 다른 동 물들의 신경연결 네트워크처럼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균근 네트 워크는 신경연결 네트워크와 놀랄 만큼 유사한 방식으로, 나무의 마디 사이에 정보를 흐르게 한다. 그리고 신경연결 네트워크가 동물에게 인지와 지능을 가능하게 하듯이, 균근 네트워크는 식물 에 유사한 능력을 부여한다. 최근 연구는 균근 네트워크가, 인간 의 신경연결이 그렇듯이, 전달·소통·협동을 촉진할 뿐 아니라 문 제해결 ·학습· 기억·의사결정까지도 촉진함을 보여준다."
이런 표현들은 그저 비유적인 것이 아니다. 생태학자 모니카 갈리아노는 식물의 지능에 관한 파격적인 연구를 출간했는데, 식 물들이 일어난 일을 기억하며 이에 따라 행동을 바꾼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식물이 학습한다는 것이다. 『포브스』와 가 진 최근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나의 작업은 결코 비유가 아닙니다. 제가 학습이라고 말할 때 그건 학습을 의미하는 거예요.제가 기억이라고 말할 때 그건 기억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식물들은 새로운 도전을 만나고 주변의 변화하는 세계 에 관한 메시지를 받아 적극적으로 행동을 바꾼다. 식물들은 감 각한다. 식물들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으며, 이에 따라 반 응한다.  덩굴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담은 저속촬영 사진을 본 적이 있다면,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덩굴은 자동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하고, 움직이고, 균형을 잡으며, 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영역을 어떻게 탐험해나갈지를 알아가려고 노력한다.
- 우리가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혹은 아마 더 친숙해진다). 시마드의 작업은 균근 네트워크를 통해 나무가 이웃들을 인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이 든 '엄마' 나무들은 자신의 씨앗에서 자란 가까운 어린 나무들을 식별하며, 이런 정 보를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활 용한다. 시마드는 식물이 동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트라우 마에 '감정적' 대응을 갖는지도 설명한다. 칼질을 당한 후, 진딧 물의 공격을 받을 때, 식물의 세로토닌 수치가 변화하며(그렇다, 식물은 동물의 신경 시스템에 공통적인 다수의 신경화학물질과
더불어 세로토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다른 이웃들에게 비상 신 호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 탈성장은 땅과 사람 심지어 우리 마음의 탈식민화를 나타 낸다. 커먼즈의 인클로저 해체, 공공재의 탈상품화, 노동과 삶의 탈집약화를 나타낸다. 인간과 자연의 탈물화를, 그리고 생태 위 기의 가속화 중단을 나타낸다. 탈성장은 덜 취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결국 가능성의 지평 전체를 열어젖힌다. 탈성장은 우 리를 결핍에서 풍요로, 추출에서 재생으로, 지배에서 호혜로, 외 로움과 분리에서 생명이 약동하는 세계와의 연결로 데려다준다. 결국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서로와 맺는, 그리 고 생명세계의 나머지와 맺는 물질적 관계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관계가 어떠하기를 바라는가? 지배와 추출의 관 계이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호혜와 돌봄의 관계이기를 바라는가?

- 이 책을 시작할 때, 나는 탈성장을 핵심 프레임으로 쓰는 것을 우려했다. 탈성장은 결국 단지 첫걸음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여정을 생각해보면, 탈성장 또한 그 이상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탈성장은 우리로 하여금 이 도전에 접근하는 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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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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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공황

경제 2023. 8. 8. 17:12

- 역사적으로 팬데믹은 우리 인간이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세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팬데믹은 한 세상과 다른 세상 사이에 놓인 문이나 다름없다.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 Roy, <파이낸셜 타임스> (2020년 4월 3일))
- 바이러스란 무엇일까? 과학자들도 이 질문에 확실하게 답하지 못 한다. 물론 그들은 바이러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한 세기에 걸쳐 엄청난 과학적 진보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 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의학계의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존 M. 배리 John M. Barry가 그의 저서 《대 인플루엔자The Great Influenza>에서 설명한 것처럼, 바이러스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바이러스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영양분을 섭취하거나 산소를 연소시키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그 어떤 대사 작용도 하지 않는 다. 노폐물을 배설하거나 교배하지도 않는다. 우연이든 의도적으로든 어떤 부산물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또 독립적으로 증식하지도 못한다. 바이러스는 완전히 살아 있는 생물체와 비활성 화학 물질의 집합체, 즉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형이다.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조차 바이러스가 생물체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한때 더 복 잡한 형태의 생물체였다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진화한 원시 생물체 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또 어떤 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진화가 아 닌 퇴화의 결과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바이러스가 더 고등한 생물체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단순화되거나 퇴화했다는 것이다. 또 세포 유전체 일부가 세포에서 떨어져 나와 독특한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가 됐지만 완전한 생물체는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인류는 바이러스가 살아 있는 생물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 에서 현미경이 아니면 볼 수도 없는 바이러스와 이제 막 싸움을 시 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바이러스는 복제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바이러스는 단독으로는 복제하지 않고, 살아 있는 세포에 침투해 숙주 세포의 에너지와 DNA를 넘겨받아 자신의 유전 정보 (DNA보다 간단한 구조를 가진 RNA에 부호화된 유전 정보)를 저장한 다음, 숙주 세포가 수천 개에 달하는 바이러스를 복제하도록 명령한다. 복제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숙주 세포벽이 파괴되고 복제된 바이러스들이 방출된다. 방출된 바이러스들은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바이러스 개체 수를 크게 늘린다. 그렇게 증식한 바이러스 무리가 세포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 바이러스는 유전 부호가 담긴 타원형 외피일 뿐이다. 바이러스 복 제의 핵심은 그 외피의 표면에 돋아나 있는 돌기에 있다. 인플루엔 자 바이러스의 경우, 표면에 두 가지 유형의 돌기가 있다. 하나는 창 처럼 생긴 헤마글루티닌 hemagglutinin (H) 돌기고, 다른 하나는 가시나 무같이 생긴 뉴라미니다아제 neuraminidase (N) 돌기다. 헤마글루티닌 돌기는 배리의 말처럼 '해적이 선박에 던지는 쇠갈고리처럼' 숙주 세포에 딱 달라붙어 침입을 시작한다. 뉴라미니다아제는 숙주 세포 표면에 있는 시알릭산sialic acid을 제거하는 파성퇴(적의 배를 파괴하기 위해 뱃머리에 달아 사용하는 뾰족한 쇠붙이를 말한다_옮긴이) 역할을 한 다. 숙주세포 표면에 시알릭산이 남아 있으면 복제된 바이러스들 이 세포 밖으로 방출되면서 표면에 엉겨 붙을 수 있다. 뉴라미니다 아제 덕분에 시알릭산이 제거되고 새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건강 한 세포를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게 된다.
- 장기 불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불황'의 진정한 의미 를 알 수 있다. 불황은 지속적인 생산량 감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불 황은 경제 성장 추세에 비해 침체된 성장을 의미한다. 만약 경제가 3% 성장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2% 성장에 머 문다면, 경제 성장이 침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호황기에도 생 산량이 감소할 수 있는 것처럼, 불황기에도 경제는 성장할 수 있다. 핵심은 분기별 성장률이 아닌 잠재성장률 대비 장기 성장 추세에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불황을 아 주 잘 정의했다. 케인스는 불황을 "경제가 회복되거나 완전 붕괴로 치닫고 있음을 나타내는 어떤 뚜렷한 추세 없이 침체된 경제 활동이 장기간 지속하는 만성적인 상태"라고 정의했다.
- 코로나19의 웨트 마켓 발원설의 경우, 그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실 적 근거는 거의 없지만 반박하는 사실적 근거는 많다. 연구소 발원 설의 경우, 그 견해를 반박할 만한 사실적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지 만, 그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실적 근거는 충분하다. 그러나 현재로 서는 둘 다 합리적인 추정에 불과하다.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정보 분석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연구소에서 유출되지 않았다면 중국은 왜 증거를 없앴을까? 연구소에서 바이러스가 유출된 게 아니라면 중국은 왜 생화학전 전문가인 중국 인민 해방군 소장에게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를 맡겼을까?
박쥐 코로나바이러스의 살아 있는 균주와 열악한 안전 관리 전적을 갖고 있는 연구소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유출 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박쥐를 판매하지도 않고 160km 이내에서는 박쥐를 발견할 수도 없는 우한에 위치한 웨트 마켓이 박쥐 바이러스의 발원지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중국에서 처음 확인된 코로나19 확진자 4명 중 3명이 발병 전 우한의 웨트 마켓에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할 때, 그 웨트 마켓이 인간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원지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중국이 숨길 게 없다면 미국에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정교한 대외 선전은 왜 펼쳤을까?
- 중국 정부 최고위급 인사와의 만남이나 우한에서의 현장 조사 없이는 위의 질문 중 어떤 질문에도 확실하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현 재 독립적인 수사관들은 중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만날 수 없고 우한에서 현장 조사를 벌일 수도 없다. 또 상당히 많은 관련 증거가 이미 폐기됐으며, 핵심 증인들은 실종됐다.
확인된 증거, 추론, 조건부 확률을 바탕으로 답을 찾기 위한 질문 의 틀은 이미 잡혀 있는 상태다. 결론은 각 확률을 곱해 얻을 수 있 다. 이 같은 방법을 활용해 얻은 증거는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출됐다는 결론을 강력하게 뒷받침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정권이 교체되고 수십 년이 지나 중국의 비밀문 서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결코 진실을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출처가 웨트 마켓이든 연구소든 그 사실 여 부와 상관없이 중국은 전 세계적인 유행병으로 야기된 경제적 피해 와 인명 피해에 대한 자국의 책임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코 로나19 정보 은폐는 설사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화난수산물도매시 장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형법상 과실이 될 것이다. 만약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연구소에서 나왔다면, 중국의 정보 은폐는 반인륜적 범죄에 해당한다.
- 스페인 독감은 전 세계적으로 4000만 명, 즉 당시 세계 인구의 2%에 해당하 는 인류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늘날로 치면 전 세계에서 1억 50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셈이다. (...) 그렇다면 이 무자비한 팬데믹이 어째서 경제 는 무너뜨리지 못했을까? 그 답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간단하다. 필요에 의해 서든 선택에 의해서든 사람들이 그 상황을 받아들인 채 계속 살아나갔기 때문 이다.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 (2020년 5월 28일))
 시장 붕괴는 보통 미래 세대도 그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날짜를 가지고 있다. 1869년 9월 24일 검은 금요일Black Friday은 제이 굴드Jay Gould와 빅짐 피스크Big Jim Fisk의 금시장 매점 시 도로 시장이 붕괴됐던 날이다. 1929년 10월 28일 검은 월요일 Black Monday은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 Dow Jones Industrial Average가 하루 만에 12.82% 하락해 대공황이 촉발된 날이었다. 그 다음날인 29일 다우 지수가 11.73% 더 하락하면서 이틀 만에 총 23%가 하락했다. 1987 년 10월 19일에는 다우지수가 하루 만에 22.6% 폭락해 역사상 일간 최대 하락률을 기록한 또 다른 검은 월요일이 발생했다. 오늘날 대 부분 사람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파산 사례인 리먼 브라더스 Brothers 파산이 발표된 2008년 9월 15일을 기억한다. 그날 주식 시장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고, 다우지수는 4.5% 하락했다. 그러나 그날의 하락은 2009년 3월 6일 다우 지수가 바닥을 치기 전까지 추가 로 39% 더 떨어진 계단식 하락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 날짜들이 상 징적이기는 하지만, 그 사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개별적으로 발생 한 것은 아니었다. 1869년 금 매점 시도로 인한 붕괴는 금을 사재기 하면서 금값이 폭등한 뒤에 발생했다. 1929년 10월 28일 검은 월요 일 폭락은, 개장과 동시에 11% 하락했다가 하락세가 회복하면서 약 2% 하락으로 장을 마감했던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이어 발생했 다. 마찬가지로 2008년 3월부터 7월 사이 베어스턴스 Bear Stearns 패 니매 Fannie Mae, 프레디맥Freddie Mac의 순차적 붕괴 소식이 시장에 영향 을 미치면서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발생하기 훨씬 전부터 증시는 하 락하고 있었다. 엄청난 시장 붕괴는 보통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 각하고 심각한 경고들을 흘려 들은 이후 발생했다.
-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은 경기가 아주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고 주 장하면서 강력한 경기 회복의 증거로 증시를 꼽고 있다. 미국 증시 는 2020년 4월 말부터 9월 초까지 강력한 실적을 내면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손실을 거의 회복할 정도로 상승했다. 그러나 이 런 증시 회복은 경기 회복을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현 단계에서 주 식 시장과 실물 경제는 따로 움직이고 있다. '떨어질 때 매수'를 하 고 주요 뉴스를 추적하고 주가 모멘텀을 강화하도록 프로그램화된 로봇에 의해 주가가 결정되고 있다. 주가 지수는 대부분의 개인과 기업들이 직면한 어려운 위기 상황에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일 부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2020년 4~9월 증시는 기술과 금융에 대 한 전망을 단기적으로나마 말해 주고는 있지만 실업률, 경제 성장 률, 붕괴하고 있는 정부의 현금 흐름, 경기 회복에 대해서는 아무것 도 말해 주지 않는다.
신 대공황이 우리 앞에 닥쳤다. 데이터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당 장은 주식 시장이 그 사실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결국 인정하게 될 것이다. 신 대공황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곧 실감하게 될 것이다. 
- 가장 엄격하고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향후 몇 년간 경제가 저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조차 현 상황을 과소평가한 전망이 되고 만다. 가장 확실한 증거에 기반한 연구 결 과는 앞으로 30년간 저성장이 지속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2020년 3월 캘리포니아 대학의 두 학자가 발표한 연구 논문 <팬데믹이 경 제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 Longer-Run Economic Consequences of Pandemics>에 는 1347년 발생한 흑사병을 포함한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팬 데믹들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분석한 내용이 담겨 있다. 13 두 저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팬데믹의 엄청난 거 시 경제적 파장은 약 40년 동안 지속되고 실질 수익률 역시 크게 하 락한다. (...) 팬데믹이 미치는 영향은 수십 년간 지속된다.(...) 팬데 믹이 만들어 낸 결과들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이해를 돕자면, 논문 에서 연구 검토한 팬데믹 15개 중 현재의 코로나19 팬데믹 사망자보 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낸 팬데믹은 4개뿐이다. 
- MMT 지지자들이 말하는 두 핵심 기관은 바로 연방준비제도와 미 국 재무부다. 연준과 재무부는 따로 만들어졌고 서로 다른 지배 구 조를 갖고 있지만, 두 기관은 다각도로 협력하며 일하고 있다. 재무 부는 연준에 계좌를 갖고 있으며, 연준은 찍어 낸 돈으로 재무부 채 권을 사들이고 수익을 재무부에 송금한다. 그러나 이 두 기관 사이 에는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이 존중하는 경계가 존재한다. 재무 부는 화폐를 발행하지 않는다. 재무부 지출은 의회가 승인하지 않거 나 연준이 낮은 금리와 자산 매입으로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제약을 받게 된다.
MMT는 이 같은 한계를 부정한다. 실제로 MMT 학자들은 재무부 와 연준을 하나의 단일 개체로 본다. MMT 모델에서 재무부는 지출 을 통해 화폐를 발행하는 주체가 된다. 재무부가 지출을 하면 연준 은행 계좌의 잔액은 줄어들고, 재정 지출의 수혜자인 국민이나 기업 의 민간 은행 계좌의 잔액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재무부가 지출을 하면 민간 부문의 부가 증가하게 된다. 재무 부가 지출을 늘릴수록 민간 부문이 더 부유해지는 것이다. MMT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허풍을 떨듯 묻는다. "재무부가 돈을 쓰지 않으면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MMT 옹호론자들은 화폐가 재무부 지출을 통해 처음 생겨나고 국 가 권력에 의해 통제된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지출할 수 있는 돈의 양에는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그게 사실 이라면, 빈곤에서 인프라, 교육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정부 지출로 해결하지 못할 사회 문제가 없다. 재무부가 돈을 빌리고 지출을 늘려도 나라는 더 가난해지지 않는다. 재무부가 지출한 돈은 곧 수혜자들의 재산이 되므로 그 나라는 더 부유해지는 셈이 된다.
- 현대화폐이론은 1년 안에 정부의 적자 지출을 조지 워싱턴부터 빌 클린턴에 이르는 모든 대통령 임기 동안 누적된 국가 부채보다 더 많은 양으로 늘리기를 바라는 국회의원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이론이었다. 의회는 정부 지출에 개의치 않겠지만, 1년간 재정 적자 가 GDP의 2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지켜 줄 지적 방어 수단이 필요할 것이다. 듣기에 꽤 그럴싸한 현대화폐 이론은 적극적인 재정정책의 근거로 삼기에 제격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그 이론의 결함이 드러날 때쯤이면, 정부가 푼 돈은 온데 간데없이 다 사라져 버리고 미국 국민들이 그 뒷수습을 하게 될 것 이다.
- 현대화폐이론은 새 병에 담긴 오래된 포도주다. 그 오래된 포도주 는 시민들이 세금을 화폐로 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가 화폐의 가치를 통제할 수 있고 화폐를 무제한으로 발행할 수 있다는 믿음으 로 만들어졌다. 정부가 발행한 화폐가 세금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수 단이라면, 시민들은 탈세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는 것을 피하기 위 해 정부가 공인한 화폐를 얻어야 한다. 즉 다른 선택권이 없는 폐쇄 된 시스템이다. 새로운 병들은 MMT와 접목시킬 수 있는 보편적 의 료 보장 제도, 무상 교육, 무상 보육, 기본 소득 보장 같은 진보적인 프로그램들의 위시 리스트로 만들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이와 같은 정책 제안들은 '재정적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쉽게 좌절됐다. 오늘날 MMT 옹호론자들은 이론상으로 꽤 그럴듯한 오래된 경제 이론을 근거로 “그럼요, 우린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 답하고 있다. 난감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은 한때 적자 지출에 한계 가 있다는 인식을 가졌다가 이제 그 한계를 전혀 살피지 않는 국회 의원들(그 한계에 대해서는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이견을 보이고 있다) 일 것이다. 재정 지출을 늘려 코로나19 팬데믹과 경제 불황으로 인한 문제들을 당장 해결할 수 있다고 하니 그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 소비자들이 지출을 늘리기보다 빚을 갚고 저축을 늘릴 경우, 연준 이 통화량을 늘리지 않는 한 화폐유통속도와 GDP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연준은 화폐유통속도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명목 GDP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찍어 내고 있다. 연준은 1930년대부터 이 문제를 외면해 왔다. 화폐유통속도가 0에 근접하면 경제 성장 역시 0에 근접할 수밖에 없다. 화폐 발행은 아무런 힘이 없다. 7조 달러 곱하기 0은 0이다. 은행이 대출을 해 주지 않아 통화량 확대 메커니즘이 깨질 경우 소비자 불안으로 인해 화폐유통속도가 떨어지면서 경제 성장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화폐유통속도가 뒷받침되지 않으 면 경제 성장이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를 문제의 핵심으로 이끈다. 본원통화 같이 연준이 통 제할 수 있는 요인은 경제를 살리고 실업률을 낮출 수 있을 만큼 빠 르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연준이 더 박차를 가해 집중해야 할 요 인은 지출 형태의 은행 대출과 화폐유통속도다. 지출은 대출 기관과 소비자의 심리, 즉 기본적으로 행동 현상에 의해 이뤄진다. 연준은 소비자의 행동 양식을 바꾸고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치를 바꾸는 법을 잊어버렸다(한때 그 방법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인플레이션은 통화주의자와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의 엉터리 이론과 달리 통화량과는 거의 아무 관계 가 없다.
20세기 이후 미국의 두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소비자의 기 대 심리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두 대통령 모두 같은 기 술을 사용했다. 한 대통령은 계획적으로, 다른 대통령은 우연히 그 기술을 사용했다. 한 대통령은 미국 경제를 살렸고, 다른 대통령은 경제를 거의 망가뜨렸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과 같다. 결과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화폐유통속도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의 증가 없이는 디플레이션의 깊은 구렁과 점점 악화되는 불황을 피할 길이 없다.
- 시간이 지나면서 GDP 대비 부채 비율은 70~80%까지 늘어나 게 된다. 정치적 지지층은 정부 지출에 힘입어 형성되고 발전한다. GDP 대비 부채 비율은 점점 늘어나지만, 정부 지출로 얻는 결실은 점점 작아진다. 더 많은 정부 지출이 각종 재정 지원 혜택, 수당, 수익 을 창출하기 어려운 공공 편의 시설, 지역 사회 기관, 공무원 노동조 합 등에 투입된다. 그러면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기 시작 한다. 그러나 적자 지출과 공공재에 대한 대중의 욕구는 결코 채워지 지 않는다. 결국 GDP 대비 부채 비율은 90%를 넘어서게 된다.
라인하트와 로고프의 연구에 따르면, GDP 대비 부채 비율 90% 는 단순히 높은 수치가 아니라 물리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임계 문턱 값critical threshold 이다. 어떤 값을 기준으로 단계적 전환이 일어나 상태 가 달라지는 경우, 그 값을 임계 문턱값이라고 부른다. 임계 문턱값 인 GDP 대비 부채 비율 90%에 다다르면, 일단 먼저 케인스 승수가 1이하로 떨어진다. 부채 1달러를 지출하면 1달러 미만의 GDP가 증 가한다는 의미다. 즉 부채를 늘려도 순 성장net growth이 일어나지 않 고, 부채에 대한 금리가 상승하면서 GDP 대비 부채 비율은 증가한 다. 현재 코로나19 팬데믹 관련 부채의 경우, 그 규모가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게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GDP 대비 부채 비율이 라인하트-로고프의 90% 임계치를 이미 넘어선 상태에서 급격한 부채 증가가 추가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 채권단은 정책 입안자들의 정책 변경이나 경제 성장을 통해 GDP 대비 부채 비율이 자연스럽게 낮아질 것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더 많 은 국채를 계속 사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한다. 말 그대로 헛 된 희망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는 빚에 중독돼 있고, 빚 중독은 빚 중독자들을 계속 유인한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신용 시장으로 자국에서 발행한 화폐로 필요한 자금을 차입한다. 이런 이 유만으로도 미국은 다른 국가들보다 지속 불가능한 부채 동학 debt dynamic을 더 오랫동안 밀고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언제 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라인하트와 로고프의 2010년 논문 <다시 보는 부채와 성장 Debt and Growth Revisited>에 담겨 있다. 두 저자가 내린 결론의 요점은 GDP 대 비 부채 비율이 90%를 넘어서면 “경제 성장률의 중간값median은 1% 감소하고 평균값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감소한다"는 것이었다. 또 라인하트와 로고프는 "부채와 성장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비선형성 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부채 비율 debt to equity ratio이 90% 미 만인 경우, "부채와 성장 사이에는 체계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달리 말하면, 부채 비율이 낮을 때에는 부채와 성장 사이의 상관관계가 높지 않다. 세금, 통화, 무역정책을 포함한 모든 요인이 성장을 이끈다. 그러나 그 비율이 90% 임계치를 넘는 순간 부채가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된다. GDP 대비 부채 비율이 90%를 넘어서면, 경제는 부채의 한계 수확marginal returns 체감과 저성장을 거쳐 결국 채무 불이행, 인플레이션, 재협상을 통 해 디폴트에 빠지고 마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국가 신용 등급은 디폴트 단계로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 전에 먼저 저성장 장기화, 임금 상승률 둔화, 소득 불평등 심화, 사회적 분열 등 곳곳에서 불만이 쏟아지지만 해결책은 찾을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널리 인정받고 있는 다른 연구들 역시 라인하트-로고프 연구와 같은 결론을 내놓고 있다. 라인하트와 로 고프는 이 분야에서 선두를 달렸을지 모르지만, 늘 평탄한 길만 걸 어온 것은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 경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미 도달했을 수도 있다는 증거는 계속 쌓이고 있다.
- 결국 마지막 종착지는 미국 국채와 달러에 대한 신용의 급격한 붕괴가 될 것이다. 이는 정부가 계속 투자자의 달러를 끌어들여 자금 을 조달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금리가 인상되면 적자가 더 늘어나면서 부채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다. 아 니면 MMT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연준이 부채를 화폐화할 수 도 있지만, 이는 국가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또 다른 방법에 불과하 다. 부채 함정에서 벗어나겠다고 빚을 내고, 유동성 함정에서 빠져 나오겠다고 돈을 찍어 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20년은 더 저성장, 긴축 재정, 금융 억압(financial repression, 정부가 부채 상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펴는 등 금융 시장에 적극 개입해 시장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것을 말한다_옮긴이),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 격차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향후 20년간 우리가 마주할 미국의 경제 성장은 지난 30년간 일본 이 보여 준 경제 성장과 비슷할 것이다. 경제 붕괴까지는 아니더라도 장기간 경기가 침체되면서 저성장이 이어지는 상태, 즉 장기 불 황을 겪게 될 것이다.
- 독일 기업가 휴고 스티네스Hugo Stinnes는 1920년대 초 바이마르 초 인플레이션 Weimar hyperinflation이 극에 달했을 때 많은 엄청난 부를 축 적했다. 스티네스는 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 1924년부터 1948년 6 월 10일까지 독일에서 사용한 통화다_옮긴이)를 빌려 실물자산을 사들였 다. 라이히스마르크 가치가 폭락하는 동안 실물자산의 가치는 급등 했다. 그는 그 가치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라이히스마르크 은행 대 출금을 상환했고, 실물 자산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의 별명은 독일 어로 Inflationskönig, 즉 '인플레이션의 왕'이었다.
1920년대 후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부친 조지프 P. 케네디 Joseph P. Kennedy는 월스트리트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먼저 버블 시기에 주식을 늘린 다음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 때 공매도를 했다. 당 시 투자자 대부분이 전멸했지만, 케네디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됐다.
-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가 사회 질서라고 말하는 그 평범한 습관들이 사회 질서를 고꾸라뜨리는 일련의 사건이 시작되는 데에도 딱 들어맞는다는 사실이었다. (H. G. 웰스H. G. Wells,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1898))
-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다. 시장은 문제가 생길 조짐만 보여도 얼어 붙는다. 계속 일정한 가격 범위를 오가며 움직이지도 않는다. 주가 가 큰 폭으로 상승하거나 하락하며 널뛰기를 하기도 한다. 이때 전 략적으로 주식을 매수하거나 매도하면 수익을 낼 수 있다. 이게 바 로 시장이다. 시장이 효율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눈 가리고 아 웅 하지 마라.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적 시장 가설이 투자 자들을 인덱스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그리고 '시장은 이길 수 없 다'는 신념 아래 시장의 효율성을 믿고 그대로 따라가는 패시브 투 자로 몰아가는 데 이용됐다는 사실이다. 효율적 시장 가설은 계좌 잔고와 신규 금융 상품 판매를 기준으로 수수료를 챙기는 월스트리트 자산 관리사들에게는 꽤 유용한 가설이다. 거의 매 10년마다 30% 혹은 그 이상의 손실을 감수하며 잃어버린 자산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투자자들에게는 이로울 게 없는 가설이다. 여러분은 합리적 예측, 마켓 타이밍, 합법적인 내부 정보를 활용해 시장을 이길 수 있다. 프로는 그렇게 투자를 하고, 로봇 도 마찬가지다. 일반 투자자 역시 시장을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투자할 수 있다.
- 2016년 나는 TV 방송에 출연해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영국 유권자들이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당시 힐러리 클린턴이 승리할 것이고 영국은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두 경우 모두 여론 조사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 레이하운드(미국의 버스 회사다_옮긴이) 버스에 붙은 외부 광고 수를 세고, 복음주의가 널리 퍼져 있는 오자크 산지를 방문하고(미국 복음 주의 기독교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이다_옮긴이), 택시 기사, 호텔 직원, 런던의 바텐더들과 매일 대화를 나누며 얻은 경험적 정 보를 활용했다. 월스트리트 분석가들에게 책상에 앉아 컴퓨터 스크 린만 보지 말고 사무실 밖으로 좀 나가 보라고 충고하곤 하지만, 그 충고를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 학계 경제학자들과 월스트리트 분석가들 은 역사를 경멸하거나 그냥 무시해 버린다. 역사는 수량화할 수 없 고 방정식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 손해다. 역사보다 더 나은 스승은 없다. 각 사건은 반복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패턴은 반 복된다. 역사를 그대로 수량화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인지 지도 cognitive map를 통해 요인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교점을 만들어 활용 할 수 있다. 서로 연결되는 교점의 상호 작용 강도를 수량화하면 된 다. 복잡성 이론은 그 인지 지도를 그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고, 베 이즈 정리는 교점으로 만들어진 결과에 수적 강도를 부여하는 데 사 용될 수 있다. 이는 여러 학문 분야가 서로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 를 보여 준다.
- 1933년 미국은 뱅크런(은행 고객들의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말한다_ 옮긴이)에 시달리고 있었고 미국 역사상 가장 극심한 디플레이션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1933년 3월 플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가 대통 령이 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시민들이 부를 지키기 위해 금 을 사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금을 사들이느라 소비는 뒷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저축을 늘리고 소비를 줄이는 것 과 비슷하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금괴가 달러로 바뀌었을 뿐 이다. 루스벨트는 소유한 모든 금을 온스당 20.67달러로 미국 재무부에 가져다 팔 것을 요구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오늘날 연준 이 채권을 사들여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루스벨트는 금을 사들여 유동성을 공급했다. 그는 행정 명령만 내린 게 아니라 금 공개 시장에서 금을 계속해서 사들였다. 미국에서 매입할 금을 찾기 어려워지자 루스벨트는 외국의 금 딜러들을 통해 금을 매입했 다.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금을 사들여 경제에 달러를 투입했다. 루스벨트는 또 금값을 서서히 올렸다. 루스벨트는 1933년 10월에서 12월 사이 미국 정부의 금 매입에 속도가 붙자 금 가격을 조금씩 올 렸다. 애미티 슬래이스Amity Shlaes는 자신의 책 《포가튼 맨The Forgotten Man》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느 날 아침, 루스벨트는 금값을 21센트 인상할 생각이라고 참 모진에 말했다. 어째서 21센트죠? 참모진이 물었다. 루스벨트는 "행운의 숫자거든요. 3 곱하기 7은 21이죠.”라고 답했다. 모겐소 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행운의 숫자 조합 같은 것으로 금값을 정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았다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 당시 루스벨트는 다른 이들과 달리 금의 달러 가격을 인상해 달 러화를 평가 절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금의 달러 가격 을 올리면 경제적 변화가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달러화를 평가절하 하면 금값이 상승하고 다른 모든 것도 가격이 상승하게 된다. 루스 벨트는 바로 그 점을 노렸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디플레이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인플레이션을 유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금의 달 러 가격을 올린 것이다. 루스벨트의 정책은 사실 금이 아닌 달러화 를 겨냥한 정책이었다. 1933년 10월 22일 루스벨트는 국민과 소통 하는 라디오 담화인 노변담화 Fireside Chat를 통해 달러화를 계속 조정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청취자들은 루스벨트 의금 몰수 정책이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당시 그 노 변담화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밀Wheat 선물 가격은 40%나 상승했다. 루스벨트의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물가가 상승하고 증시가 회복되 면서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다(1938년 연준에 의해 다시 경기 회복이 좌절됐다). 루스벨트에게 디플레이션은 적이었고 인플레이션은 동지 였다. 루스벨트는 은행과 연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의 달러 가격 을 인상해 인플레이션을 달성했다. 그는 1934년 1월 금의 달러 가격 을 온스당 35달러로 고정시키면서 통화정책에 대한 그의 실험을 성 공적으로 마무리했고, 그 고정 환율은 1971년까지 유지됐다. 1933 년 3월에서 12월 사이 금의 달러 가격은 69.3%가 올랐다. 금의 무게 로 값이 매겨지는 달러는 같은 기간 41%나 평가 절하됐다. 불과 9개 월 만에 강력한 인플레이션 발생했다.
 1971년 리처드 닉슨도 달러화를 평가절하하기 위한 정책에 돌입 했지만, 그가 퇴임하고 6년 후인 1980년까지 그 과정은 제대로 마 무리되지 못했다. 닉슨은 루스벨트 때와는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1971년에는 디플레이션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 달 러화를 불신하게 된 교역 상대국들이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는 움직 임이 거세지면서 포트녹스(Fort Knox, 미국 정부의 금을 보관하는 금고가 있는 미 육군 기지다_옮긴이)에서 금이 대량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1971년 8월 15일 닉슨은 각국이 가지고 있는 달러를 미국 자산에 투 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달러를 금으로 바꾸는 태환 제도는 '일시 적으로' 중단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루스벨트가 했던 것처럼 달러화 를 평가절하하고 새로운 금 고정 환율을 채택하려던 닉슨의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교역 상대국들은 변동환율제로 이행했고, 금태환 제도는 재개되지 않았다. 1974년 미국인들은 1933년 이후 처음으로 다시 금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부의 금본위제가 아닌 개인의 금본위제 시대가 열렸다. 루스벨트는 자신이 목표한 인 플레이션을 달성한 후 새로운 금본위제로 돌아왔고, 사실상 그 인플레이션 지니(genie,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을 말한다_옮긴이)를 다시 병속 에 집어넣었다. 1971년 이후, 금본위제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인 플레이션 지니는 제멋대로 날뛰었다. 1979년 인플레이션은 13.3% 를 기록했다. 19080년 1월 금 가격은 온스당 800달러에 달했다. 금 리를 18%로 인상하고 1981~1982년의 심각한 경기 침체를 겪고 나 서야 비로소 인플레이션 지니를 다시 병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 지니는 그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금을 이용한 루스벨트의 정책은 세심하게 통제되면서 성공작이 됐고, 닉슨의 정책은 임기응변식 대응이 되면서 엄청난 실패작이 됐다. 루스벨트는 경제 성장을 활성화해 미국이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닉슨은 초인플레이션 직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발생한 경기 침체로 미국 경제에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역사는 달러와 금의 관계에 개입하 는 일이 마치 원자로의 제어봉을 작동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보 여 준다. 제어봉을 실수 없이 올바르게 작동하면, 원자로는 유용한 에너지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제어봉을 잘못 작동했다가는 원자로 의 노심이 녹아내리는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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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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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니스

경제 2023. 6. 5. 16:39

- 영어에서 현금을 의미하는 캐시cash는 과거에 전혀 다른 뜻이었다. 1490년대 포르투갈 사람들이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유럽에서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후 합금이 아닌 철로 만든 작은 동전이 중국에 전래됐다. '캐시cash'로 불리는 주화였다. 캐시는 고대 인도의 드라비다족이 썼던 타밀어에서 유래한 말로 '저급한 주화'를 뜻한다. 타밀어가 지리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더 넓은 지역 으로 확장된 셈이다. 은행권이 등장한 18세기 이후에 캐시는 은행이 가지고 있는 금화나 은화를 뜻하게 되었다. 지금은 중앙은행이 발행 한 은행권이나 주화를 의미한다. 캐시는 거래 상대를 믿지 못하는 불안감에 마침표를 찍는 제왕(cash is king)으로 불리기도 한다.
- 인류 역사에서 돈은 거대한 변화 또는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장치다. 돈의 DNA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기는 새로운 도전 과제이기도 하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 겠지만 인류학자들이 보는 돈은 기원전 3000년 전후 바빌로니아에 서 발명됐다. 그때 위기 또는 해결 과제는 도시화였다.
이전까지 식량을 채집하거나 경작한 곳과 거주지 사이에 거리가 멀지 않았다. 부족 구성원은 마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매 등을 채집했다. 재배한 농작물도 지척에 있었다. 가족이나 부족 구성 원이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충분히 수송 가능했다. 옆 마을이나 이웃 부족과 교역을 해도 거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부족국가가 전쟁 등을 통해 통합됐다. 지배자인 왕이나 제사장은 농경지 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궁궐과 신전을 짓고 거주 했다. 왕의 가족, 시녀, 시종, 제사장, 신녀뿐 아니라 이들에게 필요 한 물품을 만드는 다양한 직공이 식량 생산지에서 떨어진 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이들을 먹이고 입히며 머물러 살게 하는 일은 그 시절 지배자에겐 대단한 과제였으리라.
실제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당시 지배자들은 신에 대한 빚을 강 조하며 세금을 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납세 의무를 백성에게 심 어주기까지 했다. 또 빚을 제대로 갚지 않으면 징벌하는 무력까지 과시하며 엄포도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흉년이 들어 밀 등의 수확이 줄어들면 신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은 배부른 소리였다. 게 다가 왕이 거둬들인 세금은 추수기 이후에나 납부 가능했다. 왕과 제 사장뿐 아니라 궁녀, 시종, 신녀 등이 추수가 끝날 때까지 물만 먹고 지낼 수는 없었다. 지배자는 밀 등 농산물이 농촌에서 도시로 흘러들 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농촌 백성이 낼 세금 을 근거로 진흙 토큰을 만들어 상거래를 일으켰다. 돈의 등장이다.
- 돈의 역사에서 reserve'는 아주 넓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 앙은행의 탄생과도 밀접하다. 중앙은행 이론의 개척자인 영국의 월 터 베지헛Walter Bagehot이 1870년대 발표한 <롬바드 스트리트Lombard Street》에는 수많은 여윳돈 체제(a many-reserve system)'라는 말이 등장 한다. 그는 "수많은 여윳돈 체제가 괴물스러울 수 있다................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베지헛의 눈에 비친 '리저브reserve'는 19세기 월스트리트인 런던의 롬바드 스트리트 에 자리 잡은 수많은 은행 등이 보유한 '웃돈'이었다. 은행들이 각자 보유하고 있는 독립적인 여웃돈이다. 그래서 수많은'이란 뜻의 a many'라는 말이 붙었다.
- 경제 교과서에 따르면 은행들은 각자 여윳돈을 빌려주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돈을 빌리는 사람들도 서로 경쟁한다. 수요-공급 원리 에 따라 돈의 가격(금리)이 형성된다. 은행들이 금리라는 '보이지 않는 손(가격)'의 신호에 따라 더 빌려주고 덜 빌려준다. 애덤 스미스 등 고 전 경제학자들은 은행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하면 돈의 공급이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이른바 자유은행(free banking) 독트린'이다.
애덤 스미스의 꿈은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은행들은 중앙은행도 없고 금융감독기구도 없던 시절 각자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호황기에 마구 대출해줬다. 그 바람에 시중에 유동성이 급증하면서 거품이 발생했다. 그 끝은 금융위기였다. 위기의 순간 은행가들은 두 려움에 떨었다. 부실과 파산의 두려움이었다. 그로 인해 은행들이 대 출을 극도로 꺼린 결과 나타난 것이 여윳돈의 증발과 실물경제의 침 체였다. 호황기에 여윳돈이 급증하고 위기의 순간 돈이 마르는 악순 환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여윳돈을 각 은행가들의 이윤 추구 동기에 맡겨둬야 하는지를 놓고 말이다. 존 우드 교수는 “19세기 영국의 대형 시중은행인 영란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서서히 진화하는 과정은 여윳돈(reserve) 관리 책임을 영란은행이 조금씩 떠 맡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 미국은 영국의 시행착오와 논쟁을 거의 한 세기 동안 목격했다. 1913년 국가 기구로 중앙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지역별, 개 별, 은행별 여윳돈(a many reserves)'을 '미 연방 단위의 단일 여윳돈(a Federal reserve)'으로 통일해 관리하기로 한 것이다. 관리의 주체로 만 든 조직이 바로 이 시스템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연방준비제도이 사회(FRB, Federal Reserve Board of Governors)이다. Fed의 주요 임무 가운 데 하나가 여윳돈의 가격을 조정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것 이다. 금융회사들은 애덤 스미스가 그린 '자유은행업을 포기하고, Fed가 결정한 기준금리에 따라 예금을 받고 돈을 빌려준다. 그 대가 로 위기 순간 Fed의 도움(긴급자금, 유동성 지원을 받아 자유로운 낙원' 에서 툭하면 겪었던 파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 대신 보호를 선택한 셈이다.
- 국채의 1차 고객은 주요 시중은행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1차 고 객은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는 도매시장에 참여하는 금융회사들이다.
금융용어로 프라이머리 딜러(PD, primary dealer)다. 이들이 주로 참여 하는 도매시장의 또 다른 이름은 발행시장이다. 정부가 국채를 찍어 도매업자인 시중은행들에게 공개입찰 방식으로 팔아치운다. PD는 국채시장의 선수들이다. 국채를 상대적으로 싼값에 사들여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대가로 여러 의무를 진다.
“PD로 지정된 시중은행 등은 국고채 발행시장에 의무적으로 참 가해야 하며, 일정 물량 이상을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 특정 채권의 정해진 물량을 거래해야 하며, 관계 기관에 거래 내역을 보고하고 중 앙은행이나 금융 당국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가할 의무가 있다. 대신 국고채 입찰 과정에서 독점적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금융 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 또 PD로 선정됐다는 것은 금융기관의 전문성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이므로 대외적으로 금 융기관의 평판을 높이는 데도 일정 부분 역할을 한다." 
애초에 PD는 시중은행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금융시장 구 조가 바뀌어 지금은 국내에서는 종합 증권사(투자은행)까지 PD로 참여 한다. 국내에서 PD는 20여 곳에 이른다. 이들은 국채 발행시장에서 도매로 사들인 정부의 빚 증서를 펀드 회사와 개인투자자들이 참여 하는 유통시장(일반 채권시장에 내다 팔고 차액을 이익으로 챙긴다. 기까지는 국채란 증서가 발행 유통되는 과정의 ABC다. 정부-시중 은행의 비즈니스가 그 정도라면, 굳이 책까지 쓰면서 설명할 필요 없다. 래리 랜덜 레이Larry Randall Wray 교수는 "국채는 정부가 자금을 조달해 쓰는 단순한 장치가 아니다"며, "돈 공급 장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원"이라고 말했다.
에너지원! 현대 시중은행은 돈을 꿔줄 때 예금만을 활용하는 것 이 아니다. 국채를 내다 팔아 조달한 자금도 많이 사용한다. 국채를 내다 파는 기법은 다양하다. 단순히 처분하는 방식은 기본이다. 며칠 뒤 되사는 조건으로 국채를 내주고 현찰을 조달하는 것이 금융인들 이 부르는 환매조건부채권(RP)이다. RP시장은 21세기 가장 중요한 도매 금융시장이다. 이전에는 콜시장이 중요한 자금시장이었다. 선진국에서는 20세기 초에,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에서는 요즘도 중시된 이것은 재할인 메커니즘으로 재할인제도라고도 불린다. 은행이 국채나 최우량 기업의 회사채를 사들인 가격보다 싼값에 중앙은행 에 팔고 현금을 받아가는 시스템이다. 이곳에서는 일반 머니마켓(단기 도매자금시장)처럼 경쟁 방식으로 가격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중앙은행 이 사전에 정한 재할인율에 따라 돈이 풀리는 양이 조절된다.
RP 시장은 머니 트라이앵글의 한 축인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펼 쳐지는 공간이다. 한국은행(BOK)이 RP 금리를 기준금리(정책금리)로 삼 고 있을 정도다. 한국은행이 '일주일 뒤에 되사는 조건(RP 7일물'을 달 고 국채를 사고판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1%로 정했다면, 국채를 바탕으로 RP 거래를 할 때 금리가 1% 선에서 유지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실제 시장에서 RP 7일물 금리가 한국은행이 정한 1%에 정확하게 거래되는 경우가 드물다. 1.001%일 수도 있고, 0.9999%일 수도 있다. 이런 실제 금리를 기준금리와 구분하기 위해 실효금리라고 한 다. 실효금리가 한국은행이 내부적으로 정한 범위를 벗어난 수준으 로 기준금리보다 높아지면, 머니마켓의 돈이 마르고 있다는 신호다. 이 경우 한국은행은 국채를 되파는 조건으로 사들여 돈을 푼다. 반대 로 실효금리가 기준금리보다 너무 낮으면 돈이 넘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면 한국은행은 약속한 기간에 되는 조건으로 국채를 팔아 돈을 흡수한다.
- 머니마켓의 가장 큰 손은 누가 뭐라 해도 중앙은행이다. 뒤이어 시중은행들이 두 번째 큰손이다. 요즘 머니마켓에서 메이저 플레이 어 구실을 하는 세력이 있다. 바로 머니마켓펀드(MMF)다. MMF는 시중 단기 여웃돈이 머니마켓으로 흘러드는 또 하나의 채널이다. 한마디로 머니마켓은 머니 트라이앵글의 중앙은행과 시중은행(금융회사) 등이 각자 이익이나 정책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게임을 벌이는 장 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주요 채권자들의 놀이터인 셈이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머니마켓(금융시장)은 자본주의 사령부"라고 말할 정도였다.
- 21세기 현재도 중앙은행이 직접 공급한 돈(본원통화, high powered money)으로 모든 상거래를 해결할 수 없다. 한국은행이 2020년 공급 한 본원통화는 205조 원 정도였다. 그런데 아주 넓은 의미의 돈인 금융회사 유동성(L)'은 4300조 원에 이른다. 21배 정도 불어났다. 무슨 매직일까? 한국은행이 주입한 돈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뻥튀 기가 된 게 틀림없다. 바로 국내에는 '신용창출(Credit Creation) 14로 알 려진 과정이다. 머니money란 말이 '신용'으로 번역됐다. 오역일까? 아니면 의역일까? 오역은 아니다. 오역이었으면 수십 년 동안 바로잡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다면 누가 돈을 의미하는 '머니money'를 신용으로 번역했을 지가 궁금해진다. 이 또한 미국 Fed를 '연방준비제도'라고 단어 치환 수준으로 번역했던 일본인들이 했다. 근대 초기 일본인들의 눈에 '통화 공급은 중앙은행이 하는 일로 비쳤다. 시중은행이 중심이 된 money creation을 '통화 창출'이나 '화폐 창출'로 번역하기가 마뜩 찮았던 게 분명해 보인다.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서구화(근대화) 과정을 시작했다. 이때 서구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한자 어로 옮기는 일을 먼저 했다. 한국뿐 아니라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마 저 일본식 경제용어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인들의 어설 픈 번역은 결과적으로 오해를 낳았다. 돈이 창출돼 공급되는 과정이 흐려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중앙은행이 돈을 공급한다'는 상식이 자리 잡았다. 이 상식대로라면, 한국은행이 주입한 205조 원만 돈이 고, 시중에 나돌고 있는 4300조 원은 돈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의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교수는 베스트셀러 《사피엔스Sapiens》에서 사회적 분업화 구조 속에서 돈의 구 실을 생생하게 설명한다. “돈은 보편적인 교환의 매개다. 인간은 돈 을 이용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다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다. 예비역 지원자금을 받은 근육질의 남자가 대학 교육을 받아 지적인 인간으로 전환된다."" 이어 “돈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도 록 하는 것뿐 아니라 가치를 저장할 수도 있다. 인간이 소중하게 여 기는 것들 가운데 저장이 쉽지 않은 것들이 많다. 시간이나 아름다움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다. 저장할 수 있어도 장기간 저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돈은 사회적 경제적 관계망을 바탕으로 한다. 관계망은 줄 의무와 받을 권리로 구성돼 있다. 영국 외교관이자 사회학자인 알프레드 미첼 이네스Alfred Mitchell Innes는 “A가 쥐고 있는 돈은 B의 부채다. B 가 그의 부채를 지불하면(상품이나 서비스를 건네주면), 돈은 A한테서 떠난 다"고 말했다. 여기서 줄 의무와 받을 권리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계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사회적 분업 이후 사회 구성원들이 원치 않아도 맺고 있는 관계다. 개인이 원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얘기다. 생존을 위해 서로 생산물을 교환해야 하는 관계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은 "자본주의에서 개인은 다른 사람과 비즈니스를 할 수밖에 없다"며, "비즈니스는 상품(서비스)을 교환하는 것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교환을 통해 한 상품의 가치가 실현된다. 한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이 바로 돈이다. 돈으로 표현된 가치가 바로 가격이다. 가격은 한 상품 의 내재가치가 아니다. 다른 상품과의 교환비율, 다른 말로 사회적 관계를 보여준다. 이런 관계망 속에서 돈은 청구권이다. 돈에 적힌 금액이 대표하는 구매력만큼 재화나 서비스를 살 수 있다. 보편적인 돈은 한 사회의 생산물과 서비스에 대한 청구권이기도 하다. 돈을 가진 사람은 액수만큼 받을 권리가 있다. 이는 돈보다 받을 권리와 줄 의무, 가치, 구매력 등이 먼저 탄생했다는 얘기다. 돈이 생겨나면서 받을 권리와 가치, 구매력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 돈은 줄 의무와 받을 권리를 정산하고 가치를 A에서 B로 이전시킨다. 또 생산물을 현재에서 미래로, A지역에서 B지역으 로 흐르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 또는 '사회적 표현'이다. 이런 돈은 바이러스처럼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숙주에 기대서 생존한다. 한때는 진흙으로 만든 토큰Token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커다란 바위 였다. 어느 시대엔 조개껍데기였고, 어떤 나라에선 나무 조각일 때 도 있었다. 하라리는 "돈은 종이든 디지털 신호이든, 아니면 조가비 이든 가치를 표현하고 이전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때 조가 비이든, 돌멩이든, 아니면 미국 달러로 불리는 종이쪽지이든 사람들 이 가치가 있다고 이심전심으로 공유하는 믿음(Trust)'을 바탕으로 한다. 하라리는 그 믿음을 '심리적 구성물(Psychological Construct)'이라고 설명했다.

- 메소포타미아 지배자들은 왕국 내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생산물 의 가치를 비교해 교환할 수 있는 단위를 개발했다. '계산 단위로서 돈(money of account)'이다. 이 단위를 바탕으로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증표를 개발했다. 바로 진흙 토큰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제프리 잉엄 교수에 따르면 진흙 토큰 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이 반드시 소유해야 했다. 왕국의 지배 자인 제사장이나 왕이 점토판으로 세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메르 인들은 신전이나 왕실에 세금을 내기 위해 밀 등의 생산물을 팔고 진흙 토큰을 마련해야 했다. 진흙 토큰을 마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었기에 자연스럽게 생산물이 유통되면서 왕국 안팎에서 상거래(시장) 가 활성화됐다.
- 상징화폐는 기원전 3000년이나 지금이나 정부,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중앙권력'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중앙권력은 다양하다. 제사장, 왕, 황제, 대통령, 총리 등 정부 형태와 구조에 따라 여러 모습을 띤다. 하지만 경제적 실체는 동일하다. 한 지역 또는 국가 안에서 '죽음만이 면제해줄 수 있는 원초적 채무(세금)'를 사회 구성원들에게 매길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 또는 조직이다. 중앙권력이 막 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발행한 증표가 바로 진흙 토큰이거나 현대 법정화폐(fiat money)다.
- 경제학 교과서에서 금속화폐는 인간들이 물물교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대안이다. 이런 가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금속화폐는 물물교환의 문제점이 아니라 돈의 영토 내 갈등이 낳은 산물이다. 미첼 교수는 "주화(coin)가 발명된 지역을 보면 진실이 드 러난다"고 말했다. 주화는 기원전 7세기 지금의 터키 지중해 연안 리 디아Lidya 지역에서 발명됐다. 그 시기 범그리스 지역은 전쟁의 도가 니였다. 도시국가들이 연일 전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쟁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신뢰와 호혜 등 추상적인 가치를 증발시켜버린다. 상징화폐의 주요 축인 중앙권력의 재정에 엄청난 압박이 가해진다. 이런 와중에 거래 공간이 확대된다. 대규모 군대가 해외 원정을 떠나기 때문이다.
제프리 잉엄 교수에 따르면 전쟁을 계기로 마주친 공동체 밖의 상대는 불신과 사술의 대상으로 비친다. 실제 아테네 등 그리스 도시국가 시절에 본격화된 주화는 왕정 또는 제국의 붕괴 이후의 상황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이런 시대에는 외상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 거래를 마치자마자 상대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결제수단이 필수다. 고대사회에는 그러한 결제수단이 금이나 은이었다. 반면 상징화폐는 사실상 외상거래다. 매매 당사자가 아닌 제3자(정부)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고판다. 이 신뢰가 유지되는 조건과 상황에서만 매매 당사자가 상대를 잊어버릴 수 있다. 전쟁은 제3자의 신뢰를 부숴놓기 일쑤다. 전쟁으로 탄생한 금속화폐 시대에는 상징화폐 시대와는 전혀 다 른 머니 트라이앵글이 작동했다. 귀금속 채굴업자-주화 주조업자 세금을 바탕으로 작동한 트라이앵글이다. 이는 머니 트라이앵글 원 형이었다. 고대 아테네에 라우리온Laurion이란 유명한 은광 지대가 있었다. 아테네 등이 페르시아와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세기 라우 리온 은광에서 거의 3천 톤에 가까운 은이 채굴됐다.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해본 결과 전성기에 노예 2만 명 정도가 은광 200여 곳에서 일했다. 은광 소유자들은 노예 노동으로 캐낸 은을 주화를 주조하는 곳에 팔았다. 주화를 주조하는 사람들은 아테네 등 국가가 정 한 규격에 맞춰 주화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아테네 동맹 세력은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할 수 있었다.
금이나 은을 바탕으로 한 금속화폐 시대는 기원전 7세기부터 1970년까지 2700년 정도 이어졌다. 그렇다고 모든 거래가 금이나 은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금이나 은은 주로 땅을 사고팔거나 해외 교역에서 결제수단으로 쓰였다. 일상적인 상거래는 물물교환이나 잡 금으로 만들어진 주화로 이뤄졌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이나 인간의 기억은 성글기 마련이다. 금과 은이 최종 결산 단위로 쓰였기 때문에 금속화폐가 모든 상거래에 쓰인 줄로 안다.
- 또 하나의 오해가 있다. 금본위제 복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금 화나 은화 시대에는 인플레이션이나 자산 거품, 금융위기가 없거나 덜한 줄 안다. 그 시절에도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금융위기가 일어나 기도 했다. 국가는 재정난이 심해지면 귀금속 함량을 줄이곤 했다. 심지어 금이나 은으로 태환이 되지 않는 종이돈을 찍어내기 위해 인 쇄기를 돌리기도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돈의 가치가 급 락했다. 물가가 급등하여 극심한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왕 등 권력자 들은 양질의 새 돈을 만들어 돈의 가치가 급락한 것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을 했다. 나중에는 돈의 유통 속도(화폐수량 MV=PT 에서 V)를 떨어뜨리는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상거래 자체를 어렵게하는 방식이다.
돈의 양이 늘어남과 동시에 질이 좋아진 때도 있기는 했다. 주로 해외무역이 확장되거나 정복 전쟁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시기다. 이 런 일은 고대 그리스 지역인 리디아에서 최초로 주화가 발명되고 지 중해 연안에서 광산이 개발된 이후에 나타났다. 아테네 등의 그리스 도시국가는 양질의 주화를 만들어 사용했다. 양질의 다양한 돈을 일 정 비율에 맞춰 사고판 그리스의 돈 장사꾼들은 고대에 가장 뛰어난 은행가들이었다.
- 금속화폐 시대 후반에 인간은 상징화폐 부활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명을 한다. 바로 부분지급준비금 제도와 은행권이다. 중세 말기에 시중은행이 고객한테 받은 예금 가운데 일부만을 떼어놓고 나머지 를 대출해주기 시작했다. 영국 금세공업자 출신 은행가들이 부분지 급준비금 제도를 발명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또 17세기에 시중은행들이 자신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종이증서(은행권)를 발행하 기 시작했다. 시중은행이 머니 트라이앵글의 한 축으로 떠오르기 시 작한 것이다. 금속화폐 시대에 상징화폐의 싹이 싹트기 시작했다. 은행권은 탄생 순간 혼돈을 불러일으켰다. 18세기 사람들은 은행권이 돈인지 아니면 어음이나 환어음 같은 신용수단인지 알지 못했 다. 인간의 역사에서 한 시스템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상화 되어 기정사실이 된 사례가 종종 발견된다. 은행권이 그런 사례 가운 데 하나다. 19세기는 은행권의 정체뿐 아니라 관리 문제를 놓고 치 열하게 논쟁이 벌어진 시대였다. 그 과정에서 시중은행 하나가 점차 중앙은행 기능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바로 영국의 영란은행이다. 머니 트라이앵글의 또 하나 축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와 논쟁, 대책 마련이라는 과정이 한 세기 동안 이어졌다. 돈의 역사에서 19세기는 대논쟁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인류는 대논쟁과 실험을 거쳐 중앙은행의 기능을 터득했다. 그리 고 20세기 초에 머니 트라이앵글이 확실하게 갖춰졌다. 상징화폐 생 태계의 뼈대가 갖춰진 셈이다. 그렇다고 금속화폐가 곧바로 상징화 폐로 전환되지는 않았다. 19세기 고전적인 금본위제는 제2차세계대 전 이후 미국 달러-금 태환을 중심으로 세계 종이돈의 위계서열이 결정되는 과도기 형태를 띤다. 고전적인 금본위제보다 금에서 더 멀 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금과의 연결이 단절됐다. 이 면에는 현대 국가의 징세 능력과 경제 운용 노하우, 갈등 완화 등이 자리 잡고 있다.
- 돈의 영토는 화폐단위 지정으로 확인된다. 중국 진시황이 통일제국을 수립한 이후 도량형을 단일화했다. 화폐단위는 도량 형의 핵심이었다. 화폐단위는 곧 셈의 기본이라고 했다. 한 나라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를 계산할 때 통일된 화폐단위가 쓰인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우선 '원' 단위로 측정된다. 국제적으로 비교 할 때는 달러로 환산된다. 한 나라의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을 파악 하는 일은 정부의 근원적인 일이다. 경제성장률을 계산해 집권세력 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 해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 총량을 알아야 세금을 매길 수 있다.
- 세금의 또 다른 이름은 '원초적 부채(Primordial Debt)'이다. 인간이 무리 지어 살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몫이 아닌 공동체 몫을 따로 떼 어놓아야 했다. 원시공동체에서는 선의를 바탕으로, 지배 - 피지배 관 계가 형성된 이후에는 제사장이나 왕 등 공권력의 힘으로 공동체의 몫을 구성원들한테서 받아내기 시작했다. 세금은 인간 사회에서 가 장 먼저 생겨난 채권채무관계 가운데 하나였다. 기업의 매출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는 여러 선택 대상 가운데 하 나다. 한 나라 정부의 세수가 영토 내 어떤 기업의 매출보다 많고 사 실상 확정적인 이유다. 한 기업이 강제력(압수수색, 강제징수, 형사처벌 등)을 동원해 수입을 강제할 수 있다면, 그 기업이 내놓은 종이증서는 사실상 돈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17세기에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는 영국 정부를 대신해 사실상 인도 지역의 상당 부분을 지 배했다. 자체 군대까지 보유했고, 사법권까지 쥐고 있었다. 동인도회 사는 인도에서 여러 가지 은화를 발행했다. 그 가운데 1860년대 찍 어낸 인도 루피 (Indian rupee)는 은 함량이 90% 이상이었다. 인도에서 정식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은 함량 때문에 신뢰도가 높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동인도회사가 쥐고 있는 강제력을 바탕으로 수입이 확실 했기에 사실상 통화 구실을 했다.
- 바로 '재화와 서비스가 화폐단위로 표현된 것(money of account)'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말한 '화폐이론의 기초 또는 출발 점'이다. 이때 개별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이 가치를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는 일단 접어둔다. 세상 모든 것이 화폐단위를 바탕으로 가격 표가 붙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화폐경제 가 숙성됐다는 얘기다. 심지어 불평등 상태마저도 '상위 10%의 평균 재산 ○○달러'처럼 화폐단위로 표현된다. 순간 '당연한 것 아닌가?' 라고 되묻는 독자가 적지 않을 듯하다. 맞다. 21세기 현재 인간이 생 산하고 공급하는 모든 것에 화폐단위로 표현된 가격표가 붙어 있는 상황에서 불평등마저 화폐단위로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바람에 '모든 경제 문제의 원인은 돈'이라고 믿는 이들이 적 지 않다. 이런 접근법이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하면 놀라운 묘사가 나온다.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Fyodor Dostoevskii는 "돈은 주조된 자유다(Money is coined liberty)!"라고 말했다. 우리말로 직역한 듯하다. 나는 '돈은 표면에 찍힌 액수만큼 자유를 누리게 한다'는 번역이 더 좋다. 돈이 한 시점의 재화와 서비스 가운데 금액만큼 누릴 수 있는 청구권이라는 의미와 사실상 같다. 도스토옙스키 말고도 수많은 작가와 사상가, 혁명가들이 돈과 금융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현상을 질타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Capital)> 1권의 화폐를 다룬 장에서 각주에 돈의 위력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글을 인용한다.
"황금을 말하는 건가? 노랗고 반짝거리며 값진 황금?...... 많은 금은 검은 것을 희게 만들 수 있고, 반칙을 정당한 것으로, 잘못된 일 을 올바른 것으로, 천한 것을 고귀하게, 늙은이를 젊게, 바보를 용감 하게."
마르크스가 이 대목을 인용한 이유는 돈을 대하는 인간의 통념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쯤 되면 돈을 움직이면 모든 경제 현상을 좌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싹틀 만하다. 실제로 그랬다. '기존 돈이 불평등을 낳는다'며 '새로운 돈을 채택하면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2022년 현재 그런 주장을 외치는 가장 대표적인 그룹이 바로 코인 지지자들이다. 비트코인 등 이 단순한 자산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돈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코인주의자들은 현재 화폐 시스템에서는 '돈에 대한 접근권(access to money)'이 제한된다고 비판한다. 중앙은행 - 시중은행으 로 이뤄진 금융 시스템이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인 네트워크여서다.
- 매닝 교수는 "1980년대 이전에는 기업인이나 상인 등이 이익을 올리기 위해 자본을 늘릴 목적으로 빚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고 말했다. 개인이 대출받는 일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가계대출이 전 혀 없지는 않았다. 미국 대부조합(S&L)과 시중은행 등에서 주택담보 대출이 이뤄졌다. 금융회사로서는 리스크가 거의 없는 돈벌이였다.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전당포 등에서 고리대금을 쓰는 게 일반적이 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신용카드가 일반화했다. 시중은행도 기 업대출 대신 가계대출을 돈벌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매닝 교수 는 설명했다. 한국에서 빚의 대중화가 시작된 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다. 나는 그때 주니어 기자로 금융 구조조정을 주도한 금융감독위원회를 취재했다. 시중은행 몇 곳이 문을 닫았다. 대기업인 대우 등이 분할돼 이곳저곳으로 매각됐다. 경제적 외과수술 시기 에 시중은행은 '미래 경영전략을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출해야 했다. 당시에 신한은행 등 시중은행의 경영진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소매 금융'을 주력 비즈니스로 내세웠다. 소매 금융은 기업이 아니라 개인 에게 대출(신용카드)을 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가계부채가 늘어난 가장 큰 요인은 경제 상황과 금융회사의 전략이었다. 개인의 낭비벽 등을 가계부채의 증가 원인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 한 나라 화폐가 기축통화이면 금융위기 면역성을 타고날까. 당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금융위기 외환위기'라는 등식이 각인돼 있었 다. 1997년 IMF 외환위기 탓이었다. 게다가 요즘 경제기자와 경제분 석가들이 추상적인 경제 모델이나 수식으로 만들어진 분석 틀에 익숙하다.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이 세계 경제를 호령했을 때 10년마다 금융위기를 겪은 사실을 그들은 망각 한 듯했다. 알고 있어도 너무 오래전이라 현대 경제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금융위기는 기축통화와는 상관없다. 경제의 불균형이 신용의 증폭과 축소를 낳아 발생한다.
- 금융시장의 성숙은 산업화 정도에 비례한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장기 투자를 하면 시중은행과 투자은행의 규모도 커진다. 자연스 럽게 자국 통화를 바탕으로 한 채권과 주식, 파생상품 시장이 성숙해 진다. 일본이 산업화 과정에서 금융시장이 성숙해진 대표적인 사례 다. 일본 정부는 달러나 유로화 대신 엔화 표시 국채를 대량으로 발 행할 수 있었다. 결국 달러화로 화폐 질서가 회복된다고 해도 산업화 와 금융시장 성숙이 금방 이뤄지지는 않는다. 행키 교수가 처방하는 달러화가 단기처방으로 불리는 이유다. 달러화를 오랜 기간 이어갈 수는 없다. 달러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긴축 때문에 사회적·정치 적 위기가 깊어진다. 저항이 불가피해진다. 달러화는 산업화와 금융 시장 성숙이 어느 정도 이뤄진 나라에 맞는 처방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결국 돈의 영토 내부에 상징화폐 시스템을 지탱할 조건들이 갖춰져야 달러화도 성공할 수 있는 셈이다.
- 종이돈을 위기의 원흉으로 꼽는 논리가 금본위제 부활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의 생각도 소박하다. '돈이 금이란 닻을 달고 있으면, 종이돈 남발 등 유동성 과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금이 돈이던 시대에도 위기 는 발생했다. 굳이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서유럽은 17세 기 이후 느리지만 꾸준히 자본주의로 바뀌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 초 산업혁명까지를 이행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금융위기의 역사가 찰스 킨들버거에 따르면 17세기부터 최근까지 400여 년 사이에 40 여 차례 주요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얼추 10년마다 위기에 시달렸 다. 주기성은 19세기 후반 들어 더욱 또렷해졌다. 1873년에는 산업 화한 주요 나라가 거의 동시에 위기에 빠졌다. 경제위기의 세계화의 시작이다. 이때가 바로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의 통화와 금융이 영국을 중심으로 한 금본위제 아래 재편된 시기였다. 경제역사가들이 말하는 '고전적인 금본위제(Classical Gold Standard) 시기다. 
-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은 "철기시대에도 돌로 만 들어진 도구가 두루 쓰였다"며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대에도 이전 시대 시스템들이 재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돈과 금융, 시장 등이 대표적인 예라며 "자본주의는 돈과 금융, 시장 등을 재활용하 고 있다"고 설명했다." 돈과 금융은 노동의 사회적 분업이 이뤄진 이 후 등장한 사회적 시스템이다.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금융위기가 자 본주의 이전부터 발생한 까닭이다. 단지 자본주의 시대 금융위기는 이전 시대와 다른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맥락의 차이를 무 시하고 모든 금융위기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이 는 인간과 원숭이의 유전자가 90% 이상 일치한다고 인간과 원숭이 는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탄생 이전에도 벌어지곤 했다. 고대 금융위 기 패턴은 현대와 너무나 닮았다. 현대 금융위기의 원형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금융위기는 기원전 49년에 일어났다.
- 큰 사건은 담론의 지형도 뒤흔들어놓는다. 1929년 세계경제는 대참화를 겪었다.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시작된 것이다. 공 황은 이전까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던 말이었다. 주식을 비롯한 자산 가격이 폭락한 뒤 실물경제가 둔화하는 현상을 모두 공 황이라고 했다. 대공황이란 그런 공황들 가운데 가장 심하다는 뜻이 다. 사실 가장 심하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1929년 이전까지 대공황 은 1873년의 공항이었다. 그해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주요 국가뿐 아니라 이들의 식민지 전체가 디플레이션deflation에 빠졌다. 당시 디플레이션은 1896년까지 23년 동안 이어졌다. 주식과 채권가격만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농산물과 각종 원자재 가격이 추 락했다. 1990년대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에 빠지기 이전까지 역사 상가장 긴 디플레이션 기록이다.
그러나 1873년 공황은 '대공황에서 강등됐다. 1929년 공황의 후 유증이 너무나 크고 깊어서 제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1873년의 공황은 '장기 공황(Long Depression)'으로 개명됐다. 그런데 "1929년 이후 경제학자들이 공황이란 말 자체를 쓰기를 두려워했 다""고 <월스트리트 제국>의 저자 존 스틸 고든John Steele Gordon은 말 했다. 대공황의 상흔이 너무 크고 깊은 나머지 경제학자들이 이후 발 생한 자산 가격 추락과 경기 둔화를 공황 대신 '침체(recession)'라고 부 르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경제는 1936~1937년 다시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하고 실업자가 급속도로 늘었다. 대 공황 이전이었다면 공황으로 부를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경제학 자들이 1936~1937년 사건을 침체라고 불렀다"고 고든은 말했다.
- 신용은 현실 경제에서 사실상 금융이다. 자금 조달(주식이나 채권 발행), 외상거래(어음, 신용카드, 신용장 할인, 보증 등), 결제(이체나 송금 등)가 모두 신용을 전제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가장 민감한 금융 활동이 바로 자금 조달이다. 외상거래나 결제는 실물거래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 영역에서 발행된 어음이나 환어음 등 각종 증서가 바로 애 덤 스미스 등 고전파 경제학자가 말한 진성어음(Real Bill)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가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신용이 일반화하면서 자금 조달을 위한 금융이 실물과 고리를 끊고 팽창하기 시작했다. 돈 벌기 위해 빚을 끌어다 베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보면 19세기 초반에 본격화한 현상이다. 바로 앞선 장에서 말한 '패닉 1825'라는 최초의 자본주의적 버블이 그때 일어난 이유다.
- 민스키는 실물경제가 침체 또는 공황 단계에서 회복해 확장 국면에 들어서거나 신기술의 등장 등으로 평균 이상의 수익이 기대될 때 금융 활동이 급증한 점을 간파했다. 금융이 실물경제 규모보다 웃자 란 현상(오버슈팅)이 발생하는 것이다. 금융거래는 순식간에 투기 단계 를 넘어 폰지 Ponzi 파이낸스 단계에 들어선다. 폰지는 영업이익 등으 로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빚을 내 빚을 갚는 행위다. 이 단계 이르면 금융은 실물경제보다 눈에 띄게 웃자란다. 그 정점이 바로 민스키 모멘트Minsky Moment다.
- 민스키 모멘트에 금융 버블이 붕괴한다. 금융이 실물보다 웃자란만큼 금융자산 가격이 가파르게 떨어진다. 신용경색과 금융 버블 붕 괴 때문에 실물경제 활동도 위축된다. 금융과 실물의 간격이 좁아지 는 거품 붕괴 과정이 파괴적이면서 연쇄적인 까닭이다.
교환 과정에서 판매와 구매의 분리가 위기의 씨앗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분리가 위기의 원인이란 뜻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판매와 구매 분리 이후에 등장한 지불수단이라는 돈의 기능에는 모순이 있다. 반 을 돈과 줄 돈을 서로 비교하는 순간 돈은 가치척도 또는 화폐단위 로만 기능한다. 그런데 차액을 결제하는 순간 돈은 교환의 매개 수단 이 아니라 가치 저장수단으로 기능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물경제가 나빠져 장사가 시원찮으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것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파열음을 낸다"며 "산업과 상거래의 위기가 금융위기 양상을 띤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했다. "요즘 수학 개념으로 가득한 경제 용어에 익숙한 사 람들에게는 낯선 표현 방식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일상용어로 바꾸 면, 돈은 교환의 매개, 가치 저장, 가치 척도, 지불수단 등 여러 기능 이 하나로 통합된 사회적 장치다. 각 기능이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르 게 부각된다. 실물경제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돈의 기능 가운데 가치 저장 수단 같은 하나의 기능만 한다. 경제주체들이 돈을 돌리지 않고 움켜쥐려고만 한다. 갑자기 현금거래와 매매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위기 순간 많이 듣는 '돈이 돌지 않는다'의 진짜 의미다.
- 마르크스의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Frederick Engels는 "농부와 소읍의 대장장이가 생산물을 거래할 때 그들은 상대가 물건을 만드는 데 얼 마나 긴 시간을 일했는지 잘 알았다. 소읍의 대장장이도 절반은 농사꾼이었다. 농부의 농산물과 대장장이의 연장의 가치 비율을 경험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때만 해도 물물교환 방식으로 상품의 가치가 '밀 2리터 대낫 1개' 식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두 재화 사이에 돈이 끼어든 경우가 드물었다. 그 시절 돈은 주로 은 화나 금화였다. 대부분 벌크 결제에 쓰였다. 큰 상인들이나 제후끼 리, 국가 간의 결제에 쓰였다. 일상 거래에서 고액권인 은화나 금화 가 쓰일 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돈이 일상 상거래에 등장한다. 이때도 은화나 금화가 아니었다. 구리를 바탕으로 한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이것마저도 귀했다. 글린 데이비스의 《돈의 역사》에 따 르면 상품과 상품의 가치 비교가 화폐단위로 이뤄졌다. '밀 2리터 대 낫 1개'가 '밀 2리터=3페니' 그리고 '낫 1개=3페니' 식으로 진화했 다. 상품 가치가 돈의 단위로 표현되면서 뜻밖의 교란이 발생했다. '밀 2리터=낫 1개의 교환에서는 가치 비교가 직접적이다. 교환 비 율이 바뀌기 위해서는 밀이나 낫의 가치가 변해야 한다. 여기에 화폐 단위가 개입하면 변수가 하나 더 늘어난다. 돈의 가치가 변하면 상품가치의 비율도 바뀐다.
게다가 화폐단위가 은이나 금의 무게 단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 다. 영국 화폐단위 파운드pound는 애초에 금이나 은의 무게 단위였 다. 화폐와 무게 단위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금본위제 시절 에도 파운드의 가치가 실제 금 1파운드와 거리가 멀었다. 현대에 와 서는 아예 관련이 사라졌다. 요즘 영국 동전 1파운드는 상당히 묵직 하다. 그렇다고 금이나 은 1파운드와 재질이나 무게가 같지 않다. 마 르크스는 "한 물건의 명칭은 물건의 재질이나 속성과는 별개"라며 "어떤 사람의 이름이 제이콥Jacob임을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성 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상품의 가격(명칭)이 2만 원이라 고 해서 실제 가치가 2만 원이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단계에서 확인된 버블의 가능성이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버블이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 호화폐 이론가 가운데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인 폴 비냐 등은 예외다. 그들은 단계설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에서 흥미로운 두 학파를 소개한다. 메 탈리스트(metallist, 가치주의)와 차탈리스트(chartalist, 국정주의)다. 화폐이론 가의 양대 산맥이다. 학술 개념이 늘 그렇듯이 두 학파의 우리말 번 역은 원문보다 더 어렵다. 메탈리스트는 돈의 가치가 실물, 특히 금 이나은 같은 금속(metal)을 바탕으로 한다고 믿는다. 돈의 자궁이 시장이라고 본다. 상거래 방식이 물물교환에서 진화하는 과정에서 화폐가 태어났다는 쪽이다. 상식화한 단계론을 인정한다.
반면 차탈리스트는 토큰token 또는 증표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 어 차타 charta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돈의 자궁은 지불 의무와 받을 권리로 이뤄진 연쇄 사슬이라고 본다. 물물교환은 신화로 치부 한다. 비냐가 저널리스트여서 그랬을까. 그는 두 학파의 주장을 공평 하게 소개하는 데 치중했다. 자신이 논리를 전개하는 데 필요한 대목 만을 끌어다 쓴 것이다.
저널리스트의 균형이 늘 미덕은 아니다. 양쪽의 주의나 주장을 평면적으로 비교해놓으면 독자의 혼란이 더욱 심해질 때도 있다. 특 히 돈의 기원 또는 돈의 역사성에 대한 주의나 주장을 단순 비교하 면 혼돈은 더욱 심해진다. 여기서는 케인스의 말대로 과거 한 이론가 의 말을 출발점으로 삼아 돈이 어디서 어떻게 탄생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추적해보려 한다. 바로 케인스의 말이다.
"돈은 문명의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래전에 탄생한 제도(시스템)이다. 빙하가 녹아내리는 바 람에 돈의 기원은 베일에 가려졌다. 인류가 살았던 간빙기 시대까지 기원을 쫓아가야 할지 모른다. 간빙기 시대의 온화한 날씨 덕분에 인 간은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웠다. 그리스신화에서 세상 저쪽 끝에 있는 낙원인 헤스페리데스 동산이나 아틀란티스 대 륙, 에덴동산에서 돈이 탄생했을 수 있다."
- 역사의 증거를 찾는 사람들은 이론가들과는 달리 "빙하가 녹아내려 돈의 기원이 베일에 가려졌기 때문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 그들 은 지금의 터키나 그리스, 이집트, 이스라엘, 시리아의 사막을 파며 돈의 기원을 추적했다. 고고학적 증거들이 상당히 발굴됐다. 인간의 머릿속 추정이 아니라 유물과 기록 등을 바탕으로 돈의 기원을 상당 히 밝혀냈다. 하지만 케인스 이후 세대의 경제학자들은 고고학이나 인류학이 밝혀낸 사실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재 돈의 바다(금융시장)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수확할 수 있을지에 더 집중한다. 돈의 기원은 그저 지적 호기심으로 치부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네!'라는 한마디와 함께.
- 고츠먼 교수는 <문명을 위한 금융(Financing Civilization)》에서 "진정한 도시화의 주인공들은 기원전 4000년쯤 수메르인들이었다. 그들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땅에 우루크Uruk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사회학과 제프리 잉엄교수가 쓴 《돈의 본성》에 따르면 사회적 계급이 지리적 차이로 드러났다. 수메르인들이 건설한 사회는 제정일치 사회였다. 신석기 혁명 (농업의 시작)으로 생산하는 대중과 엘리트(지배계급)의 분화가 이뤄졌다. 여기에 도시화의 변수가 끼어들었다. 생산하는 대중은 주로 농촌 지 역에, 엘리트는 주로 도시에 모여 살았다. 도시에는 엘리트만 사는 게 아니었다. 엘리트들을 수발할 인력이 필요했다. 수메르 지배자들 은 많은 백성들이 도시에 모여 살게 했다. 우루크 문명의 전성기인 기원전 2900년 즈음에 5만~8만 명 정도가 도시에 모여 살았다. 청동 기 시절로서는 메트로폴리스다.
수메르의 지배자들은 농촌과 도시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 의 간극을 극복하고 자신과 도시인들의 생존을 위해 재화와 서비스 를 이동하고 재분배해야 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외적을 막는 데 재화와 서비스의 이동은 필수였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당 시로서는 버겁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수메르는 자급자족 경 제(Autarchy)와 거리가 멀었다. 생활필수품을 역내 또는 원격지 교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원목과 구리, 아연 등 청동기 무기를 만드는 전략 물자를 해외에 의존해야 했다. 재화와 서비스를 이동하고 재분 배하는 일은 진부하지만 영국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가 말한 도전이었다. 수메르 지배자들은 응전해야 했다.
수메르인들은 돈이란 장치를 발명했다. 농촌에서 생산된 밀 등 식량을 제사장이나 왕, 그의 식솔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다. 재화와 서비스에는 발이 없다. 스스로 이동할 수 없다. 제 사장이나 왕은 돈이란 장치를 활용해 물질적 대사(재화와 서비스의 순환) 가 이뤄지도록 했다. 이는 근대경제학자들의 믿음과 다른 사실이다. 근대경제학자들은 돈을 그림자 또는 베일veil쯤으로 본다. 돈은 적극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접근법이다. 이른바 화폐중립설이다. 돈이 실물경제의 생산과 소비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의 결론은 돈을 많이 풀어봐야 결국 물가 상승만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 이미 세상이 변했다. 원시공동체 시절의 경제적 순수 또는 호혜를 바탕으로 한 나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 만으로는 생산물의 교환이 지속되지 않는다. 사회구성원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자발적 동의의 뿌리는 바로 부채 의식이다. 개인 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관념이다. 영국 LSE 의 데이비드 그레이버 David Graeber 교수의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Debt: The First 5,000 Years)>에 따르면 지배자들은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언어로 부채 의식, 달리 말하면 부채 이데올로기를 심어줬다. 그레이버 교수가 소개한 힌두교 경전(Satapatha Brahmana)은 고대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부채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신들과 성자, 성직자들, 사람들에게 빚을 진 채로 태어났다." 
흥미로운 점은 채권자가 신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자와 성직 자, 사람들이 고루 포함돼 있다. 사실상 사회구성원 전체가 받을 권리를 지닌 존재로 설정된 셈이다. 그렇다면 채무자, 달리 말해 줄 의무를 지닌 존재도 사회구성원 모두이다. 이쯤 되면 사회구성원 모두가 채권자이면서 채무자다. 사회 자체가 분업 때문에 '채권채무 네트워크(Debt-Credit Network)'로 바뀌었다. 모든 채권채무 관계가 수평적이지는 않았다. 분업화와 함께 이뤄진 도시화 과정에서 생산지인 농촌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제사장은 신에게 진 빚을 죽은 뒤에야 벗어날 수 있는 의무로 규정했다. 제사장은 수동적으로 백성들이 제물을 바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 수메르인들이 남긴 와르카 물병의 맨 위에는 신들의 대리인들이 새겨져 있다. 그레이버 교수는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에 는 거대한 신전이 들어서 있었다. 신전은 대규모 산업 시설이었다. 양치기와 바지선을 끄는 인부, 천을 짜는 인력, 무용수, 신전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 등 수천 명이 머물며 일했다"고 설명했다. 재 정일치 시대에 신전은 생산 허브였다.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생산수 단은 토지와 농기구였다. 이것들 대부분이 신전의 소유였다. 신전은 거대한 순환 고리의 중심이었다. 종교적 언어로 채색된 의무를 바탕 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징발하는 것이 신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신 전이 물류를 순환하는 장치였다.
제사장과 사제들은 치밀했다. 그들은 불완전한 기억에만 의존하 지 않았다. 누가 얼마를 신에게 바쳐야 하는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인류 최초의 채무 기록은 신전에 보리를 바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술 더 떴다. 자신들 권력의 원천인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원격지 무역까지 했다. 상인들에게 먼 나라에 가서 물건을 사오라고 주문했다.
이 모든 과정은 기록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문자와 숫자 가 발명됐다. 윌리엄 고츠먼 교수의 《문명을 위한 금융》에 따르면 인 간은 사랑하는 마음을 연인에게 전하려고 문자를 발명하지 않았다. 숫자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 학파들이 생각하는 것처 럼 순수한 정신적인 작용을 촉진하기 위해 발명한 것이 아니다. 개인 또는 집단의 생존과 직결된 생산분배 소비 과정에서 문자와 숫자 가 개발됐다.
제프리 잉엄 교수에 따르면 초기에 곡물의 낱알을 세는 방법이 개발됐다. 추상화 능력이 필요한 무게란 개념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 다. 가축이나 농작물을 단순히 세는 단계였다. 개수를 세는 것만으로 도 신전에 빚을 갚는 데 충분했을 수 있다. 하지만 생산물이 다양해 졌다. 노동도 셈을 해야 했다. 이 모든 문제는 서로 다른 생산물과 서비스를 비교 평가하고, 받을 권리와 줘야 할 의무를 청산하는 일이다. 단일한 기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한 사회뿐 아니라 이웃나라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비 교해 질적 비율이 아닌 양적 비율로 이뤄진 메트릭스'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다. 복잡하고 현기증 나는 작업이다.
잉엄 교수에 따르면 가치는 다름을 전제로 한다. 근대경제학자들 은 다름을 개인의 선호 차이라고 본다. 개인이 선호하는 것이 다르려 면 재화와 서비스를 고를 수 있을 만큼 공급되어야 한다. 미국 유타 대학교 E. K. 헌트Hunt 교수가 쓴 《경제학설사(History of Economic Thought:A Critical Perspective)》에 따르면 경제이론 가운데 효용이론이 등장한 시점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영국 등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시장에 다양한 물건이 가득 쌓였다. 인류가 경제역사가들이 말하는 생존 단계에서 벗어났다. 개인이 돈만 있으면 고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시계를 돌려 기원전 3000년 전후로 돌아가 보자. 말 그대로 원시적인 수준으로 노동 생산성이라고 할 게 없었다. 소수의 지배계급 외에는 개인의 선호를 운운할 형편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 는 족족 확보해야 했다.
더욱이 기원전 3000년 인간은 경제적 순수 상태에서 갓 벗어났 다. 서로 돕고 힘을 모아야 했던 호혜의 시대가 저물었다. 사회적으 로 서로 다른 신분, 즉 계급이 탄생했다. 인간이 가치의 많고 적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바로 가치의 탄생이다. 잉엄 교수는 '가치의 서열(hierarchy of value)'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가치를 숫자로 표현하는 기능, 즉 셈의 단위(Money of Account)로서 돈이 탄생했다.
- 기원전 3000년 점토 토큰은 단순히 곡물이나 양, 염소 등을 상징한 게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시 사회관계를 상징했다. 바로 사회적 분업이 낳은 채권채무 네트워크다. 또 점토 토큰은 가치의 서열을 양적으로 표현했다.
점토라는 재료 자체는 그때나 지금이나 흔했다. 희소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재료다. 하지만 사회적 분업이 낳은 채권채무 네트워크, 줘야 하는 의무와 받을 권리에 대한 기록과 가치의 비교, 신의 권위 와 무시무시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한 중앙권력이 강제하는 세금 납 부 등이 하나의 생태계(시스템)로 작용해 보잘것없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토큰이 돈으로 구실했다. 금이나 은처럼 내재가치가 있어야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가치를 이전할 수 있다는 주장과 다른 대목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왕국의 시스템 덕분에 아무런 내재가치가 없는 점토만으로도 가치를 저장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 왕국의 농부가 올해 풍년이 들어 밀을 예 년보다 더 팔아서 점토 토큰을 많이 마련했다. 지엄한 왕이 매기는 세금을 내기 위해서다. 그가 마련한 토큰은 그해 세금을 내고도 남았 다. 그는 토큰을 잘 보관했다. 그런데 이듬해 밀농사가 잘되지 않았 다. 흉년 정도는 아니었지만 평년작 수준이었다. 그는 작년에 마련해 놓은 점토 토큰을 더해 세금을 냈다. 세금을 걷는 관리들은 토큰의 연도를 따지지 않았다. 모두 동등한 가치로 인정했다. 점토가 훌륭하게 가치를 저장한 셈이다.
일반경제학에서 물물교환 다음 단계는 현물화폐다. 아리스토텔 레스의 가설에 따르면 상징화폐 단계는 1970년대 이후 신용화폐 시 대에서나 본격화했다. 그런데 벨기에의 화폐이론가 베르나르 리에테 Bernard Lietaer는 흥미로운 말을 했다. 현대인들은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그림과 문자를 보면 그들은 아주 추상적인 생각까지 했다"며 "고대인들이 상상력이 부족해서 물물교 환 뒤에 현물화폐로 넘어갔다고 여기는 시각은 현대인들의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 그리스 사람들이 전통 윤리를 바탕으로 주화에 적잖이 저항한 흔적이다. 이런 저항을 이겨내고 주화가 확산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전쟁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비상 상황이다. 전쟁만큼 빠르게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경우가 없다. 게다가 전쟁은 주로 국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다. 여차하면 수많은 병사를 지리적으로 나 문화적으로 아주 낯선 지역에 보내야 한다. 굿하트 교수의 말대로 거래 상대의 신용을 전혀 알 수 없는 지역으로, 솔론 등 아테네 지도 자들은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최악의 방법은 군대가 먹고 쓸 용품을 아테네에서 전장으로 수송하는 것이었다. 교통과 통신이 원시적인 시절 현물 수송은 거의 불가능했다. '어렵지 않게 옮길 수 있고 외국 에서도 '즉시 현물과 교환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달리 말하면 무게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크고 무거운 물건은 전쟁이 잦은 고대 그리스에서 저주받은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금화나 은화가 제격이었 다. 금과 은은 점령지에서도 조달할 수 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올빼미 동전으로 급여를 주고 전투 지역에서 물자를 조달했다. 이들은 급여로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다.
제프리 잉엄 교수는 돈의 탄생, 특히 주화의 등장에서 기묘한 시스템이 작동했다고 한다. 전쟁이 잦았던 시절, 병참을 위해 주화가 절실했다. 사실상 주화 없이는 전쟁이 불가능했을 정도였다. 주화를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서는 금이나 은 광산을 확보하는 게 필수였다. 따라서 전쟁을 할수록 약탈로 금이나 은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 다. 그만큼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주화의 양도 늘어났다. 병사들의 약 탈 대상이 단순 물품과 사람에서 금이나 은 등 귀금속으로 자연스럽 게 바뀌었다. 군인들은 모국이나 점령지에서 경제의 중심이었다. 그 들이 지급받은 주화나 약탈한 금과 은이 지역경제를 활성화했다. 심지어 시장이 없던 곳에 시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를 잉엄 교수는 '군대-주화 복합체(Military-coinage complex)'라고 불렀다. 복합체는 여 러 가지 요소들이 한 체제 내에서 밀접하게 서로 의존하는 양상을 이른다. 어느 순간 어느 요소가 먼저인지 또는 독립변수인지를 구분 하기조차 불가능하다. 군대-주화 복합체는 2천여 년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달러가 정부 차원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 기축통화로 자리 잡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도 요긴하다. 제2차세계대 전 직후 미군은 한반도와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거의 50여 개국에 주둔했다. 미국은 이들에게 달러로 월급을 지급했다. 미군 부대 주변 에는 달러로 작동하는 지역경제가 형성됐다. 나라 경제의 상당 부분 이 주둔 중인 미군의 달러 지출에 의존한 곳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와 지금의 터키 지역 도시국가 등은 전쟁에 대비해 따로따로 주화를 만들었다. 돈도 제각각이었고 화폐단위도 다양했 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하는 것이 환전상이다. 한 걸음 더 나 아가 도시국가들 모두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통화 시스템이 필요 했다. 실제로 군사동맹을 맺은 곳들은 단일 통화를 썼다. 자기들 돈 뿐 아니라 동맹국의 화폐도 정식 통화로 인정했다. 아테네는 한 술 더 떠 자기네 돈을 쓰도록 강제했다. 기원전 456년 아테네는 아이기 나섬을 압박해 자체 화폐 '거북이' 주조를 중단하고 '올빼미'를 정식 통화로 삼도록 했다. 기원전 449년에는 모든 외국 주화를 정부 조폐 창에 내는 법령을 만들었다. 모든 동맹국이 아테네 시스템으로 돈을 계산했다. 영국 화폐역사가 글린 데이비스가 말한 '아틱 은화 본위제(Attic Silver Standard)'의 등장이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국제통화 시스템이다. 금융위기 때마다 달러 체제 붕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한 번 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
- 고대 전쟁은 원가가 많이 드는 비즈니스였다. 알렉산드로스 군대 에서 최정예 기마병은 하루 2드라크마를 받았다. 보병의 일당은 1드라크마였고, 용병은 2/3드라크마 또는 노역꾼 일당의 2배를 받았다. 모든 병사에게 식사는 무료로 제공했다. 이들이 소아시아 지역에 진군했을 때 들어간 비용은 하루 20달란트였다. 은으로 0.5톤, 즉 12만 드라크마 정도였다.
정복 초기의 비용은 대부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자원(자기자본)이 었다. 하지만 그보다 몇 곱절 더 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은화 5만 달란트에 더해 죽어가던 다리우스 3세가 생포된 기원전 330년에 7천 달란트를 추가로 얻었다. 현지에서 조달한 금과 은은 마케도니아로 이송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에서 데리고 간 화폐 주조공들이 주화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지역에도 조폐창을 설치했다. 마케도니 아의 암피폴리스Amphipolis에 있는 조폐창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이 밖에 점령지에는 많은 군소 조폐창이 있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주 화 규모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규모를 능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원정을 단순히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선진 문명 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과학자, 엔지니어, 조사관, 몸종 등 지원 인력이 어마어마했다. 이들을 먹여 살릴 돈을 만드느라 조폐 창은 쉼 없이 가동됐다. 알렉산드로스의 신전이나 왕실 금고에 잠든 금과 은을 꺼내 동전으로 만들었다. 양질의 돈이 급증했고 유통 속도도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제국 곳곳에 설치된 조폐창에서 나온 돈이 각 지역에 배분되는 방식은 아주 효율적이었다. 돈을 유통하는 주요 채널은 병사와 용병들이었다. 현대 경제 용어로 말하면 병사들이 화 폐경제화의 첨병이었던 셈이다.
- 윌리엄 1세의 '최후의 날 책'은 현대 머니 시스템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주춧돌이다. 현대 돈은 넓은 의미에서 정부의 신용을 바탕으 로 한다. 시장에서 처음 만난 A와 B는 서로의 신용을 알 수 없다. 서로를 믿기도 힘들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믿을 만하다고 인정하는 제3의 사람이나 기관이 발행한 어음이나 수표 등으로 대금을 지불하 고 거래를 마감해야 한다. 영토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존 재는 정부다. 정부는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는' 빚(세금)을 받아낼 수 있는 기관이다. 영토 안에서 어떤 개인들이 보유한 무기를 합한 것보 다 월등한 공권력마저 쥐고 있다.
정부가 세금을 제대로 받아내려면 누구한테 얼마를 받아내야 할 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공권력은 센서스란 방법을 개 발해 사용해왔다. 3세기에 고대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세금 을 얼마나 거둘 수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제대로 된 센서스를 실시 했다. 로마는 그것을 바탕으로 처음 예산을 편성했다.
윌리엄 1세의 센서스 덕분에 영국은 유럽 대륙의 어느 나라보다 세원을 잘 포착할 수 있었다. 영국이 중세 말기부터 징세 대행업자 (Tax Farmers)에 의존하지 않고 정부가 직접 세리(세무 공무원)를 임명했다. 유럽 역사에서 가장 빠른 조세의 중앙집권화였다. 현대 재정학 용어로 조세 효율성이 한결 높아졌다. 이것은 파운드가 국제무역에서 결제통화로 사랑받은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 새로운 돈이 나타났다
은행돈(bank money)은 '모든 돈은 중앙은행이 공급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낯선 개념이다. 고대 중세 시대에 모든 돈은 왕 이나 제후가 찍어낸 주화였다. 하지만 대항해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서유럽에 돈의 수요가 급증했다. 왕이 찍어낸 주화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공백을 메운 주역이 바로 시중은행이었다. 시중은행 이 처음에는 어음 등 신용수단으로, 나중에는 은행권(bank note)을 발 행해 왕의 주화가 감당하지 못한 공간을 채웠다.
은행돈을 부르는 말은 다양하다. 왕이 찍어낸 금화나 은화를 국 가의 돈(state money)이라고 부르며 은행이 공급한 돈을 민간 돈(private money)으로 구별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국가의 돈을 상품을 바탕으 로 한 돈(commodity based money), 은행돈을 명목 단위를 바탕으로 한 돈(nominalist mone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의 조지타운대학교 슈테판 아이히 교수는 <정치학 관점에서 본 통화에서 "중세 대부분의 시기는 2가지 통화 시스템이 작동했다. 금화나 은화 등 귀금속 화폐는 외국과 교역에, 반면 화폐의 명목 단 위만을 바탕으로 한 돈은 영토 내 상거래에 쓰이는 방식이었다"고 설 명했다.
슈테판 아이히 교수가 말한 명목 단위만을 바탕으로 한 돈이 바 로 은행돈이다. 이 돈의 양은 18세기 후반 왕의 돈보다 많아졌다. 돈 이란 바이러스의 진화 과정에서 중대한 변화이다. 새로운 숙주의 탄 생이다. 정부-중앙은행-시중은행(금융회사)으로 이뤄진 머니 트라이 앵글의 싹이 튼 셈이다. 머니 트라이앵글은 은행돈이 없으면 작동하 지 못하는 구조다.
- 윌리엄 1세의 센서스를 바탕으로 영국 왕실은 세수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현대 국가의 완벽한 중앙집권적 조세 시스템을 갖춘 것은 아니다. 프랑스 등 유럽 대륙 국가와 견줘 상대적으로 세금을 잘 거뒀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탤리도 한몫했다. 랠리는 버드 나무로 만든 채권채무 증서였다. 탤리에는 왕실 인장이 찍혀 있다. 메소포타미아 왕국이 발행한 점토 토큰만큼이나 재질이 소박하다. 사실 기능은 거의 같았다. 영국 왕실은 세금 고지서로 탤리를 썼다. 세금 내용을 적은 랠리를 절반으로 나눠 한쪽은 왕실이 보유하고 다 른 한쪽은 세금을 내는 쪽이 보관했다. 자연스럽게 받을 권리와 줘야 할 의무를 상징했다. 중세 영국에서 돈은 곧 은화나 금화였다. 탤리 는 돈으로 태환되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 왕이 전쟁 등 급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돈의 진화에서 전쟁은 변곡점 구실을 하곤 했다. 17세기 유럽은 루이 14세 등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예외적으로 1690년대 영국이 명예혁명을 거치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했을 뿐이다. 어쨌든 17세기 유럽 권력자들은 30년전쟁 등으로 여념이 없었다. 전쟁이 일 상이 되던 시대였다. 거대한 상비군은 힘의 상징이었다. 프랑스는 40 만 명이 넘는 상비군을 보유했다. 영국도 대규모 용병에다 성인 7명 가운데 1명을 징발해 전쟁을 벌이곤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인류의 행 위 가운데 가장 소모적인 것이 바로 전쟁이다. 1690년대 중반 영국 세수의 80%가 전쟁에 소모됐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주화 대란(coinage crisis)이 상당 기간 이어졌다. 은화 공급이 부족했다. 은화는 일상상거래에 금화보다 많이 쓰였다. 이런 은화가 부족했다. 그 시절 돈(money)으로 여겨진 금화나 은화를 대신할 것이 절실했다. 바로 탤리와 은행권이 자금 조달과 결제수단 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 국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전쟁 비용을 금화나 은화를 찍어내는 정도로는 감당하지 못했다. 민간 자금을 끌어들여야 했다. 영란은행 이 1694년에 설립된 이유다. 영란은행 설립은 국가가 민간 돈에 본 격적으로 의지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돈이 국가의 돈에서 민간 돈으로 바뀌기 시작한 셈이다. 그 대가는 돈을 공급하는 권력을 시중은행(채권자)과의 분점이었다. 머니 트라이앵글 이 싹트기 시작했다.
세금 내역이 적힌 탤리를 돈 가진 사람(moneyed man)들에게 내놓 고 전쟁 자금을 빌렸다. 왕이 내놓은 1만 파운드짜리 탤리를 담보로 잡고 선이자 100파운드를 뗀 나머지 9900파운드를 빌려주는 식이었 다. 돈 가진 사람들은 왕실에 자금을 빌려주고 받은 탤리를 시중에 되팔았다. 9900파운드짜리 탤리를 9800파운드에 다른 사람에게 팔아 빌려준 돈의 상당 부분을 회수했다. 탤리를 살 사람은 차고 넘쳤다. 아리 아논 교수는 "영국인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탤리를 구입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순환구조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 고, 그 국채가 돈으로 구실하면서 세금 납부 수단으로 쓰였다.
탤리의 등장 · 할인 · 유통 등은 20세기 중반에 본격화할 현대 머 니 트라이앵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21세기 현재 우리가 쓰는 돈 은 은행 예금과 대출을 바탕으로 창출된다. 그렇다고 완전히 민간 돈 은 아니다. 최후의 순간 중앙은행이 보증한다. 정부는 민간 돈이지만 중앙은행이 보증하는 돈을 세금이나 국채를 발행해 조달한다. 한마 디로 현대 돈은 정부나 중앙은행이 찍어낸 증서가 아니다. 시중은행 시스템에서 민간의 빚이 화폐화한 것이다. 이를 중앙은행이 보증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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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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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주의 주류경제학은 환경경제학과 자원경제학이라는 분과에서 지구 생태계(환경오염이나 자원 희소성)와 경제의 관계를 다루고 있고 기후변화 역시 이 연장선에서 접근한다. 그런데 기존 주류경제학이 환경이나 자 원을 다루는 방식에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인간의 경제활동 특히 시장경제가 환경을 포함한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 생태계로부터 얻는 에너지나 식량, 원료 등은 노동이나 자본 과 마찬가지로 시장경제 안에서 생산에 투입되는 하나의 생산요소로 간 주된다. 생태계의 구성요소가 시장경제의 구성요소로 바뀌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생태계에서 인정받았던 다양한 자연적 가치는 모두 무시되 고 시장에서 매겨주는 화폐가격만이 고려된다. 일단 시장 안에 가격표 가 붙어 들어온 화석연료나 자원들은 설령 너무 희소해지거나 고갈될 위험 상황에 놓이더라도 시장가격 신호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조정될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간주한다.
- 이처럼 보수주의 주류경제학은 원래 시장 밖에 있던 자원이나 에너 지, 그리고 시장 밖으로 버려지는 폐기물과 오염물질들을 모두 시장가 격 메커니즘 안으로 끌어들여 통제하려고 한다. 지독히 시장경제 중심 적인 이 같은 발상을 생태경제학자 허먼 데일리 Herman Edward Daly는 '경제 제국주의 economic imperialism' 사고방식이라고 불렀다." 극단적으로 보면 사회와 자연을 포함해서 세상 만물이 마치 모두 시장 메커니즘의 지휘 아래 작동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 주류경제 학이 오랫동안 쌓아놓은 방대하고 심오한 지적 체계나 수많은 정책 방 안들조차 결국 시장 중심적인 틀 안에서 구성되는 근본적인 한계를 피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그 막대한 지적 자산에도 불구 하고 경제활동이 초래하는 생태파괴를 해석하고 대처하는 방식이 기대 한 만큼 유능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지구 생태계와 인간의 경제를 정반대로 접근하는 관점이 이 미 1960년대부터 제기되었다. 아직도 일반 시민들에게는 매우 낯선 생 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경제학 조류가 그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인간 경제 시스템 안에 지구 생태 요소들이 속해 있는 것 이 아니라, 거꾸로 지구 생태 시스템의 부분집합으로 인간 경제 시스템 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의 경제 시스템이 지구 생태 시스템의 하위요소 로 편입되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정반대의 두 접근법에 대해서 허먼 데일리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차이처럼 결정적인 차이라고 강조한다. 
- 기존 경제학 관점에서 생태경제학 관점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정치생태학자 부뤼노 라투르 Bruno Latour는, "사람들이 살아가 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라는 과거의 우주론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장소로서의 세계"라는 관점으로 우주론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는 경제를 지구 생태계 안에 '뿌리 내려 있는 것embeddedness' 으로 보는 관 점이기도 하고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는 허먼 데일리의 문제의식과 완전히 일치하는 접근이고 생태경제학의 핵심원리이기도 하다.
사실 상식의 눈으로 보아도 인간에게 지구 생태계는 시장경제에 투 입되는 생산요소들의 집합소 정도가 절대 아니다. 인류가 살아갈 터전 이며 기반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원료 창고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인류의 물질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존립을 위한 근본 전제 인 것이다. 허먼 데일리는 "지구 생태계가 100퍼센트 지분을 가지고 있기존 경제학 관점에서 생태경제학 관점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정치생태학자 부뤼노 라투르 Bruno Latour는, "사람들이 살아가 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라는 과거의 우주론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장소로서의 세계"라는 관점으로 우주론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는 경제를 지구 생태계 안에 '뿌리 내려 있는 것embeddedness' 으로 보는 관 점이기도 하고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는 허먼 데일리의 문제의식과 완전히 일치하는 접근이고 생태경제학의 핵심원리이기도 하다.
사실 상식의 눈으로 보아도 인간에게 지구 생태계는 시장경제에 투 입되는 생산요소들의 집합소 정도가 절대 아니다. 인류가 살아갈 터전 이며 기반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원료 창고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인류의 물질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존립을 위한 근본 전제 인 것이다. 허먼 데일리는 "지구 생태계가 100퍼센트 지분을 가지고 있는 자회사가 인간 경제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매우 직접적으로 표현 한다. 따라서 지구 생태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생물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과정에서 인간 경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생태 시스템 안에 있 는 인간의 경제활동 역시 지구 생태계와 주고받는 에너지물질의 흐름 으로 파악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생태경제학이 초기부터 지구 생태계와 인간 경제를 관통하는 열역학 법칙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던 이유도, 그 리고 경제 시스템을 스스로 무한 반복하는 기계역학 운동이 아니라 끊 임없이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생물학적 물질대사로 비유하려 했던 이유 도 여기에 있다.
- 경제적 생산 규모가 에너지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먼저 통찰한 것은 사회과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이었다. 한 세기 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 던 두 명의 자연과학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 두 명의 과학자들은 생태 경제학 창시자들인 로겐, 볼딩, 그리고 데일리 등보다 한참 앞서서 열역 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이 경제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선구 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거대한 생산력을 과시했던 20세기 근대문명이 순전히 화석연료 덕분에 가능했음을 간파했을 뿐 아니라, 화석연료에 의존한 문명은 매우 짧은 순간에만 유지될 수 있을 뿐 다시 태양에너지 에 기대는 문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 독일의 화학자 빌헬름 오스트발트Friedrich Wilhelm Ostwald가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1912년에 출간한 저서 《에너지 명령》에서 "화석연료는 필연적으로 고갈될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경제는 전적으로 태양복사 Solar radiation 에너지 공급에 근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인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 오스트발트는 "분명하고도 반박할 수 없는 지적을 했다. 화석연료라는 뜻밖의 유산이 지속적인 경제의 원칙들을 당분간 놓쳐 버리고 되는대로 살아가게 유혹한다고 말이다. 또 화석연 료가 필연적으로 고갈될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경제는 전적으로 태양 복사의 규칙적인 에너지 공급에 근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인식을 부득 이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오스트발트가 “화석에너지를 탕진하지 말 고 가장 유용한 곳에 사용하라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경 고에 따르면 자연법칙은 우리에게 어떤 선택도 허용하지 않으므로 자연 법칙의 무시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었다. 정말 미래를 한 세 기나 앞서 내다 본 얼마나 중요한 통찰인가? 오스트발트는 당시 세계적 으로 인정받는 과학자였음에도 세상은 그의 상식적인 경고를 못들은 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역시 그의 경고를 되새기는 사람들은 헤르만 셰어 같은 소수를 제외하면 여전히 거의 없는 것 같다.
- 1921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던 영국의 프레더릭 소디 Frederick Soddy는 에너지의 한계를 인식 한 후 인생 후반기에 아예 스스로 경제학을 파고들어서 현대 경제, 특히 금융의 제도적 제약을 분석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특히 1926년에 출판 한 책 《부와 가상 부, 그리고 부채Wealth, Virtual Wealth and Debt》는 엄청난 논 쟁거리를 안고 있는 문제작이다.
소디에 따르면 생명은 에너지의 지속적인 흐름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다. 이렇게 필수적인 에너지를 나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저장해두는 데 는 많은 물질적 제약들이 따른다. 그런데 화석연료라는 특별한 에너지 원은 이 제약을 단번에 벗고 화려한 20세기 문명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소디는 이렇게 경고한다. "자연이 석탄 속에 에너지를 저장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질학적 영겁의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꺼내 쓸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석탄이라는 자본스톡을 써버 리는 '화려한 기간'은 '매우 순식간'이라고 소디는 생각했다. 화려한 시대가 지나면 에너지 소득을 먹고 삶으로써 부과되는 제약이 점점 더 명 확해지고 분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순식간에 끝나는 '화려한 시간' 뒤에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소디의 대답은 햇빛이다. 그런데 햇 빛에너지에 의존해서 살기 위해 고생대나 지금이나 인간이 따라야만 하 는 규칙은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이다.
소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고의 도약을 시도하면서 현대 금융으 로 시야를 확장한다. 물리적인 경제가 열역학적 법칙의 한계 안에서 작 동하는 동안, 그 한계를 일시적으로 벗어버릴 수 있는 현대 금융경제의 오묘한 특징을 소디가 통찰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리적 자산과, 자산을 대출해서 만들어지는 '장부상의 채권'을 비교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 한다. 쉽게 돼지 농장 예를 들어보자. 실물자산인 돼지는 무한히 축적할 수 없다. 돼지 농장 규모의 공간적 한계는 물론이고 농장 규모를 키우다 보면 많은 돼지들 가운데 일부가 병들거나 죽거나 현실의 여러 물리적, 생물학적 제약이 폭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에게 돼지를 빌려줘서 채권자가 되면 어떤가? 만약 돼지 2마리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나중에 돼지 2마리를 돌려 받을 채권을 갖는 셈이고 거기에 더해 이자까지 요구할 권리도 갖는다. 소디는 이를 '마이너스 돼지 2마리 채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실물 돼 지라는 자산과 달리 장부상의 숫자에 불과한 '마이너스 돼지'는 무한히 많아져도 상관없다. 농장을 늘려야 할 필요도 사료를 더 준비할 필요도 없고 병들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이게 바로 현대 금융의 다양한 신용 팽창 방식이다. 그 숫자가 아무리 커도 컴퓨터에서 숫자만 바꾸면 자산은 아무런 제약 없이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
원래 그냥 두면 썩어 없어져 무한히 축적할 수 없는 실물자산을, 이런 식으로 남에게 빌려줘서 채권으로 만들어 버리면 영원히 썩지도 않고 아무런 추가 비용도 없으며 영원한 복리 이자까지 얹어진 선물로 돌변 한다는 사실을 소디는 주목한 것이다. 소디는 이를 "썩을 수 있는 몸체 를 버리고 썩지 않는 외피를 입는다"고 표현했다. 그 결과 무질서, 황폐 함, 녹, 부패의 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을 피해갈 기적을 만들었고 그게 현대 자본주의 경제, 특히 금융자본주의라고 통찰했던 것이다.
"부채는 복리의 속도로 성장하고 순수한 수량으로서 그 성장을 느리게 만들 아무런 제한도 없다. 실물자산은 한동안 복리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지만, 물질적 차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성장은 이내 한계에 부딪 힌다. 부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만 자산은 그럴 수 없다. 실물자산의 물질적 차원이 엔트로피라는 파괴적 힘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 축적한 거대한 자산을 이용해 또다시 자산을 무한정 확대하려고 애쓰 는 부자들의 모습에 대해 그는 "빵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씨앗에서 씨 앗으로 이어지는 밀알 같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존 러스킨을 인 용한다. "자본 말고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본은 뿌리를 생산하 는 뿌리일 뿐이다. 결코 꽃을 피우지 못하고 알뿌리에서 알뿌리로 이어 지는 튤립이요, 빵으로 만들지 못하고 씨앗에서 씨앗으로 이어지는 밀 알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지적한다. 정치경제학은 지금까지 뿌리를 양 산하는 데 전념했고 튤립이란 건 본 적도 품은 적도 없다고.
다소 길게 인용했는데, 소디의 이 흥미로운 주장이 현대 생태경제학자 들이 직면한 중요한 고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즉, 유한한 지구 위에 서 무한성장을 그만두게 하고 싶어도, 금융자본이 '복리로 늘어나는 이 자'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면 그게 가능할까? 투자에 대한 복리 수 익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금융자본의 압박을 받는 산업자본 역시 팽창을 멈출 수 있을까? 제약 없이 무한팽창하려는 금융의 욕구와, 물리적 제약 에 의해 한계 지워진 실물경제의 불일치는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 오랫동안 원자재와 환경에 대해 조사해온 프랑스 기자 기욤 피트롱Guillaume Pitron은 “오늘날 우리는 녹색기술과 정보기술을 결합하여 멋진 신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재생에너지나 배터리 생산에 필요한 희귀금속 채취를 위해 얼마나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지 경고한다. 그는 "녹색기술에는 엄청난 양의 희귀금속 자원이 필요하다. 컴퓨터 기술로 유도되는 초고성능 통신 망 또한 희귀금속을 대거 사용한다"면서,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에너지 전환을 실행하려면 희귀금속 채굴량을 15년마다 2배씩을 늘려야 한다"
- 세상에 햇빛조차도 공짜로 얻을 수는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물론 기술혁신으로 자원효율성을 높여 기존보다 더 적은 자원과 에너 지로 동일한 산출을 만들어낼 수는 있고 이에 대해 기술과 자본이 에너 지와 자본을 부분적으로 대체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허먼 데일리도 이를 "자연자본을 제한적으로marginally 대체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최대한이다.더욱이 대규모의 강력한 기술은 대체로 생산 과정에서 더 많은 자원 (물질)을 필요로 한다. 실제 역사적 경험을 보더라도 자원과 에너지 효율이 계속 향상된 것은 맞지만, 그 이상으로 총사용량이 늘어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바로 제본스의 역설이다. 물론 기술혁신으로 자원과 에너 지의 사용을 줄이는 '자원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지구 환경에도 좋 고 열역학 법칙에 위배될 것도 없다. 하지만 자원생산성을 높이자는 것 이 곧 기술혁신으로 자연자원의 고갈을 막을 수 있다든지, 아니면 자본 (설비)으로 자연자원을 대체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해두자.
- 일찍이 탈성장의 사상적 원천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는 경제의 궁극적 목 적에 관해 허먼 데일리와 맥락을 같이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남겼다.
"경제적인 가치들을 중심에 두는 (또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을 중지하 고, 경제가 최종 목적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단순한 수단으로서 합당한 위치로 돌아간 사회, 따라서 끝없이 증가하는 소비의 이 미친 경쟁을 사 람들이 털어버리는 사회를 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구 환경의 결정적인 파괴를 피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특히 현대인의 정신적, 도덕적 재앙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그러면 지구 생태계의 하위 시스템으로서 경제 시스템이 점점 더 규 모가 커져서 지구 생태계의 수용능력에 근접하는 '꽉 찬 세상'에 직면했 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허먼 데일리는 지구 생태계가 스 스로 재생시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경제 규모를 유지하도록 거시경제 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인간에게 충분한 삶의 질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낮은 엔트로피 사용가용 에너지 사용인용자)을 최소화 하는" 수준으로 경제 규모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혁신을 할 때 에도 꼭 필요한 인간의 삶의 질을 만족시키기 위해 낮은 엔트로피 사용 량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허먼 데일리는 경제의 궁극 적인 목적이 "(사치스런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해 충분한 정도만큼만 부 를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삶을 유지하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충분성sufficiency' 원칙을 제시한다.
- 이제 본격적으로 경제성장 얘기로 들어가자. 경제성장이란 1년 동안 한 국가 안에서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화폐로 계산한 총액의 증 가를 말한다. 그리고 연간 실질 경제성장률은 물가상승을 감안해서 경 제가 얼마나 높은 비율로 성장했는지를 본다. 경제학자나 정책 전문가 를 막론하고 경제가 잘 돌아가는지 알아보는 단 하나의 지표를 꼽으라 면 누구나 '연간 실질 경제성장률'을 꼽는다. 경제가 어려움에 빠질 조 짐을 보이면 그들은 늘 성장률 전망부터 쳐다본다. 성장률은 마이너스 가 아니라 당연히 플러스이어야 하며, 플러스 수치가 얼마나 클 것인지 가 최고의 관심사가 된다. 이런 분위기로 짐작해보면, 성장률은 마치 자 본주의가 태어날 때부터 개발되어 항상 경제가 바람직한지를 확인해주 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르다. '경제성장률'이라는 용어 자체가 비교적 매우 최근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 역사에서 전년도 대비 성장률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는 지 난 2,000년 동안의 세계 성장률 추이 곡선만 보더라도 확연히 알 수 있 다(그림 16 참조). 18세기까지만 해도 경제 규모는 오르락내리락 했으며 인 구가 조금씩 늘어난 탓에 매년 평균 고작 0.05퍼센트 정도만 성장했을 뿐이다. 사실상 성장하지 않는 경제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 다. 국민총생산GNP 혹은 국내총생산GDP을 연간 단위로 산출하는 방식이 개발된 것조차 사실은 1929년 대공황과 2차 대전 시점이라는 것은 이 미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어떤 의미에서 GDP는 전시의 군사물자 조달 을 위한 계산의 필요가 낳은 산물이었다. 그렇다고 GDP가 발명된 뒤 곧 바로 '연간 성장률 지표가 사용된 것도 아니다. 도마E. Domar나 해러드R. Harrod 같은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2차 대전 이후 경제에 대해 가장 크게 고민했던 것은 완전고용이었고 경제성장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고려했다는 것이다. 실제 '연간 경제성장률'이 처음으로 공공 영역에 등장한 것은 미국이 1949년이고 영국이 1950년이다. 그리고 1957년이 돼서야 유엔이 유럽 지역의 실질 경제성장률을 처음으로 비 교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경제성장률이라는 지표는 대단히 짧은 시간 안에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최고 정책 목표로서, 각 정부가 고려해야 할 1차 과제로서 자리 잡기 시작했고 국제비교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는 지표가 되었다. 또한 당시는 비록 선진국들에 국한되었지만 고도의 경제성장이 불평등 감소와 동반했던 매우 예외적인 '대압착 시기Great Compression' 였 다. 이런 분위기 탓에 경제성장은 심지어 빈곤과 불평등, 복지 부족 등 모든 경제적 질병의 치료제로 격상되었다. 특히 냉전이 한창이던 이 시기에 경제성장률 지표는 미국과 소련의 체제경쟁으로 인해 중요성이 증폭된다. 자본주의 미국이나 사회주의 소련 모두 한결같이 누가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지에 따라 자신들 체제의 우월성이 입증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 나아가 성장률은 각 국가의 위신을 세워주는 지표가 되었고 자본 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경제 규모 순위는 곧 국력과 동격이 되었다. 이 렇게 해서 "1960년대 말쯤이면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 부 정책 목표로서 경제성장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이 추세는 2020년대인 지금까지 크게 손상 받지 않고 견고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데 알고 보면 기껏해야 70년 정도의 역사에 불과하다. 짧은 역사에도 불 구하고 한번 굳어진 '경제성장 패러다임'과 '경제성장 헤게모니'는 경제 정책 일반은 물론이고 공공정책 전체에 걸쳐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점에서 보면 적어도 20세기 후반 이후의 사회는 복지국가가 아 니라 '성장국가growth state' 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죽하면 1973년 슈마허가 "병적인 성장, 건전하지 못한 성장, 파괴적인 성장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경제학자에게 표현조차 허용될 수 없을 정도로 그릇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했을까? 
- 18세기말 산업혁명으로 석탄의 대량 활용 시대가 열렸고, 이어서 1850년대에 러시아와 캐나다 그리 고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석유가 채굴되어 사용되기 시작한다. 내연기 관 자동차가 발명되고 전기 사용이 급격히 확대되었던 2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석탄보다 더 밀도 높고 효율적인 석유문명이 열렸다. 20세기 중반이 되면 중동을 포함한 전 세계 곳곳에서 석유가 대량 채굴되고, 이 어 천연가스까지 활용되면서 20세기를 석탄-석유가스라는 화석연료 의 세기로 만들었고 일부에서는 이를 '화석자본주의Fossil Capitalism'라고도 불렀다. 경제사학자 슈멜쩌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화석연료를 끊임없이 늘려서 생산 과정에 투입한 결과, 우리의 생활방식과 전쟁 방식, 식품생산 방식, 민족국가 구성 방식, 지정학, 젠더 역할 분담, 유행하는 '탄소문화'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을 전환시켰다.
이 사실을 이미 100여 년 전에 노벨 화학상 수상자 프레더릭 소디는 아주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기관사와 신호수, 관리자, 자본가, 주주, 노 동자들의 모든 노력을 더해도 "기차에 동력을 공급할 수 없다는 사실에 는 변함이 없다. 진짜 기관사는 태양에너지가 만들어낸) 석탄"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치 유산을 물려받아 펑펑 써대는 행복한 상속자인" 넘칠 만큼 많고 값싼 석탄, 석유, 가스라는 화석에너지를 이용하게 되 자, 그토록 현대 경제에서 중요한 화석에너지가 마치 물과 공기처럼 당 연히 주어진 것으로 취급된다. 필요하면 무한정 값싸게 공급받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생태학자 찰스 홀Charles Hall은, "경제 학의 사회 모델에서 에너지가 생략되고 유한한 자원에 대한 언급 역시 생략되고 말았다"고 탄식했는데 그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 역시 화석에너지의 결정적인 역할을 빼먹은 산업혁명 의 역사를 지식으로 배우고 있는 중이다.
- 요약해보자. 인류가 약 200여 년 동안(특히 최근 70년 동안) 화석에너지를 대량으로 경제에 투입한 결과, 해마다 증가하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 뤄낼 수 있었다. 온갖 과학지식과 기술적 발명, 정치와 사회제도의 혁신 에도 불구하고, 만약 인류가 지금까지 안개와 같이 흩어져 지구에 도달 하는 실시간 태양에너지에만 줄곧 의존해왔다면 오늘날의 경제성장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인류가 거둔 놀라운 경제성장이 전적으로 화석에너지 덕택임 에도 불구하고, 너무 값싸고 많은 화석연료가 거의 무한정 공급되어온 탓인지 오직 '희소성'에 주목해온 경제학자들은 막대한 화석에너지의 역할을 무시했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 기술만으로 생산함수를 고려하면서 무한 경제성장을 아무 의심 없이 낙관해왔다. 심지어 미래의 경제는 점점 더 탈물질화dematerialization할 것이므로 화석에너지나 자연자원의 한계가 미래 성장에 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이 에 대해 제러미 리프킨은 "경제학자들은 비할 데 없는 물질적 부를 창출 한 효율성과 생산성의 가파른 상승이, 옛날 지질시대의 소산인 화석연 료의 발굴과 변환이 없었다면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바츨라프 스밀도 이렇게 확인해준다. “경제학자들은 물리적인 생산 과정을 위해 요구되는 에너지의 중요성에 대한 시스템적 인식을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경제에서 에너지 비용 비중이 무시할 만큼 작기때문에 에너지는 아무래도 좋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경제적 산출이 오직 노동과 자본만으로 생산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또는 에너지도(자연에서만 추출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노동과 자본에 의해 생산될 수 있는 인공자본의 한 형태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값싸다고 생각하고 대량으로 사용하여 현대문명의 이익을 누린 대가는 컸다. 인류의 생존 기반인 안정된 온도와 자연의 순환을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어 쩌면 해법은 정해져 있다.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몰라도 화석자 본주의에서는 확실히 탈출해야 한다. 거대한 가속의 시기를 전격 반전 시켜 '거대한 감속'을 시작해야 한다.
- 유럽의 젊은 철학자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은 "각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그 시대를 잘 대표하는 고유한 숫자와 지표가 있다(Every era needs its own figures)"고 말했다. 매우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인류가 약 1만여 년 전 농사를 짓기 시작한 후 산업화가 시작되던 200 여 년 전까지만 해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는 농사지을 땅 면적과 곡물 수확량이었지 GDP 같은 화폐량이 아니었다. 비교적 최근에 발명 된 GDP 지표는 2차 대전 시기에 다른 모든 요소들을 생략하고 전쟁 물 자를 대량 공급할 목적이 컸던 것이지 시민들의 삶의 질과 행복을 측정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GDP는 태생부터 전쟁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GDP가 1950~60년대 아주 잠깐 동안 고도성장과 낮은 불평등을 동시에 만족시키면서 마치 모든 것의 해법인 양 착시를 일으켰고 그 여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성장 국가의 시대'는 현실에서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 있다. 2008년 OECD조차 다음과 같이 보고서에 기록할 정도였다. "경제성장은 진보의 동의어였다. 성장하는 GDP는 틀림없이 삶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제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세 상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많은 나라들에서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50년 전보다 삶이 더 나아지고 행복해지고 있다고 만족스럽게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 우선 정상상태 경제의 정의부터 확인하자. 1976년 《정상상태 경제학》에서는 이렇게 요약한다.
정상상태 경제란 "낮은 비율의 처리량throughput으로도 꽤 바람직하고도 충분한 정도로 인구와 인공물artefacts을 일정 수준의 저량stocks으로 유지하는 경제다. 다시 말해서 생산의 첫 단계(환경에서 낮은 엔트로피 물질의 추출)에서부터 마지막 단계(높은 엔트로피 폐기물을 외부 환경으로 배출)에 이르기까지, 최저 수준의 적당한 물질과 에너지 흐름low만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상태 경제는 물리적physical 개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어떤 것이 비물리적이라면, 그때는 아마도 영원히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한편, 생태경제학 교과서로 쓴 책 <생태경제학》의 2011년 두 번째 판에서 허먼 데일리는 조금 더 명료하게 서술한다.
"정상상태 경제의 주요 아이디어는 오랫동안 좋은 삶을 누리기에 충분한 정도로 부와 인구의 규모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이 규모를 유지하 는데 필요한 물질적 처리량은 높기보다는 낮아야 하고, 항상 생태 시스템 의 재생과 흡수용량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이 시스템은 따라서 지속 가 능하고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다. 정상상태에서 진보의 경로는 더 커지는 것to get bigger이 아니라 더 좋아지는 것to get better이다. 이 개념은 고전경제 학에 들어있었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에 와서 대체로 폐기되었다."
한마디로 '정상상태 경제'는 자연에서 얻는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자연으로 버리는 폐기물을 자연이 재생하고 흡수할 수준으로 최소화하는 경제다. 이를 위해 인구와 부를 더 늘리지 않고 자연이 감당 가능한 일 정한 수준으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즉, 정상상태 경제는 물리적 측면에서 더는 성장하지 않는 경제다. 그래서 정상상태 경제'인 것이다. 물론 어떤 영역은 투자가 줄어들고 다른 영역은 신규 투자가 늘어나 는 등 개별적 산업 영역들에서는 성장과 축소가 계속 다이내믹하게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물리적 처리량은 최소한으로 유지하지만 비물리적 처리량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허먼 데일리가 강조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정상상태 경제에서는 이제 경제의 물질적 '파이'가 더는 늘지 않 으므로 성장 대신 분배가 특별히 중요해진다.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준 까지 '최소소득과 최고소득'을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자고 정상상태 경 제학이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50여 년 동안 성장의존주의와 이론적으로 싸우면서 생태경제학을 발전시킨 허먼 데일리는 이 싸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지금 경제성장이 결코 무한히 계속될 수 없다고 하는 '물리적 불가능성'과, 성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지 멈출 수는 없다는 '정치적 불가능성' 사이의 갈 등을 목격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느 것이 이길 거 같은가? 허먼 데일리는 확신한 것 같다. 결국은 '물리적 불가능성이 이길 거라고. 왜냐고? 자연은 우리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어쨌든 정상상태 경제'의 정의를 보면, 성장을 멈춰서 더 이상 커지면 안 되는 '최적 수준의 경제 규모' 유지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하게 떠오 른다. 사실 허먼 데일리는 반복해서, 왜 기존 경제학의 거의 모든 곳에 는 최적 개념이라는 것이 있는데, 유일하게 성장에만 최적 지점이 없이 무한히 성장하면 할수록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정상상태는 '최적 규모optimal scale'라는 경제 목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한 그의 은유가 바로 배가 선적할 수 있는 최대 화물의 양을 제한하는 '플림솔 라인plimsoll line' 또는 화물 적재 한계선load line, 배가 잠 기는 한계선water line이라는 개념이다. 19세기 중엽 새뮤얼 플림솔Samuel Plimsoll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화물이 과도하게 적재되어 거친 바다에서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선박 허리에 가시적인 선을 그어놓았다(그림 31 참조). 
- 도넛 경제란 무엇일까?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이 그가 단 하나 의 도식으로 완성한 도넛 이미지가 도넛 경제에 대해서 사실상 거의 모 든 것을 말해준다. 도넛 이미지에 대한 가장 단순한 설명은 이렇다. “안 쪽 고리는 사회적 기초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안으로 떨어지면 기아와 문맹 같은 심각한 인간성 박탈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바깥쪽 고리는 생태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밖으로 뛰쳐나가면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손실 등 치명적인 환경위기가 닥친다. 두 고리 사이에 도넛 이 있으니, 이 공간이야말로 지구가 베푸는 한계 안에서 만인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영역이다."
한마디로 도넛 경제는 시민들로 하여금 아래로는 '복지를 위한 사회적 기초 social foundation'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고, 위로는 '생태적 한계ecological ceiling'를 넘지 않게 하여, 그 사이에서 '사람들의 삶을 위한 안전 하고 정의로운 영역'을 구축하자는 것이다(그림 33 참조). 그 결과 "최저 선에서 인간성을 박탈당하지 않는 삶을 살고, 한계선에서는 지구의 생 태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인간 사회의 복리를 누리는 것"이라는, 복지 와 생태를 아우르는 간명하고 강력한 제안이다. 도넛 안쪽의 12가지 사 회적 기초는 "2015년 UN이 '지속가능발전목표'에 구체적으로 적시한 우선적인 과제에서 도출한 것이다. 또한 도넛 바깥쪽의 “생태적 한계는 요한 록스트룀과 윌 스테픈 등 지구 시스템 과학자 집단이 제안한 9가지 경계선을 차용한 것이다.
- 기후위기의 티핑포인트를 지날 2020년대가 점점 흘러가고 있고 기후 상황은 매년 달라지고 있다. 과연 2024년 국회의원 선거, 늦어도 202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기후가 아니 라 경제를 바꾸는 정치적 기획들이 실천될 수 있을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던 경제학자 부부 배너지와 뒤플로는 자신들의 책에서 케인스를 떠오르게 하는 이런 글을 남겼다.
"사상ideas은 강력하다. 사상은 변화를 추동한다. 좋은 경제학만으로 우 리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경제학이 없다면 우리는 어제의 치명적 인 실수를 반드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무지, 직관, 이데올로기, 관성이 결합해서 그럴듯해 보이고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배신하게 될 답을 내놓게 될 것이다.'
- 경제 '파이'를 더 이상 키우지 않고 정의롭게 분배하는 주제로 옮겨가 보자. 생태경제학의 최대 난제는 분배 문제다. 왜 자연과 경제를 고민하 는 생태경제학에게 사람들 사이의 생산물 분배가 최대 난제가 될 수 있 을까? 간단하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기존의 경제학 대부분은 분배 문제를 '회피하는 일종의 도피처가 있었다. 경제성장이라는 도피처 말 이다. 라투는 "경제성장의 존재 때문에 서구 국가는 분배와 정의의 기 본적인 문제에 맞서지 않고 지금까지 혁명 없이 버텨왔다"고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생태경제학은 시작부터 스스로 그 도피처를 꽉 막아놓고 분배를 얘기하자고 한다. 물리적 파이를 더는 키우지 말자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물질적으로 무한팽창하지 못하는 파이를 어떻게 공정하게 분배해서 사회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킬 것인지로 관심이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과감한 생태경제학자는 가장 과감한 분배주의자이어야 할지 모른다. 문제를 반대로 접근해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지구 생태의 수용능력 안으로 경제 규모를 제한하자고 하면, 더는 재산과 수익을 늘리기 힘들 어진 부유층은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적 필요조 차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서민들 역시 찬성할 리가 없다. 생태정의가 사 회정의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후운동이나 생태운동은 이전처럼 과소비하면 안 된 다고 경고만 했지, 한정된 자원으로 어떻게 파격적으로 분배를 개선하여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살수 있는지는 말을 아꼈다. 유복하게 살던 이들은 조금 더 검소하게 살고, 어렵게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이들도 환경 을 생각해서 참으며 살라는 말로 오해하기 쉽다. 이제 분배 이슈에도 적극 적으로 개입하여 사회정의와 환경정의를 통합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스 등은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는 무한히 팽창하지 않지만, 이와 달리 지위재 등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기 때문에 물질 적 생산을 기본적 필요에 맞출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미 한국을 포 함하여 많은 선진국들은 무한 경제성장으로 익숙해진 관성과 삶의 태도, 즉 무한한 물질적 소비의 팽창을 삶의 질 개선과 동일시하는 관성에 깊 숙이 젖어 있는 상황이다. 울리히 브란트Ulrich Brand와 마르쿠스 비센Markus Wissen 이 통찰력 있게 지적한 '제국적 생활양식' 말이다.
이제 '제국적 생활양식'을 버리고 기후위기를 추가로 악화시키지 않 을 정도의 물질적 삶을 유지하는 '1.5°C 라이프스타일'로 전환하자는 케이트 레이워스 등의 제안이 이 대목에서 절실하다. 레이워스는 a든 시민이 '1.5°C 라이프스타일'로 전환하는 과정은 개인적 실천으로는 절대 달성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정부가 부유층의 사치성 소비나 탄소집약적 소비, 또는 과시적 소비를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공공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서민들에게는 부족한 필수 소비를 충족할 수 있도록 보편적 기본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 결과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면 멈추는 '사적 충 분성'을 구현하고, 동시에 '공적 풍요로움' 원칙 아래 개인적인 필요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는 사회계층과 개인에 대해서 공공의 보편서비스 를 확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캐딜락을 한 대 생산할 때마다 쟁기나 삽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낮은 엔트로피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다. 즉, 우리가 캐딜락을 한대 생산할 때마다 미래 인류의 삶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풍요를 추구하는 경제발전은 지금 여기의 우리와, 그 풍 요를 누리게 될 가까운 장래의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될지 모른다. 하지 만 그건 전체적으로 볼 때 인류의 이익에 분명히 반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의 이익이 원래의 낮은 엔트로피를 가지고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고자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조르제스쿠-로겐, 생태경제학의 창시자)
- 로겐이 말하고 싶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현재의 필요를 위해 당장 자원을 써버린다면, 미래의 아주 중대한 필요를 충족하는 것을 불가능 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대의 기본적 필요가 미래세대의 필요보다는 우선할 수 있지만, 현세대의 낭비적 사치보다는 미 래세대의 기본적 필요가 우선한다. 또한 설령 미래세대에게 더 많은 인공의 물질자본과 지적 자본을 물려준다 한들, 그것이 자연자원의 퇴화 와 가용 에너지의 소실을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결국 세대간 정의를 자동으로 조정해주던 세대간 보이지 않은 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 나 아예 근원적으로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남은 해법은 사회적 숙의를 통한 '보이는 손'이 아닐까? 기후위기에 대한 대처 역시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는 손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 예를 들어 최첨단 혁신 분야로 자처한 플랫폼 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 역시 극히 소수의 괜찮은 일자리와 압도적으로 많은 불안정한 플랫폼 노동을 양산하는 현실을 보라. 녹색 일자리에서도 아마 이런 현상 은 그대로 재연될 수 있다. 탈탄소 산업이 자동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로버트 폴린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청정에너지 투자를 통해 만들어지는 일자리가 노동자들에게 괜찮은 보 수를 제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일자리들이 작업장 환경 개선이나 노조의 대표성 강화, 여성과 소수 인종을 비롯한 소수 집단에 대한 고용 차별 감소를 이뤄 내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다만 신규 투자가 일어날 것 이라는 사실 덕분에 사회 전반에 걸쳐 - 고용의 질 개선과 노조 가입률 확대, 소수 집단 일자리 증가 등을 위한 정치 결집을 이끌어내기가 쉬 워질 것이다.”
폴린이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녹색 일자리가 새로 창출되는 것을 계기로 이 분야에서 고용 조건을 바꾸기 위한 정치적 노력이 따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탈탄소 산업 전환에 따른 녹색 일자리 창출을 계기로 기존의 고용구조를 노동친화적으로 개편하려는 적극적인 노력과 기 획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임시 계절 하도급으로 태양광 설치기사를 늘리는 방식은 과거의 고용 패턴과 관행이 녹색산업에도 그 대로 이식되도록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직무 내용뿐 아 니라 일자리의 안정성도 녹색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시작부터 필요하지 않을까?
- 일자리에도 역사가 있다면 지난 20여 년은 글로벌 신생 분야 일자리 로서 디지털 일자리의 부상을 기록할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일자리의 역사는 노동자들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안겨 주었다. 디지털 산업 전 환은 양질의 많은 일자리를 주기보다는 일자리를 없애거나 아니면 플랫 폼 노동이라는 극히 불안정한 일자리를 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앞으 로 20년 일자리 역사는 거의 틀림없이 녹색산업 전환에 따른 녹색 일자 리가 만들어나갈 것이다. 디지털 일자리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생태경제학의 지혜가 절실하다.
- 경제가 지구 생태계와 연계되어 있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장실 패는 또 있다. 원래 시장의 플레이어들은 시장에서 정해지는 가격을 수 용하기만 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의 가격 신호가 가장 효율적으로 수요 자와 공급자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산업에서 독과점 등으로 인해 소수 기업들이 시장의 가격 수용자가 아니라 스스로 가격을 결정할 힘을 갖게 되면 시장 메커니즘은 무력화될 수 있다. 시장의 수요 공급에 따른 가격이 아니라 독과점 기업이 원하는 독점가격이 시장에 강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점으로 인한 시장실패다.
문제는 화석연료 시장이 대체로 독과점이 심한 경우라서 시장실패가 일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경제가 지구 생태계와 연계될 때 시 장실패는 간혹 또는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반복 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시장의 가격기제에 의존해서 생태 문제나 기후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매우 무모해질 수 있게 된 다. 그래서 생태경제학자 피터 빅터는 이렇게 확인한다. “어떤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데 영향을 줄 유용한 정책 수단으로서 가격을 얘기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올바른 가격'이 계산될 수 있고 그 가격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또한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완전히 차 원이 다른 얘기다. 특히 경제 규모(자연과의 관계)나 사회정의를 대상으로 할 때는 더 그렇다" 
-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매듭을 지어보자. 지구가 견딜 수 있는 생태의 한계를 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정책을 '가격 메커니즘'으로 결 정할 수 없다고 생태경제학자들이 판단했으니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 는 '탄소가격제' 역시 도입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온실 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해서 오직 탄소 가격에만 의존하는 정책은 잘못 된 것이지만, 이것이 탄소 가격의 보완적 역할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 다. 우리가 당장 시장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시장에서도 탄소 배출을 줄 이는 메커니즘이 작동할 필요는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이 아니라 자 원에 과세해야 한다는 생태적 조세 기준으로도 탄소 가격은 필요하다. 문제는, 사회적 비용을 반영하여 탄소 가격을 올바로 설정하면 시장가 격 신호가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주어 녹색혁신과 탈탄소화를 이룰 수 있 다고 믿는 보수주의 주류경제학적 환상이다. 일단 탄소 가격을 통한 시장 의 신호는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제한된 역할조차도 '모든' 온실가스에 '충분한 가격을 부과했을 때 가 능한 얘기다. 알다시피 이미 세계적으로 약 80여 국가나 지방정부들이 탄소세나 탄소배출권 거래제도ETS 등의 방식으로 온실가스 배출에 가격을 매기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전체 탄소 배출의 고작 약 20퍼센트에 대해 서만 탄소가격이 매겨지고 80퍼센트는 가격이 제로다. 가격이 매겨진 20 퍼센트조차도 그나마 3/4은 탄소 배출 톤당 10달러 미만, 석유 1리터로 계산하면 약 40원 정도다. 통상적인 시장의 유가 변동 속에 파묻혀버릴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평상시의 유가 변동이 리터당 40 원보다 훨씬 그 폭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 탄소가격제가 기후위기 완화에 거의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도 지구 온도 추가 상승을 2°C 이하로 억제하려면 탄소 배출 톤당 탄소세가 200 달러에 가까워야 하는데 현재 글로벌 탄소가격이 고작 2달러에 불과하다 면서 어떻게 100배를 더 높일 수 있을지 몰라 탄식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나? 사실을 말하자면 '지구가 견딜 만큼' 탄소 가격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견딜 만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정도 가격이면 기업이 견딜 만하니까 기업은 탄소 가격으로 인해 행동을 바꿀 만한 유인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 기업들이 견딜 만한 데 왜 행동을 바꾸겠나? 따라서 기업의 이윤 몫이 침해당하지 않을 만큼 탄소 가격이 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생태계가 위험하지 않을 만큼' 설정해야 한다. 그 비용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서 기업이 불가피 하게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기술혁신에 투자를 단행하거나 아예 탄 소집약적 산업에서 녹색산업으로 전환을 서두르게 해야 한다.
- 그런데 이제까지 글로벌 차원에서 기후위기 대응에 가장 심하게 저 항해온 세력은 (대)기업들이다. 앞서 기후위기 대응 30년 대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다보스 권력'이라고 생태경제학자들이 이름붙인, 탄소 집약적 기업권력들, 특히 화석연료 산업과 군수산업이었다고 확인했었다. 기후위기 대응에 기업들이 어떻게 저항해왔는지에 대해서는 경제 학자가 아닌 기후과학자 마이클 만Michael Mann이 가장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 담배기업들이 담배의 건강 유해성을 부인 했던 것처럼 기후에 대해서도 기업들은 보수 싱크탱크나 학계를 뒤에서 지원하면서 기후위기를 정면 부인하는 내러티브를 퍼뜨려왔다는 것이 다. 그러다가 최근 기후위기가 너무 명확해지자 방향을 바꿔 기후운동 가의 위선을 공격하기, 기후위기 대응을 지연시키기 등의 전략으로 초 점을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마이클 만은 이를 '신기후전쟁 New Climate War' 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특히 기후위기를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문제를 매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담배회사들, 총기회사들, 음료회사들이 주로 써먹던 수법이, 흡연이나 총기사고 등을 '개인적 활동'이나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캠페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총기 판매 기 업들은 "총기가 무슨 죄냐, 총을 쏜 인간이 죄지"라고 하면서 개인의 책 임으로 돌렸는데 기후위기에도 비슷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개인적 실천은 안하면서 기후위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위선자' 딱지 를 씌우기도 했는데, 심지어 전 미국 대통령 후보이자 기후운동가인 앨 고어Al Gore도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이클 만은 개인들이 각자 플라스틱 안 쓰고, 자동차나 비행기 안 타고, 고기 안 먹고 하는 식으로 개인적 희생personal sacrifice을 강요하는 기후운동에 매몰되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담배 피는 걸 창피하 게 만들어서 세계적으로 흡연이 급격히 줄었던 것이 아니라 정부의 일 정한 규제가 작동해서 실제 흡연 인구가 감소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같은 개인적 실천과 기업의 행동을 바꾸게 만들 제도 변화 둘 다 중요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결정 적으로 전자가 후자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시스템의 변화가 없는 개인적 실천은 거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 이처럼 생태경제학자들과 기후과학자들은 기후위기 대응 실패의 제1 순위를 (기업)권력의 저항에서 찾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대기 업들이 앞장서서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예를 들 어 애플을 포함한 국내외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이 너도나도 환경을 고 려한 ESG 경영에 나서겠다고 하고 재생에너지 100퍼센트 사용(RE100) 을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할 뿐 아니라, 협력사들에게도 RE100을 요구 하면서 마치 기후위기 대응을 선도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ESG 경영과 RE100은 과연 기후위기에 막대한 책임이 있는 거대기업 들이 진정으로 책임을 지는 유력한 방법일 수 있을까? ESG 경영이 유행 하다 보니 온갖 화려한 수식어와 복잡한 경영기법들로 요란한 출판물과 보고서들도 범람한다.
또한 과연 디지털 첨단기업들이 기후대응을 선도하는가? 심지어 시장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한 수익 추구를 해야 하는 기업들이 수익을 억제하면서까지 사회적 가치나 환경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자발적으로? 이 대목에서 ESG 경영과 RE100에 대한 화려한 마케팅적 기법이나 수식어를 걷어내고 냉정하게 평가한 분석을 참고할 필 요가 있다. 우선은 캐나다와 영국 중앙은행 총재를 지냈고 '기후행동과 금융을 위한 유엔 특별대사까지 했던 마크 카니 Mark Carney가 자신의 책 《초가치》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ESG 경영에 대해 강조하고 있으 니 그의 주장을 확인해보자.
카니는 ESG가 기업 경영 원리보다는 금융의 투자 전략에 가깝다면서 기존의 사회책임투자CSR, 임팩트 투자mpact Investing, 공유가치 창출CSV 등 이 사실 모두 유사한 개념들이라고 확인한다. 그는 ESG가 환경과 사회 를 고려하자는 투자자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재무적 수익과 사회적 가치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장기적으로도 주주에게 더 많은 수익을 안겨줄 것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 간단히 말해 ESG는 (1) 환경과 사회를 위한 비재무적 고려를 충분히 해달라는 선한 투자자들의 요구→ (2) 투자자의 요구를 대신해서 블랙 록Black Rock과 같은 자산운용사들이 투자기업들에게 ESG 경영을 요구 (3) 기업은 투자를 받기 위해 투자 펀드의 요구를 수용하여 ESG 경 영 실천이라는 메커니즘으로 관철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현재 운 영 중인 ESG 자산 총액은 100조 달러가 넘으며 이와 관련해 전 세계에 서 대형 자산 소유자의 1/3이 유엔 산하기구인 책임투자원칙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에 서명했다고 한다. 100조 달러 규모는 전 세계 한 해 GDP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한편 정책연구자 아드리엔 불러 Adrienne Buller는 규모를 적게 잡아 2020년에 30조 달러, 2025년 50조 달러가 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도 엄청난 규모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얼핏 봐도 문제가 느껴진다. 연기금과 같은 일부 공공 펀드조차도 거의 재무적 이익만 따지는 판에, 과연 어떤 사적 투자자들이 ‘재 무적 이익'이 다소 줄어들더라도 '사회적 가치'를 균형 있게 추구하라고 끝까지 재촉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재무적 이익은 명확히 수치로 평가 가능하고 대체로 공시되지만, 비재무적 기여는 아직 제대로 평가되지도 엄격히 공시되지도 않는다. 나아가 단기나 중기적 시야에서 투자자의 재무적 이익과 사회적 가치가 직접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과연 재 무적 이익에서 양보를 한다는 보장을 어떻게 받을까? 결코 쉽지 않은 이 슈다. 심지어 마크 카니조차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수단으로만 생각해서 오로지 투자 자금을 끌어 모으거나 고객 관련 의무에 따르는 위험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ESG를 생각하는 투자 펀드가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을 정도니 말이다. 물론 ESG를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펀드나 기업에 대해 격려를 아낄 필요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표 공공펀드인 국민연금은 관련법과 규정을 개정하고 선도적으로 ESG 투자에 나섬으로써 사적 펀드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하지만 자발적인 약 속에 앞서 일정하게 사회적으로 합의된 탄소 배출 규칙과 제도를 기업 이 지키는 것이 먼저다.
마크 카니와 달리 아드리엔 불러는 ESG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특히 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블랙록이나 뱅가드 같은 소수 자산운 용사들이 수십조 달러의 자본을 매개로 다수 기업들의 지분을 장악해 가고 있는 경향을 '자산운용사 자본주의 Asset Manager Capitalism'라고 규정한 다. 이들은 과거 행동주의 펀드Active Fund와 달리, 모건스탠리지수MCSI나 S&P500 같은 지수들에 편입된 지분 등을 대량으로 소유하여 전체 지수 흐름을 따라가는 패시브 펀드Passive Fund 성격을 띠고 있다. 언론에는 화 석연료 투자가 아니라 녹색투자를 하겠다고 공언하지만 실제 이들의 투자 풀 Pool에서 녹색투자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것이 아드리엔 불러의 지적이다. 이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가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회사 블랙록에서 2018~2019년 사이에 지속가능투자 최고책임자를 맡기 도 했던 타리크 팬시 Tariq Fancy가 증언한 기업의 ESG 경영 실태다. 그 는 기업들의 ESG 노력이 실제로는 온실가스 감축에 거의 무시할 만한 효과밖에 거두지 못했다고 냉담하게 평가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오 직 정부만이 역량과 합법성을 갖고 기후위기에 집합적이고 체계적인 대 처를 할 수 있는데, ESG가 그런 정부의 노력이 마치 필요 없는 것처럼, 기업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었다는것이다. 그 에 따르면 "ESG를 둘러싼 유토피아적 스토리라인은 정부가 해야 할 역 할을 실질적으로 잠식하게 된다. ESG 기업들의 잘못된 PR광고는 지속 가능투자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그리고 자발적 이행 등이 해결책이라 고 사람들을 속이게 된다.” 그래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기후위기라는 역사상 가장 큰 시장실패에 대처하는 데 실패의 당사자인 시장이 다시 해결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 이 바로 ESG라는 것이 그의 종합적인 판단이다. 물론 그는 탄소 배출 감 축에 시장이 역할을 할 수는 있다고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문제는 정부 가 규제와 과세, 인센티브를 적절히 배치해서 공적 여건을 조성해야 기 업 ESG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업과 국 가의 역할을 구분한다.
"기업이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하고 그럴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반칙으로 엉망이 된 게임이 끝난 후, 좋은 스포츠맨십이 뭔지를 끝없이 훈계해서 다시 좋은 게임을 기대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반칙이 벌어지면 통상 선수들은 심판을 찾는다. 그런데 이 경우는 기업들과 시장이 심판 역 할까지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사기업들은 자기들 역할만 잘하 라고 하고 국가가 할 역할을 해야 한다."
그는 "시장실패를 ESG라는 마케팅으로 교정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진실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다른 많은 연구에서도 기업이 ESG를 하겠 다는 자발적인 조치는 환영하지만, 정부가 전반적인 방향, 목표, 지침, 인센티브, 규범을 제공하고 철저한 모니터링을 가동할 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주관적인 '그린위싱green wishing'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 100퍼센트 지급준비금제도는 사실상 사적 은행들이 신규로 신용창출 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효과가 있다. 일반인들은 흔히 중앙은행이 지폐나 동전을 찍어내야 화폐가 발행되고 따라서 화폐는 국가만이 발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대단한 오해다. 현대 경제에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본원통화는 매우 적은 비중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상업은행들이 부 분지급준비금제도에 의존해서 재량으로 대출을 일으킨 신용창출이 차 지한다. 전체 예금의 10퍼센트만 지급준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현 행 제도 아래에서는 90퍼센트의 새로운 신용화폐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허공에서 창출되어 사적 은행이 대출의 형태로 시장에 공급하고 이에 대한 이자 수익을 얻는다. 하지만 100퍼센트 지급준비금제도로 바뀌면 이런 상황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과격한 주장이 말이 되냐고? 사실 100퍼센트 지급준비금제도 는 유명한 미국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나 어빙 피셔의 '완전 화폐' 이 론이기도 하므로 기존 주류경제학계에서도 사실은 낯설지 않다. 피셔는 이렇게 주장한다. “100퍼센트 지급준비 시스템은 급진주의와 정반대되 는 제안이다. 원칙적으로 이 제안은 과도하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대 출을 증가시키는 현행 시스템에서 예전 금세공업자의 보수적인 안전금 고 시스템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즉, 금세공업자가 자신에게 보관된 예치금을 부적절하게 대출해주기 시작하기 전으로 말이다. 은행에 대한 고객의 신뢰를 오용하는 이러한 영업 행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준적인 관행이 되었고 오늘날 예금은행업으로 발전하였다.
- 요약해보자. 경제 규모를 지구 생태계가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묶어두자면 "성장을 강화하는 되먹임 회로들을 약화시키면서, 균형을 낳는 되먹임 회로들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무한팽창 을 속성으로 갖는 금융은 더 많은 성장, 무한성장을 강화하는 되먹임 회 로를 촉진한다. 대출에 대한 복리 이자, 투자에 대한 더 높은 수익률을 요구하는 금융은 기업들에게 끊임없는 수익을 압박할 것이고 그 결과 전체 경제를 성장과 규모 팽창으로 몰아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경 제학자들이 금융경제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탈성장론자 요르고스 칼리스는 자신의 짧은 책 《한계들Limits》에서 이 영화를 소개한다. 그는 지구 생태계가 우리에게 강제로 '한계'를 지우는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사실 그런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불편하 게 생각해온 언어인 '한계'를 긍정의 언어로 재해석한다.
"한계는 목적을 전제로 한다. 중력 그 자체는 한계가 아니라 그냥 팩트 다. 하지만 우리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목적을 세우면, 자살할 생각이 아닌 이상 그때부터 중력은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에 한계를 지운다. 바 닷물은 물고기에게는 생명을 주지만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 운다. 한계는 주체와 주체의 의도에 있는 것이지, 우리 의도와 무관하게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한계를 지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결정이지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성장을 향해 질주하는 화석연료 문명에 대해 '추가 온도 상승 1.5°C'라는 한계를 지운 것도 우리의 삶과 미래세대의 더 나은 삶을 선택하려고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리스는 "자연은 우리에게 한계를 부과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주는 엄격한 어머니가 아니"라고 덧붙인다. 지금까지 생태경제학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무한성장을 포기하고 한정된 물질과 에너지의 처리량에 의존하는 경제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구 라는 닫힌계 안에서 움직이는 '열린 인간 경제'가 열역학 법칙을 위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리 법칙과는 협상할 수 없으니 '수용해야' 한 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생태경제학자들과 특히 탈성장론자들은 우리가 만들어 갈 새로운 생태경제, 성장 없는 경제와 어울리는 새로운 삶의 가치관 과 사회적 규범을 설계하는 데 도전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지구 한계 안 에서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발적으 로' 선택하는 다른 삶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지구의 한계선 planetary boundaries' 에 직면해서 어쩔 수 없이 경제구조를 재편하고 기존 방 식의 삶을 포기하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 안전한 삶을 위해 자발적으로 '사회적 한계선societal boundaries'을 정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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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거대한 변화

경제 2023. 5. 24. 13:18

- 중앙은행이 금리를 결정할 때 참고하는 지표 가운데 하나가 '테일러 준칙(Taylor rule)'이다. 이는 적정금리 수준을 측정하는 하나의 방 법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경제 변수가 들어가 있다. 하나는 'GDP 갭률'이라고도 부르는 실제 GDP와 잠재 GDP의 차이 다. 한 나라의 실제 GDP가 잠재 GDP 수준을 넘어서서 성장하면 그 나라 경제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다. 이런 시기에 중앙은행은 대개 기준금리를 인상하게 된다.
테일러 준칙에 포함되는 다른 하나의 변수는 실제 물가상승률과 중앙은행이 통화정책 목표로 내세운 물가상승률의 차이다. 물가상 승률 목표치는 보통 소비자물가 상승률(미국은 개인소비지출 물가상승률) 기준으로 2%이다. 그런데 실제 물가상승률이 이를 넘어서면 역시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리게 된다.
- 상황에 따라서는 장·단기 금리 차이가 경기침체를 예고해주기도 한다. 우선 장·단기 금리 차이가 역전되었다는 의미는 장기금리가 단기금리보다 더 낮아졌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시차를 두고 경기가 둔화하다가 침체에 빠지기도 한다.
앞의 장·단기 금리 차이와 경제성장률의 관계를 보여주는 위의 그림을 보면 2019년 2분기에서 3분기까지 장·단기 금리 차이가 역전 되었다. 그런 다음 시차를 두고 2020년 2분기에서 4분기 사이에 우리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물론 경기침체의 직접적 원인은 코로나19였다. 그러나 장·단기 금리 차이는 이미 1년 전부터 경기침체를 예고해주었다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미국에서도 장·단기 금리 차이로 경기를 예측한다. 보통 10년물 국채와 2년물 국채의 수익률 차이를 장·단기 금리 차이로 보는데, 이 차이가 역전되었을 때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졌었다. 그 당시 경 기 상황에 따라 시차의 차이는 존재했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2022 년 7월부터 장·단기 금리 차이가 역전되었고, 그 이후로는 차이가 더 확대되고 있다. 머지않아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것을 예고해주고 있다.
- 미·중 패권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레이엄 앨리슨 (Graham Allison) 하버드 대학교 석좌교수가 쓴 《예정된 전쟁 (Destined for War)>이 라는 책이 미·중의 패권 다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 그는 미·중 패권전쟁이 전개되어나가는 방향을 '투키디데스 함 정(Thucydides Trap)'이란 키워드로 풀어냈다. 기존의 강자 (ruling power)인 미국이 부상하는 신흥 강국(rising power) 중국을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이 이 키워드의 요지다.
이 책은 미·중 패권전쟁이 무역전쟁에서 금융전쟁으로, 나아가서는 무력전쟁으로까지도 확산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 가령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이미 대중 수입상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고, 중국도 이에 맞대응한 전력이 있다. 또한, 후임 바이든 대통령은 칩4 동맹을 거론하며, 중국으로 수출되는 반도체 장비와 기술을 제한하고 있다.
앨리슨 교수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다음은 금융전쟁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라. 중국이 가지고 있는 미국 국채를 모두 매각한다. 그렇게 되면 일시적으로 달러의 가치가 폭락한다. 게다가 시장금리는 급등하고 자산 가격도 급락한다. 실제로 여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중국은 미국 국채 매입을 앞으로도 계속 줄일 것이다. 금융전쟁의 시작이 서서히 보이지 않겠는가.
앞서 본 것처럼 미국의 대외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 미국은 이를 외국인의 직접투자나 증권투자로 그럭저럭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미국 국채 매수가 감소한다면, 미국으로의 자금 유입 감소를 통해 달러 가치 하락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 자본주의 생태가 작동하는 방식을 아는가? 여러 산업이 쇠퇴하고, 오래된 기업들은 시들며, 젊은 기업들이 일어나서 이를 대체하는 것이다.이 과정은 많은 이들에게 힘들지만 궁극적으로 건전한 것이다. (피터 린치 (Peter Lynch))
- 뉴스심리지수(NSI; News Sentiment Index) 역시 우리 주식시장에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지표 중 하나다. 한국은행에서 실험적으로 만들어 서 발표하고 있는 뉴스심리지수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경제 분야 뉴스를 기반으로 표본문장을 추출한 뒤, 각 문장에서 나타나는 긍 정, 부정, 중립의 감성을 기계학습으로 분류해서 만든 지수다. 기준 치 이상으로 올라가면 경기를 낙관하는 기사가 더 많고, 기준치 이 하면 경제 기사 중에서 어렵다는 기사들이 많이 나온다는 의미다.
한국은행이 이 지수를 만들면서 살펴 보다가 해당 지수가 주가 에 1개월 정도 선행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다른 지수와는 다르 게 일별로 빠르게 작성되는 지수이기에 금융시장 중에서도 주식을 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볼 필요가 있다
이 지표를 기반으로 투자할 때 고려할 점은 뉴스심리지수가 지나치게 떨어진 상태면 투자를 고려해 볼만 하다는 것이다. 뉴스심리 지수가 떨어진다는 것은 언론에서 경기가 어렵다는 보도가 많다는 것인데, 경기가 좋을 때 나오는 경기 관련 보도보다 경기가 어려울 때 나오는 경기 관련 보도의 수가 더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뉴스 심리지수가 지나치게 떨어진 것은 반대로 향후 이 지수가 올라갈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 패스트푸드를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면 맥도널드의 빅맥을 한 번쯤은 먹어봤을 터이다. 이 햄버거를 사용해서도 적정환율을 계산할 수 있다. 영국의 유명한 경제 전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986년 부터 분기마다 빅맥지수(Big Mac Index)를 이용하여 각국의 환율이 과 대평가되었는지, 혹은 과소평가 되었는지를 평가해왔다. 이를 버거 노믹스(Burgernomics)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빅맥지수는 환율 결정 이론에서 가장 기본적인 구매력평가설(PPP; purchasing power parity)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일물일가의 원칙에 따라, 같은 상품이라면 나라 가 달라도 가격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빅맥지수에 따른 적정환율의 산출 방법은 다음과 같다.
2022년 7월 기준 미국에서 빅맥은 개당 5.15달러(애틀랜타, 시카고, 뉴욕, 샌프란시스코의 평균)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빅맥이 개 당 4,600원에 팔리고 있다. 일물일가의 법칙에 따라 빅맥의 가격은 미국과 한국에서 같아야 하고, 따라서 빅맥 한 개를 살 수 있는 5.15 달러의 가치는 한국 돈 4,600원과 같아야 정상이다. 이를 다시 환산 하면 미화 1달러의 가치는 원화 893.2원에 해당하므로, 빅맥지수에 따르면 원화의 균형환율은 미 달러당 893.2원이다. 하지만 이코노 미스트」가 빅맥지수 산출에 사용한 2022년 7월의 원·달러 환율은 1,313.45원이었다. 그러니까 원화의 가치가 32%나 저평가되어 있다는 얘기다.
빅맥지수는 각국 조세의 차이나 판매세, 요소비용(비교역재)의 차이를 고려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환율의 적정성 평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척도 가운데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물론 「이코노미스트」가 빅맥지수를 발표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 2022년 9월의 원·달러 환율은 1,360원을 기록하고 있지만, 빅맥 지수로 살펴본 당시의 한국의 원화는 32%나 저평가돼 있다. 그러나 국제결제은행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원화는 3.5%만 저평가된 상태로, 환율의 적정성은 어떤 것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경제를 전망할 때는 어떤 한 지표에 매몰되어 경기를 파악할 것이 아니라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지고 바라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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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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