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쟁의 흑역사

경제 2024. 2. 4. 17:44

- 실로 황당하지 않은가? 지도에 선 하나 그어 놓고 세상을 절반으로 나눈 뒤 자기들끼리 "왼쪽은 에스파냐 땅, 오른쪽은 포르투갈 땅"이라 고 선언했다. 이 희대의 기하학적인 영토 조약 이후 유럽 백인들은 지구의 절반을 에스파냐 땅, 절반을 포르투갈 땅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신의 명령(!)조차 무시하는 모양이다. 사실 교황의 명령은 매우 단순했다. 직선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아프리 카는 포르투갈이 차지하고, 왼쪽에 있는 아메리카는 에스파냐가 차지 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면적의 두 배나 되는 아 메리카를 모두 에스파냐에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포르투갈이 교황에게 강력히 항의했고, 이 항의가 받아들여져 1494년에 두 나라는 새로운 기하학적인 영토 조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기존 기준선을 서쪽으로 1,300킬로미터 더 이동하는 토르데시야스조약(Treaty of Tordesillas)이다. 기준선이 아메리카 대륙 안 쪽으로 더 들어오는 바람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동쪽으로 튀어나온 브 라질이 기준선 동쪽, 즉 포르투갈 땅으로 편입됐다. 남미 지역 대부분 의 국가들이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아 지금도 에스파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아 포르투갈어를 공용 어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토르데시야스조약에는 맹점이 있었다. 대서양 한가운데 그 은선 하나만으로는 아시아에서 경계를 확인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부 지런히 식민지를 개척하다 아시아에서 딱 마주친 포르투갈와 에스파
나는 치열하게 무역 경쟁을 벌였다. 그러다가 태평양에도 경계가 필요 하다며, 1529년 에스파냐의 사라고사에서 기하학적인 영토 조약을 다 시 맺었다. 마치 수박을 반쪽으로 쪼개는 것처럼 토르데시야스조약 때 그은 금의 반대편에 남북으로 선을 쭉 그은 다음 그 서쪽은 포르투갈 이, 동쪽은 에스파냐가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사라고사조약(Trea- ty of Zaragoza)이라고 한다.
사라고사조약대로라면 조선과 일본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다. 16세기 중반 일본인에게 조총을 전해 준 사람은 포르투갈 상인들인데, 이들은 자기가 일본을 언제든지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 영란전쟁은 오로지 무역이라는 이슈만으로 벌어졌던 세계 최초의 전쟁으로 꼽힌다. 말하자면 이 전쟁이 무역 전쟁의 시발점인 셈이다. 여기에는 묘한 경제학적 아이러니 하나가 숨어 있다. 전쟁이 발발한 이 유인 크롬웰의 항해조례는 중상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영국의 보호 무역 정책이다. 그런데 중개무역의 강자 네덜란드는 영국과 달리 자유무역의 지지자였다. 두 나라가 충돌한 근본적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네덜란드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다의 지배자가 된 영국은 이후 열렬한 자유무역의 수호자가 된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 펴보겠지만, 당시에는 그게 영국에 더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은 때에 따라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을 자국의 이익에 맞게 제멋대로 사용 했다는 뜻이다. 이현령비현령(耳鈴鼻懸鈴), 그러니까 '귀에 걸면 귀걸 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경제학이 사용된 셈이다.
-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몰두해 왔기 때문에 영국의 이런 태세 전환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문 제는 자유무역의 수호자로 변신한 영국이 “자유무역은 우리만의 이익 을 위한 것이에요."라고 솔직히 말하는 대신 “자유무역은 선진국인 영 국과 후진국인 식민지 모두를 위한 것이에요."라고 뻥(!)을 치고 다녔 다는 데 있었다. 영국의 이중성, 나아가 영국에서 발전한 경제학의 위 선은 자유무역이라는 이름 아래 선진국들의 식민지 착취를 정당화하 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공업 강국의 길을 개척한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1세 Napoléon(프랑스 제1제국 초대 황제, 재위 1804~1814-1815) 라는 걸출한 군사 지휘관이 정권을 장악했다. 유럽 대륙의 지배자가 된 프랑스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해상무역의 강자 영국은 유럽 의 주도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둘은 1805년 지브롤터 해협 북서쪽 트라팔가르곳 앞바다에서 운 명을 건 일전을 벌였다(트라팔가르해전). 프랑스는 바다에서 영국에 연 전연패 중이었지만, 한때 무적함대 '아르마다 인벤시블레'(Armada In- vencible)를 이끌던 에스파냐와 연합해 자신 있게 전투에 나섰다. 그러 나 이 싸움에서도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는 명장 허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 제독의 영국 함대에 참패하고 말았다.
- 분통이 터진 나폴레옹은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대륙봉쇄령 (Conti- nental System)을 들고나왔다. 1806년 나폴레옹이 베를린 점령 후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모든 국가는 즉각 영국과 무역을 중지 해야 한다."라고 칙령을 내린 것이다. 이를 베를린칙령이라 하는데, 경 제적으로 영국을 고립시켜 트라팔가르해전에서 당한 패전의 치욕을 앙갚음하려는 의도였다.
경제학에서는 이처럼 상대국과 무역을 단절하는 사상을 보호무역 주의라고 부른다. 영국이 주도한 자유무역주의에 대항하는 보호무역 주의의 반격이 드디어 시작됐다!

- 보호무역주의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독일의 경제학자가 있었다. '보호무역의 옹호자'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리스트 Friedrich List가 그 주인공이다. 리스트는 “자유무역을 받아들이면 프랑스와 에스 파냐, 포르투갈은 최고급 포도주를 생산해서 영국인들에게 내주고, 자 기들은 저질 포도주나 마시는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라는 말로 자유 무역을 저주했다.
리스트가 살던 시절,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 국가였다. 리스트는 후진국 독일이 공업이 발달한 영국과 자유무역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영국에서 수입되는 물품에 어마 어마한 세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물론 극단적인 보호무역을 펼치면 효율성이 낮아져서 국민들이 고 통을 겪는다. 내가 직접 양파도 재배하고, 토마토도 키우고, 소도 길러 서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 울 테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자유무역을 용인하면 후진국은 영원히 선 진국이 되지 못한다. 진정한 공업 강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어려움을 인내해야 한다. 리스트가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Das nationale System der politischen Ökonomie, 1841)에 남긴 말을 살펴보자.
보호관세를 실시하면 초기에는 저렴한 수입 제품을 사용할 수 없 어 그 제품의 가격이 오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서 그 나라가 온전히 제조업 역량을 향상시킨다면 나중에는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더 싼 비용으로 국내에서 그 물건을 생산할 때가 올 것이다. 초창기 보호관세로 손실을 입긴 하지만 그 민족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며 전쟁에 대비한 산업적 독립성을 키우는 것은 초창기 손해를 감당할 만한 충분한 보상이라는 이야기다. 게 다가 산업적 독립성을 갖추면 그 민족은 이를 기반으로 내부적 번 영을 이뤄 내고 문명을 증진하며, 국내 제도를 완성하고 세력을 대 외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프리드리히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민족적 체계』, 제12장 '생산 역량의 이론과 가치 이론' 중에서 (직접 번역)

- 많은 사람이 남북전쟁을 노예해방 전쟁으로 알고 있다. 노예제에 반대한 북부의 지도자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제를 수호하려 한 남부 를 물리쳐서 노예해방을 이뤘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링컨은 적극적인 노예해방론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남북전쟁의 원인 자체도 노예제가 아니었다. 물론 북부가 노예제에 반대했고 남부가 옹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전쟁의 원인은 관세, 즉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에 세금을 얼 마나 매길 것인가'에 관한 분쟁이었다. 그 당시 미국 북부와 남부의 경 제구조는 완전히 달랐다. 북부는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업이 매우 발달한 지역이었다. 이런 공업 사회에서는 노예제가 매우 비효율적이 다. 북부가 남부보다 이른 시기에 노예제를 폐지한 이유가 여기에 있 다. 반면에 남부는 드넓은 대지를 활용한 면화 농업으로 먹고사는 지역 이었다. 여전히 중세 농업 사회가 유지됐기 때문에 노예제는 이 지역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 이 시기 미국 사회에서는 '영국으로부터 물건을 수입할 때 세금을 얼마나 매길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시작됐다. 공업 사회인 북부는 영 국 수입품에 막대한 관세를 물리자고 주장했다. 그래야 영국 공산품의 가격이 뛰어 미국 내에서 자기들이 만든 상품을 더 많이 팔 수 있기 때 문이다.
하지만 농업 사회인 남부는 영국에서 수입한 물건의 가격이 뛰면 치명타를 입는다. 남부에서는 공산품을 거의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주 민들이 대부분 영국 제품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관세를 높여 수입 제 품 가격이 올라가면 남부 주민들은 과거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생필품 을 사야 했다. 당연히 남부는 관세를 높이는 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남부는 이런 식이면 우리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묶일 이유가 없다 며 독립을 요구했고, 북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북전쟁이 벌어 진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이 전쟁에서 노예제가 이슈로 떠오른 이유 는, 노예가 별 필요 없던 북부가 남부를 비난하기 위해 그 문제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노예해방이라는 명분까지 확보한 북부는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남부의 패배로 그 지긋지긋한 노예제는 현대사 에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노예제가 폐지된 이유는 백인들이 인권 에 눈을 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벌인 전쟁은 경제적 이권을 위한 것이었고 노예제 폐지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구호였을 뿐이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노예제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이유는 노예제가 더 이상 돈을 잘 벌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 다. 그런데 이런 비인간적인 제도를 수 세기 동안 운영한 자들 가운데 피해자들에게 사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잡식동물인 인간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인간에게 낙관과 비관이라는 묘한 딜레마를 선사한 다. 우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을 매우 진취적인 동물 로 만든다. 내가 살던 안정적인 거처를 떠나도 어디에서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동을 하고 모험을 한다. 신대륙을 발견 하러 떠나기도 하고, 북극이나 남극도 탐험한다. 정 먹을 게 없으면 물 고기라도 잡아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잡식성이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새로운 공포를 안겨 주기도 한다. 사자나 코알라는 늘 먹던 것만 먹기 때문에 '이걸 먹으면 탈이 나지 않을까?'라는 공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예를 들어 산에 갔더 니 버섯이 있었다. 사자나 코알라는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인간은 속 으로 '저것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는다. 그리고 버섯을 실제로 먹어 본다. 그러다가 독버섯을 집어 먹어 탈이 난다. 이때부터 독버섯은 공포의 상징이 된다.
- 그래서 로진은 "잡식동물인 인간은 평생 두 가지 동기가 엇갈리는 삶을 산다."라고 표현한다. 첫 번째 동기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도전 이다. 이게 바로 인간의 낙관주의를 상징한다. “그까짓 것 한번 도전해 보자고!"라는 용기는 바로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어!"라는 낙관에 기 반을 둔 것이다.
반면 두 번째 동기는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혐오다. "저거 도전하면 죽을지도 몰라!"라는 공포가 도전에 대한 욕구와 변화를 막는다. 잡식 동물이 아니면 이런 공포가 생길 리 없는데, 인간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잡식동물이기에 "저건 먹으면 죽을지도 몰라."라는 공포를 품게 된 것이다.
- 미국 뉴욕대학 스턴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이 사실을 이렇게 해석한다. 이 두 가지 성향 중 새 로운 것에 대한 도전 욕구가 더 강한 사람은 진보적 성향을 갖고, 새로 움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보수적 성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진보는 용감하고 보수는 조심스럽다는 이야기인데, 인류는 이 두 가 지속성을 모두 품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된 이유는 비관주의보 다 낙관주의가 강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하는 일이 모두 잘 될 거라고 믿는 낙관주의가 없었다면 인류가 어떻게 농사를 지었겠는 가? 농사라는 게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곡물을 수확하는 것이다. 즉 결과물을 얻기 위해 무려 6~7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그 긴 기간 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 고 농사를 짓는단 말인가? 막말로 그동안 맹수한테 물려 죽을 수도 있고, 홍수나 가뭄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는 비관보다 낙관을 선호한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내다 버리고! "내가 뿌린 씨는 잘 자라 서 가을에 풍족한 곡식을 만들어 낼 거야."라고 낙관하는 것이다. 농사 기술이 발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냥 기술이 발전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수백 마리의 버펄로 떼가 초원을 질주한다. 사실 거기에는 사자도 함부로 뛰어들지 못한다. 그곳 에 뛰어 들어가면 십중팔구 성난 버펄로들의 뿔에 받혀 죽는다. 하지만 인간은 그 짓(!)을 한다. "우리가 저기 뛰어들면 반드시 사냥에 성공해 오늘 밤에는 맛난 소고기를 배 터지게 먹을 거야!"라는 낙관으로 무장 한채 말이다.

- 인지신경과학자 탈리 샤롯Tali Sharot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교수는 저서 『설계된 망각』 (The Optimism Bias, 2012)에서 "낙관주의가 없었다면 최초의 우주선은 뜨지 못했을 것이고, 중동의 평화도 결코 시도되지 못 했을 것이고, 재혼하는 사람도 전무할 것이고, 우리 조상들은 감히 부 족을 떠나 멀리까지 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 럿거스대학 인류학과 라이어널 타이거Lionel Tiger 교수도 낙관주의 의 문명사적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인간이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 는 낙관적인 환상 덕분이다."

- 운하가 국유화된 이후 3개월 만인 10월 29일,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와 앙숙 관계였던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침공했다. 제 2차 중동전쟁 (Second Arab-Israeli War, 1956), 혹은 수에즈전쟁(Suez War) 이라 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아랍 국가들과 사이가 나빴던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운하를 국유화하며 자국 선박의 해상 운송로를 막자 지체 없이 이 전쟁 에 뛰어들었다.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하며 개전의 나팔을 울렸고, 일주일 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즉각 수에즈운하로 진격했다.
제1차 중동전쟁(1948~1949) 때 혈혈단신으로(미국의 강력한 무기 지원 이 있기는 했다) 아랍의 여러 적대국들을 격파했던 이스라엘의 화력에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가세한 이 전쟁의 결과 는 너무나 뻔해 보였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운하를 통과하던 배를 침몰 시키고 운하를 봉쇄하는 등 격렬히 저항했지만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 다. 이집트의 참패는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 그런데 이때 뜻밖의 변수가 등장했다. 사회주의국가들의 맹주 소련이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소련은 핵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태도로 영 국과 프랑스를 비난하며 이집트에서 철수할 것을 압박했다. 당시 이집 트가 친소(親) 경향을 보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집트를 보호하기 위 해 소련이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진짜 뜻밖의 일은 소련의 대척점에 있던 자유 진영의 맹주 미국의 태도였다. 미국은 불과 8년 전 벌어졌던 제1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나라였다. 영국 및 프랑스와도 자유 진영 의 동맹이었다. 당연히 미국이 이 전쟁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삼각동맹을 지원할 것이라고 예상되던 찰나, 미국은 되레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에 철군을 압박하고 나섰다.
- 미국은 왜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 일단 첫째로,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수에즈운하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와 달리 미국 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뱃길로 동양을 오갔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Eisenhower (미국 제34대 대통령, 재 임 1953~1961)는 고작 수에즈운하 따위(!)로 소련과 핵전쟁을 벌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고 싶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핵전쟁이라 는게 인류의 존망을 걸고 벌이는 전쟁인데, 미국 입장에서 별로 중요 하지도 않은 수에즈운하 때문에 핵전쟁을 한다? 아이젠하워가 바보가 아닌 한 미국은 이 전쟁을 감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19세기까지 세계의 최강대국은 단연 영국이었다. 그리고 영국에 대항하는 강력한 대항마는 프랑스였다. 하지만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들의 시대는 저물었다. 미국이 두 나라에 당장 이집트에서 철수 하라고 압박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거스를 힘도, 용기도 없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강력한 협박에 못 이겨 이집트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전쟁은 고작 열흘(1956년 10월 29일~11월 7일) 동 안 진행됐는데, 영국-프랑스-이스라엘 3국 동맹군은 철수하기 직전 까지 260명가량의 사망자만을 남긴 반면, 이집트군의 사망자는 무려 1,650~3,000명으로 추정됐다. 한마디로 일방적인 전쟁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전황에도 불구하고 영국-프랑스-이스라엘 3국 동맹군은 이 전쟁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전투에서는 밀렸지 만 수에즈운하를 봉쇄하면서까지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다졌던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위상은 오히려 높아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한 마디에 찍소리도 못하는 쫄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무역로를 두고 벌어진 이 전쟁은 과거 의 강자 영국과 프랑스의 시대가 저물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패권국의 지위를 상실했고,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양대 축 아래 새로운 국제 관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 베르사유조약은 독일 경제를 아예 파탄 내 버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승전국인 연합국 측이 책정한 전쟁배상금은 무려 1,320억 마르크, 요즘으로 치면 우리 돈 300조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이 거금을 갚을 기간으로 30년이 주어졌다.
1,320억 마르크를 30년 안에 갚으려면 독일 국민들은 그야말로 허 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1922년 독일의 국민소득이 350억 마르크였으 니 1,320억 마르크는 독일 국민들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3년 8개월 동안 일해야 겨우 모을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런데 연합국은 독일에 허리띠를 졸라맬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당시 독일이 유일하게 외화를 벌 수 있는 방법은 철과 석탄을 수출하는 것이었는데, 연합국 측에서 독일이 무역할 수 있는 배를 전부 압류해 버렸기 때문이다. 독일은 연합국에 배상금을 꼬박꼬박 갚아나갈 형편이 도무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연합국 측은 배상금을 석탄으로 갚으라고 강요했다. 배상금이 연체 되자 프랑스와 벨기에는 군대를 동원해 독일의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그 지역에서 나는 지하자원이라도 퍼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유일한 돈 벌이 수단인 석탄마저 빼앗긴 독일 경제는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독일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엉뚱한 방법을 동원했다. 배상금 물 어 줄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돈을 인쇄기로 왕창 찍어서 달러와 교환해 갚아 버리기로 한 것이다(당초 독일이 갚아야 할 1,320억 마르크는 금, 또는 외환으로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실물경제의 발전 없이 돈만 왕창 찍 으면 당연히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오른다. 이 때문에 당시 독일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등했다.

- 평화의 경제적 결과
프랑스와 영국의 감정 배설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원수 독일의 경 제를 박살 내야 한다는 그들의 목표도 달성했다. 그런데 그 대립의 이 데올로기가 경제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게 중요한 포인트 다. 경제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은 배설한 감정의 수백, 아니 수천 배에 이르는 곤경에 빠졌다.
독일 경제가 박살이 나면서 이웃한 프랑스와 유럽의 경제가 흔들 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1929년 미국에서 촉발된 대공황이 유럽을 덮쳤다. 심지어 재기 불능의 경제적 파국을 맞은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리고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 으키는 방식으로 궁지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프랑스와 영국 경제를 파탄으로 내몰았다. 심지어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완전히 미국에 넘겨줬다. 영국과 프랑스 는 독일을 파멸시켰다는 감정의 배설에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계산할 수 없는 경제적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한 경제학자가 있었다는 것이 다. 세계 대공황을 극복한 수요주의 경제학의 창시자 존 메이너드 케 인스John Maynard Keynes가 그 주인공이다.
케인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영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파리강화회의가 평화의 유지가 아니라 독일을 압살하는 보복적 방식으로 결론을 맺자, 실망한 채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달 만에 『평화의 경제적 결과』 (The Eco- 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 1919)라는 명저를 남겼다.
케인스는 이 책에서 “감정을 잠깐 접어 두고 냉정하게 경제적 현실 을 직시하자."라고 주장했다. 만약 독일을 거덜 내서 망하게 하면 독일 혼자 망하지 않는다는 게 케인스의 예측이었다. 당시에도 유럽은 지리 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공동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한 곳 이 망하면 반드시 경제적 여파가 이웃 나라로 번지게 된다는 것이 케 인스의 시각이었다.
케인스는 독일에 가혹한 배상금을 물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정치 논리를 앞세워 경제를 내다보지 못하 는 각국 정치인들의 행태에 강하게 분노했다. "불행하게도 정치적 고 려가 경제적 고려를 방해하고 있다. (...) 진실을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 로를 빈곤하게 만들고 서로를 빈곤하게 만들 방법을 고안해 낸다. 개 인적 행복보다 집단적 증오를 더 선호한다." 무엇이 국민들에게 더 경 제적으로 도움이 될지 냉정하게 판단하지 않고 “야, 이 원수들아!"라고 감정을 배설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빈곤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 미국은 언제 무기를 많이 팔 수 있을까? 그들에게 가장 좋은 상황은 1 전 세계가 팽팽한 긴장 상태라 너도나도 무기가 필요 할 때, 2 전쟁이 벌어져서 무기 수요가 급증할 때다. 그래서 미국 군수 자본은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평화는 무기 판매량을 줄이는 최대의 적이다.
미국 군수 자본은 인위적으로라도 긴장과 전쟁을 부추겨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최고의 방법은 미국 군부, 그리고 그 군부의 지지를 받는 강경파 정치인을 구워삶는 것이다. 혹여 정치인 가운데 평화를 지 향하는 자가 있다면 군수 자본은 군부와 강경파 정치인을 앞세워 "평 화는 무슨, 무력으로 제압해야지!"라는 여론을 조성한다. 군수 자본은 군부와 강경파 정치인에게 거금을 들여 로비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이익을 주고받으며 공생의 길을 걷는다. '군부-강경파 정치인-군수 자 본'의 삼각 공조를 일컫는 말이 바로 군산복합체다.
군산복합체가 끊임없이 전쟁과 긴장을 조장하는 상황의 위험성을 가장 먼저 경고한 이는 역설적이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군인 출신으로 미국 제34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다. 그는 1961년 대통령 퇴임식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남겼다.
우리가 연간 군사 안보에 쓰는 돈은 미국 기업들의 순이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다. 방대한 군사 체계와 방대한 군수산업의 결합 이라는 것은 미국에 새로운 경험이다. (...) 우리는 그 안의 어두운 함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군산복합체가 통제 불 가능한 영향력을 갖게 될 수도 있으므로 정부의 여러 협의회들은 그 영향력을 경계해야 한다.
-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군산복합체라는 거대하고 음험한 세력으로부터 큰 위협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군산복합체가 존재하는 한 미국은 늘 전쟁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미국 군산복합체는 전쟁을 만들어 낸 전력이 있다. 미국의 베트남 침공 이 그것이다. 1964년 미국 정부는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국 의 구축함에 포격을 가했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 1971년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가 이른바 '펜타곤 페이 퍼'(Pentagon Papers)로 불리는 미국 국방부의 기밀문서를 입수해 보도 한 바에 따르면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아 전쟁에 가담하게 된 미국이, 사실은 베트남전쟁 (Vietnam War, 1960~1975)에 개입하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고 적혀 있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국방장관이던 로버 트 맥너마라Robert McNamara는 1995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을 시인했다. 
- 국제 망신에서 벗어날 또 다른 전쟁이 필요했다
10년 넘게 진행된 베트남전쟁 동안 미국 정부는 국민 세금으로 엄 청난 양의 무기를 사들였다. 미국 군수 자본은 무기를 팔아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겼다. 문제는 그 전쟁이 미국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는 데 있 었다. 군산복합체는 이익은 챙겼지만, 명분을 잃었다. 세계 최강대국이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참패한 이 전쟁은 군산복합체의 위신을 땅바닥으로 추락시켰다.
게다가 1990년대 들어서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국가의 몰락은 동서 냉전 시대의 종식과 평화 시대의 출발을 알렸다. 하지만 군산복합체는 결코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군산복합체는 두 가지 이유로 전쟁을 원했다. 첫째, 베트남전쟁의 참패로 땅에 떨어진 위신을 회복해야 했다. 둘째, 동서 냉전이 종식되어 군사적 긴장이 완화된다면 무기를 대량으로 팔 방법은 전쟁밖에 없 었다.

- 군산복합체의 좋은 먹잇감이 등장했으니, 1990년 8월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이라크 제5대 대통령, 재임 1979~2003) 이 이웃 나라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이다. 애초에 이 전쟁은 상대가 되 지 않는 싸움이었다. 이라크군은 무려 30만 명의 최정예 부대를 내보 냈지만, 쿠웨이트의 병력은 3만 명에 불과했다. 쿠웨이트는 삽시간에 무너졌다.
후세인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여러 가지다. 당시 이란과 8년간 의 긴 전쟁을 치른 직후였던 이라크는 석유를 팔아 나랏빚을 갚기 위 해 석유 가격이 오르기를 바랐지만, 쿠웨이트가 석유를 너무 많이 생산 하는 것이 큰 불만이었다. 유가를 하락시킴으로써 이라크를 경제 위기 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쿠웨이트와의 오랜 영토 분쟁 도 전쟁의 빌미가 되었는데, 특히 국경 지대에 걸쳐 있는 유전이 문제 였다. 그러니저러니 해도 분명한 점은 후세인이 쿠웨이트가 보유한 막대한 양의 석유를 탐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당시 미국이 석유의 보고인 중동 지역에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 듯했다. 게다가 100만 명이 넘는 정규군을 보유했던 후세인은 베트남에서 참패한 미 국을 얕잡아 보기까지 했다. 사막에서 소모전을 벌이면 자신들도 베트 남처럼 미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후세인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미국 군산복합체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로 전쟁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베트남전쟁 이 후 절치부심하여 놀라울 정도로 전력을 향상했다. 미국은 소련 등 국제 사회의 중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1991년 1월 '사막의 폭풍 작전'(Op- eration Desert Storm)이라고 불린 놀라운 작전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쟁(Gulf War, 1990~1991)이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 물론 미국이 걸프전쟁을 벌인 원인은 단지 전 세계에 자신들의 무기를 홍보하고 군수 자본의 무기를 팔아 치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석유를 공급받고 싶었다. 그를 위해 서는 친미 성향의 쿠웨이트 정부를 보호하고 반미 성향의 이라크를 제 압해야 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미국 제37대 대 통령, 재임 1969~1974)도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쿠웨이트의 민주주의를 위해 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하는 것 은 위선이다. (...) 사담 후세인이 잔인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전쟁 을 벌였다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다. (...) 잔인한 지도자를 처벌하 는 게 우리 방침이라면, 우리는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Hafez al- Assad 대통령과 동맹을 맺지 말았어야 했다. (...) 이 전쟁은 후세인이 우리의 석유 생명선을 쥐고 흔들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론 미국이 걸프전쟁을 벌인 까닭이 잘 설명되 지 않는다. 왜냐하면 압승을 거둔 이후에도 미국은 이라크의 독재자 사 담 후세인을 잠시 살려 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전쟁은 독재자 후세인 제거가 목표라기보다, 베트남전쟁으 로 땅에 떨어진 미국 군수 자본의 재기전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그 재 기전은 성공적이었다. 실제로 당시 합참의장이던 콜린 파월Colin Powell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마침내 베트남 증후군을 이라크 사막에 묻 었다."라며 기뻐했다.

- 금융 자본, 전쟁의 전면에 서다
이라크전쟁이 과거의 전쟁과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다. 미 국의 금융 자본이 전쟁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미국은 군 수 자본과 금융 자본, 그리고 IT(정보기술) 자본이 이끄는 나라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미국은 제조업이 그다지 발달한 나라가 아니 다. 1970년대까지 미국은 철강이나 자동차 등 제조업 분야에 강했지만, 1980년대 이후 그 자리를 독일, 일본, 한국, 중국 등에 조금씩 넘겨줬다. 그런 미국 경제를 지탱해 온 삼각 축이 군수와 금융, IT다. 이 가운 데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미국의 금융 자본은 세계경제에 실로 막강 한 영향력을 미치는 세력이다. 그런 금융 자본이 전쟁 국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이 아직 한창이던 2003년 4월, 미국의 경제 전문 매체 CNN머니 (현재 CNN비즈니스)는 "월스트리트가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라고 보도했다. 실제 미국 금융 자본은 이때부터 "전쟁은 사실상 끝났으며, 우 리는 이라크 재건 사업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제통화기금은 그해 10월 "이라크 재 건 사업에 500억 달러(약 62조 원)의 자금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 월스트리트의 금융자 본이 재건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투자를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바그다드 재건 사업에 참여한 대부분의 미국 금융 자본은 열 배에 가까운 투자 수익을 올렸다. 심지어 폭격이 끝난 뒤 건물에 붙은 불을 끄는 소방 업무도 미국 기업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대가를 석유로 받았다. 미국이 시작한 전쟁의 비용을 이라크가 석유로 물어 주는 구조였다.
게다가 미국은 이 전쟁에 반대했던 나라들이 이라크 재건 사업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빗장마저 걸었다. 이라크와의 전쟁에 반대했던 프 랑스, 독일, 러시아, 캐나다 등이 이라크 재건 사업 참여로부터 배제된 것이다. 이건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 논란은 있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1929년을 미국의 경제 대 공황이 시작된 해로 본다. 그런데 대공황 직후, 그러니까 경제가 악화 일로에 접어든 1930년, 미국 정부가 자국 산업을 지켜 경제를 살리겠 답시고 강력한 보호무역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바로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이라는 것이었다.
대공황이 시작될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공화당 소속의 허버트 후버 Herbert Hoover (미국 제31대 대통령, 재임 1929~1933)였다. 후버는 대공황이 일 어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28년 민 주당의 앨 스미스Al Smith 후보와 대선에서 맞붙었는데, 당시 미국 경제 가사상 최고의 호황을 계속 이어 갈 것이라 확신했다. 선거 때 후버가 유권자들에게 외친 구호는 "모든 미국인의 차고에 자동차를! 모든 미 국인의 식탁에 닭고기를!"이었다.
대선에서 승리한 후버는 1929년 3월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이때까 지도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후버는 취임식에서 자신 있게 말했다. "빈곤에 대한 최후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라고 말이 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기대를 그야말로 박살 냈다. 그가 "빈곤에 대한 최후 승리"를 외친지 고작 7개월 뒤인 그해 10월 29일, '검은 목요일'로 불리는 주가 대폭락 사건이 벌어졌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인 1930년 후버는 해결책이랍시고 당시 미국이 수입하던 물 건에 관세를 대폭 올리는 전략을 들고나왔다. 관세를 높이면 당연히 수 입품의 가격이 오른다. 100원짜리 물건에 10원 관세를 물리면 시장에 서는 110원에 팔리는 것이다. 가격이 오를수록 물건이 잘 안 팔리는 것 은 당연지사다. 따라서 관세 인상은 외국 물건의 수입을 막고 싶을 때 그 나라 정부가 빼 들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후버의 생각은 이랬다. 당시 미국은 주로 영국 등 유럽에서 물품을 수입했는데, 이 수입품의 가격이 높아지면 소비자들은 어쩔 수 없이 미 국 국산 제품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안 돌아가던 공장이 돌아 갈 것이고, 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살아날 것이다.
후버의 생각을 이어받아 공화당 소속 상원 의원 리드 스무트Reed Smoot와 역시 공화당 소속 하원 의원 윌리스 홀리Willis Hawley가 이를 법안 으로 만들었다. 그 법에는 2만여 개가 넘는 외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율 을 인상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법안으로 관세 부과 품목의 평균 관세율이 1929년에는 40퍼센트였다가, 1932년에는 무려 59퍼센트까 지 올라갔다. 현대 경제사에서 가장 아둔한 보호무역 법안으로 불리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의 등장이었다.
- 사실 스무트와 홀리가 처음 법안을 만들 때만 해도 이게 이렇게 커 질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법의 초안은 미국 농가를 보호하기 위 해 수입 농산품에만 관세를 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안 내 용이 알려지자 미국 기업들이 정부와 의회에 강력한 로비를 펼치기 시 작했다. "농업만 산업이냐! 우리도 보호해 달라."라고 징징거린 것이다. 여기에 후버 대통령이 적극 동조하면서 이 법은 온갖 민원을 다 구겨 넣어 무려 2만여 개에 달하는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는 내용으 로 탈바꿈했다.
이 법안이 가져온 후폭풍은 처참했다. 유럽에서 수입되던 물품의 가격이 15퍼센트 가까이 오르자 당연히 미국 국민들은 국산품을 쓰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에 격분한 유럽 국가들이 미국 수출품에 대해 보복관세를 매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던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에 이어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열강마저 미국에 보복관세를 매기는 대열에 합류했다. 가격경쟁력을 잃은 미국 제품은 유럽에서 죽을 쑤기 시작했다. 1932년 미국의 대유럽 수출은 1929년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그나마 미국 국민들이 자국산 제품을 더 줄기차게 사 주면 상황은 좀 나았을 텐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미국 국민들의 호주머니는 당시 텅 비어 있었다. 「스무트-홀리 관세법」 통과 직후 반짝 살아나는 듯 보였 던 미국 국산품의 내수는 이후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수출과 내수가 동시에 망하니 기업들이 견딜 방법이 없었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유발한 경제 악화는 보호무역이라는 최악의 무역정책이 더해지며 대공황을 가속화했다.
이후 사태는 잘 알려졌다시피 1933년 새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미국 제32대 대통령, 재임 1933~1945)가 취임하며 진정됐 다. 루스벨트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급 중심 경제(감세, 규제 완화 등의 조치로 기업을 돌봐 주는 정책)에서 수요 중심 경제(소비자들의 지갑을 먼저 두둑하게 만드는 정책)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며 위기를 돌파했다. 유명한 공공사업 정책인 뉴딜 정책이 등장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루스벨트는 또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망쳐 놓은 보호무역의 비 효율도 해소했다. 루스벨트는 1934년 6월 12일 '호혜관세법'으로도 불 리는 「상호무역협정법」(Reciprocal Trade Agreement Act)을 통과시켜 「스 무트-홀리 관세법」을 폐지했다. 새로운 법에는 상대 국가가 미국에 대 한 관세를 낮춰 줄 경우 미국도 그 나라 물건에 대한 관세율을 최고 50퍼센트까지 낮추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국이 다시 자유무역 시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후 미국은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 무역 시장에서 자유무역의 전도사 역할을 했다. 대공황 당시 보호무역의 지 독한 비효율을 경험했던 데다가, 이후 미국이 자유 진영 최강대국의 지 위를 공고히 하면서 자유무역이 미국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 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자 미국은 전 지구적인 자유무역 시스 템을 구축하는 데 골몰했다. 1947년 미국의 주도 아래 스위스 제네바 에서 23개 국가가 모여 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즉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면서 인류는 전 지 구적인 자유무역의 시대를 맞았다. 중상주의 시대 이후 치열하게 전개 됐던 자유무역 대 보호무역의 경쟁이 마침내 자유무역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 바나나가 세계적(?) 과일이 된 때는 20세기 초반이었다. 미국은 19세기 중후반 벌어진 미국-멕 시코 전쟁 (1846~1848)과 미국-에스파냐 전쟁(1898)의 연이은 승리로 중남미 (중앙아메리카·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한 상태 였다.
그런데 이 시절 미국 사업가 마이너 키스Minor Keith 라는 자가 코스타 리카로 건너가 철도를 깔고 그 주변의 부지를 모조리 바나나 농장으로 바꿔 버렸다. 처음에는 철도 건설 인부들의 밥값을 아끼려고 철도 노 선을 따라 바나나를 키우던 것이, 어느새 커다란 수익을 안겨 주는 사업으로 발전했다. 키스가 설립한 과일 무역 회사 이름이 유나이티드프루트컴퍼니(UFC, United Fruit Company)였는데, 이 회사가 바로 바나나 4대 메이저 중 하나인 치키타브랜즈인터내셔널의 모태다. UFC는 코 스타리카에 이어 과테말라의 땅도 싹쓸이해 바나나 플랜테이션 농장 으로 만들었다.
알다시피 바나나는 무르기 쉬운 과일이다. 따라서 과일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운송을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UFC는 바나나 를 잘 운송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의 철도 부설권까지 꽉 쥐고 있었다. 땅도 땅이지만, 철도 부설권은 그 나라의 젖줄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 제일 먼저 철도 부설권부터 챙긴 이유 도 그것이었다. 이 때문에 어떤 경우도 철도 부설권은 외국 기업에 함 부로 넘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 정부는 이 중요 한 권리를 UFC에 덜컥 넘겼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첫째, UFC는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이들 나라의 독재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둘째,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인데,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 반부터 중남미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국은 UFC 같은 자 국 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남미 독재자들과 손을 잡고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를테면 온두라스에서 바나나 무역 회사 쿠야멜프루트컴퍼니 (나중에 UFC에 인수된다)를 운영하던 미국의 사업가 새뮤얼 제머리 Samuel Zemurray라는 자는, 자신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용병 을 고용해서 온두라스 대통령을 끌어내리기까지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미국은 자국의 바나나 기업을 보호한 다는 명목으로 쿠바, 푸에르토리코, 온두라스, 니카라과, 아이티 등에 거침없이 군사를 파견했다. 군대를 동원해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의 파 업을 진압하기도 했다. UFC뿐 아니라 하와이를 기반으로 출범했던 과 일 업체 돌(설립 당시 '하와이언파인애플컴퍼니)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 쳐 중남미 지역을 장악했다. 미국은 미국에스파냐 전쟁의 승리로 에 스파냐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차지했는데, 필리핀에서도 이 짓을 반 복했다. 1920년대부터 필리핀의 바나나 플랜테이션 농업을 주도한 회 사는 델몬트푸즈(설립 당시 '캘리포니아패킹코퍼레이션)였다. 1898년 미국-에스파냐전쟁이 끝나면서 시작되어 35년이 넘게 이어진 이른바 '바나나 전쟁'의 추악한 실체다.
미국의 비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중남미 지역 바나나 전쟁은 1934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남미 지역에 군사개입을 중단하고 선린 외교를 펼치겠다"고 발표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중 남미 땅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야욕은 멈추지 않았다. 냉전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중남미 정치 에 개입해 민주 정부를 붕괴시켰고,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독재자를 지 원했다.
간혹 이들 나라에서 국민들의 열망으로 민주 정부가 수립되기라도 하면 미국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나라의 내정에 개입해 민주 정 부를 무너뜨렸다. 당시 중남미의 민주 정부들은 미국 기업들이 점유한 광활한 토지를 되찾기 위해 토지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때마다 미국은 전가의 보도인 "저들은 빨갱이다!"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부추겨 민주 정부를 붕괴시켰다. 합법적인 선거로 출범한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 벤스Jacobo Árbenz(과테말라 제25대 대통령, 재임 1951~1954) 정부가 1954년 군 부 쿠데타로 무너진 것도 이 때문이다.

-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행정부에서 재무장관과 총리 대행을 지낸 예고르 가이다르regor Gaidar는 2006년 미국기업연구소를 대상으로 한 연설 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소련 붕괴의 시작점은 1985년 9월 1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우 디아라비아가 석유 정책을 급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한 바로 그 날이다. (...) 그 후 6개월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생산량은 네 배 증가했고, 석유 가격도 실질 가격 기준으로 4분의 1로 폭락했다. 소련 으로서는 매년 200억 달러의 손실을 보게 된 것인데, 그 돈이 없으면 소련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가이다르의 말처럼 소련은 당시 입은 내상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붕괴됐다.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된 소련은 건국 69주년을 4일 앞 둔 1991년 12월 26일 마침내 해체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 전 발굴과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은 소련이, 바로 그 석유를 집중 공략한 미국의 전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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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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