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공허한가

사회 2025. 4. 23. 06:58

- 삶의 의미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 역시 정확한 답변을 내릴 수 없다. 허용이 종고루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누가 낸 문제길래 이리도 어려운지..." 알수 없는 일이다. 과연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가 정말 필요한 것인지, 그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 정답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일지도 모른다.

- 현대인의 삶 속에 온라인 게임이 깊숙이 자리잡은 이유를 이해하려면, 게임 자체의 다양한 특징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존재상태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인은 문화예술의 부흥, 높은 교육수준,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 세계화라는 복잡한 역사를 거쳐 이른바 현대라는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현대인의 근본적인 존재적 기반은 바로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현대인은 이성이라는 합리성의 강철새장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 앞으로 이 새장 속에서 누가 살아가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놀라운 발전의 끝에 어떤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날지, 혹은 오래된 고정관념에 혁신적 변화가 일어날지, 아니면 사람들이 찬양하던 편리한 기계에 오히려 지배당하는 삶을 살게될지, 그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너무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전문가들조차 혼란에 빠져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운 문명의 발전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저는 새장 속에 갇힌 현대인이 이 모든 일을 철저히 이해득실로 따지며,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온라인에서 큰 공감을 얻었던 "어른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이해관계만 신경 쓸 뿐이다."라는 말 역시 이런 맥락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고등동물로, 본질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고귀한 가치를 중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직장의 치열한 경쟁이나 실리만을 추구하는 인간관계속에서 이런 가치를 잊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
이런 현실에서 익명성이 보장된 게임세계는 현대인에게 특별한 편안함을 준다. 거기서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제약이 없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낀다. 게임을 하며 천군만마를 지휘해 성취감을 얻고, 필요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팀원을 떠날수도 있다. 이렇게 도덕적 죄책감이나 부당없이 즐길 수 있는 시스템이 현대인의 심리에 꼭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 학교에서 연달아 강의할 때 내가 햄버거 세트메뉴를 주문한 행위는 그것을 특별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의 특정한 수요, 즉 빠른 시간에 충분한 열량을 채울 수 있는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이다. 또 내가 요즘 유행하는 포크송을 며칠 동안 반복해서 재생했던 것은 특별히 내가 그런 종류의 음악에 심취해서로기보다 지금껏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기에 호기심에 며칠 들어봤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특정 상황에서 발생한 행위가 내 내면의 진정한 선호를 완벽학 대변하지는 않는 것이다.
결굴 알고리즘이나 빅데이터를 통한 타게팅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선호를 최대한 포괄하는 방식으로 행동패턴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현대통계학의 지식을 적용하여 해당 행동의 수학적 결과를 분류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특정 상황에서 나타나며, 그 행동이 지닌 의미는 단순히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반영되거나 반영될 수 없는 복잡한 요소들을 포함한다.

- 현실속에서는 우리가 쓰는 말이나 행동에는 구체적 상황이 뒤따르며, 전후 맥락이 있고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상황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생략되거나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아서 파편적인 행위만 남는 것이 부지기수. 즉 누군가의 행위가 그의 주관적 의지와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면서도 다들 방관자의 태도를 보인다. 본인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눈에 보이는 행위에 따라 그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거나 추측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이유다.
따라서 불안과 의존이라는 이 모순적 상태는 본질적으로는 타인의 내면상황에 대한 불신이라고 할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런 것들이 전제되는 한 현대인은 계속해서 트루먼이 되어가는 과정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갈 것이다.

-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중세 유럽의 공개처형을 예를 들며 권력의 변화를 설명. 과거 공개처형은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는 수단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과학적 규율과 교정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푸코는 이 변화를 파놉티콘이라는 감옥모델을 통해 설명. 파놉티콘은 중앙 감시탑을 통해 모든 수감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구조로, 간수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수감자는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는 현대사회의 감시와 질서유지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 푸코의 핵심주장은, 현대사회에서 권력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규율을 통해 제어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 현대사회는 더 이상 공개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지만, 대신 감시와 규칙을 통해 사회를 통제함. 이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교정하고, 질서와 공공의 약속을 지키게 한다. 현대의 다양한 감시시스템, 예를 들어 CCTV나 스마트폰을 통한 감시는 모두 이런 파놉티시즘의 연장선상에 있다.
푸코는 현대사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정교하게 감시 시스템을 내재화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는 이미 우리의 삶의 기본적 조건이 되었다고 주장.

- 현대의 법률체계는 주로 사람의 행위가 합법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설령 내적 동기를 고려한다해도, 그 동기에 대한 진정한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푸코가 벌률로서 현대정치와 사회를 통제하고 운영하는 것은 표면에만 머무른 정치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현재의 법률이나 체제는 표면적 행위만을 통제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 형법 연구자 뤄샹 교수가 남긴 유명한 말이 이해가 간다.
"법률은 인간의 도덕적 마지노선이다. 스스로 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은 인간쓰레기인 경우가 많다."

-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에는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군중심리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구절이 등장
"군중의 상상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발생하고 사람들의 주의를 끄느냐에 달려 있다."
에밀 뒤르켐은 귀스타브 르 봉보다 앞서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집단열광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유대감을 느끼면 강렬한 에너지가 발생하는 현상을 설명. 뒤르켐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부락의 종교의식을 예로 들며, "의식을 통해 원주민은 평범한 일상과 세속적 상태에서 벗어나, 일종의 집단열광 상태로 들어가 신성한 존재와의 연결을 느낀다"라고 지적.
비록 지금의 현대사회와 뒤르켐이 언급한 원주민 부락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보이지만, 집단열광과 이를 통해 신성함을 느끼는 그들의 모습이 과연 지금의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혹시 인터넷이라는 공간 안에서 끊어진 사슬의 이성과 기다란 정서 사슬에 이끌려 사이버 폭력을 일삼으며 일종의 집단적 신성함과 정의감에 불타오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말미에서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쾌락주의자'라는 슬픈 탄식을 내뱉는다. 그의 이 탄식은 특정 인물을 향한 비판이라기보다 현대 문녕이 처한 현실에 대한 예언이다. 여기서 전문가는 현대 사회의 모든 사람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영혼이 없다는 표현은 인간 본연의 온전성과 감정을 잃고, 점점 유용성만 남겨진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베버는 현대 문명이 결국 도구적 이성의 새장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이로써 인간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게 될 위험성을 예고한 셈이다.

- 부모 세대는 물건을 구매할 때 주로 물건에 포커스를 둔다.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을 위주로 구매하기 때문. 집에 쌀이 떨어지면 사야하고, 옷이 해지면 새로 산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완전히 고장나야 새 것으로 바꾼다.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때 새로운 물건을 장만하므로 구매는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필요행위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구매에 포커스를 맞춘다. 다시 말하면 구매라는 행위자체를 통해 일종의 자기만족감을 느끼는 것. 이로써 소비자체가 일종의 습관과 본능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뭘 샀는지, 그 물건이 쓸모가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 시장은 상품을 소비자가 자신을 정의하고 드러내는 핵심적인 도구로 만든다. 이로써 상품에 대한 사람들의 갈증을 계속해서 자극한다. 현대화, 도시화, 대중화의 사회에서 상품은 모든 것의 중심이자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상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신분은 상속받은 것도,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발명해낸다. (소비자 제조: 소비주의 세계사, 앤서니 갈루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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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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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글로벌 통신망을 통제함으로써 적대국뿐 아니라 동맹국의 통신도 감시, 감청 가능. 인터넷 등장 전에는 감시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다시 말해 감시는 흔히 테러리스트, 외국 고위관리, 그밖에 통신내용이 전략적 가치가 있는 핵심표적을 위해 아껴두는 수단이었음.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의 감시기관은 무제한의 자유와 엄청난 자원을 얻었고, 이를 이용해서 글로벌 통신망을 널리 분산된 감시체계로 바꾸었다. 미국 감시기관은 말 그대로 나라 전체의 전화통화를 한건씩 녹음하고 최대 1개월간 데이터를 저장해서 나중에 관심이 필요하다고 의심되는 개인대화를 되감아 청취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 이 신세계에서는 정보수집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집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보관하는 일, 그리고 그 데이터를 선별하여 유용한 정보를 얻는 일이 관건이었다. 미정부가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지닌 입지를 최대로 활용하기 시작하자 미국의 감시양상도 변모하게 됨.

- 마찬가지로 미국의 금융권력도 변모. 재무부는 9.11테러발생 2주만에 미래의 공격을 감지할 목적으로 전 세계에서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연구. 재부무는 전세계 금융이체의 중추역할을 하는 스위프트 메시징 시스템을 중요 정보원으로 보고 형사소환 가능성으로 위협하면서 스위프트의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요구. 그리고 달러화 결제 통제를 통해 국제은행이 미국 밖에서도 미국의 정책을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새로운 제재 유형 개발에 착수. 스위프트와 달러화 결제 통제의 결합은 이란을 세계 경제시스템에서 배제하여 결국 이란을 이란 핵문제 협상테이블로 끌어냄. 이를 기획한 미국의 관리들은 일회성 임기응변으로 생각했지만, 이것은 미국의 금융권력 전체를 바꾸는 선례가 되었다.

- 씨티은행이 90여개국에 지점을 보유한 세계 제일의 국제은행이 되자, 리스턴은 은행들이 국경을 넘어 소통하는 방식을 표준화할 기회를 감지. 주요 국제은행 모두 씨티은행과 거래를 해야 했다. 즉 씨티은행이 새로운 지불메시지 기술 표준을 정하면 그 표준이 인정되고 전파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임. 그리고 실제로 이 표준은 확산되면 씨티은행은 "세계 지불시스템의 중심"이 되어 경쟁사에 비해 영구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었다. 돈이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할 때마다 씨티은행의 시스템을 거쳐야 했기에 씨티은행이 시장을 완전히 지배할 잠재력이 생겼다.

- 유럽은행들은 씨티은행이 거래은행들에게 MARTI를 강요하는 행보에 대해 단호하고 압도적으로 스위프트 채택에 나섬. 스위프트는 75년말까지 15개 국가에서 270개 은행회원을 보유하게 됨. 리스턴이 은행동의를 얻는 데 난항을 겪은 것을 MARTI의 실패원인으로 봤던 반면, 매티스는 훗날 MARTI에 대한 반감이 스위프트를 성공시켰다고 인정.
스위프트 회원가입은 이내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뛰어들기 위한 필수조건이 됨. 스위프트가 성장하며 미국을 포함한 세계 금융 시스템 입장에서 스위프트가 더 필요해짐. 스위프트 설립 11년후에는 케미컬 은행의 로버트 무어가 미국 최초로 스위프트 이사회 회장이 되었으며, 06년에는 씨티은행의 야와르 샤가 회장에 취임. 오늘날 스위프트 메시징 시스템은 매년 100억개 이상의 메시지를 전송하여 1250달러 규모의 송금을 성사시킴. 달러화 결제시스템처럼 스위프트도 글로벌 금융의 중추역할을 한다. 스위프트의 공식역사를 저술한 이들이 인정한 대로 스위프트는 실질적 대안이 없기에 금융서비스를 하고 싶다면 반드시 가입해야 하는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요건이 되었다.

- 클라우드 컴퓨팅이라는 용어가 모호하다 보니 고속 광섬유 케이블을 통해 인터넷에 연결된 서버로 가득한 건물에서 모든 정보가 처리된다는 사실이 쉽게 잊힌다. 아마존은 자신들이 올린 엄청난 수익보다 서버건물의 위치를 더 열심히 숨기려고 했다. 잉그리드 버링턴이 16년에 지방 자산기록을 철저히 조사한 끝에 AWS의 최초 시설은 애쉬번가 그 인접한 도시의 코로케이션 시설 안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 
클라우드 컴퓨팅의 서비스는 옮기기 어렵다. 최근 베조스의 전기작가가 기술한 대로 "기업이 일단 아마존 서버로 데이터를 옮기면 데이터를 외부로 다시 이전하는 불편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클라우드 컴퓨팅이 이루어지는 물리적 코로케이션 시설과 데이터센터는 이전하기 훨씬 까다롭다. 애덜슨은 이렇게 말한다.
동료의 인프라 바로 옆에 50만불짜리 통신 스위치를 설치하고, 이 돈을 모두 투자한 와중에 1500만불 가치의 서비스를 이 시설에 광섬유로 연결하고, 바로 이 방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교차접속을 실행하면, 그곳에서 어떻게 바져나가겠습니까? 빠져나오는 게 기술적으로 실현가능할지조차 모르겠습니다.

- 애쉬번의 정보 복합단지에는 특색없고 나지막한 창고 70여개가 1800만 평방피트 면적에 펼쳐져 있다. (570만 평방피트 추가 건설중) 이 면적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8개를 옆으로 눕힌 것보다 크다. 인터넷이라는 거대 도로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이터센터의 연간 전력소비량은 4.5기가와트로 추정됨. 이는 화력발전소 9개가 생산하는 양의 아홉배. 현재 관리들은 아직도 전 세계 일일 인터넷 트래픽의 최대 70%가 로우던 카운티를 통해 이동한다고 주장하려 한다. 이 주장은 어느정도 맞지만 과장된 거싱ㅁ. 21년 당시 북부 버지니아는 세계에서 데이터센터 밀집도가 가장 높았으며, 용량면에서는 가장 근접한 경쟁도시인 런던을 두배 가까이 능가했다. 이는 분명 베조스가 아마존의 제2본부를 버지니아주에 두기로 한 결정에 일조했다.

- 인터넷을 지원하는 네트워크와 서버를 한 곳에 집중하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마나 새로운 세상을 하나로 엮으려고 한 경제 네트워크의 건설자들이 기존의 것을 토대로 발전시켜 나가려다 보니 이런 결과를 낳았다. 이 건설자들의 뒤를 이은 사람들은 이전 시대의 업적 위헤 도로를 건설하기가, 즉 옛 도로 위에 새 도로를 깔고 이미 존재하는 옛 교차로에서 도로들을 서로 연결하기가 더 쉽다는 사실을 발견. 인터넷은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이고, 본질적으로 일부가 손상되면 우회하고 통제에 대해서는 내성이 있다는 창립신화가 허위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명백했다. 어느 해커가 96년에 작가 닐 스티븐슨에게 밝힌대로, "국가간 거의 모든 통신은 극소수의 병목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그 함의를 고민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북부 버지니아의 한 무명도시는 오늘날 아주 작은 한 점에 인터넷을 집중하여 쉽게 감시하고 이용해먹을 수도 있는 거대한 오목 파라볼라 거울이 되었다.

- 미국이 퀄컴 같은 기업덕에 복합 반도체 설계분야를 계속 장악할 수 있었따면, TSMC같은 순수 파운드리는 퀄컴 등이 설계한 복합 반도체를 제조하면서 팹을 계속 발전시켜가며 더 작고, 더 강력하고, 전력소모랴오 적은 칩을 제조해나갔다. 케이던스 디자인 시스템즈와 시놉시스처럼 미국에 본사를 둔 전문기업들은 수십억개 반도체를 탑재한 칩 설계에 자동화 도구를 제공했다. 한 에로 애플과 VLSI테크놀로지, 영국 에이콘 컴퓨터의 합작 투자회사로 출발한 ARM은 휴대전화와 애플의 신형 M1칩에 사용되는 RISC(축소명령집합컴퓨터) 아키텍처 등을 고안해서 특수 칩 공정에 대한 지적재산의 라이선스를 발급했다.

- 리스턴은 정부대신 기업이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와 동료들은 각 국가의 시장이라는 물결이 국경의 한계를 넘어 서로 합쳐지면서 세계 전체를 하나로 만드는 정보, 돈, 생산의 대양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리스턴을 비롯한 기업가들이 군주가 되기를 열망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만의 기업제국을 건설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기업들은 시장을 지배하고 경제지배력을 집중해서 독점이윤을 올리기를 원했다.
이들이 세계로 진출할 때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감지한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리스턴은 유로달러와 전자적 화폐흐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열정적으로 설파했다. 98년 캐나다 정치경제학자 에릭 헬라이너는 리스턴의 비전에 회의적 태도로 응수. 유로달러 시장의 존재는 정부의 묵인하에 가능했을 뿐 아니라 미국이 이 시장의 번창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고사했을 것이다. 글로벌 금융이 뉴욕이나 런던같은 거대 금융중심지에 더욱 집중되면서 전자적 화폐흐름은 이 중심지의 여러 중앙 초크포인트를 거쳐야 했다. 헬라이너의 추측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실제로 미국 같은 국가의 권력을 약화하기는 커녕, 오히려 키우게 된다. 이들 국가의 정부가 언제 이 권력을 장악할지, 그리고 실제로 권력을 잡으면 무엇을 할지가 문제였다.

- 클라우드라는 명칭은 유쾌하고 가볍게 들리지만, 그 실체는 애쉬번 등지에 위치하고 에어컨이 돌아가는 건물에 고밀도 서버랙이 빽빽히 배치된 형태. 미국 정부는 무질서하게 흩어진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대대적으로 조사하지 않아도 프리즘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에게 특정 인물이나 주제에 대한 유용하고 구체적 정보를 요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일부 기업이 협력하지 않았다. 야후는 정부의 요구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단하에 정보제공을 거부. 그러나 양대 비밀 감시법원인 해외정보감시법원과 해외정보감시항소법원이 야후에 불리한 판결을 했다. 이 판결을 근거로 미정부는 야후가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매일 벌금 25만불을 부과하겠다고 위협. 야후는 항복했고, 다른 플랫폼 기업들도 동조해야겠다고 판단했다.

- 미국의 이란 제재와 스위프트 차단조치는 이란 정권에게 가혹한 경제적 피해를 가했다. 이란 정부는 석유 판매대금을 받지 못했다. 석유를 인도산 밀가루와 차, 우루과이산 쌀, 중국산 지퍼와 벽돌로 직접 물물교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약 300만 배럴에 달했던 하루 수출량이 무려 75만 배럴까지 추락. 미국의 제재와 스위프트 조치 완호가 이란 핵 협상에서 중요 쟁점이 되었다. 미국과 다른 강대국이 공식적 협상을 개시하자 아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협상의 성사여부는 미국이 제재를 철회하려는지, 유지하려는지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적대국을 상대로 달러화 결제 시스템을 무기화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새롭게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란이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양보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이란 핵합의)에서 이란 석유와 은행을 상대로 한 제재를 중단하고, 주요 제재대상 지정을 철회하고, 이란에 스위프트 접근권한을 부여하는 데 합의. 그러나 미국은 국내 제재 철회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국제적 조치들의 결과는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두려움과 경외감, 공포에 기반한 정책은 수도꼭지처럼 내키는 대로 틀었다 잠글 수 없다. 오바마 정부는 유럽 은행에는 이란에 다시 돈을 빌려주기를, 기업에게는 이란에 다지 투자하기를 촉구했지만 그 누구도 이런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은행과 기업들은 미국 당국의 마음이 또 바뀌어서, 해외자산통제국의 결정과 규정의 모호한 부분을 이용하여 그들을 제재위반 기관으로 규정하고 엄벌하지 않을지 우려했던 것임.

- 미국 관리들은 중국의 감청 위험성이 관리 가능하다는 영국측 주장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음. 미국 정보기관이 화웨이 기술을 뚫고 들여다본 적이 있었는데, 화웨이 기술에는 외부로부터 침투할 수 있는 취약점이 많았다. 하지만 미국은 실제로 중국이 화웨이 덕분에 중국 중심의 네트워크 제국을 건설하여 미국을 밀쳐버릴 것을 걱정했다. 중국이 미국을 제외한 세계 전 지역에 5G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면 화웨이를 미국에서만 내쫓아보았자  큰 소용이 없다. 중국은 미국을 외부에서 서서히, 거침없이 포위한 후 결국 미국이라는 메트로폴리스를 굴복시킬 것이기 때문. 미국관리들은 미국이 현재의 유리한 고지에서 어떻게 화웨이를 선제공격할 것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 트럼프는 유럽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석에서는 미국의 나토탈퇴를 원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트럼프에서 나토는 미국을 쥐어짜서 유럽에 이익을 바치기 위해 설계된 사기였다.
트럼프가 바꿔 놓은 새 미국은 무서운 존재이자 적대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유럽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수십년전만 해도 유럽 정부들은 근본적인 경제이익이 위험에 처했을 때 미국의 양보를 종용할 힘이 있었다. 이제 이들은 애원하거나 듣지도 않을 불평이나 하는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이전에는 미국의 동맹이었던 유럽이 긴 잠에서 깨어나니 거대 제국 변두리에 있는 속주신세가 되어버린 것. 유럽의 금융 시스템과 기업들은 제멋대로 막 나가는 미국의 힘에 눌려 하인신세가 되었다.

- 토마스 프리드먼은 신뢰에 기반한 TSMC의 생산모형이 중국의 강박적 기술에 대한 접근법에 대한 대안이라 언급하며 TSMC의 방식을 호평햇다. 그는 TSMC가 만든 생태계를 시진핑이 제대로 이해했다면 "TSMC를 얻으려고 대만을 점령하는 것이 헛수고"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세계화에 대한 모리스창의 짧은 발언이 있었다. 그는 프리드먼의 칼럼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세계화 때문에 세계가 평평해졌다는 프리드먼의 유명한 선언은 거론했다. 정중하고 절제된 말투로 반박하면서 모리스 창은 단언했다. "글쎄요, 톰, 세상은 더이상 평평하지 않아요." 인텔의 겔싱어와 그의 지지자들은 한국과 대만이 안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이 세계 반도체의 42%를 생산하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모리스창은 시계를 되돌리수는 없다고 맞받아쳤다. 미국이 수천억불의 보조금을 지원해도 미국에 완벽한 반도체 공급망을 다시 갖추기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모리스창의 불만은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TSMC는 미국 영토에 반도체 팹을 세우면서 대만 국내에서 가지는 이점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했고, 수십년간 성실하게 쌓아 온 신뢰관계를 위험에 빠뜨려가며 고객에 관한 기밀정보를 제공해야 했다. 점차 지정학적으로 불리하게 기울어지는 판에서 신중하게 키워온 중립의 이미지도 버려야 했다. 자기 회사가 미중 충돌에 대한 걱정엇이 기술과 시장에만 집중할 수 있던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프리드먼을 향한 모리스창의 날 선 불만을 키웠을 것이다. TSMC의 링크드인 광고가 암시하듯, 모리스창이 꿈꾸던 세상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 자신도 이렇게 한탄했다. "세상모두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던 좋은 시절, 그런 시절은 더 이상 없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 미국이 중국을 너무 세게 압박한다면, 다수의 은행과 기업이 중앙에 가로등불 밝힌 언더그라운드 제국의 고속도로를 버리고 그들의 행위를 숨길 수 있는 어둡고 굽이진 길을 찾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지는 못해도 어둠의 길을 택해 자국을 더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위험을 감지한 중국은 미국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난 네트워크 구축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미국은 이처럼 중국이 독립을 시도하는 것이 나름의 제국을 건설하여 혼란의 소용돌이를 키우려는 시도라 여겼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급자족 능력이 높아진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 더 높기에, 우려할 이유가 타당했다. 그러나 이 소용돌이가 스스로 커진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두 경제대국 사이에 하드 디커플링이 일어나 수십억 인구의 생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최근 출간된 한 역사서는 경제적 고립이 훨씬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 니콜라스 멀더의 첫 저작, 경제무기는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있었던 제재와 경제봉쇄정책의 역사를 재조명. 멀더의 역사서는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이 어떻게 침략국 정부를 상대로 집단 제재를 가하는지 설명함. 그런데 평화를 다지려는 연맹의 노력이 오히려 2차대전 촉발에 일조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제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치 독일은 자신들의 제3제국이 얻지 못할까 두려웠던 원자재를 확보하는 정복사업을 시작했고, 일본 역시 같은 우려에 따라 한국과 중국 일부를 포함한 엔블록을 형성했다. 독일과 일본은 경제봉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수단을 통해 자국을 보호하려고 했고, 그 결과 세계전쟁이 일어나고 수천만명의 사망자가 발생.
멀더는 경제전쟁으로 다시 한번 세계가 불안정해질 수 있는 위험을 우려했다. 미국 정부가 선호한 수단은 "더는 세계화를 활용하는 외과수술용 칼 같은 정교한 도구가 아니었다." 이 수단들은 전쟁의대안이 되기보다 "세계화의 본질에 중대한 변화를 가쳐오고", 어쩌면 "통제불가능한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폭풍"의 조짐을 보이는, 평화 시 지극히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 57년 최초의 스푸트니크 모먼트는 미국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 소련이 보유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훨씬 많아 보였고, 이에 따라 스푸트니크에 관한 우려는 미국이 소련과의 미사일 격차를 못 따라잡고 있다는 불안으로 증폭됨.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은 소련군이 ICBM을 소시지 만들듯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했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소련이 미국의 핵무력을 단 한번의 공격으로 일소해버리기에 충분한 ICBM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음. 미사일 격차는 케데디 대통령 선거운동의 중심 이슈였고, 이 문제를 떠올리면 미국이 미사일 유도장치용 실리콘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할 이유를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는 60년대 냉전 공포가 우연히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하지만 미사일 격차는 근거없는 허구였다. 냉전 후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소련이 배치한 1세대 ICBM은 4개에 불과했다. 미국의 대규모 군비확대는 소련의 군사역량을 완전히 오해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양상은 냉전 시기에 계속 반복되었다. 미국이장에서 소련이 다소라도 우위를 점하는 것이 두려웠기에 뒤처지는 부분을 따라잡고자 자금을 퍼부었다면, 소련 역시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분투했다.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로 파멸적 선제공격을 할 준비태세와 의지를 모두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반면 소련 역시 미국이 똑같이 공격 준비태세와 의지를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한 국가의 두려움이 상대방의 두려움을 키우며 군비경쟁을 유발했고, 때로는 세계의 핵 대참사로 확대될 가능성이 다분한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게 했다.
우리는 현재 비슷한 위험성을 지닌 악순환 고리가 다시 확대되려고 하는 중대한 시점에 놓여 있다. 이제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상호간의 공포가 만들어낸 역학관계가 대세를 이루어 유럽과 기업, 일반인들을 한없이 커지는 소용돌이로 빨아들이고 있다.
이런 위협을 막을 방법은 무엇일까? 언더그라운드 제국을 건설한 주체는 미국이기 때문에 첫발을 내딛는 것도 미국이 할 일이다. 우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미국이 직면한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적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들도 이 문제를 이해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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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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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예측

사회 2025. 4. 11. 18:25

* 슈퍼 예측을 위한 십계명
1. 선별하라. 
힘들인 만큼 보상이 뒤따를 것 같은 질문에 초점을 맞춰라
2. 다루기 까다로운 문제는 다룰 수 있는 부차적 문제로 분해하라
3. 내부관점과 외부관점의 균형을 맞춰라
4. 증거에 대해서는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반응하라
5. 모든 문제에서 반목하는 원인을 찾아라
6. 의심의 정도를 구분하되 그 이상은 구분하지 말라
7. 자신감은 부족해도 넘쳐도 안된다. 성급하거나 우유부단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라
8.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되 사후확신편향을 조심하라
9. 다른 사람의 장점을 취하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장점을 취하게 만들라
10. 실수의 균형을 잡는 자전거타기를 터득하라
11. 십계명을 십계명으로 취급하지 말라


- 슈퍼예측가들은 처음에는 번거로운 추리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미국에서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는 가정이 전체의 몇퍼센트 정도인지부터 알아낸다. 
통계학자들은 이를 기본율이라고 부른다. 기본율은 어떤 대상이 더 넓은 부류 안에 어느 정도 있는지를 따지는 개념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주변을 훨씬 저 적극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적 조건으로 기본율을 바라본다. 그는 그것을 외부 관점이라 부른다. 이와 대조적으로 내부관점은 특정 경우에 대한 구체적 관점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미국인 가정의 62%가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외부관점이다. 외부관점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렌제티가 애완동물을 기를 확률이 62%라고 추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뜻. 그 다음 내부관점으로 눈을 돌려 렌제티에 대한 모든 세부적 정보를 찾아 그것을 근거로 최초의 62%를 상향 또는 하향 조정한다.
내부관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내부관점은 보통 구체적이고 당장 필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앞으로 진행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듬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외부관점은 보통 추상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정보이기에 스토리텔링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똑똑하고 노련한 사람이라고 해도 보통은 외부관점을 도외시하기 일쑤다.

- 슈퍼 예측가들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만약 빌 플랙에게 앞으로 12개월 뒤에 중국과 베트남이 국경분쟁으로 무력충돌을 일으킬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는 무엇부터 할까? 적어도 국경분쟁의 특수성과 현재 중국과 베트남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작업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과거에 이 두나라 사이에 국경충돌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부터 살펴볼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과 베트남이 5년마다 적대적 행위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하자. 빌은 그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5년의 반복모델을 사용해 미래를 예측할 것이다." 그런 외부관점을 적용하면 특정 해에 충돌이 발생할 확률은 20%가 된다. 이와 같은 설정을 해놓은 다음 그는 현재 상황을 분석하여 그 수치를 올리거나 내린다. 

- 슈퍼예측가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예측은 취미일 뿐이다. 보답이라고는 상품권 1장과 페이스북에서 우쭐거릴 수 있는 특권이 전부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인걸까? 정답은 재미있으니까,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어려운 일에 몰두하며 쾌감을 느끼는 성향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인지욕구라 한다. 인지욕구가 강한 사람은 십자말풀이나 스도쿠 퍼즐을 즐긴다. 열심히 할수록실력도 는다. 슈퍼예측가들은 인지욕구 테스트에서 대부분 높은 점수를 받는다.
성격적 요인도 있음. 성격심리학에서 말하는 5대 특성 중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것이 있다. 경험에 대한 개방성은 다양성 선호, 왕성한 지적 호기심 등 여러 차원이 있다. 슈퍼예측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경험에 대해 개방적임. 가나 출신이 아니라면 "가나의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 것 같은가?" 라는 질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임. 그러나 내가 로치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때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글쎄요, 이참에 가나를 좀 공부해봐야겠군요."
그러나 지능처럼 경험에 대한 개방성 역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성보다는 그들의 행동과 더 밀접한 연관이 있다. 퍼즐을 잘 푸는 사람들에게는 예측에 필요한 남다른 자질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감정으로 채워진 기본적 신념에 의문을 던질 줄 모른다면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없다. 오히려 지능은 조금 떨어져도 자기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 훨씬 유리함. 중요한 것은 타고난 정보처리 능력이 아니라 그런 능력으로 무엇을 하는가인 것이다.

- 우리는 다시 슈퍼예측가와 일반예측자를 대상으로 그들의 운명점수와 브라이어 지수를 비교했다. 그 결과 둘 사이의 의미있는 상관관계가 두드러졌다. 사건에서 의미를 찾는 경향이 강한 예측자일수록 예측의 정확성이 떨어졌다. 즉 확률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수록 예측은 더 정확했다. 이처럼 사건에서 의미를 찾는 행위는 행복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지만 예측고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조금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정확성을 위해서는 불행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단 말인가?

- 산문을 쓸때면 어김없이 그리스 신화의 영웅을 들먹여야 했던 19세기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을 뜻하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라는 표현이 있다. 스킬라는 이탈리아 해안 근처에 숨어 있는암초, 카리브디스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시칠리아 해안의 소용돌이였다. 선원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난파를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측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헤쳐간다는 느낌으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좋은 업데이트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중간경로를 찾아내는 문제다.

- 영국 소걸가 조지 오웰은 정치와 영어라는 논문에서 6가지 주요 법칙을 거론. 그중 이런게 있다. "짧게 할 수 있는 말을 길게 하지 말라." 그리고 "능동태를 사용할 수 있는데 수동태를 사용하지 말라." 그러나 핵심은 여섯번째 규칙이다.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느니 차라리 위 법칙들을 깨라"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는 안전장치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슴도치 전문가와 그들의 잘못된 확실성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러나 마법의 공식 같은 것은 없다. 많은 단서를 가진 다양한 원칙들이 있을 뿐. 그런 원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원리를 적용할 때 세심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엉터리 같은 예측을 할 바에는 아예 원리나 규칙들을 무시하는 편이 낫다.

-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싫다. 헬무트 폰 몰트게는 그렇게 썼다. 그는 1864년 덴마크를 패주시키고,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를, 1871년에는 프랑스를 무찔러 이름을 높인 프로이센의 장군이다. 이런 승리는 독일의 통일로 절정을 이루었다. 전쟁에 관한 그의 저술은 위대한 전쟁이론가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받아 쓴 작품들로,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게 되는 독일군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 그는 나폴레옹과 달랐다. 그는 자신을 체스팜의 말을 움직이듯 군사들에게 지시만 내리는 리더로 여기지 않았다. 리더십과 조직을 대하는 그의 방법은 기존의 리더의 개념과 완전히 달랐다.
프로이센 군대는 오래전부터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몰트케에게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표현은 그 함축적 의미를 되새겨봐야 하는 경구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계획을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적의 주력부대와 처음 마주치는 순간 효력이 계속 확실하게 유지되는 작전은 없다." 그는 그렇게 썼다. 이 문장은 수십년 동안 되풀이되고 다듬어져 요즘은 약간 다른 말투로 병사들에게 각인된다. "어떤 작전도 적과 마주치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표현이 간단명료해졌다. 그러나 몰트케가 말한 원래의 표현이 그의 생각을 더욱 함축적으로 잘 드러낸다. 어떤 상황에서든 모두 통하는 절대적 규정은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썼다. 전쟁에서 정확히 같은 사례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임기응변이 중요하다.
몰트케는 장교들의 임기응변 능력을 믿었다. 군사 훈련 외에도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인문교육이라 칭하는 훈련을 받았다. 비판적 사고를 기르기 위한 교육. 군사과목 시간에도 그들은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배웠다. 같은 시기에 미국 등 다른 나라 교관들은 문제를 제시하고 정답을 알려준다음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암기하도록 훈련시켰다. 독일 군사학교 교관은 시나리오를 제시할 뿐 해법은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스스로 찾아내게 했다. 의견차이는 용인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 장려되었다. 교관의 견해조차 그 자신이 전우의 한사람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반박의 대상이 되었다고역사가 요르크 무트는 지적했다. 장군의 견해 역시 검토대상이었다. "독일의 하급장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야 했고, 장군이 발언하기에 앞서 그 앞에서 여러 부대와 주요 작전의 결과를 비판하곤 했다."
비판을 인정하는 관례는 교실에서 그치지 않고 전투현장에까지 확대됨. 1758년 존도르프에서 러시아군과 맞붙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기병대를 지휘하던 프로이센의 최연소 장군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나이들리츠에게 전령을 보냈다. 공격하라는 지시였다. 자이들리츠는 거부. 그때 공격하면 병력손실이 너무 클 것이라고 판단. 전령은 돌아갔다가 다시 왔다. 대체가 공격을 독촉한다는 내용이었따. 그는 다시 명령을 거부. 세번째 다시 온 전령은 당장 공격하지 않으면 목을 가져가겠다고 경고. "전투가 끝나면 내 목을 마음대로 하시라고 전하게. 그때까지는 내가 좀 써야겠네." 자이들리츠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리고 때가 왔다고 판단한 순간 그는 러시아군을 공격하여 전세를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돌려놓음. 프리드리히 대제는 자이들리츠 장군으르 치하하고 목을 보전해 주었다.

- 현명한 장교는 전장에 아무리 불확실성이 가득해도 적어도 하나만은 확실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결정이다. 지휘관은 자신의 결정을 고수해야 하고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적의 행동에 따라 결정을 바꾸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지휘관은 의연한 결정으로 난관을 극복해야 하며, 언제든 기존의 계획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독일군은 이런 유연성을 지휘관의 핵심덕목으로 보았다. "일단 행동을 개시하면 특별한 이유없이 이를 폐기해서는 안된다." 독일군 교본은 그렇게 언급했다. "그러나 상황이 수시로 바뀌는 실전에서 정해진 작전을 고집하다가는 패할 수 있다. 지휘관의 능력에는 시의 적절하게 상황을 인식하고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을 간파하는 기술이 포함된다.

-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에서부터 단호한 결정에 이르는 모든 것이 하나로 묶여 아우프트락스탁틱이라는 지휘수칙으로 결집되었다. 흔히 임무형 지휘라고 번역되는 아우프트락스탁틱의 기본개념은 단순함. "전쟁은 탁자 위에서 치러지는 것이 아니다." 몰트케는 사령부의 최고지휘관을 겨냥하여 그렇게 썼다. "현지사정에 따른 결정은 신속하고 빈번하게 즉석에서만 내려닐 수 있다." 결정권은 위계체계를 따라 내려가 수시로 상황이 변하는 전장에서 가장 먼저 불의의 사태와 맞부딪히는 가장 아래쪽 병사들까지 큰 그림을 볼 수 없다. 그들이 전략적 결정을 내린다면 군대는 결속력을 잃고 작은 단위부대들의 집합으로 쪼개져 저마다 각자의 목적을 추구할 것이다. 임무형 지휘는 전략적 응집력과 분산된 결정을 단순한 원리로 혼합한다. 지휘관은 사병들에게 목표를 일러주지만 그 목표를 성취할 방법은 설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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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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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안다는 착각

사회 2025. 4. 10. 06:57

- 연방의 통합 vs 주의 권리
트럼프 집권 동안 불거진 불법 이민자 추방에 대한 연방과 캘리포니아주 간의 갈등은 미국 연방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미국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연방이나 주정부가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입각해서 헌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미국은 연방의 통합이 우선이냐, 주의 권리가 우선이냐를 놓고 끊임없이 갈등을 겪어왔다. 이것은 근대 최초로 왕정의 사슬을 끊고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해서 연방을 건설한 미합중국의 태생적 한계다.
헌법은 명확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이것이 미국의 통합을 막고 혼란을 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애매하고 허점투성이인 그 헌법이 지금까지 연방을 붙들고 있고, 무엇보다도 연방이든 주든 독재적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했다. 연방과 주의 갈등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혼란스럽게 만들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독재자의 출현을 막고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최근 미국내에서 동맹국 방위비분담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음. 특히 17년트럼프정권이 등장하면서 이 문제는외교와 국방뿐만 아니라 국민의 여론에도 주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여전히 그 뿌리가 남아 있는 먼로 독트린, 즉 고립주의의 부활로 볼 수 있음. 동시에 오랜 전쟁에 지친 미국인들의 정서를 반영. 냉전이든 신냉전이든 이것이 뜨거운 전쟁은 아닐지라도 미국인들은 전쟁에 지쳐 있음. 주로 국매문제 등에 따른 극단적 진영대결의 영향으로 미국내에서는 미국이 계속해서 세계 패권국으로의 위상을 지켜야 할지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고 있음. 제국의 흥망성쇠에서 외부의 도전보다는 국내의 분열이 더 큰 변수가 되는 경우가 많기에, 세계 최강의 군대와 동맹국을 가진 미국의 패권의 향방도 외적도전보다는 내적 도전이 더 큰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 지난 150년의 한미관계를 되돌아 보면,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낸 나라임. 미국의 주관심은 중국과 일본. 냉전이 막 터를 잡을 때 터진 한국전으로 한국이 특별해짐. 이는 순전히 냉전구도에 따른 미국 국내외 상횡 때문. 지금도 근본적으로 미국의 주관심은 일본과 중국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 중국은 현재 미국이 가장 견제하는 나라임. 그런 현실 속에서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서 미국은 물론 이웃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한국은 스스로 미국에게는 물론 세계 속에서 특별한 나라가 된 것이다.

- 최근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이 미국인들에게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고 있는 중국 때문이며,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에서 미국의 강력한 우방인 일본 때문이며,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냉전의 혹, 북한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에게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다만 한국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특별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한 나라의 운명은 그나라 국민들이 책임을 지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 캘리포니아 드림은 일반적으로 기회와 번영, 높은 삶의 질이 있는 곳이 캘리포니아라는 생각이나 인식에서 나온 개념이다. 이는 끝없는 햇살, 아름다운 해변, 기술혁신, 엔터테인먼트산업, 다양한 문화, 꿈을 추구하고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곳이라는 캘리포니아의 비전을 포괄한다.
골드러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기억으로 사라졌지만, 100년 뒤에새로운 골드러시가 찾아왔다. 골드보다 더 미국인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 것은 IT를 포함한 새로운 기술이었다. 옛날 골드러시의 심장부는 사금이 발견된 곳과 멀지 않은 샌프란시스코였는데, 새로운 골드러시의 중심지도 실리콘밸리와 인접한 샌프란시스코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다시 한번 꿈과 희망을 품고 새로 도전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IT 골드러시가 새롭게 붐을 이루면서 샌프란시스코는 히피문화와 이른바 반문화 운동의 열풍에 휩싸임. 67년 샌프란시스코의 사랑의 여름이 그것을 대표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시와 음악, 자유와 방종, 마리화나와 자유연애 등으로 기성세대의 제도와 가치관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반항했다. 거기에 스티브 잡스도 있었다.

- 식민지시대 미국인들의 억양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역부터 남동부 조지아에 이르기까지 최초 13개의 식민지에 정착한 초기 이주민 대부분은 영국에서 건너왔기 때문. 출신지에 따라 약간으 차이는 있었지만, 사실상 영국에서 들을 수 있는 억양과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큰 지역은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아이나 정도였다. 두곳에는 초기에 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이 정착했기 때문.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북부영어와 남부영어에 서서히 차이가 나기 시작. 북부영어는 영국뿐 아니라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독일 등 여러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에 따라 다양해졌지만, 남부 영어는 상대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북부의 다양성은 영어가 통일되는 방향으로 발전.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교류하고 정착하면서 차츰 비슷한 억양으로 자리잡음.
이런 교류를 촉진한 것은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북동부는 상공업이 발달했고, 유럽의 이민자들은 일자리가 풍부한 북동부 지여으로 몰림. 반면, 여전히 담배와 목화재배 등 농업중심적인 식민지로 남아 있던 남부는 새로운 이민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산업화에 따라 북부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이면서 점차 비슷한 억양을 구사하는 영어가 정착하게 되었지만, 농업중심 남부는 기존의 전통적 억양에 큰 변화가 없었다.
- 뚜렷한 변화 없이 문화의 동질화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남부 영어를 특징짓는 결정적 계기가 생김. 바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유입. 흑인노예들의 억양과 일듬이 기존 남부 억양과 섞이면서 오늘날 독특한 남부억양을 형성. 남부에서는 백인과 흑인노예간에 엄격한 신분차이가 있었지만 흑인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언어는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 직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총인구는 70만이었는데, 그중 40만명이 흑인. 특히 백인 농장주나 농장을 경영하는 백인 지배인들은 수시로 흑인노예들과 접촉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남부의 독특한 억양이 생성됨.

- 남북전쟁 이후 시카고는 육류포장 산업으로 더욱 발전. 남북전쟁은 미국 음식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옴. 그중 하나가 소고기 문화. 원래 비프스테이크는 뉴욕의 노동자들이 즐겨먹던 일종의 패스트푸드였다. 바쁜 노동자들에게 비프스테이크는 빨리 요리해서 먹을 수 있고 단백질도 풍부한 최고의 음식이었다. 남북전쟁 동안에 뉴욕의 병사들을 통해서 순식간에 다른 지역에서 온 병사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전쟁 이후에 소고기를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
이렇듯 소고기 수요가 폭증하면서 텍사스, 캔자스, 네브래스카 등 목초지에서 키운 소들이 기차로 속속 시카고에 운송됨. 순식간에 시카고는 세계 최대의 도축도시가 됨. 1870년에는 300만 마리의 소와 돼지들이 시카고에서 도축되었고, 20년 뒤에는 무려 1200만 마리가 도축됨. 1900년에 시카고 육류포장 회사들에 고용된 사람이 25000여명이었는데, 이는 미국 전역에서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였다.
육류포장 사업이 성황을 이루자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더럽고 불결한 도시가 됨. 소와 돼지의 분비물, 도축장에서 버려지거나 흘러나오는 내장과 피, 냄새가 도시 전체를 오염시킴. 그런데도 당시에는 정부가 일반 기업활동에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음.
1905년 언론인 업턴 싱클레어가 정글이라는 책을 출판해 시카고 도축장의 현실을 고발. 시어도오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 책을 읽고, 1906년 육류검사법을 통과시킴. 이 법과 동시에 식품 및 의약품법도 통과됨. 이 획기적 법안들은 미국에서 육류검사와 식품 및 의약품에 대한 연방규제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원칙에서 탈피해서 필요하다면 정부가 개입해서 국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당시 유러에서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가 급부상하고, 1917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며 세계적으로 자본주의는 거센 도전에 직면. 그런데 미국은 개혁이 필요한 경우에 한해 선택적으로 정부가 개입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지켜냄. 이를 미국의 혁신주의 운동이라고 하는데, 이 개혁을 이끈 핵심도시가 시카고였다. 시카고 프로농구팀의 이름이 시카고 불스다. 황소라는 이름과 이미지를 붙인 것은 개혁을 주도하며 힘차게 나아간 시카고의 역사성 때문.

- 1893년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 역사학회가 시카고에서 개최됨. 그때 역사학자 프레더릭 터너 교수가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미라는 논문을 발표. 이것이 미국 역사학의 이정표적인 학설인 프런티어 이론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서부개척의 역사가 미국의 문화와 국민성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문명은 유럽문명이 미국 동부에 이식되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역사가들은 주로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출신이라든지, 옥스포드나 캠브리지 같은 영국 명문대 출신이거나 그 출신 스승에게 교육받은 이른바 동부 엘리트들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유럽 지향적 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시카고 위의 위스콘신 주에서 성장한 터너 교수가 서부의 광활한 개척지에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서부 개척민들이 진정한 미국적 전통과 문명을 창출했가고 주장한 것이다. 대체로 동부 사람들에 비해 교육받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던 보통사람들이 서부로 진출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가장 미국적 전통과 가치를 만들고 다졌다는 것.
프런티어 이론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서부로 진출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착에 성공한 서부 개척민들의 자부심을 무한히 고취시킴. 한 역사가의 시선이 미국문명을 보는 시건을 바꿔놓은 것임. 미국 서부는 미국의 개인주의, 물질주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중요 배경으로 존중받게 되었다. 한동안 그 서부의 수도였던 시카고에 대한 시카고 사람들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바람의 도시는 허풍쟁이들의 도시가 아니라 자부심이 가득한 서부인의 도시인 것이다.

-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미국 역사에서 끊임엇이 반복되었다. 물론 슬로건이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동어반복이었으며 지향점이 같았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밀어닥치자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들을 중심으로 대대적 반아일랜드, 반카톨릭 운동이 일어남.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미국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이 창설됨. 미국당이라고 당명을 지은 이유는 진짜 미국인들을 위한 미국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 미국인들은 바로 와스프, 즉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들이었다.
남북전쟁 이후에도 와스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는 움직임은 거세었다. 미국의 폭발적 산업호로 인해 일자리가 넘쳐나자 이민의 홍수가 밀어닥침.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를 비롯한 동부유럽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이 중에는 유대인들도 포함됨. 남쪽으로는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지역에서, 태평양 너머에서는 중국인을 선두로 아시아인들이 미국 서부해안 지역에 정착.
기존의 와스프들은 새로운 이민자와 그들이 가져온 문화가 그들만의 미국문화를 오염시킨다고 단정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이민자들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했다. 20년대와 30년대 초반까지 미국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간 금주법의 배경에는 아일랜드인과 이탈리아인들을 비롯한 카톨릭계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술을 좋아하는 그들의 문확 근면, 성실의 대명사인 와스프 문화를 오염시킨다고 판단했기 때문. 

- 펜타닐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전구체 화학물질은 중국에서 생산됨. 이 중국회사들은 가짜 반송주소를 사용하고 제품을 눈치채지 못하게 가짜 라벨을 붙여서 수출하므로 미국 마약단속국이 쉽게 식별하지 못함. 또한 대부분의 중국 불법 펜타닐은 멕시코 마약상을 통해 미국내로 밀반입되므로 차단하는 데 한계가 있음. 미국에서는 중국 당국에 좀더 강력하게 단속해달라고 요청하고, 관련 중국제품에 대한 관세를 높이고 있지만, 최근 불편한 미중관계에서 쉽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국 펜타일을 근절하면 미국이 현재 마약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미 마약은 미국 사회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수요가 있는 한 새로운 공급원이 생겨날 것이다. 최근 코로나 19팬데믹은 오피오이드 유행을 더욱 확산시켰는데, 팬데믹으로 인해 공급망이 중단되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중개인을 통한 마약거래가 쉽지 않음에도 오피오이드 중독자는 급속히 증가. 이는 마약을 원하기만 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마약문제는 빈곤과 사회소외계층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미국을 파국으로 몰아갈 미국병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 미국 패스트푸드 문화의 성장은 미국문명과 연관이 깊다. 19세기 후반 급격한 산업화로 미국에 이민의 홍수가 밀어닥쳤다. 이때 유럽의 이민자들이 가져온 고향의 음식들이 미국에 소개됨.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공장에서 일하고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동 중에도 먹을 수 있는 빠르고 편리한 식사의 수요가 증가. 그중 하나가 햄버거임. 햄버거는 독일 이민자들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당시 독일 함부르크에서 소고기를 갈아 패티로 만들어 빵과 함께 먹었기 때문에 햄버거라 불림. 1차대전 중에 미국 정부는 햄버거라 부르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자유샌드위치라 부르도록 했다. 햄버거가 적국인 독일음식이었기 때문.
프렌치프라이 역사 1차대전과 관계가 있다. 미국이 전쟁이 참전하면서 미국 병사들이 벨기에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이때 벨기에 사람들이 감자를 잘고 길게 쪼개서 기름에 튀겨먹던 음식을 미군들이 프렌치프라이라 불렀다. 프랑스 음식은 아니었지만 벨기에의 주언어가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편의성을 추구하는 미국인들의 음식문화는 2차대전 이후에도 계속됨. 이때 자동차 문화가 확산하면서 미국의 외식문화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이후 경제호황으로 더 많은 미국인이 정기적으로 외식을 하게 되었고, 저렴하고 편리한 식사를 선호하면서 드라이브인 레스토랑과 드라이브 스루창구가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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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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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유혹의 기술

사회 2025. 4. 9. 07:04

- 어떤 기호가 거짓을 말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그 기호는 진실을 말하는 데도 사용될 수 없다. (움베르토 에코) 어떤 하나의 기술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생각한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기술도 엄연히 거짓을 만들어내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거짓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주는 기술도 어느 순간 진실을 드러내는 기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대중유혹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현대의 미디어들은 끊임없이 개인의 영역에 침투하고 유혹의 메시지를 실어나른다. 하지만 미디어는 단순히 홍보문구, 상품정보, 개인의 의견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 아주 은밀하게 미디어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의식구조를 변화시키고 세계관에 영향을 준다. 미디어가 내뿜는 이미지로 우리는 사회적 현실을 직조한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살고 있고, 내게 의미를 주는 나만의 세계라 믿는다. 어느새 그들의 유혹은 나의 신념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작전은 성공한 것이다

- 실제로 대중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을 대중으로 보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 우리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의 통제를 받으며 우리의 생각을 주조하고 취향을 형성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에드워드 버네이즈)

- 에드워드 버네이즈는 대중의 심리를 꿰뚫는 사람이었다. 프로이트가 개인의 심리를 연구했다면 버네이즈는 대중 속에 존재하는 집단적 심리의 존재를 믿었다. 버네이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을 미국 최초로 영어로 번역. 좀더 나아가 그는 기업과 정치권에서 사용하는 설득기법에 최초로 대중심리학이라는 학문을 적용. 대중심리학과 대중설득, 이 두가지 이질적 요소의 운명적 결합이 바로 PR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재탄생함.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하고 때로는 유도하는 PR은 전략이자 기술 그리고 동시에 비즈니스였다. 
파리평화회의에서 미국으로 돌아왔을때 나는 선전이 전쟁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평화를 위해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선전이라는 용어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다. ... 나는 퍼블릭 릴레이션이라고 명명했다. (버네이즈)
촘스키 교수가 미국의 발명품이자 기괴한 산업이라고 평했던 홍보산업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 뉴스는 일상적인 환경으로부터 이탈한 어떤 가시적 행위다. ... 좋은 PR전문가란 고객들로 하여금 어떤 가시적 행위를 하도록 조언한다. ... 그 행위는 삶의 지속적인 흐름을 차단하고 어떤 반응을 유도하는 것이다. (버네이즈)
여기서 적어도 이 점만은 분명해진다. 좋은 PR이란 단순한 볼거리나 스펙터클의 의미를 넘어, 기존에 존재하는 상식이나 담론에 제동을 거는 행동이다. 액셀러레이터라기보다는 브레이크에 해당. 이것은 흥미로운 관점이다. 흐름을 차단한 후에야 새로운 방향으로 대중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는 PR은 단순한 홍보의 의미라기보다는 정교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에 훨씬 가까워진다.
버네이즈가 말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통제'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만일 그가 매력적인 사람이라면, 진취적 사고와 구체적 전략으로 무장한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우리가 그에 의해 좋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PR은 분명 흥미로운 기술이다.

- 미국에서는 언제부터 베이컨을 아침에 먹기 시작했을까? 아침에 비몽사몽 일어나서 눈을 비벼가며 지방덩어리인 삼겹살을 입으로 집어넣는다고 생각해보라. 잘 먹히는가?
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인들 역시 베이컨을 아침식사로 먹지 않았음. 달걀과 롤빵에 주스나 커피 한잔을 입안에 털어 넣으면 그게 아침이었다. 20년대 중반 신생 베이컨 제조사인 비치너트 패킹사는 버네이즈를 고용. 베이컨 판매량을 늘리는 단순한 PR전략 대신 버네이즈는 미국인의 식습관을 바꾸겠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다. 그것은 제한된 시장 내에서 베이컨 회사까리 파괴적으로 경쟁하기보다는 시장자체를 확대하려는 획기적 전략이기도 했다.
우리 회사의 고객이었던 비치너트 패킹 컴퍼니는 아주 기본적인 고민거리를 갖고 있었는데, 바로 베이컨 때문이었어. 우리가 조사를 좀 했지. 그런데 미국인은 달걀, 롤, 그리고 주스로 이루어진 매우 가벼운 식사를 하고 있었어. ... 우리는 한 의사를 찾아가서 풍복한 아침식사가 가벼운 아침식사보다 몸에 좋은지 물어봤어. 그는 당연히 풍족한 아침식사가 좋다고 했지. 이후 우리는 더 나아가 5000명의 의사들에게 그의 그런 의견에 동의하는지 안 하는지르르 무료로 물어봐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는데, 그는 기꺼이 하겠다고 했지. 그중 4500명이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응답했어. 이후 전국 규모의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으로 기사가 실렸지. 4500명의 의사들이 미국인들의 건강을 위해 풍족한 아침식사를 권하다. 그 기사 이후 많은 사람들은 베이컨과 달걀이 아침식사 메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베이컨의 판매량은 증가했어.

- 힐회장 : 생각만큼 여자들이 럭키를 안 사고 있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버네이즈 : 담배포장지 색을 무난한 색으로 바꾸시죠. 아무 옷에나 어울리는 그런 색으로.
힐회장 : 이미 담뱃갑 광고에 수백만불을 썼소. 그런데 지금 와서 바꾸라고? 말도 안되는 조언이오
버네이즈 : 만일 담뱃갑 색을 바꾸지 않을 거라면 색을 유행시키죠. 녹색으로
담뱃갑 색을 바꾸는 대신 유행하는 색을 바꾸겠다는 버네이즈의 생각은 대범하고 무모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습관처럼 자료조사를 철저히 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색의 언어라는 책에서 녹색은 희망, 승리, 풍요, 고독, 평화를 의미하는 것임을 찾아냈고 프랑스 패션업계가 발표한 옷의 20% 가량이 녹색이라는 통계도 발견. 문제는 패션계를 주목시킬 거창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바이럴의 심장부가 될 것임을 버네이즈는 알고 있었다.
- 일단 장소는 뉴욕을 대표하는 최고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정했다. 참석자는 뉴욕 사교계를 대표하는 유명인사들로, 수익금은 자선단체에기부하는 것으로 했다. 여기에 녹색 무도회라는 멋진 이름도 붙이고 참석자 전원이 녹색의 가운을 입도록 했다.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음 단계로 버네이즈는 녹색패션 가을오찬이라는 이름하에 같은 호텔로 패션지 편집자들을 초정, 요즘 용어로 프레스 정킷이다. 그들의 식사 테이블에는 녹색 콩, 아스파라거스, 구운 양고기, 강낭콩 수프, 민트, 피스타치오 무스 아이스크림 등 온통 녹색계열의 음식들이 올라갔다. 그 자리에 초청된 한 미대학장은 위대한 예술가들 작품에 나타난 녹색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해쏙, 한 심리학자는 녹색의 심리학적 의미를 전달함. 결과는 어땠을까?
많은 언론들이 그해 가을 녹색의 유행을 예견하는 기사를 실었다. 품위를 원하는 곳에는 품위를, 허세를 원하는 곳에는 허세를, 정보를 원하는 곳에는 정보를 주는 버네이즈의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살짝 얹었을 뿐이다.

- 80년대 폴리에스테르가 합섬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패션소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도 유사함. 폴리에스테르는 싸구려, 인공의, 천박한 등의 단어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PR전문가 메리 트루델은 87년 미스 아메리카에게 폴리에스테르 소재 옷을 입혀 미 전역을 순회하게 하고, 피에르 가르뎅, 캘빈 클라인 같은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의상의 소재로 활용하도록 교묘하게 설득했다. 그리고 보도자료를 통해 레저용 의류를 넘어서-폴리에스테르에 새 생명을 같은 새로운 슬로건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킴. 이 전략 역시 미디어이벤트, 의견 지도자, 뉴스 보도자료 배포 등 바이럴의 기본요소를 모두 활용한 사례라 볼 수 있다.

- 어떤 상품을 팔기 전에 그것의 생태계를 조직하고 니즈를 잠재적 소비자들에게 체험하고 상상하게 하는것. 그것은 그 상품을 선택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이 지점에서 버네이즈가 말하는 니즈는 단순한 상품에 대한 니즈 이상을 의미한다.
대중의 니즈는 단순히 음식에 대한 니즈일수도 있고 옷에 대한 니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상품이 팔리기 위해서는 내적 합리화 과정이 지속되는 것이 필요. 왜냐하면 그것은 미학적 니즈, 사회적 니즈, 가정 내 사용에 대한 니즈 등을 위한 것이기 때문.
버네이즈는 어떤 상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나 습관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던 상품도 판매할 수 있다는 믿음, 아무리 새로운 것에도 사람들은 적응할 수 있다는 낙관적 대중관, 그것은 현대 소비주의 사회를 지탱해주는 강력한 이념이기도 하다. 새로운 상품을 계속 만들어내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버네이즈는 귀족이나 부르주아 대신 새로운 지도층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들은 엘리트라는 사회경제적 특권층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특권층에게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막아내는 동시에 충동적인 대중을 통제하고 설득하기 위한 기술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기술이 바로 PR이었다.
그런 이유로 버네이즈가 그저 대중설득의 천재, PR의 아버지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래리타이는 그를 스핀의 아버지, 정보조작자라 불렀다. 스핀은 정부와 기업에 의해 행해지는 대중기만 전략을 지칭함. 사적인 이익추구를 마치 공익을 추구하는 것처럼 언론을 통해 포장하는 기술을 말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흡연습관을 바꿔 미국 거대 담배회사들에 기여한 점, 전력시설의 공영화를 막기 위해 에디슨과 포드를 등장시켜 전구발명 50주년 기념축제를 개최한 점, 트럭을 팔기 위해 의회를 움직여 아스팔트 고속도로를 대규모로 건설하게 한 것, 60년대 미 농산물 회사 유나이티드 푸루트 컴퍼티를 위해 CIA를 동원해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시킨 점 등은 우리로 하여금 버네이즈의 윤리성에 대한 판단을 고민하게 만든다.

- 어떤 것들은 진실이고 어떤 것들은 거짓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좋은 이야기들이다. (힐러리 맨틀, 울프 홀 중에서)

- 단언컨대 저널리즘에서 드라마투르기는 효과적이면서도 위험함. 대중을 호도할 수도 분열시킬 수도 있기 때문. 그것이 위험하기는 기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드라마투르기는 글쓰기 방식 이상의 의미를 가짐. 왜냐하면 드라마투르기는 결말에 대한 강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어떤 이유에서 시작되었고 어떤 결말로 가야 하는 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확정적 결말이 있는 기사를 쓰고 싶어 함. 취재경쟁이 벌어지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일수록 드라마투르기는 고개를 쳐든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으며 끊임없는 네버엔딩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결과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편향을 초래하기도 한다. 
뉴스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즐겨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의 드라마투르기를 살펴보면 전형적 극적 구조를 갖고 있다. 사회인류학자 빅터 터너가 사회적 드라마 이론에서 언급한 위반, 위기, 교정의 3단계에 입각한듯한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특히 요즘 유행하는 메이크오버 프로그램들이 대표적이다.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인 방송소재다. 메이크오버의 대상은 자녀들의 버릇이 될 수도 있고, 피우는 강아지의 배변습관, 자신의 요리법, 패션감각, 재테크, 부부관계등 다양. 그것들은 언제나 골칫거리들이며 멋있게 바꾸고 싶은 대상이다. 가장 극단적 유형은 볼품없는 자신의 신체인 셈이다.

- 사회적 드라마.
사회인류학자 빅터 터너가 만든 개념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어떤 갈등이나 사건을 계기로 기존질서와 가치를 뒤집고 새로운 상태로 안착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함. 그에 따르면 사회적 드라마는 크게 위반, 위기, 교정의 3단계로 잉루어짐.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나 사회가 겪는 일종의 사회적 의식이다. 위반단계는 사건이 발발하여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는 시기. 위기단계는 점차 고조되는 단계로 기존가치가 소멸하고 새로운 가치로 대체되는 급격한 변화를 수반. 교정은 갈등을 봉합하고 공동체의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 뉴스와 오래 시간을 보낼수록 몹시 익숙해지게 될 두가지 감정은 두려움과 분노다. (알랭 드 보통)

- 뉴스는 동요하고 겁먹고 괴로워하는 대중을 간절히 원한다. 겁주거나 분노하게 만들면서 뉴스는 줄곧 대중으 똑똑한 공중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야만의 군중으로 만든다. 커뮤니케이션 개론에서 배운내용과는 정반대댜. 쏟아지는 살인, 전염병, 재해뉴스는 세상이 폭력과 광기로 가득 찬 곳이라는 두려움을 준다. 또한 세상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바보들, 특히 공무원과 정치인들에게는 댓글로 응징을 해야겠다는 정의감으로 충만하게끔 한다. 공포와 분노는 전염성이 가장 강력한 감정읻. 위험할수록 화가 날수록 사람들은 더욱 뉴스를 찾게 되고 정보를 공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 수사학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의 저작에는 다음과 같은 수사학의 기법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사용된다
* 동일단어 교차반복 : 동일한 단어를 한 문장 안에서 순서를 바꾸어 사용.
(조국이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봐라)
* 접속사 생략 : 일부러 접속사를 생략하는 기법으로 리듬감이 장점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 어두 동어반복 : 특정 단어나 구, 절을 단락의 맨 앞에 반복함
(오바마의 선거승리 연설 중 '이것은 응답입니다.'라는 표현을 매 단락의 시작부분에서 반복)
* 어미 동어반복 : 특정 단어나 구, 절을 단락의 맨 뒤에 반복함
(오바마는 08년 대선 당시 "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는 대선 캐치프레이즈를 매 단락 마지막에서 일부러 강조)
* 어미-어두 동어반복 : 동일한 단어가 한 문장의 마지막에,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시작에서 반복되는 경우
(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
* 동일단어 연속 반복 : 단어를 의도적으로 반복함
(키케로의 수사학 중 '그렇게 그렇게 그는 어둠속을 가는 것을 돕는다"

- 이미지 조작이 용이해지는 시대는 문자 대신 이미지라는 언어만을 편식하는 청소년이나 젊은층의 정보편향성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지에 대한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한 대목. 이미지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읽고 해석해야 하는 대상으로 재인식 되어야 함. 그것이 사진이건 동영상이건 간에, 이미지 공유와 배포가 소통의 한 형태로 자리잡은 현대에서 이미지는 아주 강력하면서도 아주 위험한 재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미지는 공동체의 분열과 정치집단간의 극단적 대립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성찰을 요구함. 일베의 주요 언어중 하나가 집단 은어와 사진이라는 점은 잘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미지 조작시대의 가장 위험한 점은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를 봐도 진짜라고 믿지 않는 것임.

- 당신은 심리학, 사회학, 통계학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러한 학문을 모른다면 당신의 고객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조언을 줄 수 없다. 예컨대 사회학을 모른다면 개인과 대중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PR전문가들은 비즈니스하는 방식밖에는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없는 것은 고객들도 마찬가지다. (에드워드 버네이즈)

- 대중을 유혹하는 최고의 기술은 무엇일까? 미디어이벤터, 바이럴마케팅, 공포와 분노, 트라마투르기, 수사학과 아이콘, 이미지, 어느 하나 빠질 수 없는 훌륭한 전략이지만 이들 모두에는 공통적 한계가 있다. 그것은 이들이 그저 수단적 기술에 해당한다는 것. 비유하자면 그들은 자동차이며 요트에 불과함. 실제로 그들이 달리기 위해선 가솔린과 바람의 도움을 얻어야 하는데, 바로 대중의 무의식이 그것에 해당한다. 대중의 무의식과 수단적 기술이 잘 결합되지 않으면 대중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거나 대중의 속마음을 잘못 읽게 될 것이다. 대중의 무의식을 수단적 기술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이 필요. 그것이 바로 PR, 마케핑,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위치하는 영역이다. 즉 PR전문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바람의 방향을 읽고 돛을 통제하거나 가솔린의 잔여량을 확인하면서 자동차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들이다. 미국 PR의 선구자였던 월터 리프먼은 이것을 동의의 조작이라고 불렀다. 동시대인이었던 버네이즈도 같은 취지로 이런 말을 했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우리는 지배당하고, 우리의 생각은 틀지워지며, 우리의 취향은 만들어지고 우리의 생각은 주입된다. 이것은 민주적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 대중을 유혹하는 최고의 기술은 대중의 무의식을 이용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의 무의식이 새어 나오는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첫번째로 무의식은 기억으로 존재한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 때마다 왜 25년전 히트작을 분석하는지, 94년 연대 근처 하숙집이 왜 드라마의 공간이 되었는지, 당대 농구선수 서장훈이 어떻게 해서 입담 좋은 토크쇼 게스트가 되었는지, 추억의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방송할 때마다 왜 시청률이 높게 나오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당시 대중이 함께 공유했던 기쁜이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그것들은 현재로 소환될 수 있으며 대중의 열광은 재현될 수 있다.
또한 대중의 무의식은 상처로 존재한다. 대중은 기뻐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상처받은 자들이다. 트라우마로 존재하는 무의식은 비료적 조심스럽게 다루어지는 편이다. 의도적으로 그것을 표층으로 끌어낼 때는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대치하거나 본래의 의미를 바꿔놓는다. 에를 들어 독일과 일본은 2차대전 당시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에게 2차대전의 패배는 깊은 트라우마이기 때문. 그들은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인도주의적 가치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수사학에 불과. 실제로 지난 70년간 자위대라는 이름하에 통제되었던 그들의 군사력과 국가자존감을 살려주는 계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 일본 정치인들은 과거의 상처를 현재의 영광으로 치환함. 히틀러는 1차대전 패배이후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던 독일 국민들에게 아우토반, 폭스바겐,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베를린 올림픽 등으로 민족적 국가적 긍지를 심어주며 독일인들을 전체주의의 광기로 내몰았다. 파시즘이 생기는 것은 그들이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대중의 무의식은 욕망이다. 현재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강한 욕망은 가지지 못했거나 충족되지 못한 결핍을 방증. 37년간 한국인들의 밤을 통제했던 야간 통행금지조치가 해제된 82년 1월 5일 이후 심야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90년대 후반 등장한 신도시와 대형마트에 대한 사회적 판타지는 왜 생겨났는가? 제주도로 정착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주말마다 사람들이 올레길을 걷는 이유는 무엇인가? 텔레비전에 등장한 강원도 오지와 남해 작은 섬이 중산측 가정의 여행코스가 된 까닭은 무엇인가? 슈퍼스타K의 흥행 이후 여전히 다양한 버전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재생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슨 이유로 음악영화 위플래시가 150만명의 국내관객을 끌어들이면서 한국에서는 자기계발 영화로 수용되는지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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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평등의 짧은 역사

사회 2025. 3. 30. 16:46

- 이 책에서 우리는 가장 가난한 하위 50%를 민중계급, 그 다음 40%를 중위계급, 나머지 가장 부유한 10%를 상위계급이라 지칭할 것이다. 균질하지 않은 상위계급 내에서도 (하위 9%에 해당하는) 부유한 계급과 (상위 1%에 해당하는 지배계급을 구분하기로 한다. 간단히 요약해 말하면, 민중계급은 적은 금액의 은행예금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다르게 중위계급의 자산은 주로 주택에 집중돼 있으며, 부유한 계급의 자산은 주택과 사업자산, 금융자산으로 나뉘어 있다. 반면 지배계급의 자산은 생산수단(사업자산, 주식, 유가증권 위주)에 집중됨. 계급분류에 사용한 이 용어들은 분명한 의미를 전달해 주지만 결코 고정되어 있거나 경직된 개념이 아님. 현실에서 계급적 정체성은 항상 유연하고 다원적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 계급적 정체성은 결코 화폐적 등급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계급은 생산수단과 주택의 소유, 그리고 이 소유의 규모뿐 아니라 소득과 학력, 직업, 활동분야, 나이, 젠더, 출신 지역과 국가, 더러는 종족/종교적 정체성에 의해 결정됨. 그리고 이것이 결정되는 방식은 사회역사적 맥락에 따라 유연하고 가변적임.

-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중간계급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었다.  하위 50%와 상위 10% 사이에 있는 40%가 하위 50% 못지않게 가난했기 때문. 그런데 20세기말과 21세기 초에 오면, 물론 개개인으로 보면 엄청나게 부자는 아니지만 궁핍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중위 자산계급이 만들어지고(이들은 성인 1인당 대략 10만-40만 유로의 자산을 보유), 이 집단이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몫은 40%라는 상당 수준에 이르게 됨. 이는 상위 1%가 차지하는 몫(24%)의 거의 두배에 해당하는 규모인데, 1차대전 발발 직전 이들의 점유일(13%)이 상위 1%의 점유율(55%)의 1/4~1/3에 그쳤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이 변화를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 집단 전체를 놓고 말할 때, 한 세기 전에 지배계급보다 3배 더 가난했던 중위계급이 오늘날은 2배 더 부유하다고 말할 수 있다. 소유의 집중은 시대를 막론하고 한 번도 극단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런 전반적 경향 속에서도 집중이 뚜렷하게 꺾이는 추세는 관찰된다. 이 두가지 진단은 상호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모두 사실이다. 이같은 세계의 복잡성이야말로 우리가 물려받은 역사적 유산의 일부이기도 함.
이런 불평등의 감소는 전쟁과 경제위기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내내 실행된 새로운 사회정책과 조세정책의 결과. 사회적 국가,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기초적 재화의 접근에서 실현된 일정 정도의 평등, 그리고 상위소득과 자산에 대한 강력한 누진세 적용이 바로 그 내용이다.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투쟁이 이끌어낸 이같은 근본적 변화들이 앞서 언급한 법제도 및 소유권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들인 물론 평등의 확대 또한 이루어냈다. 이 여정을 앞으로 계속하는 게 바람직한가? 바람직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해나가야 할까? 나는 이 평등을 향한 여정이 여러 면에서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이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진 생산성 증대와 집단의 번영도 당연히 그 효과 중 하나일 것이다. 전체 소유에서 차지하는 몫이 대폭 줄었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지출과 투자능력은 19세기이후 급격히 감소. 하지만 이 감소분은 부상한 중위 계급과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민중계급에 의해 상쇄되고도 남았다. 현재 불평등 수준에 만족해야 하며, 하위 50%가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몫이 5%에 불과한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결코 견고한 역사적 경험에 기반한 생각이 아니다. 평등을 향한 여정은 앞으로 계속되는 게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를 좀더 강화해야 할 것이다.

- 케네스 포메란츠는 2000년 출간한 유럽과 아시아의 대분기를 다룬 저작에서, 세계적 차원의 원자재 공급가 노동력 동원이 없었다면 서구의 산업발전은 단시간에 대규모 생태적 제약에 봉착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 그는 특히 18세기말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을 필두로 유럽국가들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 세계 다른 지역에서 행한 대규모 원료(특히 면화)와 에너지자원(특히 목재) 수탈에 기반했다는것, 그리고 이 과정이 식민지배를 통해 강제적이고 조직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포메란츠가 보기에 1750-18900년 무렵에는 중국과 일본의 가장 발전한 지역들이 서유럽의 비슷한 지역들과 발전 수준에 차이가 없었고, 사회-경제 구조도 상당히 유사했다. 양쪽 모두 지속적 인구성장과 (경작기술 향상과 개간/버목을 통한 농경지 면적의 증대덕에 가능해진) 농업발전이 진행중이었고, 직물산업을 중심으로 프로토산업화와 자본축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포메란츠의 분석에 따르면, 핵심적 두가지 이유 때문에 1750-1800년부터 양쪽이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된다. 첫째, 유럽에서 벌목으로 산업발전에 심각한 제약이 발생한 상황에서 잉글랜드에서 풍부한 석탄 매장지가 확인된 것. 그러자 목재가 아닌 다른 에너지원으로 빠르게 눈을 돌렸고, 관련 기술도 일찍 발전하기 시작. 둘째, 유럽국가들의 조세재정능력과 군사능력의 발전이 국제노동분업과 수익성 뛰어난 공급망 구축을 가능하게 함. 당시 유럽국가들이 지닌 조세재정능력과 군사력은 주로 오래전부터 벌인 경쟁의 산물이었는데, 여기에 국가간 경쟁에서 비롯된 기술혁신과 금융혁신까지 더해지며 강화됨.

- 벌목고 관련해 포메란츠는 유럽이 18세기 말에 탈출구 없는 생태적 제약에 봉착하기 직전이었다는 점을 강조. 영국과 프랑스, 덴마크와 프로이센,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모두에서 몇 세기동안 숲이 급속도로 사라져, 1500년 무렵에는 전체 면적의 대략 30-40%를 차지하던 것이 1800년에는 10%에 불과. 초기에는 아직 숲이 울창한 동유럽이나 북유럽 지역들과의 교역을 통해 목재부족분을 부분적으로 메울 수 있었지만, 곧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해짐. 비슷한 시기인 1500-1800년 동안 중국에서도 벌목이 점차 늘어났지만 상황이 유럽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의 발전한 지역들과 숲이 울창한 내륙지역들간에 좀더 강력한 정치적, 상업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

- 유럽은 아메리카의 발견과 아프리카와의 삼각무역, 아시아와의 교역을 통해 그런 제약들을 타개해나가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북미와 앤틸리스 제도, 남미로 데려온 노동력이 생산한 원료(주로 목재, 면화, 설탕)는 식민지배자들의 이윤창출과 1750-1800년 무렵부터 급성장한 섬유산업에 쓰였다. 군사력을 이용해 장거리 해상운송로를 장악한 것도 원거리 지역과의 상호보완성 강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플랜테이션에서 가져온 목재와 면화로 섬유제품과 공산품을 만들어 북미에 수출했고, 여기서 번 돈을 다시 앤틸리스 제도와 현재 미국 남부에서 일하던 노예들의 식량구입에 사용. 18세기에 노예들이 입던 옷을 만든 천의 1/3이 인도에서 온 것이었다. 또한 아시아에서 물건(직물, 비단, 차, 도자기 등)을 수입해 오는데 필요한 돈의 상당부분을 아메리카에 수출해서 번돈으로 충당. 포메란츠의 계산에 따르면 1830년 무렵 영국이 해외 플랜테이션에서 들여온 면화와 목재, 설탕의 양은 100만 헥타르 이상 경작지의 생산량에 해당했고, 영국 전체 경작지 생산량의 1.5-2.0배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렇게 식민지를 통해 생태적 제약을 극복할 수 없었다면 다른 곳에서 공급원을 찾아야 했을 것임. 물론 유럽이 자급자족으로 똑같은 산업발전을 이루었을 시나리오가 역사적, 기술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 가령 랭커셔 영국인 농부들이 관리하는 비옥한 면화 플랜테이션의 모습을, 맨체스터 인근의 하늘 위로 쭉쭉 뻗은 아무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세계의 이야기,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세수관련 자료에 따르면 150-1800년 사이에 유럽국가들과 비유럽국가들 사이에 대분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600-1650년 동안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세수가 미미했다. 하지만 유럽국가들이 부강해지는 1700-1750년 무렵부터 뚜렷하 격차가 나타나기 시작. 18세기 말고 19세기 초, 중국과 오스만 제국의 세수는 여전히 도시 노동자 임금의 2-4일치(국민소득의 1-2%)에 해당했다. 같은 시기 주요 유럽국가들의 세수는 15-20일치 임금(국민소득의 6-8%)에 해당. 데이터가 얼마나 부정확한가와는 별개로 격차는 분명 존재하며, 이는 커다란 변화가 틀림없다. 국민소득의 1%만을 세금으로 걷는 국가는 사회를 동원할 수 있는 권력과 역량이 극히 제한적임. 달리 말하면, 이런 국가는 스스로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국가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국민의 1%밖에 동원할 수 없다. 따라서 종종 자신의 영토 내에서 재화와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도 벅차 지역 엘리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음. 이와 달리 국민의 6-8%를 국가에 복무시킬 수 있는 국가는 특히 질서 유지와 대외적 군사적 야망 실현에 훨씬 더 막강한 능력을 갖게 됨.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똑같이 약한 국가였을 때는 어떤 의미에서 균형이 존재했다. 그런데 다수 유럽국가가 좀더 우월한 조세재정능력과 행정능력, 군사력을 갖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역학이 작동하기 시작.

- 보호무역주의는 유럽의 부강에만 핵심적 역할을 했던 게 아니다. 역사 속 성공적 경제발전의 경험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보호무역주의가 작동한 것을 알 수 있음. 19세기말 이후 일본,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과 대만, 그리고 20세기 말과 21세기초 중국이 그 대표적인 경우. 이들 국가는 타깃화된 보호무역주의를 통해 자국이 중점 육성하는 산업들에서 전문성과 노하우를 축적하는 동시에, 막 자리를 잡아가는 이 분야들에 외국 투자자들이 지배권을 가지게 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 이 국가들은 특정 품목에서 절대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나면 그때부터 자유무역주의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뒤처진 나라들은 종종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종속되게 되었다. 세계 체제와 중심부-주변부 관계에 대한 월러스타인의 연구는 자본주의 긴 역사 속 다양한 예들을 통해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 그런데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약진에서는 한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됨. 당시 유럽국가들은 안팎으로 대항세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일방적 무소불위의 군사력을 휘둘렀다는 사실. 최초의 유럽무역회사인 영국 동인도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사병을 동원해 인구전체를 폭압적으로 통제한 초국적 무장강도집단이나 다름 없었다. 아편전쟁의 역사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둠. 18세기 초반에 들어 그때까지 중국, 인도와의 무역수지 균형을 맞춰주던 아메리카의 은이 고갈되자 유럽인들은 불안해지기 시작. 두 거대 아시아 국가에서 비단, 직물, 도자기, 향신료, 차를 수입해 오면서 대신 팔 만한 물건이 더는 없어진 것. 그러자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아편재배를 늘려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 이렇게 해서 18세기에 아편거래 규모가 크게 증가했고, 영국동인도회사는 1773년 벵골에서 아편생산과 수출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함.

- 특권과 지위의 불평등은 사라졌는가?
계몽주의 시대와 대서양혁명들 이후 서구사회에서 법적 평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는 동화같은 믿음이 꽤 널리 확산돼 있다. 이 믿음의 중심에 있는 결정적 사건이 바로 프랑스 혁명과 1789년 8월 4일밤에 이루어진 귀족계급의 특권폐지다.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미국과 프랑스 공화국은 1960년대까지도 엄연히 법적 차별이 존속한 노예제 공화국이고 식민공화국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군주제 국가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세계도처의 기혼여성들은 60-70년대가 되어서야 배우자의 법적 후견에서 벗어나 형식적으로 평등한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18세기 말에 터져 나온 권리의 평등에 대한 요구는 사실상 백인남성들 간의 평등, 그중 특히 백인 남성 소유자들간의 평등에 대한 요구였음.

- 1789년 8월 4일 밤에 일어는 특권폐지는 결정적 사건임에는 틀림없으나, 우리는 이를 평등을 위한 아직 끝나지 않은 긴 투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함. 7월 14일 바스티유가 함락되지 않았더라면, 아니 1789년 여름에 영주들과 그들의 성을 공격해 토지소유증서를 찾아내 불태운 농민반란이 없었더라면, 8월 4일 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 그해 여름 농민발안이 일어났기에 파리에서 소집된 의회가 저주의 대상이 된 봉건제도를 폐지하겠다는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그 여름의 반란 역시 분권된 통치세력이 갈수록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상황에서 수십년간 일어났던 무수한 농민반란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788년 여름에는 토지와 공공재화를 점유하고 토지소유자들을 공격하는 등 봉기에 가까울만큼 분위기가 들끓자 마침내 삼부회 선출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짐.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1789년 조세, 정치, 법률상의 특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나서도 프랑스 귀족들이 한참 더 소유자계급으로서의 특권과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는 사실. 파리 상속문서들에 등재된 성을 분석한 결과, 우리는 19세기 파리인구의 고작 1%를 차지했던 귀족들이 1830-40년대 상위 자산가의 40-45%를 차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비중은 프랑스 혁명 직전과 비교해 아주 약간 낮아진 것에 불과. 1880-191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상위 자산가 중 귀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 이토록 변화가 더딘 이유는 여러가지로 설명된다. 1789-1815년 동안 가까운 유럽 군주제 국가들로 망명했던 귀족들이 1815년 대거 귀국해 당시 프랑스 납세 유권자 군주정이 베푼 각종 혜택을 누렸기 때문.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이미자를 위한 10억 이라는 상징적 법이다. 이 법에 따라 프랑스 혁명 당시 상실한 토지와 임대료에 대한 보상명목으로 돌아온 귀족들에게 막대한 금액이 지급됨(국민소득 15% 해당) 왕정복고 직후부터 논의가 시작된 이 법은 샤를 10세 치하였던 1825년 빌렐 백작의 주도로 채택됨.

- 지난한 과정을 거쳐 사라진 강제노동과 반강제노동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귀족계급의 특권을 폐지하는 대신 소유자들의 권리를 강화해줌. 따라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반쪽의 성공이었다. 물론 영주들의 전횡에서 벗어났고, 모든 시민을 똑같이 대우하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사법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것은 실질적 진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위 1% 자산가들, 다시 말해 귀족과 부르주아들에게 소유가 집중되는 현상은 1780-1800년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음. 오히려 1800-1910년 돋안 더 심화되기까지 했다. 결국 자산 하위 50%의 입장에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 우리는 프랑스와 유럽 사회에서 노동의 지위가 변해가는 지난한 과정속에 프랑스 혁명을 놓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와 영국 농촌에서는 프랑스 혁명 발발 몇세기 전에 이미 농노제가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는 14세기 중반에 발생한 흑사병이 자주 언급됨. 흑사병 때문에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귀해지고 사회제도가 붕괴하자 농노들의 영지이탈과 해방에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 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같은 설명은 지나치게 도식적이라고 지적. 결국 개별 지역의 권력관계와 사회정치적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 가령 유럽대륙 동쪽에서 14세기 이후 농노제가 강화돼 19세기까지 존속하다 뒤늦게 사라진 것이 그런 예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일부 낙관적인 중세학자들은 기독교 삼기능 이데올로기가 예속노동의 점진적 폐지에 끼친 긍정적 역할을 부각하기도 함. 유럽대륙 서쪽에서 예속 노동이 점차 끝나고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존재하는 하나의 노동자 계급올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삼기능 이데올로기 때문이며, 이런 과정은 이미 흑사병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물론 부분적으로 맞는 설명일 수도 있지만,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용자료만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확실한 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도 생클로드 수도원 같은 곳에는 농노제 경작토지가 존재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에야 노동을 위한 이동에 가해지던 제약이 완전히, 그리고 영구적으로 철폐되었다는 사실이다. 부역이란 용어는 1789년 프랑스 농촌에도 흔하게 존재했다. 당시 농민들은 전반적으로 이동의 자요가 있었지만 영주를 위해 며칠씩 무보수 노동을 해야 했다. 이런 형태의 부역은 프랑스 혁명기간에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프랑스 혁명기간 중 평등과 재분배가 가장 잘 구현된 1792-94년 동안 국민의회는 부역이라는 이름 자체가 농노제와 봉건제의 뿌리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를 8월 4일 밤 폐지가 결정된 귀족의 특권 중 하나로 간주해 보상 없이 폐지할 것을 요구. 이렇게 해서 일부 가난한 농민들은 자신들의 노동의 결과물과 자신이 경작하던 땅에 대한 완전하고 전적인 소유권을 갖게 됨. 하지만 1789-91년을 포함한 혁명기 대부분 동안, 그리고 다시 1795년에 납세 유권자 원칙이 부활하면서부터 좀더 보수적 인식이 자리 잡는다. 부역은 기본적으로 임대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마따잏 그렇게 불려야 하며, 다른 결정을 하면 결과적으로 소유 체계를 뒤흔들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봉건제도의 부역은 자동적으로 자본주의식 임대료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주당 1일의 부역은 수확한 농산물의 1/5 혹은 1/6에 해당하는 임대료가 되었다.

- 1914-80년 동안 일어난 대규모 재분배는 손 안대고 코풀기가 아니었다. 디너파티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정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들을 남겼다. 가장 큰 교훈은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가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는 점이다. 이 두제도가 대대적인 집단행동과 집단적 전유의 대상이 될 때만 평등을 향한 여정은 재개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 두제도가 20세기 동안 이룬 성취의 한계와, 80년 이후 이것들이 약화된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 1914-80년 동안 제도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 투쟁이었음. 앞으로도 강력한 사회적 투쟁과 집단행동 없이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없을 것임. 레이건-대처 혁명이 80년대 이래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단순히 지배계급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미디어와 싱크탱크, 정치자금을 통해 막강하고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분명히 역할을 하긴 했지만, 결정적 이유는 평등주의 연합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 평등주의 연합은 설득력 있는 대안적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를 중심으로 막강한 민중의 집단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런 서사를 다시 만들어내고,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체제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제도들의 완결된 형태는 바로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분권화, 자주관리, 환경주의, 다문화에 기반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지금의 세계보다 더 해방되고 평등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 완결된 형태의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는 권력과 소유의 항시적 순환에 기초해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자주관리적, 분권적 사회주의의 기반을 닦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 제도는 20세기 서구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사회, 조세, 법률상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실험한 국가적,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 변화들을 물론 권력관계의 변화와 민중의 집단행동, 수차례의 갈등과 위기를 거쳐 힘겹게 쟁취한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하나의 밑그림에 불과하며, 여러 단점과 한계를 내포. 가령, 생산수단과 주택의 사적소유룰 제한한 형태로 계속 허용하게 되면, 앞서 언급한 변화들이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고 부의 격차를 엄격히 제한하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일각에서 과세포를 수정하고 제한을 없애려는 막강한 시도가 있을 것이기 때문. 이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지만, 결코 도구화해서는 안됨. 바로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20년대에 소비에트 정권이 모든 형태의 소유를 자본주의의 종양이라는 이름으로 범죄시했고, 결국 우리가 아는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파행을 맞지 않았던가. 해답은 민주주의 강화와 확대에 있다. 우리는 소유의 재분배를 해야 하며, 부자들에 의한 선거 민주주의 독식을 막기 위해 정치활동, 언론, 싱크탱크 등에 대한 평등주의적 재정조달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앞서 우리는 소유의 재분배와 권력의 분유를 위해 실질적 개헌이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더해 한가지 보호장치를 더 마련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가령, 사회보장 분담금을 사회보장기금에서 관리하듯이, 누진 소유세와 누진 상속세 세수를 모두를 위한 상속기금에서 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 이렇게 행정조직을 강화하는 것이 결정을 번복하려는 정치인들의 시도를 어렵게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정치인들이 더는 슬그머니 복지혜택을 없애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 평등을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따. 이 투쟁은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 실질적 평등, 차별철폐를 극대화하면서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계경제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식민주의 시대의 종언으로 평등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지만, 경제계는 여전히 극도로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자본이 사회적 환경적 목표를 갖지 않은 채 통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현재의 경제체제는 부자들을 위한 신식민주의와 다름없다. 이런 발전모델은 정치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용납할 수 없다. 현 체제의 극복은 민족단위의 사회적 국가에서 개도국을 향해 열려 있는 연방단위의 사회적 국가로 전환할 때만, 현재 세계화를 좌지우지하는 각종 규정과 조약들에 대한 대대적 수술이 있을 때만, 가능해질 것이다.

- 공적자본의 평균비중 30%라는 수치 뒤에 감춰진 자산 범주별 차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주택용 부동산은 거의 대부분 사유화됨. 2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정부와 기업이 소유한 주택보유고는 5% 미만. 은행을 통한 저축 가능성이 제한적이고 공적 연금 시스템의 재정이 부족하다보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국 가정들에게 주택은 최고의 투자대상이 되었고, 이는 결국 부동산 가격폭등을 불어옴. 부동산과 달리 기업의 자본은 여전히 상당부분 정부가 소유. 중국정부는 현재 기업총자본의 55-60%를 소유. 05-06년 이후 이 비중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가가 생산시스템을 밀착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 특히 대기업에 대해서는 정부의 통제가 더욱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기업의 자본 중 외국인 투자자의 보유비중이 현격히 감소하고, 이 감소분이 중국 가계의 보유분 증가로 상쇄되고 있다. 

- 중국식 체제는 다른 강점들도 있다. 기후재난이 발생하면 중국은 거리낌없이 서양에 책임을 묻고 비난할 것임. 자신들이 노예제나 식민지배 없이도 산업화를 이루어냈음을, 오히려 자신들은 그것들의 피해자임을 중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기시킨다. 틈만 나면 전세계에 정의와 민주주의를 가르치려 들지만 정작 체제 내부를 갉아먹는 불평등과 차별은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선진국들, 이익만 되면 언제라도 전제주의 통치자들과 올리가르히들과 손을 잡는 타협적인 선진국들, 그러면서도 늘 오만하기만 한 선진국들을 상대로 중국은 유리한 입장이 될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가 중국식 권위주의적 국가사회주의의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환경적이고 포스트신민주의적인 이 새로운 사회주의는 마침내 후진국들의 운명을 고민하고, 서구국가들의 불평등과 위선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중국의 변화는 동력을 상실한 신자유주의에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자유쥬의의 쇠퇴는 08년 금융위기와 20년 팬데믹 위기로 가속화되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규제완화를 통해 경기부양을 달성하겠다는 레이건주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 중간계급과 민중계급은 그동안의 달콤한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자 세계화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당연히 신자유주의가 다양한 형태의 신민족주의로 대체될 가능성이다. 가령 트펌프주의와 브렉시크, 튀르키에, 브라질, 인도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의 득세는 형태는 달라도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국가적 불행의 책임을 외국인과 국내의 다양한 소수집단들에게 들린다는 것. 트펌프주의의 실패는 정체성 충돌의 격화와, 부자들과 대규모 환경오염 유발자들을 위한 사회적 덤핑이나 조세덤핑을 초래할 그런 정치적 흐름의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했다. 이런 신민족주의적 흐름들은 현재 세계가 부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중국식 권위주의적 국가사회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중국식 모델 역시 민족주의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긴 하지만, 최소한 당분간 강력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표를 실현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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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푸코는 팬옵틱이라는 전면적 감시를 감시와 처벌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오늘날 타인의 시각에 노출되느냐 마느냐가 범죄예방의 핵심이라고 평가하는 범죄예방 전문가들도 이런 감시에 큰 의미를 둔다. 애덤 스미스는 당대의 도덕적 타락의 원인 중 하나가 도시화가 낳은 익명성이라고 지적. 한 노동자가 자기 마을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으며 스스로 그것을 의무로 여김. 그러한 규범을 어길 경우 마을에서 평판이 나빠지기 때문. 하지만 대도시로 나오면서부터 그는 어둠과 그늘에 파묻힌다. 아무도 그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는 변덕스러운 악과 방종에 놀아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 사람들의 평판은 사회적교류에서 만들어짐. 작은 집단 내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거론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두번째로 나오는 발언으로 결정된다고 함. 다시 말해 처음에 그 사람에 대한 안좋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누가 그 이야기에 맞장구를 친다면 집단 전체는 그 사람을 나쁘게 볼 것임. 반면에 두번째로 말하는 사람이 그에 대해 긍정적 이야기를 하면 맨 처음 이야기한 사람의 부정적 언급은 상당부분 힘을 잃어버림.

- 기원전 5000-3000년전부터 인간집단은 대개 1000명에서 만명 상당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3000-1000년부터 일부 집단은 만명에서 10만명 규모에 이르렀고, 그 후에는 100만명 규모도 훌쩍 넘어버림. 물론 현대사회에서 인간활동의 구조는 사회생활의 탈공간화와 그로 인한 실질적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데 할애하는 시간은 아직도 상당함. 인간들의 교류에서 60%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차지한다고 한다. 사이버 시대에도 사회적 평판은 여전히 시사성 있는 개념이다.

- 당혹감은 수치심이나 죄의식과는 다른 감정. 당혹감은 주로 관습적 규칙(예의범절, 에티켓)을 위반할 때 발생함. 한창 회의중인데 배에서 꼬르를 소리가 남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났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궁정에서 신년회를 거행하던 중에 뒤늦게 바지 앞섶이 열려 있음을 깨달았던 덴마크 헨리 왕자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 보라. 당혹감은 우리의 사회적 이미지가 어긋날 때 비롯되며 일시적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림. 당혹감은 시선을 피한다든다, 말을 더듬는다든가, 맹한 미소를 짓는다든가, 자꾸 자기 얼굴을 만지고 얼굴을 붉힌다든가 하는 모습으로 드러남.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당혹감이 죄의식이나 수치심보다 더 괴롭다.

- 당혹감도 여타의 도덕적 감정들의 그렇듯 사회적 편입의 표식이다. 교수들은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당황해하는 학생을 덜 공격적으로 본다. 당혹감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규범을 어겼는지 의식하고 있음을 타인의 시선을 신경쓴다는 것을 보여줌. 자기가 방금 저지른 일에 당황해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일을 목격한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사과를 한다. 당혹감은 주위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처벌을 완화하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아이가 뭔가 잘못을 하고 당황해하면 부모도 심한 벌을 내리지 않는다. 옆 사람의 바지에 와인을 쏟거나 새치기를 한 사람이 얼굴이 빨개지면 좀더 호감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당혹감의 진정효과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죄의식의 표시로 해석되어 더욱 가혹한 판단을 끌어내기도 한다.
당혹감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회범을 어겼다는 의식이 있음을 의미. 

- 표정의 자동모방은 모방된 표정이 가진 감정을 불러오기 쉽다. 19세기 말 윌리럼 제임스는 그저 어떤 활동을 보고, 생각하고, 상상하기만 해도 그 활동을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관념운동성의 원리를 주창. 그래서 우리는 아이에게 숟가락으로 먹을 것을 떠먹이면서 아이가 입을 벌리면 우리도 따라서 입을 벌리곤 한다. 마찬가지로 성난 표정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도 비슷한 감정을 느낌. 인위적으로 표정을 막아버리면 표정의 피드백 현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음. 예를 들어 보톡스 주사를 눈썹 부위에 놓아서 분노의 표정에 이용되는 근육을 마비시키면, 분노에 관여하는 뇌 영역에서 실제로 그 영향이 나타남.

- 이미 2500년전에 투키디데스도 페스트라는 치명적 병이 사회규범을 어떻게 와해하는지 상세히 기술. 그는 이렇게 썼다.
"병은 도덕적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전에는 숨어서 몰래 하던 일에도 과감해졌다. 순식간에 팔자가 변하는 일이 너무 많앗다. 부자들이 갑자기 죽고, 어제까지 빈털털이였던 사람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사람들은 즉각적인 만족만을 원했고 쾌락을 좇았다. 그들에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 신에 대한 두려움, 법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니 경건하게 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재판을 받고 벌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무서운 위협속에 있었으니까. 모두들 어차피 죽을 텐테 살아 있을 때 재미좀 보려는 것은 당연하다 여겼다."
런던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에도 한 관찰자는 "이 전염병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 잔인하게 군다. 짐승도 서로에게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마르세유에 페스트가 돌자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거리로 내쫓았다. 아이들은 물 한 항아리와 사발만 가진채 가혹하게 버려졌다." 연구자들 역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위험한 성관게를 더 많이 고려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반대로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규범을 더 잘 지키려는 역설적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실험참가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연상을 유도했더니 오히려 규범체계가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면 자선단체에 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집단의 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을 칭찬하며, 규범을 위반한 사람을 더욱 가혹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 공정한 세상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개발된 설문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실험상황에서 피해자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확인됨. 연구자들은 설문을 통해 공정한 세상을 믿는 자들의 프로필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얻었고 그런 믿음이 연령, 성별, 사회계급과 약간은 관련이 있지만 단순히 어떤 보수이데올로기나 종교적 세계관으로 싸잡아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정한 세계관에 대한 믿음은 에이즈 환자, 극빈층, 강간피해자와 노숙자, 실업자, 장애인, 노인에 대한 경멸과도 관련이 있다. 이런 설문측정의 흥미로운 변화중 하나는 개인적 적용과 일반적 적용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 다시말해, 세상이 나에게 공정하다고 믿는가와 세상이 남들에게 공정하다고 맏느냐는 별개다.

- 사회복지사, 의료인, 간병인이나 상담사 등이 그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냉혹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음. 감정이입능력이 뛰어난 의료계종사다들이 제일 먼저 자기 일에 염증을 느끼고 말기 환자들을 회피한다는 보고도 있다. 고통을 치료하는 데 익숙한 의사들은 괴로워하는 환자의 동영상을 보아도 임상경험이 없는 의사들만큼 고통과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의사들은 환자가 당하는 고통을 그렇게까지 힘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감정이입의 패러독스가 있다.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할수록 그를 도와줄 확률은 높다. 일례로 타인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심박이 빨라질수록 신속하게 도움을 제공하려 한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관찰자는 괴로운 상황을 회피하고 피해자와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미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 상황이거나 피해자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라면, 관찰자의 감정이입이 고조될수록 피해자를 도와야겠다는 의욕의 수준도 높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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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무리

사회 2025. 2. 18. 06:54

- 농업이 인간을 묶어놓기전에 수렵채집인들은 퍼져나갈 수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었음. 다른 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분열-융합은 인간사회 내부의 경쟁을 완화하고 같은 땅에 발붙이고 사는인구수를 늘려주었다. 동시에 그 덕분에 각각의 개인은 특별한 타인들과 어떻게, 또 얼마나 상호교류할지 가려낼 수 있었다. 침팬지는 분열-융합에서 융합의 측면을 충분히 활용해 멀리 떨어져 있는 구성원과 단결하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은 먼 거리에서도 서로의 소식을 계속 접할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초기 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은 소리를 질러 소식을 알리기에는 보통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연기를 피우거나 북소리로 신호를 보내거나 하기 위해 기발한 장치가 필수적이었다. 모스 부호가 뉴스를 실시간으로 전송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장거리 통신방식에는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 이처럼 선사시대에 사용된 여러 신호도 문자로 '안녕'정도의 정보만 전달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초기기록들을 보면 수렵채집인들이 소통을 아주 잘했다는 단서들이 가득함. 특히 비상시에 그랬다. 순회를 돌던 전령이 어쩌면 당시의 조랑말 속달우편에 해당했는지도 모른다. 달리기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람의 몸은 지구력이 뛰어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을 이용해 목마른 주민들은 마지막 물웅덩이로 모여들었고, 누구든 사냥감이나 적을 우연히 만나면 다른 구성원들을 끌어들여 함께 만찬을 즐기거나 맞서 싸웠다. 유럽인들이 호주 원주민들과 처음 접촉했을 때, 1623년 4월 18일에 네덜란드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이 남자 하나를 납치했다. 다음 날 그들은 200명의 호주원주민들이 휘두르는 창을 맛보아야 했다. 소문이 대단히 빨리 퍼진 모양이다.

- 노예개미가 노예만들기 개미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별것 아니다. 개미 뇌의 진짜 적응력은 지금부터다. 사회붕괴를 피하려면 각각의 노예와 노예만들기 개미가 둥지에 있는 다른 노예개미들까지 모두 환영해야 한다. 노예만들기 개미들이 아무리 다양한 군집을 털어서 노예를 납치해 왔다 하더라도 말이다. 각각의 개체가 만들어내는 냄새가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노예만들기 개미나 노예개미 모두 다른 개체들을 자기 사회의 구성원으로 알아보는 데 전혀 문제를 겪지 않음. 이런 적응성의 밑바탕에는 개체와 유대감을 키우는 역할을 하지만, 전문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개미에서의 몸 손질은 둥지 동료들의 냄새를 뒤섞어 모두의 몸에 표준적 냄새가 배게 만듦으로써 사회수준의 애착관계를 굳혀주는 역할을 한다. 즉 노예만들기 개미의 냄새 일부가 어린 노예개미들에게 묻어 그들을 군집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게 만들고, 노예개미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개체의 냄새를 조금씩 바꾸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냄새가 혼합되는 것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노예개미가 실수로 자신의 진짜 동료와 자매가 살고 있는 고향군집에 발을 들여놓으면, 적으로 간주되어 공격을 받는 것이다. 

- 개미둥지에 개미가 추가되는 것처럼 한 국가에 국민이 더 늘어나도 뇌에 추가적으로 부담이 가해지지는 않는다. 익명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정체성 표지를 사용함으로써 낯선 이도 우리 구성원 중 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다. 대륙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함을 자랑하기도 하는 현대인간사회의 밑바탕에는 이런 상상력의 힘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소규모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그들은 실제로도 당신이나 나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때의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

- 밴드는 노골적으로 허세를 부리거나 타인을 지휘하려는 시도가 있으면 역전된 지배위계라는 것을 통해 진압했다. 자기중심주의자, 권력에 굶주린 자, 괴사라는 자를 멈추게 하기 위해 대다수가 결탁한 것이다. 아무리 엄격한 영장류의 위계질서를 물려받았다 해도, 우리 선조들은 밴드 안의 그런 시도를 다나합된 행동으로 물리쳤다. 침팬지나 점박이 하이에나가 기분나쁜 개체를 집단공격하는 경우를 보면, 그와 비슷한 전략이 아주 원초적 형태로 드러남. 지배의 역전이 성공이 보장된 일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성공적인 독재자들도 결탁을 한다는 사실으르 비싼 경험을 통해 알게 됨. 거친 아이들끼리 서로 편을 먹고 학교 운동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파워게임을 통한 성공은 한계가 있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집인들이 발로 투표했다고 표현한다. 한 밴드에서 시련을 겪으면 다른 밴드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밴드를 정치적으로 통제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집단을 지배하지 못하고, 집단은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길 거부했기에 밴드 전체에 평등이 확립됨. 동물 중에서도 평등주의를 실현한 선례가 있다. 프레리도그, 큰돌고래, 사자의 경우 지도자가 없고, 지배도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침팬지는 우두머리 수컷이 아무리 배려심이 많아도 그 밑에서의 삶은 아주 힘들 수 있다. 지위가 낮은 수컷 침팬지들이 권력을 위해 경쟁하기 때문.

- 수렵채집인의 평등주의도 완전한 동등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특히 가족 안에서 평등주의가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고, 일부 아버지는 가족 안에서 항상 철권을 휘둘렀다. 그리고 물질적 부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었지만 외교적 수완이나 다른 기술에서의 노련함의 차이 때문에 불평등이 생겨났다. 이런 면에서는 사자가 떠오른다. 사자는 지배위게가 없는 평등주의 종이지만 사냥감을 두고는 다툰다.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지 결과의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 이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절대 없다. 사회인류학자 도널드투진은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미국인들에게 평등주의는 온화한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사슴가죽 옷을 걸친 투박하면서도 예의바른 개척자들이 모두의 이이을 위해 조화롭게 함께 일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보통 평등주의는 다소 야만적인 독크린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평등한 상태를 유지하력 분투하는 와중에 끊임없는 경계와 음모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남에 대해 험담하는거이 인간의 아주 원초적 재능으로 간주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평등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육아, 요리, 사냥 등의 영역에서 성별과 나이에 따라 요구되는 것이 계속 변하기 때문. 하지만 부시먼족의 경우 대부분 각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었고 특히나 성적으로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보다 더 평등했다. 밴드사회에서는 쟁점이 발생하면 합의에 의해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냈다. TV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분명 이것이 유흥의 주요원천이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가 말한 "논의에 의한 통치"의 원본이라 할거이다.
불화를 없애는 것이 일차적 관심사였다. 밴드구성원들은 행동을 규제할 공식적 방법이 거의 없었지만 사람에게 허용된 행동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행동을 권리로 생각함. 어떤면에서 보면 이런 규칙에 동질감을 느껴 올바른 행동을 하고 집단의 중요한 문제에 참여하는 것이 시민의 자질을 보여주는 척도였다. "우리의 법이 진짜 법입니다" 한 왈비리족 사람들이 한 말에서 법은 자기들의 도덕률을 의미한다.

- 사실 인간이 밴드사회의 평등주의적 생활방식을 확대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옥신각신 다투는 일이 많기 때문. 록 콘서트가 사회적 엔트로피로 이어질 수 있듯이, 대규모 회합은 결국 난동으로 막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시기에는 살인사건 발생이 정점을 찍는다. 밴드들은  원래 이었던 곳으로 물러나고, 다른 곳에서 살던 친구들이 밴드에 새로 합류하면서 일종의 의자뺏기 놀이가 일어남.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로운 사회는 움지이는 사회다. 그리고 움직임에는 마찰이 따른다. 방랑생활을 하던 수렵채집인으도 마찬가지였다.

- 수렵채집인 정착지에는 조직화된 정부의 지도자 같은 사람은 없었어도 영향력 있는 사람은 있었다. 예를 들어 에클레스산 주변 어부 민족 우두머리를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았고, 전쟁을 선포하고 약탈품 중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신세계에서 왕에 제일 가까운 통치자는 칼루사족 추장이었다. 그는 한 건물 안에서 의자에 앉아 치안을 유지했다. 그 의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소박한 것이었지만 그 건물은 한 역사가에 따르면 2000면이 들어와도 붐비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추마시족과 태평양 연안 북서부 집단의 추장들은 대단히 호사스럽기는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그리 강하게 내세우지는 않았다. 이들은 군대를 등에 업은 큰 농업사회이 우두머리들에 비해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무를 다하도록 북돋기 위해 강압하기보다는 잔치를 벌이는 등 설득과 보상에 더 크게 의지. 리더들은 정치적 공작이나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키는일에는 언제나 달인이었다. 하지만 추장들은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 겸손, 도덕성, 확고한 신념 등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범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음. 이런 것들은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리더의 자질이며, 평등주의 시대가 남긴 유산인지도 모른다. 추장들은 사람들에게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평등주의적 마음가짐이 유지되도록 했다. 하지만 이때도 그들의 영향력은 제한되어 있었다. 리더와 추종자 사이의 끝없는 밀고 당기기 속에서 작은정착지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추장을 지지했다. 태평양 연안 북서부 추장들은 마을 생활의 평범한 측면에 대해 발언권이 있는 비공식 자문위원회의 지지를 구했다. 이것은 위원회를 통한 리더십이었다. 유랑사회에서 밴드 전체가 감당했던 역할을 위원회가 맡은 것이다.

- 각 사회를 구분해주는 미술과 장식, 언어와 활동의 멋진 불협화음은 점점 더 정교해졌다. 이 모든 다양성의 기원은 우리 종의 시작과 함께 발생한 익명사회로의 근본적 전환시기, 혹은 그보다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감. 인간사회가 이용한 표지들은 오늘날의 침팬지와 보노보에서 여전히 보이는 것가 비슷한 행동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암호가 있었을 것이다. 그 뒤로 몸 전체를 하나의 캔버스 삼아 소속성을 표현한 표지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고학적 자료에 그것들이 흔적은 거의 엇다. 수만 년 전 인구가 증가하고 상호교류가 충분히 이루어지면서 집단기억과 집단생산이 가능해졌고, 그와 동시에 매우 정교한 사회적 특성이 만들어짐에 따라 사회는 더욱 복잡해졌다.

- 다른 영장류의 개체 알아보기 사회로부터 온갖 문화적 화려함을 갖춘 인간의 완전한 익명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기나긴 여정이었다. 단순한 표지와 미리 정해진 사회적 삶을 사는 개미세계에서는 이런 문화적 화려함을 찾아볼 수 없다. 익명사회로의 진화는 대뇌겉질에서 하위의 뇌간으로 확장되는 거대한 뇌 회로 재배열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필수 신경회로의 상당부분은 표지와 그것을 공유하는 집단의 자극과 그 반응의 초보적 상호작용 상태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의 개조된 뇌는 개인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우리의 행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감정 및 의미와 연관시키게 되었다. 진화론자들은 대체로 이런 상호작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심리학을 통해 그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 정착지의 규모가 커지자 사회 내부에서 대추 교환하던 태도도 약해짐. 상대가 낯선 사람이거나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경우, 또한 그들이 아주 다른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그것에 구체적인 가치를 매겨야 했다. 그 결과 사회내부의 상호작용도 사회간 교역과 비슷해짐. 캘리포니아 추마시족의 정착지에서는 구슬을 일종의 통화로 사용해서 재화에 현대적 의미의 가치를 부여했다.
근래의 수렵채집 밴드 사회들 사이에 폭넓게 연결이 이루어진 것은 교역을 통해 불이 붙은 전달연쇄로 설명 가능. 약초, 숫돌, 오커 같은 물품들이 호주 원주민 집단간을 넘나들었고, 때로는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재화와 마찬가지로 이것들의 가치도 그 재화의 이동거리가 멀어질수록 높아졌다. 진주조개 껍질이 장신구 용도로 내륙에 도착했을 때는 마치 마법의 물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떤 물품은 원래의 용도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호주 북부에서는 몇 세기 전부터 부메랑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미사일 같은 도구를 무기가 아니라 타악기로 사용하는 유행이 북부지역을 휩쓸자 계속해서 부메랑을 만들던 남부 사람들이 부메랑을 다른 재화와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밴드 사회들은 원재료와 생산품 외에 온갖 아이디어도 거래. 유행어부터 향상된 도구제작법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먼 거리까지 복제될 수 있었다. 호주 원주민 사내아이들의 통과의례 때 수행되었던 포경수술은 아마도 1700년대에 인도네시아 교역자들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이 수술은 호주 전역으로 넓게 퍼져나갔고, 일부 지역에서는 남성 성기 전체의 표피를 벗겨내는 극단적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음. 호주원주민들은 또한 서로의 노래와 춤을 따라했다.

- 1897년에 처음 보고된 사례가 문서로 잘 기록되어 있는데, 워카이아족의 몰롱가 의식이다. 핵심등장인물들이 정교하게 만든 복장을 하고 며칠 밤 동안 환상적 공연을 펼팀. 그 후로 25년 동안 몰롱가는 호주 중심부에서 1500키로에 걸쳐 퍼져나감. 워카이아 말은 그 부족 사람밖에 이해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서로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들이 사회들이 문제없이 상호작용하게 해주는 동력이 되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동맹을 맺기 위해 사회간 결혼을 주관하는 일이 많았다. 배우자들은 고향을 방문할 수 있었기에 일종의 이중국적에 해당하는 자격을 갖고 있는데, 이는 다른 동물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 집단 간 상호작용의 역사 덕분에 많은 수렵채집인이 이웃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호주 원주민과 대초원 인디언 모두에 사용되는 수화를 널리 공유했다. 일부 수화동작은 아주 멀리서도 볼 수 있었기에 협상가들은 서로의 창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도 소통할 수 있었다. 이 수화동작은 추가적 기능도 갖고 있었다. 급습에 나선 전사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도 서로 신호를 교환하며 조직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어느 사회를 봐도 사회의 파탄은 결혼생활의 파탄과 똑 닮아 있다. 분열이 불가피해진 상홍이 닥치면,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억눌러왔던 의견들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런 의견들은 하루는 아닐지라도 한 달 전까지 주장했던 내용과 정반대되는 것일수도 있다. 사회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감소하거나 아예 사라지면, 그동안 사회에서 선호되지 않거나 이단이라 여겨졌던 상호작용 방식을 탐험해 볼 자유를 양쪽 진영 모두 얻게 된다. 그렇게 기존에는 용인되지 않았던 행동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각각의 집단이 이제는 서로가 외부자로 보일 정도로 낯설어지게 된다.

- 매직넘버
수십만년 동안 인간 정체성의 변덕스러움이 작은 규모의 사회분할을 만들어 낸 것은 확실하다. 사실 그 규모가 너무도 예측가능해서 일부 인류학자는 500을 매직넘버라 선언. 지구 어디서나 대략적인 평균으로 작용한 이 수치는 한 밴드사회에 사는 사람의 숫자였다. 120이 침팬지 커뮤니티가 불안정해지는 한계수치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사시대 호모사피엔스가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인구수의 대략적 상한치는 500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한 사회가 적더도500명 정도의 사람을 포함해야 하는 실용적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어떤 계산에 따르면 이 정도 규모의 인구면 가까운 친척이 아닌 배우자를 선택할 기회가 생긴다고 함. 수십 마리 규모의 사회를 이루어 사는 많은 포유류는 위험을 무릅쓰고 쉬지 않고 외부사회에 합류하려는 욕구를 보이는 반면, 인간은 그런 일이 드문 이유를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를 수 있는 짝이 풍부한 덕분에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사회에서 평생 머물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더 큰 규모가 아니라 하필 이 규모에서 사회분할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규모가 더 커지면 짝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훨씬 넓어지고 사회방어에도 이점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 수치는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의 견제와 균형을 반영하지 않은 듯 보인다. 수렵채집인이 살았더너 정글과 툰드라 지역은 포식자와 가용한 식량 등이 생태적 요소가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수렵채집인이 차지했던 영역은 속한 생태계에 따라 총면적에서 차이가 나서 북극 지역 사람들의 영역이 더 넓었지만 사회의 인구는 어딜 가든 대략 비슷했다.
밴드 사회의 인구수 상한선이 낮았던 것은 인간의 개성표현을 관장하는 심리학의 함수였는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균형유지가 필수적이었다. 구성원들은 같은 공동체라는 느낌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닮았다고 느끼는 한편, 자신을 독특한 존재라고 여길 만큼 충분히 달라야 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몇몇 밴드에 속해서 살아갈 때는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동기가 거의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파벌이 잘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자 이들도 더 협소한 집단과의 연줄을 통해 생기는 차별성을 욕망했다. 이렇듯 정체성 다변화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지 분파의 등장이 촉진되고 결국에는 밴드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관계단절로 이어졌을 것임. 한곳에 정착해서 결국 인구가 대규모로 늘어난 사회였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임. 밴드 사람들과 달리 정착지 사람들은 대부분 다양한 사회적 집단과 이어질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집단은 분파가 아니라 사회가 기능하는 데 필요한, 다소 폭넓게 용인되는 집단이었다. 직종모임, 전문가 단체, 사교클럽, 그리고 사회위계나 확대친족 사이에 존재하는 모임이 이런 사회적 집단에 해당.

- 부족이 간신히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한다 해도, 인구증가만으로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문명을 만들지 못함. 넉넉한 식량과 공간, 능력있는 리더십, 풍부한 사회적 분화 등으로 출생률이 높아진 가장 이상적 조건 아래서도 마찬가지. 이런 특성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은 거대한 인간사회가 동질한 사람의 후손이 아니라 다양한 유산과 정체성을 가진 인구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로 입증됨. 이런 면에서 보면 수렵채집인 사회와 부족사회가 다양화된 표지적응에 실패한 것은 국가가 거둔 대성공과 극명하게 대조됨. 사실 문명의 탄생을 이해하려면 문명이 어쩌다가 다양하게 혼합된 시민으로 구성되어 오늘날 인종과 민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 인간은 외부자와 파트너 관계를 맺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들이 동맹의 결과로 완저히 합병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심리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다르면 서로에게 크게 의존하는 사회들이 오히려 다른 사회와의 구별을 더 확실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로쿼이 연맹은 공동의 적(처음에는 다른 인디언이었다가 나중에는 유럽인)과 싸우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 연맹의 부족들은 합쳐진 영토의 서로 다른 경계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이 여섯부족이 서로 독립적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 이런 식의 연합은 자부심의 원천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원래 사회의 중요성이 감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점은 확신할 수 있다. 수렵채집인 연합밴드에서 거대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회가 더 거대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주권을 거리낌없이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는 것. 서로 다른 사회들이 하나로 합쳐진 것은 자발적 합병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격을 통해 다른 사회의 사람과 땅을 취득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전쟁이야말로 만물의 아버지라고 한 말은 참으로 옳았다. 중동에서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한 사회가 문명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이나 힘의 우세를 통해 인구수 폭발을 영토확장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 5500년 전에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유프라테스강 동쪽에서 서로 연결된 몇 개의 소도시로 구성되어 있던 우르크는 인구가 늘며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소도시는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가 그들 삶을 뒷받침해주었다. 그곳에는 거리, 사원, 작업장이 존재했다. 그 지역에서 출토된, 설형문자가 새겨진 수많은 평판을 보면 삶의 많은 측면이 꼼꼼하게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루크는 족장사회로 시작했다가 새로운 조직방법을 취하면서 극명한 변화를 겪게 된, 학자들이 말하는 최초의 국가사회의 한 예다. 최초의 국가 중에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작은 마을에 불과한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종류의 사회였다. 
국가들은 처음 등장한 순간부터 몇 가지 중요한 속성을 공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사회의 리더는 기존에 족장들에게 부담을 주던 수많은 거추장스러운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 족장은 세력기반에 한계가 있어서 비교적 쉽게 타도될 수 있었음. 족장 사회의 치명적 결함은 족장에게 권한을 위임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 족장사회의 규모가 커지자 거기에 예속된 마을의 전직 족장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최고족장은 그들 각각을 직접 감독해야 했다. 합병된 영토 종단에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 시작하자, 대체로 리더의 지배력이나 설득력에 의존하던 조잡한 감독방식은 실용성이 떨어지게 됨.
그러다 국가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것이 변화. 국가의 수장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주장했을 뿐 아니라 공식적 기반시설을 바탕으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었음. 국가에서는 분업과 통제의 계층구조가 통치와 관련된 제도로까지 연장됐다. 그리하여 자랑스러운 관료제의 탄생과 함께 사회가 응집력을 끌어올리고 광범위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게 된 것.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정복하면 기존 국가의 영토는 보통 지방으로 편입되고 그 수도는 행정 중심지로 개조됨. 각자가 특정 업무의 대가인 정부요원들은 필요에 따라 할당되었다. 이러한 감독시스템으로 인해 사회는 전보다 더욱 강압적으로 통치될 수 있었다. 초기국가에서는 수도와 외곽지역의 소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지연이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했지만 말이다. 사실 기반시설이 충분하면 리더나 정권이 최악의 충격 속에 전복되더라도 국가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국가는 다른 몇몇 세부사항에서도 족장사회와 차이가 있다. 우선, 진짜 법이 제정되었다. 권력이 약한 리더를 둔 사회에서도 사람들이 사적으로 범죄에 대한 처벌을 시행했었지만 국가에서는 권위를 가진 자가 처벌을 부과. 다음으로 상위 계층이 찾는 사치품을 비롯한 사유재산의 개념이 온전히 달성됨. 사실 족장 사회에서도 일부가 세력을 얻으면서 사회계층의 차이가 나타났지만, 국가에서는 그런 불평등이 극에 달했다. 권력과 자원에 대한 차별적 접근 권한은 노력을 통해 획득하거나 물려받을 수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족장사회보다 더 공식적인 방법으로 조공, 세금, 노동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구성원들이 그 어느때보다 사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기반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 돌아가면서 리더를 맡든, 위원회를 통해서든, 한 사람이 단독으로 이끌든 리더십의 형태와 상관없이 리더는 사회구조를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의 임무 중에는 국민정체성 강화도 있었다. 때로는 영향력 있는 리더가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행동을 무엇으로 할지 결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기벽을 유행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선택한 행동을 강요하여 언어에서 옷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표준을 정할 수도 있었다. 부족사회와 족장사회의 리더들은 그 지위가 취약했기에 민중의 목소리 역할이 가장 우선적이고 무해하며 중요한 덕목이었다. 유능한 리더는 확실한 본보기를 설정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정체성과 운명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부여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경우에도 유대감을 강력하게 유지시킴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안전하게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인구집단이 확실하게 리더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 그의 권위가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왕은 포틀래치에서 촌장들이 그랬듯이 후한 인심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경우가 드물었다.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 리더의 영향력은 도로, 인쇄기 등 정보소통수단에 대한 확실한 통제력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에서 국가조직이 발현할 즈음 종교의 역할이 사람들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변화. 수렵채집인은 치유능력과 영적 능력이 깃든 사람들을 존경했지만, 그들의 물활론적 철학은 추종자들에게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족과 족장사회는 이런 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지만 국가는 인구가 많아서 구성원들을 더 엄격하게 감독할 필요가 있었다. 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은 신이 내리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타인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하는 행동에도 영향을 주는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통치가 지나치게 독재적이지만 않으면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은 엄청날 수 있었다. 국가 안에서 벌집같은 수준으로 이루어진 상호작용은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해주었을 뿐 아니라, 흩어져 있어 연결성이 약화된 인구집단이 자기 선조들의 혁신을 잊어버리는 태즈메니아 효과와 정반대의 효과를 일으켰다. 일단 다수의 사람이 상호작용을 시작하면 신선한 관점이 그냥 유행을 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사회변화의 수레바퀴에 올라타게 된다. 5만년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화 라체팅이 계속 가속화되어 이제는 자기가 태어났던 사회와 별로 달라진 것 없는 사회에서 늙는 사람이 없는 지경까지 왔다. 이런 발전속도 때문에 사회적 정체성이 예전보다 훨씬 더 유동적인 표적이 되고 말았ㄷ. 더군다나 국가에서 확산되는 집단적 연결에는 집단적 무지가 함께 따라왔다. 밴드에 살았던 수렵채집인은 거의 모든 문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반면, 국가에서는 리더라 하더라도 사회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일부밖에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결정할 때도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적 경향을 뒤쫓아야 할 때가 많다.

- 한 사회가 족장사회에서 규모가 큰 국가로 올라가려면 우월한 전투력만으로는 충분치 않음. 소수의 거대문명은 일반적으로 사회들이 좁은 공간 안에 꽉 들어차 있는 환경에서 등장. 인류학자 로버트 카르네이로가 제한된이라고 표현한 이런 조건하에서 정복이 훌륭한 성과를 거둠. 이에 대해 인류학자 로버트 켈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이동성이 옵션이 아닐 때 등장한다."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으로 둘러싸인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던 부족들은 딱 하나이 세력만 부각되는 싸움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 되었다. 사막 사이에 끼어 있던 나일 계곡이나 대양 위의 점에 불과했던 하와이나 폴리네시아의 섬들을 생각해보라. 나일 계곡은 결국 고대 이집트가 장악했고, 하와이나 폴리네시아의 섬들은 10만명정도를 거느린 거대족장사회의 영토가 되어버렸다.
제한된 환경이라고 해서 문명의 등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곳보다는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제한이 없는 곳에서는 족장사회나 국가가 보통의 규모에 도달한 다음에는 더 이상 확장을 추구할 수 없었다. 주변 사회들이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때문. 뉴기니도 그런 상황이어서 엥가족 같은 부족 전체가 진퇴양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동했다. 규모가 작은 개미군집이 충돌을 피하기 위해 도피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장소에 정착하려면 이웃들과의 동맹을 통해 이동을 협상해야 했을 것임. 사람들은 영토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기에, 이런 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극단적 압박을 받았음을 암시.

- 중국대륙의 정복활동은 이른 식에 시작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결국 현재 중국인구의 90%에 달하는, 지금 우리가 한족이라 간주하는 가상의 통일성을 만들어냄. 이런 규모의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초기 왕조가 자신의 문화, 문자, 그리고 때로는 언어로 개종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받아들인 정책 덕분. 이런 전통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공자가 나온다. 그는 한족의 생활양식에 충실하기만 하면 한족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을 고취했다.
고대 문헌을 비롯해서 건축, 칠기제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표현된 정체성 변화의 증거를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은 진나라와 한나라가 결국 오늘날 중국이 될 인구집단의 상당부분을 어떻게 통합했는지 밝혀냈다. 수도시설, 조명, 기타 다양하게 개선한 필수적인 것들을 제공한 로마와 달리, 중국왕조는 외곽의 인구집단에게 삶의 질과 관련된 이득은 거의 제공하지 않고 반복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에 더 의존. 진나라와 한나라가 이용한 전략 중 일부는 전 세계 영토확장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임. 양쪽 왕조 모두 원래의 한족이 탄생한 곳으로 추정되는, 제국의 중심부와 제일 가까운 북쪽지역 통합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족 문화의 지배력을 확실히 하기 위해 신임하는 백성들을 그 지역에 많이 가서 살게 했다. 가장 부유한 지방에서는 자녀들에게 한족의 풍습을 가르치는 바람직한 상황이 처음 현실화되었을 것임. 수 세기에 걸쳐 이런 교육이 사회계층을 타고 전해져, 14세기 명 왕조가 생겨났을 즈음에는 한족의 정체성이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다. 중국 왕조들이 가장 외곽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반복해서 상실했던 이유는, 관심의 초점을 주로 접근 가능한 영토에만 맞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국경 안에는 왕조가 주류로 편입하는 데 실패한 토착 사회들이 존재했다. 이런 집단들이 사는 곳은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산악지역이라 진압해봤자 얻을 것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민족, 그 중에서도 서쪽의 티벳족과 위그르족 및 버마 국경의 와족 등은 결국 왕조의 통제 아래 들어가기는 했지만, 당국은 아이누족을 개로 생각했던 초기 일본인들처럼 그들을 수준이하의 사람으로 보고 거리를 두었다. 기록으로 남지 않은 정책 하나는 그런 야만인들이 언어와 풍습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16세기에 명왕조는 마치 식민국처럼, 적대적인 먀오적의 산악 근거지를 성벽으로 에워싸 그들을 포함한 다른 거주자들을 억압하기도 했다. 사회적 이탈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써 내륙지역 지방들이 잉카제국에서 했던 역할, 그리고 노예들이 체로키 인디언 사회에서 했던 역할을 완수했다. 그리스 시문학의 거장 콘스탄티노스 가바피스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옳았다. "이제 야만인들이 없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야만인들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무엇이 적절하고 옳은지를 밝히는 역할을 했다.

- 사람들은 세상은 근본적으로 공정하다는 관점을 가짐. 민족과 집단의 문제가 이런 식으로 정당화됨. 한 선도적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특권층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약자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대신, 엘리트층을 지지하고 그들의 높은 사회적 지위는 예외없이 그들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 추론한다." 다른 저자 집단에 따르면 그 결과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여 거부하거나 변화시킬 가능성이 제일 낮다."
이런 신념의 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들도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불가촉천민은 오늘날까지 그러하다.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이런 묵인은 최초의 족장사회와 국가사회시절부터 사회의 성공에서 분명 핵심적 역할을 했을 것임. 수렵채집인들이 경계심, 혐오감, 역겨움 등을 표현하던 대상이 외부자에서 사회내부계층으로 바뀌면서 그 효고가 사회전반에 스며들다 보니, 탄압받는 자들조차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 결과 민족들이 사회적 낙인을 견디며 공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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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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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빌리프

사회 2025. 1. 10. 07:18

- 사람은 대부분(조금 똑똑하다는 사람뿐 아니라 엄청나게 똑똑해서 아무리 어려운 과학적, 수학적, 철학적 문제라도 금방 이해라 수 있는 사람 조차도). 자기가 그동안 무척이나 힘들게 쌓아온 결론이 (자기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가르쳤으며 또 자기 삶 전체를 지탱하는 그 결론이) 알고보니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서는, 가장 단순하고 명백한 진실조차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톨스토이)

- 안정애탁은 어린시절에 형성됨. 뭔가 나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때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주고 도와주리라는 것을 알아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안정애착이라는 개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기본적 요소다. 누군가가 나를 잘 지켜보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시도 때도 없이 둘러볼 필요가 없다. 만일 높은 수준의 안정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일종의 이상적 보험에 가입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 보험만 있으면 어떤 문제가 일어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걸어가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법처럼 놀라운 느낌이다. 무엇이든 못할게 없다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예를 들어, 설령 일이 잘 안풀린다 해도 누군가가 나서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또 도움을 주리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사업이든 뭐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넘볼 수 없는 낯선 사람과도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며 낭만적 모험을 시도할 것이다. 자기가 끝내 잘하게 될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는 분야를 두려움 없이 파고들어 공부할 것이다. 기꺼이 새로운 도시로 이사하거나 새로운 직장을 찾을 것이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요컨대, 안정애착은 우리가 모든 일의 긍정적인 면에 더 집중하게 하고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덜 걱정하게 만든다.

- 증오에는 증오의 즐거움이 있다. 그래서 겁에 질린 사람은 공포라는 불행에 대한 보상으로 증오심을 키우기도 한다. 더 많이 두려워할수록 더 많이 증오하게 된다. (C.S 루이스)

-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고 또 그 일이 누군가이 의도에 따라서 일어났다고 생각할 때, 고통은 한층 커짐. 개인적으로 나는 핸런의 면도날이라는 원리를 약간 변형한 버전을 주장한다. 본래 핸런의 면도날은 "어리석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는 포괄적 용어이며, 나는 핸런의 면도날의 본래 의도는 사실 어리석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비합리성 및 인간본성의 오류에 관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원래의 버전을 약간 수정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인간본성의 오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이는 자기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에 내재된 근본적인 이유를 한층 더 깊이 살펴보고 누군가의 의도나 악의가 아니라 실수, 세심함 부족, 충동, 격렬한 감정, 또는 그 밖의 모든 인간적인 특성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 세개의 면도날
악당이 등장하는 복잡한 이야기의 매력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인지상태를 수시로 점검하기 위한 개인용 구급상자에 세 개의 면도날을 넣어두는 게 좋다. 면도날이라는 용어는 불필요한 정보와 복잡성을 신속하게 잘라내서 진실에 더 빨리 도달하도록 돕는 특정한 경험적 또는 인지적 지름길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 핸런의 면도날 변형판 : 인간본성의 오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 오컴의 면도날 : 부적절하다고 입증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가장 간단한 설명을 선호한다
* 히친스의 면도날 : 아무런 증거없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증거없이 기각할 수도 있다. 이는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이며 역발상주의자이기도 했던 확고한 무신론자 크리스토퍼 히친스에서 따왔다. 
이 세개의 면도날을 함께 사용하면 잘못된 믿음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는다. 이 세가지 면도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다.
* 어리석음이나 인간적 실수나 우연을 무시하면서까지 악의적인 의도가 있다고 가정하는 태도는 과연 합리적인가?
* 나쁜 의도라는 복잡한 그물망을 제안하는 태도는 과연 합리적인가?
* 그런 예외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는가?
만일 설명하고자 하는것이 이 세가지 면도날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이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설명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야 한다는 신호다. 

- 믿음은 힘이 세다. 일단 어떤 믿음이 생기면 그에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이 간헐적 단식습관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는 힘든 노력을 회피하고 오히려 기존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려고 든다. 다큐영화 제작자 애덤 커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힘이나 법을 통해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 권력은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오늘날의 현대적 개인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현대적인 개인주의 및 디지털 정보흐름의 시대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고 말하겠다.

- 오랜 관찰 끝에 마침내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들은 터무니 없는 추론을 하면서 먼저 마음속에 어떤 결론을 내리는데, 이 결론은 자기가 내린 것이거나 혹은 자신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누군가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확고하게 붙잡고 있는 생각이든 다른 사람이 제시한 생각이든 간에 이를 뒷받침하는 주장은 아무리 단순하고 어리석을지라도 즉각적으로 수용되고 박수를 받는다. 반면, 그 생각에 반대되는 주장은 그것이 아무리 기발하고 결정적이라 해도 경멸과 노여움으로 내쳐진다. 설령 그 주장이 자기를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열정적인 몇몇은 이성을 잃고는 올바른 주장을 하는 사람을 적으로 여기고 그들을 제압해서 입을 다물게 하는 일에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두가지 주요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

- 방어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정찰병이 되어라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특히 어려운 대화를 할 때는 자기것을 지키려는 사고방식으로 일관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면 훨씬 생산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 상대방 또한 그렇게 변화하도록 격려하는 것도 유용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을 바꾸기란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합리적 사고 전문가인 줄리아 갈렙은 자기것을 지키려고 하는 태도를 전투병 사고방식이라고 말한다. 갈렙에 따르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전투병 사고방식을 채택한다는 것은 추론과정을 방어전투의 한 형태로 바라본다는 뜻이며, 이 전투에서 자기의 가치관이 공격을 받아서 위험해지면 방어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대신 정찰병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 자기진영의 영토방어가 임무인 전투병과 달리 정찰병은 적진을 탐색하고 조사하는 역할을 함. 그러자면 개방적이고 호기심이 넘치는 마음이 필요. 즉 전투병은 눈앞의 위협을 물리치는 데 과도하게 집중해야 하지만 정찰병은 무엇이 진실인지 그리고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말. 그러므로 잘못된 믿음에 빠지지 않으려면 전투병이 아니라 정찰병이 되어야 한다.

- 수면마비. 꿈을 꿀 때 사람의 뇌는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행동을 하도록 신체에 명령을 보냄. 앞으로 걸어라. 허리를 굽혀 꽃을 꺾어라. 칼을 뽑아들어라. 차 위로 올라가라. 하늘을 날아라. 그렇다면 왜 사람은 렘수면 중에는 뇌의 명령을 받고도 그 명령을 실제로 실행하지 않을까? 왜 침실을 뛰어다니지도 않고 창밖으로 뛰어내리지도 않을까? 왜냐하면 다행히도 인체는 그런 위험한 상황을 예방하는 방향으로 적응해왔기 때문. 렘수면 중에는 기본적으로 뇌와 신체 사이의 연결성이 끊김. 이때는 신체가 뇌의 신호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의미.
- 그러나 때로는 모든 게 계획대로 작동하지 않기도 해서, 신제를 마비시키는 메커니즘이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뇌가 렘수면에서 깨어나기도 함. 이런 경우,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 사람은 잠에서 어느정도 깨어 있긴 하지만 신체를 움직일 수 없다. 이때 사람들은 외계인 피랍자가 경험한다는 바로 그 느낌(따끔거리는 전기적 자극,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 윙윙거리는 소음. 번쩍거리는 불빛, 그리고 침대 근처를 맴도는 외계인이 모습등)을 경험함.

- 인간은 패턴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이론이 아예 없는 것을 참지 못해서, 차라리 나쁜 이론이나 음모론이라도 찾는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 잘못된 믿음의 깔때기 안으로 떠밀려 내려가는 여정에서 사회적 요소는 강력한 역할을 한다.
따돌림 당한다는 느낌은 잘못된 믿음을 추동하는 강력한 힘이다.
사회적 매력은 최기 몇개 단계에서 밀어주고 당겨주는 역학의 결과로 일어난다. 그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친구와 가족에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느낌에 이끌린다.
사회적 유지는 오신자가 그 깔때기의 한층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 다음에 일어나며, 이때 오신자는 새로운 사회적 집단에서 자리를 잡는다.
사회적 가속화는 오신자가 잘못된 믿음의 깔때기 깊은 곳에 있을 때 일어나며, 다른 오신자에게 느끼는 사회적 유대감은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그 집단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 해결책은 거의 언제나 당신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방향에서 나오죠. 그러니까 그 방향을 들여다보려고 애써봐야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래봐야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더글러스 애덤스, 의심의 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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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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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을 팝니다

사회 2025. 1. 10. 07:17

- 약물개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장기적으로는 이득보다 해악이 더 많다는 것을 데이터가 보여준ㄷ면 DSM같은 진단매뉴얼에 의해 광범위하게 촉진되는 과잉의료화 또한 그 자체로 나쁜 정신건강결과에 기여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가 진단을 받음으로써 인정받는 기분을 느꼈다고 보고하며, 그 진단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연구는 우리의 정신적 고통을 정신적 질환, 질병, 혹은 기능장애로 재구성하는 것이 회복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이런 문제를 의학적 문제나 정신질환을로 부르는 관점이 부추기듯,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가 생물학적 이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자신의 문제가 화학적 불균형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런 가설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비해 회복에 대해 더 비관적 시각을 보이며, 더 강한 자기낙인가 자기비난을 경험하고, 더 나쁜 기대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치료가 끝난 이후에 더 많은 우울증상을 경험한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생물유전학적 설명을 수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결과가 발견되었는데, 이런 설명은 많은 경우에 환자들과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낙인화하는 태도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태가 만성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절망감을 가중시킨다.
우리의 고통을 의료화하는 것이 이처럼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이유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정신적으로 아픈 것으로 정체화하게 되면, 스스로를 정상적인 삶에 건강하게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 믿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이들은 이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되며, 이는 그를 다른과 구별하게 되고 정신의학 권위에 장기적으로 의존하게 함.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야망을 다시 생각하거나 심지어 하향조정하고, 주체성의 일부분을 포기하라는 미묘한 암시를 받게 됨. 

-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발견한 것은 고통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데 책임을 지는 사회제도들이 경제의 목적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이런 제도들은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진정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 위험한 감정들을 완화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해가 마르크스 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와 주류 사회과학의 일부가 되자, 이런 이해는 정신건강 분야에도 적용되기 시작했고, 80년대부터 여러 새로운 통찰이 등장. 이런 통찰은 우리의 고통이 명백한 경제적 목적을 위해 잘못 해석되고, 부당하게 이용되며, 탈정치화되는 특정 방식들을 드러냈다. 그러한 방식들에 대한 대략적인 목록을 만들어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 현재의 경제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고통을 개념화한다. 다시 말해, 고통의 원인을 사회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인 것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문제가 바뀌어야 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체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 믿게 한다
* 경제의 목적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웰빙을 재정의함. 웰빙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실제로 좋은지 여부와 관계없이, 경제성장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감정, 가치, 행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과 감정을 더 많은 의학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증거로 만든다.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고 교란하는 감정이나 행동은 강력한 금융기관과 엘리트들이 경제적 이득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의료화되고 치료되어야 한다
* 고통을 더 많은 소비를 위한 활발한 시장기회로 삼는다. 대기업이 소위 해결책들을 제조하고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고통은 대기업에게 매우 수익성 있는 시장이 될 것이다. 이 해결책들이란 수익을 늘리고 이윤과 더 높은 주식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들이다.

- 촘스키가 보기에 부채는 학생들을 경제순응주의자로 만들고, 그들이 진입하고 있는 체제의 경제현실에 반대하기보다는 이를 수용하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해, 부채는 신자유주의로 편입시키는 사회화의 강력한 형태로, 젊은이들이 일찍부터 현재의 경제상태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부채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바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견해가 위와 같은 비판을 뒷받침한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권을 축소시킴으로써, 우리가 직접 원하지 않았더 미래의 의무와 활동에 우리를 가둔다. 

- 미래의 나를 담보로 돈을 빌린다는 표현은 나의 미래 자유를 담보로 돈을 빌린다는 의미. 내가 오늘 빌린 돈은 오늘의 나를 해방하겠지만, 내일의 나를 옭아맨다. 그에 비해 부채를 지는 것은 너무 쉽게 느껴진다. 종속이 다른 날로 미뤄지면, 단기적으로는 장점만이 느껴진다. 합리적 투자를 위한 부채를 넘어선 부채는 투자와 전혀 관련이 없고, 다만 소비주의 경제에서 합리적으로 기능하거나 생계를 유지하거나 또는 어떤 경우에는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관련된다.

- 08년 경기침체 이후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을 아우르는 부채의 영향은 광범위하게 보도되어 왔다. 그러나 부채는 경제의 더 뿌리깊은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 반창고 붙이기 식의 해결책으로 관리되어 왔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수많은 예시 중 하나. 80년대 이래로 다른 경제적 반창고들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는 단지 임금, 세금, 부채,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우리는 머지 않아 교육, 지방정부, 국민보건서비스, 그리고 물론 정신건강분야를 포함하는 우리의 공공서비스 전반에 걸쳐 경제적 반창고가 활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임. 여기서 소비자부채의 활용과 상응하는 또 다른 반창고 붙이기가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유용한 치료를 보편화한다는 명분하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급속히 확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짐작하다시피 바로 여기서 항우울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80년대 이후로 부채와 약물이 사회적으로 작동해온 방식에는 무언가 기이한 유사성이 있음. 70년대에는 부채의 사용과 약물의 사용 모두가 그리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으나, 80년대 이래 수십년동안 부채와 약물의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부채와 약물의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 그리고 부채와 약물 모두에 합리적 사용처가 있다 할지라도, 가계부채와 약물소비는 대부분 장기적으로 유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부채와 약물소비 모두가 사상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것, 최소한 깊이 있고 지속가능한 의미에서 삶을 개선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려이 없음. 오히려 그것은 부채와 약물이 감추려고 해온, 우리 사회의 깊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채와 약물 모두는 우리 시대의 완벽한 진정제로 거듭났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
하지만 둘 간의 유사성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거대기업들이 수중에 어마어마한 부를 쏟아 넣는 것 외에도, 부채와 약물은 이념적으로도 작용하여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내적 장애로 재분류. 부채를 통한 개입은 우리의 병든 재정건강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경제적 무능함을 표적으로 삼고, 정신의학적 개입은 우리의 병든 정신건강의 저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생물학적 이상을 표적으로 삼음. 부채를 통한 개입과 약물을 통한 개입은 제각기 소위 개인적 결함을 치료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자본주의의 사상, 제도, 정책의 모든인과적 책임을 교묘히 면제한다.

- 대부분 가족에게는 자신이 겪는 고통의 사회적원인을 변화시키기는커녕 그에 대해 고심해볼 만한 시간과 자원조차 부족.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일상적 의무를 처리하느라 바쁘고, 이런 추가적 문제는 전문가가 해결하도록 놔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20세기중반의 위대한 사회학자 피터버거가 말했듯이, 현대적 삶의 복잡성과 부산함은 사회적 삶에 대한 몰이해를 자아에 대한 몰이해로 번안하는 것을 매력적인 선택지로 만든다. 특히 일종의 자기이해, 자기숙달과 안심을 제공하는, 간단하고 믿을 만한 것처럼 보이는 해결책이 제공되고 있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고, 당황스러우며, 심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역학의 힘에 대한 인식을 고양하는 대신, 정신건강 증진도구와 회복탄력성 훈련, 조기개입전략을 택한다.

- 결과적으로 고통의 사회적 원인을 모호하게 만드는 정신건강개입의 힘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함. 어떤 치료법에서건,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더 큰 힘에 대해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인 부분임. 우리는 많은 아이에게 있어 가장 진실되고 효과적인 치료법은 약물이나 상담실, 혹은 교실에서의 개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지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더 가혹한 사회적 힘의 영향을 완화하고자 노력하는 의미있고 애정어린 관계속에  있다.

- 80년대 이래 이루어진 제약업계에 대한 점진적 탈규제화는 정신과 약물이라는 분야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의 주된 원인이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로 이루어진 과잉처방문제의 주된 원인이 되어왔다. 탈규제화는 80년대 이래 영국의 정신과 약물 소비가 400%나 증가해 오늘날 영국 성인의 25%가 매년정신과 약물을 처방받게 된 배경이기도 함. 이런 성공신화는 효과적 신약의 개발이나 정신약학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제약업계가 업계의 이익에 맞는 방식으로 규제제도와 의학계의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준 이데올로기의 부상 때문이었다. 

- 팀 카서와 에리히 프롬이보기에 물질주의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주요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질주의는 인간욕구의 결핍과 방치를 보상하기 위한 시도다. 물질주의가 이런 요구를 충족해주기보다는 착취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물질주의가 심리적으로 매우 치명적 효과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삶으리 만족스럽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가치, 활동 및 지지형태와 상충되기에, 물질주의는 우리를 도와준다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해악을 끼친다. 수익성 높은 소비자본주의의 지속적 확산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감정적, 관계적 건강에 반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함. 그리고 이는 물질만능주의가 부상하는 국가에서 불안과 우울 또한 증가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 70년대에 새로운 자본주의가 얼마나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지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새로운 자본주의는 웨스트민스터, 워싱턴, 베를린, 파리같은 서구 자본주의의 강력한 중심에서 얼마 안되는 정치적 지지자를 보유했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이처럼 지지를 받지 못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2차대전 이후 서구를 지배해온 좀더 사회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와 비교해보면, 새로운 자본주의에는 유권자들의 열정과 영감을 지필만한 매력적인 도덕적, 윤리적 비전이 부재한 것처럼 보였다. 전후의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몇십년에 걸쳐 실행되고 검증되었다. 강한 국가는 특히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 사회 전체적으로 자원의 더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는 이상에 실제 현실이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말이다. 국가는 공공기관을 강화하고 장기간에 걸친 공공투자를 진행하며, 동등 임금과 낮은 실업률을 지향하고, 강한 규제를 통해 시장의 탐욕을 억제해야 했다. 강한 국가는 모든 시민의 이익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극단적 부와 가난을 억제하여 더 공평한 중간지대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자본주의는 사회전반에 깊이 동의하는, 이미 존재하는 경제적 이상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부자에 대한 세금을 감축하고, 기업에 대한 규제를 약화하고, 국가를 축소하고, 사회서비스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 새로운 자본주의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의 지배를, 사람들이 성공의 부산물을 갖기 위해 다퉈야 하며 경쟁과 사업이 지배하는 세상을 추구했다. 
70년대 중반에 이 비전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은 이러한 비전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볼 사람들, 즉 권력을 갖고 있고, 기업가적이며, 풍부한 자원과 인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전체 유권자중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기에, 새로운 자본주의는 투표에서 패배를 거둘 수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이런 이유로, 70년대에 새로운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유권자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자본주의가 단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유지해줄 것이라고 믿게 만들 최적의 방법을 찾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들은 모든 사회집단이 열정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설득력 넘치는 윤리적 비전, 소수의 철학을 다수의 철학으로 만들 수 있는 비전을 찾아야 했다. "이 새로운 비전은 대체 무엇일까?"가 이들의 질문이었다.
- 밀턴 프리드먼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70년대에 썼던 여러 저술에서 맹렬히 주장했듯, 새로운 자본주의는 서구문화의 중심을 지탱하는 기둥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진정으로 자유를 수호하는 유일한 경제적 비전은 새로운 자본주의뿐이라고 주장. 공산주의국가 소련의 발흥으로 인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프리드먼은 "자유를 위한 투쟁"을 새로운 자본주의가 전하는 경제적 메시지의 핵심에 놓음. 프리드먼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서구적 자유의 마지막 보루이며, 우리의 국경을 위협하는 공산주의를 방어해준다고 주장. 공산주의적 권위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유일한 버전이라는 것. 대중은 바로 이 주장을 이해해야만 했다.
이러한 서사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프리즈먼은 2차대전 이래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채택해온 자유의 관점을 비판. 그러한 자유의 관졈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는 우리 모두가 누리는 자유의 진정한 수호자다. 국가는 사회보장을 제공함으로써 가난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무상의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질병의 우환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불평등으로 인한 형평성의 부재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며, 공교육을 제공함으로써 무지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좋은 삶을 가로막는 요인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우리가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사회악을 척결함으로써 국가는 우리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방한다.
- 하지만 프리드먼을 비롯해 경제적 우파에 속한 사람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자유에 대한 국가중심적 비전은 사람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 차원에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하이에크가 썼던 저술을 들먹이며, 프리드먼은 모든 국가에는 점점 더 많은 권력을 집적하여 그 과정에서 점점 더 확대되고 군림하려 드는 내재적 경향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 이런 일이 일어나면 국가는 점점 더 중앙집권화하고 전체주의적으로 변화해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자유를 완전히 없애버리게 된다는 것. 이런 바탕에서 프리드먼은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내버렫두면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로 진화할 수밖에 엇다고 주장. 이처럼 공산주의로 가는 흐름을 저지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은,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자유시장 버전의 자본주의로 교체해 국가의 야심을 꺾어 버리는 것이다. 프리드먼의 주장이 가진 문제가 무엇이었건 간에 큰 국가를 소련의 공산주의와 연관짓고, 작은 국가를 서구적 자유와 연관짓는 그의 주장은 당대에 만연한 반공주의 정서와 딱 들어맞음. 그의 주장은 작은 국가의 시장근본주의에는 없었던 도덕적 비전을 부여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제는 이 최신 유행의 비전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널리 퍼뜨리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 새로운 자본주의에 필요한 것은 국민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 집단이었다.

- 수년간 나는 직업적 상황에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PHQ-9과 GAD-7같은 검사지를 작성한 경험이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들 중 자신이 거대한 경제 서사시에 조연배우로 출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런 진단도구가 주로 신자유주의의 현재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들의 고통을 재구성하고 민영화하기 위한 수단이라 보지 않았다. 이런 문서가 약탈적 제약기업의 야망 및 과잉처방과 직결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들은 이러한 도구들이 고통을 개인적 결함으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이윤을 축적하기 위한 상품으로 탈바꿈시키고, 감정적 고통을 낳는 뿌리깊은 구조적 원인에 대해 정부가 손을 놓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불평등과 정신적 고통 사이에 이처럼 밀접한 관련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윌킨슨에게 이 질문을 던지자, 그는 진화이론을 바탕으로 대답. "우리는 진화 역사에서 대부분 기간을 조그만 수렵채집사회에서 보냈습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지위가 균등하게 배분되는 평등주의적 삶의 방식에 맞추어 진화해 왔습니다. 예전엔 집단 전체의 협력이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니 협력적인 사람이야말로 곁에 두면 유용한 사람이었죠."
여성은 덜 이기적이라고 생각되는 파트너를 선호했고, 공동체는 집단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의 가치를 높게 샀다. 실제로도 우리는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면 외면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인류가 처한 환경은 관계지향성이나 협조성 같은 친사회적 특징을 선택하게 되었죠.
인류가 생명체로서의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을 보다 평등하고 협력적인 환경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듣고서, 나는 윌킨슨에게 심각한 경제적, 물질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즉 격차와 분리로 가득한 사회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를 물어보았다. "우리는 경쟁과 분열이 급격히 심화되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체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우리 자신의 위치와 우리가 어떻게 판단되는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상당히 가중시킵니다."
- 윌킨슨은 우리의 경제형태가 정신건강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았을까? 그의 답변은 더 결단력 있었다. 정치에서 혹은 미디어에서 정신질환, 스트레스와 자해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이에 대한 반응은 거의 언제나 서비스를 늘리라는 겁니다.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의 수를 늘리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왜 전례없이 높은 수준의 육체적 편안함을 누리는 사회가 이처럼 끔찍한 정신적, 감정적 고통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질문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에 대한 구조적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정신의료 서비스에서 이런 구조적 설명이 대체로 무시당하고 있으며, 이는 정신의료 서비스의 이데올로기가 사회경제적 현 상태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우리가 노동자가 가진 불만의 의료화를 보건, 일터로 돌아가기 위한 심리치료이 증가를 보건, 물질주의적 가치와 치료의 조응을 보건, 실업상태의 병리화를 보건, 경제적 생산성이라는 측면에서 측정되는 회복을 보건, 업계의 이해관계를 가장 우선시하는 의약품 규제를 보건, 진단명이 학교예산 감축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보건, 널리 퍼진 고통의 상품화와 탈정치화에 대해 보건, 우리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이념적 욕구와 필요에 부응하는 시녀가 되어버린 체제를 보게 된다. 이런 굴종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왜 실패하고 있는 우리의 정신건강 시스템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확장을 거듭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코로나가 모든 것을 바꾼 셈이다. 코로나는 새로운 경제생산 체제의 생존가능성과 지속가능성을 변화시켰음. 코로나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켰다. 코로나는 우리가 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무엇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무엇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부분적으로나마 변화시켰다. 근래에 생각되었던 것보다 체계적인 경제적 개혁이 더 가까울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모든 변화가 새로운 정신건강 패러다임이 오래지 않아 승산을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결국 어떤 경제적 패러다임도 영원히 가지는 못했기 때문. 그리고 현재의 패러다임도 그런 역사적 경향을 따를 수밖에 없다. 변화는 도래할 것이며, 변화가 도래했을 때 정신건강 분야에 존재하는 대안적 생각들은 시행될 준비가 완료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을 계속하기만 한다면, 즉 우리가 계속해서 신자유주의의 압력과 유혹에 저항하기위해 노력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신자유주의 교리가 강제하는 율법이 아닌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개입들을 개발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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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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