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의 감춰진 잘못을 드러내라. 네가 혐오스러워하는 곳으로 가라. 네가 도저히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도와라. 만약 집착하는 게 있다면 그 무엇이든 놓아라. 너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라.
- 우리는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느끼기를 두려워하므로, 항상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고집이나 편견 같은 마음의 교묘한 속임수를 활용하여 방어벽을 구축. 그 방어벽의 기반은 상처받는 일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이다. 그 위에 설상가상으로 분노나 집착, 무관심, 질투, 부러움, 자만심 등을 겹겹이 쌓고 덕지덕지 발라서 방어벽을 더욱 굳건하게 완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누구나 가슴 깊숙한 곳에 여린 구석이 존재. 다시 말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타고났다. 이 마음은 우리가 굳건히 세워 놓은 방어벽에 난 조그만 틈새와도 같다. 비록 작아 보이는 틈새지만, 그것이 점점 벌어지다 보면 굳건히 세운 방어벽을 무너뜨릴 수 도 있는 것이다.
-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에서 힘을 얻고, 무엇에 마음을 기대는가? 붓다는 진정한 힘을 주는 것은 열린 마음과 너그러운 융통성뿐이라고 했다. 삶의 무상함에서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나약해지며 괴로워질뿐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도망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 두려움은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니다. 두려움을 잘 이해할 때 비로소 마음이 열린다. 우리가 구축한 마음의 방어벽은 커다란 망치를 들고 부순다고 해서 부서지는 것이 아님. 먼저 그 방어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함. 너그럽고 정직한 태도로 방어벽에 다가가서 관찰하는 것이다. 그 벽을 손으로 만져보고, 코를 대고 냄새도 맡아보라. 그것은 자신이 혐오하는 것과 갈망하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알아차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방어벽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방어벽을 구축해온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전략을 알아차리게 됨
- 어떤 식으로 덫에 걸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음. 우리는 에고가 사용하는 속임수를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는다. 그저 위안을 줄 거라는 익숙한 패턴에 맹목적으로 자신을 내맡긴 채, 왜 자신이 만족스런 삶을 살지 못하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보리심 수행의 가장 근본적 접근법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세세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 일어나는 일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며, 자비롭게 알아차리도록 수행하는 것. 그러다보면 오랜 습관에 빠져 맹목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악순환에서 차츰 벗어나게 됨
- 아무리 우주를 들었다 놓는 대단한 체험이라고 해도, 그 체험이 복잡다단한 일상사에 스며들지 못한 채 그 상태에 대한 집착만 낳는다면 오히려 수행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런 특별한 체험을 하더라도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과 잘 지내는 소소한 일상에도 충실해야 하는 것. 그럴때 특별한 체험을 통해 얻은 통찰이 삶의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 하지만 이와 반대로 삶과 수행을 괴리시키면서 특정한 상태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수행자의 태도가 아니다.
- 삶은 연극과 같은 것이니 자신이 일시적으로 맡은 역할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말라
- 감정은 내면의 혼잣말을 통해 부풀어 오른다. 내면의 부추김이 없다면 감정은 충족되지 않는다. 명상을 하다가 분노가 일어나면, 생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냥 흘려보내라
- 왜 명상을 하는가? 왜 우리는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우선,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명상을 하는 건 아니다. 그런 오해를 갖고 명상을 시작한다면 반드시 실패. 그런 사람은 명상을 하며 앉아 있는 동안, 틀림없이 자기가 뭔가 잘못됐다고 느낄 것이다. 명상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숙달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또 명상은 뭔가를 뜯어고치는 일이 아님. 그런 생각으로 명상에 접근한다면 계속 좌절하게 됨.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이 가진 혼란스러운 면이든 건강한 면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수용하는 것을 자비라고 한다. 내가 가진 존재방식 그대로,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자신과 소통하는 것이다.
- 명상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이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나온 본질적 불안이다. 이런 감정이 느껴질 때 누군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버티고 앉아 있다 해도 몸은 뒤틀리고 마음은 멀리 떠나버린다. 이런 상태가 너무 불편하기에 '지금 이순간'에 머문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것. 하지만 이런 감정을 마주할때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음. 인간은 추억하고, 공상하고, 자기가 계획해서 만든 상상의 세계에서 안도하고 편안해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금 이순간'의 날 것에 그대로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 이것은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라는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너그러움과 유머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수행의 핵심은 이렇다. 머무르라. 머무르라. 그저 지금 여기 머무르라
- 어떤 수행이든지 그 본질은 하나다. 타인의 향한 원망이나 스스로를 향한 자기혐오가 일어났을 때, 거기에 따르는 연쇄반응에 휩쓸리지 말고 알아차리는 것. 그런 감정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며,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일어나는 온갖 혼잣말들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면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 만사가 잘 풀릴 때나 신통치 않을 때나, 무슨 일을 하든지 아티샤의 수심요결을 지침으로 삼아 정진하라. 특히 세가지 수행지침을 기억할 것.
* 가장 빨리 도달하는 자가 되려고 하지마라
* 무언가를 이루려는 희망을 버려라
* 박수를 기대하지 마라
-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몸과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상황이라고 가정하자. 하지만 적개심의 딱딱한 겁질을 들춰 보면 그 속에는 헐벗은 두려움이 숨을 헐떡이고 있다. 단단한 분노의 겉껍질 속에는 어쩔 줄 모르는 여린 마음이 숨쉬고 있다. 헐벗은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해 우리는 그토록 여러개의 방어기제로 보호막을 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연약한 벌거숭이의 마음, 즉 보리심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쉽지는 않다. 여린 마음을 느낄 때 오는 낯설음과 불편함이 싫어서 마음을 닫아버리기때무. 그런데 자애심을 키우는 수행에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중요. 나와 남 사이에 벽을 쌓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게 자애를 기르는 첫걸음이기 때문. 물론 그것을 알아차릴 때도 자신에 대해 자비로운 시선을 유지해야 함. 내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마음의 방어벽을 녹일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짐. 물론 보리심이 드러날 수 있는 기회도 동시에 사라짐. 무조건적인 사랑을 타고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스스로에게 훼방을 놓는 셈
- 깨어있는 마음은 이미 모든 존재속에 내재된 속성이다. 따라서 그것을 굳이 막으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드러나게 됨. 하지만 우리는 에고의 불안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진실이 깨어나지 않도록 차단하는 인생을 살아감. 우리가 기원수행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 타고난 성향을 일깨우지 않고 방치한다면, 그 성향은 점점 움츠러들고 말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과 결심이다
- '지금 이순간'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라. 냄비나 프라이팬, 비누, 칫솔 같은 일상적 도구를 쓰면서도 거기에 관심을 기울여 기쁨을 느껴라. 채소를 씻거나 머리를 빗을 때도 감사함을 표현하라.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랑을 느끼며, 만물에 내재한 생명의 힘에 고마움을 표현하라. 이처럼 알아차리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잘 어우러지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연결될 수 있으며, 근원적 환희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런 태도를 주위 환경과 남들에게까지 범위를 넓혀보라. 아마 감사와 환희심이 더욱 고양될 것이다.
- 자비에도 세가지 '가까운 적'이 있다. 그것은 동정심, 무력감, 멍청한 자비심이다. 사람들은 흔히 동정심이나 직업적 친절함을 진정한 자비심으로 오해. 동정시이 진정한 자비심과 다른 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라는 획일적 구분법을 갖고 있다는 점. 자기 스스로를 '남을 돕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상대방의 자존감을 깔아뭉개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타인을 언제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무기력한 사람으로 전락시키는 일이기 때문. 이런 관점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자비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자신을 그 고통에서 떨어뜨려 놓기에 급급하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이런 동정을 받아본 적이 있다면 그 불쾌한 모멸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정심에는 자비심이 가지는 온기와 배려는 없고 기이한 거리감만 존재. 명심하라. 진정한 자비심은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상하관계로 연결하지 않는다. 주는 사람은 정신적 보상이나 자기만족 때문에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고, 그저 타인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무력감은 눈앞에 벌어진 불행에 압도당하는 마음, 또는 질려버린 마음에서 비롯함. 우리는 종종 세상에 괴로운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 나 같은 게 노력한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게 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함. 완전히 낙심하는 것이다. 이렇게 뭔가에 질린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번째는 좀더 해결하기 쉬운 과제를 가지고 연습하는 것. 내가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를 찾아내서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 자비심의 세번째 가까운 적은 멍청한 자비심이다. 이것은 분명히 아니오라고 거절해야 하는 순간에도 갈등을 피하고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친절함을 가장하는 것. 하지만 명심하라. 자비심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 적대관계에 처했을 때는 경계선을 분명하게 그을 필요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행위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 많은 이들이 진정한 자비심과 멍청한 자비심을 혼동함. 자신의 나약함을 자비심으로 위장하고 자기비하를 정당화함. 열린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남들이 자신을 가지고 놀게 방치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비심의 미덕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상황에 따라 남들의 공격성을 중단시키고 한계선을 그을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한계선을 긋는 것만이 방어벽을 허무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 용서는 남에게든 자신에게든 절대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억지로 용서를 한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 세상을 향해 용기내서 마음을 열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용서할 수 있는 마음도 자라남. 용서하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 할 수 있는 간단한 수행이 있다. 먼저 당신이 느끼는 수치심, 복수심, 부끄러움, 서러움, 울분 같은 느낌을 그대로 알아차려라. 그 다음에는 그 모든 감정들이 우리가 인간이기에 느끼는 것임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라. 그리고 더이상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 명료한 의식으로 모든 감정을 흘려보내고 새롭게 시작하라. 이제는 더 이상 버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용서하고, 과거로 흘려보내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뜻하게 다시 시작하라.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 수행하다보면, 차츰 자신과 남에게 상처 입힌 것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갖추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조차도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이 생긴다. 용서란 내가 가진 열린마음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상태. 우리 모두가 지닌 근본적인 선한 마음이 표출되는 일. 사실 과거를 용서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매순간 속에 내재해 있다. 한순간 한순간이 내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다
-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고통에서 달아나기 위해 쾌락을 좇는 행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누누이 들었다. 또한 깨어남과 환희,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깨닫는 환희, 열린 마음을 믿는 환희에 대해서도 들었따.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상태,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외부적 위안거리를 찾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영적 구루들처럼 지속적인 평상심이나 자비심에 머물수도 없는 어정쩡한 과도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영적 과도기의 특징을 요약하면 불안, 상심, 연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감정이지만 회피할수도 없고 싸울수도 없다. 힘겹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그 한복판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그 감정들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경직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더욱 유연하게 만들어야 함. 이처럼 이도저도 아닌 장소에 있는 듯한 불편한 감정과 친밀해져야 우리 마음이 더욱 유연해진다. 이전의 익숙한 습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늘 새롭게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면 낯선 것들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 그래서 용기를 짜내어 내가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영역에 기꺼이 마음을 열고 머무를 수 있을 때 자비는 절로 자라남.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선입견을 동원하여 아는 것처럼 억지를 부리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가 지닌 내면의 힘과 만날 수 있다
- 수행이란 어떤 견해를 강화하면서 마음의 방어벽을 쌓는 일이 아니다. 획일적인 가치관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편한 마음이 일어나도 그것과 더불어 있는 그대로 머무르는 것. 불편한 마음이 일어나거든 명상을 하고 통렌 수행을 하라. 바로 지금 이순간을 바라보라. 경직된 세계관이라는 방어벽 속으로 도망치지 마라
- 수행자에게는 옳은 것 또한 나쁜 것 만큼이나 극단적인 관점이다. 이 두가지는 모두 근원적인 지혜의 양쪽 측면일 뿐이다. 반야바라밀다의 지혜는 교차로 한가운데 서서 어느쪽으로 가야할지 기웃거리는 바로 그 순간에 있다. 교차로는 수행자의 수련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다. 내가 집착해온 고정된 견해가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 그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해라.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둬라. 그것을 움켜쥐지도 말고, 피하지도말고, 용서하려고 노력하지도 말고,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분석하지도 말고, 입에 넣고 이러저리 곱씹지도 마라. 이런 태도는 우리가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가르침과 상반됨. 우리는 컵에 물이 반이 들어 있으면 '컵에 물이 반이나 들었네'하고 고맙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이 생각은 긍정적인 척하는 편협한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컵에 물이 별로 없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두려워하는 이원론적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새마을 운동처럼 펼쳐지는 일련의 긍정주의 운동을 봤을 때 가슴 한구성 숨막히는 갑갑함을 느끼게 되는 원인이다. 그것은 부정적 생각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편협함이 그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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