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저자
도널드 발렛, 제임스 스틸 지음
출판사
어마마마 | 2014-12-2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불평등의 기원 모든 것은 1%를 위한 국가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가격비교

 

- 월가를 살찌우고 대침체를 촉발시켰던 금융규제 완화는 경제 엘리트 그룹이 미국 경제에 대한 통제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 가운데 그저 가장 최신 버전일 뿐이었다. 그들이 한 일은 다음과 같다.
* 중산층에 부담을 가중시키는 조세제도를 만들었다
* 경제 각 분야의 규제를 완화하여 항공과 물류를 포함한 전체 산업에서 노동자의 일자리를 없애거나 임금을 낮추었다.
* 금융부문에서는 08~09년 경기침체 때 결딴 나서, 가치도 없는 모기지 담보 증권사업을 투기적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재점화시켰다
* 주가를 올리고 배당금을 늘리며 임원에 대한 보상을 늘리기 위해 기업들을 부추겨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하게 하여 미국내에서 일자리를 없앴다
* 기업들이 정규직 일자리를 없애고 낮은 임금과 복지혜택이 없는 계약직 노동자들로 대체하도록 했다
* 다국적 기업들이 이익을 해외로 빼돌리게 하여 미국에서 일자리를 만드는 데 사용해야 할 세금납부를 회피하는 것을 용인했다
* 110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이 소유한 집의 실제가치보다 높은 담보로 융자를 얻도록 조장하고, 이들이 평생토록 갚을 수 없는 부채를 매달 은행에 갚도록 하여 주택시장 붕괴를 야기시켰다
* 미래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모든 것은 미국 중산층에게는 종말이나 마찬가지였다
- 중산층은 자국민보다 무역 파트너에게 더 호의적인 미국의 무역정책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것도 모자라, 의회가 만든 우호적 정책으로 혜택을 입은 국내의 기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상처를 입었다. 그 기회주의자들은 바로 거물급 사모펀드 회사들이다. 12년 대선 때 사모펀드의 홀동이 국가적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미트 롬니가 과거에 보스턴의 사모펀드 회사인 베인 캐피탈에서 일하면서 미국인의 일자리를 없애는 데 일조했다는 전력이 밝혀져 비난받을 때였다. 베인 캐피탈은 인수한 기업의 일자리를 줄이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이 하는 일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례로 미국 최대 사모펀드 회사인 블랙스톤 그룹의 창업자중 한명이면서, 현 CEO인 스티븐 슈워츠먼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가 됨. 그의 자산은 무려 47억불로 추정됨. 지난 20여년 동안 사모펀드 사업이 급격히 확대되었는데, 같은 기간에 중산층의 몰락이 가장 심각하게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모펀드 회사들이 운영하는 자금은 80년에 50억불이었는데, 12년에는 1조달러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2300여개 사모펀드 회사 외에도, 1만개에 가까운 헤지펀드 회사들이 또 다른 1조 달러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그 운영형태가 사모펀드 회사와 유사했음. 이런 현실은 월가가 기업들을 사고팔 자금 2조 달러를 갖고 있으며, 대상기업들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재앙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
- 기업매수와 매도를 통해 한 기업에서 다른 기업으로 돈의 흐름이 생기고, 연쇄적으로 다른 사업이나 지역 서비스 산업에 도움을 주면서 여러 사회에서 경제적 복지를 향상시킨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런 거래가 슈워츠먼과 그의 동료인 사모펀드 거물들의 은행계좌에는 축복이 된다는 것뿐이다. 거대 사모펀드와 헤지펀드 회사의 관리자들은 막대한 부를 얻고, 그중 많은 수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심지어 그들이 인수한 후 매각한 회사가 파산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막대한 수익 외에도 이들은 다른 납세자들에 비해 세금특혜를 받고 있었다. 의회 덕택으로 이들의 연간소득에 대한 세율은 성과보수라는 모호한 명목으로 다른 세금(39%)와 달리 15%로 고정되었다. 이는 그들의 건물을 청소하는 사람들과 같은 세율. 이들은 거래로 얻은 수익과 낮은 세금을 통해 모은 돈으로 여러채의 집과 개인용 비행기, 그리고 호사스런 파티와 같은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다.
- 11년까지 생산직 일자리는 79년 1950만개에서 1160만개로 줄어 79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짐. 더 극적인 변화는 남아 있는 일자리의 구성비율이었다. 좋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79년에 전체의 18.25였지만, 11년에는 9%로 줄어들었다.
- 누가 워싱턴에는 초당파주의가 없다고 했던가? 무역정책에 관해서는 완벽하게 초당파적으로 일치단결한 자세를 보였으며, 이는 미국 노동계층에 치명적 결과를 낳았다. 워싱턴에는 모두 교역 상대국에 공정한 무역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미국은 이런 웅변에 걸맞는 정치적 의지를 가졌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실제로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열성적인 자유무역주의자들이 보호주의라고 불리는 정책들을 실행해야 한다. 미국의 무역상대국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향력 강한 다국적 기업들의 압력과 일부 경제학자 및 언론인들이 제기하는 엄청난 논쟁은 무역규제를 취하는 어떠한 조치건, 설령 한시적일지라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헛소동은 계속되고 있다. 워싱턴 정계가 진부한 소리를 하면서 계속해서 무역개혁에 관해 입에 발린 소시를 하는 동안 무역적자는 악화되고 있다. 민주-공화 양당 때문에 76년 이래 누적된 무역적자는 무려 10조 달러에 도달했다. 이와 같은 적자의 바다는 직장을 잃은 수백만명으로 채워졌다. 정치가와 언론은 수출로 창출된 일자리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수입으로 인해 사라진 일자리는 언급하지 않는다
- 매년 무역수지 적작 늘어날 때마다 정부는 당을 떠나 공히 수출이 미국내 일자리를 늘리는 해법이 될 거라는 미신을 퍼뜨렸다. 반면에 그러한 주장의 치명적인 논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했다. 즉 만약 수출이 고용을 창출한다면, 수입 또한 반드시 실업을 유발한다. 수입은 미국에서 좋은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없앤다. 그런데 미국은 수출보다 수입을 더 많이 해왔다. 80년 미국은 상품과 서비스를 수출보다 7% 더 수입했다. 90년에 이 차이는 15%에 달했으며, 2000년에는 35%에 달했다. 그리고 세계경제가 침체되기 직전인 08년엔 38%까지 늘어났다.
- 90년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 미국에서 급여가 좋은 프로그래머 직종을 대체한 것은 가정간병인, 소매점 계산원, 소비자 서비스센터 직원, 트럭 운전자, 경비원, 보육교사와 같이 수입이 적고 승진이나 급여인상의 기회가 거의 없는 직업이었다. 프로그래머는 다른 직종의 수백만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미국 노도자의 곤경에 오랫동안 무관심한 의회에 의해 희생당했다. 민주당이나 공화당을 막론하고 의원과 대통령들은 경제적으로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만드는 대신에 사실상 외국이 미국의 기초산업을 잠식하도록 방치함으로써, 외국정부에 의해 미국의 일자리 정책이 좌지우지되는 결과를 초래. 미국내 자유무역주의자들은 정부가 조금이라도 시장에 개입하려고 하면 경고의 소리를 내느라 바빴다. 하지만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뽐내는 세계화된 국제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외국정부들은 이런 세계화 이론 같은 것은 무시하고, 자국민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는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 80년대에 인도정부는 기업의 소프트웨어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초보적 수준이었던 소프트웨어 산업을 지원하기 시작. 85년 당시, 인도 소프트웨어 수출은 1천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2010년에는 550억불에 달했다. 이토록 극적인 증가가 가능했던 것은 86년 인도정부가 IT산업에 막대한 성장기회가 있다고 판단하여 국가의 우선순위 사업으로 선정했기 때문. 인도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외국 자본의 투자에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소프트웨어 산업은 최소한의 준비만으로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IT산업의 발전을 촉진. 91년 인도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국내 여러곳에 소프트웨어 기술단지들을 조성. 정부는 이곳에 대지, 전력, 위성전화, 간결한 수출절차, 세금면제 등의 혜택을 제공. 다른말로 하면, 인도정부는 미국정부가 결코 하지 않을 일을 한 것이다. 핵심산업을 선정해 정부의 지원을 집중시켜고, 이것이 승자를 결정지었다
- 11년말 기준으로 미국에서 학자금 채무 미불액은 모두 1조달러를 넘어서서 전체 신용카드 채무액보다 많다. 대학 졸업생은 평균 2만 4000불의 채무를 지고 있으며, 10만불 이상인 경우도 있다. 전반적으로 학자금 채무는 매년 1000억불씩 늘어나고 있다. 기득권층은 돈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라며 학생들을 현혹. 일부에겐 맞는 말이긴 하지만, 대다수에게는 틀린 이야기다. 이런 경향은 경제에 있어서 도미노 효과를 유발했다. 전통적 생애 최초 주택구입자인 젊은 층은 담보대출을 받을 수 없으므로 시장에서 밀려나게 됨. 이로 인해 이미 암울해진 주택건설 산업이 더욱 타격을 받게 됨. 이전 세대의 주택 소유주들은 이제 더 좋은 집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현재 가진 집의 잠재적 구매층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에 집을 팔 기회가 없었다. 이렇게 주택시장이 스스로 회복하지 못하면 경제회복 가능성도 없다.
- 40여년전에는 학자금 채무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미국의 대출규모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대학 등록금 인상이 학자금 채무증가의 주요 원인이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미국 중산층이 경제적으로 붕괴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과거에는 많은 중산층 부모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저축할 여유가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학자금 채무는 70년대 내내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따. 하지만 중산층 가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80년대에부터 급격히 증가. 99년부터 11년 사이에 학자금 채무는 511%의 기록적 증가세를 보임
- 기업들은 얼마나 많은 자금을 해외에 두고 있을까? 아마도 2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2억달러도 아니고 2조 달러다. 25%의 세율만 적용하더라도 세수는 3750억 불에 해당하며, 연수입 10만불 미만인 중산층과 빈곤 노동계층의 세금을 모두 합한 것과 맞먹는 금액.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기업은 왜 항상 승리하고, 중산층은 왜 계속 패배하며, 미래는 왜 암울한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기업은 막대한 세금을 감면해주는 법률의 제정을 위해 로비를 벌이고 있지만, 미국 정부에는 기업의 힘에 맞서 균형을 잡고자 노동계층을 대변하고 그들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85년 이래 기업들은 84350개의 연금제도를 없앰. 각각의 연금은 수십, 수백, 아니 수천명의 보통사람들에게 퇴직이후의 삶을 보장하던 것이었다. 기업들은 미국인에게 필수적인 보호망을 철거하면서 다양한 이유와 변명을 대고 있지만 결국 모두 돈 문제로 귀결된다. 퇴직연금 적립을 그만두면서 절약된 돈은 이제 중역들의 급여나 배당금, 그리고 CEO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업에 사용된다. 의회는 아예 동조하는데 그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변화가 직원들에게 최선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가장하여 유권자들을 배신했다.
- 지배층이 고안한 퇴직 시나리오는 수백만 미국인을 노년에 필요한 수준보다도 훨씬 부족한 재정상태로 내몰 것이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의 중심에는 이제 널리 퍼져버린 401k연금이 있었다. 401k연금은 대기업과 워싱턴 정계가 30여년전에 연금에 대해 내놓은 해법. 401k가 절세형 저축상품이나 퇴직후 계획에 대한 보조역할로 사용된다면 그리 부족할리 없지만,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퇴직 후의 주 대책이 되어야 한다면 절망적이리만큼 부족한 것이다. 애초에 401k는 연금을 대체하기 위한 것으로 도입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급여 일부를 떼어둠으로써 세금을 낮추려는 기업중역을 위해 의회가 78년에 내놓은 절세 수단이었다. 당시 연방소득세는 고소득자에게 훨씬 높았는데, 최고세율이 70%였다. 그로부터 7년도 지나지 않아 기업들은 401k를 대부분의 직원들에게 개방. 그때까지도 401k는 저축을 장려하고 퇴직 후 보조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제도였으며, 기존 연금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85년까지 점차 많은 기업이 도입하면서 401k의 자산은 910억불로 늘어남. 하지만 연금을 보장할 목적으로 적립한 금액은 단지 그것의 10분의 1 정도였다. 기업들이 확정급부형 연금에서 직원들을 빼내 401k 계획으로 밀어 넣으면 총결산액을 불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모든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 그럼으로써 사실상 직원들은 급여가 대폭 삭감되었지만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401k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직업을 자주 바꾸게 만드는 급변하는 경제상황을 들먹였다. 그들은 확정급부형 연금은 노동자들이 오랫동안 근무하는 것을 전제로 해 마지막 수년간의 급여 평균으로 산출되므로 21세기 직원들의 요구를 맞추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업이 중역들에게 보장하는 것처럼, 의회는 연금제도가 일하는 기간 동안 이동가능하도록 규정을 개정해 노동자들이 고정된 퇴직금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었다. 현 상황에서 401k의 이동식 급부는 흔히 퇴직을 위해 저축하려는 노력에 방해가 된다. 다른 직장으로 옮기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401k에서 돈을 빼내 쓰는 유혹에 굴복한다. 또한 직장을 잃은 이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401k에 손을 대게 된다. 미국진보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401k는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저축하지 못하며, 만약 꾸준히 저축을 하더라도 충분한 금액까지는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401k에는 총 3조달러가 적립되어 있음. 하지만 이 수치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 제도가 왜 연금을 대체할 수 없는지 그 이유가 보인다. 근로자 복지연구소에 의하면, 11년에 401k의 계좌당 평균 잔고는 60329불 이었다. 그러나 이 변변치 않은 금액조차도 그 돈이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얼마나 불충분한지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계좌들의 중간값은 17686달러였다. 즉 401k 계좌의 절반은 이보다 많고, 나머지 절반은 적음을 의미. 또한 네개의 계좌 중 하나는 잔고가 5000불이 안됨.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자신의 401k에 있는 돈은 은퇴후 한달에 80불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 슈워제네거는 중국과의 계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이유로 합리화. 그의 계산대로라면 상해와 계약하면서 캘리포니아는 4억불을 절감했다. 하지만 그의 계산에는, 만약 사업에 참여했더라면 미국 철강 노동자들이 받을 수 있었던 수억불의 급여가 사라진 것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 노동자들이 납부할 소득세, 사회보장기금, 실업보험세 등 수천만불의 세금도 포함되지 않았다. 고용된 노동자들이 구매하는 일용품 소비에 따른 기대이익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잠재적으로 증폭될 수 있는 수억불의 경제효과 역시 고려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학교와 지방정부에 납부하는 지방세도 감안되지 않았다. 또한 연방과 주정부가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게 지출할 실업수당, 의료 보조금 등의 비용도 그의 계산법에는 빠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수억불이 미국내에 남을 것이고, 그 돈이 다시 미국경제에 투입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절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다. 다리 건설의 총 비용은 다들 짐작만 할 뿐이지만, 이자비용은 물론 전체 건설 공정을 고려하여 추산한다면 120억불에 이르렀다. 한가지 명백한 사실은 나라가 높은 실업에 시달리는 시기에 좋은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창출할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미국에 투자되는 것이라면, 미국에 일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리건 철강의 히크먼이 한 말이다. "그 일자리들은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일자리이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일자리입니다. 그 일자리들로 보건과 복지비용이 충당되고, 401k와 여타 연금이 조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 공장시설들은 모든 환경요구조건을 만족시킵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사실상 중국 정부와 경쟁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중국인과 경쟁하는 것은 매우, 아주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오리건 철강같은 미국 제조업체들은 중국정부뿐만 아니라 미국정부와 경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자유무역의 아버지 스미스와 리카도는 개도국이 선진국으로 상품을 파는 세상을 상정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자유무역에는 두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무역을 하는 국가들은 본질적으로 가치를 공유하는 체계여야 한다. 둘째, 해운을 통해 상품을 운송하는 시간의 문제 때문에 국내상품은 항상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요소 모두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 스미스와 리카도은 국내의 생산업체가 외국의 공장에 투자해 자국 시장에 판매할 상품을 만드는 시대를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 국부론만큼이나 도덕감정론도 스미스에게는 중요한 책이었따. 자유무역 이론가들이 제 입맛대로 발췌해 인용하는 국부론의 본래 취지를 생각한다면, 스미스는 모든 면에서 노동조건이 열악한 국가들에 생산을 아웃소싱해서 단기적 이익을 얻는 경제구조를 비난했을 것이다. 스미스와 리카도의 모델과 같이 비슷한 경제수준의 국가들이 서로 시장을 열어 국내에서 생산된 상품을 교역하고 상호존중하는 관계는 현재 유럽연합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빚의 마법  (0) 2015.12.02
화폐의 몰락  (0) 2015.11.20
하버드의 세계를 움직이는 수업  (0) 2015.05.22
오래된 질문 새로운 답변  (0) 2015.05.15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0) 2015.05.15
Posted by dalai
,

 


하버드의 세계를 움직이는 수업

저자
리처드 H. K 비에토, 나카조 아키코 지음
출판사
다산북스 | 2012-05-07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스타벅스, FRB, 루이비통, 미츠비시 상사 등 세계 리더들이 ...
가격비교

- 사람은 1인당 소득이 6000~7000불이 될 때까지 자기가 더럽힌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있음. 현재 경제발전의 가속화 페달을 밟고 잇는 중국의 1인당 평균소득은 3500불 수준. 그들 역시 눈 앞에 걸린 성장이라는 두 글자에 정신이 팔려, 인내만 강요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환경을 파괴한다.
- 일본은 미국을 전략적 시장으로 설정했다. 또한 시장을 개척하고자 한계비용가격을 형성했다. 즉, 시장점유율을 획득하고자 가격을 한계비용 혹은 그 이하로 낮춘 것이다. 일단 미국에서 시장점유율을 획득해야 효율적인 규모의 사업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환율도 한몫했다. 2차대전 중에는 1달러 4엔이었던 환율이 1949년에는 1달러 360엔으로 고정되었다. 높은 환율이 유리하게 작용하며 값싼 일본제품은 저렴한 가격에 미국시장으로 유입되었다. 해외에서는 싸게 팔았지만, 국내에서는 과점을 유도해 비싼 가격으로 팔았다. 채산을 맞추기 위해서다. 국내시장에서는 규모를 다지고 국외에는 한계비용가격으로 수출해 점유율을 늘리는 것이 일본의 시장전략이었다. 제품전략도 실로 비범했다. 대부분 개도국은 값싸고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으로 출발하지만, 일본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일본은 언젠가는 맞닥뜨릴 동남아 빈곤국과의 가격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원료와 에너지 자원의 수입액이 많으므로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직물 따위를 만들어서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결국 고도성장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것. 일본은 고부가가치 산업에 생산을 집중하기로 결정. 특히 석유화학, 알루미늄, 공작기계, 자동차, 전자기기, 철강, 조선, 항공기 분야 등 8가지 산업에 집중. 일본은 이 산업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보호육성정책을 발표함으로서 산업진흥을 꾀했다. 그러나 석유화학과 알루미늄은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는 산업이었기에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특히 1차 석유파동 후에 고전하면서 수출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 항공기 사업 또한 미국의 방위정책과 궤가 맞지 않으면서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수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철강과 조선산업이 초기에 성공했고 최종적으로는 전자기기, 자동차, 공작기계 산업이 차례차례 주력분야로 성장했다. 이처럼 높은 부가가치를 가진 상품을 생산해서 수출하고 판매하는 일본의 전략은 적중했다. 게다가 미국시장은 소득탄력성이 아주 높았다. 다시 설명하면, 이미 부유한 생활을 누리던 미국인은 소득탄력성이 낮은 직물이나 크리스마스 장식보다 자동차와 전자기기를 구입하고 싶어했다. 이런 제품들은 자본집약적이므로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일본은 자본집약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 즉 미국시장이 원하는 상품을 수출전략에서 주력해야 할 상품으로 선택. 당시 미국은 자동차와 전자기기 산업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략을 펼치기도 전에 시장진입의 장벽이 존재했던 것이다. 50년대 후반에 일본의 자동차 산업의 보호육성성책을 추진했을 때 미국은 이미 세계의 자동차 시장을 지배한 상태였다. 제너럴모터스, 포드, 크라이슬러가 세계 자동차 시장의 90%를 차지했으니 말이다. 전자기기와 공작기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전략은 격심한 세계경쟁에서 살아남고자 일본이 스스로 선택한 장기정책이었다. 지금가지 설명한 전략을 채택했을 때 이미 일본인들은 스스로 우수한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10년이든 20년이든 꾸준히 노력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상태였다. 더구나 일본에는 안정된 정치체제가 존재했기에 장기전략을 채택하는 데 걸림돌이 없었다. 특히 57년 보호육성산업으로 선정된 공작기계 분야는 77년 수출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무려 20년이나 걸렸다. 그리고 80년대, 일본산 공작기계는 미국시장을 지배. 그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일본제품이 미국을 점령하자 미국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자동차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67년 무렵까지 일본은 미국에 자동차를 한대도 수출하지 못했다. 도요타가 처음 수출한 자동차는 시속 85킬로도 나오지 않는데다 덜컹덜컹 흔들리며 의심스러운 소리를 내기 일쑤. 사실 20년 동안 쉬지 않고 근성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일본은 계속노력했고 철강, 조선, 기계처럼 강점이 있는 분야에선 독자개발도 추진. 물론 당시 일본의 임금이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고 엔화약세로 이점을 톡톡히 누린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 일본기업은 자기자본비율이 낮고 대형은행의 대출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음. 제조부문은 차입이 많은 반면, 주식자본비율은 몹시 낮다. 그래서 일본 제조회사들은 일정한 금액의 이자와 원금을 계속 상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주주에 대한 책임은 크지 않다. 이것은 의미가 있는 대목이다. 서구 기업들은 주주의 눈치를 보며 15~18%의 이익을 내고자 전전긍긍했지만, 일본기업들은 한 자릿수 성장만 기록해도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비용절감으로까지 이어졌다. 일본에는 은행가가 많지 않다. 당시 존재하던 76곳 가운데 12곳이 대형은행이었고 나머지는 규모가 작은 지방은행이었다. 대형은행은 계열과 연계해 융자를 제공. 참고로 그 당시 미국에는 은행이 25000곳이나 있었다. 은행의 수가 적은 일본에서는 대장성이 비공식적으로 은행에 지침을 내리거나 일본은행(중앙은행)이 창구규제를 실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미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 장기간에 걸친 고도성장은 매해 소득 증가로 이어짐. 증가한 소득의 배분을 둘러싸고 기업과 단체는 사업보조금으로 할당할 것을 정치가와 관청에 요구했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일본의 정치가들도 지역선거구에 밀착해 활동하는 업계나 단체에 유리하도록 관청을 상대로 로비. 또 관청은 권한 확대, 예산확보, 낙하산 취업자리의 발굴이라는 측면에서 정치가를 적극적으로 도움. 정경유착이 시작된 것. 이런 경향은 기득권을 둘러싼 움직임과 재정의 경직화를 초래. 결국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세계화의 진행이라는 환경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어두운 면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일본사회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할 무렵인 71년 8월 15일 미국 닉슨 대통령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료를 선언. 아울러 닉슨은 일본에 10%의 수입할당을 부과. 이로써 일본의 기적적인 고도성장은 막을 내린다.
- 국가의 성장단계를 들여다보면 대체로 제조업이 선행하고 서비스업이 그 뒤를 잇는 패턴이 흔하지만, 인도는 전혀 다름. 여타 신흥국의 서비스업은 적자를 기록하지만, 유독 인도만 흑자를 기록. 08년에는 흑자가 약 250억불에 달했다. 하지만, 인도는 10억명의 인구가 사는 대국이기에 효율적 농업, 석유화학, 에너지, 전기기기, 철강과 같은 제조업이 절실하다. IT서비스를 아무리 팔아도 10억 인구가 모두 자동차를 살 정도의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 결국,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인도인도 자신들의 이런 상황을 아는지 최근들어 제조업도 조금씩 궤도에 오르기 시작. 자동차의 타타, 세계 5위 풍력발전기업 수즐론, 미국 수출용 트랙터와 사륜구동 자동차를 제조하는 마린드라앤마힌드라가 인도의 대표 제조기업. 이들을 주축으로 제조업으로 점점 이행중이지만 아직 갈길은 멀다. 중국의 제조업에도 한참 뒤처진 상태고 일본과의 격차는 측정하기 힘들정도임
- 인도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다양성이다. 그 다양성으로 인해 교육과 소득의 격차가 크고 남녀 성차별도 극심. 여성의 교육수준이 아주 낮은 주가 있으면 아주 높은 주도 있고, 몹시 부유한 주가 있으면 눈을 의심할 정도로 가난한 주도 있다. 예를 들면 인도 동부 비하르주와 북부 웃타르프라데슈주는 모두 1억 5000만명이 거주할 정도로 넓은 지역이지만, 믿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다. 반면 중서부의 마하라슈트라, 북서부의 구자랏, 북부의 델리는 더없이 풍요로운 지역이다. 이 격차를 극복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막대한 조정비용이 투입돼야 할 것이다.
- 멕시코는 나프타로 순조로운 성장을 이루었고, 마킬라도라에도 막대한 외국자본이 투입되었다. 마킬라도라에 입주하면 제품을 미국에 수추라기도 쉬운데다 멕시코 북부의 미국 국경 근처에서 생산하므로 멕시코 및 기타 중남미 국가에도 제품을 수출할 수 있기 때문. 미국기업뿐 아니라 일본기업도 국경지대에 공장을 건설했다. 임금이 훨씬 낮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자기기 사업은 통째로 멕시코로 옮겨왔따. 물론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모두 중국이 대두하기 10년전에 벌어진 일이다. 아무튼 미국과 멕시코의 무역량은 대폭 증가. 거래는 활발해졌고 미국은 경쟁력 있는 제품을 판매하고 멕시코는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제품을 판매하면서 상호간의 이익을 올림. 단, 일부 우려처럼 미국의 일자리가 상실되긴 했다. 미국은 멕시코만큼 값싼 가구와 자동차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 대부분 자동차 공장이 멕시코로 자리를 옮김. 그 대신 미국은 CT스캐너처럼 멕시코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분야의 제품을 제조. 나프타 체결후, 멕싴는 미국과의 양국무역에서 흑자를 낼 만큼 성장. 살리나스 전 대통령은 언제까지고 빚에 의존해 살수 없다고 말했다. 나프타를 두고 백년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한 멋진 기회라고도 말했다. 여태 멕시코는 정치적으로 가능한 개혁을 모두 시도했다. 하지만, 정치력 부재로 큰 진전을 이루진 못했다. 그런 멕시코에게 나프타는 마지막 돌파구였다. 멕시코는 나프타에 참가하여 미국, 캐나다와 경쟁함으로써 산업구조를 뜯어고칠 필요가 있었다. 개혁할 것인가, 역사와 함께 사라질 것인가. 살리나스는 양자택일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과감히 실행에 옮김. WTO에 가입한 중국과 비슷한 행보다. 중국도 정치적 수단으로는 경제개혁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WTO에 가입해 중국기업을 개혁으로 내몬 이력이 있지 않던가. 그래야만 서구기업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기 때문. 외압과 외국의 경쟁력을 이용해 국내기업에 적응을 강요하는 것이다. 멕시코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멕시코가 정체에서 탈출해 성공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추측하건대 살리나스 대통령의 심정이 어미 사자가 아기사자를 벼랑으로 내모는 것 같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의 일부 정치가아 노조는 멕시코와의 자유무역협정을 두고 아직도 일자리가 얼마나 사라졌는지 보라며 떠들어대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멕시코에 수출할 상품을 취급하는 미국기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지 알아야 한다.
- 90년에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세인은 사우디 국경까지 밀고 들어와 사우디에 침공위협을 가함. 그러자 파드 국왕은 사우디를 방위하고자 미군의 파견을 허가. 이에 미국은 60만명에 달하는 육군과 공군병력을 파견해 순식간에 후세인을 제압. 하지만, 그의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후세인이 순순히 항복했기 때문. 그로부터 12년후 미국은 다시 후세인과 총구를 겨눠야 했다. 걸프전이 끝나고도 사우디에 미군의 대병력이 주류하자 이슬람 과격파들은 사우디를 떠났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이다. 그는 사우디 유수의 건설사를 경영한느 빈 라덴 일족 출신으로 이미 몇년 전에 사우디를 떠나 러시아와 분쟁을 벌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미군이 사우디에 주류하자 한층 더 과격함을 드러내며 사우디 정부의 전복을 노리게 됨.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뿐 아니라 사우디 정부까지 증오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생각하기에 현재의 사우디 정부는 이슬람답지 못하기 때문. 90~92년까지 사우디의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엄격한 이슬람법을 채택하라고 국왕을 압박. 미군을 추방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부를 분배하고, 여성에게 일체의 권리를 부여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주장은 무장 이슬람 단체인 탈레반의 요구사항과 흡사했다. 실은 사우디에서는 70년대부터 80년초까지 여성의 자동차 운전이 허용되었고 스카프도 착용할 필요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어쨌거나 국왕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국왕은 신심깊은 이슬람교도이기는 했으나 원리주의자들처럼 과격하지는 않았다. 가은 이슬람교도였으나 서로 사고방식이 달라 생기는 충돌이 여러차례 일어났고 90년 중반에는 몇건의 테러사건까지 발발. 과격파 이슬람교도들이 메카의 사원을 점거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감. 96년에는 사우디 동부도시 알코바에 있는 미군 공군기지가 폭격을 당해 수천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 두바이는 아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나라. 사우디와 달리 음주가 허용되고, 여성은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남성과 같은 환경에서 일함. 베일은 착용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서는 스카프조차 쓰지 않아도 됨. 두바이는 런던과 상해에 버금가는 국제적 금융, 상품 거래센터가 되기 위해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정도 분리. 다만 에부터 두바이에 정착해서 사는 현지인들은 수니파 이슬람교도임. 대부분 여성은 운전하지 않으며 베일을 착용한 여성들도 있음. 그러다 보니 미니스커트를 입은 인도 여성 옆에 베일을 착용한 두바이 여성들이 서 있는 대조적 광경이 현지에서 심심찮게 목격됨. 심지어 두바이에는 불교사원은 물론이고 기독교 교회까지 있다. 그뿐 아니라 바와 매춘부도 있음. 두바이의 인구는 고작 150만으로 그중 86%가 도시건설을 위해 건너온 외국인. 외국노동자라 해서 저임금 노동자만 있는 것은 아님. 온갖 직종의 노동자가 두바이로 들어왔음. 개중에는 관리직으로 고용되어 입국한 이들도 있다.
- 08년 세계 금융시장이 붕괴하자 두바이의 금융시장도 함께 붕괴. 그들 역시 자산담보증권같은 리스크 높은 금융상품을 보유했었기 때문. CDO는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담보로 하여 발행된 증권을 말함. 부동산 시장은 물론이고 금융시장도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08년 1월 두바이를 방문했을 때엔느 절반 정도만 지어지고 마무리 되지 않은 빌딩이 여기저기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고 크레인도 동작을 멈춘 상태혔음. 세게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버즈두바이도 아홉개 층만 남겨둔 채 건설이 중단되었음. 부동산 회사는 기술적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지만, 필시 자금이 부족했을 것이다. 다만, 버즈두바이는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으므로 언젠가는 완성될 것. 두바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대폭줄어 외국인을 포함한 대부분 노동자가 강제 해고당했다. 두바이에 들어와 고급 승용차를 구입했던 그들은 할부금을 마저 갚지 못하고 차를 공항에 버려둔 채 귀국. 두바이 공항의 주차장에는 수백대가 넘는 차로 넘쳐남. 이른바 고급인력은 두바이를 떠나고 저임금 노동자만 남았다. 두바이의 인구는 08년 한해동안 2/3로 감소. 정부는 거액의 채무를 떠안았고 서비스업을 비롯해 모든 경제활동이 중단됨. 두바이에 투자한 기업중 이익을 남긴 곳은 거의 없었다. 부동산 가격도 폭락했다. 가격이 폭락한 부동산은 대부분 정부소유였으므로 두바이 정부는 좀더 보수적이고 부유한 형제 토후국, 아부다비로 돈을 빌리러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아부다비는 두바이의 자산을 자신들이 관리하겠다는 조건을 달고 돈을 빌려줌. 두바이는 성공했지만 도가 지나쳤다. 현명하지 못한 일을 벌이고 말았다. 성공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착각에 빠졌고 부동산 투자에 실패했다.
- 9/11 테러 이후 석유가격이 급등하자 러시아는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 그러나 러시아에 투자한 해외 자원회사들은 손실을 봄. BP를 비롯한 해외석유기업은 러시아의 문호가 열리자 투자를 시작했지만, 러시아의 정교하면서도 교묘한 세금제도로 인해 총수익의 100% 이상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결국 BP는 5억불의 손실을 냄. 또 다른 석유회사 쉘 역시 지금까지 사할린 천연가스 프로젝트에 200억불이나 투자했으나 보유주식의 1/4을 러시아 정부에 도로 빼앗기고 말았고, 지금까지도 러시아 정부의 지배 아래에 있음. BP의 프로젝트도 같은 실정에 처함. 그뿐 아니다. 푸틴은 호도르코프스키를 투옥하면서 거대자산인 유코스를 압수. 유코스는 러시아 정부의 관리를 받으며 천연가스 기업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사우디의 아람코에 이어 세계 2위 에너지 기업으로 성장. 석유기업 로즈네프트도 유코스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렇듯 푸틴은 경매로 헐값에 팔려나갔던 국가자산을 하나둘 다시 환수하기 시작했다. 과정이야 어떻든 러시아는 채무를 줄였으며 석유로 올린 수입을 투자하고자 안정하 기금을 창설. 잠깐 설명한 바 있지만, 자원을 대량을 수출하는 자원국은 으레 자국의 통화가치가 크게 올라가기 마련이므로 제조업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움. 무엇보다 수출길이 막힘. 네덜란드가 1차 석유파동후에 경험했듯 경제성장이 멈추는 것이다. 러시아의 안정화 기금은 네덜란드 병을 앓지 않기 위한 방책이었던 셈. 이렇듯 경제는 7% 성장했지만, 인플레는 여전히 억누르지 못한 채였다. 석유와 천연가스 수익이 발생하자 루블화 가치가 상승. 이 시기에 러시아는 유럽 최대 천연가스 공급자였다. 지금도 러시아의 거대한 파이프라인이 독, 프, 이, 네, 벨을 돌며 대량의 천연가스를 수송함. 러시아의 석유 역시 전 세계로 팔려나감. 러시아는 OPEC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사우디에 이어 세계2위의 석유 산출국으로 1일 생산량이 400~600만 배럴에 달함. 하지만, 세계 최대 천연가스 매장량을 자랑하면서도 그 윤택한 자원을 자금삼아 지속적인 석유생산을 위한 사업에 충분히 투자하지 않는다는 점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 석유를 채굴하고 유전을 유지하려면 계속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해야 마땅한데 다른 분야에 자금을 써버린 탓에 정작 큰 성장이 예기되는 분야에는 자금이 제대로 투입되지 않고 있다.
- 통합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이유는 다름 아니라 각 나라가 유럽의 평화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1870년대에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일에 유럽인들은 이력이 난 상태혔다. 그래서 떠올린 아이디어가 경제통합이었다. 단일 경제권을 형성하면 인근 국가를 공격하는 행위는 결국 자국을 도탄에 빠지는 일이므로 두번 다시 서로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일본, 미국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규제를 완화하고 민영화를 실시해 대규모 경제권을 구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축소였다. 유럽에는 더없이 세련된 사회보장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그로 말미암은 재정부담도 너무나 컸다. 복지증대가 쾌적한 환경을 보장해준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지만, 복지비용으로 투입되는 자금이 워낙 방대해서 일본이나 미국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턱없이 부족. 유럽통합을 통해 경쟁의 장으로 스스로 나아가고 사회보장 비용을 조금이나마 긴축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알다시피 대부분 유럽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유럽이 통합되면서 한 나라만의 민주주의가 아닌 브뤼셀을 중심을 한 더욱 큰 공동체 정치로 전환됨. 사실 그런 공동체 정치에 쉽사리 참여하지 못한 나라도 있었다. 특히 영국은 대처 정권하에서 개혁을 단행했는데 EU통합 때문에 한창 진행중인 개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영국은 금융규제완화가 가장 진척된 나라로, 자국의 개혁을 포기하고 프랑스나 독일처럼 된다면 국력이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던 것 같다.
- 80년대 초에 달러가치는 무려 63% 상승. 미국 연준 이사회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자 공정금리를 대폭 인상했기 때문. 금리인상을 통해 미국은 외국자본을 대거 유치하고 달러 가치를 높였다. 85년 가을, 뉴욕 플라자 호텔에 G5의 재무장관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파운드, 마르크, 프랑, 엔화의 가치에 비해 달러가치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통화조정을 단행했다. 그로부터 4~5년 동안 달러가치는 50~60% 하락했고 독일 마르크화와 엔화가치는 서서히 상승.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은 고통을 겪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경제의 주축 하나가 수출산업이었기 때문. 엔화가치가 50%나 상승했으니 수출산업이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한 예로 도요타는 미국 시장에서 기존 매출대비 50%나 더 벌어 들어야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판매가격을 인삭하거나 더 많은 자동차를 팔아야 했는데, 제아무리 도요타 자동차의 성능이 뛰어날지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임무였다. 그러자 일본 산업계는 일제히 구조조정에 착수. 가장 먼저 비용절감에 메스를 댔다. 서구기업들은 인력을 쉽게 고용하고 해고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은 고도성장기 이전부터 종신고용제라는 일종의 전통을 지켜왔기에 구조조정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판매가격을 낮춰 이익을 삭감. 그러자 84년과 85년에 7~8%였던 이익률이 1~2%까지 뚝 떨어졌다. 일본기업은 대부분 자금을 융자를 통해 조달하는데다 계열그룹을 유효하게 활용했으므로 이익률 하락에 대한 주주들의 반발은 크지 않았다. 주식시장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는 미국이나 유럽기업들은 자기자본이익률을 반드시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만 일본 기업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익삭감 정도로는 초유의 엔화강세에 충분히 대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놓은 다음 처방전이 신규투자였다. 다른 선진국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강경책이었다 기존의 공장설비를 부수고 생산성이 높은 최신설비를 도입했으며, 국외로 생산거점을 옮겨 미국, 유럽, 아시아에 공장을 건설했다. 일본은행은 금리를 5%에서 2.5%까지 단계적으로 낮추며 투자를 촉진. 그러자 수출이 다시 증가했고 일본경제는 엔화강세라는 장벽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연 5.1%의 성장을 이룸. 당연히 일본인들은 예전보다 부유해졌다. 그렇게 어렵사리 모은 자금을 일본은 어디에 사용했을까? 자금이 흘러들어간 곳은 지금까지 그토록 멀리해 왔던 주식시장이었다.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몰리자 9000대였던 닛케이 평균주가는 90년 39000 수준으로 상승. 아울러 미국과 동남아 등 해외 시장에도 직접 투자 형태로 자금을 투입. 은행은 민간 투자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융자에 착수. 국내기업분 아니라 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에도 돈을 빌려줌. 한편, 기업과 개인은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 일본은 인구가 많고 토지가 좁았기에 부동산 가격이 금세 뛰어오름. 물론 투기가 목적이었다. 은행은 융자를 마구 해주었고 토지와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렇게 일본은 거품경제에 접어들었다.
-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경제는 순항했다. 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인플레이션이 억제된 반면에 생산성은 높았기 때문에 높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시기는 70년대다. 60년대 중반에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라는 이름의 대규모 사회보장제도를 발표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빈곤층에도 경제발전의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건강보험과 퇴직자 연금정책을 시행했다가 재정이 적자를 기록했기 때문. 린든존슨의 위대한 사회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재정지출이었으니 비록 적자가 났을 지라도 높이 평가할 만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사회를 문제의 발단으로 지목한 이유는 따로 있다. 위대한 사회가 베트남전에 들어가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자금원이기도 했기 때문. 모두 알다시피 베트남 전쟁의 대가는 무시무시했고 미국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이렇듯 위대한 사회라는 사회보장 프로그램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세수입의 균형이 무너지자 미국경제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 60년대 후반부터는 인플레이션율이 조금씩 상승했다. 69년과 71년에는 실업률이 상승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처음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을 경험. 과거에는 두가지 현상이 따로 일어났지만, 당시에는 두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스태그플레이션에 대처하려 애썼지만, 오히려 심각한 불경기에 나라를 빠뜨리고 말았다. 카터 역시 70년대 후반에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미국은 계속해서 물가상승, 재정적자, 환율상승의 삼중고에 시달렸다. 결국, 80년에 미국의 성장률은 -3%로 대폭하락했다. 흔히 말하는 카터 불경기다. 미국은 물밀듯 들어오는 일본제품에 고전했고 사람들은 하나둘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률이 상승했고 물가도 끊임없이 올랐다. 80년에는 물가상승률이 10%에 달했고 소비자 물가지수는 12% 상승. 역대 최고 수준의 인플레이션이었다. 무역적자도 대폭 늘어났다. 13~17년까지 미국 무역수지는 흑자를 기록했지만 80년대에 들어서자 280억불의 적자를 기록. 대부분은 일본을 상대로 한 기록적 무역적자였다. 그러자 미국은 보호주의적인 규제와 관세정책으로 일본을 강력하게 압박. 79년과 80년에는 생산성도 감소. 노동자 1명의 생산량은 하락했음에도 조합 노동자에 지급되는 비용은 연 10%의 급격한 상승률을 기록하며 미국경제의 목을 옥죄었다. 또한 미국정부는 금융, 에너지, 공익사업, 교통 등 많은 분야를 규제했었으니 해당산업의 효율이 좋을리 만무했다. 카터는 생산성 강화를 위해 다양한 규제완화책을 발표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79년 카터가 임명한 폴 볼커 의장은 금리를 19%까지 인상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했지만, 이듬해인 80년에 금리인상 방침을 단념한다. 카터의 재선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려는 심산이었지만, 그 정도로 국민의 환심을 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재정적자는 2.4%에 달했고, 경기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으며, 당연히 달러가치도 하락. 카터가 무슨 수를 써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국국민은 80년 11월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선출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폐의 몰락  (0) 2015.11.20
국가는 잘 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0) 2015.05.22
오래된 질문 새로운 답변  (0) 2015.05.15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0) 2015.05.15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0) 2015.05.03
Posted by dalai
,

 


오래된 질문 새로운 답변

저자
조계완 지음
출판사
앨피 | 2014-12-1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인문학적 안목으로 직조한 수준 높은 정치경제학 교양서 근대 이후...
가격비교

 

- 존 롤스는 '정의론'(1971)에서 존 데이비드 마봇의 논의를 빌려 "계획을 짠다는 것은 시간표를 만드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논리적 숙고과정을 보임. "우리는 우리의 행위들은 시간상에 계열화함으로써 각 행위가 일정한 시간동안 수행되도록 조직하고자 한다. ... 행동에 대응하는 욕구의 강도에 따라서, 그리고 그것이 다른 목적 달성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서 그 행동들에 대해 시간과 정력이라는 기본적 자원이 할당된다. 숙고를 하는 목적은 ... 우리의 목적과 관심들이 하나의 행위 체계로 효과적으로 결합될 수 있게 하는 계획을 발견하는 데 있다. 다른 목적들과 충돌하는 경향이 있거나 다른 행위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욕구는 제거되며, 그 자체로서 바람직할 뿐 아니라 다른 목적까지도 지지해주는 것들은 장려된다. 그래서 계획은 하나의 계층체계로 적절하게 배열된 하위 계획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계획들은 서로 보완해주는 보다 항구적인 목적과 관심들을 고려한다."
-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를 쓴 그레고리 클라크는 경제학자들의 대량실직 사태를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음. "경제학자들의 노력의 결과물이 인류의 물질생활 운명을 예측하는 데 그다지 큰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에 대한 수요급증 등으로 경제학자들의 몸값이 한없이 치솟았다는 사실 또한 신이 인간에게 던져놓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신은 경제학자들을 골탕먹이고 이들의 노력을 비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경제원리를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함. 과학과 같은 다른 학문영역에서는 지난 400여년 동안 관련 지식이 꾸준히 축적되어 왔음. 초창기에 수립된 이론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음. 그러나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명된 초기이론들마저 새로 대체된 이론 속에 포함되었고, 이론의 수립과 대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더 많은 지식이 축적되어 결국 더 광범위한 조건 아래에서도 결과를 예측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경제부문은 그렇지 못하다. 경제 세계를 기술하고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1800년에 절정을 이루었을 뿐, 그 이후로는 한마디로 갈팡질팡, 무엇 하나 확실하게 규명하고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레고리 클라크는 "산업혁명 이후 국가 혹은 지역에 따라 소득격차가 더욱 심하게 벌어진 원인을 설명하고자 수립된 수많은 수리적 경제모형들은, 부와 소득의 차이를 예측하는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면서 "맬서스의 인구론 모형은 각 사회간 생활수준 차이의 근원을 깔끔하게 분석하는 데 성공"했으나, 경제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은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의 원시 수렵채집사회에서부터 1800년경까지 뿐이라고 말한다.
- 케인스는 우리의 적극적인 활동의 대부부은, 그것이 도덕적인 것이든 쾌락주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엄밀한 수학적 기대치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생적인 낙관에 의존하며, 그러한 인간성의 특징에서 비롯되는 불안정성이 존재한다고 갈파. 우리에게는 수학적 기대치를 계산할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 "장래의 긴 세월에 걸쳐 완전한 결과가 나오는 어떤 적극적인 일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 결의의 대부분은, 추측컨대 오직 야성적 혈기의 결과로 이루어질 뿐 수량적 이익에 수량적 확률을 곱하여 얻은 가중평균의 소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 그 설립취지서의 서술이 아무리 솔직하고 진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동기를 부여받는 일은 없고 그저 그런척 할 뿐이다. 기업의 투자는 장래 이익의 정확한 계산을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남극탐험과 별다르지 않다. ... 투자의 장래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투자가 그 자생적 활동에 크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신경과민증이나 히스테리 또는 심지어 소화상태나 날씨에 대한 반응 같은 것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 타고난 활동에 대한 충동이며, 우리의 합리적 자아는 가능한 경우에는 계산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동기를 기분이나 감정 또는 요행에 맡기면서 여러가지 선택의 대상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 (케인스) 이른바 동물적 충동이 경제를 이끌어 가는 힘이라는 유명한 말이 이 대목에 나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근대적 전통인 이성적이고 엄밀한 논증의 세계보다는, 소설 작품에서 흔히 보게 되는 까닭모를, 근거없는 어떤 감정의 묘사와 흡사하다. 우리는 여기서 출발지점은 같은 데도 이상하게 다르게 들리는 메아리를 듣게 된다. 인간 이성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정부는 사회를 통제하는 계획과 경제정책을 펼 게 아니라 규제를 풀고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자의 음성이 그 하나이고, 인간 이성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정확한 계산의 수리적 기초가 우리에게는 없다. 야성적 충동에 따라야 한다는 케인스의 음성이 다른 하나이다.
-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레베카 블랭크는 여러 도전에도 불구하고 인간행동의 합리적 선택을 강조하는 주류 경제학 표준모형은 놀랄 정도로 지속되어 왔으며, 그럴만한 충분한 장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첫째, 표준화되고 널리 수용되는 분석도구로서 주류 경제모형은 멋진 것이다. 둘째, 경제적 인센티브가 전적으로 행동을 결정한다고 믿을 필요는 없으나, 심지어 선택이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최상의 안을 선택한다고 분석하는 것이 여전히 유용하며 강력한 예측능력을 갖는다. 경제적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것은, 일관성 있고 단순하면서도 상당히 신뢰성 있는 최상의 모형이다. 셋째, 너무 많은 경제학자들이 우아한 수학으로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에만 집착해온 까닭에, 흥미로운 경제학이 수학적 엄격함에 의해 제한되었지만 다루기 쉬운 수리적 형태로 직접 옮겨질 수 있다는 용이성 또한 있다." 그러나 블랭크는 표준적 경제모형의 문제점 역시 빼놓지 않고 지적한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경우 개인들이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선택으로 특징짓는다는 데 있다. 경제적 행동에 관한 전형적 이야기는 능력있는 개인을 묘사한다. 선택하고, 정보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더 나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의식적이고 합리적으로 계획하는 인간이다. 이러한 기본모형에는 어떤 개인도 지배받거나 억압받거나 수동적이거나 꼼짝 못하거나 아프거나 자기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혹은 대안을 깨닫지 못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민주적이고 산업화된 서구 사회 중산층 백인으로 상정된 대표적 경제적 개인은 아마 상당히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능력있고 통제된 서구화된 개인에서 멀어질수록 이 모형은 개인행동 패러다임으로서 매력을 잃게 된다. 지극히 가난한 도시빈민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학대받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다루는 사회사업가들은, 이런 모형이 그들 고객의 행동패턴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런 모형이 가정하는 선택에 기초한 행동이 어떤 상황보다는 그와 또 다른 어떤 상황에서 더 지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사실과 효용으로 대표되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개별 경제주체의 이익의 총합이 곧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구성된다고 주장. 그러나 여기엔 흔히 구성의 모순이 발생한다. 폴 새뮤얼슨은 경제학 첫장에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원리가 구성의 모순이라고 말한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원칙이 구성이라며, 사회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넷 이외에 다른 숫자가 된다는 것이 모순이다.
- 14세기 아랍 지리학자 이븐 바투타는 지금의 러시아 볼가강 유역을 따라 이루어진 장거리 무역을 다음과 같이 묘사. "여행자들은 각자 가져온 물건을 내려놓고, ... 야영지로 되돌아간다. 다음날 그곳에서 자신이 전날 내려놓은 물건들 앞에 모피더미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이들이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모피와 교환하는데 만족하면 물건은 그대로 두고 모피를 가져가면 되고, 교환조건에 만족하지 않으면 물건과 모피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 마을 주민이 여전히 교환을 원하면 그 물건 앞에 좀 더 많은 모피를 얹어 높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놓아 둔 모피를 거두어 간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상거래를 한다. 거래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상대방이 사람인지 유령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상대방을 한번도 보지 않은 채 거래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도 기원전 5세기 즈음 카르타고인과 리비아인 사이에 이뤄진 이와 유사한 방식의 교환을 묘사하면서 이를 고요한 거래라 불렀다.
- 그동안 국내의 경제민주화 논쟁 역시 시장교환 영역에서 자본 사이(대자본과 중소자본)의 민주화, 독점과 집중에서 더 많은 유효경쟁으로의 이행을 강조하는 공정한 시장질서 민주화, 소수 거대 자본가와 다수 소액주주 자본가들 사이의 분배민주화 차원에서 일어나고 이해되었다. 생산영역 민주화에 주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의 핵심은 생산이다. 기업(자본)의 생산관계와 생산과정의 민주화 및 통제가 경제민주화의 요체다. 이는 곧 노동 문제를 핵심으로 한다. 단지 분배 교환과정 측면에서의 시장질서와 공정성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한국의 생산영역에서 노동과 자본의 생산함수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그 함수의 수식방정식은 어떤 모습인지, 생산함수 중 노동변수의 형태(정규/비정규)가 생산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작업장의 생산영역을 바꾸는 산업민주주의를 핵심기치로 내거는 경제민주화 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함. 사실 생산과정을 배제한 경제분석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유치원에서 또는 주연배우인 자본가가 없는 상황에서 관찰"하는 격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서 주류 경제학자 집단에 속하는 로널드 코스는 "경제학자들로부터 경제학을 구하자"고 외쳤다. 그의 나이 102세 때이다. "칠판 앞을 떠나 사회를 직시하라"는 늙은 거인이 경제학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였다. "20세기에 경제학은 비로소 하나의 분과 영역을 확고히 구축했다. 경제학자들은 '자신들만 읽는' 독점적인 논문과 글을 쓸 경제학 역량을 공유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점차 추상적, 이론적 접근에 기울고 현실경제의 실질적 문제는 포기하는 쪽으로 전환되었다. 오늘날 실제 상품의 생산과정은 경제학에서 주변화되었다. 패러다임 질문은 자원배분에서 정태적 분석에 그친다. 경제학자들이 비즈니스 기업분석에 사용하는 도구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사변적이어서 기업가정신이나 경영자에게 새로운 생산물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싼 비용에 제공하려는 매일의 노력에 대해 어떤 지침을 주기 어렵다."
- 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은 팡글로스 박사의 경제학, 곧 지금상태가 모두에게 최선이라는 낙관주의를 바탕으로 갈등과 대립이 없는 조화로운 경제세계를 주창함. 진보를 주창하는 세력이 사회경제의 원천적 대립과 갈등을 그 사유기반으로(더 정확히는 근본모순으로) 삼는다면, 보수적 사유에서는 갈등없이 조화롭고 모든 사람의 공공이익이 증진되는 공리주의의 평화와 조화가 강조됨. "유난히 조화와 화해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그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란 말이 있다. 자신이 취득한 기득권이 정당성과 거리가 있고, 타인의 고통과 희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일수록 유독, 어떤 때에는 필사적으로 조화와 화해를 부르짖고 강요한다는 이야기. 주류 경제학에서 주창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도 그러한 것은 아닐까?
- 부의 분배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순전히 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불평등의 역사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행위자들이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부당한지에 대해 형성한 표상들, 이 행위자들 사이의 역학관계,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집합적 선택들에 의존한다. 불평등의 역사는 관련되는 모든 행위자가 함께 만든 합작품이다. 부의 분배의 동학이 수렴과 양극화가 번갈에 나타나도록 하는 강력한 메커니즘을 가동시킨다는 것, 그리고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힘이 지속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막는 자연적이고 자생적인 과정은 없다는 것이다. (피케티) 불평등을 약화시키고 평등으로 수렴하도록 만드는 시장의 자기조정 메카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과거 어느때보다 더 극심한 불평등의 신세계일수도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극단적인 소득의 불평등이 지속가능하지 아닌지는 이를 억제하는 장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뿐만 아니라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얼마나 효과적인지에도 달려 있다. 아마도 후자가 주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령 불평등이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혹은 효율적으로 일하기로 한 선택의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거나, 혹은 부자들이 더 많이 벌지 못하도록 막으면 사회의 가장 궁핍한 구성원들에게 불가피하게 해를 끼칠수도 있다는 이유로 불평등이 정당화될 경우, 소득의 집중이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수도 있다."
- 하이에크는 자유사회를 유지시킬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원리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칙의 집행을 제외한 모든 강제의 엄격한 금지라는 신념을 평생동안 고수. 이런 신념아래, 모든 법률아래서 자유의 원리에 반하여 노동조합이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된 강제는, 주로 동료 노동자들에 의한 강제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강조. 그는 노동조합이 고용주에게 행사할 수 있는 진정한 강제력은, 다른 노동자들을 강제할 수 있는 일차적 권력의 결과라며, 만약 노동조합이 원하지 않는 지지를 강요할 권력을 상실한다면, 고용주에 대한 강제력 행사는 그 힘을 상실할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여 집단행동을 지지하도록 강제함으로써만 소유자를 착취하고 기업의 거의 모든 수익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그러한 집단적 행동으로부터 나온 총이득이, 고용된 노동자든 아니든 간에 공평하게 분배되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이득이 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노동자들은 공급을 제한함으로써, 즉 노동의 일부를 배제시킴으로써만 자유시장의 임금수준 이상으로 실질임금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높은 임금으로 고용될 수 있는 사람들의 이득은 결과적으로 저임금 직종에 고용된 사람들, 또는 실업자들의 이해와 항상 대립하게 된다. 하이에크는 노동조합이 장기적으로 모든 노동자들이 획득할 수 있는 실질임금수준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실상 그것을 상승시키기보다는 하락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 그 주요 원인은, 지배적인 완전고용 교리가 명시적으로 실업에 대한 모든 책임을 노동조합에 떠넘기는 대신에, 완전고용을 유지시킬 의무를 화폐당국 및 재정당국에 부과하는 데 있다. 실업양산을 막기 위해 화폐당국 및 재정당국이 취할 유일한 방법은, 노동조합이 야기하는 실질임금의 초과상승에 대해 인플레이션으로 대응하는 것뿐이다.
- 밀턴 프리드먼이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은 통렬한 듯 하지만 뭔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가난한 농부를 도와야 하는 이유는 충분히 있다. 그것은 그가 농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그 정책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도록 고안되어야지 특정 직업에 속하기 때문이라든지, 특정 연령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라든지, 특정 임금수준 집단에 속하기 때문이라든지, 특정 노동조직에 속하기 때문이라든지, 특정 산업에 속하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이 점이 바로 농산물 가격정책, 일반 노인정책, 최저임금법, 노동조합법, 관세제도 등 수많은 정책들이 갖는 결점이다." 프리드먼은 강력한 노조가 그 조합원들을 위해 확보하는 이익은, 기본적으로 다른 노동자들의 희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 해당 조합원의 임금인상이 생산비용 증가로 이어져 기업의 이윤을 줄이게 되고, 그에 따른 투자감소로 좀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실업 노동자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을 줄어들게 만든다는 논리다. '집단, 세력, 조직, 사회, 관계'에 대한 불신과 거부, 그리고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과 행동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옹호한 자유주의 사상의 거인들 목록은 얼마든지 더 작성할 수 있음. 미제스의 저자 머리 로스바드는 자유사회에서는 공갈조차도 불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갈은 상대방에 대한 어떤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서비스의 대가로 돈을 받는 행위이며, 사람이나 그 재산에 대한 폭력이나 폭력의 위협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경제학의 주체는 오랫동안 윤리학의 한 분야로 여겨졌따. 아마르티아 센이 87년 쓴 책에 따르면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서는 꽤 최근까지도 경제학을 도덕철학 우등졸업시험의 한 분야로 가르쳤다고 함. 애덤 스미스는 애초에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자였고, 케인스는 38년 해로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오넬 로빈스가 말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경제학은 본질적으로 윤리학이며, 자연과학이 아니다. 경제학은 내적 성찰과 가치판단을 요구한다."고 적었다.
- 우리가 오늘날 제3세계라고 부르는 지역을 삼켜버린 1876년과 1899년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초대형 한발과 기근사태를 세밀하게 추적한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에서 마이크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제는 가난한 농민 수천만명이 끔찍하게 죽었다는 게 아니라, 19세기 경제사에 대한 전통적 지식가 상당히 모순되는 이유와 방식으로 그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50년 동안 서유럽에서는 평화시 기근이 항구적으로 사라졌다. 그런데도 상당수 식민지에서는 기근이 충격적일정도로 증가했다.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운송수단과 근대적 곡물시장이 생명을 구해주는 좋은 일을 했다는 산뜻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바로 그때 특히 영국령 인도에서 수백만명이 철로 옆과 곡물저장소 앞에서 죽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옴짝달싹 못하던 기근의 나라들을 살펴보는 게 아니다. 근대 세계체제의 외부가 아니라 바로 그 근대 세계의 경제와 정치구조에 강제로 통합당하는 과정에서 수백만명이 죽었다. 그들은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에 죽었다. 앞으로 보겠지만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애덤스미스와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의 신성한 원리를 엄숙하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데이비스는 여기서 제국주의를 지목하고 있음. 데이비스에 따르면, 이 빅토리아 시대의 대기근 사태가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역사를 구성하는 필수요소(즉, 제국주의적 수탈)였음을 명확하게 인식한 20세기 경제사학자는 44년 거대한 전환을 펴낸 칼 폴라니뿐이었다. 폴라니는 그 마지막 50년 동안 기근이 발생한 실제 원인은 지역의 소득 붕괴와 결합한 곡물의 자유시장 제도였다고 썼다. "문제는 엄청나게 치솟아 버린 가격 때문에 사람들이 곡물을 살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자유롭지만 불완전하게 조직된 시장에서는 물량이 부족할 경우 가격이 치솟기 마련이다. 이전 시대에는 지역마다 있는 소규모 가게들이 흉작에 대처하는 방편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런 가게들은 이제 사라졌거나 대규모 시장으로 흡수되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체계 아래서 인도인 수백만명이 죽었다."
- 전구를 갈아끼우는 데 몇 명의 경제학자가 필요할까요?
* 주류 경제학자 : 두명이 필요합니다. 한명은 사다리의 존재를 가정해야 하고, 다른 한명은 전구를 갈아야 하니까요
* 케인스 학파 : 몽땅 다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고용과 소비를 창출해야 하고 총수요곡선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켜야 하니까요.
* 통화주의자 : 아무도 필요없습니다. 필요하다면 보이지 않는 손이 고장난 전구의 불균형 상태를 고치게 될 테니까요
* 마르크스 경제학자 : 아무도 필요없습니다. 전구는 그 내부에 혁명의 맹아를 품고 있으니까요
- 허시먼의 이른바 터널효과는 경제성장과 분배 불평등 문제를 2차선 일방통행의 터널에 비유해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경제성장 초기에는 터널 속 두차선 중 한쪽 차선이 움직이면 다른 차선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본인의 차선이 곧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된다. 즉, 경제성장의 혜택을 남들이 얻더라도 그 혜택이 곧 본인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소득 불평등을 어느정도 수용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옆 차선만 움직이고 자기 차선은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좌절감으로 불만이 쌓이게 되고 터널안에서 차량 소통을 규제하는 교통공무원을 불신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터널 안에선 규칙에 대한 무시가 판치고 불안과 혼잡이 더해지며 정체는 더욱 심해진다. 허시먼의 터널 안에서 일어나는 소요는 경쟁과 평등의 문제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 미국인에게 평등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유럽인과 전적으로 다르다. 유럽인이 평등을 주장할 때에는, 모든 인간은 부 권력 내지 부러움의 수준에서 동일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기회의 평등에 역점을 두고 있으므로 이상과 같은 읨로 평등을 인식하는 일은 없었다. 평등의 본질로서 무한한 자유의 위도를 강조하는 것은, 평등을 이론적 상황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서 자유의 강조를 포함하고 있었다. 각 개인의 기회균등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조는, 사실상 미국인으로 하여금 소득과 부의 극심한 불평등 상황에 대해 비교적 무감각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강조가 자국을 계급없는 사외호 여긴 미국인들이 정치적 및 그 이외의 수단을 통해 경제 체계내의 불평등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을 저해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포함된 가장 본질적 요소로서 타인의 노동력의 기업적 활용과 생산수단의 소유를 통해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것, 즉 한마디로 노동을 일종의 봉사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든다면, 자본주의 시대는 14세기 및 15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장기지속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주장.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못되지만 하나의 발전을 마감하는 마지막 단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을 통해서 나는 잠재적인 자본주의는 역사의 첫 새벽부터 윤곽이 잡혔으며 수세기 동안 발전하고 지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를 예고하는 표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찾아볼 수 있었다. 도시와 교환의 급증, 노동시장의 등장, 사회의 밀도, 화폐의 보급, 생산의 증대, 원거리 시장 혹은 달리 말하면 국제시장, ... 기원 후 1세기에 인도가 원격지의 말레이 군도를 지배 혹은 적어도 그곳으로 침투했을 때, 로마가 지중해 세계 전역을 힘으로 장악했을 때, 9세기에 중국이 지폐를 발명했을 때, 11~13세기 사이에 서유럽이 지중해를 회복했을 때, 16세기에 세계시장이 형성되었을 때, 자본의 전기는 그럭저걱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지속이란 반복적인 움직임의 연속을 말한다. 거기에는 많은 변형과 복귀, 쇠퇴와 정비, 정체 등이 동반된다. 오히려 변화를 통해 자신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자본주의의 자연스런 속성이 아니겠는가? 자본주의는 이런 변화들로부터 힘을 얻어내는 가운데,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시대에서든지 경제적 가능성의 겨예를 짓는 일종의 포락선 수준으로 그 자신의 운명의 폭을 축소시키기도 하고 확대시키기도 한다.
- 조반니 아리기는 장기 20세기에서 장기지속되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핵심특징은, 상이한 공간과 시간속에서 자본이 취한 구체적 형태의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유연성과 절충주의라고 말했다. "이 점이 자본주의 전체사에서 핵심적인 성질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시련이 있을 때마다 드러나는 유연성, 변환과 적응의 능력이 그것이다. 13세기 이탈리아로부터 오늘날의 서양세계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에 일정한 통일성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페르낭 브로델) 인류 역사의 사회경제사를 그 누구보다 탁월하게 분석, 묘사한 하우저는 자본주의의 시작이 15세기 르네상스기였음을 시사한다. "르네상스 겨제의 새로운 점은, 한층 더 목적에 부합하는 더 나은 생산방법이 알려지는 즉시 재래적인 생산방법을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재래의 전통까지도 주저없이 희생시키는 그 철저함과 일체의 경제생활의 요인을 수적으로 계량화해서 장부에 기입하는 비정할 정도의 객관성에 있다. 이 비정한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은 노동자를 단순히 투자와 수익성, 이익가능성과 손실가능성, 그리고 차변과 대변이라는 복잡한 체계속의 일부분으로 생각한다.
- 사실 우리에게는 발전의 빠르고 늦음을 가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판단근거가 없다. 쿠즈네츠는 지구에서 경제성장은 세계 인구의 1%보다 약간 많은 인구를 가진 국가에서 시작되었으며, 175년 동안 확대되어 세계인구의 20~25%의 인구를 차지하는 나라들의 경제를 변형시켰다면서 "그 파급속도는 과연 빠른 것일까 느린 것일까? 우리는 이 속도를 판단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산업혁명 당시의 놀라운 사회적 급변에 대해 토크빌은 어리둥절해하며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처럼 더러운 하수구로부터 인간근면의 가장 커다란 흐름이 흘러나와서 온 세상을 기름지게 한다. 이 더러운 하수구로부터 순금이 흘러나온다. 여기서 인류는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야만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문명은 기적을 행하고 문명인은 거의 야만인으로 변하게 된다."
- 여러 형태의 다양한 자본주의가 지구상에 공존하는 구조는 13세기, 17세기, 18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하는 경제사학자가 바로 페르낭 브로델이다. 그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식으로 단계별 발전 혹은 연속적 도약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하고 말함. 그에 따르면 상업, 산업, 은행업이 부채꼴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 즉 여러 형태의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모습은 13세기 피렌체, 17세기 암스테르담, 18세기 이전의 런던 등지에서 이미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19세기 초가 되면 기계류의 사용으로 산업이 고수익 영역이 되었고 이 영역에 자본주의가 대규모로 집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반드시 이 영역에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선택의 자류를 갖고 있으며, 어느 순간에라도 방향을 선회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활력의 비밀이다. 물론 적응능력, 민활성, 반복적인 힘 등을 갖고 있더라도 자본주의가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커다란 위기가 닥치면 많은 자본가들이 몰락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다른 자본가들은 살아남고, 이를 이용해서 제자리를 잡는 자본가들도 있다. 모든 것이 바뀌지만 그러는 가운데 자본주의는 계속 이어진다. "위기는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이며 인플레이션, 실업 등은 자본주의의 중앙화 및 집중화를 강화한다. 이것은 발전의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지 결코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가 아니다." (마르크제가 60년대에 한 말)
- 법률가들은 거대기업의 부호들에게 생각할수 있는 한의 모든 보호색을 입혀서 본질적으로 무책임한 성격의 존재로 만들어 그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위장시켜 줌. 또한 전문적 홍보 담당자는 대부호가 순진하고도 착한 행동을 하는 시골소년과 같은 존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혹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수완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반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위대한 발명자이자 산업정치가라는 이미지를 일반인들에게 주입시켰다. 변한 것은 대부호들이 예전처럼 쉽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폭로시대의 기록자들은 미국 사회의 최정점에 있는 자들의 실태를 널리 일반인에게 알려 주었따. 그러나 그 이후로는 그런 폭로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따. 체계있는 정보가 결여되어 있고 인간적인 흥미를 일으키는 말초적 사건에 우리의 관심이 너무 끌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서는 이미 대부호 같은 존재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거나 혹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밀스, 1979)  라이트 밀스는 대부호에 대해, 한편으로는 도둑, 다른 한편으로는 혁신자라는 두가지 대조적 이미지를 갖는 것이 반드시 모순된 것만은 아니며, 많은 점에서 두가지 모두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일깨운다. 관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대기업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변화한 것을 더듬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대기업가의 사상이 출판물에 나타나기 시작하자 학술잡지나 서적의 논문도 저널리즘의 폭로기사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30년대에는 대기업가에게 도둑놈같은 남작이라는 불명예스런 명칭이 붙여졌으며 대기업체라는 것도 불명예의 비참한 길을 더듬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 대기업은 학자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어 자기 회사의 역사책을 편찬하도록 하고 있다. 각 기업체의 역사책에서는 무뢰한 같은 기업사상이 건설적인 경제계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그 영웅들의 위대한 사업으로 이 세상 만인이 이익을 얻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 대부호에 대한 이같은 조잡한 이미지는 가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이미지가 나타내는 것 자체가 틀려서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사물을 합법성 내지 도덕성 그리고 인격이라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들처럼 많은 재산을 지닌 괴물들이 그 시대와 그 장소에서 어떠한 경제적 기능을 달성하느냐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따. 바로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재산이 많은 이 괴물들은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통해서 소용돌이쳤던 부단한 혁신의 질풍노도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개인적 영민함과 남다른 노력으로 새로운 기술 내지 비용효율적 기술을 자기 속에 체현시켜 사기업을 만들어냈고, 마침내 거대한 연합체를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기술과 그 기술이 동반했던 사회형태야말로 자본주의 진보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 앨프레드 챈들러가 경영자 혁명이라고 말한, 회사 고위간부 전문경영자들의 정신세계 풍경은 어떨까? 포춘지 54년 5월호에는 '경영자들은 왜 책을 읽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최고 간부들 대부분은 희곡이라든가 고전문학, 철학서, 시와 같은 것은 거의 읽지 않는다. 이러한 영역에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자연히 외경과 불신이 혼합된 동료들의 시선을 받게 되며, 경영자 무리의 웃음거리가 된다" 우리가 모르는 것, 빈껍데기 전문가, 헛똑똑이를 내세워 삶의 불확실성과 블랙스완을 주창한 나심 탈레브는 말한다. "내가 세계 역사상 최강 국가의 손꼽히는 비즈니스 스쿨에서 본 바에 따르면, 세계 최강기업의 경영진들이 그곳에 와서 자신들이 돈벌이한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데 그 사람들 역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할 가능성이 짙어 보였다. 그때 나는 회사의 경영자라는 사람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할 가능성이 짙어 보였다. 그때 나는 회사의 경영자라는 사람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유시장 체제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트 밀스는 파워엘리트에서 50년대 거대기업 경영자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 "회사 간부들의 교제범위를 보면 예술이라든가 문학을 애호하는 사람들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 가운데는 한 페이지 이상쯤 되는 보고서나 편지같은 것도 손수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장에 대한 혐오는 특수한 예외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긴 연설은 대단히 싫어한다. 그들은 정말로 간소화된 시대, 요약본이나 두서너줄의 메모지를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보고서 같은 것도 다른 사람에게 읽히고 자신은 요약된 것만 청취한다. 그들은 독자라던가 필자이기보다는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듣는 사람이다. 그들의 지식 대부분은 의회라든가 다른 분야의 친구들에게서 얻어듣는 것들이다."
- 보울스는 작업장에서 생산제품 한 단위당 노동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고용주들이 취하는 전략으로는 임금을 가능한한 적게 지불하고 관리자나 작업반장을 통해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어르고 달래는 단순통제, 현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현장감독관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기계를 도입하고 기계의 속도를 변화시켜 노동력 지출강도를 높이는 기술적 통제가 있다고 말한다. 또 한가지 전략으로 관료적 통제가 있다. 관료적으로 조직된 기업에서 특정한 직책과 직무를 사다리 형태로 아래에서 위까지 서열화해 각 체계마다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하는 당근을 주는 동시에, 정교하게 고안된 인센티브 구조위에서 세세한 작업규율과 절차를 명시하는 것이다. 관료적 통제에서 진정한 권력의 원천은 기업의 조직적 구조 속에 새겨져 있따. 따라서 권력관계는 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조직 시스템 내에 숨겨진 채 작동한다.
- 미국의 거대한 일자리 창출기계는 추세적으로 고임금 일자리는 줄이고 엄청나게 많은 저임금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79년부터 84년 사이에 새로 창출된 일자리의 58%가 연간 소득 7천불 미만의 저임금 일자리였다. 특히 79년 이후 기록적인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졌드나 새로 창출된 8백만개의 일자리 중에서 310만개 이상이, 기존의 노동시장 조건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임금 일자리 외에 추가로 생겨난 저임금 노동이며, 당시 미국을 일자리 창출 기계라고 부른 예찬은 이러한 나쁜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 베넷 해리슨은 노동규율이 저임금 노동확산을 통해 이뤄지는 근원적 요인으로 기업조직 변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94년 펴낸 세계화 시대 대기업의 진화에서 유연성의 시대에 대규모 법인기업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며, 소규모 기업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해리슨은 네트워크 자회사를 통한 아웃소싱 전략으로 본체 회사의 몸집을 줄이고 있는 대규모 법인기업의 날렵하고 민첩한 전략이, 현대 다국적 대규모 법인조직의 장점이라고 지적. 저임금 유연화는 기업조직의 유연화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쉬운 해고와 저임금으로 대표되는 시장 지향적 고용정책이 80년대 이후의 노동규율 방식이라면, 그 이전 고용체제에서의 노동규율은 이와 반대로 고임금과 안정적 고용이라는 내부노동시작의 관료적 형태를 띠었따. 미국 내부노동시장의 형성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샌포드 야코비의 '기업의 관료제 도입'에 따르면, 미국 내부노동시장은 점점 더 많은 기업에서 내부노동시장의 특징을 점차 갖춰 나가며 확대된 것이 아니다.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과정이 아니라, 1차대전과 이후 대공황으로 구체제의 고용관계가 갑작스런 위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고용체제로 채택된 것이다. 기존의 시장지향적이고 자의적이고 비장기적인 고용시스템에서 관료권위적이고 규칙이 지배하고 안정적인 고용체제로 대체됐다. 내부노동시장은 마치 한통의 버터밀크 속에 응고되어 있는 버터덩어리처럼 무의식적인 협력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잇는 의식적 권력의 섬들로 여겨진다.
- 경제학에서는 국내총생산의 규모, 고용량, 연간 노동시간 등 지표의 크기 그 자체보다는 그 방향성, 즉 추세와 변화율을 밝혀내는 것이 항상 더 중요. 숫자 자체보다는 우리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에 대응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말해주는 것이 탐구분석의 목적이기 때문. 동시대 우리의 노동시간은 어떤 추세와 변화속에 있는가? 장시간 노동처럼 실업률 증가도 기본적 경제구조에서 비롯됨. 자본주의 시스템은 본래 고용을 제공할 목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님.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명분 그 자체는 합리적이지만, 이 명분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논리와 타협하기 매우 어렵다. 사용자들은 공장과 기계를 오랫동안 깨어있는 가동상태로 두는 데 강한 인센티브를 가짐. 이 인센티브는 노동시간을 끌어올리고 또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산파역할을 함. 돌아보면 사회개혁가들은 국민경제 내의 일자리 부족과 여가시간 부족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자본주의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이런 인센티브라는 강력한 장애물을 과소평가했다. 물론 반대로 노동자의 처지에서 보면, 장시간 노동은 실질임금 저하에 직면하여 이를 노동시간 연장에 따른 초과수당으로 상쇄하려는 시도이다. 나아가 역설적이게도 과로노동의 원인은 불완전 취업이다. 고용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현재의 과로노동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적인 이유는, 파트타임 불완전 취업 형태로 인해 주당 정규노동시간에 비해 더 적은 노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장시간 노동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
- 일찍이 폴란드 경제학자 미할 칼렌츠키가 '완전고용의 정치적 측면'에서 갈파했듯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완전고용체제는 완전고용이 불가치하게 초래하는 이윤압박 때문에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없다. 완전고용 문제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는 근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 "노동자들은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자본가들은 그들을 훈육하고 싶어한다. 산업의 지휘관들과 경영자는 지속적 완전고용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물론 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을 때는 국가의 재정지출을 통해 탈출을 원하지만 완전고용 유지에는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런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정치적 경기순환은 실제로 현실 미국경제에서 역사적으로 있어 왔다." 케인스 주의적 호황의 지속은 산업예비군의 고갈과 이에 따른 노동규율의 이완을 초래하여 불가피하게 이윤압박을 낳게 되는데, 이는 거꾸로 불황 과정에서 산업예비군의 보충, 즉 실업률 증대방식을 통해서 해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 자체가 완전고용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 외에도 완전고용 달성을 가로막는 정치적 장애물도 있다. 이윤으로 대부분의 소득을 얻는 사람들은 대체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이들 대다수는 이윤을 줄이는 효과가 있는 정책의 도입이나 실행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칼레츠키는 완전고용을 향한 고용증가가 임금상승 압박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좀더 높은 수준의 상품 판매 및 공장설비가동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단위비용을 절감시키고 수익성을 증가시키는 경향도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경제가 완전고용에 접근할수록 임금성장이 가속화될지라도 수익성 또한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날 공산이 있다는 것이다.
- 기존 수요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시장을 창출할 만큼 방대한 양을, 그것도 급속히 감소한 비용으로 생산하는 기계화된 공장제 창출이 가능하려면 두가지 조건이 필요. 첫째, 거기에 드는 비용이 그다지 크지 않고 단순한 기술혁신으로 산출량을 재빨리 증대시킬 수 있는, 제조업자에게 이미 특별한 보수를 가져다 준 산업의 존재. 둘째, 하나의 생산국가에 의해 광범위하게 독점되는 세계시장.  첫째의 산업이 영국의 면방직 산업이었음. 또 영국은 식민지 팽탕을 가능케 한, 경쟁국의 시장을 장악하기에 충분한 경제와 적극적인 국가를 갖고 있었다.
- 자본주의는 잉여를 기업의 소유주들에게 돌아가게 하고, 기업 소유주들은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혁신하고 생산적으로 투자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아짐. 자본주의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을 더 낮은 비용으로 만들어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는 역사상 최초의 경제체제임. 또한 자본주의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잃게 되므로 노동자들에게 열심히 그리고 더 잘 일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 사적 재산권은 보호되어야 하는 반면, 경제적 지위는 보호되지 않아야 한다. 경제적 지위가 보호되지 않는다는 말은, 경쟁에서 패배하면 정말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 따라서 잉여의 통제를 보장하는 재산권과, 시장경쟁으로 인한 지위의 불안정, 이 둘 모두가 혁신과 투자를 촉진한다.
- 슘페터는 '경제분석의 역사'에서 이데올로기 장을 쓰면서 그 옆에 '망상?'이라고 연필로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그는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이고, 우리만이 절대적 진리의 반석 위에 서있다고 말할 수 없다. 노동운동가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누구의 이데올로기보다 더 나은것도 더 나쁜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제학의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역사인가?라고 물은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합리화라고 불리는 사고습성이 우리 자신, 우리의 행위동기, 우리의 친구, 우리의 적, 우리의 조국에 대한 이미지를 제공하므로, 우리 자신게는 안락감을 주고 그것들이 실제상태보다 우리가 추측하는 모습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라고 여기게 한다. 우리들 자신보다 더 성공적인 경쟁자는 우리가 경멸해 마지 않는 속임수를 통해 성공을 거두는 경향이 있다. 추측하건대 우리 집단이 아닌 집단의 리더는 협잡꾼이다. 적국은 괴물들의 소굴이고, 우리의 조국은 완전히 존경받을 만한 영웅들의 고향이다. 이런 특성은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에 분명히 중요하다."
-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특유의 빼어난 묘사를 한껏 발휘하여 혁명적 상황과, 공황, 패닉을 불에 비유한 바 있다. 불은 길들여질 수 있고 꺼진다는 통찰이 인상적임. "파괴의 모든 수단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불이다. 불은 멀리서도 보이고 또 다른 모든 것들을 끌어들인다. 불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후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것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불을 지르는 군중은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불을 지른다고 생각한다. 불길이 사방으로 퍼지는 동안 모든 것은 불길에 합세하게 된다. 그리고 일체의 것은 불길에 의해 깡그리 파괴된다. 불은 군중을 말해주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난 후에는 불은 군중처럼 다시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 불은 번지며, 옮겨붙는 휘발성이 강하고 만족할 줄 모른다. ... 불은 파괴적이다. 그것은 정복될 수도 있고 길들여질 수도 있으며 그리고 꺼진다."
- "두터운 경제원론 교과서의 그 수식과 복잡한 그래프 뒤에 자유시장을 지키기 위한 피 흘리는 전투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미제스의 제자 머리 로스바드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제스가 일생동안 단 한번도 대학에서 월급을 받는 전임자리를 가져보지 못했다는 것은 미국 학계의 씻을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오명이다. ... 그가 뉴욕대에 있던 시절 그를 만난 우리들은 한 번도 그의 입에서 원망이나 후회의 말이 나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온화함과 친절함을 잃지 않으면서 미제스는 학생들에게서 보이는 생산적인 그 어떤 불씨라도 강화해주고 용기를 주느라 열심이었다. 압도당하여 묵묵히 앉아만 있는 학생들에게 그 특유의 유머러스한 눈빛을 반짝이며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이 주제에 대해 당신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건 그것은 이미 어떤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한 말과 똑같을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하곤 했다. 로스바드는 미제스가 시대와 불화를 빚은 것은 아니지만 자유주의 경제학이 승리하려는 순간, 그 유명한 케인스 혁명이 끼어들어 비극이 되고 말았다고 술회했다. "일반이론은 혼란스럽고 미완성이었던 인플레이션과 정부 적자에 관한 새로운 해설로, 경제학계를 들판의 불처럼 덮쳤다. 이제 모호하고 불투명하고 준 수학적 용어로 무장한 케인스 덕분에, 경제학자들은 영향력과 권력을 확장하느라 안달이 난 정치인과 정부와의 대중적이고 돈이 생기는 제휴에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케인스 경제학은 엄청난 규모의 복지국가와 간섭주의를 지적으로 무장하여 아름답게 치장하였다. 미제스의 이론은 가볍게 잊혀졌으며, 케인스 혁명이란 좋은 이름의 돌격에 쓸려 나갔다." 이 거대한 망각의 비극은, 아마도 제일 똑똑한 미제스 추종자들의 이탈일 것. 하이에크의 영국인 제자들은 케인스주의로 몰려갔고, 그중 앨빈 핸슨은 곧바로 미국 케인지언의 주도자가 되었으며, 미제스를 따르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미국에서의 높은 학문적 지위를 수락하고는 급히 오스트리아를 떠나 케인스 경제학의 온건파를 형성하였다.
- 우리가 경제정책에 관해 기억해야 할 점은, 그 정책들이 선의로 가득 찬 임금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인간적 욕구를 가진 보통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 사람들은 어떤 때는 국가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일하지만, 어떤 때는 자신들의 정치적, 금전적 욕심에 따라 움직이기도 함. 현실의 경제정책이 경제학 교과서에 있는 이상적 정책과 다르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맨큐)
- 케인스 경제정책을 통해 30년대 대공황이 극복됐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부족하다. 30년대 대공황은 2차대전 개전까지도 극복되지 않았으며 전쟁을 겪으면서 극복됐다는 것이 경제사학계의 통설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뉴딜정책 기간동안 정부지출은 29년 102억불에서 39년 175불로 증가했지만, 같은기간 GDP는 1044억불에서 911억불로 감소했으며 실업률은 3.2%에서 17.2%로 증가. 미국이 참전한 41년 12월에서야 비로소 미국경제는 대공황을 탈출. 정성진은 전후 황금시대는 적자재정을 통한 총수요 관리정책 같은 케인스의 경제정책의 성과가 아니며, 이 황금시대의 배경이 된 것은 영구전쟁경제였다고 주장. 황금시대는 전 세계적 규모의 대중투장 분쇄, 동서방 국가자본주의 대결구도 창출, 즉 냉전체제 성립 및 영구 전쟁경제작동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1900년 발표된 동화 오즈의 마법사는 사실 19세기 후반 미국 통화정책에 관한 우화. 1880년부터 1896년까지 미국 물가는 23% 하락. 이런 물가 하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대폭적인 부의 재분배가 발생. 서부에 살던 대부분의 농민들은 동부의 은행들에게 빚을 진 상태였음. 물가가 하락하자 농민들이 진 부채의 실질가치는 증가했고, 은행들은 부자가 됨. 농민의 이해를 대변한 정당 정치인들은 은화의 자유발행을 허용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 당시 미국은 금본위제도 아래 있었으므로 금이 양이 통화량과 물가를 결정했다. 은화 자유주조를 지지한 사람들은 은도 금처럼 화폐로 통용되도록 만들려고 했다. 이 주장이 채택되었다면 통화량이 증가해서 물가가 상승하고, 농부들이 진 부채의 실질부담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은화 자유주조를 둘러싼 논쟁은 점점 가열되어 1890년대 주요 정치 쟁점이 되었다. 1896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제닝스 브라이언은 은화 자유주조를 지지한 대표적 인물. 브라이언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연설에서 "노동자들의 이마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지 마라. 인류를 황금의 십자가에 못 박지 말"고 설파. 미국 중서부 지역의 기자였떤 라이먼 프랭크 바움은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면서 당시 중요한 정치논쟁의 주역들을 토대로 등장인물을 만듬. 경제사학자 휴 로코프는 90년 어느 경제학 저널에 실린 논문에서 오즈의 마법사 등장인물을 다음과 같이 해석. "도로시는 미국의 전통적 가치, 허수아비는 농부들, 깡통 나무꾼은 산업근로자들, 오즈는 금의 무게단위, 노란 벽돌길은 금본위제도 등으로 묘사했다. 은화 주조론자들이 논쟁에서는 졌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바라던 통화공급 확대는 이루어졌고, 물가는 상승했다. 농부들은 빚을 갚기 수월해졌다."
- 피케티도 수리경제학과 수학의 확실성에 의구심을 표출한 바 있다. "경제학 분야는 아직도 역사적 연구 및 다른 사회과학과의 협력을 등한시 하면서 수학에 대한, 그리고 순전히 이론적이고 흔히 이념적인 고찰에 대한 유치한 열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너무나 자주 자기들만 관심을 갖는 사소한 수학적 문제들에 매달리고 있다. 이처럼 수학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던지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내놓을 필요가 없이 과학성의 겉치레를 손쉽게 입힐 수 있는 방법이다. ... 사실 경제학은 결코 다른 사회과학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오려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할 때에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분명히 실용적 접근방식을 취하고 경제학자들뿐만 아니라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들의 연구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 명석하고 합리적인 세계는 원리가 적용되는 수리의 세계에서만 통할 뿐, 현실경제의 작동양상은 전혀 다르다. 투자자는 자본이 낳을 장래수익이 아니라 눈앞의 이익에 신경을 쓴다. 즉 합리적인 계산보다는 케인스가 말했드 혈기, 신경과민, 히스테리와 같은 심리적 요인이 투자에 영향을 끼치는 사태가 벌어지는 일이다. 물론 국가가 조성하는 사회경제적 분위기도 투자와 소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닥터 둠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월가의 비관론자이자 투작인 마크 파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겨울철 동네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 연못의 얼음이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정도는 스케이트를 타는 친구의 수가 많을수록 더 커진다. 연못 위에 사람수가 많아질수록 얼음이 깨질 위험은 더 커진다는 합리적 판단은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어리석은 믿음이 생겨난다. 신뢰가 감염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에 따라 연못의 얼음이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내면, 확신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뀐다." 케인스의 세계에서는 기업가는 단순히 시장 이자율에 따라서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며, 가계는 현재 소비와 저축에 따른 미래 소비의 가치를 현재가치 할인법으로 계산한 뒤 최적의 소비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 슘페터는 수사학의 측면에서 마르크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순수 경제적 분야에서 그의 업적의 본질을 적과 동지가 다 같이 오해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경제이론이라는 차가운 쇳덩이도 마르크스의 책 속에서는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닌 열기를 얻을 정도로 김이 물씬 나는 풍부한 글귀에 흠뻑 젖어 있다. 자신이 과학적 의미에서 분석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요구에 글쎄 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누구든 간에 감종이 넘치는 언사라던가 착취와 궁핍화에 대한 열띤 고발만을 생각할 뿐 그것들의 근저에 있는 그의 사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이것들 모두와 그의 악의에 찬 풍자 또는 오크니 부인에 대한 악의적 논평과 다른 것들은 확실히 연출의 중요한 부분이며, 마르크스 자신에게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신봉자, 불신자 모두에게도 중요하다.
- 앨프레드 마셜이 경제학에 끼친 영향은 영국 켐브리지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경제학자를 길러낸 데서 찾을 수 있음. 케인스, 아서 세실 피구, 조앤 로빈슨, 데니스 로버트슨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영국의 경제학 인명사전을 채우고 있다. 그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켐브리지 학파는 상당기간 동안 세계 경제학계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마셜은 1885년 2월 켐브리지 대학 교수직 취임연설에서 "강한 인간의 위대한 어머니인 켐브리지가 세계로 배출하는 자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자기 주위의 고뇌와 싸우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최선의 힘 중 적어도 얼마 정도를 기꺼이 바치려고 하는 사람이다. 이들을 더 많이 길러내는 것이 내가 가슴속에 품은 포부이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Posted by dalai
,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저자
송원근 지음
출판사
북오션 | 2014-01-24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한국에 장하준 신드롬을 불러온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가격비교

-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제시되는 규제들로는 순환출자 금지 등 기업 지배구조 규네, 금산분리의 강화,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 도입 등이 있음. 순환출자는 대규모 기업집단 총수 일가의 지배체제 구축수단으로 악용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특정 집단의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업지배구조 규제라는 것으로 경제민주화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음. 그러나 환상형, 지주형, 행렬형 등 다양한 형태의 순환출자구조는 적은 지분을 가진 대주주들이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잠재적인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싱가포르 자딘 메디슨 그룹, 호주 엘더스 그룹, 홍콩 신시어 그룹, 일본 도요타 그룹 등 외국에서도 순환출자 구조는 보편화돼 있음. 심지어 경영 안정을 위해 대주주 지분에 대해 10~20배에 이르는 차등의결권과 거부권을 부여한 황금주 제도도 도입하고 있음. 순환출자 금지는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이런 현실을 외면한 정책임. 한국의 대기업들이 이룩한 글로벌 경쟁력의 배경에는 오너체제 특유의 과감하고 신속한 투자의사결정과 계열사간 자원배분 및 협력이 있었다. 시대를 초월하는 기업지배구조의 모범답안은 없음에도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특정 기업지배구조를 배제하는 것은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기존에 형성된 기업지배구조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역사적, 시대적 배경에서 진화되어 온 것임을 감안해야 함
- 금산분리의 강화도 재벌로 대표되는 산업자본의 금융부문에 대한 지배력을 억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음. 대기업 계열 금융/보험계열사가 보유하고 있는 비금융 계열사에 대한 지분의 의결권 한도를 현행 15%에서 궁극적으로 5%로 제한하겠다는 정책,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보유한도를 9%에서 4%로 축소한다는 정책 등이 그것이다. 유럽과 일본에는 산업자본의 은행소유에 대한 제한이 없으며, 금산분리가 엄격한 미국의 경우에도 산업자본의 금융업 지분소유를 15%까지 허용하고 있음. 금산분리 강화정책의 경우 일부 대기업의 지배구조에 직접적 영향을 미침. 물론 산업자본의 금융부문에 대한 지배력 억제라는 목적도 특정 집단의 경제력 집중에 따른 남용을 방지하겠다는 경제민주화 정책의 일환이다. 그러나 이러한 금산분리의 강화가 외환위기 이전 대기업의 부실로 인해 금융기관이 부실해지면서 경제위기가 도래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이런 위기상황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행한 조처인지는 의문스럽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부문의 구조개혁과 자본시장의 자유화에 따라 이루어진 금융시장의 발전을 보면 설사 대기업이 금융기관의 지분을 보유해 대주주의 지위를 가진다 하더라도 금융기관이 대기업의 사금고가 되리라는 우려는 과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금산분리의 강화는 오히려 관련 대기업의 지배구조 전환비용을 늘려 투자를 위축시키고 금융권의 자율성 감소를 가져와 금융시장의 발전을 제약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현재는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고 하고 있지만 경제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 커질수록 대기업뿐만 아니라 기업 일반에 대한 전반적 규제강화가 나타날 것이다. 더 나아가 정부의 개입과 관료적 관리가 특정 집단이 아닌 개인의 일상생활까지 옥죄게 될 수 있고, 민주화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전체주의가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것이 경제 민주화의 본질이고 앞날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경제 민주화를 명분으로 하는 정책이 확대된다면 한국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되리라는 점이다.
- 정부주도 계획경제의 약점은 투자의 불확실성이 증가할수록 심화된다. 시장은 다양한 경제주체가 벌이는 실험적 투자가 어떤한 성과를 얻는지 경쟁을 통해 검증한다. 그리하여 수익률이 높은 분야에 재원을 집중할 수 있다. 반면 정부투자는 시장경쟁을 통한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므로 수익률이 낮은 분야에 재원이 낭비되는 경향이 있음. 투자의 불확실성이 증가할수록 정부가 수익률이 낮은 분야에 투자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재원의 낭비는 더욱 심화됨. 문제는 이제 세계경제의 흐름과 한국경제의 성장단계가 모두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데 있다. 정보통신혁명과 세계화의 촉진으로 세계경제는 과거 그 어느때보다 투자의 불확실성이 높은 상태에 도달. 그리고 한국경제의 성장방식도 자원의 신속한 투입이 경쟁력의 기반이었던 투자기반 성장에서 기술진보가 경쟁력의 기반인 혁신기반 성장으로 전환하고 있음. 투자기반 성장단계에서는 선진국이 이미 개발한 기술을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투자의 불확실성을 줄였지만, 혁신기반 성장단계에서는 스스로 기술을 개발해야 하므로 불확실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시장경쟁을 통해 자원을 수익률이 높은 산업으로 유연하게 재배치하는 능력, 즉 시장의 효율성이 경제성장의 중핵이 됨

1.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 자유시장은 존재한다
- 장하준은 자유시장을 일체의 정부개입이 없는 상황으로 설정하고, 광범위한 정부개입의 예를 들어서 자유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 그러나 자유시장이란 장하준의 주장과 같이 정부개입의 진공상태를 의미하지 않음. 자유시장은 정부가 교역의 이익을 실현하도록 그 가능성을 보장하는 친시장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시장을 말함. 구체적으로 자유시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보편적 소유권 보호기능, 통화가치 안정기능, 정보공급기능을 충실히 갖추어 거래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이런 제도가 받쳐주면 교역의 이익이 교역에 참가한 개인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시장에 참여할 이유가 생기고, 불확실성이 축소되어 교역의 범위가 확장됨. 반면 정부가 가격 및 수량을 통제하거나 시장참여를 제한하는 반시장적 개입을 자행할 경우, 거래의 이익이 정부의 특혜를 받는 집단에 국한되고 거래의 불확실성이 심화되어 교역의 범위가 축소됨. 장하준은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정부의 개입을 모두 유사하게 취급하여 자유시장의 존재를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 물가수준은 어떻게 안정시킬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낮게 유지될 경우에는 물가의 변동성이 축소됨. 예를 들어 미국은 73녀눕터 82년까지 10년간, 전년 동월 대비 물가상승률이 8.9%에 달했으며 변동성을 나타내는 표준편차는 2.7%에 달했음. 반면 83년부터 92년까지는 물가상승률이 3.8%로 억제되었는데, 이때 표준편차는 1.1%에 그쳤따. 따라서 물가의 변동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을 낮게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통화를 발행하는 중앙은행이 금리를 높게 유지하여 인플레이션의 급등을 억제하는 저물가 정책기조를 유지해야 함. 이자율은 정부개입에 의해 결정된다는 장의 주장은 이런 내용을 의미. 그렇다면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을 유지하려면 어떠한 형태의 정부개입이 필요한가? 가장 흔한 처방은 중앙은행을 정치적 권력에서 독립된 전문가 조직으로 운영하는 것.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무자본특수법인이며, 한국은행장의 임기가 보장되어 정치권의 직접적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됨. 이는 물가안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이 정치적 목적의 인위적 경기부양이라는 인식에 기초
- 산업정책은 반시장적 개입의 대표적 사례. 이것은 정부가 특정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그 산업에 참여하는 기업에 각종 특혜를 제공하는 정책. 산업정책은 그 산업에 참여한 기업에 인위적으로 높은 이윤을 보장해 주어서 자원배분을 왜곡하고 경쟁을 제한함. 단기적으로는 특정산업에 많은 재원이 투입되어 생산을 촉진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쟁의 압력을 약화시켜 기업의 생산성이 저하됨. 또한 산업정책이 광범위하게 적용될 경우 금융기관들은 정부 특혜기업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게 되고, 그 결과 생산성이 높은 기업을 선별하는 능력이 퇴화함. 과거, 산업정책이 경제성장을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특정 기업에 지원을 집중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지원기업이 수출을 통해서 국제시장에서의 경쟁에 참여했으며, 그로 인해 경쟁의 압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기 때문. 그러나 그 시기의 산업정책은 결국 기업의 기술역량과 금융기관의 기업선별 능력 부족을 가져왔으며, 이는 한국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해결해야 할 중요 과제로 남았음. 그러나 몇몇 수출대기업을 제외한 한국기업의 연구개발능력가 금융기관의 기술 투자 및 기업선별 역량은 아직까지 매우 초보적 수준

2.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된다 : 기업은 이윤을 위해 일해야 한다
- 이해당사지 지배구조에서 경영진은 다양한 당사자의 이해를 대변해야 함. 여기서 문제는 경영진의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특정 이해당사자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합리화될 수 있다는 것. 이는 비효율적 기업경영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활용가능. 예를 들어 일자리 보호, 납품기업보호의 명목으로 기업의 장기적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비효율적 의사결정이 빈번하게 나타날 수 있음. 또한 이해당사자 지배구조에서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하므로 신속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 어려움. 이런 어려움은 신속한 투자, 위험부담에 대한 의사결정의 부재로 이어져 기업의 효율성, 특히 장기적인 수익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됨. 결론적으로 당사자 지배구조는 기업의 주인인 주주뿐만 아니라 다른 이해당사자들에게도 이익을 가져올 수 없음.
-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부터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규제완화, 민영화, 그리고 자유무역 등 자유화 정책은 가격기구와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것이었음. 이러한 정책의 효과는 미국에서 80년대 중반이후 낮은 인플레이션과 안정적 성장이 지속적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 더 정확히는 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오기 전까지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음. 90년 이후 미국경제는 GDP성장률이 이전시기에 비해 크게 개선되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안정적 성장을 지속하였고 낮은 물가와 낮은 실업률을 달성하여 전후 제2의 번영을 구가했다고 평가할 수 있음. 반면 장하준이 주주 자본주의의 전성기라고 말한 90년대와 2000년대를 보면, 장은 이런 긍정적 부분들을 모두 간과한 채 단순히 연평균 1인당 GDP만을 비교하고 있음. 그것도 글로블 금융위기로 예외적인 경기침체를 경험한 08~09년을 포함하여 이 시기를 대단히 부정적 시기로 묘사하고 있음. 이 시기 미국경제에 대한 왜곡된 평가와 더불어 이를 주주자본주의, 주주가치 극대화를 지향하는 지배구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논리적, 현실적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임. 이 시기 미국경제가 소득증가,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60~70년대나 80년대보다 좋지 않았다는 장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왜 이것이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가 국민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증거가 되는 것인지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움


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 선진국 근로자가 후진국 근로자보다 생산성이 높다
- 왜 선진국 근로자는 후진국 근로자보다 같은 산업, 같은 직종에서 일하면서도 더 많은 소득을 버는가? 이는 근본적으로는 선진국 근로자가 후진국 근로자보다 생산성이 높기 때문. 여기서 생산성이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해내는 능력. 근대 지본주의에서 생산성은 효과적 분업체계의 설계, 자본재 투입수준, 그리고 기업경영의 효율성에 의해 결정됨. 장하준이 강조하는 개인적 기량은 생산성을 결정하는 지배적 요인이 아님. 오히려 근로자 개인에게는 분업체계 내에서 정해진 직무를 생산계획에 맞게 수행할 수 있는 노동규율이 요구됨. 선진국 근로자들은 후진국 근로자보다 이런 노동규율에 익숙하며, 따라서 보다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음. 이민 제한이 완화되더라도 이민 노동자들은 이런 노동규율을 습득해야 소득을 제고할 수 있음. 이민제한이 약한 국가에서도 이민 노동자들이 저임금 직종에 주로 종사하는 이유는 바로 이때문. 선진국 근로자들은 1인당 노동생산성이 후진국 근로자보다 일반적으로 높음. 예를 들어 50~09년 스웨덴 근로자 1인당 국민총생산은 이집트보다 5~10배 높았음. 그러나 이는 선진국 근로자들의 개인적 기량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 아님. 선진국 근로자들이 보다 효율적 분업체계에 편입되어 생산하고, 보다 양과 질이 뛰어난 자본재를 사용하기 때문. 또한 선진국 기업들은 보다 효율적인 생산공정 관리기법을 적용해서 같은 노동력을 가진 근로자부터 더 높은 생산성을 이끌어 내기 때문
 

4.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 정보통신혁명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 장의 정보통신혁명에 대한 평가는 90년대 중반 이후에 실현된 정보통신 혁명의 성과를 무시하는 것. 또한 정보통신 혁명으로 투자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산업정책의 효과가 약화되고 있는 경향을 무시함. 정보통신산업은 산업정책의 효과가 크게 약화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음. 정보통신산업으로 기업의 규모가 축소되고, 기업의 연구개발에서 신기술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은행의 역할이 축소되는 대신 위험자본의 역할을 확대됨. 신기술의 비중이 높아져서 투자의 불확실성은 크게 심화되었고, 기업규모가 축소되고 은행의 비중이 작아지면서 신규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되었음. 따라서 정부가 유망주를 선정하기도 어렵고, 선정한 유망주가 격화된 경쟁을 극복하기도 어려워졌음. 결국 산업정책은 그 효과가 크게 제약되었음. 90년대 각국 정부는 첨단산업 육성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그 성과는 보잘것 없었다. 바로 이런 환경변화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은 정보통신혁명을 과대평가하는 정책적 조류를 경계한다. 그러나 그는 정보통신 혁명의 성과를 무시했기 때문에 그 효과가 의심스러운 산업정책을 주창하는 오류를 범했다.
- 장이 강조한 전보와 세탁기는 모두 19세기말~20세기초 제2차 산업혁명기 기술진보의 산물. 2차 산업혁명은 10세기말~20세기초 미국, 독일 등 후발선진국이 주도한 일련의 기술개발과 그에 따른 생산성 증대현상을 의미. 이 시기 기술진보는 전기, 자동차, 화학과 같은 대규모 장치산업에서 주도하였으며,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여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음. 또한 50년대~70년대 전반기 자본주의 황금기의 기술적 배경이 됨. 2차산업혁명으로 위계적 구조를 가진 대규모 기업이 출현하였고, 독과점이 일상화되었으며, 기업이 자체적으로 세운 계획이 시장기구 못지 않게 자원배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기적은 바로 이런 2차 산업혁명의 성과를 추격하여 재현한 것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련의 기술진보를 위대한 발명이라고 지칭하며, 이는 4개의 기술진보군으로 분류가능. 4개의 기술진보군 중에서 개별 기술진보군 하나의 사회, 경제적 파급효과는 95년 이후 정보통신혁명의 사회, 경제적 파급효과에 필적할 정도로 큰 공헌을 했음. 예를 들어 전기모터의 발명이 이끌어낸 생산성 증대효과는 정보통신혁명의 생산성 증진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평가됨.
- 이들 위대한 발명 이전에는 서구 선진국의 생활양상이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달랐음. 근거리 교통은 마차에 의존했고, 식재료는 냉장할 수 없었으며, 각종 전염병이 창궐했다. 취사는 화덕에, 세탁은 손빨래에 의존. 공장의 동력은 증기기관에 의존했기 때문에 작업장은 연기와 열기로 가득했고, 작업시간을 길었다. 장거리 여행시에는 기차이용이 빈번했는데,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서 대형사고의 위험이 상존. 그러나 19세기말~20세기초 기술진보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선진국들은 50년대에 이미 현재와 유사한 생활수준을 달성했음. 정보통신혁명의 영향이 아무리 크다해도 이들 위대한 발명의 영향보다 크다고 하기는 어려움.
- 무엇보다도 19세기말~20세기초의 기술진보는 20~70년대초까지 장기적 생산성 증대를 가져옴. 기술진보가 진행중이었던 1870~1913년간 미국의 노동생산성은 연 1.18%로 상승했는데, 기술진보가 완료되어 그 성과가 실현된 1913~73년간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86%로 급증함. 이 시기를 생산성의 시기라고 칭함. 이 생산성의 시기에 미국의 산업생산은 연 3.14%로 꾸준히 성장하였고, 소득이 증가하면서 교육수준도 높아지고 평균수명도 연장되는 등 생활수준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음. 2차대전 이후에는 서구 선진국들도 이러한 기술진보를 흡수하여 70년대까지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이루었음. 흥미롭게도 1870년부터 1970년까지 기간 중 획기적인 제품을 발명은 1950년 이전에 집중되었음. 다시 말해 2차 대전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경제 부흥의 기술적 기초는 이미 19세기말~20세기초에 놓여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게다가 2차 산업혁명은 기업의 형태를 크게 변화시킴. 2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산업은 중화학 공업으로 대규모 투자설비투자가 필요했다. 따라서 고정비용을 회수하자면 대량생산이 가능해야 했고, 이러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대규모의 판로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대량생산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중간재의 안정적 공급을 확보해야 함. 그래서 이들 산업의 기업들은 대량생산을 위해 일관 생산과정을 도입하였고, 중간재를 외주에서 들여오기보다는 자체 생산에 의존하는 수직적 공정통합을 추구하였으며, 판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추게 되었음. 결국 단일기업이 중간재 생산 및 완제품 생산 그리고 판매를 동시에 수행하게 됨. 자연스럽게 기업의 규모는 확대되었고, 다양한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정교한 피라미드형 위계조직이 도입되었다. 즉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근대적 기업은 2차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 장이 19세기말~20세기초 기술진보의 성과를 상찬하고, 정보통신혁명의 성과를 폄하하는 것은 그가 산업정책을 선호하는 성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 19세기말~20세기초에 기업 내 계획의 역할을 확대하고 기업간 경쟁은 제한하며 기존기술을 개량하는 기술진보를 촉진하여 산업정책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었음. 그리고 이런 조건을 적절히 활용한 일본 및 개도국인 동아시아 국가들은 산업정책의 성공사례로 거론됨. 반면 정보통신 혁명은 기업내 계획보다는 기업간 거래를 확대하고(외주화), 신규창업을 활성화하여 기업간 경쟁을 격화시키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기술진보를 촉진시켰음. 이것은 장이 선호하는 산업정책에 매우 불리한 조건을 조성한다.
- 장은 아직도 한국이 정부의 재원투입을 통해 성장할 여력이 있다고 주장 그러나 이는 정보통신혁명으로 변화한 환경을 무시한 주장. 선진국들이 혁신기반 성장전략을 추구하면서 지속적으로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는데, 신기술 개발 능력없이 이들을 추격하기는 어려움. 한국의 현재수준으로 보면 더 이상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제고할 기술을 외부에서 들여올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다. 더군다나 정보통신 혁명이 창조한 환경에서는 더 이상 산업정책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움. 기술개발 속도가 빨라져서 투자의 불확실성이 과거보다 크게 높아졌음. 따라서 정부가 미리 유망주를 선정하기 매우 어려움. 시장경쟁이 강화되어서 정부가 선정한 유망주가 계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할지도 미지수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양한 투자를 실험할 수 있고, 경쟁을 통해 성과가 부진한 투자를 조기에 종결시킬 수 있는 시장의 역할을 확대해야 함. 정보통신혁명의 시대에 닥친 산업정책의 한계는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됨. 90년대 이후 세계 각국의 첨단산업 기업을 육성하려 시도했으나 대부분 처참한 실패로 끝남. 한국의 벤처기업 육성정책은 수많은 사례 중 한가지일 뿐이다. 각국의 정부는 투자대상을 적절히 선정하지 못했고, 이후 투자대상을 적절히 평가하지도 못했으며, 지원대상에 정치적으로 포섭되어 자원을 낭비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는 산업정책은 정보통신혁명이 창출한 환경에서는 성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우며, 혁신기반 성공전략을 추구하는 도구로 부적절함을 의미


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 제도는 인간의 본성에 맞게 만들어진다
- 장의 주장의 맹점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이 도덕성과 반하고 추악한 본성이라 전제하는 데 있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고 비도덕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추악한 본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경제와 문화 그리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인류는 아득한 옛날부터 교환과 거래를 위해 생산과 분업을 확대하여 경제, 과학기술, 문화, 그리고 제도의 발전을 이루어옴. 교환을 위해 생산을 하고,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거래하기 위해 생산에 비교우위가 있는 부분에 특화하는 경향은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만개하기 이전에도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현상. 자급자족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거래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경우, 품질이나 기술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과 특정한 분야에 대한 전문화를 이루면 그만큼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짐. 따라서 개인의 이익추구에 대한 동기부여가 클수록 거래 및 전문화의 규모와 범위가 확대된다.


6. 거시경제의 안정은 세계경제의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 물가안정은 경제에 도움이 된다
- 인플레이션이 높은 시기보다 낮은 시기가 투자와 소비, 성장과 고용에서 더 나은 성과를 보였다는 경험적 증거는 무수히 많음. 스탠리 피셔, 라트나 사헤이 그리고 카를로스 베그는 02년 논문에서 전후 높은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국가를 포함한 25개국의 자료를 통해 높은 인플레이션이 투자, 소비 그리고 경제성장에 모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주고 있음. 미국 경제에서도 다양한 자료와 지표를 통해 인플레이션의 경제의 장기적인 성장에 부정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예를 들어 50년대 이후부터 금융위기 직전인 07년까지, 인플레이션이 높았던 시기와 낮았던 시기를 나누어 경제성장률을 살펴본 결과, 낮은 인플레이션 시기에 더 높은 성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장은 선진국이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한 90년부터 09년까지의 연평균 1인당 소득 증가율이 이전보다 더 낮았다고 주장하면서 인플레이션 억제책이 투자와 성장을 오히려 위축시켰다고 함. 장은 통계를 아주 교모하게 사용했다. 선진국, 특히 미국의 경제는 90년대 초반의 침체기를 거쳐 이후 금융위기 이전까지 안정적이고 견고한 성장을 거듭하며, 특히 높은 성장률과 낮은 실업률에도 물가안정을 달성하고 있는 점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또한 미국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한 08년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어 09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다. 장은 마이너스 성장을 한 이 시기를 의도적으로 포함하여 연평균 소득 증가율을 계산한 후 이를 근거로 낮은 인플레이션이 언급한 90년대와 금융위기 이전까지의 미국경제의 성과, 즉 낮은 인플레이션 속의 높은 성장 및 낮은 실업률이라는 성과는 묻혀버림


7. 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 보호정책만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다
- 기업이 성장하고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산업의 보호와 육성정책 같은 정부개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대신 수출주도 공업화 전략을 채택하여 유치산업에 대한 보호대신 비교 우위가 있는 부문이 세계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했기 때문.
- 보호무역으로 미국경제의 성장이 가능했다는 장의 주장은 무엇인가? 그는 19세기 미국의 관세를 들고 있다. 남북전쟁이후부터 미국에서 보호주의적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기 시작했다. 보호주의적 성격을 띤 고율의 관세부과는 1차대전 이전까지 이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이 기간은 미국이 제조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산업화를 이룬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나타난 급속한 산업화는 일견 보호무역에 의한 것을 여겨질 수도 있음. 1차대전 이후부터 그리고 본격적으로 2차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국이 된 많은 개도국들이 수입대체 공업화를 추진한 것도 19세기 미국의 급속한 산업화를 보호주의적 고율 관세의 보호 덕분에 가능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 그러나 이 기간 고율관세가 부과디시 시작한 것은 남북전쟁 발발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이 남북간의 전면적 내전으로 확대됨에 따라 박대한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재정수입이 필요하였고, 연방의회는 1861~62년에 관세를 두배 이상 올림. 남북전쟁 이후에도 고율의 관세가 지속되었던 것은 관련된 각종 이익집단의 로비 혹은 정치적 압력이 원인이었다. 특히 고율의 관세를 요구한 이익집단은 주로 북동부의 농민들, 모직물 제조업자 등 국제경쟁력이 없는 산업의 종사자들이었음. 19세기 미국의 급속한 산업하는 앞서 설명한 재산권 보호, 자유기업, 제한된 정부 등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음. 반면 관세가 산업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였음.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던 이 시기 미국의 대부분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었기 대문에 외국으로부터의 수입경쟁이 위협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음.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고율의 관세에 의한 산업보호가 미국경제의 성장과 후생증대에 기여했다는 경험적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음.


8. 자본에도 국적이 있다 : 경쟁력 있는 자본에만 국적이 있다
- 다국적 기업의 자국편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국편향은 절대 불변의 특성이 아니라 각국 기업환경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 이런 현상을 근거로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고 선별적으로 유치하려는 정책을 시행한다면 결과적으로 투자와 고용증대,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그에 따른 전반적 기술경쟁력 제고와 생산성 향상이라는 이득을 향유하지 못할 것이다.


9.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 탈산업화가 국제수지 적자의 원인인가?
- 탈사업화의 원인과 관련하여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이론적 개념으로 보몰의 병리(Baumol's cost disease)라는 것이 있음. 이것은 미국 경제학자 보몰이 제시한 것으로 생산성 향상 없이 비용이 증가하는 현상을 말함. 일부 서비스 부문, 예를 들면 공연예술분야에서와 같이 노동생산성은 크게 변화가 없음에도 노동시장에서 채용경쟁이 일어나 종사자의 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경우에서 나타남. 서비스 부문은 생산성 증가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다른 상품을 구입할 때보다 높은 서비스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장하준의 견해는 거의 모든 서비스 분야에서 보몰의 병리 현상이 나타남을 전체로 할때 성립할 수 있음. 그러나 소위 탈산업화라는 현상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소득이 증대되고 이에 따라 다양하고 세분화된 서비스가 요구되는 상황이 된 것이므로, 모든 서비스 분야에서 보몰의 병리가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인 수요가 증대되었기 때문에 서비스의 상대가격이 높아진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음. 보몰의 병리현상과 같은 노동집약적 부문에서의 생산성 정체가 모든 서비스 부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님. 서비스 부문에서도 IT기술 및 과학적 경영기법의 발달 등으로 괄목할만한 생산성 증대가 나타나고 있어 제조업과 서비스 부문을 이분법으로 나눠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높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

10.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 미국은 선택권이 있는 나라다
- 미국의 노동시장은 자국민에게 높은 수준의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음. 그러나 삶의 질을 높이고 싶어하고, 또 그런 능력이 있는 근로자들에게는 삶의 질을 제고할 여건을 마련해줌. 이민을 통해서, 장시간 근로를 통해서 미국인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하였고, 이를 달성하였다.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현상은 미국근로자들의 이런 선택을 반영하는 것이다. 장의 주장대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는 아닐 수 있음. 실제로 1인당 국민소득은 룩셈부르크가 더 높음. 그러나 미국은 잘살 수 있는 여건이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있음. 그리고 현재 미국 근로자들은 그러한 여건을 잘 활용하고 있다.

11.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 아프리카의 비극이 선진국의 탓만은 아니다
- 민족간 갈등을 비롯한 정치적 문제와 제도적 요인은 아프리카의 성장을 저해하는 근본적 요인이며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 고찰이 필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60~70년대에 독립국가가 된 이후 냉전의 영향, 군사독재, 민족간 갈등으로 정치적 혼란과 부정부패가 지속되었음. 식민지 시절에 노예무역으로부터 시작한 아프리카의 제도적 기반은 기본적으로 재산권 보호에 매우 취약했음. 또한 정치적 불안과 부패의 만연 그리고 독립이후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강력한 영향으로 불안정한 재산권은 더욱 심화되었음. 불안정한 재산권이라는 제도적 특징이 투자를 제한하여 경제성장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역사적, 경험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고, 아프리카는 상당한 규모의 저축이 있음에도 취약한 재산권 보호탓으로 저축을 투자에 투입하지 못하고 있어 경제성장이 제약받고 있음. 물론 장의 지적과 같이 경제발전의 결과가 제도의 발전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재산권의 보호가 경제성장과 부국으로 이르는 길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필요조건이라고 이야기할수는 없음. 그러나 불안정한 재산권은 시장경제가 원활히 작동하는 것을 제약하고, 투자와 생산 그리고 거래까지 경제가 발전하기 위한 기본적인 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이런 제도적 특징은 경제의 장기간 정체 및 저개발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음. 사하라 이남 지역의 많은 국가들에서 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부패와 관료주의 그리고 제도적 미비로 말미암은 열악한 기업환경이다. 세계은행에서 발표하 기업환경지수로 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기업환경은 전 세계 183개국 중 모리셔스(20위), 보츠와나(57위) 등 일부국가를 제외하고 대부분 100위 이하로 매우 열악. 이와 같은 기업환경 탓에 비공식 부문의 비중이 매우 높고, 소규모 공동체를 벗어난 거래, 교역, 기업활동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제도가 없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움. 대내외적 교역 및 기업활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환경은 경제성장을 크게 제약하고 있음. 결론적으로 취약한 재산권, 부패, 관료주의를 확대시키고 열악한 기업환경을 낳은 아프리카의 제도가 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이남 국가들의 경제정체의 근본적 요인이다.
- 세계은행과 IMF가 행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조건부 원조와 지원은 정책 및 제도의 변화를 촉진하는 데에도 실패하였고 경제성장의 촉발에도 성공적이지 못했음. 이와 같은 사실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조건이 민영화, 무역자유화, 균형재정 등이었다는 이유로 자유시장 경제정책의 강요가 지난 30년 동안 아프리카 경제의 정체를 가져온 진짜 요인이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임을 말해줌. 즉, 구조조정을 시도하려다 아프리카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원조와 지원을 받고도 아프리카가 제대로 구조조정 되지 못한 것이다.

12. 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 : 정부가 고른 유망주가 과연 잘 나갈까?
- 한국은 주요 경제부처에 수출상황실을 설치하고 매일 수출 실적을 집계하고 정책을 운영하는 기초정보로 활용. 정부는 실시간으로 수출실적 제고를 위해 기업에 행정적인 지원을 제공했음. 또한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은 수출실적과 긴밀하게 연관되었으며, 실적이 취약한 기업은 지원대상에서 배제. 따라서 기업은 국제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을 확대해야할 강력한 유인이 존재했음. 이런한 시장경쟁의 압력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생산성을 증진하는데 크게 기여함. 수출주도 공업화 전략을 채택한 국가는 성장동력의 상당부분을 총요소생산성 증가에 의지했음. 반면 수입대체 공업화전략을 채택한 국가의 성장동력은 대부분 재원투입 증가에 의지. 60~89년동안 한국, 대만, 홍콩은 경제성장의 33%이상을 총요소생산성의 증대에 의지했음. 반면 유사한 기간동안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을 채택한 국가의 경제성장 중 총요소생산성이 성장에 기여한 부분은 20% 이하였음. 이렇게 생산성 격차가 생기는 이유는 주로 자본재를 체화하는 기술적 수준 때문이다.
- 개도국 산업정책은 양날의 칼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선택하는 투자대상에는 재원을 집중하고, 정부가 배제한 투자대상에는 실험적 투자도 억제하였음. 그 결과 국제시장의 경쟁을 통해 정부가 적절한 대상을 선택한 동아시아 국가는 고도성장을 실현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다른 개도국은 안정적 성장을 실현하지 못했음. 정부 선택의 적절함 여부와는 관계없이 개도국 산업정책은 금융시장의 성장이 지체되어 혁신기반형 성장전략을 구사하기 어려운 환경을 초래하는 단점이 있었음. 다시 말해서 산업정책은 정부가 별 어려움 없이 투자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경우에만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음. 즉, 개발한 기술을 체화하는 투자기반형 성장전략을 구사할 경우에는 산업정책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산업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음. 동아시아 국가들의 산업정책은 거대 장치산업인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중요한 목표로 두었음. 중화학 공업의 혁신적 기술진보는 19세기말~20세기초부터 이미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들 기술을 체화하는 것만으로 생산성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 장은 정치적 의지가 충분하면 정부의 승률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고 하면서 산업정책의 유효성을 주장하지만, 동아시아 국가의 정부들이 높은 승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의지 때문이 아니라 기술개발의 체화단계에 있었기 때문.
- 홍콩 및 싱가폴의 경험은 금융시장의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줌.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홍콩과 싱가폴은 공업화 초기부터 금융기관 설립을 자유화하고 해외자본에 국내자본시장을 개방했음. 이들 국가의 산업정책은 민간 금융시장의 성장과 병행되었으며, 민간의 위험평가기능이 성장하였음. 그에 따라 홍콩은 60~65년간 총요소생산성의 증대가 선진국보다 2%p 빠를 정도로 기술진보의 역할이 컸음.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들 중 싱가폴만이 유일하게 2000년대에도 연 5%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음.

13.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 부자를 도와주었더니 가난한 자의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
- 소득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대표적 국가인 미국에서도 하위 20% 소득 계층의 실질평균소득은 8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연 0.9%로 꾸준히 상승. 이는 소득재분배 정책으로 저소득층 소득이 다른 계층 소득보다 빠르게 증가했던 68~75년 평균성장률 2.4%보다는 크게 낮은 것이 사실. 그러나 고물가, 저성장 현상이 팽배했던 76~85년간 연 0.3% 성장에 그친 것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개선효과이다. 물론 86~00년 간 하위 20% 소득계층의 실질평균소득이 다른 소득계층에 비해 성장이 가장 늦었으며, 그 결과 소득격차는 확대됨. 그러나 저소득계층의 절대적 수준은 높아짐


14.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 : 미국 경영자들의 높은 보수는 노동생산성을 반영한 것이다.
- 장은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주자하지만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와 고용은 경영성과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사실은 무시. 80년대 이후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증가는 성과급이나 스톡옵션과 같이 기업경영 성과와 직접 연동되는 보수항목이 증가한 결과. 이렇게 성과중심 급여가 증가한 이유는 70년대 미국기업의 성과가 악화되면서, 이를 치유하기 위해 경영진에 대한 주주들의 견제가 강화되었기 때문. 소유과 경영이 분리되는 미국 특유의 기업지배구조 문제로 미국 기업은 경영진이 도덕적 해이를 범하기 위운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었음. 성과급과 스톡옵션은 기업의 성과를 경영진에게 일부 제공하여 주주와 경영진의 이해를 일치시킴으로써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 장치. 경영자의 보수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문제를 해소하는 비용의 일부로 인정해야 함. 미국 경영자들은 도덕적 해이를 억제하는 보상을 보수로 받고 있음. 따라서 미국 경영진의 보수는 이들의 생산성을 직접 반영한 것이다. 미국 경영자들은 소득은 높아도 근속년수가 짧은 매우 유연한 노동시장에서 상호 경쟁. 이들이 기업 채산성에 크게 해가 될 정돌 높은 소득을 인위적으로 유지할 때는 기업실적이 하락하고, 경영진의 소득도 하락할 뿐만 아니라 장래에 구직전망에도 큰 타격을 입음. 따라서 미국 경영진이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소득을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 실제로 스톡옵션은 경영자의 도덕적 해이를 해소하고 있는가? 스톡옵션은 경영진과 대주주 간 타협의 산물이며, 타협인만큼 여러가지 한계가 있음. 장이 지적했듯이 경영진이 이사회를 포섭하는 데 성공할 경우, 경영진은 스톡옵션의 구체적 행사방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설정 가능. 따라서 스톡옵션은 경영진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방식으로 운영될 수 있음. 이런 약점에 대한 장의 지적은 어느정도 타당함. 그러나 장은 스톡옵션이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견제하는 순기능을 무시. 이는 장이 주주자본주의 자체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임. 주주 자본주의는 경영진을 견제하는 효과가 약하고 주주 자본주의의 도구인 스톡옵션도 경영진을 견제하는 수단보다는 경영진의 급여를 올려준느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 장의 견해.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 미국은 오랫동안 신주발행을 주된 재원 조달 방식으로 하는 거래형 금융의 전통을 유지. 그러한 국가에서는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가 문제가 됨. 스톡옵션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다. 따라서 최근 미국 경영진의 높은 급여 중 최소한 일부는 미국 자본시장의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으로 간주해야 함.

15.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기업가 정신이 부족하다
- 장의 주장과는 달리 후진국에 기업가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기업가 정신이 뛰어난 기업가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시장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기업가 정신은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서 이윤을 창출하는 능력이고, 이는 현상유지가 주목적인 후진국 자영업자들의 영업행태와는 전혀 다른 개념. 선진국 기업주들은 이런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여 기술을 개발하고 현대적 기업조직을 창안하여 오늘날과 같은 비약적인 생산성 증대를 이룩. 또한 이들은 지속적 경쟁 속에서 경영합리화, 전략적 제휴, 인수/합병 등 위험부담이 큰 전략적 결단을 내렸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따라서 장의 지적과는 달리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나라 사람들보다는 기업가 정신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음. 선진국 기업주들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은 이들이 생산성을 기반으로 한 시장경쟁에 참여하였으며, 기업가 정신이 탁월한 기업주들을 경쟁을 통해 선발하였기 때문. 장은 교육, 금융, 법률, 과학 인프라가 기업가 정신의 실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인프라는 시장경쟁이다. 후진국의 소득이 낮은 이유는 이들 국가의 기업이 개인의 생산성을 제고하지 못하고, 기업가 정신이 탁월한 경영자를 육성하지 못하기 때문. 이는 근본적으로 기업간 경쟁이 생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쟁이 아니라 정치적 이권을 목적으로 하는 지대추구 경쟁의 형태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 따라서 후진국에게 가장 부족한 인프라는 시장경쟁이다.
- 선진국의 기업가들은 대량생산, 대량판매를 달성하여 자영업의 한계를 타파하고 오늘날의 대기업을 이룩하였다. 또한 선진국 기업가들은 치열한 기업간 경쟁에 직면해 있으며, 그 속에서 지속적인 전략적 결단을 통해 현재의 위치를 차지하며 미래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음. 후진국의 기업들은 선진국의 기업보다 생산의 규모, 기업조직의 효율성, 전략적 결단이 부족한 것이 특징. 이를 통해 후진국 기업가들과 선진국 기업가의 격차가 바로 기업가 정신의 격차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음.

16.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 영리하지 못한 사람도 시장이 도와준다
- 선진국에서는 복잡한 상품을 규제하기보다 상품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고급 서비스업이 성장하여 제품의 유통을 촉진시키는 것이 일반적 경향. 금융상품도 유통을 억제하면 소비자의 후생만 악화되고, 오히려 규제회피를 목적으로 하는 더욱 복잡한 금융상품이 개발되어 규제가 무력화될 우려가 있음. 따라서 금융상품의 거래는 허용하되, 그 위험은 관리하는 방식이 바람직함. 장은 정부의 규제가 복잡한 상품을 단순화하여 그 상품과 관련된 의사결정의 질을 제고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고급 서비스업 시장이 그 역할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음.
- 상품이 복잡하여 제한된 합리성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 상품을 규제하는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함. 상품이 복잡하면 소비자를 대신해서 그 상품관련 정보를 직접하고 가공하는 전문 서비스업 시장이 성장하기 때문. 정부는 경쟁의 압력이 없고, 규제대상에 대한 완전한 정보도 없다. 따라서 전문 서비스업 시장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보다 더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 규제를 설계하기 어렵다. 선진국들은 상품을 규제하기 보다는 전문 서비스업 시장을 육성하여 소비자의 선택을 지원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음. 단, 전문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정보처리능력이 부족하거나 비윤리적일 경우에는 복잡한 상품의 거래에 관계하는 경제주체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장이 지적한대로 미국 금융업 종사다들의 무능과 비윤리적 행위가 08년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요인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움. 그러나 이는 금융상품의 내재적 문제라기보다는 이들 금융업 종사자들의 자질문제임. 예를 들면, 08년 금융위기의 근원은 저신용 부동산 대출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주택담보부 증권(MBS) 및 부채담보부증권(CDO)의 가치하락에 있었다. 그러나 신용카드 대출기반 담보부증권(ABS)나 기업대출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부채담보부증권(CLO)은 금융위기 이전에도 이미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었고,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저신용 주택담보부증권에 비해서는 채무불이행이 많이 발생하지 않았다. 08년 금융위기의 근원은 주택, 부채담보부 증권이라는 복잡한 파생금융상품 때문이라기보다는 저신용 부동산 대출에 기반한 주택, 부채담보부증권이라는 위험한 자산에 대한 관리실패에 있다. 이는 명백하고 금융업 종사자들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다.

17.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 수준높은 교육은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 장이 예로 든 타이완과 한국이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수출주도 공업화를 통해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에 참여하였고, 경제발전의 단계마다 그 단계에 적합한 인적자본과 기술의 공급이 적절하게 이루어진 덕분. 경제발전의 단계마다 그에 적합한 인적자본과 기술이 공급되기 위해서는 교육의 역할이 필수적임. 예를 들어 한국은 수출주도 공업화를 통해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에 참여해 산업화 과정을 거치기 이전에는 농업중심의 경제체제였고, 이후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수출 위주에서 시작해 중화학공업, 전자, 자동차, 조선 등의 발전을 통해 자본집약적 고부가가치 제조업 중심으로 경제의 주도적 산업이 변모해왔음.
- 스위스에서는 의무교육 9년 이수후 대학진학을 위한 일반 고등학교, 교원양성학교, 그리고 직업학교 등으로 나뉘어 진학. 직업학교에 진학하면 도제수업을 통해 학교와 기업을 오가면서 직업교육을 받고 졸업후 취업. 물론 직업학교에 진학하더라도 진로수정은 자유롭고 졸업 후에도 고급 직업교육기관인 응용과학대학에 진학가능. 장이 이야기한 대학진학률은 OECD에서 발표한 고등교육 입학률 중 학업지향적인 A유형 고ㅇ등교육 입학률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왜냐하면 스위스의 A유형 고등교육 입학률이 95년 17%엣 2000년대에는 40%부근까지 상승한 것으로 볼 때 대학 진학률에 고급직업 교육기관인 응용과학대학 등 직업 지향적 B유형 고등교육 입학률은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 스위스의 직업지향적 B유형 고등교육 입학률은 95년 29%에서 2000년대에는 20% 미만으로 하락. A유형과 B유형을 함께 고려할 경우 스위스의 대학진학률은 그리 낮지 않음


18.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 GM은 규제가 없어서 몰락한 것이 아니다.
- 장은 주주가치 극대화가 기업과 국민경제에 더 부정적이라는 근거로 GM사례를 들고 있음.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GM의 몰락은 경영진이 주주가치 극대화가 아닌 이해당사자, 특히 노조의 요구에 굴복한 것이 근본적 원인이었음. 90년대 빈번하게 발생한 파업을 수습하기 위해 GM경영진은 전미자동차노조의 요구를 계속 수용하여 임금인상과 더불어 근로자와 그 가족, 퇴직자 및 미망인에게까지 의료비 및 연금혜택을 부려. 이에 따라 복지에 드는 비용이 급증하여 고비용 구조가 고착화되었고, 이는 GM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정적 원인이 됨. 또한 90년대 GM과 노조의 합의는 기존사업장 이전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사업의 신축성을 크게 감축시킴. 기존 사업장을 의무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노조와의 합의로 기존생산라인의 교체가 어려워졌으며, 구형 모델의 생산이 지속되는 결과를 낳음

19. 우리는 여전히 계획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 :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계획경제가 아니다
- 계획경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원인은 지식의 문제 때문. 즉 경제가 발전하면서 생산할 제품의 종류와 수가 다양해져 중앙계획이 갈수록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장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임. 그러나 문제는 공산주의의 중앙계획 시스템이 견고한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장의 기본전제에 있음. 이것은 생산수단을 사회가 소유하고 사전조정을 통해 시장경제 시스템보다 결제를 훨씬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전제임. 지식의 문제와 더불어 공산주의가 실패한 또 다른 원인은 재산을 개인이 소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윤동기가 사라진 데 있음. 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계획과 자본가가 생산하는 물량 사이의 괴리때문에 나타나는 생산의 무정부성을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중앙계획 시스템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견고한 논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소위 생산의 사회화 원인을 간과한 것. 소위 생산의 사회화라 일컫는 현상은 사적 소유가 보장되는 시장경제에서 개인들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 행하는 분업 및 자발적 협조에 의해 거래, 생산, 전문화가 확대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가 철폐되면 이윤동기가 제거되고 이에 근거한 시장에서의 거래, 생산 및 분업 그리고 전문화의 확대가 나타나지 않게 됨. 소유관게의 변화는 사회적 협조의 기반인 이윤동기라는 유인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를 대체한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정부의 명령과 지시를 통해서만 작동될 수 있음.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개인들이 혁신과 전문화를 꾀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발적 협조에 의한 생산과 분업의 확대를 기대하기 어려움.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지식의 문제와 더불어 이윤동기의 문제점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음

20. 기회의 균등의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 결과가 균등하면 발전이 없다
- 장은 소득재분배를 통해 결과의 균등을 달성하지 않으면 교육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정책은 성과가 제한적이고, 외부의 충격 탓에 발생하는 구조적 실업처럼 인적자본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는 현상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주장. 그러나 장은 소득재분배 정책이 근로자 스스로 인적자본을 축적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키고, 민간 재취업 서비스 시장의 성장을 위축시켜서 실업을 만성화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음. 실제로 OECD 유럽 선진국들은 정부가 취업알선을 위해서 GDP의 1.3%를 지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년 이상 장기실업자들이 실업자의 34.6%에 달함. 결국 결과의 균등은 구조적 실업문제를 해소하기보다 더 악화시킴. 그래서 선진국들은 주로 학교 환경의 균등화에 초점을 맞추고 소득재분배보다는 유자녀 가족에 대한 조세 특례와 같이 양육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노동시장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음. 장의 표현을 빌리면 결과의 균등은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장기실업을 만성화시키는 문제가 있다.

21.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 북유럽 국가들도 실업률 때문에 고민한다
- 장은 복지지출이 근로의욕을 약화시킨다는 문제점을 과소평가. 장이 지적한 대로 복지지출은 직업탐색 비용을 줄여서 직업이전을 촉진하지만, 동시에 직종간 임금격차를 줄여서 직업을 이전할 자유를 없앰. 그뿐 아니라 저소득층의 근로소득과 실업소득간 격차가 축소되므로 저소득층이 노동시장에서 이탈할 우려가 있음. 실제로 실업자에 대한 소득지원 규모가 큰 국가일수록 실업자 중 장기 실업자 비중이 높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선진국들은 80년대 이후 실업자에 대한 소득지원을 점차 감축하고 있음.

22. 금융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 금융시장에서 자본의 신속한 이동이 중요하다
- 장은 자본의 신속한 이동이 기업간 경쟁을 촉진하여 생산성을 제고하는 효과를 무시. 그의 주장과 달리 단기차익의 추구만이 자본이동의 목적이 아님. 금융시장의 역할은 자본을 수익률이 높은 투자인에게 집중하는 것. 자본이동이 활발한 금융시장에서는 다양한 투자안에 대한 실험이 가능하고, 그 실험의 실적에 따라 투자에 대한 수익률이 높은 기업에게 자본이 우선적으로 배분됨. 따라서 개별기업의 입장에서는 자본이 너무 신속하게 철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생산성이 높은 기업에 투자가 집중되는 장점이 있음. 이런 장점은 특히 기술진보의 속도가 빨라서 투자의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성과가 두드러짐.
- 금융시장의 중요기능은 생산성 있는 기업에 자본을 우선적으로 공급하는 경쟁촉진 기능임. 이런 기능이 원활하게 발휘되려면 자본이동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함. 그렇지 않으면 부실대출이 축적되어 경기침체가 발생하고, 기업간 경쟁은 억제되어 생산성이 침체될 위험이 높음
- 장은 자본이동이 억제되고 기업들에게 장기투자자금이 제공될 경우 경기불안이 해소되고 경제성장이 촉진된다고 주장. 실제로 장기투자자금을 제공하는 데 성공한 독일과 일본의 대형은행들은 2차대전 이후 이들 국가의 고속성장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인정됨. 그러나 이들 대형은행들은 부실대출 정리를 지연시키고, 신규기업의 진입을 어렵게 하여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 또한 대형은행들의 부실대출이 누적될 경우 대규모 경제위기가 촉발될 수 있음. 90년대 이후 벌어진 일본의 장기경기침체의 주된 요인은 은행부문의 부실대출 누적으로 인한 투자의 침체현상이었음. 그리고 30년대 세계 대공황은 23년 오스트리아 크레딧 안슈탈트 은행이 부실대출로 파산하면서 촉발되었음. 따라서 자본이동이 억제된다고 해도 항상 경제성장이 촉진되고 경기변동이 축소되는 것은 아님. 장은 장기투자자본의 이런 위험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있다.
- 장이 장기투자자본은 장점만을, 자본이옫에 대해서는 단점만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자본의 수요자인 기업의 입장에서만 금융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 기업의 시각에서는 금융서비스는 기업의 투자를 원활하게 하는 역할만 수행하면 됨. 따라서 자본은 공급자인 투자자로부터 기업으로만 이동하면 되는 것이지, 한 기업에서 다른 기업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음. 그러나 국민경제의 입장에서 금융시장이 보다 중요한 기능은 투자가치에 따라 자본을 배분하여 제한된 자본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자본이 국경과 산업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한 손쉽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함. 즉, 경제성장은 금융시장이 효율적이어야 달성할 수 있음. 특히 최근 정보통신 혁명으로 기술진보의 속도가 빨라져서 투자의 불확실성이 높음. 이렇게 개별투자의 실패가능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실패한 투자에서 자본을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효율적 자본시장의 존재가 경제성장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음. 실제로 정보통신혁명을 미국이 선도한 이유는 시장형 금융이 발달한 금융시장을 보유하여 자본의 이동이 신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
- 장의 주장은 결국 금융시장이 투자대상을 선별하는 기능보다는 유동성 공급기능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가능. 그의 주장은 투자의 불확실성이 비교적 낮고, 대규모 재원 투입이 필요한 시기에는 유효함. 그러나 투자의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음. 불확실성이 높으면 투자대상의 선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자본이동이 활발하지 않으면 이런 오류를 교정하기 어렵기 때문. 투자의 불확실성이 높은 혁신기반 성장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금융시장이 효율적이어야 함. 금융시장의 기능은 자본의 선택과 집중이라고 요약할 수 있음. 금융시장은 투자가치가 높은 투자대상을 선택하고, 그 선택한 대상에 자본을 집중함. 이 선택과 집중 두가지 기능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관계가 있음. 적절한 선택을 위해서는 자본이 신속하게 이동하여야 하는 반면, 집중을 위해서는 자본이 이동하기보다는 특정기업에 지속적으로 투입되어야 함. 시장형 금융환경에서는 기업의 투자정보가 공개되어 투자자들의 선택이 가능하므로 선택기능에서 비교우위가 있으며, 관계형 금융시장은 은행이 기업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는 대신 감시비용을 지불하면서 자본을 집중할 수 있어서 집중기능에서 비교우위가 있음. 80년대 이후 금융자율화 정책은 선택기능을 강화하는 정책이었으며, 반면 장의 주장은 선택보다는 집중기능을 강화하자는 것. 장은 50~70년대전반까지 관계형 금융시장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장기자본공급이 이러한 성과의 요체라고 주장. 그런데 관계형 금융시장은 기존기업에 유리하고 신규기업에 불리하므로, 기업간 경쟁을 통해 투자대상을 선별하는 기능이 취약. 따라서 관계형 금융시장의 투자성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선별기능이 중요하지 않은 상황이거나 선별기능이 보강되어야 함

23. 좋은 경제정책을 세우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 : 신고전파, 경제위기의 주범이 아니다
- 장은 자유주의 경제학이 아닌 경제학을 주목할 것을 주장함. 그러나 장은 80년대에 신고전파 경제학이 도입된 계기인 70년대 중반~80년대 중반 고물가, 저성장 현상을 무시하고, 이를 극복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성과를 부정. 신고전파 경제학은 정부의 한계를 인정하고, 정부의 시장개입을 친시장적으로 국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신고전파 경제학을 반영한 보수적 거시정책 기조가 정착됨. 방만한 통화 및 재정정책을 남발하던 정부의 개입은 축소되었고, 그 결과 물가는 안정되고 경기변동이 축소되었으며 성장률은 회복되었음. 장이 신고전파 경제학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개도국 외환위기와 08년 금융위기는 사실 신고전파 경제학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위기임. 대부분의 개도국 외환위기 및 08년 금융위기는 방만한 통화 및 재정정책, 그리고 국제경쟁력의 악화 때문. 방만한 통화 및 재정정책은 금융자산의 가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고, 국제경쟁력의 저하는 국제수지를 악화시켜 통화가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림. 금융위기는 이런 신뢰상실의 결과임. 보수적 통화 및 재정정책, 정부개입의 자제를 통한 경쟁력의 강화를 추진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결과가 금융위기라고 보기는 어려움.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버드의 세계를 움직이는 수업  (0) 2015.05.22
오래된 질문 새로운 답변  (0) 2015.05.15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0) 2015.05.03
한국의 경제학자들  (0) 2015.04.24
신호와 소음  (0) 2015.04.09
Posted by dalai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저자
장하준 지음
출판사
부키 | 2010-11-08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교수의 3년 만의 신작 그가 전하는...
가격비교

 

-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유시장 정책은 금융위기 전부터 대부분의 나라에 성장이 둔화되고 불평등과 불안정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가져오고 있었다. 부자나라들에서는 막대한 신용확대 조치로 이 문제를 덮어왔다. 70년대 이후 미국의 임금수준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노동시간은 늘어났다는 사실을 신용확대에 힘입은 소비붐으로 눈가림해 온 것. 부자나라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개도국들이 당면한 문제는 한흥 더 심각함.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 국가들의 생활수준은 지난 30여년간 전혀 향상되지 않았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1인당 성장률은 3분의 2가 떨어졌다. 같은 기간 동안 중국과 인도처럼 비록 불평등은 심화되었짐나 급속한 성장을 이룬 나라들도 있음. 그러나 이 나라들은 부분적인 자유화만을 허용하면서 본격적인 자유시장 정책은 도입하기를 거부한 곳들이다.
1.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 자유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가 있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시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여러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도 없음. 자유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님.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임.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
- 자유무역대 공정무역을 둘러싼 요즘 논쟁의 이면에도 이런 가치관의 충돌이 깔려 있음. 많은 미국인들은 중국이 자유롭게 무역을 하는지는 몰라도 공정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함.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저임금에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제품을 파는 중국은 공정하지 못한 경쟁을 하는 상대임. 반대로 중국인들은 선진국이 자유무역을 옹호한다고 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을 기반으로 생산된 제품들에 대한 수입제한 같은 방식으로 중국산 수출품에 인위적 장벽을 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라고 반박할 수 있음.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갖고 있는 가장 풍부한 단 하나의 자원인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는 데 제약을 받는 것은 부당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공정무역을 둘러싼 논쟁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결정에 관한 문제이지 통상적 의미의 경제학적 논쟁은 아니다. 경제 문제에 관한 것이기는 하나 경제학자들이 하는 잣대로 재서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 시장의 경제가 모호하며 객관적으로 결정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경제학이 물리학이나 화학같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음. 물론 자유시장을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은 우리가 시장의 올바른 경계를 과학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믿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연구하는 대상의 경계를 과학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과학적 연구라고 할 수 없음. 지금까지 보았듯이 새로운 규제에 대한 반대는 일부에서 아무리 현 상태가 부당하다고 지적해도 그대로 고수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또 기존의 규제를 철폐하자는 주장은 시장영역을 확대하자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시장은 1달러당 1표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만큼 돈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자는 의미다. 따라서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를 들어 특정 규제의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그 규제를 통해 보호될 권리들을 부정한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 표명에 불과함. 물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논리는 순전히 정치적인 반면 자신들의 논리는 객관적인 경제학적 진실이라고 우기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들만큼 정치적 의도를 갖고 행동하는 것이다. 시장은 객관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2.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된다
- 주주들이 법적으로는 기업의 주인일지 몰라도 그들은 기업의 이해당사자 중에서 가장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고, 따라서 기업의 장기전망에 가장 관심이 없는 집단이다. 보유주식을 다 팔 경우 해당 기업이 위기에 빠질 정도로 지분이 많은 대주주 외에는 주식을 팔고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 주주들, 특히 소액주주들이 장기투자를 줄여 이윤을 극대화하고 그 이윤에서 주주에 대한 배당을 극대화하는 단기수익 극대화 전략을 선호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이렇게되면 재투자에 필요한 유보이윤이 줄어들게 되므로 해당 기업의 장기전망은 악화됨. 주주들을 위한 기업경영이 결국 기업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킴.
- 16세기에 발명은 되었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유한책임 회사를 세우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음. 유한회사를 설립하려면 왕실이나 정부에서 특별허가를 받아야 했다. 또 회사를 100% 소유하지 않고 유하회사 형태로 운영하는 경영자는 리스크를 100% 자기가 부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도하게 위험한 사업을 하리라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 의견이었다. 마찬가지로 유한회사의 경영에 참여하지 않은 투자자는 리스크의 한도가 각자의 투자액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고용한 전문경영인을 감시하는 데 소홀하리라는 것이 중론이었음. 경제학의 시조이자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수호성인인 애덤 스미스가 유한책임의 원칙에 반대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음. 그의 유명한 말처럼 "공동자본 회사의 이사진은 .....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을 관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한책임을 전제로 하는 합명회사 파트너들이 자기 돈을 지키듯이 남의 돈을 관리하리라는 기대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럽국가들은 규모가 크고 리스크가 높으면서 국익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업에 한해서만 예외적으로 유한회사의 설립인가를 내주었음.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그 최대 라이벌인 영국 동인도 회사, 1721년 투기붐을 일으켜 유한책임제도의 인상을 오랫동안 망쳐 놓은 그 악명놓은 영국의 남해회사가 대표적 사례. 그러던 중 19세기 중반 철도나 철강, 화학공업 같은 대규모 산업이 등장하면서 유한책임의 필요성이 절실해짐. 제철공장이나 철도회사를 단독으로 설립할 수 있을만큼 막대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 이후 유한책임은 1844년 스웨덴과 1856년에 영국을 시작으로 하여 1860년대 및 1870년대를 거쳐 서유럽과 북미 국가들 대부분에서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유한책임에 대한 의구심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서유럽의 기업가 활동에 관한 한 유명한 역사 연구서에 따르면, 유한책임이 일반화되고 몇십년이 지난 19세기 말 영국에서도 기업을 소유하고 직접 경영하는 중소기업인이 법인(유한회사)이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자기기업의 채무에 대해 완전히 책임지는 것을 피하려 하면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 노동자를 비롯하여 다른 이해당사자들에게 돌아가던 소득 중 많은 부분이 이윤으로 재분배된 것도 문제였지만 80년대 이후 국민소득에서 이윤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음에도 그것이 투자확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 미국 국민총생산에서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80년대에는 20.5%였으나, 그 이후 90~09년 동안에는 증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18.7%로 떨어짐. 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낮은 투자율을 상쇄하고 성장률을 놓였담녀 투자율 감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음. 하지만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연간 약 2.6% 증가하던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주주 자본주의 시대의 전성기라 할 90년부터 09년까지 연간 1.6% 증가하는 데 그침. 기업행태에서 미국과 유사한 변화를 보였던 영국도 1인당 국민소득이 영국병을 앓던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는 연간 약 2.4% 증가했으나, 정작 90년부터 09년까지는 1.7% 증가하는 데 머무름. 이렇듯 주주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면 그에 따른 상류층으로의 소득재분배 문제를 무시한다 해도 경제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음

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 잘사는 나라과 못사는 나라의 임금격차는 개인의 생산성이 달라서가 아니라 각 정부의 이민정책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라간의 이주가 자유롭다면 잘 사는 나라의 일자리는 대부분 못하는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차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임금이라는 것은 정치적 결정의 산물. 이것을 뒤집어 보면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것은 가난한 계층의 국민즐 때문이 아니라 부유한 계층의 국민들 때문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사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잘사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지만,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부자나라의 부자들에 비해 경쟁력이 높지 않기 때문. 하지만 이는 부자나라의 부자들이 개인적으로 특별히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님. 이들의 높은 생산성은 단지 역사적으로 축적해 온 다양한 제도들 덕분일 확률이 높기 때문.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개인의 가치에 맞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
- 자신들의 높은 생산성 덕에 자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부자나라의 부자들이 너무 의기양양할 것에 대비해 한가지 경고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부자나라의 어떤 개인이 비슷한 일을 하는 가난한 나라의 개인보다 실질적으로 생산성이 월등히 높은 분야에서조차, 그 격차는 개인의 능력차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의 차이에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 부자나라의 일부 개인이 가난한 나라의 동일 직종 종사자에 비해 생산성이 수백배나 높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머리가 더 좋다거나 교육을 더 잘 받았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안됨. 그들은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조직, 더 나은 제도와 물리적 인프라를 가진 경제환경에서 살기에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수세대에 축적된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다.

4.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 변화를 인식할 때 우리는 가장 최근의 것을 가장 혁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름. 예를 들어 최근 전자통신 기술상의 발전은 상대적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후반의 전보만큼 혁명적이라고 할 수 없음. 인터넷 혁명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만큼 크지 않음. 가전제품은 집안일에 들이는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줌으로써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을 촉진했고, 가사 노동자와 같은 직업을 거의 사라지게 만듬. 과거를 돌아볼 때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아서는 안된다. 옛것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되고 새것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됨. 그렇게 할 경우 국가의 경제정책이나 기업의 정책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의 직업과 관련해서도 여러가지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됨
- 사람들이 전신서비스나 세탁기보다 인터넷이 더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사람들이 가장 최근에 일어난 변화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해서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런 왜곡된 시각이 단지 개개인의 견해에 그친다면 별 문제가 아님.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귀중한 자원이 잘못 쓰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일부 선진국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 기술혁명에 마음이 팔려 이제는 구닥다리 제조업은 필요없고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다. 그에 따라 많은 나라들이 탈산업화 사회의 시대가 왔다고 철석같이 믿고 제조업을 홀대하여 자국경제를 약화시켰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선진국 사람들이 인터넷에 매료되면서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정보격차가 국제문제화되고, 이에 따라 많은 기업이나 자선단체, 개인들이 개도국에 컴퓨터와 인터넷 설비를 갖추라고 많은 돈을 기부한다는 사실. 그러나 과연 정보격차 해소가 개도국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일까? 개도국 아이들에게 노트북 컴퓨터 한대씩 마련해주고, 시골마을마다 인터넷 센터를 세워주는 것이 도움은 될터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우물을 파주고, 전기를 넣어주며, 세탁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비록 고리타분해 보일지는 모르나 실제 개도국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는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우물이나 전기, 세탁기 같은 것이 반드시 컴퓨터나 인터넷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많은 기부자들이 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경우 거둘 수 있는 혜택을 장기적 관점에서 비용과 비교해 가며 면밀하게 평가해 보지도 않은 채 그저 그럴싸해 보이는 프로그램에 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 이기심은 대부분의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본성중 하나지만, 유일한 본성도 아니고 많은 경우 인간행동의 중요한 동기도 아님. 사실 세상이 경제학 교과서에서 묘사하는 이기심 가득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인 사람을 잡아내고, 잡은 사람을 벌주는 데 온 시간을 써야 할테니 말이다. 세상이 지금처럼 돌아가는 이유는 인간이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이 믿듯이 전적으로 이기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제제도는 사람들이 이기심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은 하되 인간의 다른 본성들을 모두 활용하고 사람들이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제도일 것. 결국 최악의 행동을 기대하면 최악의 행동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 도덕성을 착시현상이 아니다. 고객을 속이지 않는 상인,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쥐꼬리 월급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지 않은 공무원 등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장치도 중요. 그러나 그것으로는 우리가 하는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없다. 그 장치의 존재자체가 우리가 전적으로 이기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음에야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하랴. "사회공동체라는 것은 없다. 오직 남자, 여자라는 개인, 그리고 가족단위만 존재할 뿐이다." 라는 대처의 주장과 달리 인간은 사회라는 울타리 없이 고립된 이기적 존재로 살아온적이 없다. 우리 모두는 도덕적 규범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안에서 태어나 그 규범들을 내것으로 만드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행동동기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늘 자기이익을 쫓는다면 상거래에 속임수가 만연하고, 생산라인이 너무 느려지는 등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런 전제를 기반으로 경제구조를 설계하면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떨어진다는 점.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 주체로 신뢰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고, 결과적으로 도덕적 행동을 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을 감시, 판단, 제재하는 데 엄청난 자원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최악의 행동을 할 것이라 예상하면 결국 최악의 행동을 하게 된다.

6. 거시경제의 안정은 세계경제의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 인플레이션을 길들였는지 모르지만 세계경제는 상당히 더 불안해졌다. 지난 30년 사이에 물가변동을 잡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흥분해서 우리는 같은 기간동안 전 세계 여러 나라가 겪어온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상황을 못본척 했다. 그 사이 수많은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과도한 개인채무, 파산, 실업 등으로 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던 08년 금융위기도 그 한 사례. 인플레이션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우리는 완전고용이나 경제성장같은 중요한 문제에 충분히 신경쓰지 못했다.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미명아래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불안해졌다. 물가안정이 성장의 전제조건이라고들 주장하지만, 9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에 고삐를 매었음에도 성장률은 미미했따. 바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성장을 둔화시켰기 때문.
- 인플레이션을 2~3% 이하로 끌어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정책들이 실제로는 투자를 저해하는 부작용을 낳음. 실질금리가 8~12%에 달하면 투자자들은 실물투자를 꺼림. 어디에 투자를 해도 7% 이상의 이윤을 내기 어렵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이윤을 많이 낼 수 있는 방법은 고위험, 고수익의 금융자산에 투자하는 것 뿐이다. 금융투자는 얼마동안은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창출된 성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함. 결국 실물부문에 대한 장기투자로 뒷받침되지 않는 금융투자는 08년 금융위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사상누각이기 때문
- 문제는 물가안정이 경제안정도를 측정하는 여러 지표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사실 물가안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제안정의 지표도 아님. 사람들의 삶을 흔드는 가장 큰 사건은 일자리를 잃거나, 하는 일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 혹은 금융위기가 몰아닥쳐 집을 차압당하는 것들이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물가가 오르는 것은 위 사건들에 비해 아무것도 아님.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히 말해보자. 물가상승률이 2%일때와 4%일때의 차이를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길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반 인플레이션 투사들이 예고했던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물가안정과 잦은 금융위기, 고용불안 증대 등 물가로 표시되지 않는 경제불안 요소들이 공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님. 이 현상들은 모두 동일한 자유시장 정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신자유주의 정책 패키지로도 알려진 자유시장 정책 패키지의 일련의 정책들은 낮은 인플레이션, 자유로운 자본이동, 그리고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미사여구로 표현되는) 높은 고용불안정성 등을 중시함. 기본적으로 금융자산 보유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 정책들이 입안된 것. 인플레이션을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금융자산의 수익은 대부분 명목상 고정되어 있어 물가가 오르면 상대적으로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 금융자산은 물적, 인적 자산보다 더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잇는 성질 덕분에 다른 자산에 비해 더 높은 이윤을 낼 수 있음. 금융자산은 바로 이런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 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금융투자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자들의 고용, 해고 절차를 쉽게 하면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더 쉬워져서 당장 보기좋은 대차대조표를 만들기가 용이해지므로 기업매매가 원활해져 높은 금융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

7. 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 통상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정반대로 개도국들의 경제실적은 국가주도의 발전을 꾀하던 시절이 그 뒤를 이어 시장지향적 개혁을 추진할 때보다 훨씬 나았다. 국가가 개입해서 그야말로 엄청난 실패로 끝난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시장 지향적 개혁기간보다 이른바 어두운 과거 시절 훨씬 더 빠른 성장과 비교적 고른 분배를 이루었고 금융위기도 훨씬 적었음. 게다가 대부분의 부자나라들이 자유시장 정책 덕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님.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편에 가까움.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이라는 논거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을 포함하여 현재 잘살고 있는 나라들은 모두 보호무역과 정부보조금을 통해 오늘의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보호무역주의, 정부 보조금 지원 등의 정책들이야말로 요즘 부자나라들이 개도국들에게 하면 안된다고 설파나는 것들인데도 말이다. 자유시장 정책을 써서 부자가 된 나라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 날마다 수천만 미국인들이 택시를 타고, 샌드위치를 사면서 해밀턴과 링컨으로 지불을 하고, 거스름돈으로 워싱턴을 받는다. 존경해 마지 않는 이 정치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좌파, 우파에 관계없이 미국의 모든 신문방송에서 공격해대는 그 못된 보호무역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외국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밀어붙인다는 기사를 읽으며 혀를 찰 뉴욕의 은행가들과 시카고 대학의 교수들도 그 기사를 실은 월스트리트 저널을 살 때 쓴 앤드류 잭슨이 차베스보다 훨씬 더 외국인 차별을 심하게 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죽은 대통령들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노예노동에 의존했던 2류 농업국가를 세계 최강의 산업부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들이 사용했던 정책들은 21세기 후손들이 신봉하는 정책과 정반대라는 것을 미국과 전 세계 시민에게 증언했을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무역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영국은 해밀턴이 주장한 것들과 비슷한 정책으로 부를 축적.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유치산업론을 이론으로 정리한 최초의 인물은 해밀턴이지만 그가 사용한 정책들 중 많은 부분은 1721년부터 42년 사이 영국을 다스렸던 이른바 최초의 대영제국 수상 로버트 월폴에게서 베께온 것들이다. 1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영국은 모직산업에 진출. 그때까지는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을 가리키는) 로우컨트리가 주도하는 하이테크 산업이었던 이 분야에 진출한 영국 모직 제조업자들은 월폴과 그 계승자들이 제공한 관세, 보조금 등의 정부지원을 받아 성장. 얼마 가지 않아 모직물은 영국의 주요 수출상품으로 자리잡았고,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산업혁명에 필요한 식량과 원자재를 사는 데 사용됨.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산업적 우위를 확보한 1860년대에 이르러서야 영국은 비로소 자유무역을 시작. 미국이 183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 경제도약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보호주의적 정책을 고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 또한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 즉 1720년대에서 1850년대 사이에는 가장 보호주의적인 나라 중 하나였음. 현대 선진국들 중 유치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과 보조금 정책을 사용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일본, 핀란드, 한국 등 많은 나라가 외국인 투자를 강력하게 규제. 193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핀란드는 외국인 지분이 20% 이상 되는 기업들을 공식적으로 위험기업으로 분류. 프랑스, 오스트리아, 핀란드, 싱가포르, 타이완 등 여러 나라들이 주요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국영기업을 세움. 자유무역 정책을 쓰고 외국인 투자를 환영하기로 이름난 싱가포르는 국내총생산에서 국영기업의 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평균 10%의 두배인 20%가 넘는다. 현재 부자가 된 나라들 중에 외국인의 지적소유권을 잘 보호해주었던 나라도 별로 없다. 외국인의 발명품을 내국인이 자기 이름으로 특허내는 것을 허용하는 나라도 많았다.

8. 자본에도 국적이 있다
- 점덤 더 많은 자본이 초국화되어 가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초국적 기업들은 국적이 없는 기업이 되기보다는 사실상 해외지사를 둔 단일국적기업으로 남아 있다. 핵심기술 개발이나 전략설정 등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대부분 본국에서 이루어지고 최고 경영진도 대개 본국 국적을 지닌 사람들로 채워짐. 공장문을 닫거나 일자리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다양한 정치적 이유와 그보다 더 중요한 경제적 이유에서 대개 본국의 공장과 일자리를 가장 나중에 없앰. 이 말은 초국적 기업이 가진 혜택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의미. 기업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 국적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의 국적을 무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외국인 투자가 많은 경우 새로운 생산시설을 설립하는 그린필드 투자가 아니라 기존기업을 인수하는 브라운필드 투자라는 사실. 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외국인 직접투자 중 브라운필드 투자가 절반 넘게 차지. 국제적 인수합병 붐이 최고조에 달했던 01년에는 이 수치가 80%까지 육박하기도 했음. 이 말은 외국인 직접투자의 많은 부분이 생산이나 고용을 새로 창출해낸 것이 아니라 기존 기업의 경영권 인수에 집중되었다는 의미. 물론 카를로스 곤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새로운 경영주가 피인수 기업에 보다 뛰어난 경영기술 역량을 투입하여 병들어 쓰러져가던 기업을 소생시키는 경우도 있음. 그러나 인수된 기업이 이미 지니고 있던 역량을 할용할 목적으로 이뤄지는 인수합병도 아주 흔하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외국기업이 자국기업을 인수했을 경우 인수기업의 자국편향적 특성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피인수 기업 직원들이 그 기업내에서 승진하는 데 한계가 생긴다. 그린필드 투자에서도 자국편향은 고려해야 할 요소. 그린필드 투자가 새로운 생산시설을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그 대안, 즉 투자가 새로운 생산시설을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그 대안, 즉 투자가 전혀 없는 상태보다는 이론적으로 더 나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투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정책 입안자들이 고려해야 할 점은 앞으로 그 나라경제가 나아갈 방향에 이 투자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하는 것이다. 기업활동의 종류에 따라 기술혁신과 생산성 증가를 가져올 잠재력도 다르다. 오늘 무슨일을 하는가가 미래에 어떤 일을 하게될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거두게 될지를 결정한다. 미국 산업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80년대 유행하던 말처럼, 만들어내는 내용물이 감자칩인지 나무칩인지 마이크로칩인지 상관없다는 듯이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기업이라면 마이크로칩보다는 감자칩이나 나무칩을 생산하고 싶어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9.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우리들 중 대다수가 이제는 공장에서 일하는 대신 상점이나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탈삽업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조업 부문이 덜 중요해졌다는 의미에서 탈산업화 시대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총생산에서 제조업 생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든 것은 대부분 제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가격이 서비스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이지 제조업 생산량의 절대량이 줄어서가 아니다. 이렇게 제조업 생산품의 가격이 낮아진 것은 제조업 분야의 생산성이 서비스업 분야보다 더 빨리 증가하기 때문. 탈산업화 현상이라는 것이 서비스 부문과 제조업 부문이 서로 다른 속도로 성장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경제전반에 걸친 생산성 향상과 국제수지 면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개도국들이 산업화 단계를 건너뛰고 탈산업화 단계에 곧바로 진입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허상에 불과. 서비스 산업은 생산성이 증가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기 힘들다. 또 서비스 상품은 교역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서비스 산업에 기초한 경제는 수출능력이 떨어짐. 수출에서 얻는 수입이 적으면 해외에서 선진기술을 사들일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고 결국 경제성장의 속도도 느려짐
- 부자나라들의 국민총생산에서 제조업 비중이 줄어든 주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조업 제품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하락했기 때문이 아님. 중국이나 다른 개도국 제조업 제품의 수입이 대거 늘어나서 그런 것도 아님. 이런 수입제품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는 것은 몇몇 부문에 국한되어 있다. 이른바 탈산업화 현상은 제조업 부문의 급속한 생산성 향상에 따라 제조업 제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하락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 따라서 부자나라들의 국민들은 고용의 측면에서 보자면 탈산업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직 탈산업사회를 공언할 정도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 가난한 나라가 서비스 산업을 기반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함. 서비스 부문은 본질적으로 제조업보다 생산성 증가속도가 느림. 물론 지식기반 서비스처럼 생산성이 향상될 잠재력이 큰 부문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식기반 서비스업은 주로 제조업체를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는 이런 서비스업들을 발전시키기가 상당히 어려움. 결국 처음부터 서비스 산업에 기반을 두고 경제개발을 추진할 경우 제조업에 기반을 둔 경우에 비해 장기적 생산성 증가율이 훨씬 더 떨어질 수밖에 없음. 더구나 서비스 상품은 교역가능성이 떨어지느 만큼 서비스 생산에 특화된 나라는 제조업 생산에 특화된 나라보다 국제수지에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음. 국제수지에 문제가 생기면 장기적으로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떨어지게 되므로 선진국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개도국에게는 치명적인 것. 개도국은 경제개발을 위해 해외의 선진기술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개도국의 국제수지에 문제가 생기면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능력 자체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
- 스위스와 싱가포르의 실제 모습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다름. 실제로 이들은 제조업 성공신화를 일군 나라임. 사람들은 흔히 스위스가 제3세계 독재자들이 은행에 예치해 놓은 비자금이나 관리해주면서, 혹은 일본이나 미국 관광객들에게 소 목에 매다는 방울이나 뻐꾸기 시계 따위나 팔아먹고 산다고 생각함. 그러나 스위스는 세계 최고수준의 공업경제를 이룩한 나라. 우리가 스위스산 제품을 흔히 볼 수 없는 것은 스위스가 인구 700만명의 작은 나라여서 제조업 제품 생산량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다 그마저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소비재가 아니라 기계류나 화학제품 같은 생산재가 대부분이기 때문. 그러나 스위스는 1인당 제조업 제품생산량이 세계 최고수준인 나라이다. 싱가폴 역시 세계에서 제조업이 강하기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이다. (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 기준). 지금까지 나온 일본, 스위스, 싱가폴, 핀란드와 스웨덴을 더하면 제조업 부문의 세계 최강 5개국이 된다. 인구가 8만 5000명에 1인당 국민소득은 9000달러 정도인 세이셸처럼 매우 작고 관광자원이 풍부한 나라를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서비스 산업에 의존하여 괜찮은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는 나라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10.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 평균소득으로 따져볼 때 미국인들은 룩셈부르크를 제외한 다른 선진국 국민들에 비해 재화와 서비스를 살 수 있는 구매력이 가장 높음. 그러나 소득분배가 극도로 불균등한 미국과 상대적으로 소득분배가 고른 다른 선진국을 이렇게 평균소득만 비교해서는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짐작하기가 어려움. 이 불균등한 소득분배 현상은 미국의 건강지표가 좋지 않고 범죄율이 높은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함. 게다가 미국이 다른 선진국보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살 수 있는 이유는 이민이 많고 고용조건이 열악한 덕에 상대적으로 서비스가 싸기 때문. 이와 더불어 미국인들은 유럽인들에 비해 일을 훨씬 더 오래한다. 같은시간 일하는 것으로 계산하면 미국인들보다 유럽인들의 구매력이 더 높아짐. 미국인들처럼 여가시간보다는 물건을 많이 갖는 쪽이 더 나은 삶이냐, 유럽인들처럼 물건을 더 살 돈보다는 여가시간을 확보하는 쪽이 더 나은 삶이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미국이 다른 부자나라들에 비해 생활수준이 더 높은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1.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 아프리카가 늘 정체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구조적 문제가 그대로 있었고 경우에 따라 더 심했던 60년대와 70년대에 아프리카는 상당한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발목을 잡는다고 간주되는 구조적 문제들 중 대부분은 오늘날 부자가 된 나라들도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다. 나쁜 기후, 내륙국가, 풍부한 천연자원, 민족분쟁, 바람직하지 않은 문화 등 그야말로 빠진 것 없이 다 갖추고 있었다. 이런 구조적 문제가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이런 장애요인이 낳는 문제를 처리할 만한 기술적, 제도적, 조직적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 지난 30년 동안 아프리카의 정체를 불러온 진짜 요인은 이 지역 국가들이 추진하도록 강요받았던 자유시장 경제정책임. 역사나 지리적 요건과는 달리 정책은 변화시킬 수 있음.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 구조적 문제는 늘 있는 것이고, 그나마 시간이 흐르면서 그 영향력이 줄어들면 들었지 더 심화되지는 않았을 터이므로 1960년대와 70년대에 잘 성장하고 있던 아프리카 경제가 80년대와서 갑자기 성장을 멈춘 현상은 이 구조적 문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음. 이와 관련하여 가장 혐의가 짙은 것은 당시 진행되었던 정책방향의 극적인 변화였다. 79년 세네갈을 필두로 해서 70년대 말부터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 지역 국가들은 세계은행과 IMF 그리고 이 기관들을 조정하는 배후의 부자나라들이 제시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조건으로 따라 온 자유시장,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 일반적인 통념과는 반대로 이 정책들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음. 이 정책들로 인해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제품들이 국제경쟁 무대에 갑자기 노출되었고, 그나마 60년대와 70년대에 가까스로 성장시켜 놓은 일부 제조업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시 코코아, 커피, 동과 같은 1차 산품의 수출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아프리카 나라들은 이런 산품들을 특징짓는 극심한 국제가격변동과 정체된 생산기술에 계속 고통을 겪어야 했음. 여기에 더해 구조조정 프로그램에서 수출을 늘려야 한다고 요구하자 아프리카 각국은 모두 비슷한 제품을 수출하기 시작. 보유한 기술로 생산할 수 있는 것들이 몇가지 밖에 없기 때문. 그것이 코코아, 커피같은 전통 생산물이 되었든 화훼류 수출이 되었든 갑자기 많은 나라가 동시에 같은 제품을 공급하면서, 늘어나는 공급량으로 인해 가격이 폭락하는 일이 잦아짐. 심지어 수출량은 늘어도 총수입은 주는 사태까지 생김. 예산적자를 줄이라는 압력을 받아 줄어든 정부지출의 영향은 금방 나타나지는 않지만 서서히 취약한 사회간접자본 등으로 그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의 지리적 약점이 더 부각되어 보였다.

12. 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
- 정부는 유망주를 고를 능력이 있고 그렇게 한 선택이 놀라울 정도로 성공한 사례도 많음. 편견없이 둘러보면 전 세계에 정부가 유망주를 제대로 고른 사례들이 널려 있음. 기업활동에 영향을 주는 정부의 결정은 기업들이 직접 내리는 결정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근거없는 주장. 더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다 해서 항상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님. 사실 너무 많은 정보에 파묻혀 있으면 오히려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질 수도 있음. 그리고 정부는 필요하면 더 나은 정보를 획득하여 의사결정의 질을 높일수도 있음. 게다가 개별기업에는 도움이 되더라도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결정들도 있음. 따라서 정부가 시장의 움직임에 역행하는 유망주를 골랐다 하더라도 특히 그 결정이 민간부문과 긴밀한 협력하에 진행되었다면 국민경제를 향상시키는 결과가 나올 수 있음.

13.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 트리클다운 경제학으로 알려진 이 주장은 첫번째 장애물에서 넘어지고 만다. 일반적으로 성장을 촉진한느 부자들을 위한 정책, 그리고 성장감소를 부르는 빈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의미를 양분해서 말하는데, 실제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은 지난 30년의 세월동안 성장을 가속화하는 데 실패했음. 따라서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조각을 주면 결국에는 전체 파이가 커진다는 트리클다운 이론의 첫번째 단계는 설득력이 없음. 또 두번째 단계, 즉 윗부분에서 창출된 보다 큰 부가 흘러내려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며든다는 이른바 트리클다운 현상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트리클다운 현상이 조금씩 일어날수는 있으나 그것을 시장에 맡겨두면 그 효과는 미미하기 때문.
-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신분이 정해지고, 평생 그 상태로 살아야 하는 봉건적 질서는 18세기 이래로 유럽전역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은 출생신분이 아니라 성취한 것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음. 물론 이는 19세기에 살았던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자들, 특히 유럽에 있다면 자유주의자라기보다 중도좌파라 불렸을 미국 자유주의자들이 질색할 생각들을 많이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에 반대했음. 가난한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짓이라고 여겼음.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부를 축적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금욕을 꼽았다. 노동으로 돈을 벌면, 그것으로 즉각적인 욕망을 채우기보다 투자를 해야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금욕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인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 이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면 당장 부자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그것을 소비해 버릴 것이다. 이렇게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잠시 재미를 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전체 경제의 투자와 성장이 지체되어 더욱 가난해진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반감을 가진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정치논리는 고전파 경제학자들로부터 지적인 뒷받침을 받았다. 이런 고전파 경제학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 바로 19세기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임.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오늘날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자본주의 경제가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지 않았음.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는 자본가, 노동자, 지주라는 세 계급으로 구성되며,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행동하는 방식도 다르다고 보았음. 자본가들은 벌어들인 소득의 거의 전부를 투자하는데, 노동자나 지주들은 소득을 거의 소비한다는 것. 지주계급에 대해서는 학파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리카도 같은 사람들은 지주를 소비만 하면서 자본축적을 방해하는 계급으로 간주. 그러나 맬서스 등은 지주계급의 소비가 자본가들이 생산한 상품에 추가수요를 발생시켜 자본가들을 돕는다고 여김. 하지만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노동자들이 소득의 전부를 소비하기 때문에 국민소득에서 노동자들의 소득이 큰 부분을 차지할수록 투자와 경제성장은 위축될 것이라 보았음. 리카도같은 열렬한 자유시장론자와 프레오브라젠스키 같은 극좌파 공산주의자가 만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둘이 많이 다른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은 모두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극대화하려면 투자가능한 잉여생산물을 투자자의 손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 둘 사이에 다른 점은 이 투자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뿐이다. 잉여 생산물을 집중시켜야 하는 투자자는, 자유시장론자의 경우 자본가 계급이었고, 극좌파 공산주의자의 경우 계획경제 당국이었다. 오늘날 부를 재분배하기 전에 먼저 부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궁극적으로 잉여생산물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추진되기만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재분배가 경제성장까지 촉진한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많음. 예컨대 오늘날과 같은 불황기에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가난한 사람들들을 위한 소득재분배이다. 소득이 적을수록 가용소득에서 더 많은 몫을 지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 저소득 가계에 복지지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10억불을 추가지원할 때 얻을 수 있는 경기활성화효과는 같은 액수의 돈을 부자에게 감세해줄 때보다 더 크다. 더욱이 임금이 최저생계수준 혹은 그 이하가 아니라면 노동자들은 추가소득을 자신의 교육이나 건강에 더 투자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노동생산성과 경제성장이 촉진될 수 있음. 더욱이 소득분배가 보다 평등해지면 파업이나 범죄가 줄어들면서 사회적 평화가 이루어지고 이는 다시 투자를 촉진함. 사회적 평화가 이루어지면 재화를 생산하고 부를 생성하는 과정이 방해받을 위험이 줄어듬. 상당수의 학자들은 소득불평등의 수준이 낮으면서 빠른 경제성장이 일루어졌던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이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한 덕분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14.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
- 미국 경영자의 보수는 여러가지 면에서 너무 높다. 우선 전임자들에 비해서 너무 높다. 동시대 노동자들의 보수 평균과 비교해서 볼 때 오늘날 미국의 CEO들은 60년대 CEO들에 비해 10배를 더 받음. 상대적으로 60년대 CEO들의 경영 성적이 더 좋았음에도 말이다.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는 다른 부자 나라 경영자들과 비교해도 너무 높다. 측정방법과 비교대상 국가가 어디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비슷한 규모와 실적을 올리는 다른 나라 회사 경영진들에 비해 미국 경영자들은 절대기준으로 많게는 20배나 더 받음. 이들은 또 보수만 지나치게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경영부진에 대해서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음. 게다가 실제로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가 완전히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님. 미국의 경영자 계층이 지닌 경제적, 정치작, 이데올로기적 힘은 자신들의 보수를 결정하는 시장자체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음.

15.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밖에 없음. 어영부영하며 정처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이 한명 있다면 구두닦는 아이는 두세명, 행상은 너덧명 된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개인들에게 기업가 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산을 할 수 있는 기술과 현대식 기업같은 발달된 사회조직이 없어서이다. 개인의 창업을 돕는다는 목표를 내걸고 개도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의 돈을 빌려주는 마이크로크레디트 제도가 의도한 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만 봐도 개인의 기업가 정신이 갖는 한계를 짐작할 수 있음. 20세기에는 특히 기업가 정신을 구현하려면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음. 따라서 집단적 조직력의 부족이 개인의 기업가 정신의 부족현상보다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더 큰 장애요인이다.
- 마이크로 파이낸스 산업 관계자들은 초기에 자리를 잡기 위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정부보조금이나 해외원조를 받지 않고도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들이 흑자를 낼 수 있다고 항상 자랑해 옴. 어떤 사람은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도 기회만 주어지면 시장을 잘 이용할 능력이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음.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정부보조금이나 해외원조금을 받지 않으면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들도 돈을 빌려가는 사람들에게 이자를 물려야 하는데 그 이자율이 거의 고리대금업자 수준이었음. 그라민 은행은 초기에 적정 수준의 이자율을 적용했지만 이것은 오로지 아무도 모르게 방글라데시 정부와 해외원조 기관들에게서 보조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보조금을 받지 않은 회사들은 대개 40~50%에 달하는 대출이자를 부과해야 했으며,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는 심지어 80~100%까지도 부과한 것으로 밝혀짐. 90년대 말 보조금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자 그라민 은행도 2001년 회사를 재정비하고 40~50%의 이자율을 부과하기 시작. 이자가 많게는 100%까지 붙는 상황에서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을 정돌 이윤을 낼 사업은 거의 없다. 따라서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으로부터 받은 대출금 대부분은 갑자기 궁해진 돈을 메우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딸의 결혼자금을 댄다던가, 직장에 다니는 가족이 앓아누워 일시적으로 돈을 벌지 못해 부족해진 생활비를 충당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다시 말해 마이크로크레디트 자금의 대부분은 원래 목표였던 가난한 사람들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소비에 사용된 셈
-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그곳에 사는 개개인의 기업가적 에너지가 부족해서가 아님.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기업가적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들. 부자나라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기업가적 에너지를 집단적 기업가 정신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에디슨이나 빌 게이츠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전설과 슘페터의 선구적 연구결과 등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기업가 정신을 너무 개인적 차원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기업가 정신이란 탁월한 비전과 굳을 결의를 지닌 영웅들에게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성공적 사업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여기서 나온 발상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기업가 정신을 개인적 차원에서 보는 견해는 옳고 그름을 떠나 점점 구식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기업가 정신이란 것은 점점 더 공동체적으로 함께 이루어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16.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늘 최선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직접 관련된 일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전문용어로는 제한적 합리성이라 함.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우리가 그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음. 따라서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의 복잡성을 줄이려면 일부러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고 있다. 특히 극도로 복잡한 현대 금융시장과 같은 분야에서 정부의 규제가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정부가 보유한 지식이나 정보가 더 우월해서가 아니라 정부규제를 통해 선택의 범위를 제한하여 문제의 복잡성을 줄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낮출 수 있기 때문.
- 금융경제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 은행장, 날고 긴다는 펀드 매니저, 명문대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유명인사까지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하는 경제학 이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우리 인간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도 될 만큼 똑똑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런 결론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도 괜찮을 만큼 우리가 똑똑하지 않은데, 시장에 대한 규제는 가능한 것일까? 대답은 그렇다 이다. 아니, 사실은 그 이상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똑똑하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규제가 필요하다.
-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규제대상인 피규제자(예컨대 기업)보다 관련 상황을 더 잘 알수는 없다는, 언뜻 보기에는 합당한 근거로 정부규제에 반대함. 맞다. 정부가 기업이나 개인의 상황을 어떻게 당사자보다 더 잘 알 수 있겠는가. 이를 근거로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정부 관료들의 정책이 경제주체인 당사자의 결정보다 더 우월할수는 없다고 주장. 그러나 사이먼의 이론을 가지고 설명하면 현실에서 정부규제가 유용한 이유는, 정부가 피규제자보다 관련 상황을 더 잘 알고 있기 대문이 아니다. 오히려 규제의 효용성은 행위의 복잡성을 제한해서 피규제자들이 보다 나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는 08년 금융위기에서 선명하게 입증됨. 08년 위기 직전에 우리는 이른바 금융혁신을 통해 모든 것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우리의 의사결정 능력은 이런 복잡성에 압도당해 버렸다. 물밀듯이 쏟아져 나온 복잡한 금융상품들은 해당상품의 전문가가 아니면 금융전문가들마저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 심지어 그 상품의 전문가마저 많은 경우 그 상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자기회사의 사업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진도 거의 없었다. 금융감독 당국 역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온전히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고는 이제야 핵심적 의사결정권자들의 입에서 이에 관한 고백들이 때로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떠밀려서 나오고 있다. 앞으로 유사한 금융위기를 겪지 않으려면 금융시장에서는 행위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할 필요가 있음. 금융상품의 경우 우리가 해당 상품의 내용과 다른 금융 부문 및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면 발행할 수 없도록 해야 함. 그 복잡성으로 인해 심지어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마저 그 내용과 영향을 알지 못하는 파생금융상품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주장들이 너무 과격하게 들릴 수 있음. 그러나 이는 우리 사회가 약품이나 자동차, 전기/전자 제품 등 다른 상품에는 줄곧 적용해오던 조치이다. 일례로 어떤 회사가 새로운 약품을 개발했다고 해서 그것을 곧장 판매할 수는 없음. 약의 효능인 약품에 대한 인체의 반응은 매우복잡. 그래서 우리 사회는 엄격한 검증절차로 그 약이 부작용을 압도할만한 효능이 충분한지 확인한 뒤에야 출시를 허용. 따라서 금융상품도 판매하기 전에 안전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제안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님. 일부러 제한적 규칙을 만들어 우리의 선택을 의도적으로 한정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환경을 단순화시키지 않는 한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으로는 세상의 복잡성에 대처해 나갈 수 없다. 우리에게 규제가 필요한 이유는, 정부가 당사자인 경제주체들보다 관련상황을 반드시 더 잘알기 때문이 아니다. 규제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제한된 정신적 능력에 대한 겸허한 인정인 것이다.

17.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 높은 교육수준이 국가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사실 놀라울 정도로 빈약함.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은 사람들이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생산성 향상과는 직접 관련이 없음. 또 지식경제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육이 경제발전에 필수요소가 되었다는 주장도 옳지 않음. 우선 지식경제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역사적으로 지식은 언제나 부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탈산업화와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선진국의 대다수 일자리에서 꼭 필요로 하는 지식요건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음. 지식경제에 더 중요하다는 고등교육도 그것이 경제성장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나라의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교육수준이 아니라 생산성 높은 산업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 사회전체의 능력이다.
-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 상식에 반하는 증거들이 많음.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정평이 나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예부터 살펴보자. 60년 타이완의 문맹률은 46%나 되었고, 필리핀의 문맹률은 28%에 지나지 않았음. 그럼에도 타이완은 인류역사에 남을 기록적 성장을 보인반면 필리핀은 그다지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함. 60년 필리핀 1인당 국민소득은 200달러로 타이완의 122달러에 비해 거의 두배였다. 그러나 현재 타이완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필리핀의 거의 10배에 달함. 같은 시기 한국의 문맹률은 29%여서 필리핀과 비슷했지만 아르헨티나의 9%에는 훨씬 웃돌았다. 문맹률이 더 높았음에도 한국은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해서 60년에 아르헨티나의 5분의 1이던 국민소득이 이제는 세배가 되었다.
- 위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경우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례를 봐도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고 해서 꼭 경제가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음. 80년에서 04년 사이에 이 지역 문맹률은 60%에서 39%가 되어 눈에 띄는 감소추세를 보였음에도, 같은 기간 1인당 국민소득은 매년 0.3%가 떨어짐.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교육이 경제발전에 그토록 중요하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교육이 경제성장에 별달리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증거는 여기서 예로 든 동아시아 국가들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극단적인 경우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일반적인 현상. 랜트 프릿쳇 교수가 "교육은 전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라는 제목으로 04년 발표한 논문에서느느 60년에서 87년 사이의 기간 동안 수십개의 선진국과 개도국에서 모은 자료를 토대로 교육이 경제성장에 긍정적 효과를 끼쳤는지 여부를 살펴본다. 널리 인용되는 이 논문에서 프릿쳇 교수는 교육수준이 높아진다고 해서 경제성장이 촉진된다는 증거는 거의없다고 결론내림
- 스위스 패러독스 역시 교육의 생산성 효과가 낮다는 사실로 설명됨. 그러나 초중등 교육의 생산성 효고가 낮은 것은 이 시기의 교육이 자아실현, 모범시민 양성, 민족 정체성과 같은 것을 함양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혐, 고등교육의 생산성 향상효과가 낮은 것은 고등교육의 기능 중 경제학에서 분류라 일컫는 기능이 강하기 때문. 물론 고등교육은 피교육자들에게 생산성과 관련된 지식을 상당 정도 전수해 주지만, 그것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피교육자들이 얼마나 고용에 적합한지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많은 직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능력은 일을 하면서 배워갈 수 있는 전문지식 보다는 전반적인 지능, 의지, 조직적 사고력 등이다. 따라서 대학에서 역사나 화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지식은 보험회사나 교통부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는 거의 쓸모가 없겠지만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의지가 강하며, 조직적 사고력이 있다는 신호가 됨. 대졸자를 모집하는 회사는 각 직원의 전문지식보다는 이런 일반적 능력을 보고 직원을 채용하는 것. 대학에서 얻은 전문지식은 대부분 직장에서 수행할 업무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18.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 기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국민경제에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규제가 기업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천연자원이나 노동력과 같이 기업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자원이 파괴되지 않도록 개별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기업 부문 전체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기도 함. 또 각 개별 기업에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끼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기업부문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규제도 있을 수 있음. 노동자 교육규정 같은 것이 그런 사례.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규제의 내용이지 양이 아니다.

19. 우리는 여전히 계획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
- 자본주의 경제도 계획되는 부분이 많음. 공산주의 경제의 중앙계획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정부 역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모든 자본주의 정부는 연구개발과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재원의 상당부분을 지원하고 있고, 또 대부분의 자본주의 정부가 국영기업의 사업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경제의 상당부분을 계획함. 부문별 산업정책을 통해 미래의 산업구조를 계획하는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 유도계획을 통해 국민경제의 미래모습까지도 설계하기도 함. 더 중요한 것은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국경을 넘나들정도로 큰 규모의 위계질서를 갖춘 대기업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기업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입각해 경제활동을 한다는 사실. 문제는 계획의 수립 여부가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서 적절한 계획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20. 기회의 균등의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 기회의 균등은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 물론 훌륭한 성과를 올린 사람은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함.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아이가 배가 고파서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면 선천적으로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적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그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집에서는 생계비 지원을 받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학교에서는 무료급식을 통해 밥을 굶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기회의 균등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의 균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부모가 아이를 굶기지 않을 정도로는 돈을 벌 수 있어야, 그 아이도 같은 조건에서 다른 아이들과 경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지나치게 결과를 균등하게 하려는 것은 해롭지만, 이 지나치다는 것의 한계를 어디로 정해애 하는지는 논의글 거쳐야 함.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 최소한의 소득, 교육, 의료 혜택 등을 보장함으로써 최소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100미터 달리기 시합에서 모두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려야 한다면 공정한 경기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기회의 균등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회를 건설하기를 바란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1.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 잘 설계된 복지정책이 있는 나라 국민들은 일자리와 관련된 위험을 감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개방적 태도를 취함. 이것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보호무역에 대한 요구가 덜한 이유중 하나이기도 함. 유럽사람들은 자기가 종사하는 산업이 외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해도 실업수당을 받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고,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에 반해 미국사람들은 한번 일자리를 잃으면 생활이 심하게 어려워질 뿐 아니라 다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 바로 이런 이유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복지정책이 가장 잘 갖추어진 나라들이 이른바 미국의 르네상스라 부르는 90년 이후에도 미국과 비슷한 성장을 하거나 심지어 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 70년대 당시 영국 경제가 활력을 잃자 비대해진 복지제도와 노조활동이 도를 넘어선 게 그 원인이라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짐. 실제 상황은 더 복잡했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식으로 영국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노조들에게 주제파악을 하도록 했고, 복지제도를 대폭 약화시킨 마거릿 대처는 영국을 살린 구세주나 다름 없었음. 90년대 들어와서 과도한 복지정책을 추진하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미국경제가 겉보기에 더 빠르게 성장하자 복지정책에 대한 이런 시각은 위세가 더 커졌다. 다른 나라들도 복지예산을 줄일 때면 영국병을 고친 대처 전 총리와 활기차게 성장하는 미국경제를 운운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직업안정성이 높고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 있으면 경제의 생산성과 활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과연 진실인가? 한국 사례에서 보았듯 고용 불안이 높아지면 젊은이들은 의사나 법률가처럼 안정된 직종을 선호하는 보수적 선택을 하는 경향이 강해짐. 이는 개인적으로는 좋은 선택일 수 있지만 사회전체로 볼 때는 재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떨어뜨림. 미국의 취약한 복지제도는 이 나라가 전반적으로 정부개입에 훨씬 더 긍정적인 유럽국가들에 비해 오히려 심한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취하게 된 중요 원인 중 하나. 유럽에서는 (국가별 세세한 차이를 잠시 접고 이야기하자면) 몸담고 있던 산업이 쇠퇴해서 일자리를 잃는 것은 물론 큰 타격이자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날 정도의 일은 아님. 의료혜택은 변함없이 받을 수 있고, 국가임대주택 혹은 주거 보조금도 유지될 뿐 아니라 많게는 실직 전 월급의 80%까지 받으면서 정부의 지원으로 직업 재교육을 받고, 구직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 반면 미국에서는 정부에 보호무역을 도입해 달라는 요구를 해서라도 한번 잡은 일자리는 놓치지 않아야 함.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 실업보험의 자격요건이 까다로운 데다 그나마 유럽에 비해 지급기간도 짧다. 직업재교육과 재취업 과정에서도 정부의 도움은 거의 받을 수없음.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실직을 하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집마저 잃을 수 있다는 사실. 국가 임대주택이나 임대료 보조금이 거의 없기 때문. 따라서 감원을 포함한 산업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은 유럽보다 미국이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음. 대부분의 미국 노동자들은 조직적 저항을 하기 어렵지만, 조직적 저항이 가능한 노조 소속의 노동자들이라면 현재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당연함. 위 사례들을 통해서 직업 안정성이 낮으면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할지는 몰라고 자기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서 열심이 일한다는 문제가 있음.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되면 대성할지 모를 유망한 청년들이 모두 해부학 교실에서 씨름하고 있다. 적절한 재교육을 받으면 생명공학과 같은 유망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미국 노동자들이 자동차 산업같은 사양산업에서 악착같이 일자리를 고수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피할 수 없는 대세를 약간 지연시키는 것일 뿐이다.
- 노동자들에게 제2의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복지정책은 노동자를 위한 파산법이라고 할 수 있음. 파산법이 기업가들로 하여금 위험을 더 적극적으로 감수하게 해주는 것처럼, 복지정책은 노동자들이 변화에 더 개방적이고, 그에 따른 위험을 더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를 갖도록 해줌. 제2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첫번째 직업을 선택할 때 더 대담해질 수 있고, 후에 직업을 바꾸어야 할 때에도 더 개방적 자세를 취할 수 있음.
- 차를 빨리 몰 수 있는 것은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없다면 아무리 능숙한 운전자라도 심각한 사고를 낼까 두려워 시속 40~50킬로 이상 속도를 내지 못할 것임. 이와 마찬가지로 실업이 자기 인생을 망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 큰 정부가 사람들을 변화에 더 개방적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경제도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22. 금융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 현대 금융시장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효율적이라는 데 있다. 최근의 금융혁신을 통해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새 금융상품들 덕에 금융부문은 금융자산 보유자들을 위한 단기이윤 창출데는 더 효율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보았듯이 이 새로운 금융자산들은 금융 시스템 뿐 아니라 경제전반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금융자산의 유동성을 이용해 자산 보유자들은 작은 변화에도 빨리 반응하기 때문에 실물경제부문의 기업들은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기다려 줄 줄 하는 자본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음. 금융부문과 실물부문 사이에 존재하는 속도의 차이를 줄여야 함. 즉 금융시장의 효율성을 의도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의미
- 한때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아이슬란드는 95년 무렵 룩셈부르크, 스위스, 일본,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싱가포르, 프랑스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11번째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미 부유했던 아이슬란드의 경제는 90년대 후반 금융산업의 민영화, 자유화가 추진되면서 마치 터보엔진이라도 장착한 듯 급속히 성장. 아이슬란드 정부는 98년에서 03년에 이르기까지 국유은행들과 투자기금들을 민영화하고 은행에 대한 지급준비율제도마저 없애든 등 가장 기본적 금융규제까지 철폐. 이후 아이슬란드 은행들은 무서운 속도로 확장하여 해외고객을 유치하는 데까지 눈을 돌려 은행마다 인터넷 뱅킹 사업부를 두고 영국, 네덜란드, 독일 금융시장까지 잠식. 한편 아이슬란드 투자자들은 자국은행들의 공격적 대출정책 덕에 엄청난 자금을 융통해 기업쇼핑에 나섰는데, 그 대상은 특히 5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저 유명한 대구전쟁을 치른 과거의 적대국 영국이었다. 바이킹 침략자라 불린 아이슬란드 투자자들의 대표격으로는 젊은 재력가 욘 요하네손이 소유한 투자회사 바우거를 꼽을 수 있다. 2000년대 초 혜성처럼 등장한 바우거는 07년에 영국 소매 유통업의 핵심세력으로 자리잡음. 햄리스 데브넘스, 오아시스 및 아이슬란드 등 영국의 유력한 소매 대기업들의 대주주가 된 바우거는 3800개 소매점에서 6만 5000여 직원들을 고용하며 100억파운드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는 거대 비즈니스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음. 얼마동안은 이 같은 금융부문의 확장이 아이슬란드에 기적을 낳는 것처럼 보였다. 1985년에야 주식시장이 개설되었을 정도로 한때 지나친 규제로 악명 높았던 금융 후진국 아이슬란드가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활기 넘치는 신생금융 중심지로 급면. 90년대 후반 이래 아이슬란드 경제는 보기 드문 속도로 성장하여 07년에는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스위스, 덴마크에 이어 세계에서 5번째로 부유한 나라가 됨. 이때만 해도 아이슬란드의 경제성장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처럼 보였음. 하지만 불행히도 08년 금융위기 이후 아이슬란드 경제는 완전히 붕괴. 그해 여름 아이슬란드 3대은행이 모두 파산하는 바람에 정부는 이 은행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인수해야 했음. 그러나 상황은 계속 악화되기만 했고, 급기야 09년 10월에는 세계화의 상징 맥도날드가 아이슬란드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세계화의 변방으로 밀려난 아이슬란드의 현실을 다시한번 확인. 2010년 초 현재 IMF는 아이슬란드 경제가 09년 8.5%에 달하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고 추정하는데, 이는 선진국 중 가장 빠른 추락이다. 요즘들어 아이슬란드가 90년대 후반 이후 추진한 금융주도 발전 정책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증거들이 점점 더 많이 나오고 있음. 07년 아이슬란드의 은행자산은 같은 해 국내총생산의 1000%에 달했는데 이는 은행부문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인 영국에 비해 두배나 높은 수치. 이에 더해 아이슬란드의 금융업 팽창은 외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밝혀짐. 이 나라의 순외채는 07년에 국내총생산의 거의 2.5배에 달했음. 사실 이보다 훨씬 적게 외채를 쓰고도 망한 나라가 많다. 한 예로 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직전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순외채가 각각 국내총생산의 25%와 35%였다. 아이슬란드의 경제기적 뒤에 감춰져 있던 금융거래의 어두운 면도 드러났다. 은행의 주요 대출자 중 상당수가 같은 은행의 핵심 주주였던 것이다.
-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면 어디든 재빨리 옮겨갈 수 있는 바로 이 효율성 때문에 금융이 경제의 다른 부문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음. 8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이 "지나치게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국제금융시장의 수레바퀴에 모래를 뿌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토빈은 금융이동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금융 거래세, 이른바 토빈세의 도입을 제안. 토빈세는 이제까지 정치권에서 금기사항이었으나 최근 들어 고든 브라운 전 영국총리가 옹호하고 나선 바 있다. 그러나 토빈세만이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의 속도차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적대적 인수합병을 어렵게 만들어 투기적 주식투자로 얻는 이득을 줄일 수 있다. 주식을 빌려서 파는 공매도를 금지하거나 주식 증거금율을 인상하는 방법도 있음. 특히 개도국의 경우에는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에 대해 규제가 필요. 그렇다고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의 속도차이가 완전히 없어져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실물경제와 완전히 함께 움직이는 금융시스템은 무용지물이다. 금융의 존재가치는 실물 경제보다 빨리 움직이는 데에 있기 때문. 다만 지금까지 문제는 금융이 지나치게 빨리 움직여 실물경제에서 탈선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수준의 유동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제발전의 궁극적 원천인 물리적 자본가 인적자본, 조직혁신 등에 기업이 장기투자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방식으로 금융시스템이라는 회로의 배선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23. 좋은 경제정책을 세우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
- 역사적으로 경제를 가장 잘 운영한 경제관료들은 대부분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기적적 성장을 구가하는 동안 일본, 그리고 일본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한국도 경제정책은 법대출신들이 맡았다. 타이완과 중국에서는 공대출신이 이 역할을 담당. 이는 경제가 성공하는 데 경제학, 특히 자유시장경향의 경제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꼭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함. 이 책 전체를 통해 살펴봤듯이 지난 30여년 동안 자유시장 경제학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경제실적이 저조해졌다. 성장률 감소, 경제 불안정성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급기야 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몰아온 주범이 바로 이 자유시장 경제학인 것이다. 정책 입안에 경제학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 경제학은 자유시장 경제학이 아닌 다른 종류의 경제학이어야 한다.

* 우리의 경제시스템을 재설계 한다고 할 때 명심해야 할 원칙
(1) 윈스턴 처칠이 민주주의에 대해 한 말을 빌려 자본주의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자면, 자본주의는 나쁜 경제시스템이다. 문제는 다른 모든 시스템이 더 나쁘다는 것이지만, 이책에서 문제삼는 것은 자유시장 자본주의지 모든 종류의 자본주의가 아니다. 이윤동기는 여전히 우리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연료이며, 우리는 이런 이윤동기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30여년 동안 엄청난 수업료를 치르면서 배웠듯이 이윤동기에 아무런 규제도 가하지 않는 것이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함. 마찬가지로 시장은 무수한 경제주체들이 수행하는 여러가지 복잡한 경제행위들을 상호조정하는 데에 특히 효율적 메커니즘임.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시장이 메커니즘 혹은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도 명심해야 함. 예를들어 시장은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세심한 규제와 조정을 필요로 함.
(2) 인간의 합리성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는 인식 위에서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건설해야 함. 08년 경제위기는 우리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복잡한 세상을 만들어 버린 탓에 일어난 것. 우리의 경제시스템이 붕괴한 것은 복잡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근본적으로 무한하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시스템이 재구성되었기 때문. 따라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면 우리의 객관적 사고능력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함. 흔히 투명성만 높이면 대규모 금융위기가 또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함.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주장. 근본적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정보처리 능력의 부족이기 때문. 만약 문제가 정말 투명성이 결여되어 일어난 것이라면 투명성이 높기로 유명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90년대 초반 금융위기를 겪지 않았을 것임. 이른바 금융혁신이 계속 무제한적으로 허용된다면 우리의 규제능력은 끝까지 우리의 혁신 능력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3) 인간이 이기심이 없는 천사가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발휘하게 하는 시스템을 건설해야 함.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착한 일을 하게 하려면 금전적 보상을 하거나 벌칙으로 위협해야 한다고 믿음. 문제는 이런 믿음이 비대칭적으로 적용되어 부자는 더 많은 금전적 보상이 약속되어야 더 열심히 일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될 것을 두려워해야 더 열심히 일한다는 이상한 주장으로 탈바꿈한다는 것.
(4) 사람들이 항상 받아 마땅한 만큼 보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함.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개개인으로 따지면 부자나라 국민들보다 때로 더 생산적이거나 기업가 정신이 더 뛰어난 경우가 흔함. 정치적으로 용납되기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이민이 자유로워져서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부자나라에 가서 그곳 국민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면 부자나라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쫓겨날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개인적 자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기나라의 경제 시스템과 선진국의 이민정책 때문. 많은 사람이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누리지 못해 가난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기회의 평등만 제대로 보장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 마땅하다는 말은 아니다. 어느정도 결과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특히 모든 아이가 최소한의 영양과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면 시장이 제공하는 기회의 평등 정도로는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할 수 없음. 이는 누구도 먼저 출발하지는 못하지만 일부 주자들은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매고 달리는 달리기 시합과 같다.
(5) 물건 만들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탈산업화 지식사회는 신화에 불과하고, 제조업은 지금도 경제에 필수적이다. 지식경제라는 개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우리는 결국 물질적인 존재로 아이디어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더욱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항상 지식경제 속에서 살아왔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나라가 잘사는지 못하는지를 궁극적으로 결정해온 것은 우월한 지식을 소유했는가이지 물리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가 아니었기 때문. 사실 대다수 나라들이 점점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옛날보다 물건을 덜 소비한다고 느끼는 것은 제조업체들의 생산성이 대단히 향상하여 서비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조업 제품이 싸졌기 때문.
(6)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이 더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대 경제가 생산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금융산업이 필수적. 금융부문이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투자를 하고 나서 그 투자가 결실을 맺을 때까지이 시차를 메워주는 것. 금융은 그 속성상 빨리 움직일 수 없는 실물자산에 유동성을 부여함으로써 자원을 신속학 재배분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지난 30여년 동안 금융은 배보다 더 큰 배꼽이 되어버렸다. 금융자유화로 돈의 이동이 쉬워졌고, 심지어 국경도 손쉽게 넘나들 수 있게 되면서 금융투자자들은 더 참을성이 없어져 즉각적인 이윤을 원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기업과 정부는 장기적인 전망이 어떻든 간에 빨리 수익을 낼 수 있는 정책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금융투자자들은 돈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정부와 기업에 대한 협상카드로 활용해 국민소득의 더 많은 부분을 금융소득으로 돌리는 데 성공.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또 금융을 더 불안정하게 하고 고용불안 또한 심화시킴. 금융부문은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빚을 갚지 못하면 감옥으로 가야하거나 자신의 저축만으로 작은 사업장 하나를 겨우겨우 운영해야 하던 주식회사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실물부문과 금융부문간 속도차를 크게 줄이지 못하면 장기투자의 확대나 실질적인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없다. 생산적 투자가 결실을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7) 더 크고 더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지난 30여년 동안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는 정부가 사회병폐의 해결사가 아니라 병폐의 일부라고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물론 정부 실패의 사례가 존재하고, 그중 일부는 엄청난 실패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과 기업이라고 실패하지 않는 것은 어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정부가 눈부신 성공을 거둔 사례도 많다는 것. 정부의 역할은 철저히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8) 세계경제 시스템은 개도국들을 불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 대부분의 부자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의 제약 때문에 완전히 자유시장주의에 맞는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심지어 대처총리 조차도 영국의 국가의료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 이런 사정들로 인해 자유시장 정책이 실험된 곳은 주로 개도국이었음. 특히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많은 가난한 국가들은 자유시장을 맹신하는 국제기구나 부자나라들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유시장 정책을 채택해야 했음. 이런 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가 취약했기 때문에 자유시장 정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더라도 더욱 무자비하게 추진할 수 있었음. 결국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래된 질문 새로운 답변  (0) 2015.05.15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0) 2015.05.15
한국의 경제학자들  (0) 2015.04.24
신호와 소음  (0) 2015.04.09
경제학자의 문학살롱  (0) 2015.04.03
Posted by dalai
,

한국의 경제학자들

경제 2015. 4. 24. 15:31

 


한국의 경제학자들

저자
이정환 지음
출판사
생각정원 | 2014-10-02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재벌과의 빅딜? 국가의 개입은 어디까지… 짝퉁 경제 민주화와 주...
가격비교

 

 

- 12년 기준으로 주식시장에서 기업들이 조달한 자금은 1조 4600억인데, 자사주 매입과 현금배당으로 빠져나간 돈은 무려 13조 6000억. 미국도 증시조달 자금은 2520억불이었는데, 주주환원 금액은 6650억불이나 됐음. 한국투자증권 김학균 연구원에 따르면 "상장유지 비용이 큰 것도 문제지만 애초에 증시에서 조달하는 자금의 절대규모가 크지 않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 과거에 주가가 높을 때 증자를 하면 좋은 조건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음. 주가가 뛸 때마다 증자규모가 늘어나곤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유상증자는 어려운 기업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됨. 유상증자를 하면 주식수가 늘어나므로 기존 주주입장에서는 주식가치가 희석되고 주가가 떨어지게 됨. 장기적으로 그렇게 확보한 자금으로 주주가치를 높일 수도 있겠지만 당장 주가에는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김 연구원은 "높은 주가에도 기업들이 자금조달을 하지 않는 건 딱히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으로 분석된다"면서 "결국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끌만한 마땅한 동력이 없다는 고민이 투영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 설명함
- 스웨덴의 복지국가 시스템은 물론 높은 소득세율 때문이지만 강한 노동운동과 사회적 연대, 그리고 국가 주도의 성장정책이 근본 동력. 노동자 대표들이 기업 대표들과 협상을 해서 파업을 접고 산별노조로 전환하기로 했고 국가가 완전 고용을 보장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 부실한 기업들이 문을 닫게 만들려면 해고된 노동자들을 정부가 책임져야 함. 단순히 실업급여를 주는 걸 넘어 산업고도화와 노동자 재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고용을 창출하고 경제전반의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함. 핵심은 임금을 깎아서 생존하기 보다는 임금을 올릴 수 없는 기업들을 도태시키는 것. 국민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만들려면 그만큼 더 벌게 해줘야 선순환이 시작됨. 주목할 대목은 스웨덴도 복지국가 시스템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 사민당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했음. 노사 대타협도 어느날 갑자기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라 양쪽이 서로 위협을 느낄 정도로 대등한 권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음.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한 노동운동 진영이 자본을 압박해 대등한 타협을 끌어냈다는 사실도 중요한 교훈. 한국은 노조 조직률은 10%를 밑돌고 산별 노조는 정치적 존재감이 크지 않음. 질 좋은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데 노동자 계급은 분열돼 있고 진보정당은 궤멸되다시피 한 상황.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정말 요원해 보임. 그런데 무엇으로 자본가 계급을 압박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대타협을 하려면 협상의 상대방이 있어야 할텐데 이건희 회장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협상테이블에 나오겠는가
- 순환출자가 문제가 많다는 데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것처럼 보이는데 신장섭 교수의 생각은 다름.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에서 "순환출자는 정부가 지주회사 설립을 금지시켜서 나타난 현상인데 재벌들이 멋대로 순환출자를 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뒤늦게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고 지적. "순환출자의 원죄는 정부에 있다"는 주장.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일본 상법을 그대로 베껴오면서 지주회사 금지조항도 들어왔음. 2차대전 직후 전범기업들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지주회사를 금지시킨 건데 그게 아무 맥락없이 들어온 것. 일본 기업들은 지주회사 설립이 금지되자 상호출자 형태로 자금을 조달. 애초에 지주회사가 가능했다면 한국재벌도 순환출자를 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이야기. 정승일 대표는 "현대기아차 그룹의 경우 현대 모비스가 현대자동차에 출자하고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에 출자하고 기아자동차가 다시 현대모비스에 출자하는 구조인데 순환출자를 당장 금지시키면 기아자동차 같은 우량회사가 대우자동차나 쌍용자동차 같은 골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주장. 극단적 비유인데다 비약이 지나치다는 생각은 들지만 순환출자 금지가 곧 재벌해체가 된다는 현실적 지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음.
- 이병천 교수는 "한국 신자유주의는 개발독재의 유산위에 올라탔다"면서 "재벌과 금융자본이 타협하면서 공존공생하는 잡종 신자유주의로 진화했다"고 분석. 장하준 교수가 재벌을 신자유주의의 희생양으로 규정하고 재벌개혁이 곧 신자유주의 확대라고 비약하는 것과 달리 이병천 교수는 애초에 재벌이 신자유주의의 주도세력이라고 규정. 그는 재벌이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이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 장하준 교수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음. "재벌들이 바보같은 짓을 한 거에요. 시장주의(자유주의)를 들여오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90년대 중반 자유기업원 등을 만들어 미국 공화당 극우파들의 극단적 개인주의나 수입하고 주주자본주의 이론을 들여오고 그랬거든요.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거죠. 재벌가문이야말로 대다수 주주들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있거든요."
- 유철규 교수는 "역사적 맥락에서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민주화로 말미암아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대응능력이 약화된 국가의 후퇴를 국가 지원으로 말미암아 모호해진 사적 소유권을 확립해 노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암묵적으로 재벌에 부여되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와 유철규 교수의 문제의식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음. 유교수는 재벌이 이미 국민경제에서 이탈해 신자유주의와 결탁하고 있다고 보는데 장교수는 재벌이 신자유주의와 동거를 시작했지만 더 늦기 전에 신자유주의의 마수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입장
- '존경받는 기업 발렌베리가의 신화'라는 책을 보면 한국사회가 얼마나 스웨덴 모델을 편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가능. 발렌베리그룹은 사실 그룹이 아님. 발렌베리 가문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들 사이에 막연한 연대의식만 있을 뿐 같은 이름을 쓰지도 않고 당연히 동일한 기업로고 같은 것도 없음. 개별 기업의 독립경영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삼성같은 계열사 부당지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음. 차등의결권 역시 오해가 많다. 이건희 일가가 순환출자 구조 덕분에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발렌베리가문이 차등의결권을 이용해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마치 우선주와 보통주의 개념처럼 10배의 의결권을 갖는 주식도 상장돼서 일반 주식 투자자들도 누구나 거래가능. 유통물량이 적긴 하지만 주가의 차이도 크지 않음. 신정완 교수에 따르면 찰츠요바덴 협약은 철저하게 좁은 의미에서 노사관계와 관련된 의제들, 그것도 주로 분쟁해결 방식에 국한돼 있음. 발렌베리 가문은 찰츠요바덴 협약뿐만 아니라 어떤 노사협약에도 참여한 바가 없음. 고용자 연합회가 있는데 발렌베리 가문이 나설 이유도 없고 애초에 다른 기업들을 대표할 자격도 없음. 한국에는 이찬근 교수 등의 언론 인터뷰가 와전되면서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임. 실제로 스웨덴에서는 발렌베리 가문의 소유, 지배권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논의조차 되지 않음. 오히려 발렌베리 그룹의 상호출자와 차등의결권 등 소유와 지배가 괴리되는 독특한 지배구조를 큰 문제의식 없이 용인했고 경제력 집중 역시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임. 한국과 달리 재벌 총수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지탄을 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함. 신정완 교수는 "이찬근 교수 등이 강조하는 거대기업과 노동조합, 정부의 조합주의적 계급 타협의 틀은 스웨덴에서도 80녀내 이후 근본적으로 해체돼왔다."고 지적. "재벌 총수의 기득권 보호를 핵심 고리로 삼아 계급타협을 이룬다면 발전국가주의만 전면화되고 사회민주주의는 부차화돼 자칫 국민적 합의라는 정치적 위광까지 부여받은 재벌의 이해관계에 노동운동이 끌려다니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핵심을 찌름
- 과거 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던 구조본이 실체가 있는 지주회사로 바뀌면서 그룹 전체의 의사결정 기능이 더욱 강화된 것은 분명. 송원근 교수는 지주회사의 수익을 늘리기 위해 자회사들과 부당 내부거래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 한 계열사의 부실이 다른 계열사에 확산되는 걸 막기도 어려움. 소유의 집중과 함께 투명성이 높아졌지만 지주회사 전환을 과연 지배구조의 개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 실제로 03년 신용카드 대란이 터졌을 때 그룹차원에서 LG카드에 자금지원을 했음. (주)LG의 대주주와 계열사들이 공동출자하는 방식이었지만 (주)LG의 출자자금은 (주)LG가 한국전기초자 등의 보유지분을 계열사들에게 넘겨서 마련. 송원근 교수는 부실 계열사 지원에 자회사를 동원했고 자회사의 이익을 탈취했다고 분석.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금융계열사의 부실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이야기. 문제는 비슷한 현상이 LG뿐 아니라 이미 지주회사 전환에 성공한 SK그룹과 금호아시아나 그룹 등에서도 발견되고 지주회사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한화그룹이나 롯데그룹, 코오롱 그룹, 동양그룹 등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큼. 실제로 SK(주)가 SK에너지 지분을 공개매수하고 자사주를 발행하면서 최태원 전 회장의 지분비율을 크게 늘려주기도 했음. 공개매수라고는 하지만 총수 일가가 보유한 지분을 넘겨받은 것.
-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완전한 자유방임을 요구하는 게 아님. 오히려 경쟁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보는 게 신자유주의임. 자유방임 상태의 시장은 스스로 경쟁조건을 파괴하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서 독점과 계급대립을 해소해줘야 한다는 게 핵심. 특히 반독점가 사회보장 정책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구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구분하게 됨. 김성구 교수는 여기에서 다시 독일권 신자유주의와 영미권 신자유주의를 구분하고 그 이론적 차이를 주목하라고 강조. 용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제대로 써야 비판과 극복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 독일권 신자유주의는 30년대 고전적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떠오른 발터 오이켄의 독일권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개입을 시장질서 유지에 한정했음. 70년대 케인즈주의의 실패이후 주목을 받게 된 영미권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는 좀더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말함. 국가의 개입범위에 따라 3가지 방향으로 나뉘는 것임. 김성구 교수에 따르면 한국에 신자유주의라고 소개된 영미권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개입을 철저하게 부정하기 때문에 신자유즈의라기보다는 구자유주의의 복원 또는 부활이었다고 보는 게 맞음. 영미권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쟁으로 질서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반면 독일권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경쟁정책이 필요하다고 보는 차이가 있지만 둘다 국가의 개입을 부정하면서도 국가의 개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봉착해 있음
- "주주는 경영자가 아니며 경영자는 주주가 아니라는 구별, 그리고 이 구별에서 비롯되는 둘 사이의 모순적 대립은 사람들이 순진하게 논리적인 동일성, 현실적인 일관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뿐입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보통 주식회사에서 한 사람이 헨리포드처럼 독재자가 되는 동시에 엔론의 케네스 레이처럼 비자금과 분식회계의 달인이 되는 경우입니다." 김상봉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보통은 포드는 레이가 될 필요가 없고 레이는 포드가 될 수 없음. 주인은 자기재산을 훔칠 필요가 없고 하인은 그가 하인으로 있는 한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함. 헨리 포드 같은 절대 주인도 아니고 케네스 레이같은 전문경영인도 아니면서 포드같은 전제군주인 동시에 레이 같은 사기꾼처럼 행동하는 자들을 한국에서는 재벌총수라고 부름
- 가장 극단적인 투기자본은 브릿지 증권 사례. 브릿지인베스터먼트라부안홀디스라는 사모펀드가 외환위기 직후 대유증권과 일은증권의 지분을 헐값에 사들인 뒤 두 회사를 합병해서 리젠트 증권으로 이름을 바꿈. 그리고 대규모 배당으로 남아 있는 현금을 빼먹기 시작. 자사주를 사들여 소각해서 최대주주 지분비중을 계속 늘림. BIH는 투기자본의 교과서라 불릴 만한 다양한 먹튀수법을 선보임. 자사주 매입과 소각 덕분에 02년 49.7%였던 BIH의 지분이 04년에는 70.9%까지 늘어나고 자사주를 더하면 90%가 넘게 됨. 회사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장악하고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대규모 무상증자와 유상감자를 실시. 회사의 자산을 자본금으로 편입시킨 뒤 그걸 주주들에게 나눠주는 방식. 브릿지 증권은 심지어 회사 본사 건물을 팔아 현금으로 만들고 유상감자를 실시하여 주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함. 정상적 회사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회사는 최대주주가 돈 챙겨서 빠져나가는 게 최대목표였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음. BIH는 이 회사 지분 2200억을 사들인 뒤 배당으로 204억원, 유상감자로 2155억원을 빼내감. 한국 주식시장 사상 최대규모의 유상감자였음. 최종 매각까지 BIH가 벌어들인 돈은 3609억에 이름. BIH는 말레이시아 조세회피지역 라부안에 본사를 둔 사모펀드였음. 애초에 경영보다는 투자개념으로 접근했던 것. 고객들 돈을 받아 한국의 증권사 지분에 투자했으니 최대한 빨리 이익을 남기고 투자원금과 수익을 회수해서 고객들에게 돌려주는 게 목표. 심지어 막판에는 회사를 청산하려고까지 했음. 노조가 나서서 경영권을 넘겨받아 종업원 지주회사로 전환했으나 그때는 이미 껍데기만 남은 뒤였음.
- 이승협 교수는 "이건희 회장의 개인적 결단에 기초한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은 삼성그룹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를 외환위기와 IMF에 의한 통제라는 사회적 파국으로 치닫게 한 요인이었다"고 지적. 개인의 권위나 카리스마에 의존한 조직운영은 자본주의 초기 또는 소규모 기업의 경영방식이고 장기적 안정성을 갖기 어려움. 실제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면 삼성그룹에서는 잘된 건 모두 회장님 능력 덕분이고 잘못된 건 임원들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음. 이승협 교수는 "삼성의 성공신화는 모두 이건희 회장에게 귀속되며 실패사례는 조직의 실패로 귀결된다"면서 "이런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조직원은 철저하게 배제된다"고 분석. 이런 분위기다 보니 실제로 삼성자동차 경영실패는 전문경영인들 탓이고 반도체 사업은 이회장의 선견지명 덕분이었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공공연히 흘러나옴. 이회장이 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던 게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들었다는 것. 그러나 삼성그룹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건 74년 이병철 회장 시절이었고 오히려 자동차 사업진출은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의지였다는 게 숨길 수 없는 사실. 물론 이병철 회장 시절 시작한 반도체 사업이 이건희 회장 시절 부쩍 성장한 것도 부정할 수 없음. 임원들이 반대했는데 이건희 회장이 개인 돈으로라도 인수하겠다며 의욕을 부렸다는 게 삼성의 공식기록에 남아 있음.
- 일찌감치 순환출자를 정리하고 지주회사로 전환한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지분이 0.04%, 회장일가 지분을 모두 더해조 0.06%밖에 안됨. 그런데 계열사를 통한 내부지분율은 48.8%나 됨. LG그룹도 구본무 회장의 지분이 1.26%, 회장일가 지분은 3.91%밖에 안되지만 내부지분율이 33.25%나 됨.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상황은 오히려 지주회사에서 더 심각. 흔히 재벌체제를 이야기할 때 오너일가가 소수주주들의 이익을 가로챈다고 비판하지만 지주회사로 바뀌면 오너일가와 소수주주들의 이해가 일치하게 됨. 계열사들에게 일감을 몰아주고 하청업체와 비정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고질적인 관행은 지주회사로 전환한 뒤에도 결코 줄어들지 않음. 오히려 주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 지주회사를 주주 자본주의의 가장 진화된 형태라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임
- 훗날 역사에서 삼성 특검은 자본권력이 법치주의를 무너뜨린 사례로 기록될지 모름. 전성인 교수는 "이건희 회장의 차명 재산이나 우회지배 무제 등은 이미 법원에서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에 도의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어도 법적으로 문제삼기는 어렵게 됐다"면서 "법원이 이미 면죄부를 줬기 때문에 삼성그룹은 이제 어떻게 상속세를 최소화하면서 아들, 딸드에게 지배권을 넘겨주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다"고 설명
- 이재용 부회장은 에버랜드가 보유하고 있던 에스원 주식을 19000원에 사서 30만원에 팔았다. 삼성엔지니어링은 5000~5500원에 사서 59000원에 팔았다. 에버랜드가 헐값에 주식을 넘긴 것도 문제지만 상장 직후 삼성생명이 집중적으로 에스원 주식을 사들인 것도 의심스러움. 삼성엔지니어링 주식을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사들인 시점도 이 부회장이 지분을 내다판 시점과 일치. 물론 공개시장에서 주식을 사고 파는 걸 막을 방법은 없음. 그러나 수백억 원어치 주식을 갑자기 내다 팔면 주가각 확 떨어지기 마련. 삼성생명 등이 이 부회장이 쏟아내는 매물을 받아줬다는 의혹이 나옴. 살 필요가 없는 주식을 샀거나 필요 이상으로 비싸게 삿다면 역시 삼성생명 주주들에게는 배임이 됨. 이 부회장의 시세차익을 올려주려고 주가조작에 동원됐다는 의혹이 제기됬지만 검찰은 모두 무혐의 처리. 제일기획도 비슷한 수법으로 종잣돈 마련에 동원됌. 이 부회장은 96년 3월 제일기획 전환사태를 사들이고 유상증자에 참여해 20.75%의 지분을 확보한 뒤 98년 11월 전략을 내다 팔아 140억원의 차익을 남김. 전환사채의 전환가격은 1만원, 유상증자 가격은 5000원이었는데 평균 매도단가는 48802원이었음. 이 과정에서도 이 부회장의 지분 처분시번에 삼성화재가 주식을 대량 매입해 주가를 떠받쳤다는 의혹이 제기됨. 이 부회장의 종잣돈은 3년만에 33억 2000만원에서 700억 이상으로 불어남. 이 과정에서 96년 12월 에버랜드 전환사채에 48억 3000만원을 투자하고 31.9%의 지분을 확보해 단순에 최대주주가 됨. 직책은 부장이었고 심지어 이때는 일본 와세다대에서 유학중이었음
- 97년 3월 삼성전자가 인텔을 대상으로 발행했던 전환사채 90만주를 사들였는데, 전환가격이 4만 9931원이었는데, 그해 3월 24일 기준으로 삼성전자 주가는 5만 6700원이었음. 시가와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역시 특혜 논란이 있었음. 이 전환사채는 7년 뒤인 04년 8월 주식으로 전환됐는데, 8월 20일 기준으로 43만 4000원, 449억원에 사들인 전환사채가 3906억원어치 주식으로 불어남. 종잣돈이 에버랜드와 삼성전자에 묶이자 이재용 부회장은 같은 수법으로 비상장 기업 삼성SDS에 손을 댐. 99년 2월 삼성SDS가 230억 규모의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발행하고 이걸 이재용 부회장 남매가 사들임. 주식전환가격은 7150원, 그 무렵 장외시장에서 5만 4750원~5만 7000원 정도에 거래되던 주식을 거의 8분의 1가격으로 사들인 셈. 이 부회장은 이듬해 이 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해 지분 8.81%를 확보. 삼성SNS의 전신인 서울통신전기도 같은 수법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손에 넘어감. 96년 11월 전환가격 5000원에 20억원어치를 사들여 주식전환 이후 50.25의 지분을 확보. 그해 말 기준으로 주당 순자산가치가 1만 2000원이었고 삼성전자가 주당 1만 9000원에 지분을 인수한 적도 있음. 이 부회장이 주당 5000원에 샀다면 거의 4분의 1가격에 산 셈
- 이 부회장이 삼성SDS 주식 8.81%를 확보하는 데 들인 돈은 주당 7150원, 단돈 47억이었음. 여기에 삼성 SNS지분을 매입하는 데 든 돈 15얼 2000만원을 더하면 62억 2000만원. 그런데 합병 이후 장외시장에서 삼성SDS 주가는 30만원을 웃돌기도 했음. 이부회장의 지분 11.25%의 가치는 얼추 계산해도 3조원이 넘음. 내부거래가 늘어나고 삼성SDS의 이익이 늘어나면 이부회장의 자산가치도 치솟을 것.
- 2000년 이전 이부회장의 후계작업이 종잣돈과 핵심지분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면 2000년 이후에는 에버랜드를 중심으로 순환출자를 강화하는 과정. 이부회장을 비롯해 이부진, 이서현 남매가 46.46%를 보유한 에버랜드를 실질적 지주회사로 키워 3남매의 지분가치를 늘리는 전략. 20년 전부터 착실하게 설계된 시나리오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임. 에버랜드가 일찌감치 98년 삼성생명 지분을 사들인 것도 이런 장기적 포석에서였을 가능성이 큼. 이재용 부회장이 에버랜드의 최대주주가 된 직후 에버랜드는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9000원에 309억원치 사들여 20.7%의 지분을 확보. 비상장 기업이었던 삼성생명 주식은 싸게 살 수 있으면서도 보험가입자들의 위탁자산으로 다른 계열사들 지분을 사들일 수 있었기 때문. 삼성생명만 잡고 있으면 우회지배가 가능. 삼성생명은 야금야금 삼성전자 주식을 사들여 7.6%의 지분을 확보. 취득원가가 5690억원이었는데, 주가가 130만원 기준으로 환산하면 가치가 13조 8096억원에 이름. 흥미로운 건 이게 다 삼성생명 고객들 보험료를 받아 운용하는 자산이라는 것. 삼성생명 고객들 돈으로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그 삼성생명을 제일모직이 지배하는 구조. 제일모직은 이 부회장이 지배.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카드/삼성SDI-->제일모직의 순환출자 구조에서는 제일모직을 지배하면 그룹전체를 지배가능. 결국 이재용 왕국의 아킬레스 건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임. 박근혜 대통령이 이미 선거공약으로 기존 순환출자는 인정하겠다고 했고 금융산업 분리가 쟁점인데 칼자루를 쥐고 있는 정치권도 비교적 이재용 후계구도에 우호적인 분위기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0) 2015.05.15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0) 2015.05.03
신호와 소음  (0) 2015.04.09
경제학자의 문학살롱  (0) 2015.04.03
대통령의 경제학  (0) 2015.03.26
Posted by dalai
,

신호와 소음

경제 2015. 4. 9. 21:28

 


신호와 소음

저자
#{for:author::2}, 신호와 소음#{/for:author} 지음
출판사
더퀘스트 | 2014-07-1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오바마 재선 당시, 50개 주의 결과를 모두 맞힌‘예측의 천재’...
가격비교

 

- 예측의 실패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음. 사람들이 각각의 경우에서 자료를 평가할 때 핵심맥락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 주택 소유자가 주택가격에 보인 확신은 최근 미국의 주택가격이 상당한 수준으로 하락한 점이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했을 수 있음. 그러나 폭락사태 이전과 같은 주택가격 급등현상은 과거 미국에서 한번도 없었음.
* 은행들이 무디스와 S&P의 MBS 신용등급 평가 능력에 보인 확신은 이 신평사들이 다른 유형의 금융자산을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평가했다는 사실에 근거했을 수 있음. 그러나 이들 신평사들은 과거에 CDO와 같은 기묘하고도 복잡한 증권을 평가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음
* 경제학자들이 주택 위기에 금융권이 잘 버티리라고 본 확신은 주택가격 등락이 일반적으로 과거 금융권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은 데서 비롯했을 수 있음. 그러나 과거 금융권에서는 그처럼 높은 레버리지가 동원된 적이 한번도 없으며, 또한 과거에는 주택에 그렇게 많은 투자가금을 사이드베팅한 적이 한번도 없었음
* 경제가 금융위기에서 빠르게 회복할 것으로 생각하며 경제에 보인 정책 입안자의 확신은 최근의 여러 경기후퇴를 경험한 데서 비롯했을 수 있는데, 이 경기후퇴 대부분 V자 곡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음. 그러나 그 경기후퇴들은 금융위기와는 관련이 없었음
- 경쟁이 어떤 곳보다 치열한 프로스포츠의 세계에서 예측을 가장 잘 할 수 있으려면, 그는 무엇보다 스스로 혁신가가 되어야 함. 시장의 비효율성에서 이득을 취할 것을 목표로 삼기란 쉽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그 비효율성을 찾은 다음에 그게 세상의 새벽을 알리는 신호인지 아니면 잘못된 단서인지 판단하기 위한 계획은 저절로 서지 않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발상을 하기란 어려움. 좋은 발상을 하기란 더더욱 어려움. 좋은 발상을 했다하더라도, 금방 다른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걸 베끼기 때문. 때문에 임시변통의 즉각적 해결책, 즉 현재의 사업방식이나 상황을 아주 조금만 바꿔서 경쟁자들을 따돌릴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함. 훌륭한 혁신가는 전형적으로 매우 크게 생각하고 또 매우 작게 생각함. 새로운 발상은 때로 문제의 가장 미세하고 구체적인 데서, 즉 보통 사람들은 귀찮아서 피하려 드는데서 비롯함. 또 '왜 세상은 지금 이 모양으로 되어 있을까?', '현재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대체할 대안은 없을까?' 같은 가장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생각을 할 때 새로운 발상이 나타나기도 함. 사람들이 대부분 안주하려 드는 편안하고 따뜻한 곳에서 새로운 발상이 나타나는 일은 지극히 드물다.
- 우리가 어떤 관계의 진리를 알지 못하거나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경우 과잉적합 오류에 빠지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음. 그 가운데 하나가, 과잉적합 모델이 예측가가 사용하는 통계 테스트 대부분에서 더 나은 점수를 기록한다는 점. 예측가들은 해당 모델이 자료의 변동성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 검증하는 테스트를 흔히 하는데, 이 테스트를 따르면 과잉적합 모델은 자료의 분산을 85% 설명해 주어 56%에 그치는 적정적합모델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음. 하지만 과잉적합 모델은 소음가지 계산에 넣어 추가점수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니 과잉적합 모델은 실제 현실을 설명하는 데서 적정적합모델보다 훨씬 덜 정확할 수밖에 없다.
- 경제예측가들은 하치우스가 그렇듯 세가지 근본적 문제에 부닥친다. 첫째, 경제 통계 자료만으로는 인과관계를 결정하기란 매우 어려움. 둘째, 경제는 항상 움직이는 만큼, 지금의 경제 주기에서 유효한 경제적 행동이 미래의 경제주기에서는 전혀 효과가 없을 수 있음. 셋째, 경제 전문가들 예측이 형편없었던 만큼이나 이들이 다루어야 하는 자료 역시 썩 훌륭하진 않음
- 영국 런던 정경대 교수 찰스 굿하트가 주장한 굿하트의 법칙이 있는데, 정책 입안자가 특정 변수를 목표로 삼으면 그 순간 이 변수는 경제지표로서 가치를 잃기 시작한다는 내용. 이를테면, 정부가 인위적으로 주택가격을 부풀리는 조치를 취하면 어쨌든 주택가격이 상승하기야 할 테지만, 이 항목은 경제지표로서 가치를 잃게 됨. 이런 상황을 극단적으로 상정하면, 관찰자의 관찰이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관찰자 효과와 비슷해짐. 예컨대, 우리가 어떤 것을 관찰하면 이 대상은 바뀌기 시작. 통계모델에는 대부분 독립변수와 종속변수가 존재하고, 이들 변수는 서로 엄격하게 분리된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는 발사을 기초로 함. 하지만 실제 경제현실에서는 이 변수들이 모두 한 덩어리로 엉겨 붙어 있음.
- 독감 바이러스(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조류에 기대어 불멸의 삶을 이어간다. 조류 가운데서도 특히 앨버트로스, 갈매기, 오리, 백조, 거위 등 장거리 여행을 하는 철새들로 인해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옮겨 다님. 그런데 정작 이 새들은 독감으로 쓰러지는 예가 거의 없음. 그리고 이 철새들은 독감 바이러스를 다른 동물종, 특히 사람과 자주 접촉하면서 살아가는 돼지나 닭 같은 가금류에 옮김. 닭은 독감에 걸릴 수 있지만, 대개는 금방 이겨내고, 살아남아서 바이러스를 가까운 이웃인 사람에게 옮김. 돼지는 이런 일을 닭보다 훨씬 잘한다. 돼지는 인간과 닭 양쪽에서 모두 바이러스를 잘 받아들이고 또 전파할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도 바이러스를 갖고 있어서, 다양한 바이러스가 한데 섞여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잇는 매개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 거시경제학적 예측부터 선거 여론조사에 이르는 많은 분야에서, 단 한사람(기관)의 예측에만 의지하지 않고 모든 예측의 평균을 취하는 일만으로도 예측의 오차는 보통 15~205까지 줄어듬. 하지만 모든 예측의 평균을 내기 전에 다음 세가지를 이해해야 함. 첫째, 모든 예측을 아우르는 총합적 예측이 전형적인 한 개인의 단일한 예측보다 본질적으로 언제나 낫긴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음. 이를테면, 거시경제학적 예측은 아무리 총합해서 평균을 낸다 해도 몇달 뒤 진행될 경기후퇴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음. 경제학자 개개인의 예측보다 조금은 나을지 몰라도 말이다. 둘재, 대중의 지혜 원칙은 모든 예측이 각기 독립적으로 진행될 때 유효함. 주식시장을 포함한 진정한 베팅시장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에 따라 대응할 수 있고 또 얼마든지 그렇게 함. 구성원들이 좀더 동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이런 조건에서라면 집단행동은 더 복잡해짐. 셋째, 총합적 예측이 일반적인 개인(기관)의 예측보다 낫긴 하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님. 조사체계가 정확한 여론조사 기관이 있다고 치자. 이 기관은 굳이 자기보다 덜 정확한 다른 여론조사 기관들의 예측으로 자기 예측의 정확성을 희석할 이유는 없다
- 비이성적 트레이더와 솜씨 좋은 트레이더 사이에는 일종의 공생관계가 형성되어 있음. 솜씨 좋은 포커 선수들이 게임에서 돈을 따려면 호구를 포커 테이블에 앉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 이 비이성적 트레이더를 금융 세계에서는 소음 트레이더라 부름. 경제학자 피셔 블랙은 1986년에 쓴 에세이에서 이들을 간단하게 소음이라고만 지칭했다. 소음은 금융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면, 우리가 금융자산에 대한 가격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소음은 시장을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 일반적으로 소음은 금융시장 또는 시장일반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실천적이거나 학술적인 이론 그 어느것도 검증하기 매우 어렵게 한다.
-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타당하지 않은 신호들에서 타당한 신호를 찾아내는 일은 훨씬 쉽다. 물론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어떤 신호 하나는 마치 수정처럼 훤하게 들여다 보인다. 그 신호가 어떤 재앙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다르다. 신호는 모호하며 다른 가능성을 가리키는 온갖 의미로 가득하다. 그 신호는 소음의 대기속에서, 즉 특정한 재앙을 예측하는 데 아무 쓸모가 없는 모든 종류의 정보속에서, 관찰자의 눈에 각인될 뿐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서 문제되는 것은 신호를 포착하는 역량이 아니다. 우리가 일정수준 이상의 역량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진주만 공습이나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 수많은 신호를 감지했을 것이다. 유효한 신호는 파일 캐비넷이나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유효하지 않은 신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호를 포착하는 능력이 아니라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방에서 타당한 신호를 골라내는 능력, 다시 말해 신호를 분석하는 능력이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0) 2015.05.03
한국의 경제학자들  (0) 2015.04.24
경제학자의 문학살롱  (0) 2015.04.03
대통령의 경제학  (0) 2015.03.26
21세기 통화전쟁  (0) 2015.03.19
Posted by dalai
,

 


경제학자의 문학살롱

저자
박병률 지음
출판사
한빛비즈 | 2014-05-30 출간
카테고리
경제학자의 문학살롱
책소개
경제학자들이 살롱에서 소설을 통해 경제학을 토론한다면...소설 ...
가격비교

- 1837년 미국 최초의 금융공황이 밀어닥쳤다. 없는 사람에게는 더 혹독한 공황이었다. 서부개척이 활발해지자 서부의 은행들은 부동산을 담보로 막대한 대출을 해줌. 이것이 버블을 일으킴.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투기현상에 깜짝 놀라, 토지 거래를 할 때는 은행권 대신 금과 은 만으로 결제하도록 제한. 금과 은은 부족했다. 화폐부족에 버블은 꺼졌지만 거래마저 뚝 끊김. 토지가치가 떨어지자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줬던 소규모 은행들은 버틸 수 없었음. 은행들이 기업에 대출상환을 요구하자 기업들은 줄줄이 파산. 영란은행은 미국으로 금은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자율을 올림. 그랬떠니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영국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짐. 영국 경제경색은 미국의 면화 수출 급감으로 이어짐. 금융중심지였던 필라델피아가 저물고 뉴욕의 월가가 떠오름
- 개츠비가 짧은 순간 떼돈을 벌 수 있었던 데는 1920년 1월부터 시행된 금주법의 역할이 컸음. 위대한 개츠비의 소설 속 배경은 22년 여름 뉴욕시와 롱아일랜드. 금주법이 시행된 지 2년 된 해다. 개츠비는 밀주를 유통시켜 단 2년만에 백만장자가 됨. 미국의 20년대는 재즈의 시대, 광란의 20년대로 불리는 황금기다. 동시에 금주법의 시대라고도 함. 1919년 10월 전국 금주법이 제정됨. 이듬해부터 미국 땅에서 술은 자취를 감춤. 사실 미국의 금주운동은 남북전쟁 때부터 있었음. 청고도들이 이주해 건설된 나라였던 만큼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분위기였음. 술 제조와 판매에 대해서도 금지 여론이 높았음. 1881년 캔자스주는 1차대전 직전에 10여개 주들은 주법을 통해 술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했음. 하지만 연방의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술이 금지된 것은 이때가 처음. 미국 내 영토에서 0.5% 이상의 알콜이 포함된 모든 음료의 주조와 판매가 금지됨. 금주는 보수주의자들이 이끌었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앞장섰고 산업자본가들도 찬성. 근로효율이 높아진다는 이유. 주정뱅이 남편들을 싫어했던 여성계도 찬성. 당시 적대국이었던 독일이 주도하던 맥주산업에 대해 가진 반감도 한몫했다. 문제는 부작용. 술 제조와 판매를 금지했지만 암암리에 술은 제조되고 유통됨. 술 가격이 급등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클럽을 만들어 대놓고 술을 즐겼다. 개츠비의 파티에서도 술은 빠지지 않았다.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일으킨 것도 음주로 인한 사고였다. 돈 없는 서민들은 가짜 술이라도 들이켜야 했음. 그랬다가 죽은 사람이 13년 동안 3만명이 넘었다.
- 대도시 뒷골목에서는 무허가 밀주 제조공장이 들어섰고, 심지어 가정의 화장실에서도 술을 제조. 식당에서 불법으로 술이 팔려나감. 음주운전 사고율은 오히려 높아짐. 매수된 관료들은 밀주 유통을 눈감아 주었다. 이런 혼돈을 파고든 것이 갱단들임. 갱단은 밀주를 만들고 이를 유통시키면서 큰 돈을 벌었따. 그중 단연 두각을 드러낸 조직이 알 파코네가 이끄는 마피아였음. 알 카포네는 밀주뿐 아니라 도박과 매춘으로 사업영역을 넓히면서 25년 무렵에는 시카고의 일인자가 됨. 금주법 발효 5년만의 일이다. 금주법의 막을 내리게 한 것은 29년 대공황. 대공황의 혼돈 속에 많은 이들이 대놓고 술을 찾으면서 금주법은 더 이상 적용되기 힘들었음. 또 세금확보를 위해서도 지하로 숨은 술을 양지로 끌어낼 필요가 있었음. 루즈벨트 대통령은 금주법 폐지 공약을 들고 나와 대선에서 32년에 승리하고 33년 금주법은 폐지됨
-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성공을 거두면서 19세기 말 파리는 좋은 시절(belle epoque)을 맞음. 영화가 처음 선보인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새로운 20세기에 대한 기대로 가득참. 이런 기운은 1차대전인 1910년대까지 이어짐. 20세기 상반기 물리, 화학, 생물, 천체, 수학, 의학 등 과학기술은 폭발적으로 발전. 해저 2만리(1870), 80일간의 세계일주(1872), 15소년 표류기(1889)에서 볼 수 있듯이 여행과 북극 탐험, 우주여행 등 공간을 넘나든 미지의 땅에 대한 쥘 베른의 상상력은 과학과 특허의 시대에 환영받음. 쥘 베른의 창의성은 고향 낭트도 한몫했다. 낭트는 제 1의 무역항이었음. 식품, 화학, 기계공업이 발달한 도시. 특히 17~18세기에는 아프리카 노예와 프랑스 잡화, 아메리카 대륙의 산물을 교환하는 삼각무역으로 번영을 누림. 쥘 베른의 못 말리는 상상력과 공상은 이국적 정서가 풍부한 낭트가 출발점이 됨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은 300여 영방국가로 흩어짐. 신성로마제국을 이뤘지만 실제로는 느슨한 연합국에 불과했음.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으로 힘을 한데 모은 이웃 프랑스에 비해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낙후됐음. 1806년 나폴레옹이 침공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붕괴. 알자스와 로렌을 빼앗긴 것도 이때였음.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한 독일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재상이 된 뒤 1871년 통일을 이룸. 같은 해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 승리, 나폴레옹으로부터 당한 수모를 갚음. 프랑스는 자신의 땅 베르사유에서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 지불을 약속하고 알자스, 로렌을 반환. 1914년 1차대전이 터지며 독일과 프랑스는 또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는 연합국에 속한 프랑스의 승리였다. 프랑스는 1919년 베르사유에서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림. 보불전쟁의 복수였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독일은 2차재전의 유혹에 빠짐. 헤세는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사랑은 미움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위대하고, 평화는 전쟁보다 고귀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 유럽인은 두 차례 전쟁을 겪고서야 헤세의 말을 이해했다.
- 독일은 1871년 통일을 이룸. 이후 급속히 성장하면서 1910년대에는 영국과 겨루는 유럽 최대 공업국으로 성장. 하지만 그늘도 있었다. 소득 양극화로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의 빈부격차가 커졌고, 사회적 대립이 커졌다. 체제를 전복하려는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도 커져갔음. 독일은 의료보험, 산재보험 등 사회보험을 최초로 도입하며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래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음. 변신은 이 시기에 나왔다. 실직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해야하는 그레고르의 팍팍한 삶은 평범한 독일인들의 일상이기도 했다. 국가가 부강해지 만큼 노동자들의 삶이 향사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이 택한 것은 팽창주의였음. 독일은 급격히 군비를 늘렸고, 영국, 프랑스 등과 대립하기 시작.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경제는 완전히 망가짐. 패망한 독일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음.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일부 영토를 반환하거나 할양함. 1921년 승전국들은 독일에 배상금으로 1320억 마르크를 낼 것을 요구. 당시 영국 GDP의 절반이나 되는 액수였음. 케인스는 "독일 경제는 물론 유럽 경제를 망칠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음. 결과는 참혹했다. 전비를 마련하느라 이미 많은 돈을 시중에 풀었던 독일은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마구 찍음. 넘쳐나는 유동성은 역사상 유례없는 초인플레를 유발. 1921년 0.3마르크였던 일간신문은 23년 11월 7000만 마르크에 이르렀음. 빵 1파운드를 사기 위해서는 800억 마르크를 내야 했음. 1923년 독일의 물가상승률은 연간 29500%였다. 3.7일마다 물가가 두배씩 뛰었다. 1923년 7월 1000만 마르크, 11월에는 1000억 마르크 지폐가 발행됨.
- 무에서 유를 일궈야 했던 60년대에는 저돌적 기업가 정신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신규사업을 개척하는 창업가형이 많았음. 성장의 시기였던 70~80년대에는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사업확장형 CEO가 주목받음. 80~90년대에는 관리형 CEO가 떴다. 주력산업이 성숙기에 진입하고 경쟁이 격화되면서 경영합리화와 조직의 안정성이 중시된 것.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기에는 구조조정형 CEO가 중요했음. 거친 대외 환경에서 기업의 생존을 위해 효율성을 높이는 CEO가 필요했다. 결국 폭발적 성장형 시대에는 공격적인 돈키호테형, 세심한 관리형 시대에는 사려깊은 햄릿형이 적합하다는 의미
- 흔히 영국은 두명의 여왕이 만들었다고 함. 한명은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고, 또 한명은 18세기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18세기 빅토리아 시대로 가는 기초를 닦음. 그는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 등으로 포섭해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격파. 이는 영국이 작은 섬나라에서 해상제국으로 도약하는 기반이 됨. 동시에 에스파냐의 동인도 무역독점이 깨짐. 영국은 이어 적극적인 해외 원정으로 미국 플로리다 북부를 획등했음. 버지니아라는 지명은 엘리자베스 1세를 의미함. 이 시기 영국 왕권은 절정에 이름. 엘리자베스 1세는 화폐제도를 통일했다. 그레셤의 제안을 받아들여 금과 은의 가치를 일정하게 했음. 노동시간과 임금을 정하고, 빈민구제법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을 보호. 광산, 금속, 제분, 유리 등은 독점권을 부여해 보호 육성함. 중상주의를 강하게 밀어붙여 대외수출을 늘림. 동인도 무역 독점권을 준 동인도회사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경제군주였따. 경제력이 커지면서 유럽의 주변국에 불과하던 영국의 르네상스가 시작됨. 이탈리아보다 1~2세기가 늦었지만 셰익스피어라는 세기적인 작가가 나오면서 영국문학은 황금기를 맞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시대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평을 받음. 햄릿은 1601년에 쓰여짐. 엘리바베스 1세가 사망하기 직전이다. 영국에서는 자식이 없는 처녀 여왕이다 보니 후계자에 대한 온갖 음모와 추측이 들끓었다. 날로 노쇠해져가는 여왕의 건강에 대한 우려도 많았음. 햄릿의 무대는 12세기 덴마크이지만, 실제로는 여왕 사후에 갈등을 겪을 영국 왕실의 불안감을 반영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면 국력이 한창 신장되던 때에는 희극들이 많았지만 여왕 집권 말기부터는 비극으로 전환. 햄릿에 이어 오델로, 리어왕, 맥베스 등 불멸의 명작들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에 나왔다
- 1492년 스페인은 유대인을 몰아냄. 17만명의 유대인이 스페인을 떠남. 스페인은 유대인으로부터 몰수한 재산으로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에 투자. 하지만 유대인이 떠난 빈자리를 컸다. 금융시스템이 무너진 것. 1557년 스페인은 파산을 선언. 이어 무적함대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격파당하면서 해상 주도권마저 잃음. 유대인들은 15세기 스페인, 16세기 이탈리아, 17세기 네덜란드, 18~19세기 영국을 거쳐, 20세기 미국에 정착. 지금도 세계경제를 주무르는 숨은 실력자는 유대인들이다.
- 경제학은 시간의 가치를 표현하지만 미하엘 엔데는 숫자가 빠뜨린 것이 있다고 말한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한국인들은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데 익숙해져 있음.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에서 온종일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초과수당을 받으며 밤샘근무를 한다. 소녀 모모가 있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 시간,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여행을 다니며 잊지 못할 추억을 쌓으세요. 그것이야말로 더 큰 가치가 있답니다."
- 실비아 나사르의 '사람을 위한 경제학'을 보면 찰스 디킨스는 새 구빈법을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법이라고 생각. 미국 여행은 그의 생각에 힘을 실어줌. 아메리카 대륙은 경작을 기다리는 드넓은 땅이 있었고, 풀밭 위에는 엄청난 수의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인구가 살아갈 땅은 넉넉했다. 인구론은 영국에만 적용된다고 믿게 됐다. 인구론은 자본가들에게 큰 지지를 받음. 노동자들이 자신의 성욕을 참지 못한 나머지 너무 많은 아이들을 낳아 가난을 자초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됐기 때문. 공장주들은 임금착취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지자 환호함. 인구증가에 대한 공포는 1801년 영국이 근대적 인구조사를 최초로 실시하는 계기가 됨
- 인구론은 진화론 탄생의 밑받침이 됨. 다윈은 1838년 어느날 머리를 식힐 참으로 인구론을 읽었따. 식량이 부족해지면 식량을 쉽게 구하기 힘든 사회적 약자부터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보면서 생존을 위한 경쟁개념을 떠올림. 다윈은 종의 기원 서문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을 보든 동식물에 적용한 것이 나의 이론"이라고 실토. 찰스 디킨스는 경제학을 지지했다. 경제학이 없다면 세계가 굴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경제학을 음울한 학문으로 방치하는 게 아니라 따뜻한 학무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 나쁜 아이로 불린 구빈원 고아 올리버가 실은 따뜻한 아이였던 것처럼 경제학도 어두운 학문이 아니라 희망찬 학문일 수도 있다는 것. 인간에 대해 따뜻한 경제학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빚어낸 작품이 올리버 트위스트였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경제학자들  (0) 2015.04.24
신호와 소음  (0) 2015.04.09
대통령의 경제학  (0) 2015.03.26
21세기 통화전쟁  (0) 2015.03.19
제2의 기계시대  (0) 2015.03.07
Posted by dalai
,

대통령의 경제학

경제 2015. 3. 26. 20:42

 


대통령의 경제학

저자
이장규 지음
출판사
기파랑 | 2014-09-0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대한민국 경제를 살릴 다음 대통령은 누구여야 하는가? 이승만부터...
가격비교

 

 

(1) 이승만
- 도대체 얼마나 못살았던 것일까? 일본 식민지 시대에 가장 경제가 좋았던 때가 41년이었다고 하는데, 1인당 GDP기준으로 41년 수준까지 경제가 회복된 것이 68년이었음. 막대한 미국원조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엉망이었던 한국경제는 6/25 전쟁 통에 쑥대밭이 되었고, 이에 따라 박정희 시대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일제강점기 말기 수준으로 회복되었음
- 미국은 6/25 전쟁의 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애를 먹음.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며 미국에 강력히 저항. 6/25 전쟁으로 인한 남북분단은 고착되었으나, 크게 봐서 좌익과 우익의 싸움은 일단락된 셈. 특히 남한 입장에서는 참혹한 전쟁을 겪음으로써 좌익이 설 수 있는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 따라서 전쟁 이후의 권력투쟁은 좌우익의 갈등이 아니라, 독재와 장기집권을 쟁점으로 하는 민주화 차원의 정치적 대립으로 바뀌게 됨. 이승만 정권은 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 중임제를 허용토록 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확보했으나, 이로 인해 심각한 민심이반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 선거 때마다 이기기 위해 무리를 했고, 그 부작용은 더 큰 부작용을 불러옴. 이기붕의 부상과 자신의 건강악화로 비서정치가 갈수록 더해감. 이승만 정부의 독재적 무리수는 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극에 달함
- 만약 농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채 6/25 전쟁을 맞았었다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을 통해 그 결과를 단정할 수는 없어도 점령군 북한에 대한 남한 농민의 지지가 훨씬 적극적이었을 테고, 그리하여 전쟁은 북한의 조기 승리로 끝났을 공산이 컸다.

(2) 박정희
- 반대가 심하면 독재의 힘으로 밀어붙였고, 관료들이 소신을 발휘하도록 대통령 자신이 정치적 바람에 방패막이 노릇을 자임. 논란이 심하거나 시간을 끌며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자신이 결단. 바로 이런 점이 박정희 특유의 리더십이었는데, 이론적으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부분임. 합리적, 민주적 논의 절차를 무시하면 결과가 나빠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 박정희의 첫 결단으로는 혁명 직후 부정축재 처벌대상이었던 대기업 총수들을 처벌은 커녕 경제개발 선봉장으로 내세웠던 것을 꼽을 수 있음. 거기에 더해 1년 뒤에는 정부지불보증제도를 도입. 민간기업이 외채를 얻어오는데 정부가 빚보증을 섰던 것. 보통의 경제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특혜조치였음. 박정희로서는 한국기업 자체의 신용만으로는 차관도입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에서 재계의 요청을 과감히 수용한 것. 물론 측근의 조언과 재계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지만 전례없는 결단은 그의 몫이었다. 60년대 초반, 수많은 곡절을 겪었던 한국경제의 외자도입 체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정부가 빚보증을 서줘가면서까지 기업들에게 투자를 독려한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군부의 힘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가 기업과 짝이 돼서 경제개발을 성공시킨다는 시나리오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 더구나 대부분의 개도국의 경우, 정부와 기업간 파트너십 구축은 이른바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패정권의 불행한 말로로 접어들기 십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박정희가 리더로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반대를 무릅쓴 주요 정책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험스런 정책들을 많이 썼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대부분이 성공했기 때문. 대일청구권 협상을 비롯해 종합제철사업,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육성, 부가세 도입 등 모두가 격렬한 반대나 논란을 무릅쓰고 태어난 정책들이었음. 그러했기에 박정희를 더 특별히 주목하는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 경제는 60년 초반의 시행착오를 거쳐 중반에 접어들면서는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해가면서 한국경제의 산업혁명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고, 또 성공시켰음.
- 경제정책에 관한 한 박정희는 철저하게 행정부 우위원칙을 지켜나갔음. 관료들이 최선을 다해서 검토한 정책은 정부안으로 대통령 결재를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의회의 심의과정은 형식에 불과했음.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에 회의적이었고, 의회정치의 비효율에 부정적이었음. 의회에서의 토론절차는 자신의 경제개발 노력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여겼음. 오히려 정치인들의 부당한 개입을 차단시켜, 직업관료들이 소신껏 정책을 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음. 이 같은 그의 정책 태도는 유신체제로 접어들면서 그 정도를 더해갔음.
- 사채동결조치는 워낙 충격적 조치였던 만큼. 오랫동안 논란이 꼬리를 물음. 긍정론자들은 기업들의 연쇄 도산사태에 정부가 선제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더 큰 위기를 막았을 뿐 아니라 그 뒤에 몰아닥친 1차 오일쇼크도 견뎌냈으며 중화학공업 투자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말함. 반면 비판론자들은 가장 극단적인 대기업 살리기 정책이었으며 시장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한 부작용이 두고두고 심각했고, 사채수입에 의존했던 중산층의 붕괴현상도 상당했음. 어쨌거나 8/3 조치의 최대 수혜자는 기업이었음. 시장원칙을 크게 손상시키면서까지 사채동결을 통해 정부가 집단도산을 노골적으로 막아주었던 것. 따라서 정부로서는 혜택을 입은 기업들의 상응하는 조치를 기대. 기업의 빚 부담을 덜어줘서 위기를 넘기고 사업이 잘되면 기업공개를 통해 그 이익을 신세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 북한변수는 한국경제에 플러스였는가, 아니면 마이너스였는가? 남북분단 현실은 한국경제에 여러모로 큰 영향을 미쳤고, 계속 그래왔음. 없는 살림에 힘겨운 국방비를 감당하느라 자원배분에 심각한 왜곡을 일으켜온 측면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한국경제로 하여금 끊임없는 긴장과 도전의 끈을 늦출 수 없게 만든 긍정적 측면도 존재. 이승만의 농지개혁 정책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공산화 위협이 결정적 역할을 했듯이, 박정희 경제에도 다방면에 걸쳐 큰 영향을 줌. 경제개발계획이나 중화학공업 육성 등도 그런 사례
-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추진한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은 단순히 경제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음. 엄밀히 말하자면 중화학공업 육성이 아니라, 방위산업 또는 군수산업 육성이었고, 무기공장을 만드는 것이었음. 따라서 단순한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국가 안보정책이요, 군사대책 쪽에 더 무게가 실린 정책이었음. 북한의 위협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미국이 빠른 속도로 한국의 방위부담을 줄여가는 상황 속에서 취한 박정희 나름의 고육지책이었음. 한쪽은 10월 유신을 통한 집권연장이고, 다른 한쪽은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군 기본화기는 2차대전 때 미군이 쓰던 MI소총이었음. 박정희는 청와대 기습사건을 계기로 미국으로부터 M16자동소총 생산공장을 한국에 세워준다는 약속을 어렵사리 받아냄. 그것도 3년여의 실랑이를 벌인 끝에 71년 건설을 시작해 72년에야 완공. 무기산업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박정희는 본격적인 무기 국산화를 진두지휘하며 박차를 가함. 70년 8월 무기개발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하고, 부총리 김학렬에게 특수강 공장을 비롯해 무기생산에 필요한 공장건설을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소요자금 조달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
- 중화학 공업 육성은 엄청난 도전이자, 그 시대로서는 위험부담이 높은 벤처사업이었음. 부하의 암살로 정권이 종말을 맞자, 중화학공업 추진은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라했고, 실무 총책이었던 오원철은 신군부로부터 경제를 망쳤다는 죄목으로 심한 고초를 겪음. 박정희 정권이 졸지에 막을 내렸을 당시, 그의 경제개발 공적은 막판의 중화학공업 투자 실패로 몽땅 날아갔다는 분석이 정설처럼 여겨졌음. 그만큼 중화학공업 육성의 부작용이 심각했음. 그랬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구조조정을 거쳐, 한국경제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도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 결과적으로 77년 반짝 호황은 오히려 박정권에 독화살이 되어 돌아온 셈. 호황의 끝이 바로 코앞인 줄도 모르고 기업들은 과잉투자에 더욱 열을 올렸고,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수출은 급속히 추락하고 이에 따라 수출로 먹고살던 국내기업들의 도산이 줄을 이음. 부동산 투기는 물론이고 불황 속에도 물가는 폭등이었다. 여기에 부가세 도입에 대한 조세저항으로 민심도 어느 때보다도 흉흉하게 돌아갔음. 정치는 차치하고, 경제 쪽에서만도 이처럼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박정권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 박정희 정권말기 경제안정화 정책으로의 변화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큼 획기적이었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던 것일까. 이런 전환이 전적으로 직업 관료들에 의해 시작, 추진되었다는 점이 주목거리임. 박정희 경제에 앞장서왔던 그들이 박정희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안 제시와 새로운 처방을 주장하고 나섰던 것. 도대체 어찌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한 관료집단이 상당한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와 같은 반정부적인 일을 주도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박정희 키즈의 반란이었다. 박정희 시대가 키워냈다고 할수 있는 경제기획원 핵심관료들 사이에는 바로 박정희식 경제정책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어가고 있었음. 76년 이후 77년, 78년에 불어닥친 호황국면은 박정희 경제체제의 문제와 한계가 오히려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음.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과잉투자의 부작용 등이 그랬음. 돈이 흘러 넘치고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가하면 기업들은 은행 빚으로 채산도 맞지 않는 과잉투자 속에 통화긴축은 시늉만 내고 있었음. 강경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78년 당시 경제관료들의 염원은 어떻게 하면 물가안정을 이루면서 국제수지가 흑자를 내는 경제를 만들 수 있는가였다. ... 독일, 일본, 대만이 성공사례로 늘 공부거리였다. 1차 석유파동 때 우리는 물가안정보다는 부양에 더 역점을 두었는데, 일본, 대만은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뒀다. 그래서 우리도 79년 2차 석유파동 때는 불황을 감수하더라도 물가안정 위주의 정책을 펴자고 했던 것이다."
- 경제학자나 연구기관, 언론 등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리는 정책건의나 비판을 내놓고 하기 어려운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기획원은 기획차관보 강경식, 기획국장 김재익 등을 중심으로 78년부터 안정화 정책으로의 전환에 시동을 걸기 시작. 실무관료들의 사고전혼, 계획 전환을 지원하고 방어해준 최후의 보루는 뒤늦게 부총리가 된 신현확뿐이었음. 기획원이 중심이 돼서 안정화 계획에 불을 지피고 KDI의 경제학자들이 가세해서 본격화하는 과정에는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경제기구들의 어떤 건의나 경고도 없었음. 선진국의 전문가들이 한국경제에 대한 경고등을 켜기 전에 한국의 경제관료가 스스로 빨간불을 켜고 비상을 건 셈. 후임 대통령 전두환이 안정화 정책의 절대적인 신봉자가 된 것도 경제관료들이 처음부터 교육시킨 결과였음
- 78년 선거 패배를 계기로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 팀을 모두 경질하고 신현확 신임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에게 지휘봉을 맡기고 나서, 박정희는 그 전 같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음. 인사를 믿고 맡기는 것도 정책방향이 자신의 철학이나 추구하는 바와 같거나 통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용인술이 뛰어나고 통이 큰 리더라 해도, 자신이 주도해온 것을 뿌리째 부인하고 뒤집는데 어찌 마음 편히 믿고 맡길 수 있겠는가. 박정희는 신현확 부총리의 보고에 자주 짜증을 냈고, 막판에는 아예 그의 청와대 보고 자체를 기피. 결국 신현확을 경질하고 역시 자신의 종래 철학을 잘 소화해냈던 김용환 전 재무장관을 다시 기용할 생각도 했음. 자신이 선택한 경제사령탑을 믿지 못하고 1년만에 바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말기에 이른 박정희의 총기는 빛을 바래가고 있었음. "박정희 대통령의 용병술은 감히 누가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그야말로 적재적소에 사람을 썼고, 기용한 사람은 믿고 맡겼음. 그러나 막판에 와서는 안타깝게도 인사 면에서 그런 총기가 흐려졌던 게 사실이다." 남덕우의 회고다. 정권말기에 이르러서 박정희의 총기가 흐려지고, 용병술이 정상궤도를 벗어나 흔들렸던 것은 비단 경제분야뿐이 아니었음. 기본적으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정부장 김재규로 3인방 측근을 짤 때부터 심각한 사달이 나기 시작했던 것. 인사의 달인이 결국 인사를 잘못하는 바람에 불행한 종말을 자초한 셈

(3) 전두환
-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하마터면 없어질 뻔했음. 적자에 허덕이는 자동차 회사들에 대한 전두환의 경제선생으로 등장한 김재익이 비교우위론을 내세우며 "자동차 산업은 한국에 맞지 않으니 외국의 큰 회사에 넘기자"고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던 것. 따라서 정부차원에서 현대자동차를 미국 GM에 넘기기로 결론이 났었는데, 정주영 회장이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는 바람에 무산됨. 김재익의 최대실책으로 꼽히는 대목이다. 500만호 주택 건설 계획은 국보위가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첫 번째 선물이었음. 80년 9월 23일 국내 신문과 방송은 대대적으로 보도해야 했고, 물론 어떤 비판기사도 금지됐음. 국보위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공정거래제도의 도입. 재벌에 대한 특혜와 시장의 독과점을 본격적으로 규제감시하는 제도적 장치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 재벌을 본격적으로 규제하게 되는 공정거래위원회제도가 군인들 힘으로 탄생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경제관료들이 오래전부터 말만 꺼냈을 뿐, 엄두를 못 내던 일이었음. 그나마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 안에 과장급 공정거래담당관을 두어서 기업들의 독과점이나 지나친 가격담합 문제 등을 형식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 김재익이라는 탁월한 경제학자는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소신껏 자신의 그랜드 디자인을 펼쳐나갔음. 전두환은 경제에 문외한이었으나 학습소화능력이 뛰어났음. 소위 세마리 토끼라고 하는 성장, 물가, 국제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확실히 깨우침. 물가안정이 최우선 과제이고, 시간이 걸리고 어렵더라도 금융을 자율화시키고 개방정책을 펴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전두환의 과외선생이 되기 전의 김재익은 실패한 관료였다. 76년 부총리 남덕우의 예외적인 발탁으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자리에 앉아서 여러모로 자신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정책으로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으나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음. 직업관료들의 집단 따돌림 속에 그는 외로운 백로같은 존재였다. 결국 공무원 청산을 결심하고 KDI에 가서 연구나 할 작정을 했었다. 그런 처지에 세상이 와장창 뒤바뀌고 새 실력자의 가정교사가 된 것이다.
- 정부가 최우선 정책으로 강조한 슬로건은 "한 자릿수 물가"였음. 언론도 꿈같은 소리를 한다며 유치한 정권 홍보쯤으로 치부했음. 그러나 그해(81년) 물가는 결과적으로 도매 11.3%, 소비자 13.8%였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비자 물가 기준으로 82년 2.4%, 83년 -0.8%였다. 상상도 못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진 것. 전두환 정권의 물가안정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비록 반대와 비판을 억누르는 가운데 밀어붙였다 해도 정부 스스로가 고통을 감내하는 비인기 정책을 장기간 일관되게 추진한 끝에 맺은 결실이라는 점에서다. 총지휘자 김재익은 마약같은 30년 인플레이션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특단의 전기가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힘과 기회를 얻은 그는 소신대로 대통령의 이름으로 이를 실현시켜나갔던 것.
- 개방이 대세가 된 것은 3저호황 덕분이기도 했음. 막대한 국제수지 흑자를 경험하면서 이젠 싫어도 수입증대 정책을 써야 하는 상황으로 세상이 달라진 것. 그럼에도 수입을 죄악시하는 인식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음. 양담배처럼 국민감정에 민감한 품목은 수입규모에 상관없이 개방불가 품목으로 간주됨. 이 일을 추진하던 상공부 고위간부는 심한 고역을 치르기도 했음. 86년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설 무렵 박운서 상공부 통상진흥국장은 해외공관장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국산담배만 피울 것이 아니라 이제 양담배도 피워야 한다. 컴퓨터나 전자산업은 당분간 더 보호해야 하지만, 양담배 같은 소비재쪽은 개방해서 외국의 통상압력에 대처해야 한다." 고 했다고 큰 봉변을 당함. (보안사로 호출당해 고역을 치름)
-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순수한 권익보호 차원을 벗어나 이데올로기적 투쟁양상을 띠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시대 말기인 70년대 후반부터였지만, 전두환 정권에 들어오면서 탄압이라는 자양분을 토대로 더 본격화하기 시작. 정부 일각에서는 노동부를 중심으로 경제가 호전되고 하니 노동조합 정책도 완화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청와대의 검찰 출신, 군 출신 강경파들에 의해 번번이 묵살당함. 그러나 전두호나 시대의 잘못된 노동정책 탓을 신군부에게만 돌릴 순 없다. 물가안정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만큼, 정부의 중요 기본정책 중 하나가 임금억제를 뜻하는 이른바 소득정책을 강력히 펴왔던 점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음. 김재익을 비롯한 정부 이코노미스트들은 만성적 인플레이션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강력한 임금억제 정책을 구사했고, 따라서 당연히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음. 물론 이 같은 임금억제가 물가안정에는 큰 역할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의 탄압을 초래했던 점을 부인할 수 없음. 86년 들어오면서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강봉균 기획국장 등 실무자들 사이에서 노동법에 대한 최소한의 개정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역시 청와대의 냉담한 반응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감. 속으로 곯아들고 있는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아무도 챙기지 않음. 결국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87년 6/29 선언 이후 엄청난 노사분규 사태를 불러오게 됨

(4) 노태우
- 노태우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존재감이 약한 대통령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노태우 시대는 마치 잃어버린 5년처럼 여겨짐. 그러나 이 시기야말로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변화무쌍한 격변의 시기였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26년간의 군사독재 시대가 드디어 막을 내리고, 민주화의 향연 속에 각종 개혁이 홍수를 이룸. 올림픽이 치러졌고, 소련과 중국 등 공산국가와 처음 국교를 맺었으며, 북한과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역사적 사건도 바로 노태우 집권 시대에 일어난 일. 게다가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회오리 속에 야당이 국회를 장악하는 여소야대 세상이 전개됨. 정보기관의 실질적인 언론통제가 사라진 것도 이때부터였음. 정치민주화는 물론이고 경제 쪽에서도 민주화 쓰나미가 밀어닥쳤음. 기존의 경제개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고, 분배와 복지가 모든 정책의 화두였다. 이승만은 건국, 박정희는 산업화, 전두환은 물가안정이 각 시대의 키워드라고 한다면 노태우 시대의 그것은 역시 민주화였다. 민주화 열풍은 대통령의 리더십 변화에서 시작해, 의회의 역할 그리고 기업과 노조, 일반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개발경제 시대의 기존인식들을 뿌리째 흔들었다.
- 서울올림픽 이후 경제는 비실대기 시작. 경고등은 역시 수출 부진 현상에서 먼저 켜졌음. 가파른 원화절상이 수출에 큰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환율 때문만이 아니었음. 노사분규의 혼란속에 임금이 급속히 오른데다 다시 찾아온 인플레이션으로 수출경쟁력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었음. 3저 호황(86~88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이 항만, 도로 등의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소홀히 했던 탓에 물류비용이 급속히 오르고 있었음. 밖에서는 일본이 그간의 엔고를 극복하는 구조조정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 특히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동남아의 값싼 노동력, 풍부한 자원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국제협업체계를 구축했고, 이것이 그동안 한국이 주력해온 미국과 유럽의 중저가 시장을 협공하는 데 큰 성과를 올리고 있었음. 국내에서는 이런 세계경제의 새로운 판도변화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들조차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수출 감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저 "이상한데..."하는 정도였다. 90년 이후 내리 3년간은 국제수지 적자가 계속되는 가운데 수출은 속절없이 줄어갔으나 아무도 손을 쓰지 않았다.

(5) 김영삼
- 김영삼은 개혁을 결단하는 데는 능했던 반면,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일머리 즉, 내용, 방법, 절차를 너무 소홀히 했다. 사건사고 처리하듯이 경제정책도 우지끈 뚝딱 해치우려 했다. 그러다가 잘 안되고 여론이 좋지 않다 싶으면 이내 사람을 갈아치웠다. 5년 재임기간 중 경제부총리를 7명이나 기용한 것이 바로 그런 증거다. 자신의 좌우명처럼 강조해왔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을 스스로 무색하게 함. OECD에도 가입하고 1인당 국민소득 1만부로 달성해 보였으나 결국 정권 중반기를 지나면서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국가적 외환위기로까지 치닫게 됨. 그 과정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미연에 막을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은 적지 않았으나, 김영삼의 리더십은 절실할 때마다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음. 오히려 위기를 재촉하는 가속페달을 밟기도 했다. 본인이 직접 능력을 발휘하던가, 아니면 사람을 잘 쓰든가, 그는 두가지 모두 실패했다.
- 세계화는 정치적으로 말만 무성했을 뿐 집권 후반의 개혁 피로현상과 함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무튼 김영삼 시대에 한국경제는 여러 역사적 이정표를 세움. 95년 수출 1000억불을 돌파했고, 1인당 국민소득 역시 1만불을 넘겼고, 종합주가지수 1000선을 뚫었다. 더구나 그 다음해 96년말에는 선진국 그룹인 OECD에 정식으로 가입했음. 이로써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한국경제는 어디까지가 진정한 성장이고, 어디서부터가 거품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상황으로 계속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 경제의 실상은 시간이 갈수록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혼란스러워져 가기만 했다. 집권초기에 내걸었던 신경제 건설의 포부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고, 치유를 다짐했던 이른바 한국병 증세는 더욱 심해져 갔다. 대통령은 집권 마지막해까지도 개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지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급기야 97년에 접어들면서 대기업들이 한 달에 하나꼴로 줄지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김영삼 대통령은 한보를 부도낸 것을 후회하면서 어떻게든 부도만은 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 현직 대통령의 당부를 그냥 무시하고 갈 수는 없었다. 부도내지 말라는 대통령의 거듭된 지시를 어기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부도 처리해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 대안이 부도유예협약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부도처리나 마찬가지지만 형사문제로 신문에 크게 보도되는 것을 막겠다는 묘안이었다." (강경식, 국가가 해야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부도유예협약은 묘약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부도금지 지시와 강경식의 편법 대처는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신인도를 결정적으로 추락시켰다. 정부 지시에 따라 은행들은 진로를 부도처리하지 않고 부도유예협약으로 미봉한 데 이어서, 재계순위 7위인 기아자동차까지 여기에 적용시켰다. 부도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부도유예협약이란 편법을 동원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기아가 국민기업임을 내세워 채권은행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거부하면서 시간끌기 전략으로 나간 것이 결정타였다.
- 국가부도위기는 현대 한국경제사에서 처음이 아님. 70년을 전후로 차관기업들이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다가 세계시장에 불황이 닥치면서 무더기로 빚더미에 올라앉아 은행의 연쇄도산 위기로까지 몰고 갔었고, 그 이후 중화학 공업의 과잉투자, 석유파동, 국내정치 불안 등으로 80년에 또 한차례 큰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앞의 경우는 모두 독재정치 시대에 일어났던 위기상황이었고, 위기대처 방법 또한 대통령의 최종결심으로 결정되는 것이었으며, 정책의 집행 또한 일사불란하게 진행됨에 따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소위 선제적 죄가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73년 박정희의 8/3 사채동결조치가 그랬었고, 80년 전두환의 국보위 강제 구조조정들이 그랬다. 부작용이 생기더라도 방향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뜻에서 국가부도위기는 종래의 개발연대식 대처가 애당초 불가능했던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이 풀었던 방정식에 비해 김영삼이 풀어야 하는 방정식은 훨씬 어렵고 복잡했다.


(6) 김대중
- IMF 신탁통치가 아니었다면 한국경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대통령 김대중의 경제정책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국가부도위기를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발휘됐던 김대중의 탁월한 리더십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임. 혼란 속 김대중의 리더십은 전임 대통령들, 노태우와 김영삼에 비교해 특히 돋보였음. 그러나 대통령의 리더십만으로 한국경제가 살아난 것은 아니었음. 금 모으기 같은 국민적 분발과 각고의 노력이 그 기본이었으며,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강력한 압력 또한 결정적 역할을 했음. 한국경제를 중환자실에 집어넣고 과감하게 대수술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강제적 외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 2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경제가 일본경제가 맥아더 사령부의 각본과 감시속에서 과거를 해체하고 변화와 개혁의 판을 완전히 다시 짜나갔던 형국과 유사한 점이 많았음. IMF가 부도만 막아주고 개혁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김대중 정권은 과연 어떤 정책을 펼쳤을까. 그랬을 경우에도 30대 재벌의 절반이 무너지고 은행들이 무더기로 간판을 내리는 사태가 벌어졌을까. 결코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
- IMF위기 때문에 김대중이 자신 특유의 경제관, 즉 DJ노믹스를 실천해나가는 데 차질을 빚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함. 어찌 보면 김대중은 경제위기 덕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DJ노믹스가 추구해왔던 경제개혁 작업 또한 IMF의 강압적 지침 덕에 자신의 손으로 성취해낼 수 있었음. 사실 김대중이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시장경제의 창달은 관치경제의 부작용을 규탄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였음. 처음에는 민주주의가 시장경제의 전제조건이라고 했다가, 80년대 중반부터는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의 병행추진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쪽으로 바뀐다. 논리로 뒷받침된 경제관이라기보다는 양쪽의 좋은 것만 골라서 취한 짜집기식 주장이었음. 김대중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현실정치인이었다. 야당 총수로서는 재벌의 폐단을 줄기차게 공격하고 외채 의존적 개발전략을 극력 반대했으나, 대통령 김대중으로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현실적인 저항이나 부작용을 감안하지 않는 무모한 개혁을 밀어붙이는 정책 선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IMF가 제시한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의 일정과 기준은 김대중에게 개혁의 명분과 방법론을 동시에 제공해준 셈
- 김대중은 정치의 달인이었고, 풍부한 경제지식을 과시했으나, 행정은 아마추어를 면치 못했다. 왜곡된 의료보험수가가 근본문제였는데 이것은 그대로 둔채 난마처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의약분업을 밀어붙이려 했던 것부터가 순진한 발상이었음. 자신도 시인했듯이 보건복지부를 믿었던 것도 관료사회의 실상을 몰랐던 탓이다. 경제행정이 2차방정식이라면 복지행정은 3차방적식이라 할 정도로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인데, 당시의 복지행정은 연륜도 짧을 뿐 아니라, 의식만 앞서 있고 현실문제의 해결역량은 매우 미흡했었음. 그러니 시민단체에 중재를 맡기는가 하면, 관련 경제부처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정치권을 동원하는 자충수를 두기까지 했던 것. 김대중으로서는 그 어려웠던 IMF 위기도 거뜬히 극복해냄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칭찬이 자자했건만,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의료대란으로 2년여를 연일 언론으로부터 질타당하는 수난을 감수해야 했음.
- 가장 아쉬운 것은 IMF 조기졸업이 결코 바람직한게 아니라는 점. 물론 김대중에게도 IMF 조기졸업은 경제적 의미 못지 않게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했음. 단 졸업을 너무 서둔 나머지 지나친 부양책을 동원했고, 그것이 방법과 과정은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강력한 정부주도와 별로 다를 바 없었음. 고통스런 수술은 서둘러 봉합해야 했다. 어렵사리 판을 벌였던 구조조정이 도중에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은 충분히 추워야 하는 법인데, 그렇지 못했던 것.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다음 정권으로 넘겨졌다. 고삐풀린 부동산 투기와 또다시 금융위기를 몰고 올 뻔했던 카드대란이 그것이다.

(7) 노무현
- 노무현은 "반미를 하면 안되는가"라는, 종래의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말을 주저없이 했고, 박정희 경제의 해체를 공공연히 천명. 노무현은 김대중에 비해 훨씬 비타협적이었으며, 더 이념적이었고, 직선적이었고, 거칠었다. 주변의 심한 저항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옳다는 판단만 서면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노무현은 한마디로 박정희식을 전면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 박정희식이라는 것은 성장우선 정책의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시대에 기득권을 누렸던 사람들, 그리고 이를 존재케 했던 시스템과 질서까지도 비판, 부인하고 나섰음. 박정희를 뒤따랐던 유일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의존 탈피를 뜻하는 자주국방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안보나 정치분야에서도 큰 전환을 시도했지만, 경제분야가 가장 오래 시끄러웠음. 그는 정책기조 면에서도 성장 없이는 복지 없다를 걷어내고 복지 없이는 성장 없다로 바꿈. 외국정책 참고하는 것도 미국 사례엔 거리를 두고 유럽 사례에 더 관심이 많았음. 노동과 복지정책에 대한 기본입장을 달리했으며, 정책 운영에 노조나 시민단체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했음. 지역주의 타파와 사회통합을 참여정부의 기치로 삼았고, 서민 대통령을 자임. 전임 정권에서 물려받은 양극화 심화현상을 개선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임. 노사관계에 있어서는 노조편임을 분명히 했고, 재벌에게는 노골적으로 대립각을 세움. 국민의 정부부터 그러한 경향이 시작되긴 했으나 참여정부에 와서는 사람이나 정책면에서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변화를 실천해 나감
-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익혀나가면서 여러모로 진화를 거듭해나감. 기업관, 노조관, 관료관 등에서 상당한 변화를 보임. 경제정책에 관한 한 시간이 지나면서 빠른 속도로 이데올로기 과잉현상에서 벗어나 실무형 행정 대통령으로 바뀌어감. 자신의 정치적 지지세력들이 반발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과의 FTA를 결심한 것이야말로 그 전의 노무현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음. 집권전반의 담론의 주제가 분배와 복지였다면, 중반 이후부터는 오히려 성장 잠재력 확충과 국가경쟁력 제고와 개방 쪽으로 중심축이 옮겨갔음. 고용없는 성장을 문제시하고 양국회 해소를 추구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없이는 일자리 창출이 없음을 이내 깨달음. 특히 노조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집권 중반에 들어서기도 전에 생각이 달라져 갔다. 자신이 추진하는 노동정책에 대해서까지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는 주류 노동세력에 대해 80년대식 낡은 투쟁방식이라며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음. 초기의 노무현은 노조에 대해 김대중보다 더 깊은 애정을 표시했었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더 큰 실망을 표시. 기업편으로 전향했다는 뜻이 아니라, 가급적 삼갔던 노동계에 대한 비판을 정면으로 하고나선 것. 노동계가 자신의 정부까지 줄곧 무시하는 태도에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참여정부를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점점 과잉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변해감
- 부동산 정책은 갈수록 꼬여갔다. DJ말기에 불기 시작한 아파트 가격상승 바람은 04년에 가서는 극에 달함. 다른 많은 개혁정책을 아무리 쏟아내도 부동산 투기바람이 계속되는 한 빛을 낼 수 없었음. 노무현 정부에 와서 잘못 대응하는 바람에 부동산 투기가 더 기승을 부렸던 것도 사실이지만, 굳이 책임소재의 원천을 따지자면 김대중 정권이 IMF 조기졸업을 목표로 서둘러 부양책을 썼던 데서 비롯된 일. 참여정부로서는 잘못된 유산을 물려받은 데다 그것의 대처 또한 그르친 꼴이었다. 서민정부를 자임하고 양극화 극복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으나 가장 아픈 대목은 다름 아닌 부동산 정책의 실패였다
- 노무현이나 기예처장관 변양균은 한마디로 너무 순진했고 일머리를 몰랐다. 국가장기 청사진 제시는 박정희 시대에도 정부가 직접 하지 않았다. KDI를 시켜서 애드벌룬을 띄우게 하고 정부관료들이 그걸 토대로 가능한 사안을 선택적으로 실천에 옮겨가는 방식을 썼다. 절대권력자인 박정희가 그런 우회적인 방법을 썼음에도 국가장기발전 계획이란 것이 원래 여러모로 정치적 오해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힘도 없는 노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그것도 레임덕이 한창인 시기에 장밋빛 청사진을 그려 보인 것 자체가 일머리를 모르는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었던 것.

(8) 이명박
- 기세좋게 출발한 MB노믹스는 10리도 못가서 발병이 났다. 정권 출범 3개월만에 터져 나온 촛불시위로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미국발 금융위기, 국제 유가 폭등, 그리고 유럽발 세계경제위기로 이어지는 대외여건 악화는 성장촉진에 초점을 맞춘 747공약을 초장에 주저앉혔던 것. 어찌보면 세계경제가 구조적 불황에 빠져든 판국에 성장을 모토로 하는 747 공약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음. 오히려 역풍이 불기 시작. 성장정책은 졸지에 나쁜 정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경제가 나빠지면 당연히 기업투자 촉진책을 우선적으로 쓰기 마련인데,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 것. 종전 방식의 경기부양 정책이 기업특혜 정책으로 매도되는 분위기속에서 지속성장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분배와 복지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세를 주도. 경기부양을 할 때 정부가 취하는 정책 선택도 달라진 것이다. 다시 참여정부로 복귀하는 분위기가 생김
- 한국의 대통령들은 대체로 국내보다도 외국에서의 평판이 더 좋음. 이명박 대통령도 그러했다. 국내에서는 747 공약의 좌절이나 촛불사태의 혼란 등으로 지지도가 급전직하 현상을 보였던 것에 비해, 밖에서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석유파동, 그리고 유럽의 재정위기 등을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해 보인 지도자로 그를 치켜세움. 게다가 G20 정상회담의 서울개최를 주도함으로써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를 끌어온 G7체제가 새롭게 진화하는 길목에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괄목상대로 끌어올렸다는 점 또한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만했다.
- "세종시 문제는 정치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이대통령의 기본적 발상 자체부터 잘못된 인식의 출발. 정치적으로 민감한 골치아픈 문제를 순진하게 경제논리로만 내세워 관료들 중심으로 국회의원의 기존결정을 뒤엎으려고 했으니 잘될 리 없는 일이었다. MB정권으로서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만 허비하고 만 셈. 대통령으로서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이 아니라 여당의 지지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명박의 정치능력은 결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이 계속 비정치적 행보를 포기하지 않은 점은 성공실패여부를 떠나 매우 주목할 만하다. 세종시 수정안이 좌절된 후에도 잘못된 정치적 약속은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 11년 3월에도 역시 선거공약이었던 영남권 신공항 건설계획을 오랜 논란 끝에 사과성명과 함께 백지화로 결론지음. "신공항 건설을 약속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하지만 10~20조 투자해서 매년 적자를 본다는 어려움이 있다.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 이에 반해 박근혜는 "신공항 건설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고, 약속했으면 지켜야 한다"며 또다시 반기를 들었고, 급기야는 차기 대통령 선거공약에까지 다시 포함시킴.
- 주요정책이 심각한 정치현안이 될 때마다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 세종시 문제도 그랬고, 한미 FTA 협상비준때고 마찬가지였다. 세종시를 행정수도화하는 대신 과학기술이나 교육중심 도시로 바꾸고자 했던 이명박의 판단은 사실 옳았다. 그러나 국회에서 다수의 여당의원조차 설득못함. 충분한 정치적 사전조율이 전제되어도 힘든 일을 자기 소신만 믿고 밀어붙였던 것. 문제의 향방이 정치인들 손에 달려 있는 판에 정치적 접근을 금기시하는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좋게 해석하자면 중대한 사안을 합리적으로 냉정하게 처리해야 하며, 경제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거나 표를 의식한 나머지 인기영합주의로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세종시나 한미 FTA같은 문제야 말로 정치적 중대 쟁점이요, 따라서 정치적 논의와 타협노력이 선결과제였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대처럼 국회의원은 거수기에 불과하고 행정부가 옳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얼마든지 밀어붙였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마땅한 대안도 없이 국회를 피하거나 멀리하기만 했던 것임. 국회의원들이 이런 대통령에 호의적일리 없었으며, 여야를 가릴 것없이 마찬가지였음. 비록 87년 민주화 이후의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에 부담을 줬다 해도, 세상이 달라져서 정치적 합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엄연한 현실을 간과했던 것. 정치를 싫어하고 멀리하려 했던 CEO대통령의 근본적 한계이기도 했음.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호와 소음  (0) 2015.04.09
경제학자의 문학살롱  (0) 2015.04.03
21세기 통화전쟁  (0) 2015.03.19
제2의 기계시대  (0) 2015.03.07
베트남에서 기회를 잡아라  (0) 2015.02.06
Posted by dalai
,

21세기 통화전쟁

경제 2015. 3. 19. 20:49

 


21세기 통화전쟁

저자
강재택 지음
출판사
매일경제신문사 | 2014-12-22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21세기 통화 전쟁을 알기 쉽게 풀어낸 우리나라 최초의 책! 우...
가격비교

 

 

- 미국 금리인상은 이론적으로 우리나라에 투자된 외국자본의 유출요인이 됨. 그 이유는 우리나라와 미국의 금리차가 줄어들기 때문. 일반적으로 우리나라같은 신흥시장국은 미국에 비해 환율 변동성이 큼. 즉 우리나라 원화가치가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 따라서 우리나라 자산의 기대수익,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채권의 이자율에 이런 원화가치 하락가능성을 보상할 만큼의 추가적 이자 차이가 있어야 외국자본이 우리나라 채권에 투자됨. 그런데 미국의 중앙은행이 정책금리를 인상하면 미국의 시장금리도 따라서 올라갈 것이고, 우리나라와 미국의 금리차이가 줄어든다. 우리나라 자산투자의 환변동 리스크를 보상하는 추가금리의 폭이 줄어들기 때문에 우리나라 채권에 대한 투자매력이 감소. 우리나라 채권을 팔고 미국의 채권을 매입함에 따라 국내채권에 투자된 외국자본이 유출될 수 있음.
-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더라도 실제 대규모 외국자본의 일시적 유출가능성은 낮음
(1) 미 연준은 금리인상 시기와 폭을 시장의 기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결정할 것으로 생각됨. 미 연준의 양적완화로 세계 경제가 가까스로 회복되는 상황에서 시장의 기대에 비해 조기에 또는 대폭의 금리를 인상하게 되면 세계경제는 다시 충격에 빠질 수 있음. 따라서 미 연준은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이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통화정책의 정상화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됨.
(2) 미국 금리인상은 우리 경제에 긍정적 외부효과도 있어서 미국의 금리인상에 대한 부정적 효과가 일부 상쇄됨. 미국 금리인상은 미국경제가 호조를 보인다는 점을 미 연준이 확인시켜주는 것. 미국 경제 호조는 우리나라 제품에 대한 수요증대로 우리나라 수출이 증가. 또한 달러화 강세로 인해 우리나라 수출의 가격경쟁력이 개선되는 측면이 존재. 물론 대규모 자본의 일시적 유출에 의해 원달러 환율이 급격히 상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 미국은 자국에서 촉발된 금융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자국통화공급을 무제한적으로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미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지 않았음. 오히려 미 달러화의 발행을 통해 유로지역과 아시아 등 신흥 시장국의 유동성 부족을 해소시키면서 미국만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줌. 우리나라도 그 당시 미 연준과의 300억불 통화스왑발표 후 환율이 하루만에 177원 하락하고 외환시장이 급속히 안정을 찾음. 또한 미 연준과 통화스왑을 체결한 브라질, 멕시코의 경우도 통화스왑 체결후 CDS 프리미엄이 크게 안정됨. 위기는 미국에서 발생하였지만 미국은 위기해결과정에서 달러화 공급증대를 통해 국제금융위기의 해결사로서 오히려 미국의 위상을 높이고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더욱 강화한 것
-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위안화 환율의 하락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을 인식되고 있음. 위안 달러 환율의 전일대비 변동폭을 상하 일정 범위내로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 중국과의 교역에서 적자규모가 큰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목하고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음. 미국이 중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하면, 중국이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미 국채를 시장에서 매도함으로써 미 국채시장과 달러화의 위상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 우리나라도 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 연준과의 통화 스왑 협상과정에서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미 재무부 장관에게 유사한 압력을 넣은 것이 협상 성공에 도움이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 환율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가격이다. 따라서 변동환율제 하에서 환율은 외환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며, 외환의 수요와 공급은 기본적으로 국제수지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음. 통상 경상수지가 적자인 경우 자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의 공급이 수요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됨. 이에 따라 국내 외환시장에서 미 달러화가 상대적으로 귀해지면 자국통화 가치가 하락됨. 그리고 이 부족한 달러화는 주로 해외차입에 의해 충당됨. 이 경우 해외차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내 외환시장에서 원 달러 환율이 가파르게 상승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외환위기로 연결될 수도 있음. 그런데 미국은 다르다. 경상수지 적자만큼 자국통화인 달러화를 발행하여 지급할 수 있기 때문에 경상수지 적자 때문에 외화를 조달할 필요가 없음. 또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상당부분 미 국채 투자 수요에 따른 자본유입으로 메워짐.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상대국들이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화를 안전한 형태의 외환보유액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 국채가 최적의 투자대상이기 때문. 다만, 경상수지 적자 지속이 미국경제의 부실로 해석되는 경우에는 달러화 약세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
- 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 안전통화인 달러화에 대한 수요가 여러 경로를 통해 증가함으로써 달러화 가치하락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음
(1) 거래적 동기에 의한 달러화 실수요 증가. 기조달 차입금의 만기가 도래했으나 금융위기로 인해 차입금의 만기연장을 받지 못하는 금융기관 등 차입자들이 차입금을 상환하기 위해 달러화가 필요했음. 이에 따라 시장에서 달러화의 매입수요가 평상시에 비해 더 많이 증가
(2) 예비적 동기의 달러화 수요. 지금 당장은 결제일이 도래하지 않았지만 향후 결제일에 필요자금을 원활히 조달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걱정될 수 있음. 이런 우려가 있는 금융기관 및 기업들은 어느 정도의 미래 기간 결제 예상액을 미리 확보하게 됨. 이런 수요는 미국 이외 국가의 금융기관, 특히 국가와 금융기관의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신흥시장국에서 더욱 뚜렷하게 발생하게 됨
(3) 투기적 동기에 의한 달러화 수요. 국제금융시장의 상황이 불확실한 경우 달러화는 안전통화이기 때문에 약세가능성 보다는 강세 가능성을 기대하는 거래자들이 더 많은 것이 일반적. 이런 상황에서 향후 달러화 강세 가능성에 기대어 달러화를 미리 확보해 두었다가 달러화 가치가 기대수준으로 상승할 경우 달러화를 매도하여 환차익을 얻으려는 수요가 생길 수 있음. 이런 수요는 시장정보와 예측력에서 우위에 있는 선진국 금융기관에서 더 자주 일어날 수 있음.
- 통화가치가 독일 마르크화와 그리스 드라크마화의 어느 사이에 있는 유로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독일 마르크화의 통화가치가 그리스 드라크마화보다 높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 따라서 독일은 마르크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통화가치가 낮은 통화(유로화)를 사용한다는 것. 반면, 그리스는 드라크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통화가치가 높은 통화를 쓴다는 것. 그 결과는 독일은 힘 안들이고 자국통화를 평가절하한 효과에 힘입어 경상수지 흑자행진을 벌이고 있음. 실제로 05~09년 중 독일 경상수지 흑자의 상당부분인 61.6%가 유로지역에서 발생했음
- 현실적으로 유로화는 달러를 대신하여 국제거래에서 사용되고 그 결과 달러화를 기축통화 지위에서 밀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모든 국제거래가 달러화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 국제거래는 최종적으로 거래대금을 결제함으로써 거래가 종료됨. 그런데 그 결제가 대부분 뉴욕에 있는 미국의 한 은행에 개설된 달러 계정을 통해 이루어짐. 예를 들어 우리나라 한 은행이 유럽의 한 은행에서 차입을 한다고 하자. 이 경우 뉴욕에 개설된 유럽 은행의 한 계정에서 달러화로 일정 금액이 차감되고 동일 금액이 우리나라 은행의 계정으로 들어옴. 미국의 은행계정과 달러화를 사용해야 대부분의 국제거래가 종결되는 것이다. 수출입대금의 결제도 마찬가지. 유로화가 달러를 이길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여실히 드러남. 유럽중앙은행이 유로화를 발행하는 것만으로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 위기 때에는 모든 경제주체들이 안전통화로서 미 달러화를 원함. 유럽중앙은행이 미 연준과 무제한적인 달러화 공급약속, 즉 통화스왑 협정을 체결하고 유로지역이 위기로부터 회복된 것은 유로화가 달러화를 이길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 일본은 현재 미국의 지지하에 추진하고 있는 아베노믹스를 계속 추진할 것임. 이를 통해 우선 대내적으로는 디플레이션을 탈피하고 경제회복을 기대할 수 있음. 또한 아베노믹스로 수출경쟁력이 회복되어 경상수직 흑자가 확대되면 이를 통해 미 국채매입을 늘림으로써 미일관계를 계속 공고히 할 수 있음. 이렇게 미국의 지지하에 국제적 위상을 회복함으로써 중국과의 아시아 맹주경쟁 및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지위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음. 이는 또한 일본 엔화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될 것임. 문제는 아베노믹스가 당초 기대한 효과를 이끌어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음. 중국의 추월을 막아내지는 못할 것임.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제학자의 문학살롱  (0) 2015.04.03
대통령의 경제학  (0) 2015.03.26
제2의 기계시대  (0) 2015.03.07
베트남에서 기회를 잡아라  (0) 2015.02.06
기계와의 경쟁  (0) 2015.02.06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